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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양준혁 2000안타 & 은퇴

by Wood-Stock 2009. 8. 18.
통산 2000안타 '전설' 양준혁
 

[스포츠서울닷컴 | 박정환기자] '양신' 양준혁(38)이 통산 2000안타 고지에 올라섰다. 말 그대로 양신이 됐다. 프로야구 26년 역사에 거대한 축이 세워졌다. 1993년 4월 10일 대구. 베테랑의 풍모를 물씬 뽐낸 삼성 라이온즈의 24세 신인 3번 타자는 데뷔 첫 타석 안타 후 14년 2개월여 만에 2000번째 계단에 도달했다.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순철 MBC ESPN 해설위원의 말이다. 양준혁의 대기록은 형용 불가다.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그 이상으로 위대하기 때문이다.

 

# 메이저리그로 치면 3000안타를 넘볼 시기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2000안타는 흔하다. 6월 9일 한국시간 기준 달성자의 수는 246명. 안타는 경기수에 비례한다. 빅리그 정규시즌은 162경기의 대장정이다. 이에 반해 한국 프로야구는 1년에 126경기가 고작이다. 1999년(132경기)과 뉴 밀레니엄 초반(2000년부터 2004년·133경기)을 빼면 1991년 이후 매년 그랬다.

 

양준혁의 데뷔 시즌인 1993년을 기점으로 그의 소속팀들은 올해 126경기를 더할 경우 총 경기수가 1931회다. 양준혁이 뛰고 있는 시대의 1구단 평균 경기수다. 같은 기간 메이저리그의 합산 경기수는 2367회. 양준혁은 현재까지 경기당 평균 1.11안타를 기록 중이다. 팀 경기수 대비 출장률은 통산 0.971에 달한다.

 

양준혁의 안타수를 메이저리그 경기수로 환산하면 어떻게 될까. 현 페이스 유지란 가정을 둔 뒤 올해 종료시 값을 구한다면 2551안타다. (2367 * 1.11 * 0.971) 양준혁의 통산 안타 페이스는 메이저리그일 경우 2000안타가 아닌 '3000안타'를 넘볼 시기에 가깝다. 숫자 놀음이지만 가치적인 접근에서 비교한다면 그렇다.

 

# 일본 프로야구 첫 29년간 2000안타 기록자 1명

 

그렇다면 일본과의 비교는 어떨까. 72년 역사의 일본 프로야구에서 통산 2000안타 타자는 총 35명이다. 메이저리그보다 경기가 적어 그 수가 많지는 않다. 최초로 통산 2000안타에 안착한 선수는 가와카미 데쓰하루다. 1938년 프로 출범 3년째 해에 데뷔한 가와카미는 16번째 시즌인 1956년 2000호 안타를 때려냈다.

 

일본 프로야구 탄생 21년 만의 경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슈퍼스타이자 타격의 신이라 불렸던 가와카미의 기록은 전쟁으로 인한 3년 공백기로 더 빛났다. 가와카미 이후 2번째 통산 2000안타가 나오기까지는 9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일본 프로야구 첫 29년간 2000안타 기록 보유자는 가와카미가 유일했던 것이다.

 

한국 프로야구는 26년 역사에 첫 주인공을 배출했다. 절대 늦지 않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양준혁이란 점은 축복이다. 그 역시 '타격의 신'이기 때문이다.

 

# 많은 안타를 위한 조건 자체가 불리

 

사실 양준혁은 많은 안타를 위한 조건 자체가 불리(?)한 선수다. 미·일에 비해 적은 경기수는 대한민국 공통 사항이니 둘째 치더라도 볼을 너무나 잘 고른다. 많은 안타를 얻으려면 많은 기회(타수)가 필수다. 스즈키 이치로가 항상 안타 선두권에 자리잡는 이유다. 그러나 양준혁은 통산 볼넷 1위답게 타수가 적다.

 

작년까지 양준혁의 연평균 타수는 436.7회에 지나지 않는다. 매년 0.340 대의 고타율이라도 평균 150안타가 될까 말까다. 안타수에서 손해를 보는 유형이다. 대학과 군대로 만 24세가 되는 해에 데뷔한 것도 악조건이다. 일본의 경우 만 24세 이상의 나이로 출발해 통산 2000안타를 마크한 선수는 35명 중 3명 뿐이다.

 

# 통산 2000안타는 대기록의 결정체

 

볼넷은 양준혁의 안타수를 억제했지만 그 이상의 선물로 다가왔다. 꾸준한 완벽함으로 설명될 수 있는 양준혁의 화려한 커리어에 볼넷은 큰 역할을 담당했다. 양준혁의 통산 2000안타는 결과도 결과지만 그 과정이 더욱 눈부시다. 2000안타까지 볼넷 1위는 물론 대부분의 통산 타격 지표에서 최고를 지향한 양준혁이다.

 

2루타 1위(398) 홈런 3위(323) 타점 1위(1237) 득점 1위(1143) 타율 2위(0.318) 출루율 2위(0.422) 장타율 2위(0.542) 장타수 1위(744). (통산 3000타석 이상 기준)

통산 2000안타는 이 대기록들의 결정체다. 그리고 다시 생성된 도전이란 세포는 수정을 거친 후 또 다른 결정체가 돼 더 큰 신화를 만들어 갈 것이다.

 

 

maxmlb@sportsseoul.com

 

 

[양준혁 2000안타의 의미]
1803경기서 게임당 1.11개 안타
15시즌 가운데 13차례 3할 타율
경기수 차이 美-日 3천안타 버금가






 

 
프로야구 출범 26년 만에 처음 탄생한 2000안타.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는 게 현장 야구인들의 평가다.

삼성 선동열 감독은 "본인의 철저한 관리로 부상 없이 뛰어야 가능한 기록"이라며 "양준혁의 경우 그 외에도 낮은 변화구에 속지 않는 훌륭한 선구안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기록 달성이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양준혁은 지난 93년 데뷔한 이후 이날 2000안타를 달성할 때까지 총 1803경기를 뛰었다. 게임당 평균 1.11개의 안타를 때려낸 셈. 올시즌 포함, 총 15시즌 가운데 13차례나 3할 타율을 기록했다. 수술 등 큰 부상으로 빠진 적이 한 번도 없다.

지난 26년 동안 타격 기술에 있어 양준혁에 버금가는 선수는 많았다. 앞선 세대 가운데 통산타율 1위(0.331) 장효조(1009안타), 최다 홈런의 주인공 장종훈(1771안타) 등이 안타제조기로 명성을 드높였으나, 롱런 능력은 양준혁에 미치지 못했다.

만약 국내 야구가 메이저리그나 일본처럼 게임수가 많았다면 2000안타 달성은 훨씬 빨랐을 것이다. 메이저리그의 경우 최다안타 기록은 피트 로즈가 24시즌에 걸쳐 작성한 4256안타이다. 2000안타 이상 친 선수는 총 246명으로 그 가운데 현역 선수는 22명이다. 휴스턴의 크레이그 비지오가 2980안타로 현역 선수 중 1위를 달리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23시즌을 뛴 장 훈의 3085안타가 통산 최다 기록. 2000안타 이상은 현역 5명을 포함해 총 35명이 기록했다. 주니치의 다쓰나미 가즈요시가 2431안타로 현역 1위를 달리고 있다.

양준혁의 2000안타 클럽 개설은 미국과 일본에 비해 한참 역사가 짧은 우리 프로야구에도 이제 당당한 연륜이 쌓여가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 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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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 결코 평범하지 않은 2000안타

 

[데일리안 이상학 객원기자]'딱' 소리가 나는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두산 중견수 이종욱에게 향했다. 라이너성으로 뻗어나간 타구는 이종욱 앞에 뚝 떨어졌다. 안타였다. 언제나처럼 1루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던 타자는 안타임을 확인하고는 두 팔을 살짝 들었다 놓았다. 이내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퍼졌다. '살아있는 전설' 양준혁(38)이 대망의 개인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김평호 1루 코치와 포옹하고 선동렬 감독으로부터 축하의 꽃다발을 받자 양준혁은 비로소 2000안타 달성을 실감했다. 소속팀 삼성 선수단은 물론이고 두산 선수단과 잠실구장 모든 관중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사나이 양준혁의 눈가에도 땀으로 둔갑한 이슬이 맺혔다. 26년째를 맞아 한국프로야구 사상 첫 2000안타가 탄생한 2007년 6월9일 잠실구장은 그 순간이 바로 역사였다.

 

2000안타는 그냥 2000안타가 아니다. 타고난 천재성과 꾸준한 노력 그리고 초심을 잃지 않아야 이룰 수 있는 대기록이다. 어느덧 프로 15년차 베테랑 선수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양준혁은 타석에 들어서 투수를 상대할 때마다 첫사랑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투수 앞 땅볼을 치고도 1루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양준혁은 적어도 야구에 있어서는 어린아이 같은 동심을 가진 선수다. 이처럼 야구에 대한 사랑과 의지에 꾸준함까지 받쳐줬기에 2000안타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양준혁은 언제나 꾸준했지만 그의 야구인생에는 예기치 못한 고난과 시련이 많았다. 2000안타를 달성하는 그 순간, 양준혁의 뇌리에는 위업을 이룬 기쁨과 함께 지난날의 아픔이 파노라마처럼 흘렀다. 결코 평범할 수 없는 2000안타는 그래서 더욱 빛났다.

 

▲ 그에게 닥쳤던 불의의 시련들

 

양준혁의 2000안타가 더욱 빛나는 이유는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까지 마치며 24살의 나이에 데뷔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인생사에서 '만약'이란 부질없는 가정일 뿐이지만, 양준혁이기에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프로에서 5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매우 크다. 양준혁은 몇 년 전 인터뷰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프로에 직행하지 않을 것을 후회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1988년 대구상고(현 상원고)를 졸업한 양준혁은 박영길 당시 삼성 감독을 만나 입단을 타진했다. 그러나 당시 삼성에는 박승호·이종두 등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박 감독은 양준혁에게 대학에서 경험을 쌓을 것을 권고했다.

 

대학 진학할 때만 하더라도 양준혁은 4년 후 삼성 입단을 철석같이 믿었다. 서류 명목상 도장을 찍거나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양준혁의 마음 속 깊은 진심은 이미 삼성의 파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서울지역 대학으로 진학할 수도 있었으나 대구지역 영남대로 진학한 것도 모두 삼성에 대한 사랑이었다. 고교 시절부터 방망이 돌리는 솜씨를 인정받은 양준혁은 영남대에서 공수주 삼박자를 두루 갖춘 대형선수로 발돋움했다. 젊은 시절 양준혁의 몸은 비교적 호리호리하고 날씬한 편이었다. 어깨도 꽤 강했다. 양준혁은 대학에서 더욱더 무서운 선수로 성장했다.

 

그러나 엄청난 시련이 양준혁에게 닥쳐오고 있었다. 1992년 1차 지명에서 삼성이 양준혁이 아닌, 그의 대구상고 동기 김태한을 지명한 것이다. 당시 삼성은 왼손 투수 자원이 부족했고, 빠른 공을 던지는 왼손 유망주 김태한은 분명 끌리는 재목이었다. 무엇보다 삼성은 타자보다 투수가 필요했다. 양준혁은 큰 배신감을 느꼈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2차 지명에서 쌍방울과 OB의 오퍼를 모두 거부했다. 그리곤 상무에 입대했다. 삼성의 파란 유니폼을 입고 대구구장을 누빌 생각에 설렌 마음으로 맞이했던 1992년, 양준혁에게 주어진 것은 파란색 유니폼이 아니라 카키색 군복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시련이 미래에서 양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삼성 유니폼을 입은 후 6년간 양준혁은 삼성 타선에서 우뚝 솟은 최정상의 산처럼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특히 1998년에는 타격 1위(0.342), 최다안타 1위(156개), 홈런 5위(27개), 타점 5위(89개), 출루율 1위(0.450)에 오르며 최절정의 타격 감각을 뽐냈다.

 

그러나 시즌 후 삼성이 그에게 보답한 것은 연봉인상이 아니라 해태로의 트레이드였다. 삼성은 1990년대 고질적인 문제였던 마운드 보강을 위해 당대 최고 마무리투수 임창용을 영입하길 원했고 그 과정에서 양준혁을 포기했다. 오직 삼성을 위해 고졸 프로직행을 포기하고 입단시기를 늦춘 것이 한순간에 허사가 되는 그 순간, 양준혁은 절망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양준혁에게는 좀처럼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2000년 LG로 이적한 뒤에는 선수협의회 파동의 주범으로 내몰려 팀 내에서도 운신의 폭이 좁았고, FA가 된 후에는 선수협의회 주동자로 낙인찍혀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2002년 어렵사리 삼성으로 컴백한 뒤에는 생애 첫 한국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누렸으나, 양준혁 개인적으로는 데뷔 후 처음으로 타율이 2할대(0.276)로 추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FA 실패 사례 리스트에 오르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2005년에는 데뷔 후 최악의 타율(0.261)을 기록하며 암암리에 은퇴소문까지 나돌았다. 물론 프로선수치고 시련을 겪지 않은 선수는 없겠지만, 양준혁이 대선수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유독 시련이 많은 편이었다. 그것도 가슴 속 진정을 후벼 팔만큼 아픈 시련들이었기에 양준혁 본인이 겪었을 아픔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 시련은 이겨내라고 있는 것

 

인생에서 시련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래서 시련은 더욱 겁나고 힘들다. 그러나 시련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사뭇 대조적이다.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시련을 이겨내고 다시금 우뚝 서는 사람들도 있다. 야구선수로서 수많은 시련을 겪고도 오늘날 이 자리에 올라선 양준혁은 당연히 후자의 경우. 양준혁은 시련이 닥칠 때마다 이겨냈다. 그에게 시련은 주저앉히게 만드는 쇳덩이가 아니라 그것을 이겨내고 더욱 강하게 만드는 하나의 촉매제였다. 양준혁이 15년간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1998년 12월의 트레이드 충격은 양준혁을 눈물짓게 만들었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1999년 해태에서 양준혁은 타율 0.323·32홈런·105타점·21도루로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다. 물론 1999년은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고투저 시즌이었지만, 해태에서도 양준혁은 변함없이 양준혁이었다. 삼성에 대한 악감정이 남을 법도 했지만 그는 고향이나 다름없는 대구구장을 찾은 첫 날, 외야의 어린이 관중들에게 준비한 사인볼을 나눠주기에 바빴다. 양준혁이 나눠준 사인볼은 삼성의 것이 아니라 해태의 것이었지만 어린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련을 딛고 일어선 양준혁은 해태 유니폼을 입고 있어도 대구의 영웅이었다.

 

2000년 LG로 이적한 뒤에도 양준혁은 흔들리지 않았다. 대구구장과 광주구장 등 규모가 작은 구장들을 홈으로만 쓰다 가장 규모가 큰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게 됐지만, 장타에 의존하는 거포보다는 안타와 볼넷을 통해 출루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사실상의 중장거리 타자였던 양준혁에게는 크게 문제될 게 아니었다. 실제로 양준혁은 2001년 LG에서 타격왕(0.355)과 함께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녹슬지 않은 타격 실력을 뽐냈다. 사실 LG 시절 양준혁은 선수협의회 문제로 그라운드 안팎에서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했다. 하지만 그는 그라운드에서 오직 타격 실력 하나로 모든 시선을 잠재워버렸다. 보이지 않는 무소불위의 힘도 녹색 그라운드의 양준혁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삼성 이적 후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으나 이번에는 신체나이의 노쇠화로 시작된 시련이 닥쳤다. 2002년의 경우는 FA 계약 여파에 따른 겨우내 훈련 부족 탓이라 할지라도 2005년의 부진은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배트스피드는 예전만 못했고, 특유의 오픈스탠스는 허점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여느 노장 타자들이 어려워하는 것처럼 몸 쪽 공에도 대책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양준혁은 고집을 부르는 대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변화를 받아들였다. 극단적인 만세타법을 버리는 승부수를 던진 것. 내딛는 오른쪽 발을 안쪽으로 끌어당겨 타격의 정확도를 높이는데 주력했고, 언제나처럼 1루를 향해 질주했다. 한 경기, 한 타석, 한 순간마다 집중한 결과는 화려한 부활이었다. 양준혁은 정점을 지난 베테랑 선수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변화의 시기를 오히려 기회로 삼았다.

 

▲ 그에게 멈춤은 사형 선고다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박찬호가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자 여기저기서 대선수의 은퇴시기를 놓고 말이 많다. 비단 박찬호뿐만 아니라 국내무대를 누비고 있는 노장선수들에게도 '은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불과 3년 전까지 양준혁도 그런 소리를 들었다.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명예롭게 은퇴하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 요지였다. 어느 선수에게든 은퇴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그냥 내뱉는 은퇴라는 말이 깃털처럼 가벼운 것에 비해 당사자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는다. 그만큼 은퇴는 선수들에게는 민감한 단어다. 물론 나이는 숫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양준혁에게 은퇴는 말도 안 되는 말이다. 멈춤은 그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양준혁에게 은퇴가 사형선고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바로 야구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양준혁은 혼자 살지만, 생활에 있어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 야구 생각만으로도 배가 부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야구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는 것과도 다를 바 없다.

 

실제로 양준혁은 그만의 확고한 타격 철학을 갖고 있으며 독학으로 끊임없이 연구한다. 만세타법을 개발하고 포기하는 과정 모두 양준혁 스스로 내린 결정이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준혁의 타격에 대한 이론적이고 기술적인 분석은 향후 코치 및 감독이 되어서도 기대가 되는 대목이다. 게다가 올 시즌을 준비할 때도 양준혁은 방망이를 잡은 후 처음으로 웨이트 트레이닝 훈련에 전념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도 했다. 부활에 성공한 지난해였음에도 불구하고, 체력적인 한계를 겪고는 스스로 야구에 대한 고픔을 느낀 것이다.

 

15년에 걸쳐 2000안타라는 전인미답의 고지를 밟았지만 양준혁에게 2000안타는 종점이 아니라 종점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정거장일 뿐이다. 양준혁은 지난 5일 대구 롯데전에서 통산 1993안타를 기록한 후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 아직도 1007개나 남았어요. " 양준혁의 초점은 이제 2000안타가 아니라 3000안타를 향하고 있다. 우리나라보다 50여년의 역사가 앞선 일본프로야구에서도 3000안타는 재일동포 출신 장훈(3085개)이 유일하다. 물론 3000안타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목표가 있어야하고, 양준혁도 자신의 새로운 목표를 설정했을 뿐이다.

 

팀 승리와 함께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야말로 선수로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손등이 붓고 유니폼이 찢어져도 멈추지 않는 양준혁이라면, 3000안타는 저 멀리 달나라 꿈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일 수 있다. 2000안타든, 3000안타든 어디까지나 숫자일 뿐, 양준혁이 그라운드에서 흘린 땀방울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다. 팬들의 가슴에 남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진정이다. 양준혁은 그 진정을 진정으로 따르는 진정한 프로선수다. 그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2000안타가 더욱 값지게 느껴지는 진정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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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 "난 행복한 선수"(종합)
 
(서울=연합뉴스) 김영현 기자 = "팬에게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선수 생활을 하면서 늘 행복했어요"
한국 프로야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타격 달인' 양준혁(41.삼성)이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양준혁은 26일 은퇴 의사를 구단에 통보한 뒤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먼저 전했다.
양준혁은 "나를 많이 사랑해 준 팬이 너무나 고맙다"라며 "또 큰 부상 없이 운 좋게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는 행복한 선수였다"고 말했다.
 
1993년 데뷔해 올해까지 2천318개의 안타와 351개의 홈런을 날리며 통산 타율 0.316을 작성한 양준혁은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2002년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과 24일 대구구장에서 펼쳐진 올해 올스타전을 꼽았다.

양준혁은 1995년부터 2007년까지 13년 연속 '별들의 무대'에 출전했으나 올해는 팬 투표에서 밀렸다. 박정권(SK)이 발목을 다친 탓에 대신 운 좋게 대체 선수로 올스타전 초청장을 받았다. 어렵게 출전한 양준혁은 6회부터 대수비로 투입됐고, 고향 팬이 지켜보는 가운데 7회 3점 홈런을 때리며 환호에 화답했다.

양준혁은 이에 대해 "김성근 SK 감독님이 나를 뽑아주지 않았다면 그냥 은퇴만 선언하고 말았을 것인데 올스타 무대에 출전하면서 의미 있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라며 "더욱이 홈인 대구구장에서 홈런까지 쳐서 무척 기억에 남는다"라고 설명했다.

양준혁은 또 올스타전에서만 통산 4개의 홈런을 때려 이 부문 공동 1위로 올라섰다. 41세1개월28일로 김재박 전 LG 감독이 1991년 세운 역대 최고령(37세1개월) 홈런 기록도 19년 만에 갈아치우는 등 마지막 올스타전에서도 뜻깊은 기록을 남겼다.
아울러 개인 최다인 통산 2천131경기에 출장했고 최다타수(7천325타수)와 홈런(351개), 안타(2천318개), 루타(3천879개), 2루타(458개), 타점(1천389개), 득점(1천299개), 사사구(1천380개)에서 최고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양준혁은 이 가운데 특히 안타와 홈런 기록에 애착이 간다고 전했다.
양준혁은 "2천 안타 기록은 내가 처음으로 세웠다"라면서 "나는 타율과 출루율이 동시에 높은 스타일이라고 자평하는데 최다 안타는 나의 타격 특징을 잘 반영한 기록"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또 난 한 번도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했다"라며 "그런데 꾸준히 홈런을 친 끝에 최다 홈런 기록도 갖게 돼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힘들었던 순간으로는 1998년 삼성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됐을 때와 1999년 선수협의회 결성을 주도하면서 시련을 겪었을 때를 꼽았다.

양준혁은 "당시 야구를 그만둘 것까지 생각할 정도로 힘들었다"라며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딛고 이후 10년 동안 야구 선수로 뛰고 있다"라고 웃었다.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은 친다'던 양준혁은 2008년 타율 0.278에 홈런 8개를 올리는데 그치면서 충격을 받았다.

양준혁은 "지난해부터 은퇴를 생각하기 시작했다"라며 "그러다가 한 달 전에 은퇴 결심을 굳혔다. 이제 팀에서 주전으로 활약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만큼 팀과 나를 위해 빨리 결정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라고 밝혔다.

주전으로 출장하는 기회가 줄어들면서 경기 외적인 면에서 후배를 위해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왼손 배팅볼 투수가 귀한 팀 사정을 고려해서 올해부터 직접 후배 타자를 위해 배팅볼을 던지기도 했다.

양준혁은 "팀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라며 "선배가 그런 모습을 보이면 후배들이 많은 것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전보다 야구 기술은 발전한 것 같은데 선수들의 열정은 떨어진 것 같아 안타깝다"라면서 후배에게 야구에 더욱 많은 애정을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특히 1999년(해태), 2000~2001년(LG)을 제외하면 줄곧 몸담았던 삼성에 대해서는 "명문 구단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라며 "좋은 선수를 잘 키우는 구단인 만큼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계획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은 없지만 야구와 관련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결혼은 늦었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면 하고 싶다"고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coo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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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 “2500안타를 하고 싶었는데 그게 좀 아쉽다”
 
25일 '시즌 후 은퇴'를 발표한 삼성 양준혁(41)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이날 오후 3시 시작되는 팀 훈련을 위해 오후 1시반쯤 일찌감치 대구구장에 도착했다. 후배들의 훈련을 돕기 위해 그라운드로 나섰다.
수개월 동안 은퇴 고민을 해 온 양준혁은 인터뷰 도중 '팀', '후배'라는 단어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팀이 잘 나갈 때 후배들을 위해서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 좋다고 결정했다"고 말했다. 신기록의 사나이 양준혁은 "2000안타를 달성한 순간, 홈런 타이틀 하나 없이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을 세운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2500안타를 하고 싶었는데 그게 좀 아쉽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시즌 중 일찍 은퇴를 결정한 거 아닌가.

"때가 된 거 같다. 지난해부터 고민했는데 지난해는 개인 성적이 좋았다. 많이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다. 최근 주전으로 못 나가고 있다. 이렇게 있는 것보다 팀이나 나나 빨리 (은퇴를)결정하는 것이 맞다고 봤다."

-소감은.

"홀가분하다. 야구를 32년간 해왔는데 팬들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다. 행복한 선수 생활을 했다. 마지막으로 올스타전에 나가서 팬들과 좋은 만남도 가졌다. 그동안 성원해준 팬들에게 감사드린다."

-은퇴를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벤치 멤버로 있으면서 내가 엔트리 1개를 까먹고 있다.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줘야 한다. 팀이 잘 나갈 때 빨리 은퇴를 선언하는 것이 보기 좋다. 팀이 안 좋을 때는 은퇴하면 이상할 거 같다. 후배들이 잘 해주고 있어 때가 됐다."

-26일부터 1군 엔트리에 빠진다고 들었다.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다. 팀의 일원으로서 돕는 일을 한다. 엔트리에서 빠지지만 시즌 끝까지 1군 선수들과 동행하면서 배팅볼을 던져주거나 타격 부진에 빠진 후배들에게 조언도 해주는 일을 하게 된다. 타격코치가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고참으로서 이런저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시즌 중 1군 출장은 못 하는 것인가.

"글쎄, 시즌 중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복귀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은퇴 경기 때는 등록해야겠지만. 구단에서 포스트시즌에서는 베테랑이 필요하다며 포스트시즌 엔트리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포스트시즌 출장도 그때 가서 결정될 것이다."

-구단에 서운한 것은 없나.

"전혀 아니다. 구단에서 배려를 많이 해줬다. 올스타전 이전부터 많은 이야기를 했다. 구단측은 내년에도 삼성에서 뛰어도 좋다고 했고, 내가 다른 팀으로 가고 싶다면 아무런 조건없이 풀어주겠다고도 했다."

- 결심하기까지 주위와 상의는 했나.

"가족들과 많이 이야기하고 가까운 지인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부모님은 그냥 지켜봐주셨다."

- 여러 기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0안타를 달성할 때와 홈런 타이틀 하나 없이 최다 홈런 기록을 세웠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 거 같다."

- 은퇴 전에 아쉬운 기록이 있다면.

"2500안타는 꼭 치고 은퇴하겠다는 목표가 있었는데 무산되 조금 아쉽다.(양준혁은 2010년 스프링캠프에서 팀 우승과 함께 개인적인 목표는 1~2년 더 뛰면서 2500안타 이정표를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25일 현재 2318안타를 기록 중이다)"

- 시즌 후 계획은. 지도자 수업을 받나.

"시간이 있으니까 생각을 해봐야 한다. 정해진 계획은 아직 없다. 알다시피 내가 유소년 야구 발전에 관심이 많이 있었다. 지도자 연수 등 여러 가지 길이 있겠지만 심사숙고해서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되는 길을 선택하겠다"

한용섭 기자 [orang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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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의 마지막 안타
 
삼성 양준혁(41)은 7월 26일 '시즌 뒤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1993년 상무를 제대한 신인으로 삼성 유니폼을 입은 지 18년째. 1991년 삼성이 왼손 투수 김태한 대신 그를 1차 지명 선수로 택했더라면 19년이 될 수도 있었다.

18년 동안 양준혁은 야구사에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한국야구위원회(KBO)의 통산 최다 경기(2131), 최다 타수(7325), 최다 안타(2318), 최다 2루타(458), 최다 득점(1299), 최다 타점(1389), 최다 4사구(1380) 항목은 그의 이름으로 채워져 있다.

이 가운데 양준혁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기록은 통산 2318안타다. 양준혁이 7월 1일 롯데와의 홈 경기에서 2318번째 안타를 치는 순간 필자는 대구구장에 있었다. 이 장면을 그날 아래와 같은 기사로 송고했다.

"1일 대구구장 9회말. 6-6으로 맞선 1사 2루에서 롯데 배터리는 8번 타자 진갑용을 고의4구로 걸렸다. 대구구장 관중석에선 상대의 기를 죽이려는 듯 야유가 터져 나왔다. 야유는 곧 환호로 변했다.

관중들은 이 상황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9번 타순에 마운드엔 롯데 오른손 투수 이정훈. 대구 팬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왼손 타자 양준혁이 대타로 나설 수 있는 기회였다. 그의 이름이 연호되는 속에 양준혁이 더그아웃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양준혁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초구 볼을 고른 뒤 2구 째는 스트라이크. 3구 째 시속 135km 싱커에 양준혁이 특유의 큰 폼으로 스윙을 했다. 타구는 날카로웠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롯데 좌익수 손아섭이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공이 날아갔다. 공이 그라운드에 닿기 전 이미 삼성 더그아웃에선 후배 선수들이 두 손을 번쩍 들고 쏟아져 나왔다. 이틀 연속 끝내기 안타. 그 주인공이 양준혁이었기에 팬들의 기쁨은 더욱 컸다."

삼성 구단 관계자는 26일 "후반기 양준혁이 선수로 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이 지켜진다면 7월 1일의 끝내기 안타는 양준혁의 프로야구 최후의 안타가 될 것이다.

이 안타는 양준혁의 통산 458호 2루타이기도 했다. 보통 끝내기 안타가 나오면 1루를 밟은 타자는 곧바로 더그아웃에서 뛰쳐 나온 동료들의 축하 세례에 휩싸인다. 그러나 양준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2루로 달렸다. 기록을 의식한 질주였다고 폄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욕심이 있었기에 양준혁은 불멸의 기록을 쌓아나갈 수 있었다. '언제나 1루로 전력 질주하는' 양준혁 다운, 프로의 2루타였다.

그 한 달도 되지 않아 양준혁이 은퇴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이날 오랜만에 가진 수훈 선수 인터뷰에서 양준혁은 이렇게 말했었다.

"9번 김상수 자리에 대타로 들어가라고 미리 언질을 받았다. 끝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최근 컨디션 조절이 쉽지 않은데 기회가 오는 대로 열심히 하겠다. 대타라도 자주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매 타석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은퇴를 염두에 둔 선수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양준혁이 밝힌 은퇴 이유는 '팀 리빌딩을 위해 후배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싶다'이다. 양준혁은 지명타자·1루수·좌익수로 뛸 수 있는 선수다. 이 포지션에는 양준혁 외에도 최형우, 채태인, 박석민, 조영훈, 강봉규 등이 경합하고 있다. 이들에겐 기회가 필요하다. 하지만 양준혁은 대타로도 제 몫을 해 줄 수 있는 선수다. 체력은 아직 자신이 있다. 양준혁 자신도 은퇴를 발표하며 "기회가 된다면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과 2010년 팀의 한국 시리즈 우승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마지막 힘을 쏟아 붓겠다"고 말했다. 은퇴 발표가 이르다는 느낌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하지만 1993년 드래프트에서 양준혁을 2차 1지명으로 뽑았던 김종만 전 삼성 단장은 "다소 빠른 결정이지만 올 시즌 말 쯤 은퇴 선언이 나오지 않을까 예상했다"라고 말한다. 김 전 단장은 1982년 프로야구 원년 삼성 주무를 맡았던 인물. 거슬러 올라가면 1966년 제일제당 배구부 창단 때부터 스포츠단에 몸담았다. 삼성그룹 내 스포츠단 생리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안다.

삼성은 전통적으로 프랜차이스 스타와 인연이 좋지 않은 구단이다. 7월 24일 대구구장 올스타전에 삼성은 원년 이후 구단을 빛냈던 대선수 출신 10명을 '라이온즈 레전드'라는 이름으로 초청했다. 이 가운데 현재 삼성 유니폼을 입고 있는 이는 장효조(2군 수석 코치)와 류중일(1군 수비 코치) 두 명 뿐. 김시진(넥센 감독도, 이만수(SK 2군 감독)도, 김성래(오릭스 2군 코치)도 모두 지도자로는 삼성과 인연이 없었다.

프랜차이스 스타가 어떤 방식으로 은퇴하는가는 구단 입장에서도 중요한 문제다. 구단과 현역 생활 연장을 두고 갈등을 빚는 선수는 많다. 구단에서는 '세대 교체'를 앞세우고, 선수는 그간의 공헌도를 앞세운다. 현재 기량에 대해서도 이견을 보인다. 현실적으로는 현역 선수와 초임 코치 간 연봉 격차라는 문제도 있다. 그리고 팬들은 대개 선수 편이다. 현역 시절 빛이 강렬했던 선수일수록 은퇴에 대한 팬들의 반발도 강하다. 그래서 이 경우 구단 주위에서 나오는 말이 '아름다운 은퇴'다.

7월 26일의 양준혁의 선언도 굳이 따지자면 이런 '아름다운 은퇴'에 속한다. 과연 아름다울지는 의문이다. 나이 마흔 다섯에 저연봉을 감수하며 대타 타석을 준비하는 타자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하지만 양준혁 이전 삼성 프랜차이스 스타들과 구단의 결별사를 떠올린다면 이번 은퇴 선언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일지도 모른다. 당장 양준혁 자신이 '구단보다 큰 선수는 없다'는 논리 아래 해태로 트레이드된 적이 있다.

은퇴 후 행보에 대해 아직 결정된 바 없지만 양준혁은 지도자의 길을 걸을 것이다. 양준혁은 선수로도 그랬듯 지도자로도 삼성 외의 구단은 생각하지 않는다. 책임이 어디에 있든 과거 '레전드'들의 현재는 삼성 구단에겐 뼈아픈 역사다. 불세출의 스타 양준혁이 이 악연을 끊을 지도자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최민규 기자 didofid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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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을 '레전드'로 만들어 준 여섯 장면
 
[엑스포츠뉴스=이동현 기자] '양신' 양준혁(41, 삼성 라이온스)이 정들었던 그라운드를 떠난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한 그는 오는 9월 중 은퇴 경기를 치르고 시즌 종료 후 공식적으로 은퇴할 예정이다.

양준혁은 1993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1998년 12월 14일 해태로 트레이드됐고 2000년 3월 24일에는 LG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2002년에는 FA 자격을 얻어 다시 삼성으로 돌아갔다. 정상급 기량을 갖췄으면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던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 입단
입단 과정부터가 남과 달랐다. 1991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지명을 받았지만 입단하는 대신 상무행을 택했다. 고향팀 삼성에서 선수 생활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결국 그는 이듬해 삼성 지명 선수가 돼 대구 구장에 서게 됐다. 몸속에 푸른피가 흐른다던 양준혁의 삼성행은 그렇게 결정됐다.

▲ 해태 이적

1998시즌 플레이오프에서 LG에 1승3패로 패퇴한 삼성은 그해 겨울 어마어마한 대형 트레이드를 성사시킨다. 타격은 어느팀과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삼성이었기에 투수력 보강에 초점을 맞췄고, 그 대상은 임창용이었다.

1998년 규정 이닝을 채우며 8승7패34세이브 평균자책 1.89를 기록했던 임창용은 당시 최고 수준의 마무리 투수였다. 그를 데려오는 대가로 삼성은 양준혁 카드를 꺼냈다. 양준혁은 갑작스러운 이적에 큰 충격을 받은 듯 은퇴 시사 발언까지 했으나 1999년 3할2푼대의 높은 타율을 기록하며 제몫을 했다.

▲ 선수협 파동

2000시즌에 앞서 야구계를 회오리 속으로 몰아넣었던 선수협 파동. 양준혁은 이른바 '적극 가담 선수'로 분류돼 구단에 미운털이 박혔다. 결국 그는 LG로 트레이드돼 서울에서 뛰게 됐다.

쌍둥이 유니폼도 꽤 잘 어울렸다. 2000년에 타율 3할1푼3리를 기록하며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었고, 이듬해인 2001년에는 타율 3할5푼5리로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당시 LG 사령탑이었던 김성근 감독은 양준혁을 1번 타자로도 기용하는 등 그의 다양한 쓰임새에 주목했다.

▲ 2002년 삼성 우승

FA로 파란색 유니폼을 다시 입은 양준혁은 2002년 타율 2할7푼6리에 머물렀다. 데뷔 후 줄곧 3할대 타율을 기록했던 양준혁에게는 충격적인 성적표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즌에 삼성은 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며 포효했다. 한국시리즈에서 양준혁은 10타수 5안타를 쳤다.
▲ 2천 안타

아무도 밟아보지 못한 고지에 양준혁이 올라섰다. 2007년 6월 9일 잠실 구장. 상대는 두산 베어스 이승학이었다. 9회초 마지막 타석에서 그는 초구를 받아쳐 센터 앞으로 날아가는 통산 2천번째 안타를 때렸다. 2천 안타는 그만큼 꾸준하게 선수생활을 했다는 증거였다. 양준혁이 작성한 수많은 개인 기록 가운데 유난히 돋보이는 이정표다.

▲ 마지막 3점 홈런

이보다 더 극적인 피날레가 있을까. 13년만에 대구에서 벌어진 이번 시즌 올스타전에서 그는 그동안 응원해 준 홈 팬들에게 큼지막한 홈런 선물을 안겼다. 6회초 대수비로 출장해 7회말 첫 타석에서 우측 담장을 넘어가는 3점 아치를 그려 대구 구장을 뜨겁게 달궜다.

마침 이날 올스타전 경기에 앞서 1980년대 삼성을 이끌었던 '전설'들이 그라운드에 나와 대구 팬들을 만나는 행사가 진행됐다. 바로 이어진 본경기에서 양준혁은 영웅이 됐다. 마치 자신도 이제 '삼성 레전드'의 한 축이 되었음을 웅변하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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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 은퇴 특집 ①] 야구인들이 말하는 ‘양신’ 양준혁 

 

도성세(전 영남대 감독)

▶고교·대학 은사= 초등학교·중학교 때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내가 대구 지역에서 감독을 지내고 있어 양준혁이 어릴 때부터 실력을 잘 알았다. 키와 체격 모든 조건을 갖추고 성실하고 인성도 좋아 양준혁 키우는 재미로 대구상고 감독 생활을 했다. 1학년 때부터 4번을 맡겼다. 영남대에서도 대형 타자로 키우려고 1학년부터 줄곧 4번을 치게 했다. 1학년 때 타율 5할을 치는 등 국가대표도 됐다. 강하게 키우기 위해 꾸지람도 많이 하고 일부러 더 혼냈다. 프로야구의 각종 신기록을 수립했는데 은퇴 후에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 후배를 육성하길 바란다. 해외 연수 갔다와서 지도자로서도 잘 할 것으로 믿는다.

전준호(SK 코치)

▶영남대 1년 선배=대학시절 양준혁은 괴물이었다. 체격조건이나 파워풀한 스윙이 남달랐다. 영남대 오른쪽 외야펜스 뒤에 문과대학 새 건물이 들어섰는데 양준혁이 프리배팅한 공이 그 벽을 때리기도 했다. 학생들로부터 항의를 받기 일쑤였다. 신입생부터 스타대우를 받았지만 선배·코칭스태프에게 예의바른 선수였다. 모든 면에서 슈퍼스타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이 있었다.

한국 프로야구에 훌륭한 발자취를 남긴 양준혁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후배들에게 좋은 모범이 됐다. 많은 후배들이 양준혁이 세운 기록을 목표로 정할 수 있게 해주지 않았나. 후배지만 참 존경스러운 선수다.

이종범(KIA 외야수)

▶1993년 신인왕 경쟁=아쉽게도 나는 양준혁 선배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적이 없다. 아마 시절 국가대표로 잠시 만난 적이 있지만, 프로에서는 소속팀이 달라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 가장 강렬한 추억은 신인왕 경쟁을 했던 1993년이었다. 나도 최선을 다했지만 신인왕은 당연히 양 선배의 몫이라 생각했다. 개인타이틀도 따지 못했던 나(도루 2위)보다는 데뷔 첫 해 타격왕까지 거머쥔 양 선배가 받는 것이 당연했다. 평생 한 번의 기회밖에 없는 신인왕을 놓쳤지만 나는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고 시리즈 MVP를 받은 것으로 만족했다.

양 선배는 타격에 관한 모든 기록을 남겼고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타자였다. 양 선배로부터 후배들이 배워야 할 건 기록뿐만 아니다. 최고가 되기까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관리를 했던 과정일 것이다. 최고 장점은 역시 선구안이다. 볼을 골라내는 능력은 역대 최고다. 나쁜 공을 참아내고 기다리지 않는 공을 쳐내며, 결국 투수와의 승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라운드를 떠나는 마당에 '축하 드린다'고 할 수도 없고…. 말을 꺼내기가 참 어렵다. 그저 양 선배가 현역 시절 보여줬던 그대로 제2의 무대에서도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것을 바랄 뿐이다. 이왕이면 야구 지도자로서 후배들을 키워 성공하는 양 선배를 보고 싶다.

김성래(일본 오릭스 2군 코치)

▶1993년 MVP 경쟁=1993년 MVP 경쟁은 정말 치열했다. 나는 부상에서 복귀해 홈런·타점 타이틀을 따냈다. 양준혁은 신인으로 타격왕을 차지한 데다 홈런·타점에서도 꽤 많이 따라왔다. 양준혁은 신인왕과 MVP를 모두 받기에 손색 없었다. MVP 투표 전날, 호텔방에서 양준혁과 캔맥주를 나눠 마시며 '우리 중 누가 MVP가 되더라도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자'고 말했다. 당시 선동열(해태)의 기록도 워낙 좋았기 때문에 같은 팀에서 뛰는 우리의 득표가 갈릴 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했다. 결국 내가 MVP를 받았다. 준혁이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그는 앞으로 MVP를 받을 기회가 많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후 양준혁은 MVP를 받지 못했다. 선배로서 참 아쉽다.

구대성(은퇴·호주 연수 계획)

▶1996년 두 번째 MVP 경쟁=같은 해 입단해서 같은 해 나란히 은퇴를 하게돼 기분이 묘하다. 내 은퇴 경기 때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서로 제2의 야구 인생을 잘 만들어나갔으면 한다. 나는 호주로 연수를 떠나는데 양준혁은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궁금하다. 1996년 투수 4관왕(다승, 구원, 평균자책점, 승률)을 하면서 정규 시즌 MVP까지 받았다. 그때 양준혁이 MVP 투표에서 2등을 해 무척 아쉬웠을 것이다.

송진우(일본 요미우리 연수코치)

▶2000년 선수협=선수협이 만들어질 당시 정말 어려웠다. 준혁이 뿐만 아니라 (최)태원이 등 집행부들이 참 많은 고통을 감수하고 노력했다(송진우가 회장, 양준혁이 부회장이었다). 준혁이는 옳은 일이라고 한 번 생각하면 고집을 꺾지 않고 본인을 희생하는 성격이었다. 우리 팀 후배들에게 준혁이를 본받으라고 말한 적도 있다. 뻔한 내야 땅볼, 외야 플라이도 언제나 전력질주하는 베이스러닝 때문이었다. 은퇴를 한다는데 아쉽겠지만 본인이 선택한 길이니 박수를 보낸다. 그 동안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잘 전수해 줬으면 좋겠다.

김성근(SK 감독)

▶2001년 LG서 사제의 인연=LG 감독대행이던 2001년, 경기 전 더그아웃을 둘러보는데 양준혁이 팔 다리를 쭉 뻗고 앉아있더라. 덩치가 워낙 크고, 팔다리가 길지 않나. 자세가 좋아보이지 않았다(웃음). 양준혁이 예의바른 선수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번 지적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베테랑 양준혁에게 소리를 한번 지르면 분위기가 어떻게 변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너, 자세가 그게 뭐냐"라고 호통을 치니 양준혁이 바로 고쳐앉더라. 이후 젊은 선수들보다 더 바른 자세로 더그아웃에 있었다. 이 일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양준혁은 내 속내를 알아차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모범을 보이는 베테랑. 내가 원했던 바다. 그해 양준혁이 개인 최고타율(0.355)을 기록하며 타격왕을 차지했다. 한 마디만 해도 속뜻을 이해하는 선수다.

올 해 올스타전에서 양준혁이 찾아와 은퇴한다고 말했다. 양준혁을 추가선수로 뽑기를 잘했다. 경기 전 프리배팅을 보니 타격감이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대타로 내보냈더니 그렇게 타격감이 좋지 않아보였는데도 3점 홈런을 쳐냈다. 다시 한번 대단한 선수라는 것을 느꼈다. 그나저나 양준혁이 SK에서 뛰면 어떨까(웃음).

김응용(삼성 사장)

▶해태와 삼성에서 2번 불러준 은사= 양준혁은 한마디로 모범생이었다. 술과 담배를 안 하고 야구에만 열중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했으니 마흔살 넘어서도 야구를 할 수 있었다고 본다. 해태로 트레이드되면서 오기 싫다고 버텼지만 와서 1년만 뛰라고 설득했다. LG에서 FA를 선언하고서 선수협과 관련돼 진로가 불투명할 때 삼성으로 다시 데려왔는데, 전력으로 필요한 선수라 데려왔던 거다. 삼성에 돌아와서 야구에만 열심히 했다. 29년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타자 중 1인자라고 생각한다. 기록이 말해준다. 평균 타율이 제일 높지 않나. 영구결번으로 지정될 자격을 충분히 갖췄다. 은퇴는 본인이 제일 잘 판단한 거 같다. 시기적으로 좋게 발표했다. 조금 아쉬울 때 그만둬야 한다.

조성환(롯데 내야수)

▶3할을 일깨워주다=나는 1999년 입단 뒤 줄곧 무명 선수였다. 하지만 2003년 처음으로 3할 타자(타율 0.307)가 됐다. 그해 후반기 삼성과의 경기였다. 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갔는데, 삼성 1루수던 양준혁 선배가 "3할 타율을 꼭 이뤄라. 3할을 쳐 본 타자와 그렇지 않은 타자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었다. 양 선배가 어떻게 하면 3할을 칠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양 선배의 조언은 옳았다. 한 번 목표를 이룬 선수는 그렇지 않은 선수와 다르다. 시즌 중 타율이 떨어져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유지할 수 있다. 내가 2008년 4년 공백을 딛고 재기에 성공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3할을 쳤다'는 자신감이었다. 상대 팀의 후배에게 정말 귀한 조언을 해 줬다.

류택현(LG 투수)

▶통산 최다 341홈런= 당시 볼카운트 1-3인가 2-3인가에 맞았다. 바깥쪽으로 잘 들어간 공이었는데 (양)준혁이 형이 홈런을 의식한 듯 풀스윙을 하더라. 공이 스윙궤적에 걸렸다고나 할까. 준혁이 형이 노려쳤다고 하면 거짓말이다.(웃음) 홈런 뒤 문워크 세리머니를 하는 것을 보고 통산 최다홈런 신기록인지 알았다. 사실 투수들은 그런 기록을 일일이 신경쓰지 않는다.

LG에서 함께 뛸 때 준혁이 형과 즐거운 추억이 많다. 준혁이 형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두번 놀란다. 먼저 큰 덩치에 놀라고, 다음에는 겁이 많다는 데 놀란다. 전지훈련에서 바나나보트를 함께 탄 적이 있는데 타고 나서 준혁이 형 표정을 봤어야 했다. 아랫입술을 덜덜 떨면서 "난 안 탄다고 했잖아"라고 하더라. 준혁이 형은 눈을 좀 낮춰야 장가를 갈 수 있다. 눈이 머리 꼭대기에 있다. 형! 눈 좀 낮추시고 장가 좀 가세요.

김현수(두산 외야수)

▶2000안타 미래의 후보=전설적인 대선배님의 뒤를 이을 후보로 지목돼 정말 영광이다. 양준혁 선배님은 야구를 무척 잘 하시기도 하지만 어느 상황에서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이 정말 존경스럽다. 선배님과 같은 팀에서 야구를 해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운데, 2007년 6월로 기억한다. 잠실에서 우리팀이랑 경기할 때 선배님께서 2000안타를 치셨는데(타구가 내 옆인 중견수 방향으로 왔다), 당시 좌익수로 현장을 지켜보면서 나도 저런 가슴 뭉클한 장면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나도 선배님처럼 오랜 시간 동안 야구 선수로서 꾸준히 잘 하고 싶고, 선배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더 많이 노력하겠다.

선동열(삼성 감독)

▶마지막 감독= 양준혁이 어려운 결정을 했다. 나 역시 선수 때 은퇴는 힘들게 결정한 것으로 기억이 떠오른다. 양준혁은 타자로서 한국 프로야구에 한 획을 그은 훌륭한 선수다. 조금 더 선수 생활을 하고 싶어 쉽지 않은 결정지었지만 잘 마무리 한 것 같다. 선수 은퇴 후 제2의 인생에서도 선수 시절처럼 잘 하기를 바란다. 잘 할 것으로 기대한다. 올 시즌 어린 선수들이 팀의 중심이었는데 양준혁이 베테랑으로서 잘 이끌어줘 고맙다. 멋진 은퇴 경기를 만들어주고 싶다.


 

 

 

[양준혁 은퇴 특집 ②] 통산 기록 당분간 깨지기 어렵다  

 

양준혁은 자신이 보유한 각종 통산 기록을 깰 후보로 한화 장성호(33) 두산 김현수(22)를 언급했다. 양준혁 자신이 장종훈(한화 코치)의 통산 타격기록을 하나둘씩 경신 했듯이, 장강의 앞물은 뒷물에 밀리는 이치를 인정한 것이다.

양준혁은 대학(영남대)을 졸업하고 군대(상무)까지 다녀와 만 25세에 프로 데뷔했다. 반면 장성호는 충암고
를 졸업한 뒤 19세부터 뛰었다. 양준혁보다 6년이나 빨리 프로 무대에서 뛰었다. 양준혁이 데뷔 해인 1993년부터 2001년까지 9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했고, KIA 장성호(현 한화) 역시 2006년까지 9년 연속 3할 타율을 때렸다. 장성호가 양준혁을 따라잡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장성호는 2008년 이후 매년 두 자릿수 안타에 그치고 있다. 지난 겨울에는 은퇴 위기까지 겪은 뒤 한화로 트레이드 됐다. 올 시즌 안타수는 15일 현재 54개, 통산 1795안타를 기록 중이다. 장성호가 내년부터 매 시즌 120안타를 때려낸다 해도 2015년 중반에야 양준혁의 2318안타를 넘어설 수 있다. 37세까지 4년간 정상급 실력을 발휘해야 가능하다.

'타격 기계' 김현수는 14일 현재 565안타를 기록 중이다. 그는 이제 22세다. 양준혁을 뛰어넘으려면 매년 160안타씩 11년을 쳐야 한다. 33세까지 변함없는 '타격 기계' 초절정 모드를 유지해야 한다.

1990년대 말부터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프로로 직행하는 선수들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대졸 선수들의 통산 기록은 한시적인 것으로 취급됐다. 그러나 '포스트
양준혁'이 나올 가능성은 상당히 떨어졌다. 이유는 두 가지. 고교 졸업 후 곧바로 주전을 꿰차는 경우가 드문 데다, 스타 플레이어는 FA 자격을 얻어 해외로 진출한다.

프로야구 수준이 높아지면서 신인, 특히 19세 고졸 타자가 라인업에 들기 어려워졌다. 95년 삼성 이승엽, 2001년 한화 김태균처럼 데뷔 3년 이내에 리그 최고타자가 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이승엽과 김태균은 국내에서 9시즌을 채운 뒤 일본 프로야구로 진출해버렸다.

이승엽(34)이 국내로 복귀하면 홈런 기록은 곧장 경신될 전망이다. 이승엽은 국내에서 홈런 27개를 추가하면 양준혁과 같은 통산 351개가 된다. 그러나 이승엽은 통산 안타(1286개) 등 다른 기록에서는 양준혁을 넘어서기 힘들다.

양준혁 시대는 끝났지만 어쩌면 '포스트 양준혁'을 만날 수 없을 지 모르기에, 그의 은퇴를 바라
보는 야구팬들의 아쉬움은 더 크다.

한용섭 기자 [orange@@joongang.co.kr]


 


Tip…양준혁은 10개 부문에서 통산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양준혁이 17년 야구 인생동안 달성한 기록들은 다른 수치로 환산하면 어떻게 될까.

양준혁은 개인 통산 2133경기에 출전하면서 3879루타를 기록했다. 루와 루 사이의 거리는 27.44m. 양준혁은 17년 간의 야구인생 동안 그라운드
에서 약 10만6440m를 뛴 셈이다. 경부고속도로(416km)의 1/4에 해당하는 엄청난 거리다. 마라톤으로 치면 풀코스를 2번 완주하고 20㎞ 하프코스를 뛴 셈이다.

351개의 홈런은 어떨까. 평균 비거리
를 110m으로 잡으면 양준혁은 3만8610m에 달하는 길이를 친 셈이다. 에베레스트산(8848m)을 4개 쌓고도 백두산(2750m) 1개를 너끈히 넘길 수 있는 길이다.

프로야구 한 시즌 경기는 133게임이다. 2133경기를 뛰었다면 16시즌 동안 한 경기도 거르지 않고 전경기를 뛰어야 가능한 숫자다. 1389개의 타점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양준혁은 한 시즌 평균 약 81타점을 올렸다. 올시즌 타점 5위인 최희섭(KIA)는 83타점을 기록 중이다. 17시즌을 최상위권
수준의 타점을 유지했다는 뜻이다.

서지영 기자 [saltdoll@joongang.co.kr]


 

 

 

[양준혁 은퇴 특집 ③] 양준혁 “신비주의 접고 트위터로 팬 곁에 가겠다”
 
'신기록의 사나이' 양준혁(41·삼성)이 19일 SK전에서 18년 프로 생활을 접고 은퇴식을 치른다.

최다안타, 최다홈런, 최다타점 등 10개 부문의 통산 기록을 보유한 양준혁은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스타로 손색이 없다. 1993년 데뷔, 신인왕을 거머쥔 이후 꾸준히 화려한 성적을 남긴 양준혁이 은퇴경기를 앞두고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마지막 경기다. 심정이 어떤가. 팬들이 경기 내내 '양준혁'을 연호할텐대.

"시즌 도중 은퇴를 선언했을 때나, 18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라운드에 나갈 때 팬들의 목소리를 듣게되면 어떤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마지막 올스타전에서 홈런을 쳤다. 팬들은 은퇴 경기에서도 인상적인 장면을 기대하고 있다.

"올스타전은 운이 좋았다. 홈런이나 안타는 솔직히 자신없다. 그동안 경기도 뜸했다. 그래도 내야 땅볼을 치더라도 1루까지 전력 질주하는 것은 자신있게 보여드리겠다."

-SK 투수들이 은퇴 경기라 좋은 공을 줄 수도 있지 않은가.

"(손사래를 치며)에휴~, 그런 소리 마라. 쳐라고 좋은 공을 던져 줘도 홈런을 친다는 보장은 없다. 알고 쳐도 홈런 치기가 쉽지 않다."

-은퇴식에 특별히 초청한 사람들은 누군가.

"부모님을 포함해 지인 50여명을 초청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고 지방이라 많은 사람을 초청하기는 쉽지 않았다."

-야구 인생에서 잊지 못할 사람을 꼽자면.

"김응용 삼성 사장님, 김성근 SK 감독, 도성세 전 영남대 감독 세 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김응용 사장님은 감독 시절 두 번이나 나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 1999년 해태로 트레이드됐을 때, 내가 거부하고 해외 진출 시도 등으로 소란을 일으켰다. 김 사장님(당시 해태 감독)이 '해태에서 1년만 뛰어라, 다른 곳으로 트레이드시켜 줄게'라고 말했다. 공수표가 아니라 그해 시즌 도중 현대로 트레이드 시켜주려고 했는데 무산됐다. 약속대로 이듬해 LG로 트레이드시켜줬다. 2001 시즌 후 FA 자격을 얻고 LG와 협상이 결렬된 후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마지막에 김응용 사장님(당시 삼성 감독)이 필요한 선수라며 적극적으로 구단에 요청해 나를 영입했다. 김 사장님이 선수들에게 욕을 많이 해도 표현만 그럴 뿐 속마음은 애정이 깊다.

-김성근 감독은 은퇴 전 올스타전 출장 기회도 줬는데.

"지난 7월 대구 홈구장에서 마지막으로 올스타전에 뛰게 배려해줘 지금도 감사드린다. 김성근 감독님은 LG에서 비록 1년만 같이 지냈지만 많은 것을 배웠다. 기술적인 부분보다 야구에 대한 생각, 혼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김 감독님과의 인연이 18년 동안 선수 생활을 오래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도성세 전 감독은 어땠나.

"도 감독님은 대구상고-영남대에서 7년간 함께 지냈다. 때리기도 많이 때렸지만 혹독한 훈련으로 기본 바탕을 쌓게 했다. 고교 1학년때부터 4번을 치게 했고 대학 때도 신입생인 나에게 4번타자를 시키셨다. 대구상고 때 하도 많이 맞아 곧장 프로에 가려고 했지만 당시 삼성의 외야가 쟁쟁해 대학을 갔다오라고 했다. 일찌감치 영남대 진학을 확정짓고 나자 도 감독님이 영남대 감독으로 부임해 4년을 더 함께 했다. 당시에는 죽겠더라.(웃음)"
 
-은퇴 선언 후 트위터(twitter.com/slion10) 활동이 왕성하다.

"요즘 시대가 바꿔 IT가 워낙 발달했다. 과거에는 신비주의를 고수했지만 이제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팬들과 가깝게 소통하는 것이 야구 인기몰이에도 좋을 거라 봤고. 트위터는 팬들과의 즐거운 공간이다. 팬들과 같이 오프라인에서 봉사활동 계획도 잡아가고 있다. 의미있는 모임으로 발전하고 좋은 것 같다."

-시즌 후에 유소년 클럽야구대회를 개최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대.

"중고생, 청소년 클럽야구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유소년 야구는 내가 아니더라도 여러 단체,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지원이 되는 편이다. 중학교부터 입시 전쟁으로 청소년 클럽야구는 유명무실하다. 야구를 통해 인성교육도 가능한데 안타깝다. 야구를 하면서 단체 생활, 팀웍, 희생정신, 리더쉽, 선후배 관계 등 다양한 배움이 가능하다. 사회의 리더가 되는데 보탬이 된다. 대구상고 야구부 동기 중 나와 김태한 2명만 야구를 하고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은퇴하면서 후배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한두번 이야기했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을 더 갖고 뛰었으면 한다. 시대가 바뀌어 팬들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 우승만이 목표가 아니라 팬들에게 성실하고 좋은 플레이로 보답하는 것도 중요하다. 과거에는 성적이 최우선시됐다면 요즘은 팬이 성적보다 더 중요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은퇴 후 계획은 윤곽이 드러나나.

"아직도 2~3가지 안을 놓고 생각 중이다. 곧장 코치가 되는 것은 내 스스로 부담스럽다. 현재로는 미국 연수가 가장 우선 순위이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양준혁 은퇴 특집 ④] 삼성, 프랜차이즈 스타 대접 ‘톡톡’
 
지난 7월 대구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 식전행사로 ‘삼성 라이온즈 레전드 올스타’ 10명이 소개됐다.

이날 라이온즈 레전드에 선정된 김시진(투수) 이만수(포수) 김성래(1루수) 강기웅(2루수) 김용국(3루수) 류중일(유격수) 장효조·장태수·이종두(이상 외야수) 박승호(지명타자) 등의 올드 스타들은 대구 팬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레전드 스타들은 대체로 선수 생활을 그만 둘 때 삼성과 좋은 관계로 이별하지 못했다. 김시진 넥센 감독은 롯데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이만수 SK 수석코치는 은퇴 과정에서 구단 프런트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장효조 삼성 2군 수석코치 역시 마지막 경기는 롯데 소속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삼성은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각별하게 챙기고 있다. 2007 시즌 후 김한수를 시작으로 2008년 전병호, 2009년 김재걸 그리고 올해 양준혁까지 삼성 유니폼을 입고 십수년 넘게 활약한 스타들의 은퇴식을 치러줬다. 양준혁의 은퇴 경기는 1억원의 예산을 들여 준비했다.

삼성은 은퇴식과 함께 곧장 코치로 예우를 해주고 있다. 김한수와 전병호는 2군과 재활군에서, 김재걸은 1군 코치로 활약 중이다. 특히 전병호와 김재걸은 은퇴와 동시에 연수 없이 코치로 재고용됐다. 삼성은 명문 구단에 걸맞게 프랜차이즈 스타의 은퇴 후 거취에도 적극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양준혁도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구단의 지원을 받아 1년간 해외 연수를 떠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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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동의 똑똑똑] 양준혁 야구선수

ㆍ“땅볼이라도 죽어라 뛰는 게 프로… 뛰다 마는 거, 난 인정 못해”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기엔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8할이 야구다. 동네 야구를 하며 자라난 촌놈의 소원이자 꿈은 푸른 잔디구장을 직접 밟아보는 것. 1999년 삼성라이온즈 대구구장 장내 아나운서 일을 시작하면서 떨리고 벅차오르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런 촌놈에게 ‘4번타자’ 양준혁(41)은 존재만으로도 기쁨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우상을, 전설을 넘어서는 신이다. 양신(梁神). 93년 프로데뷔 후 숱한 기록을 갈아치운 ‘한국 야구사의 기록제조기’. 그의 빗속 은퇴식을 보면서 ‘한 시대가 저문다’고 느낀 건 그의 당당한 체구만큼이나 묵직한 무게감 때문이었다.
 
김제동 “형님. 이래뵈도 연예인 야구단에서 포지션이 유격수거든요. 제가 야구왕 김격숩니다.”
양준혁 “니가 유격수 한다는 건 좀…. 근데 니 장비 하나는 죽이더라. 승엽이꺼 써서 그렇제.”
김제동 “장비는 죽이지요. 2002년 우승할 때 승엽이가 홈런쳤던 방망이 제가 갖고 있어요. 그거 한 6000만원 한다카데예.”
양준혁 “야, 니 완전히 땡잡았네.”
 
 

“제동아, 니 와 이래 늙었노?”


-참, 나. 형님은 늙은 거 생각도 안 합니꺼? 영감쟁이 다 돼가꼬. 그나저나 축하해야 되겠제?


“안 짤맀으니 축하해도 되지. 한 잔 해도 생큐고. 근데 감기가 와 갖고 정신이 좀 몽롱하다. 긴장도 풀맀꼬. 지난번에 은퇴경기 하면서 비도 오고 마음도 울컥하고 그라다보니 감기가 오데.”


-삼진 세 개 드시면 울컥할 만합니다.


“그러게. 어린애한테 먹으니까 욱하데. 난 안타라도 쳐야 되는데 157㎞를 꽂아뿌니까. 미치겠데. 그날 광현(SK 김광현)이 볼은 도저히 못 치겠더라고. 광현이 신인 때부터 쭉 쳐봤는데 그날 공이 제일 좋았던 것 같다. 그래도 내 은퇴경긴데 공 한 번 안 주겠나 했는데 끝까지 안 주데. 박경완 포수도 눈 감아뿌고. 그런데 그게 오히려 기분이 좋더라고. 1등해야 하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니까.”


-김광현 선수나 송은범 선수가 마운드에서 모자 벗고 인사할 때 기분이 어땠어요?


“고맙더라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나 역시 못 쳤지만 최선을 다한 거고, 팬들도 좋아해주시고. 그런데 그날 내만 못 친 게 아니잖아. 우리 그날 안타 한 개 나왔어.”


-은퇴식 할 때 많이 울던데 기분이 어땠어요?


“은퇴에 대해서는 작년부터 고민을 많이 해왔거든. 내가 팀에 부담주면 유니폼 벗겠다고 마음먹었지. 올해 그 시기가 오는 것 같아 한 달 이상 고민하는데 얼마나 (생각이) 많았겠노. 그런데 막상 결정하고 나서 팬들이 텐트까지 쳐가면서 반대하니까 덜 외롭더라고. 은퇴식도 축제같이 꾸며주니까 기분도 좋고 고맙고 그렇지. 무지하게 허전할 것 같았는데 편안했어.”


은퇴경기는 정말 가슴이 뭉클했다. 9회에서 땅볼을 치고도 끝까지 1루로 전력질주하던 형의 모습. 그건 형의 야구인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모습이었다. 또 그런 양준혁을 기억하는 야구팬들에겐 그를 떠나보내야 하는 아쉬움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난 안타라도 쳐야 하는데 광현이는 끝까지 안 주데... 그래도 최선 다하는 모습이 고맙고 기분 좋더라고”
▲ “빗속 은퇴식을 보며 ‘한 시대가 저문다’고 느낀 건 체구만큼이나 묵직한 그의 무게감 때문이었다” - 김제동

-세월 정말 많이 지났죠?

“글치. 니 그때 한창 까불락거렸다 아이가. 처음 봤을 때 그렇게 웃기더라고. 장내 아나운서 할 때 니 나오면 올 스톱이야. 그거 쳐다보느라 정신없지. 되도 안한 선글라스 끼고 나와가꼬 안되면 벗어뿌고, 그걸로 사람 웃기고. 니 그거 결국 방송에도 써먹데.”

-웃기게 생겨서 그런 거죠. 그런데 형님은 야구 유니폼만 입었다 뿐이지 그게 어디 선숩니까? 깡패지.

“내 스타일이 그래. 어쩔 수 없어. 껄렁껄렁하는 거. 그래서 야구장에서 껌을 안 씹잖아. 씹어뿌면 완전 가뿌는 거야.”

-그래도 어쩌겠어요. 씹는 것처럼 보여요. 만세도 젤 많이 부르고. 형님 뛸 때도 막 휘저으면서 이래 뛰잖아요. 머리부터 들어가고. 머리나 좀 작습니까.

“내가 봐도 폼은 안 나더라. 내 폼 보고 ‘목도리 도마뱀’이라카데.”

-그냥 뛰는 것도 아니고 헬멧 벗어던지고 뛰는 게 허물 벗듯 하잖아요. 승엽이는 땅파고 손들어 젖히지, 동주는 얼굴 떨지, 한수형도 기마 자세에 팽이 돌리지….

“폼이 그래도 20-20클럽 네 번 했어. 200도루는 하고 싶었는데 결국 193개밖에 못했지.”

-와예, 하고 싶다 카지….

“하믄 견제 들어오잖아. 외국 보면 도루하고도 세리머니 하는데 우리는 홈런치고도 뭐 못하게 하는 분위기였다 아이가. 좀 나댄다 싶으면 다음에 저 놈 나오면 빈볼 던져 맞혀뿌라 했다고. 예전보다 좀 나아졌는데 나는 후배들한테 더 하라고 해. 팬들도 좋아하잖아. 야구선수도 ‘엔터적’인 게 있어야지. 홍성흔이처럼 뭔가 보여주면 팬들이 좋아하잖아.”

야구는 인생이다. 인생에도 역전이 있듯이 9회말 투아웃 때 역전의 묘미도 있고, 이기는 날도 지는 날도 있다. 삼진아웃을 가장 많이 당해본 사람만이 홈런을 가장 많이 칠 수 있다는 교훈은 실패를 통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는 인생의 교훈과도 꼭 닮았다.

 
 
-앞으로 계획 중에서 유소년 야구에 관심이 많다 했죠.

“나름 알아보고 있는데 정말 공간이 없더라. 그래도 여기저기서 도와줘서 잘될 것 같기는 하다. 당장 선진국처럼 야구장이 많아지고 인프라가 갖춰지는 걸 기대하지는 못하겠지만 나 같은 선수 출신이 그런 일을 해야 안 되겠나. 단순히 생각하면 박찬호, 이승엽 같은 야구 꿈나무들도 키워야겠지만 내 진짜 목표는 야구교육을 통해 애들을 사회의 리더로 키우고 싶다는 기다. 우리 때는 야구하면 공부랑은 담쌓고 했지만 이제는 공부하면서 청소년들도 취미로 야구할 수 있게 해야지. 애들이 공부에 치여서 시간이 안 나는데 주말에라도 좀 뛰게 해줘야 안 되겠나. 야구하면 협동정신, 예절, 팀워크지. 가르칠 게 정말 많다니까. 공부만 해라 이케 가꼬는 교육이 안 된다 이기라. 애들이 집에서 야구게임이나 하지, 동네에선 놀 데도 없잖아. 방에서 게임만 자꾸 해봐라. 애들 생각이 음지화되지.”

-맞아요. 학교 운동장도 뚝뚝 잘라놨고, 숨바꼭질이나 구슬치기 하는 애들도 없고. 결국 다 어른들이 그렇게 잘못해 놓은 거죠.

“내가 처음에 공간문제 때문에 시청이랑 관공서랑 이런 데 찾아갔는데 뭐라 하는 줄 아나? 니 ‘가오’ 세울라 카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더라고. 이런 공무원들이랑 마이 부딪혔지. 정말 인식이 안 돼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고.”

-갑자기 비 많이 왔을 때 형님이 장화신고 땅고르개 들고 베이스에 고인 물 밀어내던 게 생각나요. 어찌보면 팬 서비스 차원에서 웃자고 한 일이겠지만 한편으론 씁쓸하고 슬프더라고요. 프로야구가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야구장 시설의 현실이잖아요. 아직도 더그아웃에 쥐 나오나요?

“얼마 전에는 로커 천장에서 고양이가 뛰어내려 오더라니까. 천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아이가.”

돔구장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경기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좋겠다. 언제까지 여자축구 등록선수 몇백명 가지고 월드컵에서 우승했다고 좋아할 것인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신화를 일궈냈다고 박수치는 건 우리 세대에서 끝내야 한다. 프로야구 시설의 현실이 이럴진대 일반인이나 청소년들이 뛰고 즐길 수 있는 야구장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더 멀게만 느껴진다.
 
▲ “공부에 치인 요즘 아이들 야구 통해 리더 만들고 싶어... 당장 인프라 기대 어렵지만 나 같은 사람들이 해야지”
▲ “언제까지 열악한 환경에서 신화를 일궈냈다고 박수칠 것인가. 그건 우리 세대에서 끝내야 한다” - 김제동

-언제 인터뷰한 거 보니까 애들 많이 낳고 싶다고 하던데.

“내 그런 말 한 적 없다. 자꾸 결혼 이야기 물어보면 딱 짤라뿐다. ‘노 코멘트’이카면서.”

-우와, 영어도 사투리로 하네예. 와 장가 안 갑니꺼.

“니부터 가라. 니 어떻게 되나 보고 갈라꼬….”

-나는 아직 서른일곱입니다. 형님부터 가야죠.

“다들 그카면서 지 먼저 가데. 내 핑계대고. 승엽이도 그래놓고 지 먼저 가뿌고.”

-공개적으로 한효주씨 팬이라면서요. 만난 적 있죠?

“안 만났다. 그냥 드라마 <동이>를 열심히 보는 거지. <동이>에 숙종이 ‘깨방정’으로 많이 나오니까 나도 어떻게 엮어 볼라꼬 ‘깨준혁’이라고 이름지어 트위터에 올렸지. 내 한효주씨 사인도 받았다. 누가 받아주데. 내 이름 써갖고. 그거 받아보니 팬들이 이런 기분으로 사인 받는구나 싶데. 막 날아갈 것 같고, 힘이 솟고…. 그날 하루는 진짜 해피하더라.”

-으하하. 그래 갖고 그거 들고 시합하셨습니까?

“집에 액자해서 만들어놨지. 우울할 때 한 번씩 보면 기분이 업되지. 드라마에서 동이 아들 있잖아. 왕자. 그 아들을 보면서 나 어렸을 때 같다며 트위터에 썼는데 반응 싸늘하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카는 글이 열개나 올라오더라고. 그래서 바로 꼬랑지 내리고 급 사과했지. 제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카고.”

-아들한테까지 감정이입된 것 보면 중증인데요. 한효주씨 몇살인지는 압니까?

“24살. 근데 뭔 상관이고. 내 혼자 팬으로 좋아하는데 그게 뭐 어때서? 니도 내랑 비슷한 기분 알낀데…. 모르나?”

-아이고, 알아요. 됐어요. 형 은퇴식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남들은 은퇴식에 아들 데꼬 들어가는데 형님은 혼자 들어가니…. 형님 아버님도 많이 우셨잖아요. 물론 오랜 세월 뒷바라지 하면서 감회가 새로우셨겠지만, 며느리나 손자가 없어서 울컥하셨을 거예요.

“와? 그 모습도 안 괜찮드나? 나이든 아버지랑 같이하는 것도. 꼭 얼라나 마누라만 데꼬 드가야 되나?”

형이 생각하는 야구의 의미를 물었다. 인생이고 삶이다. 애인이고 부모고, 무한한 기쁨을 주는 절대적인 것. 삼성라이온즈 품에서 그만둬 행복하다는 형은 “참 좋은데…. 말로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라면서도 주저리주저리 ‘야구예찬론’을 편다. 형이 꼽은 최고의 감격적 순간은 2002년의 우승. 나 역시 믿을 수 없어 얼굴을 꼬집으며 울던 기억이 선명하다.

“내가 삼성에 돌아왔던 해잖아. 그전에 삼성이 여덟번 결승에 올라갔어도 우승은 그때가 처음이었지. 그전에 내가 어떤 소릴 들었냐 하면 우승 시키지 못한 4번타자라꼬. 잔인한 이야기였지. 그리고 많이 힘들었잖아. 다른 팀 갔다 올 때 구단서도 98%가 반대했어. 선수협 때문에 갈등도 있고…. 우승하니 모든 게 정리되데.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하면서도 한 번도 우승 못했었거든.”

수많은 야구팬은 ‘양준혁’이란 이름 석자 때문에 즐거웠다. 물론 그가 홈런을 칠 때마다 절망했던 상대편 팬도 있겠지만…. 그가 떠나온 ‘판’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없을까.

“후배들한테 잔소리를 마이 하는데 결국은 본인이 느껴야지. 마지막 공 하나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땅볼로 날아간다고 뛰다 말고 돌아오는 거, 나는 인정 안 해. 안타가 아니더라도 전력을 다하면 송구에러가 나고 그게 안타를 만들거든. 그게 진정한 프로지. 내가 나를 돕고 최선을 다해야 남도 나를 돕고 기회가 생기는 이치지. 야구뿐 아니라 인생이 그렇다 아이가.”

카, 상투도 틀기 전에 도사 되겠다. 총각도사. 사족 한마디. 인터뷰 내내 지방색을 드러내며 ‘원어민 사투리’를 쓴 건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한 장치임. 용서하시라.

2010. 9.29 <정리 |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동영상 | 김문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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