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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송진우 200승-2000K-3000이닝

by Wood-Stock 2009. 8. 18.

송진우 200승, 한국야구사에 가장 값진 기록

 

(서울=연합뉴스) 130년 역사의 미국프로야구에서 개인 통산 200승을 돌파한 선수는 올해까지 108명. 현역 선수로는 로저 클레멘스(휴스턴), 그렉 매덕스(LA 다저스) 등 두 명의 300승 투수를 비롯, 케니 로저스(디트로이트)까지 10명이 있다.

 

70년 전통을 자랑하는 일본프로야구에서는 400승으로 최다승을 올린 한국계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김정일)를 필두로 역시 한국계 후지모토 히데오(한국명 이팔용)까지 23명만이 200승을 넘어섰다. 현역 선수 중에서는 요미우리의 구도 기미야스(215승)가 최다승을 거뒀고 주니치의 좌완 야마모토 마사, 구와타 마쓰미(요미우리)가 각각 185승, 173승으로 뒤를 잇고 있다.

 

야구계에서는 투수를 평가할 때 '10승 투수'와 '15승 투수'로 나눠서 본다. 한 해에 10승은 해줄 것으로 믿는 투수는 보통 3선발 요원으로 취급한다. 15승 이상을 올릴만한 투수는 특급으로 분류하며 흔히 에이스라는 칭호를 달아준다.

 

10승 투수든 15승 투수든 200승을 올리려면 14년 또는 20년을 꾸준히 평균치를 유지하며 던져야 한다. 부단한 자기 관리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1989년 프로 데뷔해 18년 만에 한국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200승 고지를 밟은 송진우(40.한화)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신화가 됐다. 선발과 마무리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던 척박한 현실에서 그는 한해 평균 11승, 6세이브씩을 올리며 200승과 100세이브를 넘어선 유일한 선수다.

 

선발-중간-마무리의 계투 시스템이 일찍부터 정착한 미국과 달리 일본에서 최근 200승을 넘어선 이는 요미우리의 구도(43) 정도다. 1982년 프로에 들어선 그는 대부분 선발로 뛰며 2004년 22년 만에 200승을 이뤘다.

 

반면 송진우는 마무리와 선발을 가리지 않고 나서 200승을 올렸다. 1992년에는 19승8패, 17세이브(25세이브포인트)를 올리며 그해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선발투수 송진우는 팀 사정에 따라 구원으로도 등판했고 지난 2004년에는 세이브 하나를 추가, 통산 102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했다. 지난해와 올해는 선발에 전념하고 있다.

 

200승도 중요하나 송진우가 200승-100세이브를 동시에 달성한 세계 두 번째 선수라는 점에서 더욱 값지다.

미국프로야구에서 200승과 100세이브를 동시에 넘어선 선수는 없다. '백 도어 슬라이더'의 대명사인 데니스 에커슬리가 그나마 대기록에 근접했다. 선발 투수로 출발한 그는 197승을 올렸고 나중에 마무리로 변신, 390세이브를 낚은 특이한 케이스였다.

 

일본의 에나쓰 유타카만이 206승-193세이브로 세계에서 처음으로 200승-100세이브를 함께 달성했다.

송진우가 한미일 역사상 133번째로 쌓아올린 200승 금자탑은 25년의 한국프로야구가 낳은 고귀한 기록임에 틀림없다.

 

 

 

송진우 '3000이닝 투구' 돌파의 의미

 

송진우가 한국프로야구 28년사에서 첫 개인 통산 3000이닝 투구를 돌파해 200승, 2000탈삼진에 이어 또한번 한국 야구사에 새 이정표를 세웠다.

 

그는 2001년 9월 5일 수원 현대전에서 사상 첫 2000 이닝에 도달했고 2004년 7월 27일 대전 SK전에서 2500이닝에 이른데 이어 1989년 데뷔 이후 21년만에 3000이닝마저 돌파했다. 통산 2000이닝 이상을 투구한 투수가 송진우 외에 한화 정민철(2362.2이닝)과 이강철(은퇴), 한용덕(은퇴), 김원형(SK) 선수 등 4명에 불과하고 송진우의 기록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3000이닝이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 지를 알수 있다.

 

3000이닝 투구를 넘어선 투수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사이 영(은퇴·7356이닝)을 포함해 129명에 이른다. 현역투수는 그렉 매덕스(5008.1이닝)의 은퇴로 로저 클레멘스(FA·4916.2이닝), 톰 글래빈(애틀랜타·4413.1이닝) 등 7명이다. 일본은 가네다 마사이치(은퇴·5526.2이닝)등 26명인데 현역 투수는 구도 기미야스(요코하마·3298.1이닝), 야마모토 마사히로(주니치·3120.2이닝) 등 2명에 불과하다. 투수들의 역활분담이 더 세분화된 요즘 추세로 볼 때 앞으로는 나오기 힘든 기록이기도 하다.

 

송진우의 기록은 미·일 대투수들의 그것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한국 야구가 그들과 다른 풍토 속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송진우는 대학을 졸업하고 그것도 1988년 서울올림픽 출전때문에 프로 입단이 한해 더 늦어졌는데도 '200승-100세이브-2000탈삼진'에 이어 3000이닝 투구까지 돌파한 것이다. 이같은 기록은 메이저리그에서 존 스몰츠(보스턴·210승 154세이브 3011탈삼진 3395이닝), 일본에서 에나쓰 유타카(은퇴·206승 193세이브 2987탈삼진 3196이닝) 등 한·미·일에 한명씩만 존재하고 현역으로는 송진우를 포함해 단 2명에 불과한 대위업이다.

 

 

 

송진우, 3,000 이닝과 함께 걸어온 '기록의 길'

 

" 홈에서 3천이닝을 채우고 싶다 " 던 '영원한 회장님' 송진우(43, 한화)의 꿈이 실현됐다.

두산 이대수의 뜬공이 우익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가는 순간, 대전구장을 찾은 야구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함성을 질렀다.

 

2009년 4월9일 송진우가 또 하나의 새 역사를 썼다. '3,000이닝 투구'. 28년의 한국프로야구사에서 처음 나온 대기록이자 당분간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념비적인 기록이다. 송진우는 이미 한국 프로야구에서 최초로 200승과 2,000 탈삼진 달성이라는 신기원을 이룩한 현역 최고령 투수. 그의 업적은 이제 역사를 넘어 '신화'가 됐다.

 

지난 2001년 9월 5일 수원 현대전에서 프로야구 최초로 2천이닝 투구를 달성한 송진우는 2004년 7월 27일 대전 SK전에서 2,500이닝 투구 기록을 세우며, 대망의 3,000 이닝 고지 달성의 전망을 밝게 했다.

 

28년 역사의 한국 프로야구에서 통산 2천 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도 송진우를 비롯해 정민철(한화), 이강철(KIA, 은퇴), 한용덕(한화, 은퇴), 김원형(SK) 등 총 5명에 불과하다. 팀 동료인 정민철이 이날 선발로 5이닝을 던져 2천368.2 이닝으로 뒤를 좇고 있으나, 결코 깨지기 쉬운 기록은 아니다.

송진우는 한 경기 등판할 때마다 본인의 투수부문 한국 최고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그럼에도 성실하고 꾸준함의 대명사인 송진우이기에 더욱 이 기록이 의미하는 바가 클 것이다. 현재 경기출장과 세이브 부문을 제외한 승리, 탈삼진, 투구이닝, 상대타자수 등 투수 전 부문에서 통산 1위 기록을 달리고 있다.

 

프로야구 생활 21년. 최근에 입단한 신인선수들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부터 프로 마운드에 올라 그라운드를 누볐던 그이기에 땀방울을 닦아내는 그의 이마에는 어느덧 주름살도 제법 잡혔다. 그에게 열성적인 응원을 보내줬던 올드팬도 이제는 자녀의 손을 잡고 '변함없이 마운드에 오르는' 그의 모습을 보러 야구장을 찾고 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3천 이닝 이상 던진 투수가 사이 영(7천356 이닝)을 포함한 129명(현역투수 9명)이나 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가네다 마사이치(5천526.2 3이닝)를 포함한 26명(현역투수 2명)이 3천 이닝을 넘겼다.

 

아직 역사가 짧은 한국 프로야구지만 송진우는 멈추지 않고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긍지를 후배들과 자라나는 야구꿈나무들에게 온몸을 다해 보여주고 있다. 그가 세운 기록들은 후배들에겐 새로운 도전 목표가 된다.

 

 

'베테랑' 송진우 '투수 기록의 산실'

한화 베테랑투수 송진우(43)는 투수 부문에서 '기록의 산실'같은 존재다.

 

송진우는 통산 3000이닝 투구뿐 아니라 각종 기록에서 전무후무한 대기록들을 보유하고 있다.한국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달성한 3000이닝 투구는 200승과 2000탈삼진 돌파에 이은 전인미답의 기록이다.'200승-100세이브-2000탈삼진'을 한꺼번에 돌파한 위대한 경력에 3000이닝 투구를 추가한 것이다.

 

송진우의 최다 기록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그가 제일 윗자리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부분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송진우가 역대 최다 기록을 갖고 있는 부문은 승리(210승),상대 타자(12688명), 탈삼진(2045개),투구이닝(3000이닝)은 물론 패전(153패), 피안타(2714개), 피홈런(270개), 4사구(1266개), 4구(1149개), 실점(1336점), 자책점(1165점)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다.송진우가 첫 머리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부문은 출장수(663경기·4위),완투(64번·7위),완투승(48번·8위),완봉승(11번·13위),세이브(103개·11위),사구(117개·8위) 등이 몇 개 되지 않는다.

 

송진우가 이처럼 놀라운 대기록을 쌓아왔지만 상과의 인연은 많지 않았다. 정규시즌, 한국시리즈, 올스타전 등에서 MVP를 한 차례도 받지 못했고, 골든글러브에서는 2002년 한 차례 이름을 올렸을 뿐이다. 1992년 다승(19승8패),구원(25세이브포인트·8구원승 17세이브) 등 2관왕에 오르고도 MVP와 골든글러브 경쟁에서 탈락했다. 1990년 구원(38세이브포인트·11구원승 27세이브), 2000년 승률(0.867·13승2패) 부문 타이틀을 따내 개인통산 네 차례 투수 부문 개인타이틀 차지했다. 송진우의 대기록들은 한 시즌 반짝해서 거둔 산물이 아니라 1989년 데뷔 이후 큰 부상없이 꾸준하게 쌓아온 집념의 산물로 그 자체로 한국 프로야구 역사나 다름없다. 그는 데뷔 이후 1993·1998·2003·2007년 등 4시즌만 규정 이닝을 채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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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송진우 은퇴, 그가 남긴 위대한 역사
"한결같은 색깔을 내는 소나무"... 동료들을 위해 희생했던 훌륭한 선수
 

내게는 투수보다는 '회장님'으로 더 친숙한 프로야구 최고령 투수 송진우(43, 한화) 선수가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송진우 선수 생년월일이 1966년 2월 16일이므로 나와 동갑내기이다. 하지만 나는 12월 11일이니, 송 선수는 나보다 열 달이나 앞서 태어났다. 나같은 경우 100미터 달리는 일도 벅찬데 송진우 선수는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존경할 수밖에 없다. 이제 그가 떠난다니 마음 한자리가 아프다.

 

송진우 선수가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남긴 족적은 쉽게 잊히지 않을 위대한 역사이다. 통산 210승 등 무수한 기록을 남겼다. 지금도 안타까운 것은 송진우 선수가 200승을 거둔 2006년 8월 29일 기아전 경기를 어느 방송사도 중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승이라는 한국 프로역사에 위대한 역사를 이룩하는 장면을 우리들은 녹화화면으로만 볼 수 있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그가 기록하는 것에는 '최고령'이 따라붙었다. 최고령 선발승은 2008년 9월 13일 문학경기장에서 SK전(42세 6개월 28일), 구원승은 2009년 4월 8일 대전 경기장 두산전(43세 1개월 23일), 완투승은 2005년 9월 8일 문학경기장 SK전(39세 6개월 23일), 완봉승은 2005년 9월 8일 문학경기장 SK전(39세 6개월 23일)이다. 공교롭게도 문학경기장에서, 그리고 SK전에서 많이 세웠다.

 

투수는 타자보다 선수 생활을 오래 하기 힘들다. 타자들은 몸관리를 잘하면 마흔 살이 넘을 때까지 생활을 할 수 있지만 투수는 그렇지 못하다. 예를 들면 최동원 선수(32살-롯데, 삼성), 선동렬 선수(36살-해태, 주니치), 김시진 선수(34살-삼성, 롯데), 이상훈 선수(34살-(LG) 은퇴 나이를 보면 송진우 선수가 몸관리를 얼마나 철저히 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지금과 그때는 프로야구 환경과 선수 관리가 달랐다고 할 수도 있다.

 

철저한 몸 관리... 선수로서도, 인간적으로도 훌륭했던 송진우

 

▲ 세광고 시절의 송진우 1983년 제 36회 황금사자기. 세광고가 야구부 창설 29년 만에, 그리고 충북지역 고교 역사상 최초로 서울에서 열린 전국 야구대회 우승을 이루어냈던 그 역사의 중심에 서있던 것이 경남고와 벌인 결승전에서 완투승을 거둔 2학년생 송진우였다.

 

송진우 선수 은퇴에 누리꾼들도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다음 누리꾼 '차칸늑대'는 "한결같은 색깔을 내는 소나무나 난초처럼 꿋꿋하게 활동해온 점을 높이 평가하며 앞으로 지도자생활도 열심히 하시길 기원합니다. 송진우 아듀!!!"라고 했다.

 

송진우 선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차칸늑대'가 표현한 "한결같은 색깔을 내는 소나무"라는 비유에 동의할 것이다. 그는 교만하지 않았고, 야구를 사랑했으며, 무엇보다 선수들 권리를 귀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유명한 '회장님'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재벌의 회장님은 영광과 부를 상징하지만,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회장님은 영광과 돈이 아니라 자기 희생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송진우 선수를 존경하는 이유는 프로야구 선수로서 남긴 위대한 기록과 함께 동료 선수들을 위해 자기가 먼저 짐을 진 것 때문이다.

 

'eujin'는 "이글스 경기에 송진우 선수가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기립하여 회장님을 맞이하곤 했습니다. 등판만 해도 우리에게 힘을 주던 회장님!! 그 모습을 못 보게 된다니 너무 아쉽습니다. 깨지기 어려운 대단한 기록, 대단한 우리 회장님"라며 "대단한 지도자로 거듭나리라 믿습니다"고 했다.

 

지도자 수업을 받은 후 위대한 선수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다시 태어나 한국 프로야구 발전을 위해 힘쓰는 송진우 선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제 송진우 선수가 아니라 송진우 코치, 송진우 감독이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둘이고싶다'는 "당신은 진정한 야구인이라"며 "한국야구계의 산 증인으로서, 또한 사생활도 깔끔했던 사람으로 선후배 야구인 및 일반인들에게조차 참으로 존경 받는 야구인이었소, 앞으로 현역으로는 님을 보지는 못하겠지만 내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되어 있을 것이요"라고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송진우 선수에게 찬사를 보냈다.

 

우리 모두 같은 마음이다. 송진우 선수가 프로야구 선수로서 남긴 위대한 기록들, 그 기록은 다시 깨어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남긴 기록은 대한민국 프로야구에 길이 남을 역사이다. 이제 선수로서는 볼 수 없지만 운동복을 입고 야구장의 지휘관으로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회장님, 당신은 늘 푸른 소나무로 남을 역사입니다.

2009.08.16

 

  

 

 

떠나는 송진우, '회장님, 우리 회장님'

언젠가 한번은 찾아올 순간이라고 예상했지만 이별은 너무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영원한 '회장님' 송진우가 시즌중 갑작스러운 은퇴 선언으로 충격과 아쉬움을 전해줬다.

 

한화 구단은 지난 16일 "송진우가 2군에서 지속적인 훈련을 실시했지만 본인의 명성에 걸 맞는 피칭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가족, 구단과의 상의를 통해 은퇴를 결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송진우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그야말로 '전설'이라는 이름이 허용될 수 있는 몇 안되는 대투수였다. 1965년 2월 16일생, 우리 나이로 무려 45살인 송진우는 세광중·세광고-동국대를 거쳐 1989년 빙그레 유니폼을 입고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프로 생활로 따지면 21년, 야구를 처음 시작한 시기로 치면 무려 35년을 그라운드에서 보냈다. 현재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김광현·류현진같은 투수들은 나이차로는 아들뻘로, 그들이 아직 젖을 떼기도 전부터 송진우는 프로무대를 누비고 있었다.

 

송진우의 위대함을 단지 한두 마디 문장이나 기록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프로 데뷔 첫경기였던 1989년 4월 12일 대전 롯데와의 홈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화려한 첫발을 내딛은 송진우는 이후, 21년간 한국 프로야구의 투수부문 각종 기록을 모두 경신하여 살아있는 역사로 거듭났다.

 

송진우는 통산 671경기에 출장해 210승 103세이브를 올렸고, 총 3003이닝동안 마운드를 동안 2048개의 탈삼진과 3.51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했다. 최다승·이닝·탈삼진 등에서 모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한국야구 역대 최초·최고의 기록들로 남아있다. 200승· 100세이브를 동시에 달성한 것도 송진우가 유일하다.

 

주요 기록들을 연도별로 살펴보면 데뷔 4년차이던 1992년 19승 8패 17세이브를 거두면서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하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웠다. 2002년 4월 23일 청주 SK전에서 완투승으로 147승째를 거두며 선동열 감독이 세웠던 역대 최다승(146승) 기록을 경신했고,  2006년 8월 29일 광주 기아전에서 마침내 전인미답의 200승 고지를 돌파했다. 또한 2008년 6월 6일 대전 히어로즈전에서 2000탈삼진을 돌파한 뒤 통산 2048탈삼진을 달성했다. 2009년 4월 대전 두산전에선 개인 통산 3000이닝을 처음으로 넘어섰다.

 

투수부문 각종 최고령 기록도 송진우가 모두 독점하고 있다. 2008년 9월 13일 SK전에서 최고령 선발승(42세 6개월 28일)을 거뒀고, 2005년 9월 8일 SK전 (39세 6개월 23일)에서는 최고령 완봉승을 거두기도 했다. 2007년 5월 31일 롯데(42세 3개월 15일) 전에서 최고령 세이브, 2009년 4월 11일 롯데(43세 1개월 26일) 전에서는 최고령 홀드를 기록했다. 송진우는 자신의 마지막 1군 출전경기이던  2009년 4월 26일 잠실 두산 (43세 2개월 10일)에서 최고령 출전 기록을 통하여 대미를 장식했다.

 

송진우는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대표로서도 맹활약을 펼쳤다. 아마 시절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좌완에이스로 명성을 떨쳤던 송진우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한국이 동메달을 따는데 일등공신이었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이끌었다.

 

사실 송진우는 화려함이나 1인자의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선동열이나 최동원, 박철순같은 스타급 투수들처럼 한 시대를 평정했다고 하기에는 다소 부족했지만, 기복없는 꾸준함과 성실한 자기관리로 장수 투수의 모범을 보여줬다.

 

초창기보다 오히려 나이가 든 이후에 더욱 기량이 만개했다는 것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데뷔 초기 강속구를 앞세운 파워피처에 가까웠다면, 30대를 넘기며 정교한 제구력과 수싸움에 능한 기교파 투수로 성공적인 변신을 이뤄내며 마운드를 꾸준히 지배했다. 1997년과 1998년 각각 6승에 그치며 하향세가 우려되던 송진우는 1999년에  186와 2/3이닝을 소화하며 일약 15승 5패 6세이브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 야구인생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포스트시즌에서는 한화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감격까지 맛보며 최고의 하이라이트를 맞이했다.

 

또한 송진우는 뛰어난 개인성적뿐만 아니라, 야구 선수들의 권익 향상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로 프로야구 역사에 기억된다. 프로야구 선수들의 노동조합 성격인 선수협의회를 처음 구성하고 초대 회장까지 맡은 것이다. 굳이 그가 앞에 나서지않아도 스타 선수로서 높은 연봉과 안정된 대우가 보장된 그였지만,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후배들과 야구계의 발전을 위하여 기꺼이 총대를 짊어졌다.

 

초창기에는 당연히 엄청난 파문과 반발이 뒤따랐지만, 리더인 송진우의 차분하고 성실한 이미지는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큰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송진우에게는 '회장님'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녔고, 그라운드에서의 뛰어난 기량 못지않게 선수들을 아우르는 든든한 맏형의 이미지로 팬들에게 어필하게 되었다.

 

흐르는 세월조차 언제까지고 송진우의 야구를 향한 열정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이별의 순간은 결국 찾아왔다. 올 시즌 구위 저하가 두드러지며 13게임(7와 1/3이닝간) 1승 2홀드에 평균자책 7.36에 그쳤다. 2군에서 마지막 꿈을 불사르던 송진우는 결국 더 이상 선수생활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깨끗하게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아쉬운 것은 소속팀인 한화가 올시즌 창단 첫 꼴찌의 위기에 내몰리며 한창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가운데, 정상에서 팀 레전드와의 작별을 맞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이 송진우의 위대함을 가리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몹시 공교로운 타이밍에, 우리 시대에 다시 나오기 힘든 대투수의 은퇴식을 지켜봐야하는 야구팬(특히 한화팬)들의 마음은 여러모로 복잡할 수밖에 없다.

 

송진우는 단지 한 명의 야구 선수를 넘어,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살아있는 역사이자 아이콘이었다. 영원한 '회장님'은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지겠지만, 그가 남긴 불멸의 기록들과 마운드에서 보여준 눈부신 투혼들은 영원히 야구팬들의 가슴속에 남을 것이다. 송진우가 부디 지도자로서도 제 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개척하여, 장차 그 뒤를 이을 후계자들을 길러내주기를 기대한다.

200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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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아듀! 송진우…등번호 '21'이 남긴 대기록
[프레시안 스포츠] 프로야구 화제의 등번호

기사입력 2009-08-17 오후 5:48:33

 

어릴 적 주한미군방송(AFKN)으로 미국 프로야구를 보면서 한 가지 이상한 생각이 든 적이 있다. 왜 뉴욕 양키즈 선수의 유니폼 뒤엔 이름이 없지?

선수를 소개하는 영어 자막은 너무 빨리 지나갔고 가끔은 너무 답답했다. 선수의 이름을 알고 싶어서.

베이브 루스도 입었던 핀 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전통의 명문 양키즈 선수들을 파악하는 것은 이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씩 선수들의 면면이 익숙해진 뒤에는 좋은 점도 있었다. 어느 순간 등번호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는 작은 기쁨이 바로 그 것.

이처럼 야구 선수들에게 등번호는 또 다른 이름이다. 유니폼 뒤에 새겨진 등번호가 특별한 상징성을 갖는 것도 이런 이유다.

미국야구 향한 도전의 시작과 프로야구 성공 부른 박철순의 21번

82년 시작된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먼저 기억되는 등번호는 뭘까? 이견의 여지는 있지만 단일 시즌 22연승 신화와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의 원년우승을 견인한 박철순의 21번이다.

타격 시 반발력이 덜 한 너클볼(최근 들어서는 팜볼이었다는 견해가 우세)로 중무장한 역동적 투구의 박철순과 OB 유니폼은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인기상품이 됐다.

21번은 박철순이 한국 최초로 미국 프로야구에 진출할 때, 밀워키 브레이브스 마이너리그 팀이 달았던 번호이기도 하다. 그가 시작한 도전은 61번의 '코리언 특급' 박찬호에 의해 만개했다.

이 때문에 21번은 한국 야구의 미국 프로야구를 향한 도전의 시작이었으며 한국 프로야구의 성공을 부른 의미있는 등번호로 기억되고 있다. 두산은 2002년 박철순의 등번호 21번을 영구결번했다.

은근과 끈기 속에 대기록을 잉태한 송진우의 21번
 
▲ 송진우 선수. ⓒ뉴시스

16일 전격 은퇴를 선언한 한화 송진우의 21번도 프로야구계의 영원한 전설이다. 그는 기록의 사나이다. 한국 프로야구 통산 최다승(210승), 최다 이닝(3003 이닝), 최다 탈삼진(2048개) 기록은 모두 송진우의 것.

공교롭게도 그는 그의 등번호와 같은 21년 간 프로야구 마운드를 지켰다. 그는 홈 플레이트 좌우 폭을 가장 잘 활용할 줄 아는 제구력과 타자와의 수싸움에 능했다.

특히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체인지업은 그의 대기록 수립을 가능케 한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투수는 제5의 내야수'라는 격언에도 가장 잘 어울리는 수비형 투수이기도 했다. 2002년 그가 최초로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을 때, '아마 메이저리그 처럼 수비 실력으로만 골든글러브를 줬다면 그는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휩쓸었을 것이다'라는 게 야구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하지만 그의 최대 강점은 숱한 난관을 극복하며 21년 간 프로야구 정글에서 오롯이 살아 남았다는 것이다. 그가 프로에 들어 와 큰 부상 없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된 이유에는 김인식 감독의 역할도 있었다.

동국대 시절 김인식 감독(현 한화 이글스)은 부상 중인 송진우를 미련 없이 외야수로 전향시켰다. 투수로서의 먼 장래를 먼저 생각해서 내린 이 결정은 송진우가 불혹의 전설을 쓰는 데에 일조했다.

돌아온 27번의 역전 드라마

한국 야구역사에서 호남은 한 때 야구의 불모지로 통했다. 하지만 1972년 군산상고의 등장은 야구 판에서 영호남 라이벌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군산상고는 명문 부산고에 5-4의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그들에게 붙여진 별명은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의 야구 열풍은 전남의 광주일고 등으로 전파됐고, 호남 야구는 고교야구 관중 동원의 새로운 견인차 역할을 했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의 주축 선수는 훗날 프로야구 초대 홈런왕이 되는 김봉연.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등에 27번을 새기고 뛰었다.

그의 27번은 프로에 와서도 역전 드라마의 상징이 됐다. 1983년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무려 얼굴을 314 바늘이나 꿰매야 했던 충격적 사고였다. 하지만 그는 같은 해 한국 시리즈에서 콧 수염을 기르고 나와 최우수선수(MVP)상을 받았다. '야구명가' 해태의 첫 우승은 이렇게 찾아 왔다.

올 시즌 김봉연의 27번은 LG에서 친정 팀으로 되돌아 온 김상현에게 전달됐다. 변화구 대처능력에 자신감을 찾은 김상현은 폭발했다. 17일 현재 그는 타점 1위, 홈런 공동 1위를 달리고 있다.

열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꿈꾸는 타이거즈 팬들에게 그의 활약만큼이나 그의 등번호 27번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도 역시 김봉연과 같은 군산상고 출신이다. '야신' 김성근 감독도 "등번호가 같은 김봉연과 김상현의 모습이 겹친다"고 말했다. LG시절 2군에서는 펄펄 날았지만 1군 경기에서만 서면 작아졌던 김상현의 인생 역전 드라마는 지금부터다.

 

/이종성 객원기자

 


 
그 이름 '송.진.우', 이제는 '전설'로 서다
 

한화 이글스의 '영원한 회장님' 송진우(43)가 이제 한국 프로야구의 전설로 우뚝 섰다.
송진우는 2009.9.23일 한화의 대전 홈구장에서 열린 LG전에 선발 등판, 한 타자(박용근, 내야안타)만 상대하고 마운드를 류현진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은퇴경기를 치르고 21년간의 프로 생활에 작별을 고했다.

 

송진우는 은퇴 발표 기자회견을 하던 지난달 18일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고 자신에게도 만족한다. 은퇴는 새로운 시작으로 생각한다. 이제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서 선수 때만큼 열심히 해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송진우는 자신이 세운 갖가지 대기록 가운데 개인적으로 3천 이닝 투구 기록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 송진우는 "오랜 기간 동안 마운드에 서 있다보면 좋은 기록도 있고 나쁜 기록도 있겠지만 이닝을 많이 소화했다는 것은 그만큼 꾸준하게 마운드에서 공을 던졌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선배, 지도자에게 좋은 것을 많이 배웠다"며 그간의 선수 생활을 돌아봤다.

 

충북 증평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 올해로 선수생활만 34년을 맞았던 송진우는 올 시즌 들어 구속이 130㎞대 초반으로 떨어지고 더 이상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에는 무리라는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결국 은퇴의 길을 밟았다.

 

지난해 6월 6일 대전 히어로즈전에서 '2천 탈삼진'이란 새 이정표를 세우고 올 시즌 초반에는 역시 전인미답의 '3천 이닝 투구'라는 대기록을 세운 송진우, 그의 '전설 시대'를 돌아본다.

 

◆화려함을 넘어선 '끈기와 투지'의 야구

 

송진우는 청주 세광고 시절부터 뛰어난 좌완투수로 주목받았다. 고교 2년 때인 1982년에는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세광고에 우승컵을 안겼다. 이듬해인 1983년 고교 3년 때에는 부상을 입은 몸으로 대회 출전을 강행했다가 부상이 덧나 이후 동국대 3학년 때까지 제대로 선수생활을 하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한 강인한 정신력으로 부상을 이겨내고 1987년 대학 4학년 때 재기에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야구팬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송진우의 동국대 시절 은사이기도 한 한화의 사령탑 김인식 감독은 "(송)진우 공은 대학 시절에도 참 좋았다. 특히 대학 졸업 무렵에는 공이 정말 묵직했다"며 당시를 떠올리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8년 프로에 입단해야 했지만 당시 서울올림픽에 출전시키기 위한 대한야구협회의 지시로 인해 송진우는 한 해 늦게 프로에 입단했다.(당시에는 올림픽에 프로 선수가 출전할 수 없었다) 1989년 빙그레(한화의 전신)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송진우는 지금까지 한 번도 팀을 옮기지 않았다. 이른바 한화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인 것이다.

 

20대의 송진우는 대포알같은 강속구를 자랑했다. 1990년대 초반 빙그레 시절에는 직구 구속이 145km를 웃도는 좌완 정통파 투수로 맹활약했다. 송진우는 데뷔전을 완봉승으로 장식하며 화려하게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첫 해 9승10패, 9세이브, 평균자책 2.81을 기록하며 단번에 팀의 기둥투수로 떠올랐다. 다음해인 1990년에는 11승7패, 27세이브, 평균자책 1.82라는 빼어난 성적으로 본격적인 '송진우 시대'를 알렸다.

 

당시만 하더라도 국내 프로야구는 현재와 같은 선발투수-중간계투-마무리의 분업화 체계가 잡히지 않은 시절이다. 감독이 나가라면 어느 때고 마운드에 올라 공을 뿌렸던 시절이었다. 그 때문에 송진우는 프로 4년차였던 1992년에는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고 경기에 출전해 다승왕(19승)과 구원왕(25 세이브포인트)을 동시에 차지하는 좀처럼 나오기 힘든 진기록까지 갖고 있다.

 

이후 송진우는 잦은 등판의 후유증으로 인해 1996년 15승을 거둔 이후 1997, 1998년에는 각각 6승밖에 올리지 못하며 침체에 빠져 은퇴 얘기마저 나돌았다.

 

◆'전설'이라 불러도 좋다, 그 이름 '송.진.우'

 

1998년 시즌이 끝난 뒤 주변에서는 은퇴와 코치 권유도 있었으나 송진우는 "아직은 물러날 때가 아니다"라며 또 한 번의 도전 정신을 보였다. 송진우는 떨어진 구속을 타자 분석과 구질의 변화로 극복하며 다음해인 1999년 15승5패, 6세이브를 올리며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한 모습을 보였다. 이 때부터 송진우는 '강속구' 투수가 아닌 '기교파' 투수로 탈바꿈했다.

 

지난 2003년엔 시즌이 거의 끝나갈 무렵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팔꿈치 수술까지 받으며 선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의욕을 드러냈다. 프로 입단 때만 해도 역시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던 후배 임선동과 조성민 등이 부상을 입으며 기교파 투수로의 변신에 실패한 것에 비춰 보면, 송진우가 21년 동안 프로무대 마운드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재능보다 앞선 것이 철저한 노력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야구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송진우와 선수 시절부터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던 이상군 한화 투수코치는 "송진우 선수는 몸관리를 잘 해 선수 생활을 오래 할 수 있었던 데다 승부근성이 있어서 대기록도 계속 수립할 수 있었다. 목표 의식을 확실하게 갖고 이를 추진해갔던 송진우의 노력을 후배 선수들도 많이 배웠으면 한다"며 선수 유니폼을 벗게 된 송진우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시대를 풍미했던 그의 피칭 모습을 이제 마운드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지만, 2009년 9월 23일 '송진우'라는 이름은 한국 프로야구사에 '전설'로 영원히 새겨지게 됐다.

 

/문현구기자 brando@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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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3이닝·210승 신화속으로 “굿바이∼ 레전드”
 

21년 동안 4만9015개 투구, 1만2708 타자 마지막 승부

 

21번 유니폼을 입고 21년간 그라운드를 누볐던 '송골매' 송진우(43). 그가 마침내 전설을 던진 뒤 마운드를 내려왔다. 한화의 심장, 이글스의 혼이었던 송진우는 23일 대전 LG전에 선발등판해 은퇴경기를 치렀다. 그리고 5회가 끝난 뒤 성대한 은퇴식을 치렀다.

 

 

 

 

전설의 마지막 투구

송진우는 당초 1이닝 범위에서 투구할 계획이었지만 그동안 몸을 만드는 과정에서 1이닝 투구는 무리라는 판단에 따라 김인식 감독과 상의해 1타자 상대로 바꿨다. 역사적인 마지막 타자는 LG 1번타자 박용근. 초구 직구, 2구 슬라이더가 연속 스트라이크 존에 꽂혔다. 칼날 같은 제구력은 여전했다. 그리고 3구째 시속 122km짜리 가운데 낮은 체인지업. 박용근의 타구는 투수 정면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송진우의 글러브를 맞고 굴절 돼 유격수 앞쪽으로 굴러가는 내야안타. '가장 수비 잘 하는 투수'라는 평가를 듣던 그였지만 마지막 순간에 실수했다. 그도 웃고, 팬들도 웃었다. 박용근은 "타석에 들어서면서 내야땅볼로 아웃될 생각이었다. 못 잡으셔서 내가 당황했다"며 웃었다.

 

○ 신화를 남기고….

 

박용근은 그가 상대한 1만2708번째 타자였다. 그리고 이날까지 4만9015개의 공을 뿌렸다. 1989년 프로 데뷔전(89년 4월 5일 대전 롯데전) 완봉승을 기록한 뒤 통산 672경기에 등판해 210승 153패 103세이브 17홀드 방어율 3.51을 기록했다. 최다이닝(3003), 최다탈삼진(2048), 최다피안타(2718), 최다피홈런(272), 최다4사구(1272), 최다실점(1341)…. 그는 프로야구의 불멸의 신화를 썼다. 2000년 5월 18일 광주 KIA전에서는 노히트노런, 1992년 사상 최초 시즌 다승왕(19)과 구원왕(8구원승·17세이브)에 오르는 역사를 쓰기도 했다.

 

○송골매의 마지막 가는 길 대전 매진

 

전설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이날 대전구장은 경기 전부터 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특히 이날은 평일인데다 한화의 순위가 8위로 굳어진 상황이어서 매진사례는 이례적이다. 시즌 11번째 매진. 또한 김영덕 감독을 비롯해, 강병철, 이희수, 이광환, 유승안 전 감독이 바쁜 시간을 쪼개 자리를 빛냈다. 한화 김인식 감독까지 송진우가 활약한 21년간 전현직 빙그레 한화 감독 6명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진기한 장면이 연출됐다.

 

○굿바이 레전드

 

팬들은 은퇴식 내내 'LEGEND 21'이 새겨진 수건을 들고 "송진우! 송진우!"를 목놓아 외쳤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는 울지 않았다. 송진우는 자신이 던졌던 마지막공 체인지업처럼 이제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 멋진 인생의 체인지업에 도전한다. 그는 은퇴사에서 "여러분 그동안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팬들은 그대가 있어서 즐거웠고, 그대로 인해 행복했다. "고마워요 송골매, 굿바이 레전드!"

 

대전|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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