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격투기 보면서 숙연한 눈물 쏟다
비주류 사내들의 투혼 가득했던 '히어로즈 2007 서울'
'강함'의 상징인 무술은 역설적이게도 흔히 무장 해제된 이들의 것이었다. 나라로도 집안으로도 인맥이나 돈으로도 보호를 받을 길 없는 맨몸의 사내들에게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은 세상과 직접 맞선 맨살의 본능적 각성이었고, 맨손으로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란 오로지 무술을 익히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들은 애초에 자신을 괴롭혔던 세상의 힘이란 도장에서 길러 맞설 수 있는 정당하고 투명한 땀의 논리에서 저만큼 떨어진 비열한 협잡들이었음을 깨달아야 했으리라. 그래서 누군가는 겨눌 수 없는 마음 속 분노를 찾아 떠돌기도 하고, 허공으로 빈 주먹을 휘둘러야 하기도 했으리라.
하나같이 궁상맞고 한심한 맨몸의 사내들
한 겹 보호막도 없이 맨몸으로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칼질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던 이 땅의 사내들도 곧잘 세상과 맞서기 위해 무도가의 길을 걷곤 했다.
본토 사무라이들에게 칼을 빼앗긴 오키나와의 무사들이 맨손으로 수련해 만들었다는 가라데를 더욱 격렬한 실전용으로 발전시키고 강자를 찾아 전세계를 떠돌아 헤맸던 극진가라데의 창시자 최배달이 그랬고, 살기 위해 몸담았던 일본 스모계에서 버림받고 프로레슬링의 대부가 된 역도산이 그랬다.
민족차별과 가난에 맞서 맨주먹을 휘둘러댔던 두 사람은 일본 무도계에서 각기 일가를 이루게 되고, 최배달의 제자들이 발전시킨 실전 가라데는 'K-1'을, 역도산의 제자들이 이어나간 프로레슬링은 '링스', '프라이드' 그리고 '히어로즈'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 한 쪽은 입식타격계를, 다른 한 쪽은 종합격투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이벤트기도 하다.
지난 28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는 'K-1 히어로즈 2007 서울'이 열렸다. 프라이드FC가 해체된 지금, 미국의 UFC와 더불어 세계 종합격투기의 한 축으로 자리잡은 '히어로즈'가 한국시장 진출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한 이벤트였다.
그래서이겠지만, 그 대회에는 아직 격투기 후진국으로 분류되는 한국 출신의 격투가들이 유난히 많이 등장했다. 그 중에 그들이 있었다. 김태영과 추성훈, 데니스 강과 윤동식.
[김태영] 일본 정도관 가라데의 전설 '긴타이에이'
90년대 중후반 PC통신의 무술동호회 게시판에 어느 재일교포 청년에 관한 소문이 가끔 흘러들곤 했다. 최배달이 만든 극진 가라데의 한 분파가 마치 만화 <드래곤볼>에 나오는 '천하제일 무술대회' 같은 무술대회를 여는데, 그 대회의 일본 에이스가 바로 김태영, 그 석 자를 그대로 일본식으로 읽어 '긴타이에이'라고 불리는 재일교포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은퇴설까지 나돌고 있는 노회한 K-1의 일본인 에이스 무사시가 아직 2년차에 불과했던 96년 9월에 열린, K-1 리벤지 96 대회.
▲ 불의의 일격에 경기를 포기해야 했던 김태영.
최배달도 그랬듯이, 태국의 무에타이와 길고 오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실전가라데가들은 그 대회에 몇 명의 태국인 무에타이 선수들을 불러 대결구도를 만들었고, 그 하나의 대항마로 출전한 것이 '긴타이에이' 김태영이었다.
상대는 한 해 전 태국에서 열린 대규모 흥행무대에서 패배를 안겼던 '완롭'이라는 선수였고, 복수전으로 벼르고 나선 그 날의 경기는 WTMC(현 WMC, World Muaythai Council 세계 무에타이 협의회)의 주니어미들급 타이틀전을 겸하고 있었다.
무에타이 타이틀이 걸린 무대여서 그랬던지, 가라데가인 김태영은 '몽콘(낙무아이-무에타이 선수-들이 머리에 쓰는 원형의 띠)'을 쓰고 '와이크루'(낙무아이들이 경기 전에 스승과 부모에게 감사를 표하는 춤을 추는 의식)를 하며 등장했다.
그리고 시작된 경기에서 그는 무에타이도 아니고 가라데도 아닌, 어쩌면 강해지기 위해 자신이 섭렵했던 무술들의 스탠스와 스텝을 수시로 바꾸어 사용해가며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렸다.
때때로 공격의 타이밍을 잡는 듯했던 완롭은 순식간에 바뀌는 김태영의 스텐스와 리듬에 말려 수십 번이나 주춤거려야 했고, 경기가 기울어감을 느낄 무렵에서야 이내 '낙무아이의 칼'이라는 팔꿈치를 휘두르며 우직하게 돌진해봤지만 노련한 김태영의 스텝을 뚫지 못하고 좌초해버렸던 것이다.
은퇴 6년 만에 고국의 무대... 그러나 아쉬운 퇴장
그 시절 동호회에서 그런 토론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이미 최배달로부터 이어온 실전가라데를 버리고 무에타이로 전향한 사람이 아니겠느냐는 의견, 그리고 주어진 상황에 맞게 새로운 기술을 응용해 가장 강한 실전무술을 익히는 최배달의 뜻에 가장 충실한 무도가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
지난 주말, 은퇴한 지 6년 만에 복귀한 그가 고국의 무대에 섰다. 긴 공백에도 불구하고 지난 8월, K-1 홍콩대회에서 그 대회 우승자 후지모토 유스케를 녹아웃 시키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였던 그였다. 관중들은 최홍만의 스승이라는 것 외에 그의 살아온 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지만, 그는 감회가 깊은 듯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경기는 아쉬움이 많았다. 경기가 시작되고 30여 초가 지났을 무렵, 아직 긴장을 채 풀지도 않은 채 가벼운 탐색을 나누던 상대의 킥이 눈가를 스쳐갔고, 경기 종료를 알리는 공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닥터 스탑. 미처 무도가의 몸이 장신의 상대 갈레시치의 팔과 다리 길이를 정확히 가늠하기 전에 발생한 한 치의 실수가 '두개골이 보일 정도의' 깊은 상처를 내버린 것이다.
아쉬운 퇴장. 못내 아쉬워하는 얼굴. 애써 웃음 지으려고 했지만, 퇴장하는 길이 조금 더 길었다면 눈물을 참지 못했을지도 몰랐을 깊은 그림자가 그의 어깨 뒤로 드리워졌다.
그 순간 노련한 무도가를 한 치 무뎌지게 했던 것은, 언제나 마음 속 깊은 어딘가에만 다져두고 왔던, 그래서 아마도 특이한 이름 때문에 조롱을 받을 때나 한 번씩 끌어올려져 어금니 뒤쪽에서 씹혀 넘어갔을 그 이름 '한국'에서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여린 마음이 아니었을까.
[윤동식] 죽도록 두들겨맞으며 밑바닥을 치고 올라온 비운의 유도왕
다음 경기는 '비운의 유도왕' 윤동식과 슈트박스의 신예 '파비우 실바'의 대결.
그는 이미 3년 전, 프라이드 미들급 그랑프리 1회전에서 일본의 격투영웅 사쿠라바에게 38초 만에 비참하게 무너지며 악플러들의 먹이가 된 바 있었다.
그 경기, 인생에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수만 관중의 눈 앞에서 여유만만하게 유치원생 분장을 하고 입장하는 사쿠라바에게 쏟아지는 아찔한 환호와 반대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폭포같은 야유를 들으며 그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넋이 나간 얼굴로, 그야말로 금방 울음을 터뜨리기라도 할 듯 충혈된 신경은 경기 시작을 알리는 공소리와 함께 폭발했고, 아마도 고요하게 흘러간 진공상태 속에서 그는 경기 종료를 알리는 공소리도 듣지 못한 채 퇴장해야 했을 것이다.
그 뒤로 무섭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버거운 상대들만 만나며 3연패. 그의 비운은 조금 더 길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히어로즈로 이적해 처음 맞선 동급 최강의 스트라이커 맬빈 마누프전은 그의 격투인생 맨 밑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그 경기 1회전 내내 '죽도록' 두들겨 맞으며 실명을 걱정하게 할 만큼 부어오른 눈으로, 그는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암바로 연결했고, 프라이드 데뷔전의 그를 기억하며 그 퇴장의 뒷모습에 함께 씁쓸해했던 모든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의 웃음이 판타지인 까닭
그에게 파비우 실바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주무기인 타격은 앞서 승리했던 마누프나 갈레시치를 따라갈 수 없지만, 그 둘과는 달리 브라질 유술 고수인 그는 그라운드에서 호락호락할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랬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테이크 다운에 이어 '마운트' 자세까지 뺏어낸 윤동식을, 실바는 어렵지 않게 튕겨냈다. 몇 번이고 마운트를 뺏어내는 윤동식의 그라운드 능력이 뺏기는 자보다 물론 단연 우위였지만, 매번 큰 어려움 없이 불리한 자세를 뒤집는 실바는 관중들을 긴장하게 했다. 이전 두 경기에서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승리로 이어냈던 윤동식이었고, 그라운드에서 끝을 내지 못한다면 달리 방법이 없을 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도 안되는 강적'이라던 퀸튼 잭슨의 슬램 공격을 다리를 붙잡으며 재치있게 무마했던 윤동식. 어쩌면 그의 특기는 하나의 길을 고집하지 않고 갈대처럼 흔들려주는 유연함,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 집념인지도 모른다. 숱한 패배와 비웃음, 손가락질 속에 거칠게 벼려온 그 집념.
경기 시작 후 6분. 지루해 보이던 그라운드 공방 속에서도 수시로 팔과 다리의 위치를 바꾸며 팔꿈치와 목을 노리던 그의 팔이 실바의 엉덩이를 '치워내듯' 굴려낸 자리에서 다리는 비수처럼 실바의 가슴을 가로질렀고, 두 주먹은 실바의 팔뚝을 잡아제쳤다. 곧장 윤동식의 다리를 두들기며 항복하는 실바.
어쩌면, 그것은 프라이드에서 한국인 첫 승을 거두었던 최무배가 '수플렉스가 아니면 이겨도 의미가 없다'는 듯 상대 선수의 허리 뒤에 집착했듯, '비운의 유도왕'이라는 꼬리표를 '감동의 암바왕'으로 바꿔달기 위해 고집스레 만들어낸 장면이 아니었을까.
윤동식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처럼, 비뚤어진 세상의 학대를 받고 살아가는, 그러면서 모든 게 제 못난 탓인 듯 스스로를 손가락질하며 살아가는 길거리의 장삼이사들에게 그것은 정말이지 짜릿한 판타지며, 위로이기 때문이다.
[데니스 강과 추성훈] 파란 눈의 '슈퍼코리안' vs 버림받은 '콘데코마'
지난 2004년 2월, 스피릿 MC 2회 대회 인터리그에 나타난 데니스 강은 한국 격투기 붐의 출발점이었다.
최강급은 아니었지만, 외국의 어느 격투기 잡지가 웰터급 세계랭킹 10위권에 이름을 올린 적도 있는 그가 격투기의 불모지인 한국, 그것도 신인들의 등용문인 '인터리그' 토너먼트에 참가했던 것이다.
그는 한국인과 프랑스인 사이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자라왔다고 했고, 한국에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는 김재영과 김형준을 맞아 단 한번,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챔피언 벨트를 따냈다. 상대 선수들은 '두려웠다, 세상에 이런 주먹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입을 모았다.
캐나다 국적의 그는 한국을 대표해 K-1 무대에 섰고, 다시 프라이드로 진출해 이름을 알려나갔다. 한국을 통해 얻어진 기회에서 보여준 그의 기량은 한국인들이 기대했던 것보다도 대단한 것이었고, 그의 주먹 한 방에 꿈 같은 세계 최강자들이 나가 떨어졌다.
지난 해에는 경기중 입은 부상을 무릅쓰고 프라이드 웰터급 준우승에 올랐고, 그가 자신을 표현한 '슈퍼코리안'은 데니스 강이라는 한 명의 격투가를 가리키는 것을 넘어 한국인 격투가 모두를 표현하는 일반명사로 자리잡기도 했다. 한국인의 유전자를 가진 이들 중, 그가 최강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한국과의 인연이라면 추성훈이 그보다도 더 길고, 질기다. '자이니치'라는 이유로 채 펼치지 못했던 유도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그는 98년 한국 땅으로 건너와 태극마크에 도전했다.
다듬지 않은 장발, 경기가 시작되면 감정은 사라져버린 듯 텅 비어버리는 눈동자, 빠르고 거친 몸놀림. 마치 어느 열정적인 그림꾼이 그려놓은 야수 같은 그는 그 시절에도 최강자였다. 그를 압도한 유도가는 한국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윤동식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던 태극마크가,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너온 그에게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판정시비. 항의. 징계.
분노와 좌절, 눈물과 포효. 그는 결국 발길을 되돌렸고, 2대에 걸쳐 버텨왔던 '귀화' 서류를 채워 넣게 된다. 추성훈(秋成勳)이 아닌 아키야마 요시히로(秋山成勳). 그렇게 돌아갔던 그가 이듬해 부산 아시안게임에 일장기를 달고 돌아와 금메달을 거두어 갔고, 속 좁은 조국의 일등 신문이 '조국을 메쳤다'는 철없는 선동이나 하고 다녔음은 주지의 사연이다.
일찍이 30승을 올린 프로야구의 재일교포 괴물투수 장명부가 말했다. '나의 고향은 현해탄'이라고.
유도복을 벗고, 격투가로서 신생 격투단체 히어로즈의 간판으로 커나갔던 그였지만, 일본인들의 '판타지 스타' 사쿠라바 카즈시를 묵사발 낸 불경죄까지 용서받을 수는 없었다. 비록 경기 전 금지된 크림을 바르기는 했지만 고의성이 없었음이 확인되었고 지나칠 정도로 공손한 사과를 거듭했음에도 1년 가까이 경기 출전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외국 국적의 한국 핏줄... 두 사람은 모두 '강자'
그의 복귀 무대는 서울이었고, 상대는 데니스 강이었다. 외국 국적의 한국 핏줄. 강자. 이적 후 데뷔전과 징계 뒤 복귀전. 흥미롭지만 즐거이 보기 어려울, 기묘한 대결. 그 경기 직전 추성훈은 자신이 이길 확률이 35%라고 했다. 사람들의 예상도 그 정도, 혹은 그 이하였다.
경기가 시작되고, 확실히 긴장한 것은 추성훈이었다. 데니스 강은 경기를 그리 길게 가져갈 뜻이 없는 듯 거칠게 몰아붙였고, 추성훈은 뒷발에 더 무게를 실으며 링 주변을 돌았다. 이따금 주먹이 섞였지만, 격렬하게 부딪히지는 못했다. 그러나 추성훈은 정확히 겨냥하지 못하고 흘러나가는 데니스 강의 팔뚝에 맞고도 쓸려 휘청거렸고, 분명 기세는 데니스 강 쪽으로 흘렀다. 4분여 동안은 그랬다.
데니스 강이 강하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강자에게 최강의 적은 자신의 강함 자체이고, 그것이 약자의 집념과 맞물릴 때 일어나는 이변은 승부의 세계에서 그리 드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애초에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란, 그저 편의적인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상대의 신중한 방어막에 막혀 잠시 숨을 고르던 데니스강의 가드 사이로 추성훈의 주먹이 날카롭게 파고들었고, 당황해 반의 반 박자 쯤 느리게 요동친 데니스 강의 머리는 치명상은 피했지만 콧잔등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붉은 피가 흘러내려 맺히고,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당황한 기색을 노출하고 만 데니스 강.
전세는 역전되어 데니스 강이 뒷걸음과 옆걸음을 반복했고, 그가 물러난 링의 중앙은 추성훈이 장악해갔다. 무슨 일인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데니스 강. 그리고 성급한 펀치 러쉬는 없었지만, 십여 년 전 유도 매트 위에서와 꼭 같이 텅 비어있는 눈빛으로 압박해가는 추성훈. 이미 경기는 거기에서 끝이 나고 있었다.
일분 여 뒤, 한 발의 짧지만 뜨거운 주먹 한 방이 작렬하고, 데니스 강의 마우스피스가 공중으로 날았다. 주저앉은 그의 왼 뺨에 작렬하는 또 한 방의 확인사살. 처연하게 풀려버린 데니스 강의 눈동자. 그 날 메인 이벤트의 주인 추성훈은 오른쪽 어깨의 태극기와 왼쪽 어깨의 일장기를 두드리며 '대한민국 최고'를 외쳤다. 새로운 '슈퍼코리안'의 등극이었다.
[마에다 아키라] '고일명'이라는 이름 가슴에 새긴 왕년 격투왕
창씨를 거부한 '자이니치' 가라데가, 비운의 유도왕, '혼혈 파이터' 그리고 '조국을 메친' 일본 금메달리스트. 하나같이 궁상맞은 별명들. 못난 내력, 한심한 비주류들.
하나가 더 있었다.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승리의 축하와 패배의 위로를 던졌던 그날 이벤트의 슈퍼바이저, 마에다 아키라. 대선배 이노키의 '쇼'에 반항해 '실전'을 지향했던 왕년의 격투왕, 그 역시 '고일명'이라는 이름을 따로 간직하고 있는 재일교포였다.
매번 조그만 성공과 커다란 실패, 어느 정도의 영예와 더 큰 오명을 안았던 그. 전설적인 레슬러 알렉산더 카렐린과 대결했고, 실전 프로레슬링 UWF 그리고 효도르와 노게이라를 발굴해낸 선구적 종합격투기 단체 링스를 이끌며 다카다 노부히코와 사쿠라바를 비롯한 수많은 후배들을 키워냈고, 자기 선수들을 빼갔던 경쟁단체 프라이드의 몰락에 '사필귀정'이라는 악담을 아끼지 않았던 그의 얼굴도 그 날의 살벌한 풍경 저 편에 원경으로 새겨졌다.
버림받은 사내들의 투혼 시리즈. 그래서 승리의 그 짜릿한 순간에조차 눈물 훔치며 숙연하기만 한 못난 이들. 대선배 켄 샴록을 꺾자마자 무덤을 파서 그를 묻는 세리머니를 했던 티토 오티즈처럼 제 멋대로 기분을 내기는커녕, 그제야 무슨 긴 재판 끝에 무죄판결이라도 받은 죄수처럼 감격하는 촌스러운 것들.
▲ 추성훈과 마에다 아키라 메인이벤트의 승자 추성훈과 대회 슈퍼바이저 마에다 아키라 (한국명 고일명)
TV로 그 경기를 보는 내내 방안에는 나 혼자였다. 다행이었다. 어쩔 뻔 했는가. 멜로영화도 아니고, 선혈 낭자한 격투기를 보며 혼자 휴지 한 뭉치 눈물로 적셔 쌓아놓는, 그 '변태같은' 모양을 들켰으면 말이다.
2007.10.31 ~ 김은식 (punctu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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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배달-역도산 '日열도 뒤흔든 최강 사내는?'
지금이야 미국의 UFC가 격투스포츠의 메이저리그로 불리지만, 종합격투기와 입식격투기의 구분이 애매하던 몇 년 전, 이종격투기로 불릴 때만 해도 세계 격투기의 중심은 일본에 있었다. 일본은 프라이드와 K-1, 종합격투기와 입식격투기의 거대한 양대단체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로 세계 격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UFC의 경우 브라질에서 탄생한 발레투도(무규칙 격투기)가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처음에는 말 그대로 규칙이 거의 없는 싸움을 방불케 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미국의 정서가 많이 녹아든 형태로 변모한 것을 알 수 있다. 격투스포츠가 크게 대중화된 레슬링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경우 격투기가 자리 잡은 배경이 미국과 다르다. 프로레슬링의 성공적인 흥행이 기반이 되어 종합격투기 붐이 일었고, 입식격투기는 일본을 대표하는 무술인 가라데가 기반이 됐다. 즉 일본종합격투기의 뿌리는 프로레슬링이고, 입식격투기의 뿌리는 가라데인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 격투기의 원류를 따라가 보면 한민족의 사내가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최배달(본명 최영의)과 역도산(본명 김신락)이다. 둘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격투계와 프로레슬링계를 휩쓴 인물로 여전히 시대를 뛰어 넘었던 최강의 사나이로 회자된다. 즉 둘을 일본 격투기의 뿌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대에 일본에서 활동하며 한민족의 기개를 드높인 두 사나이의 과거를 되짚어본다.
황소 때려눕힌 사나이 '세계를 제패하다'
1923년 태어난 최영의는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여러 무술을 섭렵했다. 택견이나 씨름 같은 전통무예를 시작으로 부유한 부모의 적극적인 지원에 심지어 차비, 소림무술 등의 타국 무술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1939년 16세의 나이로 일본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꿨던 가라데(공수도)를 접했다. '배달의 민족'이라는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그때부터 최배달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가라데에 흠뻑 빠지며 끊임없이 단련하던 소년 최배달은 1946넌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좋은 무사가 되기 위한 지침서)를 읽고 외롭고 고독한 길을 택한다. 무도인으로 살겠다는 일념 하에 입산수련을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1개월 뒤 미노부산에 올라가 본격적으로 무도를 연마했다.
당시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계곡에서 목욕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이후 오두막까지 달려와 바벨을 드는 등 몸만들기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그리고 식사와 독서를 한 뒤 오후부터 본격적인 공수도 단련을 시작했다.
나무줄기에 덩굴을 감고 정권, 수도, 관수(貫手), 발차기 등 모든 기술을 연마했고 1년 반 동안 오두막 주변의 나무들은 거의 다 말라버렸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여름이든 겨울이든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나무를 주먹으로 쳐대며 수련했기 때문이다. 맨손으로 부순 돌조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쌓여갔다.
또한 밤에는 원을 그린 종이를 벽에 붙이고 정신을 통일했다. 한 명의 말상대조차 없는 산 속에서 겪는 고독감은 상상을 초월했으나 짐승의 울음소리로 외로운 마음을 달랬고, 먹이를 주며 여우와 친해지기도 했다.
산에서 내려온 그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열린 전일본가라데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무도가로서의 첫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정통 가라데는 실제 타격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전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직접 타격을 가하는 극진가라데를 창시했다.
산에서 내려온 지 2년이 지난 후 24세의 최배달은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각 공수도장의 수장들에게 대결을 신청했다. 이른바 '도장깨기'의 시작이었다. 그때 그는 일본 가라데의 10대 문파를 대표하는 고수들을 모조리 쓰러트리며 무적의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배달은 치바의 다테산에서 20개월간의 입산수행을 또 다시 겪고 내려왔다. 처음 경험했던 입산수련을 통해 확실히 강해질 수 있었던 최배달은 두 번째 입산수련을 통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일본 내의 가라데 고수와 맞붙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고민 끝에 최배달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고른 상대는 '황소'였다. 일본 치바의 타헤야마 도살장을 찾아간 그는 대뜸 주인에게 "소를 죽이게 해주십시오. 제 주먹이 소를 죽일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습니다"라고 부탁했다.
최배달이 상대한 소는 총 47마리였고, 그 중 4마리는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한다. 물론 거칠게 날뛰는 황소 때문에 최배달 역시 큰 상처를 여러 번 입어야 했고 황소가 다리를 깔고 앉는 바람에 노후시절 무릎에 큰 후유증을 겪어야만 했다.
더 이상 최배달은 단순한 가라데카가 아니었다. 실전 최강의 파이터로 거듭난 것이다. 그때(1951년)부터 최배달은 종목을 가리지 않고 유도, 검도 등의 다양한 고수들과 결투를 벌였고 이후에는 세계를 누비며 복싱, 무에타이, 레슬링 등 각 격투종목의 강자들을 상대로 무패행진을 이어갔다.
맨손으로 황소를 때려잡고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고수들을 모조리 꺾고 다니는 것이 알려지며 최배달은 유명세를 타게 되고, 1958년 미국 FBI와 미육군사관학교로부터 극진가라데를 지도해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최배달이 꺾었던 대표적인 인물은 실전공수의 원조 사카하라, 면도날 가미소리 모리, 나고야의 닌자 미와노부오, 미국 레슬링 챔피언 레드 아이, 하와이의 붉은 전갈 톰 라이스, 태국 무에타이 챔피언 블랙 코브라 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세계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최배달은 도쿄에 '대산도장'이라는 이름의 공수도장을 설립하고 처음으로 제자를 양성하기 시작한다. 낭심 공격, 급소 가격이 모두 허용된 실전공수도였다. 70%의 무도인들이 일주일을 견뎌내기 힘들 정도로 고된 과정이었지만 남는 이들은 있었다.
최배달은 1964년 도장의 이름을 '극진회관'으로 바꾸었고, 1969년에는 처음으로 타종목 선수들의 출전을 허용한 전일본선수권을 개최했으며 1975년에는 세계대회가 열렸다. 현재는 세계 16개국 72개의 지부가 활동 중에 있다.
스모에 도전한 소년장사, 일본의 영웅되다
김신락은 1924년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의 집안은 타고난 장사 집안이었다고 전해진다. 김신락 뿐만 아니라 두 명의 형 역시 또래 아이들에 비해 체격이 크고 근력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의 부친은 약초를 캐 아들들에게 자주 먹였다고 한다.
14세 시절 김신락은 전국소년씨름대회에서 우승하며 운동에 두각을 나타냈고, 1938년에는 16세의 나이에 성인 씨름대회에 참가해 3위에 오르며 주변을 놀라게 했다. 말 그대로 소년 장사였다.
어린 나이에 보인 재능은 역도산의 인생을 바꿨다. 김신락의 활약을 지켜보던 일본인 형사가 일본에서 스모 선수로 활동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 것이다. 김신락은 일본에서 스모 선수로 활동하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나 두 형의 징용 면제와 국내에서 꿈꾸기 어려운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현해탄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그의 부모는 스모 진출을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아들의 일본행을 막기 위해 급히 결혼을 시키지만 김신락은 신혼 첫날 밤 도주해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다른 이유는 없었고, 자신이 성공하면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형사의 소개로 스모단에 입단했으며 이듬해부터 역도산이란 예명을 사용했다.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한다는 것은 예상보다 힘들었다. 훈련보다는 잡다한 뒷일이 우선이었고, 민족차별은 물론 인간적인 모욕에도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요코즈나가 되겠다는 목표 하나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상상 이상의 훈련을 소화하면서 실력은 빠르게 향상됐다.
피나는 노력 끝에 그는 마침내 스모의 3등급인 세키와케에 오른다. 이런 상승세라면 요코즈나 등극은 시간문제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스모계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역도산의 2등급 입성을 방해하는 등 가만 두지 않았다.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에 그는 한동안 술로 마음을 달래고 싸움까지 일삼았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1950년 역도산은 스모마케(상투머리)를 과감히 잘라버렸다. 스모계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때부터는 살기 위한 투쟁이었다. 한국인으로는 핍박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는 일본인 형사의 양아들로 호적을 올려 일본인으로 위장하는 선택을 했다.
1951년 일본의 한 클럽에서 역도산은 인생이 또 한 번 바뀌는 계기를 맞는다. 미국 프로레슬러와 주먹다짐을 하게 됐는데, 힘에서는 그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역도산이지만 프로레슬러에게 맥없이 패하고 만다. 하지만 그 과정을 겪으며 프로레슬링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다음날 상대했던 미국인을 찾아가 가르쳐달라고 애원한다. 그리고 미국으로 1년간의 프로레슬링 유학을 떠난다. 11년 전 스모 선수로 성공하겠다고 일본에 왔던 그가 비슷한 선택을 한 것이다.
이후 그는 선수이자 프로모터로 해외 선수들을 불러들여 일본에서 경기를 펼쳤고, 승승장구하며 주가는 점점 올라갔다. 특히 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미국에 대한 열등감이 강했던 일본인 만큼 역도산이 거구의 미국 선수들을 물리칠 때마다 일본 열도는 들썩였다. 결국 역도산의 활약으로 프로레슬링은 TV에 생중계됐고, 역도산이 출전하는 경기는 시청률 50%가 넘는 게 다반사였다. 당시의 역도산은 일왕 다음으로 인기가 높았다고 회자된다.
역도산은 프로레슬링을 뒤늦게 시작했으나 타고난 힘과 체력, 특유의 가라데촙을 내세워 WWA, NWA, AWA, 월드리그 등의 타이틀을 보유한 당대 최고의 선수에 올랐다. 유명세를 타며 재벌이 된 그는 경기장 설립도 하는 등 프로레슬링 저변확대에 앞장섰다.
하지만 역도산의 말미는 결코 좋지 못했다. 역도산이 일본에서 영웅으로 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겼기에 가능했다. 심지어 자녀에게조차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즉 그는 '성공을 위해선 무엇이든 한다'는 인생관을 갖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비열한 모습도 많이 보였다고 한다. 주변의 비판을 아랑곳하지 않았고, 자신의 위치를 넘보는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복수하는 모습도 보였다.
프로레슬링은 정해진 각본 안에서 진행되는 경기이기에 그 각본을 짤 수 있는 힘만 있으면 얼마든지 영웅이 될 수 있다. 즉 각본을 짜는 이의 의도에 따라 희비가 크게 갈린다. 이에 역도산은 각본을 어기고 상대를 무참히 짓밟는 등의 룰을 어기기도 했다.
특히 1954년 열린 기무라 마사히코와의 경기(3차전)는 국내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경기 중 기무라가 실수로 급소를 차는 반칙을 저지르자 역도산이 곧바로 실전에 돌입했고,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은 끝에 기무라는 실신하고 말았다.
부와 명예를 가졌지만 불안한 현실에 안정된 삶을 영위하지 못하던 그는 1963년 일본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야쿠자의 칼에 찔려 수술을 받았으며, 결국 열흘간 힘겹게 버티다 복막염 진단을 받고 4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안타까운 점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겼던 그가 조국으로 눈을 돌리려는 순간 죽음을 맞았다는 것이다. 역도산은 1964년 도쿄올림픽의 남북 공동참가를 추진했으며 북한의 참가비용까지 직접 지불하겠다고 나섰다. 또한 운명하던 해 조국을 방문했을 때는 경기장을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최배달-역도산, 시대를 때려눕힌 영웅들
기무라 마사히코가 링에서 역도산에게 무참히 맞으며 실신할 당시 기무라의 코너에는 최배달이 있었다. 최배달은 유도를 배우기도 했으며, 13년간 일본유도선수권에서 우승했던 유도 영웅 기무라를 극진히 대우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만 해도 프로레슬링이 각본에 의해 펼쳐지는 경기라는 것을 일본 팬들은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무라의 코너에 있던 최배달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기무라가 쓰러지자 곧바로 링으로 올라가 기무라의 상태를 확인했다.
최배달은 역도산의 그 모습을 보고 비신사적인 행위라고 간주했으며 이후 역도산과의 관계는 악화됐다. 최배달이 몇 차례에 걸쳐 대결을 청했으나 역도산이 이를 피했다는 주장도 많다.
오로지 실전이라는 부분만 놓고 보면 최배달의 업적과 역도산의 그것은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최배달은 오로지 실전을 추구한 인물로 일본은 물론 세계 각지를 돌며 내로라하는 고수들과 초창기 종합격투기인 무규칙격투기를 방불케 하는 실전을 벌이며 무패신화를 달성했다.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을 꼽는 것에 오로지 실전 결과만이 전부가 될 순 없다. 적어도 당시 일본사회에 전반적으로 미친 영향력은 역도산이 압도적으로 앞선다. 최배달이 홀로 산에서 수련하고 조용히 무림고수들을 상대했다면, 역도산은 일본 국민 대부분이 보는 앞에서 경기를 펼쳤고 늘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일왕 다음 역도산'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당시의 역도산은 일본인들에게 힘을 북돋아주는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과거 장정구가 복싱 세계타이틀전을 할 때면 서울 도심이 한산해졌을 정도라고 하는데, 역도산은 그것을 능가했다. 기무라와의 3차전은 10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후문도 있다.
그리고 둘은 훌륭한 후계자를 남겼으니 그 인물이 바로 '박치기 왕' 김일과 극진회관의 문장규 관장이다. 역도산은 재떨이와 골프채로 매일 김일의 머리를 가격하며 단련을 거듭한 끝에 박치기를 완성시켰고, 김일은 은퇴까지 20여개의 타이틀을 따냈다. 그리고 김일은 이왕표라는 후계자를 남기고 2006년 생을 마감했다.
문장규 관장은 최배달의 젊은 시절을 담은 만화책을 보고 극진가라데에 입문했고, 20대 초반 시절 전일본극진가라데선수권에서 2연패를 달성했으며 제 4회 세계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스승의 무공을 가장 제대로 전수받았다고 평가 받는 그는 3단 심사에서 극진 최고의 관문인 100인 조수에 성공한 바 있다. 현재도 스승의 뜻을 계승하며 극진가라데의 위상을 굳건히 하고 있다.
고준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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