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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Sports Record

역대 월드컵 최강, 최고팀 Best 5

by Wood-Stock 2010. 1. 8.

역대 월드컵 중 최강의 팀과 최고의 선수는 누구일까. 축구는 팀경기다. 혼자만 잘한다고 이길 수 없는 게 축구다. 최강의 팀이 있어 최고의 선수가 존재하고, 또 최고의 선수가 있어야 최강의 팀도 완성된다. 그만큼 최강의 팀과 최고의 선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2010 남아공 월드컵의 해를 맞아 역대 최강의 팀과 최고의 선수를 꼽아본다.

 

 

 

[역대 월드컵 최강&최고] (1) ‘드림팀’ 1970브라질과 ‘황제’ 펠레

 

ㆍ결승서 4-1 대파···세번째 월드컵 전승 우승
ㆍ네번째 출전 펠레
, 조국 100호골 선물 뒤 은퇴

세계 최고의 축구 강국을 논할때 브라질을 뺄 수 없다.
'삼바축구' 브라질은 늘 세계 축구사의 정점에 서 있다. 월드컵우승 5회로 최다 우승국인데다 1회부터 19회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은 유일한 월드컵 개근국이다.

최강의 브라질. 그 가운데도 역대 최강의 브라질 대표팀은 언제일까.

 

국내외 축구전문가는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팀'으로 주저없이 70년 멕시코대회 우승 멤버를 꼽는다. '축구황제' 펠레와 줄리메컵 영구 보존으로 기억되는 70년 브라질 대표팀은 펠레를 비롯, 자일징요·토스탕·리벨리노·게르손·알베르토 등 말 그래도 '전설의 드림팀'이었다.

당시 브라질은 6전승(19득점·7실점)으로 정상에 올랐다. 특히 '빗장 수비'로 유명한 이탈리아를 결승에서 4-1로 초토화하는 막강 공격력을 과시했다.

월드컵 본선에서 무승부나 패배없이 우승한 팀은 우루과이(30년)·이탈리아(38년)에 이어 70년 브라질 대표팀 뿐이다.

사상 첫 월드컵 3회 우승으로 줄리메를 영구보존한 70년 브라질대표팀의 중심에 펠레가 있었다. 58년 스웨덴대회에서 17살의 나이로 첫 출전한 펠레는 당시 웨일스와의 준준결승에서 월드컵 데뷔골을 터뜨리더니 프랑스와 4강전에서 해트트릭, 스웨덴과 결승에서 2골로 고국에 첫 줄리메컵을 선물했다.

'축구 황제'로 떠오른 펠레는 이후 월드컵부터 상대팀에게 경계대상 1호로 지목돼 수난을 겪는다. 62년 칠레대회에서 초반 부상으로 벤치에서 팀의 2회 연속 우승을 지켜본 펠레는 66년에는 경기중 들 것에 실려 나갔고, 팀은 예선 탈락했다. 

절치부심 끝에 출전한 70년 멕시코대회. 펠레에게는 그동안의 보상이자, 피날레 무대였다. 이탈리아와의 결승전에서 헤딩 선제골로 브라질 월드컵 출전 사상 100호골을 자축한 펠레는 줄리메컵을 영구히 고국에 안긴 뒤 월드컵무대서 은퇴했다.

영국 주간지 '선데이 타임즈'는 당시 결승전 헤드라인에서 펠레 이름을 'G-O-D(신과 같은 존재)다'라고 뽑기도 했다.

유연한 몸놀림과 균형감, 번개 같은 스피드, 뛰어난 지능, 현란한 개인기 등 축구 선수로서 완벽한 능력을 갖춘 펠레는 99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각국 올림픽위원회를 상대로 실시한 '20세기 최고의 선수' 투표에서 올림픽 출전 경험이 전무한데도 최다표를 얻었다.

펠레는 한 경기에서 5골 6차례, 4골 30차례, 해트트릭 92차례 등 통산 1363경기에서 1281골을 넣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역대 월드컵 최강&최고] (2) 1986년 아르헨티나와 축구신동 마라도나

 

ㆍ핸들링 반칙 역대 최고 해프닝 연출
ㆍ60m 드리블로 '기적의 골'명장면도

ㆍ'3-5-2전술'첫 시도···두번째 우승컵

1986년 멕시코월드컵은 한국에 잊을 수 없다. 32년 만의 본선에서 우승 팀인 아르헨티니와 조별 예선에서 만났다. 더욱이 대회 MVP를 수상한 '축구 신동' 마라도나의 신기한 기술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무대였다.

멕시코월드컵은 '마라도나의, 마라도나에 의한, 마라도나를 위한 대회'였다. 그러나 그를 받쳐준 훌륭한 조연이 없었다면 슈퍼스타도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발다노·부루차가·카니자 등 특급 조연들이 막강한 공격 라인을 구축했고, 탄탄한 미드필드와 수비진까지 맞물리면서 세계 최강의 면모를 갖춘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의 기술과 독일의 조직력을 겸비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특히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에 의해 탄생된 3-5-2 포메이션은 당시 가장 현대적이고 우수한 전략으로 떠올랐다. 마라도나를 중심으로 5명의 미드필더를 포진시켜 현대축구의 생명인 '허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압박축구'의 시발점이 됐다.

3-5-2 전술은 독일이 1990년 이탈리아대회에서 사용하며 정상에 올랐고, 지금도 세계 축구 흐름을 주도하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우승에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불세출의 스타' 마라도나가 중심에 있었다.

마라도나만큼 팀에서 비중이 컸던 선수는 없었고,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현란한 기술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환상적인 드리블, 날카로운 패싱, 넓은 시야에 골 결정력까지 겸비해 '축구황제' 펠레 이후 최고의 선수라는 찬사도 뒤따랐다.

1982년 스페인대회 2차리그 브라질전에서 폭력을 휘둘러 퇴장당한 마라도나는 쓰라린 첫 경험을 곱씹으며 4년 뒤 25세의 나이에 주장 완장을 차고 다시 월드컵 무대에 선다.

마라도나는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월드컵 역사 중 가장 화젯거리이자 최고의 명장면을 동시에 연출한다.
후반 6분 그 유명한 '신의 손'을 만들더니 3분 뒤 60m의 귀신 같은 드리블로 골키퍼까지 합쳐 6명을 제치고 추가골을 터뜨린다. 첫골 득점 상황을 핸들링 반칙으로 의혹의 품었던 잉글랜드와 관중도 모두 두 번째 골에는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켄바우어 감독이 이끄는 독일과의 결승전에서는 원맨쇼가 아닌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나섰다. 2-2로 팽팽히 맞선 후반 38분 부루차가에게 날카로운 패스를 연결하며 결승골을 도왔다.

 

이 대회에서 5골(2위)을 터뜨리며 아르헨티나에 사상 두번째 우승컵을 안긴 마라도나는 프랑스의 플라티니, 독일의 루메니게, 브라질의 소크라테스 등 당대 최고 스타들을 제치고 천하를 평정했다.


 

 

 

 

 

[역대 월드컵 최강&최고] (3)1990년 독일 전차군단과 마테우스

 
'전차군단' 독일은 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 14회 연속 8강 이상 성적을 거둔 우등생이다. 역대 월드컵 랭킹에서도 브라질에 이어 2위. 이처럼 꾸준한 성적의 독일 대표팀 중에도 역대 최강의 전력을 꼽는다면 대부분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멤버를 먼저 떠올린다.

현란한 기술이나 화려한 플레이는 부족했지만 선수 개개인의 역할 분담으로 이어진 톱니바퀴 같은 조직력은 그라운드 전체를 압도했다. 독일 특유의 힘과 스피드에서 나오는 폭발력, 똘똘 뭉쳐서 뿜어내는 집단 카리스마는 아르헨티나·브라질 등 '스타군단'이 부럽지 않았다. 

마테우스를 중심으로 해슬러·리트바르스키 등이 버틴 미드필드 진용은 때론 물을 타듯, 때론 야생마를 다루듯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했다. 또 클린스만·푈러·브레메가 선봉에 선 공격진의 화끈한 화력은 상대 수비를 위협했다. 

82년과 86년 월드컵에서 연속 준우승의 한을 품은 독일은 90년 대회에서 전대회 우승팀인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와 결승에서 숙명의 대결을 펼친다. 5명이 포진한 미드필드진이 풍차처럼 돌아가면서 아르헨티나를 몰아붙였고, 결국 마테우스의 날카로운 패스가 푈러로 연결되면서 페널티킥을 얻어내 브레메가 침착하게 결승골을 성공시켰다.

86년 마라도나를 앞세운 아르헨티나의 3-5-2 압박축구에 당한 설움을 똑같은 전법으로 되갚은 셈이다. 당시 사령탑을 맡은 독일의 축구영웅 베켄바우어는 브라질 자갈로 감독에 이어 선수, 감독으로 모두 월드컵을 제패하는 영예를 안았다.

또한 독일은 브라질·이탈리아에 이어 월드컵 최다 3회 우승국 대열에 합류하면서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진 동·서독 통일의 축제 분위기에 불을 붙였다. 

'압박축구'로 중원을 지배하는 독일의 사령관은 주장 마테우스였다.
'게르만 전차군단의 혼'이라 불린 마테우스는 미드필더로 공·수를 넘나들면서 팀내 최다골인 4골을 터뜨려 득점 3위에 올랐다. 또한 지난 대회때 마라도나 전담 수비수로 첫 대결을 벌여 우승 제물이 됐던 아픈 기억도 되갚았다. 

마테우스는 신동의 기질은 타고나지 못했지만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무장된 강철 체력과 스피드·슈팅력·수비력 등 멀티 능력을 갖춰 마라도나 이상의 가치를 입증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리없이 강한 마테우스. 그는 '월드컵의 사나이'다. 21세때인 82스페인대회부터 98프랑스대회까지 5회 연속 출전해 최다 타이기록과 함께 총 25경기에서 2048분을 뛰어 최장시간 출장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80년 대표선수로 발탁돼 무려 21년간 A매치 150경기에 출전했다.

 
[역대 월드컵 최강&최고] (4)1998 프랑스와 지단
ㆍ지단의 '아트사커' 佛꽃 피우다

월드컵 창시자인 줄리메(1873~1956년)의 고향은 프랑스다. 당연히 월드컵에 대한 프랑스인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러나 프랑스는 20세기 마지막 대회인 98년 대회에서야 비로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98년 프랑스월드컵은 프랑스가 그동안 받았던 설움을 단번에 씻은 무대였다.

'불세출의 영웅' 지네딘 지단을 중심으로 환상적인 '아트사커'의 진수를 선보인 프랑스는 결승전에서 세계 최강이자, 막강 공력격을 자랑하는 브라질을 3-0으로 완파하고 마침내 FIFA컵을 품에 안았다. 

당시 프랑스는 중원을 지휘하는 지단 외에도 '20세기 최고의 포백'으로 평가받는 리자라쥐·로랑 블랑·마르셀 드사이·릴리앙 튀랑 등 '철의 포백'과 수문장 바르테즈가 견고한 후방을 구축했다. 본선 7경기에서 단 2골만을 내 준 수비진은 '철옹성' 그 자체였다.

여기에 원톱 앙리를 비롯, 데샹·윌토르·트레제게·조르카예프 등 막강 공격진과 미드필더로 촘촘히 짜여져 '필드의 예술가' 플라티니 세대 이후 최고의 전력이었다. 

힘과 기술·조직력이 어우러진 에메 자케 감독의 4-2-3-1 포메이션은 축구를 예술의 경지에 올려 놓았다는 찬사가 뒤따랐다. 
또 신사적이면서도 매력적이고 화려한 플레이로 세계 축구팬을 사로잡아 페어플레이상과 최고 인기상도 덤으로 챙겼다.
특히 지단을 비롯한 이민 2세들의 맹활약으로 당시 극심한 인종 갈등을 겪던 프랑스에 국민화합과 통합의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역대 최강의 프랑스 대표팀의 탄생은 '아트사커의 마에스트로' 지단의 존재에서 출발한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중원을 지휘한 지단은 브라질과 최후의 일전에서 코너킥에 이은 헤딩으로 선제골과 쐐기골을 꽂아 넣어 첫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플라티니·칸토나에 이어 프랑스 축구의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는 지단은 그 어떤 스타군단과 맞닥뜨려도 중원을 지배하는 능력이 탁월해 '플레이메이커의 교본'으로 평가받는다. 패싱·드리블·볼키핑 등 테크니컬한 부문에서는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하고, 아름다운 지휘자였다.
 
기술을 과시하는 독불장군 스타일이 아니라 팀의 리더로서 공격과 수비를 조율하고 때론 직접 해결사 역할까지 도맡았던 지단은 FIFA 올해의 선수 3회 수상(1998·2000·2003년)과 발롱도르(유럽 최우수선수상·1998년) 등 최고의 개인상 외에도 월드컵·유럽축구선수권·유럽챔피언스리그 우승 등 세계 축구계의 주요 타이틀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특히 경기 외적인 면에서도 겸손하고 소박한 생활로 가치를 더하고 있다.

 
 
 
 
[역대 월드컵 최강&최고](5) 1974년 네덜란드와 크루이프
 
ㆍ토탈사커 전설을 쓰다

74년 월드컵 우승팀은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이끈 개최국 서독(현 독일)이다. 그러나 대회의 진정한 주인공은 세계 축구계를 경악시킨 '토탈사커'의 원조 네덜란드와 '슈퍼스타' 요한 크루이프였다.

네덜란드는 아쉽게 준우승했지만 '전원 수비·전원 공격'의 획기적인 신개념 전술로 전세계 축구팬을 매료시켰다. 또 주장 크루이프의 현란한 드리블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다.

네덜란드 사령탑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창시한 '토탈사커'는 선수들의 역할 분담이라는 축구의 전통 개념을 거부하고 변화무쌍한 축구의 특성에 맞춰 탄력적이고 유기적으로 대처하는 '혁명적 전법'이었다. 

70년 멕시코대회까지 유럽 축구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네덜란드는 74년 대회를 통해 36년 만에 본선 무대를 밟는다.

69~70년 유럽 챔피언 페예노르트 주전 7명과 70~73년 같은 대회서 3연패한 아약스의 크루이프 등이 주축을 이룬 대표팀은 본선 1라운드에서 2승1무(우루과이 2-0, 스웨덴 0-0, 불가리아 4-1)로 가볍게 통과한다. 

2라운드에서도 강호 아르헨티나를 4-0, 동독을 2-0으로 완파하고 브라질과 결승 진출을 놓고 맞붙었다. 전 대회에서 '축구 황제' 펠레의 활약으로 줄리메컵을 영구 소장한 브라질은 펠레가 대표팀에서 빠졌지만 자일징요·리베리노 등 전설의 스타들이 건재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혁신적인 축구 스타일에 막강 브라질도 역부족이었다. 후반 네스켄스와 크루이프의 연속골로 2-0 승리, 36년 만에 오른 월드컵에서 당당히 결승에 오르며 전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결승전 상대는 베켄바우어를 중심으로 리베로 시스템을 처음 선보인 서독. 
'토탈사커'의 지휘자 크루이프와 '혼(魂)의 축구' 서독의 사령관 바켄바우어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했다.

네덜란드는 경기 시작 2분 만에 크루이프가 페널티킥을 얻어내 1-0으로 앞서 '토탈사커'의 대미를 장식하는 듯했다. 그러나 독일의 전설적 골게터 뮐러에게 연속골을 내주고 결국 역전패했다.

비록 준우승에 그쳤지만 네덜란드는 일약 세계 정상권으로 급부상했고 세계 축구의 전술변화에도 큰 파장을 몰고왔다. 
또한 '오렌지 군단의 전설' 크루이프는 환상적인 드리블과 폭발적인 돌파력, 정확한 슈팅력으로 세계 축구팬을 매료시키며 당대 최고 인기스타로 떠올랐다. 특히 상대 수비를 농락하는 특허 기술 '크루이프 턴'에 세계는 경탄했다.

국가대표로 48경기에 출전, 33골을 기록한 크루이프는 아약스 시절 3년 연속 유럽 최우수선수에 뽑혔으며 '20세기 최고의 유럽 축구선수'에 선정됐다. 현재 무보수로 카탈루냐 대표팀을 맡고 있다.

 

 

 
<끝>
 
<김기봉기자> ⓒ 스포츠칸 & 경향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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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클래식팀 from Best11
 
시대를 앞서간 무적의 마자르 (1954월드컵 헝가리대표팀)
 
월드컵 클래식팀 첫 번째 주인공은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서 준우승에 그친, 그러나 '무적의 마자르' 혹은 '매직 마자르'라 불린 헝가리대표팀이다. 참고로 마자르(Magyar) 민족은 헝가리 인구의 98%를 점하며 해서 '마자라=헝가리 사람'을 의미한다.
 
당대 최강 '매직 파워'
 

 

 


결과적으로는 대회 준우승에 그쳤다. 하지만 그들은 당대 최강이었음은 물론이요 시공을 초월해 축구사가 기억하는 가장 강력한 팀 중 하나다. 어찌나 짱짱했고 어찌나 놀라운 성적을 거뒀으면 '무적의 팀' 혹은 '마법의 팀'이라 불렸겠는가. 그들을 결승에서 꺾고 줄리메컵을 들어 올린 서독대표팀의 성과가 왜 '베른의 기적'으로 회자되겠는가. 페렌치 푸스카스라는 가공할 득점기계가 이끌던, 산드로 콕시스라는 푸스카스 못지않은 해결사가 보조를 맞추던 1954헝가리대표팀은 그야말로 무적에 가까운 힘을 보여주었다. 추상적인 '강하다'는 단어를 설명하기에 가장 편한 것이 바로 기록으로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헝가리대표팀은 위풍당당이다.

지도자계의 선각자로 통하는 구스타프 세베스 감독이 이끌던 1950년대 초 헝가리대표팀은 1950년 6월4일 폴란드전 승리(5-2)를 시작으로 1954년 7월4일 스위스월드컵 결승전에서 서독에게 2-3으로 패하기 전까지, A매치 32경기를 이어오는 동안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는 축구사 초창기에 월드컵 이상의 위상을 자랑하던 올림픽(1952헬싱키대회) 금메달도 포함됐다. 게다 32경기 무패의 속사정도 28승4무였으니, 어지간하면 비기지도 않았던 당시의 헝가리다.

따라서, 응당 1954월드컵 정상은 그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예상이 아니라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고 그렇기에 '베른의 기적'이라는 말까지 나온 것이다. 서독(현재 독일) 쯤 되는 축구사의 전통강호가 누군가를 꺾었다고 '기적'이라 불리는 게 그들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할 일이고 보는 이들도 이해가 쉽지 않은 일이지만, 1950년대 초의 헝가리가 대상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 했다.

준비된 강호 날개를 달다

 


헝가리대표팀이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절대강자'의 면모를 발휘한 것은 아니다. 이미 1930년대부터 꾸준히 유럽의 강호로서의 입지를 다졌는데, 세계 2차 대전 발발 전인 1938프랑스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헝가리는 1940년부터 1945년 8월까지 5년 반 동안 A매치에서 10승7무3패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이미 '무적'의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진 놀랄 축에도 끼지 못한다. 훗날 무적의 마자르의 간판으로 활약하게 되는 푸스카스가 대표팀에 합류한 1945년 8월 이후 1954년 월드컵까지 근 10년간의 성적이 28승4무7패. 1년에 한 번 질까말까 했다는 뜻이다. 요컨대 1950년대 들어 갑자기 날아다닌 것이 아니라는 말이고 그만큼 준비된 강호였다. 여기에 앞서 '지도자계의 선각자'라 표현한, 깨어있던 지도자 세베스 감독이 1949년 부임하면서 헝가리 축구의 발전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세베스 감독은 당대의 유행을 넘어 정석으로 통하던 3-2-3-2 포메이션(이른바 W-M 포메이션)을 과감하게 버리고 4-2-4를 기본 형태로 삼으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구상으로서, 일정한 대형을 유지하면서도 선수들의 자유롭고 일사불란한 위치변동을 통해 공격루트의 다변화를 꾀할 수 있는 전형이었다. 참고로 1970년대 세계축구계를 강타한 네덜란드 토털사커에 큰 영향을 준 흐름이다.

다시 돌아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변화였고 이는 지도자의 깨인 철학도 철학이지만 그만큼 선수들의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 면에서 헝가리대표팀의 면면들은 적격이었다. 팀의 에이스였던 왼발의 달인 푸스카스와 황금의 머리로 통했던 콕시스 그리고 이들에 버금갔던 공격수들인 졸탄 치보르와 라슬로 부다이(이상 FW) 등이 전방에 포진했고, 창의적인 운영이 돋보였던 중원의 핵 낸도르 히데그쿠티와 정교한 패스와 남다른 리더십을 겸비했던 요제프 보직(이상 MF)이 허리의 축을 잡아주었으며 요제프 자카리아스-귈라 로란트 중앙수비 조합에 미하일리 란토스와 예노 부잔스키가 좌우 측면을 담당했던 플랫4와 흑표범이라는 닉네임의 골키퍼 귈라 그로시츠까지, 그 어떤 멤버들과 견줘도 당당할 이름들이 축구사에 지워지지 않을 발자취를 남겼다. 준비된 지도자와 준비된 선수들이 모인 준비된 강호가 바로 1954월드컵에 나서던 헝가리대표팀이다.

 

진하고 화려한 잔상

1954월드컵은 이런 그들의 행보에 정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에 오르지 못한 채 준우승에 그쳐야했던 결과가 더욱더 아쉽고 놀라운 것이다.

하필이면 상대가 한국이었다는 게 가슴 아프지만, 스위스월드컵 첫 경기에서 헝가리는 이제 갓 세계무대에 올라온 아시아의 새내기를 스파링 파트너쯤으로 여긴 듯 9골을 쏟아 부으면서 레벨이 다름을 입증했다. 한국의 전력이 워낙 약한 영향을 간과할 수 없으나, 역시나 헝가리의 공격력은 막강했다. 두 번째 상대 서독도 헝가리의 파상공세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들도 3골이나 넣었으니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승리도 가능했겠지만 얻어맞은 골이 8개였다는 게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또 최종결과가 어이없는 것이다.

조별예선에서 8-3으로 제압했던 그 서독이 결승에서 헝가리의 무패행진에 제동을 건 그 서독이다. 따라서, 8강과 4강에서 남미의 강호 브라질과 우루과이를 각각 4-2로 따돌리던 헝가리의 파죽지세가 서독에게 꺾일 것이라 예상한 이는 없었다. 게다 결승전 시작과 함께, 채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푸스카스와 치보르의 연속골로 2-0 앞서 나갔으니 줄리메컵의 행선지는 당연히 헝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서독에게는 기적, 헝가리에게는 악몽이 현실화됐다. 결과부터 말하면 2-3 역전패였다. 후반 들어 비가 쏟아지는 통에 그라운드 사정은 엉망이 됐고, 우루과이와의 4강이 연장까지 120분 혈투로 진행된 탓에 체력이 많이 떨어졌으며, 결정적인 2번의 슈팅이 골대를 맞고 나오는 등 불운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베른의 기적'이라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근 50개월 동안 이어지던 무패가도가 하필이면 월드컵 결승전에서 깨졌으니 그동안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던 무적의 마자르는 일순 빛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 패배로 헝가리 축구가 아예 무너진 것은 아니다. 매직 마자르는 월드컵 이후 다시 1956년 2월 터키(1-3)에게 패할 때까지 다시금 1년8개월 동안 17전 15승2무라는 여전한 실력을 과시했다. 차라리 그래서 결승전 패배가 더욱 아쉬운 것이다. 그때 이후 헝가리 축구는 시나브로 축구계 중심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상기하면 또 그렇다. 1954월드컵에 출전했던 헝가리대표팀의 화려한 향수가 지금껏 많은 이들을 취하게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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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바군단의 위대한 첫 걸음(1958월드컵 브라질대표팀)
 
축구팬이라면 대부분이 알고 있듯, 월드컵 최다 우승 국가는 다섯 개의 별이 빛나는 브라질이다. 지금껏 18번 펼쳐진 월드컵 스테이지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개근한 국가도 지구상에 오직 브라질뿐이다. 본선에 오르고 싶어 안달이 난 국가들이 부지기수인데 출전하는 것쯤이야 당연한 듯 여기는 나라이고, 5회 출전이라는 경력으로 뿌듯해할 나라들이 넘쳐나는 판국에 우승만 5회라면 말 다했다. 준우승도 2번 있음을 추가해야겠다. 적어도 축구판에서 브라질은, 위대함 그 자체다. 그러나 1930년 원년대회 개최와 맞물린 초창기부터 브라질이 지금과 같은 위상을 자랑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처음에는 남미대륙에서조차 우루과이나 아르헨티나 등에 밀린 No.3 인상이 강했다. 그랬던 그들을 하늘로 솟구치게 만든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경이로운 축구신 펠레의 등장이다. 펠레와 함께 브라질은 둥근 공으로 세상을 정복했고 그 신화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그리고, 조국에 처음으로 월드컵 타이틀을 안긴 1958년 브라질대표팀을 축구사는 삼바군단의 위대한 첫 걸음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저 그랬던 초창기 브라질

전문에 언급했듯, 시작부터 브라질이 날았던 것은 아니다. 우루과이에서 열린 초대대회에서 브라질은 1승1무로 조별예선에서 탈락했고 녹아웃토너먼트로 진행된 2회 대회에서는 스페인에게 1-3으로 패하며 1경기 만에 짐을 쌌다. 1938월드컵에서는 좀 나아졌다. 1차전에서 폴란드를, 2차전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꺾고 4강까지 올랐으며 3,4위전에서 스웨덴을 누르고 3위를 차지했으니 분명 나아졌다. 하지만 속을 살피면 매 경기 힘겨웠는데 폴란드에게는 6-5 신승, 체코슬로바키아와는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해 재경기(2-1) 끝에 어렵사리 따돌린 내용이다. 요컨대 지금의 위풍당당한 브라질과는 거리가 있었던 초창기다.

세계대전으로 휴지기를 가진 뒤, 조국에서 열린 1950월드컵에서 브라질은 우승을 자신했고 그만한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조별라운드를 2승1무, 1위로 가볍게 통과한 브라질은 결승리그에서도 스웨덴(7-1) 스페인(6-1)을 차례로 대파하며 우승후보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챔피언을 가리는 방식이 별도의 결승전 없이, 결승리그 전적을 아우르는 것이었고 브라질은 마지막 상대 우루과이전에서 무승부만 거둬도 트로피를 거머쥐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실상 브라질의 우승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던 분위기였다.

대회 개막 이후 줄곧 브라질이 내용과 결과 모두 승승장구했던 반면 마지막 상대 우루과이는 스페인과 2-2, 스웨덴과 3-2 등 삼바군단이 손쉽게 제압했던 이들과 버거운 싸움을 했을 만큼 한 수 아래로 평가됐다. 게다 경기가 열리는 장소는 20만명 가까운 브라질 홈팬들이 운집한 마라까낭 스타디움이었으니 브라질 최초의 월드컵 우승은 떼 놓은 양상이라 여겨졌다. 근데 비극이 벌어졌다. 아무도 예상 못했던 1-2 역전패. 우승을 확신하던 팬들이 슬픔을 견디지 못해 자살이라는 극단적 비상구를 찾았던 충격이었다. 이때의 여파, 그리고 하필이면 당대 최강이던 '무적의 마자르'와 만나는 불운까지 겹쳐지며 브라질은 4년 뒤 1954대회에서도 8강에서 중도하차한다. 실상 초창기에는 그저 그랬던 브라질이다.

5전6기에 성공하다
 
그랬던 브라질이 확, 달라진 것이 바로 1958년 스웨덴월드컵에서다. 거듭된 5번의 실패로 인해 스웨덴 땅을 향하던 브라질대표팀은 우승에 목 말랐다. 절실했고 절박했다. 그렇기 때문에 브라질은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했고, 조금의 안일함도 없이 매진했다. 당시 팀을 이끌던 페올라 감독은 자유분방하던 선수들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강경책을 펼쳤는데, 선수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40계명'을 내렸을 정도다. 대회 1년 전부터 스웨덴을 직접 찾아 답사를 마친 것, 선수들과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작은 불안요소까지 제거하려 노력했던 것 등 모든 노력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월드컵 트로피를 위함에서였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1958월드컵에서 브라질은 결승전 포함 6경기에서 5승1무, 16골에 4실점이라는 완벽한 경기력으로 줄리메컵을 들어올렸다. 당연한 듯 대회 참가국을 통틀어 최다득점에 최소실점, 완벽한 승리였다. 4년 뒤 1962월드컵에서 2연패를 달성하고 1970년 대회에서 3회 우승으로 줄리메컵의 영구주인이 될 때까지, 브라질 축구사의 황금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순간이다.
 
소년 펠레, 세상에 내려오다

위대한 수비수 닐톤 산토스, 늑대라 불리던 사나이 마리오 자갈로, 허리라인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위대한 미드필더 디디와 바바 등 면면이 모두 화려했다. 언급한 이들은 다음 대회까지 고스란히 브라질대표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면서 2연패를 이끌었다. 모두가 공신이고 주인공이다. 하지만, 1958년 브라질대표팀은 지금부터 소개할 2명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숱한 스타들을 배출한 마르지 않은 황금샘물 브라질의 축구 역사 속에서도 가장 찬란한 플레이어, 나아가 전 세계 축구사에 지워지지 않을 굵은 획을 그은 전설적인 선수. 바로 축구신 펠레와 작은 새 가린샤가 클래식팀 1958브라질의 핵심이다.

구구절절한 소개가 불필요한 펠레가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무대가 바로 1958월드컵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 앞으로도 그를 능가할 인물을 찾기란 어려울 것이라는 극찬의 주인공 펠레는 스웨덴월드컵 참가선수들을 통틀어 최연소였다. 단순히 어렸다에 그친다면 '황제' '축구신'이라는 수식어가 민망할 것이다.

일단 펠레는 브라질의 조별라운드 마지막 경기였던 소련전을 통해 월드컵 무대를 처음으로 밟았는데 그의 나이 불과 17세235일의 일이다. 출전에서만 그쳤으랴. 펠레는 8강전이던 웨일스전에서 자신의 데뷔골이자 경기 결승골(1-0)을 터뜨리면서 17세239일의 나이로 월드컵 최연소 득점자의 부분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나아가 프랑스와의 준결승에서는 해트트릭을 작렬시키며 5-2 대승을 이끌었고 스웨덴과의 결승전(5-2승)에서도 역시 2골을 추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야말로 경악스런 등장이었고 이 17살 소년은 커리어 최초의 월드컵에서 6골이나 터뜨리며 우승의 주역이 됐다. 실상, 월드컵 역사상 한 대회 최다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대표팀 퐁텐느(13골)의 크레이지 모드가 없었다면 대회 득점왕도 펠레의 몫이었다. 월드컵에서 펠레처럼 마법을 부린 이는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불굴의 작은 새 가린샤
 
펠레에 버금가는 천재적 플레이어, 그러나 펠레 때문에 많은 것을 잃어야했던 절름발이 테크니션 가린샤도 1958월드컵을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펠레와 마찬가지로 소련전을 통해 월드컵 무대 신고식을 치른, 이후 '20세기 최고의 드리블러' '천부적 윙어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는 가린샤는 사실 최악의 조건을 지니고 태어난 불운한 선수였다. 어려서 심하게 소아마비를 앓은 탓에 왼다리와 오른다리의 길이가 달랐는데, 일반인이었어도 불편했을 이러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필드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줬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의 의지는 하늘이 내린 태생적 벌을 환상적인 기술로 바꾸는 기적을 보여줬는데, 절뚝거리는 다리로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페인트 모션을 만들어내면서 상대를, 나아가 경기를 지배했다. 그래새 '불굴의 작은 새'라는 닉네임은 가린샤를 소개하는데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다.

축구선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펠레, 그리고 축구선수에게 필요한 것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했음에도 펠레만큼 뛰어났던 가린샤. 이 가공할 듀오를 앞세운 1958브라질대표팀은 거칠 것 없었다. 그리고 축구사는, 그들이 이끌던 그때를 브라질 축구의 황금시대라 정의한다. 참고로 FIFA 기록에 따르면 펠레와 가린샤가 동시에 출전했던 A매치에서 브라질은 단 1번도 패한 적이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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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를 위한 잔치 (1966월드컵 잉글랜드대표팀)
 
종가를 종가답게 만든, 종가를 위한 잔치(1966월드컵 잉글랜드대표팀)

 

종가(宗家)라고 하는 것은 맏이로만 이어진, 쉽게 말해 가문의 큰집이다. 종주국(宗主國)은 문화적 현상과 같은 어떠한 대상이 처음 시작된 나라를 일컫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짐작이 될 것이다. '축구종가' '축구종주국' 잉글랜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자 함이다. 그네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은 사실 뿌리 깊은 혈통에서 기인하는 자부심에서부터 시작한다 해도 과언 아니다. 인정한다. 그들은 분명 축구계 큰 형님 같은 축구애 속에서 축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이다. 하지만 과연 '업적'도 형님다웠는가 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면 바라보는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 할 것이고 당사자들은 머쓱할 것이다.

 

 


종가의 자존심을 세우다


물론, 작금 유럽 최고의 무대로 자타가 공인하는 EPL이 벌어지는 터전이기는 하나, 집중된 자본과 그로 인한 바다건너 유명 선수들의 러시 등 순수한 잉글랜드만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감이 있다. 차치하고, 무엇보다 국가대항전으로 고개를 돌리면 잉글랜드의 행색은 더욱 초라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잉글랜드는 고개 빳빳한 그들의 자존심과는 어울리지 않는 성적을 거뒀고, 월드컵이나 유럽선수권 등 메이저대회에서도 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딱 1번 어깨 당당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으니 바로 자국에서 열린 1966월드컵이다. 혹여 안방의 이점을 살린, 그 힘을 등에 업은 성과라 폄훼하거나 비딱하게 바라볼 수도 있겠으나, 그때 잉글랜드는 진짜 강했다. 종가를 종가답게 만든, 종가를 위한 잔치라 칭해도 전혀 하자가 없던 때다.

본격적 소개에 앞서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겠다. 대회 뚜껑을 열기 전 많은 이들이 우승후보로 주목했던 국가는 1958년과 1962년 월드컵을 거푸 차지했던,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으로 내려온 '축구신' 펠레가 이끄는 디펜딩 챔프 브라질이었다. 월드컵사 초유의 3연패 달성이 낙관적으로 점쳐지던 브라질은, 그러나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와 포르투갈에 1-3으로 잇달아 덜미를 잡히면서 맥없이 쓰러졌다. 2연패의 원인이 펠레였다면, 잉글랜드 대회 실패의 원인 역시 펠레였다. 이미 2번의 월드컵을 통해 도저히 그냥 막아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상대국들은 시쳇말로 '펠레 담그기'에 집중했고 결국 지독한 견제에 시달렸던 펠레는 숱한 상처와 함께 2경기에서 고작 1골을 넣는데 그쳤다. 황제가 황제다운 아우라를 발산하지 못하면서 브라질의 3연패 꿈 역시 물거품 됐다.

위대한 지도자 램지

혹 황제가 건재해 브라질이 승승장구했었다면, 더욱 흥미로운 대결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잉글랜드가 그만큼 강했다는 뜻이다. 일단 멤버가 짱짱했다. 잉글랜드 축구사를 넘어 세계 축구사가 가장 위대한 수문장 중 하나로 기억하는 고든 뱅크스를 위시로 조지 코헨, 잭 찰튼, 바비 무어(이상 DF) 앨런 볼, 바비 찰튼(이상 MF) 제프 허스트, 로저 헌트(이상 FW) 등 스쿼드 요소요소 종가의 축복이라 불러도 무방할 별들이 쏟아졌던 때다. 이들을 소개하기에 앞서 위대한 지도자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당시 잉글랜드의 벤치에는 황금멤버들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하던, '장군'이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한 명장 알프 램지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

1963년 역대 2번째로 잉글랜드대표팀 사령탑에 오른 램지 감독은 1974년까지 11년간 굳건히 자리를 지켰는데 이때 남긴 발자취가 실로 엄청나다. 113경기의 A매치에서 69승27무17패를 기록했으며, 이는 역대 감독들 중 최고 승률(61.1%)에 해당한다. 물론 그 사이 가장 빛나는 업적은 월드컵 우승이다. "조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반드시 제패해 영국 국민들에게 영광을 돌리겠다"는 취임일성을 던진 램지 감독은 결국 멋지게 약속을 지켰다.

잉글랜드는 1966월드컵을 무패로 우승했다. 대진이 특별히 좋았던 것도 아니다. 조별리그에서는 우루과이 멕시코 프랑스 등과 싸웠고 결선 토너먼트에서는 아르헨티나 포르투갈을 거쳐 결승전 상대 서독(4-2승)까지, 당대 일류 강호들과 격돌했다. 그러고도 정상에 올라섰으니 당시 잉글랜드는 분명 강했다. 그 중심에 알프 램지라는 명장의 지도력이 있었다.

램지는 월드컵 기간 중 당시로서는 혁명적이던, 윙 플레이어를 활용하지 않는 4-3-3 포메이션을 구사하면서 허리라인 전원이 공수에 관여하는 전술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측면 위주의 단조로운 패턴이 주를 이루고, 윙어들이 터치라인만을 오르내리던 시절, 미드필더진 전체가 틀을 갖춰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으니 상대로서는 여간 당황스럽지 않았다. 이런 램지식 전술은 당시 '날개 없는 불가사의(wingless wonders)'라 불리며 축구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후 중원장악을 중시하는 트렌드가 대세로 자리 잡았을 만큼 램지의 파격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종가에 쏟아진 별들

물론 깨어있는 감독이 아무리 앞선 전술을 구상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필드에서 구현할 선수들의 능력이 받침 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당시 잉글랜드대표팀의 구성원들은 혁명적 전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들의 이름이 곧 축구종가 잉글랜드의 레전드다.

20세기 대표 문지기 고든 뱅크스부터 시작한다. 예사롭지 않은 판단력과 반사 신경의 소유자던 뱅크스의 닉네임은 '잉글랜드 은행'. 고객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은행처럼 팀의 최후 방어선을 굳건히 지킨 데서 비롯된 영광스러운 별명이다. 실제로 뱅크스는 1966년 대회에서 '철옹성'의 진수를 실연했다. 준결승까지 5경기를 치르는 동안 단 1실점에 그쳤고, 조별라운드부터 8강전까진 아예 무실점으로 틀어막는 신기의 방어쇼를 선보였다. 4강전의 1실점도 PK 실점이었으니 차라리 완벽에 가까웠다. 뱅크스의 활약은 결승전에서 더욱 빛났다. 서독의 파상공세를 온몸으로 저지했으니 사실 2실점은 오점이랄 수도 없다.

야신에 버금가는 뱅크스 앞에 위대한 캡틴 보비 무어가 존재했으니 상대로서는 더욱 답답했을 것이다. 불과 17세의 나이에 웨스트햄 소속으로 잉글랜드 프로리그에 데뷔한 천재 디펜더 무어는 A매치에 108회 출장하는 동안 자그마치 90차례나 주장 완장을 찬 불세출의 리더였다. 특히나 1966월드컵에서의 맹활약은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상대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정확히 볼만 탈취하던 귀신같은 태클 솜씨, 판세를 뚫어보며 실마리를 푸는 예리한 본능, 기막힌 위치선정 능력, 시의적절한 공격전환 패스 등 장점을 다 열거하기조차 쉽지 않다. 무어가 없었다면 뱅크스도 빛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 평가다.

중원에는 맨체스터Utd.의 신화이자 당시 잉글랜드 축구의 상징이던 보비 찰튼이 있었다. 매끄러운 경기운영과 저격수 이상의 화력을 뽐내던 찰튼은 1966년 농익을 대로 익은 상태였다. 가장 확실한 잣대를 내세우겠다. 1966년 '유럽 올해의 선수'가 찰튼이다. 그리고 최전방에는 월드컵 결승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유일의 인물, 제프 허스트가 있었다. 허스트를 소개하며 결승전 이야기를 해야겠다.

잉글랜드와 서독의 결승전은 연장까지 가는 접전 양상으로 전개됐는데 101분 터진 허스트의 결승골이 '뜨거운 감자'가 됐다. 크로스바 맞고 골문 안으로 들어간 공이 골라인을 완전히 넘어갔느냐 아니냐가 논란의 중심이었다. 이날 주심을 맡은 스위스의 디엔스트 심판은 경기를 중단하고 소련 출신의 바흐라모프 부심과 상의해 최종적으로 골로 인정했다. 3-2로 추가 기운 순간인데, 사실 이대로 끝났으면 말 많고 탈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종료직전 바로 그 허스트가 해트트릭을 알리는 자신의 3번째 골이자 승부의 쐐기를 박는 팀의 4번째 득점을 올리면서 결국 잉글랜드는 서독을 4-2로 꺾고 챔프에 등극했다. 깔끔한 마무리다.

자존심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종가 팬들의 열광적인 성원, 그리고 세기의 지도자 알프 램지 감독의 혁신적인 전술운영 그리고 그것을 멋지게 그려냈던 위대한 선수들까지, 그야말로 3박자가 기막히게 어우러졌던 완벽한 우승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쯤이면 앞서 '그때 잉글랜드는 진짜 강했다'는 표현에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종가를 종가답게 만든, 종가를 위한 잔치라 칭해도 전혀 하자가 없던 때'라던 표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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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그들을 최강이라 부른다 (1970월드컵 브라질대표팀)
 
축구판에서의 브라질은 최강이라는 단어와 큰 의미의 차이가 없다. 영원한 우승후보라는 수식어야 이미 진부한 느낌이 됐고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포르투갈 언어로 '대표팀'이라는 뜻을 지닌 '셀레상(Selecao)'은 브라질 축구의 위대한 아우라를 대변한다. 실상 어제의 브라질도 강했고 오늘의 브라질도 마찬가지다.
 

 
다른 국가들이 들으면 섭섭하다 못해 화가 날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그들의 비교대상은 다른 어떤 나라가 아닌 시간 속의 그네들일지 모르겠다. 언제나 당대 최고라는 수식을 받아왔던 브라질임을 부인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새로운 명제가 탄생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늘 화려했던 브라질 축구 역사 속에서도 돋보이게 빛난다면? 브라질 축구사의 베스트라면 곧 월드 베스트와 진배없지 않을까? 설령 이것이 참이 아닐지언정, 1970년 월드컵에 참가했던 브라질대표팀은 충분히 이를 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다.

브라질 올-타임 베스트

< 월드컵 클래식팀 > 두 번째 시간을 통해 "조국에 처음으로 월드컵 타이틀을 안긴 그들을 축구사는 삼바군단의 위대한 첫 걸음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표현과 함께 1958월드컵에 출전한 브라질대표팀을 소개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하늘에서 내려온 '축구신' 펠레가 있었다. 당시 펠레 나이 17살에 불과했으니 그야말로 세상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소년과 함께 했던 브라질은 1958년 월드컵을 제패했고 그가 약관을 넘었던 1962년 월드컵까지 2연패를 내달렸다. 집중견제 수준을 넘어 집중구타(?)에 가까웠던 1966년 월드컵은 비록 축구종가에 정상의 자리를 내줘야했으나 패권을 되찾기까지는 단 1번이면 족했다.

인간의 몸을 빌린 펠레의 마지막 월드컵이던, 펠레가 가장 원숙하고 완벽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던, 펠레라는 화려함에 상대적으로 빛을 잃었지만 펠레만큼 위대했던 또 다른 펠레들이 곳곳을 수놓았던, 그래서 최초의 월드컵 3회 우승을 가볍게 달성해 브라질이 줄리메컵의 영구 주인이 되도록 했던 최강의 스쿼드가 바로 1970년 브라질대표팀이다.

알다시피 브라질은 지금껏 월드컵을 5번이나 차지했다. 하지만 시대마다 다른 평가를 받아왔다. 펠레와 가린샤를 잃은 뒤 24년간 헤매다 24년 만에 월드컵 트로피를 되찾던 1994미국월드컵의 브라질은 다소 소극적인 플레이로 '브라질답지 않은 브라질'이라는 지적을 받았고 경기당 2.56골의 막강화력을 자랑했던 2002년의 브라질 역시 '3R(호나우도-히바우도-호나우딩요) 편대'의 공이 너무도 컸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했다. 1952월드컵과 1962월드컵 역시 펠레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1970브라질만큼은 누구도 토를 달기 어렵다. 펠레가 위풍당당 중심에 있었으나, 펠레에 모든 것을 의지하지 않았을 만큼 전체적으로 강했기에 그들을 역대 최강으로 꼽는 것이다. 이를테면, '펠레와 또 다른 펠레들이 만든 드림팀이라는 극찬'이 아깝지 않다.
 
펠레와 또 다른 펠레들이 만든 드림팀

1930년 우루과이에서 기치를 올린 이래 지난 2006년 독일대회까지, 총 18번의 대회가 치러지는 동안 수많은 팀들이 월드컵 대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 숫자가 대략 360팀을 웃도는데 이들 중 "역대 최강은 누구였을까"라는 심각하지만 흥미로운 질문은 마치 펠레와 마라도나 다툼만큼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 결론이 쉽지 않을 질문인데, 대부분의 시선이 멈추는 곳은 바로 1970년 브라질대표팀이다. 실제로 영국의 축구권위지 < 월드사커 > 는 지난 2007년 각국의 축구전문가를 대상으로 이런 설문조사를 실시한 바 있는데 푸스카스가 이끌던 무적의 마자르 1954헝가리대표팀(2위)과 1974월드컵에서의 오렌지군단 네덜란드(3위)를 제치고 펠레와 또 다른 펠레들의 드림팀이 1위로 선정됐다. < 월드사커 > 는 "당시 브라질은 팀 이상의 팀이었으며 시대를 앞서간 전혀 새로운 축구를 보여주었다. 아름다운 경기의 궁극적인 모형을 제시했던 팀"이라는 찬사로 1970브라질대표팀을 소개했을 정도다. 그만큼 화려했고, 그 화려함은 상대를 압도할 정도로 강했다.


일단 펠레를 중심으로 자일징요-히벨리노-토스탕으로 이어진 전방의 공격진이 상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펠레에 대한 소개는 생략한다. 자일징요는 자신의 우상이던 가린샤의 바통을 잇는 특급날개였다. 플레이스타일은 물론이요 펠레 때문에 빛이 바랬다는 피할 수 없는 숙명도 답습했던 비운의 스타다. 하지만 1970년 월드컵에서의 기여도만 따지만 자일징요가 펠레보다 낫다. 브라질이 치른 6경기에서 자일징요는 매 경기 골 사냥에 성공해 총 7골을 터뜨렸는데 10골을 몰아친 서독의 게르트 뮐러가 아니었다면 득점왕도 가능했던 수치다. 무엇보다 꾸준했다는 것이 더 돋보이는데, 월드컵에서 특정선수가 필드를 밟았던 매 경기 득점에 성공한 경우는 자일징요 포함 딱 3번뿐이다.

'악마의 왼발' 히벨리노와 '원조 하얀 펠레' 토스탕을 빼놓을 수 없다. 닉네임에서 알 수 있듯 엄청난 파워의 프리킥 능력이 발군이던 히벨리노는 왼발이 주발이었고 특히 먼 거리에서 유용했으니 호베루투 카를로스의 그것을 연상하면 좋겠다. 마냥 묵직했던 것만도 아니다. 호나우딩요의 전매특허로 알려진, 발목의 힘을 사용해 순간적으로 공의 방향을 바꿔놓는 '플립플랩(Filp Flap)' 기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강하고 부드러웠다는 뜻인데 브라질 팬들은 히벨리노를 펠레 지코 가린샤 등과 함께 가장 위대한 공격수로 기억하고 있다.

'작은 동전'이란 애칭이 곧 이름이 된 토스탕은 '작은 새(Garrincha)'로 통한 가린샤와 같은 맥락이다. 작은 키만 비슷했던 것이 아니다. 빠르고 화려한데 정교하기도 했으니 테크닉이라는 측면에서는 역사상 누구와 견줘도 손색이 었던 인물이다. 1970년 월드컵 당시 한 언론은 "브라질대표팀에는 펠레가 있고, 또 하나의 하얀 펠레가 있었다"는 표현을 했는데 후자가 바로 토스탕이다. 고로 지코를 일컬었던 '하얀 펠레'의 원조는 따로 있었다.

거칠 것 없던 위대한 팀

이런 무시무시한 공격수들이 한꺼번에, 그것도 4명씩이나, 하필이면 한 팀에 속해 상대를 몰아붙였으니 그야말로 유린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공격수들만 넘쳤던 것도 아니다. 중원에는 일찌감치 플레이메이킹 능력에 비범하게 눈을 떴던 '조율사' 제르손이 있었는데, 브라질이 결승까지 6경기를 치르면서 모두 19골이나 뽑아낼 수 원천적인 바탕에 제르손이라는 으뜸 패스마스터가 있었다. 그의 파트너였던 클로도알도에게는 현란한 발재간이 있었다. 그는 빨랐고, 무척이나 빨랐는데 하필이면 지칠 줄 모르는 체력도 겸비했으니 상대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공격형과 수비형을 가리지 않고 척척 해낼 수 있었던 이유다. 요컨대 유형이 다른 출중한 2명의 미드필더, '패스의 달인'과 '드리블의 달인'이 동시에 지키던 1970년 브라질대표팀은 허리부터 상대를 압도했다. 수비라고 다르지 않다.

카푸의 우상이자 당시 캡틴으로 팀을 이끌었던 라이트백 카를로스 알베르토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1970브라질대표팀은 무게감이 상당하다. 왼쪽의 에베르알도는 알베르토 때문에 빛이 바랜, 레프트백의 교과서라 불리던 특급풀백이었고 그리고 철의 장벽을 구축한 브리토와 피아짜의 센터백 조합 그리고 전설적인 골리 길마르의 뒤를 이어 안방을 사수했던 펠릭스까지 짱짱했던 수비라인이다. 양이 넘쳐 빠르게 소개했지만 하나하나 브라질 축구가 자랑하는, 축구사에 빛나는 위대한 수비수들이었다.

이쯤 소개했으면 구구절절 대회 과정을 언급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못 미더울까 싶어 간단히 정리한다. 이들과 함께 브라질이 1970년 멕시코월드컵에서 남긴 성적은 6전 전승 우승이다. 월드컵 역사 속에 무승부나 패배 없이, 내리 승리만 거듭하면서 정상에 오른 경우는 원년대회의 우루과이(4승)와 1938월드컵에서의 이탈리아(4승) 그리고 1970년 브라질뿐이다. 하지만 경기수도 다르고 안팎의 형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1930년대와는 수준이 달라졌음을 어렵지 않게 상상한다면 저울질할 때 고려해야한다. 덧붙인다면, 본선에 오르기 위한 과정이던 남미예선에서도 브라질은 6전 전승으로 내달렸으니 그야말로 거칠 것 없었다. 역사가 왜 그들을 '지상 최고의 팀'으로 기억하는지, 남겨진 발자국이 그대로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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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베켄바우어가 이끌던 위대한 군단(1974월드컵 서독대표팀)
 
전차군단 독일은, 과거 서독 시절을 포함해 소위 단기전의 강자로서 입지를 단단하게 다지며 유럽 축구를 그리고 세계 축구계를 오래도록 호령해왔다. 다소 투박한 스타일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이 적지 않지만 그들은 분명 승리하는 법을 알고 있었고 이는 토너먼트 대회에서 보다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를 토대로 한 월드컵에서의 발자취 역시 단연 돋보이는 독일이다. 
 
통산 우승 횟수 3회는 브라질(5회)과 이탈리아(4회)에 이어 3위에 해당하지만 결승에 오른 횟수(7회)만으로는 최다이다. 지금껏 15번 본선무대를 밟아 단 한 차례도 8강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을뿐더러 그 중 4강까지 오른 것이 무려 11번이니 과연 단기 승부의 강자다운 행보다. 특히 월드컵 역사상 3회 연속(1982․86․90) 결승에 오른 국가는 브라질(1994․98․2002)과 함께 독일뿐이니 그들에게 < theTeam > 이라는 상징적인 닉네임이 붙여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특히, 자신들의 안방에서 통산 2번째 월드컵 정상을 경험하던 1974년 월드컵대표팀은 이러한 독일축구의 위대한 역사 속에서도 가장 강력한 빛을 내던 시기였다.
 


완벽한 팀 밸런스
 
축구사가 기억하는 위대한 리더들은 많이 있었다. 멀게는 축구종가에 첫 월드컵 트로피를 안긴 잉글랜드의 캡틴 보비 무어가 그렇고 가깝게는 브라질의 둥가, 프랑스의 데샹, 이탈리아의 바레시와 말디니 그리고 대한민국의 홍명보까지, 11명을 하나로 만들어 달콤한 결실을 맺게 했던 현명한 지도자들이 적잖다. 하지만, 프란츠 베켄바워라는 인물을 빼놓고 축구판의 리더십을 논할 순 없다는 생각이다.

'팀'이라는 개념에서 가장 완벽한 밸런스를 유지한 것은 앞서 < 월드컵 클래식팀 > 을 통해 소개했던 푸스카스-콕시스의 1954년 무적의 마자르 헝가리나 펠레라는 축구신과 다른 축구신들이 모여 가공할 공격력을 과시했던 1970브라질대표팀보다 1974년의 서독이 낫다는 생각이다. 스쿼드 요소요소 빼어난 능력을 과시했던 인물들이 수두룩하나 역시 베켄바워의 공을 간과할 수 없다.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 상징적 수식어인 '황제'라는 찬사를 받았던 프란츠 베켄바워가 이끈 위대한 군단, 그래서 하늘이 내렸다는 재능의 요한 크루이프가 버틴 오렌지 토털사커마저 쓰러뜨린 1974월드컵의 챔피언. 축구사는 그들을 위대한 팀이라 부른다.

준비된 우승
 
베켄바워라는 영웅의 등장과 함께 지난 두 차례의 월드컵에서 각각 준우승(1966)과 3위(1970)를 차지했던 서독은 여세를 몰아 1972년 유럽선수권에서 소련을 3-0으로 완파하고 정상에 등극하는 등 1974월드컵의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손꼽혔다. 개최국 이점을 떠나 일단 멤버가 짱짱했다. 단적인 예로, 1972년 유럽 올해의 선수상(발롱도르) 투표에서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귄터 네쳐 등 서독대표팀의 주축 3총사가 나란히 1~3위에 올랐을 만큼 인재들이 차고 넘쳤던 스쿼드다. 1973-74시즌 유러피언컵(챔피언스리그의 전신)에서 베켄바워가 이끌던 분데스리가의 자존심 바이에른 뮌헨이 독일 클럽으로서는 사상 최초로 꿈의 무대를 제패하면서 월드컵 우승에 대한 기대감은 더더욱 커졌다.

그들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당시 A매치 기록으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서독은 1970멕시코월드컵을 3위로 마감한 이후 그해 11월 그리스 원정(2-0승)을 시작으로 근 2년에 걸쳐 17전 14승2무1패(43골8실점)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거의, 다 이겼다는 뜻이고 경기당 평균 2.68골을 넣고 불과 0.5실점만을 허용했을 뿐이니 대단한 위력이었다. 역시나 스쿼드 요소요소를 화려하게 밝혀 주었던, 게르만 축구사의 화려한 별들 덕분이다.

언급하는 족족 전설이었다. 철의 수문장이라 불리던 제프 마이어가 골문을 지킨 것을 시작으로 강력한 대인마크 능력을 자랑했던 '사냥개' 베르티 포그츠, 서독 최고의 유틸리티맨 폴 브라이트너, 탁월한 수비능력으로 베켄바워의 활동 범위를 넓혀준 '황제의 보디가드' 한스-게으로그 슈바르첸벡, 비범했던 왼발로 경기를 풀어나갔던 플레이메이커 볼프강 오베라트, 강력한 프리킥 능력의 소유자였던 윙백 라이너 본호프, 창조적인 움직임이 일품이던 울리 회네스, 측면에서 발군의 플레이를 보여주었던 특급날개 위르겐 그라보프스키, '원조 득점기계' 게르트 뮐러와 그의 파트너 베른트 홀첸베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룡점정인 위대한 '황제' 프란츠 베켄바워까지, 그야말로 흠잡을 데가 없던 면면이다.

축구사가 인정하는 리더(베켄바워)와 골잡이(뮐러)가 앞뒤에서 이끌고, 주전 대부분이 2번의 월드컵 무대를 통해 경험을 쌓은 28~31살의 전성기였다는 사실까지, 당시 서독은 우승에 필요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으며 객관적인 전력에서 비교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토털싸커를 잠재우다
 
그야말로 허점이 없었던 베켄바워의 서독이었기에, 만약 결승전 상대가 '그냥 그랬던' 팀이었다면 아마도 그 빛이 약간은 바랬을 수도 있다. 그냥, 당연한 듯 우승컵을 가져왔다면 다소 심심할 것을 걱정했던지 월드컵의 신은 그들의 마지막 파트너로 기가 막힌 이들을 선택했다. 베켄바워에 버금가는 영웅, '필드의 혁명가' 요한 크루이프가 이끌던 네덜란드 대표팀이 그들이었다.

네덜란드는 크루이프를 앞세워 아르헨티나(4-0) 동독(2-0) 브라질(2-0) 등을 차례로 완파하는 등, 1938프랑스월드컵 이후 36년간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던 팀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기세로 승승장구하면서 '토털싸커' 열풍을 몰고 왔다. 결국 마지막 승부로 성사된 서독과 네덜란드의 결승전은 안방에서 방점을 찍고 천하를 통일하려던 개최국과 대회 최고의 이슈메이커의 맞대결, 그리고 프란츠 베켄바워와 요한 크루이프라는 양웅의 정면충돌이라는 점에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1974년 7월14일 결승전이 열린 수도 뮌헨의 올림피아스타디온에는 약 7만5천명이 넘는 구름관중이 모여들었다. 베스트멤버가 총출동한 양 팀의 경기는 시작부터 줄곧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는데, 기선을 제압한 것은 네덜란드가 먼저였다. 크루이프가 화려한 개인기로 경기시작 2분 만에 PK를 얻어냈고 이를 니스켄스가 성공시키면 장군을 불렀다. 하지만 전반 25분 서독 역시 베켄바워의 패스를 이어받아 단독 돌파를 시도하던 홀첸베인이 태클에 넘어지면서 역시 PK를 얻어내 멍군을 불렀다. 1-1. 하지만 승부의 추는 머잖아 기울어졌다. 전반전이 끝나갈 무렵 서독의 본호프가 1대1 돌파로 네덜란드의 좌측면을 무너뜨렸고 그의 패스를 받은 뮐러가 환상적인 터닝슈팅으로 역전골을 뽑아낸 것이다.

뮐러 통산 14번째 월드컵 개인득점이 결국 조국에 2번째 월드컵을 안긴 결승골이 되었다. 반면, 커리어 유일한 월드컵에서 정상까지 내달리려던 크루이프와 토털싸커의 꿈은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한 채 물거품 되고 말았다. FIFA는 그런 크루이프에게 대회 MVP를 수여하면서 위로했으나 가장 중요한 우승컵은 황제 베켄바워의 몫이었다. 그리고, 1972년 유럽선수권에 이어 1974월드컵까지 차지한 서독은 명실상부 당대 최강으로 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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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탈사커' 축구계 혁명 일으키다 (1974년 네덜란드)
 
'월드컵 클래식팀' 코너의 첫 번째 선택은 1954년 스위스월드컵 준우승팀인 '무적의 마자르' 헝가리였다. 당시 그들을 소개하기에 앞서 이런 설명을 했었다.

《월드컵의 역사를 수놓은 수많은 팀들 가운데 딱 10팀만을 추려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꼽아야한다니 선정부터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응당 기준은 성적이어야겠고 그렇다면 우승은 필수에 가까운 조건이다. 2006년 독일월드컵까지 우승팀만 18개 팀인지라 최소 8팀은 '클래식팀'에 이름조차 올릴 수 없다. 그런데 나머지 10팀도 무혈입성은 불가능하다. 지금부터 소개할 이런 팀이 있기 때문이다. (중략)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서 준우승에 그친, 그러나 '무적의 마자르' 혹은 '매직 마자르'라 불린 헝가리대표팀이다.》

우승팀보다 특별했던 2등 '무적의 마자르' 때문에 적잖은 1등은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헝가리만 유달랐던 것은 아니다. 1등만 아니었을 뿐 최고였던 2등이 또 있으니 바로 지금부터 소개할 1974년 월드컵 준우승팀인 네덜란드대표팀이다.

미첼과 토털싸커

능히, 역대 월드컵 최고의 팀으로 손색없는 전력을 갖췄었고 실제 최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시대를 앞서갔던 '토털사커'의 아버지 리누스 미첼 감독과 감히 누군가와 견줘지기를 거부했던 요한 크루이프를 필두로 롭 렌센브링크, 루드 크롤, 요한 니스켄스, 아리에 한까지 차고 넘쳤던 스쿼드는 그네들의 유니폼 색깔처럼 화려했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저 월드컵 트로피를 품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베켄바워의 서독이 아니었다면 응당 1인자가 어울렸던 그들이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강렬한 잔상이 남는지도 모르겠다.


1970년대 네덜란드 축구를 이야기하려면 먼서 리누스 미첼이라는 위대한 지도자와 그가 집대성한 '토털사커'의 개념을 짚고 가는 게 순서다.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다. 사실 딱히 어려운 개념은 아니다. '전체'라는 단어가 들어갔듯 토털사커는 '전원공격, 전원수비'를 모토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 말 그대로 실천한다는 전술이다. 요컨대 누구는 방어만 하고, 누구는 허리 진영에서만 움직이며, 누구는 최전방에서 골 사냥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골키퍼를 제한 필드플레이어들은 누구라도 수비수로, 미드필더로, 공격수로의 즉각적인 변화가 가능해야한다는 이론이다. 물론, 정신없는 포지션 체인지 와중에도 일정한 전형을 유지해야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으니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지금으로서도 어지간한 수준이라면 마음먹기조차 어렵고, 따라서 정해진 포지션을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던 때였으니 충격적인 등장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미첼과 그의 제자들은 이를 능수능란하게 펼쳤다는 점이다. 물론 '토털사커 센세이션'을 미첼만의 공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미첼의 '페르소나' 요한 크루이프라는 이름이 나와야 자연스럽다.
 
미첼의 아이들
 

 

 
축구팬이라면, 요한 크루이프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남미의 자랑이 펠레와 마라도나로 귀결된다면, 서독의 카이저 베켄바워와 함께 유럽의 자존심을 지켜준 인물이 바로 크루이프다. 아약스를 이끌고 챔피언스리그 3연패(1971~73)를 달성하며 발롱도르를 3회(1971, 72, 74) 수상했으며 지도자로 변신한 이후로도 '원조 드림팀' 바르셀로나를 이끌며 1991~94년 라리가 4연패와 1992년 챔피언스리그 정상을 정복했으니 그야말로 위대했던 축구인이다. 이쯤이면 화려함으로는 누구와 견줘도 당당한 커리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유일하다싶은 아쉬움인 월드컵 트로피를 품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 베켄바워는 언젠가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크루이프가 나보다 나은 선수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월드컵을 제패했다."

 


미첼이라는 위대한 지도자로 인해 혁신적인 개념의 토털사커가 탄생했지만, 크루이프라는 천재 플레이어가 없었다면 토털사커는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실상 위대한 지도자 미첼과 위대한 플레이어 크루이프만으로 실상 1974년 네덜란드대표팀의 위력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워낙이 일당백인지라 둘의 존재감으로도 당당했는데, 그렇다고 다른 이들을 '나머지'로 표현하기에 당시 네덜란드대표팀에는 천부당만부당한 인물들이 수두룩했다.

수비의 핵은 단연 루드 크롤인데, 토털사커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만큼 막대한 비중을 차지했던 인물이다. 1974대회에서는 왼쪽풀백으로, 1978월드컵에서는 센터백으로 나서 준우승 2연패를 이끌었던 크롤은 수비수에게 수비만을 요구하지 않았던 미첼 감독의 뜻에 따라 좌우 횡적인 움직임 뿐 아니라 종으로의 공격가담 능력도 수준급이었다. 1978년 월드컵에서는 캡틴으로 리더 역할까지 했으니 토털사커의 척추였다 해도 과언 아니다. 허리라인으로 올라오면 요한 니스켄스와 아리에 한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아리에 한은 크루이프로부터 '철의 다리'라 불리었던 인물로 장거리슈팅이 상당히 위력적이었고 중요한 순간 곧잘 골까지 기록했던 쓰임새 많은 요원이었다.

아리에 한이 크루이프의 디딤돌이었다면 니스켄스는 파트너이자 조력자였다. 'Johann the second'이라는 닉네임이 붙을 만큼 크루이프와의 호흡은 찰떡궁합이었다. 방대한 활동량과 크루이프에 버금가는 재능을 지녔으니 1970년 이후 10년 동안 네덜란드 대표팀 중원의 한자리는 늘 그의 몫이었다. 크루이프가 마음껏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비슷한 센스로 박자를 맞춰주었던 니스켄스의 공이 적잖고, 크루이프가 주연으로 빛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림자처럼 뒤를 받쳐준 니스켄스의 영향이 지대하다.

니스켄스가 2선에서 크루이프를 도왔다면 전방에서는 감각적인 윙포워드 롭 렌센브링크가 짝을 이뤘다. 특히 왼쪽에서 빛났던 렌센브링크는 여느 동료들과는 다르게 커리어의 대부분을 벨기에리그에서 보냈다. 안더레흐트가 2차례 컵위너스컵(1976∙78)을 차지했을 때 공히 결승전 결승골을 터뜨렸을 만큼 큰 경기에, 찬스에 강했던 해결사다. 크루이프가 워낙 대단했을 뿐, 다른 이들도 결코 못지않았던 화려한 스쿼드다.

짙은 여운을 남기다
 
소개한 이들과 함께, 1974년 월드컵에서 오렌지군단은 정말이지 완벽에 가까운 내용과 결과를 선보였다. 네덜란드는 스웨덴 불가리아 우루과이와 함께 묶인 1차 라운드에서 2승1무를 거두고 가볍게 1위로 통과했다. 스웨덴과 0-0으로 비긴 것이 옥에 티고 4-1로 불가리아를 대파할 때 그 뛰어난 루드 크롤이 자책골로 실점을 헌납했다는 게 또 다른 티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그리고 동독과 함께 묶였던, 더 험난했던 2차 라운드는 차라리 완벽이었다. 아르헨티나를 4-0으로 셧아웃 시키더니 동독과 브라질 역시 각각 2-0으로 무릎 꿇렸다. 요컨대 서독과의 결승전을 앞둔 6경기에서 14골1실점이라는 짱짱한 기록을 남겼는데, 결국 1실점도 자책골이니 자신들만 15골을 터뜨린 셈이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토털사커, 전원공격 전원수비'라는 기치를 들고 나온 미첼의 네덜란드를 바라보는 세계 축구계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이다. 그렇게 승승장구했지만, 미첼의 네덜란드는 정작 결승에서 서독에게 1-2로 무너졌다. 구구절절 결승전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딱히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네덜란드로서는 너무나도 아쉬운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래도 별 수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2인자의 꼬리표였다.

챔피언이라는 칭호도, 트로피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최고였다. 크루이프와 함께 단 한 번밖에 펼쳐 보이지 못했던 그때 그들의 퍼포먼스를 월드컵의 역사가 잊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미첼과 미첼의 아이들이 보여준 환상적인 경기력이 경탄스러운 까닭이다. 누군가 "토털사커는 전술의 발전이 아닌 혁명적 발견"이라는 말을 했었다. 이것이 1974네덜란드대표팀의 아우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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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방법'을 알았던 아주리군단(1982)
 
푸른 바다 색깔을 의미하는 '아주리 군단'이라는 수식과 어찌나 단단한지 빗장을 걸어 잠근 것 같다는 '카테나치오'로 유명한 이탈리아는 월드컵이든 유럽선수권이든, 메이저대회를 앞두고 늘 우승후보로 손꼽히는 자타공인 축구계의 강호다. 하지만 브라질이나 독일을 바라보는 느낌과는 다소 다르다. 실상 이탈리아는, 자신 있게 우승후보라고 꼽는 뉘앙스보다는 그들을 제외시키는 것을 주저하는 쪽에 더 가깝다. 이는, 그들이 어떤 상대든 무릎을 꿇리고 승승장구해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시나리오는 미심쩍어도 이탈리아가 누구에게 쓰러지는 그림을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요컨대 그들은 태생적으로 단기전에서 살아남는 법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모두가 인정하는 단단한 빗장수비가 있다. 자고로 이기는 것보다 지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토너먼트이고 그렇다면 수비가 강한 팀이 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 확률이 높다. 오죽하면 "공격이 강한 팀은 경기에서 승리 할 수 있지만 수비가 강한 팀은 우승할 수 있다"는 말이 나왔을까. 실제로 정상을 밟았던 2006월드컵에서 이탈리아는 7경기를 치르는 동안 단 2골만을 허용했을 뿐이다. 그것도 하나는 자책골이요 다른 하나는 PK였으니 과연 카테나치오라는 말이 나올법한 철옹성이다. 독일월드컵의 이탈리아가 유별났던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이탈리아대표팀이 가장 단단했던 때는 디노 조프라는 백전노장 골리가 뒤를 받치던 1982월드컵이었다.
 
조별예선 3무→우승?
 

 

통산 월드컵 4회 우승에 빛나는 이탈리아는 펠레를 앞세웠던 1958․62대회 챔피언 브라질과 더불어 유이하게 월드컵 2연패 기록을 가지고 있다. 초창기였던 1934․38월드컵에서의 금자탑인데, 하지만 이후 오래도록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인류의 비극이던 세계 2차 대전 발발의 영향으로, 특히나 '패전국'이던 이탈리아는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의 부진이 모두 전쟁의 탓이라고 돌릴 수는 없으나, 어쨌든 이탈리아 축구는 1950년 월드컵부터 내리 5차례나 쓴잔을 마신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주리 축구사의 암흑기인 셈이다.

그러던 이탈리아가 다시 강호다운 모습을 되찾은 것이 1970년 월드컵이다. 줄리메컵의 영구소유권까지 달려있던, 각각 2차례 정상을 밟았던 브라질과의 결승전에서 1-4로 대패하면서 아쉽게 2위에 머물렀으나 다시 기력을 회복했다는 것으로도 고무적인 결과다. 1974년 대회 조예선 탈락으로 잠시 주춤, 그러나 4년 뒤인 1978년 월드컵에서 재차 4강에 진입하면서 확실하게 숨을 고른 이탈리아가 1982년 월드컵에서 비로소 높게 비상한다.

아주 흥미롭게도, 스페인월드컵 우승팀 이탈리아는 조별라운드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3전 3무. 의아할 일이지만 사실이고 이는 지금까지도 우승팀 과정 속에는 이탈리아가 유일하다. 당시의 아주리군단은 폴란드와의 첫 경기에서 득점 없이 비긴 것을 시작으로 이후 페루와 카메룬전을 각각 1-1로 끝마쳤다. 폴란드에 이어 조2위로 간신히 2차 라운드에 진출했으니 그네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대단치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턱걸이 이후 전혀 다른 팀이 됐다.
 
미운 오리 로시, 백조가 되다
 

 


1차 예선에서 '지지 않은 팀'의 전형을 보여주던 아주리 군단이 고비를 넘기고서는 '이기는 팀'으로의 면모까지 갖추게 된다. 그것도 아르헨티나(2-1) 브라질(3-2) 폴란드(4강/2-0) 등 강호들을 난타전 끝에 제압했으니 제법 놀라운 결과였다. 특히 펠레스코어로 짜릿하게 승리했던 브라질과의 경기는 백미로 꼽힌다. 스코어가 말해주듯 명승부였는데 특히 이 경기는, 대회 최고의 별로 등극한 스트라이커 파올로 로시가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더욱 강한 임팩트를 남겼다. 말이 나온 김에 로시 이야기부터 정리하겠다.

실상 로시는 대회 출전조차 불투명했던 선수였다. 1977-78시즌 세리에A 득점왕(24골)에 오르는 등 탁월한 골잡이로 명성을 날리다가 1980년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되면서 2년간 출전정지를 당하는 등 천국과 지옥을 오가야했다. 따라서 필드를 밟지도 못하던 선수를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 부르려했던 감독의 뜻에 적잖은 이들이 반기를 든 것이 이상할 것 없었다. 하지만 당시 아주리 군단을 이끌던 베아르조 감독은 "로시만큼 기회 포착이 뛰어난 선수는 없다"는 단언과 함께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본선 직전에 로시를 불러들인 그의 선택은 탁월했다.

다시 대회로 돌아온다. 이처럼 우여곡절을 겪었던 로시가 바로 중요한 분수령이던 브라질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으니 베아르조 감독은 더없이 흐뭇했을 것이다. 월드컵 역사상 브라질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한 선수는 입때껏 로시밖에 없으니 더욱 빛났던 활약이다. 조별라운드에서 내내 침묵하다 한꺼번에 폭발한 로시는 폴란드와의 준결승에서도 2골을 몰아쳤고 독일과의 결승에서도 1골을 추가, 결국 대회 우승의 1등 공신이자 득점왕(6골)까지 등극하는 겹경사를 누렸다. 미운 오리에서 일약 백조가 된 순간이다.

과연 카테나치오
 


로시라는 '롤러코스터' 공격수를 앞세워 결국 이탈리아는 결승에서 전차군단 득점기계의 적자인 루메니가가 이끌던 서독을 3-1로 완벽하게 제압, 44년 만에 월드컵 트로피와 재회했다. 브라질과 함께 통산 3회 우승 국가로 올라섰으며 이탈리아의 우승으로 12번 월드컵의 정상을 유럽과 남미가 다시 6번씩 나눠가지는 팽팽한 힘의 균형도 맞춰졌다.

득점왕까지 차지한 로시가 응당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나 로시에 의존했던 전력은 결코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당시 이탈리아도 창보다는 방패가 강했던 팀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까지 유벤투스의 전성기대를 이끌었던 센터백 클라우디오 젠틸레, 젠틸레와 함께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늘 호흡을 함께했던 레프트백 안토니오 카브리니, 프란츠 베켄바워와 견줄 수 있을 정도의 위대한 리베로였던 가에타노 시레아, 오로지 인터밀란에서만 커리어를 소화했고 AC밀란의 레전드 프랑코 바레시와 함께 이탈리아 수비의 쌍웅으로 불리던 주세페 베르고미 그리고 1982월드컵 결승전에서 전차군단을 패퇴시킨 결승골의 주인공으로 넘치는 파워와 태클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강인한 수비형MF 마르코 타르델리까지, 과연 '카테나치오'라는 명성이 손색없는 스쿼드였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캡틴이자 기둥이던 골키퍼 디노 조프다.


앞선 3번의 월드컵에서 내내 쓴 잔을 마셨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고 결국 마흔이라는, 축구선수로는 더욱더 놀라울 나이에, 그것도 이탈리아대표팀의 No.1 골키퍼로,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는 사실만으로 조프라는 위대한 수문장의 아우라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톱클래스 선수란 굳이 타고나지 않아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실천했던 '불혹의 골리'와 함께 이탈리아는 쓰러지지 않는 근성으로 월드컵을 제패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는 방패를 지녔던 이들이 서서히 남을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까지 깨우치면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랐던 1982년 월드컵의 이탈리아 대표팀. 단단함으로 따지자면 그때 그들보다 더한 이들을 월드컵사에서 찾기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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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태양 마라도나, 세상을 호령하다(1986월드컵 아르헨티나대표팀) 
 
다음은 누구일까요?

< 등번호 10, 신의 기술이라 불리던 드리블, 혼자만의 힘으로 경기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인물, 필드를 지배했던 카리스마, 선수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의 집중견제와 덕분에 현역시절 내내 따라다녔던 크고 작은 부상, 남미대륙이 자랑해마지않는 최고의 스타, 필드 안팎에서 끊임없이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뉴스메이커, 숱한 추종자들의 변치 않는 우상 그리고, 축구계의 영원한 아이콘... >
 

 
이 어마어마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인물이 있다는 것도 놀랍고 그것도 2명이라는 것은 놀라자빠질 일이다. 한명은 '축구황제'로 통했던 브라질의 펠레요 다른 이는 아르헨티나의 '신의 아이' 디에고 마라도나다. 하늘의 태양은 하나인 법인데 축구신은 두 개의 태양을 모두 사랑한 모양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축구계의 거목이고 영원히 저울질이 불가능할 라이벌이다. 펠레가 이끌었던 1970월드컵의 브라질을 앞서 클래식팀으로 소개한 바 있으니 마라도나가 판을 접수했던 1986년의 아르헨티나를 건너 뛸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펠레라는 태양이 1970년 하늘로 솟아 멕시코월드컵을 환히 비췄다면 또 다른 태양 마라도나는 1986년에 판을 접수했다. 공교롭게도, 마라도나라는 태양이 초점을 맞춘 땅도 멕시코였다.

아르헨티나, 판을 새로 짜다

1986년 멕시코 땅에는 수많은 축구스타들이 모여들었다. 프랑스의 미셀 플라티니를 비롯해 독일의 칼-하인츠 루메니게와 로타르 마테우스, 브라질의 소크라테스와 지코, 이탈리아의 브루노 콩티, 잉글랜드의 게리 리네커, 벨기에의 엔조 시포 등 축구사와 월드컵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선수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1986월드컵하면 떠오르는, 당시의 기억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직 디에고 마라도나와 아르헨티나라고 해도 과언 아니다. 그만큼 '신의 아이(신동)'라는 마라도나의 활약상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고 모두를 공감하도록 만들었다. 1970년 월드컵의 펠레 이후 또 하나의 태양이 판을 좌우했다는 놀라운 사실만으로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는 후한 평가가 아깝지 않다. 그런데 어디 마라도나 뿐이었으랴. 당시 아르헨티나 대표팀에는 발다노, 부루차가, 루게리 등 마라도나 때문에 가려졌을 뿐 환하게 빛나던 별들이 수두룩했으니 월드컵사 최강의 팀이라는 데 손색없다.

1982스페인월드컵에서 마라도나와 함께 하고도 2라운드에서 탈락했던 아르헨티나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꼬박 10년간 대표팀을 이끌며 그 사이 1978월드컵 우승까지 차지했던 명장 세자르 메노티 감독을 경질시키고 국가대표 지도경험이 전무한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기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빌라르도 감독은 깜짝 발탁만큼이나 과감한 변화를 이끌었는데, 변화의 핵심은 세대교체였다. 그는 발다노(FW) 보치니, 트로비아니(이상 MF) 파사렐라(DF) 등 포지션별 핵심선수만을 남긴 채 전임 메노티 감독이 중용 했던 자원들을 모조리 교체하면서 밑그림부터 새로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임 감독의 색깔을 지우는 와중에도 빌라르도 감독은 부상으로 3년 가까이 대표팀을 떠나 있었던 마라도나의 존재만큼은 잊지 않았다. 참고로 빌라르도 감독은 전임 메노티에 비해 수비를 두텁게 한 후 카운트어택을 노리는 안정적 성향의 전술을 선호했다. 따라서 이를 효과적으로 구사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카운트어태커가 필요했고 마라도나가 적임자였던 것이다. 결국 마라도나는 빌라르도 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축구천재의 합류와 함께 멕시코월드컵을 호령할 역사적인 1986아르헨티나대표팀이 출항하게 되었다.
 


신의 손 사건

아르헨티나는 본선에서 아주리군단 이탈리아, 발칸의 불가리아 그리고 아시아에서 온 대한민국과 한 조에 속했다.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한국과 불가리아가 모두 각각 32년과 12년만에 본선무대를 밟은 상태였으니 조별예선 통과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예상처럼 아르헨티나는 한국과의 첫 경기에서 도움 2개를 올린 것을 시작으로 3경기 연속 공격포인트(1골3도움)를 기록한 마라도나의 활약을 앞세워 2승1무, 조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3-5-2 전술을 기본으로 삼았던 아르헨티나의 강력한 압박과 수비는 큰 효과를 발휘했고 고비 때마다 득점에 성공한 브루차가-발다노의 활약은 위력적이었으며, 역시 마라도나는 마라도나였다. 과연 우승후보 아르헨티나는 강했다.

16강에서 까다로운 이웃나라 우루과이를 1-0으로 제압한 아르헨티나는 8강에서 '앙숙' 잉글랜드와 운명적으로 조우했다. '탱고군단'과 '축구종가'의 만남은 대회 최고의 관심사로 떠올랐고 마라도나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이 경기에서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장면을 두 번이나 연출하며 새로운 축구황제 대관식을 성공리에 마쳤다.

이 경기에서 그 유명한 '신의 손' 사건이 나온다. 공을 향해 뛰어오른 골키퍼보다 앞서, 교묘하게 심판의 눈을 속여 손으로 공을 건드렸고 마라도나의 그 슈팅(?)은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잉글랜드 선수들은 길길이 뛰었으나 심판은 모두 보지 못했다. 경기 후 기자회견을 통해 마라도나 역시 "그것은 신의 손이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반칙을 인정했지만 이미 판정번복은 물 건너 간 상황이었다. 만약 이것으로 그 경기가 그대로 끝났으면 마라도나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의 손' 사건 이후 정확히 5분 후 마라도나는 자신의 능력으로 다시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중앙선 부근에서 공을 잡은 마라도나는 50m를 혼자 치고 들어가며 수비수 6명에 골키퍼까지 제치고 추가골을 작렬, 모든 잡음을 일순간에 잠재웠다. 월드컵사에 가장 기괴한 에피소드골과 가장 위대한 골을 동시에 만들었으니 마라도나는 펠레와 견주는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 아니었다.
 

 
흠 잡을 데 없는 우승
 
약관의 신예 엔조 시포를 앞세워 대회 최대의 돌풍을 일으키던 벨기에와의 4강에서도 마라도나는 원맨쇼급 활약으로 2골을 몰아쳐 아르헨티나를 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서독과 만난 파이널 무대에서도 마라도나의 활약은 멈추지 않았다. 2골을 먼저 넣으면서 손쉽게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듯 했으나 루메니게와 펠러에게 2골을 내리 허용하면서 2-2 팽팽하게 흐르던 순간, 마라도나가 승부의 쐐기를 박는 그림 같은 어시스트를 성공시키면서 3-2, 아르헨티나의 우승이 확정지어졌다. 탱고군단이 통산 2번째 월드컵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순간이다. 16강부터 결승까지 연장이나 PK득점 승부차기 등 없이 깔끔하게 이룬 우승이었고 마라도나는 흠잡을 데 없는 플레이로 찬사를 받았다.

사실 팀 전체의 공수 밸런스가 이상적이었다. 마라도나의 잔상이 워낙 강렬한 탓에 1986년 아르헨티나대표팀은 팀으로서의 가치가 다소 퇴색되어 보인다. 월드컵 역대 최고의 팀을 선정할 때 뒷전으로 밀리는 감도 없지 않다. 하지만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마라도나를 비롯해 그의 멋진 동료들이 만들어낸 하모니는 그 어떤 팀과 견줘도 당당한 수준이다. 마라도나와 마라도나 만큼 뛰어난 선수들이 만들어낸 축구의 모든 것. 1986아르헨티나대표팀은 월드컵 클래식팀으로 전혀 하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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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임성일 기자( lastuncle@soccerbest11.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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