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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Tour - China

민족 뿌리찾기 역사기행 (한겨레)

by Wood-Stock 2009. 8. 29.

 

‘민족 뿌리 찾기’ 법륜스님 역사기행 <상> 만주벌판 - 하늘이 내어준 요새 졸본, 물에 잠자다

 

거대한 댐에 고구려의 숨결은 고스란히 수몰
유일하게 남은 발해 영광탑은 광야서 피울음

 

지난 2일부터 9일까지 7박8일간 매일 새벽 3~4시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만주벌판 2천여㎞를 누볐다. ‘좋은벗들’과 평화재단 이사장인 법륜(정토회 지도법사) 스님이 이끄는 90여명의 탐방단과 함께였다. 법륜 스님은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필리핀 민다나오 등에서의 구호활동으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국제적 인도주의실천운동가이면서, 다른 한편에선 우리 민족의 뿌리 찾기에도 남다른 열정을 불태워왔다. 남북이 하나로 만나기 위한 열쇠는 ‘이념’이 아니라 원래 한뿌리였던 ‘역사’라고 보는 그는 1995년부터 한해도 빼지 않고 15년째 만주벌판을 누비며 ‘민족의 뿌리 찾기’ 역사 기행을 이끌어왔다. 그의 역사기행은 죽은 뒤의 극락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우리 스스로 정토로 만들어가는 보살도를 실천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만주 2000km, 민족의 뿌리를 찾아서

 

 

철벽 요새도 마음에 틈새가 생기면 한순간에 와르르

 

반도에서 천리 길인 심양공항에서 내려 순례단이 찾은 첫 고구려 유적은 요녕성 요양 동쪽 백암산성이다. 도도히 흐르는 태자하 강가의 한적한 시골마을 옥수수밭 너머 초원 위에 올라선다. 아직도 고구려의 기상은 죽지 않은 것인가. 400여미터나 튼실하게 10미터 높이로 쌓인 산성이 1500여년 간 흔들림 없이 서있다. 흙을 섞는 일반적인 산성과 달리 돌로만 쌓은 것이다. 평지에서 살다가 전시가 되면 적군에 맞섰던 곳이다. 정상에 올라서니 한쪽은 강고한 성이요, 왼쪽 태자하강 쪽은 절벽이다. 하지만 어떤 요새도 마음의 틈새가 생기면 무력해는 것인가. 당태종에게 고구려의 요동성이 함락됐다는 소식만 듣고 성문을 열어줘버린 백암산성의 무력함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도 당태종 이세민의 50만 대군을 격퇴한 양만춘의 안시성 결전과 비교돼 천년 넘게 회자되고 있다. 문제는 결국 의지이며, 정신인가. 지금 우리의 의지는 백암산성일까, 안시성일까.

 

» 백암산성을 돌아보는 탐방단.

고구려 패망의 아픈 역사 현장을 떠나 70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려 향한 곳은 오녀산성이다. 환인이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손 사상’을 지녔던 이들을 위해 특별히 내어준 땅일까.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졸본성이 선 오녀산성이 있는 곳의 지명이 우리 민족의 시원과 동명인 ‘환인’이다. 환인의 비류수(혼강)을 지나니 거대한 댐이 가로막고 있다. 졸본성을 둘러싼 저 댐 건설과 함께 수많은 고구려의 역사도 수몰됐다. 600~800m 고도의 평지에 있는 졸본성을 향한 산길은 40~50도의 경사로여서 탐방객의 숨결이 거칠어진다. 나머지 삼면은 천길낭떠러지다. 따라서 정상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 이 정도이니 졸본성이야말로 주몽을 위해 하늘이 감춰둔 ‘천혜의 요새’가 아닐 수 없다.

 

만주의 어원은 지혜와 용맹의 상징인 문수보살

 

» 장군총

주몽의 아들 유리왕이 옮긴 국내성 옆 칠성산의 환도산성도 3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하요새다. 20대 장수왕까지 400여년 간 고구려 정치의 중심지 국내성 옆에선 여전히 압록강과 통구하의 물이 만나 어우러지고 있다.

 

1100개의 큰돌로 쌓아 ‘동양의 피라미드’라는 장군총과 거대한 돌비석 광개토대왕비와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춤추는 고분 벽화에서 잃어버린 고구려의 웅혼을 만나면 고조선의 광대한 영토를 되찾겠다는 고구려인의 ‘다물’은 커녕 옛고구려의 변방마저 지키지 못한 역사에 탐방객들이 아파한다.

 

» 천혜의 요새 졸본성. 삼면이 낭떠러지다.

법륜 스님은 1960년대 경북 경주의 경주고 재학시절 영남불교학생회를 만들어 신라의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한 가정 한 기와 보존운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그는 ‘신라인의 후예’로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 신라의 문화유산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민족 역사의 정통성은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에 둔다. 수천년간 대륙을 무대로 이어져온 한민족의 역사를 반도 남쪽의 2천년 역사로 국한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역사 왜곡이라는 것이다.

 

이번 기행에 동행한 전남 보성 대원사 현장 스님은 ‘만주’라는 어원은 문수보살의 팔리어인 ‘만주시리’에서 왔다고 한다. 지혜와 용맹의 상징인 문수보살처럼 지혜롭고 용맹했던 우리의 조상들이 누볐던 곳이 바로 만주벌판이라는 것이다. 

 

서태지가 불렀던 ‘발해를 꿈꾸며’를 아프게 읊조리며

 

고구려를 계승했으면서도 한민족의 역사의식 속에서 더욱 더 멀어졌던 발해의 옛터전에 가면 탐방객들의 아픔은 배가되기 마련이다.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천리길을 가면 목단강 중류의 상경용천부에 발해의 옛수도가 있다.

 

» 발해의 옛 수도터.

» 발해인이 세운 절 중에 유일하게 흔적이 남은 흥륭사. 사진 오른편에 있는 석등은 높이가 5m로 보통 절에 있는 석등이 1~2m인 것에 비하면 매우 큰 편이다.

이곳에 발해인들이 세웠던 9개의 절 가운데 유일하게 흔적이 남은 절터인 흥륭사엔 보통 절집에 있는 1~2m 석등보다 훨씬 큰 5m 높이의 석등이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발해시대 주작대로의 폭은 110m였다고 한다. 서울 광화문 세종로의 폭이 100m이니 발해인들의 웅대한 스케일을 짐작할 만하다. 고구려 영토보다 두배나 넓었던 발해였다. 그래서인가. 발해에 대한 중국인들의 견제 또한 강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구려 유산과 달리 발해 유적에 대해선 아예 사진 촬영조차 금지시킨다. 반경 16㎞의 거대한 성인 상경성에서도, 대조영이 발해 건국의 씨앗을 뿌린 대석하 강가의 동모산에서도 중국 안전부 요원들과 공안들이 따라다니며 철저히 감시한다. 상경성 입구에 중국정부 흑룡강성에서 세운 푯말에 ‘발해는 흑수말갈이 세운 나라’란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불렀던 ‘발해를 꿈꾸며’를 아프게 읊조리며 찾은 인근 식당에선 조선족 한명 찾을 수 없음에도 달디 단 수박과 참외는 물론 배추김치와 무김치도 중국의 맛이 아닌 우리의 맛이 완연하다.

 

» 영광탑
중국의 장백과 무역거래를 하는 북녘 혜산을 내려다보는 길림성 백산시 장백현 탑산에 올라서면 우람한 영광탑이 서있다. 유일하게 남은 발해인들의 탑은 저기 압록강 너머로 쫓겨가버린 한민족을 건너다보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북녁동포가 배를 부여안고 넘었던 강물과 북쪽 땅을 내려다보아왔다. 누군가의 입에서부터 <광야에서>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땅의 피울음 있다/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의 핏줄기 있다/해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우리 어찌 가난하리오/우리 어찌 주저하리오/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진 뜨거운 흙이여”

 

한명 한명의 합창이 점차 내면의 의식으로 채워진다. 대륙의 기상을 잃어버린 채 반도에서마저 갈갈히 갈라진 우리들의 마음에 영광의 탑을 세우듯이.

 

» 법륜 스님과 역사기행을 떠난 탐방단.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동영상 박종찬 기자, 박수진 피디

◈ 현장에서본 중국의 동북공정 실상

안전부 요원과 공안 경찰, 걸음 걸음 감시
한족 이주정책으로 조선족자치주 씨 말라

 

현재 중국 영토의 과거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정의를 내린 중국 정부 차원의 움직임은 역사기행 현장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행선지를 알리지 않은 채 안내하는 여행사에 제재를 가하는 중국에선 발해의 유적과 같은 역사 유적 탐방 때 안전부 요원과 공안 경찰이 따라다니며 탐방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또한 탐방단이 조상의 유적지와 묘지에 몇 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거나 절을 하는 것도, 플래카드를 내거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 감시하는 중국 공안. 발해에 대한 중국의 견제 정도를 알 수 있다.

티베트나 위구르지역과 마찬가지로 조선족 자치주에 대해서도 중국 정부의 한족 이주정책으로 인해 조선족 비율이 현저히 감소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조선족 학교도 문을 닫고 있다. 조선족자치주가 명맥뿐인 지역도 적지않다. 가령 대조영이 고구려 부흥의 기치를 들고 발해 건국의 씨앗을 뿌렸던 돈화지방은 조선족 비율이 4%로 줄었다. 그러니 조선족자치주이면서도 우리말을 알아듣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족에 대한 한국 정부 차원의 지원도 없다.

 

중국정부는 특히 한민족의 정신적 고향으로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 천지 일대를 길림성의 직할 자치주로 만들었다. 백두산에 공항이 신설되면서 백두산관광객들이 조선족 자치주의 중심 구실을 했던 연길에 들릴 일도 없게 됐다. 사실상 조선족의 중심인 연길과 백두산이 단절된 셈이다. 90년대까지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의 90%가 한국인이었지만 지금은 관광객의 90%가 중국인이다. 한민족의 성산이 중국인들의 유람산으로 급변해가고 있다.

조현 기자

기사등록 : 2009-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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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뿌리 찾기’ 법륜스님 역사기행 <하> 잃어버린 상고사를 찾아 - 고구려 주몽을 중국 황제 후손으로 변조

오랑캐 땅이라 내쳤던 요하, 중국문명 기원 각색
영토 넘어 역사마저 잃은 ‘이방인’으로 망연자실

 

» 휴심정.

심양은 중국 동북지방 최대도시다. 드라마 <주몽>에서 고구려 창업의 기초를 다지고, <연개소문>에서 수·당과 고구려 장수들이 쫓고 쫓기는 혈투를 벌이던 랴오허강(요하·療河) 유역이며 ‘요동’에 속했던 곳이다. 옛이름 봉천(奉天)이다. 면면히 이어져온 천손민족의식 때문일까. ‘하늘을 받든다’는 그 이름이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심양 시내에 요녕성박물관이 있다. ‘요하문명전’이 열리고 있는 박물관 입구엔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끝이 안 보인다. 세계 역사를 다시 쓰게 한 이 지역 ‘요하문명’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온 사람들이다.

 

[하니TV] 법륜 스님과 함께 떠난 ‘역사 기행’- 상고사·국동대혈편

[하니TV] 법륜 스님과 함께 떠난 ‘역사 기행’- 백두산편


빗살무늬토기, 적석총, 비파형 동검…, 너무나 익숙한 것들

 

‘요하문명전’이 열리는 박물관 3층의 세개 전시관에 들어서자 수천년 동안 우리의 무지의 벽 속에 갇힌 뇌를 문명의 방망이가 거침없이 두드린다. 그릇과 옥 귀걸이와 무기들의 정교함은 용산국립박물관에 전시된 1천여년 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일 만큼 정교하다. 놀랍다. 충격은 정교함 때문만이 아니다. 그런 유물들이 이미 기원전 3500년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에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더욱 더 큰 충격은 ‘내 의식 저 너머’인 이곳에 전시된 빗살무늬토기와 고인돌과 적석총과 비파형 동검들이 너무나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는 것. 한반도 남쪽의 박물관에서 흔하게 보았던 동질의 유물이다. 반면 요하 서쪽 중국의 대륙에선 찾아볼 수 없는 이질적인 유물들이다. 더구나 기원전 350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제단, 여신묘, 적석총군은 이미 5천년도 더 전에 ‘국가 단계’의 조건을 갖춘 문명사회가 실존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기행단 가운데 대기업 간부인 남호일(56)씨는 “중국도 인정한 요하문명에 대해 우리나라에선 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냐”고 안타까워했다. 우리가 오직 신화와 전설만으로 치부한 채 단 한쪽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역사책에 갇힌 한국의 순례단의 가슴에 환인-환웅-단군의 혼과 손길이 닿은 비파형 동검이 깊숙이 꽂혔다.

 

 

압록강까지 천릿길엔 고주몽의 고구려 유적 지천


중국은 전통적으로 만리장성 밖인 요하일대를 ‘문명화된 중화민족의 터’와는 달리 ‘동이족과 야만적인 북쪽 오랑캐의 땅’으로 구분지었다. 그런데 30년 전부터 황하문명을 비롯한 ‘세계 4문명’보다 더 앞서고 발달돼 세계문명사를 다시 쓰게 한 유물들이 이 지역에서 쏟아지자 요하지역이 ‘동이족과 북쪽 오랑캐의 땅’이 아니라 ‘중국문명의 기원지’라는 ‘공정’을 진행하며, 2006년 말에 이 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 예비명단에 올려놓았다.

 

요하의 유물을 살피던 한국기행단의 입에선 감탄에 이어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나온다. 무엇일까. 그리스나 이스라엘, 인도 역사지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우리 상고사의 무지에 대한 자탄일까. 박물관을 빠져나오자 ‘중국에서 세계 문명의 발상지가 나왔다’는 자긍심을 얻으려 열광하는 중국인들이 더욱 장사진이다. 그들이 영토만이 아니라 역사마저 잃어버린 ‘이방인들’을 뜨악하게 바라본다.


이곳에서 압록강까지 천릿길엔 ‘47대 단군고열가의 후손’이라 칭한 고주몽의 나라 고구려 유적이 지천이다.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해 주몽은 중국민족의 시조인 ‘황제’의 손자인 고양씨(高陽氏) 전욱과 고신씨(高辛氏)의 ‘고’(高)자를 딴 인물이 되어 있다. ‘붉은 악마’가 열광했던 ‘14대 환웅 치우’가 아니라 그의 적이었던 황제 헌원의 후손으로 뒤바뀐 셈이다.

 

풀만 무성한 독립투사 무덤들, ‘역사 왜곡’ 중국만 탓하랴

 

고구려를 더듬으며 가는 길에 백두산 아래 화룡에서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 터를 거쳐 ‘대종교 3인묘’에 이르니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한 기행단의 탄식은 다시 자탄으로 바뀐다. 역사는 ‘사실’이 아니라 ‘힘의 기록’인 것인가. 단군의 혼을 되살려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 초대 교주 나철(1863~1916)과 서일(1881~1921), 김교헌(1868~1923) 3인의 무덤은 아무도 찾는 이 없이 이국의 들판에 풀만 무성하게 덮인 채 나란히 누워 있다. 상해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의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선생을 비롯해 29명 가운데 21명이 대종교인이었고, 김좌진·홍범도 등 전설적인 항일전사들의 다수가 대종교인이었지만 그들은 대부분 민족을 위해 온몸을 불살라버려 재가 되었다. 대신 살아남은 종교와 인사들이 자신의 공을 한껏 드러내는 사이 무덤 하나 돌보지 않고, ‘대종교’라는 이름 하나 기억하지 않아 저울추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것이 ‘실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눈앞의 역사였다. 어찌 ‘역사 왜곡’을 중국만 탓할 수 있을 것인가.


기행단이 고구려의 400년 수도 국내성에 머문 다음날 새벽 3시 압록강가를 달려 산길을 30분가량 올라 찾은 곳은 국동대혈(國東大穴)이다. ‘수도의 동쪽에 있는 큰 혈자리’란 뜻이다. 하늘로 통하는 듯 기암괴석 입구엔 과연 ‘통천동’(通天洞)이라고 쓰여 있다. 고구려의 왕들은 양쪽으로 뚫린 이 동굴에서 해마다 10월이면 군신들을 거느리고 와서 환인-환웅-단군을 모시며 천제를 지냈다.

 

그 통천동 남쪽 400미터 앞엔 북한과 경계인 압록강이 있었고, 서쪽 아래로는 일제가 100년 전(1909년 9월 4일)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협약’을 통해 청에게 넘겨준 광대한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영토가 펼쳐져 있었다.

 

1천여년 전 천제의식을 되살려 환인-환웅-단군에게 술을 따르며 절을 드렸다. 고려대 1학년 우경락(19)군은 “우리가 배운 역사가 어떻게 이렇게 잘못 되었느냐”며 기막혀했고, 고속철도 기관사 강은옥씨는 “우리(한민족)는 부모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어린 아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천제 뒤 손을 맞잡자 누군가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합창을 시작한다. 이들이 흘린 통한의 눈물 방울 방울이 단절된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 역사기행 이끈 법륜 스님

 

“남북 하나 될 길은 ‘이념’ 아닌 ‘역사’라는 생각에 나서
‘한 뿌리’ 고대사 인식 부족해 동포 굶어 죽어도 무관심”

 

지난 2일부터 간도 일대에서 일반인과 대학생들 각각 1백여명씩을 대상으로 7박8일씩 연이어 매년 역사기행을 이끈 법륜 스님이 이곳에 온 것은 1993년이었다. 1980년대 민주화 이후 통일운동도 시들해지고, ‘꼭 통일을 해야 하느냐’는 얘기까지 나오는 시점이었다. 그는 남북이 하나 될 길은 ‘이념’이 아니라 ‘역사’에 있다고 보고 정토회 실무자 7명과 함께 지도 한장 들고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나섰다.

 

도움을 받기 위해서 처음엔 조선족들을 찾아나섰지만 조선족들조차 중국사만을 배워 뒷동산에 있는 고구려와 발해의 성터마저도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절벽으로 이뤄진 고구려 졸본성 아래에서는 올라가는 길을 찾지 못해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던 중 하늘에서 두레박이 내려오듯 군사기지의 케이블카가 내려와 무작정 올라타 주몽의 흔적을 밟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가 1990년대 중반 북녘 동포들의 기아실상을 남한 사회와 국제사회에 알리며 동포돕기에 나선 것도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를 샅샅이 뒤지던 과정에서 동포들의 실상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민족에 대해 막연한 관념만 가진 채 우리가 실제로 한 뿌리라는 고대사의 역사인식이 부족하기에 북한에서 수백만이 굶어 죽는다고 해도 마치 남의 일처럼 무관심할 수 있었던 것”이라며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세상을 떠돌아도 아이가 태어나면 자기 나라 역사와 말부터 가르치는데 우리 민족, 특히 젊은이들이 민족의 뿌리가 정립되어 있지 않아 뿌리 없는 부평초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없는 역사를 만들어 터무니없이 내세우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역사적으로 처한 존재의 실상을 바로 알아야 어처구니없는 국수주의나 지나친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가지고 당당해질 수 있다”며 “자기를 알아야 타인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법륜 스님은 “우리 민족이 각 분야에서 전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토대는 삼국시대 이전까지 대륙을 무대로 중국민족에게 문명을 전해주었던 상고시대 문명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서 “애초 고조선이라는 말은 없고, 조선이 있었으며 그 조선을 잇겠다는 의미로 이씨왕조가 조선이름이라는 이름을 땄고, 고려도 고구려를 잇겠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며 대한이란 말도 한인(환인)의 한(큰)나라를 딴 말인데 우리는 정작 본래의 역사는 망각해버리고 있다”고 말했다.  

 

조현 기자

 

기사등록 :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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