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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Tour - China

압록강~두만강 답사(경향 연재)

by Wood-Stock 2009. 9. 25.

[압록강~두만강 1400㎞ 답사](1) 中, 백두산을 탐내다.

ㆍ백두야, 너는 정녕 ‘창바이’가 돼 가는가

2009년은 북·중수교 60년이 되는 해이다. 북한과 중국은 올해를 ‘조·중(중·조) 우호의 해’로 정해놓고 기념행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북핵 문제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발생하면서 양국간 교류·협력이 크게 확대되는 모습은 아니다. 그럼에도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둔 양국의 국경지대에는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이들 국경지대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경향신문은 지난 4~11일 ‘백두산 역사탐방단’(명예단장 이이화)과 함께 압록강 하구 단둥에서 두만강 하구 훈춘에 이르는 1400㎞를 답사, 양국 국경지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국의 움직임을 취재했다.
 
 

“타이 피야오량!(매우 아름답다)” 지난 8일 백두산 서파(西坡) 능선을 타고 천지로 향하던 천리핑(陳麗萍)씨가 고개를 돌려 능선 아래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천지로 이어지는 1365개나 되는 긴 돌 계단 아래에는 넓은 백두산의 초원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지린성 퉁화시에서 슈퍼마켓을 한다는 천씨는 남편과 함께 시내 여행사가 조직한 창바이산(長白山:백두산의 중국 이름) 관광단에 참가해 백두산을 찾았다. 처음 백두산에 왔다는 천씨는 “퉁화 시내에는 380위안(약 7만6000원) 하는 창바이산 1일 여행상품이 꽤 인기를 끌고 있다”며 “창바이산의 절경을 보니 결코 돈이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돌 계단의 끝은 백두산의 서쪽 봉우리 백운봉(2691m)이었다. 정상에 도착하니 벌써 100여명의 관광객이 천지의 장관을 담느라 분주하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커다란 글씨로 새긴 ‘천지’라는 팻말과 조·중(朝中)경계비 5호가 이곳이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발 아래 굽어보이는 천지는 티 한점 없는 비췻빛이었다. 모두들 천지와 병풍처럼 둘러진 백두산 봉우리의 장관에 눈을 떼지 못했다.

백두산을 뒤덮는 중국인의 발길

백두산에 중국인이 몰려들고 있다. 예전 같으면 수학 여행단이나 일부 중산층의 관광지 정도로 알려진 백두산이 이제는 웬만한 중국 서민들도 찾을 수 있는 친숙한 휴양지로 변모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대대적인 투자에 나서면서 백두산이 중국의 대표적인 국민관광지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다.

베이징을 비롯한 중국 주요 도시의 여행사들은 창바이산 관광상품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고객 확보에 나섰다. 지린성 정부는 중국중앙텔레비전 등의 매체를 통해 연일 창바이산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백두산으로 통하는 길목인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 쑹장허(松江河), 창바이현(長白縣) 등에는 ‘신기(神奇), 신성(神聖), 신비(神秘)한 창바이산’, ‘산 하나에 사계절이 있고, 10리만 벗어나도 날씨가 다르다’(一山有四季 十里不同天)와 같은 광고 간판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백두산이 중국인의 국민관광지로 부상하는 데에는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밑받침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 8월 백두산 서쪽의 푸쑹현(撫松縣)에 창바이산 공항을 건설, 백두산 알리기에 나섰다. 지난해 8월3일 베이징~푸쑹간 직항로가 개설된 이후 지금까지 상하이, 광저우, 창춘에서도 백두산행 항공길이 열렸다.
 
백두산 남파 산문에서 천지로 향하는 길

백두산과 동북지방의 주요 도시를 잇는 고속도로와 주요 간선도로들도 대대적으로 건설되고 있다. 지난해 지린시와 백두산 북쪽 도시인 옌지시를 연결하는 지옌고속도로가 건설된 데 이어 창춘~푸쑹간 고속도로(2011년 완공예정), 바이산~창바이산공항(2012년 예정), 옌지~얼다오바이허간 고속도로가 건설 중이거나 예정돼 있다. 또 백두산의 북파, 서파, 남파를 연결하는 얼다오바이허~쑹장허~창바이현의 순환도로가 건설 중이다. 백두산 순환도로가 건설되면 하루만에 백두산 등산코스 3곳을 모두 자동차로 등정할 수 있게 된다.

교통망과 함께 백두산 관광 편의시설도 대대적으로 확충되고 있다. 지린성 정부는 지난해부터 서파와 남파 산문을 정비했다. 대규모 주차장을 마련하고 상점, 휴게소, 매표소 등을 갖추었다. 서파 산문의 휴게소에는 백두산 전경을 담은 미니어처를 설치하고 대형 TV화면을 통해 백두산의 사계를 담은 동영상을 내보내고 있다. 북파에 비해 개발이 덜 된 백두산 서파와 남파를 백두산 관광의 중심지구로 개발하려는 중국 정부의 뜻을 읽게 한다.

이러한 관광기반 시설에 힘입어 백두산 관광객은 최근 들어 크게 늘고 있다. 지린성 발전개혁위원회는 2007년 73만명이었던 백두산 관광객 수가 올해에는 1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평년의 여름 휴가철 백두산 1일 관광객 수는 8000~9000명인데 반해 올해에 2만명을 상회했다.

그러나 중국의 창바이산 관광지 개발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지린성 정부는 지난달 백두산 서쪽 푸쑹현에 30평방킬로미터 규모의 ‘창바이산국제휴양지구’ 기공식을 가졌다. 2013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되는 휴양지구에는 다롄의 완다그룹 등 4개 민간기업에서 200억위안(약 3조6000억원)을 투자해 6성급 호텔, 국제회의장, 스키장, 수렵장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와 함께 지린성 정부는 창바이산공항과 별도로 북파와 서파, 남파 세곳에 헬기장을 건설, 헬리콥터를 이용한 백두산 관광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초현대식 시설을 갖춘 백두산 서파 산문

백두산 아래의 안투(安圖)현도 지난달 ‘창바이산관광상품생산기지’ 건설 계획을 내놓으며 2000만위안대의 투자자 유치에 나섰다. 안투현은 백두산의 명성에 비해 특색 있는 관광상품을 찾아볼 수 없다며 단지가 조성돼 본격적인 상품 개발에 나선다면 3년 안에 투자금액을 회수할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창바이산관리위원회는 최근 백두산의 자연생태를 관광산업자원으로 활용, 백두산을 세계적인 생태경제시범구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이러한 구상이 실현되는 2020년 백두산의 연간 관광객은 350만명에 달하고 전체 관광수입은 입장료 15억위안을 포함해 120억위안(약 2조7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퇴색하는 민족의 영산

중국이 창바이산이란 이름으로 백두산을 개발하고 선전하면서 우리 민족의 영산이라는 이미지는 크게 퇴색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백두산 가는 전형적인 코스는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얼다오바이허에서 북쪽 산문을 거쳐 천지와 장백폭포에 이르는 북파 노선이었다. 그러나 최근 서파와 남파가 개발되고 중국 관광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한국인 관광객의 비율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실제로 기자가 지난 7~9일 백두산 역사탐방단의 일원으로 백두산의 북, 서, 남쪽 코스를 모두 등정하는 동안 부딪치는 관광객은 대부분 중국인이었다. 중국의 ‘홍색’ 관광 인파 속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금융위기와 인민폐 절상으로 한국인의 백두산 관광이 줄어든 대신 교통 및 기반시설 확충으로 중국인 관광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지난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백두산 남파지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창바이산조선족자치현에 속하는 남파의 등산로는 북한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어 북한의 풍광을 조망할 수 있는 지역이다. 남파의 천지 정상에서는 맑은 날에는 개마고원까지도 조망할 수 있어 한국인에게는 남다른 감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남파를 통해 백두산을 올라가는 한국인 관광객은 아직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창바이산 남파 관광 유한회사의 주강(朱剛) 부경리는 “지난해 남파를 찾은 관광객 10여만명 가운데 한국인은 10%가 채 되지 않는다”며 “한국인 등산객의 대다수는 창바이산 야생화를 보려는 트레족”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중국 측은 남파 지구를 찾는 중국인 관광객이 늘어나자 월경 등으로 빚어질지 모를 북측과의 갈등을 우려해 지난해부터 북·중 국경선에 철조망을 가설하고 있다.

옌지에 사는 한 조선족은 “과거에는 옌볜조선족자치주에서 백두산 관광 사업의 관리 감독권을 행사했는데 최근 사업의 대부분이 지린성 정부로 이관됐다”며 백두산에 대해 우리 민족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 것을 우려했다. 백두산에서 만난 한 한국인 관광객은 “중국이 최근 백두산 개발을 서두르고 관광객 유치에 목소리를 내는 것은 국경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동북공정의 일환이 아니겠느냐”며 남북한 모두 중국화되어가는 백두산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두산 | 글·사진 조운찬특파원 sidol@kyunghyang.com> / 2009-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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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두만강 1400㎞ 답사](2) 中 단둥, 항구도시를 꿈꾸다

ㆍ압록강에 부는 개발 바람, 북 닫힌 문 열까
ㆍ단둥 무역 80%가 대북교역… 북한 도움없인 고속성장 한계
ㆍ동반성장 러브콜에 ‘묵묵부답’

단둥과 신의주를 잇는 압록강철교. 북한-중국 무역의 70% 이상이 이곳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단둥시의 압록강변을 걷다 보면 가슴이 탁 트인다. 강변공원 곳곳에 설치된 조각상도 볼 만하지만 곳곳에 꽃밭이나 광장이 조성돼 있어 걸음을 멈추고 쉬어갈 수 있다. 단둥 시내 어디에서든 도보로 10~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압록강 공원은 시민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휴식처다.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강가의 압록강 공원은 많은 시민으로 북적인다.

현지 주민들이 압록강가로 몰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북한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고개만 들면 강 건너 신의주가 눈앞에 들어온다. 그야말로 부르면 응답할 ‘지호지간’이다. 그러나 민간의 교류는 거의 없다.

올들어 신의주 1일 여행을 비롯, 북한 관광길이 열렸다고는 하지만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단둥 시민들은 강변에서 바라본 인상으로 북한을 얘기한다. 가동을 멈춘 공장, 창문도 제대로 붙어있지 않은 아파트, 저녁이면 칠흑으로 변하는 신의주…. 그들에게 북한은 ‘가난’과 동의어다. 압록강변에서 만난 50대 중국인은 북한이 어떤 나라냐고 묻자 주저없이 “가난하다. 매우 가난한 나라”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저쪽이 아니라 이쪽에서 살고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단둥인들에게 북한은 좋은 관광상품이기도 하다. 강변 곳곳에 서 있는 ‘중조(中朝) 변경’이라는 국경비 앞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몰린다. 즉석사진을 찍는 상인들은 사제로 만든 ‘국경비’를 세워놓고 호객행위를 한다. 그들은 울긋불긋한 한복까지 빌려줘가며 사진 1장에 10위안(약 1800원)을 받는다. 강변에서 즉석사진을 찍어주는 류모씨는 “고객의 대부분은 한국인이나 조선족이 아닌 한족”이라며 “중국인들은 북한에 호기심이 많다”고 말했다.

압록강철교,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단둥시 남쪽에 조성중인 단둥 신도시 건설현장.
북한을 좀더 가까이에서 보려는 사람들은 압록강단교를 찾는다. 북한쪽 강변 가까이까지 휘감아 도는 압록강 유람선도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1911년 일제가 건설한 압록강철교는 한국전쟁 중 미군의 폭격으로 다리의 절반 이상이 무너져 내렸다. 이후 중국은 폭파되지 않은 부분을 ‘압록강단교’라고 이름붙여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다. 20위안만 내면 다리의 중간 부분인 끊어진 지점까지 거닐 수 있다. 매표소 앞에 붙어 있는 ‘단교·폭격으로도 끊을 수 없는 역사의 기억’이라는 선전 문구가 이채롭다.

압록강단교 북쪽 100m 지점에 놓여 있는 압록강 제2철교는 단둥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다. 1943년 완공된 이 다리는 다행히 전쟁의 참화에서 비켜났다. 전쟁이 끝난 뒤 중국은 이 철교를 ‘중조우의교’라고 부르고 있다. 혈맹으로 맺어진 양국의 우의를 이 다리를 통해 영원히 다져가자는 뜻이다.

압록강을 가로질러 나란히 서 있는 압록강단교와 중조우의교는 현대사의 북·중관계를 상징한다. 북한과 중국 관계는 혈맹관계다. 한국전쟁 당시 압록강철교를 통해 수십만명의 인민해방군이 북한 땅으로 넘어가 ‘항미원조’ 활동을 벌였다. 중조우의교는 북한과 중국을 연결하는 대동맥이다. 현재 북한·중국 간 무역의 70% 이상이 이 다리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또 단둥에서 이뤄지는 해외무역의 80%가 대 북한 교역이다. 북한이 경제교역의 대부분을 단둥에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단둥 경제 역시 북한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중국이 건설을 추진중인 신압록강대교 조감도.
혈맹이라고 하지만 두 나라의 관계가 항상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둔 국경도시 단둥은 북한의 정치적 환경 변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미사일 발사, 핵실험 등 북한에서 ‘사건’이 발생할 때면 한국·미국·일본 등의 정보기관이 이곳에서 첩보전쟁을 벌인다. 지난 5월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한 직후에도 단둥은 술렁댔다. 단둥·신의주 간 무역도 한때 크게 통제를 받았다. 단둥 시내에서 만난 택시기사는 북한 핵실험 이후 한두 달간 압록강대교를 오가는 차량이 현격하게 줄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정치적 특수성으로 인해 단둥의 기업인들은 북한의 정치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단둥에서 의류분야 대북사업을 하는 한 교민은 2002년 신의주 특구 개발 계획이 발표된 직후 한때 단둥의 아파트 분양시장에 시중 자금이 쏠렸다는 사실을 전하며 “단둥이 발전하고 양국 무역관계가 유지되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북한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단둥임항산업단지, 북한을 끌어낼 수 있을까

지난 수십년간 압록강 철교는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노랫말처럼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중국과 북한을 껴안아왔다. 그러나 단둥·신의주를 잇는 철교만으로는 고속 성장을 갈구하는 단둥의 꿈을 포용하지 못했다. 도약의 기회를 엿보던 단둥에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2006년 중앙정부가 단둥을 랴오닝연해경제벨트에 포함시켜 개발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랴오둥반도를 둘러싼 후루다오, 진저우, 잉커우, 다롄, 단둥 등 5개 도시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다는 이른바 ‘5점1선’ 정책이다. 이듬해 단둥시와 압록강 하구의 항구 동항을 연결하는 ‘단둥임항산업원구(단지)’ 계획과 함께 대대적인 지원책이 발표됐다.

지난 5일 찾아간 단둥임항산업단지는 개발이 한창이었다. 단둥 옛 시가지에서 압록강을 따라 남쪽으로 10㎞를 달리니 단둥 신구 궈원완이 나타났다. 단둥의 신흥주택단지다. 랴오닝성 정부는 약 205㎡(62만평) 규모로 개발되는 이곳에 40만명을 입주시켜 단둥 신도시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지난해 이미 30억위안을 투입해 배수, 전력, 통신 시설을 완비했다. 시청사, 체육관, 극장, 도서관 등 도시 기반시설도 완성했다. 지금은 고층아파트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

단둥신도시를 지나 동항에 이르는 지역에는 첨단정밀기기단지, 장치산업단지, 환경보호산업단지, 항구공업단지 등이 건설되거나 계획 중이다. 단둥에서 동항에 이르는 40여㎞를 산업벨트로 연결하겠다는 야심찬 구상이다. 공단 및 택지조성 사업은 이미 마쳤고 투자 유치가 진행되고 있다. 현지 언론은 이 구상이 실현되면 강변 무역도시 단둥이 태평양을 향한 신흥항구도시로 거듭날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 중앙정부는 단둥임항산업단지 조성을 위해 이미 400억위안을 투입한 가운데, 중국 기업뿐 아니라 한국 등 해외자본의 투자도 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단둥의 한 교민은 “한국의 SK네트웍스가 이 지역에 부지를 확보, 부동산개발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단둥시 정부가 한국의 자본 및 기업 유치를 위해 단둥~인천간 국제 직항 개설도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중국의 단둥임항산업단지 조성은 랴오닝성연해벨트 개발을 통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동북지역을 발전시키자는 국토균형발전 전략의 일환이다. 이 지역의 개발을 통해 북한을 개방으로 이끌어내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단둥과 신의주는 지리적으로 접해 있을 뿐 아니라 ‘끊을 수 없는 역사의 기억’까지 공유하고 있다. 단둥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강 건너 신의주의 호응이 필수적이다. 중국이 단둥임항산업단지 조성에 맞춰 단둥 신도시와 남신의주를 잇는 신 압록강 대교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이 때문이다. 북한이 동의만 한다면 중국이 대교 건설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한다. 단둥의 꿈은 북한과의 교류를 확대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장차 조성될 산업단지의 노동력을 북한에서 공급받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게다.

그러나 중국의 ‘러브콜’에 북한은 아직 이렇다 할 화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재중국단둥한국인회의 한 관계자는 “압록강 하구 북한에 인접한 지역에 대규모의 산업단지를 개발하는 것은 중국이 북한 문제 해결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의지의 표명”이라면서 “단둥임항산업단지 조성이 북한을 개방으로 이끌어내는 신호탄이 될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단둥 | 글·사진 조운찬특파원 sidol@kyunghyang.com> / 2009-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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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두만강 1400㎞ 답사] (3) 고구려 도읍지 지안을 가다
ㆍ고구려 香 지운들 이 땅이 중국史 될까 
ㆍ동북공정 탓에 10년 사이 휘황찬란한 유흥도시로...  우리 고대사 중국에 예속 ‘랴오허 문명론’이 더 문제

‘백두산 역사탐방단’ 일행은 지난달 5일 단둥에서 압록강변을 거슬러 올라가는 코스를 잡아 지안(集安) 탐사에 나섰다. 압록강 하류에는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표시하는 철조망을 새로 설치해 놓았고, 철조망을 따라 포장길이 뻗어 있었다. 길가에는 복숭아단지, 밤나무단지가 연달아 조성되어 있었고 강물에는 가두리 양식장도 보였으며 강변호텔도 덩그렇게 서 있었다. 번창하는 풍경이었다. 
발굴·복원공사가 한창인 지안시 남성로의 국내성 성벽.

하지만 다장커우(大江口)를 지나 상류로 올라갈수록 옥수수밭이 이어졌고 강폭도 좁아지고 길도 지그재그로 뚫려 있었다. 더욱이 새로 도로를 건설하면서 산이고 강이고 바위를 가릴 것 없이 마구잡이로 뚫고 파헤쳐 놓았다. 특히 강변의 길을 넓히는 작업 때문에 강가에 자라는 물버드나무가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저녁 8시가 넘어서야 고구려 500여년 도읍지였던 지안 시내로 들어갔다. 한 마디로 표현해 휘황찬란했다. 상점에는 최신 유행 상품이 진열되어 있고 유흥업소의 네온사인은 밤거리를 밝혔다. 시내 곳곳에 도로를 확장하고 건물을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10년 전 답사 때와 비교하면 ‘천지개벽’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당시는 택시가 없어서 걸어다니거나 자전거로 끄는 탈것으로 돌아다녀야 했다. 산골 마을인 지안이 도시로 탈바꿈하는 배경으로는, 첫째 몰려드는 한국의 관광객, 둘째는 동북공정의 진행, 셋째는 동북공정의 결과로 고구려에 관심을 둔 중국 관광객의 급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지안시 광개토왕릉을 오르는 관광객들. 2004년 7월 장군총, 환도산성 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지안의 고구려 유적지가 말끔하게 단장됐다.

우리 탐방단이 든 숙소는 추이위안(翠園)빈관이었는데 바로 지안시내에서 중심부의 가장 넓은 거리인 승리로에 있다. 이 호텔 앞에는 고구려유지(遺址)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 호텔과 공원이 바로 국내성의 중심 궁궐이 있던 곳이다. 우리가 국내성의 중심부에서 우연히 하룻밤을 묵게 된 것에 나름대로 의미를 둘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원 앞에 보존된 몇 미터 정도의 성터만이 화려했던 국내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현재 시 당국에서 남성로의 도로공사를 하다가 고구려 유적으로 보이는 거대한 석축물 더미를 발견하고 이를 보존하면서 발굴을 서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돌아본 환도성 아래의 고분군, 장군총(장수왕릉으로 추정), 광개토대왕비와 왕릉 등은 예전보다 정비가 잘 되어 있고 모든 관광객에게 개방하고 있다. 다만 지안박물관은 내부 수리 중, 고분 벽화는 전면적 보수를 하고 있어 잠정으로 개방하지 않고 있었다. 1차 5개년 동북공정을 2007년에 마무리한 뒤 관광객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동북공정은 한 마디로 말해 소수민족통일국가론에 따라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중국 소수민족의 정권으로 규정해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이었다. 그중에서도 고구려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많은 논문을 양산해내면서 고구려의 남쪽 영역을 대동강 아래의 한강유역과 금강과 남한강 상류(충주)로 설정했다. 이 지역이 다분히 고구려 영토여서 한때 중국 영토에 속한다는 이미지를 풍겼다.

공정이 계속되는 동안 남쪽 학자들의 접근을 막았고 공정에 관련된 자료유출도 통제했으며 비디오나 사진촬영도 금지시켰다. 중국 국적을 지닌 조선족 학자들도 동북공정의 진행에 대해 몸조심하느라고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현재도 안시성 등 통제 유적에 허가 없이 잠입한 학자나 사진작가들은 비자를 내주지 않고 있다. 하지만 2004년 한국 정부와 역사학자, 민간단체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혀 논문 발표를 자제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개방을 허용하기도 했으나 근본적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또 다른 데에 있었다. 현재 중국 사회과학원 등 여러 유관 단체는 동북공정의 뒤를 이어 랴오허(遼河)문명권 5개년(2006~2010) 작업을 벌이고 있다. 중국의 문명 발상지로 황허, 창장, 화이허, 그리고 랴오허를 꼽고 그 지역의 문명을 중화문화의 원류로 보고 탐원(探源)하는 것이다. 랴오허문명론은 중국 고대 전설에 나타나는 제왕을 주요 구성체로 내세우고 있다. 랴오허문명은 랴오둥의 뉴허량(牛河梁) 적석총 유적을 통해 신석기시대에 고대 국가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를 훙산(紅山)문화라 부르며,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 유적을 통해 청동기시대 황허문명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황허문명 곧 중화문명은 여러 문명이 어우러져 중국문명을 이룩했다는 결론을 얻으려 하고 있다.

고대 랴오허는 동이(東夷)에 속하는 지역이었고 샤자뎬 하층문화는 연대로나 문화의 특성으로 보아 단군설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는 단군이 백두산에서 하강했다는 건국 설화를 가지고 있다. 랴오허문명론이 북방계 문화임을 인정하고 있으나 결국 중국문명에 동화했고, 이어 랴오둥을 거쳐 한반도로 이어졌으므로 단군은 결국 중국 고대 황제의 갈래로 풀이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우리의 백두산 이미지도 달라질 수 있다.

다음 랴오허문명론의 일환으로 기자 조선을 들 수 있다. 기자는 은의 왕족인데 주 무왕이 조선의 왕으로 책봉해 평양에서 단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는 전설 같은 기록이 있었지만 거의 부정되어 왔다. 이를 정사로 다루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황빈의 <기씨조선사화> 등) 또 한사군의 영역을 조선의 황해도 지역까지 연결시키고 조선을 식민지 상태로 지배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를 정통으로 보려는 사관이 있어왔는데 이를 정사로 규정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어 설인귀의 이미지 조작도 서두르고 있다. 당의 장수 설인귀는 고구려 정벌에 큰 공로를 세웠다고 기술하면서 설인귀의 용맹성과 승리를 부각시키고 있다. 게다가 랴오둥 일대에 떠도는 설인귀와 관련되는 민간 전설을 모아 문화현상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보기를 들면 랴오닝성 펑황산에서 설인귀가 바위에 화살을 쏘았다는 전설에 따라 전안(箭眼)을 석각한 것, 지린성 린장시 압록강변에서 설인귀가 칼을 갈았다는 바위에 당도석(當刀石)을 새겨 놓은 것, 고구려 고분 벽화의 마전도(馬戰圖) 따위에 의미를 부여해 서술하고 있다. 설인귀를 부각시키면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의 대중적 이미지는 쪼그라든다. 이런 작업은 단순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역사상 강역’을 연구한다는 것을 내걸고 변강학(邊疆學)을 조작하고 왜곡하고 아전인수로 이용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과정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티베트와 베트남을 겨냥한 서남공정, 신장 위구르족과 러시아와 몽골을 겨냥한 서북공정의 과정을 보아도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동북공정의 후속인 랴오허문명론은 얼핏 보면 중국문명의 복합성을 규명하는 것 같지만 단군 기자 위만 등 우리 고대 역사를 중국에 예속시키는 이론들이다. 통일이 이룩될 때 고구려 역사는 중국사이니 대동강을 넘어올 수 없다고 우길 수도 있고, 간도의 영유 문제는 이미 간도신협약(1909년 일본과 체결)에 따라 중국에 귀속된 것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고, 백두산은 한국 사람들에게도 창바이산(長白山)으로 차츰 각인될 것이다. 그래서 이 분야의 전공학자 박선령 교수는 “고구려는 현대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무튼 9월 초순 현재, 지안 일대에서는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안내 표지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정비와 개수를 한 뒤 유물들이 개방되고 있으나 여전히 비디오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 노영금양은 자신을 독립군 후손이라고 소개하면서도 남쪽에서 고구려를 인식하는 얘기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주 조심하는 태도가 엿보였다. 또 만주에 있는 조선족 출신의 학자들도 애써 동북공정과 랴오허문명론에 대해 거의 논의를 하지도 않고 입을 다물고 있다. 이를 보아도 중국 당국의 역사 왜곡 의도를 짐작할 만하다.

다만 예전처럼 표면으로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표현을 조심하는 모습이 감지될 뿐이다. 2단계로 접어들어 새로운 상징 조작의 방식에 따라 역사 왜곡을 은밀하고도 조용하게 진행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안에서 발길을 돌리는 한 역사학도는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다.

<역사학자 이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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