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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Tour - China

중국 신장 기행

by Wood-Stock 2009. 6. 24.
중국 신장 풍경 기행 1 ~ 화성이 이렇지 않을까
파미르고원 타슈쿠르간 가는 길의 믿기지 않는 모래산들
한겨레
» 파미르고원이다. 4천미터가 넘는 곳이 사막이다. 그저 여름 한철 이끼가 돋으면 사람들은 양을 몰고 떠난다. 있을 듯 없는 고독이다.
아! 무스타그아타여!
 

풍경, 사실 풍경 사진에 관심이 없었다. 오랫동안 사진을 해 오면서도 나의 주제는 언제나 사람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의 지배이자 조야한 내 세계관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지금 해발 4200미터 스바시 고개에서 북동쪽 거대한 산을 바라보고 있다. 무스타그아타(7546미터). 모든 빙산의 아버지이자 파미르의 주인. 머리에는 흰눈과 빙하를 쓰고 허리께는 눈부신 구름을 차고 있다. 분명 풍경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 하지만 내 카메라는 여전히 그 풍경을 직시하지 못하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풀 한포기 볼 수 없는 이 광막한 고원 사막에서 지나가는 사람은 없나 딴청을 피웠던 것이다.

 

 

» 무스타그아타! 모든 빙산의 아버지. 모든 산맥에서 독립해 홀로 서 있는 저 산에서 원시적인 슬픔을 느꼈다.
파키스탄 홍치라포 폐쇄, 올림픽 때문인가

 

지금으로부터 7년 전, 홀로 실크로드를 탐사하겠다며 이곳 카슈가르에 온 일이 있었다. 카슈가르는 타클라마칸 사막 서쪽 끝의 도시이자 동투르키스탄의 위구르족이 성지처럼 여기는 곳이다. 지금은 중국령인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에 속하지만 늘 불안한 긴장감이 도는 중국의 변방이기도 하다. 그 때 2주 동안 머물면서 현장이나 마르코 폴로처럼 파미르를 가로지르는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통해 파키스탄으로 가 볼까도 했지만 결국 텐샨(천산)을 넘어 우즈베키스탄으로 갔다.

 

하지만 늘 아쉬웠다. 언제고 다시 오리라 결심했지만 기회는 좀체 오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다시 이곳에 섰다. 그리고 이번에는 파미르로 갈 것이다. 출발하기 전 정보를 들어보니 파키스탄과의 국경지대인 홍치라포는 폐쇄되었다고 한다. 불안한 중국 올림픽의 단면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사실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은 파미르고원의 도시 타슈쿠르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란계 타지크족의 도시 타슈쿠르간에는 2300년 역사의 폐허, 성두성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세상에서 유일한 6×10㎝ 카메라 ‘베리와이드’와 흑백 필름 트라이-엑스를 준비했다. 나의 오래된 소망은 이제 탑승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출발했다.

 

 

» 카라쿨호수. 그리고 그 너머로 공어르산이 보인다. 이 호수의 물은 무스타그아타의 빙산이 녹아 만들어졌다. 주변 공기가 하도 맑아 편광필터효과를 냈다.

카슈가르를 떠나 두 시간 정도를 달리자 운전사는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내렸다. 30도가 넘는 사막의 열풍은 어느새 2000미터 고원의 상쾌한 바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왼쪽으로 시멘트를 풀어놓은 듯한 회백색 가니즈강이 흐른다. 이 거대한 협곡에는 사람은커녕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볼 수 없는 회갈색의 세계였다. 혹시 ‘화성이 이런 모습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가니즈강 상류로 올라갈수록 거대한 하나의 산이 실체를 내민다. 7719미터의 공어르산이다. 곤륜산의 일부이자 파미르의 고산 중 하나다. 이 길로 천축에서 돌아오던 현장이 훈자 왕국에서 보낸 떼강도를 만났다. 그리고 귀중한 불경짐을 싣고 있던 코끼리가 가니즈강에 빠지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타슈쿠르간을 떠나 동북으로 향한 지 닷새째 되던 날이었다고 한다.

 

차는 공어르산 북쪽을 휘돌아 옛 비단길과의 합류 지점인 부룬쿨로 간다. 가니즈 협곡을 빠져나와 3000미터 고개를 넘자 이상한 세계가 펼쳐진다. 부룬쿨 호수 앞에 웬 설산이 펼쳐진 것이다. 이상하다. 지금은 눈이 쌓여 있을 시기가 아닌데. 점점 그 산에 다가갈수록 비현실적으로 펼쳐진 풍경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 산은 하얀 모래산이었다.

 


» 가니즈강 협곡을 빠져나와 겨우 인가를 봤다. 사람은 없고, 나무 한그루 서있었다. 적막이다.
부룬쿨 호수 앞의 백사산. 1920년대까지만 해도 호수의 물이 넘쳐흘렀다고 했지만 지금은 반쯤 말라 모래로 덮여 있다. 아마도 산의 모습도 과거와 지금은 달랐을 것이다. 주변의 암석들이 풍화로 호수를 메웠고, 그 모래들이 다시 바람을 따라 산을 덮어버린 것이다. 차에서 내려 호수 주변을 걸었다. 여름에 접어들면 이곳은 푸른 초지로 변하고 많은 양들과 야크들이 풀을 뜯는다. 이곳 주민은 키르기스족이다. 한때 광대한 유목제국을 건설했던 사람들이지만 이제 중국 땅에서는 인구수도 적은 소수민족의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광막하고 황폐한 땅에서 살아간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눈부신 붉은색의 스카프를 쓴 여성들과 동물 털로 만들어진 코트를 걸친 남성들의 모습에서 아름답고도 강인한 삶의 단면을 엿본다.

 

이곳에서 식사를 했다. 어차피 그럴듯한 식당이 있을 리 없다 생각하고 컵라면을 사 왔는데 물도 뜨겁지 않다. 마르코 폴로는 “파미르에서 불을 피워도 활활 타지 않고, 음식을 끓여도 맛있게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반쯤은 익지 않은 라면을 깨물어 먹었다. 하지만 주민이 내 온 신선한 양고기 백숙은 훌륭했다.

 

 

» 고원의 공동묘지. 이곳 주민들의 종교는 이슬람이다. 묘지의 형식도 그렇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 외계인의 묘지라 한들 이상할 것도 없다.
4000미터를 넘어서면서 생기는 이상징후들

 

파미르고원은 텐샨, 카라코룸, 힌두쿠시의 3대 산맥이 모이는 곳에서 형성된 거대한 고원이다. 평균 해발 5000미터에 달하며 6000~7000미터의 산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 그곳에 서면 정말 눈으로는 믿기지 않는 풍경들이 있다. 부룬쿨을 떠나 무스타그아타의 서면을 끼고 돌면 스바시 초원이 나온다. 이곳에서 보는 무스타그아타는 신비롭다. 주변의 산맥들과 상관없이 홀로 서 있는 모습에서 슬프기까지 하다. 이제 내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4000미터를 넘어서면서 곳곳에서 이상 증후가 발견된다.

 

<한서> ‘서역전’에는 다음과 같은 두흠(杜欽)의 이야기를 전한다. “사람이 대두통과 소두통의 산이나 적토, 신열의 언덕을 넘으면 독기 때문에 열이 나서 생기가 없어지고 두통과 구토를 일으키는데 당나귀 등의 동물도 마찬가지다.”

 

무스타그아타를 뒤로하고 스바시 고개를 넘는다. 나는 빠르게 고원을 달리는 차의 창문을 열고 노래를 불렀다. 내 머리칼은 부딪히는 바람에 흩날린다. 어릴 적 부르던 민중가요도 불러보고, 알 수 없는 그녀를 향해 사랑노래도 불렀다. 하지만 파미르고원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나의 노래를 산산히 부숴 버렸다. 허공으로 흩어진 음표들이 꼬리 잃은 연처럼 나부꼈다. 풍경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고, 내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바보같이. 고산 두통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이제 타슈쿠르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부룬쿨호수와 백사산. 참으로 비현실적인 풍경이다. 산을 뒤덮은 저 모래는 어디서 온 것일까?

It’s a heartache / nothing but a heartache
hits you when it’s too late /
hits you when you’re down

사랑은 아픔이에요 / 마음의 아픔일 뿐이죠
너무 늦어버린 다음에야 깨닫게 되고 /
모든 희망을 잃은 후에야 느끼죠

(Bonnie Tyler, It’s a heartache, 1977)

» 파미르 지도
파미르 가는 길 여행쪽지

 

양꼬치가 별미… 호텔은 없어

 

◎ 교통 : 카라코룸 하이웨이(중국명 중파공로)를 통해 파미르고원으로 갈 수 있다. 카슈가르의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중국 파키스탄 사이를 운행하는 버스가 있다. 현재는 국경이 폐쇄되어 타슈쿠르간까지 간다. 몇 차례 정차를 하지만 내려서 풍경을 볼 여유는 없으니, 창가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열쇠. 여유가 있다면 동행자들과 6인승 이상의 차량(SUV)를을 빌려 떠나면 여유롭게 갈 수 있다. 가격은 하루 1000위안(10위안=1460원)정도. 타슈쿠르간까지 왕복 이틀 걸린다.

 

◎ 숙박 : 타슈쿠르간까지 가는 길에는 호텔이 없다. 민박도 마땅한 곳이 없지만 카라쿨 호수 앞에는 게르로 된 초대소가 있다. 고원의 호수와 무스타그아타를 함께 볼 수 있는 최고의 명당자리다. 음식도 함께 제공된다.

 

◎ 식사 : 이곳은 이슬람 지역이라 고기류는 오직 양이다. 양꼬치가 별미이고 백숙도 있다. 주식은 밀로 만든 딱딱한 빵인 난이다. 요구르트와 함께 먹으면 별미다. 부룬쿨 호수 앞에 모녀 식당이 있으며 따뜻한 물도 구할 수 있다. 카라쿨호수 앞과 스바시초원에도 식당이 있다. 제공되는 메뉴는 양과 빵, 요구르트로 거의 같다.

 

◎ 둘러볼 만 한 곳 : 가니즈강 협곡에서 공어르산을 조망하는 곳이 첫 번째 포인트다. 그리고 부룬쿨 호수와 백사산을 조망하는 곳에서는 키르기스 주민들이 관광용 상품을 판다. 돌이 그나마 탐난다. 약간 불량해 보이는 청년들이 양귀비를 파는데, 무시하시길. 스바시 초원에는 온천도 있다. 수온이 70도에 이르며 유황 냄새가 약간 난다. 나무로 만든 욕조에 독방이라면 100위안 정도한다. 4200미터 스바시 고개를 넘어갈 때 파미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믿기 힘든 거대한 풍경이다. 욕심 같아서는 내 손에 4×5인치 대형 카메라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기사등록 : 2008-07-16 오후 09:10 기사수정 : 2008-07-19 오후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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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장 풍경 기행 2 -  태양이 흠모한 석두성

파미르의 오아시스 도시 타슈쿠르간의 그림 같은 폐허

 

» 소택지. 여름 한철이면 눈 녹은 물이 불어나는 지형으로, 모두들 유목을 떠난다.
3600미터 파미르고원의 오아시스 타슈쿠르간. 주변은 7000미터 고봉들이 둘러싸고 있다. 나는 이 분지에 우뚝 솟은 폐허의 석두성 위에 홀로 서 있다. 고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포플러 나무 가지를 흔들다 솟구쳐 맹렬히 나의 몸에 부닥친다. 아래는 광활하게 펼쳐진 소택지가 보인다. 눈 녹은 물이 대지를 적시고 푸르게 돋은 풀들이 융단처럼 푹신해 보인다. 드문드문 유목을 떠나지 못한 양들과 야크들이 그 풀을 뜯고 있다. 너무도 투명한 대기 속에서 내 수정체는 서늘할 정도로 먼 곳을 적시한다. 천천히 안경을 벗어본다. 역시나. 흐릿한 푸름만이 망막에 새겨질 뿐이다. 도시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
 

중국에서 유일한 인도아리안계의 백인들

 

파미르를 동서로 가로질러 그토록 소망하던 타슈쿠르간에 도착했다. 쿠차를 떠나 20일 만에 이곳에 도착했다는 고선지처럼 보무도 당당한 모습이 아니라, 스며들듯 소리없이 잠입했다. 스바시 고개를 넘을 때 그리도 괴롭히던 고산병도 이제는 멈췄다. 내가 머문 곳은 ‘파미르빈관’. 이름도 아름다운 이곳은 내 나이하고 같은 마흔두 살이다. 배낭보다 무거운 고산의 3층 계단을 힘겹게 올라 객실 창문을 열었을 때 푸른 포플러 가로수가 눈부시게 빛난다. 이제야 실감이 난다. 드디어 이곳에 왔구나. 꿈꾸면 역시 언제나 그 자리에 서는구나!

 


» 타슈쿠르간의 석두성. 6백년전 명나라 시기에 건축된 것이지만 이 성의 기초는 2300년 전 것이다.
타슈쿠르간은 ‘돌의 성’ 또는 ‘돌의 탑’이라는 뜻이다. 이런 지명은 파미르뿐 아니라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 일대에 많이 퍼져 있다. 모두 돌로 만든 성곽도시를 뜻한다. 하지만 이 파미르의 오아시스 도시 타슈쿠르간이야말로 실크로드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유명한 곳이었다. 서양에서 처음으로 실크로드에 대해 서술한 알렉산드리아 출신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마케도니아 상인에게 들은 이야기라면서 그의 책 <지리학>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비단의 나라 세리카(당시 중국을 가리킨다)로 가려면 투리스 라피데아, 즉 돌의 탑을 거쳐 간다.” 어쩌면 내가 내려다보는 저 포플러 길을 따라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상인들이 말 등 가득 짐을 싣고 지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호텔을 나와 석두성으로 향했다. 타지크인들의 도시 타슈쿠르간은 사방 1㎞ 남짓한 작은 도시라 택시도 없다. 가끔 빵차라 불리는 미니밴만이 마을버스처럼 돌아다닐 뿐이다. 걷거나 자전거를 탄 이곳 타지크인들은 중국에서 거의 유일한 인도아리안계의 백인이다. 더욱 좁게는 이란계로 기원전 4세기부터 이 땅에 살고 있는 토착민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그 옛날 혜초는 이곳을 지나며 낯선 이들의 모습에 꽤나 향수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곳을 지나며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눈은 차가워 얼음과 겹쳐 있는데
바람은 때려 땅을 쪼개는구나
저 바다 얼어붙어 평평한 단(壇)이요
강물은 낭떠러지를 능멸하며 깎아 먹는다
용문(龍門)엔 폭포조차 끊어지고
정구(井口)엔 서린 뱀같이 얼음이 엉키어 있다.
불을 가지고 땅끝에서 읊조리나니
저 파미르고원 어떻게 넘어갈거나


나 역시 노래를 부르며 돌무더기로 가득한 석두성을 올랐다. 군데군데 무너지고 황폐함만 가득한 이곳을 난 너무 오래전부터 꿈꾼 것 같다. “가봐야 별것 없더라”는 여행의 진리는 이곳에서도 여전하다. 하지만 나는 별것 아닌 것도 별스럽게 찍어야 하는 사진가 아닌가? 트라이포드를 세워놓고 헛폼을 잡다가 포기했다. 빛이 충분한데 무슨 삼발이! 천천히 걸었다. 이 석두성은 주변에서 큰 돌을 날라다가 기초를 쌓고 진흙을 이용한 판축기법까지 동원해 견고히 만든 성이었다. 지금 바깥으로 보이는 모습은 600년 전 명나라 시기에 건축된 것이지만 바로 이 자리에 성이 들어선 것은 한대 이전인 2300년 전이라 한다. 참으로 까마득한 시간이다. 이곳을 한대에는 포리국이라 했고, 당대에는 총령수착이라 했다. 서역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고 반대로 서역으로 가는 최전선이었다. 그래서 중국의 고서에는 “나라는 작으나 만국으로 가는 요충이다”라고 했다.

 


» 고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살랑 나뭇가지를 흔든다. 사진을 찍고 있자니 내가 다 귀찮아 진다.

» 타슈쿠르간의 소택지 여름 풍경. 세상의 지붕 파미르의 한철 풍경이다.
석두성에서 내려다보는 타슈쿠르간은 거대한 고원의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 꼴을 하고 있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쉬어 가는 비옥한 땅이었다. 타지크인들은 봄이면 쌀보리나 콩을 심고는 양을 몰고 유목에 나선다. 그리고 가을에 돌아와 다 자란 곡식을 거둔다. 요즘 같은 여름이면 타슈쿠르간은 절반 이상 비어 있는 때이다. 이때쯤 타슈쿠르간을 지나던 당승 현장도 힌두쿠시를 넘어 피로한 몸을 이곳에서 쉬었다. 그도 아마 이곳 석두성에 서서 타슈쿠르간의 전경을 감상했을 것이다. 당시는 이곳을 갈반타국이라 했고 “사람들의 성격은 거칠고 무술 면에서 용맹하다. 하지만 신앙을 알고 불법을 숭상하며 가람은 10소, 승려는 500명이다”라고 했다. 당시는 이곳이 불국이었지만, 지금은 모두 개종해 무슬림이 되었다. 불교 유적 역시 전무하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것은 사라져도 이야기는 남는 법. 현장은 갈반타국의 국왕에 대한 이야기를 남겼다. 유난히 타지크인과 다른 한족 얼굴을 한 국왕의 내력을 들어보니 “한나라의 공주가 페르시아로 시집가는 도중 이 일대에서 난리가 나서 골짜기로 숨었다. 3개월이 지나 난리가 수습돼 다시 길을 가려 하니 공주가 임신을 했다. 페르시아 사신이 엄중히 하인들을 심문하니 공주를 찾아온 남자는 하늘의 태양이었다. 사신은 페르시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주변에 마을을 만들고 공주를 주군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여왕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니 하늘을 날고 구름을 움직이는 영웅이더라” 했다.

 


» 여름이면 늪이라 부를 수 있는 소택지로 변한다. 물 웅덩이가 많아져 여름 한철 사용하는 가교도 만들어 졌다.

‘천년여왕’이 물끄러미 쳐다볼 것만 같은…

 

바로 그가 이 황폐함만이 깃든 석두성의 주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저 아래 고원의 초원을 파미르 천마를 타고 질주하였는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나는 그 여왕이 더 궁금했다. 그녀의 삶은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과 닮아 있다. 그리고 어쩌면 며느리이자 백제를 건국한 소서노의 이야기도 품고 있다. 만주벌판에서 파미르까지 벋어 있는 이 이야기의 벨트는 누가 만든 것일까?

 

고원에 어둠이 깔리고 하늘에는 손에 잡힐 듯 선명한 별들이 피어난다. 사위는 이제 적막으로 덮였다. 조심스레 무너진 성벽 틈을 부여잡고 내려오다 힐끗 뒤돌아본다. 마치 그곳에는 고원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천년 여왕’이 있을 것만 같았다.

 

타슈쿠르간 가는 길 여행쪽지

 

늦가을부턴 폐쇄… 여름이 최적기

 

⊙ 교통 | 카슈가르에서 카라코람하이웨이(중국명 중파공로)를 통해 파미르고원으로 갈 수 있다. 최근 카슈가르에서 무장세력이 경찰서를 습격해 다수의 사상자가 났다. 중국 올림픽 기간을 노린 위구르독립운동 단체의 소행이 분명하지만 그들이 외국인을 납치한다거나 테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위구르인들은 외국인들에게 무척 친절하다. 카슈가르의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중국~파키스탄 간 버스가 있다. 현재는 국경이 폐쇄되어 타슈쿠르간까지 갈 수 있다. 늦가을부터 봄까지는 눈 때문에 도로가 폐쇄되는 경우가 많다. 여름이 최적기이다. 카슈가르에서 타슈쿠르간까지 왕복은 최소 이틀이다.

 

⊙ 숙박 | 타슈쿠르간에는 최근 3성급 호텔이 들어섰다. 싱가포르인이 세운 ‘크라운빈관’은 최신 시설을 자랑한다. 하루 400위안 정도. 하지만 옛것을 좋아한다면 42년 전통의 파미르빈관도 있다. 낡았지만 깨끗하다. 호텔 안에는 식당도 있다. 하루 200위안 정도.

 

⊙ 식사 | 지난번에 밝혔듯이, 이곳은 이슬람지역이라 고기류는 오직 양이다. 이곳은 3600미터의 고원이라 술을 마신다면 주의할 필요가 있다. 빨리 취하고 잘 깨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에 상관없이 50도짜리 고량주도 잘만 먹었다. 하지만 다음날 치러야 할 대가는 만인 평등이다.

 

⊙ 둘러볼 만한 곳 | 타슈쿠르간의 상징은 석두성이다. 요즘은 그 폐허를 보호한다고 입장료도 받고 있다. 10위안.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하지만 뛰어다니면 고산의 맛을 몸으로 느낀다. 그 아래 내려다보이는 소택지는 직접 들어가 느껴볼 만하다. 유목을 가지 않는 사람들이 야크와 양을 키우고 있으며 어마어마한 규모의 늪지를 관찰할 수도 있다.

 

 

 

기사등록 : 2008-08-06 오후 08:55:20 기사수정 : 2008-08-06 오후 08:5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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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장 풍경 기행 3 ~ 저항의 전설을 다시 한번

중국령에서 가장 먼저 이슬람지역이 된 카슈가르

한겨레
기사등록 : 2008-08-20 오후 06:45:36 기사수정 : 2008-08-24 오후 02:11:15
» 카슈가르 뒷골목에서 만난 소녀. 뜬금없는 비치볼을 든 소녀에게서 묘한 연민을 느낀다.
카슈가르의 아침. 눈부신 햇살이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면 절로 잠이 깬다. 게다가 아련히 들려오는 코란 암송 소리는 이곳이 무척이나 낯선 곳임을 일깨운다. 내가 묵는 호텔은 카슈가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인민로 앞에 있다.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젖히는 순간, 놀랐다. 인민로에는 차 한 대 없었다. 거리가 텅 빈 것이다. 하루아침에 ‘나는 전설’이 된 것일까? 그건 아니었다. 조금 있으니 붉은 머플러를 한 아이들 수백 명이 줄을 지어 인민광장 쪽을 향하고 있었다. 군인들을 태운 차량도 텅 빈 거리를 질주한다. 뭐지?
 
 

» 성화봉송을 위해 인민로가 완전히 비워졌다. 카슈가르의 위구르족은 배제되고 중국 한족 중심의 행사를 만들었다.

질주하는 성화 속 텅 빈 도시의 슬픔

 

이날은 바로 올림픽 성화가 카슈가르에 도착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새벽부터 도로를 완전히 비워놓고 일반인들은 접근도 못하게 막고 있었다. 하지만 이 풍경 속에 위구르인들은 없었다. 마오쩌둥 동상 앞에서 벌어지는 올림픽 행사는 그저 한족이 중심이 된 축제일 뿐이었다. 그렇게 중국인들은 고대로부터 이 땅 ‘신장웨이우얼(신장위구르) 자치구’가 중국의 일부라 주장했지만 이 땅이 ‘동투르키스탄’이라 생각하지 않는 위구르인들은 하나도 없다. 그날 아침 내가 본 카슈가르의 슬픈 풍경이었다.

 

카슈가르 시내는 인민로가 남북을 가로지르면서 묘한 풍경을 만든다. 북쪽은 전통적으로 위구르인들이 살아오던 황톳빛의 전통가옥들이 들어차 있다. 그에 반해 남쪽은 고층빌딩과 아파트들로 가득하고 주로 중국인들이 거주한다. 물론 남북 간의 경제 차는 엄청나다. 위구르인들은 여전히 돈 안 되는 1, 2차 산업에 종사하고, 중국인은 관광과 유통 중심의 3차 산업에 종사한다. 인구는 30만 정도로 최근 들어 급증한 한족이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물론 나머지는 이 땅의 주인이었던 위구르족이다.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성도는 우루무치이지만 이곳 카슈가르는 위구르인들이 정신적인 수도로 생각하는 곳이다. 역사적으로도 이곳은 실크로드의 천산남로와 호탄을 거치는 서역남도가 만나는 곳이고 파미르를 거쳐 인도로 가고자 한다면 꼭 들러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아주 오래전 이곳은 소륵(疏勒)으로 불렸다. 물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을 지났던 당승 현장은 그의 책 <대당서역기>에서 “농사는 번성하고 꽃과 과일도 풍성하다. 특히 가는 털로 짠 옷과 양탄자가 유명하다”라고 썼다. 신라인 혜초도 그의 책 <왕오천축국전>에 “중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사찰과 스님이 있으며, 소승불법이 행해진다”고 했다.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후 이곳을 찾은 마르코 폴로는 “주민들은 마호메트를 신봉한다. 아름다운 포도밭과 훌륭한 정원이 있고, 목화가 많이 자란다”고 했다. 불교도였던 위구르족들은 10세기부터 개종해 카슈가르는 중국령에서 가장 먼저 이슬람지역이 되었다. 그래서 카슈가르와 위구르인을 알기 위해 꼭 가봐야 하는 곳이 이 지역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 ‘에이티갈 모스크’이다. 오늘이 마침 금요일. 이슬람 주말 예배일인 ‘주마’이다.

 

 

» 성지 순례를 다녀온 청년들이 친구들의 환대를 받으며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향비는 과연 정절을 지키다 죽었을까

 

사원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늙은 포플러나무로 아름다운 정원을 꾸민 사원의 안쪽은 아주 넓었다. 정원 깊은 곳에 아름다운 조각 기둥으로 장식한 본당이 있다. 사람들은 개인용 양탄자를 갖고 와서 그 자리에서 기도를 하고 이맘(이슬람교단의 지도자)은 나직한 목소리로 코란을 낭송하고 있다. 하지만 여성은 보이지 않는다. 이 모스크 안은 남자들만 예배가 허락되어 있었다. 이제 스피커를 통해 “알라, 아크발”(신은 위대하다)이 울려 퍼진다. 나이마즈(예배)가 시작된 것이다. 기도 소리는 점점 큰 울림으로 포플러나무를 진동시켰다가 하늘 멀리 사라진다. 사람들은 앉았다가 일어서고, 다시 대지에 이마를 조아린다. 이들의 예배는 너무도 일사불란해 마치 어떤 약속된 확신을 보는 것 같다. 예배를 마치고 광장으로 엄청난 인파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원 들머리에는 홀로 자신을 돌볼 수 없는 많은 빈민 장애인들이 구걸을 한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동정의 손길을 내밀었다. 곧 이들의 앞에는 지폐들이 수북이 쌓였다. 객의 짧은 소견으로도 이슬람세계의 ‘약자에 대한 관용과 강자에 대한 저항’은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인다.

 

이슬람화된 카슈가르에 무하마드의 직계자손이라 칭했던 호자 가문이 일어선 것은 17세기였다. 이들이 수세기 동안 카슈가르 지역의 정치와 종교를 장악했던 시기에 청나라 강희제는 카슈가르를 침공한다. 그리고 호자 가문의 딸이었던 ‘향비’를 볼모이자 황제의 첩으로 데려간다. 베이징으로 간 향비는 황제의 거듭된 구애에도 비수를 자신의 가슴에 댄 채 거부했다. 이런 황제의 모습에 초조해진 황태후는 향비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바라느냐?” “돌아갈 수 없다면 차라리 죽겠습니다.” “그럼 오늘 너에게 죽음을 내리리라!” 향비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녀의 유체는 3년에 걸쳐 카슈가르로 돌아가 호자 가문의 묘지에 묻혔다.

 

향비의 전설은 중국에서도 매우 유명한 일화이고 위구르족 아이들도 아는 이야기지만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호자 가문이 배출한 황제의 비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절을 지키다 죽은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다 동릉에 묻힌 ‘용비’가 바로 그녀라는 것이다. 하지만 비극적이며 저항적인 전설은 만들어졌다. 호자 가문묘 앞에서 만난 위구르인은 “글쎄요. 전설이겠죠. 하지만 향비는 우리 가슴속에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중국인이 아니라는 증거지요”라고 한다.

 

 

» 카슈가르 인근의 우팔 월요시장. 양을 팔러나온 소녀의 모습이 이채롭다.

성지순례를 기념하는 떠들썩한 환영행사

 

황톳빛 가득한 구 도심을 거닐다가 함성을 들었다. 100여명의 청년들이 “알라, 아크발”을 외치며 행진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집회는 거의 불가능하다 들었지만 카메라 단단히 움켜쥐고 그들을 쫓았다. 무리를 자세히 보니 한 청년을 어깨에 태우고 행진하면서 연방 악수를 하고 있었다. 시끌벅적하지만 결코 축제나 혼례의식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보고 있던 행인들의 얼굴에는 일말의 불안감도 읽힌다. 이 떠들썩한 행렬은 청년의 집 앞에서 끝났다. 물어보니 “청년이 성지순례를 다녀온 기념행사”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메카를 다녀왔다면 그는 분명 이맘으로 불리는 종교지도자로 성장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카슈가르의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는 테러리스트들이지만 그들은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티베트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판도 안으로 이 땅이 들어온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독립의 방법은 다르다. 이들은 독립을 위해 폭력투쟁을 마다지 않는다. 결코 향비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없을 듯했다. 신장을 떠나는 내게 카슈가르의 황톳빛 골목은 꽤나 슬픈 풍경으로 남았다. <끝>

 

 

» 나귀의 발에 편자를 박기 위해 작업 중이다. 이곳은 완전히 중세로 돌아간 느낌이다.

» 카슈가르 여행지도

카슈가르 여행쪽지

 

사막에선 낙타 또는 버기카

 

◎ 교통 : 한국에서 카슈가르까지 가는 방법은 거의 항공이 유일할 듯하다. 하절기에는 대한항공이 인천에서 우루무치까지 연결된다. 다시 우루무치에서 철도를 이용하거나 항공편으로 카슈가르까지 갈 수 있다. 이번 올림픽 기간 중 크고 작은 사고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다. 최근 정보로는 인근 쿠차 등은 도시를 봉쇄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온다. 올림픽 이후에나 잠잠해질 듯하다.

 

◎ 숙박 : 카슈가르에는 전통 있는 호텔이 몇 있다. 과거 영국영사관으로 사용되던 치니와커빈관과 러시아영사관으로 사용되던 서만빈관이 그것이다. 모두 시설은 낡았지만 전통을 좋아한다면 묵어볼 만하다. 방은 하루에 200~300위안(10위안=1500원) 정도 한다. 하지만 요즘처럼 새로운 호텔들이 잇달아 들어서는 때는 깨끗하고 최신 시설을 자랑하는 곳도 많다. 200위안 정도면 충분하다.

 

◎ 식사 : 하절기는 해가 지면 시내 곳곳에 노천식당들이 들어선다. 매케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양고기 꼬치구이인 케밥을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 그렇다면 술 한잔 곁들여야 하는데, 이슬람 지역이라 술을 파는 곳은 많지 않다. 외국인이 드나드는 곳에서는 맥주 등을 시킬 수 있다. 치니와커 호텔에는 극장식 노천식당이 유명하다. 위구르민속공연도 관람할 수 있다.

 

◎ 둘러볼 만한 곳 : 카슈가르의 일요장터가 볼만했는데 최근 포장도로를 깔고 상설매장화하면서 볼거리가 줄었다. 대신 동쪽에서 약 50㎞ 정도 떨어진 소도시 우팔에서 월요일마다 장이 선다. 양, 소, 말, 염소 등 온갖 동물이 등장하고 지역 수공예품과 먹을거리가 등장하는 전통 장이다. 여기서 50㎞를 더 가면 다와쿤 사막이 있다. 고운 모래의 아름다운 사막 풍경을 볼 수 있으며 큰 호수가 있어 물놀이까지 할 수 있다. 사막에서는 낙타를 이용해 느리게 다니거나 버기카를 타고 고속으로 질주할 수도 있다. 취향 나름이다.

 

기사등록 : 2008-08-20 오후 06:45:36 기사수정 : 2008-08-24 오후 02:11:15

 

글·사진 이상엽/사진가 (한겨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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