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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Tour - World

파리 - 페르 라셰즈, 마리 로즈...

by Wood-Stock 2009. 6. 25.

 

그들의 파리는 얼마나 위대한가

한겨레 남종영 기자
» 올해 5월은 파리가 68혁명을 경험한 지 꼭 40주년이 되는 달이다. 에펠탑은 그때나 지금이나 파리를 굽어보고 있다.
그 파리는 어떤 곳일까? 얼마나 위대한 이름인가? 그녀는 맑고 쾌활한 기분이 되어 그 이름을 조그만 소리로 되뇌었다 … 엠마는 파리의 지도를 샀다. 그리고는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의 수도를 돌아다녔다 … 어둠 속에서 가스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과 극장의 주랑(복도)들 앞의 그 번잡스러운 가운데 늘어선 사륜마차의 발판들이 보이는 듯싶었다. (<마담 보바리>, 플로베르 지음, 동화출판공사 펴냄)
 
 

» 올해 5월은 파리가 68혁명을 경험한 지 꼭 40주년이 되는 달이다. 당시 시위대가 점거한 소르본 대학에서 는 1968년을 기억하는 사진전이 열렸다.

21세기에도 마담 보바리들은 여전해서 파리는 스타일의 도시라는 찬탄과 허영의 성소라는 냉소가 교차한다. 다시 한번 그 파리는 또 어떤 곳일까? 얼마나 위대한 이름인가? 맑고 쾌활한 기분으로 파리에 모여든 혁명가와 지식인, 예술가들의 이름을 불러 본다. 그러고는 손가락 끝으로 그들이 잠든 지도 위의 무덤을 돌아다녔다. 억울한 청년 장교 드레퓌스의 침울한 얼굴과 격노한 에밀 졸라의 고함과 <인터내셔널가>를 단숨에 써 내려간 뒤 밝게 웃는 외젠 포티에, 파리 외곽의 마지막 진지에서 세계 최초의 노동자 정부를 방어하는 코뮌 전사들의 땀방울이 보이는 듯싶었다.

 

21세기 트렌드 세터들이 파리로 모여드는 이면에서 우리가 20세기의 파리를 궁구할 이유는 없을까. 자유의 씨앗을 뿌린 그들이 걸었던 거리와 그들이 앉았던 카페 그리고 그들이 잠든 묘지까지, 현재에 존재하는 과거의 파리를 헤맸다. 진지하지 않은 시대에 진지하게 초여름 파리를 돌아다녔다. 그 파리는 어떤 곳일까? 얼마나 위대한 이름인가?

 


 

» 클레망에서 이브 몽탕까지 파리 동부의 페리 라셰즈 묘지에서 보물 찾기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초호화 역사 인물의 공동묘지를 가다

 

클레망에서 이브 몽탕까지 파리 동부의 페리 라셰즈 묘지에서 보물 찾기


묘지 찾기는 보물찾기와 비슷했다. 2유로를 주고 산 묘지 지도엔 분명 24번 구역이라고 표기됐건만, 묘지는 도통 보이질 않았다. 가로세로 5미터 구역을 10분 남짓 맴돌았다.그제야 지난해 낙엽이 아직 걷히지 않은 하얀 석관이 눈에 들어왔다.

 

프랑스의 이한열, 빅토르 누아르

 

‘사람들이여, 위대한 예술가이자 위대한 시민, 선인 도미에 여기에 잠들다’ 화가 오노레 도미에. 가난한 유리공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독재, 파리코뮌으로 이어지는 혁명의 시기에 줄곧 민중의 시선으로 파리를 관찰한 그의 이름은 세월의 흔적에 무뎌져 있었다.

 

파리 동부 페르 라셰즈 묘지. 발자크, 쇼팽, 에디트 피아프, 들라크루아, 비제, 로시니, 몰리에르, 오스카 와일드, 짐 모리슨, 이브 몽탕 … 세계에서 가장 유명인이 많이 묻힌 공동묘지다.

 

묘지를 찾기 위해서는 지도가 필요하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듬어야 한다. 물론 인기 무덤인 짐 모리슨, 이브 몽탕, 에디트 피아프는 주변에만 이르면 사람들이 틀림없이 서성거리고 꽃다발이 수북이 쌓였으므로 헛걸음이 없다. 하지만 시대가 잊은 사람들을 찾는 건 정말 쉽지가 않다.

 

빅토르 누아르. 그는 ‘프랑스의 이한열’이었다. 1870년 신문에 나폴레옹 3세를 비판한 뒤 두 발의 총탄을 맞고 거리에 스러졌다. 이틀 뒤 장례식에는 파리 시민 수만 명이 모여 왕정 반대 시위를 벌였다. 빅토르 누아르는 페르 라셰즈에서도 총을 맞은 채로 쓰러져 있다.

 

95번 구역의 외젠 포티에. 파리코뮌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세계 노동자의 노래 ‘인터내셔널가’를 작사했다. 레닌은 포티에의 25주기에 <프라우다>에 이렇게 썼다. “그가 첫 곡을 지었을 때 사회주의 노동자는 기껏해야 10명이었다. 그의 역사적인 노래는 지금 1천만 프롤레타리아가 부른다.”

 

동쪽으로 갈수록 좌파 인사들의 무덤이 많다. 76·97번 구역은 공산주의자이자 초현실주의자 시인 폴 엘뤼아르, 저널리스트 장바티스트 클레망 그리고 프랑스 공산당원들의 무덤이 줄지어 섰다. 그리고 이들을 ‘코뮌 전사의 벽’이 감싸고 있다. 파리코뮌이 실현된 해인 ‘1871’이라는 숫자가 벽에서 빛났다. 1871은 다른 세상을 꿈꾸는 자들의 비밀번호였다. 그건 1894 갑오혁명, 1592 임진왜란 같은 건조한 네 자리 숫자와 달랐다. 어떤 이는 1871을 삐삐번호를 삼았고, 어떤 이는 자물쇠 번호를 1871로 고정했다. 1871에는 알싸한 느낌이 있었다.

 

시민군 147명의 죽음과 선홍빛 체리꽃

 

마지막 시민군 147명은 여기서 사살됐다. 선홍빛 체리꽃이 피던 1871년 5월28일, 페르 라셰즈의 담장 밑으로 체리빛 피가 낭자했다. 여성 참정권 실현, 징병제와 상비군 폐지, 이자 폐지, 노동자 최저생활 보장 등을 획기적으로 보장한 세계 최초의 코뮌도 여기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5월이면 담장 왼쪽엔 체리 나무가 꽃을 피운다.

 

‘난 언제까지나 체리가 익을 무렵을 사랑한다/ 그때부터 내 마음속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다/ 행운의 여신이 나에게 온다 하더라도/ 이 상처를 고칠 수는 없겠지’(지금도 샹송으로 불리는 장바티스트 클레망의 ‘체리가 피던 시절’)

 

 


» 파리 14구의 몽파르나스 묘지는 페르 라셰즈보다 규모는 작다. 사르트르, 맨 레이, 드레퓌스, 프루동 등이 잠들었다.
드레퓌스에게 조약돌을

 

몽파르나스·몽마르트르·카타콤 묘지의 인물들

 

파리에서 가볼 만한 공동묘지는 페르 라셰즈 밖에도 몽파르나스 묘지, 몽마르트르 묘지, 지하 묘지인 카타콤 등이 있다.

 

1824년 몽파르나스 묘지엔 사르트르가 그의 연인 보부아르와 함께 잠들었다. 노란 대리석 석관 위엔 참배객들이 올려놓은 꽃다발, 펜, 안경, 지하철 티켓이 있었다. 사르트르 무덤 앞 벤치에서 만날 인사들을 지도에 체크했다. 지도는 관리사무소에서 무료로 나눠준다.

 

드레퓌스의 무덤은 어렵게 찾았다. 노란 대리석에 박힌 드레퓌스, 드레퓌스, 드레퓌스 … 드레퓌스 가문의 가족묘다. 그의 이름은 알프레도 드레퓌스. 독재와 불의가 판을 치면 드레퓌스 같은 희생자가 나온다. 역사의 변곡점마다 희생되는 드레퓌스들 앞에 에밀 졸라와 같은 구출자가 나타나면 좋으련만, 시대는 느리게 느리게 흘러간다. 참배객들이 하나씩 올려놓은 조약돌이 석관을 둘렀다. 사진가 맨 레이, 공상적 사회주의자 프루동의 무덤도 있다.

 

1798년 세워진 몽마르트르 묘지는 작가 에밀 졸라와 알렉상드르 뒤마, 스탕달,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 등이 묻혔다. 역시 관리사무소에서 지도를 얻어 찾아 다닌다. 카타콤은 지하 공동묘지다. 18세기 급성장한 파리는 묘지난을 겪었다. 보건 위생상 문제가 제기돼 파리시는 600여만 기의 묘지를 폐기하고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유골을 모아 몽파르나스의 20미터 깊이의 지하터널에 납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묘지는 레지스탕스 본부로 활용됐다. 평일에도 관광객이 붐벼 20∼30분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다. 입장료 5유로를 받는다. 다른 공동묘지는 무료다.

 

 

 

 

 

 

‘불량세입자’ 레닌의 집으로 가는 길
한겨레 남종영 기자
» 파리 생제르맹 지구와 바뱅역 교차로 등의 카페는 그때 그 자취를 품고 있다. 생제르맹 지구에 1886년 문을 연 카페 드 플로르.
시대가 잊어버린 예술가와 혁명가의 고향을 찾아 몽파르나스 거리로
 

파리지앵들은 거리에서 살아간다. 걷다가 노천카페에 앉아 거리를 자신의 응접실 삼아 버린다. 지난봄 보길도의 한 마을에서도 비슷한 풍경을 만난 적이 있다. 한 할머니가 집 앞 고샅길에 허름한 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었다. 이 순간 마을은 가난한 할머니의 너른 정원이 된 것이다.

 

트로츠키의 카페에서 연어 스테이크를

 

파리를 걷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세기를 지나온 성당과 대학, 아파트 등 역사적 건축물들이 산책의 배경으로 기다리고, 걷다가 지칠 때쯤이면 거리를 정원 삼을 만한 카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 몽파르나스는 예술가와 혁명가의 고향이었다. 피카소와 모딜리아니, 레닌과 트로츠키는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예술과 혁명을 논하다가 빈한한 작업실과 셋집으로 밤늦게 돌아갔다. 세기를 지나온 석조건물과 카페는 그때 그 자취를 여태 품고 있다.

 

1909년부터 1912년까지 레닌이 묵었던 뤼 마리로즈 4번지를 몽파르나스 워킹투어의 종점으로 삼았다. 사실 레닌의 집은 웬만한 가이드북에도 없었다. 유일한 실마리는 주소뿐이었다. 레닌의 집은 어떻게 생겼을까. 시대가 잊은 그를, 그의 집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지하철 4호선 바뱅역(Vavin)에서 워킹투어를 시작했다. 처음 산책자를 맞은 건 몽파르나스의 카페다. 카페 르 돔과 카페 로통드. 르 돔은 레닌이 놀았던 곳이고, 카페 로통드는 트로츠키가 놀았던 곳이다. 르 돔은 노르망디 지방에서 그날 공수한 해산물을 먹는 손님들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점심 식사 메뉴로 가벼운 연어 스테이크가 나온다. 10유로(1유로=1650원) 안팎.

 

카페 르 돔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뤼 캄파뉴 프르미에르(rue Campagne Premiere) 31번지에 아르누보 스타일의 건물이 나타난다. 지금은 ‘호텔 이스토리아’ 간판을 달고 있지만, 한때는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이 이곳을 드나들었다. 사진가 맨 레이의 스튜디오. 예술가들은 미국에서 건너온 다다이스트 사진가의 모델을 자청하면서 스튜디오에 찾아왔다. 제임스 조이스, 장 콕토 그리고 그의 연인 키키. 건물 앞에는 소공원이 있다. 지도를 들고 찾아온 여행자들은 소공원에 앉아 한때 맨 레이의 스튜디오였던 건물을 바라본다.

 

맨 레이는 스튜디오에서 5분 거리인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맨 레이의 묘비엔 초현실주의 예술로 이상사회를 꿈꿨던 그의 정신이 남았다.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무관심하지는 않았던” 맨 레이 이곳에 잠들다.

 

몽파르나스 묘지 뒷문으로 나가면 뤼 다게르(rue Daguerre)에 이른다. 레닌을 보기에 앞서 트로츠키를 찾기 위해서다. 뤼 다게르는 여행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시장 거리다. 200미터의 골목은 펄떡이는 생선과 푸른 과일을 파는 행상들로 활기차다. 그 거리를 통과하면 캐주얼한 아시안 레스토랑들이 기다린다. 트로츠키가 살았던 22번지의 작은 4층 건물은 호텔 간판을 걸었다. 호텔 맞은편 아시아 퓨전음식점 ‘향만각’의 노천 좌석에서 점심을 때웠다. 밥과 새우·돼지고기 등이 함께 나오는 메인과 샐러드·음료수로 구성된 세트메뉴가 5.50~8.80유로. 캐주얼한 식사를 찾는 로컬들에게 인기가 높다.

 

 

» 생제르맹 지구 카페 레 되 마고의 핫초콜릿인 쇼콜라. 걸쭉한 게 특징이다.
프랑스 공산당도 포기한 마리로즈 4번지

 

레닌의 집은 아득했다. 여행자의 발길로 더듬기엔 마리로즈 4번지 가는 길은 미로에 가까웠다. 몽수리 수원지 서쪽이었다. 마리로즈는 거대한 공동주택이었다. 레닌의 동지이자 아내였던 크룹스카야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1909년) 가을에 근처의 조용한 마리로즈의 옆골목에 있는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는 두 개의 방과 부엌이 있었다. 우리는 부엌에다 거실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다.”(사로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백태웅이 옮긴 <레닌의 추억> 중에서)

 

하지만 곧 마리로즈 4번지는 “러시아에서의 걷잡을 수 없는 반동 정치로 인해 정치적 망명이 급증하자 만원”이 되었다. 망명자들은 마리로즈 4번지의 문을 열자마자 안도의 긴 한숨을 쉰 뒤, 곧이어 상기된 얼굴로 조국에서 무르익는 혁명의 분위기를 전했다. 레닌은 이 집에서 망명자들을 맞고, 자전거를 타고 몽수리 근처의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몽파르나스 시내 카페에서 동지들과 술을 마셨다.

 

이런 그의 일상과 조우하길 기대했으나, 마리로즈 4번지에는 한때 이곳이 세계혁명의 본부였음을 보여주는 어떤 표지도 없었다. 1층에는 도미노피자의 오토바이들이 출정을 기다리고, 소형차들은 갓길을 따라 정렬했다. 파리에서 흔히 보이는 사진 찍는 사람도, 지도를 펼쳐든 사람도 마주칠 수 없었다. 단지 동네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어슬렁대는 이방인을 낯선 시선으로 흘끗거릴 뿐. 어쩌면 그들은 과거 레닌의 이웃이었음을 모를지도 모른다.

 

지난해 11월 프랑스 언론들은 한 시대가 저물었음을 보여주는 뒤늦은 징표가 나온 양 “프랑스 공산당이 재정난에 허덕이다 못해 마리로즈 4번지를 한 잡지사에 임대로 내놓았다”고 보도했다. 원래 프랑스 공산당은 이 집을 레닌의 소품을 가져와 요청에 따라 개방하는 소형 박물관으로 활용했다. 1980년대까지 동유럽 관광객들은 파리를 들르면 이곳을 찾았고, 고르바초프는 이곳에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옛소련 붕괴 뒤 마리로즈로 이어지는 발길은 끊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지난해 마리로즈 4번지에는 “1909년 7월부터 1912년 6월까지 레닌 이곳에 살다”라는 명패마저 떼어졌다. 빛 바랜 석조건물 사이로 명패의 흔적만 직인처럼 남았다.

 

 

» 뤼 다게르는 여행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거리. 캐주얼한 아시안 레스토랑과 시장이 있다.
피자집 오토바이만이 정적을 깨뜨리고…

 

마리로즈로 이사 오기 전에 레닌이 살던 뤼 보니에르의 집주인은 레닌을 싫어했다고 한다. 혁명 동지들로 항상 북적였기 때문이다. 제네바·런던·파리 등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레닌은 언제나 불량 세입자였다. 하지만 역사의 한 장은 넘어갔고 그의 집엔 발길이 끊겼다. 마리로즈 거리에는 앉아 쉴 만한 카페도 없었다. 그날 오후 태양볕은 뜨거웠고, 마리로즈 4번지는 쓸쓸했고, 빨간 피자집 오토바이는 정적을 깨뜨리며 달려갔다.

 

 


 

피카소 단골집에서 핫초코를 홀짝~

 

샤갈·모딜리아니·헤밍웨이도 노닥거렸던 역사적 카페 기행

 

파리의 대표적인 카페 지구는 두 군데다. 라인강 좌안의 생제르맹과 몽파르나스. 파리의 카페에 가면 노천에 앉아야 한다. 거리는 풍경이 되었다가 방이 되었다가 황혼에 물든다.

 

생제르맹 지구는 카페 레 되 마고와 카페 드 플로르가 유명하다. 1885년 문을 연 레 되 마고는 지식인들의 카페 문화가 처음 형성된 곳이다. 헤밍웨이와 피카소, 브르통이 단골이었고, 지금도 주인이 대를 이어 레 되 마고를 운영한다. 레 되 마고의 지배인은 “현재 설립자의 4, 5대가 함께 경영한다”며 “도쿄에 지점도 냈다”고 말했다. 야외 테라스에 앉은 뒤(식사 시간에는 경쟁이 치열하다), 레 되 마고의 안내서를 달라고 부탁하고, 쇼콜라(핫 초콜릿)를 시키고, 내부에 들어가 유명인들의 100년 전 사진을 구경할 것. 해질 녘에 가면 생제르맹 데프레(성당)가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라. 누런 햇빛에 반사되는 성당을 보며 쇼콜라를 홀짝이는 맛이란.

 

레 되 마고와 옆집 아저씨 같은 포근한 분위기라면, 이듬해 문을 연 카페 드 플로르는 신식 얌체 같다. 라이벌 레 되 마고와 달리 사진 촬영 등을 제지하기도 한다. 레 되 마고에서 놀던 축들은 새로 생긴 카페 드 플로르로 옮겨 갔다. 새로운 대리석 건물에 난방이 따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몽마르트르를 빠져나와 그 당시 신시가인 몽파르나스로 몰려들었다. 샤갈, 모딜리아니, 레제, 미로, 칸딘스키, 피카소, 헤밍웨이, 스트라빈스키, 콕토 등이 그들이었다. 레닌, 트로츠키도 있었다. 카페가 이들을 맞았다. 이들은 카페에서 노닥거렸고(때론 예술을 토론했고), 혁명을 모의했으며(때론 망명생활의 고단함을 불평했고), 영화의 필름처럼 거리를 흐르는 행인들을 바라봤다.

 

생제르맹의 카페 거리와 짝을 이루는 바뱅역 교차로에는 몽파르나스 카페 ‘빅 포’가 모여 있다. 카페 르 돔과 라 로통드, 라 쿠폴, 레 셀렉트가 그들이다. 모두 20세기 초반 문을 열었다. 르 돔은 굴·조개·생선 등 그날 공수해 온 싱싱한 해산물 요리가 유명하다. 바뱅역 교차로에는 로댕의 발자크상이 있다. 발자크가 추악하게 표현됐다고 해서 논쟁이 된 이 작품을 빠뜨리지 말자.

 

반 관광지인 생제르맹과 몽파르나스의 카페는 음식값이 비싸다. 게다가 비싼 환율까지 더해 두 명이 정찬을 하면 우리 돈 10만원이 훌쩍 넘을 것이다. 아침 식사는 10유로 안에서 가능하므로 이 틈을 타 역사적 카페에 앉아보도록.

 

공상적 사회주의자 프루동, 실존적 마르크스주의자 사르트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레닌과 트로츠키주의자(!) 트로츠키 등과 연대의 끈을 놓치기 싫다면, 그들과 역사적 끈이 연결된 프랑스 공산당 본부를 찾아가보라. 전통적인 노동자 거주지역인 콜로넬 파비앵(colonel fabien)의 지하철역에서 나오면 십중팔구 시선을 끄는 건축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물이다. 르코르뷔지에와 함께 국제연합 건물 설계에 참여하고, 브라질리아를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의 작품이다. 이 신기한 건물의 입구가 어디인지 아마 궁금해질 것이다.

 

공산당 본부 바로 뒷블록에 ‘21세기 사회주의자’들이 자주 찾는 단골 카페 라 비에르(104 Av. Simon Bolivar)가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는 음식평론가 로자 잭슨의 말을 따 라 비에르를 이렇게 평했다. 황당하지 않은 가격(파리의 유명 카페 가격은 때론 황당하다)과 좋은 맛 때문에 지역 주민들이 노상 다니는 카페. 20세기에도 노동자 거주지역이었고 21세기에도 노동자들의 삶터인 파비앵의 맛있는, 그냥 평범한 카페.

 

 

 

 

파리 여행쪽지

 

묘지 찾을 땐 지도 챙겨야

 

⊙ 에어프랑스와 대한항공이 인천∼파리를 오전 9시50분, 오후 1시20분 날마다 두 차례 공동 운항한다. 아시아나항공은 월·수·금요일 오후 1시15분에 출발한다. 12시간 안팎 걸린다. 할인 항공권 기준 82만∼105만원. 유류할증료 등 세금이 40만∼50만원 붙는다.

 

 

⊙ 프랑스관광청 홈페이지(kr.franceguide.com)를 참고해 여행 계획을 세운다. 영문이기는 하나, 파리시가 운영하는 관광 홈페이지(paris.fr)의 정보가 자세하다. 박물관·극장·공원·카페 등으로 분류됐다. 영문 온라인 파리 매거진 메트로폴 파리(metropoleparis.com)는 최신 정보가 가득하다.

 

 

⊙ 지하철로 이동하는 게 편하다. 파리 시내에서 사용 가능한 1회권 1.5유로(1유로=1650원). 1회권 10장인 카르네가 11.10유로.

 

 

⊙ 페르 라셰즈, 몽파르나스 등 공동묘지는 아침 8∼9시쯤 열어 오후 5∼6시에 닫는다. 지도 없이는 해당 묘지를 찾을 수 없다. 관리사무소에서 안내지도를 받는다. 페르 라셰즈는 규모에 비해 관리사무소에 비치된 지도가 간략해 정문 앞 카페나 가게 등에서 파는 유료 지도(2유로)를 챙기는 게 낫다.

 

 

⊙ 레 되 마고, 카페 드 플로르 등은 지하철 4호선 생제르맹 데프레역에서 내린다. 바뱅역도 지하철 4호선이다. 마리로즈 4번지 근처에서는 4호선 포르트 도를레앙역이나 알레지아역이 가깝다. 4번지를 둘러보고 몽수리 공원에 가 보는 것도 괜찮다. 초록 잔디가 드넓은 파리의 전형적 공원. 파리지앵들은 노천카페처럼 의자를 내놓고 앉아 해맞이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