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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문화예술 관련글

자유로운 청년 김중만

by Wood-Stock 2009. 6. 4.
“세상 끝에 서야만 보여줄 수 있다”
극단적 방황을 자연의 위대함으로 이겨낸, 쉰이 넘어도 자유로운 청년 김중만
한겨레
» 풍기텡가/2007, 히말라야.
사진가 김중만(54). 그는 스타다. 자신의 카메라에 담았던 스타들보다 더 반짝이는 스타다. 그가 나선 곳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번쩍이고 사람들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커다란 사자 갈기 같은 레게머리는 그의 아이콘이다. 화려한 거리의 입간판에는 새로 나온 디지털 카메라와 함께 그가 서 있다. 그는 우리 시대 사진을 찍는 스타다. 그가 스타인 이유는 그의 사진에 있다. 70년대 한국 지형에서 성장하지 않아 어떤 것에도 거리낌이 없는 사진, 창조적인 사고가 억압당하지 않는 자유가 구현된 사진, 그의 사진의 출발이다.
 

 

» 정방폭포/2007, 제주.

정신병원 강제 입원도 꺾지 못한 자유의지

 

“1975년, 프랑스 니스, 그해, 미술학도였던 나에게, 사진이 찾아왔다.” 그의 사진집 <섹슈얼리 이노선트> 첫 장에 그가 적은 글이다.

 

그가 말한 것처럼 리스 국립 응용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던 피부만 노란색일 뿐 하얀색의 서양인들과 한 치도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한 청년에게 첫사랑처럼 사진이 다가왔다. “친구의 사진 인화를 도와주기 위해 현상과 프린트를 했다. 단 5분 만에 한 장의 그림이 만들어졌다.” 그 광경은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그길로 그는 이젤을 접고 사진기를 잡았다.

 

초창기 그의 사진은 마음속에 만개한 자유의 꽃을 활짝 피우는 것이었다. 의료 활동을 위해 아프리카로 떠난 아버지를 따라나선 열다섯 살 이후로 그는 한국인이었지만 한국인이 아니었고, 프랑스인이었지만 프랑스인이 아니었다. 그의 성장 과정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 김중만을 만들었다.


1977년 칸의 미술제를 찾은 한국 화가들을 만난 김중만은 그 인연으로 귀국해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개인전은 암울했던 70년 말 한 줄기 빛처럼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자유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들이었다. 당시 그는 35㎜필름(135필름)으로 작업한 사진을 전시했다. 커다란 중형카메라로 찍은 사진만을 전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선사했다.

 

그는 강운구, 주명덕 등 사진계 인사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적인 삶”을 살던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독특한 느낌의 사진으로 한국의 패션 사진계를 쥐락펴락하는 인사가 되었다.

 

 

» Are you going with me?

» 데드플레이/2007, 나미브사막.

» 주상절리/2007, 제주.

별이 빛날 수 있는 이유는 까만 밤하늘 때문이다. 그가 스타인 이유 중의 하나는 삶의 한때를 점령한 어둡고 극단적인 방황 때문이기도 하다.

 

세 번의 이혼(세 번째 부인과는 다시 합쳤다), 두 번의 추방(두 번째 추방은 단지 신상옥 감독의 전 부인과 살고 있다는 이유였다), 한 번의 검찰 연행과 부당한 정신병원 강제 수용은 그의 시간을, 그의 작품을 어둡고 음울하게 만들었지만 삶에 대한 자유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정신병원 강제 수용 때 당시 전두환 정권이 나를 정말 예술가로 만드는구나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 일은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정신적 공황이 왔다. 사진이 없었다면 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회상한다.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심연의 바다에서 그가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사진의 진실성이었다. “어두운 내 사진을 보고 사람들은 벽에 걸 수 없다고 했다. 너무 우울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가 깨닫는 것은 진실이 사진에 그대로 표현된다는 사실이었다.

 

 

» 장진영.
» 병.

그는 아프리카에 가서 동물을 찍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생명과 자연의 위대함을 보았다. 삶의 밝은 부분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1999년 그가 찾아낸 밝은 빛 때문에 귀국할 용기가 생겼다. 7년간 가족을 위해서 돈을 벌기로 하고 이제 그 약속을 지킨 그는 1년 6개월째 상업적이지 않은 사진을 찍고 있다.

 

히말라야 산맥, 두바이 사막, 나미비아 사막 등 세상 끝에 서서 카메라를 들었다. 남극, 북극, 베링해, 보르네오 밀림, 아마존도 찍을 계획이다. “사진가의 운명은 화가나 소설가와 다르다. 그들은 세상 끝을 잠깐 체험하고 자신의 방에 돌아와 세상 끝을 보여주면 되지만 사진가는 세상 끝에 서야지만 보여줄 수 있다.” 그가 오지를 다니는 이유다.

 

 

 
곧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 작품 등장

 

히말라야에서 체험한 인간 한계에 대한 극한 체험은 그를 김중만이지만 김중만이 아닌 사진가로 만들었다. 곧 그의 작품들이 뉴욕 소더비 경매장 카탈로그에 등장한다.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는 일도 한다. 그를 향해 카메라를 드는 동안 발목과 목덜미에 까만 그의 문신들이 반짝인다. 쉰이 넘었지만 여전히 그는 자유로운 청년이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작품사진 김중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