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와 변주]월경을 꿈꾸던 여행자 ‘낭만’의 문을 활짝 열다 “겨우 이것뿐인가?”라고 질문하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여행할 권리. 소설가 김연수의 산문집 ‘여행할 권리’(창비)의 첫 페이지에는 그 짧은 문장이 깃발처럼 걸려 있다. 책을 읽기 전에 심드렁하게 지나쳤던 한 줄의 글귀였는데, 300쪽가량의 책을 순식간에 다 읽고 들여다보니, 이거, 음미할수록 묘미가 있다.
그에게 ‘여행’이라는 행위는 무척 치열한 의미를 갖는 듯하다.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말하자면 정신의 월경(越境)과도 같다. ‘겨우 이것뿐인가’라고 회의하면서 더 넓고 높은 차원으로 자신의 존재를 옮겨보려고 몸부림치는 것. 그래서 이 소설가는, 30년대의 작가 이상과 1950~60년대의 시인 김수영을 ‘여행자’의 전범(典範)으로 여긴다. 이상은 1937년 도쿄 진보초오의 ‘꼬부라진 뒷골목 이층 골방’(김기림의 회고)에서 숨졌다. 그는 동시대의 시인 김기림에게, 프랑스 파리까지 한번 가보자고 언약했지만, 그 행로의 중간에 결국 세상을 등졌다. 김수영은 또 어땠는가. 그는 퇴락한 50년대 모더니즘을 바라보며 ‘겨우 이것뿐인가?’라며 회의하다가, 독하게 신경질을 부리며 들큰한 카페를 빠져나왔다. 그는 찬바람 부는 광장에서 ‘시여, 침을 뱉어라’라고 외쳤다. 결국 정신의 월경을 꿈꾸는 여행은 그렇게 더 넓고 높은 곳에서 찬바람을 맞는 것일 테다. 그러다가 때로 목숨을 잃기도 하는 것일 테다. 진보의 길을 가고자 하는 순수한 개인의 운명이란, 그렇게 가혹할 때가 많지 않던가. 이제 책장을 덮고 베토벤을 생각한다. 김연수의 ‘여행할 권리’를 읽는 내내, 문득문득 베토벤이라는 존재를 떠올리곤 했다. 겨우 이것뿐인가, 라고 질문하면서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것. 이것이야말로 베토벤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아니던가. 베토벤도 월경을 꿈꾸던 여행자였다. 100년의 세월을 버텨온 고전주의가 진부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19세기의 벽두. 1802년 10월에 베토벤은 오스트리아 빈 교외의 조용한 마을 하일리겐슈타트에 있었다. 귓병은 날로 악화돼 치유불능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당시의 베토벤은 ‘이게 아닌데’라는 음악적 회의에 부딪혀 있었고,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난치병에 시달리며 차라리 죽음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가 바로 이때 쓰여진다. 그것은 동생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편지 형식의 유서였다. “이대로 죽는다 해도 후회는 없다. 죽음이 나를 끝없는 고뇌에서 해방시켜 줄 테니.” 그렇게 막장까지 갔던 베토벤은 죽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답답한 고전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으며 월경했다. 그것이 바로 교향곡 3번 ‘에로이카’. 바야흐로 베토벤 음악사의 중기(中期)로 거론되는 새로운 ‘낭만’의 시대가 이로부터 활짝 열린다. 1803년 여름에 본격적으로 착수해 이듬해 봄에 완성한 이 ‘괴물’ 같은 교향곡은, 근대음악사에 ‘벼락처럼 떨어진 축복’과도 같았다. 베토벤 이전의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장대한 규모, 격렬하게 부딪히는 긴장과 이완. 그것은 ‘이제 음악이 가야 할 길이 바뀌었다’는 선언이었다. 베토벤은 귀족들의 비위를 맞춰주던 산뜻한 선율과 형식을 가차없이 파괴했으며, 그리하여 음악은 그 자체로 묵직한 존재감을 얻었다. 베토벤은 이 곡을 스스로 지휘해 초연했는데, 당시의 청중들은 틀림없이 ‘불편’했을 것이다. 거장 푸르트뱅글러가 빈필하모닉을 지휘한 52년 녹음(EMI)은 ‘에로이카’를 거론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역사적 명연이다. 낭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걸작을 또 한 명의 낭만주의자가 지휘하는 셈이다. 이 음반이 너무 오래된 것이라 탐탁지 않다면, 99년에 다니엘 바렌보임이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를 지휘한 녹음(Teldec)을 선택해도 좋다. 카라얀이 베를린필을 지휘한 77년 녹음(DG),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LA필하모닉(DG), 솔티와 시카고 심포니(데카)도 후회없는 선택이 될 듯하다. 칼 뵘이 베를린필을 지휘한 60, 70년대 연주는 신뢰할 만한 겸손함을 내포하고 있지만, 왠지 단단한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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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와 변주]중독성 있는 슬픈 선율로 그린 아름다움과 죽음의 비창미 1911년 5월,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1875~1955)은 이탈리아 베니스를 여행하고 있었다. 그는 거기서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는다. 나이 쉰을 갓 넘긴 말러의 부음은 토마스 만에게 적잖은 충격을 줬다고 전해진다. 토마스 만은 당대의 어느 작가보다 음악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었던 사람이었고, 특히 말러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그는 말러의 애제자이자 음악적 벗이기도 했던 지휘자 브루노 발터(1876~1962)와 친밀한 우정을 나누던 사이였다.
상심에 빠진 토마스 만은 아름다운 베니스의 풍광에서조차 ‘죽음’의 이미지를 봤던 모양이다. 2년 후 그가 발표한 ‘베니스에서의 죽음’(Der Tod in Venedig)은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어느 중년 예술가의 마지막 순간을 그린다. 미(美)와 죽음의 문제. 결국 토마스 만은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라는 중편을 통해 세기말을 관통했던 이 탐미적 주제를 다시 끄집어내며, 그 직접적 계기는 흠모했던 작곡가 말러의 죽음이었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과로와 무기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50세의 작가 구스타프 폰 에센바흐는 휴양차 베니스의 리도섬을 찾아간다. 그는 그곳에서 미소년 타치오를 만나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사랑. 그의 시선은 타치오에게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 매혹은 50 평생을 도덕주의자로 살아온 중년의 영혼을 뒤흔들 만큼 강렬하다. 그는 베니스에 콜레라가 창궐해도 떠나지 못한다. 거리 곳곳을 배회하며 타치오의 뒷모습을 고통스럽게 좇는다. 결국 그는 수영을 즐기던 타치오를 넋놓고 바라보던 바닷가 벤치에 홀로 앉아 죽음을 맞는다. 소설은 분량도 짧고 줄거리도 단순하지만 쉽게 읽히진 않는다. 독일 소설 특유의 관념적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데다, 문학적 상징도 많은 탓이다. 대신 이탈리아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1906~1976)가 71년에 만든 동명의 영화라면 좀더 접근이 용이하다. 비스콘티 감독은 주인공의 직업을 아예 작곡가로 바꿨고, 어린 딸을 잃고 상심에 빠지는 에피소드 등을 곁들이면서 ‘말러’의 실제 모습을 화면 속에 노골적으로 심어놓는다. 영상도 탐미적이라고 할 만큼 아름답다. 게다가 영화의 시종(始終)을 장식하는 교향곡 5번의 4악장은, 이 영화가 결국 비스콘티가 말러에게 바치는 ‘헌사’임을 보여준다. 마지막 낭만주의 작곡가 말러는 모두 10개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그것들은 고전이나 낭만 초기의 교향곡들에 비해 연주시간이 길고 구조도 복잡하다. 그래서 적잖은 이들이 말러 교향곡의 산맥에 오르기를 꺼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1번, 4번, 5번부터 접근하는 것이 좋다. 특히 아름다움과 죽음의 친연성을 그려낸 5번 교향곡은 선율미가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트럼펫이 장송 팡파르를 울리며 시작하는 1악장. 바이올린과 첼로가 연주하는 주제 선율은 슬프다. 마치 한 곡의 ‘노래’와도 같은 이 선율은 몇 번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로 흥얼거리게 되는 중독성을 가졌다. 타악기조차도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연주되는 비애감 넘치는 악장이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4악장 아다지에토(Adagietto)는 느리디 느리다. 현악기와 하프 한 대만으로 연주되는 8분이 조금 넘는 악장. 1악장과 더불어 말러 음악의 비창미(悲愴美)를 대표하는 4악장은 꺼지는 촛불처럼 잦아들면서 짙은 허무를 풍긴다. 영화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은 라파엘 쿠벨릭이 지휘하는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의 연주. OST보다는 5번 교향곡 전체를 수록한 71년 연주(DG)를 구하는 것이 용이하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87년에 빈필하모닉과 연주한 녹음(DG)은 고전 반열에 오른 필청반이다. 특히 4악장 아다지에토는 한 번 들으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명연. 비교적 최근 연주로는 지휘자 루돌프 바르샤이와 융에 도이치 필하모닉의 99년 녹음(브릴리언트)이 좋다. 청소년들로 이뤄진 교향악단이 발군의 연주를 들려준다.
Kubelik(1971, DG) bernstein(1987, DG) Barshai(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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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둘러싼 이런 식의 일화는 한두 개가 아니다. 2년 뒤 뉴욕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필하모닉과 협연하던 날. 그는 따뜻한 물에 거의 한 시간가량 손을 담그고 있다가 연주회 시작 2분 전에야 대기실에 나타났다. 이날의 옷차림도 황당했다. 두터운 외투와 올이 굵은 헐렁한 스웨터. 당황한 번스타인이 “청중 앞에서 이 스웨터를 벗을 건 아니지”라고 묻자, 그는 아무 대답없이 스웨터를 벗었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온통 헝클어졌지만 그는 손으로 그것을 쓸어올리지도 않은 채 무대로 나갔다. 그날 연주한 곡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2번’. 그는 애지중지하는 ‘난쟁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고, 청중에게서 비스듬히 등을 돌린 자세였다. 그는 느린 악장에 이르자 입을 헤 벌린 채 무대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켰고, 마지막 악장에선 거의 뒤로 쓰러질 것 같은 자세로 피아노를 쳤다.
캐나다 출신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n Gould·1932~82). 앞서 언급한 두 개의 일화는 미셸 슈나이더의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이창실 옮김·동문선)를 참조했음을 밝힌다. 굴드는 콘서트홀의 ‘청중’을 좋아하지 않았다. 피아니스트로서 한창 때였던 64년, 당연히 출연료도 고공행진했을 그 시기에 굴드는 청중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려버린다. 그때부터 그의 음악 활동은 오로지 방송국과 음반사의 스튜디오에서만 이뤄진다.
굴드의 오랜 친구이자 의사였던 피터 F 오스왈드는 ‘글렌 굴드, 피아니즘의 황홀경’(한경심 옮김·을유문화사)이라는 평전을 썼다. 거기엔 굴드가 ‘청중’을 어떤 존재로 생각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인 언급이 등장한다. 굴드는 말했다. “현악기들이 불협화음을 만들어낼 때를 기다리며, 지휘자가 까다로운 박자에서 실수하기를 기다리고… 끔찍합니다. 음악회를 쫓아다니는 철면피한 인간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싫어하며 신뢰하지도 않고, 친구로 삼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에 대한 오스왈드의 해석은 이렇다. “글렌은 연주회장에 오는 사람들이 음악을 들으러 오는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는 음악을 듣는 장소로서 연주회장은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운명에 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스스로 고립을 원했던 피아니스트.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우울증을 앓았으며, 상식을 뛰어넘는 멋대로의 행태를 보여줬던 사람. 그러나 굴드를 다만 그렇게 기행을 일삼은 피아니스트로만 바라본다는 것은, 어쩌면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청중의 태도’와 별로 다르지 않을 법하다. 그렇다면 굴드는 과연 누굴까.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가 유작으로 남긴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장호연 옮김·마티)는 굴드에 대해 한 단계 높은 조망을 제시한다. 사이드는 굴드를 “좋은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기다리듯 가만히 앉아서 작품이 차려지기를 기다리는, 조용하고 수동적인 청중에 맞서 싸움을 거는 돌발적인 천재”로 얘기한다. “기교면에서 미켈란젤리, 호로비츠, 바렌보임, 폴리니, 아르헤리치와 같은 반열에 놓이”지만, 뛰어난 기교적 연주를 연주회장에서 과시하는 것을 뛰어넘어 “담론의 영역으로 나아간 지식인”이라는 것이 사이드의 평가다. 그리하여 그는 굴드를 “지식인 비르투오소(기교가 뛰어난 연주자)”로 칭한다. 사이드는 그렇게 말년의 저작에서, 그동안 굴드를 향해 던져졌던 수많은 수수께끼와 의문부호에 대해 명징한 답변을 내놓고 떠나갔다.
기행과 파격을 일삼았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음악가로서 그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지난주 ‘주제와 변주’는 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는 시도였고,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장호연 옮김·마티)에서 풀어놓은 ‘모범답안’에 상당히 많은 빚을 졌음은 이미 밝힌 바와 같다.
사이드는 이것을 “부르주아 문화가 꽃피운 산물”이라고 진단한다. “모차르트, 하이든, 초기 베토벤을 양육했던 교회, 궁정, 사유지를 대체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자율적이고 세속적인 연주공간(콘서트홀 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우리가 놀라운 기교를 가진 천재를 들으러 가는 현대의 콘서트홀은, 짜릿함과 흥분을 극한 상황으로 체험하는 일종의 벼랑”이라고 지적한다.
비르투오소 시대가 막을 올린 지 100년쯤 지나서 등장한 한 명의 ‘반항아’. 그가 바로 굴드였다. 그는 100년을 거치면서 더욱 집요해진 청중의 기대와 요구를 가차없이 거절했다. 이에 대한 굴드의 직접적 언급은 62년에 쓴 ‘박수를 금지하자!’(Let’s Ban Applause!)에서 드러난다. 굴드는 이렇게 썼다. “예술이란… 내적 연소다. 천박하게 밖으로 드러내 대중에게 과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음악의 목적은 아드레날린을 순간적으로 분비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경이롭고 고요한 상태를 점진적으로 구축해가는 것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굴드가 음악계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50년대 중반. 반 클라이번과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등의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이 리스트, 쇼팽, 라흐마니노프의 통속적이면서도 화려한 선율을 연주하며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때였다. 사이드의 표현에 따르자면, “굴드가 음악가로서 경력을 쌓아갈 무렵, 낭만주의 음악은 대단히 상업화되고 말랑말랑한 레퍼토리로 변질된 상태”였던 것이다. 굴드가 바흐를 선택한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당시의 청중에게 ‘바흐’는 낡고 재미없는 음악의 대명사가 아니었던가. 바흐를 듣는다는 것은 마치 ‘골동품’ 취미와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역으로 굴드는, 죽는 날까지 바흐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굴드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평생에 걸쳐 두 번 녹음했다. 사이드는 55년 내놓은 첫번째 녹음에 대해 “비르투오소의 역사에 진정으로 새로운 무대가 열렸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두 번째 녹음은 81년 4월과 5월에 이뤄졌다. 굴드는 여전히 화려하고 달콤한 음(音)을 거부한다. 그의 피아노는 명징하게, 스타카토로 울려나온다. 말년의 굴드는 그렇게 소멸하는 음에 집중했다.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을 응시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음악이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하나의 ‘역사’로 남겨놓은 굴드는 이듬해 10월 영면했다. 50세.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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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라디오에서 ‘FM 실황음악회’를 진행하는 컬럼니스트 정준호씨가 한 통의 메일을 보내왔다.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는 오이스트라흐 아닐까요? 한데 푸치니 탄생 150주년과 카라얀 탄생 100주년에 가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다들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지난달 30일 도착한 메일이었다. 그날은 마침 다비드 오이스트라흐(1908~74)의 생일이었다.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태어난 20세기 바이올린의 거장. 한 통의 메일이 잠시 잊고 있던 그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지난해 이맘때쯤 독일에 살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을 인터뷰했을 때, 그녀가 했던 말도 떠올랐다. “크고, 부드럽고, 따뜻한 소리를 내고 싶어요.” 바로 오이스트라흐 같은 소리를 내고 싶다는 뜻이었다. 오이스트라흐는 그렇게, 21세기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도 “닮고 싶은 연주자”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생전의 오이스트라흐는 ‘2등’과 인연이 깊었다. 어린 시절에는 “이 아이는 재능이 없어요”라는 말도 들어야 했다. ‘오이스트라흐’라는 이름이 처음 주목을 받았던 것은 1935년. 그해 열린 비에냐프스키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하면서였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는 16세의 프랑스 소녀 지네트 느뵈(1919~49)에게 쏠렸다. 그녀가 1등이었다. 얼굴도 예뻤다. 7살에 출전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실력을 보여줬던 폴란드의 이다 헨델에게도 음악계의 관심이 몰렸다. 오이스트라흐는 뒷전에 놓이는 처지였다.
‘20세기 최고’라는 헌사도 그의 생전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야사 하이페츠’라는 벽 때문이었다. 오이스트라흐보다 7살 많은 하이페츠는 러시아 바이올린의 명가(名家)로 꼽히는 레오폴드 아우어의 문하(門下), 이른바 ‘아우어 집안’의 적자였다. 그는 3살 때 바이올린을 시작해 10살 무렵에 이미 유명해진, 그야말로 신동이었다. 10대 중반부터 세계를 돌며 신기(神技)에 가까운 기량을 뽐내던 그는, 1917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미국인들을 열광시켰다. 그리고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조국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았다. 24세에 미국 시민권을 얻어 ‘미국인’으로 살면서 부와 영예를 풍족히 누렸다.
경이로운 테크닉으로 20세기 초·중반을 열광시켰던 야사 하이페츠. 오이스트라흐 앞에는 그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이스트라흐는 또 ‘2등’에 머물러야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겸 다큐영화 제작자인 브뤼노 몽생종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20세기 거장들의 다큐멘터리를 여러 편 만들었고, 그들의 삶과 음악세계를 생생하게 기록한 책도 몇권 썼다. 말하자면 영상과 문자로 20세기 거장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필름 가운데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인민의 예술가인가?’라는 것이 있다. 구소련 체제를 ‘억압’으로, 오이스트라흐를 그 ‘희생자’로 만들어가려는 ‘단순 구도’는 때때로 불편하지만, 그래도 이 영상물은 오이스트라흐의 삶과 음악을 일별하게 해주는 귀한 자료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는 몽생종의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이스트라흐는 바이올린의 왕이었어요. 빼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멋진 남자(wonderful man)였어요.”
그 오이스트라흐가, 허름한 옷차림의 청중 앞에서 바이올린을 켠다. 감자를 캐다 온 듯한 농민, 혹은 기계를 돌리다 퇴근한 듯한 노동자쯤으로 보이는 차림새들이다. 하지만 그들 앞에 선 오이스트라흐의 표정은 진지하다. 절친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1916~99)이 서방으로 망명하길 권유했을 때, “조국이 나를 키워주고 지금의 자리를 줬다”며 거절했다는 바이올리니스트. 이제 많은 이들이 그를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기억한다. ‘2등’의 삶을 묵묵히 살며 보여줬던 중후한 인간미와 가슴을 울리는 바이올린 소리. KBS 클래식FM이 이달 10일까지 그의 미공개 음원들과 희귀 연주실황을 소개하고 있다. 놓치기 아깝다.
ㆍ아내의 죽음, 그 황망함과 쓸쓸함…아름답고 슬픈 선율에 담아
옛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75)가 영화음악 작곡에 처음 손을 댄 것은 1928년이었다. 코진체프 감독이 만든 <신 바빌론>이라는 영화였다. 그후에도 그는 거의 매년 하나씩 영화음악을 만들었다. 마지막 작품은 70년 작곡했던 <리어왕>. 이 영화의 감독도 역시 코진체프였다. 그렇게 해서 쇼스타코비치는 평생 40편에 달하는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그는 왜 이렇게 많은 영화음악을 썼을까. 그것이 ‘의문’으로 남는다. 쇼스타코비치라는 대(大) 작곡가의 생존 시기. 그 시절은 마침 소련 영화의 융성기였다. 쇼스타코비치와 무려 10편의 영화를 함께 작업했던 코진체프는 당시 소비에트의 대표급 감독이었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두 편 외에도 <막심의 청년시절> <막심의 귀환> <소박한 사람들> <선구자의 길> 같은 영화에서 호흡을 맞췄다. 그렇게 유도한 것은 물론 ‘당’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당의 권유를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곤 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바로 영화음악 작곡이 쇼스타코비치에게 긴요한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청년시절 그는 영화관에서 무성영화 배경음악을 연주하며 아르바이트를 했고, 좀더 나이 들어서는 영화음악을 작곡하며 ‘밥’을 벌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작곡한 영화음악을 들을 때마다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가장’의 애환 같은 것이 느껴진다. 33세에 레닌그라드음악원 교수로 부임했다가, 42세에 즈다노프의 비판을 받고 교수직을 사임해야 했던 정황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내향적이고 성실했던 쇼스타코비치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던 듯하다. 이런 ‘유추’는 충분히 가능하다. 왜냐하면 36년부터 40년 사이에, 그는 다른 시기의 두 배나 되는 분량의 영화음악을 쏟아놓기 때문이다. 이 때는 바로 쇼스타코비치가 ‘아버지의 기쁨’을 만끽하던 시절. 딸 갈리나가 36년에, 2년 후에 아들 막심이 태어난다. 물론 ‘아빠’ 쇼스타코비치는 고된 노동으로 피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두 아이에게서 많은 위로와 기쁨을 얻었을 것이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영화음악을 만들었던 쇼스타코비치. 그는 55년에 영화 <등에>(Gadfly)를 위해 모두 12곡으로 이뤄진 모음곡(Suite)을 작곡한다. ‘등에’는 ‘쇠파리’라고도 부르는 날벌레. 영화의 원작은 영국 작가 에델 릴리언 보이니치가 쓴 낭만적 혁명소설이다. 국내에도 같은 제목으로 번역 출판돼 있는 이 소설은, 혁명을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사회주의적 대의보다 개인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고, 옛 소련에서도 스탈린 사후에야 영화로 만들어졌다.
쇼스타코비치의 영화음악 중에서도 이 작품이 좀더 특별한 것은 음악에 담긴 애수(哀愁) 때문이다. 특히 7번부터 10번까지의 곡들은 애틋하기 그지없다. 그는 왜 이렇게 아름답고도 슬픈 선율을 쉬지 않고 풀어 놓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이렇게 짐작해본다. 아내 니나가 세상을 떠난 것이 54년. 물론 쇼스타코비치는 결혼 전에 타티아나 글리벤코라는 여인을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23년간 아내의 자리를 지켜온 니나의 죽음은 그를 황망하게 했을 것이다. 아직 어린 두 아이와 함께 아내의 빈자리를 바라보는 심정. 특히 모음곡 8번 ‘로망스’와 10번 ‘녹턴’은 당시의 쇼스타코비치가 느꼈을 쓸쓸함과 허망함을 진하게 투영한다. 음반으로 듣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리카르도 샤이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95년 녹음(Decca)을 추천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아내 니나가 떠나고 8년 후, 편집자 출신의 이리나 스핀스카야와 재혼한다.
ㆍ이-팔 분쟁의 복판에 서서 음악으로 ‘공존’을 꿈꾸다
시리아 북부에 ‘알레포’라는 마을이 있다. 이스라엘 건국 시기였던 1948년의 1차 중동전쟁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됐던 마을이다. 알리자 카신이라는 유대인 여인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고향은 완전히 파괴돼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 참혹한 전쟁터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그녀는 레바논 산을 넘어 이스라엘로 피신했다. 이제 노년을 맞은 그녀가 이렇게 회상한다.
일본의 다큐멘터리 감독 사토 마코토(51)가 만든 <아웃 오브 플레이스>(Out of Place)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마코토는 2003년 9월 세상을 떠난 팔레스타인 출신의 사상가 에드워드 사이드(사진)의 궤적을 소형 카메라 한 대로 훑는다. 137분. 다큐멘터리치고는 분량이 많다. 하지만 이 ‘지루한’ 기록 필름이 한국에서 벌써 두 번이나 상영됐다. 2006년 EBS가 ‘국제다큐멘터리 페스티벌’(EIDF) 초대작으로 방영했던 <아웃 오브 플레이스>를, 지난 2일 인디스페이스에서 또 만날 수 있었다.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주최한 ‘일본 다큐멘터리 특별전’에서였다. 부제로 붙어 있는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기억들’(Memories of Edward Said)처럼, 우리 사회에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팔레스타인 사람. 이집트 카이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6세 때 미국으로 유학해 반아랍주의의 편견에 시달리며 공부했던 사람. 프린스턴과 하버드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에 재임하면서 서구의 자만심에 독설을 날렸던 사람. 덕분에 미국 우파 언론의 끝없는 공격에 시달렸던 사람. 77년부터 팔레스타인 민족회의에 참여했으나 93년에 아라파트와 다투고 등을 돌렸던 사람. 그는 스스로 술회했듯이 “어디 있든지 어긋나 있는” 인생이었으며, 그 ‘어긋남’을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으로 끌어안았던 사람이었다.
평화로운 공존. 그것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사이드는 가능하다고 믿었다. 특히 말년의 그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공존하는 ‘둘이면서 하나인 나라’를 꿈꿨다. 그는 정치권력이 오히려 그것을 방해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권력자를 증오하는 만큼 “아라파트를 미워했다”는 것이 <아웃 오브 플레이스>에 등장하는 증언이다.
그는 음악비평가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음악이야말로 ‘공존’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리라 믿었다. 그 동반자가 바로 이스라엘 국적의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66)이었다. 두 사람은 90년대 초반 런던의 한 호텔에서 우연히 마주쳤고, 약 5년간 자신들의 믿음을 ‘대화’로 풀어나가며 우연을 ‘필연’으로 바꿨다. 99년 함께 창단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West-Eastern Divan Orchestra)는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20세 안팎의 아랍과 이스라엘 젊은이들로 이뤄진 오케스트라. 그들은 2005년 분쟁지역 라말라에서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연주해 감동을 빚어낸다. 연주회장 밖은 무장군인들에게 둘러싸인 상태였다.
<아웃 오브 플레이스>의 마지막 장면. 카메라가 바렌보임을 비춘다. 그가 말한다. “사이드는 음악이 갈등을 치유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게 음악의 본성이거든요. 그래서 그는 (진정한) ‘음악가’였어요.” 객석의 불이 꺼지고 바렌보임이 피아노 앞에 앉는다. 슈베르트의 ‘즉흥곡 op.142-2’. 음악이 흐르는 사이, 카메라는 레바논의 작은 마을 ‘브루마나’로 간다. 사이드의 무덤이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그는 자신이 태어난 땅으로 가지 못하고 아내의 고향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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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를 미워했다.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조강지처를 버린, 인정머리 없는 이기주의자라고 여겼다. 이 ‘비호감’의 강도는 한국에서 특히 셌다. 그의 연주와 지휘는 실제보다 격하되기 일쑤였고 음반도 도통 팔리지 않았다. 좋아하는 피아니스트가 누구냐는 질문에,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적어도 한 10년 전까지는 그랬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 얘기다. 바렌보임과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의 결혼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음악 커플의 탄생이었다. 바렌보임이 26세, 뒤 프레가 22세였던 1968년의 일이었다. 옥스퍼드대학 교수였던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뒤 프레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키 작은 유대인’ 바렌보임과 결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뒤 프레가 결혼을 위해 종교까지 유대교로 바꿨던 것은 유명한 얘기다. 하지만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뒤 프레에게 닥쳐온 불행의 그림자. 그녀는 첼로를 켜다 자주 템포를 놓쳤으며, 나중에는 눈이 침침해지면서 악보마저 보이지 않았다. ‘다발성 근육경화증’이라는 희귀한 병. 그렇게 온몸의 근육과 신경이 점점 굳어가던 그녀는 결국 73년 무대에서 내려왔고 87년 눈을 감았다. 42년의 짧은 생애였다.
빼어난 연주력에 아름다운 외모, 게다가 사랑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알았던 순정한 여인. 이런 ‘훌륭한’ 아내를 돌보지 않은 ‘싸가지 없는’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뒤 프레가 세상을 떠난 후, 바렌보임을 언제나 따라다녔던 이 주홍글씨는 그의 연주에 대한 폄훼로까지 이어졌다. 사람들은 음악가로 승승장구하던 그를 미워했으며, 그의 음악을 들으며 정서적으로 불편해했다. 게다가 바렌보임은 “나는 하루 2시간 이상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는다. 그 이상은 내게 필요치 않다”고 공공연히 발언함으로써, ‘잘난 척하는 인간’이라는 낙인까지 찍혔다.
그렇게 ‘감정적 공분’을 샀던 바렌보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였다. 그 결정적 계기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사상가 에드워드 사이드와의 만남이었고, 두 사람이 5년간 나눈 대화의 주요 부분을 간추린 <평행과 역설>이야말로 바렌보임의 이미지를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꾼 전환점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바렌보임이 <평행과 역설>에서 보여줬던 모습에 ‘충격’을 받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음악은 아름다워요”라는 단순 어휘를 앵무새처럼 되뇌는 지휘자, “저는 바이올린이 전공이기 때문에 피아노 음악은 몰라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연주자…. 그렇게 자기 분야에만 충실한 ‘전문가’들이 즐비한 땅에서 정치와 사회, 음악과 문화를 종횡무진 오가는 바렌보임의 ‘식견’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 아닐까.
2년 전, 성공회대학의 신영복 선생께서 독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피아니스트 조은아를 소개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대화나 한번 나눠보라”는 뜻이었을 게다. 그렇게 알게 된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바렌보임 얘기가 나왔다. 그녀가 말했다. “조강지처를 버린 재주 많은 음악가 정도로만 생각했었죠. 그러다가 파리 샤틀레극장에서 바렌보임이 바흐의 ‘평균율’ 전곡을 연주하는 걸 들었어요. 그때 완전히 설득당하고 말았죠. 무엇보다 음악을 대하는 ‘시선’이 피아노만 아는 피아니스트들과 달랐어요. 억지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한 음 한 음에서 정신의 걸음걸이가 느껴졌어요.”
바렌보임은 어떤 음악가인가? 파리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와 시카고심포니의 음악감독을 역임했으며, 2000년에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종신지휘자 자리에 오른 세계적 지휘자. 모차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쇼팽 등 방대한 레퍼토리를 가진 천재형 피아니스트. 게다가 그는 피아졸라의 탱고를 맛깔스레 연주해내는 크로스오버 연주자이기도 하다. 그뿐일까?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평행과 역설>, <음악 속의 삶> 등을 통해 정치와 문화의 관계를 통찰해온 평론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의무를 전혀 이행하지 않는다”고 항의하면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분쟁지역을 찾아가 베토벤을 연주하는 지식인이다.
그래서 그에게 ‘전인적’(全人的)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본다. 전인적 음악가 바렌보임. ‘전문화’라는 구호 아래 정치와 경제는 갈수록 막강해지고 개인의 능력과 시야는 점점 협소해지는 세상. 그렇게 인간의 삶이 갈수록 왜소해지는 21세기에, 이 얼마나 특별하면서도 빛나는 존재인가.
‘기타의 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으리라/… /아, 기타여! /다섯 개의 칼에 의해/ 상처 입은 심장이여.’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는 그렇게 썼다. <칸테 혼도 시집>(1931)에 수록된 ‘기타’라는 작품. 절창(絶唱)이다. 전문을 인용하지 못해 아쉽다. 스페인의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로르카는 “시는 입으로 읊는 것. 책 속의 시는 죽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시는 탄식과 절규를 토해내는 집시의 노래 ‘칸테 혼도’(Cante Jondo)를 닮았다.
피아노 연주와 작곡에 능통했고 자국의 민속음악에 뜨거운 애정을 가졌던 로르카. 이 전방위적 예술가는 38년의 짧은 생을 그야말로 불꽃처럼 살았다. 24세에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곡가 마누엘 델 파야와 ‘칸테 혼도 페스티벌’을 조직해 음악가의 못다 한 꿈을 불살랐고, 극단 ‘바라카’를 만들어 전국을 돌면서 민중과 만났다. 대표작이랄 수 있는 <칸테 혼도 시집>과 <집시의 노래집>은 문학 언어로 육화된 스페인의 노래였다. ‘나뭇가지에서의 왈츠’, ‘즉흥적인 사랑노래’ ‘익나시오 산체스 메히나스를 추모하며’ 같은 주옥같은 시편들은 얼마나 음악적인가.
로르카가 시인이자 극작가로 활약하던 30년대는 스페인의 정치적 격변기였다. 로르카는 30년대 초반부터 우익 파시스트들에게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혔다. 그는 반파시스트 운동에 열렬히 참여했고, 인민전선을 지지하는 지식인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민전선’ 정부를 수립한 36년. 역설적이게도 이 해는 로르카에게 운명의 해였다. 같은 해 7월 반혁명 쿠데타를 일으킨 프랑코와 팔랑헤당은 순식간에 그라나다를 점거했고, 13만의 그라나다 인구 가운데 2만3000명을 학살하는 인간사냥을 벌였다. 로르카도 이 학살극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음악과 시, 연극과 회화를 아우르던 천재는 어떻게 죽었는가. 비참하고 덧없다. 36년 8월16일. 그는 루이스 로살레스라는 시인이 자기 집으로 피신하라고 권하자 그 말을 믿고 따른다. 하지만 그렇게 신뢰했던 사람은 시인의 탈을 쓴 팔랑헤당의 프락치였다. 체포된 로르카는 19일 새벽, 그라나다의 비스나르 언덕으로 끌려갔다. 새벽 공기를 가르던 섬뜩한 총성. 그것이 음악을 사랑했던 시인 로르카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리’였다. 그의 시신은 산기슭의 구덩이에 던져졌다.
그렇게 세상을 떠난 로르카를,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훗날 이렇게 회상한다. “번갯불의 화신. 쉴 새 없이 움직였고 즐거워했고 반짝였고 초인적인 매력을 느끼게 했다. 행복이 그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로르카가 시를 통해 들려줬던 스페인의 노래. 그것을 ‘노래’ 그 자체로 들어본다면, 과연 누구의 목소리가 좋을까. 선택은 별로 어렵지 않다. 당연하게도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를 골라야 한다. 로르카가 세상을 떠나기 15년 전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이 소프라노야말로 스페인의 노래를 대표하는 성악가. 그녀는 50년대에 마리아 칼라스, 레나타 테발디와 더불어 ‘스리 소프라노’로 거론되던 프리마돈나였지만, 오페라보다는 오히려 고향의 노래를 불러 더 큰 존재감을 아로새겼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20세기까지, 그녀는 스페인 노래들로 숱한 명반을 내놓고 2005년 세상을 떴다. 특히 50년 지기인 동갑내기 피아니스트 알리시아 데 라로차(85)와의 협연은 놓치기 아까운 ‘아름다운 음악’이다.
VICTORIA DE LOS ANGELES - Spanish songs
20세기 첼로의 거목. 거기까지만 얘기해도 단박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바로 파블로 카잘스(1876~1973)다. 본인도 술회했듯 “첼로보다 별로 크지 않은 키”에 두툼한 손을 가진 20세기 첼로의 제왕. 그와 동시대, 혹은 그의 사후에도 숱한 첼리스트가 명멸했지만, 카잘스만한 존재감으로 여지껏 숭앙받는 인물은 찾기 힘들다. 왜일까? 마침 국내 한 음반사에서 카잘스의 명연을 10장의 CD에 담아 ‘파블로 카잘스 스페셜 에디션’을 내놨다. 스테레오 이전에 녹음돼 세월의 때가 뿌옇게 낀 음반들이지만, 아흔살 넘어서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던 카잘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거친 숨소리가 고스란히 들린다.
만약 그 연주의 주인공이 카잘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모리스 장드롱이나 안너 빌스마였다면, 아니면 미샤 마이스키나 요요마였다면? 그래도 그렇게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도 각자의 스타일로 일가를 이뤘음에 분명하지만, 카잘스처럼 꼼짝없이 사람을 붙들어매진 못했을 것이다.
카잘스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스페인 카탈루냐의 시골마을 벤드렐에서 보낸 어린 시절. 카잘스 음악의 내밀한 에너지는 그때 이미 시작됐던 것은 아닐까? 시골 성당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 그는 어린 아들에게 음악과 피아노를 가르쳤지만, 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는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이 목수가 되거나 장사를 하길 바랐다. 어린 파블로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열한명의 아이 가운데 일곱명이 태어나면서 죽었던 가난한 집안의 아들. 본인도 탯줄에 목이 감긴 채 태어나 거의 죽을 뻔했던 그 아이는, 어서 어른이 돼 집안을 돌보는 게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친은 달랐다. 파블로에게 첼로를 시키겠다고 고집하는 어머니와 그걸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아버지는 빈번히 부딪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결국 이긴 건 어머니였다. 운좋게 후원자들을 만난 카잘스는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 몇년간 첼로를 공부했고, 아들의 영원한 지지자인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갔다. 하지만 거기서 모자를 기다리고 있던 건 낭만이 아니라 끔찍한 궁핍이었다. 카잘스는 훗날 “당시의 거처는 헛간이나 다름없었다”고 회고했다. 93세의 카잘스가 자신의 삶을 회고한 <나의 기쁨과 슬픔>(앨버트 칸 엮음)의 한 대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어머니는 어딘가로 돈을 벌러 나갔어요. 삯바느질거리를 얻어 오셨지요. 나도 필사적으로 일거리를 찾았어요. 샹젤리제의 음악홀에서 하루에 4프랑을 받고 연주했지요. 그곳까진 꽤 멀었어요. 전차삯이 15상팀이었는데, 나는 매일 첼로를 들고 걸어 다녔어요.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난 심하게 앓았지요. 일을 하러 갈 수 없었어요. 어머니는 더 늦게까지 바느질을 하셨지요. 하루는 집에 들어오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이상했어요. 절망스럽게도! 아름답고 길던 검은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신경쓰지 마라,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는 거야”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카잘스는 ‘목숨’을 걸고 첼로를 켰을 것이다. 3년 후 다시 파리를 찾은 23세의 카잘스. 그의 앞에는 마침내 빛나는 성공이 기다리고 있었다. 파리 음악계의 거장 라무뢰(1834~99) 앞에서 랄로의 ‘첼로 협주곡’을 처음 연주하던 순간, 그것이 바로 카잘스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절뚝거리며 다가와 카잘스를 끌어안은 라무뢰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게, 자네는 정말 특별하군. 다음달 나와 연주하게 될 걸세.” 연주회가 열린 것은 19세기가 막을 내리던 1899년 12월17일. 카잘스는 단 한번의 연주로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라는 후세의 평가를 예약했다. 그리고 라무뢰는 4일 후 타계했다. 서두에 언급한 ‘파블로 카잘스 스페셜 에디션’은 카잘스의 주요 녹음을 간추린 1000세트 한정판. 카잘스 애호가라면 구입을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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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
그는 친구와 술을 좋아했다. 몸에서는 늘 담배 냄새가 풍겼다. 키는 작고 몸매는 통통했으며, 둥근 얼굴에 이마는 툭 튀어나와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근시였던 터라 늘 두꺼운 안경을 꼈으며, 그 안경 너머에서 두 눈은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그가 살았던 31년의 생애는 베토벤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했던 시기와 거의 겹친다. 베토벤은 그때 이미 이름을 날리던 대작곡가였지만 슈베르트는 아직 신출내기에 불과했다. 생전의 슈베르트는 거의 룸펜에 가까웠다. 하지만 ‘떠돌이 룸펜’의 삶을 스스로 원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도 번듯한 직업을 갖고 싶어했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오스트리아 궁정의 부악장에 응모했던 슈베르트. 당시 그가 직접 썼던 청원서를 읽어가노라면, 이 키 작은 음악가에 대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생전의 슈베르트가 ‘피아노 소나타’라는 이름으로 남겨놓은 음악은 모두 23곡. 그중에서도 ‘19번 c단조 D.958’ ‘20번 A장조 D.959’ ‘21번 B플랫장조 D.960’은 백미로 손꼽힌다. 이 세 곡은 세상을 떠나기 약 두 달 전에 작곡했던 유작들. 곡명 속의 ‘D’는 음악학자 오토 에리히 도이치(1883~1967)가 작성한 작품번호의 약자다.
어떤 이들은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호평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같은 이가 그렇다. 굴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슈베르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반복적인 구조에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장문의 에세이와도 같은 그의 작품을 듣다 보면 불안감과 어색함마저 느껴진다.” 몽생종이 쓴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2005·정원출판사) 에 부록으로 수록된 ‘옮긴이 말’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굴드가 지적했듯 슈베르트의 피아노 음악은 ‘반복적’이다. 아름다운 주선율을 조(調)만 옮겨가며 여러 차례 반복한다. 그래서 때때로 지루하다. 특히 굴드처럼 간결한 스타카토를 즐겼던 피아니스트에게는 더욱 그러할 터이다. 그래서 ‘작곡가 슈베르트’는 시인이라기보다 미문(美文)의 에세이스트에 가깝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긴 3곡의 소나타에서는 그 설명적인 반복마저도 가슴 아프다. 특히 ‘21번 B플랫장조 D.960’. 이 곡은 ‘가난한 떠돌이’로 31년을 살았던 슈베르트가 세상에 남긴 ‘작별 인사’다. 브렌델은 앞서 언급한 ‘슈베르트 피아노 작품집’에서 이렇게 말했다. “첫 악장은 눈물도 흘리지 않고 두 눈을 뜬 채 작별을 고하는 듯이 들린다. 두번째 악장은 피아노를 위한 세상의 모든 애가(哀歌)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
“슈베르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던 굴드마저도 이런 언급을 남긴다.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피아니스트 리히테르의 연주회. 그때 객석에 앉아 있던 굴드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리히테르는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인 ‘B플랫장조 소나타’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곡은 매우 길다. 리히테르는 내가 들어본 것 중에서 가장 느리게 이 곡을 연주했다. 나는 최면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망아지경에 빠져버렸다. 슈베르트의 반복적인 구조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모두 스러졌다.”
그렇게 마지막 소나타로 세상과 작별을 고한 슈베르트는, 1828년 11월18일, 병세가 악화돼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다. 둘째형의 집 지하실에 기거하고 있던 그는 자신을 베토벤으로 착각한 채 헛소리를 했다. 슈베르트는 그렇게 발작을 일으킨 지 하루 만에 눈을 감았다. 사인은 장티푸스. 하지만 독일의 내과의사 디터 케르너는 <위대한 음악가들의 죽음>이라는 책에서 슈베르트의 사인이 ‘매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피아니스트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테르(Sviatoslav Richter·1915~97)의 러시아식 애칭은 ‘슬라바’다. 지난해 4월 세상을 떠난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도 같은 애칭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 둘은 성품과 음악적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첼로의 슬라바가 호방하게 뻗어나가는 외향적 음악을 들려줬던 반면에, 피아노의 슬라바는 엄청난 집중력으로 자신과 싸우는 내향적 연주를 보여줬다. 무대로 걸어나올 때의 모습도 아주 달랐다. 로스트로포비치는 뛰어들듯이 성큼성큼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왔지만, 리히테르는 조용히, 느리게 걸어나와 피아노 앞에 앉고는 했다. 그는 고개를 잠깐 숙여 청중에게 인사한 다음, 아예 눈길을 객석 쪽으로 돌리지도 않았다.
조명이 휘황한 콘서트홀을 좋아하지 않았던 피아니스트. 그래서 그를 떠올릴 때마다, 객석과 무대가 완전히 암전된 상태에서 악보와 건반만을 비추는 불빛에 의지해 연주하던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말년의 리히테르는 그렇게, “불을 꺼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그리고 71세였던 1986년, 그는 자동차 한 대로 러시아를 횡단하면서 궁벽진 마을들을 찾아다녔다. 레닌그라드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졌던 여정. 리히테르는 그렇게, 러시아의 외진 곳을 찾아다니며 91회의 연주회를 치러냈다. 그는 성미 까다롭게 ‘내 피아노’를 고집하지 않았으며, 시골 성당의 낡은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조율이 안된 피아노로도 감동적인 연주를 선보였다고 전해진다.
고집과 당당함, 느리고 무겁고 선이 굵은 연주. 11년 전 타계한 리히테르는 그렇게, ‘황소’ 같은 이미지의 피아니스트로 남았다. 그는 청중에게 멋지게 보이려는 겉치레를 털어내고 오로지 음악에 집중했으며, 세속적 성공에 눈 돌리지 않고 결벽증에 가까운 꼿꼿함을 보여줬다.
지난주 ‘주제와 변주’에서 언급했던 슈베르트의 소나타 ‘B플랫 장조 D.960’. 리히테르는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에 남긴 이 소나타에서도 역시 특유의 피아니즘을 보여준다. 극단적으로 느린 걸음의 1악장, ‘두루루룽’ 하고 울려나오는 왼손 저음부의 트릴이 묵직하다. “슈베르트 음악은 눈물 콧물 짜는 신파”라며 ‘악담’을 퍼붓는 이들은 2악장을 한번 들어볼 일이다. 어둡게 흐르는 비애감, 하지만 센티멘털로 추락하지 않는 정신적 긴장감. 이만하면 숙연하지 않은가.
이 곡의 명연을 남긴 또 다른 이들로는 빌헬름 켐프, 루돌프 제르킨, 알프레드 브렌델이 떠오른다. 켐프의 65년 녹음은 섬세하다. 하지만 리히테르와 비교하자면 선이 가늘고 힘이 없다는 인상을 준다. 반대로 제르킨의 75년 녹음은 힘이 넘친다. 고조되는 프레이즈에서 너무 세차게 달려나간다는 느낌마저 든다. 피아노 소리에 간간이 섞인 거친 숨소리를 함께 듣노라면 더욱 그렇다. 얼마전 은퇴를 선언한 브렌델은 네 명 가운데 가장 ‘달변’의 연주. 음색도 리히테르나 켐프에 비해 환하다. 그런데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를 이렇게 유창하게 묘사해도 되는 것일까.
타계한 두 거장과 77세의 노대가에게는 살짝 미안하지만, 오늘은 리히테르가 연주한 슈베르트의 D.960을 권한다. 61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연주회. 프라하 실황음반을 구하기 어려워진 지금, 이것이 하나의 대안이 될 성싶다. 네덜란드의 브릴리언트가 발매한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테르 인 콘서트>(사진)에 수록돼 있다. 5장의 CD로 이뤄진 이 음반에는 슈베르트 외에 베토벤과 리스트의 소나타들도 함께 담겼다. 가격도 저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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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89)은 나치 당원이었다. 2차대전 종전 후, 그는 자신의 나치 전력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이렇게 ‘해명’한 적이 있다. “나는 1935년 (독일) 아헨에서 음악총감독이 되려할 때 당원이 되었다. 내가 숙원해온 목표를 바로 눈앞에 둔 3일 전에 시장이 와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아직 당원이 아니지요? 지역구 당책임자에 따르자면, 이 자리는 당원이 아니고는 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서명했다.” 카라얀은 그렇게, ‘나는 1935년에 어쩔 수 없이 나치에 가입했다’고 변명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카라얀에 대한 허다한 자료들도 이 ‘술회’를 대체로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일본의 유명한 음악전문 출판사인 ‘음악지우’(音樂之友)에서 90년 펴낸 <클래식의 거장들>도 카라얀이 아헨 시대에 나치에 입당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카라얀은 27세에 아헨극장 음악총감독 자리에 오른 후 승승장구한다. 그는 2년 뒤 빈 국립오페라극장에 데뷔했고 이어서 베를린필하모닉과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의 지휘봉을 차례로 든다. 당대의 거목 푸르트벵글러(1886~1954)가 나치에 협력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뒀던 것과 달리, 카라얀은 더욱 적극적으로, 다시 말해 ‘나치의 일원’으로서 출세 가도를 달린다. 광기 어린 독재자 히틀러는 이 젊은이의 지휘를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지만, 냉철한 전략가였던 문화선전부장관 괴펠스의 생각은 달랐던 듯하다. 그는 출세에 눈먼 이 젊은 지휘자야말로 나치의 문화정책을 효율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뛰어난 인재’라고 여겼다.
음악은 과연 정치와 무관한가? 이른바 ‘음악의 자율성’은 기회주의자들에게 훌륭한 자기 변호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카라얀도 그랬다. 그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망한 직후, 자신을 심문하던 미군 장교에게 “나는 단지 음악을 했을 뿐”이라며 스스로를 변호한다. 이 ‘순수함’은 약발을 톡톡히 받았다. 당시의 미군 장교는 “음악이 생존을 의미하는, 음악만이 중요한 광신자”라는 보고를 올렸고, 카라얀은 2년 후 연주활동 금지에서 완전히 해제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치 당원이었던 카라얀의 음악 권력은 종전 후 더욱 확고해진다. 푸르트벵글러는 어느덧 ‘지는 해’였고 성품이 괴팍한 첼리비다케(1912~96)는 정치에 서툴렀다. 1954년 베를린필의 수장이었던 푸르트벵글러가 세상을 떠나자, 카라얀은 이듬해에 그 바통을 이어받으면서 ‘종신지휘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베를린필과 빈필 등 공공자금으로 운영되던 연주단체의 입장료를 올려 연주회 ‘문턱’을 높였으며, 57년부터 시작된 스테레오 녹음 시대를 맞아 매끄럽고 세련된 사운드의 음반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때부터 20세기가 거의 막을 내릴 때까지, ‘카라얀의 시대’는 계속됐다.
20세기 음악계의 최고 권력자였던 카라얀. 그는 베토벤과 브람스,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을 즐겨 연주했다. 그는 대중이 좋아할 만한 음악을 반복적으로 연주했으며, 정통 독일 레퍼토리의 범주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음악적 폭이 좁다든가, 청중의 입맛에만 맞춘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카라얀이 베를린필을 지휘해 녹음했던 벨라 바르토크(1881~1945)의 음악은 어쩌면 그 비판에 대한 일종의 ‘알리바이 증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카라얀은 바르토크의 ‘현악기,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을 60년에,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65년에 녹음했다. 하지만 나치의 광풍에 쫓겨 미국으로 건너갔던 헝가리의 작곡가 바르토크, 가난과 백혈병에 시달리다 뉴욕에서 객사한 그의 음악을 카라얀의 지휘로 듣다니! 이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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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초, 그는 갇혀 있었다. 프랑스군으로 참전했다가 나치에게 붙잡힌 포로 신세였다. 폴란드 서남부와 체코 동북부에 걸쳐 있는 슐레지엔 지역의 괴를리츠(Goerlitz) 수용소.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는 그 담장 안에서 작곡돼 초연됐다. 1월15일이었다. 3명의 수용소 동료와 4중주를 초연했던 당시 상황을,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살을 에듯 추웠다. 수용소 전체가 눈에 묻힌 상태였다. 3만명에 이르는 포로들은 주로 프랑스인들이었고 폴란드, 벨기에인들도 일부 있었다. 악기는 엉망이었다. 첼로는 현이 세 개뿐이었고, 내가 연주할 피아노의 오른쪽 건반은 누를 수는 있었지만 다시 튀어오르지 않았다. 나는 넝마 같은 초록 재킷을 걸치고 나무 고랑을 차고 있었다.”
백씨는 메시앙의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시선’을 연주했다. 2시간이 조금 넘는 연주. 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20개의 시선’은 피아노 한 대로 그려낸 우주적 장관(壯觀)이었다. 백씨의 피아노는 섬세함과 격렬함, 명상과 즐거움을 빼어나게 직조했으며, 성모의 자장가처럼 부드럽게 울려나오던 피아노의 음향은 어느덧 거대한 태풍으로 변모해 몸과 마음을 후려쳤다. 이거야말로, ‘꼼짝할 수 없게 만드는 음악’ 아닌가.
그 연주회장에 피아니스트이자 음악평론가인 김순배씨와 동행한 것은 행운이었다. 김씨가 메시앙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연주회의 커튼콜까지 완전히 끝난 후, 맥이 탁 풀린 모습으로 “정신없이 두들겨 맞은 것 같네요”라고 말하자, 김씨가 이렇게 ‘진단’했다. “이 음악이 표현하고 있는 세계가 워낙 방대해요. 인간성과 신성(神性)을 동시에 오가잖아요. 음역도 위·아래를 극단적으로 오가면서, 그야말로 극한적인 ‘대비’를 보여주고 있어요. 또 정신적이고 영적인 세계가 소리로 표현됐을 때, 인간의 육체와 대립하는 측면이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몸이 얼얼한 겁니다.”
이질적인 것들, 아니, 사람들이 이질적이라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의 ‘융합’이야말로 20세기 작곡가 메시앙의 ‘키워드’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연주회가 있기 한 달 전쯤, 프랑스에 있는 백건우씨와 인터뷰를 했다. 그때 백씨는 “메시앙의 음악세계는 복합적”이라고 표현했다. “‘복합’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라고 묻자, 백씨는 이렇게 부연했다. “메시앙 선생은 서양뿐 아니라 동양을 끊임없이 이해하려고 했어요.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나라 음악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죠. 거기에 자연과 종교까지 아우른, 굉장히 그릇이 큰 작곡가입니다.”
유사한 언급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음악은 사회적이다>에도 등장한다. 사이드는 메시앙에 대해 “확고한 ‘절충주의적 태도’를 통해 어떤 전통이나 권위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절충’은 적당한 타협이라기보다 ‘융합’이라는 뜻에 더 가까울 성싶다. 동양과 서양, 신과 인간, 미시적 자연과 거시적 우주를 융합해 거대한 음악의 벽화를 그려낸 메시앙. 김순배씨는 지난 일요일 연주된 ‘20개의 시선’에 대해, “20세기 최고의 피아노 작품”이라고 평했다.
러시아의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거의 20세기 중반까지 살았다. 덕분에 남아 있는 사진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198㎝의 껑충한 키에 늘 굳어 있는 얼굴. 피아니스트 리히테르는 러시아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얼마나 내성적인 사람인가를 회고했던 적이 있지만, 그보다 한 세대 앞선 라흐마니노프는 한층 더 우울한 초상을 후대에 남겼다. 그는 꼭 필요한 얘기가 아니면 하루 종일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우스갯소리 따위는 아예 자신의 ‘사전’에 올려놓지도 않았던 사람이었다.
마침 KBS 클래식FM에서 14일부터 6일간 ‘라흐마니노프의 밤’이라는 특집을 마련하는 모양이다. 진행자인 정준호씨가 보내온 e메일 속에 라흐마니노프의 ‘지독한 내향성’에 대한 스트라빈스키의 회상이 담겨 있어 눈에 띈다. 내용을 소개하자면 대략 이렇다.
라흐마니노프는 조국 러시아를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말년을 보냈다. 같은 동네에 역시 러시아를 떠나온 스트라빈스키가 살았다. 두 사람이 부부 동반으로 식사를 하던 중, 라흐마니노프의 아내가 스트라빈스키에게 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뭘 하세요?” 스트라빈스키가 대답했다.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지요.” 그러자 라흐마니노프의 아내가 남편에게 투덜댔다. “거봐요. 운동을 하고 샤워도 한다잖아요. 얼마나 멋져요. 당신은 부끄럽지도 않아요? 산책도 싫어하는 게으른 양반아!”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묵묵부답. 그는 겸연쩍게 웃지도 않고 인상을 찡그리지도 않은 채, 그저 식사만 했다고 한다.
이 장면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스트라빈스키에게 약간 불편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말없이 밥만 먹던 라흐마니노프의 모습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훗날 자신의 제자인 로버트 크래프트에게 이 일화를 들려줬고, 그것은 스트라빈스키의 회고록에 실렸다. 그 책에는 이런 얘기도 있다. “한 번은 우리집 현관 앞에 꿀을 두고 갔어.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폐가 될 거라고 생각했나봐. 말없이 꿀만 놓고 갔더라고.”
내성적일 뿐 아니라 남에게 ‘민폐’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했던 라흐마니노프. 이런 특별한 성정(性情)은 아마도 유년시절에 형성됐을 것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유서깊은 타타르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퇴역 장교였던 그의 아버지가 거의 ‘난봉꾼’ 수준이었던 모양이다. 그 아버지는 이리저리 사업을 벌인다며 집안의 재산을 탕진했고, 아내와도 끝없이 불화를 겪다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라흐마니노프는 어려서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며 외로운 시절을 겪었다. 게다가 누이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소년의 외로움과 우울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1897년에 ‘교향곡 1번’이 혹평받은 후,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했던 라흐마니노프의 내면에는, 이렇게 유년의 ‘트라우마’가 자리해 있었던 것이다.
작곡가, 지휘자, 편곡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 그는 20세기 음악사에서 보기 드문 ‘멀티 플레이어’였다. 그는 20세기의 새로운 흐름에 눈을 돌리지 않은 채 19세기적 음악어법을 끝까지 고수했던 음악적 보수주의자였으며, 찬란한 서정의 광휘를 인생의 마지막까지 꿈꿨던 ‘골수 낭만주의자’였다.
손가락을 쫙 펴면 손의 길이가 30㎝에 이르렀다는 라흐마니노프. 고국을 떠난 그는 미국 땅에서 살면서부터 작곡가보다는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에 집중해야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계’ 때문이었다. 1943년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사랑하는 나의 손이여, 잘 있거라. 가여운 손이여!” KBS 클래식FM ‘실황음악회’가 14일부터 방송하는 곡들은 교향곡과 피아노협주곡 전곡. 합창교향곡 ‘종’도 방송된다. 최근의 명연과 더불어 라흐마니노프의 굴곡진 생애를 만날 수 있다.
알프레드 브렌델(77)이 떠났다. 18일 저녁 오스트리아 빈의 무지크페라인 홀. “올해를 마지막으로 연주활동을 접겠다”고 이미 선언했던 브렌델이 생애 마지막 연주를 펼쳤다. 20세기 후반의 피아노 음악을 이끌어온 거장. 언제나 신뢰할 수 있었던 브렌델의 진지한 피아니즘이 마침내 ‘과거’라는 시간 속으로 떠났다.
브렌델은 초절기교의 비르투오소가 아니었다. 눈부신 개성을 뽐내는 스타일리스트도 아니었다. 그는 청중을 자극할 만한 어떤 ‘포즈’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언제나 작품의 본래적 언어에 충실했다. 섬세한 프레이즈에 도달했을 때 건반을 향해 살짝 기울어지던 머리, 피아노가 선율을 노래하는 장면에서 멀리 허공을 바라보던 눈빛…. 그것이 브렌델이 보여준 포즈의 전부였다.
그래서 브렌델은 대기만성일 수밖에 없었다. 1931년 당시 체코 땅이었던 모라비아에서 태어난 그는 일찌감치 오스트리아로 이주해 피아니스트의 길에 들어섰지만, 이른바 ‘빈 3총사’로 불리던 프리드리히 굴다, 파울 바두라 스코다, 외르크 데무스 등 또래의 피아니스트들보다 한수 아래 취급을 받아야 했다. 젊은 시절의 그는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1963년 미국 무대에도 데뷔했지만 그를 불러주는 메이저 음반사는 한 곳도 없었다. 몇 군데 마이너 레이블에서만 그에게 녹음 기회를 줬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음반사 ‘복스’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녹음하는 등,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던 인생.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점프’한다. 브렌델도 그랬다. 이 ‘견고한 구조주의자’에게 음악계의 스포트라이트가 쏠린 건 70년대에 들어서면서였다. 어느덧 그는 40대였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젊었을 때 내 연주는 그리 화제를 모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한발씩 전진했지요. 그러던 어느날, 영국 런던의 퀸 엘리자베스 홀에서 연주했을 때, 그날의 연주회는 나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것도 아니었고 프로그램 자체도 밋밋했어요. 그런데 연주회 다음날, 세군데 음반사로부터 제안을 받았어요. 갑작스레 물이 끓어올라 온도계의 눈금이 확 치솟는 느낌에 휩싸였지요.”
앞서 언급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그래서 그는 10년쯤 연하인 마르타 아르헤르치, 마우리치오 폴리니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20세기 후반의 피아노 음악을 이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18일, 연주 인생 60년의 마침표를 찍었다.
4권의 에세이집을 쓴 음악비평가이자 2권의 시집을 낸 시인 브렌델. 이 전인적 피아니스트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까. 최근 국내에 수입된 35장짜리 CD세트 <알프레드 브렌델>이 1주일도 안돼 동이 났다. 네덜란드의 음반사 브릴리언트가 내놓은 전집. 브렌델에게 아직 세간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기 전이었던, 58~70년의 녹음들이다. 곧 재수입될 전망이다.
러시아적 비애감과 때때로 폭발하는 광기 어린 열정.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은 번호가 없는 ‘만프레드 교향곡’까지 포함해 모두 7곡이다. 그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곡은 4, 5, 6번. 교향곡으로서의 구조가 취약하고 선율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 세 곡은 러시아 교향곡의 전형을 이뤄낸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잿빛 우울은 그의 천성과도 같았다. 우랄 산맥 서쪽의 보트킨스크. 차이코프스키의 고향이었던 그 회색빛 광산촌이 그런 성정을 더욱 부채질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는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이를테면 1877년 가을, 모스크바강에서 벌어졌던 자살 소동은 이 ‘우울한 소심남’의 성품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10월 초였다. 차이코프스키는 슈만이 라인강에 몸을 던졌던 것과는 달리, 강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지 않았다. 그는 물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지점에 이르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얼어 죽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동사(凍死) 기도라는 것도 본인의 말일 뿐, 실제로 그가 자살을 결행했던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차이코프스키는 구조됐고 동생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입원했다.
결혼식을 올린 지 두 달쯤 된 아내 밀류코바와의 파경. 그것이 자살 기도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차이코프스키에 관한 허다한 자료에서, 9년 연하의 아내 밀류코바는 거의 ‘악녀’로 그려진다. 음악을 이해하지 못했고 신경질적이었으며 심지어 저속하기까지 했다는 등, 그녀에게 퍼부어지는 비난은 꽤나 극단적이다. 하지만 왠지 석연치 않다. 늘 우울하고 예민했던 남자, 동성애 기질까지 갖고 있던 차이코프스키는 과연 파경의 희생자이기만 했을까. 게다가 자살 소동 1년 전, 차이코프스키는 부유한 미망인 폰 메크 부인과 묘한 관계를 맺었다. 표면상 그것은 예술가와 후원자의 ‘스폰서십’이었지만, 차이코프스키와 그녀가 13년간 주고 받은 1200여통의 편지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교향곡 4번은 바로 이 무렵에 쓰여졌다. 걸작으로 분류되는 세 곡의 교향곡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하고 열정적인 곡. 아내를 피해 이탈리아로 떠난 차이코프스키가 산레모 바닷가에서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한 교향곡이다. 악보 머리에 등장하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바로 폰 메크 부인. 그녀와의 야릇한 관계가 차이코프스키의 창작열을 자극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앞서 작곡한 1~3번과 확연히 구별되는 완성도. 시작부터 격렬하게 포효하는 1악장과 비애감 가득한 2악장이 특히 매혹적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작곡했던 5번.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에서 러시아풍의 애상보다 서구적 낭만주의의 경향을 짙게 보인다. 광포한 열정과 비장미 넘치는 선율이 잦아들면서 한층 정갈하고 산뜻해졌다. 특히 왈츠풍의 3악장이 그렇다. 또 5년 후 세상에 나온 6번 ‘비창’. 아름다운 선율과 정교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의 정점에 서 있는 이 작품은 유감스럽게도 유작이 되고 말았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을 직접 지휘해 초연하고는 9일 후 갑자기 눈을 감았다. 사인은 콜레라. 하지만 동성애가 발각돼 법원으로부터 자살을 강요받았다는 설도 있다.
흔히 추천되는 4·5번 레코딩은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연주다. 이와 더불어 스베틀라노프가 지휘하는 소련 국립관현악단의 실황도 놓치기 아깝다. 1990년 5월24일 도쿄 산토리홀에서 있었던 연주. 일본의 포니캐년에서 나왔다. 1주일 후 같은 장소에서 있었던 5번 실황도 마찬가지다. 4번보다 오히려 더 짙은 쾌감이 느껴지는 명연이다. 6번 ‘비창’은 키릴 콘드라신이 모스크바 필하모닉을 지휘한 멜로디아 음반을 1순위로 권한다. 예리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현악기군이 단연 압권이다.
[주제와 변주] ‘행동하는 음악가’ 다니엘 바렌보임
팔레스타인에 콘서트홀 건립 꿈꾸는 유태인출신 지휘자
새해의 문을 연 지휘자는 다니엘 바렌보임(67)이었다. 1일 오전 11시45분(현지시간), 오스트리아 빈의 무지크페라인(Musikverein)홀에서 열린 빈필하모닉의 신년음악회. 유대인 지휘자 바렌보임이 올해로 69회째를 맞는 이 음악회를 지휘했다. 주로 연주된 곡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와 폴카였다. 빈필하모닉은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올해도 역시 흥겨운 음악으로 한 해를 열었고, 연주회 실황은 세계 각국에 위성으로 중계됐다. 한달쯤 뒤 음반과 DVD로도 나올 예정이다.
하지만 이 즐거운 음악회의 지휘자 바렌보임은 심사가 착잡했을 것이다. 지난달 30일 신년음악회 리허설을 앞두고 열렸던 기자회견. AP통신은 바렌보임이 3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을 “끔찍한 사건”(terrible events)이라고 비판했다고 보도했다. 바렌보임은 그날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군사적으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어떤 이들은 예술로 공존을 얘기하는 건 ‘공허한 제스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적과 팔레스타인 명예시민권을 동시에 갖고 있는 바렌보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팔 공존을 외쳐왔다. 그는 지난해 8월 베를린의 발트뷔네 극장에서 이스라엘과 아랍 청소년들로 이뤄진 ‘서동시집 오케스트라’(West-Eastern Divan Orchestra)를 지휘한 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그날까지 연주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렌보임이 주장하는 ‘이-팔 공존’. 그것은 독일 의회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말했듯, “팔레스타인이 국가로서 모든 권리를 가지면서 이스라엘 및 요르단과 연방 형태를 이루는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팔레스타인이 자유롭고 안정되지 않으면 이스라엘에도 자유와 안정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제 바렌보임의 꿈은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인 요르단강 서안의 라말라(Ramallah)에 콘서트홀을 짓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다만 음악을 연주하는 것일 뿐”이며 “(나는)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아무런 계획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평화로운 공존이 “20세기로부터 배운 교훈”이며, 조국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행위는 “인간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유대인 지식인들의 ‘침묵’을 비난한다.
행동하는 음악가 바렌보임의 꿈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지난해 마지막 날, 이스라엘 공습에 희생된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은 400명에 육박했고 부상자도 1900명을 넘어섰다. 하마스의 공격에 목숨을 잃은 이스라엘인은 4명이며, 220여명이 부상했다.
그래도 바렌보임은 계속 꿈꿀 것이다. 1999년에 팔레스타인 출신의 사상가 에드워드 사이드와 함께 창단했던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는 그 꿈의 첫단추였으며, 2005년 여름에 분쟁의 한복판 라말라에서 개최했던 콘서트는 두번째로 이뤄낸 꿈이었다. 바렌보임은 이스라엘의 저지로 여러차례 무산됐다가 마침내 성사된 그 콘서트에서 모차르트의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을 위한 협주교향곡’과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연주했다.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역사적 사건”이라고 자평했던 이 연주회 실황은 국내에서 CD와 DVD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DVD에 함께 수록된 93분짜리 다큐멘터리는 음악 이상의 감동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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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와 변주]톨스토이가 소설로 그려낸 독약같은 ‘파멸의 이중주’
ㆍ베토벤 ‘크로이처 소나타’
음악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독약’일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때때로 그렇다’고 말했다. 그는 음악이 운율과 하모니를 통해 정신을 조화롭게 하고 감정을 순화시키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치우치면 사람을 유약하게 만들 뿐이라고 경고했다. 음악을 ‘하찮은 것’으로 여겼던 이 철학자는, 그렇게 나쁜 영향을 주는 음악을 지상에서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고까지 설파했다.
음악에 대한 이 부정적 견해는 19세기 말 러시아의 소설가 톨스토이에게서 다시 발견된다. 19세기는 이른바 낭만의 시대. 베토벤 이후 점점 확고해진 음악의 절대성과 신성함이 반론의 여지없이 통용되던 때였다. 음악은 고통스러운 세계에서 구원으로 나아가는 문(쇼펜하워)이었고, 나약한 인간을 초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하는 통로(니체)였다. 톨스토이가 “음악이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고 말했던 때는, 바로 이렇게 유럽이 음악을 숭앙하던 시대의 끝자락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낭만의 종주(宗主)로 통했던 베토벤의 음악, 그중에서도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가 도마에 올랐다.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는 톨스토이가 59세였던 1887년에 집필을 시작해 2년 후 완성했던 중편 분량의 작품. 기차 안에서 만난 ‘나’와 고지식한 외모의 키 작은 남자 ‘포즈드니셰프’의 대화를 축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저 듣는 입장일 뿐, 포즈드니셰프의 독백과도 같은 대사가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포즈드니셰프는 아내를 살해한 남자. 치정살인은 “빌어먹을 음악 때문”에 일어났다. 아내와 다툼이 빈번했던 그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인 아내가 바이올리니스트 트루하체프스키와 소나타를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는 불같은 질투에 사로잡힌다. 파리에서 돌아온 트루하체프스키는 “촉촉한 눈, 미소를 머금은 붉은 입술, 포마드를 바른 콧수염, 최신 유행의 머리 스타일”을 가진 매력남. 아내는 그를 만난 다음부터 얼굴에 생기가 돈다. 적어도 남편인 포즈드니셰프가 보기엔 그렇다. 그는 아내와 트루하체프스키가 파티장에서 소나타를 함께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는, 두 사람이 “음악으로 맺어진 음욕의 관계”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크로이처 소나타’를 연주했습니다. 처음 나오는 프레스토를 아세요? 이 소나타는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음악이 영혼을 고양시킨다는 건 헛소리이고 거짓말입니다. 음악은 영혼을 자극할 따름입니다. 에너지와 감정을 끌어올려 파멸로 이어지게 합니다.”
톨스토이 본인의 생각도 그랬다. 그는 <크로이처 소나타>의 후기에서 자신도 같은 의견임을 밝혔고, 소설 속의 여러 묘사를 통해 포즈드니셰프라는 인물에 작가의 모습이 상당히 투영됐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낭만적 음악에 대한 이 극단의 회의는 톨스토이의 오래된 음악 편력에서 비롯했을 터. 그는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던 지독한 애호가였고, 전문가 뺨치는 실력을 갖춘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음악 때문에 빚어진 치명적 사랑은 헝가리의 작가 산도르 마라이(1900~1989)의 <열정>에도 등장한다. <크로이처 소나타>보다 반세기쯤 후 쓰여진 이 소설도 역시 독백체. 주인공 헨릭은 형제 같았던 친구 콘라드가 자신의 아내인 크리스티나와 연인 관계임을 깨닫고 배신감에 휩싸인다. 콘라드와 크리스티나를 맺어줬던 불륜의 끈도 역시 음악. 절망한 헨릭은 오두막에 칩거하고 크리스티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헨릭은 어느날 종적을 감춘 콘라드를 내내 기다리면서 노년을 맞고, 41년 후에야 나타난 친구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네와 크리스티나 사이에서 음악은 서로를 묶어주는 끈이었어. 나는 그 사이에서 끝내 고독했네. 음악은 자네와 크리스티나에겐 말을 했네. 나하고 대화가 끊겼을 때도 자네 두 사람은 서로 얘기를 할 수 있었다네. 나는 음악을 증오한다네.”
톨스토이가 “영혼을 자극하는 음악”이라 평했던 9번 ‘크로이처’는 베토벤이 남긴 10곡의 바이올린 소나타 가운데 가장 빈번히 연주되는 곡. 오이스트라흐와 레프 오보린의 연주가 오랜 세월 호평을 받았다. 두 남자의 협연이 너무 중후하고 고전적이라면, 기돈 크레머와 아르헤리치의 연주를 선택해도 좋다. 톨스토이가 언급했던 빠르고 격렬한 ‘프레스토’는 1악장과 3악장에 등장한다. 벼랑으로 떨어지는 파국의 느낌은 3악장에서 한층 짙다.
[주제와 변주]쇤베르크 ‘바르샤바의 생존자’
ㆍ팔레스타인 아이들이 죽어가는 지금, 그를 듣는 것은 얼마나 불편한가
“끊임없이 ‘타자’를 상상하고, 그들과의 차이를 강조해, 그것을 배제하면서, ‘우리’라는 일체감을 굳혀가는 것.” 도쿄경제대 교수이자 에세이스트인 서경식은 <디아스포라 기행>(돌베개)에서 그렇게 쓰고 있다. ‘내셔널리즘’이라는 근대적 상상력에 대한 비판적 언급의 일부다. 종국에는 파괴와 살육을 부채질하게 될 이 부정적 상상력은, 자본주의적 인간관계에서 왜곡된 처세술로 통용되기도 한다. 언젠가 시내의 한 대형서점에서 잠시 들여다봤던 처세술 책에는, “지금 맞은편에 있는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려면 제3자를 함께 헐뜯으라”고 쓰여 있었다.
그 비뚤어진 상상력의 극치를 최근에 질리도록 목격하고 있다. 며칠 전 외신으로 들어온 두 컷의 사진. 그중 하나는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접경에 주둔 중인 이스라엘 군인들이 출정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다. 운동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이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또 한 컷의 사진은 돌배기쯤 돼 보이는 팔레스타인 아기가 병원으로 이송되는 장면. 아기의 얼굴은 피범벅이다. 가련한 천사는 그토록 급박한 상황에서도 맑고 아름다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심란하다. 그날부터 음악을 듣는 ‘짓’이 불편하고 버거울 뿐이다.
지금 가자지구를 폭격하고 있는 이스라엘도 한때 광기어린 순혈주의의 희생양이 아니었던가. 앞서 언급한 <디아스포라 기행>에 등장하는 장 아메리(1912~78)라는 유대인. 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문인이었다. 그는 독일문화 속에서 자아를 형성했던 지식인이었고, 의심의 여지없이 자신을 ‘독일인’으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히면서 그의 자아는 분열한다. 예컨대 이랬다.
“내가 의지하려고 하는 (정신적) 기반은 모두 적의 것이었다. 예를 들어 베토벤. 그 베토벤을 베를린에서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고 있었다. 대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제국의 명사였다. 메르젠부르크의 격언시에서 고트프리트 벤에 이르기까지, 17세기 음악가 북스테후드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이르기까지, 정신의 유산과 미적 자산은 고스란히 적의 수중에 있었다. 어느날 나는 어리석게도 내 직업을 ‘독일문학자’라고 말했다가 친위대원에게 노여움을 사 죽도록 얻어맞았다.”
나치 친위대원의 분노. 짐작하건대 그것은 “유대인이 감히 ‘독일문학자’를 사칭하다니!”였을 것이다. 그래서 숱한 유대인 음악가들이 광기에 사로잡힌 악령의 눈길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던 1933년에 독일을 탈출한 유대인 음악가는 자그마치 4000여명. 그중 한 사람이었던 쇤베르크(1874~1951·사진)는 일찌감치 나치의 공포를 예견했던 음악가였다. 그는 ‘프로이센 아카데미’ 교수로 독일 내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음악계 명사였지만, 망설임없이 독일을 떠나 미국 보스턴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다면 독일에서의 쇤베르크는 과연 어땠는가. 그는 바흐, 베토벤, 브람스를 잇는 독일 음악의 적자(嫡子)를 자처했고, 자신으로 인해 독일 음악의 헤게모니가 앞으로 100년은 더 지속될 수 있다고 자부했던 사람이었다. 그토록 ‘충성스러웠던’ 유대계 독일인조차도 독일땅에서 내쫓기고 말았다.
12음 기법으로 20세기 음악사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던 쇤베르크. 그가 1947년에 작곡했던 ‘바르샤바의 생존자’라는 곡이 있다. 이 곡은 나치의 횡포에 숨진 수많은 ‘동족’들에게 바치는 음악적 애도사였다. 악몽 같은 공포와 비통함을 고스란히 담은, 20세기 음악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진술로 꼽히는 음악. 하지만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이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는 지금, 이 음악을 아무 거리낌없이 대면한다는 게 얼마나 가능할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장 아메리의 절규가 다시 떠오른다. “베토벤은 적의 것이었다.”
Bamberger Symphoniker, conducted by Horst Stein, Hermann P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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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와 변주]모차르트 명연주 펼친 ‘여성 5인방’
그의 말은 일면 타당하다. 일단 피아노라는 악기는 덩치가 만만치 않다. 넓게 펼쳐진 88개의 건반을 훑어내리려면 어깨가 넓어야 하고 팔이나 손가락도 길어야 한다. 게다가 피아노는 태생적으로 타악기의 속성을 지닌다. 건반에 연결된 88개의 현을 해머로 두들겨 소리를 낸다. 이 메커니즘이 현대적으로 개량되는 과정에서, 악기의 음량을 키우기 위해 해머와 건반은 더 무거워졌다. 전신(前身)이었던 하프시코드에 비해 한층 완력을 필요로 하는 악기로 변해온 셈이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는 키가 2m에 가까웠고 손가락을 쫙 폈을 때 손의 길이가 30㎝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거장 리히테르는 손가락 끝에서 피를 흘리며 건반을 두드리기도 했다. 1990년 세상을 떠난 쿠바 출신의 호르헤 볼레트(Jorge Bolet)는 손을 높이 들어올리지 않고도 상당히 중량감 넘치는 리스트 연주를 들려줬는데, 그것은 결국 손목의 힘이 좋다는 뜻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사진으로 확인해본 그의 손목은 뼈대가 엄청나게 굵다.
피아노가 남성에게 더 적합하다는 관념은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 같은 작곡가들의 음악에 이르는 순간, 여지없는 진실로 굳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이들의 음악은 넓은 음역을 변화무쌍하게 오가는 데다, 힘차게 코드를 짚어 연주하는 음의 뭉치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아무래도 몸집이 크고 힘이 좋은 사람에게 유리하게 마련. 그러다보니 ‘피아노의 남성성’이라는 관념은 더욱 굳어질 수밖에.
그러나 피아노는 과연 남성의 악기일까? 꼭 그렇진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연주하는 음악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닐까. 이를테면 모차르트의 음악은 어떨까. 그것은 부피와 무게를 덜어낸 투명한 텍스처에 도달하는 것이 관건일 터. 모차르트가 남긴 피아노 협주곡과 소나타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 연주자들 중에는 의외로 여성이 많다.
일단, 릴리 크라우스(1905~86)를 떠올려 보자. 그녀는 50년대를 대표했던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 가운데 한 명. <이 한장의 명반>의 저자 안동림씨(77)는 크라우스가 51세에 녹음했던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EMI)을 명반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10년 후 CBS에서 같은 음악을 다시 한 번 더 녹음했지만, 청신함과 영롱함에서 51세 때의 연주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평가다. 크라우스보다 10년 연상인 클라라 하스킬(1895~1960)은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의 진경(珍景)을 펼쳤던 피아니스트. 특히 세상을 떠나던 해에 녹음했던 피아노 협주곡 20번과 24번(필립스)이 오늘까지도 명연으로 빛난다. 또 두 여인보다 한 세대 뒤의 피아니스트인 잉그리드 헤블러(80). 그녀는 오스트리아 빈 태생답게 우아한 세련미와 따뜻한 음색의 연주를 펼쳤다. 특히 ‘피아노 협주곡’ 23번, 24번, 26번을 비롯해 ‘피아노 4중주’ 1, 2번 등에서 명연을 남겼다.
영국에서 간행된 <죽기 전에 들어야 할 클래식 1001>은 일본 태생의 피아니스트 우치다 미쓰코 (內田光子·61)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 그녀가 91년 녹음했던 ‘피아노 소나타 전곡’(필립스)을 평하면서 “이것을 들으면 다른 음반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고까지 극찬한다. ‘런던 파이낸셜 타임스’에서 음악평론가로 활동했던 맥스 로퍼트의 평가. 하지만 그것은 마리아 호앙 피레스(65)를 사모하는 애호가들이라면 발끈할 만한 얘기다. 포르투갈 출신의 그녀는 모차르트의 소나타 전곡을 두 번 녹음했고, 그중에서도 89~90년에 녹음한 두번째 음반(도이치그라모폰)이 수작으로 꼽힌다.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영롱한 터치가 일품. 모차르트 음악의 관건이랄 수 있는 ‘투명한 텍스처’에 이만큼 도달한 연주도 드물지 않을까.
피아노가 남성의 악기라는 고정관념은 그렇게, ‘모차르트’라는 숲에 들어서는 순간 깨진다.
역려과객(逆旅過客)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은 여관과 같고 인생은 그곳에 잠시 머무는 나그네길과 같다는 뜻일 게다. 이 말은 이백의 시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의 첫 구절에 등장한다. 원문을 더듬더듬 찾아보니 이렇다. ‘夫天之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 而浮生若夢 爲歡幾何(부천지자 만물지역려 광음자 백대지과객 이부생약몽 위환기하). ‘무릇 천지라 하는 것은 만물의 여관이요, 세월이라 하는 것은 영원히 지나가는 길손이라. 부평초 같은 인생 꿈과 같으니, 즐거움이 되는 것이 그 얼마나 되는가?’
19세기 초반에 문을 열었던 낭만의 시대. 당시 예술가들은 딱딱한 규칙을 거부했고 자신의 내면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에 충실했다. 그들은 현실보다 몽환을 사랑했으며, 스스로를 외로운 존재로 소외시키면서 세상에서 겉돌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백이 한 편의 시로 묘사했던 ‘역려과객’의 세계관이 19세기 유럽의 예술가들에게도 고스란히 나타났던 셈이다. 그래서 ‘낭만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키워드는 ‘방랑’이었다. 지난해 말 무대에서 은퇴한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도 “방랑은 낭만의 조건”이라는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슈베르트의 방랑은 좀더 애절하다. 그것은 예술가의 자의식으로 선택한 방랑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이 던져진 운명이었다. 평생을 따라다녔던 궁핍과 작고 추레한 외모가 어찌 낭만적 선택일 수 있었겠는가? 생전의 그는 자신이 쓴 작품의 10%만 연주됐던 불행한 작곡가였고, 짝사랑하던 여인들이 있었지만 늘 거부당했던 초라한 남자였다. 결국 그는 “나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지상에는 내가 있을 곳이 없어”라고 푸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피아니스트 조은아는 슈베르트의 방랑을 “돌아올 곳이 없는 방랑”이라고 표현했다. 바로 그것, ‘돌아올 곳 없는 방랑’이야말로 슈베르트 음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일 터이다.
‘역려과객’의 문을 여는 ‘방랑자 환상곡 op.17’(사진· 마우리치오 폴리니 연주)은 슈베르트의 방랑을 대변하는 하나의 표상이다. 게다가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겨울 나그네’ 같은 연가곡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늘 여인에게 구애하다가 거부당한다. 결국 슈베르트 자신일 수밖에 없는 그 주인공은 정처없이 방황할 뿐이다. 실연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고작 시냇물이나 찾아가 하소연할 뿐이다. 이 소심함, 이룰 수 없는 것을 동경하지만 저돌적으로 쟁취하지 못하는 이 여리디 여린 감성도 슈베르트의 음악을 이해하는 단초일 터. 같은 낭만주의 작곡가 슈만의 가곡이 사랑의 소용돌이에 몰입해 어떤 광기를 드러내는 것에 비해, 슈베르트의 노래들은 대상을 향해 완전히 다가서지 못하고 망설일 뿐이다. 그래서 쓸쓸하고 안쓰럽다.
피아니스트 조은아는 “슈베르트의 음악에는 안주하지 못하고 부유(浮遊)하는 듯한 화성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며 “특히 마지막 곡으로 연주하는 ‘피아노 소나타 c단조’는 어느 화음에도 머무르지 않고 계속 방랑한다”고 말했다. 이 연주회는 2월7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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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작곡가 하이든의 타계 200주년이다. 1년 내내 그의 이름을 내건 각종 연주회와 음반 발매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2009년에 특별히 기억할 만한 작곡가가 하이든만은 아닐 터. 타계 250주년을 맞은 헨델과 탄생 200주년을 맞은 멘델스존도 빈번히 거론될 작곡가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커다란 존재감으로 다가오는 이는 역시 하이든 아닐까.
일단 그는 누구도 따라오기 힘들 만큼 막대한 분량의 작품을 남겼다. 100곡이 넘는 교향곡과 83곡의 현악4중주, 4곡의 오라토리오와 34곡의 오페라…. 그밖에도 많다. 피아니스트 알프레트 브렌델이 즐겨 연주했던 일련의 클라비어 소나타들은 모두 50곡 정도, 또 얼마 전 국내에서 ‘강마에 신드롬’을 일으켰던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흘러나왔던 ‘첼로 협주곡 2번’, 1970년대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장학퀴즈>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됐던 ‘트럼펫 협주곡’ 등등… 이게 모두 하이든의 음악이다.
1957년 네덜란드의 음악서지학자 호보켄(Hoboken)은 하이든의 작품에 일일이 번호를 붙여 정리했다. 하지만 누구도 호보켄의 목록을 완벽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하이든이 남긴 음악이 모두 몇 곡인지 파악하기 쉽지 않은 탓이다. 작곡 연도도 헷갈린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이 작곡한 음악이 하이든의 것으로 둔갑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를테면 ‘하이든의 세레나데’로 불렸던 ‘현악4중주 17번 F장조’가 그랬다. ‘장난감 교향곡’으로 불렸던 ‘교향곡 C장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호보켄은 1971년에 작품 목록을 수정·보완해야 했다.
작곡가 하이든의 남다른 능력은 그토록 방대한 분량 속에서도 일정한 수준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많은 곡을 썼으면서도 태작(태作)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성실한 작곡가였는가를 보여주는 증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음악깨나 듣는다는 애호가들이 “하이든을 좋아한다”고 선뜻 말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의 음악은 ‘고전주의’의 성을 같이 쌓았던 후배들, 이를테면 모차르트나 베토벤에 비해 뜸하게 연주된다. 왜 그럴까. 왜 그는 모차르트나 베토벤에 비해 충성도 높은 마니아층을 거느리지 못하게 된 걸까.
한 음악칼럼니스트와 이 문제를 갖고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나온 결론은 대략 이랬다. “좋은 작품이 너무 많은 게 탈이야. 냉장고에 먹을 게 잔뜩 쌓여 있어봐. 특별히 구미를 당기는 게 아무 것도 없을 수 있거든. 게다가 하이든은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신화’로 포장되지 못했어. 말년의 하이든은 유럽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스타 작곡가였지만,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오히려 모차르트와 베토벤에게 밀렸잖아. 모차르트는 기구한 운명의 천재로, 베토벤은 격정적 드라마의 주인공이나 음악적 신(神)으로까지 그려졌지만, 하이든은 그저 사람좋고 성실한 작곡가라는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잖아.” 그 결론 끝에 이런 얘기도 나왔다. “그래도 하이든은 위대해. 사람들이 ‘하이든을 좋아한다’고 입으로 말하진 않지만, 그의 음악을 이미 허다하게 듣고 있잖아. ‘어, 그 곡이 하이든 음악이었나?’ 하면서 말이야.”
올해로 타계 200주년을 맞은 하이든은 그렇게, 고전주의 이후 누구도 뛰어넘기 힘든 ‘양’과 ‘질’을 보여줬다. 또한 그는 고전주의 소나타와 교향곡의 형식을 완성했다는 측면에서뿐 아니라 개인적 삶의 궤적에서도 ‘근대로의 이행’을 고스란히 보여줬던 작곡가였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그는 교회합창단의 ‘보이 소프라노’로 활동하다 변성기에 이르자 버림받았으며,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해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종속된 음악가’로 30년을 봉직했다. 가난과 제도를 묵묵히 견디며 음악가의 길을 걸었던 그는, 1790년에야 에스테르하지 가문과의 계약을 끝내고 ‘직업 음악가’로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유럽에 시민계급의 기운이 서서히 퍼져가던 시기. 하이든은 어느덧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그때부터 파리와 런던에서 악보를 출판했으며 콘서트홀에 모인 다수의 청중을 위해 곡을 썼다. 그는 그렇게, ‘근대로 가는 징검다리’를 놓고 1809년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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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45만원을 내고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를 보러 간다. 또 어떤 이들은 45만원으로 한 달을 산다. 이 격차는 사라질 기미가 통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해가 갈수록 커질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음악 듣기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수십만원, 적어도 10만원이 훌쩍 넘는 연주회를 갈 수 없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도 없다. 당신이 진정 음악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경제적으로 좀 쪼들리는 형편이라면, 용돈을 아끼고 아껴서 한 달에 한 번쯤 음반가게에 들러보는 게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시간과 더불어 소멸하는 연주를 ‘녹음’이라는 테크놀로지에 가둬놓은 탓에 현장감은 당연히 부족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반의 미덕은 적지않다. 45만원짜리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를 1만원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밑지지 않는 선택 아닌가. 게다가 지휘자의 해석과 악단의 연주력을 정확하게 분별해가며 들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 번 반복해 들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음반의 탁월한 미덕이다.
또 다른 대안도 있다. 수십년간 음악문화의 첨병이었던 매체, 바로 라디오다. 영국의 BBC처럼 뛰어난 전문성과 콘텐츠를 갖추진 못했어도, 한국에도 ‘KBS 클래식FM’이라는 방송이 존재한다. 물론 몇가지 아쉬움은 있다. 대중적 인기를 고려해 선정된 일부 DJ들의 미숙한 진행, 미리미리 왕창 녹음했다가 한 편씩 방송하는 것, 클래식FM이라는 정체성에 걸맞지 않은 엉뚱한 음악 틀기 등이다. 그래도 KBS 클래식FM이 있어 다행스럽다. 이것은 당신의 주머니에서 한푼도 가져가지 않는다. 아무런 직접 투자 없이도 음악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듣고 싶은 음악이 언제나 흘러나오는 건 아니지만, 예정된 프로그램을 미리 확인하는 노력을 조금만 기울인다면, 최고의 연주회를 내 방에서 편안하게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게 해준다.
애호가들에게 특히 호평받는 것은 <실황음악회>와 <명연주 명음반>일 터. 이 두 개의 프로그램은 ‘골수’ 청취자가 가장 많다. 게다가 방송할 선곡들을 인터넷으로 미리 공개해 청취자의 선택에 도움을 주는 친절함도 갖췄다.
<실황음악회>의 2월 방송분 가운데 놓치기 아까운 연주. 바이올리니스트 율리아 피셔(26·사진)의 이름이 눈에 띈다. 지난해 4월 덴마크의 코펜하겐 라디오 콘서트홀에서 있었던 실황.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 다녀갔던 마렉 야노프스키(70)가 지휘하는 덴마크 국립교향악단과의 협연이다.
독일 뮌헨 태생의 피셔는 현재 가장 주목받는 바이올리니스트다. 네델란드의 ‘펜타톤’(Pentatone) 레이블에서 내놓은 8장의 음반은, 이 젊은 아가씨가 20대 초반에 이미 ‘성숙한 음악가’의 경지에 올랐음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녀의 연주에는 인기를 끌어보려는 조급함이나 기교의 과시 같은 것들이 없다. 그래서 담백하다. 아직 어린 나이를 감안한다면 놀라울 정도의 절제력이다. 소리를 멋지게 내보려는 과시를 뛰어넘어 음악 전체를 조감하는 통찰력, 부드러움과 강함, 곡선과 직선의 유려한 어우러짐. 그것이 피셔의 음악이다.
더욱 놀라운 건 그녀가 피아니스트로도 데뷔했다는 점이다. 지난해 1월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융에 도이치 필하모닉과 가졌던 신년음악회. 그녀는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a단조’를 연주해낸 다음, 다시 바이올린을 들고 생상스의 ‘협주곡 3번’을 연주했다. 관객들은 평생 처음 보는 이 ‘놀라운 장면’ 앞에서 뜨거운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피셔의 ‘더블 플레이’는 1회용 깜짝쇼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누누이 “나는 다만 바이올리니스트로 먼저 데뷔했을 뿐”이라며 피아노에 대한 애착을 보여왔고,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펜타톤에서 나온 피셔의 레코딩 가운데, 가장 먼저 만나야 할 것은 ‘러시안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2005년 ‘그라모폰 에디터스 초이스’를 비롯해 ‘음악의 쇼크상’ 등 다수의 음반상을 휩쓸었다. 바흐의 ‘소나타와 파르티타’, 모차르트의 ‘협주곡 1~5번’,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와 ‘더블 콘체르토’ 등도 콜렉터 아이템으로 꼽을 만하다. 그러나 그보다, 16일 KBS에서 방송되는 피셔의 연주실황을 들어보는 게 먼저겠다. 왜? ‘공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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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 소의 목에 다는 방울. 영어로는 카우벨(Cowbell), 독일어로는 헤어덴글로켄(Herdenglocken)이라고 한다. 쩔렁쩔렁 울리는 이 방울소리를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 음악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이를테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 20세기 초반의 독일음악을 대표했던 작곡가 슈트라우스는 바이에른 알프스의 장대한 풍경을 사랑했던 모양이다. 일출과 일몰, 강물과 폭포, 깎아지른 암벽과 천둥을 몰고오는 비바람…. 슈트라우스는 그 대자연을 남성적 분위기가 물씬한 ‘알프스 교향곡’으로 그려냈다. 첫곡 ‘밤’으로 시작해 ‘숲으로 들어감’ ‘꽃이 핀 초원’ ‘정상에서의 기분’ 등, 각기 이름 붙인 22개의 곡으로 구성된 표제음악이다. 쩔렁거리는 워낭소리는 9번 ‘산의 목장’(Auf am Alm)에서 울려퍼진다.
그렇다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는 워낭소리는 어디에서 들려오는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후기 낭만의 시대를 함께 살았던 구스타프 말러. 그의 교향곡에서도 쩔렁거리는 워낭소리가 들려온다. 슈트라우스의 워낭소리가 장대한 풍경을 연출하고 일순 사라지는 것에 비해, 말러가 음악 속으로 불러들인 그것은 교향악적 서사의 일부를 이루면서 좀더 깊고 긴 여운을 남긴다.
생전의 말러가 완성한 교향곡은 번호가 붙지 않은 ‘대지의 노래’까지 포함해 모두 10곡. 교향곡이라는 양식 속에서 장대한 문학적 서사를 구축했던 말러는 관악기의 편성을 대폭 늘이고 만돌린과 첼레스타, 채찍과 해머 등 다양한 악기를 음악 속으로 불러들였다. 워낭소리가 등장하는 것은 그중에서도 4번, 6번, 7번. 특히 인상적인 것은 ‘비극적’(Tragische)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6번의 워낭소리다.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그의 음악, 그중에서도 6번에 등장하는 워낭의 의미는 무엇일까?
1악장은 현악기들이 연주하는 무겁고 어두운 행진곡풍의 주제로 문을 연다. 그러다가 발전부에서 마침내 등장하는 워낭소리. 말러 전기를 썼던 음악학자 앙리 루이 드 라 그랑쥬는 그것을 “인간사의 번잡에서 한 걸음 벗어난, 은인자적 상징”이라고 해석했다. 워낭소리는 이어지는 2악장 안단테 모데라토에서 다시 등장한다. 6번은 ‘비극적’이라는 표제가 암시하듯 한 줌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비관적 세계관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악장은 느리고 아름답다. 라 그랑쥬는 이 목가적 악장의 중간부에서 새소리와 함께 울려퍼지는 워낭소리를 “말러의 창조적 에너지의 원천이었던, 자연의 복된 고요”라고 해석했다.
애초에 말러는 이 아름다운 안단테 모데라토 악장을 세번째 악장으로 초연(1906년)했다. 하지만 괴기스러운 모티브로 가득한 2악장 스케르초가 1악장과 분위기가 너무 비슷하다는 지적에 따라 1908년에 악장의 순서를 바꿔 다시 출판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어떤 지휘자들은 초판본 순서에 따라 스케르초를 2악장으로, 안단테 모데라토를 3악장으로 연주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솔티와 시카고심포니, 불레즈와 빈필하모닉 등이 그렇다.
풍경을 뛰어넘은 비유와 상징. 말러의 교향곡 속에서 워낭소리는 그렇게 어떤 ‘의미’로 자리했다. 영화 <워낭소리>가 늙은 소의 거룩한 생애를 쩔렁거리는 워낭소리로 상징했듯, 소리는 그렇게 풍경 이상의 의미를 가졌을 때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 아닐까.
요즘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6번 음반 가운데, 워낭소리가 가장 또렷하게 들려오는 것은 리카르도 샤이와 암스테르담 콘체르토 헤보의 연주(Decca)다. 게르기예프가 런던심포니를 이끌고 진행 중인 ‘말러 사이클’ 중에서 6번 음반은 각종 상을 거머쥐며 호평받았던 수작이다. DVD로는 2006년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연주(사진)를 권한다. 암과 싸우는 거장의 투혼이 감동적이다.
19세기 중반, 파리 센강 오른편의 라틴구(La Quartier Latin)는 예술가들의 거리였다. 소르본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그 거리에는 고만고만한 술집과 카페들이 모여 있었고, 그곳은 수많은 시인과 작가, 화가들로 늘 북적였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의 발자크가 그 거리를 거닐었을 것이고, 시인 보들레르가 어느 구석진 술집에서 ‘파리의 우울’의 한 구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화가 고흐도 그 거리의 방랑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라틴구의 한 모퉁이에 ‘모뮈스’라는 카페가 있었다. 이곳은 특히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예술가로서 아직 이름을 떨치진 못했지만, 당대에 서서히 뿌리내리던 ‘리얼리즘’에 막 눈을 떠가던 젊은 예술가들이 모뮈스에 모여들어 술을 마시고 토론을 나눴다. 아마 가끔은 주정도 부리고 다투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모뮈스에 죽치고 앉아 있던 패거리 중 한 명이었던 앙리 뮈르제(1822~1861).
어찌보면 그는 아직 ‘작가 지망생’이라 불러도 좋을 신출내기였다. 나이로 치자면 발자크의 다음 세대쯤 되는 작가였지만, 불행히도 마흔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데다 후대에 길이 남을 만한 걸작을 쓰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지금 ‘뮈르제’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당시 함께 어울렸던 뮈르제의 동료들도 대개 비슷한 길을 걸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 가운데 현재까지 가장 선명히 기억되는 예술가는 아마도 세 살 위의 친구였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 정도일 터. 리얼리즘 미술사의 초입에 등장하는 쿠르베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것”을 강조하면서 ‘돌 깨는 사람들’ 같은 걸작을 남긴 화가다.
그렇다면 뮈르제는 과연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던 것일까? 하루에 커피를 열 잔 가까이 마셨던 카페인 중독자. 카페 모뮈스에 출근하다시피 드나들며 ‘위대한 작가’를 꿈꿨던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커피만 들이켜다 마흔도 안돼 세상을 등진 것일까?
꼭 그렇진 않다. 다행스럽게도 뮈르제는 당시 어울렸던 가난한 친구들, 함께 사랑을 나눴던 비슷한 계층의 여인들을 등장시켜 한 권의 소설을 썼다. 여러 개의 연작 단편으로 이뤄진 소설, <보헤미안의 생활 정경>(Scenes de la Vie de Boheme)이라는 작품이었다.
시인 로돌포와 화가 마르첼로, 음악가 쇼나르와 철학자 콜리네, 다락방에서 삯바느질로 살아가는 노동자 루실과 그녀의 친구인 뮤제타. <보헤미안의 생활 정경>은 이렇게 여섯명의 젊은이들이 파리의 하늘 밑에서 펼쳐가는 꿈과 사랑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달콤하고 낭만적인 판타지가 아니라 당대 하층민들의 궁핍한 삶, 인생살이의 고달픔을 생생하게 그려낸 리얼리즘 소설에 가까웠다. 그 시절, 프랑스에서는 시민계급의 기운이 한창 커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잊혀질 뻔했던 이 소설을 오늘까지 기억하게 만든 일등 공신은 뭐니뭐니해도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일 터. 오페라의 귀재 푸치니는 이 작품을 4막의 오페라로 만들어 1896년 초연했고, 원작의 내용을 무시하고 대중적 신파극을 만들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라 보엠>은 푸치니의 다른 작품들, 이를테면 <나비부인>이나 <토스카>와 더불어 오늘날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로 손꼽힌다. 푸치니는 아버지뻘이었던 베르디보다 진지하지 못한 작곡가였음에 틀림없지만, 적어도 그는 청중의 귀를 사로잡는 매혹적인 아리아와 색채감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작곡가였다.
소설 속에 등장했던 착하고 예쁜 루실은 오페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름을 미미(Mimi)로 바꿨다. 그녀는 1막에서부터 ‘내 이름은 미미’라는 절창으로 청중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미미로는 소프라노 넬리 멜바의 이름이 당연히 거론되겠지만, 최근의 생생한 <라 보엠>을 만나고 싶다면 지난해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공연됐던 실황(사진)이 좋을 성싶다. 로돌포 역에 라몬 바르가스, 미미역에는 안젤라 게오르규. 좋은 캐스팅이다. 특히 음울한 3막에서 미미가 보여주는 가창력과 연기력이 눈부시다. EMI 발매.
“봄에 들을 만한 음악은 뭐가 있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이탈리아와 러시아 음악의 분위기가 사뭇 다른 것처럼, 일조량과 기온의 변화는 사람의 감성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당연히 계절에 따라 마음에 와닿는 음악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아예 곡명을 ‘봄’으로 내건 음악도 적지 않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이다. 하지만 베토벤 자신이 이 소나타를 ‘봄’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아니었으므로 일단 열외로 치자. 다음으로 떠오르는 곡은 비발디의 협주곡 ‘사계’에 등장하는 ‘봄’이다. 물론 하이든도 ‘사계’라는 제목의 오라토리오를 썼고 차이코프스키도 같은 이름으로 모음곡을 남겼다. 그들의 ‘사계’에도 당연히 따뜻한 봄날이 등장한다. 이밖에 드뷔시가 색채감 있는 관현악으로 그려낸 ‘봄’,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우아하면서도 흥겨운 왈츠 ‘봄의 소리’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봄의 음악’이다.
하지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이 말이 요즘처럼 실감나는 때도 없다. 기상대는 평년보다 봄이 9일쯤 일러질 것이라 예보했고 개구리들도 일주일이나 일찍 깨어나 짝짓기에 분주하지만, 이 또한 본질은 ‘지구 온난화’일 뿐이다. 지금 이 땅에서 봄을 제대로 느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이럴 때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아마도 슈만의 ‘봄’일 것이다. 슈만이 남긴 4개의 교향곡 가운데 첫 번째 곡. 그의 나이 31세에 작곡했던 이 곡은 ‘봄’이라는 표제와 달리 어둡고 광폭하며, 심지어 추운 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악상이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말하자면 ‘춘래불사춘의 음악’인 셈이다. 어떤 이들은 “약동하는 봄 기운” 운운하며 표제와의 연관성을 강조하지만, 네 개의 악장을 반복해 들을수록 슈만의 강박과 우울이 곳곳에서 느껴지는 ‘추운 봄’의 음악이다.
트럼펫과 호른의 팡파르로 시작하는 1악장. 처음부터 무겁고 느리다. ‘봄이 왔다’는 암시로는 왠지 부적절해 보이는 이 불안한 팡파르는 1악장이 끝날 때까지 여러번 반복된다. 가끔 목관악기들, 특히 플루트가 앞으로 나서며 봄날의 새소리를 연상케 하는 악구를 연주하지만, 그 새들의 지저귐마저 이내 사그라지고 다시 어두운 팡파르가 커다랗게 고개를 쳐든다. 이어서 라르게토(Larghetto)로 느리게 흘러가는 2악장. 슈만의 ‘봄’에서 가장 로맨틱한 악장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 로맨틱은 우아함이나 사랑스러움보다는 쓸쓸한 비애에 가깝다. 아타카(attacca)로 중단없이 이어지는 3악장 스케르초에서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고, 마지막 4악장에서 햇살처럼 잘게 부서지는 음표가 잠시 고개를 내밀지만 이 역시 관현악 총주의 무거운 기세에 눌려 사라진다.
베토벤의 ‘광기’는 더 지독한 양상으로 낭만주의자 슈만에게 대물림됐던 것 아닐까. 안타깝게도 슈만은 ‘마음의 병’을 끝내 치유하지 못했다. 그는 44세에 라인 강에 몸을 던졌다가 지나가던 배에 간신히 구조됐지만, 46세에 정신병원에서 눈을 감고 만다. 그는 왜 죽어가면서 아내 클라라에게 “알겠어(Ich kennen)”라고 말했던 것일까? 그의 삶이 남겨놓은 마지막 수수께끼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빈필하모닉을 지휘한 ‘봄’은 이른바 ‘필청반’. 하지만 이 연주는 색채가 밝다. 번스타인 스타일로 채색된 ‘봄’이다. 그 화사함이 거북하다면 조지 셸이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녹음이 좋겠다. 슈만의 ‘봄’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산만함’을 극복하려는 지휘자 셸의 노력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첼로 소나타’의 역사에 러시아 작곡가의 이름이 확실하게 등재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라흐마니노프가 ‘첼로 소나타 g단조’를 작곡했던 것이 1901년. 이 곡은 러시아 작곡가에 의해 쓰여진 첼로 소나타 중에서 오늘날 가장 빈번히 연주되는 곡이다. 물론 그 전에도 러시아에 첼로 소나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안톤 루빈스타인(1829~1894)은 1852년에 ‘소나타 D장조’를, 1857년에는 ‘소나타 G장조’를 썼다. 하지만 이 두 곡은 오늘날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라흐마니노프에 이르러서야 ‘첼로 소나타’라는 장르의 문이 제대로 열렸고, 이어서 미야스코프스키,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의 작곡가가 자신들의 작품 목록에 첼로 소나타를 올렸다.
하지만 그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사뭇 복잡해진다. 라흐마니노프는 주정뱅이 아버지가 재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조부 밑에서 어두운 유년을 보냈으며, 망명 후에는 본업인 작곡보다 피아노와 지휘에 매달려야 했다. 작곡보다 연주가 훨씬 ‘환금성’이 컸던 까닭이다. 미국에서의 라흐마니노프는 그렇게, 생계를 위해 부지런히 피아노를 치며 살아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쇼스타코비치는 어땠던가?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던 해에 그는 11살이었다. 스스로 술회했듯, “2월혁명과 10월혁명 등 연이어 터지는 사회적 사건에 관심이 컸던” 가정에서 성장했던 그는, “실생활을 음악에 담고 싶다”는 소망을 어린 시절부터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소박한 미의식은 스무살을 넘어서면서부터 희미해졌다. 그의 미적 감성과 아이디어는 어느덧 모더니즘의 길을 걸었으며, 예술가를 통제했던 스탈린 시대는 당연히 그에게 버거웠다. 그는 권력의 압박이 들어오면 자신의 미의식에 ‘물’을 타며 버텼다. 이를테면 ‘교향곡 5번’이나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 같은 곡들. 그러다가 압박이 느슨해지면 자신의 내밀한 자의식을 악보 속에 털어놓곤 했다.
33년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에서 ‘소비에트’로의 이행기를 살았던 두 사람. 라흐마니노프는 혁명 후의 역동적인 조국에 적응할 수 없었던 낭만적 복고주의자였고,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시대의 통제를 ‘물타기’로 버텼던 예민한 모더니스트였다.
게다가 두 사람은 극단적인 ‘소심남’이었다. 자기 주장을 세우며 남과 대립하는 걸 피했고 남의 충고나 비난엔 크게 상처받았다. 라흐마니노프는 1897년 초연됐던 ‘교향곡 1번’이 혹평을 받자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쇼스타코비치는 “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평생 입에 달고 산 사람”이었다는 것이 피아니스트 리히테르의 회고다.
억눌린 감정은 음악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두 사람이 각각 한 곡씩 남겨놓은 첼로 소나타는 마치 그 해답과도 같다. 라흐마니노프의 ‘g단조 op.19’에서는 과다한 감정의 분출이 자주 엿보인다. 쇼스타코비치의 ‘d단조 op.40’에 등장하는 리드미컬한 익살은 어둠 속에 숨어 혼자 키득거리는 웃음을 닮았다. ‘g단조 op.19’는 첼리스트 다닐 샤프란과 피아니스트 펠릭스 고틀리프의 연주가, ‘d단조 op.40’은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에 쇼스타코비치가 직접 피아노를 맡았던 연주가 명연으로 남아 있다. 최근 한국의 첼리스트 송영훈은 두 곡을 모두 연주한 음반(사진)을 내놓기도 했다. 같은 레퍼토리로 순회 연주회도 진행 중이다. 14일 고양아람누리, 15일 성남아트센터, 17일 대구 수성아트피아, 18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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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메타나는 왜 갑자기 청력을 잃었을까. 가장 유력하게 제기되는 것은 ‘매독설’이다. 독일의 내과의사 디터 케르너는 <위대한 음악가들의 죽음>(현암사)이라는 책에서 스메타나의 청력 상실을 “매독에서 비롯된 진행성 마비”로 설명한다. 그는 베토벤에 대해서도 같은 설명을 내놓는다. 다만 그것이 천천히 진행되거나 빨리 진행된 차이였다는 것. 케르너는 같은 책에서 슈베르트와 파가니니의 사인(死因)도 매독이었다고 설명한다.
매독 때문이었든 아니면 정신분열이나 우울증 때문이었든, 스메타나는 음악가로서의 연륜이 한창 무르익던 50세에 갑자기 외부의 모든 소리로부터 차단된다. 그래서 그는 프라하 가극장의 지휘자직을 사임하고 칩거에 가까운 나날을 보내야 했으며, 그때부터 오로지 작곡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의 귀에 들려오는 것은 내면에서 울려오는 기억과 상상의 소리뿐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걸작들은 바로 이 시기에 쓰여졌다. 베토벤이 귀가 안 들리기 시작한 중기(中期) 이후에 ‘걸작의 숲’으로 들어섰듯, 스메타나도 청력을 잃고 난 후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음악을 남겼다. 전부 여섯 곡으로 이뤄진 교향시 ‘나의 조국’(Ma Vlast)과 현악4중주 1번 ‘내 인생으로부터’(From My Life)가 바로 그것이다.
게다가 흥미로운 것은 두 곡의 성격이다. 간단히 말해 하나는 ‘조국에 대한 헌사’이고, 또 하나는 ‘개인적 심경고백’이다. 청력을 잃은 말년의 스메타나는 보헤미아의 민족주의를 웅대한 스케일의 관현악으로 묘사해 체코인들에게 바쳤으며, 그와 거의 동시에 현악기 4대를 동원한 소박한 규모의 실내악으로 자신의 인생을 반추했다. 스메타나는 그렇게 귀먹은 상황에서도 ‘체코의 예술가’라는 공인으로서의 자각을 놓치지 않았으며, 동시에 굴곡 많았던 자신의 개인사를 음악적 자전으로 남길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몸에 시시각각 닥쳐오던 정신이상증세를 이미 느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교향시 ‘나의 조국’은 1874년부터(1872년이라는 기록도 있다) 5년에 걸쳐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벽 위에 지어진 성(城)을 묘사하는 첫곡 ‘비셰흐라트’를 쓸 때만 해도 아직 귀가 먹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두번째 곡 ‘몰다우강’을 쓸 무렵에는 완전히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스메타나가 묘사한 몰다우강은 압도적 음량(音量)으로 흘러간다. 체코 남부에서 발원해 북쪽을 향해 거칠게 흘러가는 물살, 숲에서 벌어지는 사냥 풍경, 농가의 흥겨운 결혼식, 관현악 총주가 강약의 대비를 급하게 오가는 급류, 그러다 마침내 넓은 강폭을 이루며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 눈에 보이듯 선연한 풍경이다. 계속해서 3곡 ‘샤르카’, 4곡 ‘보헤미아의 초원과 숲에서’, 5곡 ‘타보르’와 6곡 ‘블라니크’가 이어진다.
‘몰다우’는 독일어식 발음이다. 체코는 약 300년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고, 지배층의 언어는 독일어였다. 스메타나가 한창 활약하던 19세기 중반의 프라하에는 체코어 사용자보다 독일어 사용자가 더 많았다. 이때 오페라를 통해 ‘모국어’의 부활을 꿈꿨던 작곡가가 바로 스메타나. 따라서 ‘몰다우’는 ‘블타바’라는 체코식 표현으로 부르는 것이 더 맞겠다. 음반으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나의 조국’은 라파엘 쿠벨릭이 지휘한 연주들. 그는 보스턴심포니(71년),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84년), 체코필하모닉(90년) 등과 이 곡을 녹음했다. 하지만 바츨라프 노이만이 체코필하모닉을 지휘한 녹음(75년)을 선호하는 애호가들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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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호로비츠(1904~89)는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늘 자신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만을 고집했으며, 그것을 보잉 747로 공수해 연주회를 펼치곤 했다. 연주 여행 중에는 언제나 호화로운 호텔방에 묵었고 전속 요리사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었다. 정수기도 자신의 것만을 가지고 다니며 사용했다. 연주회는 반드시 일요일 오후 4시에 열었으며, 담배는 하루에 딱 두 개비, 연습 시간은 하루 두 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그는 거의 평생에 걸쳐 이런 습관들을 고수했다.
하지만 호로비츠는 사람들이 자신의 까다로움을 지적하면 버럭 화를 냈다고 한다. 거기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 그의 항변. 이를테면 자신의 피아노만을 고집했던 것은 손에 익은 악기로 완벽한 연주를 펼치기 위한 결벽증이었고, 연주 여행에 전속 요리사를 대동했던 것은 “고기를 먹지 않는 개인적 신념 때문”이었다. 또 언제나 일요일 오후 4시에 연주회를 시작했던 것은 “그때야말로 내가 가장 생기 넘치는 시간이고, 따라서 관객에게도 최적의 시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호로비츠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하루에 담배 딱 두 개비는 왜였을까? 아마도 그것은 건강 때문이었던 듯하다. 또 연습을 하루에 두 시간 이상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너무 연습을 많이 하면 연주가 기계적이 돼버린다”고 설명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자신이 연주한 음반도 듣지 않았다. 그는 이에 대해 “그것이 (현재의) 나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연주는 시간과 함께 소멸하며, 과거의 자신마저도 결코 복제하지 않겠다는 것이 호로비츠의 뜻이었다.
이런 식의 결벽증, 다른 이들에게 까다로움으로까지 비쳤던 태도를 고수하며 호로비츠가 도달했던 피아니즘은 어떤 것이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눈부신 테크닉이다. 호로비츠는 누가 보더라도 20세기 피아노 음악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테크니션이었다. 특히 1930년대의 그는 화려한 기교를 엄청난 음량으로 뿜어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주관성이 농후하게 개입된 낭만적 해석. 호로비츠는 이에 대해 “인쇄된 악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 내가 평생 동안 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원래의 음에 장식을 덧붙이는 등 자신만의 해석으로 연주하는 걸 즐겼고, 같은 곡이더라도 연주할 때마다 음악이 달라지곤 했다. 말하자면 즉흥성이 강했다. 좋게 말하면 ‘마르지 않는 영감’을 가진 연주자였고,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자의적 왜곡을 일삼았던 연주자였던 셈이다. 어쨌든 그는, 객관적이고 역사주의적인 해석이 음악계의 대세를 이루는 20세기 중후반에 들어와서도 낭만적 해석과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마지막 로맨티스트’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 호로비츠가 61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86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귀환 콘서트. 페레스트로이카로 해빙 무드가 한창 번져가던 시절에 마침내 성사됐던 이 연주회는 착잡하면서도 감동적이다. 스카를라티의 소나타에서 라흐마니노프의 ‘WR를 위한 폴카’까지, 82세의 노인이 무려 17곡을 몰아쳤던 연주회. 호로비츠의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달떠 있고 청중은 한 음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음악에 몰입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슈만의 ‘트로이메라이’가 연주되던 순간, 객석 곳곳에서 눈물이 흐른다. 이 역사적인 실황이 최근 국내에 라이선스 DVD(소니비엠지·사진)로 출시됐다. “내가 러시아를 떠날 때 아홉 살이었던 조카가 일흔 살 노인이 됐어”라며 하하 웃던 호로비츠. 그는 3년 후 뉴욕 맨하탄에서 심장마비로 눈을 감는다. 올해는 그가 떠난 지 꼭 20년이 되는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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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안 듣는 바흐 음반 좀 있어?” 출근길에 선배가 물었다. 요즘 들어 바흐의 음악이 “유독 당긴다”고 했다. 또 다른 선배 한 명은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다. 거실에 놓인 피아노를 밤 늦은 시간까지 치다가 아래층의 지청구를 듣기 일쑤다. 그 선배도 요즘 바흐의 음악에 푹 빠졌다. “전에는 주로 쇼팽을 쳤는데 요즘에는 바흐에만 관심이 간다”고 했다. 며칠 전, 전업 작가로 사는 친구 ㅈ은 네덜란드 음반사 ‘브릴리언트’에서 나온 170장짜리 ‘바흐 전집’을 턱 하니 작업실 한쪽에 들여놨다. 그가 말했다. “바흐 참 좋네. 하루종일 들어도 질리질 않네.”
인간의 몸과 정신에는 균형을 맞추려는 본능적인 ‘추(錘)’가 있다고 한다. 바흐의 음악에 마음이 끌린다는 것은, 바로 이 균형추의 작동 같은 것 아닐까? 객관적 상식이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이성과 논리를 희구하는 마음. 강 교수와의 대화 끝에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바흐의 음악에는 정신을 정화시키는 ‘논리적 감동’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바흐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강 교수는 우스개를 섞어 “요즘 말로 하자면 ‘범생이’ 같았던 사람”이라고 했다. “아무 사심없이 자기 직분에만 충실했던 사람이죠. 가정에 충실했던 건 물론 드레스덴 시절에는 궁정음악가로서, 라이프치히 시절에는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악장)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그게 바흐의 전부죠. 재미 있는 일화도 별로 없습니다. 바흐는 출판사로부터 자서전을 청탁받기도 했지만 거절했어요. 자기 자신을 위한 기록을 거의 남기질 않았어요.”
독일의 음악학자 포르켈(J N Forkel, 1749~1818)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1802년에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것은 바흐의 첫 번째 전기(傳記)이며, 서양음악사를 통틀어 첫 번째 음악가 평전이다. 한국에서도 2005년 강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바흐의 걸작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얽힌 유명한 일화. 잠을 못 이루는 카이저링크 백작의 ‘수면 촉진’을 위해 이 곡을 썼다는 이야기도 바로 이 책에 등장한다. 바하의 제자인 골드베르크는 연주는 잘했지만 작곡엔 별 재주가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백작의 집에 상주하는 건반 연주자였다. 백작은 “잠 못 이루는 밤”에 들을 수 있는 “온화하면서도 생기 있는 곡”을 써달라고 바흐에게 의뢰했고, 제자인 골드베르크는 이 곡을 ‘백작의 자장가’로 연주했다고 전해진다.
바흐에 대한 속물적 관심은 그가 두 번 결혼해서 11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낳았다는 것에 모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랴. 바흐의 ‘탁월한 생산력’은 음악에서 한층 빛났다. 바흐의 작품으로 확인된 것만 추려도 CD로 자그마치 170장의 분량. 그는 당대의 보편적 언어로 작품을 썼지만 대중과 영합하지 않았던 ‘은근한’ 고집쟁이였고, 뛰어난 건반 연주자였지만 “노력만 하면 누구나 나만큼 연주할 수 있다”며 항상 겸손했던 사람이었다.
‘따뜻한 이성’의 음악을 지상에 전해준 ‘음악의 현자(賢者)’ 바흐. 그는 60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시력이 급격히 악화된다. 영국인 의사의 집도로 두 번 수술을 받았지만 오히려 실명하고 만다. 그후 6개월간 계속 앓다가 1750년 7월28일 밤,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66세였다. 타계하기 열흘 전 아침에 갑자기 시력을 회복했지만, 몇 시간 후에 뇌졸중이 찾아왔고 온몸이 고열에 휩싸이면서 눈을 감았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왜 바흐를 듣는가? 지난주에는 바흐 음악이 전해주는 ‘논리적 감동’과 ‘따뜻한 위안’을 얘기했다. 이번주에는 바흐 연주의 대가들, 그중에서도 특히 피아니스트들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는 어땠던가? 빠른 템포와 절제된 스타카토, 음과 음 사이의 여백, 여러 성부를 마치 따로 녹음하기라도 한 것처럼 충실하게 구현했던 대위법…. 그것은 굴드 이전의 누구에게서도 만나기 어려웠던 ‘독특한 스타일’이었다. 생전의 굴드는 그것을 “10대 중반에 이미 형성됐던 나의 스타일”이라고 술회했던 적이 있다. 어쩌면 그 개성은 기존의 주류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굴드가 10대였던 1940년대에 주류를 이뤘던 바흐 해석은 당연히 낭만주의였을 터. 에드빈 피셔, 란도프스카, 파블로 카잘스 등이 그렇지 않았던가. 하지만 굴드가 보기에 그것은 “바흐와 별 관련이 없는 연주”였다. 그는 앞 세대의 바흐 연주가들 가운데 오로지 로잘린 투렉(1914~2003)만을 ‘긍정’했다.
굴드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20세기 중반에 바흐 해석의 지침과도 같았던 존재는 에드빈 피셔(1886~1960)였다. 기계적 객관주의를 배격하면서 영적인 연주를 들려줬던 피아노의 사제(司祭). 피아니스트 강충모 교수(49·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는 “(피셔의 바흐 연주는) 대단히 낭만성이 강하다”고 평했다. “게다가 40년대에는 지금보다 녹음과 편집 기술이 많이 떨어졌던 탓에, 요즘 세대가 그의 바흐를 들으면 실망할 겁니다. 페달도 많이 사용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빨리 지나갑니다. 테크닉이나 짧은 선율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지요. 그래도 피셔는 20세기의 바흐 스페셜리스트를 거론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굴드가 20세기 중반 이후를 완전히 주도했던 건 아니다. 강 교수는 “적어도 바흐의 ‘평균율’ 연주에 있어서는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리히테르를 빼놓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리히테르(1915~97)는 굴드와 상반되는 스타일의 바흐를 선보였던 피아니스트. 그는 굴드와 달리 페달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음과 음 사이를 부드럽게 잇는 레가토를 구사했다. 강 교수는 “리히테르의 바흐는 (굴드에 비해) 음색에 신경을 많이 쓰는 온화한 연주”라고 부연했다.
굴드가 유일하게 동의했던 앞 세대의 거장 로잘린 투렉은 어땠을까? 굴드는 생전의 인터뷰에서 “(투렉의 연주는) 각 성부들 사이의 구조적 관계와 더불어 직선적 부분도 매우 뛰어나게 고려돼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녀가 견실한 대위법을 구사했을 뿐 아니라 선율의 진행에서도 유려했다는 호평일 터. 하지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가 귀에 익은 이들이 투렉의 연주를 접한다면 좀 답답할지도 모를 일이다. 투렉의 연주는 굴드에 비해 템포가 느리고 선이 굵다. 비슷한 스타일을 구사했던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타티아나 니콜라예바(1924~1993)도 마찬가지. 강 교수는 “투렉이나 니콜라예바는 모두 여성이지만, 리히테르나 굴드보다 오히려 더 선이 굵은 연주를 펼쳤다”고 평했다.
살아있는 피아니스트로는 누가 있을까? 정확하고 학구적인 연주를 선보이는 안드라스 쉬프(56)의 ‘단정한 바흐’를 빼놓을 수 없을 터. 또 진지한 구도자의 풍모를 보여주는 머레이 페라이어(62)와 수정처럼 맑은 분위기를 풍기는 안드레이 가브릴로프(54)의 ‘차가운 바흐’도 한번쯤 접해야 할 ‘문제적 연주’다. 그밖에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80)가 선보이는 화려하고 강렬한 타건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별미’로 맛볼 만한 연주. 바흐는 그렇게,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은 재즈 색소폰 연주자 스탄 게츠의 이야기로 문을 열어야겠다. 1991년 3월3일부터 6일까지, 그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몽마르트르 클럽에서 연주했다. 세상을 떠나기 정확히 석달 전이었다. 당시 그는 골수까지 쳐들어온 암과 싸우고 있었다.
결국 유작이 되고 만 몽마르트르 실황. 이 앨범에서 최고의 연주는 타이틀곡 ‘People Time’이다. 그것은 지금 들어도 가슴 절절한 명연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스탄 케츠는 평상시처럼 상쾌하고 부드러운 리듬을 구사하지 못하고,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특유의 몽환적 비브라토도 들려주지 못한다. 그날 스탄 게츠의 테너 색소폰은 목쉰 소리로 힘겹게 운다. 매끈하게 이어져야 할 블로윙은 곳곳에서 툭툭 끊어진다. 폐가 다 망가진 상태였으니, 그렇게 호흡이 끊어질 수밖에 없었을 터. 그래서 ‘People Time’은 듣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인 명연임에 틀림없지만, 담담한 마음으로 마주하기 힘든 ‘고통스러운 작별인사’였던 셈이다.
스탄 게츠는 64세로 타계했고, 그날 몽마르트르에서 함께 연주했던 피아니스트 캐니 배런(66)은 유작 앨범에 수록한 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가 얼마나 야위었는지…. 그는 자신의 솔로 때마다 혼신을 다했다. 그러나 솔로가 끝날 때마다, 나는 그가 얼마나 힘겨워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 어쩌면 고통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날의 음악은 사실적이고, 정직하고, 아름다웠다.”
분분히 떨어지는 꽃잎을 보면서 떠오르는 또 한 명의 음악가. 스탄 게츠가 마지막 에너지를 그렇게 연소시켰던 것처럼, 러시아 출신의 명지휘자 키릴 콘드라신도 음악과 함께 산화했다. 81년 3월6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였다. 그날 북독일방송교향악단의 지휘봉을 들기로 예정됐던 이는 클라우스 텐슈테드. 하지만 텐슈테드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연주회가 거의 취소될 상황 속에서 급박하게 콘드라신에게 연락이 닿았고, 콘드라신은 앞뒤 가리지 않고 연주회장으로 내달렸다고 한다. 숨이 턱에 닿아 도착한 시각이 연주 시작 1시간 전. 콘드라신은 리허설도 거의 없이 포디엄에 서야 했다. 연주할 곡은 말러의 교향곡 1번 ‘거인’(사진)이었다.
콘드라신은 누군가? 60년부터 75년까지, 모스크바 필하모닉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지휘자. 옛소련의 국영 레이블 ‘멜로디야’와 네덜란드의 ‘필립스’를 통해 한국 애호가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명장(名匠). 볼쇼이극장의 보리스 하이킨에게 지휘를 사사한 그는,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스케일이 크고 강렬한 다이내믹을 구사한 지휘자였다. 당국과 악단의 운영 문제로 마찰을 빚던 그는 75년 모스크바 필하모닉 음악감독직을 사퇴했고, 78년에 네덜란드로 망명해 79년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의 지휘자로 취임했다. 그래서 소련 시절의 연주는 ‘멜로디야’에서, 네덜란드 망명 후의 연주는 주로 ‘필립스’에서 나왔다. 어느 것 하나 놓치기 아까운 수작들이 대부분이다.
어쨌든 ‘대타’로 무대에 섰던 암스테르담 콘서트홀에서, 콘드라신은 평소보다 훨씬 뜨거웠고 지휘의 템포도 빨랐다. 음반으로 기록된 당시 연주를 지금 들어보면, 다른 지휘자들의 말러 1번에 비해 뭔가 흥분한 상태로 질주한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약 50분에 달하는 연주. 10년 전부터 심장병을 앓아왔던 콘드라신은 몸을 돌보지 않은 채 무서운 기세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날 밤,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에서 눈을 감았다. 심장마비. 향년 67세였다.
스탄 게츠의 ‘People Time’처럼, 콘드라신의 말러 1번도 담담한 마음으로 마주하기 힘들다. 그럴 때 들을 수 있는 것이 멜로디야 시절의 음반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6번 교향곡 ‘비창’은 압도적 명연이다.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현악기군, 그러다 마침내 화산처럼 폭발하는 관악기군의 팡파르. 이렇게 섬세하면서도 장쾌한 ‘비창’을 어디서 만날 수 있겠는가. 멜로디야 시절에 콘드라신이 가장 집중했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곡 녹음도, 20세기 연주사의 한 페이지를 수놓은 장관이다.
2년 전 한국을 찾았던 뮌헨필하모닉의 연주회는 지금도 향기로운 뒷맛을 남긴다. 크리스티안 틸레만의 지휘는 강렬하면서도 섬세했고 악기들은 제각기 카랑카랑한 소리를 내면서도 부드럽게 어울렸다. 애매하게 뭉개진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말하자면 제대로 다듬어진 ‘독일 사운드’. 게다가 당시 연주됐던 곡들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사진)의 음악이었다. 틸레만과 뮌헨필이 자신들의 ‘18번’을 한국에서 선보인 셈이다.
그래서 오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다시 생각한다. 나치 시절 제국음악원의 초대 총재. 적어도 나치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는 20세기 초반부터 중엽까지 독일음악의 위대함을 증거한 ‘초인’이었다. 문화부 장관 괴벨스는 물론 히틀러도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런 정치적 행적 탓에 마음 한켠을 늘 불편하게 만드는 음악가. 하지만 도저히 거부하기 힘든 황홀한 음악을 써낸 작곡의 귀재. 슈트라우스는 그렇게, ‘불편함’과 ‘황홀함’이라는 두 개의 능선을 오가며 논쟁의 여지를 남긴다.
그의 친나치 행적에 대한 평가는 ‘자발적이긴 했지만 적극적이진 않았다’는 쪽으로 모아진다. 이것은 당시 최고의 명성을 지녔던 작곡가 슈트라우스가 나치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거라는 ‘상황 논리’에 근거한다. 또 생전의 슈트라우스가 보여준 ‘약간’의 반골 기질도 가세한다. 이를테면 나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태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와 오페라 <말없는 여인>을 함께 작업했다든가, 공연 팜플렛에 츠바이크의 이름이 삭제된 걸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든가, 2차대전 말기에 나치가 슈트라우스의 대저택을 부상자 수용을 위해 빌려달라고 했을 때 “전쟁은 나와 무관하다”며 거부했던 일화 등이 사례로 등장한다. 슈트라우스는 그렇게, 간간이 히틀러의 성질을 자극했다. 그는 그럴 수 있었다. 나치가 국제적 명성이 높은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슈트라우스는 자신을 비판하는 츠바이크에게 보낸 서신에서 “음악과 극장을 후원하는 새 독일 정부”에 강한 호감을 나타낸다. 그는 ‘음악의 자율성’을 내세우면서도 베를린올림픽 개막식을 위해 ‘올림픽 찬가’(1936)를 작곡했고,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형상화한 오페라 <평화의 날>(1938)로 나치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동맹국 일본을 위해 작곡한 ‘일본 축제 음악’(1941)과 오스트리아 합병 5주년을 기념한 ‘빈의 축제 음악’(1943)도 어용음악가 슈트라우스의 면모를 보여주는 행적이다.
결국 그에게 중요한 것은 부와 명성이었다. 나치 시절의 그는 “살아있는 독일 음악가 가운데 가장 빈번히 연주된 작곡가”로 기록되면서 그것을 누렸고, 그래서 “(나치와 슈트라우스가) 서로를 이용했다”(이경분, <망명음악, 나치음악>)는 평가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정치적으로 불편한’ 슈트라우스의 음악에는 분명 거부하기 어려운 황홀경이 있다. 그의 음악에는 거침없이 흘러가는 호연지기가 있고, 감성의 밑바닥을 흔드는 쾌감도 있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마저 “찬란하다”며 경탄했던 그것. 슈트라우스 음악의 본가로 통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연주회는 5월9~10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다. ‘영웅의 생애’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연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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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치가처럼 웅변을 토해내지 않았을 것이다. 조용히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객석의 뒤쪽에 앉아 있는 관객들에겐 그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53·사진)은 그런 사람이다. 연주를 들어보면 안다. 그는 청중을 현혹하지도 않고, 기교를 과시하면서 잘난 척 하지도 않는다. 거장풍의 거드름을 피우지도 않는다. 끝없는 연습과 준비로 완벽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느껴지는 연주. 그래서 지메르만의 피아니즘은 ‘신뢰할 만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 지메르만이 지난달 26일 “미국은 폴란드에서 손을 떼라”고 말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디즈니홀에서 열렸던 미국 투어의 마지막 연주회에서였다. 이 발언은 미국이 폴란드에 미사일방어(MD) 기지를 설치하려는 계획에 대한 반발로 해석된다. 지난달 28일자 미국 ‘LA타임스’와 영국 ‘가디언’은 지메르만이 “나는 미국의 군사정책에 반대한다”며 “다시는 미국에서 연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 것으로 전했다. 일부 관객은 야유를 보냈지만 대다수는 마지막곡인 시마노프스키의 ‘폴란드 민속음악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끝까지 감상했으며 일부는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어떤 관객은 “나는 비싼 입장료를 내고 음악을 들으러 왔지, 당신의 정치적 주장을 들으러 온 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지메르만의 공연은 비싸다. 하지만 지메르만의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그가 음악에 대해 해석하거나 설명할 수 있듯이, 정치적 견해도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디언’ 인터넷판에는 그런 글이 적잖이 올라와 있다.
지메르만은 어떤 피아니스트인가. 일단 그는 ‘쇼팽의 후예’라고 불려도 좋을 만한 연주자다. 이 평가는 당연히 ‘폴란드’라는 지역성을 내포한다. 폴란드를 대표하는 작곡가 쇼팽을 가장 폴란드적인 감성으로 소화해내는 피아니스트. 그래서 1975년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에서 19살 나이로 우승한 후, 지메르만에게는 ‘쇼팽 스페셜리스트’라는 수식어가 오래 따라다녔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스페셜리스트’라는 규정에 담긴 일종의 ‘억압’, 혹은 상업적 의도가 불편한지도 모르겠다. 76년 파리에서 피아니스트 루빈슈타인(1887~1982)이 그의 브람스 연주를 들은 후, “너야말로 브람스 스페셜리스트”라고 평했을 때, 지메르만이 몹시 불편해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일화다.
지메르만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는 아마도 ‘음악적 완벽주의’일 터. 그는 철저한 준비와 연습으로 ‘무결점의 연주’를 펼치는 피아니스트로 평가받는다. 그러다 보니 콘서트홀의 소음에 민감하고, 피아노도 자신의 스타인웨이만을 고집한다. 하지만 그 고집은 호로비츠의 ‘결벽증’과는 달라 보인다. 지메르만은 피아노를 직접 조율하고 위치를 열번씩 바꿔가며 녹음할 정도로 까다롭지만, 이는 ‘결벽증’이라기보다 오히려 ‘치밀함’에 가깝다. 그래서 실제로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나온 그의 음반은 태작이 거의 없다. 특히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협연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 2번’(78년 녹음)은 젊은 시절의 지메르만을 만날 수 있는 필청반이다. 또 그는 폴란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스스로 조직해 같은 곡을 99년에 직접 지휘해 녹음했다. 이 역시 몸은 스위스에 있어도 ‘나는 언제나 폴란드 음악가’라는 그의 담담한 ‘육성’을 느낄 수 있는 수작이다. 단, 달콤한 살롱풍의 쇼팽에 익숙한 이들에겐 재미없는 연주일 수도 있다.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문학사상사)에는 호시노라는 청년이 등장한다. 고등학교를 겨우 마친 화물 트럭 운전사에다 사장에게 혼날 것을 걱정하는 평범한 청년이다. 게다가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 심성까지 갖췄다. 한마디로 단순하고 착하다.
그렇게 해서, 하루키는 약간의 코믹한 설정을 곁들여 베토벤의 피아노 3중주 ‘대공’을 소설에 등장시킨다. 찻집 주인은 계속해서 말한다. “루돌프 대공은 열여섯살에 베토벤의 제자가 돼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베토벤을 깊이 존경하고 여러모로 도움을 줬지요. 베토벤은 마흔살 때 이 작품을 완성했는데, 이 곡을 끝으로 피아노 트리오에 두번 다시 손대지 않았습니다.”
지면상 원문을 좀 줄였다. 어쨌든 찻집 주인이 ‘대공’에 대한 설명을 백과사전식으로 늘어놓자, 호시노는 “알 것 같다”고 머리를 끄덕이며 찻집을 나선다. 그리고는 여관으로 돌아가,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나카타 노인에게 말한다. “베토벤은 (귀가 안 들렸는데도) 좌절하지 않았어. 그 뒤에도 작곡을 계속해 훌륭한 음악을 만든 거야. ‘대공 트리오’도 청각을 잃고 작곡한 거래. 그러니까 아저씨도 글을 모른다는 게 불편하고 고통스럽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
대략 이 정도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공’ 해설. 이만하면 ‘대공’에 관한 중요 사항들은 대체로 언급된 셈이다. 첫째, 대공과 베토벤의 우정. 루돌프 대공은 베토벤의 후원자이자 피아노 제자였으며, 무엇보다 진심어린 우정을 나눈 벗이었다. 1809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공격했을 때, 황실은 빈을 탈출해야 했고 대공도 그 대열에 있었다. 그때 베토벤이 진정으로 슬퍼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작곡했던 곡이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 베토벤이 자신의 음악 가운데 악장마다 부제를 붙인 것은 이 ‘고별’과 교향곡 6번 ‘전원’뿐이다. 게다가 베토벤은 ‘고별’(Lebewohl)을 프랑스 출판업자가 일상적 인사말인 ‘아듀’(Adieux)로 번역하자 화를 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대공은 내게 소중한 친구’라는 그의 뜻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둘째, 청각을 잃은 후 작곡한 마지막 피아노 3중주라는 점. 정확히 말해 마흔살의 베토벤은 완전히 귀가 멀진 않았다. 약간의 청력이 남아있던 그는 1814년 자신이 직접 피아노를 맡아 이 곡을 초연했다. 당연히 연주는 엉망이었을 터. 베토벤의 친구 루이 슈포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화려했던 비르투오조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포르테에서 어찌나 세게 건반을 두드렸는지, 피아노 현이 덜거덕거릴 정도였다.” 이것이 ‘피아니스트’ 베토벤의 마지막 연주였다. 베토벤은 그날 이후 다시는 공식적 연주회에서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는 피아노 3중주도 더 이상 작곡하지 않았다. 그는 ‘대공’이라는 곡에 이르러 ‘피아노 트리오’라는 장르로 하고 싶었던 말을 다했던 모양이다. 원래 피아노 트리오는 집안이나 살롱 같은 작은 공간에서 주로 연주됐던, 말하자면 여흥적 성격이 강했던 장르. 하지만 베토벤의 ‘대공’에 이르러 그런 관념은 여지없이 깨졌다. 이 곡은 피아노가 리드하는 1악장 첫주제부터 웅장하며, 그 규모는 마지막 4악장까지 흔들림없이 이어진다. 베토벤은 그렇게, 마흔살의 나이에 일찌감치 ‘거장적 완결성’의 경지에 올랐다. 소설 속 호시노의 말처럼 “대단하다”고 할밖에.
하루키가 소설에 등장시켰던 음반은 루빈슈타인, 하이페츠, 포이어만 트리오의 연주(사진). 이른바 ‘백만불 트리오’의 연주다. 코르토, 티보, 카잘스도 이에 비견되는 역사적 연주. 모두 모노 녹음이다. 58년 녹음된 오이스트라흐 트리오의 연주는 스테레오 녹음. 앞선 두 음반보다 좀더 나은 음질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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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1873~1943·사진)는 1918년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조국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 이듬해였다. 그는 특별한 정치적 견해를 밝혔던 적은 없었지만, 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혁명 직후의 러시아를 떠나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차르 군대의 장교였고 어머니도 장군의 딸이었다. 10월혁명 3주 후, 라흐마니노프는 스웨덴 스톡홀름으로부터 연주 요청을 받고는 가족과 함께 기차를 탔다. 그후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스톡홀름 연주회를 마친 그는 이듬해 미국으로 망명, 세상을 떠날 때까지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살았다.
그랬다. 미국은 라흐마니노프의 머릿속에 “끔찍한 나라”로 각인돼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18년부터 그 땅에 발붙이고 살아야 했다. 그는 45세였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 그의 곁에는 러시아를 함께 떠나온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다.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의 생애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낯설고 물선 땅에서 그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물론 예전에도 종종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연주였다. 하지만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이 직접 쓴 곡뿐 아니라 베토벤과 슈베르트, 쇼팽과 그리그까지 연주해야 했다. 당연히 작곡가로서의 활동은 점차 줄어들었고, 미국 망명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라흐마니노프가 완성해낸 곡은 6곡에 불과했다. 그의 생애는 그렇게, 미국으로 망명했던 45세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뉜다.
그렇다면 피아니스트로 ‘전직’했던 라흐마니노프의 존재감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었다. 적어도 1920~30년대의 라흐마니노프는 요제프 호프만과 쌍벽을 이루던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다. 손가락을 쫘악 폈을 때 손의 크기가 자그마치 30㎝에 달했던 그는 건반을 완전히 장악한 채 육중하고 화려한 연주를 선보였고, 콘서트홀의 청중은 그의 초인적 기교에 열광했다고 전해진다. 그에 대해 아르투르 루빈슈타인(1887~1982)은 이렇게 말했다. “황금색 비밀을 간직한 살아있는 피아노 음색은 가슴에서 나왔다. 나는 화려하게 건반을 질주하는 그의 손가락과 흉내내기 어려운 거대한 루바토에 홀려 시름을 잊고 빠져들어 갔다.”
그렇게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얻고 돈도 벌었다. 그는 두 딸에게 프랑스 파리에 출판사를 차려줬고 별장도 구입했다. 하지만 과연 행복했을까? 별로 그랬을 것 같지 않다. 아마도 미국을 지겨워했던 그의 ‘러시아적’ 심성은 여전했을 것이고 작품을 쓰지 못하며 겪어야 했던 작곡가로서의 ‘갈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미국 망명 후 혹독한 연주 일정에 시달리면서 요통과 관절염을 끼고 살았고 늘 피로를 호소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연주가 아직 녹음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최근 국내의 한 음반사에서 ‘라흐마니노프의 예술’(The Art of Sergey Rachmaninov)이라는 음반을 펴냈다. 모두 6장의 CD로 이뤄진 이 앨범은 1919년부터 42년까지 레코딩된 라흐마니노프의 주요 연주를 담았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피아노 협주곡 1~4번’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라흐마니노프 본인이 직접 지휘봉을 들었던 ‘죽음의 섬’과 ‘보칼리제’, ‘교향곡 3번’을 만날 수 있다. 그밖에 본인이 쓴 여러 독주곡을 비롯해 쇼팽의 소나타와 녹턴, 바이올리니스트 크라이슬러와 함께 연주한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소나타 등을 수록했다. 특히 음악평론가 김진묵씨가 단정한 문체로 써내려간 해설은 이 앨범의 또 다른 미덕이다. 자그마치 19쪽 분량으로 라흐마니노프의 생애와 음악을 상세하면서도 명확하게 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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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 |
바로 그때, 엉뚱한 곳을 바라보던 이단아. 그가 바로 에릭 사티(1866~1925)였다. 이 프랑스 작곡가야말로 19세기 끝 무렵의 음악 지형도에서 가장 ‘독특한’ 개성을 보여준 음악가였다. 첫곡은 피아노를 위해 작곡한 짧고 단순한 음악 ‘오지브’(Ogives). 사티가 스무살에 쓴 이 데뷔작은 복잡하고 장대한 음악이 유행하던 당시에 느닷없이 튀어나온 중세 그레고리안 성가 스타일의 ‘단순 음악’이었다. 당연히 청중과 평론가들의 관심 밖이었을 터. 한마디로 말해 음악으로 인정받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파리 음악원을 중도에 때려치운 사티는 프랑스의 음악적 주류사회에 들어설 만한 백그라운드가 전혀 없었고, 카바레와 클럽을 전전하며 피아노 연주로 밥벌이를 하던 가난한 작곡가 지망생에 불과했다. 그러나 ‘단순함’을 향한 사티의 추구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듬해 완성한 ‘3개의 사라방드’, 또 그 이듬해에 작곡한 ‘3개의 짐노페디’에서도 신비하면서도 단순한 선율을 계속 반복했다. 1889년 썼던 ‘6개의 그노시엔느’에서도 마찬가지. 오늘날 ‘짐노페디’와 함께 가장 자주 연주되는 이 음악도 짧은 악절을 쉼없이 반복하다 어느새 스르르 사라진다. 바로 이 단순하고도 흐릿한 존재감, 그것이 바로 1925년 세상을 떠난 사티의 음악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어일 터다.
사티는 자신의 독특한 작법을 고수하면서도, 한편으론 스스로에게 작곡가로서의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닌지 늘 불안해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자신의 작품에 조롱기 가득한 제목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엉성한 전주곡’(1912), ‘정말로 엉성한 개를 위한 전주곡’(1912), ‘말라빠진 태아’(1913) 같은 곡이 그렇다. 그것은 자신의 음악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풍자였을까, 아니면 스스로를 향한 조롱이었을까?
일본 도쿄대 대학원 미학과 교수인 와타나베 히로시(56)가 쓴 <청중의 탄생>이라는 책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사티를 20세기 음악의 방향성을 제시한 선구자로 평가한다. 엄숙한 콘서트홀을 빠져나와 일상의 삶 속에서 구현되는 음악, 바로 그것을 사티가 최초로 구현했다는 게 와타나베의 평이다. 와타나베는 “연주회장에서 연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배경음악으로 흐르도록 작곡된 음악”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사티는 ‘음이라는 타일을 깐 보도’라는 곡을 초연했을 당시, 조용히 음악을 ‘감상’하려는 청중에게 “계속 말하세요. 움직이세요. 음악을 듣는 게 아닙니다!”라면서 화를 내고 돌아다녔다고 전해진다.
19세기 말의 ‘왕따 음악가’였던 사티. 가난한 독신자로 평생을 산 그는 세상을 떠난 지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미니멀 음악’으로 부활한다. 단순한 패턴을 반복적으로 연주하는 미니멀 음악은 60년대에 들어서면서 현대 음악의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잡았고, 프랑스의 영화감독 루이 말은 자신의 영화 <도깨비불>(1963)에서 사티의 음악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와타나베는 앞서 언급한 책에서 “(사티는) 미니멀로 대표되는 현대 음악의 한 경향을 완벽하게 선취하고 있는 음악가”라고 평한다.
‘(1연) 사랑하는 나무들아, 내가 말해주랴?/ 참으로 아름다운 꿈들이/ 아침에 불그스레 내 주위에서 춤출 때/ 예감에 가득차 심었던 나무들아./ (2연) 아, 너희를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이처럼 아름답게 나를 다시 사랑하고/ 순수한 나의 생동력을/ 다시 나에게 불어넣어 주는 나무들아./ (3연) 내 가슴속에 자라나오듯/ 하늘 높이 솟아올라라/ 큰 기쁨과 아픔을 내가/ 너희의 뿌리 속에 묻어 두었으니/ 사랑하는 나무들아, 내가 말해주랴?’ 괴테의 시 ‘사랑하는 나무들아, 내가 말해주랴?’의 전문(全文)이다. 김광규 한양대 독문과 명예교수의 번역이다.
폴란드 출신의 거장 크시스토프 펜데레츠키(76·사진)가 2년 전 작곡했던 ‘교향곡 8번’에 바로 이 시가 등장한다. 이 곡에는 괴테 외에도 아이헨도르프, 헤세, 릴케, 카를 크라우스, 브레히트 같은 시인들의 작품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모두 12개 악장으로 이뤄진 칸타타 풍의 교향곡. 펜데레츠키는 이 곡에 ‘덧없음의 노래’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러나 다만 ‘허무’로 종결되진 않는다. 그가 늘 그래왔듯, 곳곳에서 부활과 희망을 암시한다.
펜데레츠키가 바로 이 곡을 한국에서 직접 지휘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다음날인 30일, 폴란드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한국 초연한다. 지난 27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난 그는 “지금 한국인들이 느끼는 고통을 알고 있다”면서 “특히 유가족들의 비통함이 얼마나 크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해 더이상의 코멘트를 하지 못하는 걸 양해해달라”고 했다.
1933년 폴란드의 남부 도시 뎅비카에서 태어난 펜데레츠키는, 이미 20세기 중반에 세계적 작곡가로 명성을 얻었고, ‘체제에 저항’하거나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음악가로 남다른 평가를 받아왔다. 그는 이에 대해 “폴란드의 비극적 역사가 나를 그렇게 키웠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목격했으며, 외삼촌 한 명은 나치에, 또 한 명은 소비에트에 의해 목숨을 잃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기억과 상처를 ‘아우슈비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분노의 날’(1967)이나 ‘폴란드 진혼곡’(1980) 같은 음악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젊은’ 펜데레츠키는 아방가르드였다. 의미의 전달보다는 형식 파괴와 새로운 어법을 찾는 일에 몰두한 실험주의자였다. 특히 50년대와 60년대 초반의 그는 자신의 음악 속에서 갖가지 ‘음향 도발’을 감행했다. 이를 테면 현악기를 맨손으로 문지르고 두드렸으며, 웃음과 울음, 휘파람 소리를 음악 속에 섞었다. 악기와 인간의 목소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나려고 했던 것일까? 당시 그가 썼던 음악속에서는 타자기 소리, 뱃고동 소리, 플라스틱 깨지는 소리를 비롯해 끌로 유리를 긁어대는 거북한 음향까지 들려온다. 그러다가 펜데레츠키는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방향을 선회했다. 이후 그가 걸어간 길은, 약간 단순화시켜 표현하자면, 독일 풍의 신낭만주의였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 듣는 그의 음악은 주로 이 계통의 작품이다.
이제 노인이 된 그에게 “젊은날의 음악은 어떤 의도를 갖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것도 하나의 저항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 폴란드의 음악학자인 토마제프스키도 그런 평가를 내린 적이 있다. 그는 펜데레츠키의 아방가르드에 대해 “(유일한 정답으로 주어졌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당시의 ‘거대한 거짓말’에 대한 반발. 어린 시절의 충동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압제로부터 예술가를 해방시키려 했던 열망”이라고 평했다.
그렇다면 외견상 180도쯤 방향을 튼 것으로 보이는 지금의 음악은 무엇인가? 펜데레츠키는 그것을 “뒤로 돌아서서 문을 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문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다들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며 “이제 내 음악적 영감은 ‘전통’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 문에서 나온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한국 초연하는 ‘덧없음의 노래’도 그렇다. 이 곡에서도 역시 말년의 펜데레츠키가 재발견한 ‘전통적 서정’이 힘을 발한다. 음반으로는 안토니 비트가 지휘한 바르샤바 필하모닉의 연주가 낙소스 레이블로 출시돼 있다. 가격도 저렴하다. 사진 김세구 선임기자
1. Symphony No. 8, "Lieder der Verganglichkeit" (Songs of Transience)
2. Dies irae (진노의 날) / 3. Aus den Psalmen Davids (다비드 시편에서)
12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이 칸타타 풍의 교향곡은 19/20세기 독일 시집인 '덧없음의 노래'에 기초한 작품으로 인생무상과 부활을 음악으로 표현한 곡이다. 아우슈비츠 희생자들을 기리는 방대한 스케일의 오라토리오 '진노의 날'과 세계음악계에 작곡가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작품인 '다비드 시편에서'가 함께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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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와 변주]극과 극의 ‘광포와 고요’‘레퀴엠’(Requiem)은 죽은 이의 안식을 기원하는 음악이다. 애초에 그것은 가톨릭 미사에서 불리던 전례용 음악이었고, 악기 반주 없이 사람의 목소리로만 이뤄졌던 아카펠라 음악이었다. 첫 곡인 ‘입당송’의 라틴어 가사는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옵소서’(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로 시작한다. 그래서 첫머리에 등장하는 ‘레퀴엠’이라는 단어가 이 음악양식 전체를 일컫는 이름이 됐다. ‘안식’이라는 뜻이다.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레퀴엠은 서양음악의 한 축을 이루는 중요한 양식이었다. 수많은 작곡가들이 자신들의 창작 목록에 레퀴엠을 올렸다. 그중 오늘날 가장 애청되는 것은 모차르트와 베를리오즈, 베르디, 포레 등의 레퀴엠이다. 또 독일어 가사로 쓰여진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도 빼놓을 수 없는 걸작으로 꼽힌다.
그중에서도 베를리오즈(사진)와 포레의 레퀴엠이 보여주는 극단적 대비는 흥미롭다. 50년을 사이에 두고 각각 쓰여진 이 두 작품은 한마디로 말해 ‘극과 극’이다. 베를리오즈의 레퀴엠이 화려함을 뛰어넘어 광포할 정도로 음악을 몰아붙이는 것에 반해, 포레의 그것은 고요한 명상의 세계로 죽은 이의 영혼을 인도한다. 음악적 규모에서도 베를리오즈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인원이 500명에서 1000명에 이를 만큼 웅장함을 구현했지만, 포레는 작은 시골 성당에서 울려퍼져도 어울릴 것 같은 소박한 규모의 레퀴엠을 남겼다. 둘 다 프랑스 작곡가였던 이들은 어떻게 이리도 다른 레퀴엠을 썼을까.
베를리오즈는 음악뿐 아니라 삶에서도 지독한 낭만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프랑스 사람이었지만 정신은 독일 낭만주의에, 특히 베토벤에 그 뿌리를 대고 있었다. 그는 ‘환상’이라는 표제를 붙여 마치 한 편의 판타지와도 같은 교향곡을 썼던 ‘음악 이야기꾼’이었고, 짝사랑한 여인에게 계속 거부당하자 그녀를 아예 자신의 교향곡에 ‘마녀’로 등장시킬 정도로 망상증을 지닌 캐릭터이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 음악사회의 주류에 대한 열등감도 있었다. 그는 23세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해 뒤늦게 음악 공부를 시작했으며 피아노를 아예 칠 줄 몰랐다. 그런 베를리오즈에게 들어온 프랑스 정부의 작곡 의뢰. 1830년 일어났던 7월혁명의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레퀴엠을 써달라는 청탁은 30대 초반의 그를 고무시켰을 것이다. 그리하여 1년 만에 작곡을 끝낸 레퀴엠. 당연하게도 그 음악 속에서는, ‘뭔가 보여주겠다’는 베를리오즈의 의지, 혹은 욕망이 불타오른다.
포레는 어땠던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활약했던 그는 성당의 오르간 주자였다. 그의 레퀴엠은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평화로운 안식을 노래한다. 그는 ‘죽음의 자장가’로도 불렸던 자신의 레퀴엠에 대해 “죽음이란 고뇌에 차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마음으로 다음 세상을 맞는 것”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 의 정신을 지배했던 것은 바로 가톨릭적 세계관. 게다가 레퀴엠을 쓸 당시, 그의 가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포레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직후 이 곡을 썼으며, 몇해 전에는 어머니를 먼저 잃어야 했다.
포레의 레퀴엠은 전체가 7곡으로 이뤄진 간결하고 명상적인 음악. 특히 소프라노 독창으로 이뤄진 4번째 곡 ‘자비로운 예수’가 천상의 노래처럼 아름답다. 포레는 그렇게 평화로운 안식의 내세관을 레퀴엠에 담았다. 미셸 코르보가 성 피에르 오리앙 성가대와 베른 심포니를 지휘한 녹음이 애호가들의 오랜 사랑을 받아온 음반(Erato). 앞서 언급한 베를리오즈의 레퀴엠으로는 콜린 데이비스가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지휘한 음반(필립스)과 샤를 뮌슈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합창단을 지휘한 음반(DG)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하이파이 오디오로 이 곡을 들을라치면, 압도적인 음향적 쾌감에 온몸이 떨릴 정도다.
영화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의 삶을 대비시키면서 펼쳐진다. 물론 그 ‘대비’가 때때로 극단적이어서 현실감이 떨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인물과 상황 전개라는 것이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으면 ‘보는 재미’가 적은 법 아니겠는가. 이 영화는 두 인물의 극적 대비와 함께 그들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미묘한 조명, 수첩에 적어두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는 아포리즘적 대사 등으로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물론 <세상의 모든 아침>은 허구다. 사실에 대한 고증보다,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라는 추측과 상상으로 두 음악가의 삶을 재구성했다.
20세기의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1930~2004·사진). 그도 영화 속의 생트 콜롱브처럼 은둔의 삶을 살았다. 그는 슈투트가르트 가극장의 음악감독직을 사임했던 1973년부터 세상을 떠나던 2004년까지, 적어도 생애의 마지막 30년간 어디에도 몸을 담지 않았던 ‘은둔의 프리랜서’였다. 그리고는 아주 가끔씩, 그것이 빈필하모닉이든 베를린필하모닉이든 세계 정상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특별한 명연’을 남기곤 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원했을 때 어느 오케스트라든 지휘할 수 있었던 ‘공인된’ 명인이었다.
이 ‘은둔형 마에스트로’는 인터뷰를 싫어했다. 음반 녹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녹음을 “공포스럽다”고 말하며 저어했다. 이 때문에 극히 소량의 음반만을 남겼으며, 그것들은 당연히 ‘희소가치’가 더해지면서 명반의 반열에 이름을 속속 올렸다.
클라이버가 보여준 ‘은둔’의 절정은 언제였던가? 그것은 베를린필하모닉의 종신지휘자였던 ‘황제’ 카라얀이 세상을 떠난 89년에 찾아왔다. 당시 음악계의 호사가들은 클라이버가 당연히 그 뒤를 이을 것이라고 점쳤지만, 그는 이 ‘영예로운 포디엄’의 주인이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돌이켜보자면 그것은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던가? 클라이버는 그렇게 자신의 노선을 끝까지 지켰고, 덕분에 카라얀과는 또 다른 ‘지휘의 신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2004년 클라이버가 세상을 떠난 후, 미국의 음악평론가 헨리 포겔은 이렇게 썼다. “이상한 수수께끼의 주인공. 하지만 부인할 수 없이 세계 음악계에 우뚝 솟은 지휘자. 가장 위대한 지휘자라고 추앙받으면서도 거의 지휘를 하지 않았던 사람.”
‘은둔’의 삶을 시작했던 73년, 클라이버가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오페라단을 지휘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를 연주했던 음반이 최근 국내에 수입됐다. 그동안 DVD로, 혹은 해적판 음반으로 종종 접할 수 있었던 실황이다. 하지만 이번에 수입된 음반은 오스트리아의 ‘오르페오’ 레이블에서 원본 마스터를 SACD로 재생해낸 공식 음반. 지난해 말부터 해외 사이트를 통해 개별적으로 구입 해온 애호가들도 적지 않았지만, 이제는 국내 음반가게 어디서라도 쉽게 구할 수 있게 됐다.
음질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다. 지금까지 들었던 클라이버의 그 어떤 ‘장미의 기사’보다도 생생하다. 일본의 음악평론가 기요미 쓰토시는 이 음반에 대해 “오케스트라가 살아 있는 것처럼 요동친다”는 평을 내놓았다. 물론 약간의 ‘주례사’ 혐의가 있긴 하지만, 사실을 크게 벗어난 평가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클래식 초심자여서 ‘장미의 기사’ 전곡을 듣는 것이 좀 버겁다면, 클라이버가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 4번과 5번, 7번 등을 권한다. 브람스의 교향곡 4번도 클라이버와의 첫 만남으로 적절하다.
“This performance from 1973 is notable for its extraordinary textural clarity, in this densest of scores, and its rhythmic vitality. The vocal hero of the occasion is Brigitte Fassbaender as Octavian, her rich and creamy voice bringing her presence vividly before us. Lucia Popp is a classic Sophie, too, pure of voice but determined of purpose.” ----- BBC Music Magazine, May 2009 ****
[주제와 변주]서늘한 그늘의 아름다움
처음에는 그래서 피레스의 연주를 들었다. 아마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예쁘고 지적인 외모, 게다가 정갈하면서도 슬퍼보이는 모습에 반해서 피레스의 음반에 자꾸 손이 가던 남자들이 한둘이었겠는가. 70년대의 피레스는 앞서 말한 ‘에라토’에서 모차르트의 중·후기 피아노 협주곡들을 녹음했고, 슈베르트와 쇼팽의 음악을 녹음했다. 모두 LP 시절의 녹음들이다. CD로는 구하기 쉽지 않다.
일본 작가 다나자키 준이치로가 쓴 <그늘에 대하여>라는 책이 있다. 국내에서도 2005년 고운기 시인의 번역으로 출판됐다. 작가 준이치로는 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추천된 이래, 심장마비로 사망한 65년까지 해마다 후보로 거론됐던 일본 문학의 거봉. 그는 사회에서 동떨어진 개인을 그려내는 데 몰두했고, 퇴폐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낭만적 경향을 보인 작가였다. 그는 이 책에서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것’을 ‘음예’라고 이름짓는다. ‘안채에서 떨어져 신록의 냄새나 이끼 냄새가 나는 정원의 나무와 수풀 뒤에 마련돼 있’는 것. 준이치로는 그 음예야말로 일본풍(日本風)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요소라고 말하면서, 재래식 화장실과 다다미방, 그림을 걸거나 꽃꽂이를 하려고 벽 한쪽에 만들어두는 도코노마(床の間), 연극 가부키와 인형극 노, 심지어는 옛 여인의 화장법까지 들여다보면서 음예의 미학을 탐구한다. 그래서 책의 원제가 <음예예찬>이다. 한국어로 번역·출판되면서 ‘음예’가 ‘그늘’로 바뀌었다.
피레스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그 ‘음예’가 떠오른다. 아르헨티나 태생의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뜨거운 태양처럼 화려하게 타올랐다면, 세 살 아래의 피레스는 서늘한 그늘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연주자였다. 그는 ‘건반을 질주하는’ 아르헤리치에 비교하자면 ‘달빛’에 가까웠다. 아르헤리치가 스케일 크고 호방한 연주를 보여줬던 반면에, 선천적으로 몸집과 손이 작은 피레스는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로 불리며 충성도 높은 ‘일부’ 애호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물론 어떤 이들은 피레스의 템포 설정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강약의 대비가 자의적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레스가 89~90년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내놨던 모차르트 소나타의 가치를 부인하긴 어렵다. 피레스는 앞서 언급한 프랑스 ‘에라토’에서도 같은 곡을 녹음했던 적이 있지만, 40대 중반의 나이에 도이치그라모폰에서 녹음한 음반이 한층 더 호평받는다.
쇼팽은 그의 또 다른 장기였다. 하지만 그는 4년 전 슈베르트의 곡들을 녹음한 이후 심장병과 싸우며 한동안 레코딩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최근 국내에 라이선스로 나온 그의 음반이 반갑다.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한 피레스가 다시 연주하는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을 중심으로 왈츠와 마주르카, 첼리스트 파벨 곰지아코프와 협연한 ‘첼로 소나타’ 등을 담았다. 쇼팽이 1844년부터 1849년 사이에 작곡한 곡들, 말하자면 말년작들이다. 심장병과의 싸움에서 마침내 벗어난 피레스는 쇼팽의 말년작에서 어떤 그늘을 본 것일까. 그는 이 녹음에 대해 “쇼팽의 마지막 시기를 산책하는 마음으로 연주했다”고 말했다. 어느덧 65세가 된 피레스의 얼굴에 적잖게 잡힌 주름살, 하지만 경이롭게도, 그의 눈빛은 여전히 청초하다.
아직 찰스 디킨스(1812~1870)가 등장하기 전이었다. 디킨스가 <올리버 트위스트>를 통해 템스강 인근에 다닥다닥 붙은 더럽기 짝이 없는 집들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극빈을 묘사했던 것은 1830년대의 일이었다. 하지만 런던의 ‘빈부 풍속도’는 이미 18세기 후반에 자리잡은 풍경화였다. 템스강의 하역 인부와 나이 어린 굴뚝 청소부들은 당시 런던의 가난한 계층을 상징하는 존재들이었다. 특히 ‘런던 상인’의 집에서 굴뚝을 닦던 청소부는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었다. 그래야 굴뚝을 드나들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많은 아이들이 굴뚝에서 그을음을 닦아내다가 화상을 입었고, 어떤 아이들은 연기에 질식해 죽었다. 그래서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굴뚝 청소부’(The Chimney Sweeper)라는 시는 얼핏 낭만적 풍경화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참상’의 기록이다.
바로 그 18세기 후반, 런던에서 공연예술이 하나의 ‘산업’으로서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런던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신흥 부르주아지가 공연예술의 새로운 수요층으로 떠올랐고, 음악회를 비롯해 인형극과 서커스 등이 도심 곳곳에서 공연됐다. 당연히 이 흐름을 주도했던 흥행업자들이 등장했을 터. 오늘날로 치자면 ‘공연기획사’ 혹은 ‘매니지먼트사’로 불리는 직종이 바로 이 무렵에 출현했던 셈이다. 이 공연예술의 산업화는 파리를 비롯한 다른 도시에서도 진행됐지만 런던만큼 발 빠르게 시장을 키워간 도시는 없었다.
그런 흥행업자 가운데 요한 페터 잘로몬(1746~1815)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독일인이었다. 애초에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작곡도 가끔 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연주나 작곡보다 장사 쪽에 한층 수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1781년에 ‘물 좋은’ 런던으로 건너와 연주회를 기획해 표를 팔기 시작했고, 단숨에 흥행업자로 성공했다.
작곡가 하이든을 런던으로 불러들인 사람이 바로 그였다. 당시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하인 음악가’로 30년을 봉직하다 1790년 후작이 사망하자 겨우 족쇄에서 풀려났던 상태. 그런 하이든을 잘로몬이 손짓했다. 하이든의 입장에서 그것은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 하지만 음악사는 하이든의 ‘욕망’을 기록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그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보다 규모가 크고 훈련이 잘 된 영국 오케스트라와 연주하기를 원했던 것으로 기록한다. 어쨌든 하이든은 1791년 새해 첫날 런던에 발을 내디뎠고, 흥행업자 잘로몬의 요청에 따라 12곡의 교향곡을 작곡해 초연했다. 교향곡 93번부터 104번까지. 이른바 ‘잘로몬 교향곡’ 혹은 ‘런던 교향곡’으로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이다.
그것은 모차르트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6개의 교향곡과 함께 ‘고전주의 교향곡의 완성’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오늘날 빈번히 연주되는 곡은 94번 ‘놀람’과 96번 ‘기적’, 100번 ‘군대’, 101번 ‘시계’, 103번 ‘큰북 연타’, 104번 ‘런던’ 등. 하이든이 이전에 작곡한 교향곡에 비해 규모가 한층 커졌고, 불특정 다수의 청중을 염두에 둔 듯 대중적 선율이 자주 등장한다. 아울러 당시 런던에서 부와 인기를 얻었던 하이든의 고조된 마음을 대변하듯 경쾌하고 활발한 에너지감도 넘친다.
하지만 하이든의 런던 교향곡을 들으면서 어린 굴뚝 청소부의 퀭한 두 눈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신흥 부르주아지들이 연주회장에서 음악의 즐거움을 만끽하던 그 순간, 런던의 또 다른 곳에서는 키 작은 아이가 굴뚝을 닦고 있었다. 그것이 18세기 후반, 런던의 두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음악 칼럼니스트’라고 부르는 것도 난감하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이리도 음악 칼럼니스트들이 많아졌을까. 아마도 2000년대 접어들면서부터인 것 같다. 각종 공연장 및 문화재단에서 간행하는 잡지에 수많은 음악 칼럼니스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양적’ 민주화는 한국의 공연 문화가 한 번쯤 거쳐야 할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많은 칼럼니스트들 중에는 꽤 읽을 만한 글을 쓰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 얘기가 그 얘기인 경우가 흔하다. 게다가 남의 글을 ‘슬쩍’ 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말의 앞뒤를 바꿔놓은 채 시침을 뚝 떼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예 ‘복사’와 ‘붙여넣기’로 자신의 글을 완성하기도 한다. 솔직히 말해 필자도 몇번인가 복사를 당했다. 최근에도 어떤 평론가와 교수께서 ‘실례’를 하셨다. 어쨌든 이렇게 정신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70년대부터 글을 써온 원로를 ‘음악 칼럼니스트’라고 칭하는 것도 왠지 께름칙하다.
그렇게 호칭 문제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안동림씨가 며칠 전에 한 권의 책을 냈다. 20세기 명지휘자 34명의 음악적 생애와 특징을 비롯해 그들이 남긴 명연주까지 소개하고 있는 <불멸의 지휘자>라는 책이다. 월간 ‘객석’에 3년 동안 써온 원고를 500쪽 가까운 분량의 단행본으로 묶었다. 그는 “내 글엔 깊이가 별로 없다”며 특유의 어린애 같은 웃음을 터뜨리곤 하지만,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만한 생산력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이미 쉽지 않은 일. 그야말로 ‘노익장’이라고 부를 만한 의욕과 기력이다.
지난달 30일 <불멸의 지휘자>를 펴낸 출판사가 출간기념 간담회를 마련했다. 대학로의 한 카페였다. 기자들이 7, 8명쯤 참석했고, 이날 안씨는 기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매우 드문 경우다. ‘까칠한’ 기자들이 어떤 개인의 출판기념회에서 박수를 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마침 그 자리에는 80년대 ‘음악동아’ 편집장이었던 이순열씨(74)도 함께 했다.
“요즘 지휘자들은 개성이 없어. 음악이 다 비슷비슷해.” 스스로를 “그냥 음악 애호가”로 고집하는 그는 <불멸의 지휘자>를 써낸 이유를 그렇게 말했다. 토스카니니부터 주세페 시노폴리까지, 이미 세상을 떠난 34명의 거장들을 다시 불러내는 까닭이 “요즘 음악들은 평준화돼서, 도통 재미가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점심 식사 후 다른 카페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같은 주제의 얘기를 이어갔다.
“예술의 본령은 개성인데, 문명 자체가 ‘기계주의’로 자꾸 흘러가면서 음악도 개성을 잃었어. 지휘자들의 광휘도 사라졌어. 이제는 지휘라는 ‘기능’만 남았어.”
그는 그렇게 과거의 명장들을 그리워했다. “브루노 발터와 푸르트뱅글러, 크나퍼츠부슈”를 특별히 좋아하는 지휘자로 꼽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정작 그리워하는 게 꼭 옛날 지휘자들일 뿐일까. 그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니, 그의 속마음에 자리한 것은 사람 냄새가 살아 있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가 말했다. “문 기자, 여기 이 선생이 경기도 퇴촌에서 농사를 짓잖아? 올해는 참외를 심었대요. 7월 말에 수확한대. 직접 만든 퇴비를 주기 때문에 참외가 아주 실할 거라구. 어때 이 선생? 우리가 놀러가면 참외 좀 나눠줄 거요?” 그러자 이순열씨가 반색을 했다. “얼마든지 오시구려. 어디 참외뿐인가, 문 기자가 온다면 옛날 LP도 좀 나눠드리지.”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는 쇼팽의 친구였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마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일 터. 1830년 파리에서 일어났던 7월혁명을 묘사한 그림이다. 잔다르크를 연상시키는 여인이 가슴을 드러낸 채 삼색기를 들고 시위 군중을 이끌고 있는 이 유명한 그림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들라크루아는 이 작품에 ‘카메오’로 등장하기도 한다. 자유의 여신 바로 옆, 검은 모자에 검은 코트를 입고 장총을 든 채 전진하는 청년이 바로 들라크루아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1830년이었다. 파리 시민들이 왕정복고에 반대해 봉기를 일으키고 들라크루아가 그것을 화폭에 옮기던 바로 그 해에, 스무살의 쇼팽은 바르샤바에서 고별연주회를 펼친 후 조국 폴란드를 떠났다. 그리고 생애의 나머지 대부분을 ‘파리의 예술가’로 살았다. 그것은 쓸쓸한 이방의 삶이기도 했다. 쇼팽은 그 아름답고 외로운 도시에서 12살 위의 선배이자 친구인 들라크루아를 만났다. 우정은 진실하고 깊었다. 1849년 쇼팽이 병상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창백한 이마를 어루만져주던 이도 바로 들라크루아였다. 한때 사랑을 불태웠던 조르쥬 상드는 곁에 없었다. 같은 해 10월17일 쇼팽이 결국 세상을 떠나자, 들라크루아는 그의 장례식을 주도하기도 했다.
우정의 증표는 또 있다. 들라크루아가 남긴 쇼팽의 초상화(사진). 쇼팽의 내면을 누구 못지않게 이해했던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낭만적 화풍을 가미해 벗의 얼굴을 화폭에 담았다. 그림은 1838년작이며 당시 쇼팽은 28세였다. 들라크루아의 눈에 비친 쇼팽은 어땠는가. 그것은 결코 ‘유약한 쇼팽’이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빗어넘긴 곱슬머리에 어딘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반항적 눈매, 게다가 고집스러워 보이는 매부리코…. 들라크루아의 눈에 비친 쇼팽은 그렇게, 거칠고 고집스러운 남자였으며 격렬하고 고독한 예술가였다.
그것이 쇼팽에게로 가는 또 하나의 열쇠일 것이다. 쇼팽의 음악은 센티멘털하고 여성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그의 음악을 다섯곡만 들어도 무너질 ‘편견’일 터이다. 쇼팽의 음악에는 조국 폴란드의 민속음악, 특히 춤곡에서 체득한 ‘육체성’이 꿈틀거리며, 조국의 해방운동이 러시아의 무력에 짓밟힌 것을 참담하게 바라봐야 하는 청년의 분노도 담겨 있다. 게다가 쇼팽이 파리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시절, 당대의 예술적 주류는 혁명적 낭만주의였다. 그것이 쇼팽의 격렬한 낭만성을 한층 추동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쇼팽의 거친 숨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가. 일단 슈만이 “거칠고 독창적”이라고 평했던 ‘발라드 1번’을 들어보자. 하지만 이 곡은 연주자에 따라 격렬함보다 부드러움 쪽에 방점을 찍는 경우도 흔하다. 이를테면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그렇다. 그는 매우 균형잡힌 피아니스트임에 틀림없지만, ‘발라드 1번’의 고동치는 맥박을 전해주지 못해 아쉽다. 차라리 호로비츠의 1960년대 녹음(Sony)이나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87년 녹음(DG)에 한 표를 던진다.
“가장 격렬하고 뜨거운 쇼팽의 음악은 뭘까?” 친분 있는 몇 명의 피아니스트들에게 그렇게 물었다. 대부분 쇼팽의 음악적 원숙기에 쓰여진 소나타 2번과 3번을 꼽았다. 소나타 2번은 3악장에 ‘장송행진곡’을 배치해 ‘장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곡. 특히 1악장 첫 주제 부분에서 반주처럼 등장하는 저음부의 맥박이 뜨겁다. 호로비츠의 62년 녹음,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74년 녹음(DG)을 권한다. 쇼팽이 세상을 떠나기 5년 전 작곡한 소나타 3번은 규모가 웅장하고 구성도 치밀한 걸작. 마치 망치로 머리를 때리듯이 시작하는 1악장 첫 주제의 에너지가 압도적이다. 어느덧 60대 후반에 이른 아르헤리치가 65년 쇼팽콩쿠르 우승 직후에 내놨던 음반(EMI), 혹은 2년 후의 재녹음(DG)은 그 격렬한 에너지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Chopin Ballad No. 1 ~ Zimerman Chopin Piano Sonata No. 2 ~ Vladimir Horow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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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질병·육신의 고통이 찬란한 모차르트를 남기다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
얼마나 아팠을까. 클라라 하스킬이 연주하는 모차르트 협주곡을 들을 때마다, 그녀가 겪었을 육신의 고통이 함께 떠오른다.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찾아왔던 세포경화증. 아리땁던 그녀는 결국 곱사등이가 되고 말았다. 척추는 뒤틀리고 어깨뼈는 주저앉았다. 하스킬은 세상을 떠나던 65세까지, 그렇게 비틀린 몸으로 피아노를 쳤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적잖은 통증이 찾아왔을 게다. 실제로 하스킬은 가까운 이들에게 연주의 고통을 종종 토로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1956년 브장송 페스티벌에서 모차르트 협주곡을 연주하기 직전, “리사이틀과 협주곡은 무서워”라는 메모를 남겼다. 또 파울 자허의 지휘로 스튜디오에서 모차르트 협주곡을 녹음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도 그녀는 “무섭고 끔찍해!”라는 메모를 남겼다.
하스킬이 모차르트에 특별히 집중했던 것도 신체적 장애 탓이 컸을 터. 어린 시절의 그녀는 브람스, 리스트, 쇼팽, 무소르그스키, 라흐마니노프 등을 연주했으며 현대작품으론 바르토크, 힌데미트까지 섭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7년간의 칩거 끝에 불구의 몸으로 다시 돌아온 하스킬에게 ‘방대한 레퍼토리’는 무리였다. 그녀는 말없이 운명을 받아들인 채 모차르트에 집중했다. 물론 슈만의 곡을 비롯해 바이올리니스트 아르투르 그뤼미오와 함께 연주한 베토벤의 소나타 등 명연도 두루 선보였지만, 오늘날 하스킬의 ‘유산’을 대표하는 것은 역시 모차르트 음반들이다. 특히 필청음반으로 꼽히는 것은 세상을 떠난 60년 녹음했던 ‘피아노 협주곡’ 20번과 24번(필립스). 이고르 마르케비치가 지휘하는 콩세르 라무뢰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다. 두 곡을 굳이 비교하자면, 20번보다 24번이 더 뛰어나다는 평가가 많다.
만약 오래 전부터 하스킬을 사랑해온 애호가라면 최근 프랑스 ‘이나(INA)’에서 내놓은 미발표 음원들을 놓쳐선 안될 성싶다. 프랑스의 국영 라디오방송국 산하 레이블인 ‘이나’는 자료실의 먼지 더미 속에서 때때로 귀한 음원들을 건져올린다. 지금까지 내놓은 음반 수가 극히 적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LP나 CD를 복각한 음반이 아닌 애초의 녹음이어서 그 가치가 신선하다.
이번에 나온 ‘Mozart, 4 Concertos’는 두 장의 CD로 이뤄졌다. 마르케비치가 프랑스 국영 라디오방송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9번과 앙드레 클뤼탕스가 같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협연한 24번을 수록했다. 모두 55년 실황이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 하스킬이 두려움을 토로했던 56년 브장송 페스티벌 실황도 담겼다. 협주곡 19번이다. 이 실황은 프랑스의 마이너 음반사인 ‘프낙’에서 LP로 출시된 적도 있으니, 정확히 말해 세상에 첫선을 보이는 녹음은 아니다. 음질도 스튜디오 레코딩에 비해 건조하고 거칠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매끄러운 음질을 위해 연주의 디테일을 깎아먹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불구의 하스킬은 2차대전을 겪으며 또 한번의 고비를 맞는다.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인이었던 하스킬은 나치를 피해 남프랑스로, 스위스로 떠돌아야 했다. 당시 그녀는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며 공포에 사로잡혀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그 와중에 늘 두통에 시달렸고 두 눈도 점차 안 보이기 시작했다. 시신경에 생긴 종양 탓이었다. 하스킬은 종전 후에야 한 시골 의사에게 종양 제거 수술을 받고 두통과 실명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으며, 얼마 후 액상 프로방스 페스티벌에 참가해 모차르트의 협주곡 20번을 연주했다. 48년 7월25일. 그 실황이 바로 이번 음반 마지막 곡으로 담겨 있다.
60년은 하스킬의 마지막 해였다. 12월1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있었던 바이올리니스트 그뤼미오와 협연은 대성황이었다. 객석은 매진됐고 보조의자까지 들여놓아야 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다음 일정은 일주일 후 벨기에 브뤼셀. 하지만 그것은 성사되지 못했다. 같은달 6일 브뤼셀 역에 도착한 하스킬은 계단을 내려가다 발을 헛디뎌 넘어졌고, 혼수를 헤매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감고 말았다. 의식불명에서 잠시 깨어난 그녀는 곁에 있던 동생에게 “아무래도 내일 연주는 어려울 것 같구나. 그뤼미오씨에게 미안하다고 전해다오”라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프고 고단했던 65년. 하지만 그녀의 모차르트는 여전히 찬란하다.
Mozart Violin Sonata K526 ~ Grumiaux and Haskill
협주곡 9번: 프랑스국영라디오방송오케스트라 , 지휘-이고르 마르케비치
1955년 6월 8일 연주 (로잔 Beaulieu 극장) / Piano Concerto No.9 in E flat, K.271 - "Jeunehomme"
Orchestre National de la radio-télédiffusion française / Direction Igor Markevitch
협주곡 19번: 컨서바토리 컨서트 오케스트라, 지휘-예르지 카틀르비치
1956년 9월 6일 연주 (브장송 시립극장) / Piano Concerto No. 19 in F major, K. 459
Orchestre de la Société des Concerts du Conservatoire / Direction Jerzy Katlewicz
협주곡 24번: 프랑스국영라디오방송오케스트라, 지휘-앙드레 클뤼탕스
1955년 12월 8일 연주 (파리 샹제리제 극장) / Piano Concerto No.24 in C minor, K.491
Orchestre National de la radio-télédiffusion française / Direction André Cluytens
협주곡 20번: 컨서버토리 카데 오케스트라, 지휘-에르네스트 부르
1948년 7월 25일 연주 (액상 프로방스 페스티벌 실황, 미공개 레코딩) / Piano Concerto No.20 in D minor, K.466
Orchestre des Cadets du Conservatoire / Direction Ernest B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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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면서도 낭만적인 카리스마
마렉 야노프스키의 브람스 교향곡
지휘자 마렉 야노프스키 |
<베토벤 바이러스>의 주인공이었던 강마에의 실제 모델은 루마니아 태생의 지휘자 세르지우 첼리비다케(1912~1996)라는 ‘설’이 있다. 그러고 보니 “똥덩어리”로 대표되는 강마에의 독설은 첼리비다케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푸르트뱅글러가 세상을 떠난 후 카라얀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떠올랐던 첼리비다케는 실제로 ‘욕설’에 가까운 험담을 서슴지 않았던 괴팍한 성품의 지휘자였다. 카라얀이 보여준 ‘정치적 세련됨’에 견준다면, 첼리비다케는 길들일 수 없는 한 마리 야생마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셈이다.
그의 ‘독설 어록’에서 특히 유명한 것들은 다른 지휘자들에 대한 혹평이다. 그런데 그것은 참으로 그럴 듯하게 적확해서 무릎을 치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그는 카라얀에 대해 “유능한 비즈니스맨이거나 귀가 안 들리는 인간”이라고 쏘아붙였고, 리카르도 무티에 대해서는 “재능은 있지만 무식한” 지휘자라며 폭언을 퍼부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에게도 “3주 동안 굶으면서 견딜 수는 있지만 3시간 동안 아바도의 연주를 들으면 심근경색이 생길 것”이라고 독설을 내뱉었다. 또 지휘자 카를 뵘을 “감자 포대”, 그보다 한 세대 앞의 거장이었던 토스카니니를 “음표 공장”이라고 평하며 예술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상의 ‘어록’은 안동림씨가 얼마 전 펴낸 <불멸의 지휘자>(웅진지식하우스)를 참조했음을 밝힌다.
이 안하무인의 카리스마. 알고 보면 첼리비다케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 욕을 얻어 먹은 토스카니니(1867~1957)도 사실은 한술 더 뜬 ‘폭군’이자 독설가였다. 그는 리허설 도중 성질을 부리며 지휘봉을 부러뜨렸고 단원들에게 악보를 던지기 일쑤였다. 악보뿐 아니라 지휘봉도 던졌다. 한 번은 단원 한 명이 지휘봉에 눈을 찔려 소송을 벌이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또 그는 최고의 권력자 무솔리니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반골’이었다. 그는 라 스칼라의 지휘자로 재임하던 15년간 파시스트의 당가(黨歌)였던 ‘조비네차’(Giovinezza, 청년)를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무솔리니와 그의 추종 세력들에게 늘 눈엣가시였다. 결국 1931년 테러를 당한 토스카니니는 이탈리아를 완전히 떠나 무솔리니가 죽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았다.
암스테르담 콘체르트헤보우를 50년간 지휘했던 빌렘 멩겔베르크(1871~1951)는 어땠는가. 바그너와 브루크너에게 평생을 전력 투구했던 한스 크나퍼츠부슈(1888~1965)는 어땠는가. 그들도 모두 카리스마형 지휘자의 표상이었다. 정치적 이념의 차이, 혹은 리허설을 오래 하거나 짧게 하는 등의 몇몇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호통 지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장들이었다.
올해 상반기에 인터뷰한 음악가들 중에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이는 폴란드 출신의 지휘자 마렉 야노프스키(70·사진)였다. 그는 화합을 중시하는 민주주의형 지휘자들이 대세를 이룬 오늘날에도 여전히 카리스마를 휘두르는 지휘자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오페라극장의 도제 시스템 속에서 성장한 카리스마형 계보의 끄트머리쯤에 놓이는 지휘자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역시 대답에 거침이 없었다. “단원들에게 잘 보이려고 대화를 많이 나누는 건 쓸데없는 짓입니다. 지휘자는 모름지기 단원들을 압도하는 해석력을 갖춰야 합니다.”
야노프스키의 장기 가운데 하나는 브람스가 작곡한 네 곡의 교향곡일 터. 네덜란드 ‘펜타톤’(Pentatone) 레이블에서 2년 전부터 녹음해 발매해온 브람스 교향곡 1~4번 전곡이 얼마 전 국내에 수입됐다. 올해 초 그가 베를린방송 교향악단을 이끌고 내한해 선보였던 곡도 브람스 1번이었다. 펜타톤에서 내놓은 음반에서는 피츠버그 심포니의 지휘봉을 들었다. 해석은 내한연주 때와 대동소이. 음 하나 하나가 매우 정련됐고 악기들 사이의 균형감도 빼어나다.
그의 연주는 과거의 거장들처럼 감정을 다소 과잉시켜 두꺼운 음을 뽑아내지 않지만, 그렇다고 최근의 분석적 해석처럼 골격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연주도 아니다. 굳이 설명하자면 그 중간쯤 되는 해석 아닐까. 정확하면서도 노래의 낭만이 살아 있는 연주. 다만 펜타톤의 엔지니어는 음의 모서리를 약간 다듬어 부드러운 맛을 추가한 듯하다. 덕분에 실제 연주에 비해 강렬한 맛은 다소 줄었다. 그래도 이 음반이 브람스 애호가들의 컬렉션에 추가되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내한 무대에서 시종일관 무뚝뚝한 표정으로 브람스를 지휘하던 야노프스키. 연주를 다 마친 후, 비로소 딱 한 번 미소짓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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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와 변주]모차르트 ‘클라리넷 5중주’
모차르트가 생애 마지막 무렵에 가장 사랑했던 악기 가운데 클라리넷을 빼놓을 순 없다. 기악 음악의 발전은 악기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게 마련. 목관악기 클라리넷은 모차르트가 맹활약을 펼치던 18세기 후반에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정확한 음정과 풍부한 표현력, 적절한 음량을 갖춘 악기로 점차 발전하면서 오케스트라 속에도 클라리넷 연주자의 자리가 마련되기에 이른다.
그렇게 음악성을 차츰 인정받아가던 클라리넷은 모차르트의 말년에 이르러 악기로서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부여받는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이었던 1789년 썼던 ‘클라리넷 5중주 A장조’. 기존의 현악 4중주 편성에 클라리넷 한 대를 덧붙인 이 곡이야말로 클라리넷의 재발견인 동시에 모차르트 실내악의 완성이라고 부를 만하다. 우아한 음색에 화려한 기교, 인생의 희로애락을 사람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듯한 표현력. 이렇게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 클라리넷 곡은 모차르트 이전에는 당연히 없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적어도 100년 후, 브람스가 1891년에 ‘클라리넷 5중주 b단조’를 쓸 때까지 그랬다.
모차르트로 하여금 ‘클라리넷 5중주곡’을 쓰게 한 또 하나의 동기는 ‘우정’이었다. 그것은 베토벤이 루돌프 대공과의 우정을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과 피아노 트리오 ‘대공’으로 표현했던 것과도 흡사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어려운 말년을 보내던 모차르트도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안톤 슈타틀러(1753~1812)와의 우정에 음악으로 답했으며, 그 첫번째 열매가 바로 ‘클라리넷 5중주’였다.
알려져 있다시피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으로 간 것은 1781년,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그러니 꼭 10년을 빈에서 살았다. 그 10년은 모차르트가 궁정의 ‘족쇄’를 벗어나 프리랜서 음악가로 보낸 세월과 같을 터. 빈 시절 초창기의 모차르트는 소위 ‘잘 나가는’ 음악가였다. 그는 빈에서 작곡과 연주로, 또 학생들을 가르치며 적잖은 인기를 끌었다. 특히 빈 사람들은 피아노 연주에서 모차르트가 보여줬던 능력에 환호했으며, 이에 자극받은 모차르트는 피아노 협주곡 14번부터 25번까지를 단숨에 써내기도 했다.
하지만 권력의 울타리를 벗어난 그는 점차 힘들어졌다. 모차르트를 아꼈던 하이든이 “이 유일무이한 인물 모차르트가 군주의 것이든 황제의 것이든, 어느 궁정에서도 지위를 얻지 않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라는 개탄조의 글을 남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 물론 여기엔 약간의 이견도 있는 게 사실이다. 빈 시절 후반부에도 모차르트의 수입은 별로 줄지 않았으며, 오히려 도박 등으로 돈을 날려 어려워졌을 거라는 추측이 존재한다. 그렇게 모차르트 생애의 마지막 무렵은 몇몇 미스터리를 남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3~4년 전부터 극심한 궁핍에 시달렸다는 것. 당시 모차르트는 자신이 몸 담았던 계몽주의 비밀결사 ‘프리메이슨’의 동료 푸흐베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까지 도움을 청해야 할 만큼 안 좋은 상황이라네. 좋은 친구, 형제인 당신마저 나를 버린다면, 나와 가련한 병든 아내 그리고 아이도 파멸해 버릴 것이라네.”
앞서 언급한 슈타틀러는 바로 이 시절의 모차르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친구였다. 그 역시 프리메이슨의 동료였으며 당대 최고의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게 헌사한 ‘클라리넷 5중주’는 전곡이 모두 아름답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악장은 2악장 라르게토(Larghetto). 그것은 마치 한 마리 백조의 춤처럼 우아하며 때때로 관능적이다. 동시에 모차르트 말년의 슬픔이 아릿하게 배어난다. 2년 후 작곡한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도 역시 슈타틀러에게 헌사한 곡. 이 곡에서 클라리넷은 좀 더 저역으로 내려가면서 마치 오보에 같은 소리로 운다. 모차르트는 이 곡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협주곡’을 쓰지 않았으며, 두 달 뒤 눈을 감는다.
* 1년에 걸쳐 연재해온 ‘주제와 변주’를 오늘자로 마칩니다. 그동안 애정을 갖고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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