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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Tour - 대한민국

서울 성곽 산책

by Wood-Stock 2009. 5. 14.

천천히 걷자, 서울 성곽 한바퀴
서울 도심의 마지막 생태축 18.2㎞
네구간 나눠 걸으면 최고의 산책 코스
http://www.bukak.or.kr  
» 남산 N타워에서 국립극장 쪽으로 이어진 남산 남쪽순환로 숲속의 서울성곽.
서울은 성곽도시다. 정교하게 축조된 돌성으로 완전히 둘러싸인 도시였다. 18.2㎞에 이르는 성곽의 3분의 2가량이 지금도 산줄기에, 주택가에, 빌딩 숲 사이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성곽 일부였던 4대문·4소문 이름이나, 북한산과 북악산, 북악산과 인왕산을 혼동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전문가들은 “서울의 역사를 알려면 성곽을 따라 걸어보라”고 권한다. 서울성곽은 서울 도심에 남은 마지막 생태축이자 자연과 문화·역사가 공존하는 옛길이다. 성곽을 밟아 나가는 동안 한양의 역사·문화가 저절로 눈에 들어온다.
 

» 자유총연맹 뒤 조망소에서 신라호텔 뒤쪽으로 이어진 성곽.
 비교적 온전히 옛 모습이 남아 있다.
» 풀꽃들은 성돌 틈에서도 피고 진다.

서울성곽은 평소 익숙했던 풍경 속에 숨어 있다. 성곽을 따라 거니는 동안 남산 길이 다시 보이고 성북동도 다시 보이며 새문안길이 새롭게 다가온다. 성돌 하나하나에서 서울을 재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고 건강도 챙기는 성곽 산책을 즐겨보자. 아름다운 숲과 빼어난 전망, 정감 어린 골목들이 함께한다.

 

서울성곽(사적10호)은 1396년(태조 4년)에 처음 축조됐다. 당시 농한기인 1~2월과 8~9월 각 49일 동안 성곽을 쌓았다.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북악산을 잇는 5만9500자(18.2㎞)의 축성공사에 전국에서 약 20만명이 동원됐다고 한다. 4대문인 숭례문(남대문)·흥인지문(동대문)·돈의문(서대문)·숙정문(북대문)과 4소문인 창의문(북소문)·혜화문(동소문)·광희문(남소문)·소의문(서소문)도 이때 완성됐다. 당시 평지엔 토성을, 산엔 석성을 쌓았는데 27년 뒤인 세종 때(1422년) 모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성곽은 숙종 때(1704년) 이르러 다시 대대적으로 정비된다. 한말까지 거의 원형을 유지하던 서울성곽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평지 쪽은 대부분 철거되고 현재는 산지 쪽 10㎞가량이 남아 있다.

 

» 낙산공원 위쪽 성곽. 데이트족들이 많이 찾는다.
» 혜화문 부근 성곽은 주택의 축대가 된 지 오래다.

남아 있는 성곽의 성돌을 보면 축조 시기를 알 수 있다. 태조 때엔 주로 메줏덩이 모양의 화강암과 편마암을 섞어 쌓았다. 세종 때는 성벽 하부엔 크고 긴 석재를 쓴 반면 위쪽은 메주 모양의 돌들을 쌓고 틈새에 잔돌들을 박아 넣었다. 숙종 때 것은 정방형의 큼직한 화강암(60×60㎝ 안팎)을 반듯하게 다듬어 써 이전 성벽과 뚜렷이 구분된다.

 

성벽 안팎을 살펴보면 글자가 새겨진 성돌(각자석)들이 많이 보인다. 조선시대 ‘공사실명제’ 흔적이다. 태조 때 서울성곽을 처음 쌓을 당시 천자문의 글자 순으로 공사 구간을 정했다. 전체 5만9500자(약 18.2㎞)를 600자(약 180m)씩 97개 구간으로 나눠 각 군·현에 할당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하늘 천(天)’ 자로 시작해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다시 북악산에서 ‘불쌍할 조(弔)’ 자로 끝난다. 각자석엔 할당된 공사 구간의 시작과 끝 표시, 담당한 지역명, 날짜, 책임자 등이 새겨져 있다. 태조 때 각자석엔 구간과 지역명, 날짜를 주로 새겼으나, 조선 중기 이후 각자석엔 감독관·책임기술자 등의 이름까지 명기돼 있다. 숙종 이전 성축의 각자는 주로 성벽 바깥에, 이후의 각자는 주로 여장 부분 안쪽에 새겨져 있다.

 

서울성곽을 하루 이틀에 둘러보기는 어렵다. 녹색연합 노상은씨는 “서울성곽길은 되도록 천천히 걸으며 세월의 흔적들을 살피고 역사문화를 배우는 길”이라며 “4~5㎞씩 네 구간으로 나눠 하루에 한 코스씩 도는 일정이 바람직하다”고 권했다.

 


» 김정호가 제작한 ‘수선전도’. 1820년대 초반의 한양 모습을 상세하게 그린 도성도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제공

 

 

 

 

 

 

 

서울성곽 간단용어사전

 

⊙ 여장 | 성벽(체성) 위쪽에 쌓은 담. 성가퀴라고도 부른다. 이곳에 바깥을 내다보는 구멍을 내 적들을 살피고 공격했다. 위엔 옥개석을 덮는다.

 

⊙ 총안 | 여장에 낸 구멍을 말한다. 한 여장엔 3개의 총안을 뚫었는데, 두 개는 멀리 보는 원총안, 가운데 한 개는 성 밑을 살필 수 있게 경사지게 뚫은 근총안이다.

 

⊙ 치성 | 적을 공격하기 쉽게 성곽의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부분. 각이 지게 쌓은 것을 치성, 둥글게 쌓은 것을 곡성 또는 곡장이라 한다.

 

⊙ 옹성 | 성문 앞에 둘러쳐 쌓은 성을 말한다. 흥인지문에 옹성이 있다.

 

⊙ 암문 | 성곽에 설치된 작은 샛문. 비공식 문으로 비상구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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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식 빌딩 숲 속 성곽을 찾아라 ~ 서울성곽 - 남동쪽 구간

 

 
숭례문에서 남산, 국립극장 거쳐 장충체육관까지 1구간 6km
장충체육관에서 광희문, 흥인지문 거쳐 혜화문까지 2구간 5.5km

한겨레  
» 신당2동에서 장충체육관 부근으로 이어진 성곽. 커다란 성돌을 밑에 쌓고 위로 작은 성돌을 촘촘히 쌓은 모습에서 세종 때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성곽 위 여장 부분은 최근 복원한 것이다. 사진 오른쪽에 숙종 때 쌓은 성돌도 보인다.
서울성곽을 따라 도는 성곽 순환로가 온전히 뚫린 것은 2007년이다. 1968년 간첩침투 사건 이후 북악산과 인왕산은 일반인 출입이 금지돼 왔다. 1993년 인왕산이 먼저 일반에 개방됐고, 참여정부 때 북악산 숙정문~창의문 구간의 성곽길이 열리며 비로소 서울성곽을 따라 도는 걷기여행이 가능해졌다. 최근 녹색연합은 정상 정복형 산행문화를 개선하기 위한 대안으로 서울성곽 순환 탐방로를 찾아내 <서울성곽 순례길>이라는 소책자를 펴냈다. 이 책자가 제시한 기본 코스를 바탕으로 18.2㎞ 성곽길을 네 구간으로 나눠 나흘에 걸쳐 걸었다. 녹색연합 노상은 간사와 서울시 문화재관리팀 김용수 주임이 각각 일부 코스 순례길을 안내했다.
 

첫날. 1구간(숭례문~남산~국립극장~장충체육관)

 

서울성곽길은 아름답고도 슬픈 길이다. 숭례문①에서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성곽길 걷기는, 안타까움으로 시작해 쓰라림으로 끝날 것이다. 사라진 숭례문. 가림막 안에선 복원공사와 발굴작업이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 숭례문 옆 선혜청 터② 표지석에서 걷기를 시작한다. 선혜청은 대동미와 포전을 세금으로 거둬들이던 관아다. 1608년(선조41년)부터 1894년(고종31년)까지 있었다.

 

숭례문 앞으로 길 건너 남산육교 쪽으로 오른다. 1961년 놓인 남산육교 건너, 에스케이빌딩 앞에서 옛 성벽의 흔적을 일부 만날 수 있다. 이후 길 건너 무수한 계단을 밟아올라 남산 중턱에 이를 때까지 성벽은 사라진다. 백범 광장 지나 계단길 따라 안중근 의사 기념관③ 앞에서 한숨을 돌린다. 거대한 돌들에 새겨진 안 의사 글씨들 옆에 2010년 개관을 목표로 새 기념관 공사가 진행중이다. 다시 돌계단을 올라 숲길이 시작된 뒤에야 계단길 석축의 오른쪽 사면이 성곽이란 걸 알아채게 된다. 내려다보면 검은 성돌들이 박힌 성벽이 아까시나무 숲 사이로 뻗어 있다.

 

성곽 남동쪽은 경상도, 남서쪽은 전라도 사람들이 쌓아

 

케이블카 종점을 지나면 봉수대④·팔각정⑤과 남산 엔타워⑥가 있는 남산(목멱산·인경산) 꼭대기다. 팔각정 앞엔 국사당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태조는 한양 천도 뒤 이곳에 목멱산신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를 올렸다. 일제가 이곳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국사당은 인왕산 기슭으로 옮겨졌다. 봉수대에선 매일(월요일 제외) 오전 11시~12시30분 봉화 의식을 거행한다. 봉수란 횃불과 연기를 뜻한다. 낮엔 연기를 피우고 밤엔 불을 피워 긴급한 상황을 알렸다.


순환버스 정류장 지나 녹음 우거진 찻길을 걸어내려간다. 남산 남쪽 순환로다. 길 오른쪽 축대가 성곽이다. 길이 성곽을 끊는 지점에서야 성곽의 면모가 드러난다. 세종때 쌓은 성벽이다. 이제 성곽은 산으로 올라가고, 길은 남산 고유소나무 탐방로⑦(매주 목요일 오후 개방) 쪽으로 이어진다. 소나무들이 아름드리는 아니어도 숲은 울창해 솔숲 내음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국립극장⑧ 지나 자유총연맹 정문으로 들어간다.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엔 세종 때 세웠다가 폐쇄된 남소문 터⑨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옆의 타워호텔 부지에서도 최근 성곽 흔적을 발견했다고 하나 공사중이어서 확인할 수 없다. 자유총연맹 축대 일부도 옛 성돌로 이뤄졌다.

 

동대문에선 성곽 발굴조사 현장 구경도

 

뒤쪽 산길을 오르면 남동쪽 코스 중 가장 뚜렷한 서울성곽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여장을 따라 걷다 성곽이 끝나는 곳에서 성 바깥으로 나가 성벽을 따라 내려간다. 이끼 끼고 총탄 맞은 각양각색의 성돌들이 볼수록 아름답게 다가온다. 굽이쳐 흘러내린 성벽을 따라 산책로가 이어진다. 땅에 조명시설을 설치해 밤 11시까지 성벽을 밝힌다. 세종 때와 숙종 때 축성된 성돌들이 뚜렷이 구분된다. ‘시면’(始面·할당된 공사 시작 지점)이나 지역명 등이 새겨진 각자석도 자주 눈에 띈다. 서울성곽의 남동쪽은 주로 경상 지역 주민들이, 남서쪽은 전라 지역 주민들이 쌓았다고 한다.

 

암문⑩ 부근 슈퍼에서 생수를 사 갈증을 풀고 땀을 씻었다. 암문은 주민들이 이용하던 비공식 출입구다. 함께 걷다가 휴대용 물병을 꺼내 마시던 녹색연합 노상은 간사가 말했다. “조선 오백년 역사가 스민 이 아름다운 성곽을 두고 아직도 도시미관용 장식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서울성곽 자체를 모르는 분들도 많고요.”

신라호텔 옆을 지나 장충체육관이 바라다보이는 큰길에서 성벽은 끊긴다. 여기까지 약 6㎞, 4시간 남짓 걸었다.

 

둘쨋날. 2구간(장충체육관 뒤 지에스25 편의점에서 광희문~동대문디자인파크(공사중·옛 동대문운동장)~흥인지문~낙산공원~혜화문)

 

88식당 앞에서 언덕 위 신당동천주교회 쪽으로 오른다. 이제 성곽은 끊기고 그 흔적만이 주택가 골목 곳곳에 남아 있다. 장충아트빌라 옆 골목과 성방빌딩 맞은편 왼쪽 골목에 축대로 사용되는 성곽 흔적들이 보인다. 성곽을 따라 걷다 보니 성돌을 보면 축조 시기는 대충 짐작이 간다. 노 간사가 성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세종 때 방식으로 보이네요. 저쪽 건 좀 숙종스럽죠?”

 

장충퍼시픽빌라 골목길을 돌아 내려와 길 건너 계단길(장수길)을 오른다. 오른쪽에 광희문⑪으로 내려가는 ‘수구문길’ 표지가 보인다. 수구문(시구문)이란 광희문의 별칭이다. 서소문(소의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신을 내보내던 문을 가리킨다. 광희문은 길 가운데 있던 것을 현위치로 옮겼다. 한양공고 쪽으로 길 건너 서울메트로 동대문 별관 옆으로 간다. 별관 뒤 동대문운동장역 2번 출구에 작은 쉼터가 있다. 역 안의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

 

옛 동대문운동장 터⑫에선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 공사가 한창이다. 최근 운동장 땅 밑에서 서울성곽 터가 발견됐다.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중이다. 공사장 가림막을 따라 돌면 투명유리를 통해 발굴 현장을 들여다볼 수 있다. 80여년 전 일제가 흥인지문~광희문을 잇는 성곽을 허물고 동궁 결혼기념으로 경성운동장을 만든 것이 동대문운동장의 시초다. 발굴 뒤 성곽 일부도 복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패션몰·쇼핑센터 즐비한 거리를 지나 포장집촌 거쳐 흥인지문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청계천 물길 위엔 오간수교⑬가 걸려 있다. 옛날 이곳 성곽 안쪽엔 물이 고이는 곳이어서 성벽에 홍예로 된 다섯개의 물구멍을 냈다고 한다. 다리 옆 물가에 이를 본뜬 다섯개 홍예수문을 만들어 놓았다. 흥인지문⑭ 앞엔 1907년 헐린 오간수문 터임을 알리는 표석을 설치했다. 보물 1호 흥인지문을 보고 동대문역 6번 출구로 들어가 1번 출구로 나온다. 여기부터 성곽길이 다시 열린다. 이대병원 옆이다. 낙산지역 문화유산 해설 안내판 옆 위쪽 성벽에서 각자석들을 여럿 볼 수 있다.

 

찻길에 있던 혜화문 산 밑으로 옮겨 지어

 

성 밖으로 이어진 골목길은 곧 나무들 우거진 산책로로 이어진다. 정자와 성터교회 지나 암문을 만나 성 안으로 들어간다. 길 왼쪽은 다닥다닥 붙은 옛 주택가들이 이어진다. 이화동 산동네다. 일본식 가옥을 닮은 이층집도 자주 눈에 띈다. 화장실·낙산체육회 지나면 성곽이 길로 끊기고 길은 왼쪽 낙산공원⑮으로 든다. 광장 옆 암문 밖, 한성대 서쪽 지역은 택지 조성 공사중이다. 성 안쪽 길로 걸어내려가 나무계단으로 골목길로 들면 로봇박물관 거쳐 혜화역 앞으로 나서게 된다. 혜화동 네거리 오른쪽으로 길건너 잠시 걸으면 혜화문(16)이다. 4소문 중 동소문인데, 본디 찻길 가운데 있던 것을 옮겨 지은 것이다. 약 5.5㎞, 3시간 걸린다.

 

» 서울성곽 - 남동쪽 구간                                                            » 서울성곽길 2구간 장충아트빌라 옆 골목에 남아 있는 성곽.

 

 

워킹 쪽지

1구간 시작점 숭례문은 시청역 2호선 9번 출구나 1호선 7번 출구, 1호선 서울역 4번 출구, 4호선 회현역 5번 출구를 이용해 간다. 2구간 시작점 장충체육관은 3호선 동대입구역 4, 5번 출구를 이용한다. 2구간 출발점 건널목 좌우에 오만가지슈퍼·지에스25 편의점이 있고, 허름한 밥집들도 몰려 있다. 88식당은 찌개백반과 반찬들이 맛있다. 조밥이 나온다. 5천원. 광희문에서 걸어서 7~8분 거리의 경동교회 앞 평양냉면은 알아주는 냉면집. 육수도 육수거니와 면발이 특히 훌륭하다.


시속 1.5㎞, 시계 반대 방향으로 ~ 산책 떠나기 전 챙겨야 할 간단 정보

 

서울성곽길 18.2㎞를 걸어서 10여 차례 돌아봤다는 녹색연합 노상은씨는 “성곽길은 게으르게 두리번거리며 걸어야 역사의 향기를 느끼고 경치도 제대로 즐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속 1.5㎞ 걷기를 권했다. 천천히 거니는 속도다. 성곽길 순례에 앞서 알아둘 점을 정리했다.

 

◎ 지도를 챙겨라 | 걷기 전에 들르는 지점들을 미리 살피고 문화유적들에 대해 공부해 두면 유익하다. 녹색연합에서 낸 소책자 <서울성곽 순례길>은 상세한 지도와 유적 설명을 곁들이고 있어 편리하다. 서울시내 관광안내소에서 무료로 나눠준다. 녹색연합 누리집(www.greenkorea.org) 자료실에서 ‘PDF 파일’로 내려받을 수도 있다.

 

◎ 물과 카메라 준비는 기본 | 작은 배낭에 물과 간식을 준비하도록 한다. 특히 물을 구하기 어려운 북악산 구간이나 인왕산 구간에선 필수다. 북악산·인왕산 구간은 군사시설 지역이어서 사진 촬영은 정해진 곳에서만 할 수 있다.

 

◎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걸어라 | 서울성곽길은 대체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걷는 게 편하다. 특히 인왕산·북악산의 서남쪽 구간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전철역 등 출발점 잡기에도 편리하고 경치 감상에도 좋다.

 

◎ 문화유산 해설사를 찾아라 | 서울성곽 전체 구간 해설사는 없다. 북악산 구간의 경우 말바위안내소(02-765-0297)와 창의문안내소(02-730-9924)에서 매일(월요일 제외)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각각 해설사가 출발한다.

 

◎ 북악산 구간은 신분증 지참을 | 숙정문안내소·말바위안내소·창의문안내소에서 신분증을 보이고 인적 사항을 적어야 한다. 구간 개방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입장)까지다. 월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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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날엔 광화문 인파 한눈에 ~ 서울성곽 - 북서쪽 구간


혜화문에서 숙정문, 북악산 정상 거쳐 창의문까지 5.5㎞
창의문에서 인왕산 정상, 사직터널 거쳐 숭례문까지 6㎞

한겨레  
» 북악산 정상 주변의 숙종 때 쌓은 성곽.
셋쨋날. 3구간(혜화문~와룡공원~말바위쉼터~숙정문~북악산 정상~창의문)
 

혜화문①은 4소문 중 동소문에 해당한다. 일제 때 철거된 것을 1992년 찻길 옆 언덕 위로 옮겨 복원했다. 성밖 길 따라 북쪽으로 걷는다. 주택가 축대가 된 성곽은 두산빌라 담벽을 끝으로 끊어진다. 성돌을 축대로 쓰는 경신중고교를 지나 서울과학고 오른쪽 숲길로 들어선다. 본격적인 성곽 모습이 나타난다. 성 안쪽으로 계단과 숲길을 번갈아 걸어 한동안 오르면 와룡공원 쉼터②에 닿는다. 흔히 북악산 탐방로의 출발점으로 삼는 곳이다. 트럭 매점인 ‘와룡 카페’가 있는데다, 운동시설과 나무의자들이 설치돼 있어 커피 한 캔 따 마시며 잠시 쉬기 좋다.

 

» 와룡공원 쪽으로 오르는 성곽길 안쪽엔 곳곳에 쉼터가 마련돼 있다.

작은 생수 2통 꼭 챙겨가길

 

북악산 성곽의 아름다운 자태는 여기서 암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산길을 오르면서 시작된다. 풀향기는 한결 짙어지고 바람은 갈수록 싱그럽다. 담쟁이 무성한 바깥쪽 성벽 옆으로 굽이굽이 이어진 흙길은 울창한 숲 안으로 스민다. 성벽에선 태조·세종·숙종 때 쌓은 성돌들이 번갈아 나타난다. 나무계단을 만나 성 안쪽 길로 걸으면 말바위쉼터③에 이른다. 신분증을 보여주고 인적 사항을 적은 뒤 패찰을 받아 목에 걸고 숙정문④을 향해 오른다. 숙정문은 북대문이다.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을 지닌 문이다. 본디 북대문은 출입을 위한 문이 아니라 풍수지리상 격식을 갖추기 위해 지어진 것이어서 평소엔 닫아뒀던 문이다. 가뭄 땐 문을 열어 음기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성곽 따라 소나무 숲길을 오르면 화장실 거쳐 곡장⑤ 갈림길에 닿는다. 오른쪽 길로 올라 곡장에서 북악산 정상 쪽을 바라볼 것을 권하고 싶다. 높직한 지점에 둥글게 만들어진 성인 곡장 안에서 내려다보면 북악산 정상과 인왕산 꼭대기로 줄달음쳐 오른 성곽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사진 촬영을 막던 군인이 말했다. “청명한 날엔 광화문 인파, 남산 소나무 가지까지 낱낱이 보입니다.”

 

곡장에서 내려와 북악산(백악산) 정상인 백악마루⑥를 향해 걷는다. 암문을 드나든 뒤 계단을 오르면 청운대, 1·21 사태 때 총탄 맞은 소나무를 지나 북악산 정상에 오른다. 가까이론 경복궁과 빌딩숲이, 멀리론 관악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각자석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청운대 옆 여장 앞에 각자석의 내용을 설명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정상에서 창의문까지 내려가는 길은 매우 가파른 계단길이다. 내려가는 길에도 쉬어 가는 게 좋다. 올라오는 이들을 위해 곳곳에 쉼터가 마련돼 있다.

 

창의문안내소에 닿는다. 패찰을 돌려주고 내려오면 아름다운 자태의 창의문(북소문·자하문)⑦이 기다린다. 누에 올라 앉아 잠시 쉰다. 인조반정 때 반정군은 이 문을 열고 들어와 창덕궁을 장악했다고 한다. 출입문 홍예 위쪽엔 봉황무늬가 돋을새김돼 있고, 문 앞뒤 네곳에 빗물이 흘러 떨어지도록 한 누조가 돌출돼 있다. 출입구 바닥돌은 짚신 나막신 고무신 운동화 군화들이 드나들며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다. 창의문 안쪽 들머리 길 옆엔 ‘청계천 발원지’ 표지석과 1·21 사태로 순직한 경찰 추모비와 동상이 세워져 있다. 5.5㎞를 걷는 동안 500㎖짜리 생수 2통을 마셨다. 3시간.

 


» 옆에서 본 숙정문.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을 지닌 문이다.

빼어난 전망이란 바로 이것!

 

넷쨋날. 4구간(창의문~인왕산 정상~인왕약수터~사직터널~월암공원~돈의문터~숭례문)

 

창의문을 나가 굴다리 지나 왼쪽의 길을 건너 다시 왼쪽으로 걸으면 인왕산 성곽길로 오르게 된다. 성곽은 곧 찻길로 끊긴다. 정자 거쳐 찻길 아래쪽으로 잠시 걷다가 찻길로 올라서면 곧 바위와 초소가 나타난다. 여기서 길을 건너 작은 철문을 통해 산으로 오른다. 오를수록 전망은 좋으나 여장을 따라 걷는 성곽 안쪽 길이어서 높직한 성벽길을 걷는 맛은 없다. 돌계단을 한동안 오르면 비로소 성 밖으로 나서게 된다. 태조·세종·숙종 때 쌓은 것으로 보이는 다채로운 성돌들을 만날 수 있다.

 

함께 걸은 서울시 문화재관리팀 김용수 주임이 성벽 위 검은빛 여장 부분을 가리켰다. “총안 형태나 덮개돌 등이 처음 쌓았을 때 모습 그대롭니다.” 묵은 이끼로 검은빛이 도는 성돌들에선 총탄 자국도 여럿 눈에 띈다. 잠시 뒤 다시 성안으로 들어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면 탁 트이는 전망과 함께 인왕산 정상이 눈앞에 보인다. 북쪽 능선으론 병자호란 뒤 북한산성과 연결해 새로 쌓은 탕춘대성⑧의 흔적이 이어진다. 정상으로 오르는 동안 산밑에 흐드러진 등나무꽃 향기를 실어온 바람이 땀을 말려준다. 인왕산 정상에 서면 ‘빼어난 전망이란 바로 이것’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삿갓바위⑨ 주변에서 동서남북 좌우전후로 서울 도심의 거의 모든 곳이 눈에 들어온다. 북한산·안산·남산·낙산·관악산과 한강 물줄기, 그리고 그 사이에 솟은 빌딩들과 고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정상에서 사직터널 쪽으로 내려가는 산 능선의 성곽길은 손을 대지 않은 모습이다. 검은빛 성돌들은 담쟁이덩굴을 덮어쓴 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 바위계단길이다. 곡장⑩·선바위·국사당⑪ 쪽 성곽의 여장 복원공사가 올해 말까지 진행중이어서, 스님이 장삼을 입은 모습의 선바위와 그 밑의 국사당을 만날 수 없는 점이 아쉽다. 국사당은 남산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옮긴 것이다. 왼쪽 길로 한동안 내려가 인왕약수터에서 목을 축인다. 350m쯤 숲길을 내려간 뒤 북악산길로 이어지는 순환로를 만나 길 건너 산책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걷는다. 초소⑫ 옆쪽에 찻길로 끊긴 성곽이 보인다. 무악현대아파트 위쪽이다. 여기서부터 사직터널 부근까지 매우 아름다운 성곽길이 이어진다. 각자석도 여럿 보이고, 암문도 만난다. 커다란 바위에 성돌을 쌓아올린 모습도 보인다.

 

성곽이 끊기는 지점의 옥경이식품(슈퍼) 앞에서 성곽 오른쪽 전방 주택가 마당으로 내려서면 오른쪽에 작은 길이 있다. 이 길에서 400여년 된 은행나무를 만난다. 이 지역이 행촌동이다. 나무 앞엔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장군의 집터⑬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표석 앞쪽엔 1923년 앨버트 테일러라는 미국인이 지은 서양식 주택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다시 나와 성곽 안쪽으로 걷는다. 성곽은 상록수어린이집에서 끊긴다. 오른쪽 길을 내려가 다시 왼쪽 골목으로 돌면 빌라들이 이어지는데, 빌라 주차장 안쪽 벽이 숙종 때의 성곽이다.

 

» 숙정문과 곡장 사이 촛대바위 앞에서 당겨 찍은 경복궁과 광화문 일대 모습.
 촛대바위는 가장 반듯한 모습의 경복궁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점이다.

정동길 곳곳에도 성곽 흔적이

 

홍난파 가옥⑭을 보고 월암근린공원⑮ 아래쪽으로 걷는다. 옛 기상청 밑 공원 끝 부분에 볼만한 옛 성곽 모습이 펼쳐진다. 오래된 주택가였던 이곳이 정비되면서 숨어 있던 옛 성곽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각자석들도 많이 보인다. 강북삼성병원 안의 경교장(16)으로 간다. 백범 김구 선생이 광복 뒤 임시정부 집무실 겸 숙소로 썼던 곳이자, 안두희의 총탄에 서거한 장소다. 2층에 집무실을 복원해 백범기념실을 만들었다. 무료. 일·공휴일 휴관.

 

돈의문(서대문)터(17)를 만난다. 태조 때 처음 사직단 쪽에 세웠던 문을 이곳으로 옮겨 새로 지었던 문이다. ‘새문안길·신문로’라는 지명이 여기에서 비롯했다. 일제 때 철거됐다. 정동길로 들어 교내 곳곳에 성곽 흔적이 남아 있는 창덕여중·이화여고를 지난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을 보고 내려가 길 건너 중앙일보사 옆길로 들면 명지빌딩과 상공회의소 건물 담에서 다시 성곽이 이어진다. 큰길로 나오면 성벽은 끊기고 숭례문(18)도 보이지 않는다. 공사가림막에 갇힌 국보 1호 쪽으로, 찻길을 가로질러 표시한 성곽 자리 그림이 안쓰럽게 다가온다. 창의문에서 여기까지 6㎞. 4시간 남짓 걸렸다.

 

» 지도 그래픽 디자인 멋짓(자료: 녹색연합)

워킹 쪽지

 

혜화문 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 이용. 창의문 밖 부암동의 자하손만두집(02-379-2648)은 색색의 만두를 손으로 빚어 내는 집이다. 조랭이떡만둣국·만둣국 각 1만원. 숭례문 부근 옛 삼성본관 뒤 진주회관(02-753-5388)은 콩국수로 이름난 집. 걸쭉한 콩물과 졸깃한 면발을 맛보며 성곽길 걷기를 시원하게 마무리할 만하다. 8천원.

글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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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올라보니 “서울이 별천지였네”
“답답한 서울에 이렇게 장엄함이 숨어 있다니…”
하니Only  
» 서울의 북대문인 숙정문과 서울의 전경. 북악산에 올라서면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한겨레자료사진

“정말 별천지다! ”

 

출입 통제 38년만에 청와대 뒤편 북악산 기슭을 오른 답사객들의 이구동성이었다. 푸른 죽순 모양 솟아오른 한양 도성의 주산 북악산과 성벽, 주위 서울 도심이 어루어낸 절경에 그들은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답답했던 서울에 이렇게 장엄한 풍경이 숨어 있었군요.” “북악산이 이렇게 도심과 가까울 줄 몰랐어요.” “자연 그대로의 서울 모습이 남아있다니…”

 

18일 낮 문화재청 시범답사에서 금단의 지역이던 북악산은 장엄하고 단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그동안 청와대 권력자들과 군인들만 누빌 수 있었던 북악산 성벽길과 등산로가 4월 시작되는 단계 개방을 맞아 전문가, 시민대표들의 발길을 맞아들인 것이다. 2월12일 대보름 때 노무현 대통령과 인근 주민 150여명이 북악산을 오른 이래 두번째 시범답사다. 68년 북한 무장 간첩단 침투 사건 이래 군인들의 순찰로로 은둔해야 했던 북악산 등산로는 깔끔한 시설로 탈바꿈해있었다.

 

»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에서 바라본 숙정문의 전경. 한겨레 자료사진

답사객들은 유홍준 청장을 비롯한 문화재청 관계자들과 출입기자, 궁궐지킴이 등의 시민단체 회원, 인근 주민 등 300여명. 날씨는 다소 흐리고 쌀쌀했으나, 자연·역사 문화유산을 골고루 살펴볼 수 있는 알찬 발걸음에 참가자 대부분은 한눈을 팔지 않았다.


삼청터널 옆 홍련사에서 시작 ”문 열리면 아낙네 바람난다” 잠가둔 숙정문 활짝 열려

 

오후 3시20분 삼청터널 옆 홍련사에서 설레임 속에 답사행렬이 시작되었다. 첫 기점은 지난 9월 언론에 한 차례 공개된 바 있는 한양성 북문 숙정문. 들머리 출입 관리시설에서 신원 조회를 하고 등성이를 오르니 나무 부재로 짠 새 등산로 시설이 나타난다. 초소를 따라 좁고 구불구불하게 이어졌던 기존 산길 대신 폭 1m의 발판과 나무 난간으로 만든 `나무 데크'가 설치되어 숙정문 오르기가 한결 편해졌다. 넉넉잡고 10분여 만에 숙정문에 도착했다. 조선시대 문 열리면 도성안 아낙네들이 바람이 난다고 하여 굳게 닫아놓았던 이 북문은 이제 활짝 열려있다. 등산객들은 옛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통과했다. 따라온 아이들은 엄마, 아빠들과 누각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숙정문 다음부터는 한양성 성곽 옆 계단길을 따라 능선을 타고 올라간다. 계단을 통해 성곽길을 올라가던 관객들은 옆의 성곽을 만져보기도 하고 성벽에 뚫린 구멍으로 아련하게 깔린 성북동과 서울 도심부 전경을 디카로 찍느라 여념이 없다. 성곽을 오는 계단 길 곳곳에 경계 근무중인 병사들의 초소와 철조망 등이 따라 이어져 긴장감을 자아낸다. 1968년 1월21일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로 침투하려다 우리 군과 교전할 당시 총탄 흔적이 여전히 남은 `1·21사태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경치에 빠져 사진을 찍던 등산객들을 군 당국이 가로막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다.

 

“아빠, 여기 왜 철책선이 있어?” “으응…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란다” 손잡고 오르던 아이의 물음에 아버지는 난처한 기색으로 답한다.

 


 

`1·21 사태’ 때 흔적 전해주는 총탄 흔적 간직한 소나무 그대로

 

숙정문에서 0.5km 더 올라간 촛대바위는 서울 도심의 전망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길목. 지난 9월과 달리 널찍한 전망시설이 설치되어 등산객들로 북새통이다. 바로 눈앞에 안겨오는 경복궁과 광화문, 세종로 등 색다른 각도의 도심 풍경에 “정말 좋다”“떨린다”는 탄성이 잇따른다. 한 할아버지는 현 광화문과 세종로가 경복궁의 원래 방향과 다르게 축이 비뚤어져있는 전경을 손으로 가리키며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열심히 설명을 하기도 한다. 다시 재게 발을 놀려 계단길을 오르니 어느새 움츠렸던 몸에 활기가 돌고 얼굴에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이윽고 출발 40분만인 오후 4시 한양 성곽의 북편 관측지점인 곡장에 이르렀다. 동서남북의 서울 산세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라고 한다. 청와대를 품에 안은 북악산 동쪽 기슭과 닭알 바위 등 특유의 기암이 멀리 인왕산의 자태와 함께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유홍준 청장이 꼭 보라고 추천해 바로 옆 북쪽 초소의 쪽창을 들여다보았다. 백악산과 뒷편 북한산 보현봉 기슭의 산세가 마치 풍경화 그림처럼 창문 안으로 들어왔다. 아빠를 따라온 초등학교 2년생 김성연(9)양은 “책 사진에서 보던 답답한 서울과 달리 서울이 이렇게 크고 좋은 풍경인 줄 몰랐다”며 “다음에도 꼭 오고 싶다”고 웃었다. 촛대바위에서 700m 더올라간 동산 쉼터에서는 발 밑 숲 아래로 경복궁 후원과 민속박물관, 청와대 동편 건물군 등이 색다른 각도로 들어온다. 특히 경복궁 전각들은 더욱 손에 잡힐 듯 발밑으로 들어오는 모습이다.

 

유홍준 문화재청장 “북 초소 쪽창을 놓치지 말아라” 한폭의 동양화

 

이제 산행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북악산 인근 청운동에서 유년기를 보낸 유홍준 청장의 구수한 입담이 한창이다. “67년 대학 입학한 뒤에도 올라오곤 했는데 군대 가서 68년 무장간첩단 침투 사건이 나는 바람에 35개월이나 복무했다”고 말해 주위를 웃겼다.

» 숙정문 조금 위쪽의 촛대바위는 북악산 자락이 감싼 도심의 세종로 전경과 경복궁 권역이 눈안에 착 감겨 들어오는 명당이다. 최근 개방을 앞두고 대형 전망대가 설치되어 구경하는 재미가 더욱 새롭다. 이 전망대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여성 답사객들. 풍경이 맘에 들었는지 자세와 위치를 바꿔가며 계속 디카를 찍었다.

오후 4시 30분 마침내 북악산 정상에 도착했다. 아직 꽃이 피지는 않았지만 막 몽우리가 맺히기 시작한 진달래밭과 구불구불한 노송이 답사객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정상 부근 바위에는 30년전 산이 폐쇄되기 전까지 등산객들이 새긴 이름과 각종 낙서가 여전히 남아있어 미묘한 느낌이 들게 했다. 정상부 남쪽으로는 청와대 내려가는 작은 오솔길도 보였다. 북악산 정상까지 자주 오른다는 노 대통령은 지난주까지 이곳을 43번이나 올랐다고 귀띔해주었다. 백두산에서 뻗은 산맥이 금강산을 거쳐 도봉, 북한산을 일으키고 다시 뻗은 남맥이 기를 모아 멈춘 곳이 이곳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뜻밖에도 무장간첩단 침투 뒤 70~80년대 운영된 대형 발칸포 진지터를 철거한 표석도 보여 눈길을 끌었다. 지상 2층에 120평이나 되는 이 대형 시설은 2000년에야 서울시가 철거한 것으로 북악산에 얽힌 역사적 곡절을 극명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정상에서 만난 이인순(61·서울 쌍문동)씨는 “단순한 등산이 아니라 역사를 조명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는 답사라는 점이 좋다”고 말했다.수원 매산로에서 온 윤주현(53)씨도 “경치도 경치지만 성곽 부근의 살아있는 듯 꿈틀대는 노송들과 새롭게 발견하는 서울 도심 풍경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면서 “개방 뒤 훼손되지 않도록 각별한 관리대책도 필요할 것 같다”고 조언했다.

 

"원래 한양성 성벽은 정교하게 짠 것…20세기 조악한 복원과 금세 구별”

 

답사의 종착지인 창의문까지 내려가는 길은 경사도 70도가 넘는 더욱 가파른 계단길. 맞바람도 거세져 땀에 절었던 몸에 다시 슬근슬근 냉기가 스며든다. 서울 한양 성곽과 바싹 붙어 내려가므로 이 성곽의 역사적 흔적을 더욱 가까이서 체감할 수 있었다. 멀리는 조선 숙종 때 개수한 지붕돌·벽돌부터 70년대 초중반 서울시에서 대충 땜빵하듯 채워넣은 신 부재까지 성곽 돌의 다양한 역사를 돌빛이나 쌓은 부재의 구조를 통해 알 수 있다.

 

» 숙정문에서 성벽 길을 따라 올라온 일부 답사객들이 성북동 계곡과 동서울 일대 전경을 사진으로 찍고있는 모습이다. 답사객들은 성벽 사이사이에서 가다서다하면서 연신 셔터를 누르느라 바빴다. 일부 답사객들은 군 초소와 철조망을 찍다가 경비병에 걸려 찍은 이미지를 지우도록 권유(?)받기도했다.

유홍준 청장은 “원래 한양성 성벽은 단순히 맞물리는 것이 아니라 모를 내어 이가 들어맞도록 짰기 때문에 20세기 조악하게 복원한 성벽과 금세 구분이 된다”고 말했다. 옛 성벽돌 곳곳에 축조시기와 부역한 백성의 출신지와 이름을 새긴 글씨들도 볼 수 있어 성곽 조성에 동원된 선인들의 애환 등이 절로 느껴진다. 시대에 따라 각양각색의 색깔을 지닌 성벽 부재들이 물결치듯 산 기슭을 타고 내려오는 장관을 보면서 오후 5시10분 38년전 무장 간첩단이 침투했던 통로인 북악산 기슭의 창의문에 도착했다. 답사의 종착점이다. 참가자들은 숱한 민중이 봇짐 멘 채 지나다녔을 창의문 통로 바닥의 닳은 박석들을 밟으면서 답사의 의미를 새삼 되새김하는 모습이었다.

 

이날 답사코스는 홍련사-숙정문-북악산 정상-창의문으로 빠지는 약 3km짜리 코스로 전체 종주에 약 2시간 가량 걸렸다. 문화재청은 24일에도 일반시민과 서울시 직원 270여명을 상대로 시범답사를 추가로 진행할 예정이다. 신청은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로 하면 된다. 한편 북악산은 오는 4월부터 홍련사~촛대바위 구간을 시작으로 단계별 개방이 확대되지만, 완전 개방되는 내년 10월까지는 하루 세차례 입장이 제한되며 사전예약을 마쳐야 한다.

 

글·사진 <한겨레>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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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600년 고도’로 다시 태어난다
광화문 월대·해태상 복원…구한말 모습 회복
고층빌딩 곳곳 난립 유네스코 등재 낙관 못해
한겨레  
“해방 뒤 서울 역사에 획을 긋는 사건이다. 단순한 유적 복원이 아니라 서울의 옛 경관을 되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24일 발표된 서울 역사도시 조성안에서 광화문 광장의 설계를 맡은 건축가 정기용씨는 이렇게 말했다. 발표된 계획대로라면 3년 안에 광화문 일대의 역사 경관은 송두리째 뒤바뀌게 된다. 유네스코 역사도시 등재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국내에서 대도시 도심 개발 계획 자체를 유적의 역사성에 초점을 두고 추진한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다.

» 서울 역사도시 조성계획은 행정수도 이전 뒤 고도로서의 정체성을 재확립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 계획의 성곽 복원안 가운데 찻길로 끊긴 서울 창의문 주변 성곽을 무지개 다리 모양의 복원된 성곽으로 연결한 가상도. 문화재청 제공

광화문 일대 어떻게 바뀌나?=2009년 말까지 광화문 일대는 구한말 사진처럼 전망 통로인 월대와 해태상을 낀, 장중한 공간으로 바뀐다. 우선,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지어진 콘크리트 광화문은 10월부터 내년 2월까지 철거되고 대신 새 목조건물이 들어서게 된다. 지금 자리보다 14.5m 앞쪽의 원래 자리로 복원되므로 현재 광화문 앞 대로 한가운데로 옮기게 되는 셈이다. 문 앞의 월대와 멀리 관악산 화기를 누르려고 만들었다는 해태상도 복원되는 광화문보다 50m 이상 앞에 놓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광화문 일대가 훨씬 가까이 다가온 듯한 느낌을 갖게 될 것으로 보인다.

 

복원이 완료되면 광화문 앞 큰길의 상당 부분은 8000여평의 도보 광장으로 바뀐다. 서울의 새 얼굴이 될 이 광장은 2009년 말께 완공될 전망이다. 광화문과 근정전 출입문인 흥례문 사이에 있었던 수비병들 거처인 수의장청, 군정청 등 6개 전각을 복원하고 광화문 좌우 콘크리트 담을 허물어 조경수를 심는 등 잔치레 작업들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전하기로 한 세종로 미국대사관, 문화관광부 청사 자리에 문화복합공간이 들어설 경우 광장 면적이 1만평을 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뒷산 어디를 갈 수 있나?= 청와대 바로 뒤쪽인 북악산 정상과 남쪽 기슭은 미개방 지역으로 남는다. 하지만 내년 10월 이후 산 동서쪽과 정상 북쪽 언저리 등 다른 쪽 산자락은 모두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오는 4월 동쪽 길인 홍련사~숙정문~촛대바위 1.1㎞ 구간이, 10월 동남쪽 길인 와룡공원~말바위~숙정문의 약 1.6㎞ 구간, 내년 10월까지 산 서쪽인 창의문~팔각정 구간이 열린다. 개방 구간의 군사 경비시설에는 자체 방호를 위한 벽이 설치되지만, 휴전선 철책을 연상시켰던 높은 경계 철책은 사라진다. 문화재청은 시민 편의를 위한 탐방로를 계속 만들기로 했다.

 

역사도시 등재 전망은?=문화재청은 광화문 광장 조성에 50억원, 성곽 탐방로 조성에 20억원 정도가 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광화문 광장은 2009년, 성곽 복원은 2015년까지의 장기 프로젝트다.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도 막대한 재원을 계속 조달할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렵다는 말들이 나온다. 현 광화문 앞길의 경우 절반 가까이가 광장 터로 들어갈 것으로 보이는 만큼, 교통난을 우려하는 서울시와의 의견 조정 등도 넘어야 할 과제다.

 

사실 유 청장이 밝힌 프로젝트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재를 겨냥한 것으로, 사대문 안팎 역사 유적들을 한 역사도시권 개념으로 묶는 구상이다. 그러나 장밋빛 구상대로 역사도시 등재를 쉽게 단언하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60년대 이래 사대문 안에 고층 빌딩이 난립해 있고, 서울시가 종묘 앞 세운상가를 헐고 수십층짜리 고밀도 복합건물단지 건립을 추진 중이라는 사실 등은 문화재청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대목이다. 최근 유네스코가 등재 후보 유적 주변 고층건물군에 대한 심의기준을 대폭 강화하고, 유산 주변의 환경관리 강화 방침을 밝힌 것도 부담이 된다. 문화재 동네 관계자는 “사대문 안의 고밀도 건축타운 조성 계획을 견제하지 못하면 역사도시 등재는 난관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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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600년 한양이 있었네


ㆍ서울 성곽길 와룡공원 ~ 창의문 3.7㎞ 걷기

서울을 아는 방법 중 하나는 성곽길을 걸어보는 것이다. 성곽에서 서울을 보면 “왜 서울인가?”가 보인다. 산으로 둘러싸인 조선의 수도 한양이 어떤 곳이었는지, 경복궁 자리터는 어땠는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풍광도 좋아서 한나절 걷기여행으로 이만한 곳도 없다. 그럼 성곽의 길이는 얼마나 될까? 조선시대엔 18.2㎞였다. 지금 남아있거나 복원된 성곽은 10.4㎞에 불과하다.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서울 도심 등 복원이 불가능한 5.1㎞를 제외하고 나머지도 모두 복원할 계획이다.

성곽길에서도 경관이 좋다는 와룡공원~창의문 코스를 다녀왔다. 경복궁과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 자락이다. 한양의 진산이었는데도 북악산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많다. 하기야 서울에 성곽이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 마당이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조선시대의 서울, 즉 한양은 바로 이 성곽 안을 뜻했다. 사극에 나오는 도성이 바로 한양이다. 북악산이 서울을 조망하기 좋은 것은 바로 임금의 눈으로 서울을 볼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기점은 성북구 와룡공원으로 삼는 게 좋다. 이 코스가 훨씬 쉽다. 창의문에서 오르는 길은 성곽길 꼭대기까지 가파른 계단길이어서 버겁고 힘들다. 운동 삼아 오르려면 굳이 성곽길 외에 다른 코스도 많다.

입구부터 경관이 좋았다. 성 밖 잘생긴 산자락 아래엔 성북동의 고급주택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반대로 성곽 안쪽은 서민주택이 많다. 예전엔 성안 사람을 ‘성안 분’, 성밖 사람을 ‘성밖 놈’으로 나눠 불렀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4대문 안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자랑거리였다. 세상은 변했다.

말바위 쉼터에서 성곽 안으로 놓인 나무육교를 넘어서 올라가면 안내소가 나온다. 안내소에서 신청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면 출입증을 준다. 원래 여기부터 숙정문을 지나 창의문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2007년 봄 개방됐다. 1968년 김신조가 특수부대원 30명과 함께 침투했다. 자하문에서 경찰의 검문에 들켰고, 수류탄을 터뜨리고 총격전도 벌였다. 성곽길엔 1·21 소나무가 있다. 총탄자국을 톱밥으로 때워놓았다. 어쨌든 이후 39년 동안 일반인의 출입은 엄격하게 금지됐다. 성곽길엔 군인으로 보이는 경비원이 배치돼 군사시설에 대해선 촬영을 하지 못하게 한다. 숙정문은 1·21 소나무 못미처 있다. 숙정문은 쉽게 말하면 북대문이다. 조선시대엔 이 문을 항시 막아놨다고 한다. 출입을 못하게 관원들이 지켰다. 남대문을 막고 숙정문을 열었을 때는 가뭄이 심할 때뿐이었다. 대체 가뭄과 북대문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남쪽은 양기, 북쪽은 음기가 많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뭄이 심하면 음기를 통하게 해 비가 오기를 바랐다. 이게 바로 풍수다.


 

 


도시도 풍수지리설에 따라 만들었다. 소나무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북악마루 조금 못미처 탁트인 공터가 나오는데 바로 여기서 ‘풍수설이란 이런 거구나’를 느낄 수 있다. 서울이 어떤 자리에 세워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포인트다. 광장공사를 하고 있는 세종로와 경복궁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도심을 둘러싼 주변의 산들도 잘 보인다. 풍수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무지렁이라도 “거 참, 서울 포근하고 아늑하게 보인다”고 할 만하다. 그럼 동서남북을 보자. 왼쪽 좌청룡은 대학로 뒷산격인 낙산이다. 우백호는 인왕산이다. 남주작은 남산이 되겠다. 경복궁에서 보자면 북현무는 ‘내가’ 밟고 서있는 백악산이다. 서울을 둘러싼 산은 한꺼풀이 아니다. 홑꽃이 아닌 겹꽃처럼 이중으로 수도를 싸고 있다. 인왕산, 남산, 북악산, 낙산 너머에 북한산, 덕양산, 관악산, 용마산이 겹겹이 서있다. 최준식 교수는 <서울 문화순례>란 책에서 “중국은 수도에 정궁을 지을 때 북경에 있는 자금성의 경우처럼 수도 한가운데 궁궐을 짓는다. 그런데 조선은 그 예를 따르지 않고 풍수설에 입각해서 서북쪽으로 치우쳐서 경복궁을 지었다”고 썼다. 황제는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기 때문에 궁궐을 한가운데 배치했고, 조선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게 도시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이 서로 다르다.

말바위 쉼터에서 숙정문 가는 길. 솔숲이 아름다운 이 길은 반대편 창의문길과 달리 가파르지 않아서 걷기 좋다

조금 더 오르면 성곽길의 정상인 백악마루다. 포대가 있던 자리로 사방팔방이 다 보인다. 오른쪽 인왕산이 특히 잘 생겼다. 약간 베이지색이 섞인 듯한 바위절벽은 미끈하다. 바위표면을 자세히 보면 그 위로 성곽이 놓여있다. 바로 탕춘대 성곽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수도방어를 위해 성곽보강이 필요해 탕춘대성을 세웠다고 한다. 서울성곽과는 별도로 북한산성과 이어진단다.

성곽길은 조선을 아는 첫걸음이다. 1년 동안 서울 성곽길을 답사한 녹색연합의 노상은씨는 “성곽길이 서울의 생태축”이라며 “경주하듯 걷는 길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 생태, 경관 같은 자원을 만나는 길”이라고 했다.성곽에선 서울이 제대로 보인다.

-길잡이-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출구에서 하차한다. 마을버스를 타고 성북초등학교 앞에서 내린다.
걸어서 15분, 마을버스로는 5분 정도 걸린다. 길건너 왼쪽으로 가면 성곽길 입구다. 창의문 쪽으로 가려면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자하문 고개에서 내리면 된다. 말바위 안내소(02)765-0297, 창의문안내소(02)730-9924~5

*개방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다. 월요일은 휴무다. 신분증 지참 필수.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 말바위와 창의문 안내소에서 해설프로그램을 한다. www.bukak.or.kr

*녹색연합(www.greenkorea.org)은 지난 1년 동안 성곽길을 답사한 뒤 4개 코스로 나눴다. 서울시내 주요관광안내소에서 배포한다. 안내처는 홈페이지에 나와있다. 자료실에서 pdf파일로 다운로드 받을 수도 있다.

*등산로에 매점은 없다. 물과 간단한 도시락을 가져가는 게 좋다. 군사시설물에 대한 촬영은 금지돼 있다.

<최병준기자 b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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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 따라 단풍 기행, 북악산 
청운대에서 바라보는 경복궁과 남산타워의 풍광

 

 

북악산은 지난해 봄 40년 만에 빗장을 열었다. 서울에 살아도 못 가본 사람이 부지기수다.
서울성곽을 따라 산행을 즐기는 묘미며, 청운대에서 바라보는 경복궁과 남산타워의 풍광을 어찌 그냥 지날까. 하물며 북악의 가을이야.

특별한 북악산의 가을

가을산은 많다. 단풍이 고운 산도 많다. 가을은 산에서, 나무에서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난다. 북악산의 가을도 좋다. 단풍나무나 느티나무, 참나무가 가을을 만끽한다.



팥배나무의 빨간 열매도 총총하다. 소나무의 푸른 기운이 받치고 있어 한층 두드러진다. 무엇보다 40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북악산의 특별한 이유다.

북악산은 1968년 마지막 등산객을 허락했다. 그해에는 1.21사태가 있었다. 북한특수요원들이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잠입한 사건이었다. 그들은 국군 복장으로 세검정의 자하문 초소까지 도달했다.

향토예비군 창설의 계기가 된 사건이다. 그 행로가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이다. 그 후로 북악산의 진입이 금지됐다.

그 문은 2006년에 이르러서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성북동 쪽 홍련사에서 진입해 숙정문 지나 촛대바위까지의 1.1km 구간이 개방됐다. 말 그대로 북악산 맛보기 정도였다. 다시 일 년 쯤 지난 2007년 4월 6일에야 전면 개방이 이뤄졌다. 북악산에 올라본 사람들은 한 번씩 놀라곤 한다.

서울성곽 때문이다. 서울이 간직한 가장 중요한 문화재인 서울성곽은 북악산에서 가장 명료하다. 4.3km 등산길이 서울성곽과 함께 걷는 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악산이 간직한 또 하나의 멋이요, 북악산의 가을이 여느 산과 같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다.

서울 성곽 따라 4.3km

등산로는 전면 개방됐지만 최소한의 통제는 남아 있다. 정해진 등산로를 따라 출입할 수 있다. 출입 전에는 출입신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주민등록증을 소지하는 게 좋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절차에 따르면 된다. 때때로 사진촬영을 통제하는 구간도 있다. 등산로를 따라 의무경찰이 경비를 서는데 그리 고압적이지는 않다. 때때로 북악산 가이드 역할도 한다.

산행은 보통 창의문 쉼터에서 시작한다. 백악마루와 청운대 지나 홍련사로 내려오거나, 삼청공원과 와룡공원 쪽으로 내려온다. 가장 일반적이다. 하지만 꽤나 가파른 길이다.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 산행이나 노약자는 오히려 홍련사에서 시작하는 편이 수월하다.

창의문은 그 자체로 소중한 문화재다. 조선시대 서울 성곽의 4소문(四小門) 가운데 하나다.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한다. 1413년 창건됐지만 경복궁을 내리누르는 위치라고 해 폐쇄됐었다. 외려 오늘에 들어 그 출입이 더 빈번한 셈이다.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적이다.

창의문에서 정상의 백악마루까지 서울성곽을 따라 이동한다. 성곽이 높아 시야를 가리긴 하지만 총안 사이로 보는 산기슭의 가을 풍경도 새로운 경험이다. 성곽의 반대편으로는 서울시가지의 풍경이다.

맞은편에는 인왕산이 기세등등하다. 서둘러 걷기보다는 중간 중간 뒤를 돌아보며 풍경을 즐기는 것도 북악산 산행의 묘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유영하듯 뻗어나간 서울성곽의 흔적도 장관이다.

서울성곽은 북악산과 낙산, 남산, 인왕산을 잇는 18.2km의 성곽이었다. 지금은 평지에는 드문드문 존재한다. 남아 있는 10.5km 대부분이 산에 있다. 그 가운데 북악산이 가장 긴 편이다. 30분쯤 지나면 정상인 백악마루나 그 아래 청운대에 이른다.

첫 갈림길에서 곧장 청운대로 향하는 이들이 많다. 내리막길인 까닭이다. 하지만 백악마루까지는 채 1분도 걸리지 않는다. 모퉁이를 돌아 곧장 백악마루다. 서울의 전경을 바라는 시계는 청운대가 낫겠지만 그래도 북악산의 정상은 백악마루다.



백악은 북악산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청운대에서는 경복궁과 광화문 일대가 조감도처럼 그려진다. 반대편으로는 촛대 바위다. 촛대바위는 촛대모양을 닮아 그리 불리지만, 경복궁의 정남향이라 일제 강점기 쇠말뚝을 받았던 상흔이기도 하다. 백악마루나 청운대에서는 도시락을 먹거나 쉬어갈 수 있다.

서울의 북대문, 숙정문

촛대바위를 감상한 후에는 곡장을 향한다. 11월경에는 먼발치의 붉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지표 역할을 한다. 곡장까지는 철책과 나란한 길을 걷는다. 아직 북악산이 완전한 경계를 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청와대 뒷산이라는 북악산의 지형 탓일 게다. 곡장 지나서는 숙정문이 나온다. 숙정문은 숭례문의 반대편에 자리한 북대문이다. 서울성곽은 시대별로 축조의 형태가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숙정문에 이르면 그 모습을 비교 관찰할 수 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숙정문은 음기가 강해 문을 열어두면 장안의 여자들이 음란해지므로 문을 닫아두게 했다.’라는 재미난 기록도 남아 있다.

숙정문은 하산의 갈림길이다. 홍련사 쪽으로 내려가거나 와룡공원 방면으로 좀 더 걸은 후 하산한다. 홍련사 쪽은 삼청각과 성북동으로 이어진다. 길상사나 심우장, 최순우 옛집 같은 일대의 문화재 탐방을 겸해도 좋을 듯하다.

삼청공원 쪽은 삼청동에 가닿는다. 젊은 사람들은 창의문에서 출발해 삼청동 카페에서 산행을 마무리한다. 일대의 갤러리 투어도 권할만하다. 북악산 산행은 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큰 무리가 없으니 산행을 싫어하는 이들도 가을단풍과 서울성곽을 핑계 삼아 다녀올 법하다. 말바위와 창의문쉼터에서는 각각 오전 10시와 오후 2시 해설사와 함께하는 북악산 서울성광 역사 탐방도 이뤄진다. /여행전문기자

찾아가는 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4번 출구에서 0212번,1020번 버스 이용 자하문 하차/09:00~15:00(4~10월) 10:00~15:00(10~3월) 월요일 쉼. 월요일 공휴 시 화요일 쉼/02-730-9924
www.buka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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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정문 '숭례문'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

도성과 다른 성문들, 정말 이대로 방치하나?


한양도성의 '정문'인 숭례문 복구가 완료됐다. 국민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 숭례문(崇禮門)은 더없이 반갑지만, 복구된 숭례문 화려한 조명 이면에는 여전히 우리가 눈 감고 있는 불편한 진실들이 놓여있다. '정문'의 그림자에 가려진 도성의 '다른 문들' 그리고 이 문들을 있게 한 '한양 도성'의 부끄러운 보존 및 복원 현실이 그것이다.



숭례문은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정문(正門)이었다. 숭례문이 도성의 남측 통행문으로서만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국가 시책을 보여주는 공개적인 장소이자 국가적인 중죄인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정치적인 선전장, 나아가 중국 사신을 전송 내지 접견하는 주요 외교행사의 장으로 활용됐던 것은 바로 도성의 정문이라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강점과 6.25 전쟁, 그리고 도심 난개발 속에서도 600년을 꿋꿋이 버텨온 도성의 정문은, 5년 3개월 전 '땅값 보상'에 불만을 품은 한 노인의 방화에 몸을 내어줬다. 숭례문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 우리 사회 도처에서 벌어지는 부동산 투기 개발 열풍과 그로 인해 파괴돼가는 역사문화자원의 비참한 현실을 대표적으로 그리고 극단적으로 고발해주었다.

그리고 5년 3개월만에 복구된 숭례문. 이 숭례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한 교훈을 과연 우리 사회는 이번 복구 과정을 통해 체득한 것일까. 숭례문이 고작 '문화재 화재 예방과 방재 시스템 구축 필요성'을 교훈하고자 그렇게 불에 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숭례문이 보여준 것은, 사유재산 극대화를 위한 부동산 개발 때문에 지금도 수없이 파괴돼가는 우리 사회의 역사문화유산과 유적들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서는, 숭례문 자신을 정문으로 삼은 '한양도성' 그리고 자신과 함께 도성의 문을 이루고 있는 '다른 성문'들이 처해있는 부끄러운 현실이다.

◇ '한양도성'과 '다른 성문'들의 지금은 어떠한가

먼저, 한양도성을 살펴보자.

한양도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도읍의 성곽' 즉 도성으로서 기능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그 길이 역시 현존하는 도읍의 성곽 중 최장의 길이를 자랑한다. 지금도 원래 전체 둘레 18km 중 12km에 걸쳐 세워져 있는, 서울 도심의 대표적인 역사문화유적으로,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재목록에 등재됐다.

그러나 한양도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도, 숭례문이 복구된 지금까지도, 도성의 부끄러운 보존 현실은 바뀌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현대 도로 체계 속에서 교통을 목적으로 한 도성의 부분적인 파괴는 불가피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성곽 유실 구간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문제는 지금 남아 있는 성곽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아래 사진에서처럼, 서울의 대표적인 역사문화유적인 '한양도성'은 곳곳에서 개인 주택의 축대, 주차장의 담벼락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개인 주택이나 주차장뿐이 아니다. 한국자유총연맹 본부 건물인 남산자유센터는 아예 도성 성곽 돌을 옮겨다가 센터 건물 축대로 쓰고 있다.

자유센터 옆 타워호텔을 리모델링한 반얀트리호텔은 도성을 땅 밑으로 밟고 서 있다.

한양도성의 보존과 복원을 지휘해야 하는 서울시장의 관저 '서울시장공관'은 혜화문 옆 한양도성에 걸터앉아있다. 이 문제가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됐지만, 서울시장공관은 여전히 제자리다. 지난해에 비로소 공관 이전 계획이 나왔지만, 2012년 10월 공관의 공원화 착수, 올해 3월 공관 이전 완료라는 일정은 아직 진행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다음으로, 성문들을 살펴보자. 한양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있다. 4대문 중 도성의 정문이자 남대문이 '숭례문'. 동대문이 '흥인지문', 북대문이 '숙정문', 서대문이 '돈의문'이다. 4대문 중 서대문인 돈의문만 철거된 채 빈 자리로 남아있다. 그리고 4소문 중 북소문이 '창의문'(일명 자하문), 동소문이 '혜화문', 남소문이 '광희문', 서소문이 '소의문'(소덕문)이다. 현재 서소문인 소의문이 철거된 채로 빈 터다.

서울시는 돈의문을 2013년까지 복원한다는 계획을 2009년에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돈의문 복원은 교통 문제와 예산 및 원형 복원 등의 문제가 겹쳐 2022년까지 중장기 과제로 미뤄진 상태다. 원형 복원이 아닌 어설픈 모형은 오히려 '진정성'을 해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에도 역효과를 낸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복원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다만 서울시가 기존에 발표한 계획을 유보하거나 뒤집을 때에는 바뀐 입장을 다시 공식 발표하고 시민들에게 그에 합당한 설명을 해야 함에도, 대충 어물쩡 넘어가는 모습은 문제로 지적돼야 한다.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역사문화유산의 많은 문제들은, 돈의문처럼 복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숙정문과 혜화문처럼 잘못 복원해서 발생하는 것이 사실이다.

먼저,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은 북악산 위에 세워졌지만, 풍수지리상의 이유로 사실상 문의 기능을 하지 않는 상징적인 대문이었다. 태종 때 아예 폐쇄됐던 숙정문은 1504년에 동쪽으로 약간 옮겨 문루 없이 석문만 세워졌다. 문루 없이 석문으로만 500년을 지나온 숙정문에 별안간 없던 '문루'를 세워 올린 것은 1976년. 북악산 일대 성곽을 복원하면서 숙정문에 없던 문루를 굳이 지어 올리고, 있지도 않던 '숙정문'이란 편액을 달았다.

숙정문 편액(扁額)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이 때문에 '복원된' 숙정문은 두 가지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는, 500년간 없던 문루를, 태조 당시 문루가 있었다는 주장에 기댄 채 원형 자료도 전혀 없이 가상 모형으로 지어올려서 도리어 원형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있지도 않았던 편액을 그나마도 당시 한자 글쓰기 순서(우→좌)를 무시한 채로 써서 달아올림으로써 숙정문의 역사문화유산적 진정성을 해쳤다는 점이다. 다만, 1976년 당시에는 전통문화 복원에 대한 지금과 같은 정밀한 시각이 부족했기에, 의욕적인 당시 문루와 현판 복원 시도 자체를 무조건 비난하기는 무리일 수 있다.

문제는, 광화문(光化門) 현판이 교체되고 숭례문이 복구되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계속 제기되는 숙정문 복원 잘못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연관된 정치적인 논란을 우려해 이를 바로 잡기 위한 논의가 전혀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고 봐야 한다.

다음으로, 동소문인 혜화문(惠化門)은 일제강점기 철거된 후 1994년 복원됐지만 이 역시 원형 복원이 아닌 모형 건축에 가깝고, 위치 역시 제자리가 아니다. 교통 문제 때문에 원래 자리인 동소문로에 놓이지 못하고 그 옆에 좀 비껴서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동소문로가 일제강점기 전철길이 놓인 후로 동소문로 아스팔트길이 깔릴 때까지 수십년에 걸친 도로 개설과 활용으로 그 길 높이가 깎여 내려가는 바람에, 역설적으로 동소문로에서 옆으로 비껴 있는 지금 혜화문 터의 지대 높이는 당시 혜화문 지대의 높이를 유지하고 있다.

교통 문제 등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할 때, 혜화문을 원래 자리인 동소문로로 당장 옮겨서 원형 복원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당장 고쳐야 할 심각한 문제는 혜화문의 현판이다. 혜화문의 원래 현판이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현판을 만들어 붙였다. 게다가 그 정체불명의 한자 글씨마저도 숙정문처럼 순서(우→좌)를 무시한 채로 써 놓았다.




원래 현판이 보존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 혜화문 현판은 혜화문의 역사유산 진정성 훼손을 넘어 아예 우리 낮은 문화재 복원 의식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증표라고 봐야 한다. 이 역시 여러 차례 문제가 제기됐지만, 고쳐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이런 웃지 못할 문제는 한양도성의 또 다른 문인 '암문'의 표지판에서도 나타난다. 암문(暗門)은 성곽의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드는 비밀 출입구다. 이름 그대로 비밀스러운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일반 성문보다 작다. 이 암문이 한양도성에도 있었는지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존재했을 것이라는 추정하는 시각이 많다. 지금 한양도성에 있는 암문들은 조신시대 암문이 아니라 성곽 안팎을 쉽게 드나들도록 복원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암문을 가리키는 영어 표기가 '기상천외'하다. 낙산공원 정상에 있는 암문 표지판의 영어 표기를 보면, '어두울 암'(暗)자를 쓰는 암문이 'Rock Gate', 즉 '바위 암'(巖)자를 사용한 암문으로 둔갑한 것이다. 암문이라는 것이 성곽 건축에 있어서 공식적인 용어임을 감안할 때, 한양도성 보존 관리를 이끌어가야 할 서울시와 종로구에서 이런 실수를 범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시와 구가 이 표기를 지금까지도 고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복구된 도성 정문 '숭례문'의 화려한 조명 이면에 놓여 있는 불편한 진실들을 몇가지만 추려서 만나봤다.

숭례문의 진정한 복구는 단순한 건축물의 복구가 아니라, 우리가 잊고 있던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가치의 복원이며, 그것을 대하는 태도의 성찰이어야 한다. 개발과 재산 증식에 대한 욕구로 공공의 문화재인 역사유적 파괴에 눈을 감아 온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숭례문을 정문으로 삼은 '한양도성'과 '다른 성문'들을 올바로 보존하는 노력으로 결실을 맺어야 한다.

새롭게 선 숭례문이 지금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숭례문이 '미래의 문'이라는 대통령의 구호도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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