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 42년 작곡·연주한 '만주국' '한국 환상곡'과 두군데 선율 흡사"
음악연구가 송병욱씨, <객석> 기고문 통해 안익태 친일 의혹 정면 제기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가 1942년 일제의 괴뢰국가였던 만주국을 찬양하는 음악을 작곡하고 이를 연주한 동영상을 둘러싸고 논란이 재연될 전망이다. 이와 함께 애국가의 원곡 '한국 환상곡'이 멜로디의 일부를 이 음악으로부터 빌려왔다는 주장도 함께 제기됐다.
음악연구가 송병욱(훔볼트대 음악학과 석사과정)씨는 공연예술전문지 <객석> 3월호 기고문을 통해 독일 연방문서보관소(Bundesarchiv) 산하 영상기록보관소(Filmarchiv)에 존재하는 '안익태 영상물'의 내용을 소개했다.
<조선일보>는 안익태가 1942년 독일 베를린 구(舊) 필하모니 홀에서 지휘하는 동영상 스틸사진들을 8일자 신문에 보도했는데, 이 동영상은 2000년 3·1절에 MBC <뉴스데스크>에 이미 소개된 바 있다. 이미 '구문'인 것이다. MBC 베를린특파원이었던 손관승 보도제작1 책임프로듀서가 당시 리포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스틸 사진은 MBC가 2000년 이미 보도
▲ 1940년 부다페스트발 로마행 기차에 오른 안익태. 그의 1940년대 행적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 안익태기념재단
"지휘봉을 잡은 안익태의 손이 하늘 높이 올라갑니다.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던 베를린 필하모니의 단원들도 안익태의 손길 하나하나에 따라 빈틈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베를린 방송합창단의 화음이 장중합니다. 극동의 이름 모를 나라 조선에서 온 작곡가 안익태의 얼굴과 그의 음악이 유럽 전역에 처음으로 중계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열정적인 모습으로 지휘하는 안익태의 모습에 노랑머리의 나치 고위관료들과 일본 황실의 가족들도 찬탄을 금치 못합니다. 해방 이후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인 이 화면은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만주국 설립 10주년 기념으로 마련한 음악회입니다. 이 화면은 35mm의 필름형태로 독일 국립영화보관소의 창고 깊숙이 숨겨져 있다가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이게 된 것입니다."
곡을 연주한 악단이 베를린 필하모니가 아니라 베를린대방송관현악단이라는 점을 빼고는 <객석>과 <조선>이 보도한 동영상과 동일하다. 손 CP는 8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안익태가 2차대전 때 독일에서 활동하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단독 취재한 내용인데, 국내언론 몇 군데에서 인용 보도한 뒤 흐지부지됐다"고 설명했다.
6년만에 새로운 의미로 부활한 안익태 동영상
그러나 송병욱씨의 <객석> 기고문은 안익태의 친일 이력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또다른 의미가 있다.
<객석>에 따르면, 이 영상물에는 '만주국 창립 10주년 축하 음악회'라는 독일어 자막이 찍혀있다. 연주곡은 '만주국'이고, 작곡 및 지휘는 안익태, 연주단체는 베를린대방송악단, 합창은 라미 합창단으로 되어있다.
독일주재 일본외교관이었던 이하라 고이치가 자막을 만든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는 작곡자의 이름을 한국어가 아니라 안익태의 일본식 표기인 '에키타이 안'(Ekitai Ahn)으로 표시했다. 손관승 CP도 "필름에 안익태의 이름이 일본어로 표기되어 있는 바람에 2000년에도 필름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고 회고했다.
송병욱씨는 기고문에서 "영상물이 전해주는 '만주국'에는 우리가 현재 알고있는 '한국 환상곡'의 두 선율("무궁화 삼천리 나의 사랑아, 영광의 태극기 길이 빛나라", "화려한 강산 한반도, 나의 사랑 한반도 너희 뿐일세")이 거의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만주국'은 1943년 2월 11일 빈 심포니 연주회에서도 연주됐다. '만주국'은 그동안 악보도 없었고 안익태의 작품 연보에도 올라있지 않았던 작품이다. 그러나 이하라 고이치가 쓴 '만주국' 합창 가사를 보면, '만주국'의 창작 의도를 의심할 만한 내용이 담겨있다. 총 4연의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10년 세월 제국은 무르익었다. 부지런한 땀은 보답받았네. 민중은 환호한다. 나라는 저 멀리 빛난다./ 하나의 생각으로 통일되어 사람들은, 희망에 차 번성한다. 난(蘭)은 환히 피었고, 새 질서의 첫 열매가./ 우리는 일본과 굳건히 연결되었네. 이 신성한 목표 속에 하나의 심장과도 같이, 영원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라네, 독일이여 또한 이탈리아여 힘을 냅시다./ 영원한 봄날은 이미 가까이 와있네, 모든 족속 만족해할 그날이. 보라! 저 만주 평원 위에, 향기로운 난 환히 피었다."
'만주국'과 '한국환상곡'의 가사는 각각 다르지만, 두 군데에서 아주 흡사한 선율이 있다는 게 송씨의 주장이다. 송씨는 기고문에서 공통 선율 이외에 ▲'만주국' 축전음악의 원제에서 '만주국'을 '코리아'로 바꿔 넣으면 그대로 '한국 환상곡'의 원제목이 된다는 점 ▲두 작품 모두 원래 3악장의 관현악곡이었다는 점을 들어 두 작품이 매우 유사하다는 주장을 폈다.
1935년 7월 미 필라델피아 음악대학을 졸업한 안익태는 그해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리는 작곡 콩쿠르에 응모하기 위해 애국가가 없는 '한국 환상곡'을 작곡한 뒤 이듬해 6월 애국가 부분을 추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환상곡'은 1938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초연된 후 1940년 이탈리아 로마를 끝으로 더이상 연주기록이 없는 데 반해 '만주국'은 1942년과 43년 잇달아 공연됐다.
'만주국'과 '한국환상곡', 매우 흡사
송씨는 더 나아가 이후쿠베 아키라(伊福部昭)의 1935년 작품 '일본 광시곡'이 '한국 환상곡'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론도 내놓았다. 이후쿠베 아키라는 영화 <고지라>의 테마 음악으로 유명한 일본의 대표적인 작곡가인데, 지난달 8일 91세 나이로 타계했다.
송씨는 "미국 보스턴에서 1936년 '일본 광시곡'이 초연될 무렵 안익태는 필라델피아 심포니 클럽의 부지휘자였으므로 이 같은 사건을 몰랐을 리가 없다"며 "제목의 유사성과 창작시기로 볼 때 한국 환상곡은 일본 광시곡의 성공에 자극받아 작곡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송씨는 "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단서를 달았는데, <객석>은 송씨의 두번째 기고문을 4월호에 실을 예정이다.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가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의 건국을 축하하는 음악을 만들고 지휘했다는 사실은 그의 이력에 뼈아픈 오점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1945년 해방 후 안익태가 보완한 뒤 1948년 국가로 제정된 애국가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이 재개될 가능성도 있다. 1964년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가 "애국가가 불가리아 민요(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표절했다"고 주장한 뒤 '새 국가 제정' 시비가 붙었지만, 1977년 정부와 한국음악협회는 국가를 새로 만들지 않는 것으로 결론내렸다.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씨는 "안익태는 그동안 일제시대 한인음악가중에서 흠 없는 인물로 알려져 왔다"며 친일 주장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안익태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학술심포지엄을 준비하고 있는 안익태기념재단(이사장 김형진)은 지난 6일 이사회에서 심포지엄에서 안익태의 공과를 두루 다룬다는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안익태의 손자 미구엘 안(스페인 마요르카섬 거주)씨는 "할아버지가 나온다는 동영상을 보기 전에는 이번 건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의견을 <오마이뉴스>에 전해왔다.
2006-03-08 19:47 ⓒ 2007 OhmyNews
안익태의 친일논란, 그리고 <조선>의 줄타기
[뉴스가이드] 충격적인 특종과 놓치면 안될 것들
충격이다.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가 만주국의 창립을 기념하는 음악작품을 작곡한 것은 물론 이 음악작품을 직접 지휘까지 했다고 한다. <조선일보>의 보도다.
1942년 독일 베를린의 구(舊) 필하모니 홀에서 열린 '만주국 창립 1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을 지휘해 자신이 작곡한 '축전음악'을 연주했으며, 이 작품을 작사한 사람은 일본인 에하라 고이치였다고 한다.
만주국이 어떤 나라인가? 명색만 국가였지 일제가 세운 괴뢰에 불과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안다. 그런 만주국을 찬양하는 음악작품을 작곡하고 지휘까지 했다면 이는 명백한 친일행위다.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조선일보>는 기사의 근거로 동영상을 제시했다. 독일 훔볼트 대학에 재학 중인 송병욱씨가 독일 영상자료실인 트란지트 필름에서 입수한 7분짜리 동영상이다. '축전음악'을 지휘하는 장면으로, 무대 중앙에 일장기가 세로로 걸려있는 장면도 들어있다.
물론 검증할 바는 남아 있다. <조선일보> 기사 어디에서도 안익태가 '축전음악'을 작곡한 근거는 제시돼 있지 않다. 동영상이 지시하는 바는 '지휘' 뿐이다. 하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 '축전음악'을 지휘한 걸 두고 대수롭지 않다고 할 한국인은 별로 없다.
관심사는 후폭풍이다. <조선일보> 보도가 사실로 확정될 경우 파문은 커진다. 한 개인의 친일 행적 판정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바로 애국가의 정통성 문제다. 사안은 민감하고 논란은 격하게 진행될 공산이 크다.
그래서일까? <조선일보>는 "고민거리를 던지고 있다"고 했다. "뛰어난 음악인"과 "지금 시각에서 볼 때 유감스러운 행적"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일보>가 나아간 곳은 여기까지다. 화두만 던졌을 뿐 해법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다. 사안이 예사롭지 않기에 신중을 기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점은 달리 봐야 한다. 화두만 던진다 해도 어떻게 던지느냐에 따라 논의와 해법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의 화두 제기 방식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런 식이다.
<조선일보>는 "안 선생이 1940년대 친 추축국(독·이·일) 성향의 음악회에서 활동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20세기 최고의 재난과도 무관치 않다"고 전했다. 동영상 제공자인 송병욱씨의 말이다.
안익태가 '축전음악'을 작곡·지휘한 때는 "20세기의 명 지휘자 푸르트뱅글러와 카라얀도 나치와 협력했던 일을 한 시기"라는 점도 환기시켰고, 안익태의 스승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수많은 걸작을 남겼지만 나치가 집권한 뒤 제3제국 음악원 총재직을 맡기도 했다"는 점도 지적했다.
읽기에 따라서는 불가역 상황을 강조한 구절로 이해될 수도 있다. "지금 시각에서 볼 때 유감스러운 행적"이지만, 당시 시각에서 볼 때는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는 논리 말이다.
뿐만 아니다. <조선일보>는 기사를 1면 아랫부분에 3단으로 배치했다. 특종 지상주의가 판치는 한국 언론의 풍토를 고려하면 의외다. <조선일보>가 1면 머리기사로 올린 이해찬 총리 골프 파문 기사는 골프모임에 참석한 이기우 교육부 차관의 기자회견 내용으로, 모든 신문이 다 받은 것이다. 특종을 내리고 구문을 올렸다는 얘기다.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조선일보> 사주의 친일 행적과 지면의 친일 논조는 이미 공지의 사실이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조선일보>라면, 특종이라고 해서 무조건 키우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반론도 나올 법 하다. 편집 방침은 신문사 고유의 판단이므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지 말라고 할 수 있고, 관련 사실은 엄밀히 추려 전달하지 않았느냐는 반론 말이다.
마냥 내칠 수도 없는 반론이니 일단 접수하자. 토론거리로 남기면 될 일이다. 다만 한 가지만 확인하고 넘어가자. <조선일보>의 보도를 계기로 전개될 공론에서 놓치면 안 되는 게 있다.
공론의 축은 "유감스러운 행적"에 대한 판단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지금 시각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당시 상황"도 고려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축은 안익태 개인에 대한 평가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조선일보>의 편집태도를 둘러싼 갑론을박을 이해하는 데에도 빼놓지 않고 살펴야 할 근본문제다.
2006-03-08 10:33 ⓒ 2007 OhmyNews
"안익태는 연주 기회 많이 잡고 싶어했을 것"
애국가 작곡자 '친일' 논란에 국내 유족·연구자 곤혹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가 만든 '만주국'이 발굴된 가운데 국내 연구자와 유족 등이 최근의 친일 시비에 곤혹스런 반응을 보이고 있다.
1998년 <안익태>이라는 이름의 평전을 펴낸 전정임 충남대 교수(음악학)는 10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저서를 펴낼 때만 해도 안 선생의 친일 행적을 보여주는 자료가 별로 없었다"며 뒤늦게 논란이 불거진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는 "안 선생이 작곡한 '한국환상곡'이나 '논개' 등을 살펴보면 민족애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며 "최근에 제기된 친일 의혹에는 억측이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친일 행위를 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이 그 당시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을 감안해야 하는데, 하나의 사건만으로 안 선생을 친일로 보는 경향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 교수는 "안익태의 스승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친(親)나치주의자로 일본과도 우호적인 입장이었다"며 "안 선생이 '만주국'을 지휘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고 풀이했다.
"슈트라우스가 안 선생에게 여러가지 일을 맡겼고, 안 선생도 연주 기회를 더 많이 잡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그런 일을 한 게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안씨에 대한 연구서로는 언론인 김경래가 1972년에 쓴 <위대한 한국인 안익태> 등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전 교수의 저서 <안익태>가 시중 서점에서 유일하게 구할 수 있는 책이다. 전 교수는 최근 발견된 미공개 악보 등이 들어간 증보판을 오는 6월 재발간하기로 했다.
조카딸 안순영씨 "당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
안씨의 조카딸 안순영(성악가, 안익태기념재단 이사)씨도 이날 오전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그 당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걸 비춰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날 방송에 잠시 소개된 '만주국'과 '한국환상곡'이 흡사하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그분의 작품에서는 항상 한국민요 같은 게 나오기 때문에 스타일이 비슷하다고 해서 여러가지 얘기가 나오는 것은 유감스럽다"고 주장했다.
'만주국'의 존재를 몰랐다는 안씨는 만주국을 찬양하려는 게 아니라 한국의 독립이나 민요를 여러 나라에 보여주기 위해 한 행동일 것으로 해석했다. 생전의 안익태는 세계 곳곳에서 연주여행을 하는 동안 '한국환상곡'을 연주할 때는 외국인 합창단에게도 '애국가' 부분은 한국어로 부르도록 주문했다고 한다.
안씨는 "그분의 음악을 깊이 이해해야지, 위대한 음악성과 나라사랑이 가려지는 것은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애국가를 얼마나 사랑했고, 가족들이 한국에 애국가를 기증까지 하지 않았냐"며 '새로운 국가 제정' 논란에 대해서도 불쾌한 심정을 드러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안익태와 손기정이 1936년 올림픽이 열린 베를린에서 만나 애국가를 함께 불렀다는 등의 풍문도 명확한 검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전정임 교수는 "생전의 손기정씨는 '베를린에서 안익태를 만난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2006-03-10 10:50 ⓒ 2007 OhmyNews
안익태의 '황제'는 일본천황이었나
38년 "한국인에게 음악은 2천여년 전 첫 황제와 함께..." 인터뷰 논란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씨가 1940년대 독일주재 일본외교관의 집에 머물며 베를린 일본공관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한 일본 천황을 '한국인의 첫 황제'로 지칭한 듯한 안씨의 1938년 인터뷰 기사도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음악연구가 송병욱(훔볼트대 음악학과 석사과정)씨는 지난달에 이어 공연예술전문지 <객석> 4월호 기고문을 통해 안씨가 은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보낸 편지 2통을 소개했다. 편지는 1942년 3월 24일과 44년 2월 23일에 각각 작성됐다.
베를린 전출입 문서 보관소에 따르면, 발신지는 1940년 부임한 일본 외교관 이하라의 집이었고 서류에 '치외법권'이라는 문구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 '외교관 이하라'는 최근 논란이 된 '만주국'의 작사자 이하라 고이치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안씨는 1942년 편지에서 "이하라씨와 저는 진심으로 선생님(슈트라우스)의 6월 베를린 체류시 선생님과 사모님을 저희 집에 손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저희 집'이라는 표현과 발신지를 종합해 보면 안씨는 1942∼44년 일본 외교관의 사저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안씨는 같은 편지에서 "베를린에 오시면 부디 사무실로 저나 이하라씨 앞으로 도착하셨다는 전보 한 통 보내주십시오"라고 썼다. 송병욱씨는 "이 '사무실'은 외교관 이하라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일본 외교공관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안씨의 부인 로리타 탈라베라가 1974년에 쓴 회고록 <나의 남편 안익태>에는 "1940년 부다페스트의 일본대사관 주최 파티에서 안익태와 인사를 나눴다"는 '헝가리 귀족 부인' 릴리 카시안의 얘기가 담겨있다. 1935년 '애국가'를 작곡했던 안씨가 적어도 2차대전 시기에는 일본으로부터 '불령선인(불온한 조선인)' 대우를 받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씨는 1944년 독일 패망 후 스승 슈트라우스가 전범으로 몰리자 파시스트 정권 지배하의 스페인으로 피신했다.
안씨가 1938년 2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한국환상곡'을 초연하기에 앞서 현지언론과 가진 인터뷰에도 친일성향이 의심되는 대목이 있다. 미주 <한인학생회보> 1938년 4·5월호에 따르면, 안씨는 <아이리쉬 타임스>에 이렇게 말했다.
"2천만 한국인들에게 음악은 하늘로부터의 선물이다. 음악은 2천여 년 전 첫 황제와 함께 하늘로부터 직접 왔다.(It came to them with their first Emperor direct from Heaven over two thousand years ago) 그것은 여러 세대 동안 노래와 연주곡의 형태로 충실히 보존되어왔다"
송씨는 "음악은 하늘로부터 왔다"는 발언이 안씨가 같은 해 8월 완성한 '에텐라쿠(越天樂, 하늘에서 온 음악)'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
'에텐라쿠'는 일본 황실의 궁중음악으로, 일본 음악가 고노에 히데마로가 이를 서양 관현악으로 편곡한 작품을 만든 바 있다. 안익태가 고노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1938년 8월경 안익태판 '에텐라쿠'를 만들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안익태는 이 곡이 해방 이후 정치상황 하에서 더 이상 '에텐라쿠'라는 제목으로 통용될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곡에 어느 정도 손질을 가한 후 그 명칭을 내용상 같은 의미를 갖도록 '강천성악'으로 바꾸는 한편, 마치 세종의 아악 창작 과정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듯 이야기한 것으로 추정된다."(송병욱, <객석> 3월호 기고문)
안씨가 인터뷰에서 '2천여 년의 첫 황제'를 말한 것도 의문으로 남는다. 안씨는 1936년 3월 26일 <신한민보> 기고문에서 두 차례나 '4천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그는 2년만에 한국사의 연원을 2천년이나 줄여 잡은 셈이다. 송씨는 안씨가 당시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던 점을 들어 실언 가능성을 배제했다.
한국사에서 '2천여 년의 첫 황제'에 근접한 인물로 고구려의 동명왕(BC 58∼19)과 신라의 박혁거세(BC 69∼AD 4)를 들 수 있지만, 안씨가 단군 왕검을 제쳐두고 이들을 '첫 황제'로 지칭했을 지 의문이다.
송씨는 안씨의 '첫 황제'가 일본 황실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진무텐노(神武天皇)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만, 일본신화에는 진무텐노가 BC 660년에 천황이 된 것으로 나와있기 때문에 안씨가 인터뷰한 시점으로부터 600여 년의 시차가 있다.
한편, 안씨는 <아이리쉬 타임스>와의 같은 인터뷰에서 이씨 성을 가진 왕자(Prince Lee)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움직임을 소개하고 "모국이 아일랜드처럼 독립하길 바란다"고 말하기도 해, 친일의식과 민족의식이 혼재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안씨는 이후 1938년 8월 '에텐라쿠'를 완성하며 일본측으로 돌아섰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송씨의 해석이다. 안씨가 '에텐라쿠'를 마지막으로 지휘한 1943년 8월 18일의 연주회 프로그램에 그의 이름이 한국식(Eaktai Ahn)이 아니라 일본식(Ekitai Ahn)으로 표기된 것도 지금 시점에서 곱씹어볼 대목이다.
▲ 1943년 8월18일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한여름밤의 연주회' 프로그램.
지휘자 안익태(EKITAI AHN)씨가 자신의 작품 '에텐라쿠'를 지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천황 앞서 연주하는 게 청년 안익태 소원"
미국 보스턴 교민 박기식씨는 30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1세대 교민 임창영 박사의 생전 증언이라며 "안익태는 미국유학 시절 첼로 연주에 심취해 있었는데, 청년시절의 안씨가 평소 '내 소원은 일본천황 앞에서 첼로 독주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밝혔다.
96년 별세한 임씨는 1948년 서재필 박사의 개인비서, 1960∼61년 주유엔 한국대사를 지낸 인물이다. 평양 출신의 임씨는 자신보다 2년 늦게 미국에 온 동향후배 안익태가 1932년 필라델피아에 정착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줬다고 한다.
박씨는 "그러나 안씨가 미국에서도 일본식 이름 '에키타이 안'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 못마땅해 임 박사가 안씨를 몹시 나무라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2006-03-31 11:36 ⓒ 2007 OhmyNews
애국가 교체 논의는 이제 필연적이다
[기고] 음악평론가 강헌
▲ 1940년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안익태. (왼쪽 서 있는 사람)
"어둡고 괴로워라 / 밤이 깊더니 /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 동포여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80년대 대학가나 노조에 몸담았던 적이 있다면 '해방가'라는 이름의 노래와 이 노래에 맞춰 추던 군무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광주의 아픔을 머금고 있는 '임을 위한 행진곡'과 더불어 '해방가'는 80년대의 가장 대중적인 투쟁가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나와 당시 거개의 학우들도 이 노래가 해방 직후에 만들어진 오래된 노래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저 김민기의 노래를 제외한 많은 노래처럼 여기저기 캠퍼스에서 재주 있는 익명의 아마츄어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구전된 줄만 알았다. 노래운동이 마악 움트고 있던 참이라 우리가 부르고 있던 투쟁가 류의 노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던 때였다.
그런데 이 노래의 작곡자가 식민지 시대에 현제명과 더불어 적극적인 친일 행위의 가담자였던 김성태이며, 원래 제목은 '독립행진곡'이라는 사실과, 나아가 이 노래의 선율이 관동군의 군가 '만주행진곡'과 유사하다는 당시의 자료를 석사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발견하였다.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노래'라는 소장 평론가들의 집단에서 작은 논란이 벌어졌다. 몰랐을 때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사실을 알게된 이상 이와 같은 사실을 널리 알려서 이 노래를 더이상 부르지 말게 하자는 입장이 하나. 또 하나는 일제시대 때 독립군가 중에서도 일본 군가를 차용해서 노래말만 바꿔서 부른 것도 많지 않으냐, 중요한 것은 목적이고 정신이지 선율의 오리지널리티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이 입장에는 이미 운동권 내의 대표적인 노래로 보급되었는데(혹은 보급시켰는데) 이제 와서 이 노래를 부정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곤혹이 담겨 있었다.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으나 대충 흐지부지된 것 같다. 선배 격인 70년대 학번은 거개가 후자의 입장이었던 것 같고, 후배 격인 80년대 초반 학번들은 전자의 입장이 강했던 정도의 기억만이 남아 있다.
삶과 의식을 지배하는 '친일문화', 새로운 논의로 새 지평 열어야
'애국가'의 작곡자인 안익태가 나찌 치하의 1942년, 베를린에서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찬양하는 음악을 작곡하고 지휘했다는 영상물이 발굴되면서 일어난 논란을 접하면서 근 이십년 전에 있었던 작은 사건이 떠오른 것은 어쩌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영상물 발견자의 제보에 의하면 약 6분 가량의 연주 실황 중에서 '애국가'가 포함되어 있는 안익태의 관현악곡 '한국환상곡' 속의 선율 테마와 유사한 대목이 두 군데 정도 포함되어 있다니 정말이지 아찔하고 유감 천만인 노릇이다.
만약 이 지적이 사실이라면, 이 연주와 작곡 6년 전에 뜨거운 민족 사랑으로 썼던 '한국 환상곡'의 음률이 일장기가 휘장으로 내걸린 제국주의와 파시즘 찬양의 제단에 바쳐졌다는 말이 된다. 독일에서 이 기록 필름의 내용을 전한 제보자는 이 사실로 애국가 교체 논란까지 나아가는 것은 성급하다고 전제를 달았지만, 이미 국내의 상황은 국가 교체 주장이 제기되고 친일 행위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순식간에 벌어지게 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안익태의 친일 가담 문제와 새로운 국가 제정의 문제는 이 기록 필름의 등장 때문에 처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안익태가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후기 낭만주의의 대가 리하트르 슈트라우스의 일본 찬양 작품 '대일본축전'을 일본에서 지휘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그동안 음악계 내부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이 관현악곡은 그 이후로 거의 연주되지 않았으며 음반으로 녹음되지도 않았다.
'애국가'는 '애국가'대로 많은 시련에 봉착해야 했다. 특히 1964년 내한 공연을 가진 불가리아의 지휘자가 자국의 민요와 흡사하다는 이른바 '애국가' 표절 파동이 일었고, 그 이후 십여년이 지나서야 당시 박정희 정부는 새로운 국가 제정이 불가하다고 간신히 입장을 정리했지만 그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새로운 국가의 교체가 다양한 이유로 잊을 만하면 한번씩 제기되곤 했다. 안익태의 친일 여부와 새로운 국가 문제는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면서도 각기 다른 지평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명백한 '친일음악가' 안익태를 감싸는 '친일운명론'
먼저 안익태의 친일 여부부터 시작해 보자. 이 영상 자료 제보자의 염려 아닌 염려나, 국내의 몇몇 음악대 교수들의 안쓰런 안익태 감싸기, 혹은 안익태 기념사업 재단 측의 곤혹스러운 변명,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부 언론의 퇴행적 물타기에도 불구하고, 안익태의 친일 행위는 이제 명백해졌다고 나는 판단한다.
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 중심 국가의 수도 한복판에서, 나찌의 고위 관료들과 일본 황실 인사들을 앞에 두고 일본의 새로운 영토 10주년을 찬양하는 음악을 만들고 연주했다는 사실. 어떤 예술가의 친일 혹은 반민족 행위를 증명하는데 이 이상 더 무슨 자료와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것인가? 이 식민지 조선의 음악가가 일제의 특고(特高)들에 의해 무슨 약물에 중독되어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작품을 만들고 연주했다는 자료라도 필요하다는 말인가?
하필 그 음악가가 60년동안 불러온 국가의 작곡가라고 해서 그 범죄 행위가 은폐되거나 왜곡될 수는 없다. 남아프리카의 어느 흑인 주교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진실에 대한 관용의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사실 문제는 여전히 청산되지 않고 한국 사회 여기저기서 친일파의 후예들에 의해 잔존해 있는, 극복되지 않은 식민지성이다. 이 식민지성은 우리를 현혹한다. 가령 이런 뻔한 논리들이다.
"그때 잘나간 놈들 중에서 친일 안한 놈 어디 있어? 니가 그때 살았어봐, 너도 별 수 없었을 걸? 아마 더 했을지도 모르지…."
이런 후안무치한 말들이야 과거사법 제정 때부터 숱하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준동했던 것들이다. 평범한 사람의 내면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이 악마와 같은 논지는 역사적 인식이 박약한 요즘의 젊은 세대들한테 쉽게 전염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과 결부하여 가장 어이없는 논리는 20세기 독일을 대표했던 지휘자인 푸르트벵글러나 카라얀을 거명하면서 그들도 나찌에 부역한 혐의가 있었는데도 세계적인 음악가로 인정하지 않았느냐는 식의 억지이다.
그러나 서구의 어떤 언론이나 음악학자들도 그들이 나찌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왜곡한 적이 없다. 본인들이 그저 그 사실에 대해 애써 침묵했을 뿐이다. 그리고 안익태의 경우를 그들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카라얀은 제3제국의 군인들을 고무시키는 음악을 연주한 적은 있어도 자기 민족을 피괴하고 억압한 적국을 찬양하는 음악을 연주한 적은 한번도 없다.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은 틀렸다.
국가 교체는 필연, 통일조국 비전과 한민족 일체감 내용 담겨야
안익태가 샌프란시스코 교회에서 망국의 교민들이 스코틀랜드 민요 '오울드 랭 사인'의 선율에 맞춰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 뜨거운 민족애로 지금의 '애국가' 선율을 지을 때만 하더라도 열렬한 민족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식민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보여주었듯이 '대일본제국'의 대세를 수긍하고 적극적인 친일의 대오에 가담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그저 한명의 음악가 안익태에게 강요된 운명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변절의 처세에 대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겠냐의 온정론을 펴는 것이야말로 그 당시의 적극적인 친일 행위보다도 더 무서운 행동이다. 그것은 그 당시에도 친일의 강요에 저항했던 모든 이들에 대한 역사적 모욕일 뿐만 아니라, 반민특위의 폭력적 좌절 이후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성의 남루한 잔존을 또다시 우리 스스로에게서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이 이렇다면 국가 교체 논의는 이제 필연적이다. 입맛이 쓰고 또 쓰지만, 나는 이것이 우리에게 작지만 의미심장한 새로운 전기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기회를 빌어 '애국가'와 그 작곡가뿐만 아니라 우리의 음악사에 종양처럼 붙어 있는 수많은 '식민지적 유제'를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우리는 해방 이후 60여년이 지나도록 오로지 미래를 향해 달려가느라 (사실은 그렇게 몰아댄 이들의 선동에 휘말려) 불행한 과거를 치유하지 못했다. 어디 안익태 뿐이겠는가? 아예 대화악단(大和樂團)이라는 이름 아래 일제말 제국주의의 최전선에서 한반도의 젊은이들을 전쟁으로 인도한 쿠로야마(현제명의 창씨개명한 이름)의 흉상이 국립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정문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고 어쩌면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식민지 역사를 과감하게 청산했다고 하더라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청산이 우리에게 진정한 우리의 음악까지 제공해 주지 않는다. 우리가 새로운 국가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공모해서 인기 투표로 그것을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노래말에 어떤 의미를 담을 것인지 또 무엇보다도 음악어법은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숙고가 필요하다.
해방 공간에서 새로운 민족음악의 기치를 주장하고 그것을 예술적으로 실천했던 위대한 작곡가들은 분단의 협곡에서 좌절당했다. 남쪽에서는 월북했다 하여 역사에서 삭제되었고, 북쪽에서는 남쪽에서 왔다 하여 전후에 숙청되었다. 이들의 음악적 문제의식이 단절되지 않고 계승되었더라면 우리는 이 대목에서 또렷하게 우리의 음악적 정체성을 제시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며 이제 준비를 시작하여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남북 단일의 공간에서 한반도 기와 '아리랑'을 남북 공용의 상징으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그것을 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국가는 통일 조국의 비젼을 담은, 남북한 거주민 및 해외 동포들의 일체감을 창조적으로 발현시키는 노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국가제정위원회도 만들어야 할 것이고, 예술가들은 예술가대로 할 일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서 선결되어야 할 것은 진실의 이름 앞에 우리 마음 속의 식민지 근성이 청산되는 것이다. '애국가' 뿐만 아니라 '해방가' 역시 제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진정하게 우리를 미래로 운반해 줄 것이다.
2006-03-31 12:07 ⓒ 2007 OhmyNews
'에키타이 안' 안익태에 드리워진 친일의 그림자
[서평]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 <일어버린 시간 1938~1944>겉그림
▲ 1942년 3월 12일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 기념. 당시 안익태가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서명해준 사진으로 추정된다(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문서보관소 제공).
▲ 김구주석 휘호로 상해 임시정부가 발행한 안익태 작곡 <애국가> 악보 표지와 악보
<애국가>와 <코리아 환상곡>의 작곡자이면서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1943년 8월)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1906~1965). 지난 2006년은 안익태 탄생 100년이 되는 해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애국가>로 알려진 안익태의 친일행적 미공개 자료들이 속속 밝혀지면서 애국과 친일 논쟁이 분분했다.
<잃어버린 시간 1938∼1944>는 이렇듯 팽팽한 논쟁에 확실한 결론을 제시해 줄 만한 책이다. 제목에서 제시하고 있는 1938∼1944년은 안익태에게 음악가로서 최고의 영광이 주어진 기간이다. 그럼에도 그의 1940년 전후의 음악활동과 작품 기록은 거의 사라진 상태다.
오죽했으면 세계적인 음악가의 명성을 안겨준 1943년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에 대한 기록조차 없이, 연주회 장면이나 지휘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 몇 장이 전부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몇 장의 사진을 토대로 안익태의 영광은 우리에게 전해져 왔을 뿐이다.
성격이 꼼꼼하고 치밀하기로 소문난 그가 (하필 1938년에서 1944년까지만) 기록을 외면한 걸까? 아니면 기록한 것을 누구에 의해 잃어버린 걸까? 아니, 기록한 것을 무슨 의도를 가지고 애써 덮고 있는 걸까?
보이지 않는 <코리아 환타지>의 존재를 찾아서
'나치시대 망명 음악'을 연구한 음악학자인 저자가 안익태의 삶에 궁금증을 가지게 된 것은 독일 유학시절에 접한 한 작곡가의 전기, 즉 그동안 우리에게 안익태의 스승으로만 알려졌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전기에서 만난 '에키타이 안(Ekitai Ahn)' 때문이다.
책에는 나치에 협력했던 슈트라우스가 일본 황제의 위촉으로 작곡한 '일본 축전곡'을 일본 대사에게 악보로 전달하는 사진이 실려 있었는데, 사진과 함께 설명된 앞뒤의 글 중에 안익태, 즉 에키타이 안이 지휘한 빈 연주회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능한 음악인들이 독일을 떠나 미국과 영국으로, 아르헨티나와 일본으로까지 살길을 찾아 망명했을 때, 오히려 나치 독일의 중심부 베를린으로 가서 음악적 성공을 꾀했던 안익태. 아리아인도 아닌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히틀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막강한 음악 권력자 슈트라우스와는 어떻게 알게 되었으며 실제 어떤 관계였는가?"
저자가 1938~1944년의 에키타이 안, 즉 당시 안익태의 행적을 좇는 과정에서 주목한 것은 독일과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는 문화친목단체 '일독회(日獨會)'다. 일본과 독일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주축이었고, 음악회나 전시회, 공연 등을 기획하여 열었는데 안익태는 일독회에서 연주곡을 지정할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저자는 베를린 국립문서보관소 등의 수많은 보관 자료에서 안익태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 당시 독일과 일본의 동맹관계 속 안익태의 일독회 관련 음악활동과 일독회에서의 위치, 영향 등을 집중 조명해낸다. 그러는 한편, 독일에서의 음악 스승으로 알려진 슈트라우스와의 만남과 관계를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지기를 안익태가 슈트라우스와 사제 관계가 된 것은 1938년부터요, 제자의 뛰어난 재능을 후원하는 스승 덕분에 유럽에서 음악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고, 음악가로서 최고의 영광(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지휘 등)까지 누릴 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슈트라우스의 제자가 된 것은 1943년 일독회 행사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유럽 시절부터 애국가가 포함된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했다고 밝혀진 것과는 달리 안익태는 한 번도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한 적이 없다? 게다가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사실들과는 전혀 다르게 일본 황실 음악을 토대로 작곡한 '에텐라쿠'를 주로 선보이는 등 일본 음악가로서의 이미지를 높이고자 애썼다? 의문 투성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독일 국립문서보관서 뿐 아니라 그외 독일에서 확보된 1940년대 음악비평과 프로그램 등의 자료에서 지금까지 안익태의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코리아 환타지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코리아 환타지를 지휘했다고 하는 연주회가 모두 포착되지 않은 것일까? 안익태는 일독회와 관련 없는 다른 연주회를 가진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어디서 코리아 환타지를 연주했는가? 아니면 코리아 환타지를 지휘했다는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닌 허구인가?" - 책속에서
독일에서 '에키타이 안'이란 이름의 일본인이었고 늘 일본음악가였던 안익태. 2차 세계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전후, 일본의 동맹국 독일에서 열리는 연주회에 과연 코리아 환타지가 설 수 있었을까? 책 속에서 만나는 새로 발굴된 자료에는 코리아 환타지가 있어야 할 자리, 안익태가 제시한 정보에 따라 코리아 환타지가 있어야 하는 그 자리에 언제나 '에텐라쿠'가 있다.
그렇다면 '코리아 환타지'와 '에텐라쿠'는 동일 음악?
우리가 잃어버린 1938∼1944년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 1938∼1944>는 전체 6장. 1장에서 5장까지는 독일에서의 안익태의 음악활동, 일독회 활동, 스승으로 알려진 슈트라우스와의 관계, 코리아 환타지의 존재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 행적을 찾아다녔다.
6장에서는 1938년까지만 해도 민족의 독립을 걱정하던 애국자 안익태와 1942년 일본이 만든 만주국의 음악대사로, 또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 등과 협력하는 안익태의 모순을 설명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제시,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정리하면서 앞장의 내용들을 아우르는 형식으로 서술한다.
책의 순서대로 읽든 각 장의 주제에 따라 떼어 읽든 안익태의 삶의 한 부분들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도록 서술했다. 독일어를 전공한 저자가 독일에서 안익태의 행적을 좇아 새롭게 발굴한 자료들이 책의 전체적인 바탕이 됐다. 그동안 안익태 관련 김경래 등이 저술한 책의 내용을 필요에 따라 언급, 비교 설명하여 독자들의 혼란을 줄이려는 노력까지 더했다.
이 책은 이제까지 전혀 공개되지 않고 조용히 숨어 있던, 저자에 의해 새롭게 발굴된 자료들이 풍성하게 수록하고 있어서 자료가치가 높다. 이 자료들과 함께 음악가로서 가장 화려한 영광을 안았음에도 우리에게 거의 알려진 자료가 없는 독일에서의 1938~1944년 안익태의 행적이 자세하게 소개돼 있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에 의해 숨어 있던 안익태의 친일 행적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보면서, 아쉽고 허탈했으며 안타까웠다.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던 안익태나 코리아 환타지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고 할까?
그래서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베를린 국립문서보관소, 코블렌츠 국립문서보관소, 슈트라우스 가족문서보관소(Richard Strauss Archiv),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문서보관소 등의 자료들을 증거로 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들이 아니가.
<잃어버린 시간 1938~1944>는 독일에 숨어 있는 안익태의 자료를 발굴하여 사실과 왜곡의 진실을 추적한 책이다. 식민지 시절의 수많은 예술인들에게 우리는 여전히 친일과 반일이라는 흑백 논리만 앞세울 수밖에 없는 것일까? 책을 덮고도 끝내 아쉽고 허탈한 심정은 어찌할 수 없다. 코리아 환타지는 진정 어디에 있는 걸까?
<잃어버린 시간 1938~1944>(이경분 지음/휴머니스트/2007년 3월 5일/1만3000원) 저자 이경분은 나치시기의 망명 음악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음악과 정치사회에 대해, 음악과 문학에 대해, 우리의 창작음악 그리고 영화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지은 책으로 Musik und Literatur im Exil(New York 2001), <망명음악, 나치음악>(책세상 2004)이 있다.
2007-04-22 14:26 ⓒ 2007 OhmyNews
========================================================================================
겨레를 속여 온 친일노래 ‘선구자’
선구자에 얽힌 작곡가 조두남의 대 국민 사기극
이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나서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로 시작되는 조두남 작곡 윤해영 작시의 ‘선구자’를 불러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노래말의 내용이 장엄하기도 하거니와 곡에 나오는 “말 달리는 선구자”는 바로 만주벌판을 누비던 독립투사를 연상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 시위현장에서 동지들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이 노래를 부르면 은근히 콧등이 시큰해 졌던 기억이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곡 선구자가 이렇게 자리매김 되도록 일조한 작곡가 조두남의 회고록이 완전히 날조된 것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조두남이 말하는 선구자의 진실
조두남의 회고록 ‘그리움’에 의하면 이야기는 19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두남이 목단강의 싸구려 여인숙에 기거하고 있을 때 윤해영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선구자의 가사를 주며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을 염원하고 민족의 구심점이 될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며 가사를 전해 주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조두남이 그의 이름을 물으니 그는 자신의 이름이 윤해영이란 것을 밝히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 날 이후 조두남은 ‘윤해영의 행방을 여러 차례 수소문 했으나 끝끝내 찾을 수 없었노라’고 하여 그의 행적을 신비로 포장함으로서 자신의 선구자를 미화 하였습니다.
조두남의 회고가 거짓임이 드러나다
1932년 목단강의 싸구려 여인숙에 홀연히 나타나 조국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 달라며 선구자의 가사를 전해주고 종적을 감춘 신비의 독립시인 윤해영을 조두남은 다시 만난 적이 없다고 했지만 그의 말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증인이 등장한 것입니다.
바로 중국 길림성에서는 꽤 알려진 음악가인 김종화씨입니다. 그는 조두남이 단장으로 있던 고려악극단원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습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1944년 만주 흑룡강성의 녕안시의 녕안극장에서 있었던 조두남의 신작 발표회에 윤해영이 나타났을 뿐 아니라, 그날 발표된 곡 들이 선구자의 원작 이라 할 수 있는 ‘용정의 노래’ 뿐 아니라 윤해영이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지었다는 ‘목단강의 노래’ ‘산’ ‘아리랑 만주’등의 신곡을 발표하였는데 그날 발표된 곡 대부분이 윤해영의 시에 곡을 붙인 것 이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즉, 선구자의 가사를 전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윤해영’은 계속해서 조두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이 드러난 것 입니다.
선구자의 작사자 윤해영
그런데 왜 조두남은 선구자의 작사자인 윤해영을 1932년 여인숙에서 만난 이후 다시는 볼 수 없었다고 거짓말을 해야 만 했을까요 ?
바로 윤해영이 당시 만주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일제를 찬양하고 옹호하는 작품 활동을 하던 친일 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일제가 만주침략을 노골화 하고 있을 때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소극적으로 일제를 옹호하던 다른 문인들과 달리 그는 적극적이고도 열성적으로 일제를 찬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만주 최대의 친일단체인 ‘오족협화회’의 간부로 활약하면서 ‘만주괴뢰정부’를 찬양하는 [낙토만주]를 공공연히 외친 유일한 문인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두남 자신도 ‘스파이와 오드르’라는 악극을 작곡하였는데 이 내용이 스파이가 설치니 일본인들은 조심하라는 내용이 담긴 친일 악극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두남은 자신의 친일행적을 은폐하기 위하여 윤해영과의 관계를 숨길 수밖에 없었고 한 술 더 떠서 해방 이후 자신과 윤해영의 행적을 미화하기 까지 한 것입니다.
가곡 선구자 무엇이 문제인가?
가곡 선구자는 원곡이라고 할 수 있는 용정의 노래에서 비롯됩니다. 원래 용정의 노래는 만주를 떠도는 유랑민의 애환을 표현한 서정적인 노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광야에서 말 달리는 선구자 같은 내용으로 개작하면서 오늘날의 선구자가 되었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 ‘선구자’라는 말이 독립투사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었단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로 윤해영이 만주괴뢰국을 찬양한 ‘락토만주’란 시에는 ’선구자’란 말이 등장하고 당시 선구자가 어떤 의미로 쓰여 지던 단어였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오색기 너울너울 락토만주 꿈꾼다.
백방의 전사들이 너도 나도 모였네
우리는 이 나라의 복을 받은 백성들
희망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 (중략) ...
끝 없는 지평선에 오곡금파 금실렁
노래가 들리 누나 아리랑도 흥겨워
우리는 이 나라에 터를 닦는 선구자
한 천년 세월 후에 천야만야 빛나리
이 낙토만주에서 ‘선구자’란 말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선구자란 독립운동을 하는 선구자가 아니라 만주국의 건국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선구자라 지칭한 것이며 당시 만주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선구자가 아닌 ‘산사람’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오족이란 일본. 조선. 만주. 몽골. 한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윤해영이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는 일제의 나팔수였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곡‘선구자’를 부르며 콧등이 시큰해야 할 이유가 없었으며 광야에서 말달리던 선구자를 동경해야 할 이유는 더 더욱 없었던 것입니다.
일찍이 문익환 목사님은 조두남의 선구자가 이러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평생 ‘선구자’를 부르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도 ‘일송정 푸른 솔에..말달리는 선구자...’로 우리의 가슴을 비장하게까지 했던 이 노래가 지난 60년간 이 나라의 백성들을 속여 온 조두남에 의해 날조된 거짓 노래임을 인식하고 다시는 이 노래를 부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얼마나 많은 다른 친일 매국노들이 자신들의 친일 반민족 행적을 은폐하기 위하여 애국자를 껍질을 뒤집어썼을까?” 하는 의문에 다시 한 번 가슴이 갑갑해 집니다.
--------------------------------------------------------------------------------------------------------------------------
"친일 넘어 친나치 '안익태의 애국가' 이대로 둘 것인가"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이해영 교수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1906~65)의 친일행적은 10여년 전부터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가 친일파였을 뿐만 아니라, 나치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면 어떨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미국산 소고기 투쟁, 영화 스크린쿼터 등 사회 현안에 대해 정치학자로서 개입해온 이해영(사진)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부)가 이번엔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안익태의 전력’을 파고들었다.
이 교수가 최근에 출간한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삼인)는 지난 8년 남짓 직접 발굴한 최신 자료들을 종합해 그동안 알려진 일본명 ‘에키타이 안’의 친일 행적만이 아니라 친나치 활동까지 고발하는 문제작이다. 지난 11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 연구’ 출간
8년간 독연방문서보관서 등 자료 수집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 등
2차 대전 2년반 ‘나치독일 행적’ 추적
“유럽첩보 총책 에하라의 특수공작원”
정부 나서 ‘안익태 파일’ 등 검증 필요
“국회에서 ‘새 국가 제정’ 공론화 계획”
그 자신 안익태의 주 활동무대였던 독일에서 유학했고, 클래식 음악과 오디오 애호가이기도 한 이 교수는 논쟁적 정치학자답게 안익태 문제에 대한 기존 음악계의 학문적 접근보다 주장이 선명하다.
안익태도 처음부터 친일파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35년께 미국에서 ‘애국가’를 초연할 때만해도 “우리 민족운동과 애국정신을 돕는 데 대단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힌 적이 있다. 안익태가 본격적으로 친일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였다. 1941년 독-소 전쟁이 벌어지자, 일제는 유럽지역 자국민 소개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대로 귀국하게 되면 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오기까지 이룩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에 안익태는 베를린 주재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의 유럽 첩보망 총책이었던 에하라 고이치를 찾아가 “상담을 요청”한다.
그 덕분에 안익태는 1941~44년까지 만 2년 반 동안 에하라의 베를린 자택에 머물 수 있었다. 44년 히틀러의 생일 기념으로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 페스티벌’을 비롯해 그는 동맹국(독일·이탈리아 등)과 점령국(프랑스), 우방국(스페인)에서만 30차례의 공연을 지휘한다. 자신이 작곡한 <에텐라쿠>, <만주국 환상곡>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 등도 연주했다. 특히 그는 나치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이 됐다. 그 회원증에서 그는 출생지를 평양이 아닌 도쿄로 속여서 적기도 했다. 이 교수는 “안익태는 2차 대전이 발발한 이후엔 약한 민족주의 성향마저 탈색되면서 적극적인 친일로 전향했는데, 본래부터 음악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출세욕이 강한 인물이었던 걸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 교수는 안익태가 지휘한 여러 공연이 ‘독-일협회’의 주최와 기획으로 열렸다는 데 주목한다. 독일과 일본의 민간 친교·학술 교류단체였던 독-일협회는 나치의 제정 지원을 받는 당 외곽 조직이자 두 나라의 대외 선전도구 구실을 했다.
이런 점들을 종합했을 때, 이 교수는 안익태를 에하라의 ‘특수공작원’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안익태는 미리 일본의 첩보를 입수한 듯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독일의 우방국이자 파시스트 프랑코가 집권하던 스페인으로 ‘도주’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기피 인물’로 지정된 안익태는 파리는 물론 독일, 오스트리아 등으로는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이 또한 그의 친나치 활동을 방증한다.
그동안 직접 독일 연방문서보관서를 드나들며 ‘안익태 파일’ 등 자료를 복사해왔던 이 교수는 정부 차원에서 추가로 기록과 자료를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안익태 행적 관련 사실관계가 70% 정도밖에 밝혀지지 않은 것 같다. 정부에서 정식으로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에 있는 안익태 파일을 복사해오고, 영상 자료도 사본을 확보해야 한다. 알려지지 않은 자료가 있는지도 조회를 요청하는 등 정부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다.”
안익태의 ‘애국가’가 관행상 ‘국가’로 불려왔지만, 현재 법적으로 지정된 대한민국의 애국가는 없다. 그래서 1960~70년대에도 새로운 애국가를 제정하자는 운동이 있었고, 전두환 정권 때에도 ‘국가 제정 위원회’를 구성해 애국가의 가사와 감상적인 곡조의 문제점을 들어 새 국가를 만들려고 했었다. 즉,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문제는 보수와 진보 양쪽 모두 필요성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60년 넘게 안익태의 유럽 행적이 은폐된 상황에서 그나마 친일 문제가 터진 것도 10년 정도밖에 안 됐다. 지금도 서점에선 여러 종의 ‘안익태 위인전’이 유통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번에 확인 나치 부역만으로도 프랑스에서는 사형감이다. 프랑스는 물론이고 영국, 미국 등에서도 비열한 부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부르는 상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교수는 새로운 ‘국가’ 제정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해 공론화해볼 계획이다. “국가는 가장 중요한 나라의 상징체계 가운데 하나로, 집단 정체성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핵심적인 제의적 절차다. 그런데 비애국적인 국가를 부르고 있다는 이런 문제를 과연 우리 사회가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 있을까. ‘애국가’ 같은 기본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이제는 답변해야 한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안익태는 일제와 나치 독일의 고급 나팔수였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 '안익태 케이스' 출간
"국가(國歌)제정 위원회 구성해 공모형 국가 만들어야"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1906∼1965)의 친일 행적에 문제를 제기해온 정치학자 이해영 한신대 교수가 안익태의 유럽 활동을 분석한 신간 '안익태 케이스'를 펴냈다.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는 192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뒤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1938년 무렵 유럽에 진출한 당대에 드문 서양 음악가였다.
재미 한인단체가 발행한 신문인 '신한민보'에 따르면 안익태는 1935년 12월 28일 한인예배당에서 심혈을 경주해 창작한 애국가의 새 곡조를 연주했다. 안익태는 애국가 멜로디를 '한국 환상곡' 4악장에 사용하기도 했다.
안익태는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고 국립묘지에 묻혔으나, 2000년대 이후 각종 자료를 통해 일제에 부역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다.
지난 2015년 안익태가 1941년 일본 명절에 일왕의 시대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곡인 '기미가요'를 피아노로 연주했다는 내용의 기고문을 찾아낸 저자는 신간에서 이 글을 쓴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 1896∼1969)에 주목한다.
에하라 고이치는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1932년 만주국 건국 이후 하얼빈 부시장을 지낸 뒤 1938년 주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으로 부임해 1945년 7월까지 독일에 머물렀다.
저자는 독일의 한국학자 프랑크 호프만이 발굴한 미 육군 유럽사령부 정보국 문건을 통해 에하라의 실체를 설명한다.
미 육군이 독일과 일본 전직 정보 장교의 진술을 기록한 해당 문건은 "에하라는 주독 일본 정보기관의 총책이었다. 그는 주폴란드 정보기관과 공동 작전을 수행했다"고 명시했다.
참사관이라는 직위는 에하라 고이치가 내건 위장된 타이틀이며, 실제로는 그가 일본 정보기관의 독일 총책이었다는 것이 저자 생각이다.
문제는 저자가 '에키타이 안'으로 지칭하는 안익태가 에하라 집에서 함께 살았다는 점이다. 에하라는 "안 군이 나에게 상담을 받고자 찾아왔다"며 "독소전쟁이 시작되던 해부터 베를린에서 그와 함께 살게 됐다"고 회고했다.
저자는 "안익태는 에하라의 특수 공작원이거나 그의 중요한 다른 무엇이거나 아니면 둘 다일지 모른다"는 호프만의 주장을 인용한 뒤 "에키타이 안이 에하라의 집에서 빠르면 1941년 말부터 1944년 4월 초까지 거의 2년 반 가까이 기식했다는 사실은 안익태가 에하라의 '스페셜 에이전트'라는 강한 심증"이라고 역설한다.
이어 1944년 독일이 점령한 상태였던 프랑스에서 공연한 안익태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에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에키타이 안은 대일본제국과 나치 독일의 고급 나팔수였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에키타이 안이 고급 프로파간디스트로서 용역을 제공한 것은 분명하고, 그 대가로 여전히 그 전모를 알 수 없는 수많은 편익을 수수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비판한다.
안익태가 친일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을 위해서도 활동했다는 충격적 주장을 펼친 저자는 이제 애국가에 대해 재고할 때가 됐다고 주장한다.
그는 "안익태 애국가의 치명적 흠결은 그 선율이나 가사가 아닌 그것을 지은 사람에 있다"며 "애국가를 만든 이는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현재 애국가가 사실상의 국가일 뿐 법으로 정한 국가는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고 "국가(國歌)제정 위원회를 구성해 공모형 국가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삼인. 228쪽. 1만5천원.
'Art & Culture > 문화예술 관련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다 - 여성 예술가 4인 (0) | 2009.05.04 |
---|---|
당신의 클래식 - 문학수 (경향 연재/2006.7~2007.9) (0) | 2009.04.30 |
Sex & Art (0) | 2009.04.21 |
Artist X-File (한겨레 - 노승림) (1) | 2009.04.07 |
Gramophone Best Classic 100 (1995) (0) | 2009.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