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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문화예술 관련글

Artist X-File (한겨레 - 노승림)

by Wood-Stock 2009. 4. 7.

 

클래식 ‘브랜드’의 원조 바이올린 캐넌은 분신 ~ 파가니니와 캐넌


브랜드 마케팅은 문화계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홍보 전략이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는 역시 모차르트다. 1890년 출시되어 116년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초콜릿은 현재 세계 50개국에 수출되는 오스트리아의 특산품으로 자리잡았다. 올해 마침 탄생 250돌을 맞이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모차르트 특수’를 최대한 누릴 전망이다.


모차르트의 이름이 브랜드화한 것은 정작 음악가가 죽고 난 뒤 산업시대 이후의 일이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아티스트의 생존 당시 브랜드 마케팅이 최초로 시도된 인물은 니콜로 파가니니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파가니니’라는 이름에 19세기 빈이 열광한 수준은 거의 우리 시대 대중 스타의 그것과 맞먹는다. 1828년 3월29일 빈 데뷔로부터 약 보름 뒤 있었던 두 번째 연주회에는 빈에 거주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모든 황족들이 참석했다. 연주회장은 시작 3시간 전부터 초만원이었고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발길을 돌린 관객만 수천명에 이르렀다. 파가니니는 그해 여름까지 빈에 머물며 열두 번의 연주회를 열었으며, 빈의 상품점은 그의 초상화가 새겨진 코담뱃갑, 냅킨, 넥타이, 파이프, 당구 큐, 분갑으로 가득 찼다. 심지어 공연 입장권 값인 5굴덴(약 40파운드)짜리 지폐는 ‘파가니너’(Paganiner)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파가니니의 이름을 통하여 가장 유명해진 상품은 다름 아닌 그의 악기, 과르네리 델 제수였다. 이전에 소개한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비오티에 의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현악기가 되었다면, 여러모로 스트라디와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과르네리의 잠재력을 대중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 인물은 파가니니였다.


1742년 연주여행을 다니던 파가니니는 도박 빚 때문에 악기를 저당잡힌 채 바이올린 없이 리보르노에 도착했다. 공연을 위해 자신의 악기를 빌려주었던 극장주 리브롱 대령은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난 뒤 악기의 진정한 주인이 나타났다며 파가니니 말고는 아무도 연주하지 않는 조건으로 그에게 이를 무상으로 넘겨주었다. 그 박력 넘치는 소리로 인하여 ‘캐넌’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 바이올린은 그 뒤 파가니니의 대명사가 되었다.


1837년 제노바에서 사망한 파가니니는 ‘캐넌’을 제노바 시청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으며, 아직까지 파가니니의 다른 유품과 더불어 그곳에 안치되어 있다. 이 캐넌을 연주할 수 있는 특권은 1년에 한 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축제일인 10월12일 ‘프레미오 파가니니’라는 국제 콩쿠르의 우승자에게만 주어진다. 살바토레 아카르도, 지노 프란체스카티 등 파가니니 작품의 연주에 남다른 실력을 보였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캐넌’을 연주한 음반을 남겼다. 재즈 바이올리니스트로는 유일무이하게 레지나 카터가 이 바이올린을 연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팜 파탈로 탈바꿈해버린 ‘샬롬(평화)’ ~ 살로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로 인하여 <살로메>란 이름은 오늘날 팜므 파탈의 대명사로 각인되었다. 자신의 유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의붓아버지 헤로데 왕 앞에서 매혹적인 춤을 추어주고 그 댓가로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살로메>의 줄거리는 본래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바탕으로 작곡되었다. 슈트라우스와 와일드 이전에도 살로메는 여러 예술가들의 관능적인 경외의 대상이었다. 루벤스, 뒤러, 모로, 스탄치오니, 티티안과 같은 화가들이 그녀의 자태를 화폭에 표현하고자 노력했고, 플로베르, 하이네, 말라르메, 헤이우드는 글로써 그녀가 저지른 치명적인 유혹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지만 신약성서 그 어디를 뒤져보아도 ‘살로메’란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성서에는 다만 ‘헤로디아의 딸’이라고만 나와 있으며 실제 내용도 일반적인 문학 작품들과 다르다. 성서에는, 요한의 처형을 사주한 것은 살로메가 아닌 살로메의 어머니 헤로디아이며, 헤로디아는 당시 요한이 남편과 이혼하고 그 이복형과 재혼한 자신을 비난한 데 앙심을 품고 딸을 내세워 이와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적혀 있다.


이후 여러 작가 및 화가들의 입을 거친 이 처형 사건에서 ‘살로메’라는 이름은 당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제푸스의 저서에 처음 등장한다. 하지만 요제푸스조차 요한의 처형에는 살로메나 헤로디아나 모두 관계가 없으며 다만 민중의 폭동을 우려한 헤로데 왕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어쨌거나 이는 당시 민중의 지도자였던 요한이 집권자의 손에 처형된 정치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집권자의 아내와 딸이 아름다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요한은 정치적인 희생물이 아닌 여성의 관능적인 매혹과 편집증적인 욕망에 의한 희생양으로 탈바꿈되어버리고 말았다.


19세기말 보헤미안의 자유를 만끽하며 파리에 체류하고 있던 오스카 와일드에게 이러한 사실의 변용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당시 흠모의 대상이었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위하여 이 작품을 하루 반 만에 완성하였고 더군다나 모국어인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집필했다. 여기에도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영어를 몰랐던 베르나르에 대한 작가의 배려라는 이야기와 당시 성서 속 이야기를 무대에서 상연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던 영국의 법령을 피하기 위한 작은 조처였다는 소리도 있다. 희곡은 1893년에 완성되었지만 프랑스어로 쓴 보람도 없이 연극 <살로메>는 내용이 ‘변태적’이라는 이유로 런던에서 상연금지 처분을 당해 1931년까지 공연되지 못했다.


실상 살로메(Salome)는 유태계 여성 사이에서 흔한 이름 중 하나이다. 히브리어로 ‘평화’를 뜻하는 ‘샬롬’(Salome)이란 단어가 자신에게 매혹되지 않는 남자의 목을 베어 잔인하게 복수를 하는 팜므 파탈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 자체가 실은 아이러니인 셈이다.

 

 

발칙한 오페라, 런던서 원곡공연 ‘완전범죄’ ~ 살로메(2)


오스카 와일드의 연극 〈살로메〉의 파리 초연은 그럭저럭 성공을 거두었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다. 그가 주인공 살로메로 염두에 두었던 사라 베르나르는 마지막에 변심을 하고 출연을 거부했다. 오스카 와일드 본인은 동성애로 고발을 당해 유죄를 선고받고 2년간 영국에서 감옥 신세를 지고 있었다.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와일드는 베르나르에게 자신의 희곡을 팔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을 뿐 희곡은 거부했다.

 

연극 〈살로메〉는 파리 초연 이후 1902년 독일에서 오히려 극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독일 공연은 헤트비히 라흐만이 쓴 독일어 번역판으로 공연되었다. 이 공연을 본 여러 명사들 가운데에는 서른아홉 살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결국 그는 이 대본을 가지고 오페라를 작곡하기로 결심했다.


〈살로메〉 이전에 슈트라우스의 명성은 오페라가 아닌 주로 교향시에 의한 것이었다. 성공을 확신한 슈트라우스는 1905년 6월 음악을 완성하고 그해 12월 드레스덴 무대에 올렸다. 연극과 마찬가지로 오페라 〈살로메〉 또한 무대에 이르기까지 숱한 난관을 넘어야 했다. 파격적인 줄거리에 더해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는 음악적으로도 낯설고 실험적인 요소가 강했다. 주역을 맡은 마리 비티히는 너무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춤추기를 거부했다. 다른 가수들은 노래가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오케스트라 파트에서도 불만은 터져나왔다. 어느 파트에서 오보에 주자는 “오보에로는 제대로 연주할 수 없으니 악기를 피아노로 바꿔달라”고 작곡가에게 요청했지만 그 대답은 걸작이었다. “힘내게. 이건 피아노로도 잘 연주할 수 없거든.”


지휘를 맡은 에른스트 폰 슈흐는 초연 직전까지 슈트라우스와 말싸움을 했다. 슈흐는 슈트라우스의 시대파괴적인 음악적 시도가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슈트라우스는 결국 그에게 “대체, 이 음악의 작곡가가 누굽니까? 당신이요, 나요?”라고 따졌고, 지휘자는 “천만다행으로 당신이지요”라고 대답했다. 이런 비협조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 칼럼에서 소개했던 숱한 오페라들이 7전8기의 고난 끝에 이룩한 성공사례와 대조적으로 오페라 〈살로메〉의 세계 초연은 기막힌 성공을 거두었다. 작곡가와 가수, 그리고 단원은 오늘날의 예브게니 키신에 필적하는 무려 38회의 커튼콜을 받느라 녹초가 되었다. 이러한 폭발적인 반응은 독일 전역의 50개 오페라극장에서 꾸준히 이어졌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간 〈살로메〉는 독일에서만큼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1907년 청교도주의로 점철된 뉴욕 초연 당시에는 제이피모건사의 창시자인 제이피 모건이 끝까지 윤리적인 문제로 공연 철회를 요구했다. 연극마저도 금지시켰던 런던은 살로메의 대사를 수정한다는 조건 아래 1910년 ‘독일어’ 공연을 허용했다. 본래 내용과 상당히 달라진 대사에 가수들은 맥이 빠졌지만 2막 즈음에는 대담하게도 모두 원래 가사 그대로 노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고 결국 완전범죄는 성립되었다.



‘탄호이저’ 막가는 파리귀족들에게 모욕당해 ~ 바그너

 

19세기 파리는 발레에 중독되어 있었다. 수많은 발레 작품들이 새로 만들어지고 초연되었고 오페라 작곡가들조차 극중 줄거리와 상관없이 작품에 발레를 끼워넣기 시작했다. 오페라 극중 2막에 발레 장면이 등장하는 관례는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행이 반드시 ‘발레’의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한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발레 붐을 주도했던 세력은 ‘조키 클럽’이었다. 프랑스 정치권의 부유한 귀족들로 구성된 이들은 발레리나들을 정부로 거느리고 다녔다. 파리 오페라극장은 당시 유럽의 가장 화려한 무대였지만 동시에 가장 정치적이었으며, 타락의 온상이었다. 조키 클럽은 자신의 정부를 이 무대에 세우며 세를 과시하곤 했다.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작곡가는 작품의 질적 가치와 상관없이 그들로 인해 퇴출당하거나 최소한 모욕을 감수해야 했다.


그 모욕의 당사자 가운데에는 바그너도 포함되어 있었다. 1849년 드레스덴에서 시위에 가담한 죄로 독일로부터 추방되어 현상금까지 걸려있던 바그너는 스위스에 망명해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파리는 1845년 드레스덴에서 초연된 <탄호이저>에 대단한 호감을 보였고, 결국 나폴레옹 3세는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이 작품을 공연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는 왕당파 위주로 구성된 조키 클럽의 비위를 심하게 거스르는 일이었다.


초연까지의 과정은 멀고도 험난했다. 당시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되는 모든 작품은 프랑스어로 불러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세 명의 대본 번역가의 작업은 작곡가의 마음에 썩 들지 않았고 심지어 그 중 한 명은 저작권 관련 소송까지 제기했다. 또한 당시 신작 지휘를 맡은 지휘자는 귀도 제대로 잘 들리지 않는 형편없는 노인이었다. 그와 두 번의 연습을 마친 뒤 바그너는 유력인사에게 남은 연습과 처음 세 번의 공연은 자신이 지휘하도록 해달라고 청원했지만 거절당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갈등은 발레의 삽입 여부에 있었다. 드레스덴 초연 당시 <탄호이저>에는 발레 장면이 없었다. 극장 쪽은 2막에 발레를 삽입하자고 요청했지만 바그너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결국 조키 클럽의 협박과 사방팔방의 간청과 탄원으로 인해 2막이 아닌 1막에 발레 장면을 삽입하고 그에 맞추어 음악을 편곡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순진했던 바그너는 아무리 젊은 방탕아들일지라도 오페라를 일단 보고 전개가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알아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는 무리한 기대였다.


1861년 3월13일 나폴레옹 황제 부부를 위시한 파리 사교계 명사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탄호이저>의 파리 초연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단 3번의 공연만에 바그너는 무너져 더 이상의 상연을 포기했다. 조키 클럽은 자신의 발레리나가 무대에 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예 호루라기를 가지고 와서 온갖 소음과 야유를 일삼으며 오페라를 방해했다. 그들의 훼방에 화가 난 다른 청중들이 고함을 지르며 항의하는 사태가 매일같이 이어졌다. 예상치 못한 흥행에 극장 쪽은 계속 공연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이미 겉잡을 수 없이 상처를 받은 바그너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스탈린에게 왕따당한 사회주의자 ~ 쇼스타코비치


2006년을 맞이해 국내 오케스트라들이 특별히 주목하는 작곡가가 있다면 그것은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쇼스타코비치일 것이다. 그가 남긴 무려 열다섯 곡이나 되는 교향곡 가운데에는 아직 국내 초연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작품이 허다하다. 실제로 한국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이 연주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는 연주의 난이도라든가 오케스트라의 수준 여부와는 또 다른 문제인데, 공산주의 작곡가라는 이유로 그의 모든 작품은 냉전시절 금지곡의 영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은 물론 해외에서는 보편적으로 유통 되는 음반까지도 국내에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니, 카라얀이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마저도 검열의 대상으로 삼았던 냉전 시대의 웃지 못할 ‘추억’이다.


흥미롭게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옛 소련 연방 본토에서도 금지곡 처분을 받은 이채로운 기록이 있다. 스탈린이 가장 애호하는 음악가이자 뼛속까지 ‘징한’ 사회주의자였던 그를 궁지에 몰아넣은 작품은 <므첸스크의 멕베스 부인>이라는 오페라였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동명소설을 소재로 한 이 오페라는 셰익스피어 원작과는 전혀 상관 없이, 고용인과의 불륜 때문에 남편을 살해하고 유형지에서 연적의 여자 죄수를 데리고 자살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사회 비판을 담고 있다. 소비에트 당국으로부터 천재 작곡가로 추앙받고 의기양양해 하던 쇼스타코비치는 1926년 야심차게 작곡을 시작해 무려 6년에 걸친 공을 들여 이를 완성했다.


1934년 1월22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말리 극장에서 초연된 <므첸스크의 멕베스 부인>은 작곡가의 노력만큼이나 당시 관객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유일하게 박수를 치지 않고 표정이 굳어 나간 관객이 한 명 있었으니 다름 아닌 스탈린이었다. 다음날 옛 소련의 기관지 <프라우다>는 스탈린의 지령으로 이 작품에 대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어긋나며 지극히 부르주아적이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는 혹평을 실었다. 작품은 이미 서구에까지 알려져 뉴욕, 클리블랜드, 런던, 프라하, 취리히 등에서 초연을 거듭하며 잇단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와 상관없이 쇼스타코비치의 ‘맥베스’는 본토에서 상연 금지 처분을 받았으며 작곡가 당사자는 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수모를 당했다. 소심한 음악가였던 쇼스타코비치는 이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이듬해 교향곡 4번을 초연하려고 리허설을 하다가 스스로 작품을 철회할 만큼 심약해져 있었는데, 이는 그만큼 소련 당국의 예술에 대한 간섭이 극성스러워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그는 4번을 건너뛴 후 교향곡 5번으로 다시금 당국에 의해 국가적 영웅으로 복권되었다.


그로부터 30년 뒤, 모스크바에서는 쇼스타코비치에게 그때까지도 금지되어 있던 ‘멕베스’의 개정을 의뢰했고 이에 작곡가는 스탈린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두 군데를 수정하여 1956년 개정판을 내놓았다. <카체리나 이즈마일로바>라는 제목의 이 개정판은 1965년 스타니슬라프스키 극장에서 초연되어 다시 한 번 화제를 낳았다.



불세출의 춤꾼 29살에 정신분열 비극 ~ 발레리노 니진스키


모든 장르의 예술은 불세출의 천재를 탄생시켜 왔다. 이들 천재에게는 공통점이 몇 가지 존재한다. 요절, 불행한 삶, 사회 부적응, 그리고 시대의 전환기에 출현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남성 발레가 낳은 최고의 발레리노라 할 수 있는 니진스키에게도 똑같은 공식이 적용된다. 1890년 태어난 그는 발레리노로서 최고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스물 아홉 살의 나이에 정신분열증으로 은퇴했다. 춤꾼으로서 정식으로 활동한 시기는 8년 남짓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동안 그는 자신의 재능을 극한으로 발산하며 무대 안팎에서 무수한 업적과 일화를 남겼다.


남성 무용수를 여성 무용수들의 화려한 개인기를 위한 단순한 보조 무용수로밖에 인식하지 않았던 그 시절 니진스키는 여성들을 제치고 스스로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었다. 순수 백인이 아닌 헝가리계 마자르족 계열 출신이던 그는 작은 키에 굵은 다리, 그리고 누런 피부를 조상에게서 물려받았지만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니진스키의 출현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이 시점까지도 아무도 극복하지 못한 그의 높은 도약과 빼어난 테크닉, 그리고 예술성은 그러한 외관상의 약점을 보충해주고도 남았다.


유랑춤꾼이었던 부모의 피를 물려받은 그는 당연히 엄격한 형식에 집착했던 고전발레보다 새롭게 득세하고 있던 모던 발레에 더욱 매력을 느꼈다. 그의 동성연인이자 유명한 모던발레 흥행사였던 디아길레프의 지원에 힘입어 그는 <목신의 오후> <봄의 제전> <페트루슈카> <장미의 정령> 등 기존의 형식에서 벗어난, 역동적이고 원시적 몸짓의 새로운 안무를 창조해냈다.


새 작품에 대한 찬반이 엇갈리는 와중에도 파리 부인들의 니진스키에 대한 애정은 일관성이 있었다. 그의 화려한 도약에 그녀들은 경기를 일으키며 쓰러졌고, 그가 공연을 하는 곳이면 열차를 통째로 전세 내어 그를 졸졸 쫓아다녔다.


겉치레에 급급한 바람둥이들이 화려한 언변으로 파리의 뭇여성들을 유혹했던 것과 달리 불어를 할 줄 몰랐던 그는 오로지 재능 하나로 그들을 매료시켰다. 귀족들은 그를 사랑했지만 니진스키는 그러지 못했다. 한곳에 얽매이길 싫어하는 짚시 특유의 자유로운 정신은 20세기 초 마지막 잔치를 벌이고 있던 옛적 봉건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권위주의를 견디지 못했다. 여기에 그를 아끼다 못해 집착하는 수준에 이른 디아길레프의 과잉 애정이 더해지면서 결국 바이올린 현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천재 춤꾼의 신경줄은 이른 나이에 끊어져 버렸다.


8년간 무대 위의 시간을 뒤로 하고 1921년 은퇴한 니진스키는 무려 30년의 세월을 정신병동에서 지내다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연인의 정신병에 충격을 받은 디아길레프는 그보다 한 발 앞서 1929년 숨을 거두었다. 니진스키와 더불어 춤의 혁명을 시도했던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 사단은 니진스키의 은퇴와 더불어 쇠락의 길을 걷다가 결국 해체되었다.



툭하면 공연취소 까탈남, 조국 이탈리아 버린 사연은?


피아노는 커다란 덩치에 비해 워낙 섬세한 악기인지라 진동이며 기온 변화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것 이상으로 손상되기 쉽다. 따라서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는 피아니스트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20세기에는 피아노를 직접 공수해가지고 다닌 거장들도 간혹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있다면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고유한 음색으로도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이다. 하지만 그 음색이란 것이 아무 피아노에서나 살아날 수는 없었다. 음량을 인위적으로 다듬고 조율한 그들만의 피아노와 또 그를 따라다닌 전속 조율사의 덕이 크다.


워낙 까다로운 결벽주의자로 유명한 미켈란젤리는 한 가지라도 불만족스러운 조건이 있다면 공연을 취소했다. 날씨, 음향, 그리고 자신의 건강상태가 모두 갖춰져야 무대에 들어섰으며 무엇보다 자신과 함께 여행온 피아노의 컨디션이 가장 중요했다.


한번은 일본에 공연을 갔을 때 피아노의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다. 당연히 미켈란젤리는 공연을 취소했다. 유럽이었다면 미켈란젤리의 이런 튀는 행동이 결코 놀랍지 않았겠지만 일본은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들은 미켈란젤리의 여권을 압류하고 엄청난 위약금을 부과하며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미켈란젤리는 이후 다시는 일본을 방문하지 않았다.


연주회만큼이나 그는 레코딩에서도 까다로운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의 레코딩이 숫적으로 적은 이유는 온전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에만 비로소 마이크 앞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음반 때문에 미켈란젤리는 조국 이탈리아를 등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1968년 미켈란젤리의 전속 음반사였던 비디엠(BDM)사가 파산하자 이탈리아 당국은 그의 피아노 두 대를 압류했다. 조국을 위해 피아니스트라는 신분을 불사하고 총까지 들고 참전했던 그는 대단히 격노해 결국 스위스로 망명했고, 그 뒤 다시는 조국의 땅을 밟지 않았다. 심지어는 주최 쪽이 이탈리아인에게 티켓을 팔았다는 이유로 런던 콘서트를 취소할 만큼 그의 분노는 대단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이탈리아령이 아닌 바티칸에서는 꾸준히 콘서트를 열며 애정을 표시했다.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23세는 미켈란젤리의 동향 친구였으며 수도원에서 함께 생활한 적이 있는 각별한 사이였다.


1960년 4월28일 저녁에도 그는 바티칸 베네딕트 홀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고 있었다. 2악장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밤하늘에 번개가 번쩍였다. 점점 잦아드는 피아노 소리 위로 그 다음에는 천둥소리가 내려앉았다. 마침 천둥이 내려친 시기는 이 마에스트로가 경쾌한 3악장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자연이 선사한 시기적절한 애들립에 잔뜩 고무된 미켈란젤리는 충만한 영감으로 이날 공연을 훌륭하게 마무리했다. 이 연주실황은 아무런 편집없이 있는 그대로 녹음되어 1991년 미켈란젤리의 승인 아래 히스토리컬 레코딩으로 발매되었다. 물론 그 장엄한 천둥소리도 함께.



손 맞잡은 두 명의 슈만


오늘날 명곡이라 불리는 수많은 음악들이 작곡가의 생존 당시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슈만은 가장 불운한 경우에 속한다. 슈만의 음악세계는 본인에게는 유감스럽게도 1856년 작곡가의 죽음을 계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슈만이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1850년 지휘자로 있던 뒤셀도르프 오케스트라에서 무능하다고 비난받은 그는 매우 소심한 남자였다. 결국 그 상처를 못견디고 사표를 던지고 나와 은둔에 들어갔으며 유일한 제자이자 친구인 작곡가 브람스 이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이러한 고립은 우울증으로 번졌고, 몇차례의 신경발작을 거쳐 마침내 정신분열에 이르렀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내 클라라는 남편을 본 근교의 요양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슈만의 와병은 1854년 그가 뒤셀도르프에서 라인강에 투신하면서 결정적으로 세상에 널리 퍼졌다. 자살을 시도하였지만 미수에 그친 그는 심지어 거식증에까지 걸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글자 그대로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슈만의 분열은 그가 아직 멀쩡했을 때 벌써부터 기미가 엿보였다. 스승 비크를 감탄시킬 만큼 훌륭했던 피아노 실력은 그러나 1833년 아직 젊은 시절 손가락을 단련시키겠다는 이유로 약지를 다른 손가락에 묶어서 연습하다가 관절이 경직되면서 피아니스트의 길을 영원히 상실하며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여기에 이어진 형 율리우스와 형수의 죽음으로 재차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작곡만이 유일한 길이었던 그는, 그러나 동시에 음악가로서 문학이란 장르에 극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여러 필명을 가지고 왕성한 집필활동을 벌인 창조적인 문학가이자 비평가이기도 했다. 1833년 창간된 <음악신보>는 처음에는 슈만과 몇몇 친구들이 함께 만들었지만 이후에는 슈만 혼자서 여러 필명을 사용하며 편집을 꾸려나간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당대 음악계의 현학적인 속물들을 비판하고 공격했는데, 이를 위하여 <다비드동맹>이라는 가공의 결사단체를 만들었다.


여러 필명들이 거론되는 이 결사단체 안에서 슈만은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라는 두 가지 필명을 동시에 사용하며 자신의 분열된 인격을 드러내고 있다. 활달하고 저돌적인 성격의 ‘플로레스탄’과 그 반대로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오이제비우스’를 슈만은 아예 자신의 분신으로 삼고 오랫동안 이용하였으며 문학뿐 아니라 음악세계에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클라라 비크와의 결혼 전날 밤의 이야기를 담은 <다비드동맹춤곡집>은 슈만에게 분열 그자체야말로 훌륭한 창조의 원천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피아노 소품들이다.


슈만은 평생을 아내 클라라를 포함한 타인에 대한 질투와 콤플렉스로 보냈다. 그런 그의 죽음이 모차르트라는 눈부신 선배에게 가려 다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인 올해, 2006년은 슈만의 서거 150주년이기도 하다.

 


‘반나치’ 연주하던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여 세상의 모든 클래식의 시선은 오스트리아, 그 가운데에서도 출생지인 잘츠부르크에 모이고 있다. 1920년 여름 처음 개최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이제 전세계 음악의 중심지로, 그 판도를 가늠하는 굴지의 공연예술제로 자리매김했다. 사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의 출생지라는 근거를 제외하고는 음악적으로 크게 의미가 없는 곳이었다. 실제로 모차르트 생존 당시에는 변변한 오페라 극장 하나 없어 음악 활동 자체가 크게 위축되어 있었고, 이는 모차르트로 하여금 빈을 동경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잘츠부르크 돔 무직페라인 음악원이 설립된 것은 모차르트가 사망한 뒤 50년이 지난 이후의 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처음 개최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또한 모차르트와 별로 연관성은 없었다. 1877년부터 1910년 사이 이곳에서 개최된 모차르트 음악제가 그 모태라고는 하지만 크게 개연성은 없어 보인다. 실제로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 그리고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슈탈 등 당대 젊은 예술가들이 오스트리아 황제의 재가를 받고 1920년 개최한 제1회 공연은 광장에서 후고 폰 호프만슈탈의 연극 <예더만>을 상연한 것이 전부였다. 음악은 물론 연극, 무용, 미술 등 예술을 전방위적으로 아우르는 것을 표방하던 이 페스티벌에서 음악, 그 중에서도 오페라가 부각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시작되고 나서도 한참동안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음악가들이 이 행사에 주목을 하게 된 계기는 정치성과 관련이 있다. 독일의 나치주의에 반대하는 음악가들이 하나 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모이기 시작하자 유럽은 이 조그만 도시에 음악이 아닌 정치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1936년 나치에 적극 반대하던 최고의 인기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이 예술제에 음악감독으로 참가하여 콘서트를 개최하면서, 마침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국제적인 축제로 도약했다.


토스카니니의 참여는 대단한 이슈로 부각되어, 이후 이 음악제의 참여를 기피하던 당대 대가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가장 예민하게 반응했던 인물은 당시 토스카니니와 명성과 커리어에서 쌍벽을 이루었던 푸르트뱅글러였다. 잘츠부르크 측에서 아무리 초청을 하여도 무심한 거절로 일관하던 이 지휘자는 토스카니니의 소식을 듣고서는 갑자기 자발적으로 참여를 희망하고 나섰다. 푸르트뱅글러의 이러한 돌발적인 행동에 대한 분석은 그 의견이 분분하지만 토스카니니에 대한 과잉 경쟁심과 친 나치 예술가로 각인되지 않고 싶었던 정치적인 의도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토스카니니에 이어 브루노 발터를 예술감독으로 영입하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음악제로 그 명성을 굳건히 했다. 그러나 나치즘의 세력은 예술가들의 명성보다 더 크고 빠르게 성장하였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접수하면서, 나치즘에 반대하던 토스카니니는 음악제 참가를 거부했고, 브루노 발터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경쟁자가 사라진 페스티벌에 관심이 시들해진 푸르트뱅글러는 나치의 방해가 없었음에도 그 또한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카루소-축음기’ 문화대량생산 길 트다 ~ 테너 엔리코 카루소


음반과 무대에서 수많은 기록을 남긴 테너 엔리코 카루소와 관련된 일화를 풀어내자면, 사실 한 편의 칼럼으로 부족하다. 일단 음반과 관련해서는 지난번 그라모폰 레코드사와 최초의 클래식 음반 프로듀서 가이스버그를 다루면서 잠깐 언급한 바 있다.


1백 파운드를 지불하고 아무런 방음장치 없는 호텔 객실 안에서 단 한 번의 작업으로 이루어진 열 곡 짜리 디스크는 레코딩 산업과 역사의 분기점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카루소 녹음 이전 불과 5천 파운드의 자본으로 설립된 그라모폰사는 이 음반으로 무려 1만5천 파운드의 수익을 냈다.


그로부터 2년 뒤 카루소와 전속 계약을 맺은 빅터사는 230여개의 카루소 음반을 녹음하여 세계 클래식 음반 시장을 석권하였고 카루소는 음반 로열티로만 무려 1백만 달러가 넘게 벌어들이면서 명실공히 ‘레코딩계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또한 음질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레코딩에 거부반응을 보였던 당대 유명 성악가들이 카루소의 성공을 바탕으로 음반 녹음 대열에 하나 둘 줄을 서기 시작했고, 축음기 보급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01년 약 7천5백여대에 불과하던 축음기가 불과 5년 뒤에는 그 10배가 넘는 8만6천대나 전세계에 보급되었다는 빅터사의 통계는 “축음기가 카루소를 만들었나, 아니면 카루소가 축음기를 만들었나?”라는 명언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문화 대량생산’의 시초이자 성공적인 표본으로 각인된 엔리코 카루소는 실제 무대활동도 ‘대량생산’된 레코딩에 필적할 만큼 활발했다. 지지부진한 무명가수로 20대를 보내고 있던 엔리코 카루소는 1894년 나폴리 누오보 극장에서 지휘자 빈센초 롬바르디에게 전격 발탁돼 1897년 스승의 지휘로 팔레르모 극장에서 오페라 <라 조콘다>로 장미빛 인생을 시작했다.


이 신화적인 성공무대 이후 그에게는 오페라 출연요청이 물밀듯이 이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로마, 독일 등지로 이어진 그의 커리어는 마침내 1900년 20세기 시작과 더불어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 안착했고 1902년 런던 코벤트 가든을 거쳐 마침내 대서양 건너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상륙했다. 1902년 가을시즌부터 시작된 엔리코 카루소와 메트로폴리탄의 계약은 무려 1920년까지 연장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장장 607회에 달하는 무대공연을 기록하며 ‘카루소 신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주일정은 결과적으로 그에게 독이 되었다. 그를 무대에 세우기 위한 개런티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메트로폴리탄은 전속계약금에 상응하는 수익을 내기 위해서 카루소를 무리하게 혹사를 시켰다. 방대한 레퍼토리를 소화해내야 한다는 부담감과 무리한 연주일정, 천성적인 완벽주의자 기질, 마지막으로 성악가에게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애연습관은 결국 카루소를 성악가들의 평균연령보다 좀 더 일찍 쓰러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20년 12월24일 늑막염이 악화된 카루소는 메트로폴리탄 무대를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오페라 공연에서 은퇴하였다. 1921년 완치불능을 판정받고 고향 나폴리로 돌아온 그는 1921년 8월 2일 마흔여덟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립싱크 알바에서 황금의 테너로 ~ 테너 엔리코 카루소(2)


땅딸막한 작은 키에 외견상으로는 별볼일이 없었던 카루소의 음역이 본래 테너가 아니라 바리톤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지원아래 처음 레슨을 받을 당시 그는 바리톤으로 시작했고, 이 음역으로 최소한 10년을 공부했다. 때문에 그의 어둡고 선이 굵은 목소리를 때로는 바리톤으로 혼동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무명시절 바리톤 카루소를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열 다섯 살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이탈리아 고향마을의 한 식당에서 노래를 부를 때도 그는 어지간히 못부르는다는 이유로 식당 주인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들으며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식당에서 쫓겨난 카루소는 색다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낮에 공장에서 함께 일을 하던 남자 노동자에게 저녁을 얻어먹는 댓가로 카루소는 그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집 창문 밖에서 세레나데를 불러주었던 것이다. 카루소가 어디선가 숨어서 노래를 부르면 그 남자는 어두운 달빛아래에서 연기를 하며 립싱크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다.


이 남자가 결국 사랑에 골인하자, 카루소의 달콤한 목소리는 금세 노동자들 사이에 퍼져 나갔고, 이 립싱크 아르바이트로 적어도 카루소는 저녁을 굶지는 않아도 되었다. 마침내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스승 베루지네를 만나 테너로 전향한 뒤 온전한 목소리를 찾은 카루소는 바리톤이 아닌 ‘황금의 테너’로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의 유명세가 천장을 찌를 즈음 자신을 음치라는 이유로 해고시킨 식당 주인이 찾아와 “옛 정을 생각해 한 곡만 불러달라”고 통사정을 할 때에도 그는 냉담하게 식당주인을 내쫓으며 지난날의 ‘수모(?)’를 갚았다.


흥미롭게도 카루소의 립싱크가 다만 배고픈 젊은 시절로 끝나지 않았다. 1900년대 초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는 푸치니의 <라 보엠>이 상연되고 있었다. 한데 콜리네 역을 노래하던 남자 가수가 예기치않게 공연 도중 목소리가 잠겨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낡은 외투의 노래’를 부르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 성악가는 무대에 등장했고, 입을 벌렸다. 놀랍게도 노래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의 임자는 따로 있었으니, 당시 로돌포 역으로 함께 무대에 출연했던 테너 엔리코 카루소였다.


그는 객석을 등진 채 테너가 아닌 베이스의 목소리로 완벽하게 ‘낡은 외투의 노래’를 소화해내고 있었다. 바리톤으로 노래를 시작하고 다른 사람 대신 사랑을 노래해주던 립싱크의 젊은 추억이 카루소에게 이런 기지를 발휘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파리를 뒤집어놓은 바이올린 ~ 비오티와 스트라디 


18세기를 풍미한 이탈리아 출신의 지오바니 바티스타 비오티의 이력은 다채롭고 또 특이하다. 무려 스물 아홉곡이나 되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남긴 원기왕성한 작곡가였으며 프랑스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를 포함한 유럽 전역의 관객들을 사로잡은 최고의 연주가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다음에는 파리 오페라극장을 소유하려고 시도할 만큼 흥행주 및 경영인으로서의 재능을 살짝 드러냈지만 프랑스 혁명으로 인하여 불발에 그쳤다. 정치적인 이유로 런던으로 피신해서는 잠시 와인장사를 하다가 다시 파리로 복귀하여 결국에는 최고의 지휘자이자 음악 교육자로서 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가 남긴 업적은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악기의 명성을 세상에 널리 퍼뜨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음악의 중심지로서 오스트리아 빈과 각축전을 벌이고 있던 프랑스 파리는 적어도 공연산업에 있어서는 빈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런 파리는 이탈리아 연주가와 기교 위주의 음악스타일을 경시했으며, 특히나 바이올린을 독주 악기로 인정하지 않았다. 음량이 빈약한 이 악기는 그저 오케스트라 합주용으로 족하다는 것이 우렁찬 당대 궁정악단의 연주에 익숙한 파리 시민들의 일반적인 편견이었다.


1782년 3월 28일 파리 콩세르 스피리튀엘에서 열린 비오티의 리사이틀은 이러한 편견과 파리인들의 취향을 180도 뒤집어 놓았다. 비오티의 기교는 분명 대단한 것이었지만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은 기름지고 화려한 사운드를 가진 그의 바이올린이었다. 평소 이 공연장에서 연주되던 바이올린에 비해 두 배가 넘는 음량을 가진 이 악기의 풍부한 표현력과 마치 사람의 노랫소리와 같은 선율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한 평론가는 “관객은 물론 연주가 자신마저 악기의 비범한 소리에 압도당했다”는 평을 남겨놓았다.


이 악기는 비오티 공연 이후 최고의 화두로 대두되었으며 파리 시민들은 그제서야 장인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선망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비오티처럼 연주하고 싶다”는 말은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하고 싶다는 의미가 되었다.


비오티가 이 악기를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전해진다. 그 가운데에는 30살 연상의 연인이었던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사랑의 징표로 선물했다는 낭만적인 전설도 포함되어 있다. 꼭 스트라디가 아니더라도 비오티는 명기에 대한 욕심이 남달랐다. 그의 귀는 명인의 작품에서부터 거리의 무명의 악사에 이르기까지 차별이 없었다.


한 번은 친구와 함께 샹젤리제를 걷다가 거리에서 맹인 악사가 양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바이올린보다 오히려 시끄러운 클라리넷 소리에 더 가까운 이 악기에 호기심이 생긴 비오티는 20프랑을 주고 그 악기를 사기로 했다. 한데 비오티가 바이올린을 받아들고 연주하자 맹인이 연주할 때와는 달리 지극히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왔다. 동행했던 친구는 즉흥적으로 모자를 돌려 거리에 몰려든 청중들로부터 재빨리 돈을 긁어모았고 이 돈을 악기 값으로 악사에게 주었다.


그러나 악사는 그새 태도를 바꾸었다. “이 바이올린이 그렇게 좋은 건 줄 몰랐소. 그 돈의 두 배는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이 말을 칭찬으로 들은 비오티는 흔쾌히 원하는 만큼의 금액을 지불했다. 악사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그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그 맹인 악사의 조카였다. “내가 그 바이올린을 만들었어요. 1대당 6프랑씩 준다면 20대는 더 만들어 줄 수 있는데….”

 

 


신동에서 부랑자로…그리고 마침내 ‘전설’로 ~ 피아니스트 어빈 니레지하치


리스트를 좋아하는 클래식 애호가라면 기억해야 할 이름이 다름아닌 어빈 니레지하치이다. 190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이 피아니스트는 어린 시절에는 신동으로서, 세상을 뜰 무렵에는 그 드라마틱한 삶으로 세상을 감동시켰다.


네 살 때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여섯 살에 이미 대부분의 마스터피스를 섭렵하여 주변을 놀라게 했다. 암스테르담 심리연구소장이었던 레베즈 박사는 니레지하치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음악신동의 심리학>이란 저서를 집필했는데, 그가 가진 모든 음악적 능력, 즉 초견능력, 기억력, 즉흥연주, 조바꿈, 작곡능력 등이 학습에 의해 점진적으로 발전했다기보다 선천적으로 타고났다고 적고 있다.


“헝가리 사람이라면 당연히 리스트를 연주해야 한다”는, 1914년에 만난 바이올리니스트 페렌츠 베체이의 충고는 그를 앞뒤 안 돌아보고 오로지 리스트만을 연주하는 광적인 스페셜리스트로 만들었다. 이것은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는 대목인데, 초창기 니레지하치가 연주한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스크랴빈이 리스트와는 또다른 감동을 자아냈다는 소문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니레지하치의 환경은 음악성에 부응하지 못했다. 주변인들은 천재의 재능을 키워주기보다는 이용하기 급급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명성을 돈벌이로 악용하려 들었고, 매니저는 어머니보다 더한 악덕 흥행사로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무대도 가리지 않고 섭외했다. 심지어 그 가운데에는 서커스 장에서의 초견연주 묘기까지 있었다. 안정을 찾고자 11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하였지만 그녀 또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돈밖에 몰랐다.

 

이런 인물들 사이에서 부대끼던 그는 20대 이전에 벌써 명성을 날리고 있었음에도 지하철역에서 노숙을 하며 연주여행을 다녀야할 만큼 가난에 시달렸다. 간혹 공정한 흥행사를 만나기도 했지만, 다른 레퍼토리는 전혀 연주하지 않고 리스트만 고집하는 니레지하치에게 혀를 내두르며 떠나갔다. 음악인생에 회의를 느낀 니레지하치는 겨우 20대의 나이에 은퇴를 결심하고 잠적했다.


그가 음악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약 40년 뒤인 1973년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콘서트홀이었다. 음악계를 떠난 뒤 뉴욕의 부랑자로 전락한 니레지하치는 젊은 시절 엘시 스완이라는 여성으로부터 작은 도움을 받은 바 있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우연히 재회한 그녀는 이미 일흔아홉 살의 노파가 되어 있었으며 또한 병중이었다. 일흔살이었던 니레지하치는 그녀에게 청혼을 하였고 이 리사이틀은 바로 아내의 치료비를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일흔살의 노인이었지만 니레지하치의 연주력은 여전했다. 우연히 이 콘서트를 지켜보던 당시 씨비에스(CBS) 레코드사의 테리 맥네일은 그 신들린 연주에 넋을 잃고 말았다. 마지막 프로그램이 시작될 즈음 이 프로듀서는 정신을 차리고 가지고 있던 녹음기 버튼을 눌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유일무이하게 남아 있는 니레지하치의 실황레코딩인 리스트의 <두 개의 전설>이다. 이 녹음은 발매되자마자 말 그래도 ‘전설’이 되어 음악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가져왔다. 당대 음악 평론가 헤롤드 숀버그는 “19세기 연주 스타일을 고스란히 간직한 기적적인 연주”라고 평했다.


니레지하치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엘시 스완은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났다. 니레지하치는 또다시 자취를 감추었고, 1987년 그대로 잠적한 가운데 사망했다. 니레지하치의 <두 개의 전설>은 이후 절판되었다가 1990년 중반 마스터테이프를 확보한 텔덱 레이블을 통해 세상에 다시 한번 소개되었다.

 

 

 

발빼는 가수에 보드카 먹여 녹음 ~ 세계 최초 프로듀서 프레드 가이스버그


사진기가 발명되었을 때, 사진가가 가장 힘들어했던 것은 모델의 섭외였다고 한다.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미신 때문에 흔쾌하게 렌즈 앞에 나서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탓이다.


그런데 레코드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도 상황은 이와 유사했다. 지금은 보편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레코드가 발명 초기에는 마술적인 기계로 인식되어 성악가들은 쉽사리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특히나 샬리아핀은 군중을 사로잡는 자신의 목소리에 마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고 있었고, 녹음을 하게 되면 그 힘을 기계에 빼앗긴다고 생각하며 한사코 거절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레코드 역사상 위대한 프로듀서를 언급할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프레드 가이스버그이다. 1894년 영국에 있던 베를리너의 그라모폰사(훗날의 HMV이자 미국 RCA의 모체, 그리고 현재의 EMI)에 들어간 그는 음반 역사상 최초의 프로듀서로 그 이름을 공고히 하고 있다. 이후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1700개가 넘는 음반을 기획, 제작했으며, 그가 남긴 녹음들은 가이스버그라는 이름과 더불어 모두 역사적인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녹음이 오늘날까지 명품으로 취급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한 가지는 ‘재능있는 성악가들을 알아보는 남다른 혜안’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그 혜안으로 알아본 재능있는 성악가’들을 어떤 방법을 써서든 녹음기 앞에 불러 세운 사명감과 고집이었다.


끝까지 녹음을 거부하던 샬리아핀은 가이스버그의 집념과 그가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권한 러시아산 보드카에 무너져 결국 스튜디오로 직접 걸어들어가 자신의 첫 음반을 남겼다(1901). 가이스버그는 두 번째 프로젝트로 이탈리아 밀라노 그랜드 호텔 306호에 묵고 있던 카루소를 찾아갔다. 아직 무명이었던 카루소는 생면불식의 음반사 직원의 간절한 요청에 호텔방에서 즉석해서 아리아를 열 곡을 불렀다.


가이스버그는 이를 간이로 녹음하여 세상에 내놓았으며, 1902년 발매된 이 음반은 카루소의 음성이 담긴 가장 오래된 레코드로 남게 되었다. 역사상 최후의 카스트라토로 기록되어 있는 알레산드로 모레스키(1902), 그리고 가이스버그의 깐깐하면서도 고집불통의 뮤즈였던 넬리 멜바(1904)가 그 뒤를 이었다. 특히 모레스키의 음반은 음반 역사상 최초의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가이스버그의 뛰어난 섭외능력은 당시 에디슨이 세운 포노그래프사와 시장을 다투던 그라모폰사에게 든든한 지원사격이 되어 주었다. 포노그래프사가 실린더 방식의 축음기를 고집했던 반면 그라모폰사는 원반형 디스크와 턴테이블을 최초로 도입했다. 당시만 해도 그라모폰사는 포노그래프사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포노래프사가 고집하고 있었던 실린더 방식의 축음기는 그라모폰사의 디스크 방식보다 음질이 훨씬 우수했고, 게다가 포노그래프사는 벌써 10년 전부터 시장을 선점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노그래프사는 훌륭한 하드웨어를 발명한 만큼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에디슨이 만든 그 훌륭한 축음기로 들을 수 있는 것은 기껏 무명가수의 노래나 코미디 대본을 녹음이 고작이었다. 사람들은 비싼 티켓을 내고 공연장에 들어가지 않으면 들을 수 없었던 굴지의 오페라 가수의 목소리가 녹음된 그라모폰사의 디스크를 앞다투어 사가기 시작했다. 1921년 레코드 산업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에디슨의 포노그래프사는 1929년 문을 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표현의 자유’ 찾아 망명길 오른 발레리노 ~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영화 <백야>의 히어로로 한국의 팬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그가 영화 <백야>의 주인공과 실제로 처지가 비슷했던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열한살의 나이에 겪은 어머니의 자살, 군인이었던 아버지와 소원했던 관계는 녹록치 않았던 그의 어린 시절을 대변한다. 라트비아 변방의 발레학교에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내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바가노바 발레학교에 입학한 그는 1966년 불가리아 바르나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며 처음으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74년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의 솔리스트로서 캐나다 토론토에 원정공연을 간 틈을 타서 서방으로 망명한 바리시니코프는, 그러나 그보다 일찍 망명했던 누레예프나 마카로바와는 망명사유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들 발레계의 대선배들이 정치적 자유와 자본주의를 추구했다면 바리시니코프가 더욱 바랐던 것은 표현의 자유, 그중에서도 모던 댄스였다. 그러나 그의 터전이었던 키로프발레단은 고전발레의 아성으로 대단히 보수적이고 또 권위적이었으며 무엇보다 대부분의 안무가 여성 위주로 짜여졌다.


망명한 뒤 미국으로 건너온 바리시니코프는 뉴욕의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에 정착했다. 그의 타고난 발레 재능과 훌륭한 카리스마, 그리고 반항아적 기질은 금세 뉴욕 발레계의 명물이 되었고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는 바리시니코프의 이름과 더불어 뉴욕시티발레단과 어깨를 대등하게 겨루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선천적으로 스타 기질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던지라 그의 무대는 단지 발레를 위한 스테이지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결국 스크린에까지 확대되었다. <터닝포인트(사랑과 갈채의 나날)> <백야> <지젤> 등 그가 주역으로 등장했던 일련의 영화들은 젊은 시절 바리시니코프가 가지고 있던 발레리노로서의 화려한 개인기와 더불어 냉소적이고 반항적이며 또한 바람둥이 기질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다.


발레댄서로서 은퇴할 나이에 그는 오히려 현대무용단인 ‘화이트 오크 프로젝트’를 창단하여 주역 댄서로 활동, 모던댄스의 부흥에 앞장섰다. 이 단체는 지난 2000년 서울에서 내한공연을 가진 바 있다. 서방에서 성공한 다른 러시아 출신 댄서들이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따뜻한 환영을 받았던 것과 달리, 바리시니코프의 경우 뉴욕에서 유명세를 날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신지인 상트 페테르부르크(키로프)에서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모던 댄스 활동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모던 댄서로서도 공식적으로 은퇴했지만 아직도 그의 이름은 여전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뉴욕을 장악하고 있다. 그가 설립한 무용교육학교 ‘바리시니코프 아트센터’는 해마다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그의 이름을 딴 ‘미샤’(미하일의 애칭)라는 향수를 출시했는가 하면, 그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 판매할 정도로 사업 수완도 뛰어난 편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트콤 <섹스 & 더 시티>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지갑을 훔친 소매치기를 좇아서 장애물 달리기를 마다 앉는 노장 발레리노의 여전한 바람기와 노익장을 엿볼 수 있었다.

 

 


박수부대, 니들 사람 잘못 골랐다 ~ 베이스가수 표도르 샬리아핀


지난 주 칼럼에서 다룬 오페라 <나비부인> 초연에서의 비화는 비단 푸치니만 당한 사건이 아니었다. 후세 평론가들은 당시 관객들의 비난과 소동은 다분히 조직적이고 의도적이었던 측면이 없지 않다고 의견을 모은다.


이유는 공연 전부터 시작된 모독성 휘파람 소리와 야유의 함성 때문이다. 실제로 오페라의 본고장이었던 밀라노 극장에는 조직적인 ‘박수부대’가 존재했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날 공연의 성공 여부에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때로는 금전을 요구했다.


푸치니가 <나비부인> 초연 당시 이들로부터 뇌물을 요구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은 1901년 밀라노 데뷔를 앞두고 이 박수부대와 직접 대면한 적이 있다고 한다. 샬리아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박수부대는 밀라노뿐 아니라 유럽 도처의 극장에 모두 존재하는 마피아같은 조직이었다. 그들은 조직원들을 극장 이곳저곳에 배치해 야유를 보내거나 소동을 일으켰다.


많은 가수들은 무대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 그들이 요구하는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샬리아핀 또한 밀라노의 한 호텔에서 이들의 방문을 받았고 사례를 요구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샬리아핀은 돈을 주는 대신 박수부대를 밀어서 호텔 계단 아래로 굴러 넘어 떨어뜨렸다. 실상 이들 박수부대는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었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샬리아핀의 괴팍함을 증명하는 일화는 부지기수이다. 그는 리허설은 물론 오페라 공연 도중에도 상대역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대 뒤에서 불같이 화를 냈다. 그에게 설령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사람을 압도하는 커다란 몸집에, 오페라극장 쪽으로부터 지휘자에서부터 배역, 스테프진 선정까지 전권을 위임받을 만큼 특권을 누렸던 샬리아핀에게 그 어느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었다. 어떤 날은 조역들의 어설픈 연기에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샬리아핀은 실제 권총에 총알을 장전하고 다음 막에 출연하여 스태프들을 초긴장 상태에 빠지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샬리아핀도 매니저 휴럭 앞에서는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과 다를 바 없었다. 휴럭은 샬리아핀의 성격과 약점을 간파한 유일한 인물이었으며, 매번 공연을 펑크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샬리아핀을 어떻게든 무대 위에 올려놓곤 했다.


한 번은 샬리아핀이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안 나온다며 무대에 서지 않으려고 떼를 썼다. 한데 여느 때 같으면 얼르고 달래며 억지로라도 등을 떠다밀던 휴럭이 이번에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안나오는 목소리로 비난을 받는 것 보다야 계약금 2천달러를 날리는 게 당신에게는 더 좋을 듯하군요.” 휴럭의 예외적인 반응에 당황하고 계약금 2천달러란 말에 귀가 솔깃해진 샬리아핀은 결국 마지막에 공연 취소를 통보하려고 나가는 휴럭의 팔을 붙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좀 쉬니까 한결 나은데. 몇 곡 정도는 부를 수 있을 것 같네.”


공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매번 중도에 그만두겠다고 화를 버럭내곤 하는 샬리아핀이었지만 실제로 단 한번도 실제로 공연을 중단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이유야 어떻든 그는 진정한 프로였던 것이다.

 

 

 

재즈 ‘비밥’ 창시자 찰리 파커 ~ 불꽃처럼 타오른 천재 색소포니스트


재즈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가 찰리 파커다. 색소포니스트였던 그는 20세기 중반 출현하여 디지 길레스피, 버드 파웰과 더불어 혁신적인 ‘비밥’을 창시, 미국 재즈계를 강타했다. 아직 어렸던 마일즈 데이비스의 우상이자 애증의 대상이었던 인물이기도 한 그는 그러나 음악적인 업적만큼이나 기벽도 남달랐다. 1920년 태어나 1955년 사망하는 짧은 인생이었지만 음주와 마약, 그리고 여성편력을 일삼으며 보통 사람이 환갑이 넘어도 다 채우지 못할 사고를 그는 치고 다녔다.


그의 본명은 찰스 파커 주니어였지만, 사람들은 늘 그를 ‘버드’(bird), 혹은 ‘야드버드’라고 불렀다. 열 네 살 때 다니던 학교를 뛰쳐나온 그는 알토 색소폰을 들고 전전한 지 3년이 지난 다음에야 간신히 클럽 무대에 설 수 있었으며 그나마도 솔로가 아닌 세션의 일원으로서였다. 그의 전성기는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1940년 처음 한 무대에 섰던 이들은 이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테크닉을 기반으로 ‘비밥’을 소개, 이를 재즈의 주류로 정착시켰고 그들 스스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재즈 듀오’로 전 미국을 평정했다.


찰리 파커는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기교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대단한 기벽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는 무대에서 도통 긴장하는 법을 몰랐다. 언제나 여유롭다 못해 뜬금없기까지 한 그의 무대 매너는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가 남긴 스캔들과 사고는 10대 시절부터 복용한 마약과 음주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여느 재즈 아티스트들처럼 그 또한 당시 유행하던 헤로인의 상습 복용자였다.


1948년 초 시카고로 초청된 파커의 밴드는 아가일이라는 클럽에서 연주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나타난 버드는 이미 수면제 복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무대에 오른 그는 그러나 색소폰을 입에 문 채로 서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깨어난 그는 더더욱 말썽이었다. 밴드가 이 곡을 연주하고 있으면 그는 갑자기 저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밴드가 파커에 맞춰 부랴부랴 음악을 바꾸면 금세 다른 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정작 자신의 솔로 파트가 시작되자 밖으로 나가려고 들었다. 멤버들은 파커를 어떻게든 깨우려고 노력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심지어 그의 귀에 대고 트럼펫을 불어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첫 번째 무대가 끝난 뒤 버드는 사라졌으며, 그는 클럽이 문을 닫은 뒤 근처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잠든 채로 발견되었다. 클럽 주인은 파커 밴드와의 결별을 공식 통보했고 밴드는 뉴욕으로 돌아갈 돈을 마련 못해 시카고에서 오도 가도 못했다. 책임을 느낀 파커는 연주자 조합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미 파커의 기행에 질릴 대로 질린 조합회장은 권총으로 위협하며 파커를 내쫓았다. 그로부터 몇 년 뒤 파커는 마일즈 데이비스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 때 왜 날 깨우지 않은 거야?”


1954년 사랑하는 딸의 죽음이 전해지면서 파커의 파멸은 초읽기를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마약복용과 두 차례의 자살 시도 끝에 그는 1955년 심장마비로 서른 다섯이라는 안타까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차이코프스키, 안무에 맞춰 음악 만들다 ~ 고전 발레 안무가 프티파


발레는 분명 프랑스에서 기원했다. 그러나 오늘날 ‘고전 발레’의 종주국은 프랑스가 아닌 러시아다. 그 이유는 뭘까? 해답은 간단하다. ‘발레’의 기원은 프랑스였지만 ‘고전 발레’는 러시아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발레 이전 프랑스에서 유행한 발레는 흔히 ‘낭만 발레’로 불린다. 고전에서 낭만으로 넘어가는 클래식 음악의 순서와는 정반대로 발레는 낭만 발레에서 고전 발레로 발전했다.


그 모든 역사는 1890년대 파리출신의 유망한 젊은 무용수 한 명이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며 비롯되었다. 서유럽에 비해 러시아는 문화적 후진국이었다. 이를 개탄한 러시아 황실은 정책적으로 발레를 육성하기로 하고 19세기 최고의 무용수 세 명을 스카웃했다. 그 가운데 마지막으로 초빙한 인물이 바로 오늘날 클래식 발레의 대명사가 된 마리우스 프티파다.


1847년 스물 아홉 살의 나이에 마린스키 극장의 무용수가 된 프티파는 그로부터 25년 뒤 예술감독이 됐다. 러시아로의 망명은 프티파로서도 좋은 기회였으니,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두 명의 조력자, 차이코프스키와 레프 이바노프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이코프스키를 만나기 전 프티파는 신통치 않은 작곡가들과 함께 작업하며 갈등과 좌절을 계속했다.


차르의 절대적인 신임을 배경으로 한 프티파의 성격은 독선적이고 나르시즘이 대단히 강했으며 웬만한 작곡가들은 그런 안무가를 버텨내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섬세하고 여리기로 소문난 차이코프스키가 이런 프티파의 성격을 견디어 낸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성실하지만 소심했던 차이코프스키는 서른 살 연상의 안무가가 시시때때로 거는 사사로운 트집과 모욕을 감수하며 그가 요구하는 대로 작곡을 해주었다.


차이코프스키가 남긴 대다수의 음악들은 프티파가 이미 구상해 둔 안무에 근거해 작곡한 것이다. 음악이 아닌 동작이 먼저 구상된 셈이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프티파와 차이코프스키가 남긴 모든 작품은 ‘고전’이 됐으며, 발레 애호가들은 이들의 작품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고전 발레’라 칭하기 시작했다.


차이코프스키보다도 더욱 원통하게 시달린 사람이 있으니 조수로 활동한 안무가 레프 이바노프이다. 프티파와 달리 순수 러시아 출신이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실력을 보이는 무용수였다. 한 번 들은 음악은 악보로 바로 옮겨 적어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예술적 재능을 타고났지만 삶의 운명은 재능과 반비례했다.


부모에게서는 열 살 때 버림을 받았고 조국으로부터는 내국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프랑스 출신의 무용수보다 평가절하당하는 수모를 겪었던 그는 열 여덟살 때 마린스키 극장에 입단하여 조역을 전전하다 쉰 한 살에 조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프티파의 휘하에 들어간 그는 천재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프티파의 그림자에 가려 지내야만 했다.


‘백조의 호수’ 2막과 4막 호수 장면과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환상 장면 등 프티파의 안무 중에서도 백미로 손꼽히는 장면들은 실은 이바노프가 거의 100% 혼자서 완성시켰다고 추측된다. 알콜 중독자라는 수군거림과 탐욕스런 프티파의 욕심에 희생당한 채, 프티파는 자기 이름을 단 한 번도 정식 안무가로 걸어두지 못하고 평생을 가난 속에 살다가 67살의 나이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숨을 거두었다.

 

 

 

지휘봉 잡으려 나치 입당도 불사한…지휘자 카라얀


조만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내한한다. 이 관현악단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지휘자를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라고 말한다면, 모두가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각자의 취향이 다른 까닭에. 그러나 이 오케스트라가 낳은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지휘자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다는 말에 대해서는 누구도 감히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클래식 음악인으로서 카라얀처럼 권세와 명성을 누린 아티스트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전음악에 대해 문외한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카라얀’은 클래식과 동일시되는 이름이자 간판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도 처음부터 순탄하지는 않았다.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탄호이저>를 듣기 위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부터 독일 바이로이트까지 무려 250마일의 거리를 자전거로 달려갈 만큼 음악에 대한 열성과 집념은 대단했지만 25살까지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전 독일을 방황해야 했다. 포디엄에 서기 위해 “어떠한 짓이라도 저지를 각오가 되어 있었던” 카라얀은 1933년 27살에 나치 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그 시점과 맞물려 독일 역사상 최연소 음악감독으로서 아헨 극장에 입성했다.


1937년 빈 국립오페라극장 데뷔, 1938년 베를린 필 데뷔, 그 해 9월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데뷔 등 이후 카라얀의 음악인생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나고 독일이 패망하면서 밀라노에 있던 그는 나치주의자로 오스트리아에 송환되어 연주행위를 금지당했다. 약 2년 뒤 공식적인 금지는 해제되었지만 나치 경력은 족쇄가 되었다. 유럽 클래식 음악계를 좌지우지했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는 특히 이 후배를 “박쥐같다”는 이유로 싫어하여 베를린 필과 빈 필의 지휘대를 좀처럼 넘겨주지 않았다.


1954년 푸르트뱅글러가 세상을 뜨자 베를린 시민들은 차기 베를린 필의 지휘봉이 세르주 첼리비타케에게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루마니아 출신의 이 비타협적인 완벽주의자가 당시 막 부흥하고 있었던 레코드 산업에 대해 지닌 결벽증이 가장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는 음반 레코딩을 “음악을 통조림에 넣어 파는 행위”라며 죽을 때까지 극도로 혐오했던 음악가였다.


결국 베를린 필은 차기 지휘자로 레코딩 업계에서 막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던 카라얀을 선택했다. 푸르트뱅글러 생전에 계약되어 있던 1955년의 미국 연주여행을 그가 성공적으로 이끈 것도 유리한 환경으로 작용했다. 그는 이 미국 여행을 기회로 베를린 필의 종신 상임지휘자 자리를 요구했고, 베를린 필은 이를 수락했다.


자신을 부르고 돈이 있으면 어디든 마다않던 그는 오대양 육대주를 가로지르며 ‘카라얀’이라는 이름을 전세계 지휘대에 수놓았다. 그런 그의 내한 공연은 1984년에야 성사되었다. 그가 한국 공연을 마지막까지 마다했던 이유는 작곡가 윤이상이 얽힌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때문이었다. 지휘봉을 잡기 위해 나치당에까지 가입했던 그는 “예술을 탄압하는 독재자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음악을 연주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완고히 거절하다가 독일문화원과 정부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서거 5년 전에 세종문화회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그너 가문의 정치적 정체성 ~ 바이로이트 ‘치맛자락 휘날리며’


바그너 가문과 바이로이트 페스티벨에서 정치적 주도권은 주로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다. 지난 주 언급하였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며느리 위니프레드가 그러했고, 위니프레드 이전에는 바그너의 두번째 부인이자 리스트의 딸이자 한스 폰 뷜로의 전처였던 코지마가 있었다. 바그너의 절대적인 옹호자였던 코지마는 전 남편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을 버리고 스물네 살이나 연상이었던 바그너에게 찾아갔고 바그너가 죽는 순간까지 그의 예술적 이상을 실현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협력했다. 결과적으로 바이로이트 극장을 지을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와 더불어 코지마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그너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줄거리에서나 음악언어에서나 지극히 남성 중심의 세계관을 피력하고 있는(심지어 여성 등장인물조차 남성스럽기 그지없는) 바그너가 실은 여성 의존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의 이러한 행적은 어린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바그너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그가 어린 시절 얼마나 철부지이고 어리광장이였는가를 알 수 있는데, 이를 다 받아준 것은 그의 네 명의 누이들이었다.


그의 자서전에는 어머니 이야기 대신 누이들에 대한 애정이 묘사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도 각별했던 누나가 10살 위의 로잘리였다. 로잘리는 양아버지가 죽자 불과 열일곱 살의 나이로 동생들을 먹여 살리며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으며 서른세 살의 나이에 임신 중 사망했다. 바그너의 주변 여인들은 이렇듯 처음부터 하나같이 생활력이 강했으며 또 삶을 주체적으로 주도할 줄 아는 인물들이었다.


바그너 가문의 발퀴레(<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여전사)적인 기질은 바그너가 죽고 난 뒤에도 후손들에 의해 끊이지 않고 계승되었다. 바이로이트 공동대표였던 형 빌란트가 급서한 뒤 운영 전권을 위임받은 볼프강 바그너는 몇년 전 차기 축제국 대표로 두번째 부인 사이에서 낳은 막내딸 카타리나(1976년생)를 지목해 바이로이트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금발의 아름다운 외모에 팬클럽까지 있을 만큼 인기가 높지만 나이가 한참 어린 데다 예술적으로 아무런 경력이 없는 그녀의 계승에 대해 볼프강 전처의 딸 에바와 형 빌란트의 딸 니케가 적극적인 반기를 들고 나섰다. 만약 카타리나가 대표직을 이어받을 경우, 카타리나의 어머니이자 볼프강의 아내인 구트룬의 섭정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카타리나와 달리 에바와 니케는 바그너 연출과 드라마투르기로서 이미 명성을 확고히 하고 있는 여전사들이다. 특히 최근 들어 니케의 활동은 유럽 전체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린 시절 바이로이트에서 자의반 타의반 추방당한 니케는 어엿한 바그네리안으로 성장하여 삼촌 볼프강 바그너의 정책에 대해 비판하고 바이로이트의 개혁을 주창하고 있다.


지난 2002년 뮌헨 오페라 극장에는 니케가 드라마투르기를 한 <니벨룽의 반지>가 상연되며 커다란 화제를 불러 모았다. 바이로이트 극장 자체를 무대로 삼은 니케는 마지막 4부 <신들의 황혼>에서 바그너 오페라의 메카 바이로이트 극장이 불에 타 스러지는 파격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바그너 가문과 나치 ~ 히틀러 숭배한 바그너 며느리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의 한국 초연을 앞두고 클래식계의 바그너 열풍이 뜨거워지고 있다. 실상 바그너의 음악은 듣기 쉬운 작품들은 아니다. 음악적인 난해함은 그렇다치고 나흘 간에 걸쳐 인터미션을 빼고 총 16~17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 자체가 정상인들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대상이다. 그래서 클래식 애호가 가운데에서도 바그너를 특별히 좋아하는 이들은 따로이 구분된다. 그들은 흔히 <바그네리안>이라 불린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일반적인 내공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버거운 <니벨룽의 반지>를 비롯해 자신만의 작품을 공연하기 위해 바그너는 극장을 바이로이트에 따로 세웠다. 1876년 준공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개막 기념작은 역시 <니벨룽의 반지>였으며, 바그너 사후 이 극장을 중심으로 바이로이트는 그의 직계자손들에 의하여 바그너 숭배자들의 순례지이자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대가 끊어지거나 소식을 알 수 없는 역대 음악가들과 달리 가문의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는 바그너 가계는 매해 여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개최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전세계에 인식시키고 있다.


이런 바그너 가계에도 정치적인 약점이 있으니, 그것은 히틀러와의 친분설이다. 히틀러는 젊은 시절부터 열렬한 바그너 숭배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당시 배낭에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악보를 넣어가지고 다녔다. 일부 바그네리안들은 단지 이런 히틀러가 바그너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바그너를 옹호하고 있지만 1850년 <음악에 있어서의 유대성>이라는 논문에서 이미 바그너는 자신이 반유대주의자임을 제창하고 있다.


하지만 1883년 사망한 바그너가 히틀러와 직접적인 친분을 맺을 수는 없었다. ‘바그너=나치’라는 공식을 성립시킨 인물은 바그너의 영국인 며느리, 위니프레드이다. 1930년 남편 지그프리트 사망뒤, 남편의 누이들을 제치고 바이로이트의 대권을 장악했던 그는 노골적인 나치주의자였으며 히틀러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손자 고트프리트 바그너가 쓴 저서에는 그의 이러한 행각이 신랄하게 드러나 있다.


고트프리트는 “할머니는 1920년대부터 히틀러를 숭배했으며, 옥중의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쓸 원고지를 제공한 것도 할머니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생전에 바이로이트에 방문한 히틀러가 위니프레드의 어린 두 아들, 현 바이로이트의 실제적 권력자인 볼프강과 빌란트(1966년 사망)와 함께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흑백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현 세대들의 정치색까지 눈총을 받게 되었다.


제2차 대전이 끝난 뒤 연합국은 위니프레드를 나치의 주요 협력자 중 한 명으로 지정하고 바이로이트 축제에서의 일체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로 인하여 두 아들 빌란트와 볼프강이 축제의 운영권을 상속받았다. 아들들의 계승으로 인하여 바이로이트 축제는 정치적으로나 예술적으로 혁신적인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지만, 위니프레드는 세상이 바뀌어서도 좀처럼 ‘나치’ 딱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장남 빌란트가 죽고 나서도 14년을 더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히 히틀러를 옹호하던 그는 1980년 사망한 뒤에도 바이로이트의 누가 되었다. 1997년 고트프리트의 저서로 인하여 코너에 몰린 바그너 재단은 예정되어 있었던 위니프레드의 탄생 1백주년 기념행사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으로 인해 바이로이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은 여전히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 작품 연주가 여전히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이런 가운데 유대인을 차별하고 대대로 악연을 이어가고 있는 그 시발점, 바그너가 실은 유대인의 사생아 출신이라는 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재즈계의 바흐’ 듀크 엘링턴 ~ 재즈와 클래식의 위대한 결합


재즈 100년사에서 듀크 엘링턴만큼 다양한 기록의 보유자도 드물다. 빅밴드의 거장이자 심포닉 재즈의 완성자, 그리고 재즈 피아니스트였던 그가 남긴 기록 가운데에서도 출중한 것으로 우선 작곡 건수를 들 수 있다. ‘재즈계의 바흐’에 비견되는 그는 50여년이 넘도록 무대에 서면서 무려 6천여곡의 재즈를 작곡했다. 바흐가 남긴 곡이 1300여곡, 모차르트가 630여곡인 것을 감안할 때 이는 분명 대단한 기록이다.


그는 당대 아티스트들과는 약간 다른 노선을 추구했다. 다른 아티스트들이 연주가로서 먼저 명성을 날렸던 것과 달리 듀크 엘링턴은 “흠잡을 데 없는 작곡”으로 인정을 받았다. 미국 음악사에서 엘링턴이 살았던 1899년부터 1974년은 모든 장르를 통털어 가장 중요한 성취를 했던 시기로 취급된다. 엘링턴의 전기를 쓴 음악비평가 제임스 링컨 콜리어는 엘링턴을 미국 현대음악 작곡가인 찰스 아이브스와 함께 미국 음악사에서 있어 가장 중요한 음악가로 적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그가 뛰어난 연주가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반추한다. 엘링턴의 피아노 실력은 탁월한 정도는 아니었다. 음악에 대한 지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물론 악보를 무서워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작곡의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던 것은 자신의 악단이다. 여기서 그가 갱신한 또다른 기록이 드러난다.


금전 혹은 음악적 개성과 이해관계를 문제로 당대 수많은 재즈 밴드들이 결성과 해체를 반복하고 있을 무렵 듀크 엘링턴의 빅밴드 멤버들은 일단 가입을 하면 죽을 때까지 함께 했다. 특히 1939년에 가입해 1967년에 사망한 빌리 스트레이혼은 28년을 엘링턴과 함께 하면서 작곡을 도와주었으며 거의 양아들이나 다름없이 행세했다(듀크 엘링턴은 정작 자신의 친아들은 돌보지 않았다). 조니 호지스 또한 그와 일평생을 같이 한 멤버 중 한 명이었다.


다분한 카사노바 기질에 가정을 홀대했던 엘링턴은 살아 생전 무수한 법적, 사실적 부인들에게 원망과 지탄을 받았다. 그는 그대신 가족에게 쏟을 법한 애정을 “나의 소중한 악기”라 칭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쏟았다. 언제나 온화하고 기품있는 매너로 동료들을 상대하는 엘링턴을 멤버들은 일찍부터 ‘듀크(DuKe 공작)’라는 애칭으로 불렀으며, 이 애칭은 그의 실명인 에드워드 케네디 엘링턴보다도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재즈가 차별에 대한 저항과 반역에서 출발한 예술이라지만, 엘링턴은 오히려 흑인으로서의 남다른 자부심에서 재즈를 시작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정치적으로 흑인들이 보호를 받던 워싱턴 출신인 엘링턴은 ‘듀크’라는 애칭만큼이나 흑인이라는 인종에 대해 자신감이 넘쳤으며 백인전용 클럽에서 밴드생활을 하면서 같은 흑인 가운데에서도 우월한 위치에 있음을 내내 확신했다.


음악적으로도 그는 일개 연주가가 아닌 시대에 남을 작곡가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1933년 영국을 방문한 엘링턴은 일개 연주가가 아닌 라벨이나 델리우스와 같은 클래식의 ‘작곡가’로 인정받고 싶어했다. 실제로 혹자들은 재즈와 클래식의 위대한 결합(이른바 심포닉 재즈)이 <랩소디 인 블루>를 쓴 거슈인이 아닌 듀크 엘링턴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평한다.

 

 


경극 현대화 앞장 메이 란팡 ~ 중국 국·공 내전 항의해 수염 길러


중국을 대표하는 전통공연예술로 흔히 경극을 이야기하지만, 실상 이는 그렇게 오래된 예술이 아니다. 건륭제의 80살 생일잔치 때 안후이 지방의 한 무명극단이 베이징에 와서 공연한 것을 시초로 하고 있는데, 그래봤자 고작 200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그 여파는 무시 못할 것이어서, 당시 베이징 일대에 크게 붐을 이루고 심지어 경극배우 양성소까지 생겼다고 한다.


얼굴에 물감을 잔뜩 칠하고, 노래나 무용처럼 느껴지는 격렬한 동작을 곁들이는 이 형식 연극은 두 명의 영웅을 탄생시켰다. 하나는 경극을 주제로 만든 영화 <패왕별희>에서 주연을 맡았던 장국영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이 바로 저 유명한 메이 란팡(1894~1961)으로, 우리에게 매란방으로 알려진 희대의 배우이다.


실상 경극의 흥망성쇄는 메이 란팡의 그것과 일치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중국인들의 그에 대한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경극에서 여자역에 해당하는 단()역 전문배우(당대 중국에서는 한 무대에 남녀가 함께 서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던 터라, 여자 역할까지 남자가 모두 소화했다)였던 그의 본명은 하오팅()으로 아버지, 할아버지가 모두 단()역 전문배우였다.


14살에 부모를 잃은 그는 당대 명배우 주샤펀의 제자로 들어갔다. 워낙 용모가 출중하였던 그는 데뷔 무대에서부터 청중들을 한 몸에 사로잡았다. 이후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옮겨간 그는 서구 문물의 영향을 크게 입은 그 도시의 색다른 풍경에 남다른 인상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현대적인 색채가 가미된 연기를 선보이며 경극의 현대화와 서구화에 앞장섰다.


동서양의 요소를 완벽하게 조화시킨 메이 란팡은 이번에는 이를 해외에 알리기 시작했다. 1919년부터 1935년 사이에 이루어진 일본, 러시아, 미국, 유럽 등지의 순회공연은 경극을 중국의 대표적인 공연예술로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메이 란팡은 ‘경극대사’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경극의 현대화만큼이나 중국의 근대화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중국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중일전쟁 때에는 홍콩에 은거하며 항일투쟁에 앞장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자 동포들끼리 싸우는 꼴이 보기 싫어 다시는 경극 무대에 서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고 그 표식으로 수염을 길렀다. 여자 역할을 전문으로 하는 배우가 수염을 길렀으니, 이는 확실한 의사표시였던 것이다. 이런 메이 란팡이 수염을 깎고 다시 경극배우로 무대에 나선 것은 1958년 데뷔 50주년 기념무대였다.


메이 란팡의 사후, 중국의 경극은 침체일로에 빠지며 쇄락의 길을 걸었다. 경극의 형식과 줄거리가 더 이상 현대의 중국인들의 취향으로 다가서지 못한 까닭이다. 이는 메이 란팡처럼 시대를 내다보며 그 장르를 발전시킬 인물이 부재했다는 이야기와 같다. 예술에 있어 제자리걸음이란 용납되지 않는다.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뒤로 쳐지고, 또 잊혀지는 것. 그것이 예술이다

 

 


무대선 요정, 현실선 속물 ~ ‘포인트’ 첫선 발레리나 탈리오니


외모상 모든 점이 완벽해 보이는 발레리나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다름아닌 발. 몇년 전 발레리나 강수진의 토슈즈를 벗은 맨발이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험악하고 기형적인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편으로 그의 맨발은 무대 위에서 완벽한 춤을 추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발레리나의 혹독한 연습과 애환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왜 발레리나들의 발은 못생길 수밖에 없을까. 이는 발끝을 완전히 세워서 춤을 추는 동작, 이른바 고전발레의 기본 테크닉이자 상징이나 다름없게 된 ‘포인트’ 동작 때문이다. 이 동작을 완성하기 위하여 수많은 발레리나들이 어린 시절부터 매일같이 발톱이 빠지고 피가 흐르는 아픔을 참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인트’ 동작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 테크닉이 최초로 도입된 발레 작품은 〈라 실피드〉이다. 요정과 인간의 사랑을 그린 이 발레는 낭만주의 발레의 장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추앙받고 있다. 인간에게 절망한 윌리들의 세계를 그린 로맨틱 발레의 절정 〈지젤〉이라든가, 미하일 포킨의 신고전주의 발레 〈레 실피드〉가 바로 이 〈라 실피드〉를 뿌리로 두고 있다.


1832년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된 〈라 실피드〉는 마리 탈리오니라는 스타를 탄생시켰다. 탈리오니는 초연 당시 발레리나 사상 최초로 포인트 기법을 시도하며 마치 중력에 구애받지 않는 양 발끝으로 서서 가볍게 날아다니는 요정의 모습을 묘사했다.


“미풍처럼 무대 위로 날아와 엉겅퀴 털처럼 가볍게 떠다닌다”는 찬사를 받은 탈리오니의 춤은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낭만주의자들의 이상을 십분 만족시켰고, 그의 영향력은 발레라는 장르에서 벗어나 패션, 헤어스타일, 언어에까지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실피드 스타일〉이 유행하기에 이르렀고, 탈리오니는 서른이라는 만만치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실피드〉로, 시대의 여인으로 대접받았다.


하지만 마리 탈리오니는 실상 재능을 타고났다기보다는 만들어진 ‘스타’였다. 그의 뒤에는 아버지라는 조력자가 있었다. 마리의 매니저이자 안무가였던 필리포 탈리오니는 자신의 욕심과는 달리 춤에 있어 별반 재능을 보이지 못했던 딸에게 당시 발레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던 발끝으로 서는 포인트 기법을 혹독하게 훈련시킨 당사자이기도 하다.


여기에 덧붙여 필리포는 딸에게 동시대 도도하고 과시적인 여느 발레리나와는 차별된 겸손하고 절제미가 있으며 고상한 태도를 가지도록 가르쳤다.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이 결합되면서, 마리 탈리오니는 인간이 아닌 ‘천상의 여인’으로 그 시대 남자들의 마음을 한몸에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대 위의 ‘천상의 요정’은 무대 아래에서는 한없이 세속적인 여인 그 자체였다.


까다롭고 변덕스런 성격, 거기에 끝모를 사치와 남성편력은 그를 요정이라 착각하고 결혼한 첫번째 남편인 부아쟁 공작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마흔네 살의 나이에 무대를 떠난 탈리오니는 갑부 연인들 사이를 요정처럼 떠다니다 결국 재정파탄으로 조그마한 무용교습소를 운영하며 우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예술모독가’ 와 ‘선율의 원수’ ~ 혹평받은 리스트와 바그너


19세기 유럽은 정부나 국가의 무조건적인 검열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는 분위기였다. 그리하여 다양한 예술품들이 창조되었는데 그 작품들을 평가하는 비평활동이 가장 활발해졌던 때도 바로 이 시대였다.


그러나 이제 막 자유를 만끽한 이들의 시각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1869년 뉴욕 셔머 출판사에서는 작자 미상의 카툰을 인쇄 배포했다. 카툰의 제목은 ‘미래 음악’인데 고양이 여덟 마리, 당나귀 세 마리와 염소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그리고 있다. 지휘자의 보면대에는 리스트의 교향시 악보가 펼쳐져 있으며, 지휘자 발아래 버려진 악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바그너, 1995년까지 연주금지.”


‘미래 음악’은 당시 상당히 모욕적인 표현이었다. 청중들의 귀를 괴롭히니 이 시대에는 연주를 하지 말아주십사, 하는 바람이 담겼다. 그럼에도 이 용어를 거의 매일같이 듣고 산 음악가가 있었으니, 바로 바그너와 리스트다. 좀더 구체적으로 당시 비평을 들여다 보자면, 리스트는 “최고로 조잡한 음악을 쓰는 사람”이며 그의 협주곡은 “외설적이고 부도덕”하다고 지탄받았다. 관현악곡은 “예술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파우스트>는 특히 지탄이 심했다. “만일 그게 음악이라면 타락 음악”이라는 쓴소리까지 감수해야 했다.


리스트의 사위인 바그너에 향해진 비판은 더 심했다. 베를린의 한 정신과 의사는 그를 “정신착란증 환자”라며 경멸했다. “적()그리스도” “선율의 원수”라는 비난도 그를 따라다녔다. 같은 작곡자 베를리오즈조차 바그너를 가리켜 “확실하게 미친 사람”이라며 인격모독성 발언을 퍼부었다. 그의 오페라 <탄호이저> 서곡에 대해 파리의 평론가들은 “우리집 고양이가 피아노 건반 위에 걸어다니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내일이라도 얼마든지 작곡할 수 있다”고 말해 훗날 쇼팽의 <고양이 왈츠>의 창작배경을 예언(?)하기도 했다. 1856년 발라키레프는 평론가 스타노프에게 전날 초연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본 소감을 다음과 같이 편지로 적어보냈다.


“<로엔그린>을 보고 나서 머리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듯 아팠다네. 그날 나는 밤새도록 거위꿈을 꾸었어.”


당대 이처럼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이 두 작곡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늘날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 19세기 ‘미래 음악’이란 표현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되새겨볼 만한 대목이다. 마치 작품에 대한 평가를 후세들의 몫으로 남긴 것처럼 여겨진다. 당대에는 최악의 음악이었으나 미래에는 언제든지 그 가치관이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당시 사람들은 열어둔 셈이다.


과거에서처럼 자유롭고 거침없이 만연했던 혹평들이 현대에 와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 오히려 우린 의구심을 품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 19세기보다 훌륭한 작품들이 쏟아져서일까. 혹 우리는 19세기보다도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진보하지 못한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치에 굴복한 독일 음악 대부 ~ 힌데미트 사건


역사상 이데올로기가 예술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강제력을 발휘한 때는 언제일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시기는 예술이 자유를 가장 크게 주창하였을 때와 일치하고 있다. 20세기 중반 예술을 정치적 사상의 선전도구로 이용했던 독일 나치즘과 연관된 몇 건의 사건들이 이를 증명한다.


나치에게 희생당한 예술가들의 면면을 들여다볼 때 그 안에 포함된 명단에는 유대인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상당수의 순수 아리안계 혈통들이 블랙 리스트에 올라있다. 힌데미트 사건, 일명 오페라 <화가 마티스> 사건은 이러한 부류 사건의 절정이었다. 독일 순수혈통인 힌데미트는 물론, 독일 고전음악의 대부였던 푸르트뱅글러까지 얽히면서 이 사건은 나치정부를 참으로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화가 마티스>는 힌데미트가 직접 대본까지 쓴 오페라 작품이다. 주인공은 뷔르츠부르크 출생의 독일 종교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로,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는 궁정화가였지만 농민의 편에 서서 농민항쟁에 가담하다가 할레에서 사망했다. 힌데미트는 알자스 이젠하임 성당 제단에 그가 남긴 벽화의 제목을 세 악장의 표제로 각각 붙였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농민의 편에 선 마티아스의 행적을 찬양하고 당시 독일지역의 대주교가 자신에게 불리한 책들은 모두 태웠다는 장면을 묘사해 나치를 자극했다.


그렇지 않아도 힌데미트는 유대인 출신 음악가들과 실내악 운동을 벌이는 한편 1928년 베를린에서 초연한 <오늘의 뉴스>라는 오페라에 알몸으로 목욕탕에서 아리아를 부르는 장면을 포함시켜 검열 대상자로 올라 있던 터였다. 그러나 힌데미트는 검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심사가 끝나기도 전인 1933년 독단적으로 영국 비비시(BBC) 심포니와 함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는 교향곡 <마티스> 초연을 감행했다. 그 이듬해, 당시 나치 치하 제3제국 음악국 총감독으로 있었던 푸르트뱅글러가 그에게 동조하여 베를린 필을 데리고 독일 초연을 하였으니, 당시 나치 정부에 반대하던 대다수 독일 국민들은 콘서트홀에서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고, 결과적으로 엄청난 정치적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나치는 언론을 동원하여 힌데미트를 “유대화된 인물”이라 비난하고 정치적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푸르트뱅글러는 <화가 마티스>를 “순 게르만적인 걸작”이라 반박하고, “정치가 예술에 간섭하면 안된다”고 주창하며, “힌데미트를 잃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 맹렬하게 항변했다. 이렇게 항변한 당일날 저녁 푸르트뱅글러가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기 위해 베를린 슈타츠오퍼에 등장나자, 관객들은 그를 기립박수로 맞이했다고 한다.


결국 이 소문은 히틀러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힌데미트의 오페라는 상연금지처분되었다. 힌데미트 또한 베를린 음악원 교수직을 빼앗겼다. 이에 항의하고자 푸르트뱅글러는 베를린필 상임직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정치적, 예술적 공직에 사표를 던졌지만, 예상밖으로 이 사표는 수리될 뿐 아니라 심지어 출국금지처분까지 당했다. 그 이듬해 4월, 푸르트뱅글러가 결국 나치와 타협했다는 소식이 전 유럽에 퍼졌다. 그 다음 달에 그는 나치주의자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 속에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로 다시 복귀했다.

 

 

 

낡은 틀 깼지만 독자 스타일 미완성 ~ 현대무용가 이사도라 덩컨


 “나는 발레의 적입니다. 발레가 거짓이고, 부조리하며, 예술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 나는 내가 발레 댄서로서 경력을 쌓지 않아도 좋게 해준 잔인한 운명에 대해 신에게 감사 드립니다.”


20세기 초 당대를 주름잡던 프리마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의 집에 찾아온 이사도라 덩컨은 발레 뤼스의 창시자 디아길레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침 이 시기 그녀는 무용학교를 운영, 기존의 고전발레를 파괴하는 새로운 몸동작을 만들어내며 고전발레의 아성이었던 러시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덩컨의 춤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파블로바의 단짝 안무가였던 미하일 포킨은 덩컨의 춤을 열성적으로 찬양한 반면, 디아길레프의 추종자 니진스키는 조롱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마지막 임종 직전까지도 자신의 발레음악으로 덩컨이 춤을 출까봐 염려했다고 한다.


여하튼 덩컨의 프로필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고전발레에 최초로 반기를 든 선구자. 현대무용의 창시자. 즉흥 무용의 대가. 튀튀(여성 발레복)와 토슈즈가 여성의 몸을 왜곡한다 하여 맨발에 나체로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는 특히 유명하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사실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우선 덩컨 이전부터 유럽과 미국에서는 고전발레의 테크닉을 깨뜨리려는 현대무용의 시도가 이뤄져 왔다. 이러한 시도들은 덩컨 이후의 세대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었다. 오히려 덩컨은 고대 그리스 무용으로의 회귀를 시도했다. 덩컨이 고전발레를 전혀 접하지 않아서 춤이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주장이 많은데, 이 또한 틀리다. 영국 로열발레단 안무가에게 고전 발레의 테크닉을 매우 체계적으로 섭렵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덩컨은 단 한 번도 나체로 춤을 춘 적이 없다. 고대 그리스의 사상으로 회귀하고자 갈망했던 덩컨은 토가나 튜닉 같은 고대 그리스 의상을 즐겨입었다. 그 옷이 풍성하고 헐거운 탓에 역동적으로 춤을 출 때면 흘러내려 덩컨의 신체 일부가 노출됐으며 때로는 의도적으로 직접 의상을 찢기도 했다. 이처럼 신체의 노출을 꺼리지 않는 도발적인 퍼포먼스와 사생아를 줄줄이 낳아 기를 만큼 결혼이란 제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성향 탓에 덩컨은 여성해방운동가로서 당대 신여성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색깔이 짙을수록 본질은 빛에 가려질 수밖에 없다. 동시대 내로라하는 안무의 거장들과 달리 덩컨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기존의 틀을 갈아엎는 데는 성공했지만, ‘덩컨 스타일’이라는 자신만의 꽃을 피우지 못했기에 덩컨의 순수 예술적 업적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뒷자취를 잘 알고 있는 혹자는 덩컨을 예술가가 아닌 단순히 자유를 갈망하는 시대에 편승한 여성해방운동가로 치부하기도 한다. 이념과 감성이 앞서 나가 본연의 의무인 창조를 완성하지 못한 불운한 예술가의 뒷모습이다.

 

 

 

우울한 비극배우가 저지른 대비극 ~ 링컨 대통령 암살한 존 부스


18세기 말, 공연예술은 급작스러울 만큼 자극적인 강도를 더해갔다. 그리하여 멜로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화재, 지진, 홍수, 폭발, 살인과 관련된 각종 사건들이 실랄하게 무대 위에서 벌어졌고 관객들은 그런 무대를 보며 웃음과 눈물, 공포심을 번갈아가며 즐길 수 있었다.


미국 연극계는 이러한 풍조가 더욱 심했다. 그러던 1865년 4월14일. 가장 리얼하고 충격적이며 온 미국 시민들이 경악할 사건이 워싱턴 포드 극장에서 연출되었다. 당시 무대 위에서 상연되고 있었던 작품은 <우리의 미국인 친척>. 주역은 당시 미국 최고의 성격배우로 평가받던 명배우 에드윈 부스가 맡고 있었다.


에드윈 부스의 집안은 대대로 연극배우 가문이었다. 아버지 제니우스 브루투스 부스는 당대 미국 전역을 주름잡던 명배우였으며 같은 세대인 형제 주니어스와, 존 또한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를 공연할 때에는 삼형제가 한꺼번에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이들 형제는 모두 비극 전문 배우로 각광을 받고 있었지만 실제로도 비극적인 삶을 살고 있었으니,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정신병력 때문이었다. 아버지 제니우스 또한 정신분열증으로 삶을 마감하였으며 에드윈의 둘째 부인은 중증의 정신이상자였고, 에드윈 형제들은 모두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막내 존 부스는 그 증상이 심각했다.


존 부스의 우울증은 형과 아버지의 명성을 쫓아가지 못하는 자격지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바에서 만난 친구에게서 “너는 결코 아버지 같은 유명한 배우가 될 수 없을 거야”라는 조롱을 받았다. 이 때 부스는 화를 내는 대신 조용히 웃으며 이렇게 응수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무대를 떠날 때, 나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바에서 친구와 헤어진 후, 그는 형이 한참 공연 중인 워싱턴 포드 극장에 찾아 왔다. 형을 만나러 왔으리라 생각한 극장 스태프는 아무런 경계 없이 그를 극장 안으로 들여놓았다. 공연이 한참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던 이날 밤, 그러나 충격적인 장면은 무대 위가 아닌 극장 특별석에서 벌어졌다. 한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에드윈 부스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동안 동생 존 부스는 특별석으로 몰래 잠입해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형의 팬 한 명을 총으로 쏴 죽였다. 그 희생자의 이름은 다름아닌 16대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러프컷’ 들고 서울온 피나 바우슈 ~ 26년전 서울공연때 ‘전라’ 장면 검열에


지난 주 내내 서울 엘지아트센터에서는 독일의 피나 바우슈가 이끄는 부퍼탈 무용단의 <러프 컷>이 공연되었다. 엘지아트센터 개관 5주년 작품이자 한국 공연문화사상 최초로 1급 해외 예술단체가 한국 기업의 지원을 받아 한국을 소재로 만든 예술작품이어서 의미가 남달랐다.


이 창작 작업의 단초는 그들의 2000년 엘지아트센터 공연(<넬켄(카네이션)>)에서 비롯됐지만 실상 피나 바우슈와 한국의 인연은 그로부터 20여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79년 2월3일 세계적 화제를 불러 모았던 <봄의 제전>을 세종문화회관에 올린 것이 부퍼탈 무용단의 첫 내한의 흔적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 참으로 이례적인 사건이었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아방가르드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을 소화하기에 한국은 아직 보수적이고 문화적으로 개방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아니, 한국 관객들이 그렇게 조숙했단 말인가”라며 착각할 만하지만 이유는 따로 있다.


제물로 바쳐지는 처녀 역의 무용수가 전라로 춤을 춘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지면서 이에 대한 찬반 여론이 시끄럽게 일어났고 관객들은 그 소문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무대에서 옷을 벗는 게 그리 호들갑 떨 일이 아닌 일반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가 됐지만 더더욱 보수정권 아래의 당시로서는 분명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요소였을 것이다.


바우슈 개인으로서도 1979년 서울 공연은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의 오랜 연인이자 감정적, 예술적 동반자였던 무대 디자이너 롤프 보르지크가 지병이 있는 상태로 추운 겨울 한국에 함께 왔다가 이후 병세가 악화돼 그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의 기억에 대해 바우슈는 “아주 오래 전, 매섭게 추운 겨울날, 아주 커다란 공연장에서 공연을 했다”고 시리게 회상하고 있다.


그런데 관객들은 과연 여성 무용수의 전라의 춤을 감상할 수 있었을까. 수고스럽게 찾아온 관객들로서는 아쉬웠겠지만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사전 검열에 걸려 당국과 실랑이를 벌인 피나 바우슈는 결국 신체의 중요한 부분은 최소한으로 가리고 춤을 추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한 발 뒤로 물러섰던 피나 바우슈는 앞선 인도 캘커타에서의 공연만큼은 원전 그대로 강행했다. 당시 스리랑카, 싱가포르 등 동남아 5개국에서 <봄의 제전>을 먼저 순회 공연한 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바로 서울이었다.


종교적 보수성으로 철저하게 무장됐던 인도 관객들은 그 무용을 보고 경악하여 항의를 표시하다 못해 무대 위로 쳐들어올 태세였고 춤을 추던 무용수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두려움에 떨었다. 결국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바우슈는 공연 중간 스스로 무대 조명 스위치를 꺼버렸다고 한다. 이 작품은 전 세계 방방곡곡을 돌면서 여러 차례의 난동과 환호를 반복한 끝에 부퍼탈 무용단의 고정 레퍼토리로 안착되었다. 그리고 25년여가 지난 지금 바로 ‘한국’을 주제로 한 작품을 서울에서 공식 초연한 것이다.

 

 

 

무용, 음악의 속박을 벗다 ~ 롤랑 프티의 ‘젋은이와 죽음’


발레 영화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그래도 춤과 관련되어 우리의 뇌리에 가장 뚜렷한 기억을 남긴 영화는 아무래도 <백야>일 것이다. 반공영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적당히 촌스럽고 또 유치하게 우리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타도 공산주의!”라는 편파적이면서도 유치한 주제를 볼 만하게 윤색시켜 준 것은 극중 삽입된 각종 음악들과 프로 댄서들의 현란한 춤이었다. 이 영화의 두 공로자를 꼽으라면 엔딩 타이틀 ‘세이유 세이미’를 노래했던 라이오넬 리치와 현역 발레리노였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일 것이다.


바리시니코프는 이 영화에서 두 편의 실제 현대무용을 선보인다. 하나는 키로프 극장 무대에서 옛 연인 앞에서 비쇼츠키의 노래 ‘야생마’에 맞춰 춘 트와일라 타프의 작품이고, 또 하나는 영화의 시작을 알렸던 롤랑 프티의 <젊은이와 죽음>이다. 특히 이 <젊은이와 죽음>은 영화 세트가 아닌 실제 공연 실황이었으며 입체적인 카메라 앵글로 중요한 장면을 거의 빼놓지 않고 다 보여주어 무용 애호가들의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 자신이 현역 발레리노이기도 했던 롤랑 프티는 바로 전 회에 언급했던 니진스키, 디아길레프가 몸을 담았던 바로 그 ‘발레 뤼스’(1909년 러시아의 발레 감독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파리에 세운 프랑스 발레단)의 정통 후계자다. 지금은 안무 성격이 많이 바뀌어 예전 분위기를 많이 상실하긴 했지만, 1946년 비교적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젊은이와 죽음>은 무대디자인과 의상을 장 콕토가 직접 담당할 만큼 발레 뤼스의 영향이 여전히 드러나 있다.


전후 젊은이들의 상실감과 허무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안무와 음악의 주종관계를 완전히 뒤집었던 파격적인 시도로도 익히 알려져 있다. 실상 이전까지 모든 무용은 음악이 먼저 정해지거나 혹은 작곡된 뒤 그 음악에 맞추어 움직임이 만들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는 안무가들이 음악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티는 마지막까지 작품을 위한 음악을 굳이 공개하지 않았다(실제로는 결정하지 못했다고들 한다). 댄서들은 프티가 임의로 정해준 싱코페이션 리듬의 재즈음악에 맞춰 작품을 연습할 수밖에 없다. 초연 당일날. 마지막 리허설을 앞두고 프티는 무용수들에게 돌연 바흐의 <파사칼리아>를 제시했다. 놀랍게도 프티가 안무한 동작과 바흐의 음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무용 그 자체가 이미 독자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에피소드로, 무용이 음악에 종속되어 있는 음악이 아니라 동등한 예술임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백야>에서 <젊은이와 죽음>을 추었던 무용수로, 노란 드레스의 발레리나도 우리는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녀는 마리-클로드 피에트라갈라라는 무용수로 당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동하고 있었던 유명인사였다. 은퇴 후 피에트라갈라는 마르세이유 예술감독으로 임명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해임되었다. 사유는 성격 파탄이었다고 한다.



초연때 신성모독 항의로 난리,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나는 미쳐 버렸다/ 질서가 광기에 무너지고 있었다/ 지휘자에게 린치를 가하라!/ 드럼의 목을 잘라라!/ 금관악기를 도륙내라!/ 현악기를 피에 적셔라!/ 플룻의 목을 졸라라!/ 스트라빈스키의 봄이/ 성스러운 봄의, 무자비한 영화와 고통을 거느리며 도래하나니”


1913년 5월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 다녀온 영국의 전위시인 사순은 이런 싯귀를 남겨놓았다. 당시 그곳에서는 발레 뤼스의 신작 <봄의 제전>이 일대 난동 속에 초연되고 있었다. “이 따위 공연 집어치워”라는 외침과 야유조의 휘파람, 발 구르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다른 쪽에서는 “거 좀 조용히 합시다”라는 항의소리도 따라서 커지고 있었다. 결국 객석은 두 파로 갈라진 관객들의 욕설과 고함소리로 일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가뜩이나 요란했던 오케스트라의 연주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무대 뒤도 정신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안무를 담당했던 니진스키는 관객들의 태도에 분노한 나머지 무대위로 뛰쳐나가려고 바둥거렸고, 28살의 소심한 무명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그런 니진스키를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었으며, 흥행사 디아길레프는 객석을 어떻게든 조용히 시켜보려고 조명을 껐다 켜기를 여러차례 반복했다.


<봄의 제전>은 스트라빈스키에게는 일종의 신내림이었다. 디아길레프가 위촉한 발레음악 <불새>를 작곡하던 도중 그의 머리속에는 불현듯 원시종교의 제의식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무대 위에서 태양신에게 살아있는 젊은 처녀를 바치는 의식으로 재현되었다. 아무리 20세기 초의 파리가 퇴폐와 자유주의의 온상이었다지만, 그래도 기독교 윤리는 대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교도의 주술적인 내용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모독이었고 심장을 쿵쿵 울리는 원시적인 리듬과 익숙치 않은 불협화음 또한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든 요소였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난동이 단지 초연에만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평론가들에게 집단철퇴를 맞은 소심한 스트라빈스키는 더 이상 공연을 이어가기를 원치 않았다. <봄의 제전> 직후 그의 작품들이 잠시나마 실험적인 색채를 거두고 신고전주의로 회귀한 것을 보면 그도 어지간히 위축되었던 듯 싶다.


하지만 디아길레프의 주장으로 재공연은 강행되었다. 두번째 시도는 놀랍게도 환호와 열광의 도가니 속에 막을 내렸다. 처음에 비판의 칼날을 갈던 사람들도 태도가 바뀌어 쌍수를 들고 환영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봄의 제전>은 현대음악의 불멸의 이정표이자 고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렇듯, 모든 “고전”의 본래 이름은 다름 아닌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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