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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문화예술 관련글

백남준과 윤이상의 만남

by Wood-Stock 2009. 4. 7.

'죽은 백남준'이 '산 윤이상'을 말하다

<증언〉 현대 한국을 대표하는 두 예술가의 만남

2006-01-31 오전 9:38:42 프레시안 김창희 기자

 

한국이 낳은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씨(1932년 7월 20일 서울 출생,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 사망)의 타계 소식이 설 연휴 기간 중에 국내에 전해졌다. 백남준은 무려 40여 년 전 비디오를 미술에 접목시켜 새로운 예술 장르를 개척한 그의 안목으로 놀라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거니와 그 이후에도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솔직담백한 언변으로 세계인들의 예술 이해에 한 획을 그은 주인공으로 평가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백남준은 당초 음악 공부를 위해 1956년 독일 쾰른에 정착해 있었다. 이 이듬해 또 한 사람의 한국인 음악가가 독일 베를린을 찾았다. 윤이상(1917년 9월 17일 경남 산청 출생, 1995년 11월 3일 독일 베를린 사망)이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두 사람은 1958년 독일 중부의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현대음악 하기강습회에서 처음 만났다. 한 사람은 스물여섯 살의 패기만만한 젊은이였고, 한 사람은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예술혼을 주체하지 못해 어렵사리 유학길에 오른 만학도였다.

 

이 두 사람은 한 해 뒤인 1959년에도 다름슈타트의 똑같은 행사에 참가해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은 열다섯 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의 음악제 내내 자연스럽게 한 방을 쓰며 깊은 얘기도 스스럼없이 나누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1958년의 만남을 증언해주는 사진이 한 장 남아 있다.

 

1958년 독일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만난 백남준(왼쪽)과 윤이상. ⓒ프레시안

 

현대 한국의 예술을 대표하는 이 두 사람이 근 반 세기 전 '신인 시절'의 일정 기간 동안 공교롭게도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며 공통의 예술경험을 가졌다는 사실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때 두 사람이 각자의 예술세계에서 어떤 공통분모를 확인하고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려주는 증언은 별로 없다.

 

그 이후 윤이상과 백남준 두 사람이 각자의 활동영역을 음악과 미술로, 활동근거지를 독일과 미국으로 각각 달리한 데에다가 윤이상이 민주화운동에 강력하게 개입하면서 서로의 길이 달라진 것도 언감생심 그런 공통분모 자체를 떠올리기 힘들게 하는 정황이었던 것 같다.

 

또 1958년의 음악제에서 소개된 존 케이지의 전위적인 피아노 연주에 윤이상 씨는 대경실색한 반면 백남준 씨는 '예술의 신천지'를 발견했던 것 같다. 그만큼 출발점부터 두 사람은 달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씨가 부인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당시 백남준의 예술세계에 거는 나름의 기대를 표현한 것은 눈길을 끈다.

 

"그러나 여기 같은 백남준은 다행히 머리가 좋고 또 그런 심미안도 있는 것 같소. 그는 유리를 깨고 무대 위에서 피스톨을 쏘아서 그 유리 깨지는 소리와 피아노 소리가 서로 어울리는 것을 실제로 실험해보겠다고 하오. 나는 그에게 그 방면의 장래를 부탁할 수밖에 없소. (…) 백군 스스로도 '음악'이라는 용어를 여기서부터 분열시켜야겠다고 말한 바 있소."

 

이제 두 사람 모두 타계한 마당에 바로 그 1958년과 1959년의 여름 다름슈타트에서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보여주는, 꽤나 희귀한 백남준 씨 생전의 증언 한 가지를 소개한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기자가 국내 한 일간지의 독일 특파원으로 있던 1995년 11월 24일 독일 북부의 볼프스부르크에서 열린 백남준 씨의 대형 개인전 '하이테크 알레르기'의 개막행사가 끝난 뒤 그를 따로 만나 그때로부터 꼭 3주 전 타계한 윤이상 씨에 대한 개인적 회고담으로 들어두었던 것이다. 필자는 그로부터 이틀 뒤인 11월26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윤이상 추모음악회'에 취재차 가던 길이기도 했다.

 

다음은 당시 지면에 소화되지 않아 묻혀 있던 내용으로서 때마침 1월 26일 국가정보원의 과거사진실위원회가 동백림사건의 진상을 발표하면서 윤이상 씨의 사건 관련 경위를 상세히 밝힌 데에다 백남준 씨까지 29일 타계해 옛 취재수첩을 뒤져 이 증언을 재정리했다.

 

이 증언에서 특별히 민감한 내용이 새로이 발견되지는 않으나 윤이상 씨 등 독일 유학생들이 반 세기 전에 가졌던 스스럼없는 대(對)북한관, 백남준 씨의 자유분방한 정치 및 예술에 대한 인식 등은 충분히 음미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다름슈타트는 윤이상 씨가 작곡가로서 첫 성공을 거둔 장소인 동시에 북한과 접촉하는 계기를 제공한 도시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깊다.

 

이 회고담에서는 '산 백남준'이 '죽은 윤이상'의 명복을 빌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백남준 씨의 명복을 빌 순서가 되었다. 이제 막 타계한 백 씨가 이미 예술의 성좌에 영원히 자기 자리를 잡은 윤 씨를 추념하는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의 성좌는 또 어디쯤 자리잡게 될지 가늠해 보면서 말이다. <편집자>

 

"너무 기뻐도, 너무 서러워도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윤이상 씨가 1959년 독일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첫 성공을 거두던 날(편집자 : 9월 4일 초연), 나는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그가 작곡해 초연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에 엄청난 박수갈채가 쏟아지자 무대에 나가 인사하고 들어오더니 "박수를 받으니 심장이 뛰어 큰일 났다"고 하더군요. 본인이 예상했던 것에 비해 엄청나게 성공을 거뒀거든요. 그런데 그 양반은 심장병 때문에 너무 기뻐도, 너무 서러워도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오래 사시긴 했지만….

 

우린 그때 2주 동안 한 방을 썼지요. 그 양반이 대화중에 보여준 예술에 대한 진지한 열정은 놀라운 것이었어요. 그때 북한에 대한 그의 생각도 많이 들을 수 있었어요. 내가 "북한 사람들만 쫒아 다닐 게 아니라 이젠 우리도 일본의 큰 시장을 상대로 장사할 생각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엄청나게 화를 내더군요. 같은 민족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 하고 일본과는 아예 거래도 말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북한에 대해 나이브했다면, 일본에 대해선 너무 아이디얼한 생각을 고집했다고나 할까요.

 

"북한 관련 얘기도 그에겐 비밀이 아니었다"

 

사실 그의 북한 접촉은 정말 우연한 계기로 시작되었다는 걸 내가 잘 압니다. 윤 선생이 그 음악제 기간(한 해 전인 1958년의 음악제를 혼동한 것으로 추정됨)에 다름슈타트의 학생식당에서 한 동독출신 아르바이트 여학생을 만났던 모양입니다. 그 여학생이 아주 친절해서 서로 얘기를 나누게 됐는데 윤 선생이 한국사람인 것을 알고는 자신을 동독 출신이라고 소개하면서 "고향(동독)에는 북한에서 온 친구들이 많다"고 했다는 거예요.

 

이 말을 듣고 윤 선생이 덥썩 "내 가까운 친구 하나(최상한 씨)가 월북했는데 그와 서울에 사는 아들(동백림사건에 윤이상 씨와 함께 연루된 최정길 씨)을 만나게 할 수 있는지 북한 친구들을 통해 알아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친구들에게 편지해보겠다는 대답에 그날 윤 씨는 싱글벙글 기분이 좋아 나에게 그 얘기를 다 하더군요. 애당초 그런 사실 자체를 비밀로 할 생각이 없었던 거지요. 그런 건 비밀이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런저런 연고로 1967년 동백림 사건이 터졌을 때 나는 당일로 소식을 알 수 있었고 쉬쉬 하는 가운데서도 독일신문에 소식을 알리는 등 조그만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때는 내놓고 노골적으로 북한 얘기를 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내 친구의 친구 가운데 이기양(1967년 4월 프라하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취재차 체코 입국 이후 실종. 그의 실종이 그해 6월 동백림사건이 벌어지는 결정적인 단초를 마련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시 한 신문의 서독특파원이었지요. 글쎄, 이 친구가 나한테 얼마나 노골적으로 접근해 왔는지 몰라요. 그 뒤 실종됐다고 하던데 뻔하지요, 어디로 갔을지는.

 

"윤 선생은 진짜 애국자인 동시에 진짜 음악가"

 

아무튼 사건이 터진 뒤로는 서로 자기 일에 바빠 못 만나다가 1980년 쾰른에서 열린 '한국과의 만남'이라는 음악관계 모임에서야 윤 선생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나를 보더니 대뜸 "이 놈아, 내가 (민주화운동으로) 이렇게 고생하는데 도와줄 생각도 안 하느냐"고 하더군요. 그저 건강만 묻고 구체적인 대답을 안 하자 그 문제는 다시 꺼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예술로 두각을 나타내는 것 자체가 애국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생각은 달랐지만, 그는 진짜 애국자였고 진짜 음악가였습니다. 한국 사람의 감수성을 그렇게 체계화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에겐 '포즈'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의 로맨틱한 감정이 독일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 것도 중요한 성공요인이지요. 사실 독일 사람들 대단히 낭만적이거든요. 그리고 나는 독일에 사실 그리 오래 있질 않았지만 윤 선생은 이곳에 오래 살아서 '정치'를 잘 한 측면도 있고, '자기 설명'도 잘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세계에 알린 것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코리아'"

 

아무튼 그가 독일과 세계에 알린 것은 남쪽 북쪽 따질 것 없이 '코리아'였습니다. 문화부 1년 예산의 몇 배에 해당하는 일을 한 것 아닙니까? 사실 언젠가 이원홍 문화공보부 장관(1985년 2월~1986년 8월 재임)을 만나서 내가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어요.

"한국 사람으로서 윤이상 씨와 내가 있다는 것은 정말 우연이 아니다. 세계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무엇인가 알게 만드는 데 우리 두 사람보다 더 기여한 사람이 누가 있나? 그렇게 이름난 사람이 한 사람뿐이면 우연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두 사람이나 각자 제 일을 하면서 이름을 낸 것은 우연일 수가 없는 것 아니냐? 윤이상 씨를 지금처럼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정말 훈장 준다고 불러도 시원치 않을 일이었는데 노인이 죽으러 고향에 가겠다는 걸 '사과' '해명' 운운해서 막은 건 큰 잘못입니다(1994년 한국 음악계에서 '윤이상 음악축제'를 기획해 그의 귀국을 추진했으나 한국 정부가 '준법서약서'의 제출을 요구해 결국 무산된 일을 가리킴).

 

"훈장 준다고 불러도 시원치 않을 일인데…"

 

내가 늘 얘기하지만, 예술가는 절반은 재능이고 절반은 재수입니다. 두 가지가 겹친 사람을 찾아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백림사건으로 건강을 해치고서도 이렇게 기적적으로 오래 살아주셔서 고맙다고 하면서 아량을 보였어야지요.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 사느라고 바빠 베를린으로 병문안 한번 못 간 게 정말 안타까왔습니다. 늦게나마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