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 Culture/문화예술 관련글

사진작가 최민식

by Wood-Stock 2009. 4. 7.

‘카메라의 렘브란트’ 최민식의 생애

 

사진으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한 예술가.

시련을 겪는 인간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내 삶의 존엄성을 일깨워준 철학자.

가난과 박해에도 그는 50년간 단 한번도 카메라를 놓아본 적이 없다.

그렇게 최민식은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나의 카메라 워크는 절대로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나 호기심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통찰과 분노의 고발인 것이다. 나의 사진은 고난과 시련을 겪는 인간으로서의 아픔 그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사진 속에 담겨 있는 인물의 고통에 직면하게 하였다. 이것은 비참하고 불쌍하다는 동정의 의미보다

인간이 누려야 할 삶의 존엄성을 일깨워주는 아픔이었다.”

 

최민식선생(77)의 사진론이다.

 

지난해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사진전을 대여섯 차례 보러 갔다. 그가 일흔을 훨씬 넘긴 노대가(老大家)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1950~70년대에 고달프고 비참했던 우리들의 모습, 50년 시간을 뛰어넘어 눈앞에 달려드는 수백점

사진 앞에서 나는 거의 고통을 느꼈다. 충격이었다. 콧날이 시큰해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사진이 숱했다.

 

갈가리 찢어져 살이 다 드러나는 러닝셔츠를 입은 사내, 듬성듬성 빠진 이빨을 드러낸 채 밝게 웃는 지게꾼, 그의 때 낀

손톱과 검정고무신, 머리와 몸에 비닐을 둘러쓰고 비를 피하는 생선장수 아낙, 마른버짐이 핀 아이에게 국수가락을 걷어

먹이는 젊은 엄마, 산발한 머리에 누더기를 입은 채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서양 만화의 주인공을 그려대는 계집아이들,

그들 곁에 놓인 초라하기 짝 없는 보퉁이, 머리에 둘러쓴 다 해진 수건, 엄마의 빈 젖을 파고드는 굶주린 아기, 까까머리

동생을 업고 지치고 때묻은 얼굴을 밧줄 위에 묻은 누나….

 

고달프고 굶주리던 이 시대, 외신기자도 아닐 텐데 우리들의 부끄러운 얼굴을 이토록 다양하게 클로즈업해놓은 최민식은

누구인가, 그는 왜 이들에게 렌즈를 들이댔을까. 누추한 입성에 지쳐빠진 표정들, 다 해진 누더기 속에서 눈부시게 약동하는

아이들, 아름답지도 위대하지도 않은 이들을 주목한 까닭이 뭘까…. 나는 의아하고 신기하고 또 고마웠다.

 

그들의 일그러지거나 무연한 표정은 나로 하여금 어떤 아름다움이나 위대함보다 더 큰 둔중한 감동을 맛보게 했다.

새삼 겸허하고 유순해져서 나는 놀란 눈으로 세상을 둘러봤다.

 

그는 출생지가 경북 안동이라고 하지만 원래 고향은 황해도 연안이다. 천주교도라 동네에 정착하기 어려웠던 아버지가

전국을 떠돌다 안동에서 어머니를 만나 혼인해 그를 낳았다.

 

“밀레 같은 그림을 그려라”

“없는 살림에도 아버지가 어디선가 물감을 사오셨어요. 화가가 되려거든 밀레같이 가치 있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시면서.

밀레의 ‘만종’을 어디선가 구해오시기도 했어요. ‘이 사람처럼 농사짓는 가난한 사람들을 그림으로 그려라’고 하셨죠.

아버지는 성당에 열심히 다니셨고 가톨릭 성인들의 얘기를 많이 해줬어요. 돈 보스코 성인의 축제 얘기도 아버지께

들었거든요.”

 

그러나 가난은 모든 것을 지웠다. 밀레의 그림을 흉내내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찬탄을 받았지만 그림공부는

언감생심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땅이 없는 그들 가족은 지주 밑에서 소작을 부쳐야 했다.

 

“당시 연백 땅이 거의 개성 사람들 소유였어. 4대 6으로 나눠 먹는데, 식구가 많으니 7개월만 먹으면 양식이 바닥나 버려.

나머지 5개월은 굶어야 하는 거지. 그런 배고픈 체험이 없었으면 내가 오늘날 이런 사진을 찍지 않았을 거예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서 외국 가서 공부했다면 지금쯤 풍경이나 누드사진을 예술이라면서 찍고 있겠지….”

 

식량도 안 되는 농사일이 싫어 평남 진남포의 군수공장에 취직했다. 얼마 후 광복을 맞아 고향에 돌아오지만 그래도

서울로 가야 그림 공부할 길이 열릴 듯해 소년은 서울로 올라온다. 차비는 고모를 졸라 빌렸다. 첫 상경한 그는 나중에

자기가 찍고 다닌 사진 속 인물과 비슷한 모습이었으리라.

 

“6·25전쟁이 나기 3년 전이었어. 일단 과자공장에 취직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용산에 있는 작은 미술학원에 다녔어요.

그것만으로도 뛸 듯이 기뻤지. 그러나 낯선 곳에서 먹고 자고 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라야지. 정말 안 해본 것 없이 다 했어.

‘화가’의 꿈을 가슴에 품은 채 식당과 빵공장과 두부공장을 전전했어. 넝마주이, 지게꾼 같은 막노동도 닥치는 대로 했고.

인쇄소에서도 일했지. 군고구마 장사도 하고 나중에는 역전에서 구두닦이도 했어. 온종일 장사해서 돈 몇푼을 벌어놓으면

밤에 깡패들이 와서 다 빼앗아가버리고. 그러느라고 학원도 제대로 못 다녔어.”

 

 

 

무공훈장과 일본 밀항

 

그러다 전쟁이 났다. 이 시절의 고단함은 듣는 것만으로도 진저리쳐진다. 불과 50년 전 일인데 도무지 실감할 수 없는

비현실이다. 먹고 살 길이 마땅찮아 차라리 군대에 지원하기로 했다.

 

“지원하는 바람에 수송부대인 병참단에 배치됐어. 보병에 갔으면 나는 전쟁 중에 죽었을지도 몰라요. 훈련이 끝나자마자

원산까지 밀고 올라갔지. 나중에는 우리 부대가 함흥, 청진까지 갔다고! 미 10사단 소속이었어. 군수물자를 기차로 지원하는

일을 맡았어. 중공군이 투입되면서 후퇴했는데, 후퇴하면서 함흥의 만세교를 폭파하라는 명을 받았어요. 나는 중사였어.

졸병 5명과 함께 그 다리에 폭탄을 설치해놨다가 다리에 인민군이 가득할 때 버튼을 눌렀지. 끔찍했지.”

 

그 참전 공로로 최 선생은 무공훈장을 받는다. 나중 지리산 빨치산 토벌로 다시 훈장 하나를 추가해 그는 6·25전쟁 중

두 개의 무훈을 세우는 전쟁 공로자가 됐다. 나는 바로 이 연재 기사에서 지리산에 숨어 살던 빨치산 할머니를 만난 적도

있고 중국 인민해방군의 자격으로 인해전술에 참가했던 분도 인터뷰했다. 다 선량하고 정의감 넘치는 이들이었다. 자연과

인간과 예술을 특별히 사랑하던 그들, 유난히 미감이 발달하고 감격하기 잘하던 그이들이 서로 총을 겨눈 채 죽고 죽였다는

걸 자랑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전쟁이었다.

 

전쟁 중 그가 속한 부대는 전남 순천까지 후퇴한다. 전시였지만 성당에는 빠지지 않고 나갔다. 성가대 가운데 선 예쁘장한

아가씨 하나를 눈여겨본다. 청년의 가슴에 연정이 타올랐다. 미행해 집을 알아뒀다가 나중에 찾아가서 정식으로 청혼한다.

 

“우리 장인은 고향이 의주인데 한때 우리 동네(연안)에 피난 와서 살았더라고요. 알고 보니 집안끼리 서로 아는 사이야.

그 바람에 혼인이 빨리 성사됐지요. 나는 스물다섯이고 우리 집사람은 열여덟인데 그때만 해도 그게 노처녀였어요.

계급이 상사니까 적기는 해도 월급은 몇 푼 나왔지….”

 

그러나 휴전과 동시에 제대를 선택한다. 손위 처남이 부산에 살고 있어 그 곁으로 살림을 옮긴다. 아이 둘이 태어나고

네 식구의 가장이 됐지만, 전쟁판에서 숱한 죽음을 겪었지만 그의 뇌리엔 여태도 생생하게 ‘훌륭한 화가’란 말이 맴돌고

있었다.

 

마침내 1955년 그는 일본행 배를 탄다. 밀항이었다. 형편이 괜찮던 처남에게 얼마간의 돈을 융통했다. 고맙게도 아내와

아이 둘도 처남이 맡아줬다.

 

“이맘때였어요. 가을밤이었지. 16명이 부산 영도 해변에서 자그만 어선에 올라탔어. 사흘 만에 일본 규슈에 닿았어요.

다행히 나는 일본말에 익숙해서 검문 때마다 위기를 넘겼어요. 도쿄에 무사히 도착한 후 알아봤더니 같이 간 사람들 중

둘만 빼고 열넷은 잡혀서 오무라 수용소에 갇혔다가 본국으로 강제송환됐더라고요.”

 

스타이켄과의 조우

 

도쿄에 도착하니 수중엔 20일 정도 지낼 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직장을 구하다가 어느 식당에 취직했다. 그 집 주인

딸이 마침 중앙미술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당장 중앙미술학원 야간부에 입학했다. 그토록 오매불망하던 그림공부였다.

희열 그 자체였다. 돈이 필요해 낮에는 미술학원 학생들과 어울려 고물 수집을 하러 다녔다.

 

“당시 일본은 넝마주이 벌이가 괜찮았어요. 학비와 용돈이 나오고 책 살 돈도 나오고 그렇게나 갖고 싶던 중고 카메라도

한 대 샀다니까요.”

 

헌책방을 도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어느 날 헌책방에서 그는 인생을 바꿀 책 한 권을 발견한다. 미국 사진작가 스타이켄이

편집한 ‘인간가족’이란 사진집, 태어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다 죽는 인간사의 반복을 영상언어로 보여주는 책이었다.

 

“카메라의 성서, 인류라고 하는 드라마, 신비를 수놓은 서사시였어요. 신을 향한 인간의 고백이었고 관객과 사진작가가

손을 맞잡고 올리는 기도였어요.”

 

치열하게 일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이 그 흑백사진집 속에 담겨 있었다. 놀라웠다.

사진이 이렇게 울림이 큰 것이라면, 그림보다 사진을 하고 싶었다. 새로 산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림 대신

사진이론과 촬영 연구에 몰두했다. 삶의 진실과 인간 본연의 적나라한 모습을 사진 속에 담는 일에 미칠 듯이 빠져들었다.

힘든 일을 해도 지치지 않았다.

 

마침내 2년제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그제야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공부의 목적을 발견했고 방법도 알았으니

돌아가도 좋았다. 1957년 그는 중고 카메라 석 대와 부속품, 수십 권의 사진집을 사들고 다시 밀항해 부산으로 돌아온다.

 

 

 

 

“이런 사진 찍는 건 이적행위”

 

그날 이후 카메라를 놓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날마다 자갈치 시장바닥이나 판자촌을 돌아다녔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내년이면 사진 찍기 시작한 지 50년, 그는 카메라를 통해 서민의 주장을 널리 알렸고 사회 모순을

고발했고 인간의 존엄을 증언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정면에서 찍는다는 건 일종의 도전이었다. 대담성과 용기가 없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내도 필요하고 민첩성도 필요하고 요령도 필요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사진 찍다 멱살을 잡혀 파출소까지

끌려가거나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듣는 건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노숙자나 노동자의 사진을 찍다 몸싸움으로 옷이나

살이 찢기는 일도 흔했고 카메라가 박살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무엇보다 다 찍은 필름을 뺏길 때가 제일 아깝지요. 고발당해 법정에 선 것만도 서너 차례 될 걸요. 공모전에 당선돼

사진이 신문에 나면 사진 찍힌 이의 가족이라는 사람이 만나자고 연락을 해 와요. 허가 없이 찍었다는 이유로 보상을

요구하는 거지요.”

 

간첩이라고 신고가 들어가 경찰이 출동한 건 이루 셀 수도 없다. 얼추 잡아도 일년에 여남은 번씩은 된다. 한번 잡혀가면

짧으면 한 시간, 길면 이틀씩 경찰서에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우리나라 사람의 반공의식이 얼마나 철저한지 놀랄 지경이죠. 간첩 하나 잡으면 3000만원인가를 준다고 하니 일단

신고부터 해놓고 보는 거죠.”

 

그의 ‘휴먼’ 1집이 처음 나온 건 1967년이다. 이듬해 울릉도에서 간첩단이 잡혔는데 그들의 소지품 중에 최민식의 사진집이

섞여 있었다. 밑바닥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찍은 사진들이었다.

 

“수류탄, 자살용 앰플, 난수표와 함께 내 사진집이 턱 나오는 겁니다. 만일 그 책 안에 내가 한 사인이라도 있었더라면…

영락없이 간첩으로 몰렸을 거예요. 무섭던 시절이니 당장 처형당했을지도 모르고. 허허.”

 

군사정부 시절 내내 그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가난하고 삶에 찌든 사람들에게만 렌즈를 들이대는 그를 정권이 미워했다.

등 뒤를 따라다니는 전담형사가 있었다.

 

“발전하는 조국의 모습을 자랑해야 할 텐데 어쩌자고 보여주기 싫은 밑바닥 사람들의 모습만 자꾸 찍어대냐는 거지.

자고 있으면 밤중에 경찰이 들이닥쳐요. 권총 차고 두 놈이 오지. 이런 사진을 찍어대는 건 결국 이적행위 아니냐는 거였어요.

1970년 군사독재에 항의하는 부산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하면서부터는 더욱 노골적으로 박해했고….”

 

그러다 환갑을 넘긴 이후에야 비로소 살 만해졌다. 한 예술가의 인생이 환갑이 될 때까지 가난과 억압으로 묶여 있어야

했다니! 이젠 정권의 압제도 없어졌고 간첩이란 의심도 ‘해당사항’이 없어졌으며 책도 여러 권 나와 알아주는 사람도 제법

생겼다. 원고료나 강의 수입도 들어오기 시작했고, 상도 여러 개 받았다. 그는 천진하게도 그동안 받은 상금을 손가락을

꼽아가며 나열한다. 그리 큰 액수 같지도 않건만 그에게는 생애 최초로 사진을 통해 벌어들인 목돈이었던 모양이다.

 

“2000년도 부산방송 문화대상을 받았어요. 상금이 1000만원이었어요. 지난해에는 부산 시립미술관이 내 사진 50점을 영구

보존한다면서 1200만원을 주데요. 올해에는 동강 사진전에서 또 1000만원을 받고…. 요즘도 집사람에게 한 달에 100만원씩은

준다고요. 상금으로는 아프리카에 가려고 해요. 돈이 뒷받침이 되어야 사진의 앵글 각도가 넓고 깊이가 생기는 건데….

현장에 가서 1년 내내 살아야 해요.

 

10여 년 전부터는 나도 한국을 벗어나 인도 네팔 티베트 이집트에 사진 찍으러 다녀요. 그렇지만 잠깐 만에 후딱 찍고 돌아

오니 뭐가 돼야지. 브라질 인도 중국까지 다니며 노동자만 찍어대는 살가도나 집시만 찍는 쿠델카의 사진을 보면 입이 딱딱

벌어진다니까요.”

 

리얼리즘 사진의 목적

 

오늘도 그는 카메라 두 대를 메고 사람 많은 거리를 걷는다. 그는 늙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는다. 35㎜ 카메라의 작은 크기와

가벼운 무게는 그에게 대단한 기동력을 준다.

 

“이제는 요령이 생겨 무릎에 카메라를 놓고 안 보이게 얼른 찍어요. 그래놓고는 눈은 엉뚱한 데를 보는 거지. 나는 일부러

꾸미거나 연출하는 사진은 딱 싫어요. 그러자면 안 보는 척 앉아서 마냥 기다렸다 순간을 재빨리 포착해서 번개같이 셔터를

눌러야지. 찍히네 마네 실랑이가 있기 전에 이미 셔터가 눌린 거지. 리얼리즘 사진을 하자면 그런 훈련이 충분히 돼 있어야

해요.”

 

그는 ‘자갈치 아저씨’다. 그의 작품은 요즘도 온통 자갈치 시장의 표정과 언어들로 이뤄져 있다. 그의 사진은 본질적 요소만을

포착한다. 장식성을 모조리 뺀다. 동물적 직관으로 대상을 재빨리 발견해내고 카메라 위치를 찾아내 광선과 형태, 인물의

표정이 어울리는 최상의 순간,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해 호랑이 같은 민첩함으로 셔터를 눌러댄다.

 

“리얼리즘 사진의 목적은 삶을 배우는 데 있거든요. 곤궁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장을 담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고난에

직면한 개인의 힘과 위엄이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그게 내 사진의 주제입니다. 사진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장 강력한

지렛대가 되거든요. 카메라는 그냥 펜이에요. 내가 표현할 주제를 잊어서는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어요. 좋은 사진은

사람의 정신과 감정을 확장시킨다고 생각해요.

 

나는 사진의 힘을 믿어요. 힘들게 살아왔지만 사진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켰다고 자부합니다. 현재와 미래의 세대에게

과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사진만큼 탁월한 매체가 없어요. 진정한 사진작가는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야 해요.

그들이 말하는 삶의 의미를 다른 사람들에게 깨우쳐주는 것, 그게 작가로서 나의 임무입니다.”

 

그의 사진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이 담겨 있다. 천마디의 외침과 절규가 들어 있다. 고뇌와 진실,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아름다움, 그게 사진작가 최민식의 변함 없는 주제일 것이다. 그의 사진을 본다. 고구마 여섯 개를 늘어놓고 좌판

앞에 앉은 젊은 엄마, 그 곁에 아랫도리를 다 드러낸 채 놀고 있는 무심한 아이, ‘59년 BUSAN’이라 쓰인 간략한 설명.

그의 사진 끝에 거의 언제나 따라다니는 이 ‘BUSAN’이란 단어는 이제 세계인의 가슴을 치는 아픈 시그널이 되었다.

 

 

 

기사제공= 신동아/김서령 자유기고가 ( psyche325@hanmail.net )

 

==============================================================================================================

 

인간이 거기 있기에 나는 셔터를 눌렀다

 

리얼리즘 사진의 대가 최민식씨 대표작 250여점

슬픔과 눈물로 엉겨붙은 현대사 속 ‘인간’ 보여줘

 

최민식(78)씨는 한국 사진예술 1세대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리얼리즘 사진의 독보적인 장인이다. 올해로 그의 사진인생이 50년을 맞았다. 그 세월 동안 그는 인간을 찍었다. 인간은 최민식 사진의 영원한 주제였다. 지금까지 펴낸 12권의 작품집 제목이 모두 ‘인간’이었다. 사진 전문 출판사 ‘눈빛’이 펴낸 <인간-최민식 사진 50년 대표선집>은 그가 평생 찍어온 사진 가운데 놓치기 아까운 사진 250여 점을 선별해 모은 작품집이다. 최민식 사진예술의 처음과 끝이 여기에 담겼다.

 

“인간이 거기에 있기에 나는 셔터를 눌렀다.” 최민식씨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그렇게 요약한다. 그러나 그가 포착한 것은 단순히 인간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표정이며 인간의 그늘이고 인간의 현재다. 그의 인간은 언제나 역사 속에 놓인 인간이며 현실의 질곡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다시 말해, 슬픔과 눈물로 엉겨붙은 한국 현대사 속의 인간이다. 그가 본 것은 권력의 공식언어, 홍보언어 뒤편에 가려진 누추한 인간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삶의 진실이며 우리 시대의 정직한 표상이라고 그는 믿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인간’을 향한 한없이 가슴 아픈 시선이 그가 찍은 모든 사진에 굵게 박혔다.

 

그가 밑바닥 삶의 고난과 아픔을 껴안은 것은 그 자신이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1928년 황해도의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농사꾼으로 살 수 없어 서울로 왔고 조국이 두 동강 나자 영영 가족과 생이별하는 처지가 됐다. 분단의 고통이 그의 고통이었고 현대사의 고난이 그의 고난이었다. 1955년 미술을 공부하겠다고 일본으로 밀항했던 그는 도쿄 헌책방에서 발견한 사진집에 온 정신이 빨려들었다. 사진집 한권이 일생 일대의 전환점이었다. 그 후 50년 동안 그는 사진으로 세상에 말걸고 사진으로 세상을 담았다.

 

이 대표선집은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민중의 생활사를 담은 작품을 모았으며, 2부는 그가 수도 없이 찾았던 부산 자갈치 시장의 ‘아지메’들로 이루어져 있다. 말 그대로 서민의 애환이 가감없이 드러나 있다. 3부는 전쟁이 남긴 폐허와 산업화의 질주 뒤에 팽개쳐진 사람들을 품고 있다. 거지, 부랑자, 부모 잃은 아이들, 아기를 업은 여인들의 깊은 눈망울, 가녀린 어깨가 폐부를 찌르는 사진들이다. 4부는 인간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를 보여주는 작품이 모였다. 세월의 풍화작용에 이빨이 녹아버리고 이마와 뺨에 깊은 주름이 파인 노인들의 얼굴에는 삶과 죽음을 근원적으로 들여다보는 형이상학적 응시가 배어 있다.

 

최민식씨의 사진은 언제나 처진 사람들, 낙오한 사람들, 짓밟힌 사람들, 그리고 삶의 한량 없는 무게를 겨우 견디는 사람들을 주목하고 있다. 그의 사진은 불의에 대한 고발이며 질식할 것 같은 어둠에 대한 말없는 규탄이다. 그 때문에 지난 독재의 시절에 그는 수도 없이 권력 기관에 잡혀가 취조를 당했다. 그 압박과 위협 속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진실의 이름으로 들어올렸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사진은 시대의 증언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의 사진 속 인간은 삶의 주인이거나 역사의 주체는 아니다.

 

사진비평가 이영준씨는 이 선집에 쓴 최민식론에서 사진 속 인간들이 “주체성의 끄트머리만을 간신히 붙잡고 있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주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을 주인이 되지 못한 상태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 사진집은 그런 진실을 통해 우리 역사의 미완성을 역으로 보여준다. 

 

 

 

 

최민식 사진의 본질은 가난을 향한 휴머니즘

 

최민식씨는 사진집 시리즈 ‘인간’ 말고도 여러 권의 에세이집을 펴냈다. <진실을 담는 시선, 최민식>(예문 펴냄)은 그 가운데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80년 가까운 삶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사진에 관한 신념과 사상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 책에서도 그는 자신의 주제를 간단한 문장으로 단언한다. “내 사진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다.” 그러나 그렇게 끝없이 천착해온 인간이란 주제가 정말로 정직한 것이었던가 그는 이 책에서 되풀이해 묻기를 그치지 않는다. 어느날 딸이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팔아서 자신을 자랑하려는 거예요.”라고 따졌을 때, “딸아이가 나에게 던졌던 말이 수도꼭지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나를 괴롭혔다”고 고백한다. “내가 정말 그들을 팔았던가? 나는 서글픔에 짓눌려 자문했다. 50년 동안 어둡고 고단한 사람들을 렌즈에 담았다. 셔터를 누르면서 한 번도 그들의 삶에서 인간의 진실을 캐낼 수 있다는 것을 회의한 적이 없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사진 찍기의 의미를 묻는다.

 

<사진이란 무엇인가> (현문서가 펴냄)는 사진이라는 예술을 정의해 보려는 노력 속에서 사진 찍기의 의미를 살피는 책이다. 렌즈는 인간을 향해 열려 있으며 카메라는 인생을 찍는다. 다른 어떤 것이기 이전에 사진은 시대의 얼굴이어야 한다. 이 정의 위에서 그는 ‘어떻게 찍을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얼굴에 그 인물의 전부를 담아라.” “결정적 순간으로 영원을 잡아라.” 이어 그는 ‘내가 사랑한 작가’들을 하나씩 나열하며 그들의 어떤 점을 사랑하는지 이야기한다. 앨프리드 스티글리츠부터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까지 위대한 작가들의 결정적 사진들이 지은이의 설명을 돕는다.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현문서가 펴냄)은 1996년 펴냈던 것을 글을 덧붙이고 사진 80여 장을 바꿔 다시 낸 것이다. 사진을 ‘종이거울’이라고 묘사한 대로 그는 증언이자 기록으로서 사진의 구실에 강조점을 둔다. “나는 가난이 준 상처 때문에도 울었지만, 가난이 사람의 영혼을 묶고 모든 희망을 수포로 만들어버리는 것에 더 큰 고통을 느꼈다.” 가난한 사람들을 향하는 휴머니즘이야말로 최민식 사진의 본질임을 이 책은 다시 일깨워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