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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문화예술 관련글

김광석 10주기 추모글 모음 (2006.1)

by Wood-Stock 2009. 4. 7.

 

 

 

 

 

 

 

 

김광석, ‘서른 즈음’의 그를 되살린다

 

노랫말이 내 얘기인듯…말 통하는 친구같아…

 

고 김광석의 노래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주된 주체는 그의 팬들이다. 1995년 6월1일 나우누리 통신에서 만들어진 둥근소리(oneum.net)는 김광석의 팬클럽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이다. 이승우(28) 소리지기는 “고등학생부터 40대 후반까지 회원은 4100여명이며 지금도 꾸준히 하루에 1~2명씩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1996년부터 2월마다 정기 공연을 벌이고 있다. 뜻 맞으면 갑자기라도 모여 그의 노래를 부르고 술잔을 기울인다.

 

고 김광석 팬클럽 ‘둥근소리’ 세대 구분없이 회원 4100명 매해 2월이면 추모 공연

 

김광석의 노래는 곱씹을수록 다른 맛을 낸다고 한다. 깊은 감정 이입을 끌어내 나이와 처한 환경에 따라 느낌의 질감도 달라진다. 이 골수 팬들은 어떤 노래를 되새김질하고, 어떤 느낌을 추억하는지 세대별로 물어봤다.

 

정한나(23) 중학교 3학년 때 라디오에서 처음 들었어요. ‘사랑했지만’, ‘사랑이라는 이유로’였죠. ‘서른 즈음에’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에서도 전율을 느꼈어요. 하지만 아직 이 노래들에 완전히 공감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요즘엔 아껴두었다가 꺼내들어요. 까맣게 잊었던 추억을 우연히 만나는 느낌이 들거든요. 대학교 3학년인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게 돼요. 그래서인지 ‘나무’라는 노래가 와 닿아요. “누구에게 감사 받을 생각 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펴려하오.”

 

이승우(28) 95년 11월 19살 때 광석이형 노래를 만났어요. 실연 당한 다음이었는데 ‘사랑했지만’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꾸밈없고 솔직한 느낌이었어요. 쉽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다른 노래들과는 달랐어요. 지금은 ‘서른 즈음에’를 들어요. 어른들이 단 맛보다 쌉쌀한 게 좋다는 건 그 나이가 안 되면 모른다고 하잖아요. 비슷한 거죠. 어느 순간 노랫말이 자연스럽게 제 이야기 같았어요. 서른 살은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시점인 것 같아요. 결혼도 직장도 고민하게 되고 많이 지치기도 하죠.

 

이진엽(35) 누구에게나 말이 통하는 친구가 있잖아요. 광석이형 노래는 저한테 그런 존재에요. 한번쯤 겪어봤을 아픔을 과장하지 않고 노래하잖아요. 10년 넘게 들어서 특히 뭐가 좋다 이런 거 없어요. 굳이 꼽으라면 ‘잊혀지는 것’,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요. 정신없이 살았던 지난 날을 많이 생각하게 되요. 이 노래를 들으면 ‘내가 한 때 정말 아프게 사랑한 적이 있구나’ 아련한 추억이 떠올라요. 원래 김창기가 노래한 ‘잊혀지는 것’을 들으면 내 기억에서 누군가 빠져나가고, 때로는 내 악의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광석이형은 이런 슬픔을 담담하게 토해내죠. 그래서 안 들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다시 듣게 되는 것 같아요.

 

20대 때는 광석이형 노래에서 희망을 많이 얻었어요. 경상남도 거제에서 26살에 서울로 왔는데 지치고 힘들 때 3집에 있는 ‘행복의 문’을 들었어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보람을 찾아야지’ 그랬죠.

 

정찬근(40) 광석이형이 떠났을 때 제가 30살이었어요. 밥 벌어 먹기 힘들어 미루다 공연을 못 본 게 그렇게 후회되더라고요. 그 뒤엔 안치환, 백창우 등의 콘서트는 빼놓지 않고 갔어요. 30대엔 정말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광석이형 노래를 들었어요. 제 이야기 같아서요. 지금은 그렇진 않아요. ‘그때 그랬지’ 그런 생각이 드는 ‘서른 즈음에’나 따뜻한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정도만 찾아 듣죠. 요즘엔 광석이형 노래 자체보다는 둥근 소리 회원들과 기타 치며 노래 불렀던 추억이 더 살갑게 느껴져요.

  

“자살 아닐것” 의혹 끊이지 않아…‘저작인접권’ 놓고 유족간 얼굴 붉히기도

 

1996년 1월6일 김광석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서른 즈음에’, ‘일어나’ 등으로 인기를 끌며 한창 활발하게 활동하던 가수가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가 자살하지 않았을 거라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경찰은 타살 흔적이 없고 목을 맨 흔적이 뚜렷해 자살로 결론지었다. 긴급수사반을 편성하고 부검도 했지만 의심할 만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 김수영과 팬클럽 둥근소리 회원들은 2003년 1월 5일 문화방송 <시사매거진 2580>에서 김광석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전설적인 록밴드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1994년 권총자살한 뒤 지금까지도 그 죽음의 진실을 캐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김광석의 자살도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저작인접권을 둘러싼 유족 사이 분쟁은 안타까움을 부추겼다. 1996년 김광석의 부모와 부인 서해순은 아버지가 3·4집과 <다시 부르기 1·2>에 대한 저작인접권을, 부인은 이후 라이브 음반에 대한 권리를 나눠 갖기로 합의하면서 갈등은 누그러진 듯했다. 하지만 김광석의 여러 앨범에서 곡들을 따온 추모앨범이 나올 때마다 논란은 다시 불붙었다. 2001~2002년엔 <김광석 앤솔로지 1> <5TH 클래식> <컬렉션-마이 웨이>가 문제가 됐다. 서씨는 저작인접권 침해로 벌금 300만원을 선고 받았지만 항소한 상태다.

 

김광석의 아버지가 숨진 뒤엔 그 권리를 애초 합의대로 김광석의 딸에게 줄 건지, 아버지의 유서에 따라 형과 어머니에게 줄 건지를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졌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법은 딸의 권리를 주장하는 서해순의 손을 들어줬다.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둥근소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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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아릿한 떨림, 끝나지 않은…

1월6일 10주기

 

내년 1월6일이면 가수 김광석(1964~1996년)이 목을 매 숨진 지 10년이 된다. 그 동안에도 사람들은 실연한 뒤 ‘사랑했지만’을 떠올리고 ‘서른 즈음에’로 떠난 청춘을 아쉬워했으며 ‘일어나’에서 위안을 얻었다. 124만260차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태진미디어 노래방기기로 그의 노래가 불려진 횟수다.

 

하회탈 같은 미소와 낭랑하며 구슬픈 목소리…. 그의 이미지는 한번쯤은 누구나 가졌던, 살아가며 읽어버린, 그러나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맑은(혹은 맑았던) 젊은날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소극장―광장과 밀실 사이

 

‘노래를 찾는 사람들’ 등 이른바 민중가요 노래패와 그룹 ‘동물원’을 거쳐 김광석이 솔로 앨범들을 내놓았던 1990년대 초반은 문화적 전환점이었다. 새로운 흐름을 내건 가요들은 군중 속의 외로움, 흔들리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토해냈다. 시선은 개인의 내부로 향했다. ‘넥스트’의 ‘외로움의 거리’, ‘서태지와 아이들’의 ‘수시아’ 등에도 이런 자취는 또렷하다.(이영미 <한국대중가요사>) 광장은 해체되고 밀실의 고독은 깊어갔다.

 

김광석은 개인과 우리의 고민을 아울러 노래했다. 이별의 고통, 세상 앞에 나약한 자아에 대한 연민 등을 절절한 목소리에 담았다. 서정민갑 민족음악협회 간사는 “386세대에게 민중가요가 채워주지 못한 개인적인 위안과 공감을 줬다”고 말했다.

 

3집(1992년)과 4집(1994년), 그리고 한대수의 ‘바람과 나’, 김현성의 ‘이등병의 편지’, 양병집의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까지 끌어모은 <다시부르기1·2>(1993·1995년)에서 그는 우리의 문제로 시선을 다시 돌린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준흠은 “80년대 우리의 정서와 90년대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김광석의 노래엔 모두 있다”고 말했다.

 

이런 노래들을 김광석은 1000차례에 걸쳐 서울 동숭동 소극장 공연에서 풀어놨다. 공동체에 대한 향수와 개별성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절충적인 그곳에서 사람들은 그와 소통했다.

 

통기타―향수와 머뭇거림

 

그는 한대수, 김민기 등 이른바 비판적 포크의 맥을 이으면서도 대중적 지지를 받은 마지막 계승자로 꼽힌다. 그의 3집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와 같은 시기에 발매됐다. 이어 듀스 등 댄스그룹과 넥스트 등 록밴드가 기세를 펴며 문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는 “대중음악의 문법이 획기적으로 바뀌는 시점에서 김광석은 이전의 문법을 지탱해준 인물”이라며 “전면적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김광석의 노래로 덜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비판적 포크의 고갱이는 낭만보다는 사실성이다. ‘이등병의 편지’는 군대로 떠나는 청춘들의 이야기였고,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도 삶을 지탱하느라 허리가 휘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것이었다. 사랑 노래 속 화자들은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그날들’)라며 떠나보내지도 잡지도 못하는 나약한 개인이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따라가지도, 그렇다고 저항하지도 못하며 수동적으로 관조할 수밖에 없는 인물의 사실적인 모습은 오히려 보통 사람들의 공감거리가 됐다.

 

30살―청춘의 소멸과 남은 희망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서른 즈음에’) ‘회귀’ 등 그가 부른 노래에는 빛나던 청춘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이 아로새겨져 있다. 희망과 의지에 대한 확신은 주름이 늘어나면서 자취를 감춰간다. 이는 386세대의 후일담 정서와 맞닿아있다. 임진모는 “민주화 투쟁을 했던 세대의 고단함, 세상을 보는 실망감이 김광석 노래에 전반적으로 퍼져있다”고 평가했다.

 

사실 초라한 자아에 대한 절망감은 그만의 것은 아니다. 이영미는 <한국대중가요사>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1990년대 신세대들은 자신도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노래에서 순수의 표징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점은 김광석의 노래엔 ‘열정의 시대’를 향한 동경과 차마 버리지 못하는 희망이 내비친다는 것이다.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라면서도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일어나’)라고 부추긴다. 그의 노래는 한번쯤은 삶에 지칠, 그래도 쉽사리 포기 못할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래서 그는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형이고 친구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제이에스에이>(2000년)에서 오경휘 인민군 중사(송강호)는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대니”라며 술잔을 기울였다. 가수 박학기, 김건모 등이 참여한 <김광석 앤솔로지1>(2001년) 등 헌정 앨범들이 줄줄이 나왔고, 최근엔 10주기를 맞아 대표곡을 추려 담은 <김광석 베스트>가 발매됐다. 그의 노래들로 꾸미는 뮤지컬 ‘나의 노래’(가제)가 기획되고 있으며 내년 1월말께는 위성디지털방송 오디오 채널44에서 미공개 라이브 음원을 방송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의 가장 큰 팬클럽인 ‘둥근소리’는 매년 그래왔던 것처럼 내년 2월에도 공연을 열고 그를 추억한다.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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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 데뷔뒤 모던포크 계승 절정기때 요절 슬픔 더해

 

김광석의 음악 여정

 

1970년대에는 많은 ‘통기타 가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그럴싸한 노랫말로 귀를 가렵게 하는 ‘팝 같은 가요’를 부를 뿐이었다. 시대를 아우르는 노래를 했던 이들 가운데 음악예술가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한대수, 김민기, 조동진, 정태춘 정도였다. 이 ‘모던포크’의 전통은 80년대엔 그룹 ‘따로 또 같이’로, 90년대에 고 김광석으로 이어졌다.

 

김광석은 음악활동 초기부터 뛰어난 음악인이거나 모던포크를 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1984년 김민기의 <개똥이> 음반에 참여했다. 이 때 만난 몇몇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참여해 공식 데뷔했다. 1988년 ‘동물원’ 1집에 실린 ‘거리에서’와 ‘동물원’ 2집에 실린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를 불러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동물원’은 김창기와 유준열의 노래로 빛을 발하는 밴드였고, 여기서 김광석은 노래 잘하는 가수였을 뿐이다. 그리고 솔로 데뷔 뒤 발표한 ‘너에게’가 담긴 1집(1989)이나, ‘사랑했지만’이 담긴 2집(1991)은 그리 평가할만한 음반은 아니었다.

 

변화의 시작점은 ‘나의 노래’라는 자기 고백이 담긴 3집(1992)부터였다. 정태춘·박은옥만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모던포크의 의미를 부활시킨 <다시 부르기 1>(1993)을 발표하고 나서 그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스스로 “제 자리를 찾은 느낌인 만족스런 앨범”이라고 말했을 만큼 훌륭한 음반인 4집(1994)은 전체적으로 그 동안의 발라드 계열에서 포크 계열로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음반의 색깔은 이전과 달리 무거워 대중적인 인기는 크게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나이에 맞는 삶의 무게를 가진, 그리고 진지하게 삶을 바라보는” 노래들을 부르는 데 성공했다. 이 음반에는 진정한 싱어송라이터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어나’ 이외에도 ‘바람이 불어오는 곳’,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서른 즈음에’, ‘자유롭게’라는 명곡이 실렸다. 한영애, 장필순과 같이 예술적인 자의식과 노력으로 데뷔한 지 한참 뒤에야 훌륭한 싱어송라이터로 거듭 나는 흔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유작인 <다시 부르기 2>(1995)는 한대수 이래 탄생한 모던포크의 계승자로서, 자신의 곡을 포함한 한국 모던포크의 명곡들을 추려서 다시 녹음한 것이다. 조동익밴드의 멋진 세션으로 리메이크곡들이 원곡들을 거의 전부 능가하는 흔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대수의 ‘바람과 나’, 양병집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원곡은 밥 딜런의 ‘돈 싱크 투와이스, 이츠 올라잇’), 김의철의 ‘불행아’, 자신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등이 담긴 이 음반은 뛰어난 노랫말과 담백한 연주로 언제 들어도 실증나지 않는 한국 포크록의 명반이 됐다.

그가 숨진 뒤 헌정앨범 형식으로 <가객-김광석이 남기고 간 노래>(1996)가 발표됐다. 여기에는 미발표 곡인 ‘부치지 않은 편지 #1, 2’가 그의 절절한 목소리로 실려 있다. 당시 김광석은 작곡가 백창우와 함께 시를 대중가요로 만드는 <노래로 만나는 시>라는 앨범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정호승 시에 백창우가 곡을 붙인 ‘부치지 않은 편지’를 녹음한 것이다.

 

그는 서른 셋에 이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음악적인 절정기를 맞고 있을 때 떠난 것이라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분명히 4집은 자신이 생각하는 새로운 음악의 시발점이었다. 그런데 이 시발점이 영원히 끝이 맺어지지 않을 종점이 되어버렸다는 것은 한국 포크록계의 커다란 손실이기도 하다.

 

박준흠/대중음악평론가·광명음악밸리축제 예술감독

 

 

< 이상 한겨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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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포크가수 김광석 10주기, 주름가득 웃음짓던 시대의 절창을 그리워하다

유족간 갈등과 대중문화의 끝없는 차용에 소탈한 그 모습 사라져가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 빈 방문을 닫은 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너의 향기/ 내 텅 빈 방 안에 가득한데

이렇게 홀로 누워 천장을 보니/ 눈앞에 글썽이는 너의 모습

잊으려 돌아누운 내 눈가에/ 말 없이 흐르는 이슬 방울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

창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 방 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김광석이 만들고 부른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너를 잊기 위해 그의 목소리를 빌린 밤이 있었다. 그는 나지막하게 잊으려 돌아누운 나를 위로했다. 잊어야 한다고. 그의 위로가 없었다면, 우리는 불면의 밤을 통과했을까.

 

그가 그리워 그의 목소리를 빌린 밤도 있었다. 나지막한 노래는 자신에게 보내는 만가로 들렸다. 홀로 누워 천장을 보니 글썽이는 모습이 보였다. 글썽이는 것이 그인지, 나인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되뇌었지만, 어제보다 커진 그리움만 남았다. 긴긴 밤을 잊지 못해 새웠다. 그리고 남은 노래를 따라 불러본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 저마다 아름답지만/ 내 마음속에 빛나는 별 하나 오직 너만 있을 뿐이야..”

 

10년이 더 지나면, 그를 지울 수 있을까. 김/광/석

 

2005년 12월16일(음력 11월15일) 서울 창천동 안양암에서는 고 김광석씨를 추모하는 10번째 기제가 쓸쓸하게 열렸다. 형 김광복씨는 “요즘 시끄럽고 그래서” 고인의 친구와 팬들에게 해마다 돌리던 연락을 따로 하지 않았다. 몇 년새 손님이 부쩍 줄어, 양력 1월6일에도 따로 찾는 사람이 많진 않을 듯하다. 영정사진 속 고인은 썰렁한 전당을 둘러보며 사람으로 꽉 메워졌던 학전소극장 시절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안양암의 영정사진, 쓸쓸하다…

 

퍼그같이 주름웃음을 짓고 인생을 나지막이 읊조리던 가수 김광석. 그는 살아서도 포크의 신화였지만 사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신화’다. 잊을 만하면 영화에서, 텔레비전에서, 노래방에서 흘러나온다. 문화적·사회적 감수성이 이질적인 80년대, 90년대, 2000년대를 아우르는 우리들의 ‘공통분모’를 자처한다. 또한 갑작스러웠던 죽음은 ‘불완전성’을 완성시켰고, 그는 박물관에 전시된 화석의 권위를 얻었다.

 

산울림과 들국화가 시대를 풍미했고, 이문세와 이승철이 애절한 절창을 보여도, 대중문화는 유독 김광석을 자주 찾는다. 사람들이 그의 이름에 유달리 관대해지기 때문일까. 사람들을 노래로 마취시킬 줄 몰랐던 그는 이런 모습이 고마울까, 버거울까.

 

후배 가수들은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의 이름을 애써 부른다. 가수 싸이, 이소은, JK김동욱, 김경호의 공통점은 김광석의 노래를 리메이크했다는 사실뿐인지도 모른다. 성시경은 종종 “35살 땐 김광석처럼 소극장 공연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테이는 “김광석의 목소리를 가지고 싶다”고 소망한다. 경력 많은 유리상자도, 신인 그룹 버즈도 입을 모아 “김광석처럼 1천 회 공연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김광석, 그는 가수들에게 ‘가창력’과 ‘라이브’의 선언문이다.

 

드라마, 영화, 뮤지컬에서 그는 청춘과 회한을 상징하는 소도구로 변신한다. 노래의 리얼리티가 배경음악에 인용되면 애틋함은 고조됐다. 시트콤 <세 친구>(2000), 드라마 <삼총사>(2002), 영화 <클래식>(2003), 영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2004), 뮤지컬 <달고나>(2005). 매년 어디선가 노래는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무턱대고 감정이입을 했다.

 

소설가 윤대녕도 시인 이동재도 나지막이 그를 불러 행간에 이름을 새겼다. 그는 ‘표상’이었다. 영화감독 허진호는 맑은 웃음을 띤 김광석의 영정사진을 보고 ‘죽음을 앞둔 사진사가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는다’는 줄거리를 떠올렸고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89)는 그렇게 해서 나왔다. 배경음악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김광석은 누군가들에게 ‘내러티브’의 제공자가 되기 시작했다.

 

‘김광석 내러티브’는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직접적으로 표출되면서 거대한 붐을 일으켰다. 인민군 오경휘 중사(송강호)가 “오마니 생각나는구만.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대니? 야! 야! 광석이를 위해서 딱 한 잔만 하자!”라고 말한 순간, 남북의 병사와 관객들은 다같이 몰래 잔을 부딪쳤다. 1996년이래 가장 뜨거웠던 회고 열풍은 이듬해 2001년 김광석 음반 2장을 발매시키기에 이른다.

 

청춘과 회한을 상징하는 소도구로 소비

 

그러나 간헐적으로 이뤄진 추모 움직임들은 점차 사라지고 초기에 거론되던 장학사업도 소식이 없다. 1996년 2월, 49재 때 김광석 추모사업회(회장 김민기)가 첫 추모 공연을 연 뒤 1999년 1월 서울 학전에서 열흘간 포크축제를 개최해 좋은 반응을 얻고, 2001년 1월엔 ‘JSA 효과’에 힘입어 추모 음반 <김광석 앤솔로지 1> 발매 공연을 했지만 이젠 동료가수들이 자신의 콘서트에서 간간이 친구의 노래를 부르는 정도다. 1999년 윤도현, 서우영, 이정열, 엄태환이 한시적으로 결성한 김광석 프로젝트 밴드도 영화 <산책>(2000) O.S.T 작업에 한 차례 참여한 게 눈에 띌 뿐이다. 이에 비해, 1989년부터 16차례 열린 유재하 가요제는 추모제를 겸하면서 조규찬(1회), 유희열(4회) ‘재주소년’ 박경환(14)을 배출했다(올해는 은행에 예치된 운영자금의 원금 잠식으로 개최 못함).

 

그를 기리는 건 팬들이다. 1995년, 김광석과 어울려 나우누리 통신동호회에서 활동했다가 이후 웹으로 옮긴 팬클럽 ‘둥근소리’ (http://www.oneum.net)는 1996년부터 매해 ‘작은 음악회’를 열고 있다. 1995년 회원들의 연습을 지켜본 김광석은 “나도 게스트로 꼭 나갈게”라고 약속하며 “수익금은 소년소녀 가장 돕기에 쓰자”고 제안했지만 갑자기 그들의 곁을 떠났고, 단순했던 동호인 행사는 추모 음악회로 변했다. 동물원, 박학기, 권진원 등 동료 가수들이 잊지 않고 게스트로 참여하는 이 음악회는 2006년 2월에도 열릴 예정이다. “형의 10주기라고 특별한 건 없습니다. 매년 하던 대로 하려고요.” 소리지기 이승우씨나 다른 회원 모두 여전히 그를 “형” “아저씨”라고 부른다.

 

그의 그림자가 희미해진 이유는 죽음의 원인이 부른 유족 간의 갈등과 저작권 분쟁에서 찾을 수 있다. 김광석씨 부모와 부인 서해순씨는 1996년 죽음 직후 저작권을 놓고 다툼을 하다가 6월 합의에 이른다. 그해 여름 딸 서연(14)이를 데리고 출국한 서해순씨는 미국, 캐나다에 거주하다가 2002년 6월 귀국해 음반기획사 ‘위드33’을 차렸으며, 딸 서연이는 성장장애증후군으로 인해 현재 미국 버지니아에 머물며 학교에 다닌다.

 

사후 음반들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저작권 분쟁이 일어났고, 2004년 10월8일 아버지 김수영씨가 폐암으로 사망하면서 ‘김수영씨 사후엔 판권을 손녀에게 양도한다’는 1996년 합의 조항이 효력을 보이면서 분쟁은 2라운드로 들어갔다. 분쟁의 씨앗은 1993년 김광석씨가 킹레코드(현 신나라레코드)와 계약할 때 아버지 김수영씨가 대리인이 되어 계약서에 사인을 한 데 있다(상자기사 참조).

 

나오지 못한 “아저씨”의 5집이 아쉽다

 

부친 김수영씨와 둥근소리 회원은 2003년 1월5일 <시사매거진 2580>에서 사인에 의문을 제기했다. 친구 박학기는 이미 1988년 6집 음반 <남겨진 너의 노래(광석에게)>에서 “어디선가 나의 노랠 듣고 있다면 꿈속에서라도 말해줘/ 너 떠나던 밤 가려진 모든 진실을”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96년 사건 당시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드나들며 사인에 의구심을 품게 됐다는 문화방송 이상호 기자는 2005년 12월22일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다”며 “다만 명예훼손 등의 문제로 자세한 내용을 공개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수사당국이 의지를 가지고 당시 자료를 검토하면 의문점을 찾아낼 것이며, 그 지점에서부터 누가 왜 죽였을까를 재수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건 당시 경찰은 긴급수사반을 편성했고, 부검도 했지만 의문점은 없었다.

 

2006년 달력을 펼쳐도 팬들이 가공이 덜 된 김광석을 만날 기회는 거의 없을 듯하다. 새로 발굴된 1992년 미 워싱턴대 라이브 실황은 접근성이 낮은 위성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에서 선보인다. 연초 계획된 뮤지컬 <서른 즈음에>(가제)의 공연도 불투명하다. 다만 “서울 대학로에 노래비를 세우고 싶다”는 둥근소리의 작은 음악회가 유일한 제례가 될 듯하다. 생전에 발매된 음반과 사후에 발견된 미발표곡, 공연 실황 등을 들으며 팬들은 마음을 달래야 할 듯하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 연말 ‘송년회, 이런 노래는 참아주세요’라는 보고서에서 분위기를 ‘다운’시키는 위험한 10곡에 주병선의 <칠갑산>, 조용필의 <한오백년> 등과 함께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서른 즈음에>를 포함시켰다. 그만큼 우린 여전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김광석을 노래한다. “변화는 변하지 않는 것이 중심을 잃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더욱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던 김광석. 변하지 않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조금씩 변해간다. 나오지 못한 “아저씨”의 5집을 아쉬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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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노래, 다시 불러요

[김광석의 음악과 생애]

 

3집으로 ‘포크’ 이정표… <다시 부르기 1·2>는 가요사의 명반

 

1964년 1월22일 대구시 대봉동에서 3남2녀의 막내로 태어난 김광석이 살아 있다면 올해로 만 41살이다. 그는 서울 경희중학교 현악반, 대광고등학교 합창단, 명지대 경영학과 입학 뒤 가입한 연합동아리 ‘메아리’에서 차근차근 음악의 기초를 다졌다. 1984년 뮤지컬 <개똥이> 음반에 참여하면서 지인들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내고, 1985년 군대에 간 뒤 군에서 사망한 큰형으로 인해 6개월 복무를 끝내고 제대한다. 1987년엔 ‘회색분자’ 친구들이 모여 동물원을 만들어 1집을 내고 의외의 반향을 얻는데, 프로가 되고 싶었던 그는 탈퇴 뒤 1989년 1집을 낸다.

 

그의 음악적 여로는 생전에 발매된 음반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투박한 강건함, 애달픈 낭만성에 포크의 색깔이 입혀져 음악은 성숙해졌다. 그의 뒤에는 학전의 김민기와 음악감독 조동익이라는 걸출한 두 음악인이 있었다. 1995년 8월 소극장 1천 회 공연을 마친 그는 다음 겨울인 1996년 1월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사후에는 미발표곡과 실황녹음분을 중심으로 베스트 음반이 출시됐고, 동료가수들이 참여한 추모 음반이 나오기도 했다.

 

△ 1989: 1집(서울음반) 동물원 스타일의 연장으로 <너에게> <내 마음의 문을 열어줘> <기다려줘> 등 수록. 10곡 중 6곡이 자작곡으로 싱어송 라이터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 1991: 2집(문화레코드) 한동준 작사·작곡의 <사랑했지만>이 대히트를 쳤다. 문대현의 <꽃>, 김형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 김창기의 <그날들> 등 다른 작곡가들의 곡이 대부분이며 발라드 느낌이 강하다.

 

△ 1992: 3집(서울음반) 포크의 색깔이 드러난다. <나의 노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등. 조동익밴드의 담백한 세션이 가미돼 완성도가 높아졌다.

 

△ 1993: <다시 부르기 1>(킹레코드) 노찾사 시절부터 3집까지의 곡들을 추려낸 베스트 음반. “해석판이 원판을 능가하는 희귀한 예.”(음악평론가 박준흠) <광야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 <이등병의 편지>는 1990년 <겨레의 노래 1>(감독 김민기·제작 한겨레신문사)에서 전인권 버전을 듣고 군에서 죽은 큰형을 떠올린 뒤 여기 수록했다.

 

△ 1994: 4집(킹레코드) “만족스런 앨범”이라고 자평했다. 마흔에 오토바이로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는 꿈을 녹인 <바람이 불어오는 곳> 외에 <일어나> <서른 즈음에> <자유롭게> 등 수록.

 

△ 1995: <다시 부르기 2>(킹레코드) 한국 모던 포크의 대표곡들을 ‘김광석’식으로 부른 명반. 한대수의 <바람과 나>, 이정선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양병집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김의철의 <불행아>, 김창기의 <변해가네>, 유준열의 <새장 속의 친구>, 한동헌의 <나의 노래> 등 수록.

 

△ 1996: <노래 이야기>(삼성뮤직), <인생 이야기>(삼성뮤직) ‘학전’ 공연 중 92~95년과 95년분을 중심으로 담아낸 편집 실황 음반.

 

△ 1996: <가객 - 김광석이 남기고 간 노래>(문화뮤직) 추모 음반. 김광석, 권진원, 송숙환, 안치환, 노래마을, 류금신, 김영남, 박학기, 김현성, 이정열, 윤도현 등이 김광석의 노래를 부른다. 미발표곡 <부치지 않은 편지 #1, 2> 수록.

 

△ 1998: <김광석 1+2>(록레코드) 김광석 1·2집과 동물원 시절 노래를 추려서 수록.

 

△ 2001: <김광석 Anthology 1>(서울음반) 생전의 김광석 목소리에 다른 가수들의 목소리를 덧입힌 색다른 추모 음반. 고 김광석과 가수들이 함께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 박학기, 권진원, 김건모, 윤종신 등 참여.

 

△ 2001: <5TH CLASSIC>(서울음반) 김광석의 목소리에 오케스트라 연주를 입혀 웅장한 느낌을 낸다.

 

△ 2002: <김광석 Live>(스타맥스) DVD 음반. 생전의 KMTV 슈퍼콘서트 실황과 8mm 테이프 공연 실황이 있다. 5.1채널이 아닌 PCM 스테레오.

 

△ 2002: (EMI) 베스트, 라이브, 미발표곡을 모은 세 장의 CD와 영상이 담긴 한 장의 DVD로 구성된 음반. 음질을 다시 손봤다.

 

△ 2005: <김광석 Best>(EMI) 최근 출시된 베스트 음반. 3·4집과 <다시 부르기 1·2>에서 대표곡들을 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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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김광석 사후 발매 음반을 둘러싼 유족 간의 저작권 분쟁

 

1993년 (주)킹레코드(현 신나라레코드)와 5억원 선지급 계약을 맺을 때, 계약서에 사인을 한 건 김광석이 아니라 아버지 김수영씨였다. 김광석의 부인 서해순씨는 “29살이라 세금 문제가 걸려서였다”고 말하고, 형 김광복씨는 “이혼을 염두에 두고 조치한 것”이라 말한다. 1996년 1월 김광석이 죽은 뒤 신나라레코드가 계약서에 따라 로열티를 아버지에게 지급하기 시작하면서 분쟁이 복잡해졌다.

 

1996년 4월17일 부인 서해순씨는 (주)킹레코드와 시아버지 김씨를 상대로 저작권사용료 청구권확인소송을 제기했고 양쪽은 6월 합의를 했다. 시아버지가 ‘3집·4집·<다시 부르기 1·2>’에 대한 저작 인접권을 가지고, 부인 쪽은 이후의 라이브 음반에 권리를 행사하기로 했다. 이 합의엔 시아버지 김수영씨가 사망 뒤에 손녀 서연씨에게 권리를 양도한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그 뒤 나온 음반 중 라이브 음반 <노래 이야기>(1996), <인생 이야기>(1996), <김광석 Live>(2002) DVD는 별 문제가 없다. 동물원 시절과 1집, 2집의 노래가 담긴 <김광석 1+2>(1998)도 유족과 무관한 조아무개씨가 판권을 소유하고 있다. <가객 - 김광석이 남기고 간 노래>(1996)는 동료 가수가 임의로 제작했으나 분쟁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2001년에 나온 <김광석 앤솔로지 1> <5TH CLASSIC>과 2002년에 나온 에 대해선 양쪽의 의견이 엇갈린다. 11월2일 서울 중앙지법 형사단독14부(부장판사 김진동)는 서해순씨가 제작한 음반에 대해 김수영씨측이 제기한 저작권 침해를 인정했다. 서씨가 임의로 ‘3집·4집·<다시 부르기 1·2>’에서 노래를 뽑아썼다는 뜻이다. 서씨는 항소의 뜻을 밝힌 상태다.

 

<김광석 앤솔로지 1> <5TH CLASSIC>은 조금 더 복잡하다. 서해순씨가 자신이 애초 가지고 있던 ‘멀티(Multi) 테이프’(마스터링하기 전의 원본 상태로 노래 따로, 반주 따로 녹음된 테이프)에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걸린다. 서씨는 한 기획자와 계약을 맺고 멀티 테이프 안의 목소리 음원을 내줬다. 그 음원에 다른 가수들의 목소리와 오케스트라 반주 등이 덧입혀져 두 개의 음반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음반엔 시아버지가 권리를 소유하고 있던 음반에 수록된 곡과 동일한 노래들이 있었다. 시아버지 측은 소송을 제기했다. 형 김광복씨에 따르면 “서해순씨는 ‘실제 음반에 수록된 목소리와 다른 트랙을 가져다 썼다’고 주장하면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가수는 보통 한 곡을 여러 번 녹음해 이 중 제일 잘 부른 걸 음반에 수록한다.

 

법무법인 한결 조광희 변호사는 “작사·작곡자가 가지는 저작권과 달리 ‘가창’이란 연주 형태를 지니는 저작인접권에선 노래할 때마다 제각기 달리 권리를 적용시킬 수 있는 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1996년 합의사항에서 말한 아버지의 권리는 세부조항이 없는 한 음반에 미수록된 연습용 트랙들도 아우르는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되는 게 타당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2004년 10월8일 김수영씨가 사망하면서 저작권 분쟁은 추가됐다. 1996년 합의 조항에 따라 손녀로 권한을 양도해야 하는데 김광석의 모친과 형은 1996년 합의한 바로 직후 김수영씨가 사후 권리를 자신들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을 유서에 담아 공증을 거쳤다며 양도 거부의 뜻을 소송에서 밝혔다. 그러나 12월7일 서울중앙지법은 서해순씨의 손을 들어줬고, 최근 서해순씨가 3집·4집·<다시 부르기 1·2>에서 히트곡을 모아 발매한 <김광석 Best>는 적법성을 인정받게 됐다. 항소 여부에 대해 형 김광복씨는 “재판 결과를 검토하는 중”이라고만 답했다.

 

▣ 김수현 기자 groov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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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의 영원한 그 무엇

 

발라드로 승부하다 리메이크로 일어서던 김광석이 맘에 들지 않는 나

추모음반을 듣다 보면 구체적 얼굴들이 떠오르다니, 역시 그는 힘이 세!

 

나는 김광석의 ‘광팬’은 아니다.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보다는 민중가요의 ‘처음 부르기’를 좋아하고, 김광석 프로페셔널리즘보다는 동물원의 아마추어리즘을 사랑했다. 어쩌면 누군가의 말대로 “대한민국에서 10명뿐인 김광석 안티”일지도. 원래 이 글도 ‘그러니까 그는 리메이크의 황제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려다가 4천4백9십9만9천9백9십 명의 돌팔매가 두려워서 ‘나는 김광석의 광팬은 아니다’라고 바꾸었다. 미안하지만, 망자에 대한 미안함도 없지 않았다.

 

설마 김광석의 팬이 아니라고, 김광석의 노래를 피해갈 수 있었겠는가? 당신이 대략 386세대와 엉기고, 대충 노무현에게 투표하는 사람들과 밥을 같이 먹는다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김광석 사후 10년, 내가 기억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기억하게 해주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인민군 송강호까지 나서서 “광서기는 왜 기케 빨리 죽었음?”이라고 아쉬워했고, 소설가 아저씨, 시인 아줌마들도 저마다 김광석의 팬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일종의 ‘교양인의 상식’이었던 셈이다.

 

한줌도 안되는 김광석 안티팬으로서…

 

물론 나도 몰상식하진 않다. 김광석은 나에게 잊을 만하면 찾아왔다. 고딩 시절, 김광석이 민중가요 <녹두꽃>을 부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서 김광석에 대해 무지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단 과시하자. 김광석이 <사랑했지만>으로 알려지고, <일어나>로 일어나서, <나의 노래>로 랄라랄라라~ 하는 동안, 김광석은 내게 뭔가 탐탁지 않은 가수였다. 발라드로 승부하다 리메이크로 일어서는 모습이 어쩔 수 없다 해도 맘에 들지는 않았다. 더구나 그의 ‘다시 부르기’는 이래저래 노래운동에 젖줄을 대고 있지만, 그는 노래운동 출신이란 사실을 별로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아직 민중가요 출신이라고 밝히는 것은 대중가요 가수에게 커밍아웃의 의미도 약간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다시 부르기’는 꼭 김광석이 아니어도 누군가는 했을 법하고, 그 누군가는 아마도 성공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부르기’의 원곡들은 그 자체로 너무나 매력적인 노래들이었으니까. 내가 뭐라건 그는 성공했다. 나의 20대, 90년대 초·중반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두 장의 추모 음반이 나에게 남았다. <가객>의 <부치지 못한 편지>는 김광석 목소리의 비장미를 절절하게 살린 노래였다. 김광석 ‘처음 부르기’로는 모처럼 시대적 맥락까지 담고 있었다. 김광석의 다른 면모는 나에게 일종의 안도감을 주었다. <가객>에 참여한 가수는 백창우, 이정열, 권진원, 안치환 등이다. 대략 김광석의 노래운동 시절의 동지들이 주동해서 만든 음반이었다. 여기까지 90년대 후반의 이야기다. 그리고 5년이 흘렀다.

 

올해 MP3 플레이어를 사면서 김광석의 노래를 다운받았다. <김광석 앤솔로지 1>은 감동이었다. 안치환부터 김건모까지, 살아 있는 선후배가 죽은 김광석과 주고받으면서 부르는 음반이다.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은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윤종신의 목소리를 좋아하게 만들었고, <그대가 기억하는 나의 옛 모습>은 잘 몰랐던 조트리오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안치환과 주고받는 <그날들>을 듣다가는 울컥했다. 아무리 탐탁치 않아도 그는 ‘내 청춘의 영원한’ 그 무엇으로 남았다. <거리에서>를 듣다 “그리운~ 그대~”라고 목청이 올라가면 고딩 시절의 독서실이 떠오르고, <이등병의 편지>를 들으면 스물다섯이 넘어 군대 가던 친구가 떠오르고,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들으면 나를 버리신 ‘그분’이 생각나고, <서른 즈음에>를 들으면 막막했던 청년 실업자 시절이 떠오른다. 유행가를 들으면서 구체적인 얼굴이 떠오르면 그 노래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당신에게 그러하듯, 나에게도 그러하다. 김광석은 힘이 세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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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진정성, 그 청아함!

 

숨지기 한달전 뉴욕에서 3일 내내 술잔을 기울였던 노래친구의 추억

사람들에게 날리던 그만의 멘트 “형, 행복해야 돼!”를 잊을 수 없네

 

세월이 참 빠르다. 광석이의 부음을 전해받고 어이없고 허탈해하던 일이 엊그제 일처럼 선명한데, 벌써 10년. 보고 싶다. 소년 같은 모습으로 파안대소하던 사람 좋던 그였기에 더욱.

 

가수 김광석과의 기억은 김민기 선배 주도하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 음반 작업을 하던 1984년으로 거슬러간다. 전혀 운동권 같지 않은, 달라붙는 청바지에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약간은 건들대던 낯선 모습으로 우린 첫 대면을 했다. 아현동 시장 어귀 애오개 소극장 연습실을 가득 채우던 맑고 청아한 목소리는 처음부터 날 감동하게 하기에 충분했고, 같은 해 가을 노래모임 ‘새벽’의 <또다시 들을 빼앗겨> 공연에서 국민대 대강당을 가로질러 공명하던 <녹두꽃>은 너무 맑고 깨끗해 슬프기만 했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절규하던 그 진정성은 기억하는 것만으로 지나간 삶의 순수함에 대한 회한으로 나를 흔든다.

 

청바지와 나이키, 약간은 건들대던 첫 만남

 

정말 사람 좋은 그였다. 노래모임 ‘새벽’ 활동을 함께하던 80년대 중반 그는 이화여대 근처 골목길에 있던 ‘Prominent’라는 카페 무대에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했다. 가끔 보고 싶어 들르면, 그날 그가 받기로 한 개런티는 아깝지 않게 우리들의 술값으로 헌상되곤 했다. 홍익대 정문 옆의 음악학원과 상도동 ‘새벽’ 연습실에서의 어찌 보면 고되었던 음악 훈련 작업과 정치적인 학습 작업 속에서도 특유의 파안을 지어 보이면서 유쾌하면서 가볍게 이끌어가던 장난기 넘치던 대화들. 난 서로 헤어질 때마다 광석이가 사람들에게 날리던 광석이만의 멘트를 아직 잊지 못한다. ‘형, 행복해야 돼!’

 

‘새벽’ 활동을 접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동물원’ 음반이 우연히 손에 들어왔고, 정말 반갑게 그 청아한 목소리를 이국 땅에서 상업적인 음반을 통해 <거리에서>라는 노래로 다시 듣게 되었다. 그리고 잠깐의 귀국. 유명해진 가수 김광석은 여전히 순수하고 사람 좋은 후배로 넉살을 떨면서 찾아와선 사는 이야기를 다시 유쾌하게 털어놓으면서, 음악과 사람에 대한 나의 넋두리를 잘도 받아주었다. 사실 김광석과 나는 동갑이다. 하지만 대학 학번으로 서열을 엄하게 짓는 한국 사회 덕분에 난 그가 떠나기 전까지 미안하리만큼 톡톡히 형 대접을 받았다.

 

그가 가수로 잘나가던 시절에 난 미국에 있었기에, 사실 서로 소통할 길은 별로 없었다. 95년 겨울, 뉴욕에 있는 선배가 가수 김광석의 뉴욕 공연을 기획하고 싶다고 했다. 정말 오랜만에 유명가수 김광석에게 전화를 했다. 역시 그는 흔쾌히 내 부탁이라면 기꺼이 하겠다며 수락을 해주었다. 필라델피아에서 1회, 뉴욕에서 2회 공연이었다. 공연 준비 때문에 뉴욕에 체류하는 동안 우린 3일 내내 밤새 그렇게 또 술을 퍼가면서 서로의 안부와 생활과 음악에 대해서 정감 어린 넋두리를 풀어놓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일 줄은 정말 몰랐다.

 

그리고 한 달쯤 흐른 뒤, 뉴욕 공연을 기획했던 선배가 광석이의 사망 소식을 전해왔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한 달 전에 여전히 사람 좋은 그와 마셔대었던 술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고 살갑게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아직도 귓전에 맴돌고 있어서, 더욱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

 

얼마 전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 공연 관계로 이화여대 앞 골목들을 서성거릴 기회가 있었다. 갑자기 그가 노래하던 카페에 들러보고 싶었다. 지금도 난 기타를 둘러멘 그가 ‘형!’ 하고 부르면서 내 어깨를 툭 치곤, 일그러지는 얼굴에는 미소를 가득 담은 채 갑자기 신촌 어느 어귀에서 나타날 것 같은 환상을 꾸곤 한다. 우리들 젊은 날의 아름다운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그를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와 다시 술 한잔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슬픈 그의 노래를 그의 청아한 라이브로 한 번만 다시 들어볼 수 있다면!

 

이룰 수 없는 일과 사랑에 빠졌을 때, 너무나 사랑하여 이별을 예감할 때

아픔을 감추려고 허탈히 미소지을 때, 슬픈 노래를 불러요 슬픈 노래를

 

▣ 이창학/ 김광석의 친구·전 <노찾사>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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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잃어버린 뜨거움이여

 

내 청춘을 둘러싼 모순들을 변증법적으로 일거에 해결해준 그의 노래

죽음 뒤 마주한 방송국 카메라, 30분간 땀흘리며 허탕 치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송광호는 아니었지만, 나도 그 비슷한 짓을 한 적은 있다. 김광석이 죽은 해였으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대중음악평론가였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라는 말과 마찬가지였으나, 아무려나 어찌어찌하여 나는 대중음악평론가라는 직함으로 어느 음악 케이블방송사의 카메라 앞에 앉아 있었다. 요는 김광석의 자살과 음악에 대해 얘기해달라는 것이었다. 길어야 몇십 초 정도 나갈 인터뷰였다.

 

“야, 가서 찬물 좀 가져와.”

 

촬영이 시작되고 15분 정도가 지나자 카메라맨이 손부채질을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결코 더운 날씨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진땀을 흘리는 내게 PD가 달래듯 말했다. “그냥 친구에게 얘기하듯이 말씀하시면 됩니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해볼게요.” 내가 너무 심하게 떨어 촬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PD의 권유에 따라 깊은 숨을 몰아쉬며 나는 준비해간 멘트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김광석은 한국 모던포크의 적자로서…” 운운하는, 기실 평상시에는 잘 발음하지 않는 단어들로 이뤄진, 그다지 길지 않은 문장이었다. “친구에게 말하듯이, 친구에게 말하듯이”라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카메라맨이 들어왔다. 나는 카메라를 바라봤다. ‘네가 카메라라면 나는 망원경이다.’ 그리하여 하도 많이 되풀이해서 말하는 바람에 아예 외울 정도가 된 문장, 그러니까 김광석의 음악세계와 그의 죽음의 의미를 짧게 요약한 문장을 마침내 모두 말하고야 말았을 때, PD가 옆에 있던 방송작가에게 소리쳤다. “야, 가서 찬물 좀 가져와.” 그날 나는 30분에 걸쳐서 대략 다섯 문장 정도의 인터뷰를 녹화했다. 이제까지 해본 방송 인터뷰 중에서 그게 제일 긴 것이었다. 그리고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그 인터뷰는 방송에 나오지 않았다. 가족과 텔레비전을 보다가 겸연쩍은 마음에 내가 중얼거렸다. “광석이 형, 괜히 일찍 죽어서….”

 

대학생이었던 내 오른쪽 귀로는 동물원의 노래가, 왼쪽 귀로는 노래를찾는사람들의 노래가 늘 들렸다. 내 음악적 감수성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그 정도였다. 그건 어쩌면 청춘의 정치적 스펙트럼이랄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연애와 운동 사이를 한없이 오가는 변증법적인 움직임. 동물원과 노래를찾는사람들 사이에 김광석이 있었다. 그러므로 김광석의 노래에는 나를 비롯한 한심한 청춘들이 무턱대고 빠져들 수밖에 없는, 청춘을 둘러싼 그 모든 모순들을 일거에 변증법적으로 해결하는 명쾌함이 있었다. 우리를 열광시킨 것은 <그루터기>를 부르던 그 입술로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을 노래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공적 운동과 사적 연애가 원래 둘이 아니라는, 그 참으로 아름다운 일원론의 세계.

 

벌써 김광석이 죽은 지가 10년이 됐다면, 그가 죽은 해는 1995년이었나? 아니면 1996년이었나? 1990년대의 일을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공적 삶과 사적 삶이 아름답게 조우하던 순간은 다만 몇 년에 불과했다. 공교롭게도 김광석이 자살하던 즈음에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일들에 골몰하고 있었다. 광장은 텅 비었고, 잔치는 끝났으며, 정태춘의 노래처럼 오래도록 종로에는 장맛비만 내렸다. 나는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대중음악평론가라는 직업을 버리고 직장인이 됐다. 직장에 다니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찬물’을 마셔댔다.

 

그러다가 동물원의 김창기가 <하강의 미학>이란 음반을 냈다. 거기에 이런 가사를 지닌 노래가 있었다. “또 나의 삶은 아주 말끔히 포장되고 우리의 추억은 멀어지고 모두 제 갈 길을 떠나고 아침 출근길에 문득 너의 노래를 들으며 아주 짧은 순간 호흡이 멈춰질 듯하지만 난 단지 날 가끔 내가 원했던 대로 봐주던 널 잃었다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인걸.” 한때 우리는 한없이 뜨거운 불들을 삼킬 수 있었지. 그때는 누구도 ‘찬물’을 마시지 않았지. 더 많은 뜨거움을 갈망했지. 그러므로 우리가 잃어버린 건 김광석이 아니라, 그 뜨거움이라는 걸, 연애와 운동 사이를 한없이 반복 운동하던, 그 타협할 수 없는 욕망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김광석의 노래란, 그리고 결국 청춘이란 으레 그런 것이라는 걸.

 

▣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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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무슨 재주로 연습하겠나

 

‘하얀 그랜저’를 몰던 티코 같은 가수가 내게 준 환상이여

그가 떠난 이후로 그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안 나타나네

 

2005년 12월 현재. 내가 속해 있는 ‘언니네이발관’은 두 달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콘서트를 하고 있다. 며칠 전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김광석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슬며시 웃음이 났다. 바로 어제 콘서트에서도 김광석의 노래를 부른 나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남들 하루이틀 하는 콘서트라는 걸 몇 달간 하려는 생각을 처음 한 것도 김광석의 1천 회 공연이나 들국화의 장기 공연을 염두에 두면서 구상한 것이었다.

 

‘왜 그 사람은 똑같은 레퍼터리로 통기타 달랑 들고 노래만 하는데 1천 회씩이나 라이브를 해도 사람들이 계속 몰릴까. 왜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과 경외 같은 것들 말이다.

 

당신은 불세출의 포크 영웅

 

내가 처음 그를 실제로 목격한 것은 홍익대 앞 주차 골목에서였다. 하얀 ‘그랜저’를 직접 몰고 어딘가로 웃으며 달려가던 그를 보고 ‘야, 김광석도 그랜저 모는구나’ 하면서 신기해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김광석은 어쩐지 프라이드나 티코 같은, 그것도 아주 허름한 차를 몰고 행여나 운전하다가 시비가 붙어도 그 하회탈 같은 웃음으로 넉넉하게 웃어줄 것만 같은 사람…. 물론 환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라져버리고 난 지금 그런 환상을 던져주는 가수가 없다. 왜 그럴까.

 

나는 종종 돈을 받고 음악글을 쓰는데, 김광석 사후의 우리나라 포크시장을 ‘무주공산’으로 즐겨 표현한다. 시장의 주인이 그 하나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으니, 무주공산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된 것만은 아닐 터. 문제는, 깃발만 꽂으면 차지할 수 있는 그 무주공산이 10년이 다 돼가도록 새 주인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대로 영영 주인 없는 땅으로 남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 땅에 통기타 한 대 들고 저마다 제 목소리를 뽐내며 기똥찬 실력으로 라이브를 하는 가수들은 널리고 널렸다. 미사리에, 대학교 통기타 동아리에, 또 동네 어느 방 한구석에. 누군가 김광석보다 더 정확한 음정과 화려한 바이브레이션으로, 더 깊고 튼튼한 호흡으로 우렁차게 노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처럼 목소리에 슬픔이 배어나오는 사람은 좀처럼 만나볼 수 없다.

 

바로 그 ‘슬픔’이 김광석이라는 가수가 뿜어내는 매력의 핵심이고, 거기에는 그 어떤 재능도 연습도 당할 수 없는 것이다. 슬픔을 무슨 재주로 연습하겠는가. 연습된 슬픔의 표현이, 학습된 감정이 호소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정말 안타깝지만, 내가 만나본 대부분의 통기타 가수들은 쓸데없이 명랑하거나, 아니면 궁상으로 빠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시대를 상징하는 목소리’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슬픈 땅에서 슬픈 세상을 살아왔기 때문에 애수 가득한 그의 노래는 언제나 우리 시대를, 이 땅을 상징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늘은 그런 사람을 한 번에 하나만 내려주시나 보다. 그가 떠난 이후로 그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1970년대에는 송창식이 있었고, 80년대엔 전인권이, 90년대에는 김광석이 있었는데 2000년대엔 아무도 없는 것을 보면 세상이 변한 탓도 있을 것이다. 2005년 지금이 상징이라는 걸 필요로 할 만큼 절절한 게 없는 세상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모든 가치가 변하고, 정의로운 것,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금이지만, 만약 김광석이 살아 있었다면 아마도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해 있을 것이다. 항상 공연을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남의 공연을 모처럼 보고 싶어 예매 사이트를 뒤져보아도 내게 지금 필요하고, 내가 그리워하는 김광석이라는 이름 석 자는 없었다. 대신할 그 무엇도 없었다.

 

그렇다. 나는 요즘 그것이 못내 슬프고, 어떤 의미에서는 불행하다고까지 느낀다. 그것이 바로 김광석이라는 불세출의 가수가 내게 자리하고 있는 크기다. 홀로 무대에서 기타를 들고 하모니카 입에 물고 노래하는 그가 있는 공연장으로 거짓말처럼 빨려들어 가고 싶다.

 

▣ 이석원/ 언니네이발관 멤버

 

< 이상 한겨레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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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노래를 부르는 것 만으로도

오늘 김광석 사망 10주기... 자꾸만 썼다 지우는 그 이름, 그 노래

 

"광석아, 고맙다. 내 인생에 나타나 함께 시간을 보내줘서… 내 기억 속에 너의 맑은 목소리와 미소를 남겨줘서 정말 고맙다."

 

김광석 사망 10주기를 이틀 앞둔 지난 4일 밤 12시 무렵. 가수 강산에(43)씨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10년 전에 무심하게 떠난 '친구' 김광석에게 지금 이 순간 어떤 말을 전하고 싶냐고. 강산에씨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애써 감추려했던 그의 작은 탄식은 성능 좋은 전화기를 피하지 못했다. 잠시 후 강산에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광석아, 고맙다"라고.

 

강산에씨는 90년대 초반 김광석과 함께 신촌역 인근의 카페 '무진기행'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2001년 발매된 김광석 추모앨범 'Anthology1'에서는 김광석과 한 소절씩 주고받으며 이렇게 노래한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10년 전 오늘, 김광석이 지다

 

김광석에게 나직하게 고마움을 전하는 이는 강산에씨와 같이 특별한 추억을 가진 사람만이 아니다. 한번쯤 김광석의 목소리에 기대어 불면의 밤을 건너봤거나, 힘겨운 삶의 고개를 넘어본 사람들은 어김없이 말한다. 김광석은 왜 그렇게 우리 곁을 일찍 떠났느냐고.

 

"김광석, 그를 막 흔들었어야 했다. 훼방을 쳤어야 했다. 감성의 깊은 골짜기로 홀로 걸어들어갈 때 막 떠들어서 그를 환기 시켰어야 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이렇게 노래할 때, 소리소리 지르면서 그를 불러댔어야 했었다. 두발로 땅을 힘차게 구르면서 그를 마구마구 흔들어댔어야 했다." - 김점선(화가), '김광석 콜렉션 마이웨이'에서

 

1996년 1월 6일. 하모니카와 통기타, 그리고 한참을 울고난 뒤 비로소 입을 연 듯한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을 위로했던 가수 김광석이 세상을 떠났다. 김광석의 목소리에 위로 받았던 많은 사람들은 마냥 맑게만 보이는 주름 가득한 그의 미소와 갑작스런 죽음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거짓말 같은 '이 시대의 가객'의 죽음.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거짓말처럼.

 

소극장에서 김광석과 함께 '서른 즈음에'를 부르던 30대의 사람들은 어느덧 40대가 됐다. 서태지와 함께 '난 알아요'를 외치던 아이들은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며 군대에 가거나 누군가를 보냈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를 읊조리며 서른살을 맞이하고 있다.

 

최루가스 자욱한 거리에서 20대의 삶을 보낸 386과 X세대라 불린 90년대 청춘들, 그리고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연인과 실시간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21세기의 스무살이 함께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는 건 더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세대를 넘어선 이들은 오늘도 뒷골목 술집에서 잔을 부딪히며 김광석의 노래를 부른다.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10년 동안 물었던 질문을 서로에게 또다시 던진다.

 

"김광석은 왜 그렇게 일찍 죽었을까?"

 

물음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북한 오경필 중사처럼 "광석이를 위해서 한 잔 하자!"며 술잔을 들뿐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김광석의 흔적은 희미해지지 않았다. 유명 가수들의 그럴듯한 추모 공연은 이어지지 않고 있지만 김광석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다. 오프라인을 포함한 그의 팬클럽은 50개가 넘고 여기에 가입된 사람은 5만에 가깝다. 가장 오래된 팬클럽 '둥근소리'는 96년부터 추모 공연 성격의 작은 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는데, 오는 2월에도 열 예정이다.

 

김광석의 노래가 TV 드라마와 영화에 나오는 것은 더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등병의 편지'는 남한과 북한 병사들의 정서적 통일에 이바지하고(<공동경비구역 JSA>),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준하(조승우)와 주희(손예진)의 이별을 더욱 애달프게 만든다(<클래식>). 또한 김제동과 영화배우 설경구가 TV에서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고 나면 그 노래 제목을 묻는 '신세대'의 문의가 한동안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쇄도한다.

 

10년 후 오늘, 여전히 살다

 

이런 김광석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여전히 김광석을 기억하고 그의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가수 강산에씨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슴으로 느껴지는 진정성의 힘"이라고 설명했다. 한동헌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대표는 "김광석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서 드물게 문학적 성취를 이룬 돋보였던 가객이었다"며 "문학성 짙은 가사와 진정성이 묻어있는 김광석 목소리의 결합은 대중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음악 칼럼리스트 김작가도 "김광석의 목소리는 그에 범접할 수 있는 아류도 계보도 없다"며 "훌륭한 목소리와 좋은 노래가 결합돼 김광석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아이콘처럼 굳어졌다"고 평했다. 여기에 김작가는 다른 해석도 덧붙였다.

 

"한국의 포크 음악은 저항과 미학의 두 갈래 길을 갔는데, 김광석은 이 두 갈래 길을 동시에 장악했다. 그러나 김광석을 작가의 반열에 올리기는 어렵다. 그가 불러 큰 인기를 얻은 곡들은 대부분 리메이크된 것이다. 원곡 자체가 탁월했다. 즉 김광석은 탁월한 보컬이었을 뿐, 창작자는 아니었다."

 

김작가의 지적대로 김광석이 불러 큰 인기를 모은 '이등병의 편지',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불행아', '그녀가 처음 울던 날' 등은 모두 <다시 부르기>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다. 이런 이유로 "김광석은 리메이크의 원조"라는 평가도 있다.

 

"김광석의 노래에는 이미 모든 생을 살아본 듯한 관조가 진하게 묻어있다. 그러나 그 관조는 체념이 아니라 삶에 대한 강한 희망이다. 짙은 슬픔 속에서 건져 올리는 희망. 김광석에게서는 그런 것이 느껴진다."

 

김광석의 팬 이혜영(31)씨의 말이다. 김광석도 공연 실황을 담을 앨범 <인생이야기>에서 아래와 같은 구체적인 희망을 언급하기도 했다.

 

"나는 환갑 때 연애를 하고 싶다. 7년 뒤 마흔살이 되면 오토바이를 하나 사고 싶다. 돈도 모아놨다. 그거 타고 세계일주하고 싶다. 가죽바지 입고… 나이 마흔에 그러면 참 재미있을 것 같다. 여행과 삶을 살아가는 건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조금 힘들더라도 뭔가 새로운 것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견뎌낸다."

 

마흔을 꿈꿨던 영원한 32세

 

그러나 김광석의 죽음이 증명하듯 그는 스스로의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이 앨범은 그의 사후에 세상에 나온 것이다. 64년도에 태어난 김광석이 지금 살아있다면 그의 나이는 42살이다. 그의 말이 지켜졌다면 그는 지금쯤 가죽바지 입고 오토바이에 몸을 실은 채 세계일주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10년 전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가 되어버렸다. 어느덧 김광석 사망 10주기를 맞이한 지금. 그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김광석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래와 같지 않을까.

 

"또 똑같은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향할 때면 가끔 너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한 잔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가 있단다. 너도 가끔 그러하니?" - 전 동물원 멤버 김창기. '김광석 콜렉션 마이웨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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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도 김광석이야?" 오늘따라 너무 그립다

17세부터 지금까지... 김광석과 함께한 다섯가지 추억

 

때로 지나간 시간들은 음악으로 남는다. 그 사람을 떠올리면 함께 떠오르는 향기가 있고, 그 시절을 떠올리면 함께 떠오르는 색깔이 있기도 하다. 혹은 특별한 손짓이나 몸짓만 선명하게 남기도 한다. 하지만 불쑥불쑥 아무 때고 흘러나와 심장을 치고 가는 음악만큼 힘이 센 매개물이 또 있을까.

 

파도 소리를 들으면 서귀포 앞바다에서 듣던 '제주도 푸른 밤'이 저절로 떠오르고, 오늘은 별이 참 곱구나,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이 부르던 '별이 진다네'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유행가를 들으면 모두들 "저거 딱 내 얘기라니깐" 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니겠는가.

 

내 지나간 시간들엔 유독 김광석의 노래가 자리하고 있는 순간들이 많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쑥불쑥 끼어들어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직하고 슬픈 노래들을 불러주던 김광석. 그가 다른 세상으로 떠난 지 벌써 10년이란다. 나는 그가 살아있던 시절보다는 이미 가버린 다음에야 그가 내보였던 슬픔의 정서에 깊이 동화될 수 있었던 세대에 속한다.

 

내가 나이를 먹는 동안에도 김광석은 조금도 나이가 들지 않은 채, 여전히 청춘으로 남아 있다. 그 주름 가득한 웃음이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고맙다. 김광석을 처음 만난 날부터 오늘까지, 언제나 맑고 깊은 슬픔으로 보듬어준 그의 노래에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올리며….

 

[풍경 ①-열일곱살] 나의 짝사랑과 함께 온 노래 '변해가네'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들 말고는 세상에 도통 가수라곤 없는 줄 알고 살았던 내가 김광석의 노래를 처음 만난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대구에는 '시인'이란 이름의 찻집이 있었는데, 늘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시인 지망생들과 담배 연기가 꽉 차 있던 곳이었다.

 

학교 문학 동아리 소속이었던 나는 덕분에 일찌감치 그곳엘 드나들기 시작했다. 토요일마다 모여서 다른 학교 애들이랑 시 토론을 했는데, 어느 날엔가는 동아리 출신 선배들이 그 집에 잔뜩 몰려와서 인사하는 자리가 길게 이어졌다. 자기 소개를 하고, 노래도 한 자락씩 하는데 선배 하나가 무지하게 멋진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바로 '변해가네'였다.

 

"느낀 그대로를 말하고/ 생각한 그 길로만 움직이며/ 그 누가 뭐라 해도/ 돌아보지 않으며/ 내가 가고픈 그곳으로만 가려 했지/ 그리 길지 않은 나의 인생을/ 내게 남겨진 거라 생각하며/ 누군가 손 내밀며/ 함께 가자 하여도/ 내가 가고픈 그곳으로만 고집했지…."

 

아직 사랑을 몰랐던 어린 나는, '너를 알게 된 후, 사랑하게 된 후부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해'간다던 노랫말을 모두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 노래를 부르는 선배에게 반해버릴 만큼은 자라 있었다.

 

노래 잘하는 사람에게 반하면 약도 없다. 짧았지만, 꽤 달콤했던 짝사랑은 선배의 애인을 본 뒤 한 달 만에 접어야 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변해가네'를 사랑해 마지않았다.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는 학교 총각 선생님부터 이웃 남학교까지 짝사랑할 대상은 차고 넘쳤으니까.

 

[풍경 ②-스물살] 최루탄 연기와 함께 온 노래 '그루터기'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김광석은 이미 노찾사 활동을 접은 뒤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루터기'나 '광야에서' 같은 노래들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입학 후 첫 집회가 끝난 밤, 알 수 없는 쓸쓸함으로 학교 강당 앞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앉아 술잔을 돌리면서 선배들이 부르던 노래는 때론 '노찾사'의 것이었고, 때론 '천지인'이나 '꽃다지', 그리고 또 불쑥 김광석의 노래가 끼어들었다.

 

목소리를 높이던 집회가 끝나고, 긴장 속에 도로 위에 누워있던 시간이 가고, 참혹했던 열패감의 순간들도 가고 난 뒤, 가없이 쓸쓸한 마음을 김광석의 노래가 다독여주었다. 대학생이었던 내가 '새'나 '사랑이여'와 더불어 참 좋아했던 노래, '그루터기'.

 

"하늘을 향해 벌린/ 푸른 가지와/ 쇳소리로 엉켜붙은/ 우리의 피가/ 안타까운 열매들/ 붉게 익히면/ 푸르던 날 어느 새/ 단풍 물든다."

 

무모해서 아름다웠던 이십대를 떠올릴 때, 내 마음에도 덩달아 단풍이 물들곤 한다.

 

[풍경 ③-스물두살] 떠나버린 사랑에게 보내는 노래 '그날들'

 

돌아보면 늘 서툴기만 했던 나의 사랑은, 그가 떠난 뒤 속수무책으로 저 혼자 계속되고 있었다. 정작 함께였을 때는 툴툴대기만 하고, 뚱해 있기나 하고, 내 감정을 숨기고 덮어두려고만 했던 주제에, 헤어진 뒤에야 내 사랑은 저 혼자 깊어지고, 또 깊어지는 것이었다. 그가 입대하기 며칠 전, 그를 만나 오래오래 함께 캠퍼스를 걸었다. 다 주지 못한 사랑이 애달파서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흐르곤 했었던 그날들/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를"

 

그 사람이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를 부르며 이등병이 되었을 때, 남은 나는 그렇게 부질없이 '그날들'만 불러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1996년 겨울, 김광석도 세상을 떠났다.

 

[풍경 ④-스물일곱]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나를 돌아보다 '서른 즈음에'

 

스물넷에 시작한 서울살이는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지하철을 타려고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속도를 따라잡기가 힘들어 어리벙벙 서있기만 했는가 하면, 지나치게 많은 건물과 너무 많은 차들과 사람들 속에서 낯선 날들을 보내야 했다.

 

하던 일을 3년 만에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고 있던 무렵에 연대 앞에 있는 '서른 즈음에'에 처음 갔다. 작고 어두운 곳이었지만, 조금은 시끄러웠고 또 조금은 우울한 곳이었지만, 그곳에 가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틀어달라고 우기는 나의 스물일곱은 그리 절망적이진 않았다. 세상 전부와 맞짱을 떠도 해볼 만하다고, 믿는 구석도 없으면서 대책 없이 씩씩하게만 살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불안했던 모양이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워 가는 내 가슴 속에/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백수의 하루하루가 멀어져 가는 걸 보면서, 어떻게 살까, 무엇에 내 인생을 걸어볼까, 참 진지하게 고민했던 날들이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을 무지하게 괴롭히면서. '서른 즈음에'와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진 않을까'를 번갈아 부르면서 나는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서른살 생일엔 꼭 '서른 즈음에'에 와서 술을 먹어야지, 하는 결심을 혼자 했더랬는데, 어쩌다 보니 지키지 못한 약속이 되어 버렸다.

 

[풍경 ⑤-요즘] "싸구려 감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짓이잖아, 이건!"

 

어제 나랑 술을 먹던 후배에게 김광석 이야기를 꺼냈더니, 대뜸 그런다.

 

"누나도 김광석이야?"

 

녀석도 분명히 김광석을 사랑하고, 그가 노래하는 슬픔의 정조를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냥 혼자 알아서 추억하게 내버려두지 못하고 여기저기 매체에서 떠들어대는 게 싫단다. 자기 감정을 싸구려 감상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 같아서, 덩달아 그 분위기에 휩쓸리는 게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래,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아껴둔 마음 속 이야기를 누군가가 헤집어 놓는 것을 보는 일이 유쾌할 순 없는 거니까. 그래도, 나는 또 이렇게 촌스럽게, 김광석을 추억하고 있다.

 

1993년 2월에 내놓은 음반 '김광석 다시 부르기 1'에 김광석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 붉게 물들어 내일을 기약하는 저녁 노을은 그저 아쉬움입니다. 익숙함으로 쉽게 인정해버린 일상의 자잘한 부분까지 다시 뒤집어보고 내걸어온 길들의 부끄러움을 생각합니다. 쉽지만은 않았던 나날들. 내 뒷모습을 말없이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던 고마운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더 열심히 살아야지 다짐합니다.

 

노래를 부르며 생각했던 세상살이가 지금의 제 모습이 아님을 깨닫고 부대끼는 가슴이 아립니다. 읽다 만 책을 다시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기억력의 한계를 느끼듯 불러왔던 노래들을 다시 부르며 노래의 참뜻을 생각하니 또 한 번 부끄럽습니다. 지난 하루의 반성과 내일을 기약하며 쓰는 일기처럼 되돌아보고 다시 일어나 가야 할 길을 미련 없이 가고 싶었습니다.

 

세수를 하다 말고 문득 바라본 거울 속의 내가 낯설어진 아침, 부르고 또 불러도 아쉬운 노래들을 다시 불러 봅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오늘, 그 사람, 김광석이 참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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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슈퍼스타를 향한 너무 아픈 사랑

[기고-대중문화평론가 신현준] 김광석 코드

 

어떤 세대에게 김광석은 왜 잊혀지지 않는 걸까? 김광석의 노래를 들었을 때 밀려오는 절박감은 무엇일까? 김광석과 같은 세대로 같은 시대를 살며, 그 자신 대학 시절 노래동아리 활동을 한 대중문화평론가 신현준씨의 기고를 통해 그 답에 접근해본다.

 

생전에 그리 가깝지도 않았고 그리 멀지도 않았던 사람에 대해서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김광석이라는 이름이 지금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일반적인, 아주 일반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도 충분치 않다. 지나가 버린 기억들, 예를 들어 '통기타' '교정' '소극장' '교외선' 등의 단어를 던지고선 추억과 상념에 잠기는 것은 그를 기억하는 가장 나쁜 방식일 것 같다. 적어도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안된다.

 

어떤 공동체가 있었다. 그 이름을 무엇이라고 붙일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김광석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던 시기. 대략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에 그 공동체는 해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해체는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 공동체가 품고 있던 꿈의 시효는 싫고 좋고의 문제, 즉 취향의 문제로 다가왔던 때가 있었다. 즉, 그때까지만 해도 취향이란 정치적인 것이었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이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이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고 대체로 단순했다.

 

그래서 대중가수 김광석의 활동 기간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활동기간과 그리 시차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뜻밖이다. 김광석의 죽음이 서지원의 죽음과 함께 논의되는 일도 그리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김광석의 전성기는 세상이 이미 변해 버린 다음, 적어도 변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이런 뜻밖의 느낌이 강하면 강할수록, 김광석을 1990년대 이후의 대중연예계로부터 구원하고 싶은 충동도 강해질 것이다. 공동체가 연예계로 전변하던 모멘트, 그 싫지 않은 쾌락의 간극에 김광석은 존재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이 공동체를 '운동권'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김광석이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중후보 백기완의 유세장에서 '타는 목마름으로'를 목놓아 불렀다거나, 몇 년 전 나온 박스세트에 '녹두꽃'의 절창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애써 강조하는 것은 한국에서 대중음악과 대중문화의 역사를 '수난사'로 해석하고 싶은 충동일 것이다. 이건 이제 시효만료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유효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광석을 회상하거나 그의 노래를 다시 들었을 때 어떤 절박함이 밀려온다면? 쉬운 답변이 있다. 그 절박함이란 한 세대의 공통감각이라는 답변. 그렇지만 이런 답변이 설명해주는 것은 많지 않다. 즉, 카 스테레오로 김광석의 CD를 듣는 사람의 정서는 설명해줄 수 있지만, 지방 소도시에서 열린 <전국노래자랑>의 무대에 올라와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를 부르는 한 아저씨의 정서는 설명해 주지 못한다(나는 이 장면을 실제로 TV에서 보았다). 그에게서 김광석 노래의 의미는 이 글의 필자와 독자와는 매우 달랐을 것이다.

 

슈퍼스타의 부재. 1980년대를 주름잡은 1950년생 조용필과, 1990년대를 주름잡은 1972년생 서태지 사이에서 '1960년대산' 슈퍼스타는 부재했다(참고로 전인권도 1955년생이고, 해바라기의 이주호는 1957년생이고, 이문세도 1958년생이다). 달리 말해서 자신이 동일시할 수 있는 슈퍼스타의 부재가 그 세대의 멘털리티다. 어떤날(조동익ㆍ이병우)과 봄여름가을겨울(김종진ㆍ전태관)은 은밀한 숭배의 대상 이상은 아니었다. 이 무렵 슈퍼스타가 대중가수가 아니라 전대협의장이었다는 점이 한국 사회의 희비극이다.

 

결론적으로 김광석은 미완의 슈퍼스타였다. 어떤 공동체의 꿈이 실현될 수 없었던 것처럼, 그의 슈퍼스타덤은 완성될 수 없었다. 그 공동체의 꿈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 충분히 확인된 다음에 윤도현이 슈퍼스타의 지위에 근접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완이었기에, 실현불가능할 수 없었기에 그의 노래들은 절박하게 다가온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그가 노래할 때, 그는 아픔을 피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정면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무모하게 낭만적 사랑에 신뢰를 보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낭만적 사랑이 사회적 정의와 민주화에 공헌했다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우리는 그런 발언이 가능한 공간을 찾아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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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정말 '잘하는 대중딴따라'이고 싶어"

[14년 전 포장마차 인터뷰] 김광석이 말하는 노래철학

 

1996년 1월 6일. 당시 복학생이었던 나는 대지극장 앞에서 발걸음을 급히 멈췄다. 가판대에 비치된 스포츠신문들의 충격적인 헤드라인 때문이었다.

 

'가수 김광석 자살'

 

순간 머리가 띵해지고 숨이 멎는 것 같았다. 33살에 자살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내 감성의 아이콘(icon)이었던 그는 이렇게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그곳으로" 떠나버렸다.

 

난 그날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셨다.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난 대취(大醉)해 쓰러졌다. 원망과 그리움을 모두 가슴에 안고….

 

김광석의 목소리를 만나다

 

그와 나의 인연은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재수생이었던 나는 매일 버스를 타고 홍제동 무악재를 넘나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버스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한곡에 귀가 번쩍 트였다. 김창기의 음색이 매혹적인(내겐 정말 그렇다!) 그룹 '동물원'의 '혜화동'이었다.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그룹 동물원의 멜로디와 언어는 단번에 날 사로잡았다. 난 다음날 레코드 가게로 달려가 동물원 1집과 2집(모두 LP판이다)을 한꺼번에 샀다. 거기에서 '거리에서'(1집)를 부르는 슬픈 목소리의 주인공을 만났다. 김광석이었다.

 

그는 1집에서 '거리에서'와 '말하지 못한 내 사랑', 2집에서는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와 '새장 속의 친구'를 불렀다. 특히 그와 유준열이 번갈아 가며 부른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내가 길거리를 걸으면서 자주 흥얼거리는 넘버가 됐다.

 

"가진 것 없는 마음 하나로/ 난 한없이 서 있소/ 잠들지 않은 꿈 때문일까/ 지나치는 사람들 모두/ 바람 속에 서성이고/ 잠들지 않은 꿈 때문일까/ 비 맞은 채로/ 서성이는 마음의/ 날 불러 주오/ 나지막히"

 

'새벽'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을 거쳐 '동물원'에 안착한 그는 정말 "가진 것 없는 마음 하나"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그리고 "잊혀져 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나를 유혹하는 안일한 만족"을 떨치고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쓰곤 했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1992년 가을. 목소리로만 만났던 그를 불교방송국에서 직접 만났다. 과지(科誌)였던 <나랏말씀>의 편집장을 맡고 있던 내가 92학번 후배들과 함께 10집에 실릴 '김광석 인터뷰'를 위해 방송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저녁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심야 가요프로그램(<밤의 창가에서>란 타이틀을 걸고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하회탈 같은 웃음을 내보이며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노래가 나가는 동안엔 복도로 나와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가 끝날 즈음에 다시 진행을 위해 스튜디오로 돌아가곤 했다.

 

대학생 기자, 김광석을 직접 만나다

 

방송은 다음날 새벽 1시가 조금 넘어 끝났고 우리는 인사동으로 향했다. 우리를 태운 그의 차는 아주 작고 소박했다(그가 엉청 뜬 후엔 그랜저를 타고 다녔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은 적이 있다). 특히 '딴따라'(?)답게 차안엔 두세 벌의 의상(?)이 걸려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인사동 초입에 위치한 포장마차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대학연합노래모임에서 활동한 이야기며 김민기씨와의 만남, '새벽'과 '노찾사'를 거쳐 '동물원'에 이르는 자신의 음악적 여정을 아주 편안하게 풀어놓았다.

 

그는 매우 솔직했다.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지도 않았고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의 정신은 지극히 맑아 보였다. 그는 우리에게 "노래가 가지는 힘 또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사회변혁적인 노래를 부르며 다른 사람들의 행동양식에 변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하는 가수들도 있지. 하지만 나는 내 노래가 다른 사람들의 행동양식에 변화를 가져오게 할 만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아. 그럴 자신은 없으니까. 노래는 생각할 거리를 주고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그 힘을 다한다고 생각해."

 

그는 당시 '민중가요와 대중가요에 모두 접목되는 가수'라는 찬사를 받고 있었다. 새벽과 노찾사를 거쳐 동물원에 이른 그의 음악적 여정을 고려한 평가였다. 하지만 그는 "민중가요와 대중가요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만약 '좋은 노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주어진다면 좋은 노래란 '사는 이야기, 평범하고 솔직한 이야기이다'라고 대답할 거야. (안)치환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대중성 확보를 위한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됐어. 왜 치환이는 대중성 확보에 미흡한지를 생각했지.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그 이유는 일부 사람들의 공감대를 자기의 것으로만 소유하겠다는 이기적인 생각 때문이 아닐까 싶어. 그러한 생각은 단지 당파주의, 편파주의를 형성시킬 뿐이야."

 

그의 '노래철학'은 계속됐다. 그는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노래들은 부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물론 "대중성과 의미있는 노래 사이에서 갈팡질팡해왔다"는 고백도 빠뜨리지 않았다.

 

"내가 부른 노래들 중에 썩 자신이 없는 노래가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경우 내 생각이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불안이 생겨. '거리에서' '사랑했지만' '기다려줘' 등이 그런 노래들이지. 이제는 이 노래들이 일반 대중가요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랑이야기라고 해서 결코 무시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중요한 것은 이들 노래가 대중들의 공감을 얻었다는 것이고, 다른 의미있는 노래들을 접할 기회도 제공했다는 거야."

 

가만 보니 그는 애연가(자판기에서 5갑의 담배를 한꺼번에 뽑기도 했다)에 애주가였다. 그의 손에서 담배는 떠나지 않았고, 소주잔은 끝없이 그의 갈증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그의 말기운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가 말했던 김민기·정태춘·안치환

 

그가 김민기와 정태춘과 안치환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을 통해 한국 음악계에서 일가를 이룬 가객(歌客)들이다. 그는 80년대 초반 김민기를 만나 뮤지컬 <개똥이> 음반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가 썼던 노래들, 그리고 행적들은 정말 기이하기까지 해. 개인적인 관계에서 보면 좋은 사람이지. 그러나 시대가 만든 사람이라 보기에는 정말 아까운 사람이야. 음악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가 가지는 입장을 넘어선 사람이라고. 시대를 담아내고 아픔을 담아내고 그려내면서도 열려있는 사람이지."

 

이야기는 정태춘으로 넘어갔다. 그는 "태춘이형은 소박하고 깨끗하다"고 평가하면서도 그에 대한 아쉬운 속내를 털어놓았다.

 

"순수쪽으로 애쓰다가 갑자기 민중성의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폭을 좁히지 않았나 싶어. 민중의 아픔들을 이슈화시켜 운동권 사람들의 호응을 얻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노래가 너무 미지근하다고 느꼈는지 확실치는 않아. 그 이전까지 태춘이형은 섬뜩한 직접적인 표현들을 아주 시적인 언어로서 제대로 걸러서 잘 표현했다고. 그런데 이제 그러한 직접적인 표현들을 하겠다고 하니 그만큼 형의 활동범위는 줄어들었다고 생각해."

 

가까운 동료였던 안치환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치환이는 80년대 서정적인 운동가요로 출발했어. 크게 보면 70년대 초에 '아침이슬'이 있었다면 80년대에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있다고 생각해.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바로 치환이의 노래야. 그의 가슴으로 담아낸 노래라고. 하지만 이후 노래들이 그가 느낀 그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었는지 궁금해. 대중성을 확보하는 문제에서 애매모호한 입장을 보였다고 생각해."

 

포장마차 대화는 새벽 5시가 조금 넘어서야 끝이 났다. 새벽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던졌다.

 

"얼마 전 월간 <말> 기자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어. 그때 그 기자가 나에게 던진 질문 중에 '자신은 과연 의미있는 가수라고 생각하는가'라는 게 있었지. 난 그 질문에 '나는 단지 대중 딴따라다'라고 답했어. 난 정말 '잘하는 대중딴따라'이고 싶어. 그 이외에는 어떤 큰 의미도 부여하고 싶지 않아."

 

그날 나와 후배들은 가슴 속에 '맑은 강' 하나를 품고 새벽을 건넜다.

 

천상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있을 김광석... "행복하세요"

 

불교방송국과 인사동에서 그를 만난 지 14년이나 흘렀다. 그리고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도 벌써 10년이 됐다. 솔직히 나는 그 10년 동안에도 그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했다. 그의 노래는 여전히 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엔 다섯 살인 딸조차 '사랑했지만'과 '바람이 불어오는 곳' 등 그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아마도 그는 지금 천상에서도 기타를 치고 하모니카를 불며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만 같다. "부르고 또 불러도 아쉬운 노래들"을. 지상에서 '소극장 공연 1000회'라는 전후무후한 기록을 과시라도 하듯 말이다. 그래서 그가 있는 천상은 분명 행복할 게다.

 

14년 인사동 포장마차 인터뷰를 마치고 내가 그에게 건넨 선물이 있었다. 곽재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전장포 아리랑>이었다. 그도 지금쯤은 누렇게 낡았을 이 시집을 들추고 있을지 모르겠다.

 

자, 이제 지상의 내가 천상의 그에게 곽재구 시인의 시 한수 올린다. 살아 생전 그가 쭈글쭈글 웃으며 건넨 인사와 함께. "행복하세요"라고.

 

마음을 바쳐 당신을 기다리던 시절은 행복했습니다. 오지 않는 새벽과 갈 수 없는 나라를 꿈꾸던 밤이 길고 추웠습니다. 천 사람의 저버린 희망과 만 사람의 저버린 추억이 굽이치는 강물 앞에서 다시는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당신의 옛모습을 꿈꾸었습니다. 천송이 만송이의 슬픔이 꺾인 후에 우리에게 남는 아름다움이 무엇일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깊은 부끄러움이 끝나기 전에 꼭 와줄 것만 같은 당신의 따뜻한 옷자락을 꿈꾸었습니다.

 

지고 또 지고 그래도 남은 슬픔이 다 지지 못한 그날에 당신이 처음 약속하셨듯이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산이거나 강이거나 죽음이거나 속삭임이거나 우리들의 부끄러움이 널린 땅이면 그 어디에고 당신의 뜨거운 숨결이 타올랐습니다.

 

- 진달래꽃, <전장포 아리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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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의 노래는, 영화의 힘

[김광석 10주기] 그의 노래는 왜 '캐스팅' 될까

 

"아, 오마니 생각나는구만."

북한군 송강호가 회한 어린 표정으로 불쑥 말했다.

"광석인 왜 그렇게 일찍 죽었대니? 야! 광석일 위해서 딱 한 잔만 하자우."

그들 등 뒤에선 김광석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슴 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북한군과 남한군인 그들은 자기 집 주소를 꼼꼼히 눌러 적고, 주소가 적힌 쪽지를 주고받았다. 오늘은 이들이 북한군 초소에 놀러오는 마지막 날이었다. 다시는 언제 볼지 알 수 없었다. 주고받은 이 주소로 편지를 부칠 수 있을까? 부칠 날이 올까? 씁쓸한 하모니카 소리가 공기를 적셨다. 하모니카 소리가 끝나자 김광석의 노래는 계속 됐다.

 

"그대들과 즐거웠던/ 날들을 잊지 않게/ 열차시간 다가올 때/두 손 잡던 뜨거움…/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친구들아 군대 가면/ 편지 꼭 해다오…"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그렇게 김광석과 함께 우리에게로 왔다. 죽은 김광석이 이 영화를 만나 다시 부활했고, 이 영화는 김광석을 만나 부상했다. 김광석의 목소리를 타고 영화는 사람들 가슴속으로 짠하게 파고들었다. 386의 향수 속에나 등장하던 '이등병의 편지'는 불현듯 모든 이들 마음속으로 부쳐졌다. 보는 이들 마음은 떨리고 있었고, 그 위로 울려퍼지던 김광석의 노래는 떨림을 통곡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너무나 충분했다.

 

박찬욱 감독은 DVD 코멘터리에서 이 장면을 이렇게 설명했다.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점이죠. 아쉬움을 남긴 채로 끝난다는 것."

 

이 영화에 또 중요하게 등장한 노래는 김광석의 '부치지 못한 편지'였다. 영화에선 한참 뒤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회상을 통해 짜맞춰진 기억 속에선, 이 다음 장면이었다. 총소리에 놀라 뛰쳐나온 양측 군인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총을 쏴대기 시작했다. 조명탄은 하늘을 가르고, 어디를 향하는지 모를 총소리는 요란했다. 그 요란하게 비극적인 상황에서였다. 노래 한곡이 무심히 흘렀다.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총소리 요란한데, 노래 한곡 무심히 흘렀다

 

어디 <공동경비구역 JSA> 뿐일까? 대한민국 모든 감독들은 김광석이 주는 애절함을 영화 속에서 극적으로 캐스팅했다.

 

2003년 영화 <클래식>에서 가슴을 저민건 손예진의 눈물 연기도, 눈이 멀어버린 조승우의 연기도 아니었다. 베트남전으로 떠나는 연인이 탄 입영 열차의 창문을 두드리며, 손예진이 "준하야, 살아서 와야돼, 꼭 살아서 와야돼"라고 울먹일 때, 그녀가 달리는 입영열차를 따라 뛰면서 목에 건 목걸이를 벗어서 남자에게 건넬 때, 먼 훗날 다시 만난 연인이 앞을 보지 못한 걸 숨기듯이 마음을 숨기고 목걸이를 다시 건넬 때, 울려퍼진 건 손예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들의 눈물겨운 이별 위로 울려퍼진 애절한 목소리는 김광석이었다.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길/ 그립던 날들도 모두 버리지/ 못 다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영화 속 인물들이 가슴이 먹먹해져올 때마다, 영화 속 인물들 가슴이 아픔으로 떨려올 때마다, 김광석의 노래는 커다란 슬픔의 자장을 그리며 울려 퍼졌다. 2004년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에서도 떠나갈 엄정화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을 생각하며, 김주혁은 라이브 카페에서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불렀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긴밤을/ 또 잊지 못해 세울까…"

 

홍반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노래 하나를 타고 애절한 사랑은 관객들 가슴속으로 저미듯이 파고들었다.

 

2005년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짝사랑한 여자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서서 7년 만에 만났을 때도 흘러나온 노래는 김광석의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이었다. 그리고 올해 2006년, <도마뱀>에서 조승우가 김광석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을 부를 예정이다.

 

올해에도 틀림없이 만난다, 김광석과 영화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DVD 코멘터리에서 음악감독은 말했다.

"시나리오 단계에 '이등병의 편지'가 있었어요. 저는 '이등병의 편지'가 군대에 관련된 노래니까, 군대를 소재로 한 영화에 군대 노래가 들어가면 재미없을 거 같다고 했고요. 박찬욱 감독과 얘길 하면서 그럼 다른 대안이 있으면 찾아보자 했는데. 뭐 제가 찾다가 그보다 더 좋은 곡을 못 찾았어요. 역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계속 '이등병의 편지'로 갔죠."

 

이 영화에서 '이등병의 편지'보다 더 사람들을 슬픔을 극한으로 몰고 간 '부치지 않은 편지'는 어떻게 등장했을까? 이 영화의 음향감독에 따르면 이건 '상당히 언발란스한 음악'이었다. 그러니 처음엔 액션 장면의 음악 같지 않아 고민했다.

그 장면은 뭐라 해도 북한군과 남한군이 격렬하게 총을 쏴대고 격렬하게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총소리는 하늘을 진동하는데, 김광석 음악이라?

 

하지만 격렬한 총소리 위로 그 음악을 올리자, 사정은 달라졌다. 전혀 다른 분위기가 탄생했다. 단지 총격씬, 액션 장면에 그칠 듯한 장면은 도리어 가장 슬픈 장면이 됐다. 그건 김광석의 노래가 주는 힘이었다. 그리고 '회한'이었다.

 

그가 말했다. "거기에 탁 그 음악을 같이 섞어서 들으니까, 무지막지한 느낌이 아니고, 너무너무 슬픈 거야. 그 장면이."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김광석의 노래가 지닌 마력일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마냥 해피한 사람이 있을까? 우리 모두가 살아도 살아도 가시지 않는 불안을 가슴 한 구석에 안고 살고있지 않은가? 가슴에 돋아나는 슬픔을 남몰래 잘라가며 살고있지 않은가?

 

그의 노래는, 영화의 힘

 

어쩌면 우리들이 김광석을 통해 보는 건, 애절한 추억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픈 애틋함일지도 모르겠다.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박하사탕>의 설경구처럼 대놓고 외치지는 못할지라도, 모두가 잠든 밤 아무도 모르게 "나, 다시 돌아가고 싶어…"라고 속삭이게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 사랑이 비를 맞으며 팔딱이던 그 시절로, 내 심장이 이상과 희망을 향해 파닥이던 그 시절로, 알싸하고 아쉬움이 한가득인 그 시절로! 그리하여 내 딱딱하고 삭막한 이 시간들을 토악질해버리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조용히 자신에게 말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한치 앞도 보이질 않지만, 일어나, 일어나서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김광석이 죽은 지 10년이 지났다. 보통 사람들이 새해를 설계하고,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란 말로 다시 일어설 것을 다짐할 때, 그는 이 세상에서 일어서서 떠나갔다. 그가 사랑한 것들을 모두 두고 떠나갔다. 더 사랑할 것을 찾아서 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승희 시인의 싯구처럼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듣기가 싫다."

 

그는 죽음으로 자유를 얻으려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자유를 얻은 건 죽음 때문이 아니다. 최승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저 혼자 자유로워서는/ 새가 되지 못한다/ 새가 되기 위해서는/ 새를 동경하는/ 수많은 다른 눈들이 있어야만 한다." (최승자 <희망의 감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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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은 하늘에서 행복할까?

10년째 계속되는 가족간 분쟁

 

"이 기사는…, 정말 쓰기 싫다."

하루에 수건, 한 달에 수십건, 일 년에 수백건의 기사를 써대고도 또 다시 기사거리가 없나 찾아다니는 기자에게도 쓰고싶지 않은 기사가 있을까? 적어도 지난해 12월 7일 있었던 서울중앙지법 판결은 그랬다.

 

단지 죽은 아들 또는 죽은 남편이 남긴 음반을 두고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법정에까지 서야 했느냐는 씁쓸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그냥 '가수'가 아니었으며, 그의 노래는 그냥 '노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노래는 여전히 기자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고 김광석이 떠난 지 10년, 그러나 그의 음악을 둘러싼 가족들의 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김광석에게 노래는 "애달픈 양식"... 유족들에겐 저작권

 

89년 '동물원'에서 나온 김광석은 '기다려 줘' '너에게'를 담은 1집을 내놓으며 홀로 활동을 시작했고, 1년 간의 열애 끝에 90년 서모씨를 만나 결혼을 했다. 이후 그는 91년 '사랑했지만'이 담긴 2집을 냈고, 92년 '나의 노래'가 담긴 3집을 냈다.

 

'거리에서'부터 '광야에서'까지 그의 세계를 모두 들여다볼 수 있는 '다시부르기 1집'이 나온 93년, 불행한 가족간 분쟁의 서곡이 울린다. 그의 아버지 김모씨가 그 해 10월 12일 K레코드사와 '3집' '4집' '김광석 다시부르기' 음반에 관해 계약을 체결한 것. '(음반에 대한) 로얄티는 K레코드사가 아버지 김씨에게 지급한다'는 등의 내용이 골자였다.

 

96년 1월 6일 김광석은 죽었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그의 죽음을 오래 기억하지 못했다. 김광석이 사망하자 아버지 김씨는 K레코드사와의 계약을 근거로 그의 음악저작물에 대한 모든 권리를 양도받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부인 서씨는 자신의 딸과 함께 남편의 권리를 상속받았다고 맞섰다.

 

특히 서씨는 K레코드사를 상대로 아버지 김씨에게 로얄티를 지급하여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로얄티지급금지가처분을 신청한 데 이어, 아버지 김씨와 K레코드사를 상대로 로얄티청구권확인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분쟁을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그 해 6월 26일 합의를 도출해낸다. 당시 합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부인) 서OO은 (아버지) 김OO가 '김광석 다시부르기' 등 기존 4개 음반에 대한 판권 및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2) 김OO가 사망하면 가지고 있던 권리는 서OO의 딸이자 김OO의 손녀에게 양도된다. (3) 김OO는 서OO가 김광석의 노래와 관련 향후 제작할 라이브음반에 한하여 권한을 갖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합의를 통해 종결되는 듯 보였던 가족간의 분쟁은 이후 아버지 김씨가 모호한 행동을 취하면서 불씨를 남겼다.

 

김씨는 서씨와 합의한 지 1주일 뒤, 부인 이모씨와 장남에게 K레코드사와 체결한 계약으로 갖게 된 김광석 음반에 대한 권리를 유증(遺贈)하고, 2004년 10월 사망했다. 유증이란 '유언으로써 자기 재산의 일부를 무상으로 타인에게 주는 행위'를 말한다.

 

그 뒤 10년... 끝나지 않은 소송

 

부인 이씨와 장남은 김씨가 사망하자, 생전에 김씨와 서씨가 합의한 것을 '사인증여'로 규정했다. 이들은 "사인증여 계약은 서씨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이기 때문에 유증에 의해 취소되고, 사인증여는 유증에 관한 규정에 준용되기 때문에 유언자의 최후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며 지적재산권 확인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 민사11부는 지난해 12월 7일 "(김씨와 서씨의) 합의가 사인증여임을 전제로 유증에 의해 취소되었다는 (원고 측) 주장은 살필 필요 없이 이유 없다"며 아내 서씨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원고들이 주장하는 사인증여라 함은 증여자가 생전에 무상으로 재산의 수여를 약속하고 증여자 사망으로 그 약속의 효력이 발생하는 계약을 말하는데, 김씨와 서씨의 합의는 소송에 대한 원만한 해결을 위해 체결한 대가성있는 약정이기 때문에 사인증여라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당시 서씨와 김씨의 합의가 서씨의 강압에 의해 체결하였다고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덧붙였다.

 

이로써 김광석 음반에 대한 모든 권한은 부인 서씨와 그의 딸에게 귀속됐다. 하지만 가족간의 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 김씨가 사망하기 전 서씨를 상대로 김씨가 갖고 있는 지적재산권의 일종인 저작인접권을 침해했다며 제기한 형사소송이 아직 법원에 계류 중이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4단독(판사 김진동)은 지난해 11월 19일 "서씨는 김씨에게 저작인접권이 있는 '거리에서' 등 노래 2곡을 동의없이 음반으로 발표, 김씨의 저작인접권을 침해했다"며 서씨에게 3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서씨는 판결에 불복, 곧바로 항소를 제기했다.

 

"하늘에서 쓰는 그의 일기장에는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까?"

 

시어머니와의 법적 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부인 서씨는 CD 2장으로 구성된 '김광석 10주기 베스트 앨범'을 발매했다. 앨범에는 최초로 공개되는 김광석의 자필 일기장과 노래 24곡이 수록돼 있다.

 

현재 음반기획사 '위드33'의 대표이기도 한 서씨는 "남편이 작고하고 10년이 지난 후에 발표된 앨범이라 매우 의미가 있다"며 "아직까지 우리 마음 속에 따뜻하게 남아 있는 노래를 중심으로 베스트 앨범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음유시인 김광석, 그는 갔지만 그의 노래는 많은 사람의 가슴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의 '노래'를 둘러싼 가족간의 분쟁 또한 10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는 하늘에서 행복할까? 지금 하늘에서 쓰고 있을 일기장에는 무슨 내용이 담겨져 있을까?"

기사를 쓰는 내내 기자의 입 속에서 맴도는 그의 노래가 왠지 서글프게 느껴진다.

 

< 이상 오마이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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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살아 숨쉬는 김광석

 

리메이크, 뮤지컬, 노래방 등을 통해 되새김질

 

고인이 돼 이 세상에 없는 가수 김광석. 6일로 사망 10주기를 맞았다. 그를 향한 세상의 구애는 여전히 뜨겁다. 김광석은 음악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통해 우리의 기억과 가슴에서 살아 숨쉰다.

 

그를 다시 불러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다름 아닌 ‘노래’를 부르는 행위다. 가수들은 리메이크나 추모앨범 등을 만들고 일반인들은 노래방에서 그의 노래를 부른다. ‘김광석 다시부르기’는 그렇게 현재진행형이다. 또 영화, 뮤지컬 등에서 김광석은 끊임없이 회자되면서 대중문화 자양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김광석 다시부르기'는 계속 된다

 

지난해 김광석 다시부르기는 절정에 올랐다. 4명의 가수가 리메이크에 나섰던 것. 지난해 8월 가수 이소은이 발표한 리패키지 앨범에는 김광석의 히트곡을 자신의 스타일로 부른 타이틀곡 ‘닮았잖아’가 담겨 있다. 특히 ‘사랑이라는 이유로’는 컬러링 차트 상위권에 올랐으며 라디오와 케이블TV 방송에서도 Top10의 자리에 들기도 했다.

 

가수 싸이(본명 박재상)도 김광석을 불러냈다. 지난해 7월 사석이나 콘서트장에서 불렀던 곡을 엄선해 내놓은 ‘18번’이라는 리메이크 앨범에서 싸이는 ‘서른 즈음에’를 불렀다. 노찾사 출신의 가수 문진오도 같은 해 2월 솔로음반을 내면서 김광석의 ‘꽃’을 리메이크했다. 앞선 1월에는 나얼이 리메이크 음반 ‘back to the soul flight’에서 김광석이 몸담았던 그룹 동물원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를 불렀다.

 

같은 달 나왔던 가수 김범수의 리메이크 앨범에도 당초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이 실릴 뻔했다. 녹음까지 한 상태였지만 최종 곡 리스트에서 제외됐다. 김범수는 이에 대해 “테크닉만으로 따라갈 수 없는 ‘김광석만이 가진 솔(영혼)’이 있다”는 표현을 했다.

 

앞선 해에도 JK 김동욱이 국내외 요절가수의 유작을 모은 리메이크 음반 ‘클래식’에 ‘서른 즈음에’를 수록했다. 또 리메이크는 아니지만 포크그룹 ‘자전거를 탄 풍경’의 멤버 ‘풍경’(본명 송봉주)이 두 번째 솔로 앨범을 내면서 김광석을 기리기 위해 ‘나무의 서’라는 곡을 넣었다. 이 곡은 원래 김광석에게 주려고 만들었다가 그의 사망 후 가수 안치환에게 줬고 다시 재편곡해 자신의 앨범에 넣었다. 풍경은 99년에 내놓은 1집에도 ‘일어서 하늘을 봐’라는 노래로 김광석을 추모했다.

 

가수 김경호가 2002년 초에 내놓은 라이브실황공연 앨범에는 ‘사랑했지만’이 들어있다. 가수 이은미도 2001년 ‘노스탤지어’라는 앨범에서 김광석이 남긴 음악에 대한 헌사의 의미로 ‘서른 즈음에’를 수록했으며 97년에는 가수 유익종이 리메이크 앨범을 발매하면서 김광석이 동물원 시절 불렀던 ‘거리에서’를 담았다.

이 밖에 해외 가수의 리메이크도 있었다. 일본의 팝 피아니스트 ‘이사오 사사키’는 지난 2002년 다섯 번째 음반을 내면서 ‘이등병의 편지’를 리메이크했다.

 

김광석의 노래 중 리메이크가 가장 많이 된 곡은 ‘서른 즈음에’다. 그 자신이 “가장 만족스러운 앨범”이라고 칭했던 4집(1994)에 수록된 이 곡은 서른에 도달한 자신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하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머물러 있지 않은 채,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잊혀져가는 청춘과 사랑을 김광석은 노래했다.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김광석은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의 대중음악 문법을 간직해 이후의 음악에 가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위안을 줬고 대중음악의 급격한 재편을 막는 완충 역할을 했다”며 “비판적 포크의 마지막 계승자로서 그의 노래는 사실성을 담보하고 상투성에서 벗어나 있었다. 리메이크는 그런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현재 대중가요가 일방적으로 흘러가고 콘텐츠가 다양하게 펼쳐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음악이 갖는 의미는 더 크다”고 덧붙였다.

 

김광석, 그 이름만으로…

 

사후에 김광석의 노래는 리메이크 외에도 다양한 형태로 변주됐다. 미발표곡부터 추모·헌정 앨범, 프로젝트 밴드 등이 그의 흔적들을 되새김질하게 만들었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12월 김광석 10주기 베스트 앨범이 나왔고 2002년에는 베스트, 라이브, 미발표곡을 모은 CD·DVD가 발매됐다. 앞선 해에는 사망 5주기를 맞아 김광석의 육성에 오케스트라 연주가 덧입혀진 ‘5TH-CLASSIC’과 권진원, 김건모, 동물원, 박학기, 윤도현 등 다른 가수들과 함께 노래한 듯 제작된 ‘김광석 Anthology 1’이 나왔다.

 

또 98년에는 김광석 1, 2집과 동물원 시절의 대표곡 등을 추린 ‘김광석 1+2’가, 96년에는 권진원, 박학기, 안치환, 윤도현, 이정열 등이 참여한 추모앨범 ‘가객-김광석이 남기고 간 노래’가 출시됐다. 특히 이 앨범에는 미발표곡인 ‘부치지 않은 편지 #1, 2’가 삽입됐다. 김광석은 숨지기 전 ‘부치지 않은 편지’의 작곡가이자 시인인 백창우와 함께 노래와 시가 결합된 ‘노래로 만나는 시’라는 앨범을 기획하고 있었다. 백창우는 지난해 12월 책과 CD를 엮은 북CD ‘백창우 시를 노래하다’를 내놨다.

 

‘김광석 프로젝트 밴드’도 빠지지 않는다. 99년 1월에 있었던 김광석 추모공연에서 서우영, 엄태환, 윤도현, 이정열이 의기투합, 자신들을 프로젝트 밴드 ‘김광석’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이듬해 영화 ‘산책’의 OST작업에 참여했으나 활동을 잇지는 않다가 지난 2004년 서우영의 콘서트에서 깜짝 의기투합했다.

 

아울러 영화, 연극이나 광고 등을 통해 김광석은 추억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2). 이 영화에서는 ‘이등병의 편지’ ‘부치지 않은 편지’가 극과 맞물려 아련함을 자아내는 한편 극중 오경휘 중사(송강호)는 김광석을 들먹이며 남북의 갭을 줄였다. 지난해 무대에 오른 콘서트 드라마 ‘길 위에서’에서도 ‘사랑이라는 이유로’가 울려퍼졌다. 2002년 한 광고에서도 김광석이 부른 ‘광야에서’의 마지막 부분 멜로디가 사용됐다.

 

이밖에 2004년 쇼이스트가 뮤지컬 ‘친구’를 기획하면서 김광석의 노래 22곡을 삽입키로 했으나 뮤지컬이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또 ‘난타’의 제작사 PMC프로덕션이 2004년부터 김광석 뮤지컬을 기획, 현재 대본 작업을 진행 중이며 2007년도 여름 경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당초 ‘서른 즈음에’라는 가제로 10주기에 맞춰 올릴 것이란 얘기도 있었으나 완성된 대본이 나오지 않아 ‘김광석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계속 작업 중이다.

 

노래방서 가장 많이 불리는 김광석 곡은 '사랑했지만'

 

그렇다면 일반인들이 김광석을 부르는 횟수는 얼마나 될까. 국내 노래방기기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TJ미디어(구 태진미디어)와 금영에서 집계한 자료를 보면 김광석의 노래는 두 회사에 각각 23곡과 20곡이 등록돼 있다.

 

TJ미디어 데이터베이스(DB)에서 집계 가능한 온라인으로 연결된 반주기에서 김광석 노래가 연주된 횟수는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124만번, 지난해에만 51만번이었다. TJ 쪽은 또 23곡 중 16곡이 2001년부터 노래방에 들어왔고 DB를 통한 집계가 불가능한 반주기까지 감안하면 그 횟수는 크게 증가할 것이라고 전했다. 온라인으로 연결된 반주기는 TJ 전체 기기의 10% 가량이다.

 

김광석 노래 가운데 TJ 반주기에서 가장 많이 불린 5곡(DB집계기준)은 차례대로 △사랑했지만 △서른 즈음에 △이등병의 편지 △일어나 △먼지가 되어 등이다.

 

금영은 김광석 노래가 온오프 연주기를 합쳐 2004년부터 2년 동안 741만5705번(온라인 20만3170번, 오프라인 721만2535번), 지난해 한해에만 396만5980번(온라인 10만8657번, 오프라인 385만7323번) 불린 것으로 추정했다. 온라인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서버를 통해 자동 집계되는 반주기를 통한 수치이나 오프라인은 네트워크 연결이 되지 않아 금영 쪽에서 추정치로 산정한 것이다. 현재 금영은 전체 약 30만대 반주기 가운데 온라인용으로 8000대를 설치한 상태다.

 

금영에서도 김광석 노래 가운데 ‘사랑했지만’과 ‘서른 즈음에’가 2~3%의 근소한 차로 가장 많이 불린 곡에 올라가 있다.

 

< 이상 미디어다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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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광석이는 와 그리 일찍 죽었대니...”

 

[김광석 10주기] 그는 아직도 우리곁에서 일어나라 외친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 만한 내 기억 속에 /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 김광석 노래 ‘서른 즈음에’ 중에서

 

세상에 익숙해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저 제 한 몸의 안위를 위해 적당히 타협하면서 또 적당히 비굴한 웃음을 지으면서 ‘세상은 다 그런 거야’ 풀죽은 목소리로 스스로를 자위하는 것이 우리들이 그토록 원하던 ‘보다 나은 세상’을 잊은 대가일 수 있을까.

 

슬플 때마다 우리 곁으로 오는 사람들이 누구에게나 한 명씩 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던지고 간 한 마디 말이나, 몇 소절의 노래줄기에 기대어 사람들은 버틸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소설가 김영현의 중편 ‘별’에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1980년대 초 삼청교육대의 한 곳이었던 강원도의 한 군부대에서 몇몇 입소자들이 탈출을 하려다 붙잡힌다. 물론, 그들은 초주검이 되도록 얻어맞고 또 일부는 죽는다.

 

그때 부대에 군종장교와 그를 수행하는 사병이 따라온다. 입소자들을 모아놓고 설교하는 자리에서 그 사병은 말한다.

 

“부디 분노와 슬픔을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분노는 버팅길 수 있는 힘을 주고, 슬픔은 인간다움을 잃지 않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시가 없는 시대, 시로 남은 노래. 김광석

 

오늘 2005년 1월 6일은 가수 김광석의 10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를 이야기하는데 웬 뜬금없는 ‘분노와 슬픔’인가. 그것은 우리가 딛고 살아온, 혹은 시대의 시궁창에 뒹굴며 살아온 지난 10년은 기쁨보다는 슬픔이, 즐거움보다는 분노가 더 기억되는 시간대인 까닭이다.

 

가수 김광석의 이름과 얼굴을 모르는 사람을 만나본 적은 있지만, 그의 노래 한두 소절을 따라 부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를 일러 ‘국민가수’라 칭하기도 하지만, 실상 그는 ‘국민’이니 ‘국가’니 하는 거대담론적인 이름을 그리 좋아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김광석은 그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가수’일 뿐이다. 노래를 업으로 삼고, 그 노래를 무기로 하여 나름의 실천을 하는 사람을 진정한 가수라고 감히 정의할 수 있다면, 김광석이야말로 ‘진짜 가수’다.

서른을 넘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의 노래가 가슴에 사무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김광석을 대표하는 노래는 한 곡으로 꼽을 수 없다.

 

실연의 아픔에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삶에 지친 이들에게, 군입대를 앞둔 벗들에게, 그리고 인생의 뒤안길을 걸어가는 노년의 부부에게 그의 노래는 동반자이자, 기꺼이 어깨를 빌려주는 벗이었다.

 

김광석은 살아서도 ‘포크의 신화’로 불렸지만, 죽은 지 10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도 여전히 ‘신화’다. 잊을 만하면 영화에서, 텔레비전에서, 노래방에서 그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그리고 뮤지컬에서 김광석은 ‘눈물겨운 무엇’을 상징했다. 드라마 ‘세 친구(2000)’, ‘삼총사(2002)’, 영화 ‘클래식(2003)’,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2004)’, 뮤지컬 ‘달고나(2005) 등, 매년 어디선가 그의 노래는 흘러나왔다.

 

비단 이것들뿐만이 아니었다. 소설가 윤대녕, 시인 이동재 역시 그를 형상화했다. 특히 맑게 웃고 있는 김광석의 영정사진은 ‘죽음을 앞둔 사진사가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는다’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89. 감독 허진호)’의 제작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대니?”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공동경비구역JSA(2000)’의 주인공 격인 인민군 중사 오경휘(송강호 역)는 “오마니 생각나는구만. 근데 광석이는 와 그렇게 일찍 죽었대니? 야! 야! 광석이를 위해서 딱 한 잔만 하자!”는 대사를 남겼다. 김광석을 매개로 하여 남과 북이 ‘심리적 통일’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후배 가수들 역시 김광석을 잊지 못한다. 1999년 윤도현, 서우영, 이정열, 엄태환이 한시적으로 결성한 ‘김광석 프로젝트 밴드’는 영화 ‘산책(2000)’의 O.S.T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 가수 싸이, 이소은, JK김동욱, 김경호은 김광석의 노래를 리메이크해 그에 대한 경외심을 표했고, 가수 성시경은 “35살 땐 김광석처럼 소극장 공연을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인기가수 테이 역시 “김광석의 목소리를 가지고 싶다”고 소망했다. 유리상자, 버즈도 “김광석처럼 1천 회 공연을 하겠다”고 자신들의 희망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러한 가수들의 추모 혹은 기념 이벤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기리는 건 단연 팬들이다. 1995년, 김광석과 어울려 나우누리 통신동호회에서 활동했다가 이후 웹으로 옮긴 팬클럽 ‘둥근소리’(http://www.oneum.net)는 1996년부터 매해 ‘작은 음악회’를 열고 있다.

 

 동물원, 박학기, 권진원 등 동료 가수들이 늘 게스트로 참여하는 이 음악회는 올해 2월에도 열릴 예정이다. ‘둥근소리’ 회원들은 1995년 회원들의 연습을 지켜본 김광석은 “나도 게스트로 꼭 나갈게”라고 약속하며 “수익금은 소년소녀 가장 돕기에 쓰자”고 제안한 것을 잊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직후 김광석은 팬들의 곁을 떠났고, 동호회의 ‘노래 행사’는 김광석을 기리는 ‘추모음악제’로 변한 까닭이다.

 

떠나간 그 사람은 어디에…

 

김광석이 만약 살아 있다면 올해로 만 41살이 된다. 그는 서울 경희중학교 현악반, 대광고등학교 합창단, 명지대 경영학과 입학 뒤 가입한 연합동아리 ‘메아리’에서 차근차근 음악의 기초를 다졌다.

 

김광석은 1984년 뮤지컬 ‘개똥이’의 음반작업에 참여하면서 지인들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낸다. 1987년엔 ‘회색분자’ 친구들이 모여 ‘동물원’을 만들어 1집을 내고는, 프로가 되고 싶었던 그는 탈퇴 뒤 1989년 1집을 낸다.

 

그의 뒤에는 학전의 김민기와 음악감독 조동익이라는 두 음악인이 있었다. 1995년 8월 소극장 1000 회 공연을 마친 그는 다음 겨울인 1996년 1월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사후에는 미발표곡과 실황녹음분을 중심으로 베스트 음반이 출시됐고, 동료가수들이 참여한 추모 음반이 나오기도 했다.

 

잊을 만하면 영화에서, 텔레비전에서, 노래방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때문에 김광석,

그는 아직도 우리곁에서 영원한 서른 나이의 가객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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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특별한 가객이었지만 자기를 용서하지 못했던 바보”

한동헌·문대현·김창남의 회고 “음악 이야기에 눈이 빛나던 녀석”

 

김광석. 그가 이 땅을 떠난 지 올해로 꼭 10년이 됐다.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는 많은 이들은 10주기 추모 촛불집회와 모임을 구상하며 그의 열 번째 기일에 의미를 두려 하지만 그를 떠나보낸 지인들에게 ‘10’이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는 아직도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지인들에게 그의 죽음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충격적인 일이자 현실로 인정할 수 없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 기억 속에 광석이는 웃음 많고 사람 좋았던 아이”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 1기 멤버이자 문화평론가로 활동중인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는 고인이 된 김광석을 웃음 많고 노래 욕심이 많았던 후배로 기억하고 있었다.

 

“내 기억 속에 광석이는 착하고 궂은 일을 도맡아 하던 아이였어요. 늘 노래를 잘 부르고 싶어 하는 욕심 많던 친구이기도 했죠.”

 

음악이야기를 할 때면 유난히도 빛나던 그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는 김 교수는 “386세대의 정서와 의식을 노래에 담아냈던 유일한 친구가 김광석이었다. 70년대의 포크 음악을 90년대 초반까지 이어온 유일한 포크 음악의 계승자”였다는 평가도 잊지 않았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한동헌 대표에게 김광석은 ‘밝고 싹싹했던 후배’로 남아있다. 그는 김광석이 가진 노래에 대한 열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추억했다.

 

“김민기 선배의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었죠. 84년 노찾사 활동을 하던 때였는데 밝게 웃던 모습이 인상 깊었던 친구였죠.”

 

미국 유학생활로 김광석과 연락이 뜸했던 5년의 시간이 흐르고 한 대표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동물원 활동을 하던 1990년.

 

그는 “그때 다시 만난 광석이는 여전히 친화력이 있었고, 밝고 싹싹 했었다”며 “음악에 대한 열정도 그대로여서 그 한결같음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한 대표는 “돌이켜 보니 우리시대에 김광석 같은 가수가 별로 없다. 그 당시에는 높게 평가하지 못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는 특별한 존재로 남아있었다”고 말했다.

 

83년 카톨릭 학생회관에서 처음 만났던 김광석을 잊지 못한다는 가수 문대현은 “세상이 어수선한 때 음악이야기로 위로를 삼고 세상을 이야기 했던 친구”라며 그를 회고했다.

 

“음악이 이야기만 하면 눈이 빛나던 친구였어요. 늘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 먹길 좋아하던 친구였는데 저작권 문제로 집안이 어수선했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을 정도로 자신의 일에 내색을 않던 그런 친구였어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우리시대의 가객

 

가수를 업으로 삼으면서 음악에 대한 고집이 더 세졌다고 김광석을 기억하는 문대현씨는 사망소식을 들었을 때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됐다”며 친구의 죽음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김창남 교수는 김광석의 죽음을 “충격적인 일”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10이라는 숫자가 새삼스럽기만 하다”며 후배의 부재를 그리워했다.

 

한동헌 대표도 “우리시대의 가객을 잃었다”는 표현으로 김광석을 잃은 슬픔을 표현했다. 그는 “광석이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며 “짙은 호소력과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혼을 지르는 노래를 이제 다시 들을 수 없게 됐다”며 김광석을 평가했다.

 

그는 또 “4집 앨범을 통해 곡을 쓰는 창작자로서의 변모하는 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다 완성하지 못하고 가버려서 안타깝다”며 완전한 싱어송 라이터로 서지 못한 후배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제는 떠나간 이를 그리워하는 것이 전부가 돼버린 지인들은 아직도 김광석에 대한 기억이 또 추억이 어제의 일 같다고 한다. 이들에게 김광석은 여전히 웃으며 기타를 치던, 이름을 부르면 금세 달려올 것 같은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 이상 데일리 서프라이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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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아저씨’ 생의 비밀들을 알게 해주어서 고마워요

 

그를 딱 한번 보았다.

1994년, 봄이었고 안암동에 있는 한 대학의 축제였다. 열 손가락으로 따지지도 못할 만큼 오래 전이다. 그래서일까. 그날 밤의 세부적인 일들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동행들이 누구였는지, 어쩌다 그 자리까지 가게 된 것인지, 또 무대에 어떤 게스트들이 초대되어 나왔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기억나는 건 단 하나. 그의 목소리뿐이다. 그 목소리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김광석 아저씨. 이상하다. 나에게 그는 늘 ‘아저씨’다. 왜 ‘김광석 아저씨’라는 표현이 제일 자연스러운지 모를 일이다. 그날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한껏 흐드러진 봄밤이었다. 축제의 밤에 모인 사람들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모두들 땅에서 살짝 발을 떼기라도 한 것처럼 붕붕 거리는 드넓은 캠퍼스 한구석에서, 나는 어깨를 옹송그리고 있었다. 따뜻한 밤이었는데, 지독하게 춥게 느껴졌고 자꾸만 몸을 움츠리게 되었다. 그때, 그를 만났다. 그는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버려/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다. 미미하고 뭉클하게. 그것은 세상에서 오직 나 혼자만이 알 수 있는 느낌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설픈 풋사랑에 실패한 여자아이에게, 사랑의 끝이란 ‘그렇지만’의 단념을 품고 있는 것이라고 가만가만 일러주던 목소리. 그러니 다 괜찮다고 위로해주던 목소리. 그때 태산처럼 커 보이던 그 사내의 나이는 고작 서른한 살이었다.

 

며칠 전, 그의 열 번째 기일이었다. 그날 저녁, 오랜 친구들을 만났다. 송년회도 못했는데, 신년회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나이 한 살 더 먹은 게 뭐가 좋다고 신년회씩이나. 술 한 잔을 앞에 두고 누군가 불쑥 말했다. 오늘 김광석 십 주기래. 설마, 벌써 그렇게 됐다고? 진짜야, 네이버에서 봤는걸. 십년이나 됐구나, 정말 그렇구나. 근데 그거 아냐? 김광석 죽었을 때 우리보다 어렸던 거. 우리 이제 서른다섯이야.

 

친구 하나가 허허 웃었다. 헛, 참 쪽팔리네. 그런 말을 중얼거렸던 것도 같다. 뭐가 ‘쪽팔리다’는 건지 아무도 구태여 물으려 하지 않았다. 십년. 대통령이 세 번 바뀌었으며, 서울의 아파트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사람들은 문자메시지로 새해인사를 하게 되었다. 혹자는 십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단지 눈을 감았다 뜰 뿐인 사소한 움직임을 위하여 여러 개의 근육들이 제자리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김광석이 대한민국 제일의 뮤지션이었다고 우기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그는 그런 순위에서 한 걸음 비켜 선 존재다. 내가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듣는 이를 압도하려 들지 않는다.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의 노래에는 틈이 많다. 듣는 이로 하여금 그 여백 속에서 스스로를 반추하게 만든다는 데에 김광석 노래의 진정한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죽음을 택했을 때부터 그는 저잣거리로부터 잊히길 바랐던 건 아닐까, 혼자 공연히 추측해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죽음이 신화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지난 십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십년도 그가 ‘여기’ 나직한 곳에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그를 딱 한번 보았다. 그저 눈물 흘렸을 뿐, 고맙다는 편지조차 보내지 못했다. 그보다 많아진 나이를 뻔뻔하게 들이밀며 이제 용기 내어 말하련다. 고마워요, 아저씨. 생의 비밀들을 알게 해주어서.

 

정이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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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김광석 13주기 추모 콘서트를 보고....

 

대학로에 가면 ‘학전’이라는 소극장이 있다. ‘아침이슬’을 만든 김민기씨가 대표로 있는 200석도 안되는 소극장인데

1990년대 TV와는 거리가 먼 언더의 라이브 가수들에게는 그들만의 열린 공간이자 ‘쌩음악’의 열기가 넘쳐 나던

라이브의 본거지였다.

 

최근 극심한 불황과 통기타 라이브의 퇴조(반대로 홍대 주변의 인디클럽 라이브는 활황)로 인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이곳에서는 매년 1월 6일을 전후하여 그때 그사람들이 모여 열띤 공연을 벌이는데 그 도화선은 바로 김광석의

자살사건이었다. (1996.1.6일 사망)

 

김광석은 솔로로 데뷔한 1990년부터 죽기 전해인 1995년까지 소극장 라이브 공연만 1천회를 돌파하여 화제가 되었었는데

1천회 공연의 대부분을 학전 소극장에서 치루었고 1천회 기념공연도 역시 그곳이었기에 그의 장례식 도중에 학전 소극장

무대에서 노제까지 지낼 정도였으며 대학로 학전의 터줏대감으로 라이브계를 평정했던 김광석이 사라진 이듬해부터는 매년

그의 기일이 되면 그의 동료, 선후배들이 모여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김광석과 그의 노래를 추모하게 된 것이다.

 

  

 

나는 노래패 출신인 친구의 기획실 일을 도와주다가 김민기, 노찾사, 동물원 등과 엮이면서 김광석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대학 노래패, 노찾사, 동물원을 거쳐 솔로로 데뷔하던 1990년 그는 솔로 데뷔음반을 잔뜩 챙겨들고 사무실을 찾아와서는

콘서트를 할테니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능력과 가능성, 게다가 음악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성실함, 겸손함을 익히 알고 있었던 우리(나와 기획실 친구들)는

주변의 인맥을 총 동원하여 멋진 콘서트를 준비하게 되었다.

 

군입대 등으로 활동을 접고 있던 동물원의 잔여 멤버, 노찾사에서 잠시 나와 있던 안치환, 훗날 김건모 음반 프로듀서로

떼돈을 벌었던 김형석 등을 밴드로 영입하고 공연장을 섭외해서 일단 저지르고 말았는데 결과는 완전 쪽박이었다...

다 말아 먹은거다...

 

당시 동물원은 알아도 김광석은 사실상 무명이었고 일정을 잡고 보니 하필 당시 최고 인기그룹 해바라기의 공연일정과

정확히 겹쳐버린 덕분에 관객 쏠림이 확연하게 나타났고 결론은 화류계 정글의 수업료만 톡톡히 치루게 된 것이다.

 

3일간의 공연 가운데 마지막날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그때까지 텅빈 공연장만 바라보던 우리는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대기실에서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고 ‘케세라세라’의 심정으로 무대에 올라간 그들은 마치 뽕맞은 환자들처럼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환상적인 연주를 펼쳤었다. 화끈한 마무리가 된 것이다.

 

그렇게 쓴맛을 본 김광석은 오히려 우리에게 미안해하며 도와줘서 고맙다고 몇 번씩 인사를 하고는 권토중래, 와신상담,

심기일전 라이브 극장돌기에 나서게 되었는데 기타 하나 달랑 메고는 음향도 변변치 않은 전국의 소극장을 누비면서 공연을

이어가던 그는 드디어 대학로 학전에 입성하여 둥지를 틀게 되고 그 이후로는 짭잘한 소득도 보장되는 잘나가는 라이브

가수로 입지를 다지게 된다.

 

그렇게 이어지던 공연이 마침내 1995년 8월 1천회를 돌파하게 되는데 1천회까지 가게 되는 첫 번째 콘서트가 바로 1990년에

말아먹은 그 공연이었기에 광석이와 나는 그 공연에 매우 큰 의미를 두게 되었고 1천번째 공연이 있던날 학전 소극장의

대기실에서 우리는 뜨거운 포옹으로 회포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불과 몇 달 후 그는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혹시 그가 있을법한 어딘가를 바라보는 김광석의 사진... 그 앞에는 소주가 한잔 있고 그 밑에서 그들은 김광석을 노래한다....

 

한대수, 서유석, 김민기 등이 한국 포크음악의 태두라면 김광석은 그 계보의 적자이자 20세기 한국 포크계 최후의 가객이라는

전설로 남게 되는데 그가 떠난지 1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의 빈자리를 체워줄 수 있는 그 누구도 없었고 통기타의 낭만과

자유로운 영혼 같은 가치는 박물관의 박제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2009년에도 1월 6일을 전후하여 예전과 다름없이 그 바닥의 라이브 신공들이 모여 한바탕 살풀이를 벌였는데 금년에는 나도

실로 얼마만인지도 모를 만큼의 세월을 건너 뛰어 학전의 냄새를 맡게 되었고 오랜만에 그들과 밤새도록 취할 수 있었다.

 

금년에는 인디밴드까지 참여하여 포크의 범주를 벗어나 보다 다양한 언더의 면모를 느낄 수 있었는데 학전 소극장 입구를 장식

하고 있는 김광석의 브론즈 앞에 놓여 있는 장미꽃 한송이가 그에 대한 그리움과 너무 일찍 가버린 아쉬움을 대변하고 있었다.

 

 

 

2009년의 출연진 : 동물원, 윤도현, 강산에, 유리상자, 여행스케치, 크라잉넛, 이은미, 권진원, 박학기, 한동준, 김광민, 이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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