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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과학, 기술, 환경

여성 과학자

by Wood-Stock 2017. 8. 9.


와이파이 쓸 때면 그녀를 기억하세요...

‘헤디 라마르’ 탄생 101주년


과학·수학에 능통… 무선통신 기술 기본 원리 발명
‘세계 최고 미모’에 발목 잡힌 삶

▲ 1938년 본격적인 할리우드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스타로 떠오른 헤디 라마르.   ©MGM

“유럽 최고의 미녀”라 불린 배우가 있었다. 나이 스물에 할리우드의 스타로 떠오른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헤디 라마르다. 지난 9일 구글은 라마르의 101번째 탄생일을 맞아 특집 두들을 선보였다. 미모가 그의 전부였다면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세계가 다시 라마르의 삶에 주목하지는 않았을 테다. 라마르는 와이파이·블루투스 등 주요 무선통신 기술의 기본 원리를 고안해 특허를 출원한 발명가였다. 그는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용기와 지성을 지녔으나, 타고난 아름다움으로 인해 사회활동과 경력에 큰 제약을 받은 여성이기도 하다.

▲ 헤디 라마르의 101번째 탄생일인 지난 9일, 구글은 특집 두들을 선보였다.   ©구글

라마르의 삶은 한 편의 영화에 가깝다. 그의 생애는 제1·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의 격변기를 관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그는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헤드비히 에바 마리아 키슬러. 성공한 은행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부터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고, 10대 시절부터 독일·체코 영화의 주연을 맡았다. 18세 때 출연한 구스타브 마하티 감독의 영화 ‘엑스터시’는 라마르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영화에서 그는 무관심한 남편을 두고 애정을 갈구하는 젊은 여성을 연기했다. 포르노가 아닌 극장 상영 영화 사상 오르가슴을 연기한 여배우는 라마르가 최초였다. 파격적인 누드 연기도 세간의 화제에 올랐다.

이듬해 라마르는 13세 연상의 프리드리히 만들과 결혼했다. 부유한 무기상이었던 만들은 무기산업 관련 과학자·기업가들을 자주 집으로 초대해 모임을 열었다. 라마르도 모임에 자주 참석했다. 그의 전기를 쓴 리처드 로즈에 따르면 라마르는 화려한 이미지와 달리 사색과 토론을 즐기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라마르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파티도 즐기지 않았다.… 그에게 저녁을 풍요롭게 보내는 방법은 지적인 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생각을 나누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계를 분해해 재조립하기를 즐길 만큼 과학과 수학에 관심이 많던 라마르는 자연스레 무기 기술에 흥미를 갖게 됐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 생활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라마르는 1968년 펴낸 자서전 『엑스터시와 나』에서 만들이 “파시스트 같은 사람”이었으며 자신이 외출하지 못하도록 집에 가두고, 사회활동에 간섭하는 것은 물론 영화 출연도 막으려 했다고 밝혔다. 무솔리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나치의 방위산업에 협조하는 남편의 모습에도 그는 절망과 혐오를 느꼈다.

▲ 스펜서 트레이시(왼쪽)와 함께 출연한 영화 '테이크 디스 우먼'(1940) 속 헤디 라마르.   ©MGM

이혼을 결심한 라마르는 남편 몰래 미국으로 떠났다. 도피 중 그는 ‘헤드비히’라는 이름을 ‘헤디’로 바꾸고, 1926년 세상을 떠난 유명한 여배우 바버라 라마르를 추모하는 뜻에서 ‘라마르’를 따 ‘헤디 라마르’라는 예명을 지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MGM사와 계약하고 본격적으로 할리우드 활동을 시작한 라마르는 1938년 ‘알지에’를 시작으로 ‘붐 타운’ ‘화이트 카고’ ‘ 토티야 플랫’ ‘삼손과 데릴라’ 등 영화에 출연해 명성을 떨쳤다. 러브콜이 쉼 없이 쏟아졌다. 라마르는 클라크 게이블, 스펜서 트레이시, 잭 스튜어트 등 당대의 인기 배우들과 함께 작품에 출연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미녀’ 캐릭터뿐이었다. 관객들은 라마르의 아름다움에 열광했고 그의 얼굴을 더 오래 보고 싶어 했다. ‘컴레이드 X’(1940) 같은 코미디 영화를 찍어도, 커리어 우먼을 연기해도, 라마르는 롱 클로즈업 신을 위해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독보적인 미모는 그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됐다. “내 얼굴은, 내 아름다움은 나의 불운이자 저주예요.” 라마르가 연기와 할리우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당연했다.

▲ “어떤 여성도 매력적일 수 있어요. 단지 가만히 서서 바보처럼 보이기만 하면 돼요.” 사진은 영화 '더 헤븐리 바디'(1944) 출연 당시의 헤디 라마르.   ©MGM

라마르는 과학기술 연구에 점점 더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낮에는 배우로 활동하고, 저녁에는 귀가해 작업실에 앉아 갖가지 기계장치를 분해하고 개선점을 찾는 ‘이중생활’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막 시작되던 때였다. 아이들을 포함한 피란민이 탄 영국 원양 여객선이 독일 유보트 함대의 어뢰에 맞아 격침됐다는 소식에 라마르는 충격을 받았다. 연합군을 도울 방도를 고민하던 그는 잠수함이 수중 무선유도 미사일을 발사할 때 적함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주파수 혼동을 일으키는 방법을 연구했다. 라마르와 아방가르드 작곡가인 조지 앤틸은 피아노의 공명 원리에 착안해 ‘주파수 호핑’ 기술을 개발, 1942년 특허를 출원했다.

▲ 헤디 라마르와 조지 앤틸이 낸 주파수 호핑 기술 특허 신청서   ©위키피디아

▲ 1941년 뉴욕타임스 지에 실린 헤디 라마르의 발명 관련 보도.   ©Flickr

▲ 1945년 미 군사 전문지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지에 실린 헤디 라마르의 발명 관련 보도.   ©Flickr

라마르는 특허가 나자마자 미 정부에 기술을 기증했으나, 미 해군은 해당 기술이 어뢰 구조상 맞지 않는다며 사용하지 않았다. 한동안 빛을 보지 못하던 라마르의 특허 기술은 1950년대부터 재조명됐다. 트랜지스터의 발명으로 전자시대의 막이 열리면서, 라마르의 기술은 휴대전화 등 무선통신 기기에 쓰이는 CDMA(부호분할다중접속) 기술로 발전했다.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블루투스, 와이파이도 그의 발명 없이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안타깝게도 라마르는 특허로 아무 금전적 이득도 얻지 못했다. 그의 특허 기술이 실용화됐을 때는 이미 특허 시효가 만료된 후였다.

1997년에야 라마르와 앤틸은 CDMA 기술의 기본 원리를 발명한 공을 인정받아 미국 전자개척재단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라마르의 수상 소감은 단 한 마디였다. “때가 왔군요.” 3년 뒤인 2000년, 라마르는 86세의 나이로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죽는 날까지도 그림을 그리고, 친구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사용한 휴지를 버릴 주머니가 달린 곽티슈 등 발명을 계속했다고 한다.

헤디 라마르 구글 두들(클릭 혹은 아래로 화면 스크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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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4호 [세계] (2015-11-10)
이세아 기자 (saltnpepa@womennews.co.kr)




섹스 심벌이면서 무선 통신 과학자였던 여자, 헤디 라마르


오늘 구글의 메인 화면을 장식한 미모의 여배우, 헤디 라마르는 아름다운 외모와 파격적인 연기로 30~40년대 섹스 심벌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업적은 유명 여배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가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블루투스, 와이파이 등 무선 전파 기술에 큰 공헌을 한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화려한 외모에 가린 그녀의 천재적 면모를 살펴본다. 

 


 


 


 


 


 


 


 


 



'히든 피겨스'처럼 가려졌던 여성 수학·과학자들의 역사



영화 ‘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 NASA에서 일한 세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당시 그들은 백인과 분리된 화장실을 써야 할 정도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오로지 실력으로 차별을 뛰어넘으며 자질을 인정받았다. 캐서린 존슨의 천부적인 수학 재능은 NASA의 달 탐사 성공에 기반이 됐고 그는 2015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자유 훈장을 받았다. 도로시 본은 다른 흑인 여성을 이끄는 NASA 최초의 흑인 여성 슈퍼바이저가 됐으며, 메리 잭슨은 흑인 여성 최초의 우주공학 엔지니어가 됐다. 하지만 동명의 책과 영화를 통해 재조명받고 있는 세 사람 외에도, 차별과 맞서며 분투하고 성과를 낸 많은 여성 수학·과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애초에 교육의 기회를 제대로 받지 못했거나, 학계에 미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노벨상 수상이 불발되거나 혹은 노벨상을 받았음에도 학계에서 석연찮은 대우를 받기도 했다.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들처럼 두고두고 이름을 기억할 만한 의미가 있는 여성 수학·과학자들을 소개한다.

DNA 구조의 실마리를 제공한, 로잘린드 프랭클린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낸 데 있어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은 제임스 왓슨이다. 하지만 많은 과학사 학자들은 그와 영국의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이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연구를 참고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1952년 X선을 이용해 DNA 구조가 나선형이며 X자 모양의 비뚤어진 사다리 이미지라는 것을 발표했다. 다만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DNA가 뒤틀린 사다리로서 이중나선 구조를 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 공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DNA 연구에 매달려 있던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게 넘어갔다. 두 사람은 학과장인 로렌스 브래그 경을 화나게 만들 정도로 잘못된 모델을 제시해 DNA 연구를 금지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로잘린드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모리크 윌킨스가 로잘린드와 한마디 상의 없이 DNA 나선구조 이미지를 비밀리에 복사해 왓슨에게 넘겨주고, 이를 토대로 연구 자격을 되찾은 두 사람은 새로운 DNA 모델, 즉 이중나선 구조를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DNA의 나선형 구조를 밝힌 업적으로 노벨 생리학상을 수상했지만,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암으로 일찍 세상을 뜨면서 공동 수상의 기회를 놓쳤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공이 인정받지 못한 데 아쉬움을 표하는 과학자들도 있었지만, 당사자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제임스 왓슨은 노벨상 수상 후 출간한 ‘이중나선’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시골뜨기이며 곰팡내 나는 바보”라고 묘사하며 심하게 모욕하기도 했다.

노벨상 후보 역대 최다 추천을 받았던, 리제 마이트너
리제 마이트너는 1900년대 초 당시 일반 물리학자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방사능 연구에 매달렸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핵은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다고 믿었지만, 마이트너는 원자가 분열할 때 핵에서 방사능이 나온다는 새로운 원자이론을 신봉했다. 이때 자신의 연구를 함께할 평생의 동지 오토 한을 만났다. 한이 화학적인 방법으로 방사능 원소들을 정제하면 마이트너는 그 원소들이 내보내는 방사능을 측정하는 식으로 함께 연구를 했고, 두 사람은 방사능 화학원소와 원자물리학을 이해하는 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 그리고 원자번호 92보다 더 높은 원자번호의 인공원소를 만들어내는 실험을 시작하며, 조교로 일하던 프리츠 슈트라스만도 참여하게 됐다. 하지만 나치 히틀러가 유대인 차별법을 통해 유대 과학자들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마이트너는 연구를 중단하고 스웨덴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에 남아 있던 한과 슈트라스만이 초우라늄 원소를 추출하는 실험을 계속했고, 그 의미는 서신을 통해 그들과 교류하던 마이트너가 풀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세 사람이 1930년대 후반부터 발표한 핵분열 관련 논문들은 많은 과학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두 사람은 역대 최다 추천 노벨상 후보 과학자 대열에 올랐다. 하지만 이 연구의 수혜는 오토 한에게만 돌아갔다. 1944년 노벨 화학상을 단독으로 수상했기 때문이다. 수상자 명단에 마이트너가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 성차별 논란이 일었고, 오토 한은 우라늄 핵분열 발견에 마이트너와 슈트라스만이 기여한 바를 언급하며 상금도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이후 그는 핵분열 발견 과정에서 두 사람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며 그의 공헌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하고, 특히 마이트너가 독일을 떠난 이후 핵분열을 하게 된 것을 근거로 그가 방해가 되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에펠탑이 기록하지 않은 이름, 소피 제르맹
여성이 수학을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 시기도 있었다. 우연히 아버지의 서재에서 몽뛰시아가 쓴 ‘수학의 역사’를 접한 후 기하학에 호기심이 생긴 소피 제르맹 역시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야 했다. 하지만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서재에 있는 모든 수학책을 남몰래 밤새 읽어가며 수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고등교육을 받고 싶었지만 국립 고등기술학교가 여성에게는 입학조차 허가하지 않았고, 그래서 소피 제르맹은 여러 교수의 강의 노트를 모아 그 학교의 르 블랑이라는 남학생 이름을 훔쳐 라그랑주 교수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가명으로 자신의 연구 내용을 가우스에게 보낸 소피 제르맹은 4년여간 편지 내용을 통해 그에게 지도를 받기도 했고, 이후 가우스는 괴팅겐 대학에 제르맹을 추천해 명예 박사 학위를 받게 했다.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며 수학 공부를 이어간 소피 제르맹은 마침내 현대 탄성물리학의 기초를 이룬 중요한 논문들을 발표하는 업적을 세우게 된다. 이 공을 인정받아 1816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파리의 에펠탑에 새겨져 있는 철제 빔의 탄성 연구에 공헌한 72명의 과학자들 명단에 제르맹의 이름은 없다. ‘과학계의 여성들’의 저자 모 잔스는 이에 대해 책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탄성 이론의 기반을 닦은 장본인이 리스트에서 빠진 것은 그가 여자이기 때문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인기 배우의 업적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했던, 헤디 라마르
18살의 나이에 구스타프 메커티 감독의 ‘사랑의 심포니’에서 4분간 나체로 호숫가 주변을 돌며 춤을 추는 파격적인 연기로 이름을 알린 배우 헤디 라마르는 이듬해 탄환공장의 총지배인으로서 세계적인 군수산업 기업을 대표하고 있던 프리츠 만들과 결혼했다. 하지만 지배욕이 강한 남편은 그를 집 안에 가두고 배우 생활을 하지 못하게 간섭했고, 결정적으로 남편이 심한 나치 동조자가 되면서 부부관계는 파국에 치닫게 됐다. 헤디 라마르가 결혼으로 유일하게 얻은 것은 남편의 일에서 배운 지식, 즉 원거리 조정 어뢰에 관한 것이었다. 여자들은 이런 일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 프리츠 만들은 사업상의 문제를 사람들과 논할 때 아내가 옆에 있어도 상관하지 않곤 했다. 헤디 라마르는 어뢰의 조정신호를 여러 개의 주파수로 분산시키면 적군도 알아낼 수 없으므로 명중률을 100%까지 올릴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고, 이는 이혼 후 배우 활동을 다시 시작한 그가 음악가 조지 안타일과 함께 주파수 증폭 장치를 발명하는 토대가 됐다. 두 사람은 미연방 특허청에 장비를 출원했고, 그들이 얻은 특허권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부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전문연구가가 아닌 할리우드 배우의 군사용 장비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들의 발명품은 20년이 흘러 주파수 호핑 법칙이 미사일 기술의 기본 개념이 되고 쿠바 사태에 미군이 투입되는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됐다. 헤디 라마르의 기술은 디지털 전화접속을 가능케 했고, 이것은 데이터 전송과 무선전기 연결망의 바탕이 됐다. 하지만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그의 아이디어로 엄청난 돈을 버는 동안 헤디 라마르가 대가로 받은 것은 플래카드 형태의 몇몇 인정서뿐이었다.

두 개의 노벨상을 받아도 차별받았던, 마리 퀴리 
남편 피에르 퀴리보다 유명하지만 자신의 본명보다 ‘퀴리 부인’으로 더 많이 알려진 마리 퀴리의 업적은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이다. 하지만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이 퀴리 부부에게 수여될 때 피에르 퀴리의 이름만이 거론됐고, 스웨덴의 페미니스트 수학자 괴스타 미타그레플러의 반발이 제기된 후에야 마리 퀴리도 남편 이름 옆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스톡홀롬에서는 남편인 피에르 퀴리만이 연단에 섰다. 심지어 당시 심사위원단은 마리 퀴리가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 “남자가 혼자 있어서는 안 된다. 남자에게는 그 곁에서 보조를 맞춰주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1906년 남편이 마차에 치여 죽은 이후 그의 교수직을 물려받아 소르본 대학 역사상 첫 여성 교수가 된 마리 퀴리는 이후에도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1911년 당시 프랑스과학아카데미 회원들은 마리 퀴리를 반유대주의, 급진적인 자유주의 여성, 페미니스트로 몰아붙이고 교회도 반대하는 외국인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마리 퀴리는 무선통신 분야의 남성 브랜리에게 밀려 한 표 차이로 가입이 좌절됐다. 1911년 노벨 화학상까지 받으며 이후 51년 동안 두 개의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과학자가 됐던 마리 퀴리에 대한 대우였다.

대학은 대중목욕탕인가, 에미 뇌터
괴팅겐 대학은 여성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 독일 최초의 대학이긴 했지만, 여자에게 교수 자격을 주는 문제에는 상당한 반대가 있었다. 에미 뇌터는 훌륭한 자질에도 불구하고 대학 교수로서의 정식 임용이 허락되지 않았다. 괴팅겐 대학에 남아 함께 연구할 것을 권했던 괴팅겐의 힐베르트 교수는 뇌터에게 대학의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는 동료 교수들을 향해 “대학은 대중목욕탕이 아니다”라는 일침을 놓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분위기가 바뀌면서 교수 자격을 얻게 된 이후에도 차별은 계속됐다. 아인슈타인과 헤르만 바일이 프린스턴 대학에 자리를 잡고 있을 때, 뇌터는 펜실베이니아의 한 여학교에서 변변치 못한 자리 하나를, 그것도 간신히 구할 정도였다. 이런 성차별적인 분위기에서도 불구하고 뇌터는 1918년 자연계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대칭성이 수학적 결과임을 증명하는 ‘뇌터 정리’를 완성한다. 뇌터 정리는 이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비롯한 현대물리학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1935년 ‘뉴욕 타임즈’에서 “현존하는 가장 유능한 수학자들의 판단에 의하면 에미 뇌터는 여성 고등교육이 시작된 이래 가장 훌륭한 수학의 천재였다”고 평했다. 이토록 동료 과학자들이 그의 천재성을 극찬했음에도 에미 뇌터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노벨상에는 수학 분야가 없기 때문일까? 하지만 많은 평론가들은 그의 수학적 업적이 물리학에 크게 기여했으므로 물리학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아시아의 마리 퀴리, 우젠슝
뇌터처럼 대칭성 문제에 큰 업적을 남겼지만 주목받지 못한 여성 과학자는 한 명 더 있었다. 아시아의 마리 퀴리라 불린 우젠슝이다. 1950년대 우젠슝을 포함한 세 명의 중국 출신 과학자들은 패리티보존법칙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리정다오와 양첸닝이 “일부 핵현상에서는 일반적인 모든 물리현상을 지배하는 패리티 대칭성 또는 좌우 대칭성이 깨질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 논문을 발표하고, 우젠슝은 이에 대한 실험에 착수한 것이다. 원자핵이 붕괴되면서 방출하는 전자의 수가 음극과 양극으로 똑같이 방출된다면 패리티보존법칙이 성립한다. 하지만 우젠슝은 이 실험을 통해 베타 붕괴가 한쪽 방향에서만 나타나면서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후, 노벨물리학상은 리정다오와 양첸닝에게만 돌아갔을 뿐 우젠슝에 대한 언급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가설을 입증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지 않고 대신 가설을 제안한 두 남성 과학자에게만 노벨상을 수상한 것이다.

참고 서적
페링거 외 2인, 게임 오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노벨과학상 운영 시스템에 대한 연구
니콜라 비트코프스키, 딴짓의 재발견
린 M. 오센, 수학을 빛낸 여성들
달렌 스틸, 시대를 뛰어넘은 여성과학자들
송성수, 한권으로 보는 인물 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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