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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과학, 기술, 환경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김경민(프레시안)

by Wood-Stock 2016. 2. 5.


http://www.pressian.com/news/review_list_all.html?rvw_no=108



디벨로퍼. 땅 매입부터 기획, 설계, 마케팅, 사후 관리까지 총괄하는 부동산 시행사, 혹은 개발자를 말합니다. 이름 그대로 부동산을 새로운 용도로 개발하는 이를 가리킵니다. 해외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디벨로퍼의 이미지가 좋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디벨로퍼가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근대의 디벨로퍼들, 정확히 일제 시대 때 활동했던 디벨로퍼들에 대한 평가도 비슷합니다. 집 장사꾼으로 치부됩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도 제기됩니다. 일본인으로부터 '조선인의 경성'을 지켜낸 사람들이라는 평가입니다.  

김경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가 현재의 북촌, 인사동을 포함해 서울 전역에 근대 한옥 단지를 개발한 정세권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근대의 디벨로퍼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1] 경성이냐, 게이죠냐?

"경성은 일본의 '게이죠'다"


1920년대 조선인들은 경성이 일본인에 의해 점령될지 모른다는 심각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1910년 일제의 조선강점을 시점으로 일본인들이 경성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경제마저도 장악하리라 확신했다. 그렇기에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종속되고 궁극에는 조선인의 경성이 아닌 일본인의 경성으로 바뀔 것을 염려하였다.

"대경성을 계획하고 대도시를 설계하는 도다. 나날이 발전하고 나날이 융성하는 도다. 그러나 그 융성하는 경성이 어찌 조선 사람의 경성인가, 조선 사람은 (자본이 없기에) 집을 팔아먹고 땅을 팔아먹고 도망하되, 일본 사람은 그 반대로 사고 얻고 하여 일일이 물밀듯이 경성에서 발전 팽창하여 가는 도다. 이와 같이 조선인의 경성은 망하여가고 일본인의 경성은 흥하여 가는 도다!"1) 

"이와 같이 일면 일본 사람이 왕성하는 동시에 조선 사람은 멸망하여 가는 도다. 조선 사람은 먹을거리가 없는지라. 어찌 망하지 아니하기를 바라며, 수입의 길이 없는지라 어찌 그 집과 땅을 지키고 이 경성을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조선 사람으로서는 멸망하여 가는 경성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원한의 피가 끊는 도다."2)

당시 이순탁 연희전문 교수는 <동아일보> 기고에서 비참한 심정을 드러냈다. 

"경성은 이조 오백 년 동안 조선 경제의 중심이었으며, 정치의 중심이었으며 문화의 중심이었으며 인물의 중심이었으며 외교의 중심임과 동시에 소비의 중심이었으며 사치의 중심이었으며 착취의 중심이었으며 협잡의 중심이었으며 죄악의 중심이었다. 요컨대 조선의 모든 중심이었다. 이리하여 금일까지도 조선 사람에게는 경성은 조선의 중심과 같이 생각될 뿐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그렇게 생각되는 것 같다. 

그러나 경성은 벌써 조선의 중심이 아니다. 조선인의 중심이 아니다. 즉 경성은 조선의 중심이 아니라, 게이조(경성의 일본식 발음)의 중심이며, 조선인의 경성이 아니라 일본인의 경성이다. 경제 방면으로 보아서 그러한즉, 다른 방면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3)

▲ "경성이냐? 게이죠냐?". ⓒ동아일보


그는 특히 일본인들이 조선인들보다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였다. 당시 경성부 토지 면적은 대략 1000만 평에 이르렀는데 이 중 국공유지를 제외한 사유지(조선인, 일본인 및 기타 외국인 보유 토지)는 대략 440만 평으로 전체의 44%에 이르렀다. 이 중 조선인 소유는 159만 평인데 비해 일본인 소유 토지는 164만 평에 달한다. 기타 외국인 토지가 113만 평이었다고 하니, 조선인 소유 토지 비중은 전체의 16%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국가 체제를 일제에 강압적으로 빼앗긴 상황에 국공유지와 (민간) 일본인 소유 토지를 모두 합하면 일제 혹은 일본인에 의해 확보된 토지는 무려 경성 전체의 72%에 이른다.4) 

조선인 보유의 토지 면적이 일본인에 비해 적다는 것은 토지 양적인 측면에서 조선인들이 일본인에 비해 토지 시장에서 수세에 몰린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토지의 질적인 측면이었다. 토지의 질적인 측면이라 함은 토지가 도시의 어느 지역에 위치하느냐와 관련된다. 예를 들어, 명동과 같이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 토지와 서울 변두리 지역 토지를 비교할 때, 비록 면적이 같다 하더라도 두 토지 간 가격 차이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따라서 토지 시장에서 기실 더 중요한 부분은 토지의 규모(토지의 양)보다는 토지 가격(토지의 질)이다. 

토지 가격을 보면 조선인과 일본인 간 불평등은 더욱 심화된다. 조선인 보유 토지 가격은 879만 원인데 반해, 일본인들의 보유 토지 가격은 60% 이상 높은 1566만 원에 이르렀다. 조선인과 (민간) 일본인 보유 토지 규모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인 보유 토지 가격이 조선인보다 훨씬 높다는 것은 매우 요지의 토지들을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뜻한다. 

또한 당시 조선인 인구수는 일본인보다 3배가 많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1인당 보유 토지 규모와 보유 토지 가격을 계산한다면 그 불평등성은 매우 심각하다.

"큰 집과 좋은 땅은 전부 일본인 소유 : 해마다 조선 사람의 소유 토지나 가옥은 (…) 조선 사람의 손을 떠나 다른 사람의 손으로 건너가고 (있기에…) 멀지 않은 장래에 조선 사람은 다소 시기의 장단이 있을 뿐, 전부가 걸인이 될 것을 추측할 수가 있다. () 인종별로 보면, 값이 높은 중앙 번영 지대는 전부가 일본 사람과 외국인이요. 조선 사람은 모두 산밑 움막살이 초가집이 대부분"5) 

토지를 보유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바, 1923년 조선총독부 자료(<통계 연보>)에 의하면 호별세(1년 소득 1000원 이상인 사람이 내는 일종의 소득세)를 내는 경성 거주 조선인은 20만 명 중 불과 2000명으로 전체 경성 소재 조선인의 1%에 불과하였으나, 일본인은 7만6000명 중 9500명이 냈다. 통계상으로 경제력을 갖춘 조선인은 일본인의 4분의 1수준밖에 되지 않은 것이었다.6) 

따라서 조선인이 일본계와 경쟁하여 토지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경성의 조선인들은 경제적 힘이 미약했기에 그들의 미래를 두려워했고 조선인의 경성이 아닌 일본인의 게이죠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경성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비록 3배가량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경성이라는 곳의 소유자가 되지 못하고 오직 그 집의 고용인사역자(일본인 토지주 또는 기업주의 공용된 조선인) 밖에 되지 못하면, 벌써 그 집의 주인은 아니다. 경성은 벌써 '경성'이 아니다. 경성은 '게이죠'다."7) 

1) "멸망하여 가는 경성 (상) 경성이 다 이렇다", <동아일보> 1923년 3월 6일.
2) "멸망하여 가는 경성 (중) 경성이 다 이렇다", <동아일보> 1923년 3월 6일.
3) "경성이냐? 게이죠냐?", <동아일보> 1927년 1월 5일.
4) <동아일보>, 앞의 기사. 
5) "조선인 토지 가옥, 일인의 사분의 일–오백원 이상 납세자는 일본인, 오원 미만에는 전부가 조선인", <조선일보> 1927년 12월 11일. 
6) 강병식, "일제하 서울(경성부) 토지 소유 실태와 사회상에 대한 연구", <역사와실학> 3집, 1992년. 
7) "경성이냐? 게이죠냐?", <동아일보> 1927년 1월 5일.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2] 1920년대 급변의 경성

식민 도시로 전락한 경성, 인구는 늘지만…


일제 강제 합병의 결과, 경성이 식민 도시로 전락하면서 수도로써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일제는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의 지위를 깎아 내리고자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는데, 이 조치로 말미암아 경성의 범역은 크게 축소된다.1)


경성이 식민 도시로 전락하면서 정치 행정 업무에 종사하던 조선인들은 생활 근거를 상실하였고, 이들 다수는 경성을 떠났다.2)  또한 1910년대 일제의 강압적 무단 통치를 피해 만주와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도 많았다. 

경성에 거주했던 조선인들이 경성을 떠났음에도, 경성의 총 인구수는 1910년 강제 합병부터 1910년대 말까지 대략 25만 명선을 유지하면서 큰 변화가 없었다. 조선인들이 경성을 빠진 자리를 일본인들이 채웠기 때문이다. 1914년부터 1920년 불과 6년 사이 일본인의 수는 5만9000명에서 6만5000명으로 10% 이상 늘어난다. 

하지만, 인구가 정체되었던 1910년대가 지나고 1920년이 되면서 경성은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된다. 경성은 이전과 다른 차원의 산업화와 도시화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경성, 10년간 4.5배의 성장 

1920년 회사령이 철폐되어 회사 설립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서, 경성에 각종 회사와 공장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는데, 일본인들이 건설한 회사와 공장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은 물론이다. 1920년 불과 200여 개에 불과했던 회사의 수는 1930년 900여 개에 이르게 되어 10년간 무려 4.5배의 성장이 이루어졌다.3)  


이러한 성장의 기류 속에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은 소비 도시 경성이 생산 도시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1928년 <조선일보> 기사는 경성이 "소비 도시로부터 생산 도시로 일변"하고 있고, "십사 년 전과 비교하면 6배가 늘었다"고 밝히고 있다.4)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공장은 대활기를 띄어 작금량년에는 대자본이 들어와서 시내 공업 지대를 엿보는 중이며 널리 시외까지 공장터를 엿보는 중으로 공업 지대로 변한다는 게 경성의 장래는 우리에게 관계없는 생산적 도시가 되리라 한다."

사업체의 증가는 자연적으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는데, 이는 지방에서 토지를 일제에 빼앗긴 계층이 공장들이 들어선 도시로 이주하면서 충당되었다. 1918년 토지 조사 사업이 완료되고 산미 증산 계획이 시작되면서 조선의 농민층은 토지를 빼앗기며 경제적으로 몰락하였는데, 이들은 그나마 자신들의 노동력으로 일할 수 있는 공장이 있는 도시로 이주하였다.5)  

경성이 산업 도시라는 특징을 띠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농촌의 빈농들이 경성으로 몰려들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경성으로 모여든 빈농들 모두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도시 내 주거 빈민(걸인)은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근일 서울 시내에는 걸인이 많이 증가되었으며, 앞으로도 더욱 증가될 형세로 농촌 형편이 곤란하여 시골서 살 수 없는 사람이 상경한 까닭이다."6)

비단 몰락한 저소득 농민층만 경성으로 몰려든 게 아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실력 양성에 대한 사회의식이 높아진 가운데, 1924년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으로 대변되는 고급 교육 제공 기회는 지방 부유층에게는 경성을 매력적인 주거지로 만들었다. 여기에 보건의료 체계 개선으로 사망률이 감소하고 출생률이 증가하면서 자연 증가율도 상승하였다.7) 

이로 인해 경성의 인구는 25만 명(1920년)에서 35만 명(1930년)으로 10년 사이에 40% 폭증하였고, 불과 15년 후인 1935년 인구는 1920년 대비 60% 증가한 40만 명에 이르게 된다. 

경성, 유럽과 동일한 문제 발생했지만 피해는 조선인에 집중

1920년대 경성이 산업 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19세기 유럽 도시들이 산업 도시로 변화하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산업 혁명을 겪으면서 유럽 도시 내부에는 수많은 공장이 설립되었고, 이 공장들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이 노동력은 대개 농촌 지역의 몰락한 빈농들의 이주로 충당되었다.

이로 인해 중세 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이 도시들(지리적으로 매우 작은 면적의 도시들)은 엄청난 인구(노동력) 유입으로 새로운 문제점에 직면한다. 지나치게 사람들이 과밀해졌으며, 도시 내부 위생상 문제점이 나타나게 되었고, 과밀한 인구로 인한 심각한 주택 부족 문제가 발생하였고, 도시 빈민이 양산되었다.  

1920년대 산업 도시 경성은 유럽 도시들의 산업화 과정상 나타난 동일한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피식민계층인 조선인에 집중되었다.

"현재 경성의 가장 절박한 중대 문제 중의 하나는 경성부민의 주택 문제이다. (…) 경성을 찾아오는 사람으로 놀래는 것은 경성부민의 태반이 제 집을 가지지 못하고 () 일본인은 21,034호(거주 가구수)에 개인 소유 14,222가(가옥)와 관사 2,299가(가옥)를 합하면, 16,521가(가옥)로 약 5,200집이 부족한 셈인데 반해, 조선인 측은 49,259호(거주 가구수)의 230,732인이 24,044가(가옥)에 들어 살고 있으니, … 현재의 배 이상의 집이 필요한 것으로 되어 있어, 조선인 측의 주택 문제는 일본인에 비하여 일층 심각한 형편이다."8) 

▲ ‘대경성 면목이 안재 3만호가 월세 세민, 총 호수 4만9천호 속에: 주택난 중의 경성’ (<중외일보> 1929.11.8)


1) 김영근 「일제하 경성 지역의 사회∙공간구조의 변화와 도시경험 : 중심-주변의 지역분화를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제20호, 2003. 
2) 김영근, 위의 글. 
3) 中村資良, 朝鮮銀行會社要錄 I~X, 1921~1942 (양승우∙최상근, 「일제시대 서울 도심부 회사 입지 및 가로망 변화의 특성에 관한 연구」, 『도시설계 : 한국도시설계학회지』 제5권 제1호, 2001 재인용). 
4)「京城에 工場激增 昨今엔 九百十四處, 소비도시로부터 생산도시로 일변」,『조선일보』1928년10월 17일. 
5) 형기주 「일제하 경성의 공업과 공업입지: 1910년대」, 『서울학연구』, 제10호, 1998.
6)「乞人의 激增과 이에 대한 대책은 엇던가」, 『동아일보』 1924년 08월 29일.
7)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1(「일제하 경성 지역의 사회∙공간구조의 변화와 도시경험: 중심-주변의 지역분화를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제20호, 2003에서 재인용) 
8)「대경성 面目이 安在 3만호가 월세 세민, 총 호수 4만9천호 속에, 주택난중의 경성(1)」 『중외일보』 1929년 11월 8일.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3] 충무로, 남대문 찍고 북촌으로 질주

경복궁 접수한 일제, 북촌과 서촌을 짓밟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와서 정착하기 시작한 시점은 19세기 후반으로, 그들의 거주 지역은 일본공사관이 위치하였던 진고개 일대(현재 예장동에서 충무로 1가에 이르는 지역)였다. 당시 반일 감정이 높았던 사회 분위기로 말미암아 신변 안전에 유리한 공사관 주변에 주거지를 정했다.1)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본인들의 거주 지역은 지속해서 팽창하는데, 1895년 청일 전쟁의 승리 이후, 일본인들이 당시 서울 남부 지역에 자리 잡았던 중국인 상권을 몰아내면서, 일본인들의 공간적 범역은 진고개를 넘어 남대문로 일대로 확장된다. 그리고 1896년 일본영사관이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로 이전하면서, 경성 남부 지역에서의 일본인 세력은 더욱 공고해진다.2) 

러일 전쟁의 승리와 한일 강제 병합으로 마침내 조선에서 지도적 위치를 확보한 일제는 경성 남부 지역을 그들의 전용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1910년대 중반(1917년)에 이르러서는 본정(충무로), 대화정(필동) 뿐 아니라 남대문로 1, 2, 3, 4가까지 대부분의 필지가 일본인 소유로 넘어가게 된다.

    
▲ '일본인의 북진과 부정책도 북촌주력'. ⓒ(<조선일보> 1928.11.22.)
▲ 일본인 거류지(추정(1885~1894, 1904~1909). ⓒ김종근, 「서울 중심부의 일본인 시가지 확산」, 2003 재정


위 그림에서 보듯이, 식민지 지배층인 일본인과 피지배층인 조선인 거주지가 공간적으로 명확히 분절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청계천 이남 남촌 지역은 일본인 그리고 청계천 이북 북촌 지역은 조선인에 의해 점유된, 분절된 경성이다

1910년 이후, 일제 강점이 지속함에 따라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수도 지속해서 증가하였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는 경성 지역에 일본인 주거지 부족이라는 도시 문제를 일으켰다. 만약 새로이 경성에 유입된 일본인들이 (기존 일본인들이 장악한) 경성 남부 지역에만 몰려 산다면, 한정된 공간에 새로운 주택 수요가 더해져서 주거 환경이 과거보다 더 열악해질 것이고 주택 가격과 토지 가격은 큰 폭으로 상승할 것이다. 종국에는 해당 지역이 부유한 일본인들 위주의 지역이 되고, 자금 사정이 풍족하지 않은 일본인 계층은 외곽 지역으로 빠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계 인구 급증에 대한 적절한 대안은 기존의 경성 남부 지역을 넘어 새로운 지역으로 일본인 거주 지역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의 일환으로 진행된 정책은 경성 북부 지역-청계천 이북 북촌의 조선인 거주지역으로의 일본인 주거지 확장이었다.

하지만 북촌 지역에 일본인 주거지를 확보하는 것은 과거와 다른 접근 방식이 요구되었다. 초기 남산 일대에 일본인 거주 지역을 개발한 것은 미개발 지역을 개발하는 방식이었고, 남대문 주변의 중국인들을 몰아낸 것은 청일 전쟁 승리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청계천 이북 지역은 조선인들이 조선 왕조 600년에 걸쳐서 사는 전통적인 도시 지역이었다. 따라서 제아무리 일제가 새로운 통치 세력으로 군림한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조선인을 대거 몰아내고 일본인을 위한 신규 단지 건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일본인 급증을 대비를 해야 했다. 일제는 이를 위해 도시 계획 정책 필요성을 공론화함과 동시에 일제의 통치 기구를 청계천 이북에 위치시킴으로써 세력권을 주변 지역으로 확장하는–어찌 보면 간접적 개발 전략을 취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매력적인 토지는 바로 과거 조선이라는 국가가 소유했던 그리고 현재는 일제가 소유한 국공유지였다. 

1920년대 들어, 일제는 1921년 총독부와 경성부, 재조선 일본계 상공인 그룹과 함께 경성도시계획연구회를 설립하였고, 1922년 조선건축회는 <조선과 건축>이라는 월간지를 발간하여 서구 도시 계획 이론을 식민지 조선에 전파한다.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경성부에 임시도시계획조사계를 설립하여 도시계획조사사업을 시작하였고, 신문 지상에는 도시 계획 관련 쟁점들이 공론화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일본인 주거 지역과 시가 지역의 도시 문제 해결을 위한 것으로 조선인의 환경 문제 해결에 주안을 두지 않았다.3)

공론화 과정과 더불어 일제는 통치 기구의 청계천 이북 이전을 추진하는데, 1910년대 중반 총독부 경복궁 이전 계획을 설립하여 1926년 경복궁에 총독부를 건설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통치 기구의 토지(예를 들어, 총독부 개발 지역)를 기존 조선인 거주지에 건설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조선인 토지를 매입하기 위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였고 그 매수 과정마저도 심각한 반대에 부닥쳐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경복궁, 경희궁 등 궁궐은 물론 왕실이나 국가 관련 시설이 있었던 대규모 필지가 일제의 관심 지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조선이라는 국가가 없어지고 일본이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기에 기존의 국공유지는 일제가 실질적으로 마음대로 사용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궁궐과 국가 시설 부지는 일반 조선인의 거주지와 물리적 경계가 분명하고, 도시의 과밀하고 비위생적인 환경과 분리된 데다, 비교적 녹지가 확보된다는 점에서 일본인 관사의 입지로 안성맞춤이었다.4)

통치 지구의 이주와 더불어 통치 기구에 부역하는 일본인들의 거주지를 인접 지역에 확보하는 작업이 동반되었다. 

"총독부가 남촌으로부터 북촌으로 옮아온 지가 겨우 삼 년도 채 지나지 않은 오늘에 벌써 총독에 따라다니는 관공리(官公吏 : 관광서 직원)는 물론 상인들까지 날마다 남촌에서 북촌으로 올라오고 있어 날이 갈수록 그 수가 격증하여 이제는 조선 사람이 대부분이 살던 북촌에도 일본인의 그림자가 점점 농후하여 간다… 과거에 시가미(市街美 : 시가지를 가꾸는 일)나 도로 확장 등에 별 큰 힘을 들이지 아니하던 북촌 일대에 경성부(京城府)는 갑자기 재정에서 무리하면서 거액의 돈을 넣어 (일을 진행하고 있다.)"5)

총독부가 경복궁으로, 경성부청이 덕수궁 옆 신청사로 이전함과 동시에 적선동, 통의동, 청운동과 효자동 지역에는 총독부와 경성부의 관사, 그리고 동양척식회사, 조선식산은행직원숙소가 세워진다. 이어 1926~1928년에 걸쳐 연건동, 동숭동에 경성제대가 자리를 잡으면서, 동숭동, 이화동, 명륜동, 혜화동 지역에 경성제대 교수와 직원을 위한 관사와 사택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1929년에는 정동에 재판소, 1934년 광화문에 총독부 수신국 분관 등이 잇따라 자리를 잡게 되었다. 

▲ 경성 지역 관사 건설. ⓒ김명숙 「일제시기 경성부 총독부 관사에 관한 연구」, 2003


그림의 1~7(경복궁 주변)과 57~60 (경성제대 주변) 지역은 청계천 이북 지역에 대단지로 건설된 일본인들을 위한 관사들로 1920년 이후에 건설되었다. 현재도 경복궁 주변 서촌 지역에는 과거 관서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적산가옥들이 존재한다. 위 그림 7번 지역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들을 위한 관사가 지어진 곳인데, 그 주변에 아래와 같은 적산가옥 촌이 현존한다.6) 

▲ 관사 추정 적산가옥. ⓒ김경민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은 조선인들에게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총독부가 경복궁 내로 이전되어 기존 남부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일본 사람들의 세력이 일조에 북부로 이전하게 되면, 그때의 조선 사람의 생활 근거지는 다시 동쪽으로 또는 서쪽으로 쫓겨나거나 (구축(驅逐)되어), 혹은 청량리로 혹은 마포 등지로 또 혹은 멀리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그 생을 구하러 이사하게 될 것은 물론이다. 아! 이 어찌 도태구축의 암담한 사실이 아니리오."7) 

1) 홍성찬 「한말, 일제초 재경 일본인의 은행 설립과 경영」, 『한국사연구』제97호, 1997
2) 손정목 『일제강점기 도시화과정 연구』, 일지사, 1996
3) 박세훈 「1920년대 경성도시계획의 성격: 「경성도시계획연구회」와 '도시계획운동'」, 『서울학연구』 제15호, 2000 
4) 김명숙 「일제시기 경성부 소재 총독부 관사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4 
5)「일본인의 북진과 府정책도 북촌주력: 돌아보지 않은 곳에 새로이 거액을 경주」 『조선일보』, 1928.11.22 (제목에서 말하는 ‘돌아보지 않은 곳’이라 함은 북촌지역을 말한다.)
6) 김명숙•전봉희 「일제강점기 경성부에 지어진 관사의 단지적 성격」,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 계획계/구조계』 제23권 제2호, 2003
7)「멸망하야가는 경성 <중, 전3회> 조선이 다 이러타」 『동아일보』, 1923.3.7.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4] 조선-일본 토지 전쟁의 발발

"일본인이 종로에 발을 못 붙이게 하라"


앞서 연재에서 설명하였듯이, 1920년대 지방 빈농과 지역 유지의 경성 유입이 증가하면서 경성에 거주하는 조선인 인구는 빠르게 늘었고, 일본인의 인구 역시 증가하였다.

토지 및 주택 시장 측면에서 매우 성격이 다른 수요 계층에 시장에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이질적인 두 계층은 주거 지역도 상이했는데, 일본인은 청계천 이남 남촌 지역에 그리고 조선인은 청계천 이북 북촌 지역에 거주하였다. 하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성 유입이 가속화되면서,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거주하던 두 계층은 동일한 지역의 토지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새로이 경성에 진입하려는 조선인들은 그들보다 경제력이 월등한 일본인 거주 지역(남촌)에 자신들의 거주지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경성에 유입된 조선인들의 목적지는 청계천 이북, 북촌 지역이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우월한 입장의 일본인들에게는 공간적 제약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남촌뿐 아니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지역으로 거주지를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촌의 주거 환경도 유지하면서 새로 유입된 일본인들의 살 거처를 마련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일제는 정책적 차원에서 북촌 진출을 계획한다.

조선인과 일본인 공동 관심 지역, 북촌 

결과적으로 북촌 지역은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의 공동 관심 지역으로 떠오르게 되었고, 이는 두 계층 간 토지 확보 경쟁, 조일 토지 전쟁을 불러일으켰다.(여기서 '북촌' 지역은 현재 우리가 관습적으로 인지한 삼청동, 가회동 일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대문 안 청계천 종로 북쪽 지역을 뜻한다.)  

"최근에 이르러 그들은 총독부가 경복궁으로 옮길 시일이 가까워지매 대경성의 미관을 위한다는 이유로 종로 일대의 큰 거리를 개수하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종로통 도로개수에 따라, 양측의 조선인 상점과 가옥들이 간혹 도로의 폭을 넓힘으로 인하여 헐리어 버리는 곳이 십수 개소나 되는… (그리고) 헐린 집터에는 도시미관을 위하여 단층집을 짓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이층 이상의 집을 세우도록 하였다. (하지만) 경제력이 부실한 조선 사람이 이층 이상의 집을 세울만한 자력이 있을지가 (의문이다.) … 일본인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인을 감언이설로 충동하여 전부 지가의 수중에 넣고자 암중비약을 한다…."1) 

일제는 정책적 차원에서 총독부 등 정부 기관을 북촌 지역의 옛 국공유지에 자리 잡게 하고 주변에 관사를 건설하여 일제 하수인들의 거주지를 북촌에 만들었다. 부동산 개발 측면에서 해석하자면, 일종의 앵커 시설(Anchor Facility)를 입점시킨 후, 앵커 시설에 필연적으로 연관되는 시설 및 인력들의 이주를 유도한 것이다. 

정부 기관을 북촌 지역에 옮김과 동시에 일종의 도시 미화 운동(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과 미국에서 불었던 도시 계획 정책으로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는 계획 : 불가피하게 저소득이하 서민들이 거주지를 뺏기는 상황이 종종 발생함)을 종로통에 벌이면서 자연스럽게 조선인들의 북촌 이탈 효과를 보려 했다. 

이러한 힘든 와중에도 북촌 지역을 사수하려는 조선인들이 있었고, 그들의 심경은 매우 비장했다. 

"종로통 삼정목 구십번지 길진옥 씨는 '물론 우리의 재력이 어찌 넉넉할 수가 있겠습니까만, 기어코 이 지역만큼은 일본인의 수중에 내어주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들을 가지고 헐리게 된 열다섯 채의 소유주들 중 한 사람도 집을 팔아넘긴 이가 없습니다. 그 터를 안 팔려고 기를 써가며 각 은행으로부터 비싼 이자를 주고 돈을 얻어다가 이층집을 짓는 중인즉, 앞으로 장사가 잘되면 혹시 몰라도 만일 그렇지 않다면 결국은 은행물건이 되고 말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 아닙니까'라며 매우 전도를 우려하는 중이었다."2)

▲ '종로도로개수와 일본인의 북진'. ⓒ<조선일보>, 1925.06.18


북진하는 일본인을 두려워하는 조선인들 

당시의 조선인들은 남촌을 넘어서 북촌 지역으로 북진하는 일본인들을 매우 두려워하였고, 이를 막기 위한 숨 가쁜 노력을 하였다. 이들은 은행 빚을 지어가면서 토지를 지키려 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조선인이 바라는 만큼 녹녹하지는 않았다.

▲ '북진의 여파? 공가가 감소'. ⓒ<동아일보>, 1927.5.30

북촌 지역 소재 신규 주택이 시장에 나오는 대로 속속 일본인들의 수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일본인들의 북촌 진입으로 말미암아 빈집들이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같은 날짜의 다른 기사에서도 경성에 유입된 일본인 중 70%가 북촌에 정착하였다고 한다.3)

급기야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청계천 이북 지역 중 과거 조선인들의 다수를 차지하였던 지역에서도 일본인들의 수가 많이 늘어난 지역들이 상당수가 되었다. (아래 그림 참조)



▲ 한국인 우위지역의 변화(1917-1927). ⓒ김종근, 서울 中心部의 日本人 市街地 擴散: 開化期에서 日帝强占 前半期까지, 2003 재정리 


암울한 시대 분위기 속 신흥 자본가 계층 등장 

일제의 주택 문제 해결은 기실 일본인 주택 부족 해결을 의미하였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가 일본인의 북진(북촌 진출)이었다. 따라서 경성의 조선인들은 주택 부족 문제에 힘들어했고 자신들의 터전인 북촌에서 쫓겨나는 형국이었다. 그렇기에 조선인들 입장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세력 또는 조직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조선인 주택 수요층을 위한 새로운 조직이 등장하는데, 건양사의 정세권 선생을 위시한 조선인 출신의 신흥 자본가 계층, 근대적 디벨로퍼들이다. 이들은 늘어나는 인구를 볼 때, 주택사업(주택 건설 및 운영)이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일부는 민족적 소명을 갖고 사업에 임했다. 

건양사 정세권 선생의 첫째 따님 정정식 님의 전언이다. 

"아버지(정세권 선생)는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 붙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4) 

그리고 이런 흐름에 나타난 주택 양식이 우리가 환호하는 삼청동, 가회동, 인사동 등지에서 볼 수 있는 근대식 한옥 집단 지구다. 

1) "종로 도로 개수와 일본인의 북진", <조선일보>, 1925년 6월 18일.
2) <조선일보>, 앞의 기사. 
3) "(일본인) 北進의 餘波? 公家가 減少", <동아일보>, 1927년 5월 30일.
4) "激增하는 日本人府民 今年에 벌서 三百名", <동아일보>, 1927년 5월 30일.
5) 2013년 8월 30일 인터뷰를 진행했음.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5] 한옥 집단 지구의 탄생과 디벨로퍼

북촌 한옥 마을, 서촌과 다른 이유가 있었다


1920년대 경성의 상황을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방의 가난한 조선인과 유지층들이 경성으로 이주하면서, 조선인 인구가 급증하였고 이들이 거주하려는 지역은 북촌이었다. 일본인 역시 인구가 급증하였는데, 이에 대한 대응 전략의 하나는 일본인 주거지를 북촌으로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촌 지역은 이질적 계층들이 한정된 토지를 놓고 경합하는 곳이 되었고, 당연히 자본력이 막강한 일본인에게 유리한 형국이었으며 많은 조선인은 분개하고 좌절하였다.

하지만, 조선인들을 위한 주택을 제공하는 새로운 조직(회사)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근대적 디벨로퍼의 출현이다. 이들이 건설한 한옥은 기존의 한옥과 전혀 다른 형태였다. 이 한옥들은 과거와 달리 아주 작은 규모였고 한 채씩 지어진 것이 아니라 대단지로 개발되었다. 우리가 현재 삼청동, 가회동, 익선동에서 볼 수 있는 근대적 한옥 집단 지구가 탄생한 것이다. 

여러 채의 작은 한옥들이 모여 개발된 한옥 집단 지구는 복합적 요인의 결과였다. 한옥의 구조적 특징과 더불어 디벨로퍼에게도 경제적 이윤이 돌아가는 사업 구조 등이 작용하였다. 

▲ 정세권 선생이 개발한 가회동 31번지 한옥 집단 지구. ⓒ이주현


한정된 토지에 여러 사람이 모여 살게 되는 경우, 해결책은 크게 두 가지다. 과거 100평의 대지에 한 가구가 살았으나, 인구가 늘어 5가구가 들어와서 살 형편이라 치자. 이 경우, 첫 번째 해결책은 100평 대지 1층 가옥을 5층으로 개발하여 5가구가 기존과 똑같은 평형의 주택에 사는 것이다. 즉, 아파트와 같은 형태이다. 하지만 한옥의 구조적 특성상 고층으로의 개발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다른 해결책이 필요하게 된다. 100평 대지에 5가구가 살 수 있도록 가구당 20평 크기의 주택 5채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 경우 한 가구당 주택의 규모는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나 더 많은 수의 가구가 거주하게 됨으로써 대규모 대단지 개발이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조선인 인구 급증에 대한 1920년대식 해결책은 큰 대지의 한옥을 철거하고 여러 채의 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대단지 한옥 집단 지구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작은 평수를 여러 채 공급하는 전략)은 부동산 디벨로퍼에게 이익이 되는 구조다. 예를 들어 역삼동 원룸 시장을 살펴보면, 실평수 10평형 원룸의 월 임대료가 대략 100만 원 수준이나, 5평형의 원룸은 60만 원 선이다. 주택 수요를 분석하면 당연한데, 소득 분포를 볼 때 월 100만 원을 내고 살 수 있는 계층보다는 월 60만 원 을 낼 수 있는 소득층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5평 원룸에 대한 수요가 많다면, 하나의 재화(원룸)에 대한 경쟁 역시 5평 원룸이 10평 원룸보다 더 높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레 가격에 반영된다. 비록 5평 원룸 월세(60만 원) 자체는 10평 원룸(100만 원)보다 낮더라도, 평당 임대료를 계산하면 5평 원룸의 평당 임대료(12만 원=60만 원/5평)는 10평 원룸(10만 원=100만 원/10평)보다 20%가 높다. 따라서 소유자인 디벨로퍼 입장에서는 10평 원룸 한 채를 소유하는 것보다 5평 원룸 2채를 소유하는 것이 유리하다. 소득이 100만 원(10평 원룸 한 채)에서 120만 원(5평 원룸 두 채)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디벨로퍼 입장에서는 주택 규모를 더 작게 하고 여러 채를 만들수록 이익이 될 수밖에 없다. 평당 임대료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1920년대 경성 거주 조선인들의 생활은 지속해서 궁핍해졌기에, 조선 서민들이 원하는 주택의 규모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정세권 선생의 1932년 글이다.  

"10년 전(1922년) 30칸 안팎 되는 집이 무난히 팔리던 때에는 그래도 오늘날 신문지상에서 나타나는 생활난의 부르짖음은 적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신문 지상에 오직 생활난 이야기만 보도될 뿐이고, 이르는 곳마다 들리니 생활난의 비참한 절규가 아닌가. 가옥매매도 너덧 댓간의 집을 찾는 사람이 가장 많아 10간 내외의 집이 매매될 뿐, 그 이상의 큰 집을 찾는 이가 적다." (정세권, '나날이 위미(萎靡)되어가는 가옥 매매로 본 조선인의 경제', <실생활>, 1932년 8월호) 

따라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볼 때, 한옥 집단 지구의 출현은 필연이었다. 그리고 한옥 집단 지구는 대단지에 여러 채의 한옥들을 거의 같은 시기에 건설하였기에, 개인 혹은 작은 회사가 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다. 당연히 일정 규모의 자본력을 갖춘 회사여야 했다. 그리고 부동산 개발은 상당한 위험성(사업 파산의 경우가 높음)과 더불어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것이었기에, 규모가 있고 전문성있는 디벨로퍼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인구 급증기에 작은 주택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디벨로퍼의 출현은 해외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중후반, 뉴욕은 유럽의 이민자들이 미국에 유입되는 통로였다.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뉴욕은 주택부족무제(특히, 저소득 서민 주택)에 시달렸다. 이 와중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주택 건물(Tenement라 불리는 우리의 다세대 주택과 비슷한 주택 건물)이 건설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건물들은 경제적 이윤만을 추구했던 제리 빌더(Jerry Builder)라 통칭되는 일면 악독한 디벨로퍼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들은 당시 주택에 대한 규제가 매우 부실했던 틈을 타, 아래의 도면과 같이 집들을 잘게 쪼갰다. 가급적 방수를 최대한 늘려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조선의 근대적 디벨로퍼들이 큰 한옥을 부수고 작은 한옥 여러 채를 건설한 것과 비슷한 경우다.

▲ 뉴욕의 사진 작가 제이콥 리스는 이민자를 포함한 저소득층의 삶을 사진으로 담았고, 이는 당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한 층에 12가구가 살도록 방들이 쪼개진 형태인데, L(Light)은 밝은 방, D(Dark)는 어두운 방을 의미한다. 1914년 출간된 [How the other half live]에 수록된 도면 이미지.



하지만 이들의 건축물은 심각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미약한 규제를 틈타, 위 도면 이미지의 일부 D(Dark)방과 같이 햇빛이 일절 들어오지 않고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방들을 공급하였기 때문이다. 제리 빌더는 폭발적인 주택수요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이익 극대화에 치중하였기에 입주민이 살 집의 구조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사회적 환경적 문제점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근대적 디벨로퍼들이 제공한 한옥은 과거 한옥의 문제점들을 개량한 것이었다.

▲ Tenement 건물을 조사하고 있는 감독관. 미국 기록물 보관서

(the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그런데도 이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하다. 당대 최고 건축가 박길룡은 저택을 부수고, 소규모 한옥 단지로 개발하여 주거 환경을 악화시킨다고 비난하였고, 이들은 '집 장사'로 매도되었다.1)    

그렇지만 1920년대 북촌 지역에서 그들이 근대식 한옥 집단 지구를 건설하지 않았다면, 아니 못했다면 우리가 북촌에서 바라보는 주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선인들을 위한 주택 개발을 일본 측도 안 했기에 조선인마저도 안 했다면, 서촌의 적산 가옥 집단 지구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력이 월등한 일본인들을 위한 주택이 대량이 공급되었을 수 있다. 우리가 마주한 삼청동의 모습은 대량의 적산 주택 단지이지 한옥 집단 지구가 아닐 수 있다.

▲ 서촌에 남아 있는 적산 가옥 단지. 과거 동양척식주식회사 관사로 추정됨. ⓒ김경민


따라서 이들에 대한 재평가는 이루어져야 한다. 그들의 한옥 집단 지구 개발이 경제적 이윤에서 시작되었건 아니건, 당시 민족적 총화(북촌 지역을 일본인에게 빼앗기어서는 안 된다)가 한옥 집단 지구라는 형태로 투영되어 개발되었고 결과적으로 많은 수의 조선인이 북촌에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인의 북촌이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조선인의 북촌이 있었기에 삼청동, 계동, 익선동의 근대 한옥 집단 지구가 아직도 살아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일제가 교묘하게 사업을 제약하는 상황에서 이들이 사업을 일군 것 역시 평가되어야 한다. 건설 및 개발업자는 민간의 공사뿐 아니라 관급 공사에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시 일제는 여러 독소조항을 두어 사실상 조선인 회사들의 관급 공사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은행 대출 역시 그들에게 매우 불리한 형편이었다.2)  

즉, 은행에서 대출도 제대로 안 되는 상황에서 근대적 디벨로퍼들이 대규모로 사업을 진행한다는 것은 매우 큰 리스크를 지고 사업을 한다는 것인데, 이들이 이런 상황에서도 사업적 성공을 일군다는 것은 매우 시장이 좋았든지 아니면 사업적 수완이 대단하든지 아니면 두 경우 모두를 누릴 수 있던지 일 것이다. 

당대 활동하였던 대표적인 근대적 디벨로퍼에는 정세권의 건양사(建陽社), 김동수의 공영사(公營社), 마종유의 마공무소(馬工務所), 오영섭의 오공무소(吳工務所), 이민구의 조선공영주식회사 등이 있다.3) 이 중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당시 건축왕이라 불렸던 건양사의 정세권 선생이다. 


1) <리씽킹 서울>(김경민·박재민 지음, 서해문집 펴냄, 2013년).

2) 구경하·김경민, '1920년대 근대적 디벨로퍼의 등장과 그 배경', <한국경제지리학회지>, 제17권 제4호, 2014년. 

3) 김란기, '근대 한국의 토착 민간 자본에 의한 주거 건축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제1권 제1호, 1992년.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6] 왜 정세권인가?

영화 <암살> 주인공이 잊히는 게 온당한가?


광복 70주년과 맞물려 영화 <암살>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성 독립운동가에 관한 역사적 평가가 미약했음에 대한 자성,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연유로 역사 앞에 드러날 수 없었던 인물에 대한 안타까움이 대중에서 회자되었다. 이의 연장선에서 아래의 질문을 해 본다.
 
조선물산장려회 재정을 절대적으로 후원하면서 조선물산장려회의 황금기를 열었고, 조선어학회 재정을 지원하면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문을 당한 사람이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지는 게 온당한가. 

  

조선물산장려회. 온 국민이 국사 시간에 최소한 이름은 들어본 단체다. 단어 뜻대로 좋은 조선 상품을 많이 생산하고 조선 상품을 많이 소비하여 조선 경제력을 키우자는 운동을 주도한 단체다. 기억력이 좋고 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만식 선생이 이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역사에서 잊혀진 '그' 

  

조선어학회 그리고 조선어학회 사건은 어떤가. 역시 최소한 이름은 들어본 단체이고 사건이다. 조선어학회는 우리글과 말을 지키자는 학회로 어떤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단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활동을 위해 많은 자금이 들어갔을 것이다.

  

전국에 걸쳐 조직을 갖추고 운동을 하든가, 아니면 민족을 위한 비영리 사업을 한다면 누군가는 조직을 만들어서 이끌어야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상당한 자금을 후원해 사업이 진행되게 해야 한다. 우스갯소리지만 좋은 캠페인이건 활동이건 사람이 있어야 하고 자금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에서 잊혀진 어느 '누군가'는 두 단체 재정의 상당 부분을 본인 회사를 통해 후원했으며, 본인 건물 1층에는 조선물산장려회 물건을 판매하는 상점을 개설했고, 별도 조직을 설립해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를 만들고 홍보했다.

  

'그'가 조선물산장려회 재정이사로 재직하면서 도움 준 시기는 조선물산장려회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내부 갈등으로 그가 조선물산장려회를 나온 후,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은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조선어학회를 후원하기도 하였다. 조선어학회 건물을 본인 자비로 건설해 기증하고 지속해서 후원했다. 조선어학회는 말이 어학회지 어학회가 아니다. 1940년대 일제 폭압 속에서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해외가 아닌 국내에서 목숨을 걸고 한 독립운동 단체와 진배없다. 

  

  

▲ 1949년 6월 12일에 찍은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자 동지회 기념 사진. 앞줄 좌측부터 김윤경, 정세권, 안재홍, 최현배, 이중화, 장지영, 김양수, 신윤국. ⓒ한글학회

  

우리 말 지키려던 '집장사'꾼? 

  

그렇기에 주도적 인물들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모진 고민에 시달렸고, 그 중 2명은 고문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그'도 조선어학회 사건 주도자로 함께 고문을 당했고, 이후 '그'의 재산 상당량(서울시 뚝섬 일대 대규모 토지)을 일제에 빼앗기면서 회사 자체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됐다. 

  

그리고 그는 경성 전역(주로 종로 이북 조선인 거주지역)에 작은 한옥이 옹기종기 모인 한옥 집단 지구를 건설했다. 조선인을 위한 주택을 조선인 회사가 건설하여 조선인들이 살게 하였다. 즉, 한옥 공급을 통해서 주택 부분의 물산 장려 운동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조선인의 북촌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집장사'꾼으로 불리었고, 그의 한옥들은 20세기 후반까지 대중의 관심 대상 밖에 머물렀고 철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가 개발한 가회동 31번지는 전 국민 아니 세계인들이 서울에 오면 들리는 명소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그를 모른다. 역사 앞에 들어날 수 없는 숨은 주인공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전 국민이 알고 있는 중요 민족 운동의 주요지도자를 모른다면, 이는 더 애처롭고 부끄러운 현실일지 모른다. 
  
우리나라 최초의 디벨로퍼이자,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실질적 주인공, 조선어학회의 후원자 기농 정세권 선생이 바로 그다. 그에 관해서 하나하나 살펴보자.

  

▲ 정세권 선생이 개발한 가회동 31번지 한옥 집단 지구. ⓒ이주현

  
천재 소년, 19세에 면장이 되다 

  

정세권은 1888년 4월 10일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잊는 가난한 가정이었다고 한다. 총 14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서 가장 못사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를 매우 천재적인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정세권에 대한 기록 자체가 드물기에 가족들의 설명과 기록이 다소 엇갈리는 부분이 있기는 하나, 그가 서당에서 교육을 받았고, 매우 어린 나이에 장원을 하였으며, 진주사범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천재성이 발하는 예로써, 진주사범학교 3년 과정을 단 1년 안에 졸업한 것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첫째 따님 정정식 님(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의 증언이다.

  

"1900년대, 일본 사람들이 방방곡곡에 사범학교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일본 교육을 시키려고 애를 썼는데, 아버님이 사범학교를 다녔어요. 남들이 3년을 다니는 과정을 1년 만에 졸업을 했어요. 그리고 18살에 면장이 되셨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아버지를 천재라고 불렀어요." 

  

그가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한글학회(조선어학회)에서 1965년 정세권 사후, 그를 기억하면서 쓴 조상문의 일부다.  

  

"기농 선생! 선생은 원래 비범한 재질과 탁월한 실천력을 타고 났습니다. 열두 살에 진주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고, 진주사범학교에서 학년을 뛰고 또 뛰어 넘어서 1년 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만큼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천재였습니다. 열여덟 살에 기자능 참봉이 되고, 스물세 살에 면장에 피임된 것은 선생의 월등한 역량이 모든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었습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8살(1907년)의 어린 나이에 그는 참봉에 제수되었고, 19살(1908년)의 나이에 (하이면) 면장에 임명된다. 면장이 된 시점은 의견이 갈린다. 한글학회와 아드님 정용식 씨 증언 기록에 의하면 1910년 23세에 면장이 된 것으로 나오기도 하나, 따님 정몽화 씨 기록에 의하면, 1908년 참봉이 된 후, 1년 후 1909년에 면장에 임명된다고 한다.  

  

당시 고성군 군수가 정세권을 눈여겨 본 후, 하이면 면장으로 임명하였다고 하며, 이로 인해 대대로 면장을 했던 최 씨 가문과 마찰이 생겼다.  

  

거짓말 안하는 면장 

  

그리고 1910년 한일 강제 합방으로 국가 통치 주체가 일제로 바뀌는 과정에 아래의 에피소드를 정몽화 씨는 전한다.  

  

면장이 되신 지 2년 만인 1910년에 한일 합방이 되었다. 일본 헌병대장은 그 때 고성군 내 면장들을 모두 모아 놓고 "한일합방을 어떻게 생각하시오?"라고 물었다. 모두 "좋다"라고 대답해서 풀려났는데, 아버님은 "좋지않다"라고 대답하니 감영에 가두어 놓았다. 동네 어른들이 매일 찾아와서 "좋다캐라, 좋다 캐라" 말하라고 감영 앞에서 야단이었다. 그 후 헌병대장이 또 왔다. 

  
"한일 합방을 안 좋다고 했다면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좋다는 말은 거짓이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시오. 당신 같으면 당신 나라가 남의 나라와 합방을 당했는데, 나라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다 할 것이요? 나는 거짓말은 안 하는 사람이오." 

  

그랬더니, 

  

"음, 거짓말 안하는 면장이군, 그렇다면 좋소. 나가시오."

  

그 다음부터는 거짓말 안하는 면장으로 통하게 되어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아 일하기가 아주 수월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하이면 면장으로서 주민 소득을 향상하고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방풍림 조성 사업을 펼치기도 하였고, '대동계'라는 저축계를 발족시켰다. 누에 치는 잠업조합연습소를 설립하고 목화를 대량 생산하기도 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전국 우수 면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여러 사업 중 그가 가장 역점을 두고 싶었던 사업은 주택 개량이었다. 그는 하이면에 있는 초가집들을 모두 기와집으로 바꾸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면장으로 재직한 지 몇 년 후 1912년, 24세 나이로 그는 면장직을 사임한다.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는 것에 대한 회의와 면장직을 독점하였던 다른 집안으로부터 테러를 당한 연유에서다. 이후 1919년 진주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고는 하나, 자세한 정황은 찾을 수 없다.  

  

그리고 1919년 기미년 독립운동 이후, 그는 드디어 큰 결심을 한다. 하이면을 떠나 경성으로 이주한 것이다. 그는 상경 후,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부동산 개발 회사 건양사를 설립해 그의 거대한 꿈 대규모 근대식 한옥 단지 개발을 하이면이 아닌 경성에서 시작한다. 삼청동, 가회동, 익선동, 봉익동, 혜화동, 성북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지에 한옥 집단 지구가 출현한 것이다. 

1) <구름따라 바람따라>(정몽화 지음, 학사원 펴냄, 1998년)
2) 2014년 1월 15일, 정정식 님과 인터뷰. 
3) 유제한, '기농 정세권 선생을 조상함', <한글학회>,1965년.
4) <구름따라 바람따라>(정몽화 지음, 학사원 펴냄, 1998년), 37쪽.
5) <구름따라 바람따라>(정몽화 지음, 학사원 펴냄, 1998년), 35쪽.
6) 김란기, '일제하 민족 건축 생산 업자에 관한 연구-개량 한옥 건설 업자 김종량과 정세권을 중심으로',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제9권 제2호, 1989년.
7) <구름따라 바람따라>(정몽화 지음, 학사원 펴냄, 1998년)
8) 2014년 1월 15일, 정정식 님과 인터뷰.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7] 1920년 정세권의 북촌 입성

1980년 역삼동과 대치동, 당신의 선택은?


부동산 투자 및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를 물어보면, 아래와 같은 답을 듣게 된다. 

첫째는 위치.
둘째도 위치.
셋째도 위치.

부동산 투자에서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주 근거리에 위치하였음에도, 부동산 가격 차이가 큰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사교육 1번지 강남구 대치동의 경우, 근래 재개발이 완료되어 입주가 시작된 아파트(50평형대)의 전셋값이 20억 원에 육박하고 시세는 20억 원을 능가한다. 하지만 바로 옆 동네 역삼동만 해도 50평형대(매매가) 시세는 20억 원 이하다. 

만약 시계를 30년 전으로 돌려 1980년대 초·중반을 돌이켜보면, 역삼동 지역은 지하철 2호선이 지나가는 교통 좋은 동네임에 비해, 대치동 지역은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지역이었다.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은마아파트 주변은 대규모 논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지하철 3호선이 양재에서 대치동으로 연장된 것은 1993년의 일이었고, 대치동 학원가는 1990년대 초반 이후에 형성되었다. 1980년대 두 지역의 가격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음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격차는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만약 1980년대 초, 서울로 갓 이주하려는 사람이 어느 지역–강북 또는 강남, 만약 강남이라면 역삼동 또는 대치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현재의 자산 규모는 매우 다를 것이다.

정세권 선생이 하이면을 떠나 경성에 정착한 1920년 

가족을 이끌고 상경한 정세권은 거주지와 사업 소재지를 선택해야 할 결정의 순간에 직면한다. 

당시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경성의 어느 지역을 거주지로 정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경우, 여러 경우의 수가 존재하였다. 

사대문 밖에 거주할 것인가 아니면 사대문 안에 거주할 것인가?
만약 사대문 안에 거주하고자 한다면, 남촌인가 북촌인가?

사대문 밖을 살펴보면, 경성 북쪽과 서쪽은 지형적으로 확장하기 힘든 형편이었고, 남쪽은 일본인들 주거지가 후암동을 거쳐 용산으로 뻗어 가는 중이었다. 따라서 부동산 디벨로퍼에게 실질적으로 남은 선택은 동대문 밖 창신동 주변이다.

현재의 창신동은 동대문 상권의 의류 제조 지구로 서민 주거 지역으로 지금은 인식되고 있으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의 창신동은 부유층 거주지 혹은 별장지였다. 일례로, 한일은행 설립자 조병택의 저택과 미디어 아티스트 고(故) 백남준(백남준의 부친 백낙승은 당시 대재벌)의 생가터가 창신동에 있다. 하지만 1920년대 경성의 산업 도시화에 맞물려 창신동은 지방의 빈민들이 몰려드는 급변의 지역으로 돌변한다.

1933년 <동아일보>에는 시 당국이 창신동 소재 토막집을 강제 철거했다는 아래의 기사가 실렸다. 

"임원상은 동대문 밖 창신동 626번지에 움집을 짓고 사는지 10년이 넘었다.(즉, 1923년 이전이다.) 무너진 성벽을 의지하고 겨우 비를 피하고 살던 터인데 거기에 모여든 최익준 씨의 식구, 유성규 씨의 식구가 역시 근방에 움(막)을 파고 그날그날을 연명하고 지냈다."

▲ <동아일보>, '십년토굴을 일조에 철퇴, 창신동 성터에 지은 토막민의 가련한 동정', 1933.05.31


기사를 통해 1920년대 초반부터 창신동 지역에 토막집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듯이, 매우 혼란스런 상황의 창신동은 정세권에게 첫 정착지로써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창신동 지역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저택이 있었던 창신동에 토막집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대규모 수요가 존재한다는 방증이었고, 그는 이후 1930년대 창신동에서 한옥 집단 지구를 개발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첫 정착지로 사대문 안 지역을 마음에 두게 된다. 하지만 앞서 연재에서 설명하였듯이 종로 이남 남촌 지역은 이미 일본인 세력권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종로 이북 지역이었고, 그중에서도 현재의 북촌 일대(삼청동, 가회동, 계동, 낙원동 일대)였다. 

북촌 입성, 디벨로퍼로서 당연한 선택 

디벨로퍼는 토지를 확보하고 건물을 지어 분양하거나 임대를 하여 수익을 낸다. 따라서 첫 조건이 토지 확보인데, 좋은 위치의 토지를 남들보다 빠르고 쉽게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토지의 규모도 중요한데, 여러 작은 토지들보다는 단일의 대규모 토지가 개발에 유리하다. 같은 규모의 토지여도 50평대 토지 10곳을 개발하기보다는 단일의 500평 토지 개발을 자연스레 선호한다. 한 곳을 개발한다고 치더라도 최소의 투입 비용(예를 들어, 최소 1인의 건설 관리자 상주)이 존재하기에, 50평 10곳 동시 개발의 총공사비는 단일의 500평 토지 개발보다 더 많다. 

정세권에게도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토지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지역이 매력적이었고, 이런 관점에서 삼청동, 가회동, 계동, 익선동 지역은 그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일제 통치가 이어지면서 조선의 귀족 출신들마저도 가세가 기울어 자신들의 토지를 대거 시장에 내놓았고, 결과적으로 토지 시장에서 물건(토지) 구하기가 쉬웠다. 실제 정세권은 조선 왕족의 종친 이해승 소유의 누궁동(익선동 166번지)과 고종의 서자 완화궁의 사저 (익선동 33번지)를 매입하여 한옥 집단 지구로 개발한다.1)

아래의 기사는 당시 조선 왕족 소유의 부지(광화문 소재 미술 공장)가 일본인에게 매도되었다는 소식으로, 이는 대규모 토지들이 토지 시장에 나타났음을 알려주는 방증이다.

 

▲ <동아일보>, '이왕가 미술공장 일본인에게 매도', 1922.02.03


다른 중요한 점은 부유층 부동산 매물은 은밀하게 거래된다는 것이다. 즉, 물건이 모든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공개되는 것이 아니라, 지인을 통해 자본력이 있는 일부에게만 정보가 제공된다. 성북동과 평창동 등 부유층 밀집지역에서 거래되는 물건은 매우 한정된 부동산 중개업소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지체 높은 조선의 귀족들이 본인의 토지를 부동산 시장에 매물로 내놓을 때 정보를 모든 대중에게 공표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자본가에게만 정보가 제공되는 것을 원했을 것이다. 이런 정보 전달은 자연스레 대면 접촉 기회가 많을수록 쉬워진다. 서로의 신뢰가 쌓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북촌 입성은 부동산 시장에 나온 대규모 토지 정보를 쉽게 알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지주 작업을 하기 위한 대면 접촉이 보다 쉽다는 점 등에서 디벨로퍼로서 당연하고 현명한 선택이었다. 

정세권 선생 첫째 따님 정정식 님(이화여대 명예교수)의 증언이다.

"제가 1921년 계동서 났으니까, 계동으로 바로 들어가셨던 것 같아요. 그때 계동에는 맹현동산이라고 맹정승 땅이 있었어요. 그 동산이 관리가 안 된 상태여서, 몰래 들어가서 동산에서 막 구르고 놀았어요." 

1) 구경하, 김경민 '1920년대 근대적 디벨로퍼의 등장과 그 배경'. <한국경제지리학회지> 제17권 제4호,  2014년.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8] 상경 10년 후 재벌이 되다.

그는 어떻게 10년 만에 부동산 재벌이 되었나?


1929년 <경성편람>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여러 분야의 대표적 인물들이 각 분야를 소개한 것인데, 나름 경성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경성은 조선의 수도이요. 삼십여만 시민이 사는 대도시일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조선의 심장이라 할 것인데 이때까지 완전히 소개한 책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누구나 유감으로 여기던 바, 이번에 경성 인사동에 있는 홍문사 편집부에서는 <경성편람>이라는 책을 발행하기로 계획하고 여러 학자의 원조와 각 신문사 편집국장의 고문 하에 가장 완전히 경성을 소개하기 위하여…." 

<경성편람>은 경성을 최초로 소개하려는 목적이 있었기에 신문 등의 주목을 받았다. 당대 학자와 신문사 편집국장 등이 논의를 거쳐 대표적 인물을 섭외하고 내용을 검토했다. 

교육, 종교, 언론, 금융, 실업, 과학(발명), 의료, 법조, 건축 등 총 열아홉 분야를 정한 후, 각 분야의 대표적 인물들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교육계에는 최두선(대한적십자사 총재, 경성방직 회장), 유억겸(연희전문 총장, 문교부 장관), 김활란(이화여대 총장), 언론계에서는 송진우(동아일보) 등, 법조계에서는 김병로(초대 대법원장) 등이 참여했다.

그리고 건축계(건축설계가 아닌 부동산/건설업)를 대표해 건양사의 정세권이 참석했다. 그는 당시 '건축계로 본 경성‘이라는 글을 썼다. 정세권의 나이 41세, 경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건양사를 설립한 지 불과 10년도 안 된 시기였다. 그사이 조선을 대표하는 부동산업계의 거두로 성장한 셈이다.  

그의 회사 건양사가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지표들은 그 외에도 많다. 1936년 <매일신보>는 신흥 자본가로 성장한 인물들을 조명하는 시리즈 '나는 어떻게 성공하였나'를 연재하였다. 5회차 연재에서 부동산/건설업계를 대표하여 정세권과의 인터뷰가 실렸다. 

▲ <경성편람>(홍문사, 1929)

"최근 10년 전부터 시골서 소위 견딘다는 사람들(약간의 자산이 있는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와서 서울 장안에는 그들이 사는 산뜻한 새 집으로 군데군데 난데없는 새 부락을 이루었습니다. (…) 이런 경향으로 장안에 갑자기 집 장사가 많이 생겼고 또 그 집 장사들이 돈푼도 족히 모았습니다만, 그 중에도 (정세권의) 건양사라면 아낙네들까지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이름이 났습니다."

일반 아녀자들까지도 정세권의 건양사를 알 만큼 대중들에게 이미 보편화된 회사라는 것이다. 이는 매우 대단한 일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인 상류층 또는 유학 출신들이 살고자 하였던 주택은 한옥이라기보다는 문화 주택이라 불렸던 서양식 주택이었다. 근대적 디벨로퍼들이 건설했던 한옥은 규모가 매우 작은 주택을 대규모로 지었기에, 현재의 다세대 다가구 정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브랜드가 있는 다세대 다가구 전문 건설 및 임대 업체를 알지 못한다. 대기업 건설 회사마저도 자체 브랜드(삼성의 래미안, 대림산업의 e편한세상 등)를 들고나온 것은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이후였다. 하지만 지금부터 근 100년 전 일반인들에게 주택 브랜드를 각인시킨 디벨로퍼가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소설 속에서 발견된다. 이태준의 소설 '복덕방'(<조광>, 1937년)은 1930년대 서울 한 복덕방을 배경으로 세 노인의 삶을 담고 있다. 등장인물 중, 서 참의는 복덕방의 주인으로 가회동에 큰 한옥을 가진 꽤 잘 사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인물이 어떻게 돈을 벌었고, 현재의 삶은 어떤지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참의는 참의로 다니다가 합병 후에는 다섯 해를 놀면서 시기를 엿보았으나, 별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이럭저럭 심심파적(심심풀이)으로 갖게 된 것이 이 가옥 중개업이었다. 처음에는 겨우 굶지 않을 만한 수입이었으나 대정팔구년 이후로는 시골 부자들이 세금에 몰려, 혹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만 몰려들고… 몇 해를 지나 가회동에 수십 칸의 집을 세웠고 또 몇 해 지나지 않아서는 창동 근처에 땅을 장만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중개업자도 많이 늘었고 건양사 같은 큰 건축 회사가 생겨서 당자끼리 직접 팔고 사는 것이 원칙처럼 되어 가기 때문에 중개료의 수입은 전보다 훨씬 줄은 셈이다."

경성에 인구가 급증하면서, 추가적인 주택 수요가 붙어서 중개업 활황으로 초기에 돈을 좀 모았으나, 현재는 중개업 자체의 수입이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 정세권의 건양사 같은 근대적 디벨로퍼들이 한옥 판매자로서 구매자와 직접 매매를 하거나, 혹은 그들이 한옥을 직접 임대하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부동산업을 세밀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구조로 산업이 움직인다. 디벨로퍼가 개발에 대한 전체적인 구상을 하면, 금융권 자금을 수혈 받아 건축 설계 회사에서 설계를 그린다. 그리고 건설 업체에 시공을 맡긴다. 시공이 완료된 후, 부동산 중개업을 통해 일반인에게 분양하거나 임대를 맡기는 구조다. 

위의 문맥을 살펴보면, 부동산 중개업 시장에 별도의 중개 업자들이 존재했으나, 중개업 시장에 건양사 등 근대적 디벨로퍼가 영역을 확장한 것으로 읽힌다.

건양사는 디벨로퍼이면서 자체적으로 설계팀과 시공팀을 갖춘 건설 업체임과 동시에 중개업 영역까지 확보한 부동산의 모든 영역을 수직적으로 통합한 회사였다. 그리고 부동산 관련 모든 영역(개발/기획, 설계, 시공, 중개)을 통합한 회사를 정세권은 건양사 설립 10년 안에 마무리했고, 자체 브랜드를 일반인에게 각인시켰다.

이외에도 자체 금융을 통해 일반인에게 융자를 한 부분 그리고 건양주택이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신문 광고를 통해 마케팅한 부분에 관한 설명은 추후 연재에서 한다.

1) '경성편람계획 경성을 소개코저 홍문사에서 계획',<동아일보>, 1929년 7월 26일.
2) '나는 어떻게 성공하였나 (5)',<매일신보>,1936년 5월 21일.
3) 이태준, '복덕방', <조광> 1937년 3월호 , 1937년, 68쪽.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9] 경성 최대 디벨로퍼, 건축왕 정세권의 시대

집값 폭락 시대, 그는 어떻게 돈을 벌었나?


1936년 <매일신보>는 성공한 사업가들의 성공 사례를 시리즈('나는 어떠케 성공하얏나?')로 연재하였다. 그 중 다섯 번째 연재에 정세권의 인터뷰가 실렸다. 여기서 눈여겨야 할 부분이 있는데, 바로 제목이다.


'집값 폭락 시대의 무시무시한 그때를 말하는 건양사주-정세권'


연재 초기, 1920년대 이후 경성의 인구는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일반적 상식으로는 인구라는 주택 수요가 증가하였기에 집값 역시 지속해서 상승해야 함이 마땅할지 모른다. 즉 1920년 이후 집값은 지속해서 인구 성장에 걸맞게 올라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기사는 '집값 폭락 시대의 무시무시한 그때'가 있었음을 전한다.  

  

주택 시장에서는 가격이 끝없이 상승하거나 끝 모르게 떨어지는 상황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2000년대 중반, 집값은 끝없이 오를 것이라는 믿음이 팽배하였다. 하지만 2008년 말 전 세계를 휩쓴 금융 위기의 순간, 집값은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일부 지방의 경우, 2012년 서울의 경우 2013년 말을 기점으로 반등하여 지금은 상승세로 접어들었다. 어느 국가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주택 시장은 사이클이 존재하는 시장이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상황이 100년 전 경성에서 벌어졌다.  

  

▲ '나는 어떠케 성공하얏나(5)', <매일신보>, 1936년 5월 21일.

1936년, 기자와 정세권의 인터뷰내용이다.

 

정세권 : 저는 원래 고성의 한 부락에서 살았는데, 그 때부터 가옥에 대한 취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후 대정 8년(1919년) 상경하여 1년 동안 여러 가지 준비를 한 후, 그 이듬해 (1920년)부터 가옥을 건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에게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그 후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는 동안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자:  한 번도 손해를 아니 보셨다니, 대정 8년(1919년) 호경기 때 좋은 집 한 칸은 400원까지 올랐지만, 2년 후 대정 10년(1921년) 집값은 한참 폭락하여 180원까지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정세권: 아마 선생님 생각에는 이 물음에 대한 저의 대답이 아마 곤란하리라 여기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중심은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한 칸에 400원하던 주택 가격이 반값 이하로 폭락하여 장안의 집장사는 모두 손해를 보았으나, 저는 유독 절대로 한 푼도 손해 보지 않았습니다. (웃으면서)

 

(<매일신보>(1936년 5월 21일 '나는 어떻게 성공하였나 (5)')

  

이 인터뷰에는 건양사가 빠르게 성공하였는지에 대한 힌트가 담겨 있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 합병한 후 조선 경제력을 장악하기 위해 회사령을 공표하였다가, 1919년 독립운동 이후 문화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1920년 3월 회사령을 폐지한다. 회사령은 회사 설립을 허가하는 제도이기에, 허가권자인 일제는 조선인 회사 설립을 불허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여러 지표는 조선인 회사들의 출현이 1910년대 매우 미약했을 보여준다. 하지만, 회사령 철폐로 회사 설립이 신고제로 바뀌면서 조선인 회사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부동산개발업계에서도 당연히 회사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을 것이고, 건양사는 회사령 철폐(1920년 3월 폐지) 6 달 후인 1920년 9월 9일 설립되었다.  

  

1920년까지의 호경기 동안, 건양사를 비롯한 다른 주택 건설 개발 회사들은 큰 사업 기회를 거머쥐었을 것이다. 경성으로 인구가 몰리는 호경기 시절, 주택 개발 회사들이 큰돈을 버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회사의 저력이 나타나는 상황은 불황에 직면했을 때이며, 어떤 전략을 세워 탈출하느냐가 관건이다.  

  

2008년 이전, 부동산 호경기에 흥에 겨웠던 건설 회사들은 2009년 이후의 경기 장기 침체에 힘겨워하면서 건설경기 회복을 위한 대책을 무수히도 요구하였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 건설이라던 용산국제업무지구개발를 비롯하여 많은 대형 PF사업이 좌초했을 때, 건설 회사들은 불확실한 미래(불경기 혹은 경기 불황 등)에 대한 전략이 전무하였던 관계로 그들은 지속해서 특혜를 바랐다. 그리고 많은 건설 회사가 불황의 파고에 좌초하고 말았다.

  

1921년과 1922년의 경성 부동산 가격 대폭락은 살아남은 자에게는 어마어마한 기회였다. 경쟁자들이 시장에서 도태되었고, 살아남은 회사는 시장 지배자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시장 선도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세권의 건양사는 불황의 파고에서도 독특한 전략을 펼친다. 부실 자산의 즉각적 매도와 함께 시장 상황에 걸맞은 신규 개발 사업 진행과 이를 통하여 기존 부실을 축소해 나가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정세권의 증언이다.  

  

"한 칸당 300~400원에 팔 집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칸당 250원가량의 밑천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를 180~190원에 팔면 손해가 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이런 전략이 가능합니다.) 지은 집을 밑지고 판 대신에 뒤를 이어 즉시 한 칸에 170원에 집을 짓고 팔고, 10~20원쯤 남은 돈으로 은행 이자를 갚습니다."

  

위의 상황을 재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시장이 호황이었기에 시장에서는 한 칸당 300~400원의 주택 수요가 존재했다. 가격을 상대적으로 높게 책정할 수 있었기에 꽤 좋은 시설의 주택을 건설할 수 있었고 칸 당 250원의 비용이 들어갔다. 하지만, 갑자기 대폭락 상황이 닥쳐 어쩔 수 없이 주택 매매 가격이 칸당 180~190원이 된다면, 기존의 주택(시설이 좋은 주택)을 60~70원 손해를 감내하고서라도 즉각 매도한다. 21세기적 해석을 한다면, 증권 시장에서의 손절매이며, 부동산 부실자산(NPL : Non-Performing Loan)을 즉각적으로 처분하는 것과 같은 대담한 전략이다.

  

하지만, 부동산 개발 산업에서 NPL을 처분하고 어떤 사업도 하지 않는 것은 앉아서 끊임없이 손해만 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만약 시대적 흐름을 간파하는 통찰력(경성의 인구 폭증하기에 주택 수요는 지속된다. 현재의 흐름은 몇 년 후 분명히 바뀐다)이 있다면, 신규 개발 사업을 진행하여 회사 매출을 일으켜야 한다. 여기서 정세권의 전략이 빛나는 이유는 적정 주택을 적정 가격에 공급하면서 매출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집값이 비싸기에 여러 옵션을 집어넣은 좋은 질의 주택이 아니라, 수요자들에게만 필요한 적정한 기능이 있는 적정한 가격의 주택을 공급하는 것이다. 기존과 같이 칸당 250원의 상대적으로 좋은 질의 주택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평당 170원의 적정한 수준의 주택을 건설한다.

  

그리고 이를 6~12%의 마진을 붙여서 180~190원의 시장 가격에 판매한다. 그렇다면, 정세권의 건양사는 10~20원의 이익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기존 주택의 처분으로 인해 칸당 60~70원의 손해가 났을지라도 매출을 지속적으로 확대한다면 10~20원의 이익이 꾸준히 발생하기에 기존의 손해분을 메우는 것이 가능해진다. 더 나아가 그의 바람대로 시장이 과거의 가격으로 회복되어 칸당 400원이 된다면, 그는 10~20원의 이익이 아닌, 230원의 이익, 즉 원가 대비 130%의 이익을 건지게 된다.  

  

디벨로퍼가 부동산 개발 사업을 수행하는 경우, 사업 비용의 전부를 자기 자본으로 충당하는 일은 거의 없다. 미국과 같이 부동산 개발업과 관련 금융업이 발달한 경우, 일반적으로 디벨로퍼는 전체의 20~30%정도를 자기 자본으로 충당한다. 물론 이 경우도 자기 자본 내에 외부 투자자 자금을 이용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따라서 부동산 개발 사업에서 디벨로퍼와 금융권 간 신뢰 관계는 사업 성공에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는 부동산 하락기에서 더욱 빛날 수밖에 없다. 상승기에는 사업이 잘 되기에 은행 대출을 충분히 갚고도 남으나, 하락기에는 사업의 돈줄이 막히기 때문에 은행 대출을 갚을 여력이 없기 마련이다.

  

독특한 전략으로 건양사는 부동산 폭락기를 무사히 지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금융권과 강력한 관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렇게 몇 번 하는 동안에 일시 폭락하였던 집값이 다시 옛날 값대로 복구되었을 때, 170원에 지은 집을 복구된 시세 (칸당 400원)대로 팔아 그 전에 밑진 그만큼 복구하여 놓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이익은 못 볼 수 있습니다만, 손해는 보지 않고 그 대신 해마다 거르지 않고 꾸준히 집을 지어온 관계로 은행으로부터 신용을 얻어 금융이 민활하여 조금도 거리낌 없이 무시무시한 그때를 아무 일 없이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시장은 그의 예상대로 곧바로 상승세로 돌아섰다. 그의 또 다른 증언이다.

  

"대정 8년(1919년) 당시에 농촌 인구가 도시에 집중됨으로 다량의 주택이 필요케 되었는데, 당시 주택 가격의 폭등은 형언할 수 없는 바가 있어서, 현재(1940년)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물자가 상당히 있었기 때문에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물자 구입이 가능하였으므로 2, 3년간은 주택 경기 활황을 보게 되었으나, 그 뒤 대정 11년(1922년) 경에 이르러 대폭락을 보게 되었다. 이래 한동안 주택 가격은 저위(저위, 낮은 상태)를 유지하였는데, 대정 12, 13년 (1923년, 1924년)이래 다시 점점 높은 상태가 되어 소화 5년(1930년)에 다시 상당히 고가에 이르게 됩니다." 


(<매일신보>(1940년 1월 6일) '경기는 앞으로 어떠할까')

  

그의 전략(NPL 즉각 처분과 적정 가격의 적정 주택 대량 공급)과 함께 주택 시장이 다시 오를 것이라는 통찰력은 대폭락장에서 건양사를 굳건히 지켜냈다. 1923년 드디어 부동산 시장이 상승세로 돌아선 순간, 경성의 부동산 시장 내 다른 디벨로퍼들은 도태되어 있었고, 폭락장을 거치면서 금융권과 파트너십을 구축한 건양사는 시장의 선도적 위치에 올라선다. 경성 최대 디벨로퍼, 건축왕 정세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정세권의 건양사는 1929년 한 해 경성에서 지어진 한옥의 15~20%를 건설하였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10] 80년 앞서 대규모 주택 임대 사업 길 연 정세권

한국 건설社는 왜 최고 부자가 못 되나?


'뉴스테이'(민간 건설사가 중산층용 임대 아파트를 개발하고 운영하는 사업) 정책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정부가 저리 은행 이자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건물 건설 후 분양 위주 사업을 하던 민간 건설 회사가 대규모 주택 임대 사업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사실 해외에서는 민간 부동산 회사들이 중산층과 서민을 대상으로 임대 주택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사업이 매우 일반화돼 있다. 하지만 부동산 개발 산업이 낙후된 우리나라에서는 임대 주택 혹은 임대 아파트는 저소득 서민층에만 한정된 시장으로 여겨져 왔었고, 주된 역할을 하는 조직은 LH(토지주택공사)와 SH(서울도시개발공사) 등 공기업이었다. 

이는 매우 잘못된 편견이다. 중산층 혹은 서민용 임대 아파트 시장은 민간 디벨로퍼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시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는 대형 민간 임대 사업자가 존재할 뿐 아니라, 뉴스테이 정책이 주목을 받고 있다. (관련 기사 : "뉴욕 부자들이 임대아파트에 사는 이유는?") 

21세기의 우리에게 민간 기업의 임대 주택 개발 및 운영 사업 진출이 새롭고 신기하게 여겨질 수 있으나,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경성의 디벨로퍼는 민간이 운영하는 임대 주택 시장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지했고 실제 사업을 진행했다.

단순 부자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부자가 된 배경 

경성 주택 시장에는 1920년부터 1940년 사이 크게 3번의 사이클이 존재했다. 1910년대에서 1921년까지 급등한 주택 시장은 1922년과 1923년 사이 50% 이상 하락하는 대폭락을 경험한다. 1924년 이후 서서히 오르던 주택 시장은 세계 대공황기(1929~1933년)에 다시 내림세로 반전했다. 이후, 다시 폭등하기 시작한 주택 시장은 1937년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폭락한 후, 1939년 이후 다시 반등한 후 제2차 세계 대전의 파고 속에 횡보를 거듭하게 된다. 

1922~1923년 대폭락장에서 살아남은 정세권은 시장의 선도적 지위를 점유한 후 큰 무리 없이 사업을 영위했고, 1930년대 초반의 부동산 불경기 역시 별 탈 없이 견뎌냈다. 하지만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의 파도가 거세지는 시점에서 그는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준다. 민간 임대 주택 시장 진출이었다. 

"사변(1937년 중일 전쟁)으로 인해 집 장사가 받은 영향은 상당히 큽니다. 사변이 일어난 바로 뒤부터 집 매매는 중지 상태에 빠지고 집값은 약 20%가량 떨어졌으며, 새로 짓는 집은 전혀 없다시피 되었다가 서울의 주택난이 점점 심해졌기 때문에 금년(1938년) 여름부터 집값이 도로 올라서 지금은 사변 전의 가격과 거의 같습니다. 그러나 건축 재료가 꼭 10% 올랐기에 전과 같이 집 장사의 채산이 서지 않습니다. 

(…) 앞으로 집 장사는 도저히 전과 같은 채산을 바라기는 어려우므로 집을 새로 짖는 것은 일체 중지하고 그 대신 집세 받는 영업으로 전환할 작정입니다. 서울은 소위 대도시라고 하면서 기업적으로 집세 빌리는 업을 하는 사람이 없고, 소위 셋집이 증가한 것은 그 집이 팔릴 동안 임시로 들어있으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불편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앞으로 집 장사들의 나아갈 방침은 대규모의 조직적인 집세 놓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매일신보> 1939년 1월 6일자)  

▲<매일신보> 1939년 1월 6일자.


과거 그는 한옥 집단 지구를 개발하면서 집이 팔리기 전, 몇 개월의 단기간 임대를 놓곤 했다. 해외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의 편의를 봐주기도 했고, 자금이 넉넉하지 못한 서민에게 월부로 주택을 임대하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 선생이나 고투 이극로 선생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왔을 때, 그 인텔리들이 살 집이 없어서 쩔쩔맸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본인이 건설한 단지의 한옥 중 빈집이 있으면, 그런 분들이 와서 살게 했어요." (딸 정정식(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인터뷰, 2014년 1월) 

춘원 이광수는 정세권과 이후 남다른 인연을 이어간다. 정세권이 자신의 한옥을 건설해 준 것을 고마워하며 '성조기'라는 글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정세권의 딸들 중매를 서주었다. 고투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의 실무와 사전 편찬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주역이었고, 정세권은 그와의 인연인지는 모르나 조선어학회에 회관을 건설하고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이들과의 관계는 이후의 연재에서 한다. (필자)

1939년 그는 '서울은 소위 대도시라고 하면서 기업적으로 집세 빌리는 업을 하는 사람이 없기에' 시장에 경쟁자가 없음을 확인하였고 '그 집이 팔릴 동안에 임시로 들어있으라는 것이어서 (소비자에게) 그 불편이란 이루 말할 수 없기에' 수요가 존재함을 직감하였다. 또한, 건축비 상승으로 인한 채산성 악화로 주택 매매 가격은 한계가 있고 시장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주택 매매 시장 위축은 당연했다. 

이에 더해 전시 상황이어서, 부동산 시장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했다. 따라서 그의 선택은 주택 매매 사업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의 조직적 집세를 놓는' 즉, 대규모 주택 임대 사업이었다. 

제대로 된 디벨로퍼의 자질은? 

부동산에서의 수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부동산을 싸게 사거나 건설해 비싸게 판매함으로써 얻는 자본 수입(Capital Gain)과 부동산 매입 혹은 건설 후 다른 사람에게 임대를 주고 임대료 받는 임대 수입(Income Gain) 이다. 

부동산 상승기에는 자본 수입으로 큰 이익을 벌 수 있고 또 소유 후 임대를 통해서도 큰돈을 벌 수 있다. 그런데 부동산 시장이 침체기에 빠진다면, 자본 수입을 통한 이익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도 임대 수입을 통해서 나름의 수입은 가져갈 수 있다.

만약 부동산 디벨로퍼들이 분양을 통한 자본 수입만 노린다면, 그는 부를 축적할 수는 있어도 국가를 대표하는 부를 축적하기는 힘들지 모른다. 부동산이 비록 한 방을 노리는 사업이기는 하나, 진정한 한 방은 싼값의 매물을 사서 가치를 끌어올린 후 10배, 20배에 파는 것이다. 즉, 준공과 동시에 건물을 팔아 단기간 이익을 챙기기보다는 준공 이후 해당 지역과 건물의 가치를 업그레이드한 후 판매하는 것이 더 좋은 전략이다.

한국의 대형 개발 사업을 홍보하는 선전성 기사를 보면, 자주 등장하는 표어 중 하나가 '한국형 롯폰기 힐을 건설하겠습니다'이다. 롯폰기 힐은 일본의 대형 디벨로퍼인 모리빌에서 건설한 복합 개발 프로젝트(아파트, 오피스, 쇼핑몰과 문화 시설 등)다. 그리고 모리빌은 모리 미노루 회장(2012년 작고)이 부친과 함께 작은 개발 사업을 진행하면서 사업을 일궈 일본 최대의 디벨로퍼로 성장한 회사다. 

한 때 모리 미노루는 일본 최고의 부자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만약 그가 건물 준공과 동시에 건물을 팔아버렸다면 그는 일본 최고 부자가 될 수 없었다. 그의 주요한 전략은 일부 건물은 팔더라도 일부는 임대를 주면서 관리하고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즉, 자본수입과 임대수입을 모두 고려하는 전략으로 한 때 일본 최고 갑부로 등극했다. (<도시 개발, 길을 잃다>(김경민 지음, 시공사 펴냄)) 

따라서 제대로 된 디벨로퍼는 자본 수입과 더불어 임대 수입을 고민해야 한다.

2015년,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로부터 7년이 지나서야 그것도 정부의 정책 인센티브로 판을 깔아준 후에 대한민국 민간 건설 회사들(이들은 디벨로퍼가 아니다)은 민간 주택 임대 사업에 참여했다. 

1939년, 정세권의 건양사는 사회 경제적 흐름을 간파하고 민간 주택 임대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자본 수입과 임대 수입을 이해한 진정한 디벨로퍼였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11] 한 해 동안 170여 채 한옥 건설하기도

건축왕, 한 달 만에 한옥 37채를 만들다


일제 강점기 시절 정세권의 건양사가 일반인들에게 인식될 만큼 매우 큰 회사이었음에도, 해방 전 사세가 기울었기에 건양사의 매출, 이익 등 회계 및 기타 사업 자료를 구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건양사의 활동은 신문 자료 혹은 인터뷰 자료를 통해서 가늠할 뿐인데, 특정시기 신문에 소개된 분양/임대 광고는 대략의 사업지와 규모를 추정하게 해준다.

건양사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광고를 게재하였다. 특히 <조선일보>에 1929년 2월 7일부터 1930년 2월 16일까지 총 37회에 걸쳐서 집중적으로 광고를 내보냈다. 그에 비해 <동아일보>에 게재된 광고는 1930년 2차례와 1939년 1차례에 그친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1929년 이전의 광고, 그리고 1930년 이후 <동아일보> 1회 광고 이외에는 다른 시기에 게재된 광고는 찾아볼 수 없다.

아래는 1929년 2월 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건양사 최초 분양 광고이다. 
 

해당 광고는 매우 다양한 정보들을 제공한다. 

방매가(放賣家)는 한자의 뜻대로, '팔 집을 내놓는다‘는 것으로 현재의 아파트 분양과 일맥상통한다. 광고의 맨 마지막에는 건양사의 전화번호가 '광화문1319'라는 기록이 보이며, 건양사의 사업 분야(건축 청부 및 설계, 건축재료 무역, 토지 가옥 매매)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해당 광고에는 7개 지역 소재 방매가를 소개하고 있다. 관철동 120번지 신축 31칸 주택 2동, 낙원동 195번지 신축 31칸 주택 1동, 관훈동 197번지 신축 36.5칸 주택1동, 소격동 98번지 신축 17칸 주택 1동과 봉익동과 재동 소재 가옥에 대한 것이다. 이중, 봉익동과 재동의 개발은 규모가 상당하다. 봉익동 11번지는 열칸 짜리 규모 주택 9채와 재동 54번지는 10칸 내외 주택 9채를 분양하려고 한다. 그리고 창신동 651번지 토지 매각 예정에 대한 기록도 있다. 

예전 조병택 집 130칸은 금월 말에 허물어 닦을(훼별 毁撇) 터이오.
그 대지 1157평은 분할 매각 중인 바, 3월 중순이 지나도 매각되지 않는 것은 본사에서 방매가를 건축함. 

내용인즉, 조병택 씨(한일은행 창업주)가 소유하였던 130칸의 대저택을 건양사가 매입한 상태인데, 1929년 2월말에 저택을 허물고 전체 대지 1157평을 분할 매각할 예정이다. 즉, 기매입 한 토지를 분할해 일반인에게 분할된 토지를 판매한다는 것으로, 만약 3월 중순까지 토지가 매각되지 않는다면, 건양사에서 한옥 집단 지구를 개발하여 개별 한옥을 판매한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조선일보> 1929년 3월24일자 광고다. 


낙원동 195번지와 소격동 98번지 광고가 없는 것을 보면 두 지역의 한옥은 매각되었고, 봉익동 소재 한옥 역시 네채가 매각되었다. 하지만, 관철동, 관훈동, 재동 한옥은 매각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리고 창신동 651번지에 대해서는 다음의 광고를 하였다.

창신동 651 신건 와가 9칸 내지 12칸 37동. 
창신동 651 대지 분매 잔여 6백평. 

매입한 창신동 651번지 토지(1157평 ) 중 550여 평 부지에 9칸 혹은 12칸 크기의 한옥 37동을 건설하였고, 나머지 부지인 600여 평은 토지를 매각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위의 2 광고가 내포한 함의는 매우 대단하다. 

1929년 2월 한 시점에 벌써 서울의 7지역에서 건설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 중 3지역은 10채 내외 혹은 그 이상의 대규모 건축을 진행 중이었다. 봉익동 11번지와 재동 54번지 그리고 창신동 651번지는 근대적 디벨로퍼들의 대표적인 전략 '대규모 부지 매입 후 쪼개어 개발하기'가 그대로 녹아든 사업지다. 대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대저택을 매입하여 토지 자체를 매각하거나, 건물을 건설하여 매각한 것이다. 

또 개발 속도가 매우 놀라운데,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2월과 3월 광고를 문맥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창신동 651번지 나대지에 불과 한 달 사이 37채의 한옥을 건설한 것이다. 이는 대형 디벨로퍼로서 건양사의 회사규모가 어마어마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서울 시내 여러 곳에 동시다발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관리하는 능력과 더불어 매우 짧은 기간에 상당한 양의 주택을 공급하는 능력은 매우 놀랍다. 이는 경제학적 분석으로 규모의 경제를 이룬 것이라 볼 수 있고, 건양사의 경쟁력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규모의 경제를 이룩한, 즉 대량 생산이 가능한 사업 구조가 주는 이점은 비용 절감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두 명의 디벨로퍼가 각자 개발하는 주택에 한 채당 한 개의 화장실, 세면대를 매입해 시공해야 한다고 가정하자. 집 한 채를 개발하는 디벨로퍼와 동시에 일곱 지역 60여 채 가옥을 개발하는 디벨로퍼의 세면대 매입가격은 확실히 다르다. 대량으로 구입하는 경우, 가격 할인을 요구할 수 있고 당연히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는 종국적으로 건설 비용 인하효과로 직결된다. 

대저택 매입이 가능한 거대한 자본력을 갖춘 대형 디벨로퍼, 건양사는 대량의 주택공급을 통한 규모의 경제를 창출하였고, 이는 비용 절감를 통한 가격경쟁력 확보로 이어졌으며, 다른 디벨로퍼를 넘어서는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1929년에 신문에 실린 지역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관철동, 낙원동, 관훈동, 소격동, 봉익동, 재동, 창신동, 사간동, 수송동, 체부동, 안국동, 익선동, 계동 일대이다. 이 중에는 한두 채 건설도 있었으나, 크게는 10채에서 45채에 이르는 개발지들이 존재한다. 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1929년 한 해 170여 채의 한옥을 건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 1929년 한 해 건양사에서 개발한 지역과 해당 지역의 주택수 추정치.

  
당시 매년 공급된 주택은 대략 1700여 채였다.(<매일신보> 1931년 2월 21일자 '경성건물로 본 입체적 성장. 소화원년부터 오년 동안 신축가옥 7712동' 기사에 의하면, 1927년부터 1930년 사이 평균적으로 1700여 채의 주택이 신규 건설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헐리는 한옥들 위에 건설된 주택의 절반 이상은 일인 주택이었다.(<일제강점기 도시화 과정 연구>(손정목 지음, 일지사 펴냄, 1996년) 그렇기에 한인들의 주택 부족은 일인들보다 항상 심각했다. 신규 한옥의 건설 추정치는 850채 이하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1929년 건양사의 추정 개발주택수(170여 채)는 경성 전체 주택의 10%, 그리고 전체 신규 한옥의 20%이상을 차지하는 규모다. 

당연히 수많은 일꾼이 필요하였고 이를 관리해야 했다.

"부친께서는 매우 부지런하셨어요. 잠을 3시간밖에 안 주무셨어요. 명동 조지아백화점(구 미도파백화점, 현 롯데영플라자) 건너편 명동 입구에 '호라이아'라는 일본 빵집이 있었는데, 새벽 6시에 거기 가셔서 빵을 잔뜩 사오셨어요. 우유와 빵을 자신 후, 건양사 본사 건물 앞에 모인 200여 명 일꾼에게 너는 종로 몇 번지에 가서 미쟁이를, 너는 어디가서 뭐하고 이런 식으로 일을 직접 시키셨어요." (정세권 선생 친족 인터뷰, 2013년 10월)

건축왕 정세권은 그렇게 경성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12] 창신동, 부르주아 유토피아의 추억

18세기 중엽 런던 거리, 20세기 초반 창신동에?


'건축왕 정세권'이 한옥집단지구를 건설한 지역, 창신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정세권 선생에 대한 연재에서 다소 벗어난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는 창신동 소재 대형 한옥이 곧 헐리기 때문이다. 해당 한옥은 어쩌면 창신동의 잊혀진 역사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추억일지 모른다. 

지난 연재에서 소개한 정세권의 건양사 광고에는 아래 내용이 나온다. 

창신동 651번지. 예전 조병택 집 130칸은 금월 말에 허물어 닦을(훼별(毁撇)) 터이오. 그 대지 1157평은 분할 매각중인 바, 3월 중순이 지나도 매각되지 않는 것은 본사에서 방매가를 건축함 

현재의 창신동은 동대문 패션타운에서 판매되는 의류를 제작하는 대표적인 패션공장지대이자, 많은 저소득 서민층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따라서 창신동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작은 가내수공업 형태의 공장들과 다세대 주택들이 혼재한 서민주거지역이다. 실제로도 해당 지역은 다세대 주택들로 꽉 찬 모습을 보여준다.   

▲다세대 주택으로 꽉찬 창신동. ⓒ김경민


하지만, 시간을 100년 전으로 돌렸을 때, 과연 창신동은 현재와 같은 모습이었을까? 1910년대 창신동은 과연 서민집단지구였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 반증이 위 광고다. 

정세권 선생이 매각하려는 부지는 1157평에 이르는데, 실제 해당 부지는 2000평이 넘는다. 해당공고는 2181평 부지의 일부를 매각한다는 것이었다. 조병택이라는 당대 거부가 창신동에 어마어마한 저택에 살고 있었고, 그가 사망하면서 집안이 기울자 저택이 매물로 나왔고, 이를 정세권의 건양사가 매입, 한옥집단지구로 개발한 것이다. 

조병택은 창신동에만 대지 8곳 3622평, 밭 6곳 2153평을 소유하고 있었다. 해당 저택은 조대비(헌종의 어머니이자, 흥선대원군을 도와 고종을 즉위시킨 신정왕후로 추정)의 가옥을 한일은행 창업자이자 초대이사장, 조병택(한일은행은 여러 은행과의 합병과정을 거쳐 조흥은행으로, 현재의 신한은행에 이른다)이 1905년 이전 매입한 것이다. 창신동은 대왕대비가 살았던 지역이요, 은행장이 살았던 지역이었다.  

비단, 한일은행 창업자 조병택만이 창신동에 살고 있었던 당대의 거부가 아니다. 그보다 더 거부였던 임종상은 창신동에 아방궁을 짓고 살고 있었다. 임종상은 1935년 소득세액 기준 서울시 두 번째 부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三千里機密室 The Korean Black cham-ber', <삼천리>제7권 11호, 1935년 12월) 

임종상의 창신동 저택에 대한 기록이다. 

"동대문을 나서면 왼쪽 성 밑에 궁궐과 같이 우뚝 솟은 어마어마하게 큰 집이 있다. 이 집이 준공되던 당시에는 조선 안의 집으로 제일 굉장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골에서도 일부러 구경을 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고, 한참동안 한가한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었다.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이 집 주인은 … 임종상 씨가 십여 년 전부터 자기의 손으로 설계를 해두고 마음에 드는 집을 짓고… 육천칠백 평을 매평에 삼 원씩 이만여 원에 사서 재작년 팔월에 짖기를 시작하여… (중략) 그런데 이백육십여 칸이나 되는 큰 집을 한 바퀴 돌려면 우렁이 속 같아서 혼자는 찾아 나오기 어려울 것이요. 이 집안은 어디로(가)든지 유리같이 닦아놓은 복도가 있어서 버선에 흙 한 점 묻히지 않고 다닐 수가 있게 되었으며 … 비단병풍과 방장으로 둘러싸서 창밖에 겨울을 모르고 추위와 주림에 신음하는 민중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분에 넘치는 호사와 끝없는 행락으로 날을 보내기에 알맞은 집이다." '霄壤二相(소양이상) (一(일)) 富豪(부호)의住宅(주택)과 極貧者(극빈자)의住宅(주택)', <동아일보>,1925년 1월 1일 

"임 부잣집! 이크 말도 말아라. 서에는 윤대가리, 중앙에는 민대감, 동에는 임 부자 이것은 서울하고도 고명한 삼대가이다. 실로 아방궁 이상이니, 외견상으로는 감히 개구(開口)도 못하겠다(감히 구체적으로 나열도 못 할 정도다). 입만 딱 벌리고 '아구~ 굉장도 하구나' 할 뿐이다. 그저 그렇게 하고 하도 엄엄(嚴嚴)하야 들어가지도 못하고 왔다."'대경성 백주 암행기', <별건곤> 제2호, 1926년 12월 

그뿐이랴? 해동은행 중역이었던 김성환, 남작 작위를 갖고 있었던 이근호와 민영린,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도 존재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재벌로 평가받는 백남승(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의 부친)의 저택 역시 창신동에 있었다.

20세기 초반 창신동에 투영된 18세기 중엽의 런던 

18세기 중엽 이후, 런던이 산업도시로 변모하면서 자본가 계층은 하층민과 한 지역에 섞여서 사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런던을 벗어나(대략 마차로 출근할 수 있는 거리) 한적한 농촌취락에 넓은 빌라를 지으면서 살기 시작한다.(<부르주아 유토피아>(로버트 피시만 지움, 한울 펴냄, 2000년)) 

20세기 초반의 창신동은 18세기 중엽 이후의 런던과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신흥 자본가계층들이 한양도성 밖으로 이주하여 넓은 지역에 저택을 건설하면서 살고 있었다. 한국식 부르주아 유토피아의 발현이었다.  

하지만, 부르주와 유토피아가 조성됨과 동시에 빠르게 창신동의 성격은 매우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경성에 지방의 조선인들이 몰려들면서 부자와 토막민 같은 최하층이 동시에 거주하는 지역이 된 것이다. 비록 한양도성 밖이기는 하나, 경성 중심지 종로와 코 닿을 거리에 있었기에 토막민들이 입지하기에 적격이었다.   

"이같이 임종상(林宗相)) 장택상(張澤相) 조병택(趙秉澤) 등 백만장자의 대궐 같은 집들이 즐비한 부자촌에서 불과 수십 보 가량쯤 떨어져 있는 산 밑에는, 눈을 씻고 보아도 사람의 집 같아 보이지 않는 움집이 오육 채가 맞붙이고 있다. 이 집들의 터가 국유요 사정지외무번지라고 써 붙인 번지도 없는 집들이니 이 집에 들어있는 사람이 무슨 명망이 있을 리 없다. … 말벌이꾼, 지게꾼같이 눈이 쌓여 (돈)벌이가 떨어져 하루 한 끼 죽으로 입에 풀칠도 못 하고 온종일 얼음 언 거리를 떨며 헤매다가 길거리에서 얼어 죽을 수 없어 기어드는 곳이다. 그러나 흙방에 거적자리 몇 입을 깔았을 뿐이오. 이부자리도 제대로 된 것이 없으니 추위에 언 발을 뻗고 편안한 잠을 잘 수도 없을 것이다. 지붕을 하지 못하여 비가 새어 생털 조각을 얻어다 덮었고 창에는 눈보라가 들이치니 겨우 공석닙으로 가렸을 뿐이다.

그나마 이 두꺼비 집 같은 움집도 자기의 소유가 아니요, 한 달에 이 원씩 세를 내고 사는 것인데, 세를 못 내는 때에는 눈 덮인 거리로 쫓겨날 수밖에 없다 한다. 더군다나 놀라운 것은 세 칸쯤 되는 움직 한 채에 3가구가 들어 사는 것이다. 컴컴한 들창 속으로 병든 노파의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와 밥 달라고 보채는 어린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부서진 문틈으로 새어 나온다." '霄壤二相(소양이상) (一(일)) 富豪(부호)의住宅(주택)과 極貧者(극빈자)의住宅(주택)', <동아일보>,1925년 1월 1일 

이 창신동은 6.25 동란을 거치면서, 피란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그리고 현재는 패션산업의 집적지로 변모하게 된다. 하지만, 1960년대에도 창신동지역에 일부 저택이 존재하였음을 기억하는 증언이 있다. 

"경기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대 의과대학 입학하기 전, 형편상 과외를 가르쳐야 했습니다. 동대문에서 창신동으로 올라가는 길에 아주 큰 한옥들 몇 채 있었어요. 그 집에서 학생을 가르쳤죠. 매우 큰 집이었습니다." 김풍명 의학박사 (전) 대한피부과학회 회장 인터뷰, 2015년 10월 1일 

창신길 옆 대형 한옥 보존하라 

그리고 아직도 창신동의 과거 모습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몇몇 남아있다. 정세권 선생이 건설한 한옥집단지구 내에 몇 채의 한옥이 남아있음과 동시에, 시기를 알기 힘든 대형 한옥이 창신길 중간에 현존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부르주아 유토피아 창신동의 기억을 보여줄 수 있는 이 대형 한옥이 곧 헐린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부지는 종로구청이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가운데 주차장과 지역커뮤니티센터로 바뀐다. 

필자는 창신동이 뉴타운으로 묶여 있던 시기인 2013년부터 <프레시안> 연재와 저서(리씽킹 서울, 2013)를 통해 창신동 패션산업지구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뉴타운 해제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Urban Hybrid라는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여 2013년 창신동에 사무실을 개소하여 활동 중이기도 하다. 지역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들의 요구가 타당함을 나름 이해한다.  

창신동 지역은 주차할 장소가 없기에 주차장에 대한 요구와 지역커뮤니티 시설의 필요성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시설들을 마지막 남은 대형 한옥을 부수고 그 위에 지어야 할지는 고민해야 한다.  

현재 서울시는 역사도시 서울을 모토로 내걸고 있고, 한양도성을 유네스코역사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심사숙고해야 할 부분은 과연 한양도성 밖 창신동에 우리가 보여줄 것이 1950년대 이후의 기억 (패션산업지구) 밖에 없는지이다. 아직 제대로 된 연구가 없었기에 우리가 창신동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기억을 모르거나 잊혀 졌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창신동에 부르주아와 유토피아의 추억이 있었음을, 20세기 초반 산업도시 경성이 급변하면서 지역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고 있다면, 마지막 남은 기억은 보존해야 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한양도성이 유네스코에 등재되었을 때 노리는 효과는 주변지역 관광활성화가 아닐까. 외국인들이 한양도성에 올라가서 '아, 성벽은 이렇게 생겼구나'라고 생각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에서 커피를 마시든 점심을 하든 아니면 숙박을 하게끔 하여야 한다. 즉, 주변 지역 활성화에 도움이 안 되는 유네스코 등재는 무슨 보람이 있나? 그렇다면, 가장 한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그 정취를 다세대 연립주택에서 느끼게 할 것인가? 아니면 대형 한옥에서 느끼게 하는 게 맞나? 

현재, 서울시는 창신동에 봉제박물관을 건설하려고 한다. 단순한 봉제박물관 한 가지로는 사람들을 모으는 데 한계가 자명하다. 하지만, 주변에 역사적 자원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창신동 641번지 소재 대형 한옥, 대략 700여 평의 대지에 대형 한옥과 저택입구에는 60/70년대식 2층집이 있다. 오랜 기간 사람이 살지 않은 상태이다. 가장 번잡한 창신길에 위치하여, 지역 주민들을 위한 주차장과 커뮤니티시설로 개발될 예정이다. ⓒ김경민


교차보조를 통한 새로운 전략을 세워라. 

대형 한옥을 보존하면서 주차장과 지역커뮤니티 시설을 개발할 수 있고, 이를 위한 다양한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현재 중앙 정부와 서울시는 수백억의 예산을 투하하여 창신동에서 도시재생사업을 벌이고 있다. 해당 사업 목적 역시 경제활성화다. 그리고 이 경제활성화는 지역 산업 활성화와 더불어 패션/디자인을 매개로 한 관광산업 활성화 전략이 요구된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지역에 와서 돈을 쓰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핵심은 리테일(레스토랑과 상점)과 숙박이다.  

대형 한옥은 B&B 숙박시설로 활용하면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생긴 수익을 지역 커뮤니티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수익시설의 수익 극대화를 통해 비수익시설을 보조하는 교차보조방식 개발을 실행하는 것이다.  

또한, 도시재생사업의 몇백 억 예산 중 일부를 활용하여 다른 곳에 주차장과 커뮤니티 시설 건설을 요구한다면 이는 무리한 것인가? 

우리는 종로구 익선동 대형한옥지구 (역시, 정세권의 건양사가 건설한 지역이다) 바로 앞에 있던 오진암을 부수고 지역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비즈니스 호텔을 지었던 과오가 있다. 현재의 주차장과 커뮤니티 건설계획은 그것보다는 진일보한 것이다. 최소한 지역커뮤니티를 위한 것이기에.  


그런데도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역사성을 날려버리는 과오를 또 다시 범하지 않기 바란다. 오진암과는 비교도 안 되는 누추하고 작은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인 익선동 166번지(한옥집단지구)에 지금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하길 바란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13] 건양사, 경성 건설 40년의 역사

일제의 견제 "서울이 정세권 것이란 말이냐!"


정세권은 1920년부터 한옥 집단 지구 개발을 시작하여 1950년대 중후반까지 사업을 영위하였다. 하지만, 1940년 이후의 개발은 외부적 요인(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의 혼란)으로 인하여 왕십리 인근 지역에 한정된 듯하다. 따라서 정세권의 개발 사업은 주로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집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님 정남식 님의 기억이다.

"아버지가 어느 날 집에 오셔서 말씀하셨어요. '총독부가 불러서 들어갔더니 나 보고 왜 한옥만을 건설하느냐?고 묻더구나. 우선 무시하고 들어왔다.' 하지만, 중일 전쟁의 여파인지는 모르나, 총독부가 지속적으로 아버지에게 일식 주택을 건설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아버지는 일본 주택은 절대 지을 수 없다면서, 1940년부터 해방 때까지 주택 사업에 손을 대지 않으셨어요." (막내 따님 정남식 님 인터뷰, 2015년 10월 16일)

그리고 이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궤를 같이 한다. 일제는 1940년 11월 20일 '택지 건물 등 가격 통제령'을 발포하였다. 통제령은 모든 택지와 건물 가격을 1939년 9월 18일을 기준으로 통제 통결시키는 것이었다. 이의 후폭풍은 상당하였다. 시장 거래 가격을 거의 1년 전 수준으로 동결시켰으니, 매매 시장의 위축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거래가 중지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주택 구매자가 1940년에 주택을 높은 가격에 샀다면 손해를 보고 작년 가격으로 살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비록 매매 시장은 위축되었다 하더라도, 지방 인구가 여전히 경성으로 진입하고 있었기에 임대 시장은 매우 활황이었다. 굳이 주택을 팔지 않아도 집을 세놓아서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주택 개발 업자 입장에서는 주택 건설 채산성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일 전쟁의 여파로 건설 자재 가격이 상승하였기에 주택 건설 가격의 상승은 불가피하였으나, 가격 통제령으로 말미암아 주택 매매 가격 인상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손해를 보고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고, 이러한 사업성의 악화로 인해 디벨로퍼들은 주택 공급에 나설 수 없었다. 
  

▲ "신축 가옥은 많으나 주택난은 여전 심각"(<매일신보> 1940년 11월 23일).


그리고 정세권은 개인적으로 조선총독부의 감시망 하에 있었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다른 디벨로퍼에 비해 더 좁았다. 조선물산장려회 활동, 신간회 참여, 그리고 조선어학회 후원 등으로 그는 일제의 요주의 리스트에 있었고, 특히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상당한 재산을 일제에 빼앗겼기 때문에 사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왜정 말기, 뚝섬 일대의 큰 토지를 빼앗긴 후 가세가 기울었어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큰 집을 나와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가야 했을 때, 옆 집 사람들이 신기한 듯 우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정세권의 딸 故 정정식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인터뷰, 2013년 10월 4일) 

1920년대와 1930년대, 건양사의 황금기 시절, 정세권 선생의 개발 지역은 청계천 이북 경성 지역의 대부분과 경성 외곽 지역(오늘날로 보자면 교외 지역 개발)에 걸쳐 넓게 분포한다. 그의 증언을 따르자면, 건양사는 한 해 300여 채의 가옥들을 개발하였다 한다. 근 20년에 걸쳐서 6000여 채를 건설하였다면, 이는 상당한 규모다. 1920년대에는 경성 내 신축건물의 20~30%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정세권은 본인이 건설한 한옥 주택의 품질을 체크하기 위해 한 지역에 한옥 집단 지구를 개발하면 온 가족이 이사를 하여 그 집에서 일정 기간 거주하였다. 실제로 집에 살면서 집의 하자 등을 고치고 품질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정세권의 손녀 김재원 교수의 증언이다. 

"할아버지께서 집을 계속 새로 지으셨기 때문에 정말 자주 이사를 다니셨어요. 새로 입주한 집을 외할머니께서 손보시곤 했어요. 그리고 집이 이내 빨리 팔리곤 했기 때문에, 이사가 매우 잦았습니다. 

어머님(故 정정식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께서는 계동에서 출생하셔서 봉익동과 가회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고 1928년께 소학교(교동 소학교) 들어가실 때에도 가회동에 사셨다고 하십니다. 당시 가회동은 아직 동네가 형성되지 않았던 곳으로 허름한 오래된 한옥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후 소학교 재학 시절에 익선동과 낙원동(3층집)에 잠시 사시다가 1934년 이후 이화여고에 다니실 즈음 다시 가회동 양옥으로 이사하셨다고 합니다. 

이화여고에 다니는 동안 다시 서대문(적십자 병원부근)에 사셨고, 다시 가회동으로 이사하였다가 서대문(죽첨동 : 옛 인창학교 부근)에 사시는 동안 이화여전(1938년께)에 입학하셨다고 합니다. 이전에 다니시는 동안 다시 가회동으로 이사하셨다가 결혼 당시(1949)에는 왕십리로 나가계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전쟁 말기에 가운이 많이 기울어졌었겠지요." (정세권의 손녀 김재원 교수 이메일 인터뷰, 2015년 9월 10일)

위 증언에는 빠져 있지만, 정세권은 한일은행 창업주이자 대부호인 조병택의 저택을 매입하여, 해당 부지에 한옥 집단 지구를 1930년대 초반에 건설하였고, 가족들이 함께 창신동에 잠시 거주하기도 하였다. 또 정세권은 혜화동과 성북동 일대에도 대량의 한옥 집단 지구를 건설하였으며, 아들 내외가 그 지역에서 거주하였던 기록이 전한다.

비록 건양사가 어느 지역을 개발하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하더라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신문의 분양 광고, 실생활 잡지에 나왔던 분양 광고와 건양사 회사 주소지 그리고 가족의 증언과 등본상 주소를 역추적하여 종합적으로 건양사의 개발 지역을 지도화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해당 지역 전체를 개발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경성 대부분의 지역을 책임지고 있다. 더군다나, 광고와 가족의 등본상 주소에 나와 있지 않은 개발 지역이 충분히 있다는 추정할 수 있기에, 정세권의 개발지는 최소한 이 이상일 것이다.

▲ 그림 2, 건양사 개발지.


건양사 경성 개발의 규모와 방식이 함의하는 도시 개발/계획사적 의미는 필자의 견해로는 상당하다. 건양사의 사업 유형과 개발 방식은 미국 교외 주택 단지의 선구자인 레빗 사에 필적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본격적인 교외화로 접어든다. 고속도로의 건설, 저렴한 주택 구입 모기지 등 여러 이유로 중심 도시에 모여 살던 백인들이 교외 지역으로 주거지를 이주한 것이다. 교외 지역으로 이주하려는 주택 수요가 폭증하자 이에 걸맞춰 대규모 디벨로퍼들이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레빗타운이라 불리는 거대한 교외 지역 주택 단지를 개발한 레빗(Levitt & Sons, Inc) 사이다. 레빗 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윌리엄 레빗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로 군인들을 위한 주택의 대량 건설 시스템을 경험하였고 이를 실제 거대 주택 단지 개발 사업에 적용하였다. 

즉, 규격화된 디자인과 건설 부품의 사용, 일부 공장에서 제작된 건설 자재의 이용, 잘 짜여진 공정과 분업 체계의 적용 등을 주택 건설에 적용한 것인데, 이는 포디즘적 생산 양식을 부동산 개발에 적용한 첫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매우 짧은 기간에 대량의 주택을 건설한 것이다. 예를 들어, 롱아일랜드 소재 레빗타운에 개발된 주택 수는 무려 1만7000여 채에 이르며 이는 가장 큰 주택 단지 개발로 여겨진다.(Peter Hall, [Cities of Tomorrow]Blackwell Publishers, 2001, pp.320-322) 
  

▲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레빗타운.


아래 사진은 1975년 항공 사진에서 보이는 동대문 북쪽 창신동 지역이다. 창신동 651번지는 앞서 설명한 거부 조병택의 아방궁을 매입하여 개발한 지역으로, 레빗타운과 스케일은 다르나 작은 규모에서 비슷한 모양새의 주택을 대량으로 건설된 흔적은 매우 흡사하다.
  

▲ 1972년 동대문 인근 창신동 한옥 집단 지구. ⓒgis.seoul.go.kr


하지만, 더 놀라운 곳은 돈암 지구(보문동 지역)의 한옥 집단 지구이다. 일제는 보문동 일대를 당시 경성 외곽의 뉴타운 개발 지역으로 꼽고 일본인들을 이주시키려 하였으나, 실제 개발은 조선인 디벨로퍼들에 의해서 개발되었다. 개발 시기는 1937~1940년이다.(김영수, 동대문 밖 돈암지구 주거지의 형성과 변천, 서울학 연구, 2009) 아래 모습은 시기적으로 미국의 레빗타운 건설 이전, 조선에서(포디즘을 고려했건 안 했건) 이미 레빗타운에 필적할 만한 규모의 주택 개발 단지가 건설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래 사진은 1980년도의 항공 사진이니, 1940년 당시에는 온 지역이 한옥으로 덮여 있었다. 보문동 지역에 정세권의 건양사가 개발한 부분이 있는지는 현재 아는 바가 없다. 

▲ 1980년 보문동. ⓒgis.seoul.go.kr


따라서 그 규모가 다르다고는 할 수 있으나, 인구 폭증의 경성 1920~1930년대 우리나라에도 포디즘의 대량 생산에 비견되는 역할을 한 디벨로퍼, 건양사가 존재하였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념비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의 개발이 시사하는 큰 의미는 디벨로퍼 정세권이 일제의 도시 계획에 정면으로 저항하면서 한옥 집단 지구를 개발하였다는 데 있다. 이에 대한 연재는 다음 회에 한다.

(정세권 선생님의 둘째 따님 정정식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피아노과)께서 2015년 10월 30일 소천하셨다. 

2013년 <프레시안> 연재를 통해 연이 닿아 수차에 걸쳐 소중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불과 몇 달의 신혼을 함께 한 남편이 한국 전쟁 시 납북되었던 끔찍한 기억을 들려주었을 때의 상심을 잊지 못한다. 연로한 가운데 정세권 선생님 개발 지역의 기억을 끄집어 내려고 노력하였던 모습에 대한 감사함은 글로 표하기에 너무도 부족하다.

고인은 부친이 집 장사로 매도되었던 점과 조선물산장려회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부분이 외면 받는 현실에 마음 아파하였다. 그리고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인해 정세권 선생님이 당한 고문의 기억에 힘들어하였다. <프레시안> 연재를 통해 정세권 선생님이 역사적으로 재평가 받기를 소망한다. 지면을 통해서 유족분들께 다시 한 번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필자))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14] 일제의 도시 개발에 저항하다

왕십리 토지 전쟁, 불붙다


정세권의 경성 개발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1920년대 개발은 공간적으로 사대문 내부 특히 청계천 이북(북촌 지역)에 집중된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4대문 외곽 지역(창신동, 서대문, 성북동 등)을 개발하였는데, 경성 외곽은 일종의 교외 지역 뉴타운/신도시 개발로 해석 가능하다. 그리고 동시에 사대문 내의 빈 공간을 개발하였다. 마지막 단계인 1940년대 이후의 개발은 왕십리 지역에 집중된다.

정세권의 경성 개발이 도시 계획사 측면에서 중요한 이유는 일본 강점기의 일제 개발 정책에 대한 정세권의 대처 방법/전략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선 연재에서 설명하였다시피, 일제는 일본인의 경성 이주를 원활히 하기 위해 2가지 전략을 세웠다. 첫 번째 전략은 일본인 주거주 지역인 청계천 남쪽 지역을 넘어서 조선인 공간인 청계천 이북 북촌 지역에 일본인 거주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일종의 도시 미화 운동을 벌이면서 시가지를 예쁘게 다듬는 작업을 하였다. 

두 번째 전략은 기 형성된 주거 지역을 밀어버리고 새로운 주거지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농지와 같은 공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뉴타운/신도시 개발 전략이었다. 첫 번째 전략이 192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시도되었다면 두 번째 전략은 여러 논의 과정을 거쳐 1930년대 이후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정세권의 도시 계획/개발에 대한 인식은 일본인의 청계천 이북 북촌 진출을 막는 것이었다.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의 북진을 막아야 한다"는 그의 인식은 한옥 집단 지구 형태로 투영되어, 북촌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작은 한옥들이 처마를 이어가며 어우러진 형태의 대형 개발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많은 조선인이 북촌에 거주할 수 있었고, 조선인의 북촌을 그나마 지켜낼 수 있었다. 

지속해서 일본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뉴타운/신도시 개발 전략은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도된다. 일제의 신도시 개발 전략은 서구의 도시 계획 이론 중 에버에저 하워드의 전원 도시 이론(Green City)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대표적인 예가 1937년의 대경성중심의 100년 계획이다. 이는 경성의 인구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수원, 인천, 금포, 개성, 의정부, 춘천, 이천, 김양장 등 경성 주변의 8개 도시를 전원 도시(신도시)로 개발한다는 계획이었다. 경성과 이들 도시는 경성의 남대문과 동대문, 광희문을 포함한 6개 문에서 시작하여 방사형 도로로 연결되고, 각 도시를 잇는 환상형 도로가 8개 도시를 서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매일신보> 1937년 2월 10일, 국토계획의 입장에서 '위성 도시' 건설 입안) 

▲ 대경성 중심의 위성 도시 계획(좌, <매일신보> 1937년 2월 10일), 에베네져 하워드의 Garden City 개념도(우, [Garden Cities of To-morrow](1902년). ⓒ김경민


이는 비록 계획 차원의 비전이었으나, 작은 스케일에서는 이를 차용한 개발들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일제는 서양식 주택들을 집단적으로 개발한 문화 주택 단지를 이미 이곳저곳에 개발하고 있었다. 이들 문화 주택 단지는 그들의 기반인 남대문 일대에서 용산을 거쳐 영등포와 흑석동으로 나가는 축선상에 많이 위치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 곳이 눈에 띄는데, 광희문 외곽 왕십리 지역이다. 

▲ 京城(現ソウル)の郊外住宅地形成の諸相. ⓒ이지은


정세권의 입장에서 경성의 개발 판세를 복기해보자. 종로 이북 북촌 지역에는 정세권을 위시한 많은 조선인 한옥 집단 지구 디벨로퍼들이 활동하면서 한옥들을 촘촘히 세운 형국이다. 그리고 남대문은 이미 일본인들에 선점되어 있었고, 일제는 이미 남대문을 지나 후암동을 거쳐 용산 그리고 현재 중앙대학교 인근의 흑석동까지의 축 개발 구상을 세웠고 실제 개발이 대단위로 행해졌다. 

제 아무리 조선인 갑부여도 해당 지역 부동산 개발에 뛰어드는 것은 무리였다. 북쪽은 지형적 조건이 맞지 않았고, 그의 관심권에 포착된 지역은 서대문과 동대문, 혜화문(성북동 일대), 그리고 광희문 외곽 왕십리 지역이었다. 정세권은 이 지역 일대를 실제로 개발하였는데, 동대문 일대는 과거 귀족층 주거 지역과 조선의 빈민층이 혼재한 지역이었고, 성북동과 서대문 지역은 조선인과 다른 민족들이 혼재한 성격의 지역이었다. 그러나 광희문 외곽 왕십리 일대 개발은 성격과 의미가 남다르다. 정세권과 일제(동양척식주식회사)가 정면으로 부닥친 곳이기 때문이다. 

정세권은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들은 모두 경성제국대학을 딸들은 이화여대를 다닐 정도의 수재였다. 그 중에서도 둘째 아들은 매우 특출 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30년대 초 경성제국대학 농과대학에 합격하였는데, 정세권은 이를 매우 기뻐하여 아들의 미래를 위하여 농장을 개발할 요량으로 뚝섬 일대 몇만 평의 부지를 매입하였다.

"당시 서울농대(경성제국대학 농과대학)는 정말로 들어가기 힘들었어요. 조선에 변변한 산업이 없으니까, 농업이 중요했죠. 그래서 농과대학에는 주로 일본인들을 뽑지 한국인들을 뽑지 않았어요. 둘째 오빠는 제일고보(경기고등학교)에서 전체 1, 2등을 하는 수재였어요. 너무 뛰어나서 조선인이지만 안 뽑을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무척 기뻐하셨고, 그 오빠의 미래를 위해 농장 자리로 뚝섬 일대를 많이 사셨죠." (막내 따님 정정식 님 인터뷰, 2015년 10월 4일) 
  
그리고 그는 뚝섬으로부터 현재의 왕십리 방향으로 토지가 나오면 매입하기 시작한다. 이 당시 정세권은 조선물산장려회 운동과 조선어학회를 지원하면서 일제의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오른 상태였다. 그런 그의 행동을 가족들은 매우 불안해하며 지켜봤다.

"우리 아버님이 갑자기 땅을 사시기 시작하셨어요. 건축을 하면서, 당시 잠화정(뚝섬) 부근을 사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보고 산보를 가라고 해서, 거기까지 걸어가기도 했었죠. 그 언덕에 있는 땅을 전부 다 사기 시작하면서 농사를 지었어요. 당시 어떤 일이 있었냐면, 동척(동양척신주식회사)에서 시내에서 왕십리까지 그리고 뚝섬 방향으로 땅을 사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아버님하고 경쟁이 붙었죠. 왜냐하면 우리 아버님은 일본놈을 못 들어오게 하려고 막은 거고. 일본은 우리 아버님이 점령을 하니까 그걸 막으려고 또 들어오고." (둘째 따님 고(故) 정남식 님 인터뷰, 2013년 9월 1일)

뚝섬 인근 지역 토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상당량 보유하고 있다는,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땅 소작농은 빚을 지고 쫓겨난다는 기사 내용이다.

"왕십리와는 다르나 교통상 연결이 되어있는 뚝섬으로 나가보자. 여기는 동대문에서 동뚝섬까지 가는 기동차가 있어 교통이 편해졌다. 뚝섬을 건너서면 채소밭이 전면에 널리어 있는 것이 주목을 끈다. 섬이라 토질도 채소 재배에 좋으려니와 경성 근교로서는 채소 재배가 다른 농사보다는 유리할 것이다. (…) 과거에 물류 중심지였으나, 현재는 그 위상을 찾아볼 수 없다. 재산이 있는 사람은 뚝섬을 떠나고 지금은 소작인만 남은 빈촌이 되었다. (…) 토지 소유 관계를 보면, 면내의 전답 면적 중 동양척식회사 땅이 절반이나 되고 그 외에도 다른 지역 거주 지주의 땅이 많아 이곳 주민들은 소작농을 한다. 그런데 동척 땅을 소작하게 되면 소작 계약은 (…) 조건이 박하기 짝이 없어 빚에 쫓기는 살림을 하는 사람이 많다." (<조선일보> 1931년 10월 6일, 대경성 후보지 선보기 순례 (7), 신작로 이외에는 보잘 것 없는 왕십리) 

이 왕십리 토지 전쟁은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다만, 당시 많은 사람이 왕십리 지역의 가치에 대해서 크게 평가하지 않았다. 경성 근교에 있는 빈민들이 몰려 사는 동네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세권의 왕십리에 대한 견해는 일반인과 달랐다.

"신당리 쪽은 말도 못할 만큼 초라한 오막살이 촌락이 널려 있는데, 몇 걸음 더 나아가 왕십리 쪽으로 나가면 역시 신당리와 대동소이한 초가집뿐이다. (…) 왕십리가 일천사백호 상왕십리가 일천일백오십호나 된다고는 하나, 아주 작은 집들이 많이 모여 있을 뿐이다. (…) 길만 신수 좋게 뚫려 있을 뿐이고 부근에는 시내에서 밀려 나오는 소시민의 집이나 늘어갈 뿐이다." (<조선일보> 1931년 10월 6일, 대경성 후보지 선보기 순례 (7), 신작로 이외에는 보잘 것 없는 왕십리) 

1930년대 정세권은 왕십리 일대 대량의 토지를 매입하고 실제 개발은 1940년대 이후 (해방 이후)에 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0년 이후, 태평양 전쟁의 양상이 심각하게 돌아가면서 전쟁의 와중, 주택 개발은 거의 중단되었고, 일제 압력으로 정세권은 개발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는 왕십리 일대 토지를 보유한 채 개발은 보류한 형국이었다.

1930년대 정세권의 왕십리 토지 매입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별 볼일 없는 토지를 매입하는 것이었고, 이는 그의 혜안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20년대 이후, 신문지상에는 경성 개발에 대한 일제의 논의가 종종 발표되곤 하였고, 미래의 대경성 개발 계획에 대한 큰 그림을 그가 이해하였던 것이다. 

일제의 경성 도시 계획에 영향을 준 에버에져 하워드의 이론의 핵심은 전원 도시와 사회 도시 이론이다. 전원 도시는 교외 지역의 뉴타운/신도시로 이해할 수 있고, 사회 도시는 여러 뉴타운/신도시들이 연합한 일종의 대도시권으로 볼 수 있는데, 여러 뉴타운들은 철도나 고속도로 등으로 연결되는 형태를 갖춘다.(Ebenezer Howard, [Garden Cities of To-morrow], 1902) 

실제로 일제의 뉴타운/개발 계획에 맞춰 남대문 외곽의 후암동 일대에 거대한 문화 주택 단지를 개발하였고, 왕십리 일대와 보문동 일대에 새로운 뉴타운 개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총독부 고시 제722호, 1936) 이는 하워드의 전원 도시 계획 이론에 입각하여, 후암동, 왕십리, 보문동 일대를 뉴타운으로 개발하고 이들 지역을 교통망으로 연결하는 계획이었다. 

만약 이것이 실현되었다면, 경성권 조선인들의 소재지는 경성 사대문 안과 일부 외곽 지역에 머문 채, 일본인들에 의해 둘러싸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제의 의도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는 후암동/용산과 왕십리를 연결하는 도로망, 즉 남산 주회 도로다. 일제의 도시 계획은 식민 도시의 측면에서 식민 계층인 일본인을 위한 계획이었지, 피식민 계층인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왕십리가 조선인들 타운이었다면, 일제는 굳이 남대문 외곽 지역(후암동/용산지역)과 왕십리를 연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제의 큰 계획 하에서 남산 주회 도로가 건설되는 것이었고, 이는 일본인 주거지들을 연결하는 목적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만약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왕십리 일대 토지를 대량 매입하였다면, 1940년대 왕십리 일대는 남대문 외곽 일본인 주거지의 연장선에서 개발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정세권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간의 왕십리 토지 전쟁은 도시계획/개발사적인 측면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는 일제의 도시 계획에 정면으로 저항했다.

▲ 남산주회도로 계획도(1937년). ⓒ국가기록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15] 안재홍과 동지적 연대를 맺은 건축왕

일제가 9번 투옥한 독립운동가, 누가 그를 지웠나?


1920년대 급격한 부를 축적한 정세권은 대(大)자본가로 성장하는 와중,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가 참여한 민족운동 관련 조직 중 공식적 기록으로 확인 된 것에는 조선물산장려회를 비롯한 양사원,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이 있다. 아래는 국가보훈처의 공식 기록이다.

"1923년 1월 조만식(曺晩植)‧안재홍(安在鴻) 등을 중심으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가 발기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서울 지회를 설립했다. 1930년 4월 조선물산장려회 서울 지회의 경리부 상무이사로 선출되고, 1930년 5월에는 중앙회의 경리부 상무이사로 선출되었으며, 1934년 중앙회 이사로 선출되어 회관건립‧강연회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 2월 자치론을 비판하고 절대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이에 적극 찬동하여 서울 지회에서 활약했다. 1930년 11월 신간회 서울 지회의 대회준비위원회에 김응집(金應集)‧홍기문(洪起文) 등과 함께 재정부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가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하면서 독립된 사무실이 없어 고난에 처하자, 1935년에 서울 화동(花洞)에 있는 2층 건물과 부속 대지를 조선어학회 사무소용으로 기증하여 조선어학회의 국어운동과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6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국립유공자 공훈록 6>(국립유공자공훈록편집위원회 엮음, 국가보훈처 펴냄, 1988년), 667~668쪽) 

그가 맡은 직책은 대부분 경리와 재무이사로 조직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서슬퍼런 일본 강점기, 거대 기업을 운영하는 자본가, 그것도 정부 인‧허가가 필요한 부동산 개발업의 자본가가 대놓고 여러 조직의 재무를 담당하면서 재정을 지원한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역할은 더욱 빛난다. 또한, 이러한 공식적 기록 이외에도 가족들은 그가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가 가족을 지원했던 사실을 증언한다.

"아버님은 또 만주동포구제회를 손수 설립하였다. 만주 땅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같은 동포 흉탄에 쓰러지신 김좌진 장군 유가족이 오셨다. 현지처이신 미망인과 명한, 철한이 남매와 그들의 이모, 나 선생이 함께 왔다." (<구름따라 바람따라>(정몽화 지음, 학사원 펴냄, 1998년) 

우리나라 최초의 법학교수이자 서울대학교 법대 초대학장을 역임한 최태영 박사(1900~2005년)의 회고다. (최태영 박사는 우리나라 상고사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1922년 조만식이 1차로 시작했던 물산장려운동이 일제 탄압으로 잦아든 뒤, 1929년 이를 재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경상도 사람 정세권이 내게 와서 이를 다시 일으켜 세워 보자고 했다. (정세권의 주장은) 여러 사람이 뜻을 같이 했는데, 일제가 주목하니 위험한 노릇이어서 법을 아는 내가 나서서 법망을 비켜가며 친일을 피하고 징역 안 갈만큼이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최태영, '광산이야기와 제2차 물산장려운동', <대한민국학술원통신>, 제144호, 2005년 7월, 4~9쪽)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1924년 법학사를 마치고 조선에 들어와 1925년 한국인 최초로 법학 교수가 된 최태영 박사에게 정세권이 접근하여 조선물산장려운동 재개에 협력을 부탁했다. 최태영은 1929년 정세권과 함께 물산장려회 상무이사로 활동을 시작한다. ('물산장려 정기대회', <중외일보>, 1930년 5월 19일) 

그와 함께 한 근‧현대사의 굵직한 인물 중, 특히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 인물은 민세 안재홍과 고루 이극로다. 이 두 인물은 납북과 월북으로 그 업적이 상대적으로 가려진 형편이나, 민세 안재홍은 1920년대 민족 언론의 사표였으며, 고루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최고역점사업 한글사전 편찬의 실질적인 기둥이었다. 

특히 민세 안재홍은 기농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 양사원,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 모든 활동을 함께 한평생의 동지였다. 

안재홍(1891~1965년)의 아호 민세(民世)의 의미는 '민중의 세상'인 만큼 그는 매우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였다. (<안재홍의 항일과 건국 사상>(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엮음, 백산서당 펴냄, 2010년), 9쪽) 

또한, 언론인으로서, 그리고 정치인이자 역사가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1924년부터 1932년까지 <조선일보> 주필 그리고 조선일보 사주를 역임하면서 기록적인 수의 글을 발표하였는데, 사설 980여 편과 시평 470편 등 1450여 편에 이른다. (<조선일보 사람들 일제 시대편>(조선일보사 사료 연구실 엮음,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2004년), 97쪽)

<조선일보> 활동을 개시하기 전 이미 독립운동에 가담한 대가로 3년간의 옥고를 치른 그는, 언론인으로서 <조선일보> 재직 시 감옥을 제집 드나들 듯하였다. 일본의 비인도적 처우를 비판한 사설('보석(保釋) 지연(遲延)의 희생', <조선일보>, 1928년 1월 21일), 일본의 중국 침략을 비판한 사설('제남사변(濟南事變)의 벽상관(壁上觀)', <조선일보>, 1928년 5월 9일), 신간회 총무간사로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 준비 발각 등으로 1928년 3차례에 걸쳐서 투옥되었다. 

1920년대 조선일보는 경영 사정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사주가 자주 바뀌었는데, 1924년 독립운동가 신석우가 경영권을 확보하면서 월남 이상재가 조선일보 4대 사장에 취임하였고, 이상재 선생의 사망으로 1927년 5대 사장에 신석우 그리고 1931년 6대 사장에 안재홍이 취임하게 된다. 안재홍은 조선일보의 경영이 어렵자 고향의 논밭을 팔아 신문사의 빚을 갚았고 직원들의 밀린 봉급을 지급했다고 한다. (<조선일보 사람들 일제 시대편>(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 엮음,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2004년), 101쪽)

건양사가 1929년과 1930년 <조선일보>에 광고를 집중적으로 게재한 것은 당시 조선일보의 경영 상황을 도와주려는 의도로 추측된다. 건양사는 <조선일보>에 총 37회에 걸쳐서 광고를 게재한 데 비해, <동아일보> 게재는 2차례에 그치기 때문이다. 또한, 이상재(신간회 초대회장 역임) 및 안재홍과 조선물산장려회와 신간회 활동을 함께한 동지적 인연 역시 크게 작용한 듯하다. 

안재홍은 사장에 취임한 지 1년 후 1932년 일제의 강압 때문에 경영권을 내놓게 된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의 독립운동은 지속하는데, 1936년 임정과 연락을 취하였다는 죄목으로 2년간 옥고를 그리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기농 정세권과 민세 안재홍, 고루 이극로에게 심한 고초를 안긴 것이었다. 특히, 감옥에서 안재홍과 이극로가 겪은 고초는 상당하였다. 일제는 안재홍에게 이극로를 직접 문초하라고 지시하면서 이극로가 대답을 하지 않는 경우, 이극로의 뺨을 때리라고 강요하였다. 안재홍은 이를 단연코 거절하였고, 그 결과는 모진 고문이었다. (<다사리 공동체를 향하여 : 민세 안재홍 평전>(정윤재 지음, 한울 펴냄, 2002년), 71~72쪽)


조선물산장려회와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 여러 민족운동에 기농 정세권과 민세 안재홍이 함께 참여한 점은 의미하는 바가 상당하다. 1920년대 새롭게 성장한 신흥 자본가와 언론인이 함께 합작하여 주도한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정세권은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민족운동 조직의 재무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고 안재홍은 자신의 미디어역량을 활용하여 민족운동의 취지를 설파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는 민족 자본가과 민족 언론인 간의 협력을 통한 민족운동이라는 측면에서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아래 조선어학회 사진은 정세권과 안재홍의 친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둘은 사진 속 맨 앞줄에 나란히 앉아 있다.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생존자들을 찍은 1946년 사진.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정세권, 세 번째가 안재홍. ⓒ조선어학회


본 연재와는 결이 다른 이야기를 지면을 통해서 하고자 한다. 해방 이후 민세 안재홍은 우파 정치인으로 미군정하의 초대 민정장관과 제2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6.25 동란 이전 그의 행적을 놓고 본다면, 조선일보 사주 안재홍은 민족 언론의 사표요, 해방 공간 대한민국 건국에 전념을 다한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이를 기억하여 1989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6.25 동란은 그의 일생을 바꿔놓았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그는 서울에서 북측에 납북되었다. 그는 북한에서 독립유공자로서 대우를 받았고 1955년부터 북한에서 정치 활동을 하면서 평화통일 추진협의회 최고위원을 역임하였고 1965년 별세하였다. (<안재홍의 항일과 건국 사상>(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엮음, 백산서당 펴냄, 2010년), 149~150쪽) 

그런데 그는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아래의 발언을 하였다 전한다.

"1948년 미국인의 모략에 의하여 리승만 괴뢰 정권이 성립된 때도 미국인들에게는 버림을 받고 리승만 도당에게는 감시와 박해를 받으며 얼마 동안을 지내왔다." (<민주조선>, 1950년 7월 17일, <안재홍의 항일과 건국 사상>(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엮음, 백산서당 펴냄, 2010년)) 

위 발언만을 놓고 침소봉대한다면 그는 종북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의 삶 궤적을 볼 때 그는 기본적으로 우파 정치인이었으며, 그의 정치적 견해는 충분히 이승만 정권과 다를 수 있고, 또한 당시 북한군의 감시 하에 있었기에 본인 의도와 다른 발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필자와 다른 견해도 충분히 존재가능하다. 이유야 어쨌든 대한민국을 '괴뢰 정권'으로 칭한 점과 그가 북한에서 평화통일 추진협의회 최고위원을 역임한 점, 그가 북한에서 '애국지사' 칭호를 받은 점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세 안재홍은 우리에게 많은 숙제를 던져준다. 1989년이 되어서야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위대한 언론인 민세 안재홍은 납북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십 년간 평가가 미루어졌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연구, 특히 북한에서의 행적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최근이다. 연구가 상대적으로 최근이기에 그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줄이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역사에 대한 획일적 해석을 유도하는 국정화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국정화의 시대, 대한민국이 인정한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에서 애국지사 칭호를 받은 민세 안재홍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하고 기억해야 하나? 

그의 북한 행적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다는 이유로 혹은 하나의 잣대로 그를 평가할 수 없다는 이유로, 폭압의 일제 강점기 동안 9번이나 투옥 당한 독립운동가는 역사 속에서 지워져야 하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16] 조선 물산 장려 운동에 뛰어든 정세권

부동산 디벨로퍼가 독립운동에 돈 댄 까닭은?


1920년대 초반, 조선의 상공업은 불황과 불경기, 일본인 기업위주의 일제 산업정책으로 심각한 위기상황이었다.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경제사상>(방기중 지음, 연세대학교출판부 펴냄, 2010년), 83쪽)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1920년대 후반에서도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1920년대 조선의 암울한 경제 상황에 대한 최태영 교수(서울대학교 법학대학 초대원장)의 회고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YMCA 강당에서 내리 3년을 (물산 장려 운동 사업의 일환으로) 강연을 했다. 일제가 일본 상품만을 한국인들한테 강매하면서 한국인에게는 조그마한 제조업도 금했던 때였고 공업학교도 절대 허가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우리가 그 때 일본 상품에 세금을 매길 수 없었기에 조선 물산을 장려해야 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우리나라 것을 만들어먹자, 우리가 만든 물건만 사자, 우리 상품을 애용하자, 옷도 일본인이 만든 양복을 입을 수밖에 없다면, (하다못해) 우리가 만든 옷감이라도 쓰자고 할 만큼 연설 내용이 절실했습니다. 하다못해 가공이라도 우리가 한 것을 쓰자는 것이었습니다." (최태영, '광산 이야기와 제2차 물산 장려 운동', <대한민국학술원통신>(제144호), 2005년, 8쪽)

당시 조선의 상공업이 극도로 위축되었기에, 조선산 완제품을 사용할 수 없다면 원자재라도 조선산인 물건을 사서 쓰고, 심지어는 가공이라도 조선에서 한 것을 사용하자고 호소할 정도로 조선의 공업은 피폐한 상황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이러한 절박한 시대적 상황에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은 시작되었다. 물산 장려 운동은 1920년 조만식 선생의 지도에 평양에서 시작되었으며 1923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전국에서 들불같이 일었던 이 운동은 불과 반년 뒤인 1923년 여름을 기점으로 세력이 약화되더니, 1924년 4월 30일 개최된 제2 정기 총회를 분기로 완전한 침체기로 빠져든다.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경제사상>, 81~84쪽)

조선물산장려회에 참여하였던 한국일보 논설위원 유광렬의 기록이다.

"1923년 창립할 때에는 전국적으로 성세가 높던 이 운동은 그 후 대체로 침체한 상태였다. 한때는 학생이 (조선산) 수목교복을 입은 때도 있었고, 기생들마저도 수목을 입는 이가 있었으나 이것은 소수요, 대다수의 열정은 식어가는 듯 보였다." (유광렬,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의 전모 : 민족운동사 측면사', <인물계>(1권 2호), 1964년)

조선물산장려회가 급격하게 세가 위축된 것에 대해, 신용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일제의 훼방과 공산주의 계열의 반대를 이유로 들었다. 

"조선 민족의 국산품 장려 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나자 일본 경찰은 제지하고 나섰다. 그리고 집단 활동을 탄압하였다. (…)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격심해지면서 아울러 이 운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청년들의 비판과 공격이 격심해졌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운동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그러나 물산 장려 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자 나모 씨는 과격파의 교조성을 비판하고 민족 자본의 육성 없이는 경제적 민주 독립과 노동계급의 건전한 성장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반박하며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과격파들은 유산 계급에만 귀속되는 것이라고 집중 공격을 계속하여 광범위한 소비자 대중 국민을 이 운동에서 이탈시켰다. 일제 탄압과 마르크스 과격파의 양면협공을 받게 되자 의욕을 상실하여 더 이상 적극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1924년부터는 무기력한 체념에 빠져 겨우 간판만을 지키고 있다." (<재발굴 한국 독립운동사>(신용하 지음,한국일보사 펴냄, 1989년), 75쪽) 


조선물산장려회는 크게 4시기로 구분된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함께 활동하였던 초기(1923~1924년), 민족주의 계열 명망가 주도하면서 일부 상공업자들을 가세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중기(1925~1929년) 그리고 상공업자들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부흥기(1929~1932년), 마지막으로 상공업자들이 조직에서 이탈하자 시작된 쇠퇴기(1933~1937년)이다.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경제 사상>, 77쪽) 

아주 짧았던 초창기를 거쳐, 중기인 1924년 이후, 조선물산장려회는 과연 제대로 된 조직인가를 의심할 정도로 침체에 들어간다. 1924년 4월의 제2회 정기 총회 이후, 실무와 재정을 담당하는 이사회는 거의 열리지 못하였고, 극도의 재정난 속에 사무실 임대료를 내지 못하여 이곳저곳으로 전전하는 형편이었다. 또한 간간이 기관지를 만들어 배포하고자 하였으나, 원고난과 검열난, 인쇄난이 겹치면서 이마저도 힘든 상황에 봉착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의 침체 상황을 보여주는 다른 예는 조선물산진열관 건설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조선물산장려회는 조선 물산을 진열할 수 있는 조선물산진열관 건설을 추진하였다. 1928년 8월 조선물산진열관을 주식회사 형태로 만들고 창립비 1000원을 마련하자고 결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36 : 경제 운동>(오미일 지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펴냄, 2009년), 132쪽)

과연 조직 운영을 위한 이사회가 열린다고 한들, 사무실 임대료도 지급 못하는 조직이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정도로 재정 형편이 열악한 조직이 전국적 차원의 운동을 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우리가 역사 교과서에서 배우는 조선물산장려회는 전국에 지회가 설립된 대단한 조직이었다. 그렇다면 이 조직의 재정적 지원은 매우 탄탄하여야 한다. 그런데 1929년 이전의 조선물산장려회는 사무실 임대료도 내기 벅찬 패망 일보 직전의 조직이었다.

사무실 임대료로 내지 못하는 쓰러져가는 조직에 임대료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재력을 활용하여 조선물산장려회관을 건립하고 1층에 상품 판매소와 2층에 상품 진열소(일종의 디스플레이 쇼룸)를 갖추게 한 이가 있으니, 정세권이다.

사업가가 기부할 때 가장 눈여겨 보는 것 중 하나는 기부받는 조직의 안정성이다. 어느 정도는 안정된 조직이어야 기부금이 제대로 사용되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리멸렬한 형편의 조선물산장려회에 대한 정세권의 재정 지원은 어쩌면 상식 밖의 일일 수 있다. 더군다나 그는 한옥 집단 지구를 개발하는 디벨로퍼이지, 조선물산장려회가 근본적으로 양성하고자 하는 계층인 상공인 계층도 아니었다.

또, 앞서 이야기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조선의 상공업은 아주 작은 규모에 불과한 형편이었다. 일부 자본을 축적한 기업이 있었다 한들,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고 조선계 상공업의 대다수는 그야말로 소상인이요 소공인이었다. 따라서 정세권과 같은 대형 디벨로퍼에게 조선의 상공업이라는 영역은 본인 사업에 전혀 보탬이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상관도 없는 영역이었고 그리고 그가 돌보고자 하는 조선물산장려회는 일부 명망가들 위주로 돌아가는 간판뿐인 조직이었다. 

▲ 조선물산장려회 총회 광경,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정세권의 참여는 일제 식민치하 경제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시작된다. 일제가 시장 식민 정책을 통해 조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상황을 우려하였고, 일제는 조선인 회사들에 대한 강도 높은 감시를 실시하고 있었다. 

1929년 당시에 대한 정세권의 회고다.  

"1929년 일본은 우리 배달 민족을 자국의 대화(大和) 민족에 동화하려고 식민 식민(植民植民), 기지 식민(基地植民), 문화 식민, 원료 식민, 시장(市場) 식민, 모두 다섯 종류의 식민 정책을 강행하던 시기이다. 이러한 정책을 강행하는 시기이므로 경찰에서는 형사진을 두어서 회사마다 모임을 담당하는 형사가 있었다." 

정세권을 위시한 상공업자들의 가세는 조선물산장려회를 새롭게 변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명망가 위주의 조직에 새로운 계층의 수혈은 조직 재활성화의 새로운 모멘텀이었다. 정세권 평생의 동지로 1925년부터 물산장려회 이사로 활동해온 민세 안재홍(당시, <조선일보> 주필)은 당시 물산장려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고 새로운 돌파구를 상공업자들이 주도하는 실용적 노선의 가미에서 찾았다. 

"물산 장려 운동이 초기에는 식자층에 의하여 관념적인 운동으로 그 초기 과정을 지내왔었다. (현재는) 언젠가는 이루어져야 했을 조선인 상공업자들과 결합이 이루어져 그 일단의 진전을 보려하고 있다. 이는 필연이요. 또 당연한 일이다." (안재홍, '물산장려회의 일진전 – 그 회관 건축의 실현을 보고', <장산>(2권2호), 1932년, 2쪽)

정세권의 참여로 인하여 조선물산장려회는 이전의 재정 문제를 해소하기 시작하며, 도약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러던 조선물산장려회가 1927년부터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요인의 하나로 이사진이 개편되면서 새로 상무이사로 참여한 건축가 정세권이 적극적 재정 지원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세권은 조선어학회에도 회관을 지어 기증한 인물로서 조선물산장려회에도 회관을 신축하여 기증했으며, 새 기관지의 조선물산장려회보의 발행비용도 모두 부담하였다." (<재발굴 한국독립운동사>, 75쪽) 

정세권은 1929년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취임하면서, 물산장려회의 재정 문제를 단번에 해소해 주었다. 1929년부터 3년간 조선물산장려회 경상비와 기관지 발행 비용 등 재정의 상당 부분을 짊어졌고, 1930년부터는 전임상무로서 조선물산장려회 사업 전반을 총괄하기 시작한다.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경제 사상>, 113~115쪽)

1923년 기세를 올리던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이 불과 1년 만에 대침체기에 빠진 상황에서, 1920년대 후반 정세권의 지원과 실질적인 참여는 조선 물산 장려 운동 황금기의 도래를 의미하였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17] 조선물산장려회관, 북촌 상권에 충격을 주다

100년 전 서울에 옥상 정원이 있었다!


조선 산업전(産業戰)의 진영(陣營)으로 여겼던 물산장려회관은 조선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전시하여 생산열과 구매욕을 촉발하려 하였고(<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6 : 경제 운동>(오미일 지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펴냄, 2009년), 133~134쪽), 이의 일환으로 회관에서 개최된 조선물산염매시는 대중으로부터 선풍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당시의 기사다.

"조선물산장려회 주최로 우리 물산 애용을 장려하기 위하여 금월 4일부터 열린 조선물산염매시는 개시한 이래 2주일 동안 예상 이상의 성황으로써 한산한 북촌 상가에 큰 충동을 주었다 함은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동염매시의 계획은 일주일마다 새로운 물산을 출품하길 하였는데 미곡, 직물, 고무신, 비누, 화장품 등 일상 수요품은 수요자가 날로 증가함으로 부득이 계속 출품키로 되었는바, (…) 물품추인에 대한 일체 책임은 염매시 간사 정세권 씨가 지기로 되었다." ("조선물산장려회의 염매시 성황 수요자가 날로 격증", <동아일보> 1931년 11월 20일)

조선의 소상공인들에게 왜 염매시가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또 다른 기사다. 

"염매시는 일반 백화점과는 그 성질이 달라서 순전히 조선 물산만을 취급하는 관계로 조금이나 뜻이 있는 고객은 반드시 찾아오는 까닭에 출품자로서는 그 선전의 목적을 달할 수 있다. 지방으로부터 출품하는 우리물산생산업자도 점차 증가 중인데 동 염매시 간사 정세권 씨는 동 염매시 발전책에 대하여 더욱 노력 중으로 지방에 있는 우리 물산 생산업자 중에 아직 출품치 못한 사람을 속히 동 염매시 사무소로 신입하기를 바란다 한다." ("조선물산장려회 제4회 염매시각지에서 출품 답지", <동아일보> 1931년 11월 29일)

▲ 염매시 개시식 기사. ⓒ매일신보


위의 두 기사에서 충분히 알 수 있듯이, 조선물산장려회관의 설립은 물산장려회의 선전 및 판매 활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일종의 허브였다. 다양한 상공업자들이 상품을 진열할 수 있는 장소로서 역할을 하였고, 이를 정세권의 건양사가 도맡았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회관에서 팔 수 있는 물건을 모았고 진열관에서 전시·판매하였다. 즉, 생산과 판매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정세권이 구축한 것이다. 당연히 정세권의 건양사는 전사 차원에서 물산 장려 운동에 뛰어들었다.

"정세권은 김용기, 문용규와 함께 건양사를 설립하였다. (…) 정세권은 1920년대 건양사가 큰 이윤을 올리며 주주 90여 명, 자본금 20만 원의 기업으로 성장하자 이를 배경으로 물산 장려 운동에 본격 가담하였고, (건양사의 공동 설립자) 김용기가 신간회 회계 재정부장을 지낼 때 신간회 경성지회 재정부원으로 동참하였다. 건양사 경영진 모두 물산장려회 지원에 적극적이어서 김용기는 물산장려회 명예회원 및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경제 사상>(방기중 지음, 연세대학교출판부 펴냄, 2010년), 115쪽)

정세권은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을 보다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건양사와는 별개의 회사, '장산사'를 설립하여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을 전담시킨다.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의 하나인 <장산>은 장산사의 이름에서 연유한다. 정세권이 설립한 '장산사'와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인 <장산>이 동일한 명칭이라는 점은 정세권이 조선물산장려회의 중추적 역할을 했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증거다. 장산사는 생산업자가 진열관에 출품하지 않은 상품들 중 좋은 물건을 선별하여 위탁판매를 하거나 구입·판매하면서 품목을 다양화시켰다. (<한국 독립 운동의 역사 36 : 경제 운동>, 135쪽)

앞선 연재에서 설명하였듯이, 조선물산장려회관은 기부금으로 건립하려 하였으나 기부금이 걷히지 않은 관계로 정세권의 사비로 완공되었다. 그렇기에 본인 소유의 건물이 되었고 건양사는 전사적인 차원에서 조선 물산 장려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조선물산장려회 전무이사로서 그리고 건양사의 사주로서 정세권은 두 조직을 본인의 건물인 조선물산장려회관에 입지시킨다. 거대 기업의 수장으로서 그리고 본인이 후원하는 기관의 실질적 운영자로서 한 건물에 여러 조직들을 입지시키는 것은 조직 운영과 관리상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낙원동 300번지, 경성 최초 그리고 최대 부동산 개발 업체의 사무실과 조선물산장려회 사무실이 위치하였던 곳이다. 낙원동 300번지에는 당시 경성에 가장 높은 건물일 수 있다.

4층 높이의 건물의 1층은 조선물산장려회 물품을 판매하는 상점이 3분의 2 그리고 건양사가 3분의 1을 사용하였다. 2층은 조선물산장려회 회의실과 물품 전시관으로 사용되었고 3층은 정세권의 가족이 기거하였다. (<구름라 바람 따라>(정몽화 지음, 학사원 펴냄, 1998년), 44쪽)

낙원동 300번지 건물에 대한 유가족의 기억은 선명하다.

"4층짜리 건물 입구에는 아버님 개인 회사인 '건양사' 간판과 '조선물산장려회'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었어요." (둘째 따님 정정식 님 인터뷰, 2013년 10월 4일)

조선 물산 장려 운동과 연관은 되지 않으나 건축 또는 조경사적 의미가 있을지 모른 점은 해당 건물의 4층은 옥상정원으로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조선물산장려회에서는 20일 오후 4시 반에 낙원동 300번지에서 동회관 신축 기공식을 개최하였었는데 동회 이사장 이종린 씨의 식사와 정세권 씨의 설계보고가 있었고 내빈 측의 축사가 있었다는데 건평 28평 4층 건축으로 아래층은 동회 사무실로 제2층은 진열관 제3층은 일반의 식당 제4층은 옥상 정원으로 사용할 터이라 하며 늦어도 7월 15일까지는 낙성식을 하리라 한다." ("물산장려회관 7월 중순까지 준성", <매일신보>1931년 4월 22일)

옥상 정원이라는 개념이 대한민국에서 나름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 불과 근래의 일이다. 100년 전 낙원동 300번지 조선물산장려회 총본산의 건물 설계에는 시대를 앞선 기획이 들어 있었다. 

아래 사진은 4층 옥상 정원에서 찍은 정세권의 가족 사진이다.

▲ 그림 2. 정세권 선생 가족 사진.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18] 사라진 조선물산장려운동 총본산

"낙원동 300번지 부순다고 사진 찍으라니…"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총본산 낙원동 300번지에 대한 정세권 선생 가족들의 추억은 남다르다. 정세권 선생 가족들과 수차례에 걸쳐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가장 많이 그리고 생생히 들었던 부분은 낙원동 거주 시기의 기억이었다.

"1920년대 당시에는 계단이 있는 집이 귀해서 낙원동 300번지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와서 층층다리를 오르내렸다. 옥상에는 동생을 위해서 그네를 매었는데 아이들이 매일 모여들어 아버지가 시청에 이야기를 해서 파고다공원안에 어린이 놀이터가 만들어졌다. 

4층 건물입구 정문에는 아버님 개인 건축회사인 '건양사' 간판과 '조선물산장려회'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 (중략) ~ 2층에는 조선물산장려회 회의실이 있었다. 월례 모임이 있는 날에는 콩나물 무 대파 양지 곱창 쇠고기 등을 넣고 국을 많이 끓이는 날이었고, 조선물산장려회 회원님들이 모이는 날이었다. 

안재홍, 여운형, 김도연, 명세재 선생, 이극로 박사 등 어린 나이인데도 많이 들어서 귀에 익은 어르신네의 함자들이다."(<구름따라 바람따라>(정몽화 지음, 대구 : 학사원 펴냄, 1998년), p 44-46) 

"낙원동에 4층집을 지으셨죠. 벽돌로. 우리가 거기서 살 때, (아마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소련식 패치카를 개발하고 설치하셨어요. 벽돌이 전부 난로에요. 여름에는 안 땠지만, 겨울에는 거기에 감자와 고구마도 구워 먹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식 집에서 살았죠. 파고다공원 (현, 탑골공원) 북쪽 후문 왼편에 위치해서 파고다공원이 우리 집 마당같았어요."(둘째 따님 고 정정식 님 인터뷰, 2013.10.04)

꼭대기층이 비록 정세권 선생의 가정집이라 보여도, 사실 가정집 역할만을 한 것이 아니다. 조선물산장려회의 창고와 공장에 진배없었다. 

"1930년대 초에 우리나라에 수해가 발생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남도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때 우리 아버님이 남도 사람들 무명을 다 사들였어요. 그걸 3층집에다 전부 갖다 놓으셔 가지고 우리 집에서 옷을 지었어요. 조선의 농촌에서 짠 무명과 삼베를 트럭으로 가지고 와서 그걸 밤새도록 우리가 자르고 꿰맨 후에 이틀인가 후에 남도로 다 보냈어요. 저도 국민학생이었는데 그 때 하도 바느질을 해서 여기가 이렇게 해졌어요."(둘째 따님 고 정정식 님 인터뷰, 2015.09.01)

▲ 조선물산장려회 총회 광경.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비록 정세권선생의 첫째 따님은 당시 초등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였지만, 조선물산장려회와 관련된 활동인지를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 경성제국대학(인근)에 염색공장이 있었어요. 거기에 다니시면서 염색을 배우셨어요. 그리고 옷에 염색을 해서 입히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동국민학교 다닐 적에 무명에다가 물감을 들여서 감색 외투를 입고 다녔어요. 그런데 학교에 그걸 입고 가면 아이들이 놀렸어요. (교동초등학교는 당시 부유층 귀족자제들이 다닌 학교였다) 그래도 우리 아버님이 하시는 거니까 정말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어요."(둘째 따님 고 정정식 님 인터뷰, 2013.10.04)

"우리 집에서는 일본 물건, 일본 옷은 쓰지도 입지도 못했다. 아버님도 우리 형제도 다 명주나 무실명주 무명베에 검정 혹은 회색, 녹색 등 물감들인 한복과 양복을 입고 자랐다. 그래서 우리 어머님 손은 언제나 물감으로 물들여진 얼룩덜룩한 손이었다. 모시에도 분홍 진분홍 옥색 물감이 들여졌고, 동생 옷은 명주에 주홍색 빨간색 등 물감이 드려진 옷이었다. 당시 종로에 있던 독일물감 파는 집에 가끔 심부름을 간 기억이 있다. ~ (중략) ~ 교동국민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교문을 나오면 검정옷에 노란 소매를 달고 패랭모자를 쓴 분들이 광고를 돌렸다. 나는 그 뒤를 친구들과 함께 자주 따라 다녔는데, 광고지를 뿌리면 서로 많이 가지려고 한 기억이 있다. 하루는 (광고지를 뿌리는 분을) 뒤따라 가다보니 낙원동 300번지 우리가 사는 집으로 쑥 들어가기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 광고지에는 '우리 살림 우리 것으로'라고 쓰여져 있었다."(<구름따라 바람따라>(정몽화 지음, 대구 : 학사원 펴냄, 1998년), p.48) 

이어지는 당시 조선물산장려회 활동에 대한 가족들의 회고다.

"2층 건물 내 전시장에는 명주 무명베 삼팔 묵실명주 삼베 모시 생모시 나당 등 조선 땅에서 나는 옷감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옷감 이외에도 각종 조선물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장구 꽹과리 조선종이 갓 참빗 담뱃대 대소쿠리 유기촛대 실패 반짇고리 앗자무늬가 있는 예쁜 상자 등.

아버지 회사 직원들은 이 옷감으로 춘추양복을 만들어 입었다. 이런 옷감들은 아버님이 직접 각지의 특산품 산지를 찾아다니시며 사들인 것이다. ‘평양에 다녀왔다. 전라도에 갔다왔다’ 이런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그 당시 학생들 교복 옷감은 일본에서 가져오는 고꾸라지(小倉地)였는데 조선물산장려회에서는 ‘우리 살림 우리 것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학생들 교복을 국산으로 바꾸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 무명베 교복을 배재 경신 대동 휘문 같은 사립학교에서 먼저 입기 시작했다."(<구름따라 바람따라>(정몽화 지음, 대구 : 학사원 펴냄, 1998년), p.45) 

1923년 시작한 조선물산장려회에 대한 전국적인 호응은 불과 반 년 밖에 가지 못하였다. 하지만, 1929년 정세권 선생의 등장과 함께 물산장려회는 다양한 사업들 - 기관지의 지속적인 발행, 조선물산장려회관의 건립, 조선물품의 전시와 판매, 기부 및 사회사업 -이 일어났다. 

명제세 씨 등 사회명망가들로 인해 1923년부터 1929년까지 물산장려회의 명맥을 이어왔다고는 하나, 1929년 이후의 성과는 이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이 사업을 실질적으로 진행하였던 인물인 정세권에게서 기인한다. 1923년 초기 전국적으로 대단한 호응을 받았던들, 그 기세는 1년도 안되어 꺾였고, 1928년까지는 사업 자체를 진행할 여력도 안 된 조직이 정세권이 참여한 1929~1932년 사이 대단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정세권이 조선물상장려회를 실질적으로 탈퇴한 1933년 물산장려회는 다시 쇠락을 길에 빠져 1937년 해체된다.(<근대서지>(정용서 지음, 근대서지학회 펴냄, 2012년),, p.301)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나, 필자의 사견으로는 조선물산장려회의 부흥기는 정세권이 재정적 지원을 하고 실질적으로 이끈 시기와 일치하기에 조선물산장려회는 정세권 선생의 참여(건양사의 참여)가 없었다면 1923년 1년 짜리 운동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 조선물산장려회 광고.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만약 1929~1932년 사이의 성과들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조선물산장려운동에 대해 배웠을까? 가두행진을 하면서 우리 물건을 사자는 캠페인 활동의 의미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나, 실질적으로 생산을 독려하고 판매가 이루어지는 결과물이 없었다면 그 역사적 가치가 현재 우리가 기억하는 물산장려운동의 역사성에 미치지 못하였을지 모른다. 어쩌면 정세권 선생과 건양사의 역할이 없었다면, 물산장려운동은 현재와 같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지 모른다. 따라서 정세권 선생과 건양사의 역할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하며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필자의 주장에 비약이 있다고 치더라도, 최소한 부흥기를 이끈 정세권의 노력을 알려져야 하고 이는 유족들의 작은 바람이기도 하다. 

"명제세 선생님이 조선물산장려회를 이끈 수고를 하신 거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작 (물산장려회의 성공) 이 낙원동 300번지 그 4층 건물이었다고 생각해요. 온 집안 식구가, 그 때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인데도 가서 가위질을 했어야 했어요. 그렇게까지 온 집안 식구가 다 솔선했어요."(째 따님 고 정정식 님 인터뷰, 2015.09.01)

낙원동 300번지는 파고다공원 건물 아케이드를 건설하면서 파고다 뒷 지역을 정비할 때 헐린 것으로 추정된다. 정세권 선생에 대한 기억이 없듯이, 헐리는 순간 누구도 낙원동 300번지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정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낙원동 300번지를 부술 예정이니, 관심이 있으면 미리 와서 사진을 찍으라고."(막내 따님 정남식 님 인터뷰, 2015.10.04)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총본산은 이렇게 그 누구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명동에서 낙원상가아파트를 볼 때, 탑골공원 후문 좌측에 1930년대 물산장려운동을 조선전국에 재점화시킨 총본산이 있었음을, 역사적 붉은 벽돌 건물이 우뚝 서 있었음을 기억하였으면 한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19] 조선물산장려회의 성공과 위기의 건축왕

그가 손을 떼자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이 몰락했다



1929년 조선물산장려회 활동이 재점화할 조짐을 보이자, 일제의 방해와 탄압이 시작되었다. 최태영 박사의 물산 장려 운동 강연에 대한 회고다.

"(조선물산장려회) 강연하는 날이면 종로경찰서에서 조선인 사상범을 감찰하는 일본인 미와(三輪) 형사가 연단에 버티고 연사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칼자루를 잡았다 놨다, 연신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서 연설 내용을 감시했다. 등 뒤로 그런 움직임이 일어난 것 같으면, 과격한 말을 얼른 돌리곤 (순화시켜서 표현하곤) 하였다." (최태영, '광산 이야기와 제2차 물산 장려 운동', <대한민국학술원통신>, 제144호, 2005년, 8쪽)

정세권 역시 일제의 강압을 기억하고 있다.  

"(낙원동 300번지가 조선물산장려회 본점이 위치한 관계로) 관할 종로경찰서에서 본인을 호출하여 말하기를 '네가 조선 물산을 장려함은 실상 조선 독립 운동이 아니냐’고 힐난하였다. 본인은 이에 대해 ‘오사카 사람이 오사카 물산을 장려하고 아이치 사람이 아이치 물건을 장려하는 것도 오사카 독립이요 아이치 독립이라고 할 수 있나? 우리는 조선인으로 낙오된 조선 물산을 장려함이 경제 생활상 당연한 일이 아닌가'라고 강경히 주장하였다. 그러니 고등계 형사도 하등의 행동을 입증할 수 없어서 주의만 주었다." (유광렬,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의 전모–민족 운동사 측면사', <인물계>, 1권 2호, 1964년)

일제가 물산장려회 활동을 예의주시하는 가운데서도, 정세권은 전폭적으로 물산장려회의 재정을 부담하고 운영을 진두지휘한다. 특히, 그의 재정 기여는 놀라울 정도였다.

앞선 연재에서와 설명하였다시피, 회관 건축 비용 관련 총 2만 원 중 건물 건설 비용에 1만5000원, 토지 매입비에 5000원이 들어갔다. 당시 낙원동 지역은 경성 요지이었기에 5000원은 상당히 큰 거금이다.

재정에 그가 얼만큼이나 기여를 했는지는 물산장려회 운영비를 분석하면 알 수 있다.

                                                                                         단위 : 원(圓).전(錢)

1929년도(1929.8.8-1930.5.15)

1930년동91930.5.16-1931.4.5)

수입

지출

수입

지출

통상회비     90

특별회비     35

회부수입    22.18

광고료     349.35

특별수입   150

차입금    1,220

회관세     104.30

수당금     270.60

비품비       7.40

회보비   1,304.29

소모비     113.21

현금        66.73

회비       436.18

광고료   1,002.49

차입금   2,450

수당금     541.78

선전비    1,596.23

회관세     524.41

(회보비?)  1,216

합계      1,866.53

합계     1,866.53

합계     3,888.67

합계     3,878.42 

(조선물산장려회, <朝鮮物産奬勵會報>, 1930년, 41~42쪽 ;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경제 사상>(방기중 지음, 연세대학교출판부 펴냄, 2010년), 114쪽 재인용)

정세권이 본격적으로 물산장려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1929년의 수입을 보면, 회비(통상 회비와 특별 회비) 125원, 회부 수입 22원, 광고 수입 349원, 특별 수입 150원, 차임금 1220원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바로 회비의 총액이다. 모집된 회비가 겨우 125원에 불과할 정도로, 물산장려회가 제대로 운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29년 이후 물산장려회가 자리를 다시 잡기 시작하면서, 이듬해인 1930년 436원으로 크게 늘어난다. 그런데도 1929년 회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총 수입(1866원) 중 차입금(1220원)의 비중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물산장려회를 운영하기 위한 비용(1866원)만큼은 어디선가의 수입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런데 지출을 모두 메꾸기에는 회비와 회부 수입, 광고 수입, 특별 수입은 턱도 없는 액수였다. 그렇기에 상당한 비용을 차입금(손실 부족금)으로 충당하였다.

1930년에도 상황은 비슷하였다. 사업의 활발한 탓에 지출이 늘어났다(1930년도의 지출은 3878원). 하지만, 비록 회비와 광고비가 늘었다한들, 기록적인 증가로 모든 지출을 감내하기는 어려웠다. 1930년에도 상당한 규모의 외부 차입금(2450원) 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조직이 운영되기 위해서는 이 부족한 부분을 메꿔야 하는데, 이 부분을 정세권이 부담하였다. 2년간 그가 부담한 금액은 확인된 것만 3670원에 이른다. 낙원동 300번지의 토지 가격이 5000원임을 고려할 때, 그의 재정 부담은 상당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물산장려회 운영비의 60~75%를 그가 부담하였다고 한다.

▲ 조선물산장려회의 선전 활동 광경, ⓒ독립기념관


전세계를 불어닥친 대공황기, 조선 역시 경기 불황 속에 부동산 시장은 침체기에 있었다. 그 와중 그는 조선물산장려회에 어마어마한 거금을 투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부 환경의 악화로 인해 본인 사업이 정체된 가운데, 조선물산장려회에 자금을 쏟아붓고 있었으니, 제 아무리 대자본가라고 한들 재정적 타격은 피할 수 없었다. 특히, 그는 건양사라는 부동산 개발 회사 이외에도, 조선물산장려회를 돕기 위한 별도의 회사, 장산사를 설립하였고, 장산사라는 기관을 통해서 물산 장려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에 건양사의 경영 상태는 악화되어 자본금이 8만 원으로 줄어들었고, 부채액이 10만 원에 이르렀다고 그는 회상한다. ('사고', <실생활>, 제3권6호, 1932년 6월)

1928년 정세권이 조선물산장려회에 적극적으로 간여하면서 전무이사로서 물산장려회 실무를 실제 경영하여, 많은 족적을 남겼음에도 그 사이에 내분은 지속되고 있었다. 정세권을 위시한 상공업자 측은 실용적인 부분으로 더 나아갈 것을 원했으나, 민족주의 명망가 그룹은 물산 장려 운동을 보다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할 것을 원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의 변모를 보면 알 수 있는데, 1929년 10월에 창간한 <조선물산장려회보>는 1931년 1월 <장산>으로 바뀐다. 장산으로 바뀐 연유는 회보를 잡지로 혁신한 것이었고, 내용면에서 일반인들이 보편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쉽게 하고 관심이 갈 만한 내용으로 한약계 귄위 기관 순례기, 모범상공대가 소개 등 상업공업자를 소개하는 것들을 실었다. 정세권이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을 위해 세운 별도의 회사 명칭이 장산사인 것에 알 수 있듯이, 기관지 <장산>은 정세권에 의해 기획 편집 발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장산>은 1931년 6월까지 6호를 발행하고 곧 <신조선>으로 바뀐다. 그러면서 편집 방향에도 변화가 오는데, <장산>에서 보여줬던 실용적인 내용은 많이 없어지고, '소비에트 5개년 계획', '필리핀의 독립운동', '최근 영국의 정변'과 같은 시사적이면서 민족 의식을 진작시키는 기사들의 빈도가 높아진다. 이에 정세권은 별도의 기관지 <실생활>을 1931년 8월에 창간하여 실용적 노선을 견지하고자 하였다. (<한국 독립 운동의 역사 36 : 경제 운동>(오미일 지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펴냄), 2009년, 131~132쪽)

정세권의 실용주의 이사진과 명망가들 위주의 (구)간부의 의견 차이가 확대됨에 따라, 1932년 8월 정세권의 장산사는 물산장려회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정리한다. ('물산장려회상무이사회', <매일신보> 1932년 6월 23일) 조선물산장려회관이 완공된 시기(1931년 9월)로부터 불과 1년만에 파국을 맞이한 것이다. 조선물산장려회는 1932년 9월 종로2정목으로 회관 이전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물산장려회상무이사회', <매일신보> 1932년 12월 2일)

정세권이 조선물산장려회를 나온 이후, 물산장려회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1930년대 주요 활동 (이사회, 간담회, 총회 등) 횟수를 세어보면, 1930년 초부터 1932년 9월까지(정세권이 활동한 시기)에는 총 10회가 개최되어 주요 안건들이 처리되었으나, 그 이후에는 1934년 1회의 간담회와 1934년 1회의 상무이사회 개최가 전부이다. (<한국 독립 운동의 역사 36 : 경제 운동>(오미일 지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펴냄), 2009년, 126쪽) 조선물산장려회의 마지막 기관지 <신흥조선>은 1934년 1월 마지막 호를 발간하였다. (<한국 독립 운동의 역사 36 : 경제 운동>(오미일 지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펴냄), 2009년, 123쪽) 정세권 선생과 조선물산장려회가 공식적으로 이별하면서 물산장려회는 빠르게 세가 위축되어 버린 것이다. 빈사 상태에 빠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런 미약한 활동은 재정 부담으로 인한 것으로도 보이는데, 당시 일간지에는 조선물산장려회 회비 납부를 독촉하는 기사가 자주 실렸다.

▲ 회원이면 반드시 회비를 납부하여야함을 재인식시킬 것을 결의함. ⓒ매일신보


비록 정세권이 조선물산장려회와 비공식적으로 관계를 끊었다고 하더라도, 모든 관계를 정리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후에도 물산장려회 이사직은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어학회의 기둥이었던 그의 동지, 이극로 박사 역시 당시 새로이 이사로 선임되었던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서, 정세권 선생이 조선물산장려회와 모든 관계를 끊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1934년 정세권은 상임이사였다.) ('사고 독자필독', <실생활>, 312, 1932.12)


조선물산장려운동에 대한 정세권의 지원은 재정적 지원과 더불어 실제 운영을 담당하는 등, 전사적 차원에서 매달린 총력 지원이었다. 이는 불가피하게 건양사 경영 상황을 위기로 빠지게 할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회사를 희생하면서까지 그가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을 지원했음에도 내분으로 인해 그가 조선물산장려회와 공식적 관계를 일정 정리한 것은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의 미래를 생각할 때 뼈아픈 대목이었다.

비록 그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는 받지 못하였다하더라도, 우리는 그가 남긴 족적을 의식하지는 못하나 경험하고 있고 열광하고 있다.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은 조선 소상공인들의 물건 생산과 판매, 소비를 장려하였듯이, 그는 그가 만든 제품(근대식 한옥)을 개발/생산하여 일반 대중들이 소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근대식 한옥 집단 지구를 경성 전역에 건설하여, 경성 전체에 집(한옥)을 물산 장려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건설한 북촌, 인사동, 익선동, 봉익동, 서대문, 창신동, 혜화동, 성북동, 왕십리의 근대식 한옥 집단 지구는 조선 물산 장려 운동 정신(우리 것을 소비하자)이 주택으로 표출된 것이다. 

비록 20세기 이전 양반 귀족들의 저택을 쪼개서 만든 작온 한옥들의 집합체라 또는 집장사들이 만든 집이라는 오명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근대 한옥 집단 지구가 내포한 의미는 도시 계획사적으로 도시 개발사적으로 그리고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이라는 독립 운동사적으로 그 의미는 매우 높고도 깊다.

최태영 박사의 평가다.

"그는 좋은 사업가였다. 소목, 대목, 토목, 미장, 문 만드는 이, 구들장 놓는 이 등 집짓는 기술있는 건축가들을 많이 모아서 조합을 만들어 가지고 사업을 하는데, '집부터 일본집 짖지 말고 한옥을 짖자, 초가집 없애고 깨끗한 것 짖자'고 하였다. 즉, 서울 전체에 집을 물산 장려한 것이다." (최태영, '광산 이야기와 제2차 물산 장려 운동', <대한민국학술원통신>, 제144호, 2005, 8쪽)

조선물산장려회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후, 그는 더 위험한 민족 운동에 투신한다. 조선어학회를 후원하기 시작한 것인데, 이는 목숨을 건 독립 운동이었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20] 고루 이극로와의 인연

건축왕, 조선어학회에 발 담그다


정세권은 외국에서 공부하고 들어온 지식층을 많이 아꼈다. 가족들은 특히 이광수와 이극로를 기억한다.

"이광수 선생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들어왔을 때, 거처할 곳이 없어서 쩔쩔매는 것을 보고 (아버지 소유) 북촌 한옥에 머무르게 하셨어요. 이극로 선생을 무어라 불렀는지 아세요? 고무신 박사예요.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어요. 아버지가 너무 아낀 분이었어요…." (둘째 따님 고 정정식 님 인터뷰, 2013년 10월 4일)

이광수는 비록 친일을 하긴 하였으나, 인간적으로 기농 정세권과 인연을 이어갔다.

"이광수 선생님이 오빠들(정세권 선생의 아들) 중매를 서주신다고 했는데, 모두 좋아하는 여자들이 있었나봐요. 그래서 저와 동생(정몽화)의 중매를 서주셨죠. 부인되시는 허영숙 선생님 병원에도 자주 갔어요." (둘째 따님 고 정정식 님 인터뷰, 2013년 10월 4일)

이광수는 정세권이 본인의 집을 지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글로 남기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 서울 최고의 한옥 지구 만든 그는 왜 잊혔나)

하지만, 민족운동 관점에서 정세권(1888년생)은 비슷한 연배인 민세 안재홍(1891년생)과 고루 이극로(1893년생)와 고락을 함께 한다. 안재홍과 정세권은 초기부터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을 함께 하였고,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였다. 1929년 귀국한 이극로는 이후 조선 물산 장려 운동과 조선어학회에 투신한다. 이극로의 적극적 활동에 동감한 안재홍과 정세권 역시 조선어학회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며, 이들 모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고문을 받는다.

나이가 비슷한 이들의 만남 그리고 이루어진 운동–조선 물산 장려 운동과 조선어학회 사건을 볼 때, 이들은 가히 동지적 인연을 맺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대중들이 잘 알지 못하는 민세 안재홍과 고루 이극로를 유족들이 유독 기억하는 연유다. (추가적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들의 관계는 산업계와 언론계, 학계의 중추적 인물들이 국내에서 목숨 걸고 전개한 민족 독립운동 전선이었다.

조선어학회는 조선말을 지키고 간직하는 것이 주목표였기에 일제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독립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에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이 뒤따랐다. 이윤재와 한징은 모진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이들 중 혁혁한 노력으로 조선어학회를 이끌고 조선어말사전 편찬에 큰 역할을 하였음에도 그 역할이 상대적으로 평가받지 못한 인물이 고루 이극로다. 이는 그가 해방 정국에서 자진 월북한 것, 그리고 북한에서의 활발한 활동에 연유하지 않았나 싶다. 이극로는 북한 국어 정책과 정치 활동에 관여하여 194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 시 무임소장관에 선임되었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1948~1967년)과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의장(1964년)을 역임하였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박용규 지음, 한글학회 펴냄, 2012년), 199쪽)

상해 동지대학교에서 공부를 한 고루 이극로는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독일에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기간 어학 분야를 공부하였고, 베를린 대학교에서 조선어 강좌를 개설하여 1922년부터 3년간 조선어를 가르쳤다.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 사상과 어문 운동', <한국인물사연구> Vol.5, 한국인물사연구소 펴냄, 2006년, 334쪽) 경제학 박사 출신이 외국 대학에서 조선어를 강의하고 조선어학회를 주도한다는 측면이 일면 엉뚱해 보일 수도 있었기에, 신문 지상에는 "탈선 경제학 박사"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고루 이극로 씨 탈선 경제학 박사', <조선일보>, 1932년 2월 11일) 

당시 그는 독일계 박사이면서 조선어학회를 주도하는 이유로 지성계와 언론계의 주목을 받았고, 원고 청탁과 대담 및 좌담 요청이 쇄도하였다.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 운동', <한국인물사연구> Vol.5, 한국인물사연구소, 2006년, 337쪽) 그의 귀국 자체가 <동아일보> 지면에서 다룰 정도로 그는 귀국과 동시에 재조선 학계 스타로 떠올랐다. ('독일 철학 박사, 이극로 씨 귀국', <동아일보> 1928년 10월 28일)   

1929년 1월 귀국한 이극로는 그해 3월부터 조선어 연구 활동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당시 조선인을 위한 조선어사전이 없었기에, 조선어사전편회를 조직하여 위원장 및 상무위원을 맡으며 조선어 사전 편찬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94쪽) 그는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학회를 개명하고 초대 간사장(1931~32년), 2대~6대(1932~37년) 간사, 7대 간사장을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학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갔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94~195쪽)

조선어학회 후신인 한글학회의 표현을 빌자면 "이극로는 한글 운동의 기획자로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사업(1933년)과 표준어 사정 작업(1936년)에 민족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도록 유도하였고 (…) 조선어학회는 이극로를 중심으로 조선어사전 편찬을 완수해 내었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95쪽)

그는 조선이 독립하기 전까지는 돈을 벌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한글 운동에 매진하였다. 1930년대 말 조선어학회의 재정난이 타개되지 않은 상황이라, 다른 회원들은 취직을 하고 여가에 사전 편찬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극로만은 사전 편찬실을 지켜나갔다. 보기에 안쓰러웠던지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 교장직을 제안하였음에도 그는 이를 거절하며 사전 편찬 작업에 골몰하였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98쪽)  

▲ 조선어 사전 편찬에 발분망식하고 있는 이극로. ⓒ조선일보

 

이극로의 활약상에 대한 외솔 최현배의 증언이다. 

“(이극로 선생은) 일신의 안일과 집안의 이익에 급급한 현대인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어려움을 극복하였기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94~198쪽)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연행된 최초의 피의자인 조선어학회 회원 정태진의 평가다.

"고루 이극로 선생님이 우리나라에서 한글 운동의 제1인자이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202쪽)

"조선어학회 대표는 고루 스승이었고, 학회의 모든 운영은 오로지 고루 스승이 이끌어 갔다. 한 예로 학회 운영비가 떨어지면 이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시다가 돌아와 '129, 어떻게 산다는 말인가!'라고 길게 한숨을 내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201쪽)

129는 조선어학회 회관이 있었던 종로구 화동 129번지를 뜻한다. 조선어학회를 129로 부를만큼 고루 이극로에게 화동 129번지 조선어학회 회관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었고, 129 설립에 전력을 다한 정세권에 대해 그는 매우 고마워하였다.

이극로의 글이다.

"조선어학회의 발전. 이제 조선어학회라 하면, 해내 해외를 불론하고 조선말을 연구하는 학술 단체로 뚜렷하게 알리어진 것이 사실이다. 이 학술단체가 어떻게 (성장)되어 왔나를 간단히 적으려 한다. (…) 그러다가 이제로 육년전에 비로소 서울 수표정 42번지 조선교육협회 집안에서 방 한칸을 얻어가지고 곁방살이로 문패를 붙이게 되었다. 그 뒤로 우리는 사전 편찬, 잡지 간행, 철자법 통일안 작성 이 밖에 여러 가지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장산사 사장 정세권 씨로부터 서울 화동 129번지 2층양옥 한채를 조선어학회 회관으로 감사히 제공받게 되었다. 그래서 금년 7월 11날에 이 집으로 회관을 옮기게 되었다. 조선어학회가 딴 문패를 붙이고 독립한 호주가 된 것은 창립 이후 이번이 처음 일이다. 이 학술단체가 독립된 호주가 되도록 성장한 것은 오직 조선어학회 회원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과학적 사업에 대한 조선 사회의 많은 동정이 있은 까닭이다.

끝으로 우리 조선어학회는 조선 사회에 대하여 특별히 정세권 씨에 대하여 감사함을 마지 아니하는 동시에, 우리는 적은 힘이나마 더욱 정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바라는 바를 이루도록 힘쓰려 한다." (이극로, '조선어학회의 발전', <한글> 제25호, 한글학회, 1935년, 339쪽)

짧은 글에서 그는 두 번에 걸쳐서 정세권의 호의에 감사하였다.  당시 경성방직 여공의 한 달 월급이 21원이었다 한다. 정세권은 토지 매입비 및 건설비 4000원을 들여 회관을 완성하였다하니, 200여 명 월급 분량을 내놓은 것이었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02쪽)

그가 이렇듯 정세권에게 거듭 감사함을 표명한 것에는 그의 종국적 목표에 연관되어 있다. 이극로는 회관을 단순히 조선어학회 활동 기지로 여기지 않고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 만들고자 하는 의욕을 갖고 있었다.

이극로는 대학을 신사를 양성하는 양사원으로 인식하였고, 그는 이런 기관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투사와 독립 이후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삼고 싶어했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37쪽) 그는 그 연장선상에서 본인이 가장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답으로 "가난한 학자와 기술자에게 먹고 살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 하였다.(이극로, '명사 만문만답', <조광>, 1939년 3월호, 167, 170쪽) 그래서 그는 실질적인 공간(화동 129번지)을 확보한 후 재단을 설립하여 운영비를 얻어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가고자 한 것이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138쪽) 아쉽게도 재단을 설립하려는 계획과 양사원 설립 계획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정세권의 조선어학회 참여는 조선 물산 장려 운동 활동 중 이극로를 만나면서 시작되었고, 출판업계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이극로의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당시 조선어학회의 최종 목표는 조선어 사전 '큰 사전'의 출판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방언 등을 표준화시키는 표준화 작업과 한글 맞춤법 통일 등이 선결과제였다. 그런데 한글 맞춤법 통일에 있어서 조선어학연구회와 조선어학회는 심한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이극로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언론계와 학계 및 출판계 주요 인사 70인의 동의를 얻어 이를 돌파한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46~67쪽)

물산장려회 기관지인 <장산> 그리고 이후 <실생활> 잡지의 발행인으로 출판계 거물이기도 한 정세권은 이극로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기 시작한다.

그는 조선어학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재정적 기여를 한다. 종로구 화동 129번지의 조선어학회를 건립하여 기증하였고, 조선기념도서출판관 5인 이사의 일인으로 활약하였고, 다양한 활동에 재정 기부를 하였다.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133~134쪽)  

일제의 입장에서 조선어학회 참여자들의 면면과 활동을 고려할 때, 조선어학회 회관 설립 비용 및 각종 활동 지원 행위는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진배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조선어학회 건물 기증, 조선기념도서출판관 이사 재직과 조선어 표준말 사정위원회 후원)의 대가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인한 모진 고문과 재산 강탈이었다. 이는 다음 연재에서 한다.

▲ 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어사정위원들의 현충사 방문 기념 사진. 앞 줄 맨 왼쪽에 정세권, 둘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에 이극로, 같은 줄 네 번째에 안재홍. ⓒ한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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