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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장준하는 누가 살해했나

by Wood-Stock 2016. 8. 12.

[장준하 의문사 조사관이 최초 공개하는 '장준하는 누가 살해했나' ①]

새로운 가설, '중정은 장준하를 살해하지 않았다'


2012년 9월 초 어느 날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만 4년여 전인 그때,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당시 세간에 큰 인기를 얻고 있었던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아래 '나꼼수') 멤버 중 하나인 <시사IN> 주진우 기자였습니다. 

주 기자는 대뜸 "고 선배, 저희 방송에 한번 나오셔야죠"라고 제안했습니다. 2012년 8월 1일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바로 그 사건,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님의 두개골에서 발견된 외부 가격흔과 관련된 '나꼼수' 특집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출연하게 된 '나꼼수 봉주 19회 - 납량 특집 / 장준하와 공작들'. 

'나꼼수'를 접한 청취자들의 반응은 대단했습니다.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방송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소름 끼치도록 무섭게 들었다고 하셨고, 또 어떤 분은 이 사건의 뒷이야기를 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속 한켠에서는 이 방송에 대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실은 '그날 다 말하지 못한 진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는, 당시 '나꼼수'에서 차마 다할 수 없었던 비밀을 이제 밝히려 합니다. 때가 오면 밝히겠다면서 혼자만 삼켰던 장준하 의문사 사건의 '또 다른 가설', 바로 '중정은 장준하를 살해하지 않았다'는 저의 확신입니다.

1993년 처음 알게 된 장준하, 그것은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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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8월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 장준하공원에서 열린 고 장준한 선생 40주기 추모식에서 고 장준하 선생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2003년 7월, 그날은 저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제2기 조사관으로 새로 임명된 날이었습니다. 조사관 임명장을 받고 난 뒤 위원회가 제게 배당한 사건은 1975년 8월 17일 의문사한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님' 사건이었습니다.


재야인사 장준하. 저는 장준하 선생님(아래 '장준하 선생')을 생각하면 먼저 '운명'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처음 장준하 선생을 알게 된 계기부터 그랬습니다. 제가 처음 장준하 선생을 알게 된 것은 1993년 3월이었습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된 후 재야 인권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우연히 시청하게된 방송이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특집. 군인 출신 대통령 시대가 끝나고 마침내 문민정부가 출범한 그때,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과거 독재 권력 하에서 발생한 의문사를 방송에서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바로 장준하 선생 의문사였습니다.

방송을 통해 저는 장준하 선생을 충격적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았던 '대한민국 진짜 애국자' 장준하. 해방 전에는 광복군으로 그리고 해방 후에는 백범 선생의 비서로, 이후 백범 서거 후에는 <사상계> 사장으로 언론 운동을 했으며 훗날에는 국회의원으로서 또 재야 민주인사로서 박정희 독재와 맞섰던 '민주주의자' 장준하.

그런 장준하 선생이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됨으로써 그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 것은 너무도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유신 독재자인 박정희와 마지막 순간까지 맞섰던 장준하 선생이 "등반 중 실족 추락사했다"고 발표한 정부 수사 결과를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은 '사실은 박정희 독재권력에 의해 타살된 것'이라고 수군거렸고, 그 의혹은 사후 41주기가 지나가는 오늘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1993년 당시 '그것이 알고 싶다'는 바로 이러한 장준하 선생 의문사 의혹을 집대성한 수작 중 수작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방송을 보고 이후 2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잊히지 않는 명 대사가 있습니다. 바로 장준하 선생 의문사를 추적한 '그것이 알고싶다' 진행자였던 배우 문성근씨가 던진 마지막 내레이션이었습니다. 

10년 후, '그 사건'의 조사관이 되다

"이제 이 사건은 단순 변사사건도 아니고 더 이상 의문사도 아닙니다. 명백한 타살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취재를 마무리짓기로 했습니다. 18년 전의 사건이라서(주 - 1993년 당시) 법적인 공소시효는 이미 지났습니다. 유가족은 고인의 죽음에 얽힌 진실만 밝혀진다면 가해자가 누구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장막에 가려진 장준하 사건의 한구석을 조금 열어 보았을 뿐입니다. 그 속에는 왜곡된 사실과 우리가 찾고자 하는 진실이 뒤엉켜 있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서 이제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곳에서 이 사건이 공식적으로 거론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분들께서도 이제는 그 침묵을 깨야 한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진실은 쉽게 얻어지지 않지만 그것을 얻은 사회는 역사 앞에 언제나 떳떳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장면, '이제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곳에서 이 사건이 공식적으로 거론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이 내레이션에서 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저 역시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곳의 누군가가 나서서 책임있게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연은 놀라웠습니다. 그날로부터 정확히 만 10년이 되던 2003년 7월, 제가 바로 그 '책임 있는 곳에서' 장준하 선생 사건의 의문사를 조사하는 '책임있는 조사관으로' 임명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욕심은 있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될 줄은 정말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사건의 진실을 '미치도록' 밝히고 싶었습니다.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 계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비밀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완벽하게 밝혀내는 일, 그것은 저에게 있어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후 저는 1기 위원회가 남긴 수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조사 자료와 또 2기에서 추가 입수한 문서를 넘나들며 밤을 새우고, 날을 보냈습니다. 사건 현장인 약사봉을 수없이 오르내렸습니다. 사건 발생일로부터 30여 년 세월이 흐른 그곳에서 세월 속에 사라진 바위를 찾고 달라진 지형 지물을 헤집으며 그렇게 몸부림 쳤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한 명백한 사실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준하 선생은 실족 추락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족 추락사했다는 근거보다는, 인위적인 원인으로 한 사망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더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의문은 한 가지였습니다. '누가 장준하 선생을 사망케 했는가' 였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사인이 실족 추락사가 아니라면 분명 장준하 선생을 가해한 기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목한 '가해 의심 기관'은 다음과 같은 세 곳이었습니다. 

장준하 타살 의심? '중정' '청와대 경호실' '보안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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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 2012년 12월 5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도리 장준하 공원에서 고인의 사인 규명을 위한 유골 정밀감식을 위해 개묘작업을 해 고인의 두개골을 수습하고 있는 모습.


첫 번째는 역시 중앙정보부(아래 '중정')였습니다. 박정희의 18년 장기 독재를 가능케 해 준 최악의 폭압 기구.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장준하 선생과 유력 야당 정치인까지 제 맘대로 연행하고, 고문하고, 또 감시한 중정의 악행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청와대 경호실'이었습니다. 특히 장준하 선생이 사망하기 직전인 1974년 새로 임명된 청와대 경호실장을 주목했습니다. 바로 그 사람, '차지철'이었습니다. 1974년 8월 15일 문세광 총격사건으로 육영수씨가 사망하자 대통령 박정희는 박종규에서 차지철로 청와대 경호실장을 교체합니다.

그리고 이때, 새로이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은 이전 청와대 경호실장과 상당히 다른 경호 철학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우리가 차지철의 청와대 경호실을 의심한 몇 가지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누구나 알 듯 청와대 경호실의 주 업무는 대통령 신변 안전입니다. 즉, '신체 경호'입니다. 그런데 차지철은 달랐습니다. 그는 '누구도 대통령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심기 경호'와 함께 '정치적 생명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보위 경호'를 새로운 경호 철학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후 그는 우리가 매우 주목할 만한 한 권의 책을 냈습니다. 청와대 경호실이 낸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록될 그 책의 제목, '암살사'였습니다. '저자 차지철'로 된 이 책은 장준하 선생의 암살 의혹을 조사하는 제 입장에서는 결코 놓칠 수 없는 강력한 의혹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바로 '국군 보안사령부'(약칭 '보안사')였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포천 약사봉은 장준하 선생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군사 지역으로 묶인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사고 직후 보안사 소속 군인들이 여러 차례 사건 현장에 나타납니다. 민간인 사망 현장에 군인이 나타나 어떤 일을 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워진 조사기간은 불과 1년 남짓. 이 조사 기간동안 모든 기관의 의혹을 충분하게 조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장 의혹이 집중된 기관을 중심으로 조사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우리가 선택한 집중 조사기관은 '중정'이었습니다. 

한편, 우리가 장준하 선생의 가해 기관으로 중정을 의심한 데에는 당연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몇 가지 사실 관계만 언급해도 그 이유는 충분합니다. 1975년 8월 17일, 사건이 일어난 현장 주변에서 '중정의 짙은 그림자'를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장준하와 중정의 악연, 몇 가지 사례

가장 큰 의심은 사건 발생일인 1975년 8월 17일 이전에 중정이 세운 비밀 계획의 확인입니다. 1975년 3월 31일, 중정은 장준하 선생을 대상으로 하는 '3급 비밀' 계획을 수립합니다. 감옥을 보내고 <사상계>를 부도내는 등 온갖 핍박을 해도 물러서지 않는 장준하는 중정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골칫덩어리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1974년 1월,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한 장준하 선생을 긴급조치 위반죄로 15년 징역에 처했지만 이 역시 실패합니다. 미국 정부의 압박으로 장준하 선생을 불과 10개월 만에 석방시킬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중정은 이때 '매우 비상한 내용의' 보고서를 비밀리에 작성합니다.

그것이 바로 1975년 3월 31일 중정이 작성한 3급 기밀의 '위해분자 관찰계획 보고서'였습니다. 장준하를 '위해 분자'로 규정짓고, 그러한 '위해 분자' 장준하가 '유사시 위해 행위를 할 경우', 이를 사전에 탐지 봉쇄하도록 하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는 보고서였습니다. 그리고 이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약 5개월 후, 장준하 선생은 끝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중정은 왜 1975년 3월 31일 이 '위험한' 계획을 수립했을까요? 그 날에 어떤 비밀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랬습니다. 바로 그날은 장준하에게도, 그리고 중정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 유신 독재를 깨기 위해 두 번째 야권 통합에 나선 날이었던 것입니다. 

이날 장준하는 야당 지도자인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비롯해 훗날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 김영삼씨와 양일동 통일당 당수를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이는 오직 장준하 선생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이 야권통합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박정희 독재 권력을 깨는 무서운 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유신헌법 발효 후 재야 및 야당 정치권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는 순간, 더 이상 장준하를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을 중정이 내리기에 충분한 이유였습니다. 바로 그날, 중정이 장준하 선생을 상대로 '위해분자 관찰 계획 보고서'를 수립한 날이었습니다.

사고 유일한 목격자? 누구인가, 그는

이처럼 장준하 선생 사망을 전후해 확인된 중정의 특이 동향 외에도 우리가 중정을 의심한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바로 장준하 선생의 최후를 목격했다는,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장준하 선생은 등반 중 실족 추락사한 것"이라고 남게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에 대한 새로운 의혹입니다. 그 사람, 김용환씨입니다.

문제는 '목격자를 자처하는' 그의 진술이 과연 사실이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장준하 선생과 약사봉을 함께 등반하다 사고를 목격했다는 그의 주장은 유감스럽지만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조사팀의 최종 결론이었습니다. 조사 기간 중 20번 만나 그중 15번 진술조서를 작성한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는 이 많은 진술 과정에서 일관된 진술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자신이 봤다는 장준하 선생 추락 상황에서 '팔색조 진술'을 반복했습니다. 때로는 추락 장면을 봤다고도 했고, 또 어느 때는 추락하는 것은 못 보고 단지 짧은 비명만 들었다고 했습니다. 또 어느 때는 그저 흔들리는 소나무 가지만 봤다고 했고, 심지어는 "그런 소나무 가지 발언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사고 후 <동아일보>에 난 기사를 통해 알았다"는 황당한 답변도 거듭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 사건은 굉장히 단순한 일입니다. 함께 등반하다가 내려오던 중 자신이 봤다는 목격 사실만 자연스럽게 증언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 기억이 엇갈릴 수 있지 않냐고요? 

아닙니다. 그는 장준하 선생이 사망하고 불과 3일 후인 1975년 8월 20일 빈소에서 처음으로 사건 목격에 대한 진술을 시작합니다. 사고 직후 어디론가 사라졌던 김용환씨는 장준하 선생의 발인 전날에서야 갑자기 나타납니다. 사건 경위를 모르는 이들은 사고 목격자라는 그를 사방으로 애타게 찾았으나 어디론가 사라진 그가 나타나지 않으니 얼마나 애가 탔을까요?

그런데 사라진 목격자가 마침내 나타났으니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이 급했을까요? 그래서 당시 빈소에 있던 고 문익환 목사를 비롯해 계훈제, 문동환, 김준엽 총장 등이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에게 사건 경위를 물었습니다. 하지만 이날도 그의 진술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그가 본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런데 이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행보를 보이는 김용환씨에 대한 의혹이 더욱 가중돼 가던 그때, 2기 의문사위 조사팀은 정말 뜻밖의 문서 한 장을 찾게 됩니다. 중정이 제출한 문서 중에서 발견한 그 자료의 명칭은 '특수인물 존안카드'. 그리고 이 카드 주인의 이름난에는 '김용환'이 적혀 있었습니다. 바로 목격자를 자처하던 사람의 이름 석 자였습니다.

중정의 '특수인물 존안카드' 속 그 남자 정체

돌아보면 사건 목격자를 자처하던 김용환씨에 대한 의혹은 제가 새로 조사팀을 맡기 전부터 상당했습니다. 사고 상황을 목격을 했다는 그가 도대체 누구냐는 의혹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장준하 선생을 따르는 충실한 사람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실체가 의심스러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혹의 연결 선상에서는 늘 중정과의 연관성이 뜨거운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혹은 그저 의혹으로만 남았습니다. 예를 들어 1기 의문사위는 김용환씨가 '중정의 사설 정보원'이라는 진술을 중정 간부로부터 확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김용환씨는 중정의 정식 채용 정보원은 아니지만 일정한 보수를 주며 중정이 채용한 사설 요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진술을 한 중정 간부는 2기 조사에서 말을 번복합니다. "김용환씨가 사설 정보원이 정말 맞냐"는 확인 조사에서 그는 "1기 위원회 조사 당시 그럴 수 있다는 취지로 답했을 뿐 정확히는 알 수 없다"면서 "답한 것이 전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2기 조사팀은 이 부분에 대한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 원점에서부터 다시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찾게 된 한 장의 중정 존안 문서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의 확인이었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최후를 목격했다고 자처하던 김용환씨와 중정이 '사실은 매우 특별한 관계였음을' 뒷받침하는 물적 증거를 찾아낸 것입니다. 목격자를 자처하는 이의 이름으로 된 중정의 '특수인물 존안카드'.

이 자료가 발견되기 전까지 김용환씨의 입장은 분명했습니다. 자신은 중정과 그 어떤 연관도 없으며, 또한 그러한 일은 있을 수도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장준하 선생님을 스승처럼 믿고 의지하는 동지였다며 그러한 자신을 의심하는 것에 대해 격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정이 존안하고 있던 김용환 명의의 '특수인물 존안카드'에 대한 중정 관계자의 진술은 달랐습니다. 조사팀은 1975년 당시 이 존안 카드를 작성하는 데 관여한 중정 간부 B씨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김용환씨 명의로 작성된 '특수인물 존안카드'에 대해 작성 경위 및 용도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답변은 분명했습니다. 

그는 "장준하가 위원장을 맡던 신민당 동대문지구당 간사가 김용환씨였다는 점에서 이는 서울시경 정보과 형사가 김용환씨를 중정의 '사설 정보원'으로 활용토록 추천, 작성한 것으로 보이며 그렇지 않고서는 사회적으로 큰 비중이 없는 김용환씨를 상대로 이 같은 '특수인물 존안카드'를 만들 이유가 없다"라고 단언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의혹에 대해 김용환씨는 전면 부인했습니다. 그는 이 의혹 외에도 명백하고 분명한 자신의 모든 의혹을 막무가내로 부인했습니다. 지면 관계상 모두 언급할 수 없는 중대 의혹을 그는 무조건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결코 단순한 사고 목격자가 아니라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한 진짜 그날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특히 사건 당일, 현장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상당수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날은 1975년 여름 중에서도 유난히 무더운 날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푹푹 찌는 날,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사건 현장인 산속에 나타났다면 그들은 누구일까요? 중정이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다고 판단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랬습니다. 중정의 '위해분자 관찰 계획 보고서' 수립과 이후 사고 목격자를 자처하는 그가 '사실은' 중정의 특수인물 존안카드로 관리되고 있던 내부자라는 점, 그런 사람과 함께 등반후 변사체로 발견된 장준하 선생의 몸이 일반적인 추락사로 보기 어려운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이 사건이 중정 개입에 의한 사건으로 판단하기에 무리가 없었습니다.

정말 의심스러운 정황은 또 있었습니다. 바로 장준하 선생을 상대로 '위해분자 관찰계획 보고서'를 작성했던 중정 책임자가 장준하 선생 사망 후 휴가를 떠났다는 점입니다. 이게 상식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일까요. 자신이 3급 비밀로 감시하던 자가 사망했는데 바로 당일 휴가를 떠났다?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날 담당자가 휴가를 떠났다는 것은 이 매우 큰 의미를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위해분자 관찰 계획 보고서'에는 '1975년 3월 31일부터 계획 종료시까지'라고 적고 있었습니다. 즉, 장준하 선생이 사망하자 장준하 선생을 관찰하던 담당자가 휴가를 떠났다는 것은 바로 '계획이 종료되었음'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 사건 전반에서 확인한 중정의 짙은 의혹을 끝내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법으로 보장받은 조사 기간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의혹이 해소돼 조사를 마친 것이 아니라 '확인해야 할 의혹만 남긴 채' 법적 조사기간 종료로 조사의 문의 강제로 닫힌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만 12년 전, 그때의 일이었습니다.

반전, 그러나 '중정은 장준하를 살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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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의 장준하 선생


그런데 이러한 저의 확신에 결정적 반전이 일어난 것은 지난 2012년 8월 1일의 일이었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사망에 있어 중정이 깊숙이 개입했다고 확신해 온 제게, 어쩌면 이 사건의 진실은 따로 있을 수 있다는 강력한 의문이 든 것입니다. 2012년 9월 초, 제가 출연한 '나꼼수'에서 다 말하지 못한 진실, 그것은 바로 '중정은 장준하를 살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글을 지금까지 읽어온 분이라면 적지 않게 놀랄 듯합니다. 장준하 선생이 사망하고 무려 41년이 지난 오늘,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중정이 장준하 선생을 위해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타살설을 믿는 사람들은 "국가 차원의 재조사를 통해 이 사건에서 중정이 무엇을 했는지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또 반대편 사람들은 "그간 중정에 대해 조사했지만 더 밝혀질 사실이 없다"며 '조사 무용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런 옥신각신으로 외부 가격에 의한 타살이 유력하다는 발표가 있지만 더 이상의 국가 차원 재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2012년 8월 1일 장준하 선생 묘 이장 과정에서 '새로 드러난 명백한 진실'입니다. 당시 서울대 의대 법의학 교수 출신의 이정빈 박사는 이장 과정에서 확인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을 부검한 결과, '외부 가격에 의한 타살' 소견을 밝혔습니다. 이로 인해 '실족 추락에 의한 사망'이라는 주장은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타살 가능성이 보다 분명해진 지금, "그렇다면 누가 장준하 선생을 이처럼 사망케 하고 이후 실족 추락사로 위장한 것이냐"는 가해 의심 기관은 어디일까 많은 이들이 의혹을 제기할 것입니다. 바로 그 가해 의심기관, 바로 '국군 보안사령부'라는 새로운 가설을 제기합니다.

왜 가해 의심 기관이 지금까지 제기된 중정이 아니고 보안사인지, 그리고 그 근거는 무엇이며 왜 이 사실을 지금 밝히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 다음 기사에서 소상하게 밝히겠습니다.




[장준하 의문사 조사관이 최초 공개하는 '장준하는 누가 살해했나' ②]

장준하 타살, 보안사가 답할 '진짜 의혹' 5가지


2013년 3월 26일, 그날 저는 서울 용산에 위치한 백범 기념관에 있었습니다. 2012년 8월 1일, 묘 이장을 위해 열었던 장준하 선생 관 안에서 직경 6cm로 둥그렇게 뚫린 선생의 두개골이 확인되었고, 이 두개골의 법의학 감정 결과를 발표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상처럼 이날 백범 기념관은 많은 취재진과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처럼 발표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고, 참석한 이들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안타까운 분노가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대 의대 법의학 명예교수인 이정빈 교수가 단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건만 '마치 바늘 하나만 떨어져도 그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해 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이정빈 교수의 법의학 감정 결과 발표. 이정빈 교수 역시 사안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에 신중하게, 그러면서도 법의학 지식이 부족한 사람 역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자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장준하 사인은 '타살', 이정빈 교수 법의학 감정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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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빈 서울대 명예교수. 사진은 지난 2013년 3월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장준하선생 사인진상조사 공동위원회 주최로 열린 '장준하선생 유해 정밀감식 결과 국민보고대회' 당시 감식결과를 발표하는 모습.


과연 이날 발표된 장준하 선생의 사인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랬습니다. 우리 모두가 '의심하고 있었던 사실 그대로' 였습니다. 이정빈 교수는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상흔에 대한 그동안의 감정 과정을 지나칠 만큼 소상하게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은 최종적 결론을 날카롭게 제시했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함몰은 외부 가격에 의한 것이고, 그 가격 물체는 망치가 아니라 둥그런 형태의 물체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부 가격으로 장준하 선생은 즉사했고 이후 추락해 엉덩이 뼈가 손상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예상했지만 이정빈 교수의 충격적인 결과 발표에 장내는 술렁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이어지는 이정빈 교수의 법의학 감정 결과. 이 교수는 보다 더 분명하게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에서 확인된 상흔이 '왜 추락에 의한 상처가 아닌지' 밝혔습니다.

"두개골과 엉덩이뼈가 추락 때문에 손상됐다면 반드시 어깨뼈나 왼쪽 눈 위 안구 주위뼈도 함께 손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장준하 선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추락보다 외부 가격에 의한 머리뼈 손상 가능성이 큰 증거입니다. 특히 사건 당시 검안에 의하면 장 선생의 몸에 출혈이 거의 없었고, 또 긁힌 상처가 많지 않았다는 점 역시 장 선생이 추락사 하지 않은 것임을 보여준다 할 것입니다."

이 교수의 소견을 보다 쉽고 간결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만약 장준하 선생이 실족 추락사 했다면, 그래서 이 추락으로 인해 둥그렇게 뚫린 두개골 상흔이 생긴 것이 맞다면 '장준하 선생의 어깨뼈 골절'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왜 그런지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추락에 의해 두개골 상흔이 발생했다면 그 두개골보다 더 빨리 지면에 닿는 신체부위는 오른쪽 어깨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깨가 부딪히고 그 다음에 두개골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준하 선생의 어깨나 등 어디에도 추가 골절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충격적인 감정 결과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습니다. 이처럼 분명한 사실이 왜 국가 차원에서의 재조사가 아닌, 민간의 영역에서 발표를 할 수밖에 없는지 분노하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저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새로운 사실이 제 머릿속에 떠오르며 전율했습니다. 백범 기념관 무대 전면에 대형 스크린으로 투영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상흔을 보며 10년 전 그때, 그러니까 2003년 조사 당시 두 사람이 제게 했던 거짓말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그들이 왜 거짓말을 한 것인지 한꺼번에 깨닫는 전율이었습니다.

중정이 아니라면... 장준하 타살 진짜 범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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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장준하 선생 손자인 장현욱씨가 지난 2013년 3월 30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노제를 지낸 뒤 영정사진을 들고 형무소를 나서고 있는 모습.


2003년 제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선생 의문사를 담당하는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저는 최종 결론을 '진상규명 불능'으로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건의 실체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내린 '불능'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이 사건을 조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법률적 장치였습니다.


의문사 특별법에 의하면 진상규명이 된 것으로 보는 '인용' 결정은 차후 그 어떤 방식으로도 재조사를 할 수 없습니다. 진상규명이 됐는데 또다시 조사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2003년 당시 일부에서는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을 중정 등 국가권력 기관의 개입에 의한 사건으로 판단하고 진상규명 인용 결정을 내리자"라는 위원들의 의견도 상당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 담당 조사관이었던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암살범이 '안두희'로 알려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범 선생의 암살 사건이 해결됐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안두희의 진짜 배후가 누구냐'는 문제는 오늘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중대한 의혹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장준하 선생 의문사 역시 이를 '국가 권력 기관의 개입에 의한 사망'으로 두루뭉술하게 정리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적으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향후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결정적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사건이 정말 해결 불가능한 어려움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조사 시간이 더 필요하고 이를 통해 중정과 보안사 등 당시 권력 기관이 존안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몇 가지 필요 자료만 확보한다면 반드시 이 사건의 완전한 실체를 밝힐 수 있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날, 저는 그동안 막연했던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중정은 장준하를 살해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집중했던 중정 관련 의혹이 '사실은 또 다른 연막'이었을지 모른다는 전율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간 무심결에 흘려버린 주요한 두 사람의 거짓말이 그야말로 머리에 번개 맞은 것처럼 되살아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사실을 즉각 세상에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지금 공개한다면 이 진실을 은폐하려는 세력에 의해 증거가 폐기되거나 조작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날 확인된 장준하 선생 타살 결론에 따라 국회에서 특별법이 제정되기를 기다리며 지금까지 기다려 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갔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이 민간 차원의 법의학 감정 결과로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이 법안을 반대하는 과반의 새누리당에 의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목이 터져라 외치고 또 외치며 장준하 선생 사인에 대한 국가 차원의 재조사를 요청했지만 장준하 선생 사후 40주기를 맞이했던 2015년 마저도 그렇게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맞이하는 장준하 선생의 2016년 8월 17일 41주기 추모 기일. 정치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기대감을 주고 있습니다. 1988년 이후 28년 만에 다시 맞이한 여소야대 국회에서 '야당이 마음만 먹는다면' 장준하 선생을 비롯한 과거 의문사로 목숨을 잃은 분들의 진실을 밝힐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는 호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우리만의 욕심이었나요? 1979년 10.26 사태로 끝났다고 믿은 박정희 권력은 여전히 그의 딸을 통해 오늘까지도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끼는 지금입니다. 그 속에서 장준하 선생의 사인 규명은 여전히 고난의 한 가운데에 방치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타살 증거가 발견됐음에도 "더 이상의 무슨 재조사가 필요하냐"는 뻔뻔한 저항에 특별법 제정은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그동안 밝혀오지 않은 새로운 이 사건의 전모를 국민 앞에 공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론내렸습니다. 특별법 제정후 국가 차원의 재조사가 이뤄진다면 그때 조사관에게 밝히려 했던 사실을 지금 밝혀 '왜 재조사가 필요한지 새로운 논쟁을 시작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래서 밝히는 그날의 진실, 우리가 그동안 확신했던 중정이 아니라 이 사건 가해 기관으로 새로운 조사가 필요한 폭압기구, 바로 1975년 당시 국군 보안사령부를 향하는 이 사건 새로운 증거에 대한 주장입니다. 왜 그럴까요. 시간은 다시 2003년 의문사위 조사 그때로 돌아갑니다.

전율 속에 떠오른 두 사람의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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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둘러싼 두 사람의 거짓말.



장준하 선생 의문사를 조사하면서 저는 두 사람의 거짓말과 마주하게 됩니다. 물론 처음엔 그들이 거짓말하는 줄 몰랐습니다. 가장 먼저 거짓말을 한 사람은 이 사건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해온 김용환씨였습니다. 그는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직후 현장에서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사라진 그가 다시 사건현장으로 돌아온 시각은 당일 밤 12시를 전후한 시각. 사라지고 약 8시간 후였습니다.

하지만 김용환씨는 자신이 사라지고 다시 사건 현장으로 돌아온 사실을 부인합니다. 자신은 어디로 사라진 적도 없으며 따라서 다시 사건 현장으로 돌아온 사실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장 선생이 사망한 후 파출소로 내려가 있으라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이동 지서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내내 있다가 이후 포천 경찰서로 이동한 후 다음날 아침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에게 조사 받은 후 무혐의로 귀가한 게 이후 자신의 모든 행적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주장에는 결정적인 허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주장과 달리 그는 분명 사건 당일 밤 12시경 사건 현장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 장소 그 시각에 그를 본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재론 여지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먼저 그가 사건 현장에 있었다고 확인해 준 사람은 이 사건을 담당했던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였습니다. 

그는 위원회 출석 요구를 받은 후 왜 자기를 부르나 의아했다고 합니다. 장준하 선생이 실족 추락사했다는 사실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며 이를 목격한 사람도 자신이 조사했는데 뭐가 문제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당시 김용환씨를 처음 만난 곳은 어디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서돈양 검사는 분명하게 기억한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8월 17일에서 18일로 넘어가는 밤 12시경 현장에 도착한 후 사체를 검안했습니다. 이후 추락했다는 사고 계곡을 둘러보고자 산을 올라가는데 어느 경찰이 목격자라며 한 남자를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건 경위를 좀 묻다가 그곳에서 계속 묻기도 뭐해서 경찰에게 내일 아침 의정부지청으로 데려오라고 지시한 사실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서 검사의 진술 그리고 이러한 검사의 지시에 따라 사건 현장에서 김용환씨를 경찰서로 데려간 사실이 있다는 당시 포천경찰서 경찰 김삼용의 진술까지 우리는 사건 당일 어디론가 사라진 김용환씨가 다시 그날 밤 12시경 사건 현장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의문은 따로 있었습니다. 왜 김용환씨는 이처럼 단순한 사실에 대해서도 끝까지 부인하는 것일까. 자신이 그 시각에 사건 현장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왜 이처럼 절박하게 부인하는 것인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착각하는 것 아닐까 싶었는데 그 역시도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그가 이 사실을 부인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을 인정할 경우, 이 사라진 시간동안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사라진 김용환씨가 그 시간동안 무엇을 했는지 알려주는 중정의  '중요 상황보고' 문서 한 장. 그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유족에게 사고 알린 괴전화의 주인공, 그는 바로... 

장준하 선생의 유족이 처음 남편과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사건 당일 낮 3시경 집으로 걸려온 한 통의 괴전화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한 중년의 남자가 전화를 걸어와 "지금 장 선생이 산에서 크게 다쳤으니 많은 사람들이 포천 약사봉으로 와야 한다"라는 말을 전한 후 급박하게 전화를 끊은 일이었습니다.

이후 장 선생의 유족들은 이 전화를 걸어온 '괴 남자'가 이 사건의 중대한 비밀을 풀 열쇠를 가졌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남자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993년 3월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이 남자를 추적했으나 끝내 실패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괴 전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게된 것은 2기 의문사위 조사가 막바지에 이르던 2004년 초였습니다. 국정원으로부터 입수한 중정의 '중요상황 보고' 문서를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피던 중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문서 한 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바로 그 남자의 실체, '목격자' 김용환씨였습니다.

'장준하는 8. 17 08:30 호림산악회(서울운동장 앞 소재) 회원 일행 41명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소재 운악산으로 출발 등반 도중, 동일 14:40분경 동 운악산 약사봉 계곡에서 실족으로 추락, 뇌진탕으로 사망하였음. 시체는 검사 지휘를 받기 위해 사고 현장에 보존중이며 현지 경찰 3명이 현장을 경비 중에 있는데, 동 일행인 김용환(동대문구 이문동 거주)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장준하 부인 및 가족 등이 20:30경 현장에 도착하였음.'

사고가 발생한 당일 밤 9시, '중요 상황 보고' 문서를 통해 중정부장에게 보고된 이 문서에서 적시한 것처럼 유족에게 연락을 취한 사람, 바로 김용환씨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 우리는 또 한 명의 새로운 거짓말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사건 현장에 인접한 보안부대의 부대장이었습니다. 한편 우리가 그를 주목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건 당일 밤 12시경, 군복을 입은 상당한 직급의 군인도 그 현장에 있었다는 관계자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건 현장 인근에 부대를 찾아보니 보안부대가 있어 조사팀은 1975년 당시 이 부대에서 근무했던 부대장을 찾아 출석을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출석한 사람이 이 부대 한아무개 부대장. 우리는 그에게 '사건 당일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현장을 방문한 사실이 있는지'를 추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대 현장을 간 사실이 없다고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민간인이 사망한 일에 왜 군인이 가겠냐"면서 딱 잡아뗐습니다. 1기에 이어 2기 위원회에서 각각 한 번씩 출석했지만 그는 늘 이렇게 부인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사건 현장에 갔습니다. 강력하게 부인하는 그의 눈을 보며 오히려 저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찾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건 당시 이 사람의 운전병으로 복무하던 현역 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확인한 결과, 우리가 의심한 그것은 모두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운전병은 "사건 당일 부대장을 모시고 사고 현장을 간 사실이 있다"라고 털어 놨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상세한 진술. 저는 곧바로 문제의 보안부대장에게 다시 출석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 번째 위원회에 출석한 보안부대장, 태도는 이전과 많이 달랐습니다. 당당하게 부인하던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던진 한마디에 그는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사실은 사건 당일 현장을 방문했다"라면서 그간 해온 거짓을 실토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왜 거짓말 했냐"며 다시 다그치자 그는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편할 것 같아 그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알았어야 했습니다. 사실은 바로 이 거짓말은, 사실 하나의 연결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 말입니다. 즉, 목격자를 자처하던 김용환씨와 문제의 보안 부대장 거짓말은 각각 독립돼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연결된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저는 당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요.

사라진 목격자가 간 곳은 보안부대?

현장에서 갑자기 사라진 김용환씨는 거듭 파출소에 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분명 파출소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확인한 것처럼 사라진 김용환씨는 이후 어디에선가 전화를 이용해 장준하 선생의 집으로 사고 사실을 알렸습니다. 중정의 존안 문서가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괴전화를 건 것은 분명 김용환씨가 맞는데 도대체 그는 어디에서 이 전화를 한 것일까? 1975년 당시 사건이 발생한 약사봉 인근 지역은 매우 가난한 마을 중 한 곳이었습니다. 전화 보급률이 좋지 않았던 당시 마을에 전화가 있던 곳은 확인 결과, 단 한 집에 불과했습니다. 바로 마을 이장 집에 설치된 행정 전화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마을 이장에게 확인해 보니 그는 사건이 발생한 당일 누구에게도 전화를 빌려준 적이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에게도 전화를 빌려준 적이 없기 때문에 틀림없는 사실"이라며 이장은 못을 박듯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의문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도대체 김용환씨는 어디에서 이 전화를 했다는 것인가? 괴전화의 주인공은 분명 김용환씨가 맞는데, 사건 현장 주변 어디에도 없는 전화를 이용할 수 있었던 곳은 어디냐는 강력한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지 못한 전화가 사실은 현장 주변에 한 곳 더 있었습니다. 사건 당일 밤, 사고 현장을 방문하고도 "그런 사실이 없다"며 두 번이나 거짓말했던 보안부대가 바로 그곳입니다. 그렇게 판단하자 자연스럽게 풀린 의문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디론가 사라졌던 김용환씨가 '어떻게 밤 12시에 다시 사건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나'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 12시, 사라졌던 김용환씨가 사건 현장에 돌아온 것은 분명한데 그는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다시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가 사체 검안을 위해 도착한 시각에 정확히 맞추고 나타나 검사를 만났다는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각, 차량을 이용해 사건 현장을 방문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문제의 보안부대장'이었던 것입니다.

즉,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후 유일한 사고 목격자인 김용환씨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라진 김용환씨는 이후 유족에게 전화해 장준하 선생의 사고 소식을 알립니다. 조속한 사건 처리를 위해서는 유족이 현장에 와야 하고, 그렇게 해야 사체 인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전화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바로 그 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곳, 바로 사건 현장 근처 국군 보안사령부 소속의 보안부대. 그러나 보안부대는 우연히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 모든 일은 미리 계획된 것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장준하 선생을 시해한 이들은 누구였을까요? 

그랬습니다. 이 사건 전반부에는 사실 '의문의 엑스트라'가 두 명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명의 엑스트라는 이 사건 초반에 뜬금없이 나타나 여러 의혹과 의문을 줬습니다. 하지만 중정을 의심하는데 집중해있던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이들의 역할을 애써 무시하는 경향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의문사위 조사 당시 조사팀은 이 두 명의 엑스트라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알았습니다. 그들은 엑스트라가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엑스트라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이 사건에 있어 숨겨진 주연이었다는 사실, 그들이 바로 '이 사건의 비밀을 푸는 열쇠'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간과한 '군인 두 명', 그들은 엑스트라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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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5년 8월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 장준하공원에서 열린 고 장준한 선생 40주기 추모식에서 차남 호성씨(왼쪽)와 손자 현욱씨가 묘를 찾아 묵념을 하고 있다.




김용환씨는 사건 당일 장준하 선생의 산행 사실을 알고 뒤늦게 쫒아 올라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다가 장준하 선생을 만난 곳을 설명하면서 비로소 두 명의 군인을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1975년 8월 20일 장준하 선생의 빈소에서 경위를 묻는 문익환 목사 등에게 그는 "이등병 계급장을 단 시골 출신의 군인 두 명과 같이 있던 장준하 선생을 만나게 됐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것이 알고 싶다> 방영 후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자체적으로 행한 장준하 선생 의문사 조사 때에도 "장준하 선생을 찾기 위해 올라가던 중 산 입구에서 조금 더 산으로 들어간 그곳에서 군인 두 사람과 함께 있던 선생님을 만났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사고 당일 군인 두 명과 함께 있었던 장준하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문제는 이러한 낯선 두 명의 군인에 대해 김용환씨가 처음 만났다는 경위와 장소가 계속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어떨 때는 약사봉 계곡 중턱의 어느 숲속이라고 하고, 또 어느 때는 물이 흐르는 개울가 어디쯤이라며 말을 바꿨습니다. 

또 어느 때는 물가에 서서 군인들과 커피를 마시는 장준하 선생을 만났다고 하고, 또 어느 때는 군인이 처 놓은 텐트 안에서 나오는 장 선생을 만났다고도 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하나의 사실을 두고 앞뒤가 극단적으로 다른 여러 목격 진술을 하는지 저는 답답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명치 않은 김용환씨의 진술을 두고 아까운 조사 시간을 너무도 많이 허비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그 군인을 만난 곳이 산인지 개울인지, 또 만났다는 군인이 이등병 계급장을 단 두 명의 시골 출신 군인이라는 주장에 대해 구체적 사실을 확인하려 했지만 불분명한 그의 주장에 결국 조사를 마무리하게 된 것입니다. 중정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쏠리는 상황에서 의미없는 군인 이야기를 확인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면서 간과해 버린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군인 두 명이 어쩌면 '이 사건의 시작이며 결말이었을지 모른다는' 깨달음이 충격처럼 다가온 것은 바로 백범 기념관에서 개최된 '법의학 감정 발표'를 지켜보면서였습니다. 우리가 무시한 바로 그 두 명의 엑스트라가 '사실은' 이 사건의 열쇠라는 강력한 의혹입니다.

그래서 다시 복기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확신했던 중정의 의혹보다 더 크고 분명한 새로운 의혹은 이제 '보안사'가 답해야 할 일입니다. 이 사건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한 군인들의 그림자, 처음과 끝에서 등장하는 이들도 군인이었고 그들이 결정적인 순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우리는 물어봐야 할 것이 많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보안사가 답해야 할 분명한 의혹'에 대해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 보겠습니다.

사건 시작부터 끝까지 '보안사의 짙은 의혹'

밝힌 것처럼 시작은 김용환씨가 만났다는 장준하 선생과 함께 있었던 두 명의 군인입니다. 사건 당일 현장에 있었다는 이등병 계급의 군인 두 명과 장준하 선생이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는 김용환씨의 처음 주장. 하지만 일요일 대낮에 이등병 두 명이, 더구나 이들이 그 당시 귀한 텐트를 가지고 계곡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느냐는 의문도 강하게 제기됩니다.

여하간 이렇게 군인 두 명과 함께 있었던 장준하 선생은 얼마 후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그리고 사라진 목격자 김용환씨는 이후 장준하 선생의 집으로 전화해 이 사실을 알린 것으로 중정 기록에 의해 확인됩니다. 그리고 이 전화를 한 곳은 이장 집을 제외하고 단 한군데, 바로 인근 보안부대밖에 없습니다.

한편 사라졌던 김용환씨가 밤 12시경 사건 현장으로 복귀하여 사건 수습 중인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를 만납니다. 그리고 김용환씨는 서 검사에게 자신의 실족 목격을 증언했고 같은 시각, 보안부대장 역시 사건 현장에 밤 12시경 도착한 사실이 운전병에 의해 새롭게 확인됩니다.

이처럼 사라졌던 김용환씨와 보안부대장이 같은 시각인 밤 12시에 사고 현장에 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전화 사용 등을 위해 보안부대에 있던 김용환씨가 사건 수습을 위해 서돈양 검사가 현장 방문을 한다는 정보를 듣고 보안부대장과 같이 현장으로 돌아왔다는 의심, 저는 이 부분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일이 더 있습니다. 사건 당일 현장에 와 놓고도 두 번이나 이 사실을 숨겼던 보안부대장에게 "그렇다면 당시 이 사고 현장에서 한 일은 뭐냐"고 묻자 여기에 대해 그가 또 되풀이한 거짓말입니다. 그는 처음에 "숨진 장준하씨를 본 후 그냥 부대로 복귀한 것이 전부"라고 답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그게 말이 되냐"며 저는 집요하게 파고 들었습니다. "보안부대장이 사건 현장을 방문한 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것 같냐"라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오래 버티다가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사실은 자기가 한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털어놓은 그날 밤의 진실, 보안부대장은 현장을 다녀온 후 자신이 보고 확인한 사실에 대해 직접 문서를 작성한 후 이를 보안부대 통신병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통신병이 이 문서를 영문 텔레타이프로 작성, 이후 보안사령부와 직통으로 연결된 모종의 보안부대 시스템을 통해 당시 보안사령관 진종채에게 직보했다는 실토였습니다.

문서 분량은 'A4 반 장 분량의 영문 텔레타이프'. 과연 이 말은 또 어디까지 사실일까요?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이 문서를 입수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보안사령부의 후신인 오늘날의 기무사령부에 즉각 공문을 발송하게 됩니다. 1975년 8월 18일 새벽 2시에서 4시경 OOO부대 보안부대장이 진종채 보안사령관에게 직보한 텔레타이프 문서를 제출해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우리는 기대가 컸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실 의문사위는 장준하 선생 의문사를 조사하면서 기간동안 단 한 장의 문서도 기무사령부로부터 제출받지 못했습니다. 국정원은 그래도 중정 존안 문서를 상당 부분 협조해 줬습니다. 다만 우리가 필요한 문서에 대해 끝내 '모르쇠'해 논란이 됐지만, 기무사의 경우는 완전 달랐습니다.

기무사는 그야말로 '단 한 장의 문서'도 의문사위에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문사위 조사가 끝난 후 국정원 직원은 개인적으로 섭섭하다는 말을 우리에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의문사위에 자료 제출을 했는데 국정원과 기무사를 똑같은 수준으로 비판하는 것은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푸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기무사 직원이 국정원 직원에게 했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습니다. 기무사 직원이 국정원 직원에게 "의문사위가 달란다고 정보기관이 존안 자료를 내주는 게 무슨 정보 기관이냐? 우리는 단 한 장의 문서도 주지 않고 버텼다"라며 조롱했다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기무사는 장준하 선생 의문사와 관련해 요청한 문서에 대해 단 한 장도 주지 않고 버틴 것이 사실입니다. 왜 없느냐고 하니 '없으니 없다'는 식의 막무가내 답변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사를 통해 확인한 이 보안부대장의 영문 텔레타이프 한 장에 대해서는 확신했습니다. 적어도 이 문서에 대해서는 절대 피해갈 수 없는 확실한 증거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역시나 였습니다. '존안 자료 없음' 그 여섯 글자가 전부였습니다. 과연 그 자료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요? 처음엔 "민간인 사망 사고에 왜 군인이 가냐?"며 사건 개입을 부인하던 그가 마침내 진실을 토로하며 밝힌 진종채 보안사령관에게 전달한 이 문서. 저는 이 문서가 지금도 분명 '기무사령부 문서고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대통령과 보안사령관, 47분간 독대 밀담 밝혀져야

기사 관련 사진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부전선의 한 포병부대 및 최전방 초소를 시찰하고 있는 모습.


그런데 이처럼 장준하 선생 의문사 과정에서 확인되는 '보안사 개입 의혹'의 화룡정점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1975년 8월 18일, 그러니까 보안부대장이 진종채 보안사령관에게 직통으로 영문 텔레타이프 문서를 보낸 바로 그날 오후의 일입니다. 

한 명의 남자가 조용히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갑니다. 그는 박정희 유신 독재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권력 기관의 수장이었습니다. 시간은 8월 18일 오후 4시 35분경. 1975년 '청와대 의전일지'에 기록된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간 장소가 매우 특이했습니다. 정상적인 업무였다면 이해할 수 없는 청와대 서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마주한 그 사람, 바로 진종채 보안사령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약 47분간의 독대. 과연 이 시간동안 진종채 보안사령관은 대통령 박정희에게 무엇을 보고했을까요? 분명하게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바로 다음날, 관련 부대장으로부터 새벽녘 영문 텔레타이프로 보고를 받은 진종채 보안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과 만나 이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과연 이 말을 믿을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더 특이한 점은 보안사령관이 대통령과 단독 면담한 일은 1975년 들어 이 날이 처음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날, 이처럼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제 글을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장준하 선생 의문사를 국가 차원에서 재조사해야 한다"는 주장과 "이미 충분히 조사했고, 그래서 더 해봐야 소용없다"는 주장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들어야 할 말이 더 있고, 보안사에게 묻고 싶은 의혹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두 명의 군인은 누구인지,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가 유족에게 전화를 건 장소는 어디인지, 또 밤 12시에 사건 현장에 복귀한 목격자 김용환과 같은 시각 현장에 나타난 보안부대장의 동행 의혹 및 이후 보안사령관에게 부대장이 보냈다는 직보 텔레타이프 행방과 그 내용은 무엇인지 우리는 보안사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청와대 서재에서 있었던 '그날의 밀담'입니다. 장준하 선생 사망 다음날, 보안사령관 진종채와 박정희 대통령 사이에서 있었던 그 특별한 독대 밀담은 '반드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대한 의혹'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41년 전 그날, 장준하 선생이 변사체로 발견된 의문을 풀 수 있는 또 하나의 열쇠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의문1] 장준하 선생 사망 사건 현장에 있었던 두 명의 군인은 누구인가
  • [의문2]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가 유족에게 전화를 건 장소는 어디인가
  • [의문3] 사건현장에 복귀한 목격자 김용환과 같은 시각 현장에 나타난 보안부대장은 동행했는가
  • [의문4] 보안부대장이 이후 보안사령관에게 보냈다는 직보 텔레타이프에는 뭐라 써있는가
  • [의문5] 사건 다음날 박정희 대통령이 보안사령관 진종채를 독대하며 나눈 밀담의 내뇬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동안 묻힌 국가 차원의 재조사 노력과 앞으로 이어가야할 일들은 무엇인지, 그 해답은 3편에서 밝히겠습니다.




기무사 비밀 보고서... 장준하 미스터리 풀 열쇠

장준하 '타살'... 박 대통령 특별법 결단해야


▲  1975년 8월 22일에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장준하 선생의 장례식 모습, 영정 사진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장준하 선생의 막내아들 장호준


지금으로부터 만 2년여 전인 2014년 8월 초의 일이었습니다. 이날 저는 인기 팟캐스트 '이이제이'에 출연합니다. 그리고 약 2시간에 걸쳐 장준하 선생 사인 의혹이 무엇인지 그리고 국가 차원의 재조사는 왜 필요한지 소상하게 밝혔습니다.

그런데 방송 녹음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었습니다. '이이제이'를 진행하는 이동형 작가로부터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혹시 아직도 다 말하지 않은 진실이 있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잠시 멈칫했습니다. 해야할 진짜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어진 다음 말은 이랬습니다.

"네.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밝힐 수 없구요. 앞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국가 차원의 조사가 이뤄질 때 밝히려 합니다. 지금 밝히면 증거들이 모두 은폐되거나 폐기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향후 국가 차원의 조사기구가 출범하면 그때 사건을 담당하는 조사관에게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협조하여 반드시 이 사건이 해결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방송이 있고 만 2년이 지났습니다. 또 장준하 선생이 '외부 가격에 의한 타살'이라고 법의학 전문가인 서울대 의대 이정빈 박사가 공식 발표한 날로부터 어느덧 만 4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실은 이렇게 묻히고 장준하 선생 41주기를 맞이하고 있는 오늘입니다.

그래서 고민했습니다. 41주기를 맞이하는 2016년 8월 17일을 맞이하면서, 유신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으로 앉아 있는 현 정국에서, 그리고 1988년 이래 처음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출범하고 있는데 여전히 아무런 변화없이 장준하 선생 41주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참담했습니다.

사실 사인규명 특별법 제정을 가장 크게 기대한 때는 19대 국회였습니다. 19대 후반기 국회의장이 된 정의화 의원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2012년 8월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외부 가격흔이 확인된 후 당시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정의화 전 의장은 자신의 트위터에 매우 의미심장한 글을 남겼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이 신경외과 전문의인 내게 외치고 있는 듯하다. 타살이라고!"

이 글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정말 이 글을 새누리당 중진 국회의원이 직접 쓴 글인지 처음엔 저 역시도 선뜻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정 전 의장은 이런 세간의 의구심에 대해 다시한번 트위터를 통해 확실히 밝혔습니다.

"돌베개 베고 천릿길 돌아 상해 임시정부 찾았던 일본군 탈출병, 장준하 선생의 주검을 보면서 고인의 죽음을 슬퍼한다. 국회에 들어오기 전부터 국민 한 사람도 억울한 죽음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새로운 증거가 나왔으니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재조사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이제 와서 밝히지만 사실 저는 이러한 소신으로 정의화 전 의장께서 이후 정치적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특히 19대 국회 후반기 의장에 도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지경에 가능할까" 회의적인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 전 의장께서는 국회의장으로 당당히 당선이 되었습니다.

더 다행인 점은 정 전 의장께서 국회의장으로 당선된 이후에도 그 분 소신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장준하 선생 40주기 추모제가 있었던 2015년 8월 17일, 파주 장준하 공원에서 당시 국회의장 신분으로 참석한 정의화 의장의 연설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뛰게 하였습니다. "내가 의장으로 있는 동안 장준하 특별법이 제정되도록 더욱 노력할 것"이라는 딱 부러지는 연설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정의화 전 의장님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특별법은 끝내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9대 국회 임기를 끝나면서 법안 역시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이것이 장준하 선생 추모 41주기를 맞이하는 지금까지도 국가 차원의 재조사가 이뤄지지 못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장준하 타살 의혹 외면 말아야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경기도 포천 이동면의 운악산 약사봉 전경


[관련기사] 새로운 가설, '중정은 장준하를 살해하지 않았다'
[관련기사] 장준하 타살, 보안사가 답할 '진짜 의혹' 5가지

이 글을 연재하면서 여러 반응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장준하 선생을 가해한 기관을 중정으로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보안사일 가능성에 대해 여러 근거를 제기하자 일어난 반응입니다. 어떤 분은 "정말이냐"며 되묻기도 하고, "이런데 왜 재조사가 이뤄지지 않냐"며 분개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반면 "이러한 의혹 공개로 증거자료를 폐기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저 역시 이런 사실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조사관으로서 새로운 확신을 갖고도 지난 4년간 침묵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저 빠른 시간내에 새로운 특별법이 제정되어 이 중대한 의혹에 대해 국가 차원의 재조사가 이뤄지기를 누구보다 학수고대 했습니다. 그리하여 타살 정황이 분명해진 이 사건의 전모가 조속히 규명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만의 기대였고 희망이었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41주기 기일을 맞이하는 오늘까지도 국가 차원의 재조사는 난망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 가슴 아픈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2년 후인 2018년이 1918년에 태어난 장준하 선생님의 탄생 100년을 맞이하는 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2년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한 해 앞선 내년 2017년은 또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지 100년째 됩니다. 그는 바로 '쿠데타 유신독재자' 박정희 전 대통령입니다. 1917년생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장준하 선생님이 앞뒤로 탄생 100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탄생 100년을 맞아 탄신제를 한다며 엄청난 국가 세금을 배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도 속상합니다. 눈물이 납니다. 광복군으로, 그리고 일생을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운 장준하 선생은 그 사인조차 밝혀지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는데, 반면 민족을 배신하고 쿠데타로 민주주의를 짓밟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가 세금으로 탄신을 기념한다고 난리법석을 떨려 하는 이 나라 현실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장준하 선생님이 태어난 지 100년을 맞이하기 전에 이것 하나는 종지부를 찍어야 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바로 그 오래된 논란, 사인 규명에 대한 종지부입니다. 이를 위해 저는 국민에게 직접 장준하 선생의 사인 규명이 왜 필요한지, 무엇을 더 조사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지적하여 호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이 조사에 필요한 특별법 제정을 국민의 뜻으로 20대 국회가 처리할 수 있도록 한목소리로 외쳐 달라며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이 사건의 새로운 가설을 오마이뉴스를 통해 밝힌 이유입니다. 여전히 남은 이 사건의 의혹,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지 않을까요?

부모 잃은 아픔 박근혜, 장준하 선생 유족에 비할까 

박근혜 대통령은 얼마 전 사드 배치 문제로 국민의 비판이 높아지자 뜬금없이 "가슴이 시리도록 아프게 부모를 잃었다"며 국민에게 감정적인 호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저 역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가슴 아팠던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처지가 안쓰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유족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박정희를 떠나 보낸 때는 만 27세였습니다. 하지만 장준하 선생의 막내 아들 장호준 목사가 아버지를 잃은 때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만 16세 때의 일입니다. 그 어린 고등학생이었던 장호준은 내내 박정희로부터 고통받았던 아버지가 낯선 땅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그 험한 길을 찾아가며 내내 울부짖습니다.  

당시 이러한 장호준 목사와 함께 있었던 이동파출소 이수기 순경은 그 모습을 저에게 전하며 눈물 흘렸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어린 고등학생이 독재자 박정희를 원망하며 절규하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제 앞에서 술회했습니다. '가슴 시리도록 아프게 아버지를 잃었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고통이 이 날 장준하 선생의 막내 아들 장호준 목사만 했을까요.

또한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장례 후 쫓겨나듯 청와대를 나왔다고 회상하곤 합니다. 하지만 비참하게 쫓겨난듯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청와대를 나오는 그날 만 27세의 박근혜 당시 '영애'는 빈손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청와대 집무실 금고에 넣고 쓰다 남겼다는 6억 원이 넘는 정치 자금을 비롯하여 육영재단, 영남대학교, 정수 장학회, 그리고 이후 전두환이 임기중 챙겨 줬다는 성북동 한옥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재산과 권력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장준하 선생의 유족은 달랐습니다.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다음날, 시신이 면목동 전셋집으로 옮겨진 후 마련된 빈소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조문객에게 접대할 음식조차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장준하 선생님이 남긴 재산은 7명의 가족이 사는 비좁은 전셋집 한 칸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문 온 이들은 자기 돈으로 술과 음식을 사와 나눠 먹었다고 합니다. 

더 큰 문제는 당장 장준하 선생을 모실 묘 자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돈이 없는데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런데 다행히 이 문제를 해결해 준 고마운 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님이었습니다. 장례 기간 내내 유족을 감시하던 중정이 남긴 '중요상황 보고'에 의하면 김수환 추기경이 부인 김희숙 여사에게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김수환 추기경은 장지 결정을 하지 못하여 고민하던 부인 김희숙 여사에게 "파주에 있는 천주교 공원 묘지에 장 선생을 안장하세요. 그 비용은 제가 책임질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비명에 간 그때, 이제 남은 자녀와 함께 지독한 유신 독재 한가운데에 내던져진 그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하면 그저 눈물나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마지막 가는 길에 장례비용조차 걱정해야 했던 장준하 선생은, 그러나 그의 사후 41주기를 맞이하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방치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역사 정의 수준이니 말을 해 무엇 하겠습니까.

더민주 김해영 국회의원, 20대 국회 최초 '장준하 특별법' 발의

▲ 김해영, '장준하 사인규명 특별법' 발의 더불어민주당 김해영 의원을 비롯한 46명의 국회의원이 고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를 규명하기 위해 '장준하 사건 등 진실규명과 정의실현을 위한 과거사 청산 특별법'을 발의했다. 김해영 의원과 고 장준하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씨, 고상만 전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은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법안 발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 의원은 "고 장준하 선생의 죽음의 원인은 많은 의문과 의혹에 쌓여 있고 장 선생님뿐만 아니라 위법,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발생한 사망, 상해, 실종 사건이 많이 있다"며 "특별법을 제정해 진실정의위원회를 설치하고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법안 발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41주기 기일을 앞두고 대한민국 20대 국회에서 '장준하 선생 등 과거 독재권력하에서 의문사한 이들의 진실을 밝히는 진상규명 특별법'을 16일 발의했습니다. 이 특별법에는 대표발의해 주신 더불어민주당 부산 연제구 출신의 김해영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모두 46분의 국회의원이 공동 발의에 참여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 '고맙고 정의로운 법안 공동 발의에 참여해 주신' 46분의 국회의원 이름을 한 분 한 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라도 이 의원님들에게 제 고마움과 존경심을 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장준하 특별법 공동발의 의원 명단] 
<더불어 민주당> 김해영·이용득·기동민·이찬열·권칠승·이철희·최운열·유승희·위성곤·김현미·김병욱·이훈·유은혜·전현희·박용진·박홍근·노웅래·김태년·김경협·백혜련·윤호중·김영춘·강병원·윤후덕·강창일·김철민·황희·이춘석·신창현·임종성·강훈식·신경민·신동근·김정우·안규백 의원, <국민의당> 이동섭·채이배·이용주·유성엽 의원, <정의당> 윤소하·김종대·추혜선·심상정·이정미 의원, <무소속> 윤종오·서영교 의원 (총 46명)

이제 남은 일은 이 법의 통과입니다. 장준하 선생님이 태어난 100년을 맞이하기 전에 사인을 명백히 밝히려면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습니다. 국가 차원의 조사가 필요한 이유 역시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장준하 선생님은 타살되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반박할 여지없는' 진실입니다. 박정희 권력이 만들어낸 실족 추락사는 2012년 8월 장준하 선생님이 스스로 드러낸 증거에 의해 확인되었습니다. 외부 가격에 의한 두개골 상흔, 이보다 더 분명한 타살 증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타살한 가해자가 누구인지만 밝히면 될 일입니다. 진실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건 당일 그날, 사고 현장을 무수히 오갔던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 요원에 의해 작성되고 보고된, 그래서 지금도 그들의 문서고에 틀림없이 존안되어 있는 문서만 찾으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그 문서를 찾으러 갑시다. '대한민국이 거꾸러져도 절대 안된다'며 끝내 문서고 개방을 거부했던 기무사가 있는 한 어렵다는 분도 있습니다. 더 이상의 자료는 없다며 끝끝내 사건 당일 밤 9시 이후 추가보고 문서를 제출하지 않는 국정원의 비협조 때문에 되겠느냐며 회의적인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장담합니다. 특별법만 제정할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이 도와주십시오. 다시금 국가 차원의 조사 기구만 출범할 수 있다면 반드시 됩니다. 진실이 걸어서 나와 마침내 정의의 문을 난타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진실은 더디게 오지만 우리는 끝내 승리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41년 전 이미 그때 죽어버린 진실이 다시 걸어 여기까지 온 것을 보십시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정의는 패배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자 장준하 선생님이 걸어온 그 길처럼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뚜벅 뚜벅 그 길을 걸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합시다.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겠다며'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반독재 민주화의 길을 걸어간 장준하 선생님처럼 '우리 역시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지 않겠다고'.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님. 대한민국의 진짜 애국자, 장준하 선생님. 우리 역시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 죽음, 반드시 밝힐 것입니다. 그날까지 고이 잠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