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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역사와 책임 - 한홍구 (한겨레 연재)

by Wood-Stock 2014. 5. 26.

[사람이 중심이다] 세월호 참사 특별기고

역사와 책임 (1) 세월호의 악마들, 대한민국의 악마들…


세월호는 우리에게 준엄한 물음을 던진다. 책임이란 무엇인가?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속옷 바람으로 도망치는 어처구니없는 선장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저 기막힌 모습을 우리는 역사의 굽이굽이에서 많이 보아왔다. 어쩌면 저 징글징글한 모습을 되풀이해서 또 보게 될는지도 모른다. ‘세월호의 악마’라 불린 선장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생하게 동영상으로 되풀이해서 보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의 역사 속에 세월호의 악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악마들은 너무도 많았다. 어찌 도올 선생 글에서 지적된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나 한국전쟁 때의 이승만뿐이랴.


등짐을 진 피난민들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폭파된 한강철교 옆에 임시로 놓인 부교 위를 건너고 있다. 피난민들은 소에 짐을 싣고 가다 식량이 떨어지면 잡아먹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세월호 사건이 있기 바로 전, 우리 사회는 태안 앞바다에서 해병대 캠프에 참가했던 고등학생 5명이 파도에 휩쓸려 숨지는 비극을 겪었고, 두 달 전에는 경주에서 리조트 체육관이 붕괴하여 대학생 10명이 숨지는 비극을 겪었다. 이런 사전 경고음에도 불구하고 세월호라는 사고가 또다시 터지니 참담하고 황망하기 짝이 없다. 서너 달 지나면 앞의 사고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월호 사고도 잊혀져버리는 것일까? 세월호 사고가 경고음이 될까봐 불안하다. 세월호가 가라앉던 바로 그날, 핵마피아가 포함된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설계수명이 다한 핵발전소 고리 1호기의 재가동을 승인했다. 규제 완화?수명 연장-납품비리-마피아의 상호 묵인…. 예고된 인재의 모든 것이 그대로다. 21년 전 서해훼리호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운 것일까? 사고가 터지면 그때만 이것저것 대책이 난무할 뿐, 사고는 또다시 망각의 함정에 빠진 우리를 덮쳐온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의 무책임, 끼리끼리 해먹는 ‘해피아’, 인명 경시, 안전 불감증…. 하나하나의 진단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런 문제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다는 점이다. 혁명을 통해 단칼에 얽힌 매듭을 끊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찬찬히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들이 얽혀온 과정을 돌아보아야 한다. 세월호 사건 이후 많이 이야기된 것이지만 1950년 6월 북한군의 전면 공세 이후 대통령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던 무렵으로 돌아가보자.

우리의 역사 속에 세월호의 악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악마들은 너무도 많았다. 1950년 6월 북한군의 전면 공세 이후 대통령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던 무렵으로 돌아가보자.

가만있으라 세월호에, 가만있으라 서울에

세월호 선장 이준석이 그랬던 것처럼 이승만은 북한의 공격으로 함락 위기에 빠진 수도 서울에서 제일 먼저 달아난 사람이었다. 전쟁이 발발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던 호언과는 달리 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27일 새벽 1시에 소집된 비상국무회의에서는 서울시민의 피난에 대한 계획은 세우지 않고, 수원 천도를 결정했다. 새벽 3시, 국군통수권자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이승만을 태운 특별열차는 수원에 멈추지 않았다. 새벽 5시 대전을 통과하여 오전 10시, 대구에 도착했다. 누군가가 “각하, 너무 많이 오셨습니다”라고 진언한 게 틀림없다. 평양이 아니라 대구에서 점심을 드신 이승만은 기차를 돌려 대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장거리 전화로 서울의 중앙방송국을 연결해 “유엔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내용의 방송을 녹음했다. 케이비에스(KBS)는 이 방송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까지 내보냈다고 한다. 이승만은 방송에서 자신이 대전에 내려와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시민들은 그가 자신들과 함께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방송만이 아니었다. 신문도 잘못된 정보를 쏟아내고 있었다. 6월27일치 <동아일보>는 “국군정예 북상 총반격전 전개”라는 제목으로 국군이 해주시를 완전히 점령했다고 보도했고, 같은 날 <경향신문>도 “아군의 용전”에 괴뢰군이 전 전선에서 패주 중이라며 국군이 해주시에 돌입했다고 했고, 6월28일치 <조선일보>는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했다고 썼다.

언론이 시민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마구 보내고 있을 때 이승만은 한강 다리 폭파를 준비했다. 6월28일 새벽 2시30분쯤 총참모장 채병덕 일행이 한강 인도교를 지난 직후 육군공병감 대령 최창식은 한강 다리 폭파를 명령했다. 시민들에게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해놓고 자기들만 빠져나간 뒤 다리를 끊어버린 것도 참으로 문제지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은 폭파 당시 한강 다리에 피난민이 가득 있었다는 점이다. 아비규환, 다리 위에 몇 명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고, 시신을 수습한 것도 아니니 도대체 몇 명이나 억울한 죽음을 당했는지 알 수가 없지만, 관련자들은 적게는 500명, 많게는 1500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통령이 피난 갈 수는 있다. 꼭 스탈린처럼 모스크바 코앞까지 진출한 독일군의 포성 속에서 크레믈(크렘린) 궁전에 버티고 앉아 모스크바 방어전투를 지휘하는 게 능사가 아닐 수도 있다. 대통령이 피난 갈 때 백만이 넘는 서울 시민 모두와 피난 가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니 알리지 못하고 빠져나가는 궁색한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고 치자. 배수진을 치고 장렬하게 전사할 것이 아니라면 급하게 도망가며 다리도 끊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다리를 끊을 때도 법도가 있고, 버려진 서울 시민들을 다시 만날 때도 예의가 있는 법이다.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1950년 6월27일치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28일치<조선일보> 1면. 한홍구 교수 제공

최창식과 채병덕 - 이승만의 희생양들

9월15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지고 서울 탈환이 임박하자 이승만 정부 안에서는 환도 후 어떻게 서울 시민과 대면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 정권은 희생양을 찾았다. 다리 폭파의 현장 책임자였던 29살의 젊은 대령 최창식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바로 그날 임시수도 부산에서 열린 계엄고등군법회의는 최창식에게 국방경비법 27조의 ‘적전비행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최창식은 자신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당시 판결문은 최창식의 한강 다리 폭파로 막대한 차량과 군인이 추락하고 무사한 차량 장비 및 군수물자가 적에게 노획되고 수만 병력이 도강을 하지 못하는 혼란이 발생했다고 모든 책임을 최창식에게 돌렸다. 9월21일 최창식은 부산 교외에서 사형되었다.

한강 다리 폭파와 관련된 또 다른 중요 인물인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도 최창식에 앞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채병덕은 전쟁 발발 직후인 6월30일 초기 패전의 책임을 지고 총참모장에서 해임되어 ‘경남 지구 편성군 사령관’으로 밀려났다. 채병덕은 7월24일 국방장관 신성모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내용은 귀하는 서울을 잃고 중대한 패전을 당하여 책임이 매우 무거운데, 지금 적이 전남에서 경남으로 향하고 있으니 이 적을 막기 위해 선두에 서서 독전하라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죽음으로 패전의 책임을 갚으라는 것이었다. 이 편지를 받은 사흘 뒤 채병덕은 ‘전사’했다고 발표되었다.

그의 죽음을 놓고 온갖 소문이 난무하지만 영미권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고전적인 대중서인 페렌바크의 <이따위 전쟁>에 의하면 채병덕은 7월27일 하동고개에서 미군복을 입고 오는 한 무리의 군인들과 맞부딪쳤다고 한다. 채병덕이 “어느 부대냐?”고 외치자 그들은 채병덕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다. 채병덕의 부관은 덩치가 큰 채병덕의 시신을 간신히 끌고 와 차에 실었다. 채병덕의 뒤를 이어 총참모부장이 된 정일권의 회고록에 따르면 내무장관 조병옥은 “채병덕 장군이 애석하게 전사했어도 뒷이야기가 이러쿵저러쿵 많은 것”은 그가 적의 탱크가 미아리 문턱까지 왔는데 “걱정 말라 걱정 말라” 하다가 “수많은 서울 시민들을 지금 생지옥에 갇혀 있게 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강 다리 현장의 공병감 최창식과 국방장관 신성모를 거쳐 이승만으로 이어지는 한강 다리 폭파의 명령 체계의 중간고리는 이렇게 진즉 끊어져 버렸다.

거룩할진저, 그 이름은 ‘남하’한 애국자로다

서울 시민을 속이고 다리 끊고 도망간 이승만은 서울에 돌아올 때 서울 시민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을까? 세월호 사건 후 박근혜 대통령은 비록 옆구리 찔러 절 받기였지만 유가족과 시민들의 거센 분노에 못 이겨 몇 차례 사과를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리 끊고 도망친 직후 이승만을 따라온 신익희, 장택상, 조봉암 등 국회의장단은 충남 도지사 관저에 머물고 있는 이승만을 찾아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팔을 벌리는 제스처를 써가며 “내가 당 덕종이야?”라며 한마디로 사과를 거부했다고 한다. 당 덕종은 반란을 진압한 뒤 백성들이 난에 휩쓸린 것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사과한 바 있다. 이승만을 대신해서 사과한 것은 전쟁 발발 이후 각종 방송에 대한 책임을 맡은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이었다. 다리 끊고 거짓 방송 하고 도망친 일이 어디 일개 국장의 사과로 끝날 일인가.

강을 건너 도망쳤다 돌아온 ‘도강파’가 서울에 남아야 했던 ‘잔류파’에게 돌려준 것은 사과도 위로도 아닌 “정실과 관용과 누락이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서슬 푸른 ‘부역자 처벌’이었다. 그러나 인천 상륙에서 서울 탈환까지 거의 2주가 걸렸는데 엄중 처벌을 받아야 할 부역자들이 여전히 서울에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진짜 부역자라고 불릴 만한 자들은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올라갔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총 든 자들이 와서 짐 나르라니 짐 나르고 집회 나와 만세 부르라니 만세 부른 그런 사람들이었다. 전쟁 당시 서울에 남았던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성칠은 일기에서 “악질들은 제 한 깐이 있으니까 미리 다 도망”해버리고 “나는 악질로 굴지 않았으니 나쯤이야” 하고 마음 놓고 있던 사람들만 잡혀가서 경을 쳤다고 썼다.

부역자 처벌은 일부 극우세력에게는 엄청난 재산 축적의 기회이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서울 수복 3주가 안 되어 계엄사령관이나 헌병사령관이 부역자 처벌을 빙자하여 살인과 고문을 자행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악질 도배들을 철저히 소탕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을까. “허무맹랑한 사실로써 선량한 시민을 악질 부역자로 날조하여 이를 처단케 함으로써 그들의 가산 기타 금품을 탈취하려는 부류”가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를 ‘일부 청년단체’의 간부와 성원들의 일탈로 몰고 가려 했지만, 못된 짓을 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외신들은 이와 같은 만행이 경찰과 군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연일 보도했다.

…너무 멀리 도망간 각하

김성칠은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어리석고도 멍청한 많은 시민(서울 시민의 99% 이상)은 정부의 말만 듣고 직장을 혹은 가정을 ‘사수’하다 갑자기 적군을 맞이하여 90일 동안 굶주리고 천대받고 밤낮없이 생명의 위협에 떨다가 천행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눈물과 감격으로 국군과 유엔(UN)군의 서울 입성을 맞이하니 뜻밖에 많은 ‘남하’한 애국자들의 호령이 추상같아서 ‘정부를 따라 남하한 우리들만이 애국자이고 함몰 지구에 그대로 남아 있은 너희들은 모두가 불순분자이다’ 하여 곤박이 자심하니 고금천하에 이런 억울한 노릇이 또 있을 것인가!” 김성칠은 그날의 일기를 “거룩할진저, 그 이름은 ‘남하’한 애국자로다”라는 탄식으로 마무리했다. 이것은 적반하장의 극치였다. 다리 끊고 도망갔던 자들이 돌아와 남은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어찌 이념의 문제겠는가. 그것은 싸가지 문제였을 뿐이다.

전향자들의 단체인 보도연맹을 관리했던 대표적인 공안검사 정희택 역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숨어 있어야 했다. 그는 인민군에게 잡히면 살아남을 수 없는 처지였기에 땅굴을 파고 권총을 몸에 지닌 채 77일을 쪼그려 있었다고 한다. 간신히 살아남은 그는 정부가 환도하자 지팡이를 짚고 법무장관 이우익에게 인사를 갔다. 장관이 살아 돌아온 정희택을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이제부터 잔류파에 대해서는 부역 여하를 막론하고 수사해서 재판에 회부한다”는 것이었다. 정희택은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지팡이로 장관의 책상을 내리치며 “수도를 사수하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애국시민을 유기한 채 도망간 자는 누구인가. 당신들이야말로 한강의 남쪽 강가에서 잔류 시민들에게 사과하고 허가를 얻은 후에 들어왔어야 했다”고 외쳤다고 한다. 이승만의 거짓 녹음방송에 앞서 서울 사수를 호소하는 즉흥시를 생방송으로 내보냈던 모윤숙도 피난을 가지 못했다. 모윤숙은 9월30일 경무대에 가서 이승만을 만나자 분한 생각이 가슴에 북받쳐 넥타이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하며 “할아버지, 도대체 나를 부려먹고 막판에는 방송을 시키고 혼자만 살려고 피난 가기예요?” 하고 바락바락 악을 썼다고 한다. 이렇게 대통령 넥타이에 매달리고 장관 책상을 지팡이로 후려치기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당대 최고의 우익 인사였기 때문이다. 이도저도 아닌 사람에게는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앞줄 맨 왼쪽)이 1952년 7월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방문해 반공 포로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서울 시민을 속이고 다리 끊고 도망간 이승만은 서울에 돌아올 때 서울 시민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을까? 이승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강을 건너 도망쳤다 돌아온 ‘도강파’가 서울에 남아야 했던 ‘잔류파’에게 돌려준 것은 사과도 위로도 아닌 서슬 푸른 ‘부역자 처벌’이었다.

앞줄 사형, 뒷줄 무기

다리 끊고 도망갔다 기세등등하게 돌아온 자들에게 도대체 몇 명이나 목숨을 잃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법무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정부 수립 이후 마지막 사형이 집행된 1997년까지 사형당한 사람은 군 관련 사건 120명을 포함하여 모두 919명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대한민국 정부가 제시하는 통계 중에서 가장 엉터리 통계일 것이다. 이 자료에서 한국전쟁 이전과 전쟁 기간 중의 통계는 전혀 믿을 것이 못 된다. 부역자 처벌 과정에서는 9·28 서울 수복에서 1·4 후퇴 사이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1950년 11월25일 동아일보 기사에 사형이 선고된 부역자가 867명이고 이 중 이미 사형이 집행된 사람은 161명에 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부산일보> 1950년 11월27일치에는 11월24일에 322명의 공산당 협력자에 대한 형 집행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1950년 12월11일 주한미국대사관의 ‘한국 정부의 부역자 처리에 관한 보고’에 따르면 11월8일까지 합동수사본부에 체포된 1만7721명 중 민간법정에서 사형이 선고된 사람은 353명, 계엄군법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사람은 713명,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된 사람은 232명이었다. 오죽했으면 “앞줄 사형, 뒷줄 무기”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한국군의 ‘잔인하고 범죄적’인 처형 장면을 보다 못한 영국군이 사형 집행을 중단시키는 등 이승만 정권의 무자비한 사형 집행은 외교문제로도 비화되었다. 박완서가 탄식했듯이 “친일파의 정상은 그렇게도 잘 참작해 주던, 그야말로 성은이 하해와도 같은 정부가 부역에는 그다지도 지엄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일제가 가혹했다지만, 일제 36년간 사형당한 독립운동가 수는 3개월 인민군 점령 기간에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목숨을 잃은 시민 수에 한참 못 미친다. <한국경찰사> 제2권에 따르면, 인민군 치하 3개월간에 걸친 부역자 중 검거 15만3825명, 자수 39만7090명으로, 총 55만915명의 부역자가 처리되었다. 이들과 그 가족들은 두고두고 연좌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양심 없는 자들은 한몫 볼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부역자 처벌에 열을 올렸지만,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서울지방법원 판사로서 부역자 처벌 재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유병진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간행한 <재판관의 고민>이라는 저서에서 부역자 재판의 문제점을 생생하게 지적했다. 조금 길지만 유병진의 고민을 들어보자. “우리는 서울시민에 대하여 왜 서울에서 후퇴하지 않았던가하고 이를 문책하여야 할 것인가? …… 평시민은 고사하고 또 중간파 거두를 내놓고라도 정부 장차관급의 몇 사람과 도지사까지, 아니 그 이상의 우익 요원들의 대부분이 탈출 못하지 않았던가! …… 그러면 탈출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자는 그 누구였던고! …… 일단 진격의 명령만 내리면 1주일 이내 압록강까지, 아니 백두산에 태극기를 휘날린다던 군부의 호언을 믿고만 있었던 시민에게 27일 밤의 대통령 특별방송은 일층 진실로 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그러고 본다면 서울시민의 잔류는 정부에서 시킨 셈인가? 결론이 이에 이르니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부녀자들이 끌려오는 경우가 자꾸 늘어났다. 그 죄목은 여성동맹 간부로 “인민군에 제공하기 위하여 된장 고추장 혹은 놋그릇 등을 수집하여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일제 말기에 일본이 전쟁물자가 부족해지자 가가호호를 수색하여 놋그릇을 걷어 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제와 싸웠던 미군이 한반도 남쪽을 점령한 뒤 일제에게 놋그릇을 바쳤다거나 일본 군대에 나갔다고 처벌한 적은 없었다. 인민군도 남쪽을 점령한 뒤 이승만 정권에 세금 바쳤다고 사람들을 못살게 굴지는 않았다.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나날이었다.

얼마 전 한국방송(KBS)에서 ‘한국의 유산’이란 공익광고에서 대한의 잔다르크로 불리면서, “독립투사들의 주린 배를 채워준 임시정부의 영원한 안식처, 그 어머니를 기억합니다”라고 소개되었던 정정화도 부역죄 처벌을 피해가진 못했다. 과거 임시정부 시절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북에 갔다가 전쟁 때 내려온 것을 만난 죄였다. 독립운동 시절 잡혀간 적 있었던 종로경찰서에 정정화는 해방되었다는 조국에서 다시 잡혀갔다.

‘안의사’의 후예들

임시정부의 어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부역자들의 처벌에 앞장선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것은 냉전과 분단의 틈바구니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에서 애국적 반공투사로 화려하게 변신한 김창룡, 원용덕, 노덕술 같은 자들이었다. 관동군 헌병 보조 출신에서 이승만 시절의 특무부대장(보안사령관)으로 출세한 김창룡은 여순사건 직후의 숙군사업에서 남로당 프락치로 적발된 박정희를 수사했던 장본인이지만, 같은 만주 출신이란 이유로 원용덕, 백선엽, 정일권 등과 함께 박정희를 살려준 자이기도 하다. 서울 수복 후 군검경 합동 수사본부 본부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김창룡은 이승만의 최측근으로 수많은 공안사건을 조작했다. 김창룡의 손을 거친 공안사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 사건이다. 안두희에 따르면 김창룡은 자신이 백범을 암살하자 자신에게 “안 의사, 수고했소”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이들의 세계에서 ‘안 의사’란 안중근 의사가 아니라 백범 살해범 안두희였다. 김창룡이 박정희와 앞뒤로 서서 찍은 사진이나, 김창룡이 백선엽, 이후락 등과 어깨동무하고 찍은 사진은 한국 공안권력의 뿌리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50년대 후반 공안조작사건의 대표적인 희생자는 조봉암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농림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주도하고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두 번 연속 2위를 차지한 거물 정치인 조봉암은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을 가장 위협할 인물로 꼽히고 있었다. 조봉암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던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내건 구호는 ‘평화통일’과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였다. 피해대중이 누구이겠는가. 바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며, 억울하게 부역자로 처벌받은 사람들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에게 간첩이라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씌워 그를 죽인 뒤 편안하게 1960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려 하였다. 그러나 1958년 7월2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진보당 사건 1심 선고공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은 조봉암은 예상을 깨고 간첩죄 부분은 무죄이고 국가보안법 위반만을 유죄로 인정하여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장은 유병진, 부역자 처벌의 부당성을 깊이 고민했던 바로 그 판사였다.


공안권력과 마피아들

7월5일 법원에는 반공청년을 자처하는 300여명이 들이닥쳐 “빨갱이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죽여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난동을 부렸다. 이 반공청년들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일제가 키운 군국소년들이었다. 정작 일본에서는 패전 후 미군이 군국소년들의 머릿속에서 군국주의 물을 빼는 작업을 벌였지만, 분단된 한국에서 미군은 그런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전쟁이 터지자 군국소년들은 군인이 되어 전쟁을 치렀고, 전쟁이 끝난 뒤 반공청년이 되어 “빨갱이 판사를 타도하라”며 법원에 난입했다. 박정희 시절, 이들은 향토예비군이 되어 “일하며 싸우고 싸우며 일하세”, “싸우면서 건설하자” 등을 외치며 병영국가 건설과 유신과업 수행에 앞장섰다. 그들은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없었다. 김대중 빨갱이, 노무현 빨갱이가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가스통 할배’, ‘애국 할배’가 된 1950년대 반공청년 세대는 요즘도 피디(PD)수첩 무죄, 미네르바 무죄, 강기갑 무죄, 한명숙 무죄 같은 판결을 쏟아내는 법원을 찾아가 “빨갱이 판사 타도하자”를 외치며 팔십 청춘을 불태우고 있다.



역사와 책임 (2) ‘관피아’ 출생의 비밀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고 몇 달 되지 않아 이승만은 4월혁명으로 축출되었다. 4월혁명의 불을 결정적으로 지핀 것은 김주열군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떠오른 일이다. 경찰이 허공이 아니라 시위대를 정조준해 쏜 최루탄이 김주열을 절명케 했고, 경찰은 그 시신을 돌을 묶어 바다에 유기한 것이다. 김주열에게 최루탄을 발사하고 그의 시신을 유기한 자는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경위 박종표였다.

박종표는 한동안 신문에 여러 차례 오르내렸고, 결국 혁명재판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박정희 정권의 특별사면으로 1968년 석방됨.) 그런데 박종표가 재판에 회부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949년 4월 반민특위는 아라이 겐키치(新井源吉)란 이름으로 일제의 악질 헌병보조원으로 활동했던 박종표를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그러나 1949년 6월6일 이승만의 지시를 받은 친일 경찰들에 의한 반민특위 습격사건으로 급격하게 무력화된 반민특위는 1949년 8월19일 박종표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던 악질 고등경찰 노덕술이 반민특위 습격사건 이후 풀려난 뒤 경찰에서 헌병으로 업종을 바꿔 부역자 처벌에 열을 올렸던 것처럼, 악질 헌병보조원 박종표도 반민특위를 거치면서 헌병에서 경찰로 업종을 바꿔 이승만의 충견이 되어 김주열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했다. 아, 반민특위여! 아, 한강 다리여! 아, 부역자 처벌이여! 아, 세월호여! 아, 대한민국이여!

일제의 악질 고등경찰과 헌병들이 가만있으라 거짓 방송하고 
다리 끊고 도망갔다가 돌아와 가만히 있은 사람들을 빨갱이로, 부역자로 잡아 죽이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것이 공안권력 출생의 비밀이다. 
지금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수많은 마피아 집단들은 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다.

분단과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몰아닥친 엄청난 비극이었지만, 친일파들에게는 하늘이 내린 축복이었다. 일제의 악질 고등경찰과 헌병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분단과 전쟁 때문이다. 일제의 악질 고등경찰과 헌병들이 어떻게 권력을 공고히 했는가. 가만있으라 거짓 방송하고 다리 끊고 도망갔다가 돌아와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을 빨갱이로, 부역자로 잡아 죽이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것이 수십년간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공안권력의 출생의 비밀이다. 그 후예들이 지금껏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공안권력은 대한민국 수구세력의 중추이다. 지금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수많은 마피아 집단들은 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다. 요즘 세월호 사건으로 해양수산부 출신의 해피아가 갑자기 부각되었지만, 어디 해피아뿐이랴. 재정경제부 출신의 모피아, 건설부 출신의 건피아, 교육부 출신의 교피아 등등 정부 부처 개수만큼이나 많은 관료 출신 마피아를 하나하나 따질 수 없어 싸잡아 관피아라 부른다고 한다. 어느 인기 개그맨이 치킨집 광고에서 신나게 “형님, 동생, 언니, 오빠, 친구, 처남, 동서, 사돈에게 권유해서 늘어난 체인점이 무려 ○○○개”라고 하는 것처럼 공안권력의 형님, 아우, 삼촌, 조카, 언니, 오빠, 누나, 동생들이 각계각층의 마피아가 되었다. 이들이 빨대 하나씩 꽂고 설계 변경하고 노후수명 연장하고 규제 완화하고 서로 전관예우 전통 물려주며 밀어주고 당겨주며 오순도순 사이좋게 대한민국을 운영해왔다. 다 밟아버린 줄 알았던 빨갱이들이 되살아나기 전까지.

송변과 차동영은 지금?

세월호의 아픔을 보면서 다리 끊고 도망갔던 친일파가 돌아와 무슨 짓을 했는지를 떠올리는 것은 진영논리에 빠진 것이고 정략적인 것일까. 아직 아이들을 물 밖으로 다 데려오지 못했는데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금이 단 한 번도 역사 앞에서 자기 책임을 다한 적이 없는 무책임한 족속들, 게다가 무능하기까지 한 족속들로부터 대한민국을 찾아올 수 있는 골든타임이기 때문이다. 2013년 말과 2014년 초 영화 <변호인>이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많은 사람들이 변호인을 보고 감동했다. 그런 송우석 변호사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참 뿌듯했다. 두 시간 동안. 영화가 끝나고 극장에 불이 켜지고 밖으로 나와 보면 세상은 변한 것이 없었다. 우리의 송변은 어디로 갔을까. 노무현은 어디에 갔을까. 노무현은 부엉이바위에서 떨어져 죽었건만, 그를 죽음으로 내몬 수사검사 우병우는 세월호 참사로 국가대개조나 거국내각이 얘기되는 상황에서 새로이 청와대 민정비서관에 임명되었다. 영화 속 차동영 같은 자들, 예컨대 이근안은 여전히 자신이 애국자이며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하겠다고 거침없이 말하고 있다. 차동영의 배후에 있던 강 검사 같은 자들의 맏형이 바로 김기춘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담당 검사를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발탁한 것이 김기춘이고, 그가 오랫동안 국장을 지낸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의 후배들은 지금도 간첩조작을 하고 있다.

부림사건의 주임검사 최병국은 얼마 전까지 울산에서 3선 의원을 지냈고, 새누리당 대표였던 황우여는 <변호인>의 모델이 된 부림사건과 같은 시기에 있었던 더 큰 공안사건(사형판결까지 나왔다)인 학림사건의 판사였다. 박근혜 정권 출범 직후까지 대한민국 국무총리였던 김황식은 재일동포 김정사에 대한 고문조작 간첩사건의 판사였다. 이 판결은 유기징역이 최고형인 내란음모 사건에서 김대중에게 사형판결을 내리게 한 ‘신의 한 수’였다. 한국 굴지의 법무법인인 태평양의 대표 변호사를 오래 지낸 가재환은 사법연수원장 시절, 법조인 교육 시스템에 법조 윤리를 도입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전두환 시절 대법원장 비서실장으로 5년간 있으면서 안기부의 압력을 사법부에 전달하던 창구 노릇을 톡톡히 했다. 세월호의 선장 이준석이 차라리 도망갈 수는 있다고 치자. 그러나 그가 돌아와 선장 윤리를 강의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책임졌던 보수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라도 좋으니까, 아니 원래 보수가 더 그런 거니까 역사 앞에서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이 그리울 뿐이다. 중국의 공산혁명을 이끈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의 무덤은 평양 외곽에 있다. 마오쩌둥이 백만 대군을 파병할 때 남의 집 자식들만 국경을 넘어 전쟁터에 내보낸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타 죽은 마오안잉을 마오쩌둥은 조선에 묻었다. ‘마오안잉은 마오쩌둥의 아들이다’라는 말과 함께. 수많은 중국 병사들의 유해가 조선반도 도처에 널려 있는데 어떻게 자기 새끼만 고향으로 데려가냐는 뜻이었을 것이다. 마오쩌둥이 수많은 정치적 과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한국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의 26살 새신랑이었던 아들은 아버지의 60살 생일을 축하해주고 얼마 후 북한 지역으로 출격하였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미군 장성의 아들 중에 아버지와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한 사람이 145명이고 이 중 35명이나 전사하였다고 앞에 인용한 페렌바크는 쓰고 있다. 대한민국 장관이나 국회의원, 고위 장성 아들 중에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희생된 사람은 과연 몇 명인가?

자기들이 보수라고 자처하는 한국의 지배층들은 사실 보수가 아니다. 보수라면 응당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책임지지 않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으니, 한 사회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세력이라면 마땅히 자신이 맡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고, 책임지지 않는 자는 보수의 자격이 없다. 현재 한국의 지배층은 가끔 사랑의 열매를 사주는 식의 자선을 베푸는 것 이외에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무엇을 희생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는 집단이다. 조선이 망할 때 구례 촌구석의 가난한 선비 황현은 목숨을 끊었다. 조선왕조의 녹을 먹은 적도 없고, 특별히 황은을 입은 적도 없었다. 500년간 선비를 키운 나라에서 나라가 망하는데 목숨 바치는 놈 하나 없으면 그것이 무슨 꼴이냐며 아편을 탄 술을 오래 보다가 결국 마셨다.

백사 이항복의 자손으로 조선 최고의 명문가 후예이자 8만석을 거두는 대부호였던 이회영의 6형제는 나라가 망하자 재산을 정리하여 중국으로 망명했다. 해방된 조국에 살아 돌아온 것은 막내 이시영뿐이었다. 이회영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문당해 죽었고, 형제들 중 가장 많은 돈을 내놓은 이석영은 굶어 죽었다. 8만석이라면 삼성, 현대 같은 재벌은 아닐지라도 ‘황제노역’했다는 토호보다는 훨씬 큰 재산이었다 할 것이다. 그 재산을 바쳐 이회영 형제가 한 일이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것이었다. 교과서에야 독립군 양성기관이라고 우아하게 처리가 되겠지만, 독립군 양성기관에 들어간 청년 중 상당수는 집에서 부리던 종들이었다. 조선에 있을 때 뜨르르하던 대갓집 마나님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만주 칼바람을 맞으며 집에서 부리던 종들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버선 기워주었다. 이게 위기의 순간에 나오는 보수의 참모습이다. 한 사회에서 온갖 혜택을 받았던 사람이라면 그 사회가 침몰해갈 때 자신이 설 자리를 알아야 한다.


역사와 책임 (3)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일본의 장점도 배우지 못한 친일파들

지금의 수구세력이 돈만 있고 양심도 염치도 능력도 없어서 그렇지, 지금 친일파 소리를 듣는 인사들이 전부 다 몰염치한 사람은 아니었다. 한국군 창군에 참여한 일본군 출신 중 가장 선배이며 고위직이었던 이응준은 미군정에서 참모총장을 맡을 것을 권유했으나 자신 같은 사람이 새 나라 새 군대의 간판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물러났고, 뒤에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신태영은 아예 처음에는 군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응준과 일본 육사 동기로 역시 일본군 대좌였던 안병범은 당시 한국군의 최고령 대령이었는데 이승만이 다리를 끊고 도망간 뒤 패잔병들을 모아 유격전을 꾀하다가 실패하자 ‘적과 싸워 국토를 지키지 못하는 자는 죽어 마땅함’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인왕산에서 자결했다. 이제 국정원의 간첩조작 사건과 관련하여 알았으면 악마이고 몰랐으면 바보 소리를 듣게 된 공안검찰도 처음부터 저 지경은 아니었다. 1964년 중앙정보부가 송치한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보수적이고 반공사상이 투철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은 기소하기를 거부했다.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되었기 때문이다. 1981년 이른바 연세대생 내란음모 사건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구상진은 어린 대학생들이 유인물을 만들다 잡힌 것을 안기부가 내란음모죄 기소의견으로 송치하자 적용 법령을 바꾸려 하다가 옷을 벗어야 했다. 그 빈자리를 메꾸어 ‘허위조서’까지 만들어 안기부 뜻대로 이들을 내란죄로 기소하여 안기부에 스카우트된 자가 바로 정형근이었다.

아시아의 약소국이었던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여 제국주의 열강에 끼게 되고 급기야 우리를 식민지로 삼은 것은 우리에게는 큰 불행이었지만, 일본 보수세력 입장에서는 그들 나름대로 무언가 강점을 발휘한 바가 있다고 할 것이다. 야스쿠니신사에 가보면 그들식 전쟁기념관인 유슈칸이 있는데, 야스쿠니신사에 배향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영쇄부’를 펴놓은 것을 보면 일본에서 군신으로 추앙받는 노기 대장의 아들들의 이름이 나온다. 백범도 일제 경찰에게 밤새 모진 고초를 당하며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라고 한 적이 있다. 친일파들은 일본과 친했고 일본을 위해 일했을지는 몰라도 일본의 보수세력 본류가 가진 살벌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도덕성과 희생정신은 전혀 배우지 못했다. 앞잡이 노릇만 했기 때문이다.

계엄군이 광주로 쳐들어온 5월27일 시민군 300명이 죽음을 기다렸다 
“시민 여러분, 우릴 기억해주십시오 우린 폭도가 아닙니다” 
그들은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피하지 않았다.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분단과 전쟁과 학살과 부역자 처벌로 망가진 것은 좌익만이 아니었다. 아니, 좌익은 남쪽에서만 멸균실 수준으로 사라졌을 뿐, 북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명맥을 유지했다. 이 땅에서 진짜 사라진 것은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우익이었다. 남북협상을 중간파가 했다지만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에 비추어 보면 백범 김구는 극우, 우사 김규식은 합리적 우파나 잘해야 중도 우파 정도라 할 것이다. 이승만이 다리 끊고 도망갈 때 서울에 남았다가 북으로 끌려간 조소앙, 안재홍 등의 인사들이 양심과 부끄러움과 합리성을 지니고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질 줄 아는 우익인사들이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민족적 양심을 가진 우익 중에서 백범은 암살되고, 나머지 지도급 인사들은 끌려가고,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학살당하고 부역자로 처벌받으며 낙백해버렸다. 우익이라면 당연히 민족을 내세워야 하는데 이 땅의 자칭 우익들은 3·1절에도 성조기 들고 나오는 부류들이다. 내가 여러 번 강조하는 바이지만, 한국의 진보는 원래 진짜 보수였다. 극우파 김구의 수행비서였던 장준하는 김구가 남북협상에 나서자 공산주의자와 무슨 협상이냐며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과 함께 떨어져 나왔고, 이승만 정권의 국무총리가 된 이범석이 직책상 당연히 좌익 전향자들을 포용하는 태도를 보이자 좌익들에게 관대하다며 이범석과도 갈라선 강골 극우파였다. 신의주 반공학생 의거의 사상적 배후 함석헌, 좌우대립이 극심했던 시절 우익 정도가 아니라 아예 미군장교였던 문익환과 박형규, 반탁학련이란 극우파 학생조직의 행동대장이었던 계훈제, 7년간 국군장교로 복무한 리영희, 반공포로 김수영, 유학생의 열에 아홉이 미국에 잔류하던 시절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납북당한 것을 잊지 않고 군에 복무하기 위해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온 백낙청 등등은 어느 모로 보나 보수의 가치를 충실히 지킨 양심적인 인물들이었다. 일제의 주구들이 우파요, 애국자를 자처한 험한 시대에 까마귀 노는 물을 피한 백로들이 시간이 흐르며 진보가 되었다.

그래도 대한민국호가 침몰하지 않은 이유

이승만 같은 자들이 선장을 하고, 김창룡, 원용덕, 노덕술, 박종표, 이근안 같은 자들이 선원질을 한 대한민국호가 침몰하지 않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미국이 와서 구해준 덕분일까? 서울을 버리고 도망간 선조에게는 자기가 의주까지 가서 불러온 명나라 군대가 나라를 구해준 것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순신이 있었고, 나라의 녹을 먹은 적이 없으면서도 분연히 떨쳐 일어난 의병장들이 있었다. 장수만 있어서 어찌 의병전쟁이 되겠는가. 역사가 그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수많은 의병들이 이 나라를 지켰고, 다시 세웠다.

전두환의 계엄군이 다시 광주로 쳐들어온 5월27일 새벽, 도청에는 시민군이 300명이나 남아 죽음을 기다렸다. 지금까지 돌아가는 꼴을 보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분이 살아남았다. 그렇지만 그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거기 남은 바보는 없었다. 누가 너는 꼭 남아야 한다고 명령하는 사람도 없었고 집에 간다고 잡는 사람도 없었다. 아무도 집에 가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다. 여학생들, 고등학생들은 눈을 부라리고 악을 써서 도청에서 내보냈다.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남은 것이 아니었다. 지는 싸움을 피할 수 없었기에, 다 총을 놓고 집에 가버리면 텅 빈 도청을 전두환에게 내주는 것이기에, 그냥 남았다. 특별한 직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광주시장도 아니었고 이름난 교수나 문화인도 아니었고, ‘사’자 돌림 전문가도 아니었다. 시민군 중대장, 소대장이라서 남은 게 아니라 남은 사람 중에서 새로 중대장, 소대장이 임명되었다. 남은 사람들 중에는 죽어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이 된 윤상원 같은 지식인 출신도 있었고, 더러 대학생들도 있었지만, 다수가 철가방, 구두닦이, 날품팔이, 용접공, 웨이터, 식당 보이 등 박정희가 ‘똘마니’라고 비하해 부르던 사람들이었다. 그 ‘똘마니’들이 위대한 광주시민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피하지 않았다.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집에 간 사람들도 “광주시민 여러분,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를 기억해주십시오.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라는 애절한 호소를 들으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키워가며 반만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긴 새벽을 보냈다. 5월26일 밤 “나는 도청에 남을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정직하게 자신에게 던지는 사람들이 바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누구나 광주의 자식이 되어 온몸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갔다.

아이들 구하러 가야 한다며 전화를 끊은 사무장 양대홍은 부인의 애타는 전화에는 응답하지 않고 끝내 퇴선 지시를 내리지 않은 무전기를 꼭 쥔 채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구명조끼가 모자라자 “내 거 입어” 하고 선뜻 벗어준 학생, 그 와중에 아기부터 탈출시키던 아이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끼고 살아가기엔 너무나 아이들 곁에서 선생 노릇 하고 싶어했던 교감 선생님, 아이들과 함께 가라앉은 선생님들, 그리고 겨우 매점에서 물건 파는 어린 알바생이면서 “선원은 맨 마지막에 나가는 거야. 너희들 다 구하고 나갈 거야”라며 세월호의 악마들, 대한민국호의 악마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어마어마한 책임감을 보인 박지영… 이들이야말로 구조변경에 노후수명연장에 과적에 규제완화에 온갖 비리와 뇌물로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우는 대한민국호가 여태껏 가라앉지 않고 항해할 수 있는 숨은 복원력이었다.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 자신에 내재한 이 복원력밖에 없다. 더 이상 대한민국호를 책임지지 않는 자들,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끝>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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