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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Tour - 대한민국

아주 특별한 커피 & 카페 (시사인)

by Wood-Stock 2016. 7. 20.

시사IN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List.html?sc_serial_code=SRN81&view_type=sm

성우제 (커피 칼럼니스트)  |  coffeesung@gmail.com



뭔가 특별한 부암동 ‘클럽에스프레소’

부암동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클럽에스프레소는 뭔가 특별하다. 푹신한 소파 대신 딱딱한 나무 의자만 있는 반면, 질 좋은 스페셜티 커피 원두 가격은 절반 정도 싸다.


예전부터 그랬다. 일부러 그런 곳에다 자리를 잡지 않았나 의심할 정도로 클럽에스프레소 가는 길은 불편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257-1. 그 커피점을 9년 만에 다시 찾으면서 나는 또다시 툴툴거리고 말았다. 예전에 차를 몰고 갈 때는 주차 때문에 골 아프게 하더니, 이번에는 지하철을 타도 단번에 닿지 않는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부암동은 여전히 고요하다. 그러나  클럽에스프레소는 놀랍게도 손님들로 북적댄다. 수요일 오후 2시. 1층의 40여 좌석은 빈 곳이 거의 없었고, 볶은 콩(원두)을 사려는 손님들이 수시로 들락거린다. 맛있는 음식점도, 분위기 좋은 카페도 아닌데 평일 대낮에 불편을 마다 않고 굳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곳의 커피에 분명 뭔가가 있다.

  
커피 대중화에 뜻을 둔 마은식 대표(오른쪽)는 “커피 값을 내리자”라고 말한다.


그 ‘뭔가’는 입구에서부터 눈에 띈다. ‘커피 중독자 시리즈’라는 제목의 이벤트에는 ‘커피를 물처럼 자주 마시는 사람을 위하여’ 같은 다소 장황한 문구가 적혀 있다. 이른바 중독자에게 제공하는 볶은 커피콩의 가격이 놀랍다. 500g에 1만8000원(내가 사는 캐나다와 엇비슷하다). 한국의 스페셜티 커피 원두 가격이 100g에 6000~8000원인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이다.

입구에 ‘카페’나 ‘커피 전문점’이 아니라 ‘커피 상점’이라고 써 붙인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푹신한 소파 대신 딱딱한 나무 의자가 있고, 화려한 인테리어 대신 천장과 칸막이, 테이블과 의자가 모두 원목으로 짜였다. 소박하고 검소한 분위기이다. 마은식 대표는 “실내는 목공을 하는 나와 우리 직원들이 꾸몄다”라고 말했다. 남미·아시아·아프리카 등 수십개 커피 생산국에서 들여온 각종 커피콩을 볶아 파는 코너가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집에서 커피를 쉽게 내려 먹는 방법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돌아간다. 물 300㎖에 커피 15g을 2분 만에 내려 마시면 된다. 물은 92℃에 맞춘다.

클럽에스프레소는 2010년 10월1일로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1990년 서울 대학로에 당시 스물셋 젊은이가 창업한 스페셜티 커피점은 ‘새롭다’ ‘특이한 20대가 주인이다’ 하여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2001년 마은식 대표는 한적하기 짝이 없는 부암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나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내가 전문가라면 아무것도 없는 바로 그 맨바닥에서 이상적 모델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커피점 안 가장 좋은 자리 는 수십개 커피 생산국에서 들여온 커피콩이 차지한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물 가운데서도 커피는 묘한 ‘물건’이다. 먹어서 배부른 것도 아니고 마셔서 시원한 것도 아닌, 그저 쓰거나 설탕을 곁들인 달달한 음료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람들은 그 쓴물을 마시기 위해, 놀랍게도 5000원 이상씩을 서슴없이 투자한다.

스페셜티 커피가 한 잔에 5000~6000원이라면 한국에서는 그리 비싼 축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커피점이 부암동 같은 외진 곳에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엇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마 대표가 말하는 ‘전문성’이다. 그이와 함께한 자리에 직원이 에티오피아산 ‘리무’라는 커피를 한 잔 내왔다. 마 대표가 에티오피아에 가서 직접 사온 것이라 했다. 약간 텁텁하지만 좋은 신맛이 돈다. 깊이와 더불어 입안 한가득 차는 묵직함이 느껴진다. 마 대표는 “꽃향기가 나지 않느냐”라고 묻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커피의 진정한 맛은 ‘볶기’와 ‘블랜드’(Blend·산지가 서로 다른 커피를 섞어 맛과 향을 풍부하게 하는 것) 기술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새까맣게 혹은 연하게 볶거나, 블랜딩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다.


최근 그 개념이 크게 바뀌었다. “스페셜티 커피의 진정한 맛과 향은 각 커피 산지가 가진 독특한 환경과 문화에서 나온다. 산지의 고유한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문성 높이기와 더불어 마 대표가 목표로 삼는 것은, 바로 그 맛과 향을 좀 더 많은 이들이 즐기게 하는, 이른바 대중화이다. 커피 가격을 대폭 낮춘 것은 대중화를 위한 첫걸음이다. “미국에서 20달러 하는 청바지가 한국에서 10만원 한다면 말이 안 된다. 나는 커피 값을 내리자고 악을 쓰며 이야기한다.” 커피업계에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커피 질을 높게 더 높게

대중화를 목표로 한다면서 그는 그 대중을 점점 더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2007년부터 그이 스스로 담배를 끊어가며 실내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하더니, 2년 후에는 셀프 서비스를 도입했다. 3층 건물(120평·396㎡)을 모두 쓰면서 직원 16명의 쉼터는 ‘널널’하게 만든 대신, 손님에게는 달랑 1층 한구석만 내준다. 직원들의 쉼터에는 푹신푹신한 소파와 침대까지 있지만 손님들에게는 딱딱한 나무 의자만 제공할 뿐이다.

“꼭 필요하지 않은 서비스를 줄이는 대신 그 에너지를 커피의 질을 높이는 데 집중하겠다”라는 것이다. 마 대표는 급기야 매장 내의 테이블을 모두 없애는 계획을 진행 중이다. ‘손님을 불편하게, 더 불편하게’를 슬로건으로 내건 듯 보이는데, 클럽에스프레소에서 그것은 ‘커피 질을 높게, 더 높게’로 받아들여진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 아웃하면 2000원이 싼 3000원에 마실 수 있다.

인테리어는 모두 원목으로 짜였다


아무리 스페셜티 커피라고 하지만 한국만큼 커피 값이 비싼 나라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최근 산지의 특성을 살려 커피를 볶고 만드는 신개념 커피점으로 각광받는 미국 ‘스텀프타운 커피 로스터스’의 커피 한 잔 가격이 2달러에 불과하다. 한국에서는 클럽에스프레소가 이른바 가격 파괴와 전문성 높이기를 통해 스페셜티 커피를 대중화하는 실험에 돌입했다.


클럽에스프레소
서울 종로구 부암동 257-1 / 전화 02-764-8719 / www.clubespresso.co.kr
교통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 3번 출구로 나와 버스 1020번, 7022번, 0212번, 7212번으로 갈아타고 10여 분 후 부암동주민센터 앞에 하차. 
특징: 20년 전통의 수준 높은 스페셜티 커피 가격이 파격적. 집에서 커피를 직접 볶을 수 있도록 생두 판매. 오븐에서 직접 구운 신선한 쿠키. 온라인 쇼핑 가능. 실내 금연. 인터넷 안 됨.




커피를 매개로 ‘공간’을 소비하다

대구광역시에 있는 ‘Camp by 커피명가’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안명규 대표의 목표는 커피를 매개로 사람들이 모이고 쉬고 생각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주)커피명가 대표 안명규씨에게 연락했더니, 2010년 5월에 문을 연 ‘Camp by 커피명가’로 안내했다. 대구시 삼덕동 커피명가 본점에서 만나겠거니 여겼는데 뜻밖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새로운 커피점은 바깥 풍경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안명규는 ‘씨~익’ 웃기를 잘 하는 사람이다. 그날도 그는 그렇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 “느낌 좋지요?”

느낌이 좋았다. 아니 조금 놀라웠다. 외국에서 산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내 눈에도 주변 분위기는 이국적으로 보였다. 대구 중구 계산동2가 50번지. <매일신문> 사옥 1층에 자리 잡은 캠프바이커피명가는 그 남동쪽이 계산동 주교좌성당의 마당과 연결되어 툭 트여 있다. 사적 제290호 쌍탑 고딕 성당의 110년 역사가 빚어내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커피 향과 잘 어울렸다. 어떻게 이런 자리를 찾아냈을까 싶었다.

  
대구 계산동 <매일신문> 사옥 1층에 자리잡은 캠프바이커피명가는 주교좌성당의 마당과 연결되어 툭 트여있다(위). 고딕 성당의 분위기가 커피 향과 잘 어울린다.


1990년 7월23일 대구 경북대 근처에 처음 문을 연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 커피명가는 전국 23개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거느린 (주)커피명가로 변신했다. 캠프바이커피명가는 직영점 세 곳 가운데 하나이다.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26개 점 중에서도, 캠프바이커피명가는 커피명가가 쌓아온 20년 전통과 문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듯 보인다.

2000년 가을, 커피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대구 삼덕동 커피명가(그때는 유일했다)를 찾아갔을 때도 안명규씨는 커피 얘기 대신 바깥으로 열린 창문을 보면서 똑같은 말을 했다. “느낌 좋지요?” 거의 태우다시피 볶은 커피가 좋은 커피의 대명사로 통하던 그 시절, 부드럽고 약간 신맛 나는 커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바로 그 커피를 맛보러 간 사람에게 그는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했었다.

10년이 지난 뒤 다시 그를 만나면서 그 엉뚱함이 커피명가(明家)를 커피의 명가(名家)로 바꾼 에너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의 목표는 좋은 커피 만들기가 아니었다. 커피는 그의 꿈을 실현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고교 때부터 사람들이 모이고 쉬고 생각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 공간의 ‘지기’가 되는 게 꿈이었다. 커피를 통해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선물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20여 년 전 커피 값 5000원 받던 ‘또라이’


시작 또한 엉뚱했다. 고향인 경주에서 친구들의 부추김을 받아 ‘공간’을 만들었다. 고교 은사께서 “커피 값으로 5000원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셨다. 속으로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커피 값을 진짜 5000원씩 받았다. 경주 특급호텔 커피 값이 750원 하던 시절이었다. 손님은 드문드문 왔다. 1년 동안 그렇게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에 생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손님만 올 수 있게 한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생각하라고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걸 알았다.”



안명규 대표(오른쪽)는 전 세계 커피 농장에 학교 짓는 일을 한다. “소비자가 커피 농부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유명 커피회사인 UCC가 원두커피를 보급하려고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저것이 핵심이다 싶어 나도 커피를 볶아야겠다고 결심했다.” 5000원짜리 커피를 팔며 구상한 갖가지 기획과 맞물려 구체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1990년, 나이 스물일곱살 때였다.

그는 경북대 부근에 터를 잡았다. 밝을 명(明)을 쓰는 명가라 이름 지었다. “사람들에게 밝은 느낌을 주고 좋은 기운을 갖게 하고 싶었다.” 커피를 팔면서 ‘장사를 한다’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밝은 느낌을 주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자꾸 엉뚱한 곳으로 나아갔다. 장사의 기술과 멀어질수록 장사가 더 잘되는 엉뚱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볶는 기계를 개발해 커피를 직접 볶았다. 주변 상인들로부터 ‘또라이’ 소리를 들으며 33평 공간에 생화 화분 수십 개를 들여놓고, 화장실을 호텔식으로 만들었다. 방학 때 하루 10~20명씩 드나들던 손님이 방학이 끝나자 폭발했다. 개강 첫날에 100명, 그 다음 날에는 150명. 화장실 때문에 오는 학생도 많았다. 그가 생각한 분위기가 무너졌다. 여유롭고 밝은 분위기를 되살리려면 손님을 못 오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에서 300원 하던 시절 1000원을 받던 터여서 커피 값을 더 올리면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안을 내렸다. 커피점 금연. 병원 응급실에서도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었다. 손님의 70%가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그 전략은 서서히 먹혀들었다. 고전음악이 흐르는 곳에서 바리스타가 직접 손으로 내리는 커피를 보고 마시며 손님들은 공간을 ‘소비’하기 시작했다. 공간 소비니 하는 용어들을 문화 이론가들의 글에서나 볼 수 있던 시절, 대중은 커피명가에서 벌써 공간을 직접 소비하고 있었다. 커피를 매개로….

그 공간의 전통이 110년 역사의 계산동 주교좌성당의 바깥 분위기와 만나 캠프바이커피명가를 이루고 있다. 이름이 커피명가 ‘청담동점’ ‘동성로점’ 따위와 다른 이유가 있다. 캠핑 갈 때의 두근거림 혹은 즐거운 마음을 갖게 하는 공간, 여러 사람이 모여 회의를 하는 작전 캠프 같은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이다. 더불어 캠프바이커피명가의 실내 분위기는 건물 1층 갤러리와 연결되면서 가볍고 발랄하다.

세계의 커피 농장에 학교를 지어주는 작전 캠프도 이곳에 마련했다. 오전 8시부터 1시간 동안 커피명가의 커피는 1000원이다. 아침 1시간 동안 모이는 그 돈은, 커피명가와 직거래하는 다른 나라 커피 농장으로 나가 학교 선생님 월급을 주는 데 사용된다. “이제는 커피를 내리거나 볶는 것 말고 질 좋은 생콩을 구하는 것이 커피 맛을 좌우한다. 그 맛을 위해서라도 소비자가 커피 농부들을 지킬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안명규씨는 말했다.




과연 고종이 처음 커피를 마셨을까

북한강변에 자리잡은 왈츠와닥터만은 커피 전문점이자 문화예술 왕국이다. 커피박물관에서는 늘 상설 전시를 하고, 콘서트홀에서는 매주 훌륭한 음악회가 열린다.


‘1896년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커피를 마셨다.’ 한국 커피사의 첫 문장은 으레 이렇게 시작한다. 근거도 출처도 없는 사실이 신문 잡지와 책자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어느덧 정설 노릇을 하고 있다. 최근 그보다 오래된 ‘기록’이 발견되었다. 박종만 ‘왈츠와닥터만 커피박물관’ 관장이 발굴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커피는 아관파천이 일어나기 13년 전인 1883년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1882년 고종은 외교사절단 보빙사를 미국에 파견했는데, 그 일행을 안내하고 조선에 함께 돌아온 퍼시벌 로웰이 작성한 문건에 커피 이야기가 나온다. “궁중에 초대되어 조선의 귀한 수입품인 커피를 대접받았다.” 얼마 전 박 관장은 자료가 전하는 최초의 다방도 발견했다. 1913년에 문을 연 서울 ‘남대문역 다방’이다.




박종만 관장이 직접 설계한 왈츠와닥터만(위)에서는 북한강 풍경을 만끽하고 공연예술을 감상할 수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삼봉리 272번지는 북한강변이다. 대도시 중심으로 보면 퍽 외진 곳이어서, 여기까지 커피를 마시러 올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찾아온다. 왈츠와닥터만은 커피 전문점(혹은 레스토랑)일 뿐 아니라, 커피를 기반으로 하는 문화예술의 거점이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시며 북한강 풍경을 만끽하고, 역사를 만나고, 공연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좋은 커피와 분위기만을 제공하는 전문점이라면, 한국 커피의 뿌리까지 일부러 찾아 나설 필요도, 이유도 없을 터이다.

나는 커피 전문가 박종만씨를 만나러 갔으나, 그는 커피박물관 관장으로 나타났다. 명함에도 ‘대표’ 대신 ‘관장’이라 박혀 있었다. ‘커피에 미친 남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그는 커피점에서 시작해 커피 볶는 공장과 레스토랑에 이어 커피박물관·콘서트홀까지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을 ‘커피 왕국’이라 부른다. 왈츠와닥터만은 왕국답게 지난 15년 동안 지리적 변방이던 곳을 커피와 어울리는 문화예술의 한 중심지로 만들어냈다.

커피와, 커피를 둘러싼 자연·문화예술 환경은 서로에게 긴밀하게 영향을 끼친다. 맛을 추구하다보니 커피 문화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고, 그 관심은 세계 및 한국 커피의 기원과 전파 과정을 찾아가는 ‘탐험’으로 이어졌다. 실제 박 관장은 커피 탐험대를 꾸려 2007년 아프리카를 시작으로 아랍·유럽·브라질 등을 해마다 방문하는 커피 문명 탐험을 해오고 있다. 올해에는 인도를 찾을 참이다. 많게는 네 명으로 구성하는 대원들 탐험 비용은 커피박물관이 모두 부담했다. 


커피 관련 유물도 2000점을 보유하고 있다.



아프리카·브라질 등으로 매년 커피 문명 탐험 떠나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10년이 지난 2006년에 커피박물관을 개관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부끄러웠다”라고 돌이켰다. 우리 커피 문화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고종이 처음으로 커피를 마셨다 카더라’만 난무했다. 그 자각을 바탕으로 그는 30~40명에 이르는 대원을 이끌고 여름이면 전국의 커피 유적지를 찾았다. 기록은 없으나 최초의 커피점을 가졌을 법한 한국의 첫 호텔 ‘대불’의 흔적을 제물포에서 더듬는가 하면, 전통의 명맥을 유지하는 시골 다방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는 ‘100년 된 커피집이 스타벅스와 나란히 있어야 하는데, 왜 우리에게는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다. 커피와 관련한 이런저런 탐사와 행보가 왈츠와닥터만 커피의 질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리 없다.

1989년 일본 출장길에 우연히 보게 된 커피회사 왈츠의 커피 볶는 공장 풍경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연기 속에서 할아버지들이 뛰어다니며, 웃으며 일하는 광경이 마치 별천지 같았다”라고 박 관장은 말했다. 당시 그는 꽤 괜찮은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는 나이 서른의 CEO였다. 직업을 바꾸었다. 그는 서울 홍대 앞에 ‘왈츠’라는 커피 전문점을 열고 정통 커피 맛을 대중화하는 데 일조했다. 

틈만 나면 세계 곳곳을 누비며 커피를 체험하던 그는 1875년 문을 연 프랑스 파리의 유명한 카페 ‘드 마고’(Les Deux Magots)를 만났다. 사르트르와 보바르가 토론하며 글을 썼다는 자리가 온종일 예약되어 있는 광경은 큰 충격이었다.

  
박종만 왈츠와닥터만 커피박물관 관장은 “왜 우리는 100년 된 커피집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커피의 뿌리를 찾아 나섰다.

충격은 ‘드 마고처럼 자랑할 만한 커피 문화’ ‘100년 가는 커피집’을 만들자는 꿈으로 이어졌다. 1996년 본인이 직접 설계해 지은 왈츠와닥터만은 그 꿈의 출발이었다. 그는 고급 커피를 중심으로 한 레스토랑에, 커피와 어울리는 문화예술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단층 건물을 3층까지 올려 박물관을 만들었다. 국내외에서 20년 넘게 수집해온 커피 관련 유물 2000점을 보유한 박물관은 상설 전시 외에도 1년에 두 번씩 특별전을 연다. 3층 온실에서는 커피나무가 자란다. 박 관장은 15년째 한국의 토양에 맞는 종을 개발해왔는데, 요즘은 4대째 나무가 자라고 있다. 

박물관 안에 설치된 콘서트홀에서는 매주 ‘닥터만 금요 음악회’를 열고 있다. 올해 1월21일 열린 <피아니스트 박민경 초청연주회>는 제239회 음악회였다. 한 무대에서 매주, 국내 정상급 연주자들이 5년 넘게 공연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보기 드문 일이다. 

박 관장에게 “왈츠와닥터만의 커피는 어떤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커피 회사 대표가 아닌 박물관장으로서 우리의 지향점을 이야기하면”이라며 말머리를 꺼냈다. “커피 볶는 이들이 자기 기준을 가지고 하는 것이 영 마뜩지가 않다. 커피 산지에서 주민들이 내는 커피의 이상적인 맛, 바로 그것에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커피란 무엇인가”라고도 물었다. “매일 만나는 변하지 않는 오랜 친구”라는 답이 금방 돌아왔다. 박 관장은 그 친구를 위해, 친구를 활용해 문화예술 왕국을 계속 건설 중이다.




천년 고도의 ‘1000단계’ 커피 맛

경주에 있는 ‘슈만과클라라’는 원래 유명한 음반 가게였다. 음악 감상실 전기 요금이나 해결하려 시작한 이 커피점은 외지에서 온 커피 애호가로 북적이는 명소가 되었다.


까놓고 말하자면, 경북 경주의 커피점 슈만과클라라 대표 최경남은 내 친구다. 2000년 봄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친구하자”라며 말을 ‘깠다’. 서울에서 기자로 일하던 나를, 경주에서 커피점을 막 시작한 최경남과 친구의 연을 맺게 해준 것은 커피이다. 커피 마니아 행세를 하던 나는 경주 출장길에 열심히 한다고 소문난 슈만과클라라에 들른 적이 있다. 나는 아마추어였고 그는 프로의 세계에 막 진입한 터였다. 낮에 한번 보았는데, 자정이 넘어 그가 내 숙소에 다시 나타났다. 가게 문을 닫고 오는 길이었다. 선술집에서 동이 틀 때까지 커피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경남에게는 독특하고 집요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또 다른 동갑내기 안명규(커피명가 대표)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나는데, 그는 안명규를 ‘선생님’이라 부른다. 남들이 기자‘님’이라 부르던 나는 쉽게 대할 수 있어도, 커피계의 대선배에게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외국에 나와 사는 내가 10년 만에 다시 경주를 찾았을 때 ‘한번 꽂히면 끝을 보려 하는’ 그의 집요함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동국대 네거리라 불리는 곳의 지하에 세 들어 있던 슈만과클라라는 걸어서 5분 거리의 4층 건물로 이사했다. 물론 자기 건물이다. 건물 앞으로는 형산강이 흐른다.



슈만과클라라의 고전적 분위기는 고도(古都)와 잘 어울린다. 1층을 커피 공장과 생콩 보관창고 따위로 쓰고, 손님을 위한 매장은 2층에 마련했다.


건물 앞에 서자마자 의문이 생겼다. 슈만과클라라 매장은 2층에 있다. 가장 비싸고 좋은 자리인 1층은 공장과 생콩 보관창고로 사용 중이다. 그곳에서 최경남은 커피를 볶고 시음하고, 빵을 굽는다. “지하에서 해도 될 일을 왜 여기서 하느냐?”라는 질문에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먼저 행복해야 손님도 행복하게 커피를 마신다. 그러니 당연히, 작업실이 가장 좋은 자리에 있어야지.” 최경남은 작업실에서 행복한지는 모르겠으나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커피콩을 볶으며 스스로를 10년째 들볶고 있다. 커피의 볶는 정도는 보통 8~10단계쯤으로 나뉜다. 최경남은 그 10단계를 100으로 쪼개어 1000단위로 만들어놓았다. 그 미세함을 보기 위해 커피 볶는 기계에 큰 돋보기까지 설치해놓았다. “너무 나가는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는 말했다.

“10년 정도는 기본을 쌓는 기간이다. 커피는 자연에서 얻은 열매인데 자연의 이치를 알아가면서 볶아야 제맛이 나온다. 생콩이 지닌 성질에 따라 볶는 방식을 달리해야 한다.”

매일 볶고 굽는 커피와 빵 맛볼 수 있어

커피를 볶는 데 뭐 그리 거창하게 자연의 이치까지 말할까? 그러나 설명을 들으니 그럴 법도 했다. 커피는 산지에서 볶는 방식을 따르면 가장 좋은 맛이 나온다. 이를테면, 타이에서는 커피를 10~11월에 수확한다. 한국에 들여오는 1~2월은 한겨울이다. 38℃ 여름 기온에 있던 커피가 영하 기온에서 제맛을 내기는 어렵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콩’인 생두는 환경에 민감한 만큼 기온의 변화까지 고려해 볶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두의 성질에 따라 정교하고 정밀하게 열을 조정해가며 볶아야 진짜 맛이 나온다. 맛은 경험에서 오는 것인 만큼 콩의 성질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볶는 것이 로스터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슈만과클라라의 고전적 분위기는 고도(古都)와 잘 어울린다. 1층을 커피 공장과 생콩 보관창고 따위로 쓰고, 손님을 위한 매장은 2층에 마련했다.


슈만과클라라는 1990년대 말까지 경주 성건동 동국대 네거리에 있는 유명한 음반 가게였다. 당시 최경남은 음반 가게 주인이었다. 경주에서 고전음악 동호회를 이끌던 그에게 어느 애호가가 감상실과 연주회장으로 쓰라며 건물의 지하실을 내주었다. 1999년 전기·수도 요금을 해결하려고 팔기 시작한 커피가 본업이 되어버렸다. 완벽한 주객전도였다. 지금도 슈만과클라라에는 그 상호와 더불어 과거 고전음악 감상실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벽 한쪽을 가득 메운 LP와 CD, 그리고 “아직 100년은 되지 않았다”라는 조지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범상치 않은 소리가 과거 고전음악 감상실의 분위기를 전해준다.

슈만과클라라의 고전적 분위기는 고도(古都)와 잘 어울린다. 커피든 분위기든 고전적인 개념이 주류를 이룬다. 커피와 빵, 케이크는 신선함이 생명이라는 가장 고전적인 방식을 따른다. 거의 매일 볶고 굽는 커피와 빵이 1층 공장에서 2층으로 바로 올라온다. 고도답게 슈만과클라라의 손님 중 60%가 외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이다. “관광지라고 바가지 씌우는 것 아니냐”라고 슬쩍 농을 걸 만큼 커피 가격은 비싼 편이다. 주전자로 내려주는 에티오피아 이르가체프·수마트라 만델링 등이 7000~8000원 선이고, 카페 아메리카노가 6000원이다. 커피 여러 종을 섞어 풍부한 맛을 내는 블랜딩 커피는 아예 없다. “섞을 줄 몰라서 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고집이 묻어나온다. 


주변 커피점에서 얼마를 받는지 관심도 없고 공부에만 매달렸다는 그를, 10년 넘게 성원하면서 지하에서 4층 건물로 나오게 해준 이들은, 비싼 가격과 먼 곳을 마다 않고 찾아오는 팬들이다. 최경남을 만나러 간 일요일 오후, 30개 테이블이 가득 차 있었다.

“고전음악 감상실이 일반 다방처럼 되는 게 싫어서 하기 시작한 공부이다. 처음에는 1년만 배우면 행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하다보니 ‘택도 없다’.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 알게 된다. 그래서 지금, 내가 커피를 잘한다, 못한다, 누구에게 배운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최경남은 1년에 네 번씩 10년째 일본에 드나들며 커피 볶는 공부를 계속한다고 했다.


10년 넘게 커피 전문가로 살아온 최경남 슈만과클라라 대표는 “커피를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사실만 알게 된다”라고 말했다.









‘씨앗과 컵’ 이야기까지 팝니다

성남 분당에 자리한 ‘가비양’은 스토리 마케팅을 지향한다. 그래서 24쪽 차림표에는 메뉴뿐 아니라 커피콩 이야기가 빼곡하다. 커피가 지닌 개성을 찾아 알리는 가비양만의 특별한 노하우.


차림표를 달라고 했더니 두꺼운 팸플릿 같은 것을 가져다준다. 24쪽짜리 차림표 표지에 ‘씨앗에서 컵까지’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가비양’에서 마실 수 있는 메뉴와 가격뿐 아니라 커피콩을 수확한 지역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적혀 있다. 세인트헬레나. 나폴레옹의 유배지로 널리 알려진 이 섬에서도 커피가 생산된다. 나폴레옹은 죽어가면서도 커피 한잔을 원했으며 “이곳에서 얻을 것이라고는 커피밖에 없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황제의 커피여서 그런지 가격은 커피의 최고봉 블루마운틴(1만5000원)보다 높은 1만8000원이 매겨져 있다.

콜롬비아 시에라네바다, 인도네시아 울트라 만델링, 에스프레소 컬렉션 같은 커피에서부터 녹차·샐러드·단팥죽·쿠키·케이크에 이르기까지 차림표에는 설명이 자잘하게 붙어 있다. 바로 내가 마시고 먹는 것에 담긴 이야기들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맛이 새롭다. 에티오피아 이르가체프를 손으로 내려왔는데 강한 가운데 단맛이 돈다. 양동기 가비양 대표는 “우리는 이렇게 스토리 마케팅을 많이 한다”라고 했다.



도심에서 가깝지만 시골티가 물씬 나는 가비양 풍경.


‘시각 마케팅’ 위해 카페 한가운데 ‘공장’까지 설치

가비양은 나무로 지은 2층짜리 건물 안에 있다. 경기도 분당의 서현역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지만, 그 주변은 시골티가 물씬 풍긴다. 무덤들이 있는 야산을 뒤에 두고, 왼쪽의 텃밭에서는 채소가 자란다. 샐러드에 쓰는 채소라고 했다. 입구에 들어서서 생콩을 담은 마대 자루, 커피 원산지의 풍경, 각종 커피 기구, 원두 판매대를 보며 지나야 앉을 자리가 나온다. 

120석 매장의 한가운데 가장 좋은 자리에는 뜻밖에도 ‘공장’이 자리잡고 있다. 유리를 통해 공장의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커피 볶는 기계 3대가 연기를 뿜으며 연두색 생콩을 검은색 원두로 만들어낸다.

화장실에라도 가려고 하면, 바리스타가 커피를 내리는 주방과 쿠키를 굽는 오븐 앞을 지나, 커피교실을 하는 방을 두루 구경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커피를 이렇게 볶고, 내리고, 공부하며 커피를 만든다’는 것을 저절로 볼 수 있게 한 구조이다. 양 대표는 이를 두고 ‘스토리 마케팅에 이은 시각 마케팅’이라 했다. 일반인들이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커피 볶는 풍경 등을 공개하는 효과는 여러 가지이다. 공장에서 바로 나온 커피이니 ‘신선하다’ ‘값이 싸다’ ‘맛이 좋다’라고 자연스레 생각하게 된다.

월요일 오후 다소 한가할 시간인데도 가비양의 자리는 3분의 2쯤 차 있다. 스페셜티 커피라고는 하지만 한 잔에 5000원 이상씩 하는 커피를 마시러 도심도 아닌 이곳까지 자동차를 몰고 일부러 찾는다는 것은 조금 의아해보일 법도 하다. 더구나 라이브 카페가 망해서 나간 외진 이 자리에, 가비양이 들어선 지 2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가비양이 커피의 깊고 풍부한 맛과 분위기로 두꺼운 팬층을 확보한 까닭은 양동기 대표의 젊은 시절 커피 관련 ‘스펙’이 이곳에 고스란히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처음 본 2000년께, 양 대표는 일본 커피 기구를 수입하던 30대 초반 젊은이였다. 어깨에 가방을 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당시 전국의 유명한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들은 대부분 양 대표의 고객이었다. 

일본의 한 대학에서 인공지능 컴퓨터 프로그램을 공부하다가 커피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일본의 커피 ‘선진 문물’을 누구보다 쉽고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고노나 칼리타 같은 유명한 커피 기구 회사와도 어렵지 않게 거래할 수 있었다.

 

중앙에 있는 커피 볶는 기계들(위) 덕에 고객들은 가비양의 커피가 더 신선하고, 값싸고, 맛이 좋다고 여긴다.

양동기 ‘가비양’ 대표(위)는 일본에서 인공지능 컴퓨터 프로그램을 공부하다가 커피를 만났다. 그는 늘 커피가 지닌 최고의 개성을 끄집어내려고 애쓴다.

커피 싸움, 재료가 승부 판가름

당시 그가 고노의 사장 고노 도시요를 만나러 가면서 설립한 회사 이름은 ‘가비양’이었다. 양 대표에 따르면, 가비는 예전에 커피를 일컫는 순우리말이었다. 거기에다가 자기 성을 붙였다. 전 세계 사람들이 발음하기 쉽게 하겠다는 젊은 시절의 다부진 꿈이 담긴 이름이다. 

그는 지금 젊은 시절의 꿈을 하나씩 실현 중이다. 한국에서 커피 볶는 문화가 본격화한 1990년대 말에만 해도 한국은 주로 일본을 거쳐 생콩을 들여왔다. 일본 회사가 나눠주는 대로 받아야 하는 만큼 선택의 폭이 좁았다. 양 대표는 그 장벽을 넘은 커피 신세대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2006년부터 콜롬비아·코스타리카 등 남미의 커피 농장에서 생산자들을 직접 만나가며 좋은 원료를 들여오기 시작했다. 그 규모는 한 해에 20t 정도까지 늘었다. 콜롬비아의 산악지대 시에라네바다에서 전통 방식으로 생산한 아르아코족의 나부시마케 커피는 가비양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커피도 먹는 것이니 결국 재료 싸움에서 판가름이 난다. 원산지·종류·종자·기후·고도·품종·사람 등 관련된 모든 환경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다. 각각의 커피가 지닌 최고의 개성을 끄집어내는 것을 늘 기본으로 한다.” 양 대표처럼 한국 커피계의 신세대들은 다름 아닌 바로 그 기본을 다지고 넓혀가는 데 큰 힘을 쏟고 있다.




고소하고 구수한 ‘숯불구이 커피’

파주 헤이리마을에 있는 ‘칼디커피’에서는 숯불로 커피를 볶는다. 참숯 특유의 향이 커피에 스며 독특한 향미를 갖는다. 사이펀, 융 드립 등 쉽게 접할 수 없는 방식의 커피도 맛볼 수 있다.


숯불구이 갈비는 익숙해도 숯불구이 커피는 처음 듣는 분이 많을 것이다. 한때 커피를 잘 안다고 자부하던 나도 “좋은 가스 불 놔두고 웬 숯불? 치기도 유분수지”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건 뭘 모르고 한 소리였다. 

허영만의 만화 <식객> ‘소고기 전쟁’ 편을 보면 성찬이와 봉주가 좋은 숯을 구하려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좋은 숯불은 ‘재료의 잡맛을 날려버리고 고기 고유의 향을 은은히 살린다’라고 허영만은 설명한다. ‘고기’ 자리에 ‘커피’를 넣어도 딱 맞아떨어진다.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마을 1번 게이트. 마을 안쪽을 바라보면 오른쪽 언덕배기에 검은색 3층 건물이 보인다. 갤러리모자이크 건물이다. 지난해 5월1일 헤이리마을은 갤러리모자이크 1층에 새로운 명물 하나를 맞아들였다. 커피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서덕식씨(53)의 ‘칼디커피’이다. 서울 홍대 앞에 문을 연 이후 7년 만에 2호점을 열었다. 서씨는 참숯으로 커피를 볶는다.



서덕식 대표가 ‘팩토리’라 부르는 칼디커피 헤이리점에서는 알코올 램프로 가열해 커피를 뽑는 사이펀 방식 커피도 맛볼 수 있다.


서씨는 헤이리점을 ‘팩토리’라 부른다. 공장답게 칼디커피 문을 열고 들어서니 커피 볶는 기계가 가장 먼저 보였다. 오른쪽으로는 앤티크 커피 기구들이 놓여 있고, 주방에는 알코올 램프로 커피를 뽑는 사이펀 기구들이 열을 지어 서 있다. 전문 커피점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실내에는 탁자가 5개밖에 되지 않는다.

자리에 앉아 사이펀으로 뽑은 에티오피아 커피의 맑은 맛을 보고 있는데, 커피를 볶던 서씨가 사진기자와 나를 급히 불렀다. “빨리 와서 보세요.”

후지로얄 상표를 단 10kg짜리 커피 볶는 기계는, 겉보기에는 드럼통이 열을 받으며 돌아가는 일반 가스 불 기계와 비슷하다. 서씨는 드럼통 아래에 있는 숯불을 열어 보여주었다. 가스로 점화된 참숯이 파랗고 빨간 불꽃을 일으키며 드럼통 아래에서 열을 가한다. 가스로 굽는 고기와 숯으로 굽는 고기가 맛은 물론 일단 보기부터 다르듯이, 커피도 ‘숯불 볶기’가 가스 불 볶기보다 더 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원래 커피는 가마솥에서 장작불로 볶았다. 숯으로 커피를 볶는 것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서씨는 “참나무 숯으로 볶는 커피는 참숯 특유의 향이 스며들어 독특한 향미를 갖게 된다”라고 말했다. 일반 가스불보다 50℃ 더 높은 300℃의 숯불에서 나오는 원적외선은 커피콩 내부를 가열해 콩의 겉과 속을 똑같이 볶아낸다는 설명이다. <식객>에 나오는 숯 전문가의 말과 똑같다.


  

서덕식 칼디커피 대표는 1970년대 중반 부산의 한 다방에서 커피에 입문했다. 인스턴트 커피가 나오기 전, 그 시절 다방에도 ‘바리스타’(주방장)가 있었다.


가스 불에 볶는 것보다 훨씬 까다로워

과연 참숯으로 볶은 커피의 맛은 달랐다. 일반 커피에 비해 구수하고 풍부한 맛, 곧 가마솥에서 푹푹 끓인 숭늉 같은 느낌을 주는 깊은 맛이었다. 참숯을 10cm로 토막 내 불을 붙여 가열하는 참숯 볶기는, 가스 불 볶기보다 훨씬 까다롭다. 불의 강도를 쉽게 조절할 수 없어 열을 통제하기가 어렵다. 도자기를 굽다가 한순간에 망칠 수 있듯이 고급 생두를 새카맣게 태우기 십상이다. 서씨에게 왜 어려운 길을 택했느냐고 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유일하지만,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는 많은 이들이 숯불을 사용한다.  일본에서 처음 맛보았을 때 구수하고 고소한 우리 숭늉 맛이 났다. 나에게 우선 잘 맞았고. 우리나라 사람에게 잘 맞는 것 같아 시작했다.”

서씨는 숯불 볶기뿐 아니라 커피를 뽑을 때도 남들이 번거롭고 어렵다며 꺼리는 사이펀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2000년에 문을 연 홍대 앞 칼디커피는 사이펀의 명소로 널리 알려졌다. 유리 원통 아래에서 작은 가스램프로 가열을 하면 순간적으로 커피가 만들어지는 광경을 눈으로 직접 보고 즐기는 맛도 만만찮다. 커피의 성분을 가장 풍부하게 잘 뽑아낸다는 ‘융(천) 드립’도 칼디커피가 자랑하는 커피 내리는 법이다.


참숯 볶기며 사이펀, 융 드립 등 서씨로 하여금 남들이 가지 않는 전통의 길을 가게 하는 힘은, 1970년대 중반 ‘다방’의 주방 경험에서 연유한 듯 보였다. 그는 부산 중앙동 황태자다방에서 커피에 입문해 입대하기 전까지 일했다고 했다. 

1980년대 냉동건조 인스턴트 커피(맥심)가 나오기 전, 다방은 요즘의 유행처럼 주방장(요즘 말로 바리스타)이 원두를 갈아 깔때기나 사이펀으로 내려 커피를 만들었다. ‘맥심’이 나오자마자 고임금 남자 주방장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버스 안내양들처럼…. 마담이든 레지든 누구나 똑같은 맛의 커피를 물에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방장과 함께 커피의 개성도 사라진 것이다.

제대 후 일본 커피회사 UCC에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커피에 입문한 서씨는 1991년 커피공장을 열어 커피를 볶기 시작했다. “어려운 길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독특한 맛을 내려 하다보니 방법을 달리해야 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커피교실을 통해 그동안 커피 애호가를 5000여 명 배출하며 좋은 커피의 저변을 넓히는 한편, 인도네시아 사향고양이 배설물에서 나오는 루왁 커피를 한국에 처음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헤이리에서 매일 서너 시간씩 커피를 볶는다. 볶는 노하우를 공개해도 괜찮은가 하고 물었다. “커피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즐기라고 일부러 작업실처럼 만든 곳이다. 난 비밀이 없다. 얼마든지 봐도 좋다. 그러나 커피 볶을 때 집중해야 하니 질문은 하지 마라.”



‘좋은 콩’이 주는 ‘좋은 뒷맛’

종로2가 금싸라기 땅에 있는 카페뎀셀브즈에서는 3000원짜리 커피를 판다. 직원에 대한 투자와 거품 뺀 가격을 무기로 대형 프랜차이즈들을 물리치고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캐나다에 살면서 한국에 가끔 가면, 한국은 모국이 아니라 거의 천국이다. 한 가지만 해결되면 딱 천국이겠는데 1% 부족한 것이 바로 커피다. 한 잔에 1달러(약 1000원) 남짓 내고 먹다가, 3000∼4000원씩이나 내려면 빈속에 나쁜 커피 마신 것처럼 속이 쓰리다. 한국 커피 값이 이렇게 비싼 것은, 커피와 공간을 함께 소비하는 한국 고유의 문화 때문이다. 커피점의 비싼 자리 값이 높은 커피 값의 주범인 것이다.

자리가 필요하지 않는데도 커피 값이 비싸면 나 같은 사람은 참 억울하다. 서울 종로2가에 이런 억울함을 풀어주는 전문점이 있다. 카페뎀셀브즈. 대표 메뉴인 ‘오늘의 커피’가 3000원이니 전문점치고는 싼 편이다. 자리에 앉지 않고 바깥으로 들고 나가면 1000원을 더 깎아준다. 서울 중심가 금싸라기 땅에서 좀체 만나기 힘든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이다.


‘이명래고약’을 아는가? 과거 조미료 하면 ‘미원’이었듯이, 고약 하면 이명래고약이었다. 서울 종로구 관철동 5-8. 카페뎀셀브즈는 바로 그 이명래고약 건물에 있다. 3층짜리 건물을 모두 사용한다. 김세윤 대표는 “어른들은 이명래고약에 향수를 갖고 계신다. 건물이 매물로 나왔을 때 아버지께서 구매해 내게 맡기셨다”라고 말했다. 김 대표 부친은 2009년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에 300억원을 기부해 한국 사회를 크게 감동시킨 김병호 서전농원 회장이다.

 

옛 이명래고약 건물을 리모델링한 카페뎀셀브즈. 김세윤 카페뎀셀브즈 대표(위)는 직원 교육에 철저하다. 해외 연수와 교육비 지원으로 직원들이 세계 바리스타 대회에서 상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2002년 2월 전통의 이명래고약 건물은 커피·베이커리 전문점 카페뎀셀브즈로 재탄생했다. 미국의 스타벅스가 주도하는 새로운 커피 문화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김세윤씨는 그 건물을 커피 건물로 새롭게 디자인했다. 3층 건물의 안과 밖은 전통이 녹아 있되 세련되고 현대적인 분위기로 금세 탈바꿈했다. 지금은 일반화한 인터넷을 커피점에 처음으로 끌어들이는 등 젊은이들을 향한 마케팅 전략을 펼쳐나갔다.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어느 순간 커피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씨는 세계바리스타챔피언십에 참가하면서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마케팅 전략은 첨단 디자인과 인터넷 서비스 같은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옮겨갔다. 그 중심에는 케이크와 커피가 있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커피뎀셀브즈의 반경 70m 안에는 국내외 대형 커피 전문점이 6개나 포진해 있다. 공룡 같은 프랜차이즈들을 물리치고 지역의 선두 자리를 굳힌 것은 커피계의 ‘까도남’ 같은 성격 덕분이다. 

카페 디자인 1년에 한 번씩 바꿔

전략의 중심이 소프트웨어로 옮아갔다고 하지만 분위기의 새로움은 여전하다. 그는 크든 작든 1년에 한 번씩 카페 디자인을 새로 한다고 했다. 갈색을 주된 톤으로 하는 실내외 인테리어는 단순하지만 세련된 도시 이미지다. 분위기가 엇비슷한 대형 프랜차이즈들과는 달리 내부의 미니멀한 공간 디자인도 눈에 띈다. 1층을 뒷마당까지 넓혀서 천장 유리를 통해 자연광이 들어오게 하는 과감한 디자인, 2∼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홀의 산뜻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돋보인다.

김씨는 내게 에스프레소를 권했다. 국제 감정사들이 최고 커피로 평가한 ‘컵 오브 액설런스’의 과테말라 산이라고 했다. 에스프레소가 주는 강력하고 짜릿한 맛이 느껴진다. 그는 그 맛을 ‘묵직한 보디(입안에 머금었을 때 느껴지는 농도)와 경쾌한 산미’라고 표현했다. 나는 좋은 사람, 좋은 예술, 좋은 커피의 평가 기준을 ‘뒷맛이 좋다’라는 것으로 삼는데, 그날 마신 에스프레소는 기분 좋은 뒷맛을 남겼다.



주변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점들과 달리 자연광이 비치는 내부 디자인이 눈에 띈다.



김씨는 커피 공부의 필요성을 느낀 후 북유럽, 이탈리아, 독일, 미국 등지를 뛰어다니며 맛을 보았다고 했다. 커피 선진국을 돌면서 얻은 결론은 ‘모든 것은 콩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좋은 콩을 구해 그 안에 들어 있는 성질을 잘 끄집어내는 것이 내 역할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예전에는 나쁜 콩의 나쁜 성질을 죽이기 위해 커피를 까맣게 태웠으나 지금은 우리나라도 인위적으로 조작할 필요가 없는 수준에 와 있다는 얘기다. “쇠고기 자체에 자신 있으면 양념 없이 생고기로 먹는 것과 같다. 고기가 좋은데 굳이 강한 양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커피 전문점 카페뎀셀브즈에서 눈에 띄는 것은 두 가지이다. 먼저, 사람에 대한 투자. 22명 직원 교육을 철저히 해 세계 바리스타 대회에 참가시킨 직원들이 상위 입상을 하기도 했다. 대기업처럼 교육비를 지원한다. 80% 출석 증명서만 가져오면 어학원 등록비와 책값을 100% 대준다. 해마다 직원 네댓 명을 해외로 내보내 외국 커피를 맛보게 한다. 조만간 커피 산지 프로그램도 가동할 참이다.


다음은 커피 가격. 김세윤씨는 바쁜 떡볶이 가게 주인에게서 비결을 배웠다고 했다. “맛이 좋아 사람이 많은 게 아니라, 사람이 많아 맛이 좋다.” 커피는 회와 같은 선도(鮮度) 식품인 만큼 회전 속도(양)가 질을 결정한다. “커피를 직접 볶는 사람이니 공급을 조절하면서 더 싸게 할 수 있다. 사람이 많으면 당연히 맛은 더 좋아지게 된다.”

전통의 이명래고약 건물에서 김씨는 전통의 커피점을 꿈꾼다. “신촌 독수리다방과 스타벅스는 1971년 같은 해에 태어났다. 독수리다방은 건물만 남았는데 스타벅스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카페뎀셀브즈

서울 종로구 관철동 5-8 (02-2266-5947)
www.caffethemselves.com
종로2가 사거리에서 청계천 가는 길 왼쪽에 위치. 매일 오전 10시~오후 11시. 일반 커피에서부터 최고급 커피까지, 그리고 신선한 케이크를 맛볼 수 있음. 가격이 비교적 저렴. 일반 원두는 200g에 9000원. 인터넷 가능. 3층에 흡연실 있음.




전광수커피하우스 명동 본점의 매력

전광수커피하우스 명동 본점의 매력은 다양한 ‘재미’에 있다. 전광수 대표는 커피 종류에 따라, 볶음 정도에 따라 수많은 맛을 잡아내는 재미 때문에 커피를 볶는다.


커피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 좋은 커피점을 찾아 일본까지 다녀온 내게 2002년 봄 새로운 소식이 하나 들려왔다. 경기도 일산에서 머리를 기른 어떤 자가 공방을 열어 커피를 가르치고 커피를 볶아 판매하는데, 미국에서 배워온 내공이 만만찮다는 내용이었다. “공~바아앙~?” 하며 궁금해했으나, 그해 5월 캐나다로 건너오느라 분주했던 까닭에 끝내 그곳을 찾지 못했다.

얼마 전 커피점 연재를 위한 취재차 한국을 다시 찾았을 때, 그는 건재할 뿐만 아니라 이름을 ‘공방’에서 ‘아카데미’로 바꾸고 서울 한복판인 명동으로 옮겨와 있었다. 그 사이 아카데미 산하 커피점 ‘전광수커피하우스’가 생겨났고, 그것은 명동 본점을 시작으로 9개로 늘어났다.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커피점 대표들이 모두 그렇듯, 전광수 대표도 지난 10년간 한국 커피계의 질적·양적 성장과 팽창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말 그대로 비약적이다.

전광수커피하우스를 운영하지만 전광수씨는 일반 전문가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보통은 커피점을 열어 커피를 공부하고 좋은 커피를 만들어 사업을 키운다면, 전씨는 커피 자체보다는 커피 볶기와 볶기 교육에 초점을 맞추었다. 커피 생산의 여러 과정 중에서도 볶기에 치중하면서, 그것을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은 것이다.


제자 400여 명 중 150명이 ‘커피 창업’

공방과 아카데미를 통해 그동안 배출한 제자만 해도 400명이 넘는다. 그중 150명이 커피로 창업했다.
2004년 명동으로 옮겨온 뒤 2007년 전광수커피하우스를 여니, 제자 한 사람이 커피점을 만들어달라고 청했다. 프랜차이즈에 별 관심도, 노하우도 없어서 한참을 망설였다고 했다. “서울 안국동 옆 북촌에 전광수커피하우스 2호점을 열었다. 대박이 났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전광수커피하우스가 9개(서울 7개, 지방 2개)가 되었다. 명동 본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자가 운영하는데, 그가 성수동 커피 공장에서 볶는 커피를 받아 쓰고 매출액의 1%를 프랜차이즈 비용으로 낸다(보통은 2% 정도. 캐나다에서는 8% 이상). 동문으로서 결속력이 강한 점주들은 3개월마다 모임을 열면서 뚜렷한 색깔을 유지하고 있다.

전광수씨가 직영하는 명동 본점에 들어서면 그의 색깔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커피를 강하게 볶는 편이다. 전광수커피하우스의 색깔은 먼저 묵직한 보디감(입 안에서 느껴지는 질감이나 무게감)에서 찾을 수 있다. 산지별로 커피 맛은 달라지지만 전광수 커피를 관통하는 것이 있다. 쓴맛에 섞여 살짝 묻어나오는 단맛.


그의 또 다른 개성은 블랜딩(여러 종의 커피를 섞기)을 무엇보다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그는 “맛은 결국 블랜딩 싸움이다”라고 말했다. 단종 커피의 맛은 한계점이 있는데, 커피를 여러 종 혼합만 잘 하면 무한대의 맛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건은 단종 커피의 맛과 향을 ‘어떻게’ ‘잘’ 파악하여 ‘혼합’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실력이라고 믿는다.

사실 커피 볶는 방법은 이른바 고수 세계에서 큰 비밀에 속한다. 식당으로 말하자면 주방장의 레시피(조리법)와 같다. 그런 점에서 커피 볶는 방법을 가르치는 전광수씨를 ‘커피 전도사’라 불러도 틀린 말이 아니다. 2년 전 <전광수의 커피 로스팅>이라는 책까지 펴내며 16년 노하우를 공개했으니 전도사 중에서도 ‘열혈’에 속한다. 그는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나도 그렇게 배웠으니까.”


전광수커피하우스 전광수 대표(위)는 블랜딩(여러 종의 커피 섞기)을 중시한다. 그는 “커피 맛은 결국 블랜딩 싸움이다”라고 말한다.


멀쩡하게 회사에 다니다가 커피를 배우겠다며 미국으로 훌쩍 떠난 때는 나이 서른을 갓 넘긴 1993년이었다고 한다. 지인의 소개로 엘살바도르 출신의 스승 밀튼 코레아스 씨를 만났다. 동양 정서를 지닌 스승은 자기 집을 숙소로까지 제공하며 갈 때마다 일주일에서 보름씩 가르침을 아낌없이 주었다. 전광수씨는 미국을 오가며 배운 그 지식을 국내 제자들에게 나눠주는 셈이다.

그는 커피 이야기를 하는 중에 ‘재미’라는 말을 즐겨 쓴다. 커피를 볶는 것도 종류에 따라, 볶음 정도에 따라 수많은 맛을 잡아낼 수 있는 재미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도 배우러 오는 사람을 만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커피 볶는 가게가 크게 늘어서 1000개를 넘어섰으나, 그가 보기에 별 재미가 없어 보인다. 거창하지는 않아도 자기 세계를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는데, 그런 곳이 드물다는 것이다.

전광수커피하우스의 명동 본점에서 그가 추구하는 개성을 찾아보았다. “나는 편안한 숍을 원한다”라고 했다. 문을 열 때부터 편안함을 주기 위해 전돌을 구해 바닥에 깔았다. 미국의 어느 도서관에서 가져왔다는 의자와 탁자는 앤티크 스타일이면서도 ‘튀지 않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차림표는 만화를 그려넣어 재미있게 꾸몄다. 특히 이런 문구가 눈에 띈다. ‘전에 먹은 커피가 진하면 바리스타에게 농도 조절을 요구하세요.’

주방 앞에는 직원들 보라고 이렇게 적어놓았다. ‘커피를 맛있게 추출하면 뭣 하나. 식기 정리도 안 하는 것을…. 자네는 알 거야.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것을….’ 손님들도 보고 웃으라는 것이다. 전광수커피하우스에는 이런 자잘한 재미가 많다. 

※ ‘아주 특별한 커피&카페’는 이번 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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