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원 생태산책~전통과 현대 어우러진 공원 일대 골목 산책길
노랑·분홍 작은 들꽃, 아늑한 골목…숨은 풍경 찾기
1. 조홍섭 기자가 추천한 공원산책길
“‘차경’이란 말이 있죠. 보이는 경치를 빌려와 정원으로 삼는다는 건데, 국내 신문사 중 우리 신문사처럼 큰 정원을 가진 곳이 없을 겁니다. 효창공원이 우리 후원인 셈이니까요.”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를 나서며 조홍섭 환경전문기자는 말했다. 1988년 <한겨레> 창간 때부터 환경 분야에 천착해온 그다. 언덕길을 오른 지 3분여 만에 용산구 효창공원 후문에 닿았다. 작은 길 하나를 경계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후문으로 들어서니 전경이 탁 트인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모양새다. 후문에서 효창운동장 쪽 정문까지 콘크리트로 포장한 주산책로가 거의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길로만 걸으면 효창공원의 반의 반도 채 못 본다. 효창공원의 진짜 아름다움은 사이사이 뻗은 오솔길에 숨어 있다.
“여긴 조선시대 때 왕족이 관리하던 국유림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궁궐과 군선을 만드는 데 쓰이는 소나무와 구휼에 유용한 밤나무가 주종이었거든요. 이후 격변의 시대를 겪으며 용도가 계속 바뀐 것처럼 식물도 짬뽕이 돼버렸어요. 그 시대에 싸고 좋다는 건 아무거나 다 갖다 심었거든요.”
1991년 한겨레신문사 사옥이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서 공덕동으로 이전했을 때만 해도 효창공원에는 흔히 아카시아로 부르는 아까시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민선 지자체장들이 생태공원으로 정비하면서 화살나무, 국수나무, 조팝나무 등 자생 수종을 많이 심었다. 공원 후문 부근에 보통 가로수보다 훨씬 더 큰 플라타너스가 우뚝 서 있다. “일제가 1935년 이곳에 플라타너스와 벚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죠. 이 플라타너스는 80년은 됐을 겁니다.”
2005년 이후 습지 조성되며 생물다양성 높아지고 활기
개구리·두꺼비·송사리 살자 딱따구리도 나타나
그 옆으로 이팝나무가 있다. 요즘 한창 흐드러진 꽃이 흰쌀밥 같아서 붙은 이름이다. 노란 들꽃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간다. “이건 애기똥풀이에요. 잎을 짜보면 이렇게 노란 유액이 애기 똥처럼 비어져 나오거든요.” 음지에서도 잘 자라고 여름에 보랏빛 꽃을 피우는 맥문동이 밭을 이룬 곳도 있다.
정문 부근 화장실 앞 나무에는 작은 꽃송이들이 모여 주먹보다 큰 덩어리를 이뤘다. 부처님 머리를 닮았다 해서 불두화란다. “절에 많이 심는 나무인데, 무성화예요. 암술·수술이 없어 생식을 못하죠. 대신 꺾꽂이로 번식시켜요. 그래서 절에 많은가 봐요.”
새끼손톱보다 작은데도 영롱한 빛깔과 자태를 뽐내는 꽃마리, 흰 별 모양을 한 별꽃, 노란 양지꽃과 씀바귀꽃, 선홍빛 비단주머니처럼 생긴 금낭화(며느리주머니꽃) 등 작은 들꽃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들꽃들이 너무 작아 지나치기 쉬운데, 이런 것들을 잘 찾아봐야 진정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요.”
산책길 옆으로 습지도 보인다. 습지에 노랑꽃창포가 활짝 피었다. “2005년 이후 인공적으로 조성한 건데, 습지가 있어야 생물다양성이 높아지고 공원이 활기를 띠게 됩니다.” 습지에는 개구리, 두꺼비, 송사리, 다슬기 등이 산다. 물 때문에 새들도 모인다고 한다. 야생 비둘기인 멧비둘기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오색딱따구리를 본 적도 있어요.”
백범김구기념관 뒤에 자리한 김구 선생 묘역에 올랐다. 100년 가까이 된 듯한 소나무와 70~80년은 족히 된 느티나무가 봉분 앞에 우뚝 서 지키고 있다. 봉분 뒤로는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더 큰 소나무들이 둘러서야 하는데, 1970년대에 심은 거라 아담하죠?”
앞이 탁 트이면서 효창운동장이 내려다보인다. 선선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마음이 평온해진다. “여기만 오면 안온해져요. 명당이라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죠.”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무덤에 막걸리 한잔 뿌리고 나도 한잔 마시고 싶어졌다. 물론 실제로 그러진 않았다. 효창공원은 금주·금연 공원이다. 다시 후문으로 돌아가 백반집인 소반식당에 들어갔다. 막걸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2. 만리시장 주변 옛골목 산책
세련된 카페도, ‘패셔니스타’를 위한 화려한 상점도 없다. 그저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는 골목이다. 지렁이처럼 구불거리는 길과 낡은 주택들이 고즈넉한 매력을 뿜어낸다.
효창공원 동쪽 골목 여행의 시작은 효창공원 후문에서 시작한다. 후문 건너 ‘효창 카센타’를 끼고 골목으로 들어서면 오르막이 펼쳐진다. 숨을 할딱거리는 여행객을 길고양이 여러 마리가 쳐다본다. 푸른 하늘을 도화지 삼은 전선줄이 드높다. 어디선가 돌돌 미싱 돌리는 소리가 귀를 잡아끈다. 10평 안팎의 작은 공장들이 가정집과 구별 없이 동네를 메웠다. 겉과 속이 다르다. ‘보신탕 전문 시골집’ 안에는 일명 ‘마찌꼬바’(영세한 소규모 공장)가 들어앉아 있다. 실밥 날리는 골목이다. ‘정감’의 주인 송재권(64)씨는 “남대문시장 의류업체의 하청업체가 많다. 70년대 (경기가) 좋았다. 남대문시장이 최고였으니깐. 그 업체들이 동대문시장으로 이사 가자 일이 줄었다”고 말한다. 한 시대 영화로웠던 동네의 남은 흔적은 애잔하다. “고가가 철거되면 길이 더 복잡해져서 원단 실은 택배도 안 오려고 할 텐데 걱정이다.”
송씨의 걱정을 뒤로하고 다시 걷자 ‘정지된 시간’을 만난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소 ‘성우이용원’(1927년 개업)이다. 3대가 가업을 이은 이곳의 주인은 이남열(65)씨다. 꼬장꼬장하다. “30분은 깎아야 한다. 요새 5~10분 만에 깎는 데가 많은데, 머리(모양)가 안 나온다. 예전에는 80분이었다. 서두르는 사람은 나가라고 한다.” 가게에는 5년째 단골인 한 손님이 머리를 그에게 맡겨두고 있다. 그는 1~2시간 걸려 일부러 찾아오는데, “마음이 편하고 ‘힐링’이 되는 기분”이 이유라고 말한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여행하고 돌아가는 것이다. 올해 ‘서울 미래유산’에 지정된 이곳은 꽤 유명하다. “구경꾼도 있지만 하루 10명 정도는 이발하러 온다.” 찰칵 사진 한 장은 필수.
길 건너에는 만리시장이 있다. 신한은행 만리동지점 건너 들머리에서 청파초등학교까지 450m 정도의 길 양편을 만리시장 거리라 부른다. 시장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볼거리는 ‘협동조합 마을공방 사이’다. 지난해 10월에 문 연 ‘사이’는 지역민들이 이용하는 헌 가구 및 재활용품 수리 작업장이다. 조합장 이우경씨는 “목공예 강좌도 있다. 이용료는 1시간당 8000원이다. 드릴이나 각종 도구도 제공한다”고 한다. 여행객을 위한 주막도 있다. 선술집 ‘그때~그집’이 기다린다. 매운 닭발과 시큼한 막걸리가 단비다. 이어 배문고등학교 담벼락 길을 오르고 내릴 때마다 멀리 솟은 빌딩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효창원로 104길 34’에서 숨을 돌리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깜짝선물처럼 아늑한 골목이 나타난다. ‘효창원로 104마길 11’을 거쳐 ‘효창원로 104마길 18’, ‘효창원로 104마길 22’로 쭉 이어지는 좁은 길이다. 기와지붕, 파란 대문, 물고기나 악기 문양 등이 박힌 회백색 벽들 등 마치 부산 감천동 문화마을 같다.
그 길을 빠져나와 청파초등학교 담벼락 뒷길로 걸으면 ‘청파문구’에 이르러 푸른 나무에서 부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담을 탈출한 초등학교 나무가 골목을 숲으로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반기는 것은 40년 넘은 목욕탕 ‘진양장’과 ‘진양여관’이다. 대략 1.6㎞ 거리 여행은 효창공원을 바로보고 끝난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3. 공원 옆 골목 따라 ‘한겨레’까지
효창공원을 충분히 즐겼다면 이젠 주변 골목길을 돌아볼 차례다. 공원 정문에서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역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왼쪽에 갤러리 카페 ‘마다가스카르’가 나온다. 사진가 신미식씨가 운영하는 곳이다. 입구의 크고 작은 화분과 멋스러운 빈티지 자전거가 반겨준다. 안에 걸린 바오밥나무 사진을 보니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여행이라도 온 것 같다.
카페를 나와 길을 건너면 책놀이터 ‘고래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곳에 있던 출판사가 이전하면서 기증한 책을 바탕으로 꾸민 복합문화공간이다. 아이와 함께 책을 보며 차도 한잔할 수 있다. 고래이야기를 나와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든다. 왼쪽 구석에 ‘아비에’라는 작은 옷가게가 눈에 띈다. 효창동에서 옷가게를 만나는 건 좀처럼 드문 일이다. 사장 서진주씨가 직접 디자인한 남성복·여성복·아기옷을 판다. 건빵주머니가 달린 카키색 카고바지를 4만원대에 샀다.
옷가게를 나와 가던 골목으로 더 들어가니 왼쪽에 차분한 동네 분위기와 달리 좀 튀는 모던한 건물이 눈에 확 들어온다. 건물 1층에 ‘카페 데 뮤지까’가 있다. 벽 한켠을 엘피(LP)로 가득 채운 음악 카페다. 정기적으로 라이브 공연도 연다. 탁 트인 창으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재즈음악과 함께 맥주 한잔하기에 딱이다.
좀더 걸으니 붉은 벽돌의 효창 제일빌라가 나온다. 옆면을 뒤덮은 녹색 담쟁이넝쿨이 세월의 흔적을 머금었다. 제일빌라를 끼고 왼쪽으로 꺾어지니 효창 베네스 아파트가 보이고, 그 바로 앞에 원효사라는 절이 우뚝 솟아 있다. 절반은 전통양식이고 절반은 현대양식인 건물이 특이하다.
원효사 뒤에서 효창 동해빌라 오른쪽의 작은 골목길로 들어선다. 작은 골목길은 더 작은 골목길로 이어진다. 사람 둘이 지나면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좁은 골목, 왠지 정겹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왼쪽으로 꺾으니 영어로 ‘SEGAJI VIDEO’(세가지 비디오)라 쓴 간판이 보인다. 젊은 남자 셋이 운영하는 영상제작사 사무실이다. 저렴한 임대료는 예술가들을 부른다. 사무실 앞에 내다놓은 흰 벤치에 앉아 아기자기한 선인장 화분을 감상하며 숨을 고르고 다시 일어선다.
효창공원 쪽으로 나가니 일방통행 차도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 ‘커피나눔’이 있다. 커피콩을 직접 볶아 커피를 만드는 집이다. 2000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걸으니 34년 전통의 수타짜장집 ‘신성각’이 나온다. 원래도 붐볐지만 최근 티브이엔(tvN) 프로그램 <수요미식회>에 소개된 뒤로 식사 때가 아니어도 늘 사람들이 줄서 있다. 그나마 오후 3시 이후가 낫다.
신성각을 지나쳐 걷다가 성림슈퍼를 끼고 왼쪽 좁은 골목길로 들어선다. 조금 걸으니 시야가 탁 트이면서 내리막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가면 한겨레신문사다. 조건영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로, 잿빛 고성 같은 몸피를 녹색 담쟁이넝쿨이 뒤덮었다. 외부 계단으로 연결된 3층 정원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아까 사 들고 온 커피를 마시며 풀과 흙 냄새를 맡는다. 저 아래 윤전기에서 찍어내는 신문지의 잉크 냄새도 살포시 올라오는 것 같다. 기분 좋은 냄새다.
글·사진 서정민 기자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69107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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