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미군기지에 일제 병영시설 132동 있다
근대건축물과 녹지가 어우러진 서울 용산 주한미군기지터. 도심 속에서 마치 녹색 섬처럼 보인다.
2016년 반환을 앞두고 용산기지 터의 장래 활용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문화재청 현장조사서 확인, 보존상태 양호
“근대건축물의 보고…유례없는 역사문화유산”
2016년 반환되는 서울 용산 미군기지 안에 1906~1945년 사이 일제가 만든 조선주둔군 병영시설이 130동 이상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겨레>가 최근 유승희 민주당 의원을 통해 입수한 <군 주둔지 내 근대건축·시설 일제조사 용역 보고서>를 보면 용산기지 안에는 모두 1245동의 건물이 있는데, 이 가운데 132동이 1906년 이후 일제강점기에 축조돼 보존되어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 보고서는 문화재청 용역을 받아 건축사 연구자인 김종헌 배재대 교수팀이 2011년 7~8월 국내 처음 실시한 현장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보안을 이유로 조사가 불가능했던 건물 50여동을 포함하면 잔존하는 일본군 병영시설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병영시설은 주로 기지의 북쪽 지역(메인포스트)과 남쪽 지역(사우스포스트)에 남아 있는데, 각각 58동, 66동이 몰려 있다. 또 기지 안 극동공병단 부대(FED 콤파운드)에 5동, 캠프 코이너, 캠프 킴, 유엔군 가족 주거지역(유엔 콘보이)에도 각각 1개 동이 있다. 메인포스트는 병영시설이, 사우스포스트는 숙소가 주로 있던 곳으로 건물들 모두 보존 상태가 좋아 메인포스트 쪽은 미군 근무시설로, 사우스포스트 쪽은 숙소로 쓰이고 있다. 김 교수는 건물 배치를 통해 일제강점기 일본군 지휘본부와 야전군 배치 구조를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특정 지역에 100동 넘는 근대건축물이 옛 경관을 유지한 채 보존된 사례는 이곳이 유일하다.
김 교수는 “130동 넘는 일본군 병영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은 일본에서도 유례가 없다”며 “100년 전 일본의 한반도·대륙 침략의 실체를 보여주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유산”이라고 말했다. 또 외부로 돌출된 버트레스(주벽을 받치는 외부 구조물)를 활용한 군막사 시설은 고전주의에서 근대건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양식을 보여주며 서양식 응접실, 페치카에 온돌을 접목한 것도 특징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김 교수는 “용산역과 연결된 용산기지는 세계 전쟁사 흐름에 따라 일본군이 전쟁에 대응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근현대 인류문화유산의 가치를 가진다”고 평가했다.
이와 관련해 박원순 서울시장은 16일 용산공원 조성 방향을 묻는 <한겨레>의 서면 질문에 보낸 답변에서 “용산공원 개발은 서울의 100년을 결정짓게 될 중요한 선택이다. 반환부지 전체를 생태공원으로 조성해서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게 옳은 방향”이라며, 용산공원과 주변 지역 청사진에 시민들의 의견이 담길 수 있도록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 개정안을 마련해 국토부 건의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박 시장은 미군기지 안 근대 건축물에 대해선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한 기지 내부를 공개한 뒤 시민들의 공감대 안에서 보전해야 할 건물들은 보전하고 철거해야 할 건물들은 철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종업 정태우 기자 blitz@hani.co.kr
일본군 막사·벙커·위수감옥…100년 전 모습 보는듯
서울 용산 미8군 기지 안 옛 일본군 장교 숙소. 해방 뒤 미소공동위원회 소련군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주한미군 합동군사업무단(JUSMAGK)의 사무실이다.
반환기지 현장 가보니
2016년 반환을 앞두고 서울 용산 주한미군기지의 장래 활용을 둘러싼 논의가 시작됐다. 100년 이상 외세의 군대가 주둔하면서, 금단의 땅으로 묶여있던 용산기지터는 미·일 군사시설로 지어졌던 근대건축물과 자연 환경이 어우러진 세계적인 역사자연유산으로 평가받는다. <한겨레>는 창간 25돌 기획으로 2016년 시민의 품으로 돌아올 용산기지 안 낯선 역사 자연 유산들의 생생한 현장들을 집중취재했다. 국토부, 서울시 등 당국의 보존활용 계획과, 이를 둘러싼 여러 쟁점들, 전문가·시민 의견들도 함께 소개한다.
2016년 반환돼 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인 서울 용산 미군기지. 일제강점기 조선 주둔 일본군의 막사와 해방 뒤 이곳을 점유한 미군시설이 가득한 곳이다.
지난 10일 아침 기지 안의 근대유적을 살펴보려고 나섰다. 이를 위해 1927년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용산시가도>를 준비했다. 미국 국방부에서 만든 ‘용산 개리슨’ 지도로는 옛 건물의 분포를 알 수 없어 용산 조선주둔군 병영이 상세히 나온 이 지도는 소중한 자료다. 1979년부터 ‘주한미군의 입’으로 일해온 김영규 주한미군 공보관이 유적들을 안내했다.
건축물들 비교적 원형 보존 잘돼 공원 조성 뒤에도 보호가치 높아
병든 죄수들 감옥은 병원으로 쓰여, 일본군 충혼탑은 미군 충혼탑으로
조선시대 기우제 지내던 제단엔 미군들이 바비큐 구워먹은 흔적
■ ‘용산아방궁’과 벙커 용산기지는 이태원로를 경계로 북쪽의 메인포스트와 캠프 코이너, 남쪽의 사우스포스트로 구분된다. 메인포스트는 주로 미군 근무지, 사우스포스트는 주거·근린시설이다. 기지 내 건물은 모두 1245개동. 이 가운데 미군에서 역사성이 있는 건물로 분류한 것이 174개동이다.
1927년 당시 일본군 편제를 보면 용산에 20사단, 함경북도 나남에 19사단이 주둔했다. 20사단은 78, 79연대로 구성돼 있었다. 용산에는 조선주둔군사령부를 겸해 20사단과 사단사령부 외에 총독관저, 군사령부와 관저, 야포병, 기마병, 공병대, 육군창고, 위수병원, 위수감옥 등이 있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사우스포스트 서남단의 조선주둔군사령부. 1906~1913년 1차 건설된 용산기지 지도를 보면 군사령부는 용산역 광장에서 한강통(한강로)으로 나와 남서쪽으로 직진하면 곧바로 이르게 돼 있다. 현재 남은 것은 두 개의 콘크리트 벙커 가운데 작은 것이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국군 본부로 쓰였다.
벙커 뒤쪽 구릉에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다. 콘크리트를 부어 봉쇄하고 철문을 달았다. 아래쪽의 돔형 통로를 통해 총독관저까지 오갈 수 있었다고 한다. 초기 조선총독이 군사령관을 겸했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구조다.
언덕을 사이에 두고 사령부와 등을 맞댄 총독관저는 당시 조선주차군사령관이던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러일전쟁 뒤 군사잉여금 50만원을 들여 지은 초호화 건물이었다. 쌀 10만가마에 해당하는 돈으로 지은 이 건물은 ‘용산 아방궁’으로 불렸다. 당시 한달 전기료만 400원이 들 정도여서 하세가와는 물론 후임자 누구도 입주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발발 며칠 전 불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아미커뮤니티병원이 서 있다. 전망이 좋아 주변에 미군장성 숙소가 마련돼 있다.
■ 백범 암살범이 갇혔던 위수감옥 북쪽으로 이동하려면 ‘8군로’를 타야 한다. 기지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이 도로는 1908년 만들어져 한강통과 나란히 북쪽으로 나아가 남대문(숭례문)에 이른다. 건설 당시 ‘모든 기지 내 도로는 포차가 다닐 수 있도록 하라’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지시에 따라 넓게 만들었다고 한다. 오전 8시 반께 북행길은 출근, 통학 차량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옛 군사령관 관저가 있던 곳. 지금은 장교 숙소인 새 건물 앞에 멈췄다. 반환 뒤 미군 연락사무소로 쓰일 예정인 드래곤힐로지(DHL)가 빤히 내려다보인다. 이곳은 한때 미8군 클럽으로 쓰였는데, 한국 가수들이 어떻게든 서보려 한 ‘꿈의 무대’였다. 이태원, 홍대 앞 등 부대 밖에 위락시설이 들어선 뒤로는 손님이 없어 장교 숙소로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길을 건너면 20사단 사령부와 사단장 관저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단장 관저만 남아 다른 용도로 개조돼 쓰이고 있다.
다음으로 갈 곳은 1909년 지어진 옛 위수감옥 터. 둔지산을 휘돌아 넘어가야 한다. 분지처럼 푹 파인 곳에 자리잡아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모를 법하다. 어른 키 2배 높이의 붉은 벽돌로 담을 둘렀는데, 밖으로 지지대(버트레스)를 튼튼하게 쌓아 올렸다. 가운데 옥사는 한국전쟁 때 없어지고 현재는 한쪽 구석에 병감 한 동과 부속건물 한 동이 남아 있다. 병감은 환자 수인을 수용하던 감옥으로, 다른 곳과 달리 페치카 굴뚝이 솟아 있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체포돼 수감됐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군 포병대 기념 조형물
현재는 의무대가 쓰고 있으며 군용 막사의 상징인 반원형 퀀셋 건물 한 동도 남아 있다. 담장에는 한국전쟁 당시 총구멍이 곳곳에 나 있다. 그런데 이 많은 벽돌은 어디서 만들었을까. 1927년 지도를 보면 한강변 연병장(현 국립중앙박물관 자리)과 마주치는 산자락 끝에 연와제작소란 이름이 나오는데, 1906년 그곳에 민간업자의 대규모 벽돌공장을 세워 기지 내 모든 건물은 그곳에서 만든 붉은 벽돌을 썼다고 한다.
기지 안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안산대신궁(安山大神宮) 터를 거쳐 둔지산을 내려오면, 산기슭 곳곳에 옛 하사관 숙소들이 띄엄띄엄 보인다. 지금은 가족이 있는 미군과 군무원들이 쓰고 있다. 60~70년대 국내 영화 촬영 장소였다고 한다. 미국 현지에서 다 못한 촬영을 미국 분위기가 나는 이곳에서 마무리했다는 전언이다. 대부분의 숙소는 겉을 시멘트로 바르고, 현관을 달아내는 등 겉모습이 바뀌었지만 구조는 옛날 그대로다.
용산 미8군 기지 안 8군로. 1908년 일본 데라우치 총독 지시에 따라 만들었다.
■ 일본군 충혼탑이 미군 충혼탑으로 이태원로 위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를 넘으면 메인포스트. 가장 먼저 한국전 전몰 미군 충혼탑을 만난다. 원형으로 된 7단 기단을 돌기둥 7개가 반원형으로 두른 한가운데 오각형으로 된 탑신이 있고 그 위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원래 78연대 연병장에 있었는데 그곳에 1978년 연합사 건물을 지으면서 옮겨왔다. 탑은 본디 일본군 희생자를 위한 충혼비. 용산에 주둔했던 20사단이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에 출동하게 되는데, 이 전쟁들에서 죽은 일본군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해방 뒤 주둔한 미군이 비문만 바꿔 미군 충혼탑으로 재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옆으로는 한국전 이후 전사자 추모비가 별도로 세워져 있다.
메인포스트는 일본군 보병 78연대와 79연대의 병영이었다. 현재 78연대 자리에는 2층 군막사 5개동과 2개의 부속건물, 79연대에는 군막사 한 동이 남아 있다.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미군 사무동으로 쓰고 있다. 이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을 징용한 일본 건설회사 오바야시구미가 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출입문 2층 박공(경사진 지붕면과 벽 사이 삼각형 공간)에는 별이 새겨져 군 막사였음을 알 수 있다. 79연대 쪽에 남은 막사는 먼저 지어진 78연대 건물과 달리 페치카 굴뚝을 촘촘하게 밖으로 내어 건물 지지대를 겸하고 있다. 일본군이 한국 기후에 적응하려 했다는 증거로 읽힌다.
미군 사무실로 개조된 제78연대 막사가 옛 일본의 군용시설임을 보여주는 박공의 별
■ 옛 소련군 대표들이 묵었던 장교숙소 78연대 연병장 자리에 있는 한미연합사 건물을 지나 만초천을 건너면 옛 일본군 장교 숙소가 나온다. 한국전에서 두 동 가운데 한 동이 살아남았다. 해방공간에서는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소련군 대표들의 숙소로 쓰였으며, 이어 미군부대가 주둔했고, 한국전쟁 직전에는 군사고문단이 사용했다. 미색 스투코(건물 외벽을 덮는 도료)로 외장처리했을 뿐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뒤쪽 위수병원 건물은 완전히 사라졌다.
남산에서 발원해 한강으로 흘러드는 만초천은 연대 병영을 만들면서 직선화했다. 만초천은 78, 79연대 정문 앞을 지나는데, 일종의 해자 구실도 했다고 전한다. 천변 도로는 병영을 출입하는 주도로였다. 병사들이 용산역으로 이동할 때, 입대한 아들을 면회하러 온 부모들이 오가던 길이다. 부대 밖 생활오폐수가 흘러들어와 냄새가 심했으나 2년 전 하수관로를 따로 두어 냄새를 없앴다고 한다. 뒤이어 전쟁기념관 뒤쪽을 보면서 만초천을 계속 따라가면 1909년에 지은 옛 병기창이 나온다. 탄약과 병기를 보관하던 창고다. 위수감옥 담처럼 밖으로 버트레스를 대어 튼튼하게 지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옛 야포병영이던 캠프 코이너. 평평한 자리여서 일본군 포병대가 주둔했다고 한다. 현재 남은 건물은 거의 없는데, 포병대를 상징하는 기념탑이 부대 입구 가까이에 있다. 포탄처럼 다듬은 붉은색 화강암 기둥에 ‘일성관지’(一誠貫之)라고 새겼다. 한번에 정조준해서 꿰뚫는다는 의미로 포병 정신을 상징한다. 옛 위병소 옆 언덕 위엔 화강암 제단과 석축 일부가 보인다. 조선시대에 기우제를 지냈던 남단 유적으로 추정된다. 미군들이 바비큐를 구워 먹은 듯 시커멓게 그을음이 끼었다.
비교적 상태가 좋은 건물과 유적을 중심으로 돌아보았지만 살아남은 다른 건물들도 잘 보존된 편이다. 특이한 것은 땅을 깎아내고 무리하게 올린 높은 건물이 없어, 자연의 지세가 살아 있고 지세를 따라 건물이 앉은 모양이 그대로 보인다는 점이었다. 용산기지는 보존하고 활용할 가치가 있는 역사·문화적 자원을 상당수 품고 있었다.
용산기지 120년, 일본군 물러나자 미군이…
용산기지 안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기우제를 지내던 남단터.
용산기지는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용산은 1884년 청일전쟁 때 일본군의 숙영지가 되면서 일본군의 거점으로 떠올랐다. 특히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철도감부를 통해 지금의 용산역 광장에 3940평의 건물을 만들어 청사로 활용하면서, 용산은 일본의 한반도 철도경영의 중심지가 되었다. 1905년 용산기지 일대 300만평을 수용한 뒤 일부는 철도용지로 분할하고 117만9800평을 군용지로 확정했다. 이후 일본은 1913년까지 용산을 함경도 나남과 함께 일본군 병영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일본군 기지를 둘러싸거나 관통하는 주요 도로도 완성됐다. 오늘날 한강대교에서 용산로, 남영동, 갈월동을 거쳐 서울역에 이르는 직선도로인 한강통(한강로)이 이때 닦였으며, 후암동에서 용산고등학교 옆을 지나 남쪽 한강변 연병장에 이르는 군사도로가 1908년에 완성됐다.
1927년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용산시가도>를 보면 용산기지 안에는 이태원로를 경계로 북쪽에 제78연대, 제79연대 등 보병 2개 연대와 야포병이 주둔하고, 이남에는 사단사령부와 사단장 관저, 군사령부와 사령관 관저, 조선총독 관저 외에 장교와 하사관 숙소가 집중적으로 배치됐다.
일본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당시 고양군에 속하는 용산을 서울에 포함시켰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용산기지 내 부대의 기본 편제와 공간 배치를 바꾸지 않았다. 1945년 용산기지의 조선군사령부는 제17방면 군사령부와 조선군 관구사령부로 개편됐다.
8월15일 광복 이후 용산에서 일본군이 물러나면서 미 24군단 사령부가 들어섰다. 이후 미군정이 종료되어 주한미군은 1949년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기고 철수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미8군이 한국에 상륙하고 1953년 용산기지로 옮겨왔다. 1957년 일본 도쿄에 있던 유엔군사령부가 서울로 옮겨와 주한미군사령부도 신설됐다. 주한미군사령관을 겸직한 미8군사령관은 1978년 창설된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도 겸하게 되었다.
현재 용산 미군기지는 연병장을 사이에 두고 한미연합군사령부와 주한미군사령부를 중심으로 초·중·고교, 대학분교, 수송단, 121병원, 아파트 등 주거시설과 미군방송, 위락시설이 들어서 있다.
글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1927년 용산시가도엔…일제의 ‘영구주둔 계획’ 고스란히
현재 남아 있는 용산기지 내 일본군 병영시설은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수립된 ‘영구병영 계획’에 따라 1906~1913년 8년에 걸쳐 축조됐다. 일본군은 러일전쟁 뒤 조선 및 중국 침략을 위해 보병부대를 강화하기 시작해 1920년께 안정적인 편제가 완성됐다. 용산기지에는 13사단, 6사단, 2사단, 8사단, 9사단 등 지역 사단이 교대로 주둔하다가 1915년 20사단이 상주체제로 편성돼 1942년 태평양전쟁에 출동하기까지 머물렀다.
1927년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용산시가도’(서울역사박물관 제공)를 보면 당시 용산 주둔 조선군 병영시설과 편제를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군사령부, 육군창고, 보병연대 병영이 용산역과 긴밀하게 조성된 점, 야포병영 서쪽에 인위적으로 일본 민간시설이 조성된 점 등으로 미루어 병영의 전방위적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사진 배재대 김종헌 교수·소명출판 박성모 대표 제공,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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