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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Tour - 대한민국

서울의 오래된 가게들 - 서울시 선정 미래유산

by Wood-Stock 2014. 2. 9.

서울시 선정 미래유산 

여전해서 고마워…서울의 오래된 가게들


지금도 3, 4년이면 동네 풍경이 확확 변하는 서울 거리에 반세기 넘는 시간을 묵묵히 버텨낸 가게들이 있다.

서울시는 옅어져가는 시민들의 기억을 모아모아 아주 오래된 서울을 증언하는 307곳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변치 않는 모습, 변치 않는 인심

종로양복점 한쪽 벽을 두른 커다란 수납장은 이 양복점의 역사 전시관 같은 곳이다. 일본 쇼와 시대의 날짜가 적힌 영수증은 1916년 종로양복점을 처음 연 이두용씨가, 손님들이 옷을 맡길 때마다 써서 주던 것이다. 그 옆에는 손님 몸에 맞추다 한껏 늘어난 줄자들이 잔뜩 똬리를 틀고 있다. 서울 장안 멋쟁이들 옷에 빳빳하게 날을 세웠을 손바닥만한 다리미는 시커멓게 변해서 웅크리고 있다.

1927년 문 연 만리동고개 이발소 
130년 된 독일제 면도칼 서슬이 여전히 퍼렇다

성우이용원1927년 문을 연 뒤 건물조차도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해 왔다. 지금 이발관을 운영하는 이남열씨는 15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이발 기술을 전수받았다.


종로양복점 백년 흔적을 찾아온 방문객을 위해 주인 이경주(68)씨가 서랍에서 재단 가위를 꺼내 보여준다. 일본에

서 양복 기술을 배워 온 할아버지, 전쟁 속에서 재봉틀을 돌렸던 아버지 이해주씨에 이어 이경주씨가 양복점과 함께 재단 가위를 물려받았다. 아이 팔뚝만했던 일제 가윗날은 3대를 물리면서 닳고 닳아 원래 길이보다 손가락 두 마디만큼 줄었단다. 아버지는 이 가위를 들고 통 넓고 어깨 높은 신사 양복을 만들었는데 아들은 이제 가늘고 긴 유행의 남자 슈트를 만든다.


대오서점 -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중고서점인 대오서점은 2013년 12월부터 대오북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처음 문을 열었다.


서울시는 시민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서울의 오래된 것들 307가지를 모아 미래 유산으로 선정했다. 대를 물려가며 한자리를 지켜온 작은 가게들도 근현대 문물을 담은 미래 유산이 됐다. 서울 만리동 시장 한 귀퉁이에 있는 성우이용원도 3대째 하는 이발소다.

1927년 외할아버지 서재덕씨가 처음 시작한 이발소를 아버지 이성순씨에 이어 아들 이남열(65)씨가 지킨다. 지은 지 100년도 넘은 낡은 1층집에선 손님이 샤워기 대신 머리에 물조리개를 뿌려가며 머리를 감는다. 이발사는 전기면도기 대신 날을 세운 면도칼로 머리를 깎는다. 이남열씨는 매일 아침 면도날과 가위를 꺼내 직접 날을 세운다. “미안한 말이지만 아침에 지나가는 여자가 있어도 날이 안 서. 자칫 딴생각을 하거나 기가 빠져도 날이 망가져.” 130년 된 독일제 면도칼, 50년 된 일제 가위들은 아직도 서슬 퍼렇게 손님 목덜미를 오간다.

“쇠로 만든 도구가 왜 닳나. 쓰는 사람 마음이 먼저 닳겠지.”

이남열씨는 가위와 칼을 쓸 줄 모르는 요즘 미용사들을 한탄한다. 날을 바짝 세운 칼로 손님 얼굴을 문지르자 칠순 넘은 손님의 얼굴이 뽀얗게 변했다. 문짝도 잘 닫히지 않는 성우이용원엔 온종일 손님이 들고 나갔다.

사소하고 소박하지만 3대가 해온 가게 안쪽은 깊고도 넓었다. 대를 물려 해오다 보니 세월만큼 이야기도 쌓였다. 서울 돈암동 시장 입구에 있는 태조감자국은 1958년 할아버지 이두환씨가 연 가게를 아들 이규회씨와 며느리 박이순씨가 하다가 지금은 손자 이호광(42)씨가 물려받은 것이다.


태조감자국서울 돈암동 시장 입구에서 1958년부터 지금까지 삼대를 이어 감잣국 국물을 낸다. 메뉴는 조금씩 바뀌었지만 사골 국물은 그대로 지켜오고 있다.


용마방앗간 -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있는 용마 방앗간은 54년 동안 방아기계를 돌려왔다. 주변 방앗간들이 떠난 뒤에도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벽엔 수십년 써온 글이 빼곡하다. 감잣국 끓이다가 만든 감잣국 노래, “어려울 때일수록 잡숫고 힘을 내주십시고” “인정, 순정, 감자국 정” 등 시와 격언이 가득한 벽이다. “글자대로 살라”는 할아버지의 말과 “남에게 손해주지 말아라”는 아버지의 당부가 쓰인 가게에서 3대째 사장은 아침 일찍 사골국을 우려내고 밤늦게 배추 절이기를 똑같이 한다. “고치지 못하는 게 또 있어요. 밥값을 올리지 말라던 어른들 당부가 워낙 엄했기에 지금도 쉽게 값을 못 올려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밥인심이 후하셔서 저희도 고봉밥을 담아요. 다 전쟁 기억 때문이지요.”

오래된 가게는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와 기억을 이고 지고 산다.

전쟁 직후 문 연 서촌 중고서점 
책 판매 줄면서 오래된 책 구경하는 북카페로 변신

쇠락에 맞서 살아남는 법

종로양복점은 이제 종로에 있지 않다. 보신각 뒤편에서 종로2가 피맛골로, 그리고 2010년부터는 신문로 한 오피스텔 건물로 왔다. 맞춤양복점이 집값 따라 유행 따라 밀려나면서 이제는 고급 옷의 흥취를 기억하는 손님들만이 재단사의 손맛을 찾아 그곳으로 간다. 서울 남영동 숙대입구 전철역에 있는 남영기원은 생긴 지 50년이 넘은 건물 3층에 있다. 밤늦도록 기원에서 바둑돌을 놓는 손님들은 대부분 60~70대 노인들이었다. 기원 벽에 붙어 있는 1980년대 가격표엔 입장료가 5000원이라고 적혀 있는데 지금은 4000원이다. 기원이 흥하던 시절 주인이 전화번호까지 통째로 샀다는 ‘백색전화기’만 장밋빛 시절의 추억처럼 남아 있는 이곳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곳이다. 주인은 “많은 기원들이 도박 장소로 변하는 상황에서 기원만으론 운영이 어렵다. 앞날이 없다. 누군가에게 기원을 물려줄 수도 없다”고 했다.


1958년 김봉수씨가 시작한 이 작명소는 2002년부터 아들 김성윤씨가 운영하고 있다. 경복궁 근처에 있는 이곳은 전화도 받지 않고 물어서 찾아가야 한다.


종로양복점 - 1916년 보신각 뒤편에 처음 문을 연 이 양복점은 할아버지에서 아들, 손주로 3대째 가업을 이어온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양복점이다.


오래된 가게는 쇠락에 맞서 어떻게 살아남는가. 지난해 12월25일 서울 서촌에 있는 대오서점의 문이 다시 열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중고서점으로 꼽히는 이곳은 1950년 한국전쟁 때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하고 돌아온 조대식씨가 호구지책으로 열었던 헌책방이다. ㅁ자 한옥의 앞부분을 터서 서점으로 만들고 뒤쪽 방에는 살림을 차렸다. 남편은 책을 구해 오고 부인 권오남(84)씨는 책을 팔았다. 책이 귀해서 물려보고 나눠보던 시절이 대오서점의 전성기였다. 미안하다는 편지를 써놓고 몰래 책을 훔쳐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옛날 참고서나 흔한 소설책을 그대로 안고 대오서점은 나이를 먹었다. 서촌의 명소가 됐지만 막상 책을 사는 사람은 없었다. 고민 끝에 다섯째 딸 조정원(52)씨가 가게를 이어받아 북카페로 고쳤다.

“어릴 땐 싫었는데 꺼내놓고 보니 정겨웠어요. 책이며 옛 물건이며 가게를 팔았더라면 다 없앴겠죠.” 북카페로 고치면서 옛날 책방이었던 곳과 살림방이었던 곳에 오래된 테이블들이 놓였다.


손님들은 70년 된 오동나무 장과 재봉틀에 기대고 앉아 차를 마시고 옛날 책을 본다. 어쨌든 간에 “죽을 때까지 이곳을 지킬 작정”이라던 권오남씨는 행복하다.


남영기원 - 1956년쯤 생긴 이 기원은 여러 차례 팔리고 주인이 바뀌었다. 1978년 남영기원을 인수한 사장은 어릴 때부터 이 기원을 보고 자란 용산 토박이다.


수정여관 -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 당산동 남선여인숙 등이 차례로 닫으면서 1966년 문을 연 문래동 수정여관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으로 남았다.

2011년에는 서울 명동성당 뒤편 ‘삼일로 창고극장’의 문이 다시 열렸다. 1975년 실험연출가 방태수씨가 ‘에저또 창고극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소극장이다. 정신과 의사 유석진씨, 배우 추송웅씨 등 극장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지만 시시때때로 경영난에 부닥쳐 김치공장이나 인쇄공장이 되기도 하다가 한 기업의 후원으로 다시 열었다. 중학생 때부터 관객으로 이 극장을 드나들었다는 정대경(55) 대표는 “이곳은 공공재다. 삼일로 창고극장의 역사적인 가치와 의미를 서울시와 시민들이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창고극장 - 1975년 가정집을 고쳐 극장으로 만들었던 것이 시작이었다. 연극인들의 사랑방 같았던 이 소극장은 여러번 문을 닫고 열다가 2011년부터 다시 운영되고 있다.


신석탕 - 1962년 나무와 석탄을 때가며 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으로 아버지, 아들에 이어 지금은 며느리가 운영하고 있다.


오래된 가게는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까. 미래 유산 선정을 추진한 서울시 문화정책과 쪽은 “미래 유산은 명예의 전당 같은 것이라 실질적인 지원은 없다. 다만 오래된 가게에 담긴 스토리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주목하도록 하는 역할”이라고 했다. 서울시는 시민과 서울연구원이 제안한 1000개 후보지를 사실조사해 미래 유산 307곳을 뽑았다. 서울 미래 유산을 소개하는 공식 홈페이지는 2월 중순 열릴 예정이다.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서울시 문화정책과 제공,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그 많던 목욕탕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종로 중앙탕·용산 원삼탕 등 동네 사랑방 같은 옛날 목욕탕 르포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소박하고 거리낌 없는 사교의 마당 

그 많던 목욕탕은 어디로 갔을까. 추위가 매서운 계절, 김이 오르는 화려한 온천시설을 검색하는 오늘과 달리 목욕 바구니를 들고 동네 목욕탕으로 총총 뛰어가던 어제가 있었다. 지난 10여 년간 통계청이 조사한 자료를 보면, 대중목욕탕·온천탕·찜질방 등을 포함하는 욕탕업체 개수는 2000년 전체 9808개에서 2012년 6779개로 줄었다. 추이를 살피면 소규모 목욕탕의 감소는 급격한 반면 대규모 목욕탕의 수는 오히려 늘어났다. 종업원 수 1~4명인 목욕탕은 2000년 7848개에서 2012년에 4989개로 줄었다. 종업원 5~9명을 보유한 목욕탕 또한 1705개에서 1311개로 줄었다. 반면 종업원 10~19명 규모의 목욕탕은 221개에서 372개로, 20~49명의 종업원이 있는 비교적 대규모의 목욕탕은 30개에서 97개로 늘었다.



대기업 회장, 전직 대통령도 찾던

서울 종로구 계동에 위치한 중앙탕은 동네의 오랜 터줏대감이다. 북촌의 한적했던 골목이 관광객으로 북적이며 변모해가는 사이, 목욕탕은 여전히 찬바람 새어들까 창문 틈을 비닐로 꼼꼼히 덮고 낡은 모양 그대로 서 있다. 중앙탕은 1969년 문을 열었다. “내 생각엔 1969년도 전에 열었을 거야. 저기 중앙고등학교 선생님이셨던 분이 계신데 그 선생님이 지금은 여든이 넘었지, 아마. 그분 총각 때부터 여기 목욕탕이 있었대요. 그때는 이 목욕탕이 저기 위에 중앙고 것이었다는데, 그때는 대중탕이 아니라 그 학교 야구부·축구부 선수들 샤워장이었어요. 그러다가 학교에 샤워장이 생기면서 대중목욕탕이 되었지.” 현재 목욕탕을 운영하는 박희원(68)씨의 말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중앙탕은 1969년 개업했다고 등록돼 있지만 허가 없이 운영하던 시기가 있어 1950년대에 개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씨는 1979년부터 중앙탕을 맡아 관리하기 시작했다. 박씨의 개인사는 한국 대중목욕탕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한다. “1973년에 제대하면서 목욕탕 생활을 시작했어요, 이발사로. 효제탕이라고 거기서 용역 맡아 들어가 집을 세 채나 샀지. 그런데 집 담보로 돈을 빌려줬다가 사정이 나빠져서 (재산을) 잃어버렸어요. 여기(중앙탕) 주인 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랑 친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딸이 맡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우리한테 한 달만 봐달라고 부탁한 것이 이렇게 30년이 넘었네.”

대기업 1세대 회장, 전직 대통령 등 알 만한 사람들도 자주 찾았다. 손님이 드물 때는 노래방 기계를 설치해놓고 단골 손님들과 허물없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주로 손님이 별로 없는 이른 아침에 오시곤 했지. (잠시 뜸을 들이다) 그런데 이건 자세히 쓰지 마요.” “왜요?” “음식점 같은 데는 유명한 사람이 찾아왔다고 하면 더 잘되는데, 이상하게 목욕탕은 그러면 더 안 찾아오더라고요.”

1월7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인터뷰는 사람 한 명 앉을 수 있는 좁은 카운터와 여탕 출입구 앞 계단에서 이뤄졌다. 계단에 걸터앉아 있던 2시간 동안 딱 세 번 몸을 일으켜야 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할머니 두 분과 모녀에게 길을 터주느라 각각 한 번씩, 그리고 할머니를 찾아 목욕탕에 쫓아온 손녀에게 들어갈 길을 내주느라 한 번. 그리고 손님은 남탕에서 나오는 할아버지 두 분 말고 더 없었다. “평일에는 남녀 손님 합쳐서 20~30명 정도 돼요. 어제는 20명이랬나?” 하루 손님 200~300명이 들던 시절도 있었다. “한 사람 나가면 겨우 자리가 생겨 한 사람 앉고 그랬어요. 내가 처음 왔을 때는 종업원도 10명이었어.”

탕에 앉은 이들과 나눠먹는 냉커피

정옥이, 수진이… 오래 다니던 손님들의 이름도 다 기억한다. “여기 목욕탕에 와서 응애응애 하던 아이가 애 둘을 낳아서 왔더만. 동물을 그렇게 좋아하던 친구였는데…. 그리고 유학 갔다 와서 때 밀고 이발하러 온 녀석도 있고. 5학년 때까지 아빠를 따라다녔던 이 앞집 사는 친구는 지금 대학생이에요. ‘아저씨가 때 밀어준 것 기억나?’ 하면 지금은 창피해하는데 그때는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어요. 인천에서도 오고, 강남에서도 오고, 옛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요. 일본 손님도 많았어. 지금은 엔화가 떨어져서 줄었는데….”

서울 한가운데서 변화무쌍한 한국 근현대사를 지나왔지만 돌이켜보니 인연을 나눈 이들과의 사소한 이야기들이 박씨의 마음에 더 오래 남아 있는 듯했다. 박씨는 이 목욕탕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를 일이라고 했다. 중앙탕이 긴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주변의 동네 목욕탕 여섯이 문을 닫았다. 현재의 목표는 “하는 데까지 계속 운영하는 것”뿐이다. 박씨는 목욕탕 운영이 쉽지는 않지만 “손님이 단 한 명 오더라도 물은 매일같이 바꾼다”고 덧붙였다.

같은 날 오후 2시 서울 용산구 원효로3가에 위치한 원삼탕에서 입장료를 치르며 샴푸와 린스를 샀다. “보디샴푸는 안 파나요?” 물으니 처음부터 ‘이런 걸 다 사네’ 하는 표정이던 카운터에 앉은 할머니가 “그런 건 없어요”라고 말했다. 탈의실에 들어서니 옷장 위로 목욕용품이 담긴 바구니가 촘촘하다. 매일같이 목욕탕을 드나드는 손님들의 것이다.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는 목욕탕인 ‘중앙탕’의 탈의실은 현재 사람보다 오래된 물건이 자리를 더 많이 차지하고 있지만, 이 공간도 200~300명의 손님으로 발 디딜 틈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서울시 제공


원삼탕은 1966년 문을 열었다. 온탕 2개, 냉탕 1개, 한증막 1개, 샤워기는 10개 남짓. 한 차례 리모델링을 거친 시설이지만 그럼에도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온탕은 두 개로 나뉘어 있었는데, 하나는 사람 서넛이 앉으면 꽉 찰 정도로 작고 나머지 하나는 그 두 배 정도 크기다. 온탕 하나에 아줌마 예닐곱이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아줌마 한 사람이 플라스틱통에 냉커피를 한가득 담아오더니, 컵에 따라 탕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도 한잔 들어요.” 목욕탕에서 처음 보는 아낙과 인사를 나누는 법이다. 얼렁뚱땅 그렇게 커피를 얻어마셨다.

TV 프로그램에 단골로 등장하는

탈의실과 목욕탕 사이에는 커다란 유리로 벽이 세워져 있었는데, 탕에 앉은 이들은 그 창을 통해 들어오는 풍경을 보며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눴다. 마치 창밖이 큰 무대 같고 목욕탕은 관객석 같다. 노모를 모시고 온 아주머니가 목욕을 마치고 나가서는 어머니의 몸 구석구석을 닦고 옷까지 입혀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이듦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딸이 할머니 입에 무언가를 넣어주는데, 할머니가 환하게 웃는다.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던 아줌마들도 “할머니 웃는다”며 따라 웃는다. 창밖의 손님이 사라지자 아줌마들은 다시 둥글게 앉아 요즘 보는 연속극 이야기, 오늘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른 연예인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아줌마 한 사람이 친척이 믿을 만한 곶감을 판다는 얘기를 꺼내니 어느새 곶감 공동구매로 주제가 바뀐다. 욕조 속 물이 경계를 넘어 넘실대듯 주제가 다른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오갔다. 오래된 동네 목욕탕은 그날의 뉴스를 전해듣는 곳, 물건을 사고파는 곳, 처음 보는 사람과 커피를 나눠 마시며 얼굴을 트는 사교의 마당이었다. 곁에 앉은 손님에게 “여기 아주 오래된 목욕탕이죠?”라고 물었다. “그렇지.”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됐나요?” “잘은 모르는데, 이 동네에서뿐만 아니라 꽤 오래된 걸로 들었어. 아줌마들 시끄럽지? 완전 시골 목욕탕 같지?”


서울 용산구 원효로3가에 위치한 ‘원삼탕’에서 20~30년 단골이 기본인 동네 손님들은 행여나 누가 물을 많이 쓰기라도 하면 “아껴쓰라”며 잔소리를 하기도 한단다. 서울시 제공


원삼탕은 TV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등에 단골로 등장하는 서울의 오래된 목욕탕이다. <무한도전> <힘내요, 미스터 김!>, 최근에는 <응답하라 1994>에도 ‘원잠탕’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1월9일 만난 진중길(73)씨는 1987년 원삼탕을 인수했다. “여기서 30년 넘게 일하고 있는 (보일러 등을 관리하는) 기관장·이발사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옛날에는 대단했지. 하도 손님이 많아서 서로 몸이 부딪쳐서 때를 못 밀 정도였대요. 박통 시절에 위생시설이 부족하다고, 새마을목욕탕이라고 지정해서 문을 열었어요. 그래서 목욕탕 개업식에 지역 국회의원들도 오고 했다고… 소문이 그래요.” 목욕탕은 현재 용산 전자상가 자리에 있었던 농산물 도매시장인 중앙시장이 가까이 있어 한때 손님이 차고 넘쳤다. 명절과 주말에는 온 동네 사람들의 집합소 같았다.

그러나 살 냄새, 물 냄새 뜨뜻하게 뒤섞이던 시절은 어느덧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오랜 단골들만 찾는 작은 목욕탕이 되었다. “(손님이) 고마 살살 없어지더만, 언제부터 결정적으로 없어졌냐면 은평뉴타운 들어서고 사람들이 이사 나가면서…. 사람이 빠져나가면 다른 사람으로 채워져야 할 텐데, 그리 되지 않았어요. (창문을 열며) 저 앞의 지금 고물상 자리에 원래는 집이 여러 채 있어서 다섯 가구 정도 살았고, 여기 정육점 자리도 집이었고. 작은 집이 다닥다닥 모여 있을수록 목욕시설이 잘돼 있지 않으니까 목욕탕 손님이 많았죠.” 현재 손님은 하루 평균 60~70명 정도. 목욕탕은 공식적으로 새벽 5시에 열어 저녁 7시에 문을 닫는데, 동네 목욕탕 운영이라는 게 그렇게 공식대로 되는 법은 없다. “목욕탕 뒤에 기관장이 사는데, 동네 사람들이 새벽 4시만 돼도 목욕탕 문 열어달라고 벨을 눌러서 못 견뎌요.” “할머니·할아버지들이요?” “다들 그런다니까.”

마포구 신석탕, 성동구 성수목욕탕 등

“이것 좀 함 봐보이소.” 진씨가 종이봉투에서 꺼내 보여준 서류에는 원삼탕이 최근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올 2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될 예정인 서울 미래유산은 ‘근현대 서울을 배경으로 한 유·무형의 문화유산’이다. 서울시청 문화정책과 김달종 주무관은 “박물관 문화재처럼 거창하진 않지만 우리 생활과 밀접해 있어 시민들에게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 물건 등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한겨레21>이 방문한 원삼탕과 중앙탕 모두 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었다. 이외에도 2대째 가업으로 운영 중인 마포구 신석탕(1962년 개업), 성동구 성수목욕탕(1967년 〃), 용산구 영수탕(1968년 〃), 동대문구 미도탕(1969년 〃) 등이 각자의 자리에 머물고 있다고 김 주무관이 설명했다. 그렇게,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 가장 소박하고 거리낌 없는 공간인 오래된 목욕탕들이 동네와 사람들의 역사를 품고 서 있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서울의 오래된 카페들 - 라떼보다 감미로운 비엔나커피의 추억

서울 신식문화, 청년문화 전파자 명동과 신촌, 대학로 카페와 다방

1972년 생긴 카페 가무는 명동에 들어온 서양식 소비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서울 미래 유산에 선정된 카페들 중 반세기를 넘기며 여전히 문을 열고 있는 곳은 대학로 학림다방 하나뿐이다. 올해로 58년째 한자리를 지켜온 학림은 여러 세대가 함께 찾는 곳이다. 지난 1월29일 찾아간 학림다방은 대부분 다방 나이보다도 어린 손님들로 꽉 차 있었지만 클래식 음악만을 틀고 2층 다락 난간이 음악가들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는 다방 풍경은 여전했다. 학림다방 이충렬 대표는 “1987년 다방을 인수할 때쯤 음반사에서 준 달력사진을 붙인 건데 세월이 지나니 그대로 두기만 해도 앤티크가 되더라”고 웃었다.

그러나 카페가 추억만을 파는 곳이 될 수는 없다. 십수년 전 만들어진 학림다방 로얄 블렌드 커피는 반세기 만에 다방 이미지를 새로 썼다. 7잔 분량의 커피를 한잔에 우려낸 로얄 블렌드 커피는 학림다방 유학파 손님들이 외국 에스프레소 커피를 찾자 이 대표가 만들어낸 ‘한국식 에스프레소’다. 로얄 블렌드 커피는 뜻밖에 쓰지 않고 구수하고 신맛이 감돌았다. 조금 지나자 정신이 번쩍 들기 시작하며 기운이 불끈 치솟았다. 수십년 세월의 부침을 이겨온 학림다방의 커피는 이렇듯 셌다.

학림다방이 대학로 청년 시절을 구가할 무렵 신촌 카페에도 젊은이들이 모였다. 그중 지금까지 문을 닫은 적이 없는 곳은 1975년 시작한 커피전문점 미네르바다. 1월30일 밤 여전히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 미네르바 문을 열자 가운데 테이블에서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커피를 마시는 부부가 눈에 띄었다. 미네르바 주인인 현민선(52)씨는 “연애 시절 주로 여기에서 만났던 부부인데, 아이들에게 사이펀 커피를 보여주고 싶어서 데려왔다고 하더라”고 귀띔했다. 사이펀 커피는 밑에서 수증기가 올라와서 원두를 적시고 다시 내려오는 방식으로 추출하는 커피다.


 

올해로 40년째를 맞는 신촌 커피전문점 미네르바. / 비엔나커피 또한 1972년 명동에 들어온 서양식 소비주의의 상징이다.


2000년부터 이 가게를 인수한 현씨는 “처음에 커피 좋아하는 한 연세대 대학원생이 친구들과 카페를 열었다고 들었다. 물도 나오지 않아 물통에 물 길어가며 사이펀 커피를 만들었는데 그게 대박이 났다. 예전엔 손님들이 밖에서 줄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손님 한명이 나와야 들어가는 식이었다”고 미네르바의 전성기를 전한다. 주인 말에 따르면 “신촌에서 독수리다방은 이정표였다면 미네르바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단다. 아지트에 숨어서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한국엔 희귀했던 사이펀 커피를 마셨던 사람들이 “여기가 아직 있냐”며 요즘 다시 온다. 현민선씨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 신촌에서 미네르바라도 계속 있어야겠다. 건물이 헐리지 않는 한 카페를 닫을 수가 없다”고 했다.

명동에선 대학가 문화와는 다른 종류의 커피 문화가 꽃을 피웠다. 명동 패션거리를 지나 한 골목에서 마주 보고 있는 카페 가무와 카페 포엠은 1972년부터 같은 자리를 수십년 동안 지켜온 명동의 터줏대감이다. 명동이 소비의 중심지였던 시절이 그들의 전성기였다. 카페 가무에서 35년 동안 일했다는 직원은 “그때 이 카페는 대한민국 상위 10퍼센트가 모이던 곳이었다. 대학 나온 여자들, 기업 회장이나 은행 간부들이 주요 손님이었다. 그래도 손님이 워낙 많아 한명이라도 더 앉을 수 있도록 긴 벤치와 기다란 테이블을 두어 처음 본 사람들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천장과 벽은 온통 금색으로 화려하게 칠해져 있었다. 그때 참 예뻤다”고 회상했다.


한국에 막 도착한 서양식 소비주의의 상징은 비엔나커피였다. 직원이 말하길, 지금은 커피 한잔에 커피가 80그램 정도 들어가는데 당시엔 3배를 넣었다고 했다. 여기에 생크림과 설탕을 듬뿍 넣었다. 달고 양이 많고 진하면 최고라고 알았던 시절이다. 다방에서 커피값이 보통 30원이었던 시절, 카페 가무는 100원을 받았다. 지금으로 치면 2만원짜리 커피인 셈이다. 커피값이 과한가 싶어 핫케이크를 함께 냈다. 카페 가무에선 지금도 가장 잘 팔리는 비엔나커피를 시키면 조각 케이크가 함께 나온다. 70년대만큼은 아니라지만 여전히 달았다. 이제는 긴 벤치를 치우고 예스러운 의자와 테이블을 놓았다.

여전히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를 고수하고 있는 카페 가무에 비해 카페 포엠은 여느 커피전문점과 비슷했다. 부모님에 이어 카페 포엠을 지키고 있던 며느리 이상미(41)씨는 “예전엔 작가와 화가들이 많이 찾았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젊은 손님들이 대부분이다. 포엠이라는 상호는 지켜왔지만 인스턴트, 헤이즐넛, 에스프레소, 원두커피 등 커피 유행을 따라잡으며 운영해왔다”고 전했다.

비슷한 시기 전혀 다른 처지의 청년들이 마시던 커피도 아직 남아 있다. 서울 청계천 통일상가 건물 2층에 있는 명보다방도 40년을 넘긴 찻집이다. 재단사 전태일이 동료들과 바보회를 만들었을 무렵 자주 모이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십년쯤 전에 이곳을 인수한 이지영(55)씨는 “아침 7시30분 문을 열면 새벽 장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상인들이 쉬었다 간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11월엔 외국에서 돌아온 교포나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들러본다. 나는 명보다방 역사는 잘 모르지만 손님들은 내가 오래 이곳에서 장사했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고마워한다”고 했다. 테이블마다 기린표 성냥갑이, 계산대엔 전 주인들이 쓰다 간 오래된 전화기 3대가 쌓여 있었다. 마담이 커피 마신 손님과 담배 시킨 손님을 구별하기 위해 놓는 비표들에 먼지가 쌓일 만큼 다방은 한가했다. 이씨는 “이젠 가게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정수기가 있어서 굳이 다방을 찾질 않는다. 그래도 중요한 계약이나 담판을 지을라치면 여기로 온다”고 했다. 상인들이나 노동자들이 주로 찾는 이곳의 커피는 3000원. 네 종류의 인스턴트커피를 섞어서 끓여낸다는 그야말로 다방 커피다. 가난하고 오래된 커피의 맛도 똑같이 달고 썼다.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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