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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과학, 기술, 환경

일제 강점기 의료 풍경 - 프레시안

by Wood-Stock 2011. 5. 2.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 대한제국의 멸망 -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한국인

기사입력 2011-05-02 오전 7:57:52

 

1910년 8월 29일, "일한합병조약(日韓合倂條約)"이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과 이씨(李氏) 왕가(王家)는 운명을 다했다. 그 조약은 1주일 전인 8월 22일 일본제국을 대표한 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와 대한제국을 대표한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사이에 체결된 것이었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한국인(조선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모두 8조로 된 "일한합병조약"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일본국 황제 폐하와 한국 황제 폐하는 양국 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생각하여 호상 행복을 증진하고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함에는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만 같은 것은 없다고 확신하고 자에 양국 간에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천황 폐하께 양여함.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합병함을 승낙함.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 전연 한국의 시정을 담임하고 동지(同地)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체 재산에 대하여 십분 보호를 부여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함.
제8조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 폐하와 한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 경(經)한 것으로 공포일로부터 시행함.


▲ "일한합병(日韓合倂)" 공표 사실을 보도한 <황성신문> 1910년 8월 29일(월요일)자 호외. 이 기사는 같은 날짜 본 신문에도 실렸다. 또 이날부터 대한제국의 융희(隆熙) 연호 대신 일본제국의 메이지(明治) 연호를 사용하게 된 사실도 이 호외에서 볼 수 있다. <황성신문(皇城新聞)>은 다음 날인 8월 30일부터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제호를 바꾸었으며, 결국 9월 14일자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폐간한다는 공고가 없었던 것을 보면 사전에 아무런 통보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프레시안

▲ "국호"를 "한국" 대신 "조선"으로 개칭한다는 사실을 보도한 <황성신문> 1910년 8월 29일자 호외. 하지만 이 기사는 잘못된 것이다. 나라가 없어졌는데 국호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역의 명칭을 한국에서 조선으로 바꾼다는 뜻일 터이다. 그리고 한국인 대신 조선인으로 호명할 것을 <칙령> 390호(9월 30일자)로 공포했다. 사실 대한제국 시기에도 "한국(인)"보다 "조선(인)"을 훨씬 많이 사용했으므로 실제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지명과 자신에 대한 호칭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개개인의 이름도 공식적으로는 일본식 발음으로 불리게 되었다. 예컨대 "黃尙翼"은 "황상익"이 아니라 "고우쇼우요쿠"가 된 것이다.

국가(지상)주의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한제국의 멸망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라의 멸망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국민"이 되기를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패망한 나라에 속한 "인민"들은 "망국민(亡國民)", "피식민지인",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은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에서 예외가 없는 일이다. 아무리 국가에 앞선 "개인"의 존엄성을 내세우려 한들 이 엄연한 사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와 국민(인민)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언급한다고 하여 식민지 조선인들이 "조국 광복과 민족 해방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경험을 통해 살펴보건대 식민지 압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개인의 존엄성도, 자주성을 핵심으로 하는 근대적 인간도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혹자는 대한제국의 멸망으로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지배 세력의 압제와 수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패망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대신 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일제 통치를 만나게 되었다.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났다고 해야 할까?

일제의 조선 지배와 통치는 그 어떤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보다 가혹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일제는 구미 국가들이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의 식민지를 안정적인 원료 공급과 생산품 수출을 위해 지배했던 목적에 덧붙여, "식민지에 이주하여 정착 생활을 한다"라는 단어 뜻 그대로 일본인들의 식민(植民)을 위하여 조선을 지배했다.

이미 인구 팽창 문제를 경험하기 시작한 일제 당국은 일본 본토와 자연적 조건이 비슷하고 비옥한 조선을 새로운 거주 영토로 절실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기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내 일본인 인구의 비율은 일제 말기에도 3%를 넘지 못했다). 요컨대 일제는 단순히 식량과 산업용 원료를 조달하고 생산품을 판매하려고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던 것이 아니었다. 그에 따라 그 어떤 식민지에서보다 일제와 조선인들의 갈등과 마찰이 첨예해질 것은 당연했다.

또 일본과 조선의 국력과 문화적 역량의 차이는 그 어떤 제국주의 국가와 그들의 식민지 사이의 차이보다 훨씬 작았다. 따라서 일제의 지배를 용인할 수 없는 조선인들의 저항은 필연적이었고, 그에 대응한 일제의 탄압도 악랄하고 극렬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일제는 스스로 소화해내기에 벅찬 조선을 병탄했던 것이었고, 그 결과 일제의 조선 지배는 조선인(한국인)과 일본인 양쪽 모두에 씻지 못할 상흔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일제가 조선을 지배한 35년 동안 조선 사회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개항기, 대한제국 시기보다 더 많은 "근대적" 제도가 도입되었고 "근대적" 산업이 발전했다. 그에 따라 도시의 모습이 달라졌고, 농촌의 풍경도 예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의 외양과 인식도 변화하였다.

보건의료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근대식" 의료 기관이 늘어났고, 의사를 비롯한 "근대식" 전문 교육을 받은 의료인의 숫자도 늘어났다. 인구도 그 전 시대와 달리 꾸준히 늘어나는 등 "근대적" 인구 변천(demographic transition) 현상이 나타났으며, 사망률이 감소하고 수명도 늘어났다.

이를 두고 일제 당국은 자신들의 "선정(善政)"의 결과라고 끊임없이 자화자찬하며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런 주장을 하고 거기에 동조하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없지 않다. 필자는 이 연재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을 통해 일제 식민지 시대 보건의료 분야의 변화를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꼼꼼히 살펴보고, 일제와 그 동조자들의 주장의 진위와 의미를 짚어볼 것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근대성"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식민지성"을 함께 고찰하려는 것이다.

▲ 조선총독부의원, <조선총독부의원 20년사>(1928년)에서. 대한의원을 개칭한 조선총독부의원은 일제 시대 조선 의료의 중추적 기구였다. 조선총독부의원의 성격과 활동 내용만 잘 살펴보아도 일제가 조선에서 펼친 보건의료의 실태와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연말 "근대 의료의 풍경 제1편(개항부터 망국까지)"을 일단 마치면서 올 봄에 독자 여러분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재회의 시기가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늦어져 초봄이 아닌 "늦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재의 취지와 성격을 더 선명하게 하기 위해 제목을 "근대 의료의 풍경 제2편"이 아닌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 그리고 질책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필자>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2] 김익남 ~ 최초의 근대 의사 김익남, 그의 진짜 정체는?

기사입력 2011-05-05 오전 11:58:45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사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의과 대학 격인 "의학교"의 교관(교수)을 지내며 역시 처음으로 근대식 의사 36명을 배출한 사람은 김익남(金益南, 1870년 9월 6일~1937년 4월 5일)이다. (서재필이 김익남보다 7년 앞서 1892년에 미국 컬럼비아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지만, 이미 미국인으로 국적을 바꾼 다음이었다. 또 서재필은 1890년대 후반 조선에 잠시 돌아와 있을 때에 의사로 활동한 바가 전혀 없었다.)

일본에서 근대식 교육을 받아(1899년 도쿄 지케이의원 의학교 졸업) 의사가 된 김익남은 일제의 중요한 이용 대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국권 상실 이전 김익남이 일제에 포섭되거나 협력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기도했다 실패로 돌아가자 자결한 정재홍(근대 의료의 풍경 제59회)을 추모하는 사업에 관여하는 것을 비롯해 일제의 눈에 벗어난 행동은 뚜렷하였다. 그러니 김익남이, 일제가 한국 의료계를 장악하기 위해 1908년부터 부여하기 시작한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지 못했던 것은 본인의 불찰이나 우연의 소산이 아니었을 것이다.

 

▲ 그의 사망 소식을 보도한 <매일신보> 1937년 4월 6일자에 게재된 김익남의 사진.
김익남의 후반 생애는 어떠했을까? 1904년 9월 의학교 교관을 그만 두고 군대 강화를 도모한 국왕과 정부의 방침에 따라 군의관이 되었던 김익남은 대한제국 친위부(親衛府) 소속 2등 군의장(軍醫長, 중령) 신분으로 대한제국의 패망을 맞았다.


일제에 의해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고 2년이 지난 1909년 7월 허울뿐이었던 군부(軍部, 국방부)마저 폐지되고 대한제국 황실을 경호, 보위하는 목적으로 친위부가 설치되었다. 군부는 정부 소관이었던 데에 비해 친위부는 황실 소속이었다. 김익남과 의학교 제1회 졸업생 김교준(3등 군의장, 소령), 손창수(1등 군의, 대위) 등은 친위부 소속의 군의관으로 계속 근무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병탄을 한 달 앞둔 1910년 7월 하순, 친위부 소속 장교 가운데 대다수가 퇴역하고 일부만이 남게 되었다. 이때 김익남의 애제자이자 평생지기인 김교준은 예편하였고 김익남은 군대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친위부는 병탄 뒤에 더욱 축소되어 이름도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로 바뀌었다. 조선보병대에서 군의관으로 재직했던 사람으로는 김익남 외에 의학교 제1회 졸업생인 이제규와 김명식이 있었다. 이 가운데 이제규는 헌병대사령부에 근무한 경력이 밝혀졌으며, 이것이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주관하여 편찬한 <친일 인명 사전>(2009년)에 오른 이유가 되었다. 그에 반해 김익남과 김명식이 헌병대 등 일본군 부대에 근무했다는 기록은 발견된 바가 없다. (김명식은 구한국군 장교를 일본군 장교로 전환하는 칙령에 따라 1920년 4월 28일 일본군 1등 군의가 되었다. 이 조치 이전 조선인 장교들은 차별 대우를 받았다.)

▲ <조선총독부 관보> 1911년 4월 1일자에 게재된 조선인 장교 명단. 여기에는 이들의 소속 부대가 나와 있지 않지만 대부분 조선보병대 소속이었다. ⓒ프레시안


그러면 김익남은 언제까지 군대에서 근무했을까? <총독부 관보> 등 관변 자료에서는 김익남의 전역에 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 신문에서는 전역과 관련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김익남의 사망 사실을 보도한 <매일신보> 1937년 4월 6일자에는 "군부 의무국이 설치되자 10여 년 동안 국장 대리로 시무하얏스며 대정 8년(1919년)에는 간도 용정에서 병원을 열어 동포들의 의료 봉사에 힘을 쓴 일도 잇다"라고 되어 있으며, 같은 날짜 <조선일보>에는 "한국 정부에 의무국(醫務局)이 생긴 후에는 삼등 군의장이 되야 십륙년간이나 국장 사무를 취급하엿고 또 휘문 보성 학교의 생리위생과목도 마터 가르첫스며 기미년 이후에는 간도 룡정촌으로 가서 이래 십삼 년 동안이나 그곳에 이주하여 사는 조선 동포의 병을 치료하여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별건곤> 제64호(1933년 6월 1일 발간)에는 "북간도에서 개업하고 잇는 김익남 씨도 곰보회의 평의원 자격은 잇다"라고 나와 있다.

▲ 김익남의 사망 사실을 전한 <매일신보> 1937년 4월 6일자 기사 "조선 최초 양방의 김익남옹 장서(長逝). 서양 의술 수입 보급의 은인."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한 학교를 "경응의숙 의과전문"으로 잘못 기재한 것을 제외하면 사실과 잘 부합한다. ⓒ프레시안


▲ <조선일보> 1937년 4월 6일자. 이 기사도 김익남이 의학을 공부한 학교를 "경응의숙 의학전문학교"라고 잘못 적은 것 이외에는 별다른 오류가 없어 보인다. ⓒ프레시안


이 기사들을 종합해 보면, 김익남은 1919년 3·1 운동 뒤 군대를 떠나 간도 용정(龍井)으로 가서 1933년 무렵까지 개업 의사로 활동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익남의 제대는 고종의 별세 및 조선보병대의 축소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보병대는 전투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망국 왕실의 장식물 같은 것이었는데, 이마저도 고종의 서거 이후 더욱 축소되었다. 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조선보병대가 감축되자 더 이상 그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진 김익남(최고위 군의관으로 국왕의 별세에 도덕적 책임도 느꼈을 것이다)이 전역을 한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를 통해 확인해야 할 부분이다.

▲ <매일신보> 1919년 11월 12일자 광고. 김익남은 만주로 갈 무렵, 지석영이 원장으로 있는 조선병원(朝鮮病院)의 고문으로 있었다. 이 광고에는 김익남이 "육군 군의정"으로 나와 있는데, 당시에는 현역이나 예비역이나 대체로 그런 식으로 구별 없이 표현했기 때문에 이것으로 김익남의 전역 시기를 추정하기는 어렵다. 김익남이 조선병원에서 했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이름만 올린 것이었을까, 진료도 했을까? ⓒ프레시안


그러면 김익남은 왜 조국을 떠나 만주(간도)로 갔고, 또 거기에서는 무슨 일을 하였을까?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김익남은 일제 당국으로부터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지 못해 단독으로는 의사로서 의료 행위를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만주는 조선에 비해 일제의 지배력이 덜 미치는 곳이었지만 거기에서도 의술개업인허장 없이는 개업을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교준의 증언에 의하면(<대한의학협회지> 제5권 제10호, 1962년) 자신이 용정에서 개업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김익남이 그곳으로 찾아와 김교준의 면허장으로 둘이 함께 개업했다고 한다. 김익남은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줄 애제자를 찾아 만주로 갔던 것일까? 그러면 김교준이 1924년 무렵 귀국한 뒤에 김익남은 누구와 함께 또는 누구의 도움으로 의료 행위를 계속 하였을까?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로는 풀 수 없는 문제이지만, 망국민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어려움으로 보인다.

정구충은 저서 <한국 의학의 개척자>(동방서적, 1985년)에서 자신이 해주도립병원 외과 과장으로 근무하던 1928년(<조선총독부 및 소속 관서 직원록>에 따르면 정구충은 1926년 도립해주병원에서 근무하다 1927년에 도립초산의원으로 전근하였다. 김익남을 만난 시기나 장소에 착오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가을 자신을 찾아온 김익남이 들려준 이야기를 토대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필자를 방문한 목적은 나에게 유력한 인사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아마 독립운동 자금 관계가 아닌가 기억된다. (…) 선생이 처음 만주에 갔을 때는 차차 자리가 잡혀서 몇 해를 지내는 동안에 망명 온 여러 친구들과의 연락으로 통위부와 군관학교 등의 조직에도 참여했었다. 그러나 빈약한 조직이었고, 경제적으로 곤란을 받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기 구입이 가장 어려운 문제였었다. (…) 1919년 경에는 모두들 큰 희망을 가졌던 것이 일본이 중국의 청도를 장악하고 회령(함북)에 군대가 강화됨에 따라 차차 꺾이게 되었다. (…) 비밀리에 활동하던 광복군(특정한 단체 이름이 아니라 일반적인 무장 독립 단체의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이나 의열단의 활동도 점차 주춤해지고 선생의 춘추도 50을 넘어서 황혼기에 접어들어 가므로 국내 사정을 살피기 위해 누차 귀국하여 보았으나 정착할 곳이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

▲ 조선총독부 경무총장(警務總長)이 일본 외무차관에게 1920년 5월 28일에 발송한 "용정 조선인 친목계"에 관한 첩보 보고. ⓒ프레시안

요컨대, 김익남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 투쟁 등에 관여했지만 점차 그런 활동이 여의치 않아지고 나이도 들어서 귀국을 모색하던 차에 자신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익남이 항일 투쟁을 위해 만주로 망명했다는 정구충의 기록을 뚜렷한 근거 없이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무조건 배척해서도 안 될 것이다. 정구충의 언급을 뒷받침하는 자료나 증언은 발견된 것이 없다. 김익남의 최측근이라 할 김교준에게서도 그와 관련된 증언은 없었다. (김교준은 자신의 만주 활동에 대해서도 거의 얘기한 바가 없었다.)

매우 구체적인 내용 등 정구충의 언급이 사실일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나 증언이 나타나기 전에는 판단을 유보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엄밀한 사료 비판 없이 정구충의 언급을 받아들였던 적이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학도로서 적절하지 못한 일이었다.)

한편, 김익남의 만주 생활에 관련된 일제의 기록이 두 가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김익남이 "용정 조선인 친목계"(1920년 4월 25일 결성)의 대표(계장)라는 보고이다. 그 보고에 따르면 이 친목계는 조선 남부 지역 출신들이 조직한 것으로 북부 출신들이 상권을 장악하는 데에 대해 자구책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 간도 총영사관 대리영사가 1922년 2월 28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간도 및 동 접양(接壤)지방에 있어서 배일단체 및 친일단체 조사의 건." 이희덕이 회장인 "용정촌 조선인 거류민회"에서 김익남이 의원을 맡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프레시안

또 한 가지는 김익남이 "용정촌 조선인 거류민회"의 임원(議員)이라는 보고이다. 이 거류민회의 임원진은 앞의 친목계와 달리 북부 지역 출신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이 보고에 그 단체가 "친일단체"로 분류되어 있다고 그 조직원과 임원들이 친일파, 매국노라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일일 터이다.

 

이들 단체보다 더 주목할 것은 거류민회의 회장이고 친목계의 고문으로 나와 있는 이희덕(李熙悳, 1869~1934년)의 정체이다. 이희덕은 당시 간도 지역에서 노골적인 반민족적인 행각을 벌여,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처단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이 문서들로 김익남이 이희덕과 어떤 관계였는지, 또 이들 단체에서 김익남이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김익남의 만주 생활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김교준을 통해 김교헌(김교준의 형. 근대 의료의 풍경 제59회) 등 당시 만주 최고의 항일 운동 세력과 인연을 맺고 있었을 김익남이 이희덕이라는 1급 친일파와는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

김익남과 관련하여 풀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지만, 그가 근대 의학의 도입기에 누구보다도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에 반해 우리가 그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적절한 평가에 소홀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교준의 술회에 따르면, 김익남은 아들 하나만을 두었는데 그 아들도 1910년대에 폐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김익남의 후반 생애는 이래저래 쓸쓸했다.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3] 병원 관제 ~ "인민의 질병을 낫게 할 국립병원을 만들자"

기사입력 2011-05-09 오전 7:41:50

 

1894년 9월 제중원의 운영권을 에비슨에게 이관함으로써 일반 국민들의 질병을 구료하고 건강을 관리하는 국립병원은 사실상 없어졌다.

바로 이듬해에 국립병원을 다시 설치하는 논의가 있었고 1896년 초에는 병원 설립비(4555원)와 운영비(9798원)를 예산에 계상하기도 했지만, 아관파천 등 정치적 혼란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 을미개혁기에 논의되었던 병원은 의학교 부속 기관으로 설치하는 것이었다.

▲ 칙령 제14호 <병원 관제>. 맨 왼쪽 윗부분에 국왕 고종의 친필 서명이 있다. ⓒ프레시안

그로부터 3년 남짓 지난 1899년 4월 24일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勅令) 제14호로 <병원 관제(病院官制)>를 반포했다. <의학교 관제>(칙령 제9호)가 반포되고 나서 정확히 한 달 뒤의 일이었다. '근대 의료의 풍경'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했던 이 병원에 대해 몇 차례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 이번 회에서는 <병원 관제>에 대해 꼼꼼히 짚어보자.

제1조 병원을 한성 내에 설립하야 인민의 질병을 구추(救瘳, 낫게 함)할 사

이 새로운 국립병원의 정식 명칭은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저 "병원"이었다. "의학교"와 마찬가지 방식의 호칭이었다. 1년 3개월 뒤 광제원(廣濟院)으로 개칭할 때까지는 "병원", 또는 관할 부서가 내부(內部)라는 점에서 "내부 병원"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병원의 역할은 일반 "인민"의 질병을 구추하는 것이었으며, 병원은 수도인 한성에 두었다.

제2조 병원은 내부의 직할이니 경비는 공관(公款)으로 지판(支辦)할 사

병원은 내부(행정자치부) 직할이며, 운영비를 정부 예산으로 지출하는 국립병원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의학 교육을 담당하는 의학교(학부 소속)와 환자 진료를 담당하는 병원을 분리한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전통적으로 의학 교육과 환자 진료를 같은 기관이 담당했다. 전의감(典醫監)과 혜민서(惠民署)가 그런 성격의 기관이었으며, 1885년에 설립된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 제중원도 마찬가지였다.

을미개혁기의 논의에서도 병원을 의학교의 부속 기관으로 설치할 계획이었다. <병원 관제> 제정 과정에서 참고했을 일본도 의학 교육 기관과 병원이 분리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1899년의 <관제>에서 의학교와 병원이 완전히 분리된 것이다. 그렇게 된 연유를 알 수 없지만 학부와 내부 사이의 힘겨루기와 타협의 결과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3조 병원의 세칙은 내부대신이 정할 사
제4조 병원의 좌개(左開)한 직원을 치할 사
병원장 1인 주임(奏任) 기사 1인 주임
의사 15인 이하 판임(判任) 대방의 2원(員) 종두의 10원 외과의 1원 소아의 1원 침의 1원
제약사 1인 판임 서기 1인 판임

병원의 정규 직원은 주임 2명, 판임 17명 등 최대 19명이었으며, 서기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의료직이었다. 이것은 정규직 의사 1명과 학도(조수격) 4명을 두었던 제중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규모이다. 그리고 의사 15명 가운데 종두 의사가 3분의 2인 10명이나 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두창(痘瘡)이 얼마나 큰 보건의료 문제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으며, 이 병원에서 종두 의사의 발언권이 상당히 강했을 것이라는 점도 짐작할 수 있다.

그밖의 의사로는 대방의(大方醫, 성인 환자를 진료하는 내과의사), 외과의사, 소아과의사, 침의(針醫)를 두었으며, 이 가운데 순수한 의미의 한의사는 침의 1명밖에 없었다. 병원/광제원이 한방 병원이었다고 하는 주장이 적지 않은데 적어도 이 <관제>로는 근대 의학(양방) 위주의 병원이었다. (자세한 실상에 대해서는 뒤에 살펴보도록 한다.)

제5조 병원장은 의학과 화약(化藥)에 숙련한 인원으로 임명하야 일체 원무를 장리하며 소속직원을 감독할 사
제6조 기사난 의사 제약사의 업무 급(及) 약품매약을 관사(管査)할 사


병원의 책임자인 병원장은 단순히 관리직이 아니라 "의학과 화약(화학, 약학)에 숙련한 사람" 중에서 임명토록 했다. 외아문 독판이나 협판이 제중원 원장을 겸한 것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이다. 특이한 것은 병원장 이외에 기사(技師)를 두어 "의사, 제약사의 업무와 약품, 매약을 관리, 감독"토록 한 것인데, 그렇게 한 연유에 대해서는 연구가 필요하다.

제7조 의사는 의학 졸업한 인원으로 선용(選用)하야 인민의 질병을 진찰히며 소아을 종두하며 각종 수축(獸畜)의 병독(病毒)를 검사할 사

의사의 임무는 질병 진료와 종두 시술 외에 가축 병의 검사까지 하도록 규정되었다. 수의사가 없는 상황에서 그 역할까지 하도록 한 것이었다. 또한 이 <관제>에는 의학을 졸업한 사람 가운데에서 의사를 임명하도록 했다. 여기에서 "의학을 졸업한 사람"이라면 "의학교"와 "종두의 양성소" 졸업자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신식(근대식) 의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병원을 운영하겠다는 방침인 셈이다. 종두 의사들이 의사직을 선점했기 때문인지 의학교 졸업자들은 아무도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는데 병원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다.

제8조 제약사는 각양 약료을 검사하며 학도 기인(幾人)을 치(置)하야 제약법과 화약법(化藥法)을 학습케 할 사
제9조 서기는 상관의 명을 승(承)하야 서무 회계를 종사할 사


병원은 기본적으로 진료만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지만, 제약 및 약학 교육은 하도록 했다. 별도로 약학교를 설립하기 어려운 사정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10조 사세(事勢)를 양도(量度)하야 현금 간은 병원장과 기사를 위생국장이 겸임하도 득하고 사무가 확장하면 기사는 외국인을 고용함도 득할 사

▲ 1903년 4월 25일 탁지부 대신 김성근(金聲根)이 의정부 의정 이근명(李根命)에게 보낸 청의서. 지난해(1902년) 가을 광제원에서 의학교 졸업인을 임시위원으로 임명하고 여러 지방에 파견하여 구제 활동을 하는 데 사용했던 여비와 약값 2373원을 지급해 달라는 내용이다. 이때 의학교 제1회 졸업생들이 대거 이 사업에 참여했다. 광제원 임시위원이 단순히 명목뿐인 것은 아니었음을 뒷받침하는 자료이다. ⓒ프레시안
이 조항대로 실제 병원장과 기사를 위생국장이 겸임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만큼 고급 의료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외국인 기사를 고용할 수 있다는 규정은 훗날 일제가 병원을 장악하는 통로가 되었다. (일본군 군의관을 지낸 사사키 시호지(佐佐木四方志)가 1906년 2월 9일 광제원 의장(醫長)이 되어 광제원과 한국 의료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조항이 없었다 해도 일제의 침탈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제11조 각 지방에 특별이 검사할 사건이 유(有)하면 의학 졸업한 인으로 임시위원을 파견할 사
제12조 임시위원의 여비난 원근과 일자를 계료(計料)하야 내국여비 4등 규정에 의하야 지급할 사


앞에서 언급했듯이 의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병원의 정식 의사로 임명된 경우는 없었다. 대신 많은 수가 병원(광제원) 임시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위의 조항에 따라 출장비도 지급받았다.

제13조 지방 정황에 의하야 병원을 각 지방에 치함을 득할 사
부칙 제14조 본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할 사
광무 3년 4월 24일 의정부 참정 신기선(申箕善)

대한제국 정부는 수도 한성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비슷한 성격의 병원을 설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지방 정황에 의하야 의학교를 지방에도 치함을 득함이라"는 <의학교 관제>의 제12조와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계획은 달성되지 못했고, 한성의 병원도 1906년 초부터 일제의 침탈을 받기 시작하여 1907년에는 일제가 주도하여 만든 대한의원으로 통폐합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4] 병원 세칙 ~ 대한제국 국립병원의 무상 진료 대상은?

기사입력 2011-05-13 오전 9:02:13

 

<병원 관제> 제3조 "병원의 세칙은 내부대신이 정할 사"에 따라 1899년 5월 8일 내부령 제16호로 <병원 세칙(病院細則)>이 마련되었다. 병원의 운영 원리를 담은 이 세칙을 상세히 살펴보자. (실제와 차이나는 점이 없지 않지만 병원은 대체로 이 세칙에 따라 운영되었다.)

제1조 병원에 각양 약료와 의사를 치(置)하야 인민의 질병을 구추(救瘳)할 사
제2조 진찰하는 시간은 오전 8시로 12시까지 내원하는 병인을 진찰하고 오후 2시로 4시에는 청요(請要)하는 병가(病家)에 허거(許去)호되 단 병이 급하면 시한(時限)을 물구(勿拘)할 사

이 병원에서는 외래(外來) 진료와 왕진(往診)의 두 가지 방법으로 환자들을 진료했다. (전염병 환자를 진료하는 피병원 외에 입원 환자에 대한 조항은 없다.) 즉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는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왕진을 요청하는 환자들을 그 집으로 찾아가 진료하는 방식으로 병원을 운영했다.

그리고 병이 위급한 경우에는 어느 때이든 왕진을 가도록 했다.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던 당시에 거동이 어려운 환자들을 위한 적절한 조치였던 왕진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활용되다 1970년대 이후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북한에서는 지금도 의사들이 자신이 담당한 구역의 환자들을 찾아가서 진료하는 모습이 남아 있다고 한다(의사 담당 구역제 또는 호 담당제).

제3조 병원문 내에 대의소(待醫所)를 설하야 진찰할 시한을 대(待)하야 병인을 종편(從便)케 호되 내원 차제(次第)로 패(牌)를 급(給)하야 진찰하는 제(際)에 선후를 분쟁하미 무(無)케 할 사

외래 진료를 받으러 병원을 찾은 환자들은 순서표를 받아 대기실에서 기다리도록 했다. <관제>에 규정된 정규 직원 이외의 사람들이 이러한 안내를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제4조 환과고독(鰥寡孤獨)의 무실무의(無室無依)한 자와 감옥서 죄수 외에는 약을 매(賣)호되 시상(市上) 약가를 의하야 극히 염가로 수(受)할 사

이 병원은 무상 진료와 유상 진료를 병행했다. 홀아비, 과부, 고아, 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 등 곤궁하고 불쌍한 처지의 환자들과 감옥에 수감된 죄수 환자들은 무상으로 진료하고, 그밖의 환자들은 염가로 진료했다. 진료의 수준과 내용을 떠나 국립병원의 좋은 본보기였다.

제5조 병인이 증세가 우중(尤重)하야 기거 운동을 못하면 내소(來訴) 병원하야 의사를 청거(請去)호되 교력비(轎力費)는 원근과 시간을 분등하야 종략(從略) 선납할 사
제6조 빈한한 인민의 병이 중하야 운동치 못하고 병원에 내소하면 의사가 궁행(躬行)호되 교력비도 수치 물(勿)할 사

왕진을 청하는 경우 의사의 교통비(가마값)는 거리와 시간을 계산하여 환자측에서 미리 지불하도록 했다. 하지만 가난한 환자는 이 비용도 면제받았다.

▲ 내부령 제16호 <병원 세칙>(<관보> 1899년 5월 12일자). ⓒ프레시안
제7조 의사가 5일간으로 감옥서에 궁행하야 죄수의 질병을 검사하며 약(若) 병이 유(有)하면 약료를 감옥서장에게로 통첩부송(通牒付送)한 후 수도건기(收到件記)를 토래빙준(討來憑準)할 사


의사는 1주일에 5일씩 감옥으로 가서 죄수들을 진료했다. 죄수 환자가 늘어나서였는지 1900년 4월부터는 매일 진료로 바뀌었다. 그리고 환자가 병이 있는 경우 치료에 필요한 약을 감옥서장에게 보내도록 하였고, 그 사실을 기록한 문서를 받아와 확인하도록 했다.

제8조 내원(來院)과 청거한 병인의 거주 성명과 연령 병명 약명을 성책(成册)하고 감옥서 죄수 병인은 죄명과 성명 연령 병명 약명을 병성책(幷成册)하야 매월 종(終)에 내부에 보고할 사

외래 환자, 왕진 환자, 죄수 환자들의 주소(죄수는 죄명), 이름, 나이, 진단명(병명), 약 이름을 기록하여 책으로 묶어 매달 말일에 내부(위생국)에 보고하도록 했다. "진료기록부"를 만들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진료기록부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만약 이것이 발견된다면 대한제국기 환자들의 실상과 병원의 운영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제9조 내원한 병인이 증세 위중하야 난치에 지(至)하면 타 병원의 연유를 통첩하야 의사를 청래(請來)할 사
제10조 타원 의사를 청래할 시에 병원장이 위생국에 해(該) 사유를 통첩하고 교력비는 공용으로 지출할 사

이 병원에서 충분히 치료하기 어려운 환자가 있는 경우 다른 병원의 의사를 불러 도움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그럴 경우 그 의사의 교통비는 환자 대신 병원이 지불하도록 했다. 여기에서 다른 병원이란 일본인이 운영하는 한성병원, 찬화의원과 구리개 제중원 등으로 생각된다.

제11조 기원절과 탄신절과 명절일과 일요일에는 진찰하는 업을 휴할 사

병원은 기원절(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開國紀元節과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繼天紀元節), 탄신절(황제와 황태자의 생일), 그리고 설과 추석 등 전통 명절과 일요일에는 진료를 하지 않았다.

제12조 제약사가 약료를 매매하고 문부(文簿)는 간(間) 5일하야 위생국장과 도장를 날(捺)하야 상교(相交)할 사

제약사는 약을 매매한 기록부를 작성하여 5일치를 묶어 위생국장에게 보고하고 날인한 것을 서로 바꾸도록 했다. 이 조항대로라면 "매약(처방)기록부"는 병원과 위생국에 각각 1부씩 2부가 있었을 것이다. 이 기록부도 앞에서 언급한 진료기록부와 마찬가지로 발견된 바가 없다.

제13조 제약소의 각항 용비는 위생국에셔 지출하고 약가 수입금은 위생국으로 납할 사

병원의 주 수입원인 약값은 위생국에 납부하도록 했고, 필요한 경비는 위생국에서 받아쓰도록 했다. 철저한 중앙 관리 방식이었다.

제14조 피병원(避病院)을 설호되 인가(人家) 50보(步) 외에 산수를 택하야 악질을 전염치 물(勿)케 할 사

병원에는 별도로 전염병 환자를 수용, 치료하는 피병원을 설치하도록 했는데,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인가에서 50보(50 미터가량?) 이상 떨어지도록 했다.

제15조 피병원의 상중하 삼등간을 설하고 병인의 소청을 의호되 상등간은 1인이오 중등간은 2~3인이오 하등간은 무실무의한 병인을 치(置)하고 치추(治瘳)할 사
제16조 피병원에 유(留)하는 소비(所費)는 상등 중등 하등을 분(分)호되 무실무의한 자에게는 수치 물할 사

피병원에는 1인실(상등간), 2~3인실(중등간), 빈민환자용 병실(하등간)을 두었다. 그리고 피병원에 입원한 환자에게는 병실의 종류에 따라 진료비를 받되, 빈민 환자는 무상으로 진료하도록 했다.

제17조 병인의 음식은 의사의 지휘를 거(據)하야 피병원에셔 궤(饋)하고 외타 음식은 금지할 사
제18조 병인의 친족간의 내원하야 구호하는 자의 음식은 혹 운전내왕(運轉來往)하야도 의사가 검사할 사

피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음식은 의사의 지휘를 받아 주도록 하고(병원 급식), 외부에서 환자의 음식물을 반입하는 것은 금지했다. 그리고 환자를 간병하는 가족, 친척의 음식을 외부에서 반입하는 경우 의사가 검사하도록 했다.

제19조 피병원에 의사가 매일 1차식(式) 궁왕(躬往) 진찰하고 내왕인(來往人)의 의복 거여(車輿)를 소독할 사

의사는 매일 한 차례 피병원에 가서 환자를 진료하고 피병원에 내왕한 사람들의 의복과 자리(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에 이 "거여"가 "자리"로 기재되어 있다)를 소독하도록 했다.

제20조 무실무의한 자가 병원에셔 사(死)하면 사시(死屍)는 지방매장비 예를 의하야 위생국에셔 공관(公款)으로 지판할 사

병원에서 연고가 없는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 매장 비용은 위생국에서 지불하도록 했다. 시신을 함부로 내다버리지 않도록 하는 조치였다.

제21조 피병원에셔는 염병(染病) 호열자병(虎列刺病) 폐창(癈瘡) 등으로 타인에게 전염되는 병인을 치추할 사

피병원의 역할은 장티푸스(염병), 콜레라(호열자병) 등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었다. 이 조항은 제13조 다음에 두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여기에서 폐창(癈瘡, 고질병?)이 어떤 병을 뜻하는지 확실치 않다. 폐(癈)는 발(發)의 오식(誤植)으로 발진티푸스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1899년 8월 16일 제정된 <전염병 예방 규칙>에는 콜레라, 장티푸스, 적리(이질), 디프테리아(實布垤利亞), 발진티푸스, 두창 등 6가지가 법정 전염병으로 규정되어 있다.

제22조 피병원에셔 병인이 30명이 유(逾)하면 병원장이 내부로 보고할 사

피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30명이 넘으면 병원장은 내부에 보고하도록 했다.

제23조 호열자와 전염병이 유(有)하면 진찰하는 시간을 물구하고 제 의사가 합동시무할 사

전염병 환자가 있는 경우 여러 의사가 협력하여 진료하도록 했다. 그만큼 전염병을 매우 중대한 보건 문제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제24조 감옥서에도 피병간을 치하야 악질이 유하면 해간에 이수(移囚)하야 타 죄인에게 전염치 물케 할 사
광무 3년 5월 8일 의정부 찬정 내부대신 이건하(李乾夏)


감옥에 전염병 환자가 생기는 경우 따로 피병실을 만들어 환자를 그곳에 격리하여 다른 죄수에게 전염이 되지 않도록 했다. 이 정도의 조치로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을지 모르지만 죄수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은 진일보한 모습이었다.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5] 광제원 ③ ~ 의사 월급이 판사 월급의 5분의 1! 그 때는?

기사입력 2011-05-16 오전 7:55:15

 

▲ 내부대신 이건하(李乾夏)가 의정부 의정 윤유선(尹容善)에게 제출한 <병원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청의서>(1900년 5월 8일자). 병원에서 함께 취급하던 종두에 관한 인원과 사무를, 신설하는 종두사(種痘司)로 이속(移屬)하게 되어 <병원 관제> 중에 개정할 어구가 많고, 병원이라는 칭호는 의질제생(醫疾濟生)한다는 본뜻에 미치지 못하므로 광제원으로 개정함이 타당하여 칙령안을 제출한다는 내용이다. "광제(廣濟)"라는 글자를 쓴 종이(개부표)를 덧붙였고, 그 종이 아래에는 "보시(普施)"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프레시안
1899년 4월 내부 소속으로 설립된 "병원"은 그 뒤 몇 차례의 변천을 거쳤다. 우선 병원의 명칭이 1년 2개월 뒤 "광제원(廣濟院)"으로 바뀌었다. 1900년 6월 30일에 반포된 칙령 제24호 <병원 관제 중 개정>에서는 보시원(普施院)으로 개칭하였다가 7월 9일 광제원으로 개부표(改付標, 원래의 결정을 원천 무효시키는 수정 방식)되었다. ((<병원 관제 중 개정>이 반포된 것은 청의서가 제출된 지 두 달 가까이 지난 6월 30일이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지만, 그렇게 된 연유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병원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청의서>(1900년 5월 8일자)에 따르면, "병원"보다 "광제원"이 "질병을 치료하여 널리 중생을 구제한다(醫疾濟生)"는 기관 설립의 취지에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당시 용법으로 "은혜를 널리 베푸는 곳"이라는 보시원은 광혜원(廣惠院)과 좀 더 가깝고, 광제원은 제중원(濟衆院)과 더욱 비슷한 의미를 갖는 표현일 것이다.

1900년 6월 30일의 관제 개정으로 광제원은 종두 시술 기능과 관련 인원(종두 의사)을 한성종두사(漢城種痘司)로 넘긴 대신, 대방의 1명과 외과의 1명이 증원되어 일반 진료 기능은 약간 확충되었다.

1905년 2월 26일 <광제원 관제>가 다시 개정되어, 광제원은 종두 시술 기능을 회복하였으며 의사 5명, 제약사 1명, 서기 1명, 기수(技手) 2명 등 인원도 많이 늘어났다. 또한 한약소(韓藥所), 양약소(洋藥所), 종두소 등 역할에 따라 부서가 설치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대체로 "한약"을 한자로 "韓藥"이라고 썼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韓藥"이라는 표현은 거의 사라지고 "漢藥"이 재등장했다. 이처럼 일제는 철두철미하게 민족적인 것을 말살하려 했다.)

그 뒤로 관제 개정은 없었지만 광제원에는 더욱 큰 변화가 나타났다. 1906년 초 직제에도 없는 의장(醫長)으로 광제원에 발을 들여놓은 사사키 시호지(佐佐木四方志)는 역시 아무런 법률적 근거도 없이 한약소, 양약소, 종두소를 철폐하고 새로 내과, 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를 설치한 뒤 일본인 의사들을 각과의 책임자로 선임하는 한편 한국인 의사들을 축출했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는 과정의 축소판이었다.

의학교는 1907년 3월 <대한의원 관제> 제정으로 소멸될 때까지 자주성을 잘 지켰던 데에 반해서 광제원은 그보다 1년가량 앞서 이미 사실상의 식민지 의료 기관이 되었던 것이다.

▲ 한성종두사(漢城種痘司). 종묘와 창덕궁 등 동쪽 궁궐을 야간에 순찰하는 임무를 담당했던 옛 좌순청(左巡廳) 청사를 개조하여 사용했다. 지금 지하철 종로3가역 11번 출구 근처에 있었다. 1908년 4월경부터는 한성위생회 청결 사무소로 쓰였다. (경복궁 등 서쪽 궁궐을 담당한 우순청은 광화문 네거리 기념비전(紀念碑殿) 자리에 있었으며, 1898년부터 1902년까지 황성신문사 사옥으로 쓰였다.) ⓒ프레시안



조금 화제를 바꾸어, 대한제국 시기에 국립병원 의사들의 경제적, 사회적 처지가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1899년 8월 25일,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제35호로 <관립병원 관등 봉급령>을 제정, 공포했다. <병원 관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원장과 기사의 관등은 주임(奏任), 의사 약제사 서기는 판임(判任)이었으며 관등과 급봉(給俸)에 따른 봉급 액수는 다음과 같았다. 이것은 관립 각종 학교 교관, 교원과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 즉 병원장과 기사는 의학교의 주임교관과 같은 대우를 했으며, 의사 약제사 서기는 의학교의 판임교관 또는 보통학교 등의 교원과 같은 대우를 했다.

▲ <관립병원 관등 봉급령>(<관보> 1899년 8월 28일자). ⓒ프레시안

이렇듯 의사에 대한 대우는 교관(교수), 교원에 대한 것과 거의 같았다. 그러면 의사와 더불어 대표적인 전문직인 판사, 검사와 비교하면 어땠을까? 한마디로 관등에서도 큰 차이가 났거니와 봉급액도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병원장의 봉급은 재판장의 5분의 1가량이었으며, 기껏 판사시보(試補)나 검사시보와 비슷한 정도였다. 이로 보아 당시 의사 직은 입신출세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매력적인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의사의 봉급이 법관에 비해서는 훨씬 적었지만 다른 직업과 비교하면 결코 적은 편이 아니었다. 농부(農部) 소속 인쇄소의 사무원과 공장(工匠)의 월급은 12원, 고용인은 5원, 견습공은 8원이었으며, 우체부는 7원이었다. 군인의 월급은 대령(正領) 106원, 대위(正尉) 46원, 소위(參尉) 28원으로 장교는 의사와 엇비슷했지만 하사관(正校)은 9원, 사병(兵卒)은 3원에 불과했다. (당시는 개병제(皆兵制)가 아니었으므로 병졸도 "직업 군인"이었다.)

또한 1899년 4월 15일에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 전문 일간지인 <상무총보(商務總報)>의 주필 월급은 20원이 안 되었다. (서재필이 주한 일본 변리공사 가토(加藤增雄)에게 넘겨 준 자료에 의하면, 독립신문은 재정 상황이 좋았는지 주필 서재필은 월 150원(중추원 고문 월급 300원은 별도), 언문(한글) 담당 조필(助筆, 주시경이었을 것이다)은 월 50원을 받았다.) 당시 <관보> 1년 구독료는 6원이었으며 쌀 한말 값은 1원~1.6원이었다.



오늘날은 어떨까? "2011년도 공무원 봉급표"를 보면 월봉(본봉)으로 국립대학 교원은 33호봉이 447만3400원, 1호봉이 159만8400원이고, 초·중등학교 교원의 경우는 40호봉이 408만5600원, 1호봉이 124만3700원이며, 대법원장은 894만900원, 대법관 633만2700원, 일반법관 17호봉 632만3400원, 1호봉 240만9900원이다. 국·공립병원 직원들의 봉급에 관해서는 별도로 발표된 자료가 없지만 국립대학 교원과 비슷하거나 조금 많을 것이다.

100년 전에 비하면 법관과 국·공립병원 의사의 봉급 차이는 많이 줄어든 셈이다. 100년 전과 지금, 어느 쪽이 나은 세상일까?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6] 광제원 ④ 100년 전 국립병원 의사들은 누구였나?

기사입력 2011-05-19 오전 10:18:59

 

<병원 관제>가 반포되고 이틀 뒤인 1899년 4월 26일 병원 직원에 대한 인사 조치가 있었다. 원장 겸 기사는 위생국장 최훈주(崔勳柱)가 겸임토록 했으며, 의사로는 김교각(金敎珏), 이만식(李晚植), 이응원(李應遠), 임준상(林浚相), 이인직(李寅稙), 김성배(金聖培), 이세용(李世容), 박형래(朴馨來), 이호경(李浩慶), 이호형(李鎬瀅), 한우(韓宇), 노상일(盧尙一) 등 12명이 임명되었다. 또 고영실(高永實)이 약제사로, 조동현(趙東顯)이 서기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4월 27일에는 추가로 피병준(皮秉俊)이 의사로 임명되었다.

초대 병원장으로 임명된 최훈주가 의사로서 교육을 받거나 활동했던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작일(昨日)에 내부 위생국장과 주사들이 감옥서에 왕(往)하야 죄수를 검사하난대 (…) 전일 조석구 씨가 감옥서장으로 재(在)할 시에난 매일 옥중을 소쇄(掃灑)하야 거처가 청결하더니 근일은 죄수간(間)에 예물(穢物)이 퇴적하야 악취가 해비(觸鼻)하니 위생에 대단 유해할지라 위생국장 최훈주 씨가 간간(間間)이 검진하고 오예를 소독하얏다더라"(<황성신문> 1899년 4월 29일자)라는 기사를 보면 최훈주가 근대적 위생과 의료에 어느 정도 소양을 지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훈주는 병원장으로 임명받자마자 감옥서를 방문하여 실태를 점검하고 개선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 <고종실록> 1897년 12월 21일자. 내부 참서관 최훈주가 국왕에게 (국립)병원 설치를 진언했다는 기록이다. 이 상소가 있은 지 1년 4개월 뒤에 병원이 설립되었으며, 최훈주는 초대 병원장으로 임명받았다. 당시 국립병원 설립은 최훈주 개인의 소망이라기보다 민중들의 염원과 열망이 담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프레시안
최훈주는 내부 참서관 시절 국왕에게 제출한 상소문에서 "지금 위생국의 황폐한 상태는 실로 애석한 일입니다. 마땅히 병원을 설치하여 위급한 생명을 구원한다면 명의(名醫)의 처방을 징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종실록> 1897년 12월 21일자)라고 진언한 바 있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었는지 최훈주는 위생국 국장과 병원 원장을 지내게 되었다.

의사로 임명받은 13명 가운데 이호형, 한우, 노상일을 제외한 10명이 일본인 의사 후루시로(古城梅溪)가 세운 종두의 양성소 제1기 및 제2기 졸업생이었으며, 서기 조동현 역시 양성소 제2기 출신이었다.

그러면 종두의 양성소 출신이 아닌 사람들은 어떤 경력과 배경을 가졌을까? 우선 한우(韓宇)는 사립 혜중국(惠衆局)에서 2년이 넘게 의사로 활동하면서 제법 명성을 날렸지만, 교육 배경은 알려진 바가 없으며 과거(醫科)에 합격한 사실도 없다.

"병원 기사 김각현(김교각의 오기이거나 이명(異名)일 것이다) 씨와 의사 한우 씨가 감옥서에 진(進)하얏 검진한즉 죄수 총계가 239인인대 기중 병수(病囚) 안성화 등 24인은 창종(瘡腫)과 서증(暑症)이 유(有)하야 양약(洋藥)을 제급하고 김덕원 등 8인은 토사증과 제반 잡증이 유하야 본국약(本國藥)을 제급하얏다더라"(<황성신문> 1899년 8월 12일자)라는 기사(한우가 양약을 처방했다는 기록은 이것 말고도 여럿 있다)를 보면 한우가 일본인이나 서양인이 운영하는 병원이나 진료소에서 양약 조제법과 근대 서양식 진료를 배웠을 것 같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달리 한의사와 의사가 뚜렷이 구별되지 않고 또 의료인 면허 제도 자체가 확립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날의 시각에 입각해서 한우와 같은 사람이 한의사였는지 (양)의사였는지 판단하려 하는 것은 별 의미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한우가 근무했던 혜중국은 어떤 곳이었을까? 1896년 12월 무렵 "유지각한 여러 사람들이 가란한 사람이 병든 거슬 불샹히 넉여"(<독립신문> 1896년 12월 12일자) 설립한 혜중국(새문안 대궐, 즉 경희궁 흥화문 앞에 있었다)은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료로 환자들을 진료했던 병원이다. <독립신문> 1898년 6월 16일자에 의하면, 혜중국에서는 개원 이래 1년 반 동안 빈민 환자 2만4000여 명, 군인 2000여 명, 죄수 200여 명을 무상으로 진료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한 셈이었던 혜중국은 정부가 병원을 세우는 데 음으로 양으로 적지 않게 기여했다. 그리고 혜중국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내부병원이 설립된 뒤로 환자가 줄어들어 1899년 말에 문을 닫은 것으로 여겨진다.

한우는 혜중국에서 2년 반, 내부병원/광제원에서 7년 가까이 간판 의사 격으로 (빈민) 환자 진료에 헌신했으며, 1902년 콜레라(恠症) 유행 시에는 피병준, 이규선(李圭璿) 등과 함께 수천 명의 생명을 구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한우는 사사키가 광제원에 의장으로 들어온 직후인 1906년 3월 규정에도 없는 시험에 불합격했다 하여 강제 퇴출되었다.

이호형(李鎬瀅, 1853년 또는 1856년생)은 <관원이력서>에 따르면 "본국(本國) 의학"을 수업했으며, 1895년 4월 잠시 경상북도 관찰부 주사를 지낸 뒤 별다른 관직 경력이 없다가 내부병원 의사로 임명받았다. 그는 그 뒤 광제원 기사(技師)로 승진했고 1904년에는 태의원(太醫院)의 겸전의(兼典醫, 전의 다음 직급)로 임명되었다. 또 일제 강점기에는 의생(醫生) 면허(588번)를 받아 원산에서 활동했다. 이호형이 수학했다는 "본국 의학"은 한방을 뜻하겠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공부했는지는 알 수 없다.

노상일(盧尙一) 역시 수학 경력을 알 수 없는데, 다음 기사를 보면 노상일은 어디서인가 양방 치료와 조제법을 배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병원 의사 노상일 김교각 양씨가 감옥서에 왕(往)하야 검진한즉 죄수가 총계 237인이라 기중 김덕원 등 7인은 적리증(赤痢症, 이질)이 유하고 이봉선 등 10인은 외감(外感)과 잡증이 유하고 이향백 등 5인은 창질(瘡疾)이 유하고 장기보 등 4인은 습종(濕腫)이 유하기로 기 증(症)을 각수(各隨)하야 양약을 제급하고 최병근 등 6인은 풍화(風火)와 잡증이 유하기로 한약을 제급하얏다더라. (<황성신문> 1899년 6월 13일자)

이 기사에 의하면 죄수 237명 가운데 이질, 감기, 창질(매독의 뜻으로도 쓰였는데 여기서는 확실치 않다), 부종 등으로 양약 치료를 받은 환자가 26명, 한약 치료를 받은 환자가 6명이었다. 또한 <독립신문> 1899년 5월 16일자는 노상일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흥미로운 소식을 전하고 있다.

군기시골(軍器寺골, 서울시청 뒷편) 사는 의원 노상일 씨가 일전에 내부병원 의사라 하는 새 벼슬을 하였는대 공동 사는 내부 시찰관 리재성 씨가 00에셔 000 셔로 맛나 말하되 집이 셔로 지척에 잇스니 잠간 자긔의 집에 오라고 쳥하엿더니 노 의샤가 과연 리 시찰의 집으로 가셔 셔로 보고 노 의사가 도라갈 때에 교군 고가(雇價) 12량(5월 19일자 기사에 8냥으로 정정)을 달나 하거늘 리 시찰이 말하야 갈아대 교군 고가가 무엇이뇨 한즉 노 의사의 대답이 의례히 물어내는 것이라 하고 고가를 밧아 갓다더라.

내부병원이 사간원(경복궁 건춘문 맞은 편) 자리에서 개원한 것은 6월 1일이었다. 하지만 이 기사를 보면 그 이전에도 왕진 진료는 하고 있었다. 또한 가마값(轎軍雇價)이 거리와 시간에 따라 달랐지만 가까운 거리도 8냥이었다. (당시 <황성신문>의 구독료가 한 달에 1냥. 1년에 11냥인 것에 비하면 결코 싸지 않았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일종의 왕진료(의사 수입은 아니었지만)라 할 가마값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내부병원 의사로 발령받은 종두의 양성소 출신 10명 가운데 선두 주자는 김교각(金敎珏)이었다. 4월 26일자 인사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했던 김교각은 6월 23일 병원의 2인자격인 기사(技師)로 승진했다. 원장과 기사를 겸했던 최훈주는 이때부터 원장직만 수행했다.

하지만 김교각은 8개월 남짓 뒤인 1900년 3월 3일 익명으로 투서했다 하여 내부병원 기사직에서 해임(免本官)되었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사건에 앞서 1월 15일 태의원 겸전의 이준규(李峻奎)가 최훈주에 이어 제2대 병원장으로 임명받았다. 이준규는 의과에 합격한 적은 없지만 태의원에 근무했는데, 이런 근무 경력은 피병준(태의원의 전신인 내의원에서 침의로 10년가량 근무했다)을 제외하고는 내부병원 의사들과 다른 점이었다.

<황성신문> 보도에 의하면, 병원 의사들이 원장 이준규에게 능멸과 위협(凌脅)을 당했다고 내부대신, 협판, 위생국장에게 익명으로 투서한 문제로 내부는 3월 3일 관련자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내부대신이 직접 대질 등을 통해 자초지종을 파악한 결과 기사 김교각과 의사 최광섭(崔光燮)이 투서자로 판명되어 두 사람을 해임했고, 이준규도 잘못이 있다 하여 15일 감봉(罰俸)에 처했다.

▲ <황성신문> 1900년 3월 5일자. 내부병원 기사 김교각과 의사 최광섭이 내부대신에게 익명으로 (병원장을 비방하는) 투서를 했다 하여 해임(면관)되었다는 내용이다. ⓒ프레시안

그 뒤 5월 24일자로 김교각의 징계가 해제되었지만 다시 내부병원에서 근무하지 못했던 반면, 최광섭은 6월 23일 의사로 재차 발령을 받았다. (최광섭은 내부병원 의사로 임명되기 전, 회계원 주사 등으로 일했을 뿐 의료 활동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로 이 사건의 전말과 의미를 알기는 어렵다. 이 사건은 단순히 김교각과 이준규 사이의 개인적 알력일 수 있다. 아니면 종두의 양성소 출신과 기존 한의사(典醫)들 사이의 세력 싸움과 갈등이 드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이례적으로, "병원 관제 개정" 및 <한성종두사 관제> 청의서가 제출된 지 거의 두 달이 지나서야 그에 대해 결정이 난 것도(제5회) 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광제원에서 종두 시술 기능을 떼어내어 별도로 한성종두사를 설치하고 며칠 지난 7월 9일 그에 따른 인사가 이루어졌다. 광제원의 의사로는 피병준, 한우, 이호영, 임준상, 이규선, 김병관(金炳觀, 사립 혜중국 의사), 이희복(李喜復) 등 7명, 제약사로는 이재봉(李在琫), 서기에는 조동현이 임명되었다. 이 가운데 종두의 양성소 출신은 피병준, 임준상, 조동현 등 3명으로 줄어들었다. 한편, 한성종두사의 의사로는 이수일(李秀一), 김성배, 이호경, 유관희(劉觀熙), 성낙춘(成樂春) 등 5명, 서기에 이세용(李世容)이 임명되었다. 이수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종두의 양성소 출신이었다.

이에 앞선 4월 12일 위생국장 최훈주가 고원 군수로 전임하였고, 그 대신 이준규의 상관이었던 전의 박준승(朴準承)이 위생국장에 임명되었다. 요컨대 전의 출신 이준규가 광제원의 실권을 장악하고, 종두의 양성소 졸업생들은 대부분 한성종두사로 전출되어 광제원에서는 힘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김교각이 해임된 것은 광제원의 역학 관계에 변화가 나타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일련의 과정이 단순한 세력 싸움인지, 아니면 광제원의 성격, 나아가 전반적인 의료 정책을 둘러싼 노선 투쟁인지는 앞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7] 광제원 ⑤ ~ 국립병원에서 양·한방 공동 진료를 했다고?

기사입력 2011-05-23 오전 7:55:07

 

광제원(이 글에서는 개칭 이전까지 포괄해서 사용한다)의 환자 진료 실적은 당시 신문 보도를 통해 일부나마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황성신문>에 보도된 사항들을 정리하였다. (다른 신문들까지 조사하면 좀 더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도 병원에서 작성했을 진료기록부와 약품대장이 발견되면 병원 진료와 운영의 더 구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추후 작업이 필요한 부분이다.)

광제원은 1899년 6월 초부터 12월 말까지 7개월 동안 총 8191명, 한 달 평균 117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그 가운데 양약으로 치료받은 환자는 4755명(월 평균 679명), 한약 치료 환자는 3436명(월 평균 491명)으로 양약 치료 환자가 60% 가까이 되었다. 양방 및 한방 진료를 병행한 셈이었는데, 죄수 환자 진료를 보도한 기사들을 보면 한 의사가 양방과 한방을 겸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제6회).

ⓒ황성신문

직제상으로 한약소와 양약소가 구분된 1905년 2월 이후는 부서에 따라 한방과 양방 가운데 한 가지 방법만을 사용했는지, 궁금한 사항이다. 1906년 3월 부당하게 강제 퇴출당한 당시 한약소 소속의 한우(韓宇)는 그 이전에 양방 치료를 많이 했는데, 1905년 2월 이후에는 어땠을까? 또 광제원에서 많이 취급했던 전염병의 경우, 한방과 양방 분리 치료가 가능했을까? 소독과 같은 양방 방법은 한약소에서는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굳이 한약소와 양약소를 분리했던 이유와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광제원에서 진료한 환자는 1900년에는 월평균 1368명, 1901년에는 1533명으로 계속 늘어났다. (진료 환자 실적에는 종두 시술 수는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1902년 이후에는 <황성신문>에 진료 실적이 보이지 않는데 광제원이나 위생국에서 발표를 하지 않은 때문인지, 아니면 신문사에서 보도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 1900년부터 양방과 한방 치료를 받은 환자 수를 분리하여 보도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사립 혜중국은 관립병원 개원 이래 환자가 점차 줄어들어 결국 1899년 말쯤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혜중국을 이용한 환자 가운데 성별이 파악되는 경우는 남자 983명, 여자 526명으로 남자 환자가 3분의 2가량을 차지했다. 광제원의 남녀 환자 비율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어떤 기관의 운영 상황을 파악하는 한 가지 방법은 예산 액수와 내역을 검토하는 것이다. 당시 <관보>와 신문 보도를 종합하면 광제원과 한성종두사의 예산은 다음과 같았다.


 

1899년 개원 첫해의 광제원 예산은 3000원이었다. 여기에 병원 건물(갑오개혁 때 혁파된 사간원(司諫院) 청사로 경복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구입비와 수리비가 포함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병원을 개원한 지 넉 달 남짓 지난 10월 정부는 병원비 1000원을 예비금에서 추가로 지출했다.

 

▲ 탁지부대신 조병직(趙秉稷)이 1899년 10월 25일 의정대신 윤용선(尹容善)에게 제출한 <청의서>. 내부 소관 병원이 인민들의 위생에 유시유종한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병원비 1000원을 증액해 달라는 내용이다. ⓒ프레시안

▲ 탁지부 대신 서리 김영준(金永準)이 1900년 10월 22일 의정부에 제출한 <청의서>. 이 청의서는 새 병원 건물 구입비 3000원, 물품 운반비 100원, 건물 수리비 100원 등 내부대신이 지출하여 달라는 3200원에 대해 의정부 회의에서 논의해 줄 것을 요청하는 문서이다. 정부는 11월 3일자로 그 비용을 예산 외로 지출할 것을 결정했다. 이 문서에 의하면 광제원은 10월 7일 재동 서상영(徐相永)의 집으로 이전하였다. 광제원이 새로 이사한 건물은 1885~1886년 제중원이 사용했던 곳으로 1900년에는 서상영의 소유였다. 1905년부터 법관양성소 교관(교수)을 지낸 서상영이 언제 어떻게 옛 제중원 건물을 구입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프레시안

그리고 이듬해에는 8424원으로 크게 증액되었으며, 1901년부터 1905년까지는 한성종두사 예산을 포함하여 1만 원을 조금 웃돌았다. 이것은 내부 전체 예산의 1.1~1.5%, 정부 총예산의 약 0.15%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 형편상 그리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정규 예산과는 별도로 1900년 11월 3일에는 광제원 구매·수리비 3200원을 예산 외로 지출했다. 이 비용은 광제원이 건춘문 앞에서 재동으로 이전하는 데 든 것이었다. 광제원이 새로 이전한 건물은 1885년부터 1886년 11월 무렵까지 제중원이 사용했던 곳으로 이 당시는 서상영(徐相永)의 소유였다.

"북서 재동 전 외아문상(上) 왜송(倭松)배이 집"(<황성신문> 1900년 10월 13일자 및 15-18일자, '근대 의료의 풍경' 제23회)은 서상영의 집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새 광제원 건물이 서상영 소유 가옥이라는 사실은 이미 10여 년 전에 신동원(KAIST 교수)이 밝혔던 것인데, 필자는 그러한 사실을 그 동안 잊고 있었다.)

 

한편, 1906년 5월 31일에는 본 예산의 2배가 넘는 2만7805원이 "광제원 확장비" 조로 정부 예비금에서 지출되었다. 광제원 의장(醫長) 사사키(佐佐木四方志)가 법률적 근거도 없이 한약소, 양약소, 종두소를 철폐하고 새로 내과, 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를 설치하면서(제5회) 든 비용이었다. 이로써 광제원은 7년 동안 견지해 오던 양한방 병용 방식을 포기하고 근대서양식 편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번에는 광제원 예산을 세목별로 살펴보자. 광제원 예산은 봉급, 약품비, 환자 (식)비, 기타 비용(청사 유지비 및 잡급, 잡비)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봉급이 60%가량으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으며, 약품비는 대략 10% 남짓, 환자 (식)비는 3~7%, 기타 비용은 20%를 조금 웃돌았다. 이렇게 예산의 대부분은 봉급과 운영비 등 경직성 항목에 지출되었고 환자 진료에 관련된 약품비와 환자 (식)비는 기껏해야 20%에 머물렀다. 액수로 말한다면 환자 1인당 10전(0.1원)에 불과한 것이었다.

1907년에는 광제원 예산이 3만3000여 원으로 크게 늘어났는데, 증액분의 대부분은 외국인(일본인) 봉급이었다. 정부가 국가 예산으로 일본인 의사들의 생활을 뒷바라지 한다는 힐난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일본인 의사 채용에 대해 여론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살펴보자.)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제원은 대한의원으로 흡수, 폐합되었다.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8] 광제원 ⑥ ~ 국립병원, 일제의 유린을 받기 시작하다

기사입력 2011-05-27 오전 10:19:18

 

광제원은 기본적으로 빈민 환자들을 국고(國庫)로 진료하는 병원이었다. 1만6414명을 진료했던 1900년도의 병원 수입(藥品放賣收入價)은 439원(元)62전(錢)2리(里)로, 그 해 병원 지출 8424원(병원 이전료 3200원은 별도 지출)의 5%에 불과했다. 오늘날에는 공사립을 막론하고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병원의 수지(收支) 상태였다.

한편, 일제(통감부)가 사실상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을 장악한 1910년의 경우, 대한의원(大韓醫院)의 세출 예산은 약 25만환(圜), 전주 청주 함흥 등지의 자혜의원(慈惠醫院) 세출 예산은 4만5000환이었고, 이들 국공립 병원의 세입 예산은 9만5000여 환이었다(<관보> 1909년 12월 27일자). 불과 몇해 사이에 병원의 수입-지출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을 뿐만 아니라(세출은 1906년에 비해 23배가 되었다) 수지가 "근대화"되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병원의 수입은 지출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 1905년 1월부터 화폐 단위를 원(元)에서 환(圜)으로 바꾸었고 이때 구화(舊貨) 2원이 신화(新貨) 1환에 상당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원과 환의 가치는 거의 같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프레시안

모든 점이 다른 100년 전과 오늘날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국가의 경제, 재정 상태가 매우 빈약하고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 격이었던 조건에서 정부와 의사들이 나름대로 제 역할을 하려 애썼던 점을 평가하면 족할 것이다.

또 당시는 전환기를 맞아 전통적인 의사 등용 방법이었던 과거(醫科) 제도가 폐지되었고 새로운 방식의 의학 교육은 이제 막 시작되던 때였다. 그에 따라 의사의 공급은 그 이전보다 더 불안정했다. 광제원에서 근무했던 적지 않은 의사가 학력과 경력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주된 이유는 그 점이었을 것이다.

<병원(광제원) 관제>에 규정되었던 대로 "의학 졸업한 인원", 즉 의학교 졸업생들을 광제원 의사로 채용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된 적은 없었다. 광제원을 의학교 학생들의 실습 병원으로 활용하려는 계획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요컨대 대한제국 정부가 의욕적으로 만들었던 의학교와 광제원은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의학교 졸업생들은 가장 마땅한 일자리였을 광제원 의사 직을 얻지 못했으며, 그것은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후배들의 의욕을 꺾었고 그럼으로써 의학교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 광제원으로서는 당시 유일하게 정규 의학 교육 과정을 밟은 의사들의 역량을 활용하지 못했다. 다만 그들을 "임시 위원"으로 콜레라 방역 활동 등에 참여시켰을 뿐이었다. 제대로 활용하더라도 크게 모자랐을 의료 인력을 거의 방치했던 것이다. 아쉽지만 그것이 100년 전 국가 의료의 또 한 가지 모습이었다.

광제원의 주된 기능은 환자 진료였으며, 필요한 경우 방역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밖에 <관제>에는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광제원은 의무(醫務) 행정 역할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기사가 한 예이다.

함흥거(居) 한국홍 박성학 이창익 3씨가 수만금을 구취(鳩聚)하야 인민의 질병을 광구(廣救)차(次) 약포를 설립하고 광제원에 청원하얏더니 사립병원으로 인허하고 해(該) 3씨난 임시위원으로 파송하얏더라 (<황성신문> 1903년 8월 12일자)

이 기사를 보면(비슷한 기사가 몇 가지 더 있다), 광제원은 위생국의 기능인 약국(약포)/병원의 인허 업무를 담당했다. 또한 이 기사를 통해 사립병원이 정부의 인허가를 얻는 절차가 확립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광제원이 일제의 유린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04년부터였다. 러일 전쟁에 참전한 일본군이 2월 20일 전후 한성에 잠시 진주했을 때 광제원은 영어학교, 일어학교, 사범학교, 7개 소학교 등과 함께 일본군의 임시 거주처(병영)로 제공되었다. 역사상 병원이 군대 주둔지로 사용된 것은 드문 일은 아니지만 정당화될 일은 아닐 것이다. 설령 아군의 경우라도.

▲ 러일 전쟁의 개략도. 일본어판 위키피디아 "日露戰爭" 중에서(왼쪽). 1904년 2월 한성에 진주한 일본군. 한글판 위키피디아 "러일전쟁" 중에서. 광제원을 비롯하여 한성에 일본군이 진주했던 것은 인천 해전 직후인 1904년 2월 20일 무렵이었다(오른쪽). ⓒwikipedia.org

그 뒤 1905년 10월 광제원의 종두지소(광제원으로 통합되기 이전의 한성종두사 건물, 제5회)는 일본인 경부(警部, 경감) 와타나베(渡邊勇次郞)의 관사가 되었다. 물론 광제원 측과 이에 대한 사전 협의는 없었다. 주로 한성에 거주하는 어린이들의 종두 접종 업무를 보았던 종두지소는 졸지에 접종 장소를 빼앗기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한국 침략의 선봉장 격인 일본인 고위 경찰에게.

광제원에 대한 일제의 본격적인 침탈은 1906년 2월 사사키가 의장(醫長)으로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사사키는 한약소와 종두소에 근무하던 한국인 의사 5명에게 시험을 치러서 낙방했다 하여 축출했다. 이때 쫓겨난 5명 가운데 이재봉, 이수일, 김석규, 송영진 등 4명은 조치에 고분고분히 따랐다고 하여 몇 달 뒤에 두 달치 봉급을 지급받았고, 부당한 조치에 저항했던 한우는 그마저도 받을 수 없었다.

그 뒤 사사키는 아예 한약소, 양약소, 종두소를 철폐하고 대신 내과, 외과 등 근대식 진료과를 설치하고는 일본인 의사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이미 광제원의 주인은 사사키였던 셈이다. <황성신문> 1906년 9월 5일자에 따르면, 그 무렵 광제원에 근무하는 "본국 관원"은 15명, 일본인 의사는 무려 16명이었다.

"본국 관원" 가운데 신원이 확인되는 사람은 원장 민원식(閔元植), 그리고 의사 최형원(崔衡源, 1885년 의과 합격, 양약소 소장 역임), 김성배(종두의 양성소 1기, 종두소 소장 역임), 피병준(1885년 의과 합격, 종두의 양성소 2기), 이규선(한약소 소장 역임), 박형래, 이응원(이상 종두의 양성소 2기), 유일한(종두의 양성소 3기) 정도이다. (최형원과 김성배는 얼마 뒤에 면직되었다.) 나머지는 대부분 잡급직이었을 것이다.

광제원 시절의 일본인 의사로 확인되는 사람으로는 외과 및 이비인후과 의사 우치다(內田徒志), 부인과 의사 스츠기(鈴木謙之助), 안과 의사 가네이(金井豊七), 그리고 약제사 이타가키(板垣懋)이다. 일본인 의사들이 대거 광제원 자리를 차지한 데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도 있었지만 긍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수준 높은 근대 의술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결코 친일적이지 않았던 <황성신문> 기사에도 다음과 같이 그러한 기대와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광제원에셔 외과에 명고한 의사 내전(內田)씨가 검진 후에 시용(施用) 최신 묘법하야 봉침(針縫) 치료한즉 어언(於焉) 회생에 중상 9처를 한(限) 10일 치료라 하니 빈사 인을 회생하고 해원 의사의 고명박식을 세인이 칭송한다더라 (1906년 6월 26일자)

광제원에셔 내외국 의사가 병인 치료에 열심하야 내과 외과 이과비과안인후과 등으로 분과하야 공동 시료하난대 일본 간호부 3인이 환자 치료에 역진 간호함으로 귀부인도 내원 치료하니 내외 치료상에 우극 편의한지라 (…) 문명국에셔난 의학사의 정명(精明)으로 간호학을 교육하야 간호부의 명예가 우극탄미하니 (1906년 8월 2일자)

광제원에셔 또 부인과를 특설하고 일본에 고명한 부인의 영목겸지조(鈴木謙之助)씨를 초빙하야 부인에 대한 산전산후와 수태법과 혈붕(血崩) 혈괴(血塊) 등 각증에 기효여신(其效如神)하니 원근간 부인은 여우(如右)한 병증이 유(有)하거든 광제원 해(該)의의게 왕진하면 신기한 공효만 볼 뿐 아니라 각색 치료과가 진비(盡備)하얏스니 무론모병(無論某病)하고 일일 내료(來療)하면 무불득중(無不得中)이라더라 (1906년 8월 11일자)

39세 이희보가 20년 전붓터 이통(耳痛)으로 농인(聾人)되야 평생 한탄하더니 신문에셔 광제원 의사가 고명하다난 언(言)를 보고 해원에 취(就)하야 치료하니 불과 1주일에 세어(細語)를 청문케 하니 여차(如此) 고명 의사는 초견(初見)하얏다고 감은한다더라 (1906년 12월 6일자)

광제원 의사 일본인 금정(金井)씨가 안생과(眼眚科)에 신효하야 12년 된 폐안(廢眼)을 치료 유효케 하야 현성완인(現成完人)하얏고 일반 맹인에게 통기(通寄)하야 속래(續來) 치료하라한즉 맹인이 고사하기를 폐안을 복명(復明)할지라도 영업은 무로(無路)한즉 불가라 함으로 해(該) 맹인의 우치함을 문자(聞者) 개탄한다더라 (1907년 3월 6일자)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는 데 내세운 명분은 한국(인)의 문명개화였다. 그리고 그러한 문명 개화 가운데에 한국인들에게 가장 어필했던 것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의료였다. <황성신문> 보도는 그러한 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9] 식민지의 질병 ~ 식민지의 일본인, 가장 많이 앓았던 병은?

기사입력 2011-05-30 오전 7:50:27

 

조선 시대 말, 대한제국기 한국인들의 전반적인 건강과 질병 상태를 말해 주는 구체적이고 상세한 기록이나 통계 자료는 (발견된 것이) 없다.

미국인 선교 의사 알렌과 헤론이 작성한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1886년), 일본인 군의관 고이케(小池正直)가 펴낸 <계림의사(鷄林醫事)>(1887년) 그리고 몇몇 신문 기사와 외국인들의 여행기 등을 통해 당시 한국인들의 건강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으며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렸다고 짐작할 따름이다.

한편,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질병 통계는 1904년도치부터 찾아볼 수 있다. 통감부(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1907년 12월에 발간한 <제1회 통감부 통계 연보>에는 1904년부터 1906년까지 매년도의 질병별 환자와 사망자 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상세한 조사 방법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통감부 본청 및 지역 행정 기관인 이사청(理事廳)이 자료를 수집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한국 정부의 협조를 얻어 작성한 것이다.

▲ <제1차 통감부 통계 연보>(1907년 12월 발행)의 위생 관련 통계. 1904년, 1905년, 1906년 한국 거주 일본인들의 질병별 환자 수, 사망자 수가 지역별, 월별(月別)로 나와 있다. ⓒ프레시안
이 통계에서는 질병을 전염병(傳染性病), 발육영양병(發育及營養的病), 피부근육병(皮膚及筋病), 골관절병(關節及骨病), 순환기병(血行器病), 신경계병(神經系及五管病), 호흡기병(呼吸器病), 소화기병(消化器病), 비뇨생식기병(泌尿及生殖器病), 외과질환(外襲性及外科的疾患), 중독증(中毒症) 등 11가지 질병군(疾病群)으로 분류하고 분류가 확실하지 않은 경우에는 병명불상(病名不詳)이라고 했다.

이러한 질병 분류 방식은 이 당시 일본에서는 쓰이지 않고 (반)식민지인 한국과 대만에서만 사용하던 것이었다. (따라서 같은 시기 일본 내의 질병 통계와 비교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 1899년부터 사용하고 있던 세밀한 질병 분류는 여러 가지로 여건이 열악한 한국과 대만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1883년 하반기부터 11가지 질병군으로 분류하여 위생 통계를 작성했으며, 1899년부터는 폐결핵, 결핵성 뇌막염, 장결핵, 암종(癌腫), 각기, 간장 경화, 신장염 및 브라이트(武雷馬)씨병, 산욕열 등 40여 가지로 세분하여 통계를 작성했다. 이 가운데 전염병에 관해서는 더욱 이르게 1876년부터 콜레라, 적리(이질), 장티푸스, 두창, 디프테리아 등 5종에 대한 환자 및 사망자 통계가 작성되었으며, 1879년 발진티푸스, 1897년에는 성홍열과 페스트가 추가되었다. 요컨대 일본에서는 1900년 이전에 근대적인 질병 통계 및 관리 체계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 이 표에서 보이듯이(1903년판 <일본제국통계적요(日本帝國統計摘要)>) 일본에서는 이미 1899년부터 질병을 급성 기관지염, 만성 기관지염, 폐렴 및 기관지 폐렴, 탈장, 간장 경화, 복막염, 신장염, 산욕열 등 40여 가지로 세분하여 통계를 작성했다. 이 당시 일본과 한국의 보건의료 수준은 비교 자체가 난센스라 할 정도로 차이가 컸다. 김익남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지케이 의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1899년, 근대식 의학 교육을 받은 일본인 의사는 이미 2만 명을 헤아렸다. ⓒ프레시안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환자 수가 해마다 크게 늘어난 것은 재한 일본인 수가 빠르게 증가하고 또 그들의 병원 이용도가 높아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통계 연보>에 따르면 1906년 말 현재 한국인은 978만1671명, 일본인은 8만1754명이었다. 한국인은 실제로는 이 수치보다 몇 백만 명 많았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질병별로는 소화기병(27~29%)과 호흡기병(20~22%)이 전체 질병의 절반을 차지했고, 신경계병, 비뇨생식기병, 외과질환, 피부근육병 순으로 그 뒤를 이었다.

▲ <제1차 통감부 통계 연보>(1907년). ⓒ프레시안

전염병은 전체 질병의 5~7%로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큰 전염병 유행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소화기병이나 호흡기병으로 (잘못) 분류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반면 아래 표에서 보듯이 같은 기간 대만에서는 전염병이 전체 질병의 18%가량(대만 거주 일본인 및 대만인)으로 집계되었다.

환자 수를 성별로 비교하면 여성 환자가 남성 환자의 70~75%였다. 당시 한국에 거주한 일본인 여성이 남성보다 적었던 것과 여성들의 병원 이용률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것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질병별로는 전염병과 외과질환은 남성에게 많았으며 신경계병, 호흡기병, 소화기병, 비뇨생식기병은 절대 수는 남성이 많았지만 상대적으로는 여성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더 높았다.

▲ <제1차 (한국)통감부 통계 연보>(1907년) 및 <대만총독부 제10 통계서>(1906년).

바로 위 표에서 한국 거주 일본인과 대만 거주 일본인, 그리고 대만 거주 일본인과 대만인 사이에 각각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같은 일본인이지만 거주 지역에 따라 질병 패턴에 차이가 보이는데, 전염병은 대만 거주 일본인에게 월등히 많으며, 반면 소화기병과 호흡기병은 한국 거주 일본인에게 많았다. 한편 대만 거주 일본인은 소화기병과 비뇨생식기병이, 대만인은 피부근육병, 외과질환, (아편)중독증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 시기 한국인에 대해서는 관련 자료가 없어 비교할 수 없는 점이 아쉽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그러한 자료들이 많이 있어 비교 분석이 가능하다. 앞으로 이 점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할 것이다.

▲ <제1차 통감부 통계 연보>(1907년). ⓒ프레시안

▲ <제1차 통감부 통계 연보>(1907년), <대만 총독부 제10 통계서>(1906년). ⓒ프레시안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0] 재한 일본인의 질병 ~ 한국 살던 일본인의 사망률이 높은 까닭은?

기사입력 2011-06-02 오전 9:41:00

 

평균 수명(출생 시 기대여명), 영아 사망률, 연령별 사망률(age-specific death rate), 전염병 발병률 등 중요한 건강 지표들로 볼 때, 오늘날 한국인의 건강 수준은 세계에서 톱클래스이다. (하지만 서울에서만도 지역과 계급 계층에 따라 건강 수준에 큰 차이가 나타나는 등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점은 여전히 많다.)

건강 지표와 수준만으로 어떤 사회와 국가의 발전과 성숙 정도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이 중요한 비교 및 평가 기준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인은 언제부터 건강 수준이 개선되었으며, 그렇게 된 요인은 무엇일까? 100년 전 한국인의 건강 상태는 어땠을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인의 건강 수준은 개선되었을까, 악화되었을까? 이 연재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려는 것들이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과 대만인의 건강 수준 역시 오늘날 세계 최선두급이다. 그러면 일본인과 대만인의 건강 개선은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가? 이 문제도 이 연재에서 함께 살펴보려 한다. 그것은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한 국가, 한 민족이라는 틀에 갇혀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변화를 비교론적 관점에서 고찰할 때 더욱 구체적이고 의미 있는 해답을 구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 회(제9회)에 이어 1904년~1906년 사이 재한 일본인들의 사망에 관해 알아보자. 우선 전체 환자에 대한 사망자 비율은 1904년 1.3%(사망자 673명/환자 5만1775명), 1905년 1.8%(1388명/7만9299명), 1906년 1.3%(1754명/13만9608명)이었다.

질병별로는 호흡기병(전체 사인의 20~24%), 전염병(14~23%), 소화기병(16~19%), 신경계병(14~18%), 발육영양병(14~15%)이 당시 재한 일본인들의 주요한 사망 원인이었다. 100년 전에는 전염병에 의한 사망이 압도적으로 많았을 것이라는 "상식"과는 다른 양상이다. (전염병이 다른 질병으로 오진되었을 경우도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일본 당국이 전염병에 대해 특별히 주의하여 취급했던 점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발병자 중 사망자의 비율을 뜻하는 치명률(致命率, case-fatality rate)은 발육영양병(7~15%), 순환기병(5~7%), 전염병(3~6%) 순으로 높았다.

▲ <제1차 통감부 통계연보>(1907년) "제57표. 사망자 종류별". 1904년 발육영양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전염병 사망자 수와 똑같은데 기록상 오류로 여겨진다. ⓒ프레시안

<제1차 통감부 통계 연보> 20~21쪽의 "제13표. 현주 본방인(本邦人, 일본인) 출생 및 사망"에 의하면, 1906년도 재한 일본인 총 사망자는 1993명으로 질병에 의한(병원 이용) 사망자 수와는 239명 차이가 난다. 이 1993명을 기준으로 한다면 1906년도 재한 일본인의 조사망률(粗死亡率, crude death rate, 그해 인구 중 사망자 비율)은 인구 1000명당 24.4명(사망자 1993명/인구 8만1754명)이었다. (1904년과 1905년의 경우는, 재한 일본인의 조사망률을 계산할 데이터가 없다.)

한편, <일본제국 통계전서>(1928년판)에 의하면 1906년 일본의 총인구는 4816만4761명, 총 사망자는 95만5256명, 조사망률은 인구 1000명당 19.8명이었다. 요컨대 재한 일본인의 조사망률이 본국보다 4.6명 높았다. 연령별 인구 구성과 연령별 사망률을 알지 못하는 이상 실제로 재한 일본인의 사망 위험이 본국보다 높았는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조사망률이 높다는 사실은 일제 당국자와 재한 일본인들에게 위협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통감부가 대한제국 정부를 강박하여 대한의원을 서둘러 만든 데에는 이러한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제1차 통감부 통계 연보>(1907년), <일본제국 통계전서>(1928년판), <대만총독부 제10 통계서>(1906년). ⓒ프레시안

위 표에 보이듯이 일본이 10년 동안 식민지로 통치한 대만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조사망률은 일본 본토와 거의 비슷한 데 반해, 아직 반식민지(보호국)인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조사망률은 본국보다 상당히 높았다. 또한 대만에서는 대만인의 조사망률이 일본인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이 당시까지도 연간 한국인 총 사망자는 파악되지 않았으며, 총인구도 상당히 부정확했다.

1899년 이후 일본에서 사용하는 질병 분류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에(1899년에는 신구 방식을 병용했다) 재한 일본인의 질병별 사망 패턴과 직접 비교할 같은 연도의 일본 본국 자료는 구할 수 없다. 그에 따라 이 글에서는 부득이 재한 일본인에 관한 1904~1906년 자료와 일본 본국의 1897~1899년 자료를 비교하는 방법을 취했다(표 10-3).

▲ <제1차 통감부 통계 연보>(1907년) 및 <일본제국 통계전서>(1902년판). ⓒ프레시안

이 표에서 보듯이, 한국 거주 일본인과 일본 내 일본인의 사인으로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은 전염병(각각 17.6%와 7.7%)이었다. 그 밖의 차이점은 재일 일본인에서 신경계병과 소화기병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고 나머지는 대동소이했다.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앞으로 계속 살펴보도록 하자.

▲ <제1차 통감부 통계연보>(1907년). ⓒ프레시안

▲ <제1차 통감부 통계 연보>(1907년) 및 <일본제국 통계전서>(1902년판). ⓒ프레시안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1] 조선의 전염병 ① ~ 조선이 일본보다 전염병 사망률이 낮았다?

기사입력 2011-06-06 오후 1:41:13

 

 

대한제국 시기 한국인의 전염병 발병 상황에 관해 체계적으로 정리된 자료로 남아 있는 것은, 필자가 알기로는, 내부 위생국이 1909년에 펴낸 책자인 <한국 위생 일반(韓國衛生一斑)>이 유일하다.

그런데 이 책을 발간한 1909년 6월말 현재 위생국 직원 23명 가운데 한국인은 8명, 일본인은 15명이었다(<한국 위생 일반> 30쪽). 당시 국장은 한국인 염중모(廉仲模)였지만,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기사(技師) 4명과 사무원 1명, 기수(技手) 3명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따라서 이 자료도 일본인이 주도하여 만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1902년 콜레라(恠症) 대유행 때의 신문 보도들을 보면(제6회), 이 <한국 위생 일반> 이전에도 대한제국 정부가 전염병 발생에 대해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한국인과 재한 일본인의 전염병 실태에 관한 통계가 수록되어 있는 <한국 위생 일반>(1909년). 대한제국 내부 위생국에서 출간한 것이지만 실무적으로는 일본인이 주도한 것이었다.

<한국 위생 일반>에는 표 11-1과 같이 콜레라(虎列刺), 장티푸스(腸室扶私), 적리(赤痢), 디프테리아(實布垤里亞), 두창(痘瘡), 발진티푸스(發疹室扶私), 성홍열(猩紅熱) 등 1908년과 1909년 상반기의 전염병 환자와 사망자가 국적별, 지역별로 집계되어 있다.

▲ <한국위생 일반>(1909년). ⓒ프레시안

이 통계 자료에 의하면 1908년 한국인 전염병 환자는 2050명, 사망자는 584명이었으며, 1909년 상반기에는 각각 4354명과 904명이었다. 한편 일본인은 1908년 환자 1164명, 사망자 314명이었으며, 1909년 상반기에는 각각 433명, 119명이었다.

전체 법정(法定) 전염병(당시 대한제국 법령에는 성홍열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이 글에서는 함께 다루었다)의 치명률은 20%를 상회했으며, 특히 콜레라의 치명률은 무려 65~81%나 되었다.

1908년과 1909년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에게 가장 흔했던 전염병은 두창(천연두)이었으며, 장티푸스와 적리 등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이 그 뒤를 이었다. 한국인보다 우두 접종률이 높았던 일본인도 두창의 위협으로부터 별로 안전하지 않았다. 반면에 디프테리아와 성홍열 등 호흡기 질병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같은 시기 일본의 전염병 발생을 보면(표 11-2), 적리와 장티푸스가 선두를 다투었고 디프테리아가 그 뒤를 이었으며 두창은 상대적으로 적은 점 등 한국과 다른 양상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치명률에서는 한국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 <일본제국 통계전서>(1928년판). ⓒ프레시안

▲ <한국 위생 일반>(1909년), <일본제국 통계전서>(1928년판). ⓒ프레시안

인구 규모의 차이를 보정(補正)하기 위해 인구 10만 명당 환자 및 사망자를 계산해서 비교해 보면(표 11-3), 세 인구 집단 사이에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큰 차이가 나타난다. 인구 10만 명당 전염병 환자는 재한 일본인 1001명, 재일 일본인 181명, 한국인 23명이었으며, 전염병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재한 일본인 270명, 재일 일본인 49명, 한국인은 7명이었다. 같은 일본인인데도 한국에 거주하는 경우 본국 일본인에 비해 환자와 사망자 모두 5배 이상 많았으며, 이들에 비하면 한국인 환자 및 사망자 수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다.

한국인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언급하기로 하고 우선 일본인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1908년에 나타난 재한 및 재일 일본인 사이의 차이가 예외적인 것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1906년과 1907년의 자료들을 비교해 보았다(표 11-4). 그러나 이때에도 역시 재한 일본인은 본국 일본인보다 환자 수에서 6배 이상, 사망자 수에서는 9배가량이나 되었다.

요컨대 1906년~1908년 사이 재한 일본인은 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보다 전염병의 피해를 훨씬 많이 받았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것은 당시 한국이 전염병 천국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일본인들이 낯선 한국 풍토에 아직 적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자료를 좀 더 상세히 보면 장티푸스, 적리, 콜레라 등 수인성 전염병과 두창에서 차이가 뚜렷했고 성홍열은 상대적으로 차이가 적었으며, 디프테리아는 재한 일본인에서 오히려 조금 적었다. 디프테리아와 성홍열은 주로 영아에서 발생하는 전염병이므로 아직 영아가 적었던 재한 일본인에서 발생률이 적었던 것이었을까?

▲ 제1차(1907년) 및 제2차(1908년) <통감부 통계 연보>, <일본제국 통계전서>(1928년판).

재한 일본인의 전염병 발생률과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데에 반해, 같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그것은 지나치리만큼 낮았다. (일본인보다 한국인의 전염병 발생과 사망이 적은 양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제 강점기 내내 지속된다.) 위생 환경, 의료 접근, 위생 지식과 습관 등 모든 면에서 일본인보다 크게 열악했을 한국인에서 전염병 발생과 사망이 엄청나게 적었던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한국 위생 일반>에 언급되어 있듯이, 당시 의사와 당사자 및 가족에 의한 한국인의 전염병 신고가 극히 낮았고 위생 경찰의 "검병적(檢病的) 호구 조사"에도 매우 비협조적이었던 점이 실제 상황과는 크게 동떨어진 통계치가 작성된 가장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한국인 전염병 환자와 사망자는 대체 얼마나 되었던 것일까? 앞으로 밝혀져야 할 과제이다.

▲ <한국 위생 일반>(1909년), <일본제국 통계전서>(1928년판). 일본 거주 일본인에 비해 재한 일본인의 전염병 사망자 수는 지나치게 높게, 반대로 한국인은 지나치게 낮게 나타나 있다.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2] 일본의 전염병 ① 일본을 괴롭힌 전염병 2위는 이질, 1위는?

기사입력 2011-06-09 오전 7:55:33

 

일본 내무성 위생국(후생노동성의 전신)에서 1877년부터 매년 발간한 <위생국 연보>(1887년판) 중 전염병 관련 부분. 부현(府縣)별로 전염병 환자 수와 사망자 수가 집계되어 있다. 1888년부터는 영문판 <Annual Reports of the Central Sanitary Bureau>도 함께 발행되었다. 프레시안
일본은 1877년의 콜레라 유행을 계기로 전염병에 대한 통계를 체계적으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1874년부터 1891년까지 무려 17년 동안 위생국장으로 재임한 나가요(長與專齋, 1838~1902)가 전염병 통계의 확립에도 가장 공이 컸다.


한국은 일제에게 강제 병탄되던 1910년까지 독자적으로 그런 일을 하지 못했으므로, 전염병 통계에 관해서는 일본에 수십 년이나 뒤진 셈이었다. 일제가 한국의 위생 행정을 아예 무시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앞으로 2회에 걸쳐 1876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에서 발생한 전염병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이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킨 전염병은 콜레라였다. 1877년부터 1910년까지 34년 동안 콜레라에 걸린 환자는 모두 55만4062명이었고, 그로 인한 사망자는 37만6151명이나 되었다.

가장 유행이 심했던 해는 1879년과 1886년으로 환자가 약 16만 명씩이었고, 사망자는 각각 10만 명을 넘어섰다. 치명률이 50퍼센트 미만인 해도 몇 차례 있었지만 평균적으로 70퍼센트 가까이 되었고, 환자 발생이 많은 해에는 치명률도 높아 피해가 더욱 컸다.

아래 도표를 보면 콜레라 발생 양상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콜레라는 1879년과 1886년의 대유행, 1882년, 1890년, 1895년의 중규모 유행, 1902년의 소규모 유행 등 대략 5년 주기로 창궐했다. 그리고 이 유행기에 치명률도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895년 이후에는, 1902년의 소유행이 한 차례 있었지만 콜레라는 점차 위력을 잃어갔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일본에서는 1910년 이후에도 콜레라의 큰 유행은 없었다. 1919년과 1920년 식민지 조선을 강타한 유행에도 일본은 별로 피해를 보지 않았다. 요컨대 1895년의 유행 이후 일본에서 콜레라는 관리가 가능한 질병이 되었다. 수액 요법, 항생제와 같은 뚜렷한 치료 방법이 없었던 시대였으므로 무엇보다 검역과 소독이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일본에서 콜레라가 유행한 해에는 거의 예외 없이 한국에서도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콜레라가 창궐했다. 한 가지 예로, <황성신문> 1902년 11월 20일자에 의하면 광제원 의사 한우, 피병준, 이규선이 콜레라(恠症) 환자 수천 명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당시 일본에서의 치명률이 70퍼센트 가까이 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국의 콜레라 사망자가 적어도 1만 명가량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피해가 훨씬 컸던 1879년, 1886년에 한국(조선)의 콜레라 발생과 그로 인한 사망의 규모는 얼마나 되었을까? 그 사이 콜레라에 대한 한국의 대응 능력이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면 1879년, 1886년의 피해와 1902년의 피해가 크게 차이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콜레라에 이어 두 번째로 사망자(36만 2400명)를 많이 발생시킨 전염병은 적리(이질)였다. 35년 동안 총 환자 수는 148만여 명으로 콜레라의 2배가 넘었다. 적리는 콜레라와 달리 폭발적이라기보다 지속적으로 유행했다. 환자수가 15만 명을 넘어선 1893년과 1894년이 예외적인 경우로 생각된다. 치명률도 초기를 제외하고는 20퍼센트 남짓으로 거의 일정했다.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적리 역시 1900년대 들어서는 환자 수와 사망자 수가 1890년대에 비해 많이 감소했다. 하지만 치명률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특별한 치료법이 아직 나오기 전이었으므로 적리 환자 감소에도 검역과 소독 등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1897년 일본인 세균학자 시가(志賀潔, 1871~1957년)가 적리균(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시겔라 균이라고도 한다)을 발견했지만, 원인균의 발견이 곧장 치료술의 발전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적리균을 발견한 뒤에도 세균 검사보다 임상적으로 진단을 붙이는 경우가 훨씬 많았으므로 적리 환자 중에는 아메바성 적리 환자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인을 괴롭힌 또 한 가지 중요한 전염병은 장티푸스였다. 34년 동안 94만여 명의 환자와 22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장티푸스는 적리보다도 폭발적인 양상이 더 적었고, 치명률도 거의 일정했다. 장티푸스는 콜레라, 적리보다 앞서서 188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감소했다. 물론 장티푸스에 대한 특효 요법이 없었던 시절의 일이다.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당시 또 한 가지 중요한 전염병은 두창이었다. 두창은 콜레라와 비슷하게 몇 차례 주기적으로 유행했다. 1886~87년, 1892~93년, 1897년, 1908년의 유행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런 유행도 콜레라에 비하면 별 것 아닌 셈이었으며 그나마도 점점 더 위력을 잃어갔다. 그리고 콜레라, 적리, 장티푸스가 주로 위생 조치의 덕택으로 감소했던 것과는 달리 두창의 감소는 우두술이라는 의료적 방법의 혜택을 많이 보았다.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3] 일본의 전염병 ② 日 공격한 흑사병, 한국은 비켜간 이유는?

기사입력 2011-06-13 오전 7:55:08

 

19세기말 동아시아의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던 일본에서 가장 맹위를 떨쳤던 전염병은 콜레라, 적리, 장티푸스 등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이었다. 이들 수인성 전염병은 특별한 예방, 치료 방법이 없더라도 상하수 관리만 제대로 하면 상당 정도 퇴치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환자를 일찍 발견하여 격리함으로써 병의 전파를 막을 수 있는 병이기도 하다. 즉 소독과 검역으로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질병인 것이다. 일본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이런 조치들을 활용하여 수인성 전염병의 창궐을 막는 데 성공했다. 구미 선진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유일한 경우였다.

이 시기에 일본을 괴롭혔던 또 한가지 전염병은 디프테리아였다. 1876년부터 1910년까지 35년 동안 30만 명 가까운 디프테리아 환자가 발생했고, 그 가운데 10만 명 남짓이 목숨을 잃었다. 환자나 보균자의 호흡기 분비물인 객담, 콧물, 기침 등을 통하여 또는 피부의 상처를 통하여 사람에서 사람에게로 직접 전파되는 디프테리아는 수인성 전염병보다 다루기가 훨씬 까다롭다.

▲ 근대 일본의 의학 영웅 기타사토(北里柴三郞, 1852-1931). 1890년 세계 최초로 디프테리아와 파상풍 독소에 대한 항독소 혈청요법을 에밀 폰 베링과 함께 개발했으며, 그 업적으로 제1회 노벨 의학상 후보에 올랐다. 1889년에는 파상풍균을 처음으로 순수 배양했고, 1894년에는 최초로 페스트균을 발견했다. 또 일본의사회가 창립되었을 때부터 별세할 때(1916~31년)까지 회장을 지냈다. 뿐만 아니라 의료 침략의 선봉장 구실을 한 동인회(同仁會)의 창립 멤버로 한국과 중국에 일본식 의료와 일본인 의사들을 부식(扶植)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대 일본인들에게 전형적인 영웅이었다. ⓒ프레시안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일본에서 도시화 속도가 빨라진 1890년 이후, 수인성 전염병들과 반대로 디프테리아의 발생은 급격히 늘어났다. 다행히 치명률은 오히려 감소함으로써 사망자는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 이에는 기타사토(北里柴三郞, 1852~1931년)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항혈청요법(抗血淸療法)이 적지 않은 효과를 나타내었다. 기타사토는 이 업적으로 1901년 제1회 노벨 의학상 후보로 올랐지만, 공동 연구자였던 에밀 폰 베링(Emil Adolfvon Behring, 1854~1917년)이 단독으로 수상했다.

메이지(明治) 정부는 초기부터 발진티푸스의 발발에 크게 주의를 기울였다. 19세기 중엽까지 서유럽에서도 큰 피해를 초래한 질병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특별히 취한 조치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발진티푸스는 1891년 1000명 남짓 되는 환자가 발생한 뒤로는 사실상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전반적인 생활 수준 향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1897년 처음으로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된 성홍열은 그 뒤 10여 년 동안 환자, 사망률, 치명률 모두 빠르게 증가했다. 주로 호흡기를 통해 전염되는 질병의 특성상 도시화와 상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897년부터 1910년까지 환자 6336명, 사망자 1104명이 발생하여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앞에서 언급한 전염병들보다 훨씬 더 일본 열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것은 흑사병(黑死病), 즉 페스트였다. 1897년 메이지 일본에서 첫 번째 페스트 환자가 발생하여 얼마 뒤에 사망했다. 기타사토가 홍콩에서 페스트균을 발견한 지 3년 뒤의 일이었다. 1899년 말 페스트 환자가 다시 발생하자 일본 내무성 위생국 직원들은 연말연시 휴가를 반납하며 방역에 골몰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1910년까지 해마다 환자가 발생했고 치명률이 80퍼센트를 넘나들었지만 환자 발생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1907년에 환자 646명, 사망자가 574명(치명률 89%) 발생한 것이 최대 피해였다. 중세 시대나 마찬가지로 한 번 걸리면 죽은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무서운 병이었지만 전파력은 대단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1920년대까지 간헐적으로 페스트가 발생했다.

1900년 초 대한제국 정부도 페스트의 전파를 우려하여 선박 검역을 강화했는데 다행히 한반도에는 상륙하지 않았다. 이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페스트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중국, 일본, 만주, 시베리아, 대만 등 한반도를 둘러싼 지역에서 계속 간헐적으로 유행했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어렵다. 천운이었을까?

<황성신문> 1900년 2월 26일 기사는 그 전날 의학교에서 페스트 예방에 관한 강연회가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페스트의 전파 매개체로 쥐(鼠)를 든 것은 타당하지만, 엉뚱하게 누에(蚕), 모기(蚊), 파리(蠅)도 용의자로 지목되어 있다.

(예방 연설) 작일 하오 1시에 의학교장 지석영씨와 교사 고성매계씨가 각부 대관과 각 학교 교원과 여학교 교장과 기타 인사을 회동하야 흑사병의 예방 규칙을 설명하난대 해(該)병의 근인(根因)은 염질(染疾)과 동(同)한대 차(此)병에 이(罹)하면 10의 8, 9는 사(死)하고 전염의 근유(根由)는 서충천문승(鼠蟲蚕蚊蠅)의 교통함과 오예물로 종(從)하야 생하니 예방 개의(槪意)는 의복을 청결하며 가옥을 통창(通暢)하야 공기를 다수(多受)하며 오예물을 원(遠)히하야 악취를 오촉(誤觸)함이 무케하라 하더라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메이지 시기 일본 정부가 위생·의료 분야에서 가장 큰 힘을 기울였던 것은 전염병의 전파 방지였다. 사실 디프테리아 항독소 혈청요법을 제외하고는 전염병에 대해 뾰족한 치료 방법이 없었던 시절에 소독과 검역 등의 방법으로 전파를 억제하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었다. 그리고 위 도표처럼 당시의 전염병 통계를 요약해 보면 일본이 그러한 일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일본은 1900년대에 들어 인구 10만 명당 연간 전염병 환자 200명, 사망자 50명 수준을 유지했다. 이는 구미 선진국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감염(의심)자의 강제 격리, 일방적 재산(가옥) 처분과 같은 인권 유린 행위도 적지 않게 일어났다. 대만과 조선 등 식민지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더욱 뚜렷했다.

▲ 출처 : <위생국 연보>, <법정 전염병 통계>, <일본제국통계전서> 등. ⓒ프레시안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4] 전염병 예방 규칙 ~ 조선이 흑사병보다 더 무서워한 전염병은?

기사입력 2011-06-16 오전 8:09:08

 

대한제국 정부는 1899년 8월 16일 내부령 제19호 <전염병 예방 규칙>을 필두로 몇 가지 전염병을 예방, 관리하기 위한 법령을 잇달아 제정했다. 그보다 4년 전인 1895년 7월 내부령 제2, 4, 5호로 <호열자병 예방 규칙> <호열자병 소독 규칙> <호열자병 예방과 소독 집행 규정>을 공포한 바 있었지만 이제 관리 대상 전염병을 확대하고, 관리 방법도 더 체계화한 것이었다.

이러한 법을 제정하고 전염병 예방에 나선 것은 근대 국가의 통치 기구를 자임하는 국왕과 정부로서 당연한 일이었지만, 일본의 영향도 컸다. 정부는 <전염병 예방 규칙>에 이어 콜레라(虎列刺), 장티푸스(腸窒扶私), 적리(赤痢), 디프테리아(實布垤里亞), 발진티푸스(發疹窒扶私), 두창(痘瘡) 등 여섯 가지 법정 전염병에 대해 각각 예방 규칙을 제정했다. 당시 일본은 여섯 가지 외에 성홍열과 페스트도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했는데 한국 정부는 이 두 가지 전염병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 대한제국의 <전염병 예방 규칙>(1899년 8월 16일 제정, 왼쪽)과 일본제국의 <전염병 예방법>(1897년 3월 제정). 대한제국 정부가 <전염병 예방 규칙>을 제정하면서 일본의 법을 많이 참고했던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런 한편, 한 번도 발생한 적이 없는 페스트는 제외하는 등 한국의 실정에 맞추는 노력을 벌인 흔적도 적지 않게 보인다. "예방"의 "예"자도 한국(預)과 일본(豫)은 (의미가 다른 것은 아니지만) 다른 한자를 사용했다. ⓒ프레시안

우선 개개 전염병에 관한 법령의 전문(前文)들을 통해 그 질병들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살펴보자. (원문의 뉘앙스를 되도록 살리면서 현대어로 옮기려 했다.)

"콜레라는 전염병 중에 사납고 모질기(猛惡)가 가장 심하여 그것이 만연 유행할 때의 흉포하고 참학(慘虐)함은 세상 사람들이 익히 아는 바이다. 그 병의 병독은 일종의 세균(細菌)이 위주인데 (세균은) 환자의 토사물 중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병의 만연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토사물과 그 밖의 오염물에 소독법을 사용하는 것을 빠뜨릴 수 없다. 불가불 환자가 발생하는 초기와 병독이 아직 널리 퍼지기 전에 십분 소독법을 시행하여 병재(病災)를 좁은 부분에 국한시켜 불씨를 꺼트려야(熄滅) 한다." (<호열자 예방 규칙>)

콜레라는 19세기 질병의 챔피언이었다. 당시 인류에게 피해를 가장 많이 주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피해의 규모만을 따진다면 콜레라는 말라리아, 두창, 발진티푸스 등 전통적인 강자, 그리고 결핵이라는 새로이 떠오른 "문명병"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당시 사람들이 콜레라를 가장 두렵게 여긴 것은 폭발적인 발생과 높은 치명률 때문이었다.

10년, 20년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느닷없이 나타나 순식간에 질풍노도와 같이 온 세상을 휩쓸고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지는 그 특성 말이다. 위의 인용문처럼 콜레라는 "사납고 모질기가 가장 심한" 질병이었다.

세균학의 챔피언인 코흐는 콜레라를 "세균학자들의 가장 믿을 만한 동맹군"이라고 불렀다. 인류에 대한 콜레라의 위협이 지속되는 한 세균학(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 콜레라균(Vibrio cholerae)의 전자 현미경 사진. 1870년대까지만 해도 세균병인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동료 의사들에게서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1880년대가 되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코흐가 결핵균(1882년)과 콜레라균(1883년)을 잇달아 발견하면서 "세균학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그렇다고 당장 의학이 전염병 치료에 크게 기여했던 것은 아니었다. 항생제와 결핵약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60여 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때까지는 영양 상태의 개선, 공중 위생 조치가 전염병 퇴치에 기여한 바가 훨씬 컸다. ⓒ프레시안

그리고 코흐는 마침내 1883년 동맹군의 정체를 규명했다. 19세기의 마지막 콜레라 팬데믹(세계적 유행) 때 라이벌인 파스퇴르에 앞서 콜레라균을 발견했던 것이다. 콜레라균의 발견으로 코흐와 세균학의 성가는 더욱 높아졌다. 그 뒤 코흐와 동료, 제자들은 기세를 몰아 오랫동안 인류를 괴롭혀 왔던 세균성 전염병들의 원인균과 정체를 대부분 규명하게 되었다.

"장티푸스는 그 병독이 환자 설사물(瀉下物) 중에 있으니 콜레라 병독과 같이 불결 오예(汚穢)한 토지에서 번식 미만하여 널리 유행하는 세를 이루는 병이다. 그 예방하는 방법도 콜레라와 대략 같다. 이 병은 여섯 가지 전염병 중에 최다한 질병이다. 유행 기간이 길고 병증 경과가 오래 지속(久)되면 공중의 안전 행복에 손해를 끼침이 콜레라처럼 유심하다. 따라서 이 병이 유행할 조짐이 있거든 속히 십분 진력하여 이를 박멸하고 제2의 유행을 예방하기를 태만히 해서는 안 된다." (<장질부사 예방 규칙>)

"적리는 그 병독이 환자의 설사물 중에 있어 전염하는데 병의 특성(病性)이 장티푸스와 유사한 병이다. 따라서 그 예방 소독하는 방법도 장티푸스와 대략 같다. 유행할 시 설사물 중에 혈액(血液)이 섞이지(混) 않은 환자라도 이 병(적리)과 마찬가지로 예방해야 한다. 장티푸스와 같이 참독(慘毒)이 매우 오래가고 심한지라 발병 시를 당하여 박멸 방법을 십분 진력하여 예방법 등을 전체적으로 장티푸스와 같이 해야 한다." (<적리 예방 규칙>)

같은 수인성 전염병이지만 장티푸스와 적리(이질)는 콜레라에 비해 유행이 장기적, 지속적이라는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다. 장티푸스가 여섯 가지 전염병 중에서도 가장 흔하다고 한 것은 한국 정부가 스스로 조사하여 파악했던 사실이 아니고 일본의 데이터를 차용한 것이었을 터이다. 그리고 설사 환자 가운데 혈변(血便)을 보이는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를 일단 적리로 간주하는 것은 세균 검사가 불가능했던 당시로는 적절하고 타당한 조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디프테리아는 미성년 아동에게 침범하여 병상(病狀)이 가장 험악하게 나타난다. 그 병독은 인두 후두를 포함하여 환자의 가래(痰) 침(唾) 콧물(鼻汁)과 환자가 사용하는 의복, 완구 등을 매개로 하여 전염하기 때문에 이 병이 만연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아동을 격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專要)하다. 소학교와 유치원 등 아동이 군집하는 장소에 이 병이 유행할 조짐이 있는 경우에는 특히 긴중(緊重) 주의해야 한다." (<실포질리아 예방 규칙>)

디프테리아는 영유아와 학령기 아동에게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대표적인 전염병이다. 디프테리아를 법정 전염병에 포함시킨 데에는 일본의 영향이 작용했겠지만, 한편으로는 어린이 건강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의 반영일 수도 있다. 서구 사회에서 여성과 어린이 건강에 대한 관심이 싹튼 것은 대체로 18세기이다. "모성 병원" "모자 병원"이 생겨난 것이 그러한 점을 뒷받침하는 근거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전문적인 부인과, 소아과 서적이 간행되고 있었다. 한 가지 잣대로만 세상을 볼 일은 아니다.

"발진티푸스는 그 병독이 환자의 신체를 통해 퍼져나가(揮散) 전염되는 병으로 전파 속도가 가장 빠르고 날랜(最迅疾) 병이다. 그것이 1차 유행할 조짐이 있으면 홀연히 산만(散漫) 전파하여 빈민부락 등 군집 잡거(雜居)한 장소에 가장 먼저 침입한다. 가옥이 불결 협애하면 공기의 유통이 불량하기 때문에 전염성의 위세가 더욱 맹렬(猛劇)해져 전체 부락민(全部人衆)을 침해한다. 따라서 이 병이 만연함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속히 환자와 건강자를 격리하고, 빈민 부락에 침입하는 때에는 피병원과 요양소를 개설하는 빈민구료법의 보급을 서둘러야(不怠) 한다." (<발진질부사 예방 규칙>)

전염병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질병이 가난과 연관되어 있음은 동서고금을 통해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리고 "질병의 사회성"은 요즈음에 새로 발견된 진리나 담론이 아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발진티푸스는 감옥, 빈민촌, 전쟁터와 같이 생활 조건이 열악한 곳에서 창궐하는 질병으로 알려져 왔다. 발진티푸스의 그러한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는 <발진질부사 예방 규칙>에는 "빈민구료법"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법률이 만들어졌던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경우 피병원은 수시로 세워졌다. 그리고 그것은 이 시기에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었고 조선 시대 내내 유지되던 전통이었다.

"두창의 병독은 두창의 고름(痘漿)과 딱지(痘痂) 중에 있어서 병자의 신체를 통해 발출(發出)하므로 전염력이 다른 병들보다 더 강렬하다. 그 때문에 한 겹 해진 옷을 통해 병독이 전파되어 무수한 대중에게 병독이 침입한 적이 왕왕 있었다. (다행히) 두창은 종두와 같은 만전(萬全) 예방법이 있어 그 병의 피해(患害)를 미연에 방제(防制)할 수 있다. 하지만 (종두를) 재삼 반복하지 아니하면 그 효과가 무(無)한지라 진실로 이 병이 발생하는 때에는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임시 종두를 보급하고 환자에게는 면밀히 소독법을 시행하여 십분 병독을 박멸케 하고 종래의 경험에 의거함이 필요하다. 보호 간병하는 사람이 친히 환자를 병구완(介抱)하다 두창 병독에 오염되더라도 그 수족과 의복 등에 십분 소독법을 시행치 아니하여 병독을 전파하는 경우가 매우 많으니 이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

두창은 앞의 다섯 가지 전염병과 달리 우두술이라는 "만전(萬全) 예방법"이 있는 질병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조선 정부는 1885년부터 우두술 보급을 국가 사업으로 전개해 왔지만 이 당시까지도 크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의학적 방법의 유무도 질병의 퇴치에 중요한 요인이지만, 설사 그러한 방법이 있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역량이 갖추어져 있는지 여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두창의 경우가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문제만은 아니다. 확실한 치료법이 있는 데도 사용하지 못한 채 죽어가거나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지금도 우리 주변과 지구촌에 얼마나 많은가?
▲ 확실한 치료법이나 치료약이 없어서 죽어가는 환자와, 그것이 있는데도 사용하지 못한 채 죽거나 신음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억울할까? ⓒ프레시안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5] 전염병 예방령 - 콜레라·장티푸스…100년 전 전염병 관리는?

기사입력 2011-06-20 오전 7:50:48

 

그러면 대한제국 시기에 정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염병을 관리했을까? <전염병 예방령>부터 살펴보자. 우선 법령은 콜레라 등 여섯 가지 이외의 전염병이라도 크게 유행할 조짐이 있으면 지방장관(군수)이 내부에 보고한 뒤 예방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의사가 전염병 환자로 진단을 내리면 동장(洞任)은 24시간 이내에 지방장관 및 가장 가까운 경찰서에 보고하고, 지방장관은 그 사실을 관찰부에 보고하는 한편 인접한 군(郡), 가까운 병영 등에도 알리도록 했다. 그리고 관찰부는 1주일에 한 차례 환자 수, 치유자 수, 사망자 수를 내부에 보고해야 했다. 이 규정대로라면 전염병 발생 시 정부는 매주 전국적인 상황을 파악하게 되어 있었다.

또한 지방장관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내부에 보고한 뒤 피병원을 세울 수 있었다. 또 인민들도 지방장관의 허가를 받아 사설 피병원을 세우는 것이 허용되었다. 법률에 따르면 관립이든 사립이든 환자의 동의 없이 강제로 피병원에 입원시키지는 않았다.

그리고 해당 지역 관리는 전염병 환자가 생긴 집의 문에 전염병명을 써 붙이고 소독이 끝나기 전에는 외부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도록 했다. 요컨대 보고, 피병원 설립, 환자 격리, 소독이 전염병 발생시의 가장 중요한 조치였다. 이런 공통적인 조치 이외에 전염병의 종류에 따라 약간씩 다른 조치들을 취했다.

콜레라의 경우 환자가 사용하는 변기 관리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환자의 변기에는 덮개를 씌워 변이 흘러넘치지 않도록 하고 환자가 변을 볼 때마다 석탄유(石炭乳), 생석회, 석탄산수를 뿌려 소독하도록 했다. 또한 환자의 의복, 침구, 깔개, 식기 등과 간병인의 의복 등 그리고 환자의 토사물에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물건들도 소독하도록 했다.

만약 간병인이 환자의 토사물이나 오염된 물품을 손으로 만졌을 경우에는 석탄산수와 승홍수(昇汞水)로 손을 씻어야 했다. 그리고 환자의 집에서는 음식물을 반드시 펄펄 끓여(煮沸) 먹도록 했다. 선박에서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환자나 사망자가 발생한 경우에도 마찬가지 조치들을 취해야만 했다.

그리고 환자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환자가 있는 집에 일체 출입하지 않고, 환자 집에서 사용한 우물물은 먹지 말고, 인근 쓰레기장을 청소하고, 하수구를 정비하고, 음식물은 끓여 먹어야 했다. 그리고 설사와 구토를 하는 경우 신속하게 의사의 진료를 받아야 했고, 그러한 증세를 보인 사람이 사용한 변기와 토사물도 소독하도록 했다.

전염병의 전파를 막기 위해 교통 차단이 필요한 경우에는 차단 구역을 명확히 표시하고 의사, 관리, 필요한 인부 외에는 일체 출입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환자가 치유되거나 사망, 또는 피병원에 이송한 뒤 5일 동안 새로운 환자가 발생하지 않으면 교통 차단을 해제하도록 했다. 또한 환자가 사망하면 그 사체를 다른 무덤들과 떨어진 곳에 매장하고 나중에 이장하지 못하도록 했다.

<호열자 예방 규칙>에는 콜레라 예방 접종에 관한 언급은 없다. 실제로도 일제 강점 이전에 한국인들에게 예방 접종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일본에서는 1896년 기타사토의 지휘로 일본 전염병연구소(傳硏)의 무라타(村田昇淸)가 콜레라 백신을 독자적으로 개발했으며, 1902년 유행 시에 고베 주민 7만여 명에게 처음으로 그것을 접종한 바가 있었다. 1886년 6월 고치(高知) 현립(縣立) 의학교를 졸업한 무라타는 1920년 말 조선에 와서 조선총독부의원 의관(醫官)을 거쳐 1921년 7월부터는 총독부 경무국 위생과장을 지냈다.

호열자(虎列刺)는 콜레라의 일본식 음역어(音譯語)로 "호랑이가 살점을 찢어내는 것과 같이 고통스럽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국(조선)에서 언제부터 호열자라는 병명을 사용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한성주보> 1886년 7월 5일자에 호열자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1880년대부터라고 생각된다. 이보다 앞서 1879년 콜레라 유행 시 일본인들의 요청으로 부산에 "소독소피병원"이 세워졌을 때 호열자라는 용어가 처음 소개되었을 수도 있다. 일본에서는 1850년대에 이미 콜레라(コレラ)라는 서양식 병명이 쓰였다.

▲ <콜레라(コレラ) 병론>(1858년)의 표지(왼쪽)와 콜레라의 병리를 언급한 부분(오른쪽). 일본에서는 최소한 이때부터 콜레라라는 새로운 병명이 쓰였다. ⓒ프레시안

한편, 장티푸스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관리했다. 우선 장티푸스 또는 그와 비슷한 발열(熱性) 환자가 생기면 외부인과의 접촉을 금지했다. 그리고 환자 자택에서 간병, 치료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환자와 가족이 원하는 경우에는 피병원이나 그 밖의 적당한 가옥으로 옮겨 치료받을 수 있었다. 또한 장티푸스 환자의 변기, 의복 등 물품은 콜레라 환자의 경우와 같은 방법으로 소독하도록 했다. 환자 인근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조치도 비슷했다.

하지만 콜레라와 달리 교통 차단 조치는 하지 않았고, 환자 시체의 처리에 대해서도 별다른 규정이 없었다. 적리에 대해서는 전문(前文)만 있고 별도의 구체적인 규정은 없는 것으로 보아 장티푸스와 동일한 방법으로 관리했을 것이다.

디프테리아는 어린이에게 주로 발생하는 특성상 어린이 관리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디프테리아 또는 유사 환자가 발생하면 그 집의 어린이는 다른 집에 피신하도록 했다. 그리고 용무가 없는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시켰으며, 어린이는 무조건 환자 있는 집에 갈 수 없도록 했다. 간병인도 어린이와 접촉해서는 안 되었고 빈번히 붕산수(硼酸水)와 염화칼륨수(鹽酸加里水)로 양치질(含漱)을 하도록 했으며, 환자의 방에서 나오기 전에 석탄산수와 승홍수로 손을 씻어야만 했다.

환자의 객담, 침, 콧물을 닦은 종이와 천은 덮개가 있는 용기에 담아 소각하고 환자가 양치질한 약수(藥水)도 석탄산수로 소독한 뒤에 정해진 변소에 버리도록 했다. 환자가 사용하는 변기도 석탄산수로 소독하도록 했다. 그리고 환자가 사용한 의복, 침구, 깔개, 완구, 식기는 물론 간병인의 의복 등과 그밖에 오염된 의심이 있는 물건들도 적당한 용기에 넣어 소독해야 했다. 환자가 회복되는 과정에 있더라도 의사가 완치되었다고 인정하고 최종적으로 소독을 하기 전에는 어린이와 어울릴 수 없었다. 환자 집 인근에 사는 어린이들은 감기(感冒)에 걸리지 않게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했고, 혹시 감기에 걸리면 신속하게 의사의 치료를 받도록 했다.

디프테리아 환자가 많이 발생한 경우에는 의사가 그 지역 소학교, 유치원(1897년 일본인들이 부산 용두산 아래에 세운 '부산유치원'이 한국 땅에 세워진 최초의 유치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법령이 제정될 때까지 그것이 유일했다. 따라서 이 조항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에 찾아가 어린이들을 진찰하도록 했다.

의사는 교원들과 협의하여 환자가 생긴 집의 어린이는 환자가 완쾌할 때까지 다른 집에 피신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그때부터 3주일 동안 등교, 등원하지 못하도록 했다. 기침이나 열이 나는 어린이는 신속히 귀가시켰고 의사의 치료를 받게끔 그 어린이의 집에 통보하도록 했다. 소학교나 유치원에 며칠 동안 결석하는 어린이가 생기면 교원들은 그 어린이 집에 결석한 이유를 알아보아야만 했다.

또한 디프테리아 유행 시기에는 평소보다 상학 시간은 늦추고 하학 시간은 당겼다. 어린이들이 목을 많이 쓰면 호흡기 감염증의 전파 가능성이 높아지고 건강에 무리가 온다고 여겨 음악 등 고성(高聲)을 내야 하는 과목은 유행이 끝날 때까지 수업을 하지 않도록 했다. 학교는 더욱 깨끗이 청소하고 휴식 시간에는 창문을 활짝 열어 충분히 환기를 시키도록 했다. 학교 곳곳에 어린이들이 침과 객담을 뱉을 항아리를 설치하고는 때때로 그것을 석탄산수로 소독하도록 했다.

이러한 조치들을 취했는데도 디프테리아가 계속 성행할 시에는 아예 소학교와 유치원을 폐쇄하도록 했다.

과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과도하게 철저한 조치였다. 제대로 된 치료법이 없었고, 일본과 달리 디프테리아 항독소도 사용할 수 없는 형편에서는 그런 조치가 필요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 법대로 조치를 취했는지는 자못 의심스럽다.

발진티푸스의 경우도 환자와 다른 사람들을 격리시키는 것이 첫 번째 조치였다. 환자의 방에는 간병인 이외에 가족들의 출입도 금했다. 환자는 자택에서 간병, 치료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고 환자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소독하도록 했다.

인근 사람들에 대한 조치는 다른 전염병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지만, 신체와 의복을 청결히 하도록 했고 과도한 노동, 노숙(露臥), 야행(夜行) 등 신체의 쇠약을 초래할 행위는 금지한 것이 특이했다. 또한 발진티푸스 유행 시 의사들은 빈민 부락을 순회 진료(巡診)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두창의 관리에 대해 알아보자. 두창 또는 유사 환자가 발생한 경우, 그 환자 집및 인근의 아직 우두를 맞지 않은 미두아(未痘兒)와 우두 접종을 받은 지 5년이 지난 사람은 신속히 우두를 맞도록 했다. 환자가 발생한 집의 어린이는 어린이가 없는 다른 집에 피신하도록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어린이는 3주일 동안 소학교, 유치원에 갈 수 없었고 또 (부모는) 그 이유를 학교에 알리도록 했다.

두창의 경우에도 환자나 간병인과 관련되는 거의 모든 것을 환자가 완쾌할 때까지 철저히 소독하도록 했다. 그리고 환자의 두창 딱지가 떨어졌더라도 의사가 완치되었다고 인정하고 그 뒤 목욕, 환의(換衣)하기 전에는 어린이와 어울리는 것을 절대 금지시켰다.

이런 것들이 100여 년 전 한국 정부가 전염병을 예방, 관리하기 위해 취한 지침이었다. 이대로만 했다면 제법 효과를 보았을 터인데 실제 얼마나 시행되고 또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지를 말해주는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6] 일제 강점기의 의료 상황 ①

일본 덕분에 조선인의 의료 수혜가 늘었다고?

기사입력 2011-06-23 오전 10:30:39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관·공립 의학 교육 기관들을 설립하여 조선인 의료인들을 많이 배출함으로써 조선인들에게 의료 혜택을 확대시켰다고 선전했다. 과연 그러한 선전처럼 식민지 시기를 통해 조선인들의 의료 수혜가 늘어났을까? 여기에 대해 몇 차례에 걸쳐 살펴보도록 하자.

일제 강점 이전 관립 1개(대한의원 부속의학교), 사립 1개(세브란스 의학교)였던 의학교는 해방을 맞던 1945년에는 관립 2개, 도립 4개, 사립 2개(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늘어났다.



그리고 그에 따라 근대 서양 의학을 교육받은 조선인 의사 수는 강점 이전 100명 미만에서 1943년 2618명으로 30배가량 늘어났다. 하지만 조선인 의사 1인당 조선인 인구는 1943년에도 9800여 명이나 되었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의사 1194명을 합하면 의사 1인당 조선인 인구는 6700여 명으로 조금 떨어진다.

우리나라는 2010년 12월 말 현재, 의사 1인당 인구가 639명이다. 강점 초기보다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는 일제 강점기 말에도 인구당 의사 수가 지금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조선인들에게 의사는 구경조차하기 힘든 존재였다.

▲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일본 제국 통계 연감>. ⓒ프레시안
왼쪽 그림처럼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인 의사 수보다 조선인 의사 수가 더 빠른 속도로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인구가 조선인의 3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음을 생각하면 일본인 의사 수는 대단히 많은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인 의사를 찾는 일본인 환자도 더러 있었고 일본인 의사의 진료를 받는 조선인 환자도 없지 않았지만, 의료의 공간은 민족별로 분리되어 있었다. 위의 그림처럼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일본 본국보다도 더 많은 의사의 진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내내 일본인 의사 1인당 일본인은 600명 내외로 오늘날의 선진국 수준이었다. 이렇듯 조선인과 일본인은 의료 혜택 면에서도 전혀 다른 처지였다.

이 현상을 뒤집어 생각하면 일본인 의사들은 강점 초기부터 사실상 포화 상태에 놓여 있었다. 민족별로 의료 공간이 사실상 거의 분리되어 있기는 했지만, 조선인 의사들의 증가는 일본인 의사들에게 (잠재적인) 위협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당연히 일제 당국으로서도 이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1874년 8월 <의제(醫制)>를 제정하면서부터 의료인의 자격을 국가가 관장했다. (대한제국은 1900년 1월 <의사 규칙> <약제사 규칙> 등을 제정하여 국가가 의료인 관리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메이지 정부의 방침은 의료 체계를 근대 서양식으로 완전히 개편하는 것이었다.

▲ 출처 : 橋本鑛市. "近代日本における醫師界の社會學的分析". (1991년 10월 일본교육사회학회 발표 논문). M : 메이지(明治), T : 다이쇼(大正) S : 쇼와(昭和).
그렇다고 전통 의료인들의 진료권을 박탈하지는 않았다. 근대 서양식 의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똑같이 "의사"라는 명칭을 쓰도록 허용했다. 하지만 전통 의료인들의 재생산은 철저히 억제했다. 세월이 흘러 자연적으로 소멸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일본의 전통 의료인("從來開業"으로 표시)은 1902년(M35, 메이지 35년)이 되면 50퍼센트 이하로 떨어지고 1916년(T5, 다이쇼 5년)에 이르면 15퍼센트 가량으로 급감한다.

일제는 일본 본국에서와는 달리 식민지인 대만과 조선에서는 전통 의료인에게 온전한 "의사(醫師)" 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의생(醫生)"으로 차별 대우를 했다. 대만에서는 1901년부터, 조선에서는 1912년부터 전통 의료인들을 의생으로 등록시켰다. 조선에서 <의생 규칙>이 제정된 것은 1913년 11월이었지만 그보다 1년여 전부터 사실상 시행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 환자들이 더 많이 찾은 의료인은 의생이었다. 하지만 의생들의 재생산은 억제되었으므로 날이 갈수록 수가 줄어들었다. 더욱이 신식 의사가 증가하는 속도보다 의생의 감소 속도가 훨씬 빨랐다. 결국 시간이 갈수록 조선인들이 이용한 의료인 수는 증가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감소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선인들은 의료 혜택에서 점점 더 소외되고 있었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대만과도 다른 현상이었다.

▲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프레시안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7] 일제 강점기의 의료 상황 ②

대만과 한국, 똑같은 日 식민지 하지만 달랐다!

 

기사입력 2011-06-27 오전 7:40:05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설립, 운영한 관립 의학교로는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와 경성제국대학(경성제대) 의학부가 있었다.

경 성의전은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899년에 대한제국 정부가 설립한 의학교에 이른다. 의학교는 1907년 통감부(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대한의원으로 통폐합되었으며, 대한의원은 1910년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명칭과 성격이 다시 바뀐다. 나라가 독립국에서 피보호국을 거쳐 식민지가 된 것과 마찬가지 경로를 밟은 것이었다.

조선총독부의원의 교육 부서는 부속의학강습소로 불렸으며, 당시 학생들은 모두 조선인이었고 교관(교수)은 전원 일본인이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 전문학교 관제>가 제정, 공포되면서 의학강습소는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전수학교와 더불어 조선 최초의 전문학교가 되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다.

▲ 출처 :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 동창회 명부>(1996년) 및 <유린회(有隣會) 회원 명부>(1992년), (재일본) <경성제국대학 동창회 회원 명부>(1990년). ⓒ프레시안

하 지만 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수학 연한도 의학강습소 때와 마찬가지로 4년이었으며 교과 내용도 대동소이했다. 가장 뚜렷한 차이라면 일본인들의 입학이 허용된 점이었다. 경성의전은 전신인 의학강습소 시절을 포함하여 35년 동안 도합 2315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가운데 조선인은 986명, 일본인은 1319명, 대만인 등 그 밖의 출신은 10명이었다.

위 의 그림에서 보듯이, 1919년까지는 한 명도 없었던 일본인 경성의전 졸업생이 1920년부터 점차 늘어나 1927년부터 조선인 졸업생을 능가하게 되었고 날이 갈수로 졸업생 수의 차이가 더 커졌다. (1941년도에 졸업생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전시 정책으로 수업 연한이 6개월 단축되어 두 학년이 반년 간격으로 같은 해에 졸업했기 때문이다. 경성제국대학도 마찬가지였다.)

경 성제국대학은 일제 강점기 동안 식민지 조선의 유일한 대학이었다. 의학부의 수학 연한은 의학전문학교들과 마찬가지로 4년이었지만, 학부에 입학하기 전에 예과를 거쳐야만 했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예과를 다닐 필요가 없었다. 요컨대 경성제대에 예과를 설치했던 것은 조선에는 고등보통학교(조선인)/중학교(일본인) 이후 과정인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점에서 당시 예과는 오늘날의 의예과, 치의예과와 위상과 성격이 달랐다. 법문학부와 이공학부 학생들도 학부 입학 전에 예과 과정을 거쳐야 했다.)

경성제대 의학부는 1930년부터 1945년까지 17차례(1941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인 311명, 일본인 763명, 기타 8명 등 모두 108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경성의전과 달리 경성제대 의학부는 처음부터 조선인과 일본인 졸업생의 비율이 대체로 3:7 정도였다.

▲ 출처 :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 동창회 명부>(1996년), <유린회(有隣會) 회원 명부>(1992년), (재일본) <경성제국대학 동창회 회원 명부>(1990년), <日治時代臺灣醫生社會地位之究>(陳君愷 지음, 1992년). ⓒ프레시안

이 그림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서 일제가 설립, 운영한 관립 의학교 졸업생 수의 누계(累計)치이다. 앞의 그림에서 졸업생 수가 연도에 따라 들쭉날쭉했던 것과는 달리 졸업생 수가 상당히 일정한 속도로 증가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일제 당국이 식민지의 의사 배출에 대해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생각하게 하는 모습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조선과 대만은 민족별 관립 의학교 졸업생 배출에서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 조선의 경우, 초기에는 조선인 졸업생 배출이 많았지만 1935년부터는 일본인 졸업생 배출 누계치가 조선인을 넘어서게 되었고, 그 격차는 갈수록 더 커졌다.

지난 회에서 제시했던 그림 "일제 강점기 의사 수의 변화"에서 1927년부터 조선인 의사 수가 일본인 의사 수보다 많아진 것과는 언뜻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1942년부터 졸업생 배출) 출신들 거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으며, 또 일본 등지에 유학하여 의사가 된 조선인들이 귀국해서 조선에서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본인 중에는 의사가 된 뒤 일본으로 돌아간 경우(특히 경성의전 일본인 졸업생)가 적지 않았다.

대만에서는 조선과 대조적으로, 대만인 관립 의학교 졸업생 누계치가 일본인 누계치보다 항상 많았고 그 차이도 줄어들지 않았다.

요컨대 대만의 관립 의학교는 전 기간에 걸쳐 대만인 의사 양성에 충실했던 반면, 조선의 관립 의학교는 적어도 1920년대 후반부터는 조선인 의사보다 일본인 의사 배출을 더 중요한 역할로 삼았다고 여겨진다.

▲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대만총독부 통계서>, <일본제국 통계연감>.

 

위의 그림은 조선, 대만, 일본의 의료인 수급의 변화를 비교한 것이다. 신식 의사 1명당 인구는 일본의 경우 이 기간 내내 대체로 1200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대만과 조선은 꾸준히 감소했다. 조선의 변화가 더 뚜렷하기는 했지만 1940년대 초에 겨우 대만의 1910년대 초 수준에 이를 정도였다.


의생을 포함하여 보면, 조선과 대만은 상반되는 양상을 나타내었다. 대만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의생을 포함한 의료인 1인당 인구가 감소하여 의료인 수급이 개선되는 모습을 보인 반면, 조선은 계속 악화될 뿐이었다. 대만은 의생의 감소를 상쇄하고 남을 만큼 신식 의사 수가 증가했지만, 조선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일제 식민지 시기 대만인 의사의 산실이었던 "대만총독부 의학교" 건물과 강의실(왼쪽, <대만위생개요>, 1913년)과 연혁(오른쪽, <대만총독부 의학전문학교일람>, 1925년판).

공 교롭게도 한국과 대만에서 공식적으로 근대식 의학 교육이 시작된 것은 똑같이 1899년이었다. 그 해 3월 24일 대한제국 정부가 <의학교 관제>를, 꼭 1주일 뒤인 3월 31일에는 대만총독부가 <대만총독부 의학교 관제>를 공포했다.

의 학교는 그 뒤 일제에게 장악되어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가 되었으며, 대만총독부 의학교는 1919년에 대만총독부 의학전문학교로 승격했다. 그리고 경성의전은 1920년대 후반부터 주로 일본인 의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바뀌었는데 반해, 처음부터 식민지 교육 기관이었던 대만총독부의전은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 대만인 의사 교육 기관으로서의 성격이 변하지 않았다.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8] 일제 강점기의 의료 상황 ③ 일제 시대, 북쪽에 의사가 많았던 까닭은?

의사(의료인) 수와 더불어 의사의 지역별 분포 양상은 국민(주민) 건강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어떤 국가의 의사 수가 많더라도 지역적으로 편중되어 있으면 의사 수가 적은 나머지 지역은 그만큼 의료 서비스에서 소외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사의 지역적 편중에 따른 문제는 교통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 더욱 심각했다.

의사 편중의 대표적인 예는 도시-농촌 간 의사 수의 차이이다. 일제 강점기에도 도농 간의 의사 수는 차이가 컸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시계열적(時系列的)으로 보여주는 통계 자료는 없다.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등에는 의사와 의료 기관의 분포를 도(道)별로 집계하여 수록했을 뿐 도시(府), 농촌(郡)별 자료는 없다.

의료 관련 단체에서 비정기적으로 발간한 의적록(醫籍錄)과 <총독부 관보>의 의사 개업 및 이동 신고 등을 종합하면 어느 정도 윤곽을 그려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이번 회에서는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에 수록된 도별 의사 수의 변화를 추적, 분석해 보기로 하자.

▲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위의 표에서 보듯이 의사 1인당 인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감소했다. 다시 말해 의사의 공급이 늘어났다. 하지만 일제 말기인 1943년에도 전국 평균으로 조선인 인구 1만 명당 조선인 의사 1명에 불과했다.

게 다가 지역(道)에 따른 차이도 대단히 컸다. 경성, 인천, 수원 등 대도시가 많은 경기도가 의사 수급 사정이 가장 나았으며, 그 다음으로 평남, 평북, 황해, 함북, 함남 등 북부 지역이 뒤를 이었다. 흔히 "개화(開化)"가 상대적으로 일찍 시작되었다고 일컬어지는 북부 지역에서 신식 의사의 배출이 많았던 것이다.

경기도가 사정이 가장 좋았던 데에는 의학교가 대부분 경성에 있었던 점도 작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타 지역에서 경성으로 유학 온 학생들이 의사가 되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러면 전통의료인이라고 할 의생들의 지역적 분포는 어떠했을까? 의생들 역시 인구당 수를 산출해 보면 북부 지역이 많아 함북, 함남, 평북, 평남 순이었다. 신식 의사의 분포와 차이나는 점은 의생이 경기도에 상대적으로 적었던 반면 경남에 많았다는 것이다. 전라도, 충청도, 경북 지역은 의사든 의생이든 전국 평균치를 훨씬 밑돌았다. 그만큼 일제 강점기 조선의 남부 지역은 의료인들의 서비스로부터 더 많이 소외되어 있었다.



이 번에는 일본인, 조선인 의사와 의생을 모두 합한 전체 의료인의 분포를 살펴보자. 앞의 자료들에서 예견할 수 있듯이 경기도와 북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았다. 특히 경기도는 전 기간 동안 의료인 1명당 인구 2000명 수준을 유지했다. 경기도에서는 의생의 감소치를 신식 의사의 증가치가 상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함북, 함남, 평남, 평북, 경남 지역은 전체 의료인 공급이 점차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 정도가 심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반해 삼남 지방을 비롯한 그 밖의 지역은 식민지 초기에도 좋지 않았던 상황이 날이 갈수록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전남과 전북 지역이 최악의 상태를 나타내었다.

▲ 1943년 당시 도별 인구와 의사 비율.

일 제 말기인 1943년 조선인 신식 의사가 절대수로나 인구당 비율로나 가장 많았던 곳은 경기도였다. 전체 인구의 12퍼센트 가량을 차지하는 경기도에는 의사의 30퍼센트 남짓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조선인 신식 의사가 많이 분포했던 곳은 평안남도였다.



한편, 1943년에도 의생이 가장 많았던 곳은 함경남도였다. 그리고 의생은 인구 비례로 보았을 때 의사의 경우보다 지역적 편중 현상이 적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남, 전북 지역은 의생 역시 다른 지역들에 비해 훨씬 적었다.



강 점 초기에 비해 의사 수는 많이 늘어나고 의생 수는 많이 감소한 1943년에도 전국적으로 의생은 의사보다 30퍼센트 가까이 많았다. 하지만 경기도에서는 이미 의사 수가 의생 수를 압도했으며, 평안남도에서도 의사 수의 우세가 확실했다. 황해도에서는 이 무렵 의사 수가 의생 수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나머지 지역들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전히 의생 수가 의사 수보다 많았다. 충북, 충남, 경남, 함남 지역이 특히 그러했다. 이렇듯 의료인 분포의 변화 속도는 지역마다 달랐다.

몇 차례 살펴보았듯이, 일제 강점기에 경기도를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의 의료인 수급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남부 지역이 특히 심했다. 이러한 의료인 수급의 악화는 사망률과 이환률 등으로 나타나는 건강 수준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앞으로 이 연재에서 살펴볼 중요한 테마이다.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9] 일제가 지은 병원 - 일본이 한국에 병원을 지은 진짜 이유는…

기사입력 2011-07-04 오후 1:33:27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통치하면서 크게 내세웠던 점이 관립/도립의원을 곳곳에 설치하여 조선인들에게 의료 혜택을 널리, 많이 베풀었다는 것이다.

관립의원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격인 경성(京城)에 있었던 조선총독부의원(1928년부터는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 경성의전 부속의원, 철도국 의원들이다. 이 가운데 총독부의원의 전신은 대한제국 시절인 1907년에 세워진 대한의원("근대 의료의 풍경" 53~56회)이다. 대한의원은 대한제국의 돈으로, 그것도 일본으로부터 억지춘향 격으로 거액의 차관을 얻어 설립한 것이었지만 처음부터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일본인의 병원이었다.

일제 강점기 도립의원의 연원은 대한제국기의 자혜의원(慈惠醫院)이다. 1909년 8월 21일 대한제국 정부는 <자혜의원 관제>를 칙령 제75호로 반포했다. 자혜의원의 역할과 성격은 관제에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제1조 자혜의원은 내부대신의 관리에 속하야 빈궁자 질병의 진료에 관한 사무를 장(掌)홈 자혜의원은 필요가 유할 시에는 빈궁자가 안인 병자의 진료함을 득(得)홈
제2조 자혜의원의 진료는 무료로 홈 단 전조 제2항의 경우에는 차한에 재(在)치 아니홈


요컨대 자혜의원의 기본적인 역할은 빈민 환자를 무료로 진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관제에 명기된 대로 1909년 12월 전주와 청주, 1910년 1월에 함흥에 자혜의원이 세워졌다. 자혜의원은 형식적으로는 내부대신이 관리하는 대한제국의 병원이었지만, 실제로는 대한의원과 마찬가지로 일제와 일본인 의사들이 완전히 장악한 병원이었다.

자혜의원이 가장 처음 세워진 전주, 청주, 함흥은 전통적인 고을로 외부인에 대해 매우 배타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가 그런 곳들에 자혜의원을 세운 데에는 그곳에 거주하는 소수의 (기특한) 일본인들을 진료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자신들이 자부하는 근대의료를 도구로 조선인들의 심장과 뇌수 한가운데로 파고들겠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병탄 직후인 1910년 9월 수원, 평양, 대구 등 10곳에 자혜의원이 설립되는 등, 1943년까지 모두 49개(출장소와 분원 포함)가 설립되었다. 이로써 부산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도시(府), 주요 읍 및 요충지에 도립의원이 자리를 잡았다. 부산에는 이미 일본인이 세운 사립 의료기관이 많았기 때문에 굳이 도립의원을 설립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자혜의원은 1924년까지 총독부가 관장했고 명칭은 대체로 도(道)자혜의원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1925년부터는 소속이 도(道)로 바뀌면서 공식 명칭도 도립의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글에서도 지금부터는 도립의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 전라북도립전주의원(<조선도립의원 요람>, 1937년). 1909년 12월 9일 청주의원과 함께 가장 먼저 세워진 자혜의원이다. 사진 속의 건물은 나중에 신축된 것이다. 1937년 당시 전주도립의원은 내과, 외과(피부비뇨기과 겸무), 산부인과, 소아과, 이비인후과(안과 겸무), 치과 등 진료과를 두었으며 일반 병상 41개, 전염병 병상 26개, 시료(施療) 병상 10개 등 병상 77개를 운영했다. 전주의원의 규모는 전체 도립의원 중 중상급에 속했다. ⓒ프레시안

▲ 강릉도립의원에서 시료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조선도립의원 개황>, 1930년). 시료 환자는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 ⓒ프레시안

▲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프레시안

그림에서 보듯이, 도립의원이 곳곳에 설립되면서 병원을 이용하는 환자 수도 증가했다. (그림에서는 경성의 총독부의원(뒤에 경성제대 부속의원)과 각 지역의 도립의원 이용자를 함께 나타내었다.) 세월이 갈수록 입원 환자와 외래 환자 모두 늘어났고 이 점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차이가 없었다. 다만 예외적으로 조선인 외래 환자가 1920년대에 급격히 줄어든 것은 총독부의 경비 지원이 감액됨에 따라 무료 진료(施療) 혜택이 감소했기 때문이었다.

이 그림을 보면 관립/도립의원을 이용한 조선인 수와 일본인 수는 거의 비슷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조선인 이용자가 조금 더 많았다. 일제 당국의 선전대로 조선인들이 식민지 통치 덕택에 의료 혜택을 점차적으로 많이 누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누락된 요소가 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인구 비(比)이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수는 일제 강점기 동안 꾸준히 증가했지만 일제 말기에도 조선 전체 인구의 3퍼센트에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병원 이용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인구당 이용자 수를 계산해야 할 것이다.

▲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프레시안

위의 그림은 관립/도립의원 이용자 수를 인구 수로 나누어 얻은 결과를 나타낸 것이다. 인구당 입원 환자, 외래 환자를 비교해 보면 일본인에 비해 조선인 이용자는 사실상 거의 전무했다. 1910년대 무료 치료가 많았던 시절에도 조선인 환자는 일본인 환자의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것이 일제가 그토록 내세웠던 조선인들에 대한 의료 혜택의 실상이다. 일제의 관립/도립의원은 그들만의 것이었고 조선인들을 위한다는 것은 생색내기 용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살펴볼 것인바, 주로 조선인들에게 행해졌던 시료(施療)에는 생체 실험의 함정이 내포되어 있었다.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20] 전염병으로 본 일제 강점기 ~ 일제 강점기 조선인 생활수준의 진실은? 

 

기사입력 2011-07-08 오전 7:58:11

 

일제 강점기를 통해 조선인들의 생활수준은 나아졌을까, 아니면 악화되었을까?

최근 주로 경제(사)학자들이 이에 관련된 논쟁을 벌여왔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 논쟁이다. 하지만 이 논의에는 한계가 내재되어 있다. 이들이 사용한 경제 지표들은 대부분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별이 되어 있지 않아 조선인의 생활수준 향상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가정과 전제가 필요하며 그러한 가정과 전제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조선에서 경제 성장이 있었던 것은 대체로 인정되는 바이지만, 그 배분 양상에 따라 조선인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을 수도, 별 변화가 없었을 수도,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구와 보건 위생에 관련된 지표들은 대부분 조선인과 일본인이 구별되어 있어 조선인들의 사정을 직접 알아볼 수 있으며, 일본인과의 비교도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조선인의 신체와 건강상의 변화를 규명함으로써 이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 사회, 문화, 정치 분야의 실상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인구와 보건 위생 자료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에 따라 이미 1960~70년대에 주로 인구학자에 의해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의 인구 변동, 출생력, 사망력, 사망 원인 등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연구자에 따라 연구 결과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일제 강점기를 통해 지속적인 조선인 인구 증가가 있었으며 그것은 주로 사망률 감소에 기인했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적인 연구 결과이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인구 변천(demographic transition) 모델의 제2단계(多産多死型에서 多産少死型으로 변화)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가 일제 강점기에 처음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 앞선 시기(예컨대 1890년대)에 나타난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바,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연구자들은 대체로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 사망률 감소의 주요한 요인으로 전염병 사망률의 감소를 꼽았으며, 또 그것은 전반적인 생활수준의 향상보다는 위생 시설과 의료 혜택(제16~19회)의 확대에 기인했다고 주장했다. 이번 회에서는 그러한 주장들이 타당한지, 특히 전염병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자.

▲ 1910~1940년 사이 조선인과 일본인의 조사망률(粗死亡率) 변화. 세 집단 간의 성별, 연령별 인구 구성의 차이를 보정하지 않은 자료로서 비교에 한계가 있지만 조선인, 일본인(조선 및 일본 거주) 모두 이 기간 동안 사망률이 떨어지는 사실을 볼 수 있다. 1918년에 큰 피크가 나타나는 것은 인플루엔자 유행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1918년 이전 조선인 조사망률이 낮은 것은 주로 신고의 미비 때문으로 여겨진다.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일본제국 통계 연감>. ⓒ프레시안

일제 강점기 조선에 관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통계 자료는 조선총독부가 매해 펴낸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1910~1942년)이다. 그 자료는 정확도에 어느 정도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일제 강점기 여러 분야의 시계열적(時系列的) 변화를 살펴보는 데에는 거의 유일한 자료이다.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에는 전염병과 관련된 자료가 "호구편(戶口篇)"의 "사망 원인별"과 "위생편"의 "전염병 환자 및 사망자" 등 두 부분에 실려 있다. 선행 연구자들이 사용한 자료는 "호구편"의 "사망 원인별"인데 그것부터 살펴보자.

▲ 조선에 거주하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인구 10만 명당 전염병 사망자 수.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호구편". ⓒ프레시안

위 그림에 보이는 1918~1920년의 큰 피크는 인플루엔자(에스파냐 독감), 콜레라, 두창(천연두) 등이 이 시기에 크게 유행했기 때문이다. 흔히 팬데믹(pandemic)기라고 부르는 이 시기를 제외하면 일제 강점기에 팬데믹은 없었는데, 그것은 동아시아의 (나아가 대체로 세계적으로도)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팬데믹 기 이후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 감소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에서는 뚜렷한 반면 조선인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기의 조선인 사망률 감소의 주요 요인으로 전염병 사망률의 감소를 꼽는 것은 이 자료만을 보아서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팬데믹 기를 제외한 모든 시기에 걸쳐 인구 10만 명당 일본인 사망자가 조선인 사망자보다 많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실제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사망자의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또한 "호구편"에서 사용한 사망 원인의 종류는 전신병, 정신병, 신경계병, 감모(感冒), 전염성병 등 25가지인데, 감모(감기) 항목이 별도로 설정되어 있는 등 전염성병의 범주가 의학적으로 확실치 않다. 거기에 반해 "위생편" "전염병 환자 및 사망자"의 전염병은 콜레라, 적리,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두창, 발진티푸스, 성홍열, 디프테리아, 유행성뇌척수막염(1924년부터), 재귀열(1939년부터) 등 법정 전염병으로 의학적 범주가 확실하다. 더욱이 총독부 당국은 전염병 실태 파악과 관리 대책을 그 자료에 근거하여 마련했다. 따라서 시대별 및 대만, 일본과의 객관적이고 정확한 비교를 위해서는 "전염병 환자 및 사망자"를 활용해야 한다.

▲ 조선, 일본, 대만의 인구 10만 명당 법정 전염병 환자 수.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일본제국 통계 연감> <대만총독부 통계서>. ⓒ프레시안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조선총독부가 공식적으로 파악한 법정 전염병 환자 수는 조선인에 비해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체적으로 10배를 상회했다. 이것은 조선인 환자가 실제로 적었던 것이 아니라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 독부는 보건의료 분야 중 법정 전염병 예방과 관리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였으며 또 그만큼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일본인 환자 수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고(본국의 일본인보다 전 시기 동안 네 배가량 많았다) 조선인 환자는 (1918~19년의 인플루엔자 환자와 1919~20년의 콜레라 환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환자 규모도 파악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적절한 대책을 기대한다는 것은 난센스일 것이다. 요컨대 총독부의 선전과는 달리 조선인들은 전염병 예방과 관리에서 아예 소외되어 있었다.

총독부는 전염병 실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 문제의 중요한 요인으로 조선인들의 근대적 위생에 대한 무지와 당국에 대한 비협조, 조선인 의료인(특히 의생)의 무능을 꼽았다. 하지만 총독부가 조선을 30년 이상 통치한 주체인 바, 그런 이유들은 한갓 핑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만도 비슷했다. 대만인 법정 전염병 환자는 거의 파악되지 않았으며, 대만에 거주하는 일본인들도 조선 거주 일본인보다는 나았지만 일본 본국보다 전염병에 훨씬 많이 시달렸다. 조선과 대만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전염병 발병률이 짧은 기간 동안만 본국보다 높았다면 현지 풍토에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여지가 있지만, 이것은 전 기간에 걸친 현상이었다.

▲ 조선, 일본, 대만의 인구 10만 명당 법정 전염병 사망자 수.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일본제국 통계 연감> <대만총독부 통계서>. ⓒ프레시안

법 정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이 기간의 후기로 가면 조금 나아졌지만 조선과 대만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본국의 일본인보다 법정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훨씬 많았다. 그리고 법정 전염병으로 인한 조선인, 대만인 사망자 수는 거의 파악되지 않았다. 일제 당국이 전염병의 예방과 관리에 총력을 기울였던 팬데믹 기에도 당국에 파악된 조선인과 대만인 사망자 수는 일본인 사망자 수에 훨씬 못 미쳤다.


< 표 1>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콜레라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보여준다. 나는 조선인 환자 및 사망자가 일본인 환자 및 사망자와 거의 비슷한 점에서 1919~20년 대유행기의 조사치는 정확도와 신뢰도가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총독부 당국이 콜레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실태 파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또 나는 이 수치가 일제 강점기 조선인이 겪은 법정 전염병의 실태를 유일하게 보여주는 자료로, 이것을 근거로 다른 법정 전염병들의 환자와 사망자 수를, 제한적이나마,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의 법정 전염병 피해는 직접적으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총독부가 파악한 조선인 환자 수, 사망자 수는 (1919~20년의 콜레라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지금으로서는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 환자 수, 사망자 수를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된다. 아래 그림들은 각각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환자 수 및 사망자 수를 통해 본 법정 전염병 발생 양상이다.

▲ 조선 거주 일본인 환자 수를 통해 본 법정 전염병 발생 양상.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조선 방역 통계>. ⓒ프레시안

▲ 조선 거주 일본인 사망자 수를 통해 본 법정 전염병 발생 양상.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조선 방역 통계>. ⓒ프레시안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