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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문화예술 관련글

한국 재즈의 대부, 전설 이판근

by Wood-Stock 2010. 11. 16.

사람들은 그를 ‘재즈의 전설’이라 부른다

ㆍ재즈 편곡·작곡가로 50년간 3000여명 뮤지션 배출 이판근

“한국 재즈의 뿌리를 추적하다 보면 결국 만나는 인물.” 자라섬 재즈페스티벌 인재진 예술감독은 그렇게 말했다. 재즈비평가 김현준도 비슷한 평가를 내놨다. “그를 빼놓고 한국 재즈를 말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누구인가? 바로 이판근(76·사진)이다. 지난 50여년간 한국 재즈의 중심에 서 있던 연주자이자 편곡자이자 작곡가. 아울러 3000명에 달하는 뮤지션들에게 재즈의 감성과 이론을 전해온 한국 재즈의 교사. 지난해 9월 뉴타운 개발로 철거되기 전까지, 기자촌 산동네에 자리한 그의 누옥((陋屋)은 재즈의 발신지였고 논장(論場)이었다. 그렇게 이 땅에 재즈의 씨를 뿌리고 가꿔온 그에게 후학들의 경의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중순 가평에서 열린 자라섬 재즈페스티벌에서 그의 음악인생을 집약해 보여주는 프로젝트 무대가 펼쳐졌고, 최근에는 그를 향한 ‘음악적 오마주’를 표방하는 음반 ‘A Rhapsody In Cold Age’가 세상에 나왔다.

30여년간 자신과 가족의 삶터이자 한국 재즈의 ‘공부방’이었던 기자촌 집을 잃은 그는 막내딸 민영씨 집에 머물고 있었다. 경기도 고양시의 작은 아파트. 옛집을 빼곡히 채웠던 온갖 악보와 서적, 음반, 영상물, 악기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일부는 철거 풍파에 망실됐고, 나머지는 여기저기 보관 중”이라고 했다. 최근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다는 그는 반세기를 넘긴 자신의 재즈 인생을 이렇게 털어놨다.

“오사카에서 태어나 교토에서 자랐죠. 아버지가 군수공장에서 일하셨는데 집에 유성기가 있었어요. 판들이 제법 많았죠. 클래식, 국악, 재즈 다 있었어요. 물론 일본 엔카도 있었고. 아버지 덕택에 세상에는 참 여러 가지 음악이 있다는 걸 어릴 때 알았어요. 국민학교 5학년 때 전쟁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왔죠.”

오사카에서 출발해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18일이 걸렸다고 했다. 대한해협을 강타했던 마쿠라자키 태풍 탓이었다. 어린 그는 가족과 경남 마산에 정착한 후에도 계속 재즈를 들을 수 있었다. 바다를 건너오는 일본 방송을 통해서였다. 당시 6년제였던 마산상업중학교에 진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SP 음반까지 가세해 재즈를 향한 그의 호기심을 북돋았다.

“우리 연배의 재즈맨들은 다 독학이잖아요. 나도 마찬가지죠. 그때 들었던 것이 ‘Blue Moon’, ‘Under the Apple Tree’, ‘Blue Sky’ 같은 곡들이죠. 일본 가수 핫토리 료이치의 노래를 포 프레시맨(Four Freshmen)이 재즈로 편곡한 곡도 들었어요. 중학생 시절부터, 판을 들으면서 음악을 악보에 옮기는 일에 완전히 빠졌죠. SP 표면이 하얗게 일어나서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때까지 들으면서 오선지에 옮겼어요. 내가 3학년 때 마산상중이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나뉘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밴드부에 들어가서 알토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불었죠.”

밴드부 편곡 작업은 이판근의 몫이었다. 그는 마산의 양키시장에서 구한 음반들을 밤새 들으면서 글렌 밀러의 ‘In the Mood’, 토미 도시의 ‘Song of India’, 베니 굿맨의 ‘Sing Sing Sing’을 채보·편곡했고, 그것은 곧바로 마산상고 밴드부의 레퍼토리가 됐다. 이판근은 그렇게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에 연주자 겸 편곡자로 첫발을 내디뎠으니, 거기서부터 셈하자면 그의 재즈 인생은 어언 60년이다.

서울상대에 진학해서도 학업보다 재즈의 유혹이 컸다. 미군 부대는 대한민국 도처에 있었고 부대마다 클럽이 있었던 까닭이다. 클럽은 당연히 재즈 연주자를 필요로 했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덕분에 당시 개런티는 “하루 연주에 쌀 반가마니 값이었다”는 것이 이판근의 회고다. 한국전쟁 직후의 대학생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호화 아르바이트였던 셈이다.

“복잡한 청춘을 보냈어요. 낮에는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책을 일본어로 읽고, 저녁과 밤에는 미군부대에서 색소폰을 불었으니 말이죠. 학교에 알려지면 쫓겨날까봐 숨어다녔습니다. 그러다 베트남전이 발발하면서 미군부대의 숫자가 급감했어요. 아마 3분의 1로 줄었을 겁니다. 그 무렵부터 한국인이 운영하는 미군 전용 클럽들이 생겼죠. 거기가 주무대가 됐어요. 그때 악기를 색소폰에서 베이스로 바꿨습니다. 하지만 85년에 모든 연주를 접었죠. 그때부터 편곡과 작곡, 레슨에만 전념했습니다.”

ㆍ30여년간 재즈 산실 ‘기자촌 집’ 뉴타운 개발로 철거

처음으로 ‘선생’ 노릇을 한 것은 미군부대 연주자로 한창 이름을 날리던 1959년이었다. 그는 “알토 색소폰 연주자 황천수가 첫 제자”라며 “연습장소는 반도호텔 옥상이었다”고 했다. 은평구 기자촌으로 들어간 것은 1977년. 아래층에 부인이 문방구를 차려 생계를 꾸렸고 위층은 살림집이자 재즈학교였다. 그 옹색한 공간을 거쳐간 연주자들 중에 가장 기억나는 이가 누구냐는 질문에, 이판근은 매우 단호하게 “색소폰 연주자 강태환과 김수열”이라고 했다. “재즈의 예술성을 고수하는 최고의 뮤지션”이라는 찬사도 덧붙였다. 그러자 딸 민영씨가 아버지의 고집을 잠시 탓하더니 그간의 ‘피교육생들’을 줄줄이 소개했다. 물론 지면으로 다 거론하긴 힘들다. 간단히 말하자면, 원로부터 중견까지 현재 활동하는 대다수 재즈 뮤지션들이 ‘기자촌 학당’을 거쳤다. 게다가 그 면면들은 재즈로 한정되지 않는다. 록그룹 사랑과평화의 최이철, 봄여름가을겨울의 전태관과 김종진, 포크 가수 박학기, 영화음악가 조성우를 비롯해 심수봉, 인순이, 윤수일처럼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가수들까지 기자촌을 거쳐갔다.

하지만 이판근의 삶은 80년대부터 지금까지 팍팍하다. 특히 노년의 그가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30여년간 한국 재즈의 산실 역할을 해온 기자촌 집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의 제자들과 일부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재즈아카데미 보존 청원’ 운동이 진행되고 있지만, 구청과 건설회사는 여전히 ‘노 코멘트’ 상태다. 그는 세시간이 넘게 진행된 인터뷰 말미에 마침내 한탄을 쏟아냈다. “그곳은 그냥 제가 살던 집이 아니라, 우리 재즈 뮤지션들의 추억과 땀이 깃든 곳이잖습니까? 그 무너진 잔해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참담해요.”

<글 문학수·사진 정지윤 기자 sachimo@kyunghyang.com>

201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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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즈의 대부 이판근

"재즈는 상업성에 굴복해선 안돼… 판소리 녹아든 한국적 재즈 만들고 싶다"

 

그 이름이 낯설다 - 오로지 '한우물' 팠지만 독립된 음반 낸 적 없고 세속적 명성 원치 않아

 

이판근씨가 새로 이사한 아파트의 작업실에서 자신의 재즈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재즈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모두 다 동료"라고 강조했다.


그의 이름은 남는다' - 200곡 작곡·후진 양성… '이판근프로젝트'팀 국제재즈페스티벌서 공연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에서 이판근프로젝트팀이 이판근씨의 곡을 연주하고 있다.

또는 이판근씨가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무대에 올라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추석이 지나고 가을이 깊어가면 재즈 팬들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경기 가평군에 있는 북한강변의 아름다운 섬마을 자라섬에서 국제재즈페스티벌이 열리기 때문이다. 올해 제7회 대회는 14~17일 열렸는데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팀이 무대에 올랐다. 이름은 이판근프로젝트. 한국 재즈의 전설 이판근(76)씨의 음악을 재해석하기 위해 젊은 음악인들이 모인 것이다.

이판근씨가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후배들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는다. 그는 "젊은 친구들 실력이 뛰어나다"며 "저렇게 재즈를 잘 하니 내 마음이 좋다"고 말한다. 그를 더욱 기쁘게 한 것은 미국에서 목사로 활동중인 제자 정창균씨가 무대에 오른 것이다. 사람들은 정창균씨를 한국의 로랜드 커크로 불렀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색소폰 3개를 한 입에 물고 연주하는 미국의 로랜드 커크처럼 그 역시 색소폰 3개를 한 입에 넣고 연주하는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판근프로젝트는 이판근씨의 음악을 다시 조명하는 작업이다. 별도의 연주팀을 꾸리고 그의 작품을 음반으로 만드는 것인데, 한국 재즈계에서 특정인의 음악을 주제로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은 전례가 없다. 그래서 이판근프로젝트는 그가 한국 재즈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연주자로, 이론가로, 교육가로 재즈와 평생을 함께 했다. 재즈가 위축되고 그래서 많은 동료가 다른 길로 떠났을 때도 그는 결코 재즈와 결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로 그는 그 세계의 대부 혹은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그런데도 일반인에게는 그의 이름이 아직 낯설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곡으로 독립된 음반 하나를 낸 적이 없고, 자신의 곡만을 선보인 공연을 한 적도 거의 없으며, 무엇보다도 일반인에게 재즈가 아직은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재즈의 산실을 뒤로 하고 아파트로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는 짐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1976년부터 살았던 서울 은평구 진관동 기자촌의 자택에서 9월에 이곳으로 이사한 뒤 아직 짐을 말끔히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피아노, 기타, 음반 등이 한쪽 방을 차지하고 있다. 그 방에서 그는 재즈를 쓰고 음악을 듣는다. 공동주택이다 보니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음악을 크게 트는 것도 쉽지 않다.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적지 않은 불편이다. 그러나 더 마음이 아픈 것은 기자촌에서 떠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34년 동안 생활공간으로, 녹음실과 강의실로 사용한 기자촌의 2층 건물에는 그의 재즈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에게 재즈를 배운 제자들은 그곳을 한국 재즈의 모교라고 불렀다. 한국에는 재즈를 기념하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이씨는 거기에 재즈 기념관을 하나 지으려 했다. 하지만 은평뉴타운 사업이 진행되면서 결국 건물이 수용됐고 이씨는 아파트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에서 함께 사는 딸이 기념관 건립을 위해 뛰고 있으나 적어도 기자촌에 세우는 것은 어려워졌다.

그렇게 들어온 아파트에서 그는 재즈 레슨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파트에서는 큰 소리를 내면 안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가르칠까 궁금했는데, 사실 악기는 사용하지 않는다. 제자라 해도 연주 솜씨가 수준급이기 때문에 따로 악기 다루는 법을 가르칠 이유가 없다. 대신 이판근씨는 자신이 만든 작품의 악보를 보여주고 제자들에게 애드리브 부분의 음계를 채우도록 한다.

재즈는 대개 주제부_발전부_주제부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처음과 마지막 주제부는 멜로디가 정해져 있지만, 발전부는 멜로디가 따로 없어 연주자가 알아서 즉흥적으로 소화해야 한다. 클래식을 작곡가의 음악이라 한다면, 재즈를 연주자의 음악으로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만큼 연주자의 능력이 중요하다. 이판근씨는 제자들이 채운 애드리브의 음계를 찬찬히 살핀 뒤 품평을 하고 조언을 덧붙인다.

이판근씨는 "발전부는 연주자마다, 또 같은 연주자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 달리 전개한다"며 "이것이 재즈를 즉흥적, 직관적 음악이라고 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즉흥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방식이 바둑의 수만큼이나 많기 때문에 재즈음악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예상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판근씨는 그러나 그 같은 불확실성이 재즈의 매력이라고 강조한다.

어려서부터 매료된 재즈의 세계

이판근씨는 1934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교토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클래식은 물론 육자배기나 판소리 같은 한국 음악도 많이 들었다. 따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음악에 소질이 있었는지 웬만한 곡은 몇 번 들으면 악보를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재즈만은 예외여서 도무지 채보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재즈의 비밀을 풀겠다고 덤벼든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마산으로 건너온 그는 이듬해 드디어 재즈를 듣고 악보를 그릴 수 있게 된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재즈의 곡조를 듣고 악보를 만든 뒤 학교 밴드부에 연주하도록 했다.

서울대 상대에 진학하자마자 미 8군 무대에 뛰어들었던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3년 정도 법률사무소 등에서 일하다가 1963년 결국 재즈를 평생의 직업으로 선택한다. 이후 그는 연주자로, 이론가로 상당한 이름을 날렸으며 특히 지금은 고인이 된 이정식씨의 밴드에서 베이스와 편곡으로 맹활약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팝과 록의 물결에 밀려 재즈는 점차 설 자리를 잃었고, 그와 함께 활약한 1세대 뮤지션 대부분은 1970년 이후 다른 장르로 돌아서거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판근씨는 끝까지 재즈를 고집했다.

그에게 다소나마 힘을 준 것은 1978년 신촌에 문을 연 재즈 클럽 야누스다. 그곳에서 이판근씨는 트럼펫의 강대관, 드럼의 최세진, 기타의 조정수, 색소폰의 김수열, 피아노의 손수길, 드럼의 유영수 등 1, 2세대 재즈 연주자 및 보컬 박성연 등과 함께 월 1회 정기 연주회를 하면서 재즈음악을 이어갔다.

1985년부터는 연주활동에서 손을 떼고 작곡과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지금까지 200곡 이상을 만들었고 3,000명 이상을 가르쳤다. 강태환, 정원영, 김광민, 이정식, 한충완, 정성조, 임인건, 윤희정 등이 모두 그의 문하생이다. 대중가요의 스타 김수철, 인순이, 박학기 등도 한때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한번 간 길은 다시 가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애드리브 부분을 같은 멜로디로 반복해 연주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는 그렇게 후진을 양성하면서도 자신의 곡을 알리는데 무관심했고 세속적 명성도 원치 않았다.

그 이유를 묻자 좀 포괄적인 대답을 한다. "재즈의 정신은 진선미입니다.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음악이지요. 그래서 상업성에 굴복해서도 안되고 현실과 타협해서도 안되는 겁니다."

한국적인 재즈를 만들고파

이판근씨는 자신만의 재즈 세계를 구축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그것은 한국 음악과 재즈의 결합이다. 이판근씨는 "흑인 음악인 블루스가 재즈로 발전했듯, 판소리 같은 한국 음악에서도 새로운 재즈가 탄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블루스와 판소리는, 한의 정서가 깔려 있고 화음이 없으며 멜로디가 간단하고 가사가 매우 길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그는 덧붙인다.

이판근씨는 이미 20여 년 전부터 이 일을 해왔다. 그가 만든 몇몇 곡에는 국악의 요소가 적지 않게 반영돼있다. 이판근프로젝트가 최근 제작한 앨범 '어 랩소디 인 콜드 에이지(A Rhapsody in Cold Age)'에 들어있는 '어 페어웰 투 매드니스(A Farewell to Madness)'나 '더 랩소디 네버 엔즈(The Rhapsody Never Ends)' '강' 같은 곡에는 사발가, 한오백년, 쾌지나칭칭나네 등에 나오는 음계를 사용했다. 그래서인지 이판근프로젝트에 참가한 후배들도 "한국인의 감성이 재즈에 그대로 투영돼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재즈에서 출발했기 때문인지 국악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국악 같으면서도 아니고 아닌 듯 하면서도 맞는 그런 재즈다.

또 하나, 후배들의 실력을 획기적으로 키우고 싶다. 그는 "지금의 연주 능력을 기준으로 할 때, 내가 작곡한 곡을 완벽하게 소화하려면 20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제자들을 잘 가르쳐 그 기간을 50년 이내로 줄이고 싶다"고 마지막 꿈을 살짝 밝혔다.

지금 재즈계는 조만간 재즈의 르네상스가 도래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국에 재즈가 전해진 지 60년이 지난데다 수준 높은 연주자가 늘어나고 좋은 창작곡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에 그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판근씨는 바로 그 르네상스를 여는데 자신이 작으나마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 특별히 젊은이들이 더 적극적으로 재즈의 세계에 뛰어들기를 기대했다.

 

2010.10.28 / 한국일보 박광희편집위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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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근 프로젝트 : A Rhapsody In Cold Age 

 

 

 1. Preface To Famellogy

 2. Famellogy

 3. A Farewell To Madness

 4. Preface To 소월(素月)길

 5. 소월(素月)길

 6. The Rhapsody Never Ends

 7. 江

 8. 江 (Alternate Take)

 

한국 재즈의 살아있는 전설 이판근 선생에 대한 음악적 오마주를 담은 Audioguy Records의 프로젝트 음반
한국 재즈의 거인(巨人)이 남긴 발자취, 그리고 우리의 또 다른 자화상

이 땅에 재즈의 씨앗을 뿌린 한 선각자의 인생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자 한국형 재즈의 정착을 꿈꾸는

지금 이 시대의 또 다른 자화상


이판근 PANGEUN LEE

 

작곡가이자 이론가, 교육자인 이판근 선생은 한국 재즈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장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의 존재를 빼놓고 한국의 재즈를 이야기하는 것은 절대 불가하다. 1934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이판근 선생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교토와 마산에서 보내며 일찍이 재즈의 향취에 젖어들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재즈의 명곡들을 채보하며 스윙필을 익혔고, 서울상대에 진학하자마자 미 8군 무대에 진출, 베이스 연주와 편곡을 담당하며 초기 한국 재즈의 부흥을 이끌었다.

 

색소포니스트 김수열, 트럼페터 강대관, 클라리넷 연주자 이동기, 피아니스트 김용세 등이 당시 그와 어깨를 나누던 동료들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 재즈의 전설로 얘기되는 색소포니스트 故 이정식 선생의 밴드에서 큰 활약을 했다. 1960년대 팝 음악의 물결에 밀려 재즈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고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외국으로 떠나거나 방송국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이판근 선생은 제 자리에 그대로 남아 한국 재즈의 명맥을 이어갔다. 연주와 창작 못지않게 교육에 많은 열정을 쏟아 부었는데, 오늘날 중진급 이상으로 얘기되는 우리나라 재즈 연주자들의 절대다수가 그의 제자들이다.

 

1978년에 발표돼 한국 재즈의 본격적인 첫 앨범으로 기록된 [재즈로 들어본 우리 민요, 가요, 팝송]에서 편곡을 담당했고, [박성연과 재즈 at the Janus Vol.1](1985)에 실린 곡들의 대부분도 그의 연주와 편곡으로 완성됐다. 과연 이판근 선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강태환, 최선배, 신관웅, 정성조 등의 음악인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정원영, 김광민, 한충완, 이정식, 윤희정, 임인건, 박재천, 전성식, 유성희, 조윤성 등도 그에게 가르침을 받아 재즈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이판근 선생의 삶은 1950년대부터 이어온 한국 재즈의 맥과 호흡을 같이 한다. 특히 그는 약 20년 전부터 국악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병행하며 한국형 재즈의 정착에 헌신해왔다. 다만 그가 만든 무수히 많은 곡들이 아직 미발표로 남아 있던 탓에 세상은 그의 묵직한 존재감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판근 프로젝트”의 [A Rhapsody in Cold Age]는 공식적인 그의 첫 송북(songbook)이자 또 다른 역사의 출발점이다. 재즈를 향한 작곡가 이판근의 영혼은 단 한 순간도 숨죽이지 않은 채 부릅뜬 두 눈으로 세상을 응시했다. 그 강렬한 시선 덕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음을 잊지 말라. 우리의 출생이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었듯, 재즈의 삶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던 역사의 흐름 덕에 가능했다.

Executive Producer : 인재진
Producer : 김현준
Co Producer : 계명국
Recording, Mixing&Mastering Engineer : 최정훈
Assistant Engineer : 남송지
Project Manager : 황현준, 정현
Recorded at : Jangchoong Studio, Seoul Korea, Sep 11, 2010
Mixing & Mastering at Audioguy Studio, Seoul, Korea,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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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재즈 1세대 그냥 저물게 할 순 없다

기록에 팔 걷은 음악평론가 김현준·남무성

 

두 재즈 평론가가 일을 냈다.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토종 재즈 1세대를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 직접 팔을 걷고 나섰다. 남무성 평론가는 재즈 1세대 얘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브라보! 재즈 라이프>를 제작·연출했다. 김현준 평론가는 한국 재즈의 전설적 이론가 이판근의 음악을 후배 음악인들이 재해석한 ‘이판근 프로젝트’ 앨범 <어 랩소디 인 콜드 에이지>의 프로듀싱을 했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펜대 대신 메가폰을 잡고 녹음실을 들락거린 걸까? 17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두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이판근 프로젝트’ 앨범 지휘한 김현준    » ‘브라보! 재즈 라이프’ 다큐 만든 남무성

 

 

 

사회 영화를 감명 깊게 봤다. 어쩌다 이런 작업을 하게 됐나?

 

남무성(이하 남) 처음부터 재즈 1세대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건 아니다. 그저 누군가가 그분들을 기록하는 영화라도 하나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만 막연하게 했다. 그러다 지난해 여름 이판근 선생 연구실이 강제 철거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뉴스를 봤다. 또 그즈음 트럼페터 강대관 선생이 은퇴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냥 있을 수 없어 영화 만드는 데 얼마나 드나 알아봤더니 <용서받지 못한 자>가 3500만원 들었다더라. 이 정도면 할 수 있겠다 싶어 직접 나선 것이다. 친구와 내가 반반씩 투자했는데, 우리가 초짜여서 결국 예상보다 서너배 이상 돈이 들었다.

 

사회 이판근 선생 연구실은 어찌 됐나?

 

다 철거됐다. 재개발이 아니라 도로 건설 때문이어서 보상도 제대로 못 받았다. 당시 선생이 딸과 함께 투쟁하며 요구했던 건 근방에 작은 공간을 내달라는 거였는데, 묵살당했다. 선생이 40년 동안 자료 모으고 작업하고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었다. 외국에선 재즈 박물관으로 만들 정도의 공간을 그냥 없애버린 것이다.

 

김현준(이하 김) 국내에서 음악 좀 한다는 이들은 재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통로가 이판근 선생밖에 없었다. 제자가 2000명이 넘을 거다. 심수봉, 김수철, 박학기, 윤수일, 인순이, 봄여름가을겨울, 빛과소금…. 윤도현 밴드도 와서 인사하더라. 선생은 일흔여섯살인 지금도 우리 민요를 재즈로 편곡하고 외국의 재즈 스탠더드 곡에 우리말 가사를 붙이는 등 작업을 계속하신다.

 

사회 이판근 프로젝트 앨범은 어쩌다 만들게 됐나?

 


미8군 무대 섰던 밴드들이 뿌리, 현재 이판근 선생 등 명맥 이어... 정부가 보호해야 할 순수예술

 

 

 

재즈 관계자들 사이에서 늘 1세대 이야기는 하는데, 자료가 없다. 1960년대만 해도 한국 재즈가 일본 재즈보다 수준이 높았다는 얘기를 전해 듣지만 당시 음악을 들을 수가 없다. 이런 부분에 대한 갈증이 있었는데, 이번에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의 인재진 예술감독과 의기투합해 이판근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다. 기왕이면 단순한 기록보다는 평균 30대 중반의 젊은 연주자들이 선생의 음악을 자유롭게 해석하며 영감을 얻도록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래서 지난 10월 자라섬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하고 앨범까지 냈다.

 

이 앨범의 가치는 이판근 선생의 직계 제자들이 아니라 선생의 이름만 알던 젊은 연주자들이 연주하며 소통한 ‘또다른 헌정’이라고 본다. 최신 흐름을 더해 1세대 음악이 낡았다는 선입견을 없애기도 했다. 프로듀서의 공이다.

 

사회 재즈 1세대는 어떻게 처음 시작됐나?

 

1950~60년대에 미8군을 통해 재즈가 전파됐다. 당시 미8군 무대에 섰던 연주자들이 엄밀히 말해 진짜 1세대다. 영화 <자유부인>을 보면 카바레에 나오는 음악이 다 재즈다. 그 연주자들이 모두 1세대다. 근데 베트남전이 터지고 미8군 밴드들이 몽땅 그리로 가면서 명맥이 끊겼다. 전쟁 뒤엔 재즈 대신 로큰롤이 미8군에서 유행했다. 연주자 절대다수는 음악 스타일을 바꾸거나 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하지만 기록이 없어 당시 연주자들 중 이름이 전해져 오는 분들은 몇 안 된다. 계속 재즈를 해온 이판근·강대관·김수열·이동기 선생 정도다.

 

 

특별한 사람들 전유물 아니라 세계 실용음악에 영향 준 영역... 어렵게 뿌린 씨앗 지금도 유효

 

사실 영화에 나온 분들 모두가 엄밀히 따져 1세대는 아니다. 그분들과 함께 무대에 섰던 연주자들도 1세대로 묶은 것이다.

 

이후 이분들로부터 음악을 배우고 개중 일부는 유학도 다녀온 이정식·임인건·전성식·김광민·한충완·정원영 같은 연주자들이 2세대로 분류된다. 유학파 2세대로부터 음악을 배우고 다시 유학을 다녀온 송영주·배장은 등은 3세대로 볼 수 있다. 요즘 새로 나오는 젊은 연주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4세대가 아닐까 한다.

 

1세대 분들은 “우리가 다음 세대에 준 것이 없다”고들 말씀하시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분들이 씨앗을 뿌려놓았기에 오늘 4세대 젊은 연주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다.

 

사회 1세대 중 재즈를 계속하신 분들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 같다.

 

재즈로는 돈을 절대 못 벌었고, 호텔·카바레 등 밤무대에 섰다. 그러고 나서 새벽에 재즈 클럽에 모여 밤새 연주했다. 돈벌이로는 방송이 큰 도움이 됐다. <쇼쇼쇼> 같은 프로를 보면 뒤에 풀 밴드가 섰다. 거기서 가요를 연주한 것이다. 방송으로 가는 걸 변절로 여긴 이도 있었지만, 생계를 위한 거니 손가락질할 건 아니라 본다. 어쨌든 밤무대·방송을 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재즈를 품고 있었으니까.

 

박춘석·길옥윤 같은 분들은 가요 작곡가로 갔다. 박성연 선생은 밤무대도 하고 방송도 했지만, ‘야누스’라는 재즈 클럽을 차려 거기서 평생을 노래했다. 다른 연주자들도 그곳에 모여 함께 재즈를 했다. 다들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돈도 못 벌고 고생만 하다 이제 저물어가는 거다. ‘야누스’는 문 연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제 손님이 별로 없다고 한다.

 

사회 1세대 분들이 지금도 무대에 서나?

 

홍대 앞 ‘문글로우’라는 클럽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합주를 한다. 요새 ‘야누스’에는 젊은 연주자들이 주로 나온다. 김수열 선생은 대학로 ‘천년동안도’에, 류복성 선생은 청담동 ‘소울투갓’에 가끔 선다. 그게 그분들 생업이다. 10만원 안 되는 돈을 받고 행사를 한다.

 

사회 이판근 선생 연구실마저 헐리는 상황에 아쉬움이 많겠다.

 

1세대 분들에게 뭘 해주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일단 재즈에 대한 인식부터 바뀌었으면 좋겠다. 재즈는 남의 나라 음악,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세계 실용음악에 영향을 주는 하나의 뿌리다.

 

정부기관 등에서는 재즈를 대중음악의 한 장르 정도로 취급한다. 상업음악이니 경쟁에서 이겨 돈 벌면 버티는 거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이다. 하지만 재즈는 다른 상업음악과 게임이 안 된다. 재즈는 클래식처럼 보호해야 하는 순수예술 영역이다. 재즈를 보호하고 우대한 유럽·일본 등은 문화 강대국이 됐다. 하지만 지금 정부는 한류 운운하며 돈 되는 분야에만 돈을 붓는다. 돈 놓고 돈 먹는 투기다. 그나마 희망을 본다면, 요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연주자들은 재즈가 돈 안 되는 음악인 줄 알면서도 한다는 거다. 낮에 아르바이트 하고 밤에 클럽에서 연주한다. 홍대 앞 인디밴드 마인드와 다르지 않다. 신기하면서도 기분이 좋다.

 

요즘 세대는 치열하게 싸우기보다는 즐기면서 음악을 하는 것 같다. 실용음악을 공부하며 재즈를 응용하기도 한다. 바람직한 방향이다. 정통 재즈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사회·정리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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