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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영화 이야기

한국 초기 영화스타

by Wood-Stock 2010. 6. 30.

                                                                 한상언 (paxcinema) 기자

 

 

[한국영화스타 1] 춘사 나운규 ~ 불꽃처럼 타버린 서글픈 천재

 

영화의 탄생 이래로 수많은 스타들이 스크린을 화려하고 풍성하게 장식했다. 한국영화사를 돌아보면 하늘의 별만큼 많은 스타들이 한 시대, 한 세대의 문화 상징으로 지금까지도 그 빛을 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스타들은 든든한 한국영화 지킴이로, 이들이 만들어낸 화려한 불꽃은 한국영화 발전의 밑거름이었다.

 

이 글은 무성영화시기부터 지금까지 한국영화의 중요 스타들을 리뷰해 보는 것으로 일종의 '배우로 본 한국영화사'이다. 이 글에서 첫 번째로 다루는 스타는 무성영화 시기 최고의 스타이며 초창기 한국영화의 걸작 <아리랑>을 만들어 한국 영화의 초석을 놓은 춘사 나운규(1902.10.17~1937.8.9)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 우리 영화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특히 <아리랑> <임자 없는 나룻배> 등 20~30년대 제작된 중요 영화는 한 편도 남아 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의 모든 영화사가 프린트도 남기지 못할 정도로 영세했고,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중요 필름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나운규의 영화업적에 대해 평가할 만한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 남한의 윤봉춘, 안종화 등과, 북한의 이규설, 문예봉 등 나운규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증언, 신문과 잡지의 글, 변사들이 녹음한 영화의 줄거리가 나운규에 대해 알 수 있는 전부이다. 그래서 극작가 오영진은 나운규 탄생 60주기에 나운규를 "불꽃처럼 모든 것을 허공에 태워버리고 스러진, 서글픈 천재"로 평가했다.

3·1 만세운동과 도판부사건

나운규는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약종상을 하던 나형권의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회령은 두만강을 경계로 간도와 마주하고 있는 국경도시로 간도의 우리 동포들과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했다.

나운규는 공립보통학교시절 평생의 동지인 윤봉춘을 만났다. 이 둘의 관계는 나운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간도로 떠난 나운규는 1918년 독립군 양성소 역할을 하던 간도명동중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는 윤봉춘도 있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해 4월, 회령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나운규와 윤봉춘은 간도에서 발행하던 <독립신문>을 회령에 배달하는 일을 했다. 윤봉춘은 만세운동의 학생 주모자로 일본 헌병대에 잡혀 청진형무소에서 6개월을 보냈고 나운규는 연해주로 몸을 피했다.

러시아 혁명의 기운이 가득한 연해주에서 먹을 것, 자야 할 곳이 필요했던 나운규는 러시아 백군에 용병으로 가담했다. 하지만 마적단을 토벌하는 일에 앞장서는 그곳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탈영, 북간도로 돌아왔다.

복역을 마친 윤봉춘과 연해주에서 돌아온 나운규는 북간도에서 재회했다. 둘은 광복군 비밀조직 도판부에 가입하고 특수훈련을 받기 위해 광복군이 있는 청산리 근처에 갔다. 그곳에서 "당신 똑똑한데 군대말고 공부를 해서 나라를 위해라"라는 한 나이 많은 광복군의 충고를 듣고 둘은 서울로 방향을 돌렸다.

서울 중동중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판부사건이 발각되었다. 나운규와 윤봉춘은 경찰에 체포되어 나운규는 만세사건 포함 1년 6월의 형을, 윤봉춘은 1년의 형을 받았다. 둘은 청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곳에서 애국지사 이춘식을 만나 나운규는 춘사, 윤봉춘은 금원이라는 호를 얻었다.

영화입문과 <아리랑>의 성공

1923년 출소한 나운규는 고향 회령으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 함흥에서 만들어진 신극단체 <예림회>가 회령에 공연을 왔다. 연극에 매료된 나운규는 <예림회>의 문예부장 안종화에게 간청하여 연구생으로 <예림회> 무대에 섰다. 나운규는 땅딸보 몸집에 다리도 휘고, 억센 함경도 사투리까지 사용해 전혀 배우로 어울리지 않았다. 안종화에 의하면 첫 무대에선 그를 본 모두는 보잘 것 없는 연기의 둔재라며 손가락질했다고 한다.

1924년 <예림회>는 해산했다. 안종화는 부산에 설립된 영화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나운규는 안종화를 찾아가 영화계 입문을 부탁했다. 연구생으로 입사한 나운규가 처음으로 맡은 역은 <운영전>(조선키네마주식회사, 윤백남 연출, 1925년)에서 가마꾼이었다.

나운규의 외모는 전혀 배우 같지 않았다. 외모로 보았을 때 그가 맡을 수 있는 역은 악역이나 광인, 노역뿐이었다. 나운규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윤백남이 만든 <심청전>(윤백남프로덕션, 윤백남 연출, 1925년)에서 심봉사 역을 맡은 나운규는 실제 장님을 찾아가 장님의 행동을 관찰했다.

나운규는 청춘남녀의 연애 이야기, <농중조>(조선키네마프로덕션, 이규설 연출, 1926)에서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농중조>는 흥행에서 성공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영화평에서 평자들은 나운규의 연기를 칭찬했다. 특히 <농중조>에서 각색과 연출의 경험은 나운규가 <아리랑>을 만들기 위한 예행이었다.

<아리랑>(조선키네마프로덕션, 나운규 연출, 1926)이 만들어졌다. 나운규 원작, 감독, 주연의 이 작품은 나운규를 한국영화의 왕좌에 앉혔다. 농촌을 배경의 러브스토리가 살인사건으로 파국을 맞는 <아리랑>은 10년이 넘게 전국방방곡곡에 상영되었다. 주인공 나운규, 신일선은 무성영화시대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이어 만들어진 <풍운아>(조선키네마프로덕션, 나운규 연출, 1926년)의 성공은 나운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 <풍운아>에 출연한 나운규         ▲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 포스터


영화 황제의 몰락

나운규는 <아리랑>과 <풍운아>를 들고 고향으로 금의환향했다. 회령서 나운규와 윤봉춘은 다시 만났다. 나운규는 평생의 지기 윤봉춘을 영화계로 이끌었다. <풍운아>이후 <야서> <금붕어> 등의 작품이 실패하자 <조선키네마프로덕션>와 나운규의 사이는 갈라졌다.

나운규는 1927년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한다. 하지만 나운규가 만든 작품은 <아리랑>만큼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나운규는 인천의 기생출신 배우 유신방과의 열애에 돈을 쏟아부으면서 단원들의 신뢰를 잃었다. 윤봉춘마저도 등을 돌렸다. 1929년 <나운규프로덕션>은 해산했다. 나운규는 동경으로 떠났다.

1930년 나운규의 곁을 떠났던 동료들이 다시 모였다. <아리랑 후편>과 <철인도>를 만들었다. 서광제를 비롯한 카프진영의 비판이 쏟아졌다. 나운규는 미나도좌라는 신극단체로 옮겨가 연극을 공연했고 영화도 만들었다. 이 시기 나운규에게는 비난만 쏟아졌다.

1932년 나운규의 열연이 돋보였던 <임자 없는 나룻배>(유신키네마, 이규환 연출, 1932년)가 만들어졌다. 해방 전, 최고의 스타였던 문예봉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 나운규는 자신의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갖은 고생 끝에 나룻배로 사람을 실어 나르며 사는 춘삼이 철교가 놓이면서 맞게 되는 비극을 그렸다.

나운규는 더 이상 한국영화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가 만든 영화는 계속 흥행에 실패했다. 생활은 쪼들렸고 극단을 따라다니는 처량한 신세였다. 하지만 여전히 나운규의 이름을 믿고 돈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폐병을 앓고 있던 나운규는 영화에 더욱 몰두했다. 1936년 그의 유작 <오몽녀>(조선영화주식회사, 나운규 연출, 1936년)가 제작됐다. 소설가 이태준 원작을 나운규가 각색, 연출한 이 작품은 대단한 찬사를 쏟아냈다. <아리랑>을 만든 나운규의 부활을 예고하는 듯했다.

나운규의 병은 깊어갔다.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영화에 대한 집념은 클 수밖에 없었다. 죽기 전까지 그는 시나리오 <황무지>를 쓰고 있었다. 1937년 8월 9일 오전 1시 25분 나운규가 눈을 감았다. 36세의 한창의 나이였다.

나운규의 장례는 최초의 영화인 장으로 치러졌다. 빗속에서 치러진 장례에서 나운규를 비판했던 카프계열의 서광제가 조사를 낭독했고, 나운규를 영화계로 인도했던 안종화가 고인에 대한 약력소개를 했다. 그리고 평생의 동지였던 윤봉춘의 조전 낭독이 있었다.

나운규는 무성영화 시기 최고의 감독이었으며, 팬들을 몰고 다니던 스타였다. 그는 현재 반쪽으로 갈린 한반도의 남과 북 모두에서 우리 영화의 초석을 놓은 개척자로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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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스타 2] 최초의 영화 스타 이월화 ~ '조선의 카츄사'에서 '권번의 기생'으로

 

1927년 1월 4일자 <조선일보>에는 잊혀진 한 여배우에 대한 기사가 났다. '말썽 많든 여배우 이월화-명성 울리던 토월회 여우, 극단 떠나서 기생생활'이란 제목의 기사에는 영화에서, 토월회 무대에서 인기를 한몸에 받던 이월화의 근황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전략) 시내 와룡동으로 이월화를 찾아가니 어제와는 딴판으로 비단옷으로 몸을 감은 그는 아직도 요염한 자태가 사라지지 않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중략) "늙은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면 아무리 해도 돈이 드니까요. (중략) 결국은 이런 기생노릇까지 합니다 그려." (후략)

 

이월화(李月華, 1904~1933)는 여배우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 무대에 선 선구적 인물 중 하나였다. 초창기 무대극에서는 모든 여자 역할을 남자배우가 했다. 여배우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일례로 <이수일과 심순애>로 더 잘 알려진 <장한몽>에서 심순애 역은 예쁘장한 남자배우 고수철이 연기했다.

최초의 여배우는 1917년 개량단의 김소진이었다. 하지만 최초의 여배우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게 그 활동은 미미했다.

두 번째이며 영화에 최초로 출연한 여배우는 궁중나인 출신으로 당시 4대 극단 중 하나인 취성좌의 주인이었던 마호정이다. 마호정은 계모나 소첩 등 악역을 잘 했다. 그러다 보니 취성좌의 공연에서 마호정은 계모역을 하고 여주인공은 남자인 최여환이 했다.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는 콜레라 전염을 막기 위한 홍보용 영화를 취성좌를 통해 만들게 했다. 이 영화에 출연한 마호정은 최초로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가 됐다.

1923년 윤백남은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月下의 盟誓)>(1923년)를 만든다.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저축 장려를 목적으로 윤백남이 이끄는 민중극단에 의뢰하여 만든 작품이었다.

1919년부터 만들어진 영화는 연극 도중에 연극에서 표현하기 힘든 장면을 영화로 보여주는 연쇄극(키노드라마)의 한 부분이었다. 본격적인 극영화인 <월하의 맹서>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이월화는 여배우가 드물었던 시기에 영화 한 편 출연으로 한국영화사상 최초의 스타가 됐다.

배우가 되기 전 이월화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본명이 이정숙으로 알려져 있으나 홍소회라는 설도 있다. 1933년 <동아일보>의 이월화 부고 기사에는 그녀가 진명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이월화는 1921년 김도산의 신극좌에 들어가 배우가 됐다. 그해 소녀들로만 구성된 여명극단으로 옮겨 <운명>을 공연하는 중 민중극단을 이끌던 윤백남의 눈에 들게 된다.

윤백남은 이정숙의 이름을 이월화로 바꿔주고 민중극단 두 번째 작품인 <영겁의 처>에 출연시켰다. 이월화는 그 작품에서 '올가' 역을 맡아서 유명해졌고 영화 <월하의 맹서>로 2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가 됐다.

1923년 토월회가 창립되면서 이월화는 토월회의 여배우로 무대에 선다. 동경유학생 출신이었던 박승희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토월회는 신파극이 아닌 리얼리즘극, 곧 신극을 공연했다. 여배우가 귀하던 시절 이들은 당시 최고 스타 이월화를 여배우로 스카우트했고 이월화가 출연한 토월회의 공연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됐다.

이월화는 <부활> <사랑과 죽음> <카르맨> <하이델베르크> 등 초창기 토월회의 작품에 여주인공을 맡으며 승승장구해 '조선의 카츄사('부활'의 여주인공)'으로 불렸다.

하지만 몰락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박승희에게 구애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토월회 무대를 등지고 부산으로 내려가 이경손이 만든 영화 <해의 비곡>(1924년)에 출연했다. 방황의 시작이었다.

부산에서의 두 번째 영화 출연을 거절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윤백남이 만든 영화 <운영전>(1925년)에서 배역을 맡지 못했다. 또한 안석영에 대한 구애도 실패했다.

고국을 떠나고 싶었던 이월화는 대구의 한 부호의 아들과 결혼하여 상하이로 떠났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파국으로 끝났고 이월화는 이후 중·일 혼혈 청년 이춘래와 만났다. 하지만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이월화가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즈음 상해에서 돈이 떨어진 이월화는 다시는 밟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그녀는 <뿔 빠진 황소>(1927년), <지나가의 비밀>(1928년) 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나 조역으로 만족해야 했다.

특히 <지나가의 비밀>을 촬영하고 있을 때에는 조선 권번에 기적을 올린 기생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조선 최고의 스타였던 이월화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기생으로 추락한 것이다.

스크린에서, 토월회의 무대에서 뭇사람을 녹이고 울리고 웃겼던 '조선의 카츄사'가 기생이 되어 대낮부터 웃음을 팔았다.

1933년 7월 18일 이월화가 죽었다. 이춘래와 함께 일본 모지로 옮겨가 살았던 이월화는 노모의 병 문안차 서울에 다녀간 지 일주일만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불과 나이 30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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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스타 3] 한국영화의 어머니, 복혜숙 ~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었던 박정양의 아들인 박승희는 일본 유학 중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연극 애호가를 넘어 스스로 연극인이 되고자 1923년 사재를 털어 토월회를 만들었다. 당시 토월회에는 여배우로 이월화가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이월화는 일본유학출신의 지식인이자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박승희를 사랑했다. 하지만 약혼녀가 있었던 박승희는 이월화의 구애를 거절했고 이월화는 토월회를 떠났다. 토월회의 히로인 이월화가 사라져버리자 박승희는 이월화를 대체할 여배우가 급하게 됐다. 이때 찾아낸 배우가 복혜숙(1904~1982)이었다.

 

    

▲ 한국영화 속 자상하고 인자한 어머니상을 구현한 복혜숙     ▲ <수업료>에서 할머니 역의 복혜숙

 

복혜숙은 1904년 충남 대천에서 후에 목사가 되는 복기업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복마리아였다. 일찍이 신교육을 접할 수 있었던 그녀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이화여전에 들어갔다. 3학년 때 기숙사에서 나와 하숙을 하던 중 '수산장'이라는 수예학원에 들어가 수예를 익히게 됐다. 일본어가 유창하고 손재주가 남달랐던 그녀는 수예학원 원장의 주선으로 일본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요꼬하마 기예학교에 들어간 복혜숙은 뛰어난 솜씨로 만든 물건을 내다 팔아 적지 않은 용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극장에 출입하면서 각종 공연과 영화에 빠졌다. 그녀는 무용수가 되려고 사와모리 무용연구소에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반년 동안 궂은 일을 했다. 그러던 중 소식이 끊긴 딸을 찾으러 일본에 온 아버지에 의해 고국으로 끌려왔다.

복혜숙은 아버지가 세운 김화여학교의 일본어선생으로 일했다. 하지만 시골의 무료한 생활에 질린 그녀는 가출을 했다. 복혜숙은 단성사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신파극과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단성사 변사 김덕경을 찾아가 배우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1921년 복혜숙은 복마리아라는 이름을 이혜경으로 바꾸고 김도산이 이끄는 신극좌에 입단했다.

복혜숙이 신극좌에 입단할 당시는 신파극이 전성기를 지난 시기였고 영화에 밀려 극장을 잡지 못하고 유랑극단처럼 지방을 떠돌기 시작할 때였다. 극 또한 엉성해서 대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충 말로 대사를 약속하고 무대에 서는 것이 일반이었다. 복혜숙은 작품의 완성도에 실망하여 일본에서 여러 번 관람하여 대사까지 기억하고 있던 <누교>의 극본을 쓰고 자신이 주연을 맡았다. 공연은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연극에 대한 주먹구구식 교육이 아닌 체계적 교육을 받기 위해 신파극단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1924년 일본에서 유학한 현철이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를 세웠다. 복혜숙은 이곳에 들어갔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는 입센의 <인형의 집>을 공연하고 내분에 쌓인 채 문을 닫았다. 하지만 복혜숙은 <인형의 집>에서 노라로 출연하여 호평을 받고 이월화가 빠진 토월회의 전속여배우가 되는 행운을 얻었다. 이때 예명도 이혜경에서 복혜숙으로 바꿨다.

복혜숙은 토월회가 공연한 <춘향전>의 '춘향' 역으로 이월화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됐다. 이 작품은 적자에 허덕이던 토월회의 단비 같은 작품이었다. 지방 공연요청이 쇄도했다. 대구를 시작으로 남부지방을 돌며 흥행몰이를 했다. 토월회의 작품은 점점 통속적으로 흘렀다. 그 동안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던 박승희는 흥행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주요 단원들이 박승희에 불만을 품고 토월회를 탈퇴했다. 토월회는 휴면기에 들어갔고 복혜숙은 무대를 떠나 조선권번의 기생으로 일하며 영화에 출연했다.

복혜숙이 비중 있는 역으로 처음 출연한 영화는 <농중조(새장안의 새)>(이규설 연출, 1926년)였다. 토월회에서 <춘향전>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던 그때, 윤백남의 요청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당시 인기 있었던 일본의 통속극, <농중조>에서 복혜숙이 맡은 역은 여주인공 마화숙 역이었다. 젊은 남녀의 자유연애를 담고 있는 이 작품에서는 나운규가 조연으로 나와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흥행도 성공적이었다.

그 뒤, 복혜숙은 <홍련비련>(1927년, 이필우 연출), <낙화유수>(1927년, 이구영 연출), <세 동무>(1928년, 김영환 연출), <지나가의 비밀>(1928년, 유장안 연출) 등의 작품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다. 복혜숙은 <아리랑>(1926년, 나운규 연출)의 신일선과 함께 20년대 최고의 스타였다.

복혜숙은 1928년부터 8년간 비너스라는 다방을 운영했다. 처음에는 얼굴마담으로 있었는데 그 다음해, 다방을 인수해 직접 경영했다. 당대의 스타 복혜숙이 운영하는 비너스는 유명인들이 찾는 명소였다. 비너스에서는 낮에는 차를 팔고, 저녁에는 바를 운영했다. 또한 춤을 추는 무도장을 겸했는데 조선총독부에서 무도장을 허가하지 않자 1937년 1월 '삼천리'에 복혜숙을 비롯한 서울의 유명한 기생들이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비너스를 운영하면서 복혜숙은 1929년 다시 문을 연 토월회의 무대에 섰고, 영화에도 계속 출연했다. 또한 1926년부터는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에서 방송극을 쓰고 출연을 했다. 30년대부터는 <그대 그립다> <종로행진곡> 등 유행가 음반을 취입했다. 한마디로 이 시기 복혜숙은 다방면에서 최고의 인기와 함께 여성으로서 선각자의 길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2~30년대 여주인공만을 맡았던 복혜숙은 <수업료>(1940년, 최인규 연출)에서 처음으로 할머니 역을 맡았다. 비너스를 운영하던 1933년 경성의대 출신인 김성진과 결혼했는데 시어머니가 영화와 연극에서 복혜숙이 다른 사람의 애인, 부인이 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복혜숙은 자상하고 인자한 할머니로서 영화에 출연했다.

40년대 이후 복혜숙은 영화의 주인공은 되지 못했지만 300여 편이 넘는 영화에서 조역과 단역으로 출연했다. 연극 무대와 방송에도 꾸준히 얼굴을 비췄다. 한국전쟁 중에는 한국군대의 문예중대에 자진 입대하여 군복을 입었고, 1954년 한국 영화에 대한 입장세 면세조치를 이끌어내어 한국 영화의 중흥에 앞장섰다. 또한 1962년부터 한국영화인협의의 연기분과 위원장으로 배우들의 뒷바라지에 힘을 쏟았다. 73년부터는 최초의 영화인 연금수혜자의 혜택을 받았다.

배우가 되고 싶어서 집을 뛰쳐나왔던 복혜숙은 평생을 배우로서 무대 위에 있었고 카메라 앞에 섰다. 300여 편의 출연 영화 중 그녀의 마지막 영화는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1년, 이장호 연출)였다. 말년에 창덕궁 낙선재에 출입하면서 이방자 여사와 칠보 장식물을 만들며 소일했던 복혜숙은 1982년 10월 5일 7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동시대를 살았던 여배우들이 어렵고 힘들게 여생을 보냈던 것에 비하여 복혜숙은 후배 영화인들의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평소 후배들에게 어머니라고 불리었던 복혜숙은 평생 한국영화를 지켜온 한국영화의 어머니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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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스타 4] <아리랑>의 신일선 ~ 돈에 팔려 간 <아리랑>의 여주인공

 

26년, <심청전>을 마치고 고향 회령에서 작품 구상을 하던 나운규는 시나리오를 완성하여 서울로 돌아 왔다. 나운규는 <농중조>(조선키네마프로덕션, 이규설 연출, 1926)의 주인공을 맡았고, 각색과 연출을 도우면서 자신의 감독 데뷔작을 준비했다. 제작비는 일본인 제작자 요도를 통해 마련했다. 일이 착착 진행됐다. 하지만 한 가지, 여주인공역이 마땅치 않았다.

 

그때 함흥에서 문수성 극단의 공연을 본 복혜숙(<농중조>의 여주인공)이 나운규에게 함흥에 노래와 춤을 잘 하는 여배우가 있으니 한번 찾아가 보라고 했다. 나운규는 함흥으로 15세의 어린 여배우를 찾아 갔다. 그 여배우는 나운규가 부산의 한 극단에서 보고 눈에 담아두었던 신일선이었다.

문수성 극단에서는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신일선을 내보낼 수 없었다. 매니저 격이었던 오빠 신창운과 단장 문수일 사이에 싸움이 났고, 급기야는 칼부림까지 일어났다. 이를 틈타 나운규와 신일선은 함흥을 떠나 서울로 도망쳤다. 신일선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아리랑>(조선키네마프로덕션, 나운규 연출, 1926년)에 출연하게 됐다. 그녀는 이 한편의 영화로 조선최고의 스타가 됐다.

 

▲ <아리랑>의 여주인공 신일선     ▲ <아리랑>에서 나운규와 신일선


신일선(1912~1990)의 본명은 신삼순으로 신용복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동덕여학교에 재학중이던 그녀는 오빠 신창운의 강권으로 배우가 됐다. 3.1운동 당시 순사였던 오빠 창운은 3.1운동에 가담, 일경을 때려 구속되는데 한 친일인사가 양자로 삼으면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그러던 중, 창운은 조선극장에서 공연하던 조선예술가극단의 히로인 이혜경에게 반하게 된다. 그는 조선예술가극단의 이혜경과 관계를 맺고 싶은 생각에 빼어난 용모에 노래와 춤에도 소질이 있었던 막내 삼순을 극단에 입단시키고 자신도 매니저처럼 동생과 동행했다. 입단과 함께 삼순은 이름을 일선으로 고쳤다.

창운의 목적은 성공이었다. 이혜경과 가까워졌고 급기야 동거생활로 들어갔다. 단원들과 관객들은 수군거렸다. 이런 행동은 극단의 단결을 해쳤다. 극단에서는 부산공연의 실패를 이유로 신창운과 신일선을 내쫓았다.

신일선은 서울로 올라왔다. 학교에 다시 들어갔지만 동덕여학교가 아닌 혜화학원이었다. 배우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학교생활보다는 무대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했다. 오빠 창운에게 다시 무대에 서고 싶다고 고백했고 함흥의 문수성 극단에 들어갔다. 빼어난 용모에, 뛰어난 노래와 춤 솜씨, 신일선은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아리랑>은 엄청난 흥행과 함께 주연배우였던 나운규, 신일선을 조선 제일의 스타로 만들었다. 이 영화는 만들어진 뒤 10년이 넘도록 이 땅의 도시와 시골, 구석구석에서까지 상영됐다. 이후 민요 아리랑은 국민의 노래가 되어 전국에서 불렸고 토월회를 비롯한 여러 극단에서는 <아리랑>을 무대에 올려 공연하기도 했다.

<아리랑>이 만들어진 1926년 한해, 신일선은 나운규가 만든 <풍운아>(조선키네마프로덕션)와 이경손이 만든 <봉황의 면류관>(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다. 1927년에는 <괴인의 정체>(김철산 연출), <들쥐>(조선키네마프로덕션, 나운규 연출), <금붕어>(나운규프로덕션, 나운규 연출), <먼동이 틀 때>(계림영화사, 심훈 연출)에 출연했다. 1926년과 27년, 두 해 동안 제작된 한국영화가 총 16편이었는데 신일선이 총 7편의 영화에 주연을 맡았다. 한마디로 신일선의 최전성기였던 것이다.

신일선의 인기가 넘치다 보니 이 16세의 소녀에게 몸이 달은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팬레터가 쌓이고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사람도 생겼다. <봉황의 면류관>을 만든 이경손도 가슴앓이를 심하게 했고, 박덕양이라는 사람은 짝사랑을 심하게 한 나머지 기관차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신일선은 1927년 음력 9월, 돌연 호남의 부자 양승환과 결혼했다. 그녀의 오빠가 연극배우 심영의 꾀임에 빠져 양승환에게 영화 출자금 명목의 거액을 받고 그녀를 시집보낸 것이다. 결혼은 결국 파국으로 끝났다. 결혼 3개월만에 양승환의 본처가 애를 안고 나타났고, 양승환은 미두에 손을 댔다가 사기꾼들의 농간에 빠져 전 재산을 날렸다. 신일선은 빈손인 채로 시동생 집에 얹혀 살게 됐다. 그녀는 1934년, 자살을 기도했다. 하지만 죽지 못했다. 그녀는 친정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남편이 없는 틈을 타 서울로 도망했다.

신일선이 다시 배우로 돌아왔다. 그동안 영화계도 많이 바뀌었다. 영화왕 나운규는 그 명성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우선 신일선은 레코드를 취입했다. 일본서 위문공연도 했다. 1934년 <청춘의 십자로>(안종화 연출)로 영화에 컴백했다. 이어 <은하에 흐르는 열정>에도 출연했다. 하지만 전국을 들썩이던 그 옛날의 인기는 회복할 수 없었다.

1936년, 나운규는 폐병에 시달리면서도 재기 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조선 최초의 유성영화 제작에 착수한다. <아리랑 3편>이었다. 이 작품에는 나운규와 그의 죽마고우인 윤봉춘, 마지막 애인인 현방란, 그리고 전택이, 신일선이 나왔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필우가 만든 <춘향전>에 밀려 최초의 유성영화라는 타이틀도 놓쳤고 흥행에서도 실패했다. 거기에 평단의 혹평에 시달렸다. 당시 매일신보에서는 "신일선의 재기는 석일의 발랄했던 신선미를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 그 평면적인 연기도. 그래도 재기를 꾀하는 것이 일종 연민의 느낌을 주었다"고 혹평했다.

조선예술가극단 단장 문수일이 찾아왔다. 평양공연에 '신일선 무대출연'이라 허위선전을 한 것이 들통 나 극단이 해산직전에 몰린 것이다. 신일선은 과거의 인연을 생각해 평양으로 떠났다. 평양에는 그녀를 마중하기 위해 극단단원들이 역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신일선은 대본을 읽고 바로 무대에 섰다. 관객은 열광했다.

1937년 신일선을 스타로 만들어 준 나운규가 타계했다. 그 다음해 신일선도 연예계를 떠났다. 그녀는 짧게나마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남편이 죽어 자식들과 함께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군대에서 죽었고, 큰 아들이 출장간 사이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큰아들과도 헤어지게 됐다. 신일선은 피난 중 정착한 평택에서 행상을 하며 어렵게 살았다.

1957년, 나운규 타계 20주기를 맞아 <아리랑>이 리메이크됐다. 연출을 맡은 김소동은 신일선을 출연시키기 위해 신문광고를 냈고, 윤봉춘은 신일선을 만나 설득했다. 설득 끝에 그녀는 단역으로 <아리랑>에 출연한다. 그녀는 영화 출연을 계기로 헤어졌던 큰 아들과 만났다.

이후, 그녀는 식당을 하면서 어렵게 생활을 꾸려갔고, 몸이 좋지 않자 한 암자에 들어가 생활했다. 신일선은 대중의 기억에서 잊혀 진 채로 1990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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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스타 5] '눈물의 여왕' 전옥 ~ 백조처럼 살고자 했던 '눈물의 여왕'

 

1927년 <아리랑>의 여주인공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신일선이 전남 화순의 부자 양승환과 조선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독립해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첫 작품 <잘 있거라>(1927년)를 준비하고 있던 나운규에게는 자신의 영화에서 여주인공을 도맡았던 신일선의 공백이 급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운규는 <들쥐>(1927년)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던 전옥을 신일선 대신 출연시키기로 한다.

사슴 같은 눈에 콧날이 오뚝하여 이목구비가 뚜렷한 전옥은 당시 16세로, 나이는 어렸지만 토월회 무대에 섰고 <낙원을 찾는 무리들>(황운 연출·1927)에서 주연을 맡은 경험도 있었다. <잘 있거라>에 출연한 그는 돈에 팔려 부호에 시집가는 황순녀 역을 능숙하게 잘 해냈다.

전옥은 곧 신일선을 대신해 나운규 프로덕션의 대표 여배우가 되었고 연이어 <옥녀>(1928), <사랑을 찾아서>(1928)에서 주연을 맡으며 스타의 길을 걷는다.

전옥은 1911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전덕례다. 영생중학교 2학년 때 가세가 기울자 집에서 그녀를 시집보내려 했다. 배우가 되고 싶어 극단을 기웃거렸던 그는 부모를 설득해 오빠 전두옥과 함께 서울로 내려갔다.

전옥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스타로 있던 토월회 문을 두드려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 <망루의 결사대>에 출연한 전옥


기회가 찾아왔다. 1925년 토월회 창립 2주년 기념공연 <여직공 정옥>과 <농중조>가 광무대에서 상연되던 어느 날 <여직공 정옥>에서 주인공으로 연기를 하던 석금성이 관객이 던진 사과에 배를 맞았다. 임신 중이던 석금성은 졸도했고 그녀를 대신하여 전옥이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전옥은 다음 공연인 <일요일>에서도 석금성을 대신해 역을 맡았다. 이 공연에서 흥분한 전옥이 "구주대전이 군국주의를 타파한 지가 오래되었다"는 삭제된 대사를 해버리는 바람에 공연은 중단되고 그는 경찰서에 끌려가 밤새 시달렸다.

전옥은 토월회 무대에서 착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극단이 갑자기 해산하게 되었다. 1926년 2월 박승희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주요 단원들이 극단을 탈퇴하면서 공연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녀는 영화 일을 하고 있는 오빠를 따라 무대를 떠나 영화로 자리를 옮겼다.

전옥은 앞서 말한 대로 나운규의 작품에 연이어 주연을 맡으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나운규가 자신의 애인인 기생 유신방을 <사나이>(1928), <벙어리 삼룡>(1929), <아리랑 후편>(1930)에 주인공으로 기용하면서 전옥은 영화를 떠나 다시 무대로 옮겼다.

1928년 17세의 전옥은 오빠의 전문학교 시절 친구이자 가수,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강홍식과 결혼한다. 그녀는 남편 강홍식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에서 노래를 생방송했고 방송극에도 출연했다.

1929년에는 다시 문을 연 토월회의 무대에 섰으나 이내 토월회가 문을 닫자 지두한이 세운 조선연극사의 무대에 섰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게 만드는 독백으로 유명했으며 비극의 여인 역을 잘 해 '비극의 여왕',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30년대 전옥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많은 음반을 발표했다. 이때 발매된 그녀의 음반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발표한 여러 노래들과 <항구의 일야>로 대표되는,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을 레코드에 담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중 1934년 남편 강홍식이 발표한 <처녀총각>은 10만장이라는 엄청난 양이 팔렸다. 큰 돈을 번 강홍식은 한 일본여자와 바람이 나서 가정을 떠났고 해방 후 월북했다.

그녀는 라미라 가극단에서 나운규의 <아리랑>을 각색한 <아리랑>(1943)을 비롯해 많은 가극을 공연했다. 가극에 출연하면서 그녀는 다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 일제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 영화계는 친일영화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복지만리>(1941), <망루의 결사대>(1943), <병정님>(1944)이 당시 그녀가 출연한 친일영화다.

 

 

해방 후 전옥은 전국순회공연을 하던 남해위문대를 백조가극단으로 개칭하여 악극을 공연했다. 그녀는 평생 백조처럼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극단의 이름도 백조가극단으로 정한 것이었다.

당시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1부에 전옥이 나오는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가 공연됐고, 2부에는 버라이어티쇼로 고복수, 황금심 같은 유명 가수들의 무대로 구성되었다. 수많은 악극단이 명멸했던 그 당시, 전옥의 백조악극단은 모든 면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전쟁 중에도 계속되었다. 이즈음 전옥은 극단의 살림을 맡던 일본 유학출신 최일과 재혼했다.

50년대 중반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전옥은 다시 영화로 눈을 돌린다.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1957), <눈나리는 밤>(1958), <목포의 눈물>(1958)을 영화로 만든다.


50년대 후반 영화가 양산되기 시작하자 전국의 극장이 영화관으로 바뀌어 갔다. 이와 더불어 전국의 악극단은 자연 소멸의 위기를 맞는다. 백조가극단은 주력을 영화로 바꾸었다. 1960년 전옥과 최일은 백조가극단을 백조영화사로 변경했다. 하지만 1962년 영화법이 개정되어 군소영화사들이 퇴출되면서 백조영화사도 문을 닫았다.

 

▲ 나운규가 만든 <옥녀>의 스틸사진


60년대 이후 전옥은 무대와 다른 모습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평론가 변재란은 전옥이 <고려장>(김기영 연출·1963)과 <쌀>(신상옥 연출·1964)에서는 무당역으로 신기 어린 카리스마를, <연산군>(신상옥 연출·1962)에서는 인수대비역으로 강력한 모성과 뒤틀린 권력욕을, <육체의 문>(이봉래 연출·1965)에서는 시골처녀를 팔아넘기는 포주역으로 악독한 모습을 연기해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과 다른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한국영화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독특하다고 평가했다.

1969년 10월 전옥은 고혈압과 뇌혈전 폐쇄증으로 5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자식들은 남과 북의 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었다. 영화배우 최민수의 모친인 배우 강효실과 북한의 대표적인 배우 강효선이 그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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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스타 6] 영화배우 주인규 ~  영화로 혁명을 꿈꾼 사나이

 

스탈린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흐루시초프는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의 실정과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은 공산권에 큰 충격과 함께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해방 후 소련에서 북한으로 온 소련파는 흐루시초프의 변화된 노선을 따라 모택동의 지원을 받는 연안파와 힘을 합쳐 남로당 계열의 몰락으로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한 김일성에 대한 비판을 계획했다.

이들은 1956년 조선노동당 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와, 전후 복구사업에 관련된 제반 정책에 대해 김일성의 책임을 공식적으로 제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김일성을 숙청하려는 시도는 실패하였고 뒤이어 김일성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소련과 중국정부의 간섭에도 김일성은 소련파, 연안파에 대한 숙청을 2년에 걸쳐 천천히 치밀하게 진행하였다.

소련출신으로 정률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의 문화선전성 제1부상으로 활동하다 종파청산 당시 소련으로 망명했던 정상진은 자신의 수기 <아무르 만에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에서 해방 직후부터 8월 종파투쟁까지 그가 교유했던 문학, 예술인들을 회고하고 있다.

그 수기에는 1956년 9월, 초대 국립영화촬영소장이며 초대 영화인동맹 위원장이었던 주인규가 8월 종파사건으로 조사를 받던 중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였다고 짧게 기록하고 있다. 초기한국영화의 선각자이자 북한영화의 토대를 닦은 주인규의 최후가 정신적 고통을 견디지 못한 자살이었다는 점은 씁쓸하다 못해 비극적이다.

베일에 가려진 영화배우 '주인규'의 삶

주인규의 삶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6.25전쟁 시 강홍식과 함께 서울의 영화인들을 북으로 데려간 장본인이었으므로 남한에서는 오랫동안 언급이 불가능한 인물이었고, 북한에서는 8월 종파투쟁으로 자살한 후, 복권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북한 양쪽에서 그의 이름은 빈 공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주인규는 1901년경 함흥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주경팔은 시골의 탄탄한 부자였으며, 동생은 태평양노조사건으로 함께 체포된 주선규이다. 1927년 당시 주소는 함흥군 함흥면 하서리 212번지였다. 1919년경 한 살 많은 이인동과 결혼했으나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

1927년 11월 17일 매일신보에는 주인규의 이혼소송에 관한 기사가 게재되었다. 이혼의 원인은 부인 이인동이 시집에 들어가 살기를 거부해서 생긴 것이었다. 이인동은 1922년 5월 만병수(萬病水)라는 약을 다량 복용하여 자살을 기도하여 놀란 시아버지가 6개월 뒤 사망하였고 몇 해 뒤에는 친정에서 첫째 아이를 낳은 후 시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해산 5개월 뒤 아이만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주인규가 영화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922년 함흥에서 발족한 극단 예림회에 가입해 문예부장 안종화를 만난 것이 기회가 되었다. 예림회는 지두한, 서정익, 박정걸 등 동경유학 출신들이 함흥에 세운 연극단체였다. 예림회에는 훗날 한국영화의 선각자로 손꼽히는 인물들인 안종화, 주인규, 김태진, 그리고 나운규가 있었다.

1924년 예림회는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서울이 고향인 안종화는 함흥을 떠나 무대예술연구회의 공연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안종화를 배웅하기 위해 세 명의 친구들이 방석만한 엿을 들고 함흥역에 모였다. 그 친구들이 바로 주인규, 김태진, 나운규였다.

부산으로 떠난 안종화는 함흥의 친구들에게 부산으로 내려오라고 연락했다. 안종화의 연락을 받고 김태진이 제일 먼저 내려왔고 얼마 안 있어 주인규가 내려왔다. 안종화가 있던 무대예술연구회원 전부가 일본인이 세운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영화를 찍게 되었는데 안종화가 함흥의 친구들을 잊지 않고 불렀던 것이었다.

<개척자>에서 처음으로 비중 있는 역할을 맡다

주인규는 함흥의 친구들과 함께 월 11원의 적은 돈을 받는 연구생으로 월 10원의 식비를 물며 감독으로 있던 윤백남의 집에 기거했다. 얼마 안 있어 서울에 있던 나운규도 부산으로 내려왔다. 주인규는 그곳에서 일본인 왕필렬이 연출한 <해의 비곡>(海의 悲曲)과 윤백남이 연출한 <운영전>(雲英傳)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운영전>이 흥행에 실패하자 윤백남은 자신의 집에 기거하던 연구생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백남프로덕션을 설립한다. 주인규도 따라 올라왔다. 영화제작비가 없는 백남프로덕션은 막막할 뿐이었다. 그때 주인규가 1000원을 내어 놓았고 주인규의 동향 친구 K도 1000원을 내놓았다.

주인규가 가지고 온 돈으로 영화제작이 시작되었다. 흥행을 고려하여 <심청전>을 고른 윤백남은 연출을 이경손에게 맡겼다. 심봉사로 나온 나운규의 연기가 좋았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윤백남은 일본에서 흥행을 해보고자 <심청전>을 가지고 일본으로 떠나며 이광수 원작 <개척자>를 다음 작품으로 정했다.

<개척자>는 이경손이 연출을 맡았고 처음으로 주인규가 비중 있는 역을 맡았다. 주인규가 맡은 역은 젊은 화학자 김성재역으로 화가 민은식을 사랑하는 동생 성순을 자신의 연구비를 후원하는 변철학에게 시집보내려다가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역이었다.

이른 봄에 일본으로 떠난 윤백남은 여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개척자>는 혹서로 네거필름이 손상되었다. 채무자들의 빚 독촉이 심해지자 주인규를 비롯하여 백남프로덕션에 남은 사람들은 <개척자>를 상영하여 빚을 청산하기로 하고 손상된 필름이나마 상영하기로 결정하였다.

<개척자>는 1925년 7월 17일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개봉 첫날부터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서울 시내가 온통 물에 잠겼다. 극장에 관객은 십수 명에 불과했다. 얼마 뒤, 단성사 뒤 여인숙에서 백남프로덕션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개척자>에 이어 <아리랑>서도 '악역' 맡은 주인규

 

▲ <아리랑> 제작 기념 사진. 앞줄 중절모 쓴 이가 주인규 그 왼편이 나운규, 오른편이 김태진


백남프로덕션 해체 후, 이경손, 나운규, 김태진, 이규설 등은 조일제가 만든 계림영화협회에 합류했으나 주인규만은 두문불출 하고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일 년의 공백기를 거쳐 그가 스크린에 얼굴을 내민 것은 그 유명한 <아리랑>에서였다.

1926년 2월, 경성 본정에서 모자점을 하던 요도라는 노인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세웠다. <장한몽>이후 지리멸렬한 상태에 있던 계림영화협회의 일부 영화인들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으로 옮겨와 영화를 만들었다. 협회의 첫 번째 작품은 이규설이 만든 <농중조>였고 다음 작품은 나운규가 만든 <아리랑>이었다.

주인규는 <개척자>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리랑>에서도 악역을 맡았다. 주인규가 맡은 역은 여주인공 최영희를 겁탈하려는 청지기 오기호역이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악역 전문배우로 명성을 얻는다.

<아리랑>에서 배우들은 최적이라고 평가받는 자신의 캐릭터를 구현해 내었다. 장난기 가득한 외모의 주인규는 지주에게 아부하고 농민들을 괴롭히는 얄미운 청지기역을, 지금의 유오성과 같이 선 굵고 폭발적인 에너지를 갖은 나운규는 살인을 저지르는 광인의 역을, 곱상한 외모의 귀공자 타입인 김태진은 여주인공의 애인 역을, 어수룩한 외모의 이규설은 가장 그럴듯한 조선 노인의 모습을, 지금의 문근영과 같이 귀엽고 고운 외모의 신일선은 여주인공 역을 맡아 훌륭히 소화해 내었다.

 

남북 모두에 잊혀진 존재로 남은 '주인규'

 

<아리랑>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나운규는 다음 작품으로 <풍운아>를 만든다. 이 작품에서 주인규가 맡은 역은 기생 혜옥에게 빠져 부인 영자를 버리려다 영자가 쏜 총에 맞아죽는 안재덕 역이었다. 이 작품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연이은 성공에 나운규는 자만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주인규를 비롯한 함흥출신 김태진, 이규설 등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떠났다. 주인규는 김태진과 함께 심훈과 강홍식이 있는 계림영화사로 옮겨갔다.

계림영화사에서는 주인규는 심훈이 연출하는 <먼동이 틀 때>에 출연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영화배우 최민수의 외조부이며 당대 최고의 미남스타인 강홍식이었다. 주인규와 강홍식은 이 영화에서 함께 연기한 후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역사적 격변기를 함께 헤쳐 나가는 동반자적 관계로 발전한다.

<먼동이 틀 때>가 흥행에 실패하자 계림영화협회는 문을 닫았다. 주인규는 그 사이 극동영화사의 <낙원을 찾는 무리들>에 출연했다. 이즈음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독립하여 나운규프로덕션을 차려 나왔다. 나운규의 독선에 반대하여 회사를 나왔던 주인규, 김태진, 이규설 등이 다시 회사로 들어가 <뿔 빠진 황소>를 만들었지만 영화는 실패했고 회사는 후속작 제작을 포기했다.

1932년, 적색노조 활동으로 동생과 함께 체포돼

주인규는 아내와의 이혼 문제로 영화계를 떠나 고향 함흥으로 돌아갔다. 1920년대 말과 30년대 초는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던 시기로 특히 주인규의 고향 함흥은 중화학 공장이 밀집되어 있어 적색노조가 활발히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2년의 공백 후, 주인규는 <도적놈>이라는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계로 돌아왔다. 이 작품의 연출은 나운규의 절친한 친구였으나 나운규의 방탕한 생활에 등을 돌린 윤봉춘이 맡았다. 대구의 부호 장두한이 투자한 대구 대동영화사에서 만든 이 영화는 계급문제를 다뤘으나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 1932년 6월, 동아일보에 실린 주인규 체포 기사


단, 주인규의 연기에 대해서는 카프 출신 윤기정이 조선일보에 실은 평에서 "고철수로 분한 주인규 동무는 이번에도 믿음성 있는 연기를 발휘하였다. 대장간에서 일하는 발달된 근육은 힘의 표현 같다. 노동자 역으로 적역이다"라는 찬사를 하였다.

<도적놈> 출연 후, 주인규는 고향을 떠나 모스크바로 떠났지만 국경을 넘지 못하고 중도에 돌아와야 했다. 모스크바의 쏘브키노를 목표로 영화수업의 길을 떠난 것이었지만 실상은 공산당 간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소련으로 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함흥질소회사에 위장 취업한 주인규는 육체노동자로 있으며 적색 노조활동을 했다. 또한 미국서 영화공부를 했다는 황운과 함께 함흥에 길 안든 영화사를 만들어 불합리한 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을 그린 <딱한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제작한다.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인 1932년 6월 19일, 흥남 적색노조의 수뇌 주인규와 그의 동생 주선규가 체포되었다. 이들은 적색노조사건이 터지자 신흥으로 몸을 피했지만 정사복 경찰관 10여명이 자동차를 타고 추적한 끝에 체포된 것이다. 1934년 10월 재판에서 주인규는 징역 3년, 주선규는 징역 5년이 언도됐다.

해방 직후, 함경도 검찰소 소장으로 활동

1938년 출소한 주인규는 영화배우로 다시 스크린에 나섰다. 고려영화협회의 <복지만리>에 출연한 것이다. 고려영화협회에는 예전의 친구들이 많았다. 제작자인 이창용은 과거 학생 신분으로 영화판을 기웃거렸던 인물로 주인규가 출연한 <아리랑>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 촬영조수를 하다 일본서 영화공부를 하고 돌아온 사람이었다.

감독을 맡은 전창근 역시 상해로 떠나가기 전 주인규가 나온 영화에서 연구생으로 영화수업을 받던 젊은이였다.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오랜 추억이 있는 강홍식, 윤봉춘, 이규설 등이 이 작품에서 함께 했다.

1939년 2월, <복지만리>의 촬영에 참여했던 주인규, 박창환, 심영, 유현, 이재현 등이 중심이 되어 고려영화협회 직속 극단인 고협을 창단했다. 이들은 당대 거부 중 한 명인 한학수의 도움으로 경기도 고양에 고협촌을 만들어 집단생활을 했으며 산양목장을 운영, 산양유를 내다 팔아 운영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이 고협촌의 촌장은 주인규의 동생 주선규였고, 주인규는 경리를 맡았다.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의 통제가 극도로 달했던 일제 말기, 조선 내 모든 영화사는 총독부 주도로 만들어진 조선영화사로 통합되었고 영화인들은 심사를 통해 이 회사에 입사하였다. 주인규는 사상범으로 투옥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통제 회사에 입사하지 못했지만 영화출연 요청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 시대를 살았던 다른 영화인들과 마찬가지로 주인규 또한 친일영화에 출연했다. 고려영화협회와 일본 동보영화사가 합작으로 만든 <망루의 결사대>에 출연했고, 통제회사인 조선영화사에서 만든 방한준 연출의 <거경전>과 최인규 연출의 <태양의 아들들>에 출연했다. 그리고 해방을 맞았다.

일왕이 항복을 선언했지만 함경도에서는 소련군과 일본군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함흥은 소련군이 일본군과의 전투 끝에 해방시켰다. 적색노조가 활발히 활동하던 함경도에서는 소련군에 의해 해방 된 직후, 청진감옥에서 풀려난 정치범들과 지하의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 자치조직을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다. 태평양노조사건으로 투옥 경험이 있는 주인규도 함흥 검찰소 소장으로 활동하였다.

남과 북 모두에 잊혀진 존재로 남아

1946년 주인규에게 북한영화의 건설이라는 큰 임무가 맡겨진다. 소군정의 도움으로 영화촬영소를 만들고 북한 각지에 흩어져 있던 영화인들을 평양으로 모았다. 주인규는 1946년 10월 만들어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 산하 영화동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47년 2월, 건설이 시작된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장이 되었고, 그해 문예총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주인규와 여러 영화에서 함께 출연했으며 깊은 우정을 나눴던 강홍식은 1949년 북한 최초의 극영화 <내고향>을 연출하였다. 주인규도 1950년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을 연출한다.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의 개봉을 전후하여 전쟁이 터졌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3일만에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되었다. 주인규와 강홍식은 서울의 영화인들을 소집하고 교육시켜 평양으로 데려가는 역할과 전선에 종군영화인들을 투입하여 전황을 기록으로 남기고 인민군을 위안하는 역할을 맡은 총 책임자였다. 서울에서 이러한 사업을 하던 중 전세는 역전되어 후퇴를 하게 되었다.

주인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1951년 개편된 영화동맹에서 아무런 직책도 맡지 못하였다. 파국의 시작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북한에서는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계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 적색노조 계열의 주인규의 고난은 계속되었다.

특히 1956년 '8월 종파사건'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함흥에 있으면서 자연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정률, 기석복과 같은 소련출신 조선인들과 교분을 쌓았던 것이 그를 사지로 몰아갔다. 종파숙청이 한창이던 1956년 9월 주인규는 자살한다.

파란만장한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주인규의 마지막은 대부분의 영화와는 달리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운명이 주인공을 파국으로 이끄는 비극이었다. 그가 연기했던 많은 영화에서처럼 비참한 죽음이 두 팔을 벌려 그를 맞이하였다.

영화배우로, 혁명가로 북한영화의 건설자로 쉼 없이 달려왔지만 그는 이제 남과 북 모두에서 잊혀진 존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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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스타 7] 영화배우 차홍녀 ~  '홍도'로 살다 간 여배우 차홍녀

 

1940년 12월, 철원극장에서의 공연을 끝으로 북선 순회공연을 마친 극단 아랑의 단원들은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철원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원들은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옷깃을 여몄다. 공연직후 무대 뒤에서 쓰러졌을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던 여배우 차홍녀는 거적을 쓰고 웅크리고 있는 거지를 발견하고 1원을 적선했다.

기차에 올랐다. 열이 나기 시작한 차홍녀는 서울에 도착 할 때쯤 헛소리까지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온몸에 발진이 돋아 꼭 괴물처럼 보였다. 마마라고 불리던 천연두에 걸린 것이다. 북선 순회공연으로 지친 상태에서 병에 걸린 거지와의 접촉으로 불치의 병이 옮아 온 것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연출가 박진은 차홍녀의 집에 찾아가 천연두에 걸린 그녀를 안고 통곡했다. 박진은 차홍녀의 때 묻지 않은 모습과 착한 마음씨가 마음에 들어 지방극단을 전전하던 그녀를 동양극장으로 데려왔고 그곳에서 스타로 키워낸 연출가였다. 죽음을 기다리는 차홍녀를 바라보는 박진은 제 자식이 죽은 것마냥 원통한 심정이었다.

며칠 뒤 차홍녀는 불과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착한 마음씨로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되었지만 그 착한 마음으로 인해 세상을 너무 일찍 떠나간 것이었다. 홍제동 화장터로 가는 운구행렬 끝자락에는 그녀의 착한 마음씨에 감동한 거지들이 뒤를 따라가며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짧은 생을 살았지만 무대 위에서 최고의 스타였던 차홍녀. 생전 그녀가 누렸던 인기에 비한다면 지금 우리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차홍녀를 최고의 배우로 키운 연출가 박진과 연극배우 고설봉만이 그들의 회고록에서 그녀를 추억하고 있을 뿐이다.

 

▲ 동양극장 시절 배우 차홍녀와 그녀를 최고의 배우로 만든 연출가 박진



22세, 꽃다운 나이에 세상 떠난 차홍녀

차홍녀는 1918년 경기도 연천의 넉넉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언니는 연화라는 이름의 기생이었다. 의정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친지의 권유로 극단에 들어갔지만 여배우로서 빼어난 미모가 아니었기에 큰 주목을 끌지 못했다.

 

▲ 서대문 근처에 있었던 동양극장. 이곳에서는 1년내내 연극 공연이 끊이지 않았다.


희락좌, 신무대, 황금좌 등의 극단을 전전하다 동양극장의 연출가 박진의 눈에 들어 1935년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 청춘좌의 창단 단원으로 입단하게 되었다. 박진은 차홍녀의 첫 인상을 "흙 묻은 김장 무 같아서 두들겨 만들기 쉽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청춘좌에는 기라성 같은 여배우들이 있었다. 스크린과 무대에서 최고의 여배우로 추앙받던 김소영, 연기 하나는 최고라는 평가를 듣던 김선영, 그 외에도 당대 최고의 여배우라고 손꼽히던 고참 여배우 김선초 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방극단 출신에 경험도 미천한 차홍녀는 자연 주눅들 수밖에 없었다.

차홍녀는 일본명작주간에 상연된 <영아살해>에서 처음으로 주역을 맡았다. <영아살해>는 날품팔이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먹지 못해 젖도 안 나오고, 먹으려면 일을 하러나가야 되는데 젖먹이 아이 때문에 일하러 나가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끝내 아기를 살해하고 순사에게 울며불며 이 사실을 이야기한다는 내용의 단막극이었다. 차홍녀의 주역으로 첫 무대는 성공적이었다. 공연 내내 무대 위에서 차홍녀의 연기를 지도했던 박진은 차홍녀에게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격려했다.

차홍녀는 박진의 지도로 짧은 기간에 청춘좌의 중심 배우로 성장한다. 특히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만 맡는다는 <춘향전>의 춘향 역을 맡으면서 많은 인기를 얻게 된다. 1936년 1월에 상연된 이 작품에서 이도령 역은 황철, 방자 역은 심영이 맡았다. <춘향전>은 이도령 역을 맡은 황철이 실제 나귀를 타고 입장하자 관중은 큰 박수를 쳤고 박수 소리에 놀란 나귀가 관중석으로 뛰어 들어간 소동을 일화로 남기고 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스타가 되다

<춘향전>에서의 차홍녀의 인기는 전주곡에 불과했다.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상연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극장에는 냉방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여름이 비수기일 수밖에 없었다. 1936년 7월, 동양극장의 간부들은 여름을 무사히 넘기기 위한 방법을 고심한 끝에 사극을 내어 놓기로 했다. 첫 번째 작품으로 월탄 박종화가 쓴 <황진이>를 각색한 <명기 황진이>를 무대에 올렸다. 비수기임에도 공연이 열린 7일 동안 많은 관객이 들어찼다.

다음 작품으로 춘원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를 각색한 작품이 공연됐다. 이 작품을 보려고 지방의 유생들까지 단체로 몰려와 극장 바닥은 땀으로 흥건할 정도로 초만원을 이뤘다. 그러나 이왕직에서 공연중지를 요구해 부득이 8일 만에 공연을 끝내야 했다. 다음에 올릴 작품이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정보다 일찍 막을 내린 것이다.

지배인 홍순언은 무명의 극작가 임선규가 동양극장에 입사할 때 제출한 극본을 끄집어냈다. 박진과 최독견이 임선규의 극본은 지독한 신파라며 반대했음에도 대안이 없었다. 공연을 올리기로 했다. 최독견은 기생 얘기가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것 아니겠느냐며 제목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고 고쳤고 바뀐 제목으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임선규는 동양극장의 대표 배우 황철과 차홍녀를 염두에 두어 두고 이 작품을 썼다. 그래서 주인공 이름도 철수, 홍도로 지은 것이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오빠 철수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주인공 홍도가 오빠의 친구 광호를 만나 결혼을 했으나 시집의 무시와 괄시를 받고 종국에는 남편에게도 버림받게 되어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남편의 새로운 약혼녀를 칼로 살해, 순사가 된 오빠의 손에 잡혀간다는 내용이었다.

 

▲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신문광고

 

황철과 차홍녀가 연기한 이 신파극은 당시 경험해 보지 못한 대단한 흥행을 하였다. 전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공연을 보러 동양극장 앞으로 몰려왔으며 서대문 경찰서에서 동원된 경관들이 질서 유지를 위해 관객을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 특히, 공연기간 내내 서울 시내의 기생들이 떼로 몰려왔는데 홍도와 자신을 동일시 한 기생들의 눈물로 극장은 연일 울음바다가 됐다. 장안의 기생들을 구경하려 극장을 찾은 한량들도 많았다. 서울에서만 수십 번의 재공연이 있었지만 만원관객이 아닌 적이 없었고 지방공연도 연일 대 성공이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동양극장의 마르지 않는 돈줄이었다. 무명의 극작가 임선규는 일약 스타 작가가 되었으며 황철, 차홍녀의 인기는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더욱이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라는 이서구의 노랫말은 전국방방곡곡 울려 퍼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동양극장의 지배인 홍순언은 고려영화사와 손잡고 청춘좌의 대표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영화로 제작할 계획을 세운다. 고려영화협회의 기술진과 동양극장의 배우들이 어우러지면 배우들이 힘들게 전국을 돌며 공연할 필요 없이 돈을 긁어모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1939년 3월 17일,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동양극장과 부민관에서 동시 개봉했다. 임선규가 자신의 극본을 시나리오로 각색했으며 동양극장 무대에 섰던 배역 그대로 출연했다. 홍도역의 차홍녀, 철수역의 황철, 시어머니역의 김선초, 시누이역의 김선영, 시아버지역의 변기종이었다.

연출과 편집은 영화 초기부터 카메라맨으로 이름이 높던 이명우가 맡았다. 이명우는 1935년 조선 최초의 토키영화(유성영화) <춘향전>을 감독했던 인물이었다. 그 외 스태프도 <춘향전>을 만든 이명우 사단으로 채워졌다. 촬영은 이명우의 처남인 촬영기사 최순흥, 조명과 현상은 이명우의 제자 유장산, 녹음은 조선 최초의 카메라맨인 이명우의 형 이필우였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1939년 최악의 영화로 꼽혀

▲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스틸사진. 왼쪽부터 남편역의 김동규, 시어머니역의 김선초, 홍도역의 차홍녀

 

최초의 토키영화인 <춘향전>은 단지 스크린 속의 배우가 조선말을 한다는 것이 화젯거리여서 작품의 질에 상관없이 흥행이 됐지만 4년이 지난 1939년, 관객은 질적으로 충실한 영화를 기대했다. 영화로 만들어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녹음이 실패하는 바람에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영화가 되었다. 평단과 관객의 시선은 싸늘했다. 영화배우이자 극작가인 김태진은 주저 없이 이 작품을 1939년 최악의 영화로 꼽았다.

무대 위에서의 과장된 연기에 익숙한 배우들은 카메라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연기 또한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영화평에는 "연기에 있어서는 차홍녀 양이 그중 나은 편이요, 황철 군은 표정이 너무 딱딱하고 그늘이 없다. 김선영 양은 불량성을 띠인 핏기 없는 모던 걸로 밖에 안 보이고 김선초 여사는 능란한 도가 지나치지 않았을까?"라며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혹평했다.

동양극장에서 4년간 찬사만을 받아왔던 차홍녀에게 실패한 영화에 출연은 좋은 경험이 되었다. 그러나 제작자인 동양극장은 4000원이라는 큰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

얼마 후, 흥행의 귀재라고 불리던 동양극장 지배인 홍순언이 죽었다. 최독견이 그 뒤를 이어 지배인이 되었으나 경영은 날로 어려워졌다. 채무자들에게 시달리던 최독견은 중국으로 도망가고 동양극장 주인이었던 배구자는 채권자들에게 동양극장을 넘겼다.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인 청춘좌 소속 유명배우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폭발했다. 배우들이 극장의 채무관계 때문에 소유권이 바뀌듯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황철을 중심으로 동양극장을 탈퇴한 이들은 대숲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죽은 아랑의 일편단심의 마음을 기리는 뜻에서 새로운 극단의 이름을 아랑으로 정했다. 극단 아랑의 주요 무대는 동대문 근처에 있던 제일극장이었으며 연출가 박진과 극작가 임선규를 비롯하여 황철, 차홍녀, 김선초 등 동양극장의 유명배우들이 망라되었다.

해방 전 최고의 인기 배우 황철과 차홍녀

 

극단 아랑은 배우들이 만든 극단이기에 확실한 경영주가 있었던 동양극장 시절처럼 느긋하게 연기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방 순회공연도 많이 다녀야 했다. 특히 차홍녀가 출연하지 않는 공연은 표가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연극에 주역으로 출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강행군이었다.

1940년 겨울, 극단 아랑은 북선 지역인 함경도, 평안도로 순회공연을 떠났다. 마지막은 강원도 철원의 철원극장에서 공연된 <청춘극장>이었다. <청춘극장>의 주인공을 맡은 차홍녀는 1년여 동안 강행군으로 지칠 데로 지쳤다. 공연 후 무대 뒤에서 쓰러질 정도였다.

지친 그녀의 몸에 천연두 균이 파고들었다. 평소에도 몸이 허약하여 단원들의 애를 먹이던 차홍녀는 쓰러졌고 여배우로서 견딜 수 없는 흉측한 모습으로 죽었다. 사망일은 1940년 12월 24일 오전이었으며, 불과 22세의 나이였다.

해방 전 최고의 인기 배우는 문예봉도 나운규도 아니었다. 황철과 차홍녀였다. 황철은 월북했고 차홍녀는 너무 일찍 세상을 등졌기에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약 차홍녀가 천수를 누렸다면 한은진, 황정순, 최은희처럼 한국영화를 환하게 밝히는 배우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았을 것이다.

 

차홍녀와 같이 무대에서 호흡을 마쳤던 황철이 1941년 잡지 삼천리에 쓴 <곡 차홍녀군>으로 이 글을 마무리 짖는다.

▲ 동아일보에 실린 차홍녀의 부고기사

 


차홍녀군과 필자의 무대 모양을 연상한다면 누구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기생 홍도를 생각하게 되고 그의 오래비 황철수를 연상하게 될 것입니다. 또 <춘향전>의 컴컴한 옥중에서 큰 칼을 쓰고 '열녀불경이부'를 외치며 신관 사또의 골을 올리던 춘향이의 애끓는 모양을 생각하면 누더기의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춘향모와 청승을 떨든 이도령도 연상하게 될 줄 압니다.

어쨌든 홍녀군과 나와는 혹은 아내, 혹은 누이로 오라비로 남편으로 불과 두 석자도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상대를 했기 때문에 이는 곧 무대의 동지요, 또 연극의 아내요 길동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득한 먼 길을 절반도 다 못 걷고 지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많은 죽음에 어찌 슬프지 않은 죽음이 없으리오 만은 홍녀군의 죽음은 내게 있어서 보다 더 슬프고 애석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연극에서 살다가 무대에서 쓰러져 연극에서 죽었습니다. 마치 힘 있는 병사가 총을 메고 전장에 나아가 시뻘건 피를 흘리고 조국을 위하야 목숨을 바친 것과도 같이...

홍녀군이 이 세상에서는 늘 같이 연극을 하던 나를 버리고 갔으나 그는 지금 천국에서 그립던 동지들을 많이 만났을 줄 압니다. 우선 차홍녀 전에 비극의 여왕이라고 하든 이경설군도 만났을 것이요, 가까이 왕평군도 이백희도 만났으리라. 그래서 옥황상제 앞에서 연화무대에 구름을 타고 태양조명에 훌륭한 연극을 할 줄로 압니다. 어쨌든 홍녀군의 생애는 짧고 거칠었으나 가장 빛나고 가장 보배로웠습니다.

끝으로 홍녀군이여 천국에서 혹시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를 만났거든 세상에 남기고 간 아들의 문안이나 좀 전해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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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스타 8] 영화배우 황철 ~ 천부적 재능의 조선 최고의 스타 황철

 

해방 전 최고의 스타이자 한국연극사상 최고의 배우로 손꼽히는 황철.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했기에 우리에게 잊혀진 이름이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연극인들은 마치 전설 속 인물을 이야기하듯 그를 회고한다.

일례로 황철을 배우로 발탁한 변기종은 "한 달 동안 연극을 계속해도 목이 쉬지 않는 천부적 배우로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연극쟁이"라고 그를 평했다.

유민영은 원로 연극인들의 구술을 토대로 쓴 <한국인물연극사>에서 황철을 신파극 분야 최고의 배우로 꼽으며 배우로서 천부적이었고 지적 수준도 높았기 때문에 남한에 남아있었더라도 정통연극의 지킴이로 우뚝 서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무대 위에서는 제왕처럼 군림했던 황철도 스크린에서는 그 능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평생 네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가 출연한 영화는 동양극장의 유명한 레퍼토리를 그대로 영화로 만들어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실패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친일 영화인 <젊은 모습>, 북한에서 제작된 <춘향전>과 제작 도중 전쟁으로 인해 촬영이 중지된 <땅>이다.

영화배우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무대 위에서는 누구보다 뛰어났고 천부적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 평생을 부단히 노력했다. 유랑극단의 잡부에서 시작하여 북한 최고의 인민배우로 사망할 때까지 우리의 현대사가 그러했듯 그도 험난한 인생의 고비 고비를 때로는 찬사를 받으며 때로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달려갔다.

음주운전 사고가 바꿔놓은 인생

황철은 1912년 1월 12일 청양군수를 지낸 황우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고위관리를 지냈으나 가정은 어려웠다. 춘천서 성장기를 보내고 서울의 배재고보와 춘천의 춘천고보에 다녔으나 학비가 없어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황철은 돈을 벌기 위해 자동차 운전을 배웠다. 6개월간 조수로 일하며 운전기술을 배워 정식 운전사가 되었다. 춘천과 홍천 사이를 오가며 운전사 생활을 하던 중 음주운전으로 큰 사고를 냈고 이 사고가 인생을 바꿔놓았다.

차 안에는 홍천 주재소장의 딸이 타고 있었는데 교통사고로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일본인 주재소장은 황철에게 감옥에 가는 대신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은 자신의 딸과 결혼할 것을 명령했다. 내키지 않은 결혼을 한 황철은 결혼 직후 도망쳐 지방의 유랑극단인 벽우회에 들어가 황태철이란 가명을 사용하며 극단 잡역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림과 글씨에 자신 있었던 황철은 극단이 서울에 올라왔을 때 몰래 빠져나와 한 간판집에 취업했다. 그곳에서 황철은 극장의 간판 그림을 그렸는데 유명극단인 조선연극사의 간판 그림에 반해 조선연극사의 단장인 변기종을 찾아가 입단 허락을 받고 연구생이 된다. 지방 극단의 잡부로 출발 중앙무대에 진출한 것이었다.

조선연극사의 연구생으로 스타들을 바라보며 꾸준히 연습했던 황철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다. 연습 중인 <청춘난영>의 주인공을 맡은 이경환이 아편 복용으로 경찰에 잡혀간 것이었다.

1932년 10월, 황철은 이경환의 대역을 맡아 변기종, 강홍식, 신은봉, 전옥 등 쟁쟁한 배우들과 함께 주역으로 무대에 섰다. 연기는 무난했다. 이후에도 계속 주역으로 출연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최고 스타인 강홍식이 지방공연을 꺼려 지방공연에서 강홍식의 역은 황철이 맡아 했기 때문이다. 황철은 꾸준한 노력과 재능으로 조선연극사의 떠오르는 스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조선연극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연출가 홍해성이 있었다. 홍해성은 일본의 스키지(築地) 소극장에서 연극을 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스키지 소극장을 이끈 히지가타 요지(土方與志)는 모스크바에서 연극을 공부했던 인물로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술에 심취해있었다. 자연히 스키지 소극장은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술을 연마하는 도장과 같았다. 스키지 소극장 출신의 홍해성에게 사사한 황철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935년 <신라의 달> 공연이 문제가 되어 조선연극사의 단원 10여 명이 안동경찰서에 검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신라의 달>은 독립투쟁을 하는 젊은 청년과 그를 사랑하는 처녀가 주인공인 멜로드라마였다.

서울에서 아무 일 없이 공연됐던 작품인데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공연한 카프 맹원들이 검거된 '신건설 사건'으로 검열이 강화되자 지방공연 중에 갑자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조선연극사는 위축되었다. 또 조선연극사를 이끌기 위해 전 재산을 투자했고, 세 명의 딸마저 배우로 키웠던 지두한은 조선연극사의 인기 여배우인 장녀 지최순이 심장병과 폐결핵으로 쓰러지자 자식을 혹사해가면서 극단을 운영해야 할지 마음이 흔들렸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주인공 맡아

 

▲ 동양극장 전속 극단 청춘좌 단원들.

 

1935년 7월, 배구자, 홍순언 부부가 연극전용극장인 동양극장을 세웠다. 조선연극사를 해산하기로 결정한 지두한은 단원 전부를 동양극장으로 보냈다. 조선연극사의 떠오르는 스타였던 황철은 동양극장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황철은 무용가 배구자가 세운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청춘좌의 창단 단원이 되었다. 청춘좌에는 인기스타 심영이 있었다. 심영은 토월회 출신이었다. 지방의 유랑극단 출신으로 중앙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황철에게 중앙의 신극 출신 심영은 아직 넘어야 할 산이었다. 황철과 심영은 여러 작품에서 함께 주역을 맡으며 연기 대결을 펼쳤다. <춘향전>에서 황철이 이도령, 심영이 방자였고, <단종애사>에서는 황철이 문종, 심영이 성삼문이었다.

이들의 균형은 임선규 작 1936년 7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공연되면서 깨어졌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작품에 황철이 주인공을 맡았던 것이다. 이들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월급이었는데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상연 이후 황철의 월급이 심영의 월급보다 높아졌다. 황철의 독주가 시작된 것이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되는 내용인 <단종애사>가 조상을 모욕하는 내용이라는 이유로 조선왕실의 업무를 관장하던 이왕직에서 공연 중단을 요청해왔다. 공연은 갑자기 중단되었고 급하게 선택된 작품이 <사랑에서 속고 돈에 울고>인데, 임선규가 황철과 차홍녀를 염두에 두어 쓴 신파극이었다.

이 작품은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가 기생출신이라는 이유로 결혼 후 버림받고 살인을 저질러 순사가 된 오빠의 손에 끌려간다는 내용이었다. 이 작품의 엄청난 흥행으로 그간 적자 운영되던 동양극장은 흑자로 전환할 수 있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동양극장의 주된 관객 층인 기생들을 울렸다. 매회 공연이 끝나면 분장실 앞에는 홍도 역의 차홍녀를 만나기 위해 기생들이 줄을 섰으며, 극장 앞에는 철수 역을 맡은 황철을 모시기 위한 기생들의 인력거가 줄을 섰다. 차홍녀와 짝을 이룬 30년대 후반부는 황철의 최고 전성기였으며 그의 시대였다.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라는 노랫말로 세상을 울린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동양극장과 고려영화사 공동제작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1939년 3월 17일 동양극장과 부민관에서 동시 개봉되었다.

황철은 철수 역으로 영화에 데뷔했다.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출연한 이 작품은 실패작이었고 팬들의 외면을 받는다. 녹음이 잘못되어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로 동양극장은 큰 재정적 부담을 안았고, 황철 개인적으로는 승승장구하던 배우인생의 첫 실패를 맛보았다. 이즈음, 황철은 동양극장의 또 다른 전속 극단 호화선의 여배우 이정순과 결혼한다.

1939년, 동양극장의 지배인이자 배구자의 남편이었던 홍순언이 사망했다. 배구자는 자신이 운영하던 무용단의 공연을 중지하고 새로운 지배인 최독견과 함께 동양극장의 운영에 열중했다. 그러나 홍순언이 사망한 지 불과 몇 달 되지 않아 동양극장은 파산한다. 최독견은 중국으로 도망갔고 배구자는 채권단에게 동양극장을 넘겼다.

청춘좌 단원들은 동양극장의 새로운 주인을 반대하며 대거 탈퇴했다. "극단은 샀을지 모르지만 사람까지 산 것은 아니다"라는 연출가 박진의 주장에 동의하여 동양극장을 탈퇴하여 극단 '아랑'을 조직한 것이다. 최고의 스타였던 황철은 아랑의 대표가 되어 극단을 운영하게 된다.

제일극장과 동양극장의 라이벌전

아랑은 1939년 9월 27일 대구에서 <청춘극장>을 공연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황철, 차홍녀, 서일성, 박영신, 문정복 등 당대의 유명 배우를 망라한 아랑에 세인의 관심은 폭발했다.

서울 부민관에서의 창단 공연 또한 성공적이었다. 황철이 이끄는 극단 아랑은 신생 극단임에도 황철과 차홍녀라는 유명 스타와 극작가 임선규, 장치가 원우전, 연출가 박진 등 과거 청춘좌를 이끈 능력 있는 인물들로 인해 어렵지 않게 운영되었다.

아랑은 동대문 근처에 있던 제일극장을 주로 이용하였다. 아랑이 사용하던 제일극장과 서대문의 동양극장은 라이벌이 되었다.

제일극장과 동양극장의 라이벌전은 1940년 4월, 아랑의 <김옥균>과 동양극장의 <김옥균전>이 맞붙으면서 펼쳐졌다. 임선규가 여러 해 동안 다듬은 아랑의 <김옥균>은 의상, 장치비용만 8000원이 든 대작이었다. 아랑에서는 경비행기를 이용하여 서울 시내에 선전지를 뿌렸다. 황철이 김옥균 역을 맡은 아랑의 <김옥균>이 동양극장의 <김옥균전>을 흥행과 평에서 이겼음은 물론이다. 아랑은 <김옥균>으로 1940년도 극단 최고의 영예를 획득하였다.

 

친일, 월북, 그리고 인민배우

 

<김옥균>으로 최고의 해를 보내던 황철에게 한 해가 저물기 직전 암운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1940년 12월 22일 '조선연극협회'가 결성되어 아랑도 총독부의 통제 하에 움직이게 되었고, 12월 24일에는 청춘좌에서부터 호흡을 함께 맞췄던 아랑의 간판 여배우 차홍녀가 북선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천연두로 사망한 것이었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황철에게 차홍녀의 죽음은 동료를 잃은 것 이상의 아픔이었고, 조선연극협회의 가입은 씻을 수 없는 친일 부역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1941년 1월 27일 아랑에서는 일제의 국민연극인 <인생설계>를 공연했다. <인생설계>는 과학자들이 출연하여 과학의 중요성을 선전하는 연극이었다. 황철은 과학자 중 한 명을 맡아 연기했다. 배우로서 친일 부역의 시작이었다.

1942년 초에는 총독부 국책연극인 <삼대>에 출연했다. 카프 출신인 송영이 쓰고 안영일이 연출한 <삼대>는 일제의 전쟁 상대국인 미국과 영국의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저지를 악행을 고발하는 내용의 연극이었다. <삼대>의 남선 순회공연이 끝나고 황철은 영화에 출연한다.

생애 두 번째 영화 <젋은 모습> 출연

1943년 개봉된 <젊은 모습>은 황철의 생애 두 번째 영화 출연이었다. 당시는 일제의 국책영화만이 만들어지던 시절이었다. 영화의 통제는 1942년 총독부 주도로 조선 내 모든 영화사를 통폐하면서 시작되었다.

<젊은 모습>은 총독부 통제회사인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제작하고, 일본인 감독 도요다 시로(豊田四郞)가 연출한 작품이었다. 황철은 이 작품에서 학생들에게 철저한 황국신민이 되라고 가르치는 조선인 중학교 수학선생 역을 맡았다. 함께 출연한 배우는 문예봉, 복혜숙, 이금룡, 서월영, 최운봉 등 조선 영화계의 대표 배우들과 일본인 배우들이었다. 황철의 두 번째 영화는 그의 친일 경력의 결정판으로 시대를 탓하기에 씁쓸한 맛을 남긴다.

영화산업의 통제와 마찬가지로 무대예술 부문의 통제 또한 강화되었다. 총독부에서는 1942년 7월,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를 통합하여 '조선연극문화협회'를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총독부와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의 '국민연극경연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황철이 이끄는 아랑도 매회 참가했다. 참가만 한 것이 아니라 매회 상을 휩쓸어 갔다. 특히 황철은 세 번의 대회에서 모두 남자 연기상을 수상했다.

1942년 1회 대회 출품작은 김태진 작, 안영일 연출의 <행복의 계시>이었다. 무의촌을 배경으로 의료보급을 선전하는 작품이었다. 1943년 2회 대회에는 박영호 작, 안영일 연출의 <물새>를 출품했다. 어촌을 배경으로 해군 지원병제를 찬양하는 작품이었다. 1945년 3회 대회에 출품한 작품은 김승구 작 김영일 연출의 <산하무정>이었다. 순박한 산골의 삶을 따뜻하게 그린 작품이었다.

1930년대, 동양극장이 상업극단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1940년대 아랑은 당대 최고의 작가, 연출가, 배우가 어우러져 최고의 앙상블로 수준 높은 연극을 만들어냈다. 그중 친일 연극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일제 말기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아랑에서 친일 연극을 만들었다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아랑을 수준 높은 연극 단체로 만드는 데에는 극단을 이끈 황철의 힘이 컸다. 그는 낙천적이고 원만한 성격으로 단원들을 융화시켜 최고의 극단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황철에게 여자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였다. 인기스타로 여자가 끊이지 않았고, 바람기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생들과의 관계라면 당시의 관례상 의례히 넘어갈 문제였지만 선배 양백명의 아내이자 부인 이정순의 친구인 문정복과 바람이 난 것은 보통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문제는 조선연극문화협회가 나서서 문정복을 제명시키고, 황철은 그의 인기를 감안하여 시말서를 제출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여자 문제로 인해 망신을 톡톡히 당한 것이다. 황철은 후에 문정복과 결혼한다.

해방의 공간, 조선 제일의 배우 황철의 선택은?

 

1945년 8월, 해방이 됐고 아랑은 해산했다. 해방은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희망을 던져주었고 이는 여러 정당 및 사회단체의 조직화로 나타났다. 최초 해방공간의 주도권은 짧은 기간 조직화를 이룬 좌익에게 돌아갔다. 좌익연극인들은 연극건설본부, 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 연극동맹 등의 단체들을 조직하면서 목소리를 키웠다.

황철은 극작가 함세덕, 배우 서일성 등과 1945년 9월 낙랑극회를 조직했다. 창단 공연은 11월 1일 독일의 극작가 쉴러의 작품을 함세덕이 번안하고 연출한 <산적>이었다. <산적>의 성공에 힘입은 낙랑극회에서는 김사량 극본의 <호접>, 함세덕 극본의 <기미년 3월 1일>, 중국 작가 조우의 <뇌우> 등을 제작했다.

그러나 신파조의 작품과 미국영화가 범람하면서 낙랑극회의 이러한 작품은 관객의 외면을 받았고, 급기야 극장 대관조차 힘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연극 공연이 어려울수록 연극인들은 좌익으로 쏠렸고 극장을 연극인들에게 준다는 소문이 돈 북한을 동경했다.

조선 제일의 배우라는 황철은 좌익 연극인들의 대표기관이던 연극동맹에 그 이름을 올렸다. 1946년 11월, 황철이 남로당 결성대회에 연극인 대표로 축사를 하자 남로당에 가입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해 12월에는 연극동맹 서울지부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3월, 황철은 파업 선동 혐의로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고, 1947년 7월에는 좌익문화단체를 아우르고 있던 문화단체총연맹에서 조직한 문화공작대로 지방 순회를 다녔는데 춘천 공회당에서는 우익청년들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면서 미군정의 좌익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이 시작되었다. 연극동맹과 같은 좌익 단체에 가입한 혐의만으로도 체포되었다. 황철은 연극동맹 가담 혐의로 체포된 후, 경찰청에 다니는 친구의 도움으로 정치집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그리고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여 북한을 시찰한 후 8월 월북한다.

월북 후에도 여전한 인기... 6·25 전쟁 때 문화공작대 활동하다 오른팔 잃어

 

  

▲ 월북 후, 중년의 황철                                ▲ 북한에서 무대에 선 황철                          ▲ 오른팔을 잃고 <이순신 장군>에 출연한 황철


술과 여자를 좋아하고 공산주의 사상은 티끌만큼도 없었던 황철은 월북 후, 사리원 형무소에 수감되어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다. 몇 개월간의 교육 후, 북한의 국립극장에 배속되어 연기를 재개했다.

평양에서도 황철의 인기는 대단했다. 같은 배역을 황철과 배용이 번갈아 가며 공연했는데 황철이 공연할 때는 표가 없어 입장할 수 없을 정도로 매번 만원이었던 것에 반면 배용이 공연하는 날은 객석이 절반은 비었다.

평양에서 황철은 1949년 <을지문덕>, <어느 한 나라>, <백두산> 등에 출연했다. 특히 코르네추크 작, 최건 연출의 <외과의 크레체트>에서 시당 위원장 역을 연기하여 배용, 이단, 박영신과 함께 공로메달을 수여 받았다. 1950년에는 신고송 작, 김순익 연출의 <불길>에 황인성 역으로 출연했다.

황철은 1950년 6월부터 촬영이 시작되는 국립영화촬영소의 영화 <땅>에 주인공 곽바위 역으로 출연한다. 그의 세 번째 영화출연이었다. 소련정부의 다대한 지원으로 건설된 평양의 국립영화촬영소는 최신식 스튜디오와 녹음실 등을 갖추고 최신식의 기재를 보유한 최신의 영화촬영소였다. 1947년 공사가 시작되어 <땅>이 제작되던 1950년에는 대부분의 시설이 완성되었다.

영화 촬영이 한창이던 6월, 전쟁이 터졌고 7월초에는 서울해방 공연을 위해 영화촬영이 중단되었다. 촬영이 잠시 중단된 황철의 마지막 영화는 끝내 제작되지 못했다.

황철은 서울해방공연에서 서울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황철은 훗날 "박수 소리라기에는 너무 크고 열광적이어서 마치 극장이 무너지는 듯한 음향이었다"고 회고했다. 서울해방공연 후 예술인들은 문화공작대로 편성되어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황철은 평택에서 수원으로 가는 도중 비행기 폭격으로 오른팔을 잃는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황철은 1951년 4월 국기훈장 2급을 수여 받는다. 문화예술인 중 오직 7명에게만 수여된 것으로 함께 수여 받은 이는 이기영, 한설야, 이태준, 임화, 조기천, 최승희로 해당분야의 최고들이었다.

친일과 월북, 두 가지 금기로 전설이 된 황철

 

황철은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헝가리에서 제작된 의수를 착용하여 무대에 다시 섰다. 1953년 조영출 작 <이순신 장군>에서 황철은 이순신 역을 맡아 의수를 낀 채로 연기하였다. 관객들이 황철의 오른팔이 의수임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열연이었다. 무대 위에서의 투지로 1955년 8월, 북한 최초의 인민배우가 되었다.

이후, 황철은 국립극장 총장과 교육문화성 부상으로 행정에 관여했으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서 정치에도 관여했다. 연기와 연출을 병행하면서 평양연극영화대학교 겸임교원으로 강의도 하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연극이론서인 <무대화술>과 <분장론>을 저술했다.

1960년에는 영화 <춘향전>에서 변학도 역을 맡아 생애 마지막 영화 출연을 한다. 오른팔을 잃은 후 출연하는 것임으로 황철은 영화배우로 인연이 없었던 것 같다. 영화 출연 다음해인 1961년 6월 9일, 황철은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53년의 남로당 숙청과 1956년의 종파 숙청도 무사히 살아남았고, 최고의 위치에서 사망했기에 월북 예술인 중 편안한 말로라 할 수 있다.

황철의 생애는 우리의 현대사만큼이나 굴곡이 많았다.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이 있는 법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황철을 끄집어내어 되새기는 것은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동양극장의 화려함을 추억하기보다는 친일과 월북이라는 우리 사회 두 가지 금기를 극복하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황철은 전설이 아니라 평가해야 할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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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스타 9] 영화감독 윤백남의 삶 ~ 영화감독이 된 신문화의 개척자

 

19세기 말, 중세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조선에 근대의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통해 도입된 근대의 문물은 선진문물로 소개되었고 중세의 삶에서 탈피해야 하는 조선에 있어 빨리 흡수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근대문물에는 서구의 근대문화 또한 포함되었다. 근대문화는 조선에서 신문화로 불렸다. 조선에 들어온 신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대중매체인 신문과 잡지였다. 신문과 잡지는 새로운 소식을 전달하는 기본적인 임무 외에 쉬운 말, 쉬운 글로 쓰여 우리 말, 우리글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근대의 문화를 소개하는 창구였으며 근대문학인 소설을 탄생시키는 토양이 되었다.

근대를 대표하는 문학이 소설이었다면 근대를 대표하는 예술은 연극과 영화였다. 극장에 관객을 모아놓고 무대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펼치는 연극은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대중여흥이었다. 또한 기계문명의 발달로 만들어진 영화는 근대의 결정판이자 대표적 오락거리였다.

20세기 초, 조선에는 신문, 소설, 연극, 영화 이 모든 것이 거의 동시에 도입되어 성행했다. 신문화의 국내 유입에는 일본 유학 출신들의 지식인들이 큰 역할을 했다.

신문화의 개척자 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윤백남이다. 그는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공부했으며 귀국 후 매일신보, 동아일보 등에서 신문인으로 활동하며 이 땅에 신문화 전파에 힘썼다. 또한 최초의 연극단체 중 하나인 '문수성'을 조직하였고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세>를 만들어 이 땅의 연극과 영화를 개척하였다.

연극과 영화에서 손을 뗀 후에는 <월간 야담>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야담을 발굴, 전파하는데 힘썼으며 최초의 대중무협소설인 <대도전>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방송인으로서 활동도 빼놓을 수 없는데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의 조선어방송과장으로 직접 마이크 앞에서 야담을 들려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윤백남은 20세기 초반 신문화의 도입과 개척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소설, 연극, 영화, 방송의 맨 윗자리에 그가 있기에 한국 신문화의 개척기가 곧 그의 생애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백남은 1888년 10월 4일 무관이던 윤시병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교중이다. 백남은 그의 호로 일본 유학시절 조선인을 뜻하는 태백남인(太白南人)이란 필명을 사용했는데 조선에 들어온 후, 이를 줄여 백남으로 사용한 것이 이름을 대신하게 되었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했으며 13세 때 현재 명동 중국대사관 자리에 있던 일본어 학교인 경성학당 중학부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웠다.

백남은 당시의 풍습에 따라 15세에 조혼하였다. 결혼 직후 신학문을 더 배울 목적으로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가진 돈이라고는 백동전 20원뿐이었던 그는 제물포항에서 일본인 선원에게 붙들렸으나 유창한 일본어로 그 선원을 설득하여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었다.

객지서 무일푼으로 고생한 끝에 16세 때인 1903년 후꾸시마현(福島縣) 다히라시(平市)에 있는 반조우(盤城)중학 3학년에 보결로 입학할 수 있었다. 일본어에 능통하고 똑똑한 백남은 반조우중학의 일본인 교장선생이 매우 아꼈다.

이듬해 도쿄의 철도학교에 유학 온 사촌형과 상의 끝에 와세다실업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하게 되는데 반조우 중학 교장선생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와세다실업학교 졸업 후 윤백남은 와세다대학 정경과에 진학했으나 국비유학생이 되기 위해 동경고등상업학교로 옮겨 상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사촌형이 매달 보내주는 12원의 돈은 학업을 잇기에 빠듯했다. 그때 조선에서 일본유학생 50명을 선발했는데 선발인원 중 8명은 일본에 체류 중인 유학생으로 채웠다. 윤백남이 그 8명의 한 명으로 선발되어 매달 28원의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정경과는 국비지원 대상이 아니라는 통고를 받자 부득이 학교와 전공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동경고등상업학교에서 백남은 자신보다 6~7세 연상이었던 모리 고이찌(森吾一)라는 일본인 친구를 사귀었다. 1909년 동경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백남은 귀국 후, 관립한성수형조합의 이사로 있던 모리의 주선으로 관립한성수형조합의 부이사로 취직할 수 있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되기 직전 일제에 의해 한성수형조합이 조선식산은행으로 개편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인 간부인 윤백남은 강제퇴직 당하였다.

한성수형조합을 나온 윤백남은 경성고보 교사와 보성전문의 강사로 교직에 몸담았고 수형조합의 부이사였던 자신의 경력을 살려 매일신보의 경제 기자로 활동하게 된다. 연극에 관심이 있던 백남은 이때 매일신보 지상에 미봉(眉峰)이라는 필명으로 <함루희락>이란 희곡을 게재하였다.

그의 연극에 대한 관심은 일본 유학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자칭 극광이라고 부를 정도로 연극광이었던 그는 일본에서 조선루(朝鮮樓)라는 요정을 운영하고 있던 이인직과의 교류를 통해 문학과 연극에 관한 관심을 키웠다. 백남보다 먼저 귀국한 이인직은 <은세계>, <귀의성>과 같은 신소설을 창작하였고 자신의 소설을 원각사 무대에서 공연하여 최초로 근대식 연극을 소개했다.

백남이 매일신보에 재직할 당시에는 조선 최초의 연극단체인 임성구의 혁신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연흥사, 단성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혁신단은 일본인 밀집지역인 남촌에 있던 일본 극장의 신파극을 그대로 따와 공연했다.

윤백남은 혁신단의 공연이 너무 유치하고 저급하다고 생각했다. 윤백남은 경성학당 동창이며 매일신보 동료기자인 조일제와 이 땅에 제대로 된 연극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고자 혁신단의 대표인 임성구를 찾아가 도움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임성구와의 담판은 실패로 끝났다.

 

▲ 최초의 연극이 공연된 극장 원각사. 윤백남이 조직한 문수성의 전속극장이였지만 화재로 소실되었다.


1912년 2월, 윤백남은 매일신보를 퇴사하고 조일제와 함께 극단 문수성을 조직한다. 일본극장의 심부름꾼으로 곁눈질로 일본신파를 따라했던 임성구의 혁신단에 비해 일본 유학 출신의 지식인 윤백남과 조일제가 이끄는 문수성은 문사극단이라 불리며 대우를 받았다. 문수성은 조일제가 번역한 <불여귀>로 창단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에서는 백남이 배우로 무대에 섰다.

매일신보의 후원으로 원각사를 인수하여 문수성의 전용극장으로 사용하는 등 출발은 산뜻했으나 이는 고난의 시작이기도 했다. 전용극장이었던 원각사가 곧 화재로 소실되었다. 또한 <송백절> 등의 공연이 호응을 얻었으나 재정적인 어려움은 피할 수 없었다. 1년간 열심히 공연을 한 문수성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백남은 1년 후 재기를 시도해 보지만 얼마 가지 못해 재정난에 직면하여 다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개성에서 유일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친구 이기세가 통합을 제의해 왔다. 백남과 이기세는 극단 명칭을 예성좌로 짓고 단성사를 근거지로 창단했다. 예성좌에서는 <콜시카 형제>, <카츄사> 등을 현대식 무대장치와 효과음을 사용하여 공연했다. 그러나 조혼하여 처자식이 딸린 백남은 가정을 이끌어야 했기에 다시 매일신보에 입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아일보가 창간하면서 백남은 동아일보의 창간에 관여한다. 1920년 5월, 갓 창간한 동아일보에 <연극과 사회>라는 장문의 논문을 게재했다. 논문에서 연극운동가답게 연극을 통해 민풍개선을 주장했다. 그는 얼마 있지 않아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다시 연극계로 발을 돌렸다.

1921년 10월 예성좌를 같이 만들었던 친구 이기세와 예술협회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그간 일본의 신파극이나 서양의 희곡을 번역하여 그대로 무대에 올리던 것에서 벗어나 창작희곡을 상연하기 시작했다. 백남 자신의 창작 희곡인 <국경>, <운명>, <등대지기>, <기연> 등의 작품이 예술협회에서 공연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연극사상 최초의 후원회인 간친회를 만들어 모금에도 나섰다. 이런 백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는 없었다. 백남은 예술협회에서 손을 떼고 본격적인 연극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2년 민중극단을 조직한다.

당시는 신파극의 한 장면을 영화로 찍어 보여주는 연쇄극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연쇄극은 1919년 신극좌를 이끌던 김도산이 단성사주 박승필의 재정적 후원으로 <의리적구토>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의리적 구토>가 대성공을 거두자 각 신파극단에서는 연쇄극을 쏟아냈다.

민중극단이 창단된 1922년은 일본식 신파극에 연쇄극까지 유행하던 시기였다. 민중극단의 윤백남은 식산은행의 일본인 친구 모리에게서 저축 장려를 위한 계몽영화의 제작 의뢰를 받는다.

백남은 그 의뢰를 받아들여 민중극단 단원들을 동원 희극물 저축 계몽영화를 만든다. 영화인으로서 첫 출발이었다. 제목과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이 희극물에 대해 <한국영화측면비사>를 쓴 안종화는 "비록 감칠맛은 없었으나 당시로서는 그럭저럭 볼 만한 작품이었다"고 평가했다.

 

▲ 1923년 4월 11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월하의 맹세> 시사 기사

 

이 작품이 인연이 되어 1923년 총독부 체신국에서는 저금의 장려와 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극영화의 제작을 백남에게 의뢰하게 된다. 민중극단을 운영하며 자금난에 시달리던 백남은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메가폰을 쥔다. 한국영화사상 최초의 영화감독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최초의 극영화로 인정받고 있는 <월하의 맹세>는 2000척 길이로 1923년 4월 9일 경성호텔에서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한 역사적인 시사가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순이라는 약혼녀가 있는 영득이란 청년이 주색잡기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다. 마음을 다잡아보려 해도 파멸의 수렁에 빠질 뿐 헤어 나올 수가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넉넉지 않은 생활을 하는 정순의 아버지가 한푼 두푼 저축한 돈으로 영득의 빚을 청산해 주며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한다. 영득과 정순은 달이 휘영청 뜬 밤길을 거닐며 결혼하여 알뜰하게 생활하고 저축하여 행복한 삶을 살자고 서로 다짐한다.

<월하의 맹세>에서 윤백남은 연출과 시나리오를 맡았으며 촬영은 일본인 오오따가 맡았다. 배역은 민중극단 소속 배우들인 이월화, 권일청, 문수일, 송해천 등이 출연했는데 이중 이월화는 여배우가 귀하던 시절 <월하의 맹세>와 이어 <해의 비곡>에 출연하여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가 되었다.

 

 

대중문화의 신개지를 찾아 떠나다  

 

1924년 윤백남은 민중극단의 운영을 배우 안광익에게 맡기고 자신은 김해의 합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의 위치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때 부산에서는 최초의 영화사가 만들어졌다. 부산의 일본인 실업가들이 자본을 투자하여 만든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1회 작품으로 <해의 비곡>을 제작하여 큰 성공을 거뒀다.

<해의 비곡>의 연출은 출자자로 회사 중역이기도 했던 일본인 왕필렬이 맡았다. 주연은 안종화, 이채전, 이월화 등 극예술연구회 출신들이었다. 첫 번째 작품이 성공하자 영화사에서는 조선인 대상의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전속의 조선인 감독, 시나리오작가를 두기로 결정했다. 그 물망에 오른 이가 영화감독 경험이 있던 윤백남이었다.

백남과 안면이 있던 안종화가 백남의 영입 교섭을 맡았다. 백남은 신문화의 개척자답게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전속 감독 겸 시나리오작가로 선뜻 입사하였다. 일본인 자본주들은 일본어로 풀어내는 백남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면서 그의 입사에 큰 기대를 걸었다. 백남은 조선 세종시대를 배경으로 안평대군과 궁녀 운영, 출중한 능력을 가진 김진사의 삼각연애를 소재로 한 궁중야화 <운영전>을 자신의 입사 첫 작품으로 선택했다.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제작, 윤백남 연출의 <운영전>


<운영전>의 제작은 평탄하지 않았고 결과도 좋지 않았다. 백남은 <해의 비곡>으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히로인이 된 이채전, 이월화를 빼고 신인 김우연을 발굴하여 주인공 운영 역을 맡겼다.

촬영 도중 백남과 김우연의 스캔들 기사가 매일신보에 대서특필 되었고 배우와 스태프는 백남의 능력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쏟아냈다. 대사도 한 마디 없는 가마꾼 역의 나운규가 촬영도중 "저따위 감독은 죽여 버리는 게 낫지"라며 욕지거리를 했을 정도였다.

<운영전>은 부산과 서울에서 개봉됐으나 2000원의 적자가 났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 백남의 위치는 위태로웠다. 백남은 <해의 비곡>에서 조감독을 했던 이경손을 설득하여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던 연구생 나운규, 주인규, 이규설, 김태진 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 자신의 영화사를 세운다. 윤백남이 세운 백남프로덕션은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영화사였다.

제작자로서 백남의 출발은 고난이었다. 백남프로덕션이라는 간판은 세웠으나 영화를 제작할 돈이 없었다. 해를 넘긴 1925년, 함흥 출신 연구생 주인규와 저축장려 계몽영화의 제작을 의뢰한 바 있는 백남의 일본인 친구인 모리가 자금을 대어 백남프로덕션의 1회 작품 <심청전>의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백남은 영화감독으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해서였는지 제작만 맡았다. 연출과 각색은 이경손이 담당했으며 심봉사 역을 나운규가 맡아 배우로서 재능을 보여주었다.

<심청전>은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흥행이 신통치 못해서였는지 백남은 <심청전>의 필름을 들고 일본 흥행을 떠난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백남은 이광수의 신문연재소설 <개척자>를 무료로 영화화하기로 양해를 얻었다. 백남프로덕션의 2회작 <개척자>는 이경손 연출로 촬영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일본으로 떠난 백남은 몇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고 영화촬영을 위해 얻은 빚으로 채무자들이 영화사로 쳐들어오는 상황이 매일 일어났다. 남은 직원들은 <개척자>의 흥행을 통해 해결책을 찾으려 했지만 영화 개봉일을 전후하여 내리기 시작한 유례없는 폭우로 흥행은 참패하였다. 남은 직원들은 영화사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일본서 돌아온 백남은 거액의 빚만 떠안게 되었다.

영화감독으로서 마지막은 창간시부터 인연을 맺은 동아일보에서 1930년 제작한 <정의는 이긴다>라는 영화였다. 이후, 자신이 주도하여 극단을 조직하거나 영화사를 운영하지 않았지만 영화, 연극의 끈을 버리지도 않았다. 연극, 영화의 원로로서 후배들이 조직한 연극, 영화 단체에 기꺼이 이름을 빌려주었다. 특히 1929년 이기세, 안종화 등과 문예영화협회를 만들어 후진양성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후 백남은 문필가로 야담가로 정신없이 바쁜 세월을 보낸다. 백남의 신문 연재소설은 동아일보 창간 직후 연재한 <수호지>가 처음이었다. 이후 연극, 영화 활동으로 소설연재를 하지 않았다가 1930년부터 연재를 재개했다. 동아일보에서만 1930년 <대도전>, 1931년 <해조곡>, 1933년 <봉화>, 1934년 <흑두건>, 1935년 <미수>, 1936년 <백련유전기> 등을 연재했고 조선중앙일보에서 1933년 <항우>, 매일신보에서 1937년 <사변전후> 등을 연재했다.

문필활동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는 도중에 야담가로서 전국을 돌며 청중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야담 구연은 레코드로 녹음되어 팔리기도 했는데 언론인 유광렬의 말을 빌린다면 "방정환은 동화구연으로 윤백남은 야담구연으로 이 나라에서 그 위를 덮을 사람이 없는 쌍벽이었다"고 평했다.

 

▲ 1932년 10월, 경성방송국의 조선인 방송인들.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조선어방송과장 윤백남이다.

 

1926년 창설된 조선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이 1932년 조선어 방송채널을 만들기 위해 담당 책임자로 윤백남을 초빙하였다. 방송인으로의 이력이 더하여졌다. 백남은 조선어 방송 시간에 자신의 야담구연을 편성하고 직접 마이크 앞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1년 정도 방송국 간부로 일하며 조선어 방송 개국을 지휘한 후 그는 "가요나 기타 연출관계로 항상 방송할 기생 교섭이나 기타의 일에 매달리게 되어 안되겠다"는 이유로 퇴사한다. 동아일보의 편집고문이며 문필가, 야담가로 정신없이 바쁜 상황에서 조선어 방송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자신의 임무는 완수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백남은 1934년 잡지 <월간 야담>을 창간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1년간 활동했다. 그러나 1936년 만주로 이주하는데 그가 발행한 <조선야담전집>으로 많은 빚을 지게 되자 도망치듯 만주로 떠나갔다고 한다. 만주에서 역사소설을 쓰며 재만조선농민문화향상협회의 상무이사로 재직했으며 독립투사와 교섭했다는 이유로 2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해방 후, 백남은 최초의 영화인 조직인 조선영화건설본부의 위원장으로 위촉된다. 일제말기 어용영화를 만들던 조선영화사의 조선인 직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단체인 조선영화건설본부는 좌익계열이 주도하였다. 백남은 좌익 영화인들이 주도하던 조선영화건설본부를 탈퇴하였으며 우익문인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에 이름을 올렸다.

백남은 교육자로서 말년을 보냈다. 1946년 국민대학교 이사 겸 교수로 있었으며 전쟁기간 해군에 입대하여 전쟁사 편찬에 간여했다. 전쟁 직후인,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을 세우고 초대 학장으로 재직했고 1954년에는 초대 예술원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9월 29일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 윤백남은 평생 개척자로 살았다. 신문, 연극, 영화, 소설, 야담, 방송에 이르기까지 최초라는 타이틀에는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일본 유학 출신의 지식인으로 유복하고 유력한 생활을 쫓았다면 충분히 부유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었지만 백남은 이 땅에 신문화를 보급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신개지를 개척하고 또 개척했다. 문화로서 민중을 계몽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개척자로 살았기에 개인적으로는 힘든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헌신은 이 땅에 신문화가 꽃피우게 씨앗을 뿌린 것이었다. 그러기에 윤백남에게 한국 신문화의 아버지라는 칭호는 결코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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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스타 10] 한국영화의 메카 단성사 그리고 박승필 ~ 극장경영자로 우리 영화의 산파 역할

 

서울에 있는 영화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은 단성사는 1907년 개관하여 2007년 개관 100주년을 맞았다.

100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화재와 전란, 변화된 시대에 맞춰 수차례 신축과 수리를 거듭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현재의 단성사는 2005년 3년여의 공사 끝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새롭게 단장한 것이다.

2005년 2월 3일, 단성사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재탄생하면서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한국영화를 빛낸 100명의 영화인을 선정하여 이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한 것이었다.

선정된 100명의 영화인에는 임권택, 안성기, 강수연 같이 친숙한 이름에서부터 신상옥, 유현목, 최은희, 신성일 등 50~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들과 한국영화를 개척한 윤백남, 나운규까지 한국 영화의 대표 인물들이 두루 망라되었다.

특히 이 명단에는 한국영화 탄생의 산파였으며 단성사를 한국영화의 상징 같은 존재로 만든 한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초창기 한국영화의 버팀목으로 조선 사람의 손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크고 작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단성사 지배인 박승필이 바로 그이다.

박승필의 초기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부고 기사를 통해 1875년에 출생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단성사에서 선전을 담당했던 이구영의 증언에 의하면 박승필은 삼형제 중 셋째 아들이었다고 하며, 촬영기사 이필우는 삼형제 중 둘째였다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의 형제를 비롯하여 조카들까지 박승필이 주도하던 흥행계에서 활약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일제강점기 영화전문잡지인 <영화시대>를 발간한 바 있는 박누월이 있다. 박누월은 박승필의 조카이다.

박승필이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광무대를 인수하여 구극 전용 극장으로 운용하면서부터이다. 초기 극장 중 하나인 광무대는 활동사진상영관으로 이용되던 한성전기회사의 창고를 연극 상연을 위해 개조한 것이었다. 이곳은 1903년 경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영화가 공개 상영된 곳이기도 했다. 한성전기회사 동대문 발전소 근처에 있던 광무대는 상설관으로 동대문 발전소의 전기를 이용하여 야간에 영화 상영과 연극 공연을 할 수 있었다.

1908년 박승필은 한성전기회사의 소유주인 미국인 골브란에게 200원을 주고 광무대를 임대하였다. 그는 전국의 유명한 명창들을 광무대에 모았는데 박기홍, 이동백, 김창환, 송만갑 등이 광무대에 전속으로 활약했고 이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인기 명창들이 공연할 때는 많은 관객들이 들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관객이 들지 않았다. 들쭉날쭉한 수지로 인해 경영난에 직면한 박승필은 지방순회에 나서기로 하고 당시 서울 인근인 뚝섬(현 서울 성동구)으로 지방공연을 나섰다. 짐꾼도 없이 일행 십여 명이 한보따리씩 짐을 들고 장터를 찾아 공연을 했으나 아침 끼니 거리도 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도 쫄쫄 굶고 다음 공연을 위해 찾아간 마을에선 온 동네 사람들이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날이 바로 1910년 8월 29일, 국권이 일본에게 빼앗긴 바로 그날이었던 것이다. 박승필은 중외일보에 게재된 글에서 그날 단원들과 시장 바닥에 앉아 대성통곡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광무대의 공연과 지방순회공연을 병행하면서 전통연희인 구극을 부흥시키며 일약 흥행계에 두각을 나타 낸 박승필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한일합방 직후 골부란이 일본인에게 한성전기회사의 소유권을 넘겼고 얼마 있지 않아 광무대는 간판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박승필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부린다.

1913년 현재 을지로3가 근처에 있던 황금유원지 안의 일본인 소유 극장인 연기관을 임대하여 광무대로 간판을 바꿔달고 공연을 재개했으며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하고 스타를 만들어 내면서 광무대를 구극의 메카로 만들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극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하여 임성구, 김도산 등이 이끄는 신극 단체를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새롭게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영화의 흥행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1917년 박승필은 일본인 다무라 미네가 소유한 단성사를 임대하여 활동사진과 신극 전용관으로 이용하기로 하고 1년여의 공사 끝에 1918년 12월 21일 확장 개관한다. 광무대에 이어 단성사를 임대한 박승필은 구극과 신극, 영화를 아우르는 흥행계의 패자로 우뚝 솟아오르고 있었다.

박승필은 자신의 극장을 풍성하게 채워줄 예술가들의 재정적 후원자가 되면서 그 영향력을 키웠다. 신극의 개척자인 임성구와 김도산의 재정적 후원자였으며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감각적인 판단으로 흥행이 될 만한 새로운 도전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박승필은 일본인 극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연쇄극의 제작을 김도산에게 권유하였다. 연쇄극은 연극의 일부 장면을 영화로 촬영하여 공연 중 상영하는 것이었다. 박승필은 김도산이 공연한 바 있는 <의리적 구토>의 몇몇 장면을 영화로 촬영하여 공연에 삽입시키게 하고 그 비용을 모두 내었다. 유명한 요릿집인 명월관, 청량리 근처의 홍릉, 장충단 공원, 한강철교 등지에서 몇몇 장면이 촬영되었다.

 

▲ 1955년경의 단성사의 모습

 


1919년 10월 27일,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단성사에서 공연되었다. 공연 도중 무대 위에서 스크린이 내려오고 익숙한 조선의 풍광이 상영되었다. 관객들은 조선의 풍광 속에서 무대의 배우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신기해했으며 열광적으로 호응하였다. 단성사는 몰려드는 관객들로 연일 만원이었다. <의리적 구토>는 조선인의 손으로 만들어 상영한 최초의 영화였다. 현재 <의리적 구토>가 상영된 1919년 10월 27일을 한국영화의 탄생일로 삼고 있다.

2, 3년간의 짧았던 연쇄극의 전성기가 지나갔다. 관객들은 더 이상 연쇄극에 열광하지 않았다. 극장에는 외국에서 수입된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박승필은 연쇄극이 아닌 단성사에서 상영하고 있는 외국영화와 같은 진짜 영화의 제작을 원했다.

조선극장은 단성사의 라이벌 극장으로 현재 인사동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1923년 10월, 조선극장의 소유주인 일본인 하야가와가 영화제작사인 동아문화협회를 만들어 우리의 대표적 고전인 <춘향전>을 제작, 상영했다.

<춘향전>은 조선극장의 유명 변사 김조성이 이몽룡 역을 맡고 기생 한용이 춘향을 맡아 연기 했을 뿐 일본인 자본과 기술로 만들어진 영화였다. 잘 알려진 조선의 고전을 영화화 한 <춘향전>은 조선극장에서 8일 동안 무려 1만 명이 관람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구극 전용극장 광무대를 운영하면서 우리 전통연희를 지켜온다고 자부했던 박승필에게 일본인, 그것도 라이벌 극장인 조선극장의 일본인이 만든 춘향전은 큰 충격이었다.

 

무성영화 시기 한국영화가 풍부했던 까닭은? 

 

박승필은 조선인의 손으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단성사 내에 영화촬영반을 만들어 <장화홍련전>의 제작에 들어갔다. 연출은 박승필과 동업 관계에 있던 영사기사출신 박정현이 맡았고, 시나리오는 단성사의 유명 변사 김영환과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를 세워 배우를 양성하고 있던 이구영이 맡았다.

촬영과 편집 등 기술부문은 조선인 최초의 카메라맨으로 일본 니카츠(日活)의 촬영기사로 활동했던 이필우가 책임을 졌는데 박승필은 거액의 제작비가 드는 영화 제작의 위험을 줄이고자 이필우에게 동아일보 주최 조선정구대회의 촬영을 시킨 후 그 결과를 보고 그에게 영화의 촬영을 맡겼다.

<장화홍련전>은 단성사 전속 변사인 최병룡, 우정식이 장쇠와 사또 역을 맡았고 광무대 무대에 선 경험이 있는 김옥희, 김설자가 장화, 홍련 역을 맡아 연기했다. 또한 그 외 광무대의 유명 전속배우들을 총동원하여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했다.

 

▲ <장화홍련전>의 연출을 맡은 단성사 지배인 박정현

 

 

1924년 9월 단성사에서 개봉한 <장화홍련전>은 <춘향전>을 능가하는 흥행 성과를 올렸다. 조선극장에서는 <장화홍련전>의 개봉에 맞춰 맞불작전으로 <춘향전>을 재개봉하기도 했으나 단성사로 몰려드는 관객의 행렬은 막을 수 없었다. <장화홍련전>은 관객들의 열화 같은 성원으로 상영일자를 이틀간 연장하였다.

서울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박승필은 조카들과 자식들을 총동원하여 필름을 들고 전국을 순회하며 흥행을 이어갔다. <장화홍련전>은 박승필에게 큰 돈을 벌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영화사에서 최초로 순전 조선인들의 힘으로만 영화를 만들었다는데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박승필은 <장화홍련전>의 흥행 성공을 기회로 영화로의 진출을 더욱 꾀하게 된다. 현철과 이구영이 운영하던 조선배우학교와 더불어 합작을 도모했다. 현철과 이구영은 동국문화협회를 조직하고 1회 작품으로 <숙영낭자전>의 제작을 준비했으나 이익 배분의 문제로 현철이 단성사와의 합작을 거부하자 합작은 틀어졌다. 박승필은 현철을 배제하고 이구영과 이필우의 재정적 후원자가 되어 이들이 고려영화제작소를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1925년 9월, 박승필의 재정적 후원을 받던 고려영화제작소는 기쿠치 유우로우(菊池幽芳) 원작 <나의 죄>를 조중환이 번안하여 매일신보에 연재한 <쌍옥루>를 가지고 영화로 만든다. 전, 후편으로 나뉜 이 영화에는 일본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김택윤, 강홍식이 출연하였으며 감독은 이구영, 촬영은 이필우가 맡았다.

단성사에서 개봉한 이 작품은 흥행에서 성공했지만 이 작품을 만든 이구영과 이필우는 서로 트러블이 생겨 헤어지고 고려영화제작소는 문을 닫았다. 이구영은 박승필의 단성사에 입사했다.

이구영의 가세로 <장화홍련전> 이후 별다른 활동이 없던 단성사 영화부는 금강키네마사로 간판을 바꿔 달고 <낙화유수>, <세 동무>, <종소리> 등을 제작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이어갔다. 1927년 10월 6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낙화유수>는 변사 김영환의 원작을 이구영이 연출하고 복혜숙, 이원용 등이 출연한 영화로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이란 가사로 시작되는 <낙화유수>의 주제가는 최초의 한국영화음악으로 꼽히고 있다.

윤백남 프로덕션에서 나와 일본인 요도가 만든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에 입사한 일군의 영화인들이 <농중조>에 이어 그 두 번째 작품으로 <아리랑>을 만든다. 나운규가 연출, 각본, 주연을 도맡은 이 작품은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하였고 세상을 뒤 흔들 정도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최승일은 별건곤에 실린 자신의 글에서 "사실상 영화는 소설을 정복하였다"라고 외쳤을 정도였다. 나운규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박승필은 나운규라는 재능 있는 젊은이를 눈여겨본다. 박승필은 <야서>, <금붕어> 등의 흥행실패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위치가 불안했던 나운규에게 재정적 후원을 약속하고 독립을 부추겼다. 재정적 후원을 약속받은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탈퇴하고 동 회사에 소속되어 있던 모든 인원들을 데리고 나와 나운규 프로덕션으로 독립한다.

나운규와 함께 한 인원은 이창용, 이명우, 윤봉춘, 주삼손, 이금룡, 이경선, 홍개명, 전옥, 김연실 등이었다. 나운규는 박승필의 재정적 후원 하에 <잘 있거라>, <옥녀>, <사나이>, <벙어리 삼룡>, <사랑을 찾아서> 등의 작품을 계속 제작할 수 있었다.

나운규에게만 박승필의 지원이 돌아 간 것이 아니었다. 윤백남 프로덕션에서 <심청전>, <개척자> 등을 감독한 이경손의 영화 활동도 지원하여 이경손 프로덕션의 설립을 도왔다. 하지만 이경손 프로덕션은 몇 편의 작품 제작을 준비만 했지 실제로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다.

조선 흥행계의 대부로 활약하던 박승필도 그 기운이 다 되어 갔다. 1927년 봄, 자신이 일으켜 키운 광무대의 운영을 인척인 박승배에게 넘기고 자신은 단성사의 운영만을 맡은 것이다. 그러나 이즈음 단성사의 운영은 쇠약해진 박승필이 아니라 지배인인 박정현이 도맡아 했다.

박정현은 극장의 운영뿐만 아니라 금강키네마와 나운규 프로덕션의 총지휘자로 있으며 이들 영화사의 자금 지출을 담당했다. 박정현은 나운규의 방탕한 생활과 연이은 흥행실패로 적자가 누적된 나운규 프로덕션을 단성사 영화부로 흡수하여 원방각사라는 새로운 제작사로 재탄생시킨다.

 

1931년 6월, 토월회를 이끌던 박승희가 단성사의 운영권을 인수하려는 시도를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박승희는 극단 대장안을 조직하고 단성사의 건물주인 다무라 미네에게 찾아가 극장운영권을 넘겨받기로 계약을 채결한다. 신문에서는 이 내용을 보도했고 이 사실에 격분한 박승필이 박승희를 명예회손 및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하였다. 이에 박승희는 건물명도소송으로 대응했다.

정신과 육체가 모두 쇄약해진 상태에서 돌출적으로 나온 단성사 인수사건은 박승필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박승필은 사건이 벌어진 지 불과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1932년 1월,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단성사의 운영권을 두고 소송을 벌였던 박승희는 단성사를 포기하고 1932년 종로5가에 있던 미나도좌를 중심으로 태양극장을 설립했다.

 

▲ 동아일보에 실린 박승필과 박승희의 단성사 운영권 다툼

 

 

단성사주 박승필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는 신문마다 크게 실렸다. 장례는 단성사장으로 치러졌으며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하루 동안 극장 문을 닫았다. 매일신보에는 신문화의 개척자인 윤백남의 애도 기사가 실렸는데 "싸움의 마당에서 후생을 위하여 피 흘리다 화살이 다 떨어져 명예의 전사를 하고 말았다"고 박승필의 죽음을 애도했다.

박승필이 떠난 단성사는 이후 지배인 박정현이 맡아 운영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약초좌, 명치좌와 같은 최신 시설의 상설영화관이 등장하면서 재개봉관으로 그 명성이 추락했으며 일제 말기 일본인 운영자들에 의해 일본의 대륙침략을 동조하는 의미의 대륙극장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본래의 이름을 되찾은 것은 해방이 되고 나서 처음 맞는 3·1절인 1946년 3월 1일이었다.

박승필은 광무대를 운영하면서 전국의 명창들을 세상에 불러내어 판소리와 같은 전통 연희의 계승 보급에 앞장섰다. 또한 신극과 영화의 도입과 발전에도 지대한 관심을 쏟아서 임성구, 김도산 등을 재정적으로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김도산의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제작을 재정적으로 후원하여 한국영화 탄생의 산파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손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순전히 조선인으로의 힘으로만 제작된 <장화홍련전>을 만들었으며 나운규와 같은 유능한 영화인들을 지원하면서 무성영화시기 한국영화를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박승필의 이러한 행동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험난한 선구자적인 길을 걸었던 것으로 애정이 없으면 갈 수 없는 길을 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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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스타 11] 최초의 영화인 김도산 ~ 대스타의 빛에 가린 조연, 그러나...

 

10월 27일은 영화의 날이다. 1963년 제정되어 작년까지 44회의 기념식을 치렀다. 최초의 한국영화로 인정받고 있는 <의리적 구토>의 극장 상영일인 1919년 10월 27일을 기준 삼아 제정된 것이다.

영화의 날 제정에는 약간의 곡절이 있었다. 자유당 말기인 1959년, 임화수가 이끌던 반공예술인단과 한국영화제작자협회에서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국산영화의 앞날을 축복하고 민족문화창달에 이바지 하고자 10월 21일을 '국산영화의 날'로 제정하여 1회 기념식을 열었다. 그러나 다음해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정권에 봉사하던 반공예술인단이 해산되면서 영화의 날도 유명무실해졌다.

1961년에는 5·16 쿠테타 직후 정권을 잡은 군부에 의해 기존의 문화단체가 모두 강제 해산되었다.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련)도 이때 해산되어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로 재조직 되었다. 영화인조직 또한 마찬가지로 기존의 조직을 해산하고 새롭게 재조직하게 되여 문총련 산하 한국영화인연합회는 1962년 예총 산하 한국영화인협회로 재탄생하였다.

원로 영화인인 윤봉춘을 이사장으로 복혜숙, 김소동을 부이사장으로 선출하여 출범한 한국영화인협회에서는 영화인 스스로 한국영화의 뿌리를 찾아 이를 기념하고자 한국영화의 시원을 찾아 이를 기념하는 '영화의 날'을 제정하기로 하고 영화의 날 제정 추진위원회를 설치했다.

추진위원회는 최초의 한국영화를 <의리적 구토>로 정하고 단성사에서 상영된 날을 기준삼아 10월 20일을 영화의 날로 정해 1963년부터 이를 기리는 기념행사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영화인들 사이에 10월 20일이 아니라 27일이 <의리적 구토>의 공식 상영일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1966년 한국영화인협회는 논란을 해결하고자 이 문제의 고증을 공보부에 의뢰했다.

영화의 날에 대한 조사에 들어간 공보부에서는 1966년 4월 8일 공보부 장관 홍종철 명의로 고증서를 보내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단성사 개봉일은 10월 20일이 아니라 10월 27일이며 이날 한국최초의 기록영화인 <경성전시의 경> 또한 함께 상영되어 영화 창생의 날로서 의의를 깊게 한다"고 확인해주었다.

비로소 최초의 한국영화 상영일이 정확히 밝혀진 것이었다. 한국영화인협회에서는 1966년부터 영화의 날을 10월 27일로 바꾸었다.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를 만든 김도산은 조선 최초의 영화인이었다. 영화의 발명자가 아니기에 한국의 뤼미에르, 한국의 에디슨은 될 수 없었지만 영화를 최초로 제작한 인물이기에 그 공로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김도산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극계 진출 이전의 생애에 대해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극계에서는 임성구의 그늘에 가려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살면서 많은 기록을 남겼다면 모를까 최초의 연쇄극인 <의리적 구토>를 만든 지 불과 2년을 버티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기에 그에 대한 기록은 극히 적을 수밖에 없다.

지금부터 김도산에 관한 작은 기록들을 수습하여 그가 어떻게 최초의 한국영화를 만들게 되었는지 추적해보겠다. 이를 통해 한국영화 탄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만든 김도산

 

 

김도산은 1891년 서울 충무로 초동 출생으로 상동학교를 졸업하고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헌병 옷을 벗어 던지고 처음 극계에 발을 내디딘 것은 1911년경 임성구가 이끄는 혁신단에 입단하면서이다. 임성구는 1887년생으로 김도산보다는 4살이 많았고 이 땅에 최초로 연극을 시작한 인물이었다.


근대적 교육도 한번 받아본 적 없는 임성구의 극계 투신은 흥미롭다. 종현성당 뒷문 근처에서 백형 임인구와 함께 과일장사를 하던 임성구는 저녁에는 일본인 극장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공연을 훔쳐보았다. 임성구가 하는 일은 관객들의 신을 지키는 일이었다. 당시 일본인 극장은 다다미 좌석으로 문 입구에는 신을 보관하는 하족실이 있어 관객들은 입장시 신을 벗어야 했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인 극장에는 일본인 거류민들의 위안과 전승기념을 축하하는 일본 내지의 신파극단 청년파의 공연이 있었다. 임성구는 하족실을 드나들며 처음 보는 신파극에 매료되어 자신도 신파극을 하여 자신이 그랬던 것과 같이 조선인 관객들을 감동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몇 년간 동지들을 규합하고 자금을 모아 신파극단 혁신단을 창단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와 최초의 연극을 공연했던 이인직에 이은 두 번째 시도였다.

1911년 초겨울, 남대문 밖 어성좌에는 혁신단의 창단공연을 알리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연극, 영화의 개척자 중 한명인 안종화는 자신이 쓴 <신극사이야기>에서 혁신단의 첫 공연에 대해 "판소리와 창을 주로 하는 협률사 공연으로 잘못알고 입장한 50여명의 관객이 있었을 뿐이며 이 중, 공연이 끝날 때까지 남은 관객은 불과 5~6명뿐이었고 임성구는 다음날 공연을 취소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 임성구의 혁신단은 흥행수입으로 각종 자선행사를 벌였다. 사진은 1911년의 걸인잔치 기념사진.


임성구 일행은 첫 공연의 실패를 거울삼아 겨울 내내 열심히 노력하였다. 봄이 오자 연기와 무대의 수준은 한층 높아졌다. 2회 공연은 1912년 4월 조선인 극장인 연흥사에서 공연되었다. <육혈포강도> 등을 비롯하여 일본 신파극의 유명 레퍼토리를 무대에 올렸다. 3일 간격으로 바뀌는 레퍼토리에 능숙해진 배우들의 연기가 어우러져 혁신단의 공연은 차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혁신단을 이끌며 작품마다 주인공을 도맡았던 임성구는 당대 신파극을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 잡았다. 당시 임성구의 인기는 사이클 선수로 각종 대회에서 일본인들을 물리쳐 자전거왕의 자리에 등극했던 엄복동과 비견되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 자전거는 엄복동, 신파극은 임성구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혁신단이 인기를 끌자 이곳저곳에서 신파극단이 생겨났다. 임성구는 새로 생겨나는 신파극단에 대항하고자 '신파원조 혁신단'이란 깃발을 만들어 자신이 신파극의 원조라 선전했다.

임성구의 전성기에 극계에 등장한 김도산은 임성구라는 대스타의 빛에 가린 조연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혁신단의 창단멤버들이 임성구와는 친형제처럼 가까운 친구들이었기에 뒤늦게 혁신단에 가담한 김도산과 김현(김소랑)은 아무래도 기존의 멤버들과 거리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혁신단에서 수십 편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매일매일 작품을 바꿔가며 공연하는 동안 김도산이 맡는 역은 주로 악인이나 주인공의 친구 정도였다. 1933년 삼천리에 실린 글을 보면 김도산은 <장한몽>에서 이수일의 친구인 의협남아 백낙관역에 능숙했다고 한다.

유일단을 이끌던 이기세가 1916년 윤백남과 힘을 모아 예성좌를 만들었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이기세는 극계를 떠났다. 1917년 김도산은 임성구와 결별하고 자신의 극단인 개량단을 만들어 독립하였다. 김도산이 개량단을 조직하자 해산된 예성좌에서 나온 유일단 출신 단원들이 김도산의 개량단에 가입하였다.

개량단은 서울의 단성사와 지방을 순회하며 공연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울공연보다 지방순회공연 횟수가 많아졌다. 서울에서는 신파극이 전성기를 보내고 사그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관객은 신파극이 아닌 서양의 활동사진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의인은 죽고 영화의 시대는 열리고... 

 

김도산의 개량단은 신극좌로 확대 개편된다. 그러던 중 극계를 떠나 있던 이기세가 다시 극단을 조직한다. 이기세의 새로운 극단은 문예단으로 대구의 유지 정인기의 후원이 있었다.

든든한 후원자를 등에 업은 문예단에 기존 유일단 출신의 배우들이 몰려들었다. 신극좌의 유일단 출신 단원들도 탈단하여 이기세의 문예단으로 돌아가 버렸다. 문제는 문예단으로 떠난 사람들은 극계에서 명성을 떨치던 인물들이었고 신극좌에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신인들이라는 점이었다.

단원들을 빼앗긴 김도산은 충격과 함께 극단의 존폐를 결정해야 할 기로에 섰다. 그때 변사 김덕경이 김도산을 찾아와 위기를 기회삼아 재기하라고 위로하며 일본인 극장에서 공연되었던 <세도나이까이(瀨戶內海)>와 같은 연쇄극을 해볼 것을 권유했다. 김도산은 마지막 희망을 붙잡는다는 각오로 연쇄극에 도전을 결정한다. 부족한 기술과 자본은 단성사 운영자 박승필을 통해 해결하기로 하고 김덕경을 통해 박승필과 교섭하였다.

 

▲ 유일단, 예성좌, 문예단 등을 조직한 한국 연극의 선구자 이기세. 사진은 1935년경 이기세.


1917년 단성사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1년여의 공사를 마치고 상설영화관으로 재탄생시킨 박승필은 외국영화의 상영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손으로 만든 영화의 상영을 꿈꿨다. 하지만 아직 여건이 미비했다. 기술도 기술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박승필은 거대한 자본이 드는 영화제작은 유일한 조선인 흥행자본가인 자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연쇄극의 재정 후원자가 되어 달라는 김도산의 제안을 박승필은 흔쾌히 승낙했다. 김도산과 박승필의 다리 역할을 했던 김덕경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촬영기사를 초빙해 왔다. 최초의 연쇄극은 이미 우미관에서 공연한 바 있는 <의리적 구토>였다.

촬영이 시작됐다. 장충단에서 서빙고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영화촬영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장사진이었다. 안종화는 자신이 쓴 <한국영화측면비사>에서 이 최초의 영화촬영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이들 군중의 시선은 저마다 포장을 젖힌 15년식 포드 자동차에 쏠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유난히 눈여겨보는 것은 그 차에 타고 있는 세 명의 괴한이었다. 그들은 제작기 일본식 '합비'에 '당꼬 즈봉'을 입고, 허리에는 번쩍거리는 장도를 차고 있었다. (중략)

괴한들이 산허리로 돌아가자 얼마 후, 조금 떨어진 숲속에서 호각 소리와 함께 청년 하나와 불란서제 목조촬영기를 멘 기사가 나타났다. 캡을 둘러 쓴 사람은 일본인 카메라맨이었고, 얼굴이 거무잡잡하고 키가 작달만한 젊은 청년은 당시 단성사에서 명성을 떨치던 해설자의 원로 김덕경이었다. 덕경의 임무는 현장지도와 통역이었다."

야외 촬영이 끝났다.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는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상연되었다. <의리적 구토>는 연쇄극으로 연쇄극은 연극의 일부 장면을 영화로 보여주는 일종의 키노드라마였다.

<의리적 구토>의 공연 모습을 살펴보면 배우들이 연기를 펼치다 무대 밖으로 사라지고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무대 위에서는 스크린이 내려온다. 다시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 무대 밖으로 사라진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가 영사된다. 자동차 추격장면, 격투장면이 보여지고 다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스크린이 사라지고 배우들이 무대에 등장 다시 연기를 펼치는 식이었다.

공연은 대성황이었다. 신극좌에서는 <의리적 구토>에 이어 바로 <시우정>, <형사고심> 등을 연쇄극으로 공연하였다.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연쇄극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단성사에는 연쇄극을 보기 위한 관객들로 연일 만원이었다. 박승필이 거액 5000원을 투자하여 만든 연쇄극은 대성공이었다. 

 

▲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신문광고

 

1920년은 연쇄극의 해였다. 연쇄극으로 이름을 떨친 김도산은 전성기를 맞았다. 연쇄극의 성공과 더불어 치솟는 인기로 따르는 기생들이 많았다. 기생들은 극장 앞에 인력거를 대기시키고 스타를 모시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김도산이 만든 연쇄극에서 주인공을 도맡았던 이경환과 극단 대표인 김도산은 기생들 품에서 살았다.

<의리적 구토>의 성공에 자극받은 이기세의 문예단과 임성구의 혁신단에서도 연쇄극 제작에 착수했다. 1920년에는 당시 4극단으로 불리던 혁신단, 신극좌, 문예단, 취성좌 중 김소랑(김현)이 이끄는 취성좌를 제외하고 3대 극단에서 모두 연쇄극을 제작하였다. 왕년의 스타 임성구는 박승필의 후원으로 연쇄극을 만들었다. 이기세는 자신이 마련한 돈으로 연쇄극을 제작하여 우미관에서 공연했다. 물론 대부분의 작품은 박승필의 재정적 후원에 힘입은 김도산의 신극좌에서 나왔다.

그러나 연쇄극에 대한 관객들의 폭발적인 관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호기심에서 한두 번 접했을 뿐 대부분의 관객들은 비싼 입장료를 내고 연쇄극을 보기보다는 서양의 활동사진을 보길 원했다. 이기세의 문예단은 연쇄극인 <지기>를 공연하고 얼마 있지 않아 극단을 해산했다. 연쇄극에 대한 폭발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작품을 만들었으나 큰 손해를 보게 되자 더 이상 극단을 운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예단 단원들은 김도산의 신극좌에 흡수되었다. 김도산의 신극좌도 더 이상 연쇄극을 만들 수 없었다. 김도산이 촬영도중 큰 부상을 입은 것이 한 이유였고 더 큰 이유는 비싼 제작비와 격감하는 관중으로는 도무지 수지를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쇄극의 전성기는 너무나 짧게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1921년 7월 26일 김도산은 늑막염으로 31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연쇄극 촬영도중 당한 부상이 원인이었다. 매일신보의 부고기사에는 김도산의 죽음 당시 신극좌는 인천 공연 중이었는데 좌장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단원들이 서울로 급히 돌아왔으며 각 신파단체에서는 연합하여 성대한 장의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 해 11월 20일, 혁신단을 이끌던 임성구 또한 폐결핵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임성구는 폐결핵에 시달리면서도 무대에 섰는데 그 야윈 얼굴을 감추기 위해 입에 솜을 넣어 볼을 불룩이 하여 분장했다고 한다. 신파극의 도입과 전파에 힘을 쏟았던 김도산과 임성구의 죽음은 신파극과 연쇄극 시대의 끝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으며 신극과 영화의 시대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얼마 있지 않아 연극과 영화의 시대가 찾아왔다. 1923년 2월, 최초의 신극단체인 토월회가 박승희에 의해 탄생했다. 토월회의 탄생은 임성구, 김도산의 신파극처럼 희곡 없이 대략의 줄거리를 가지고 무대에서 즉흥연기를 펼치는 수준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희곡을 바탕으로 잘 짜여진 무대와 연출, 계산된 연기로 연극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동년 4월에는 최초의 극영화인 <월하의 맹세>가 윤백남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극영화의 탄생은 연극의 부속물인 연쇄극의 형태로 탄생한 조선영화가 영화로서 자기 모습을 찾아간 것이었다.

신파극의 시대를 열었던 김도산과 임성구의 갑작스런 죽음과 새로운 시대의 등장은 너무나 운명적이었다. 무대에서 마지막 대사를 마치고 커튼 뒤로 사라지는 배우의 숙명처럼 김도산과 임성구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더 이상 해야 할 대사가 없어진 배우가 되어 운명처럼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다. 천생 연극인의 인생을 타고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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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스타 12] <검사와 여선생>의 작가 김춘광(김조성) 

조선극장의 주임변사, 흥행극의 작가가 되다

 

'무성영화시대'의 꽃은 스크린의 배우가 아닌 스크린 밖의 '변사'였다. 대부분이 문맹이었으며 영화라는 매체에 익숙하지 않던 시절, 변사는 관객들에게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를 안내하는 안내자였다. 관객은 변사의 설명을 통해 영화의 내용을 이해했고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래서 영화의 수준보다는 변사의 수준이 더욱 중요했고 어느 배우가 나오는지보다 어느 변사가 나오는지에 따라 흥행의 성패가 좌우되었다. 당시 극장 선전 광고지에는 소속 변사들의 사진을 넣어 광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의 스타들이 누리는 관심과 부는 당시에는 일류 변사들의 차지였다.

<한국영화측면비사>를 쓴 안종화에 의하면 전문 변사의 시조는 '우정식(禹正植)'이었다고 한다. 광무대를 드나들며 활동사진에 빠져있던 그를 광무대 운영자인 박승필이 변사로 데뷔시킨 것이다.

그러나 우정식은 변사로서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변사가 별로 없었던 시절에는 그런대로 그의 설명이 먹혀들어갔으나 관객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그의 느긋한 설명에 관객들은 야유를 보냈다. 희극영화와 같이 빠른 템포의 영화의 경우 그의 설명이 영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 1930년대 초반, 변사들의 사진이 들어간 조선극장의 홍보지.


당시 극장에는 여러 명의 변사가 있어서 이들이 돌아가면서 해설을 맡았다. 이중 무성영화시대 변사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로는 김덕경, 김영환, 김조성, 서상호, 서상필 등이 있었다. 당시 이들 변사들은 극장의 현금제조기로 통했으며 조선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단성사, 조선극장, 우미관에서는 이들을 서로 모셔가기 위해 최고 대우를 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그들이 받는 월급은 고위관리 월급의 두 배가 넘었으며 월급 외에 지방공연 시에는 따로 수당을 받았다.

조선에서도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자 이들 변사들은 영화제작에 관여했다. 1923년 동아문화협회에서 제작한 <춘향전>은 변사로 이름을 떨친 김조성이 이몽룡 역할을 맡았고, 변학도 역은 변사 최영환이 맡았다. 다음해 단성사에서 제작한 <장화홍련전>은 유명 변사인 김영환이 각본을 썼으며, 장쇠 역과 사또 역은 역시 유명 변사인 최병룡과 우정식이 맡았다. 무성영화시기 유명 변사들은 당대의 스타로서 영화해설뿐만 아니라 영화제작에도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토오키가 등장하고 무성영화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변사라는 직업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부와 인기를 한 손에 쥐었던 유명 변사들은 인기가 한창이던 시절 주색과 마약에 빠져 가산을 탕진했고 토오키라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초기 유명 변사 중 극작가로 변신하여 극단을 운영하며 해방 후까지 활동했던 김조성(김춘광)을 비롯한 일부만이 변신에 성공했을 뿐이다.

조선극장과 변사 김조성

 

김조성은 1900년 9월 16일 황해도 평산에서 독립운동가 출신 김동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독립운동을 위해 간도 등지를 떠돌았기에 김조성 역시 모친의 손에 이끌려 각지를 떠돌아야 했다. 소학교는 평양에서, 중등교육은 서울의 보성고보에서 받았고 일본을 오가며 견문을 넓혔다고 한다.

 

김조성이 언제 변사가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와 함께 변사활동을 했던 성동호는 김조성이 본래 취성좌의 배우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김조성은 김소랑이 이끌던 취성좌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중 변사로 변신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 김조성, 1938년 이후 김춘광이라는 이름을 사용


김조성이 연예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기는 흥행계의 실력자로 통하던 하야가와(早川孤舟)의 눈에 띄어 그와 함께 동아문화협회를 조직하고 <춘향전>을 만들게 되면서부터이다. 당시 <매일신보>의 기사에는 김조성이 신진배우에서 일약 간부의 반열로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고전을 영화화하는 데 있어 조선인 조력자가 필요했음은 충분히 추측 가능하다.

김조성이 중역으로 있던 동아문화협회에서는 3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대부분 이해조의 신소설을 각색한 작품이었다. 하야가와가 연출을 맡은 <춘향전>은 박기홍의 춘향가를 토대로 쓰인 이해조의 <옥중화>를 각색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 김조성은 이몽룡 역을 맡아 연기했다. 성춘향 역은 송상 출신으로 당대의 거부인 박우현이 추천한 기생 한명옥(한룡)이 맡았으며, 월매, 향단 역을 비롯하여 수십 명의 배역은 일본인 전북지사가 알선한 남원 주민 중에서 선발되었다.

이구영의 말을 빌린다면 초기 영화가 다 그렇듯, <춘향전> 역시 영화라기보다는 슬라이드에 가까웠으며 관객은 김조성의 해설을 통해 <옥중화> 한 권을 그림과 함께 듣는 것에 불과했다고 한다.

<춘향전>은 1923년, 군산의 군산좌와 서울의 황금좌에서 상영되었다. 하야가와가 운영하던 서울의 황금좌는 일본인들이 주로 출입하는 극장임으로 조선인 전속 변사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춘향전>에서 이몽룡 역을 맡은 김조성이 변사로 나서 해설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24년 9월 5일, <춘향전>은 조선인 극장인 조선극장에서 상영된다. 분란에 휩싸인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동아문화협회에서 획득한 것이 1924년 7월이었다. 1924년 9월, 단성사에서 제작한 <장화홍련전>이 개봉되자 조선극장에서는 맞불작전으로 소유주인 동아문화협회에서 제작한 <춘향전>을 재개봉한 것이다. 김조성이 해설했음은 물론이다.

원래 조선극장은 대동권번의 이사로 있던 황원균에 의해 1922년 세워졌다. 평양기생들이 중심이 된 대동권번은 3·1운동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이 높아가던 화류계에 친일파를 양성하기 위해 지바(千葉了) 경찰부장의 주도로 화류계의 친일인사들에 의해 1920년 8월 14일 주식회사 형태로 조직된 권번이었다.

황원균은 1919년 11월,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탈출하려는 의친왕의 계획을 미리 알고 일본관헌에 신고하여 그 시도를 무마시킨 장본인이었다. 그 일로 지바경찰부장의 신임을 얻은 황원균은 친일권번인 대동권번의 창설에 관여했으며, 조선인 최초로 극장건설과 운영권 모두를 획득할 수 있었다. 더욱이 동양생명보험을 통해 극장 건설 자금까지 융통 받을 수 있었다.

인사동 입구에 지어진 조선극장은 지상 3층 건물로 가족석에 엘리베이터까지 달린 최신 시설의 극장으로 1922년 11월 6일 개장했다. 개관공연으로 만파회의 <장발장>이 윤백남 연출로 공연되었으며, 각 권번 기생들의 공연과 영화상영도 함께 거행됐다. 화려하게 출발한 조선극장은 황원균의 경영능력 부족으로 적자가 쌓이면서 운영이 어려워졌다.

그러자 자금을 빌려준 동양생명보험과 소유주 황원균 사이에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이는 조선극장이 1937년 화재로 전소되기까지 지속된 운영권을 둘러싼 내분의 시작이었다. 채권자인 동양생명보험은 조선극장의 소유권을 건축회사인 동양건물에 넘겨버렸다. 동양건물은 황원균이 가졌던 운영권을 희락관과 황금관을 운영하는 하야가와에게 넘긴다. 이 무렵 황원균이 이사로 있던 대동권번 또한 부채가 늘어 폐업하고 만다.

하야가와의 동아문화협회가 인수한 조선극장은 1924년 7월 13일, 내부공사를 마치고 상설 영화관으로 재탄생하였고 동아문화협회의 간부인 김조성은 조선극장의 주임변사가 된 것이다.

조선인 3대극장(단성사, 우미관, 조선극장) 중 하나인 조선극장의 주임변사가 된 김조성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다. 1925년 1월 1일 <매일신보>에 홍원생이 쓴 '해설계의 3성'이라는 기사에서 김조성의 해설에 대해 "남구(南歐)에서 봄 제금을 뜯는 듯한 음성, 경쾌하고도 애달픈 봄날의 피리소리를 듣는 듯한 어조, 쫄쫄 흘러가는 곡간(谷間)의 샘물같이 가벼웁게 리듬 있게 흘러가다가 돌부리에 막힌 듯 잠깐 멈추었다가 물이 넘게 되면 또다시 흘러가는 듯"하다고 극찬했다.

조선극장을 인수한 동아문화협회에서는 조선인 관객을 위한 영화 제작을 지속한다. <춘향전>에 이은 두 번째 작품은 당시 세상을 뒤흔들었던 기생 강명화의 자살을 극화한 <비련의 곡>이었다. 1924년 11월 28일 개봉한 <비련의 곡>은 영남 거부 장길상(장택상의 큰형)의 큰아들 장병천과 평양기생 강명화와의 비극적인 사랑을 영화로 만든 것이었다.

이 둘은 신분의 차를 넘지 못하고 1923년 6월, 강명화가 온양온천에서 '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 살 수 없는데 당신은 나와 살면 가족도 세상도 모두 외면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더욱이 이 사건은 넉 달 후 장병천마저 자살하면서 백만장자의 아들과 기생의 정사(情死)라는 자극적인 내용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해조는 이 사건을 토대로 <강명화 실기>라는 신소설을 썼으며 동아문화협회는 <비련의 곡>으로 영화화했다.

<비련의 곡>에서 김조성은 주인공 장병천 역을 맡았고, 김조성의 조카이기도 한 기생 문용자가 강명화 역을 맡았다. 장병천의 친구 역으로 문예봉의 아버지 문수일이 연기했다. 연출은 <춘향전>과 마찬가지로 하야가와가 맡았다.

이구영은 이 영화가 <춘향전>보다는 잘 만들어졌지만 "천박한 퇴폐기분을 고조하려는 스토리"라며 혹평했다. <매일신보>와 <조선일보>에 실린 독자들의 관람평도 "더러운 사진", "걸레 같은 작품"으로 혹평이긴 마찬가지였다.

동아문화협회의 3회 작품은 이해조의 <연의 각>을 각색한 <흥부놀부>이었다. 이 작품에서 김조성은 더욱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데 배우로서 놀부 역을 연기했으며 하야가와를 대신해 연출까지 맡은 것이다. 흥부 역은 문수일이였다. <흥부놀부>는 1925년 5월 15일부터 7일간 조선극장에서 공개되었다.

1926년 8월 말, 조선극장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는다. 희락관과 황금관, 조선극장을 운영하며 조선의 극장계를 주름잡았던 하야가와는 재산을 정리하여 일본으로 떠나려고 후임을 물색했다. 동아문화협회도 해산하였다. 동아문화협회의 간부이기도 했던 조선극장 주임변사 김조성이 하야가와의 뒤를 이어 극장을 인계받았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극장 운영권은 차상호에게 넘어간다. 차상호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인 이갑성의 인척이었다. 차상호가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인수하는데 촬영기사인 이필우가 큰 역할을 했다. 1926년 12월 9일, 조선극장은 전 관주 김조성과 전무 이필우의 갈등으로 폐관하고 만다. 김조성과 이필우의 감정싸움은 이필우가 조선극장을 떠나고 김조성이 다시 조선극장의 주임변사로 옮겨오면서 해를 넘긴 1927년 2월 9일 해결되었다.

차상호가 이끌던 조선극장은 영남 부호 장길상의 후원을 받은 연극인 현철과 김영수가 공동경영자로 참여하면서 자리가 잡히는 듯 보였다. 현철은 극장의 구조조정과 새로운 소재 발굴을 이유로 수개월간 극장문을 닫고 일본으로 출장을 떠났다. 극장운영 경험이 일천했던 현철의 이 같은 행동에 월급이 몇 달씩 밀린 극장종업원들은 쟁의를 벌이게 된다. 결국 현철은 극장 운영을 포기하고 다시 김조성이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획득한다.

김조성이 다시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인수하는데 이태진을 비롯한 상인들의 자금지원이 있었다. 상인들은 김조성과 동업으로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획득하고 극장 운영의 경험이 있는 김조성에게 극장 운영을 맡긴다. 김조성은 외화 배급사들과 특약을 맺고 화제작들을 휩쓸어갔다. 조선극장의 이 같은 저돌적인 운영은 단성사 측과 경쟁을 낳았고 신문지상에는 이 두 극장의 영화획득경쟁이 보도되었다.

김조성의 조선극장 운영은 이태진이 횡령을 이유로 김조성을 고소하면서 6개월 만에 끝난다. 1928년 이태진은 김조성이 운영비 2천여원을 개인적으로 착복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고소했다. 변사 성동호를 비롯한 극장 관계자들의 중재로 고소는 취하되었으나 김조성은 더 이상 조선극장의 운영자가 아니었다. 변사 활동도 막을 내린다.

예원좌, 극작가 김춘광으로

 

조선극장에서 쫓겨난 김조성은 두문불출하며 재기를 노렸다. 김조성은 1년여의 방황을 끝내고 무대생활을 시작한다. 1929년, 최초의 가극단체인 금성오페라단의 창립단원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1930년에는 취성좌의 후신인 삼천가극단의 요청으로 비가극 <평화>를 쓰면서 극작도 시작한다. 이 무렵 그는 대표작인 <검사와 여선생>을 완성했다고 한다.

1935년 2월,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희극배우 임생원 등과 예원좌를 조직한다. 김조성은 무리를 해가며 황금좌의 배우 엄재권, 이준희, 송우섭, 허광라, 노재신 등을 전차금을 주고 빼오면서 경찰이 개입하여 공연이 중단되는 소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김조성은 유명 배우들을 빼오는데서 멈추지 않고 연중무휴 공연과 만주를 비롯한 전국 순회를 다니는 등 공격적인 경영으로 예원좌를 당대 유명 상업극단으로 이끌었다. 조선극장을 운영하면서 몸에 밴 승부사 기질이 십분 발휘한 것이다.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김조성의 극작술 또한 큰 몫을 담당했음은 물론이다. 극단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공연되어 돈을 가마니로 긁어모으게 한 <검사와 여선생>, <촌색시>등이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

예원좌가 일반에게 유명 대중극단으로 인정받게 되는 1938년 가을경 그는 이름을 김조성에서 김춘광으로 바꾼다. 자신이 존경하는 춘사 나운규와 춘원 이광수의 이름에서 한자씩을 딴 것이다. 그즈음 전국의 악극단이 100개가 넘었다. 전국의 극장 수가 고정된 상황에서 유력 상업극단으로 성장한 예원좌는 공연할 극장을 잡기 위해 다른 악극단들을 견제할 필요를 절감했다.

 

▲ 윤대룡이 연출한 <검사와 여선생> 포스터


김춘광은 극단의 생존을 위해 전국 극장을 정비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그는 황금좌의 대표 성광현과 함께 박진, 이서구, 최독견, 김관수 등과 극단 정비를 위한 단체의 설립을 총독부에 요청했다. 이는 중일전쟁 이후 모든 체제를 전시체제로 재편하려는 총독부의 의도와 맞아떨어졌다.

1940년 총독부 경무과에서는 조선연극협회를 조직하여 100개가 넘는 전국의 극단 중 9개만을 협회에 가입시켜 극단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예원좌도 그 9개 극단에 포함되었다. 총독부의 극단통제로 예원좌에서는 유명 극작가인 박영호, 송영, 임선규 등의 작품을 받아 이서향, 나웅 등에게 연출을 맡기는 등 그 수준을 높일 수 있었다.

공연도 전국을 순회하기보다는 부민관을 비롯한 서울의 주요 극장에서 공연을 올리게 된다. 이러한 성공에는 대가가 따랐다. 일제로부터 적극적인 친일 부역을 요구받은 것이다. 김춘광은 <어머니와 아들> 같은 친일 어용극을 썼으며, 그가 이끄는 예원좌는 협회에서 주최하는 국민극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수상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쳤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해방되었다. 김춘광은 어용극을 만들던 예원좌를 해산했다. 해방의 기쁨에 들뜬 영화인, 연극인들은 장래 구성될 국가에 이바지 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했다. 이는 좌익이 주도했다. 김춘광은 영화건설본부의 조직구성을 위한 회의에 참여하지만 좌익 소장 영화인들이 주장하는 친일영화인 배격, 영화산업 국영화 등의 의견에 반대를 취하며 좌익이 이끄는 어떤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는다.

1945년 10월, 김춘광은 과거 예원좌 출신들을 모아 극단 청춘극장을 조직하고 창단공연으로 <촌색시>를 무대에 올렸다. 김춘광은 예원좌 시절처럼 앞장서 나서지 않고 극단 운영을 매부인 전광남에게 맡기고 자신은 극작에 몰두했다. 1945년 말까지 예원좌에서는 <동방의 길>, <검사와 여선생> 같은 김춘광의 대표 작품을 공연했다.

 

 

김춘광은 좌우의 극단적 대립 속에 우익 연예인의 대표자가 되었다. 1946년 4월, 김관수, 최일, 박구, 박노홍 등과 예원결의친목회를 조직하여 좌익연예인들의 반대편에 활동하기 시작했다. 1947년 11월에는 유치진이 주도한 전국연극예술협회 창립대회에서 부이사장을 맡는 등 대표적인 우익인사로 활동했다.

그 기간 <안중근 사기>, <김상옥 사건> 등 애국선열들의 활동을 조명하는 내용의 작품을 썼으며 청춘극장에서는 애국지사를 다룬 연극과 함께 <미륵왕자>, <사명당>, <운현궁의 봄>, <단종애사> 등 사극을 무대에 올렸다. 당시 평자들은 신파조의 연극에 대해 비판을 했으나 그의 연극 활동은 해방을 맞은 백성으로서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1947년 변사시절 제자인 윤대룡이 김춘광의 대표작 <검사와 여선생>을 영화로 만들고자 스승의 허락을 구한다. 언제나 관객을 몰고 다니던 신파극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김춘광의 제자인 윤대룡에 의해 16밀리 무성영화로 영화로 만들어진다. 당시 열악한 제작환경으로 35밀리 유성영화의 제작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1948년 6월, 우미관에서 개봉된 후 이 영화는 전국을 돌며 관객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1949년 6월, 청춘극장에서는 조건 작 <괴도 일지매>를 국도극장에서 공연 중이었다. 분장실 입구에 있던 김춘광은 모기에 물렸다. 여배우 윤신옥에게 "이거 뇌염모기 아닐까" 농담을 건넸다. 그날 저녁부터 고열이 나기 시작한 김춘광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으나 알 수 없는 열병으로 7월 19일 사망했다. 장례는 연예계가 총출동되어 홍제동 화장터에서 열렸다. 평소 존경하던 나운규의 장례가 열린 그곳으로 김춘광도 그렇게 떠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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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기 조선영화인 13] 아편중독으로 우미관에서 객사한 변사 서상호

뿡뿡이춤 추는 변사, 경성을 휘어잡다

 

1937년 8월 12일 밤, 서울 종로 관철동에 있는 우미관 화장실에서 중년의 행려자가 숨을 거뒀다. 아편중독자였던 그는 가끔씩 우미관에 나타나던 인물이었다.

 

"나리, 초기(허기)가 나서 못살겠습니다. 좀 적선합쇼."

 

어두컴컴한 객석 사이를 비집고 손을 내밀던 그의 모습에 관객들은 깜짝 놀라 얼굴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행려자의 이름은 서상호. 나이 49세. 활동사진계 최초의 스타로 그의 웅변식 설명과 '뿡뿡이 춤'은 관객들의 인기였다. 혹여 지방순회라도 갈 것 같으면 경성의 관객들은 그가 돌아오기만 목 빠지게 기다렸다. 그런 서상호가, 변사로서 전성기를 보낸 우미관에서,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더럽다던 우미관 화장실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1920년 단성사 주임변사 서상호의 남선순업대 광고

 

1889년 부산에서 태어난 서상호는 동학혁명이 들불처럼 퍼지고 조선이 청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던 1894년, 정변과 관련 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마친 그는 고향 부산으로 건너와 잠시 머물다가, 경성으로 올라와 종로경찰서의 전신인 수문동(水門洞)경찰서의 조선인 통역으로 일하게 된다.

 

일본 경찰의 통역으로 활동하던 서상호의 구변은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였다. 주변 동료들은 서상호의 구변이 활동사진관 변사들보다 훨씬 났다며, 활동사진 변사로 진로를 전환할 것을 권유했다. 주변의 권유로 서상호는 일본경찰의 통역에서 고등연예관의 활동변사로 직업을 바꾼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되던 1910년, 일본의 영화배급사인 다이아몬드상회는 조선 최초의 활동사진 전용관인 고등연예관을 세웠다. 고등연예관 건립 이전까지는 조선에서 활동사진은 상설상영되지 못했다.

 

고등연예관은 지금의 을지로 2가 외환은행 본점에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부근에 지어진 흰색 외벽의 건물이었다. 조선인 관객과 일본인 관객 모두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일본인 변사와 조선인 변사를 함께 두었다. 고등연예관이 등장하자 변사가 활동사진의 내용을 설명해 주는 일본식 영화상영이 조선에 정착되었다.

 

고등연예관은 조선어와 일본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서상호를 고용함으로써 두 명의 변사를 고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 활동사진 설명은 일본인 변사가 오른쪽 막을 열고 등장해서 상영할 영화를 설명하고 들어가면 왼쪽 막에서 조선인 변사가 등장하여 우리말로 다시 설명을 하고 들어간 후, 10분내외의 활동사진을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서상호는 혼자 등장해서 조선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조선인 관객과 일본인 관객 모두를 상대할 수 있었다.

 

1910년 경성고등연예관 전단지. 변사가 주목 받기 전이어서 전단지에 변사의 이름은 없다.

 

서상호는 고등연예관에서 변사로 활동하며 인기를 얻었지만 일본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신파배우 임성구와 같은 진짜 스타가 되고 싶었다. 그는 신파극의 주인공이 되고자 신파극단인 혁신선미단에 참여한다.

 

1910년경부터 조선인 신파극단이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다. 1909년에 조직된 임성구의 혁신단이 그 효시였다. 일본인 극장의 하족실(신발을 벗어 보관하는 곳)에서 일하던 임성구는 일본신파극단의 공연을 어깨너머로 보고 신파극을 익혀 공연했다.

 

처음에는 서툴기만 했던 그들의 공연은 날이 갈수록 수준이 높아졌다. 1910년대 초반에 이르면 혁신단의 공연은 일정 수준으로까지 성장하여 임성구는 당대의 스타로 관객의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된다. 신파극이 인기를 끌자 변사들도 신파극단에 참여하여 임성구의 혁신단에 도전장을 낸다. 서상호와 마찬가지로 최초의 변사 중 한명인 우정식도 신파극단 이화단에서 활동했다.

 

1912년 조중장이 혁신선미단을 만들었다. 서상호도 이에 참여했다. 어깨너머로밖에 배울 수 없었던 임성구에 비해 서상호의 혁신선미단은 장점이 많았다. 외국어 학교 출신의 조중장이 단장이었고,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바 있던 당대의 스타변사 서상호와 후지와라상회(藤原商會)를 운영하던 일본인 상인 후지와라 쿠마타로(藤原熊太郞)도 발기인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일본 신파를 조선식으로 번안해 상연한 임성구의 신파극은 수준이 떨어진다고 본 이들은 일본신파 그대로를 상연하는 것이 옳다고 봤다. 이러한 움직임에 서상호, 우정식 등 유명변사들이 동참했다. 그 이유는 일본 신파 레퍼토리들이 대부분 활동사진으로 만들어져 유명한 신파 레퍼토리들은 변사들이 다 꿰고 있었던 바, 이들이 보기에 임성구의 신파극은 원본과 많이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서상호가 참여한 혁신선미단이나 우정식의 이화단은 곧 사라진다. 우선 일본 신파극을 그대로 재현한 이들의 신파극이 임성구의 그것보다 세련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일본을 배경으로 하기에 조선인 관객들이 공감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았던 것이다.

 

또한 주요 배역을 맡았던 스타변사들의 경우, 배우로 활동하는 것보다 변사로 활동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많은 이점이 있었다. 활동사진관 경영자들은 관객에 미치는 영향이 큰 변사들에게 사택을 지원해 주고, 파격적인 금액의 월급을 주면서 이들을 붙잡아 두었던 반면 신파극단은 수익도 적었을 뿐더러 이를 단원들이 나눠 가져야 했다. 서상호는 몇 번의 공연을 끝으로 다시 고등연예관 변사로 돌아갔다. 혁신선미단도 곧 활동을 멈췄다.

 

1912년 12월, 종로 관철동에 우미관이 만들어졌다. 이즈음 우미관과 함께 대정관, 황금관이 만들어지면서 경성의 활동사진관은 총 4개로 늘었다. 본격적인 활동사진시대가 열린 것이다. 대정관과 황금관은 일본인 관객만을 대상으로 하는 일본인 상설관이었고, 우미관은 조선인을 상대로 한 조선인 상설관이었다. 고등연예관의 유명 변사들이 황금관, 대정관, 우미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상호도 고등연예관에서 우미관의 주임 변사로 자리를 옮겼다. 대우도 훨씬 좋아졌다.

 

고등연예관의 활동사진은 일본에서 상영이 끝난 지 한참 지난 구작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대정관은 일본의 독점적 영화기업인 니카츠의 조선대리점으로 니카츠에서 만든 최신의 영화들을 직수입해 상영했다. 대정관과 경쟁하던 황금관도 1914년부터 니카츠에 대항하던 텐카츠의 조선대리점으로 텐카츠 최신의 일본영화를 다투어 상영했다.

 

1912년 우미관을 세운 일본인 하야시다 긴지로

 

 

조선인 상설관 우미관도 요코하마에서 직수입한 최신의 서양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우미관을 세운 이가 하야시다상점을 운영하던 하야시다 긴지로(林田金次郞)였는데, 요코하마에서 들어오는 하야시다 상점의 화물에 최신의 활동사진들이 추가되었던 것이다. 고등연예관은 경쟁상대가 될 수 없었다.

 

변사의 설명도 바뀌었다. 화면과 동시에 설명을 하는 중설(中說)이 가능해진 것이다. 서상호는 화면의 속도와 설명의 템포를 맞추는 데 있어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는 평을 얻었다. 타이틀에 없는 말도 지어내어 재미를 배가 시켰다. 또한 필름을 갈아 끼우는 사이사이에 등장해서 그 특유의 '뿡뿡이 춤'으로 관객들의 지루함을 달래줬다.

 

'뿡뿡이 춤'이란 고무로 만들어진 자전거 경적을 다리 가랑이 사이에 끼워 추는 춤인데, 뿡뿡 소리에 맞춰 하와이안 댄스, 탭 댄스 등 각종 춤을 추는 것이다. 이 춤은 코믹하면서 선정적이어서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모두 좋아했다. 특히 여성 팬들의 연모의 심정을 담은 팬레터와 선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최홍련, 엄산월 등 당대의 명기들이 서상호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서상호의 몸값과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신파배우 임성구에 못지 않은 스타가 된 서상호는 돈을 물 쓰듯 하며 주색에 빠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편에도 손을 댔다.

 

아편중독으로 쓰러진 스타변사  

 

1913년 고전하던 고등연예관이 대정관을 운영하던 닛다 고이치에게 매수되어 제2대정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극장성격도 일본인 극장으로 바뀌었다. 닛다는 6만~7만에 불과한 경성의 일본인을 상대로 3개관이 경쟁하기 보다는 경성의 20만 조선인관객을 독점하던 우미관을 견제하는 편이 났다고 판단하고 1914년 제2대정관을 일본인 극장에서 조선인 극장으로 바꾸었다.

 

닛다연예부를 세워 영화배급업을 함께 하고 있던 닛다는 극장흥행에 있어 변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2대정관을 조선인극장으로 전환 후, 조선인 변사 중 가장 인기 있던 서상호를 우미관에서 제2대정관으로 데려 온다. 졸지에 서상호를 잃게 된 우미관에서는 다시 서상호를 불러들이기 위해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한다. 우미관과 제2대정관 사이에서 서상호 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의 몸값은 점점 더 올라갔다.

 

모든 조선관객들이 서상호에 주목했다. 서상호는 일부 관객들에게 "건방지다"라는 비난을 자주 받았지만 여전히 구변은 좋았고, 다른 변사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뿡뿡이 춤'이라는 그만의 볼거리도 있었다.

 

영화배급사인 닛다연예부를 중심으로 1910년대 조선의 영화산업을 장악한 닛다 고이치의 가족사진

 

활동사진이 대중의 사랑을 받을수록 서상호의 인기도 같이 올라갔다. 1916년 우미관에서 연속영화(시리얼) <명금(名金)>(The Broken Coin)을 설명할 당시가 서상호 인기의 정점이었다.

 

연속영화라는 것은 지금의 TV드라마의 원조로 2권(릴)(약20분 분량)이 하나의 에피소드로 보통 15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시리즈물을 말한다. 주로 모험영화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마지막은 꼭 아슬아슬하게 끝나 관객들이 일주일마다 바뀌는 에피소드를 보러 극장을 찾게 만드는, 이 당시 활동사진 흥행에 가장 중요한 영화였다. 이 연속영화 중에서 가장 큰 인기를 얻었던 작품이 <명금>이었고 이것을 서상호가 설명한 것이다.

 

유니버셜에서 제작하고 존 포드의 형인 프란시스 포드가 연출한 <명금>은 대단한 인기였다.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나 하면 서상호의 설명을 당시 관객들이 유행어처럼 외고 다닐 정도였다. 활동사진의 인기도 인기였지만 서상호의 설명이 더 큰 인기였던 것이다.

 

<명금(The Broken Coin)>(1915)의 엽서

 

그러자 일본인 극장인 황금관이나 유락관에서는 조선인 관객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때 서상호를 특별 초대하여 설명을 맡겼다. 또한 일본인 극장에서의 연쇄극이나 변사극에 조선인 변사로는 유일하게 서상호를 초빙하여 출연시키기도 했다.

 

1917년 황금관 소유주인 다무라 요시지로가 단성사를 인수하여 1918년 활동사진관으로 재건축한다. 운영은 광무대를 이끌던 박승필에게 맡겼다. 박승필은 우미관에 있던 서상호를 끌어오려고 계획을 세운다. 박승필의 계획을 눈치챈 우미관에서는 서상호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직원들을 동원하여 그를 감시하도록 했다.

 

그러던 어느날 서상호를 포함해 우미관의 영사기사, 악사, 변사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들은 여느 날처럼 흥행을 마치고 우미관 직원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지방으로 도망 간 것이다. 단성사 개관 직전이 되어서야 서울로 돌아온 이들은 우미관이 아닌 단성사로 출근했다. 이를 주도한 서상호는 변사주임으로 단성사의 전무취체역이 되었다.

 

서상호를 위시하여 조선인 유명 변사, 악사, 영사기사를 모두 확보한 단성사는 조선인극장으로 독보적 지위를 얻게 된다. 단성사에서는 서상호의 설명으로 <명금>을 재상영했고, 이어 <암굴왕>을 상영했다.

 

"오, 하느님이시어! 원수의 하나를 이제야 갚았습니다. 20여년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무변 대해인 차디찬 감옥에서 꽃같은 청춘을 속절없이 다 늙히고, 복수에 불타는 일념은 골수에 사무쳐 저는 언제나 이날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오, 하느님이시어!"

 

서상호의 <암굴왕> 설명에 관객은 열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단성사에서의 활약은 막을 내렸다. 아편중독으로 설명을 빼먹는 일이 허다했고 내용도 부실했기 때문이다. 변사주임은 김덕경으로 바뀌었다. 1925년부터는 서상호를 대신해서 단성사의 영사기사로 있던 동생 서상필이 영화 설명에 나섰다.

 

1918년 활동사진관으로 재건축된 단성사의 개관 광고

 

아편중독자 서상호는 더 이상 활동사진 설명을 할 수 없었다. 모르핀 주사를 맞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그는 극장을 돌아다니며 돈을 빌렸다. 이것도 여의치 않자 가재도구를 팔아 아편을 샀다. 더 이상 팔 것이 없자 절도를 했다.

 

1925년 서상호는 절도혐의로 체포되었다. 유치장에서 미친 사람처럼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다가 순사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지만 본래 경찰 출신었기에 유치장에 있으며 아편을 끊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출소 후에는 다시 아편에 손을 댔다. 같은 해 아내 한세숙과 이혼하여 육년간의 결혼생활도 끝났다.

 

1926년에는 남의 집에서 외투를 훔쳐 달아났다가 양평에서 체포되었다. 근신을 위해 다시 변사 생활을 하려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주변에서도 그에게 더 이상의 도움을 주지 않았다. 종로통을 돌아다니며 아는 얼굴을 찾아 구걸을 했다.

 

"나으리, 옛날의 서상호올시다. 좀 적선합쇼. 10전만 줍시요. 나리님 옛날 서상호를 이렇게 괄시하십니까?"

 

파고다공원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명금>, <암굴왕> 같은 과거 변사로 전성기를 보낼 당시의 활동사진 설명을 들려주고 사람들이 던져주는 돈을 받았다.

 

서상호는 과거 자신이 전성기를 보낸 우미관을 돌아다니며 관객들에게 손을 벌렸다. 아편중독자가 객석을 다니며 구걸하던 우미관은 당시 관객들에게는 3류극장이었다. 1912년 개관하여 한때 경성의 20만 조선인을 상대로 한 유일한 활동사진관으로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1918년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바뀌고, 1921년 조선극장이 신축되자 2류극장으로 전락했다. 1930년부터 토오키 영화가 상영되고 명치좌, 약초극장 등 최신식 극장이 들어서자 낙후한 시설의 우미관은 2류극장에서 3류극장으로 추락했다.

 

1937년 8월, 우미관 화장실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활동사진시기 최초의 인기스타였던 변사 서상호는 아편중독자가 되어 더 이상 그의 목소리가 필요하지 않은 극장에서 초라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조선 최초의 토오키 영화인 <춘향전>이 개봉된 지 2년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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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기 조선영화인 14] 영사기사 출신 극장 운영자 박정현

순수 조선인만의 힘으로 만든 <장화홍련전>

 

프린트 벌수제한이 폐지된 1994년 이전만 해도 개봉영화는 소위 일류극장이라고 하는 시내의 개봉관에서만 볼 수 있었다. 지금이야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주요한 흥행영화가 처음 상영된 장소라는 의미는 극장의 위상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래서 <겨울여자>(김호선 연출, 1977), <장군의 아들>(임권택 연출, 1991), <서편제>(임권택 연출, 1993) 등 역대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갱신한 영화를 개봉했던 단성사는 오랫동안 한국영화의 메카로 불렸다.

 

단성사는 1907년 설립되어 100년의 역사를 훌쩍 넘겼다. 식민지시기 단성사는 단순한 극장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30년대 초반까지 변사의 목소리에 따라 일본인극장, 조선인극장으로 나뉘었던 경성의 극장가에서 단성사는 조선인 극장의 대표였다.

 

단성사 말고도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우미관과 화려한 시설의 조선극장이 존재했지만 그 역할은 조선인을 상대로 한 활동사진 상영에 한정되었다. 반면 단성사의 경우 혁신단, 신극좌, 신무대 등 일부 극단을 극장 전속으로 두어 운영했고, 금강키네마, 원방각사 등 방계 영화회사에 운영자금을 투입하여 영화제작에 나서는 등 우리영화를 상영한 것 이상의 역할을 담당했다.

 

단성사의 전성기는 1920년대였다. 광무대를 운영하며 능력을 인정받아 1918년부터는 단성사까지 운영하게 된 박승필이 단성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32년 그가 사망하자 단성사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윤백남이 신문에 조사를 발표했을 정도로 흥행계의 존경받는 원로였다.

 

활동사진관 운영경험이 일천했던 박승필이 단성사의 전성기를 이끌 수 있었던 데에는 최초의 영사기사이자, 우리 영화 최초의 프로듀서이기도 했던 박정현의 도움이 컸다. 그는 박승필 사후 단성사를 이끌었고 일본의 거대 자본 앞에 고군분투하다 단성사와 함께 몰락한 인물이었다.

 

지금 그의 이름은 한국영화사 속에 간단히 언급될 뿐이다. 이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사라졌지만 망각의 늪으로 쓸려 들어간 그의 인생은 기억될 만한 것이다. 이에 그에 관한 작은 흔적들을 찾아 살피고 더듬어 그의 일생을 복원해보고자 한다.

 

박정현은 1886년 음력 2월 7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한때 함흥군수까지 지냈으나 정현이 3살 되던 해에 사망했다. 아버지를 여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형수와 어머니와의 불화로 어머니와 함께 분가한 이후로는 찢어지는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어려서부터 온갖 궂은일을 해야 했는데 담배를 좋아하던 어머니를 위해 6살 무렵 담배목판을 열어 담배장사를 하기도 했다. 이후 은방의 심부름꾼, 약국의 점원 등으로 유년기를 보냈다.

 

어렵던 유년시절을 지나 청년이 된 박정현은 1910년 고등연예관이 설립되자 영사기사로 입사한다. 고등연예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활동사진 전용관으로 개관 당시 영사기사로는 아오모리현(靑森縣) 출신의 나까무라 쇼타로(中村初太郞)가 있었다. 일본인 영사기사 밑에서 영사기술을 배운 박정현은 주로 고등연예관의 출장영사와 지방순회 영사 등에 나섰다. 순회영사대(순업대)는 활동사진관이 없는 지방을 순회하는 영업방식으로 회계, 영사기사, 변사 등 10명 정도가 한팀이 되었다. 박정현은 훗날 스타변사가 되는 서상호와 짝이 되어 주로 남선지역을 순회했다.

 

1912년 관철동에 활동사진관인 우미관이 만들어지면서 박정현은 서상호와 함께 고등연예관에서 우미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미관은 경성에서 조선인 관객을 상대로 한 유일한 활동사진관이었다. 박정현은 우미관의 영사기사 주임, 서상호는 변사주임으로 활동했다. 경성의 20만 조선인 관객을 독점하고 있던 이 시기가 우미관의 전성기였다. 

 

1917년 일본 대장성 관료 출신으로 조선에 건너와 고리대금업으로 거부가 된 다무라 요시지로(田村義次郞)가 김연영이 소유하고 있던 단성사를 매수한다. 다무라는 당시 일본인 활동사진관인 황금관과 박승필이 운영하던 광무대를 소유하고 있었다. 단성사를 조선인 활동사진관으로 전용하기로 한 다무라는 광무대를 운영하고 있던 박승필에게 단성사의 운영을 맡긴다. 다무라에게서 운영권을 획득한 박승필은 단성사를 활동사진관으로 다시 짓고 1918년 12월 단성사를 활동사진관으로 재개관한다.

 

활동사진관 운영 경험이 일천한 박승필이 단성사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경험자가 필요했다. 박승필은 우미관 영사기사인 박정현과 인기변사 서상호에게 동업을 제의한다. 이 둘은 박승필에게서 전무취체역을 보장받고 우미관에서 단성사로 자리를 옮겼다. 우미관의 중요한 두 축이 빠짐으로써 우미관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는다. 우미관을 대신해 단성사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단성사 개관 이후 아편중독에 빠진 서상호는 곧 단성사와 작별하게 되지만 박정현은 단성사의 지배인으로 실질적으로 활동사진관 운영을 책임졌다. 박정현은 운영자 박승필을 도와 일본의 영화회사인 곳카츠(國活)와 미국의 영화사인 유니버셜사 등과 특약을 맺고 우수한 활동사진 필름을 상영했다. 이어 일본인 활동사진관에서 유행하던 연쇄극을 제작하기 위해 경영난에 빠져 해산 위기에 있던 김도산의 신극좌와 임성구의 혁신단을 단성사 전속 극단으로 끌어드려 1919년 10월 27일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제작했다.

 

1921년 엘리베이터까지 갖춘 조선극장이 탄생하지만 여전히 조선인 극장의 대표는 단성사였다. 그러던 1923년 황금관을 운영했던 하야가와 고슈(早川孤舟)가 조선총독부에서 개최한 부업공진회에 맞춰 활동사진 <춘향전>을 제작한다. 하야가와는 1910년대 일본의 메이저 영화회사인 텐카츠(天活)의 조선대리점을 운영하며 또 다른 일본의 메이저 영화회사인 니카츠(日活) 영화를 조선에 배급했던 닛다 고이치(新田耕市)와 함께 조선영화계를 양분하던 영화계 거물이었다.

 

단성사에서 개봉된 하야가와 고슈의 <춘향전>은 부업공진회를 구경하기 위해 경성으로 올라온 조선인 관객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1원이라는 평소 입장료의 수배가 넘는 비싼 입장료를 받았음에도 관객은 연일 매진이었다. 단성사에서는 <춘향전>의 엄청난 성공에 자극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24년 박정현은 극영화 제작을 구상한다. 때마침 우미관 영사기사 시절 박정현의 조수를 하던 이필우가 일본 데이코쿠(帝國)키네마에서 촬영기사로 활동하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조선에 돌아와 있었다. 박정현은 이필우를 만나 영화촬영 계획을 이야기하고 함께 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단성사 운영자 박승필의 설득에 나섰다. 박승필은 검증되지 않은 촬영기사를 믿고 선뜻 거액을 지원할 의사가 없었다. 박정현의 거듭된 설득으로 박승필은 우선 비용이 적게 드는 동아일보 주최 전선여자정구대회의 촬영을 맡긴 후 그 결과를 보고 영화제작을 할지 말지 생각해 보자고 했다.

 

이필우는 카메라를 빌려 정구대회의 촬영을 했다. 그날 밤 촬영된 필름을 현상하고 다음날 아침에 프린트로 만들어서 촬영된 필름을 박승필에게 보여주었다. 촬영은 성공이었다. 촬영된 필름을 본 박승필은 극영화 제작에 자금을 투자할 것을 결정한다.

 

1924년 9월 5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장화홍련전>의 광고. '단성사 박승필연예부고심대작', '기회를 잃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로써 박정현의 주도로 극영화 제작이 시작되었다. 제목은 <장화홍련전>. 감독 박정현, 촬영 이필우, 각색 김영환, 자막 김학근이었다. 박정현의 직책은 감독이었지만 연출이 아니라 제작을 책임지는 프로듀서의 역할이었다. 실제 연출은 단성사에서 검열관련 업무를 보던 이구영이 맡았다. 스태프들이 모여 시나리오 낭독을 시작했다.

 

이구영이 김영환이 쓴 시나리오를 낭독하면 김영환이 중간 중간 이야기를 보충했다. 이야기가 완성되자 배역을 정했다. 장쇠 역과 사또 역에는 단성사의 변사 최병룡과 우정식이 맡았고, 장화와 홍련 역에는 광무대에서 활동하던 김옥희와 김설자, 그 외 배역 역시 단성사 직원들이 나누어 맡았다.

 

스태프와 배역이 결정되자 촬영이 시작되었다. 로케이션은 시외 영도사로 정했다. 지금의 고려대 근처에 위치한 개운사이다. 절 한 귀퉁이를 세내어 촬영을 했다. 혹서기여서 배우들의 분장이 땀에 흘러내리는 등 쉽지 않은 촬영이었지만 단성사 영화팀은 박정현의 지도로 3주 만에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최종 완성된 필름은 총 8권 분량으로 영사시간만 2시간가량이었다.

 

1924년 9월 5일 <장화홍련전>이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설명은 단성사의 인기변사이자 <장화홍련전>의 시나리오를 쓴 김영환이 맡았다. 단성사에서는 평소 10전하던 관람료를 50전으로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관객으로 인해 이례적으로 평일 주야로 2회 상영에 9일간 장기 상영했다. 당시 활동사진관에서는 5일마다 필름을 교체했으며 일요일에만 주야 2회 상영일 뿐, 평일은 야간 1회 상영이 전부였다.

 

박정현이 제작을 책임진 <장화홍련전>은 서양영화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을 받긴 했지만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특히 이 작품은 자본에서 스태프, 배우에 이르기까지 순조선인의 힘으로 제작된 최초의 영화라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단성사에서 상영된 <장화홍련전>은 조선인 관객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후 지방 상영으로 이어졌다. 경성의 경우 조선인 전용 극장이 존재했지만 지방의 경우 조선인을 상대로 한 극장이 드물었기 때문에 순회영사대의 형식으로 상영이 이루어졌다. 경리를 맡은 박승필의 인척들이 직접 순업대를 이끌었다.

 

<장화홍련전>의 성공과 영화제작

 

<장화홍련전> 성공을 기회로 단성사의 박승필은 영화제작에 본격적으로 자금을 투입하기로 한다. 영화제작의 책임은 박정현이었다. 그는 <장화홍련전>에서 손발을 맞췄던 이구영과 이필우를 중심으로 영화제작을 준비한다. 당시 이구영은 시마무라 호오게츠(島村抱月)가 세운 예술좌에서 신파극을 배워온 현철(玄哲)과 함께 조선배우학교를 세워 1회 연구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1925년 박정현은 조선배우학교 측에 단성사와 함께 영화 제작을 하자고 제안한다. 막 간판을 달고 활동을 개시하려던 조선배우학교 측에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박정현은 동국문화협회를 세워 그 산하에 조선배우학교를 편입시키고 영화제작을 준비했다. 현철의 주장대로 <숙영낭자전>을 영화로 만들기로 한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현철이 단성사와 조선배우학교 사이의 이윤 배분을 기존 7:3에서 6:4로 조정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여기에 조선배우학교 학생들의 분규가 더해져 사태는 복잡해졌다.

 

박정현은 동국문화협회를 해산했다. <숙영낭자전> 제작을 포기한 것이다. 그는 문제의 발단이 된 현철을 제외하고 애초 계획대로 이구영, 이필우 만을 데리고 영화를 제작하기로 한다. 박정현이 이필우, 이구영 등과 세운 고려영화제작소에서는 일본의 신파소설을 번안한 <쌍옥루>를 제작하기로 한다.

 

<쌍옥루>에는 일본에서 활동하다 조선으로 돌아온 김택윤과 강홍식 등이 출연했다. 영화의 길이가 길어져 상, 하 두 편으로 제작된 <쌍옥루>는 1925년 개봉되어 흥행적으로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고려영화제작소는 이구영과 이필우, 김택윤 등 주요 성원들 사이의 불화로 <쌍옥루>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작품으로 남기고 문을 닫았다.

 

스타 나운규와 손을 잡다

 

1926년 단성사에서는 춘원 이광수의 주선으로 영화카메라를 구입한다. 이를 기회로 단성사 직속 영화부인 금강키네마를 설치한다. 금강키네마 역시 박정현이 책임자였고 단성사 선전부에 입사한 이구영이 연출자로 가세했다. 금강키네마 1회작 <낙화유수>를 준비하던 중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제작된 나운규의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된다.

 

주로 고전소설과 일본 신파극을 번안한 작품만이 영화로 제작되던 상황에서 당대 조선의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 등장하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카프 출신 평론가 최승일(崔承一)이 소설시대의 종언을 고했을 정도로 <아리랑>은 당대 지식인들의 관심과 대중의 지지를 함께 받았다. 박정현도 나운규를 주목했다.

 

<아리랑>과 <풍운아>를 연속적으로 성공시킨 나운규는 당시 조선영화계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나운규의 위치가 공고히 해질수록 행동은 독선적으로 바뀌었다. 1927년 공산주의 사상을 지닌 주인규, 남궁운, 이규설 등 오래전부터 나운규와 행동을 같이하던 동료들이 이념적 차이를 이유로 나운규와 결별한다.

 

그러던 차에 박정현이 나운규와 만난다. 박정현은 나운규에게 일본인 밑에서 영화제작을 하지 말고 단성사에서 자금을 지원해 줄 테니 차라리 독립하라고 설득한다. 나운규는 박정현과 함께 하기로 약속하고 동인제 회사인 나운규프로덕션을 세운다. 대표격인 총간사는 박정현이 맡았다.

 

1927년 9월 21일 <동아일보>에 실린 나운규프로덕션 창립 기사

 

1927년 단성사 직속의 금강키네마와 방계인 나운규프로덕션의 총지휘(프로듀서)를 맡게 된 박정현은 개봉되는 조선영화 대부분에 그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더불어 이 시기 단성사 직속 극단격인 신무대도 운영하면서 박승필의 대리인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던 상황에서 나운규가 박정현을 배신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1928년 <만주강을 건너서>라는 이름의 영화를 촬영 중이던 나운규가 단성사의 자금 외에 조선극장 측에서도 자금을 지원받아 제작비로 사용한 것이다.

 

이 영화는 검열에서 문제가 되어 제목이 <사랑을 찾아서>로 바뀌었는데 나운규가 영화의 개봉을 단성사가 아닌 조선극장에서 한 것이다. 나운규, 단성사, 조선극장 사이에 고소 고발이 이어지며 폭풍 같은 풍파가 지나갔다. 나운규와 단성사와의 관계는 이로써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죽마고우인 윤봉춘을 비롯한 동인 대부분이 나운규의 방종과 무책임을 이유로 나운규에게서 등을 돌리면서 승승장구하던 나운규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혼자 남은 나운규는 박정현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대 최고의 스타를 버릴 수 없었던 박정현은 금강키네마와 나운규프로덕션을 통합한 원방각사라는 영화사를 차려 나운규를 잡아두고 <아리랑>의 속편 제작을 하는 조건으로 고소, 고발 사건을 취하한다. 1930년 박정현의 지휘로 <아리랑>의 속편 격인 <아리랑 그 후 이야기>가 제작된다. 이구영 연출, 나운규 주연이었다. 이어 나운규 연출, 주연의 <철인도>도 제작되었다. 이 영화들은 좌익영화인들의 집중적인 공격대상이 되었다.

 

이후 원방각사의 활동은 지지부진 했다. 대공황의 여파로 조선에도 불황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인 극장 간의 경쟁으로 수입영화의 단가가 폭등하자 극장 경영은 더욱 어려워졌다. 1930년부터 경성에 상영되기 시작한 토오키 영화로 인해 무성영화를 제작할 필요성도 줄어들었다. 단성사에서는 더 이상 영화제작 자금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 시기 조선 영화의 제작 편수는 급감한다.

 

박승필 사후 단성사 경영

 

1932년 단성사 운영자 박승필이 사망한다. 단성사의 2인자였던 박정현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토월회의 박승희와 박승필 간의 단성사 운영권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다툼이 마무리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박승필이 가지고 있던 단성사 운영권이 누구의 손에 돌아갈지가 초미의 관심이었다. 당시 단성사를 소유하고 있던 다무라 미네는 단성사의 운영권을 단성사 지배인인 박정현을 중심으로 한 단성사 종업원 측에 넘겨주었다. 박정현은 박승필의 유족에게 금전적 보상을 약속하고 단성사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게 된다.

 

박승필의 유족이 경영에서 물러난 단성사는 박정현을 중심으로 동인제로 운영되었다. 박정현은 아들 박명준에게 매표주임을 맡겼고, <장화홍련전> 이후 박정현이 지휘한 대부분의 영화를 연출한 이구영과 서상호의 동생이자 단성사 영사기사 출신으로 변사로 전향한 서상필 등 자신과 가까운 인물들로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1933년 박정현은 동인제로 운영되던 단성사를 경영난을 이유로 박정현 사장체제로 바꾸었다.

 

박정현의 친정체제로 운영되던 단성사의 경영은 날로 악화되었다. 대내외적인 상황 모두 호의적이지 않았다. 1934년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이 시행되자 모든 영화관에서는 외국영화와 국산영화(일본영화)를 비슷한 비율로 상영해야 했다. 서양영화전용관으로 일본영화를 상영하지 않던 단성사에서는 의무적으로 일본영화를 상영해야 했고 이제 조선인 극장들과의 경쟁뿐만 아니라 남촌의 일본인 극장들과도 경쟁해야 했다. 낡은 시설도 문제였다. 1918년 지어진 단성사 건물은 새로 신축된 남촌의 영화관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1934년 12월 박정현은 토오키 영화 상영에 알맞은 모습으로 단성사를 신축 개관한다. 그러나 600여석에 불과한 단성사는 1000석 이상의 약초좌, 명치좌 등 남촌의 극장에 비해 협소했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의 메이저 영화회사들과 직영 혹은 공영 형태로 운영되던 남촌의 영화관은 단성사에 비해 수준 높은 영화들을 공급 받을 수 있었기에 프로그램에서도 차이가 났다. 자연스래 단성사는 2류 영화관으로 전락한다.

 

1934년 12월 신축된 단성사

 

 

 

 

단성사와 함께 몰락

 

1937년 박정현은 경영난을 타계하기 위해 극단 중앙무대와 손잡고 동양극장과 같은 연극전용관으로의 전환을 꾀했으나 실패했다. 믿었던 아들 박명준이 바람이 나 자금을 횡령해 써왔던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금고는 텅텅 비었고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아직 단성사의 신축비용도 갚지 못한 상황이었다.

 

박정현은 충격으로 몸져누웠다. 이 사이 단성사 운영권을 두고 분쟁이 발생했다. 단성사 고문변호사 혼다(本田)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김영호 등이 단성사의 운영권을 빼앗기 위해 박정현에게 1만2천원을 꿔주고 경영권을 위임 받았다.

 

이들은 박정현의 측근들을 단성사에서 몰아냈다. 해직된 이구영, 서상필, 박명준 등이 심신박약자에게 받아낸 위임장은 무효라며 진정을 냈다. 곤란해진 김영호 등은 우선 이들을 다시 복직시키고 운영권을 양도했다. 그러나 이도 잠시였다. 2차 경영권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채권자인 혼다와 김영호, 본정에서 여관을 운영하던 깡패 하야시(林)까지 가세해서 단성사의 운영권을 동아부인상회를 운영하던 최남(崔楠)에게 팔아 버린 것이다.

 

박정현은 처가에서 돈을 빌려 가까스로 운영권을 다시 획득했다. 그러나 경영할 능력이 없었다. 연이어 3차 경영권 분쟁이 일어났다. 이번엔 박정현의 사촌처남까지 가세하여 박정현에게서 운영권을 빼앗았다. 권총을 들이민 이들의 협박에 박정현은 4500원이라는 헐값에 단성사의 운영권을 일본국수회 소속의 흥행업자 와께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단성사의 운영권을 빼앗기고 엄청난 빚더미를 떠안게 된 박정현은 빈털터리가 되어 뚝섬의 토굴 같은 집으로 쫓겨 간다. 그는 거동도 못하는 상황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한때 조선영화의 총지휘자로 활약했으며 박승필 사후 단성사를 이끌었던 조선영화의 대부의 종말은 이렇게 비참했다. 1939년 8월 22일 박정현은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박정현의 손을 떠난 단성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1939년 6월, 단성사의 경영권은 명치좌를 운영하고 있던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넘어갔다. 이시바시는 조선색이 강한 단성사라는 이름 대신 새로운 이름을 공모했다. 1939년 9월 단성사는 내부 시설을 새롭게 단장하고 일제의 대륙침략을 기념하는 의미의 대륙극장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재탄생 했다. 

 

공교롭게도 박정현의 죽음과 함께 단성사라는 이름도 함께 죽은 것이다. 해방이 되어서야 단성사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처음 맞는 3·1절을 기념하여 대륙극장은 적산관리인과 종업원들에 의해 원래 이름인 단성사로 개칭되었다. 

 

참고 문헌

林鍾國 ; 朴魯埻 共著, 「朴晶鉉 篇」, 『흘러간 星座 : 오늘을 살고간 韓國의 奇人들』, 國際文化社, 1966. 
한국예술연구소 편, 『(이영일의)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 / 복혜숙 / 이구영 / [이영일 대담]』, 도서출판 소도, 2003. 『每日申報』 『東亞日報』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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