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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영화 이야기

이창동 감독의 시(詩)

by Wood-Stock 2010. 6. 7.

수많은 여백과 쉼표, 물음표가 촘촘하게 배어있는 <시>

영화 <시>를 보고 노무현을 떠올렸습니다

 

카메오(우정 출연)치곤 색다릅니다. 영화와는 거리가 멀 것 같던 두 사람이 영화에 출연해서 입니다. 먼저 김용택이 아니라 김용탁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섬진강 시인'으로 친숙한 김용택 시인이 생애 첫 연기에 도전했습니다. 그가 맡은 배역은 문화센터 '시' 강사 김용'탁' 시인. 연기력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습니다.

 

또 한 명의 인물도 깜짝 출연했습니다. 최문순 민주당 의원입니다. 상임위가 문방위라 그럴까, 중학교 교감 선생님 역으로 영화에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연기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출연한 영화는? 스크린의 가객 이창동 감독의 다섯 번째 영화 <시>입니다.

 

시 쓰기의 기쁨 그리고 시 쓰기의 아픔

 

영화는 강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던 아이들 중 한 명이 강물 위로 둥실 뜬 채 떠내려 오는 여자의 시체를 발견하는 다소 충격적인 장면으로 오프닝을 엽니다.

 

경기도 소도시의 어느 낡고 작은 서민아파트. 이혼한 딸이 맡기고 간 중학생 손자를 돌보며 사는 미자(윤정희 분)는 레이스 달린 옷과 모자로 치장하기를 좋아하는 소녀 같은 심성의 할머니. 생활보호대상자이지만 동네 슈퍼 강노인(김희라)의 간병인으로 푼돈을 벌어 살림에 보태며 씩씩하게 살아갑니다.

 

▲ 문화원에 뒤늦게 등록한 미자가 김용탁 시인으로부터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생각”하며 시를 쓰라는 강의를 듣고 자신의 옛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유달리 꽃을 좋아하는 미자는 어느 날 동네 문화원의 시 강좌 포스터를 보고 한걸음에 찾아가 등록을 합니다. 소싯적부터 꿈꿔 온 시 쓰기에 마음이 들뜬 그녀에게 세상은 마치 해맑은 봄비를 맞은 뒤 무지갯빛 영롱한 빗방울을 그렁그렁 매단 한 송이 꽃과 같이 싱그럽고 아름답기만 합니다.

 

그즈음 마을 다리 위에서 여중생이 투신자살한 사건이 은밀하게 회자됩니다. 소녀의 어머니가 맨발로 산발한 채 도심 한 복판에서 퍼질러 앉아 대성통곡을 합니다. 그런데 미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은 이 사건이 그녀의 일상에 상상치 못한 파장을 일으키고, 영화는 내리막을 향해 무섭게 치닫기 시작합니다.

 

그지없이 평화로운 삶의 풍경을 노래하기 위해 생애 처음으로 시를 쓰는 여자에게 눈앞에 보이는 일상은 절대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시가 전혀 아름답지 않은 '몹쓸 짓'에 부딪쳐 아파하고 소리 없이 통곡하다 마침내 삶의 자리와 맞바꾼 그 자리에 시의 꽃을 피우는 한 편의 시 같은 영화, <시>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시는 죽어도 싸!"

 

영화는 단 한곡의 음악도 틀지 않습니다. 자동차 소리와 강물 소리만이 더운 햇살을 식히는 바람소리를 따라 간결하게 귓가를 스칩니다. 대신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세상을 향해 자신의 창을 열어 놓은 미자의 숨결과 발길과 눈길이 스크린을 가득 채웁니다. 마치 한 편의 시와 한 생명을 등치시켜 맞바꾸려 작심한 듯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는 인색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막상 시 쓰기는 고통의 과정입니다. 김용탁 시인을 통해 시작(詩作)을 듣고 배우지만 까마득합니다. 치매로 인해 기억이 깜박하는 데다, 아마추어 시 낭송회에서는 형사라는 인간이 "샤워를 다섯 단계로 나누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며 "샤워-누워-세워-끼워-고마워"라고 낄낄거리며 음담패설이나 쏟아 냅니다.

 

낭송회 뒤풀이에 참석한 김용탁 시인의 후배라는 이는 얼큰하게 취해 "씨팔, 시는 죽어도 싸!"하며 악을 씁니다. 시를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시를 조롱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아, 이제 진짜 시인조차 부패한 시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이 엄혹한 현실에서 그녀의 시 쓰기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바르르 떨리기만 합니다.

 

▲ 가해학생의 아버지들이 자살한 여중생의 엄마와 3천만 원에 합의한 뒤

사건이 잘 해결된 기념으로 파티를 열었다며 미자에게 음식을 권하고 있다.

 

그리고 그 떨림 뒤켠에는 어둠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여중생을 성폭행한 6명의 남학생 중에 낀 손자는 '몹쓸 짓'을 하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자고 먹고 게임하고, 가해 학생의 부모들과 교감선생님은 위자료 3천만 원으로 없었던 일로 치자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타협할 수 없고 타협해서도 안 되는 부도덕의 세계와 그 속의 뻔뻔한 인간 군상들 역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그녀를 습격합니다. 식당 마당에 앉아 꺽꺽 울음을 토해내던 미자는 시의 죽음에 절망하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세상과의 작별을 준비하듯이 그렇게 생애 마지막 시를 한 줄 한 줄 완성해 나갑니다.

 

<시> 처연함과 처절함 사이에서 피는 꽃

 

인간 내면에 켜켜이 쌓인 삶의 무게와 색깔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해 스크린에 투영 시켰던 이창동 감독은 전작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에 비해 이번 <시>에서는 고통의 밀도를 낮췄습니다. 하지만 잔잔한 고통의 파문이 주는 역설의 카타르시스는 한 겹 더 밀도 있게 스며듭니다.

 

그것은 시와 생명을 맞바꾸는 미자를 통해 감독이 탐구하려고 했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에 의미 있는 가치'가 주는 '존재의 무거움' 때문입니다. 돈과 실용과 토목개발이 지배하는 정글과 같은 악다구니 속에서 의미 있는 가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감독은 이 영화에서 시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로 귀결시킵니다.

 

여중생의 생명을 놓고 3천만 원의 효용과 흥정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서도 또박또박 써 내려가는 미자의 시 쓰기는 시가 죽어 가는 시대의 현실이 얼마나 타락했으며, 반면에 하잘것없어 보였던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극적으로 대비해 보여 줍니다. 마치 시란, 처연함과 처절함 사이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피는 한 송이 꽃에 다름 아니라는 듯이.

 

이를테면, 그녀가 가해학생 부모의 협상 대표로 등 떠밀려 딸을 잃은 엄마를 찾아가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막상 자연의 아름다움만 얘기하고 돌아서는 장면은 치매로 인해 절박한 현실을 망각하면서도 동시에 시심에 취한 상반된 두 모습을 대비시키며, 과연 사람의 삶의 색깔은 무엇인지 처연한 질문을 던집니다.

 

반면에 그에 대한 해답은 처절합니다. 손자의 합의금을 벌기 위해 강 노인에게 비아그라를 먹이고 합궁을 하면서도 꽃과 나무, 바람을 응시하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여자(美子)'는 시궁창 속에서도 시들지 않는 순수함으로 마침내 시를 완성하고 그리고 다리 위에 섭니다. 그 다리는 자신의 손자가 성폭행해 자살한 소녀가 뛰어 내린 바로 그 다리입니다.

 

▲ 성폭행으로 자살한 소녀가 뛰어 내린 다리 위 그 자리에 다시 선 미자를 통해 영화는 작지만 울림이 큰 반전 두 가지를 끄집어낸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영화는 그녀의 마지막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다만 관객들에게 그녀의 선택이 무엇이었는지 무언의 목격자가 되길 요구합니다. 물욕의 화신과 내재화된 폭력이 주인인양 행세하는 세상에서 잃어버린 가치를 찾아 홀연히 떠나버린 그녀와 우리들은 결코 무관치 않다는 것을. 그래 설까요. 극장 문을 나선 뒤에도 그녀의 잔상이 오래도록 거둬들여지지 않습니다.

 

그 잔상에는 수많은 여백과 쉼표, 물음표가 촘촘하게 배어 있습니다. 관객들 각자가 어떤 눈으로 <시>를 대면하느냐에 따라 해석은 천차만별이며, 거기에 부응이라도 하듯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백의 미를 유지하며 마침표를 찍습니다. 영화란 그런 것이며, 시란 더욱 더 그러니까.

 

영화의 마지막. 미자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시 '아네스의 노래'를 꽃다발과 함께 문화원에 남겨둡니다. 문제는 그녀가 남긴 시가 일 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난 바보 노무현에 빗대어도 모자람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의 흐름을 일 년 전으로 옮기고 미자를 노무현으로 바꿔 읽어도 억지스럽지 않을 정도로 <시>는 노무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녀가 처연함과 처절함 사이에서 거둔 한 편의 시가 노무현이 마지막 남긴 글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미자가 죽은 소녀와 그녀의 엄마, 손자와 가해학생들과 그 부모들을 다 안고 다리 위에 섰듯이, 노무현이 주위의 고통을 안고 심지어 검찰과 조중동까지 안고 부엉이 바위 위에 선 모습이 겹쳐져 왔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김용탁 시인이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생각"하며 시를 쓰라고 합니다. 고 노무현의 1주기를 하루 앞둔 우리는 어떤 시를 써 내려 가야 할까요? 시 쓰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시대에 미자처럼 생명을 걸고 시를 쓸 수 있는 순수도, 용기도, 처절함도 잃어버린 우리에게 흐르는 강물을 따라 김용탁 시인의 조근조근한 낭송이 흐릅니다. 그리고 그 강물 위에 비친 우리들의 심장을 향해 <시>가 소리 없이 파고들며 조여 옵니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중략)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 나는 기도합니다 /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 머리 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2010.05.22 박호열 (tkaenao)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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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스의 노래 / 이창동


그곳은 얼마나 적막할까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좋아하는 음악 들려올까요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고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을까요
한 번도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을까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해야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이제 어둠이 오면
촛불이 켜지고 누군가 기도해줄까요

하지만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당신을 축복하리

마음 깊이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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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통 속에서도 시(詩)는 나온다"

아름다운 시를 모독하는 추악한 현실, 극단의 두 지점은 어떻게 합치되는가

 

이창동 감독의 <시>는 영화에 등장한 김용탁(김용택) 시인의 말처럼 "설거지통 속의 시"이다. 생활보호대상자로 간병일을 하면서 외손자를 홀로 키우는 예순다섯, 아니 예순여섯의 미자(윤정희)는 꽃만 보면 예뻐서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꽃 달린 치마며 손뜨개 모자, 스카프를 좋아하는 '멋쟁이 할머니'이다.

 

영화는 문화원 시 강좌를 들으며 시를 쓰려 안간힘을 쓰는 미자(美子; 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좇는 자)와 집단성폭행으로 자살한 여학생의 가해자 중 한 명이 자신의 손자임을 알게 된 미자(未子; 추한 현실을 쫓아가야 하는 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립과 갈등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냇가로 떠내려 온 여학생의 시체 머리맡에 <시>라는 영화의 타이틀을 올려놓는 첫 장면에서부터 예고된 것인데, '시는 아름다운 것'이며 시를 모독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는 미자로서는 더욱 넘어서기 힘든 간극으로 다가온다.

 

세계를 창조하는 신, 시인

 

영화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시 강좌의 첫 시간에 우리는 '본다'라는 행위에 대해 다시 배운다. 김용탁 시인의 말대로라면, 수십만 번 혹은 수백만 번 보았을 사과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본 적은 없다. 시상은 이렇듯 평소 무심코 지나친 모든 것들을 제대로 보기 시작하면서 떠오르는 것이고, 따라서 시인은 세상을 제대로 보는 자이다. 세상이 생겨나기 전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는 시인이야말로 세계를 창조하는 또 하나의 신인 셈이다.

 

미자는 강좌에서 배운 대로 수첩과 펜을 들고 다니며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글을 써보지만 시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사과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시상을 떠올리려는 미자 앞에는 거칠게 닫히는 손자의 방문처럼 거칠고 혹독한 세상만이 존재하는 탓이다. 게다가 '제일 중요한 명사'부터 잊어버리는 알츠하이머형 치매의 진행은 세계를 명명(命名)하는 시인에게는 치명적이다. 추한 현실로 끌어내려진 미자는 "그래, 사과는 이렇게 먹어야 제 맛이지"라고 읊조리면서도, 이내 다시 꽃, 나무, 살구, 강이 하는 말을 들으려 애쓰는 천상 아름다움을 쫓는 사람, 미자(美子)이다.

 

▲ <시>, 이창동 시인은 세상을 제대로 보는 자이며, 시인이야말로 세계를 창조하는 또 하나의 신이다.

 

 

망자와 산자를 연결하는 샤먼이 되는 미자

 

이처럼 <시>에서는 잔인한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미자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미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이 시 쓰기의 어려움과 병치되면서 극적 긴장감이 높아진다.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미자의 심리는 손자가 가해자임을 알게 된 순간 피처럼 붉은 맨드라미의 꽃말이 '방패'임을 상기하거나, 치매라는 진단을 받으면서도 동백꽃에 더 관심을 보이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반면, 자살한 여학생이 머물렀던 공간을 차례로 방문하며 그 속에서 시상을 좇는 행위는 현실을 내부로 받아들이려는 미자의 노력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는 겉으로 보기에 미자가 토로하는 시 쓰기의 어려움이 현실에 한 발짝씩 다가갈수록 더욱 극대화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가장 솔직한 형태의 '시'로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절대로 합치될 수 없을 것 같았던 아름다움을 좇는 행위로서의 시 쓰기와 죽은 여학생을 쫓는 미자의 순례가 이어지는 동안 미자는 인간과 신을 매개하고 망자(亡子)와 산자를 이어주는 샤먼으로서의 진짜 '시인'이 되어갔던 것이다.

 

이는 죽은 아이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에 보았던 떨어진 살구에 대해 "땅에 떨어진 살구는 깨어지고 밟힌다. 다음 생을 위해"라고 쓴 글에서 발화되어, 마침내 여학생의 시체가 발견된 강어귀에 다다랐을 때 정점에 이른다. 그곳에서 펼쳐진 미자의 수첩에는 글 대신 소녀의 눈물인 듯 쏟아지는 빗물만이 기록되고, 이로써 궁극적으로 시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인 언어를 매개하지 않은 직접적인 소통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미자가 줄곧 쫓아다닌 대상, 즉 죽은 여학생과의 합일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미자는 더 이상 시를 쓰기 위해 수첩을 꺼내지 않는다.

 

 

시적 미학을 영화화한 또 한 편의 시

 

이밖에도 영화 <시>가 시의 완성 과정임과 동시에 한 편의 '시'인 것은 영화가 마지막에 낭송되는 미자의 시를 향해 진행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시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은유, 절제, 압축의 미학을 영화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 내놓고 울 수도 없는 가해자의 입장을 샤워기를 틀어놓고 울거나 어두운 곳에 혼자 쪼그려 앉아 우는 장면으로 절제해 표현하고, 오백만 원을 받으러 간 자리에서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수첩에 적힌 글이 대화를 대신하는 모습은 영화적 압축미의 절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 강좌의 마지막 시간, 교탁에는 꽃다발과 한 편의 시가 놓여있다. 사라진 미자의 시를 김용탁 시인이 대신 낭송한다. 목소리는 김용탁 시인에서 미자로, 미자에서 죽은 여학생으로 전환되면서 미자로 현현된 박희진, 박희진으로 환치된 미자를 보여준다. 다리 위에는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처럼 희진이 서있고 카메라는 이동해 흐르는 강을 비추며 미자의 '부재'를 시인한다. 시를 모독하는 현실에서 미자는 희진과 같은 선택을 한 것이다.

 

하지만 관객을 향해 미소지었던 희진(=미자)이 암시하듯 미자가 택한 것은 추락이 아닌 상승, 다음 생을 위해 깨어지고 밟히는 살구와 같은 승화이다. 그제야 미자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를 쓰고 떠나며 세상을 제대로 보는 자, 진짜 시인이 된다.

 

 

 

▲ <시>, 이창동 감독 아름다움을 좇지만, 추악한 현실에 맞닿뜨려야 하는 미자. 

미자는 아름다움을 좇는 행위로서의 시 쓰기와 죽은 여학생을 쫓는 순례를 통해 진짜 시인이 되어간다.

 

 

노무현 서거 1주년을 돌아보게 하는 상징적 텍스트

 

<시>는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가해자의 입장에 선 미자라는 인물을 통해 미와 추, 이상과 현실이라는 극단의 두 지점을 어떻게 합치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나는 영화를 보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노무현 서거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명백한 귀결과 시대 감정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참여정부에서 활동했던 이창동의 이력이나 개봉시점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시>는 노무현 서거 1주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징적 텍스트이다.

 

희진의 죽음은 손자와 연결되어 있고, 미자와 무관하지 않다. 희진에 대한 죄의식은 직접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무겁게 마음을 짓누르는 그 무엇이다. 노무현 서거 당시 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에 대한 감정은 바로 우리 자신이 접적인 가해자는 아닐지라도 그것을 방기했다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미자를 통해 노무현 서거 1주년을 맞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설거지통과 같은 추악한 현실에서도 시 쓰기를 멈추지 말 것을 종용한다. 노무현이 선택한 '추락'이 다음 생을 위한 '승화'였음을 잊지 않도록 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시>가, 또 지금의 현실이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주제의 시 강좌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는 한 여인의 고백에서처럼 "미치도록 괴롭지만 아름다운" 이유다.

 

2010.05.23 손상민 (neo7796)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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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삶의 고통과 슬픔을 먹고 산다

 

이창동 감독은 누구?

 

 

이창동 감독은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전리'로 등단, <그 섬에 가고 싶다>(1993)의 각본과 조감독을 맡으면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1997년 '초록물고기'로 데뷔해 백상예술감독 작품상, 신인감독상, 각본상, 캐나다 밴쿠버국제영화제 용호상 등을 받으면서 입지를 굳혔다. 이외에도 <박하사탕>(1999), <밀양>(2007)등 삶에 깊이 천착해 낮은 자의 시선으로 소설적 느낌이 있는 영화를 만들어 왔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박하사탕>은 아직도 기억나는 영화다. 기차 선로에 서 있는 주인공은 왜 그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를 가까운 과거에서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풀어내는 형식으로 된 영화였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깊이 들여다 보아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시> 역시 오히려 영화가 끝나고 더 생각하고 고민하게 하는 영화다. 그는 제작노트에서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관객들에게 그런 질문을 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영화가 죽어가는 시대에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나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것은 문학과 예술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물질적 가치만 중시하는 현대사회의 풍요 아닌 풍요 속에서 쾌락을 쫓아 살아가고 껍데기의 삶을 살아가는 이 부박한 시대에 시란, 문학이란 무엇일까.

 

영화 <시>...

 

▲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사과를 수천 수 만번 보았다고 해도...진정으로 본 것이 아니라면...한 번도 보지 못한 것과같다면...

 

강물이 끝없이 흐르고, 강물에 떠밀려오는 시체 한 구... 이것은 영화의 첫 장면이자 마지막 장면이다. 이윽고 장면이 전환되면서 젊은 날엔 꽤 화려했을 법한 소녀적 감성이 얼핏얼핏 비치는 예순 여섯 살의 할머니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녀는 경기도의 어느 작은 소도시에서 이혼한 딸이 맡기고 간 중학생 손자와 함께 생활보조금을 받아가며 살아간다. 미자는 중풍 든 노인을 간병하는 일을 한다.

 

미자는 우연히 길을 지나다가 성폭행을 당해 자살한 여중생의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데, 슈퍼에 들어가 방금 목도한 사건을 안타까워하면서 얘기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독백처럼 되뇌다 수퍼 밖으로 나온다.

 

할머니 '미자'는 손자 종욱이의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을 볼 때 가장 행복해 한다. 레이스 있는 옷을 즐겨 입고 창 있는 모자를 즐겨 쓰는 '미자'는 우연히 문화강좌에 참여해 '시'를 배우게 되고 종욱이가 친구들과 함께 여중생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했다는 사실과 그 일로 피해 여학생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아파한다.

 

가해자들의 아버지들이 미자를 찾아와 합의금을 마련해 문제를 해결하자고 한다. 미자는 그들을 보면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고 돈으로 문제만을 해결하려는 모습에 또 아파한다. 그녀는 가해자의 아버지들과 자신의 손자 종욱이가 사건의 전모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갈등한다. 하지만 갈등 끝에 피해자의 어머니에게 돈도 주고 손자 종욱이도 경찰에 신고해 죄 값을 치르게 한다.

 

가해자들의 아버지들과 모여 의논할 때, '미자'가 뜬금없이 밖에 나가 맨드라미를 바라보며 시상을 떠올리는데 그 모습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워보였다. 그 장면은 아마 어른들의 세계에서 손자 종욱이를 지켜야 한다는 상징으로써의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맨드라미의 꽃말을 '방패'라 했다.

 

이런 사건과 맞물린 현실 속에서 뒤늦게 시를 배우기 위해 애쓰는 미자의 모습은 현실과 동떨어져 보인다. 현실은 자꾸 '시'를 밀어내려 한다. 결국 미자는 어렵게 시 한편을 완성하고 난 뒤 사라진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

 

어느 날 우연히 문화강좌에서 시를 배우게 된 미자는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강의를 듣는다. 시에 대한 경외감마저 가지고 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나요?"

"선생님, 시는 언제 오나요?"

선생님, 왜 시가 안 써 지는 거죠? 아무리 노력해도 안돼요."

"선생님, 시가 언제 오나요? "

 

그녀는 시 창작교실에 갈 때마다 '시'를 쓰고 싶지만 쓰여지지 않아 고민한다. 그 모습은 타성에 젖어 사는 우리들에게 종을 울린다. 50년 전에 선생님으로부터 '미자야 너는 커서 시를 쓰면 되겠다'고 들었던 말을 기억한 미자, 드센 삶을 살아온 그녀는 알츠하이머병 초기증세까지 있어 단어를 점점 잃어갈 때야 비로소 '시'를 갈망한다. 현실은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시를 갈구하는 세계와 걸맞지 않게 그녀를 긴장시킨다. 미자는 시와 세상의 충돌 한 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시는 '보는 것'에서부터 발아한다고 영화에서 시인은 말한다. 영화에서 시 창작 강의를 하는 김용탁(택) 시인은 "우리가 '사과'를 몇 천 번 몇 만 번 보았다 해도 정작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현대인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둔감하게 살아간다. 그는 "시가 죽었어"라고 말한다.

 

시가 죽었다는 것은 결국,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느껴야 할 타인의 고통과 신음과 슬픔에 둔감하다는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내 삶을 진지하게 대하는 것, 직시한다는 것이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자를 통해 오늘날 우리는 잃어버린 시를 대하는 순수성과 경외감을 일깨운다. 고통스런 일을 직면하고 진지하게 시를 쓰기 위해 자신을 성찰하는 미자, 삶에 깊이 천착해 있음을 본다. 처음에는 명사, 그 다음엔 동사, 미자가 차츰 단어를 잃어간다는 것은 결국 이 시대가 언어의 순수성을 잃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시가 죽어갈 뿐만 아니라 타인의 말, 진정한 소통, 타인의 아픔,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져 가는 현 시대를 이 영화는 조용히 고발한다.

 

성폭행당해 자살한 소녀, 딸을 잃고 슬픔에 빠진 소녀의 어머니, 죽은 소녀에 대한 슬픔이나 고통, 한 생명이 죽었음에도 자기 아들들을 위해 도덕적 양심은 묻어버리고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아버지들... 그런 아픔의 현장에서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둔감한 사람들(슈퍼주인, 구매자 등).

 

시 낭송회에서 낭송하는 사람들의 미끄러운 언어들의 유희, 그곳에서의 시는 누추하고 부끄럽다. '시' 또한 하나의 유희로 변해버린 것 같다. 그리고 강간을 해서 한 소녀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미자의 손자, 아무런 죄의식도 없는 그와 미자가 대조적으로 교차된다.

 

 

▲ 본다...듣는다... 나뭇잎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나무의 이야기, 바람소리, 새소리...듣는다...타인의 고통, 타인의 슬픔...자신과 타인의 마음...

▲ 시가 된다... 누추한 삶의 소소한 일상이...내가 보려고 하고 들으려 하고...진정으로 다가갈 때...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이 시대에...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린 사람들...고통의 소리를 듣고 슬픔을 보는 자들...진주조개 안에서 진주가 태어나듯 시가...

 

 

시는 삶의 고통과 슬픔을 먹고 자란다

 

결국 시란 삶의 고통과 슬픔을 먹고 자라는 것. 어쩌면 영화를 통해 감독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현대인들에게 타인의 고통과 슬픔, 마음에 눈뜨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시대에 진정한 시는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느껴지고 타인의 절규가 나의 절규로, 타인의 슬픔이 나의 슬픔일 수 있을 때 쓰여진다. 시는 진주조개가 진주를 만들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듯, 현실에서의 고통을 겪으면서 태어난 것이다.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아네스의 노래'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새소리, 강물소리, 비와 바람과 풀...죽은 소녀와 소녀의 어머니의 슬픔과 교감하기 위해 애썼던 미자, 그리고 그 복잡한 삶 고뇌의 한가운데서 쓰여진 시.

한편의 시를 남기고 흐르는 강물처럼 먼 길을 떠나버린 '미자'야 말로 진정한 시인이었다.

 

이 세상에서 '시'가 없다면, 문학과 예술이 죽고 없다면 이 세상은 그야말로 비참하지 않을까. 시가 있고 문학이 있어 사람들은 그래도 생각하고 보고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살아간다. 무디어가고 굳은 살 박혀가는 마음이 그래도 시가 있고 문학이 있어 사람 냄새 조금은 풀리지 않을까.

 

영화를 볼 때보다, 보고 난 뒤 집에 돌아와서 오래 더 깊이 가슴 저릿저릿한 통증처럼 아려오는 영화 <시>. 매주 만나는 글쓰기교실 사람들에 대해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들의 마음, 이들의 기쁨과 슬픔, 고통에 대해 얼마나 들여다봤을까. 피상적으로 만나오진 않았을까. 다시 생각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영화를 묵상 중이다.

 

2010.5.26 이명화(Pretty645)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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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 - 내가 온 몸으로 운 까닭 

강철군화의 시대,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S#1 강철군화의 시대,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강철군화>는 고전의 반열에 든 소설 <늑대개>의 작가 잭 런던이 쓴 작품이다. 1908년에 발표된 이 소설에서, 작가는 경제적 부를 독점한 소수가 지배하는 과두제 사회를 그린다. 문제는 그가 상상력을 통해 추출해낸 소수사회의 비전이 오늘날 융기하는 사회문제들의 형상과 동질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20세기 초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갈등을 묘사한 르포문학이자 파시즘을 예언한 작품 <강철군화>. 소수 자본가를 위해 충성하는 비밀경찰과 군대가 노동자들이 '혁명'을 꿈꿀 수 없도록 감시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영화 <시>와 소설<강철군화> 사이엔 직접적 상관관계는 없다. 영화 속 파출부 생활을 하며 생활보호대상자로, 딸의 이혼 후 맡겨진 중학생 손자 동욱과 사는 양미자. 그녀를 둘러싼 사회의 풍경은 <강철군화> 속에 묘사된 그것과 닮았다. 성폭행을 당한 후 자살한 여중생을 둘러싼 중산층과 교육 담당자들이 보이는 은폐 기도는 가진자의 범죄는 잊혀지고, 무산자의 범죄는 형벌 당하는 이중적 모순의 사회적 자화상일 뿐. 영화 <시>는 이런 시대의 외피 속에서, 여린 꽃잎같은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S#2 꽃이 흐른다, 물 위의 잔영 위로

 

영화에는 물과 꽃의 중첩된 이미자가 자주 등장한다. 양미자는 밝고 화사한 꽃무늬가 찍힌 옷을 즐겨 입는다. 모자와 스톨까지 걸친 그녀의 모습은 한 마디로 한송이 무르익은 꽃의 현현이다. 그녀는 우연히 문화센터에서 시 강의를 들으며 시작에 몰두한다. 강사로 출연한 김용탁(택)은 실제 시인이다. 연기인지, 실제 강의인지 구분이 가지않는 자연스런 느낌을 발산하는 시인의 연기가 돋보였다. 그의 말이다. "시는 아름다움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저는 어린시절 예쁘게 깍은 연필과 백지만 있으면 배가 불렀습니다. 그것은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렇다. 시는 새롭게 잉태할 수 있는 희망을 벼리는 가능성의 넒은 우주를 담는다. 

 

▲ 영화 <시> 시상을 찾아 메모하는 그녀, 그녀가 입은 옷에 주목해보라

 

 

그녀는 시인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일상을 새롭게 발견하려 노력한다. 내가 지금껏 먹었던 사과를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었는지, 속살을 쪼개고 맛보고, 껍질의 톳톳한 느낌을 이해해본다. 그럼에도 글은 쉽게 실타래 풀리듯 잉태되지 않는다.

 

이때 물 위로 여중생의 사체가 떠오른다. 아이의 이름은 박희진. 아네스란 세레명을 갖고 있다. 사건의 배후에는 손자 동욱이도 포함되어 있다. 학교 담당자들과 가해가의 아버지들은 돈으로 '화해'를 이루려 부단 애를 쓴다. 황미자가 시로 그리려 했던 아름다움의 세계에 침범한 이 담즙 같은 세상. 그녀는 진저리친다.

 

시 낭송 모임 후 회식자리에 들어온 김용택 시인과 황병승 시인(영화에 실제 시인으로 등장한다)은 시의 희망론과 무용론을 늘어놓는다. '시가 죽어간다'고. 시가 죽어간다기 보다, 글의 진정성과 휴머니티를 담아내야 할 그릇인 세상이 온통 균열의 틈새로 가득해서는 아닐까?

 

 

S#3 한 편의 단아한 시를 쓰기 위하여

 

 

영화 <시>는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당당히 말하련다. 그 이상의 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그러나 한편으론 조심스럽다. 문학적 상상력이 기반한 탄탄한 각본 위에, 덧입혀진 영상은 철저하게 계산된 듯한 배열로 맥이 빠진다. 양미자가 손자를 위해 돈을 구하러 가는 모습, 죽어간 아네스를 생각하며 물가에서 비오는 날, 모자를 날려버리고 빗물에 축축하게 젓은 백지 위로 시를 써내려 가는 모습, 이후 비에 젖은 채 피간병인인 회장과 육체관계를 맺는 그녀.

 

기호학을 들먹이자면, 물가는 죽음과 망각의 공간이다. 자신의 내면속에 끓어오르는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 단아한 시 한편을 남기고 싶은 그녀. 비가 내린다. 정화의 의미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속건제일 뿐. 비에 젖은 채 자신이 간병하는 '회장과 관계를 맺는다. 마초이즘과 성폭력, 남성들의 거세된 욕망을 상징하는 그와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손자를 포함한 5명의 아이들의 손에 죽어간 아네스를 생각하고, 동일한 값을 치러 죄의 사함을 얻는다.

 

영화 속 그녀는 알츠하이머 환자다. 치매 초기증상의 그녀는 지금껏 배워온 명사들을 하나씩 망각한다. 이어서 동사를 잊게되면 곧 죽음을 맞는다. 언어체계가 사멸하는 과정이 어찌 인간의 삶과 닮았음을, 그 유사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어느 시인은 죽음을 앞두고 모든 언어를 잊어간다고, 그저 갓 태어났을 때, 엄마에게 사용하던 짦은 단어만이 떠올랐고 이 언어로 시를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시는 관습의 무게에 억눌린 사회의 사물, 언어의 외피를 뚦는 은빛탄환이다. 그리고 그 탄환을 빚는 힘은 인간의 영혼속에 잠재된, 아름다움을 찾는 욕구다. 이 느낌이 곧 시로 탄생한다. 잊지말자 순수해야 함을.

 

이제 그녀는 시를 쓸 수 있다. 정화된 몸으로, 상처가 더깨더깨 누적되어 혀의 무게를 누르는 시간을 넘어갈 시간이다. 결말은 어떻게 될까? 어차피 영화 속에서도 짙은 암시만을 남긴 열린 결말만 선보인다. 시의 가능성이 하나의 의미로 고착되어 해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일 거다. 각본상 수상작답게 영화 속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사유해볼 만한 언어다. 이렇게 좋은 각본에 0점을 부여한 영진위는 화 있을진저.

 

동 시대에 이창동 감독과 같이 좋은 분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시의 무용론이 판치는 시대, 여전히 유효한 시의 힘을 보여준, 이창동 감독의 <시>, 놀랍고도 놀랍다. 이런 영화가 자꾸 상영관 숫자가 줄다니, 그들의 표현을 빌어 '유감일 뿐이다'

 

2010.5.27 김홍기(film2907)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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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있더라도

 

사람들은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다. 어쩌면 그건 더 이상 사람들이 시를 믿을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각박한 세상에서 시상은 더 이상 운율 위로 흐르지 못하고 메마른다. 참혹한 세태 속에서 시구는 마치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은 씨앗처럼 감성을 잊은 듯 단단하게 메마른 인간의 마음에 뿌리 내릴 수 없는 것마냥 흩날려 간다. 물기를 잃어버린 것처럼 메말라버린 세상 속에서 시쓰기를 절실히 갈망하면서도 좀처럼 시상을 떠올리지 못하는 어느 여인은 그 대신 험악한 세상의 단면만을 거듭 목격하고 체험해 나갈 뿐이다.

물 흐르는 소리만이 가득한 강가에서 흙을 만지는 아이들, 그 중 한 아이의 시선이 강물 위로 머문다. 그 시선을 따라잡은 카메라 너머로 수면 위로 무언가가 점차 스크린 너머의 객석을 향해 떠밀려온다. 한적한 자연풍경과 대비적인, 참혹한 광경이 눈앞으로 실체를 드러낸다. <시>는 대사 한마디 없는 풍경만으로 유려하고 명징하게 이 세계의 단면과 이면을 발췌해 관객의 눈 앞에 들이민다. 안온한 풍경 안에서 쉽게 표정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불쑥 머리를 들이미는, 참담한 실체의 고요한 등장. <시>는 직설적인 문체와 서정적인 운율이 동반된 한편의 시처럼 아름다운 형태를 두르고 있지만 그 내면에 담긴 끔찍한 직설과 비통한 은유를 찌르고 머금는 영화다.

직장문제로 부산에 내려가 지내는 딸 대신 홀로 손자(이다윗)를 키우며 할머니 미자(윤정희)는 시를 쓰고 싶어한다. 어느 날, 어꺠결림 때문에 찾아간 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 미자는 강으로 투신해 자살했다는 소녀의 어머니가 넋나간 듯 딸을 찾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잊지 못하던 미자는 그것이 곧 자신과 가장 가까운 혈육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강으로 투신한 소녀가 대면해야 했던 폭력은 끔찍하게 매듭지어졌지만 그 폭력의 당사자들은 일상 속에서 자신들의 가해를 쉽게 희석시키고, 그 당사자들의 부모는 위로나 슬픔의 감정보단 해결과 처리의 이성적 방안을 마련한다. 그 이성적인 해결방안은 미자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도 시상에 몰두해나간다.

어떤 일상은 파문처럼 번지듯 조용히 떠밀려와 삶을 출렁이게 만들고 흘러 넘쳐 채울 수 없도록 흔들어대지만 실상 삶은 그렇듯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다시 제 삶을 이룬다. <시>는 사건의 단면을 끌어내며 감정을 진동시키기 보단 사건을 품은 일상의 풍광을 고스란히 지켜봄으로서 감정을 억누른다. <밀양>이 일상을 파헤치고 삶을 도려내어 그 생의 심층을 관찰하는 영화였다면 <시>는 일상으로 덮여가는 삶의 진행적인 너비가 결국 가닿을 수 밖에 없는 생의 영토를 살피는 영화다. 담담하게 떠밀려 내려와 삶을 위협하는 현실 위로 일상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 같지만 실상 그 삶은 쉽게 내려앉지 않은 채 켜켜이 시간의 중력 위로 떠밀려 내려가 새로운 일상을 쌓아나간다.

그 어떤 날, 우연히 스쳐 지난 타인의 일상이 제 일상의 발목을 붙잡듯 운명은 어떠한 예감도 없이 너비를 펼쳐 생을 덧없는 것으로 몰아가고 일상은 당연스럽게 생의 너비를 밀어낸다. 그 흐름에 순응하듯 인간의 생은 무력하게 유지되지만 그 삶의 흐름마저도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처럼 차분히 이 세계 속으로 안착한다. 아름다운 일상의 총합만으로 이뤄질 수 없는 삶의 너비는 마치 물처럼 흐르는 일상 속에서 점차 정화될 수 밖에 없는 기억처럼 고요히 흐름을 지속해나갈 뿐이다. <시>는 <밀양>처럼 어떤 종교적인 엄숙함을 감지하게 만드는 영화지만 그것은 삶에 대한 체념적 체험이 아닌 갈망적 의지로서 보다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둔탁하고 거친 각운의 경험이 남긴 심상의 상흔은 결국 삶의 운율 속에서 보다 깊고 고요한 문체가 되어 삶을 정화시킨다.

<시>는 아이러니와 딜레마를 통해 보다 명징한 통증과 수려한 슬픔을 각인시키면서도 끝내 그것이 아름답다 말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경이로운 영화다. 이미 존재 자체로서 시나 다름없는 여인은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거나, 시를 흉내내는 속물들의 세상 속에서 시를 되묻는다. 그리고 결국 한편의 시를 완성한다. 통증의 세상에서 깊게 침전해 내려가는 감성의 운율은 아련하다 못해 시리고 창백해서 아프고 고결해 소중한 것이다. 이창동은 정적이면서도 첨예하게 파고 드는 문체를 구사하는 가운데, 윤정희는 그 안에서 자신만의 화법을 동원하며 독자적인 운율을 보존한다. 세상은 메마르고, 삶은 시리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영화는 되묻는다. 당신은 시를 쓸 수 있는가. 저마다의 삶은 모두가 그렇듯 스스로 돋아나고, 자라나는데 세상은 이처럼 채워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시상을 어렵게 떠올리고 쓰는 사람이 적어지는 것처럼 삶을 아름답게 떠올리고 써내려 가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탓이 아닐까. 그래도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있더라도 살아서 만나기를.

 

민용준 기자 (시네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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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의미는 무엇인지 좇는 영화 <시>

 

완성된 작품으로서 시(poem)는 ‘아름다움’이지만 문학 형식으로서 시(poetry)는 ‘아름다움을 향하는 자세’에 속한다. 이창동의 신작 <시>는 명백히 포에트리에 관한 이야기다. 완성된 하나의 시(포엠)는 정제된 언어의 조합인 동시에 피어오르는 직관의 언어다. 지극히 이성적인 도덕의 영역과 비범한 직관의 세계가 하나 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시가 탄생한다. <시>는 이 완성된 아름다움을 완결된 영상으로 담아내기보다 아름다움의 의미는 무엇인지 좇는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관객이 영화의 행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각자의 방식으로 질문에 답하는 ‘순간’ 시가 탄생하고 <시>도 완성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시와 소설은 다르다. 소설이 서사를 통해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데 주력한다면 시는 공백의 공간에서 삶과 아름다움의 의미를 묻는다. 그래서 <시>는 결정된 서사가 아닌 미지의 질문에 관한 영화다. 의사가 나이를 묻자 65살이라고 했다가 이내 수줍게 66살이라고 정정하는 미자(윤정희)는 경기도의 작은 소도시에서 이혼한 딸이 맡기고 간 중학생 손자와 함께 살아간다. 생활보조금과 중풍 든 노인을 간병하며 받는 돈이 수입의 전부인 그녀는 손자가 밥 먹는 모습이 제일 행복하다는 평범한 이웃집 할머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아직도 레이스 달린 옷과 모자를 즐겨 쓰고 꽃을 좋아하는 ‘아름다움’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가 문화 강좌에서 시를 쓰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위의 영역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그녀는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여중생이 죽기 전 몇달간 자신의 손자를 비롯한 몇몇 남학생들에게 성폭행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순간부터 그녀의 삶은 세속적이지 않은 아름다움과 일상의 도덕 사이에서 끊임없는 진자 운동을 하기 시작한다.

시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이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부조리한 세상은 시에 아름다움을 허락하지 않는다. 세계는, 일상은 시처럼 마냥 아름답지 않기에 시를 쓰고 낭독하는 금요 낭송회 모임은 어딘지 어색하고 우스꽝스럽다. 그들의 언어는 삶과 유리되어 있고, 그 사실을 알기에 젊은 시인은 술에 취해 “시는 죽어도 싸” 하고 외친다. 세상 모든 것에 감탄사를 내뱉는 아름다운 소녀 그대로인 미자(美子)의 행동과 말투 역시 어딘지 비현실적이고 과장되어 있다. 그들이 바라보는 순수와 아름다움은 공허하다. 그렇기에 미자는 성폭행당한 여학생의 엄마에게 하소연하러 찾아가는 길에 연극 같은 말투로 살구의 아름다움 따위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삶은 허공에 머무를 수만은 없다. 자신이 꽃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있던 상대가 성폭행당한 여학생의 엄마라는 걸 깨닫는 순간 그녀의 삶은 급속도로 지상으로 끌어내려진다. <시>가 번뜩임을 발하는 순간은 바로 그런 지점에 있다.

성폭행 사건을 조용히 무마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부조리와 부도덕의 세계에 묶여 있다. 그들은 가족과 정이라는 미명하에 도덕을 살해한다. <시>는 도덕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진동한다. 하늘거리며 어색한 말투를 남발하던 미자는 삶이 슬쩍슬쩍 침범해 올 때마다 울분을 토하며 진득거린다. 잠든 손자를 깨워 실랑이 벌이는 장면이나 노래방에서 한껏 감정에 취해 노래하는 장면이 파괴력이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그녀, 미자(美子)는 끝끝내 부도덕의 세계에 묶여 있지 못하고 아름다움과 도덕 사이에서 꺽꺽 울음을 터뜨린다. 낭송회 뒷풀이 도중 마당으로 나가 처연하게 우는 미자의 모습에 음담패설을 즐기는 형사가 묻는다. “누님, 왜 우세요. 시가 안 써져서 우세요?” 시는 꽃을 보고 쓰는 것만이 아님을 그녀가 깨닫는 순간 시는 드디어 완성된다.

<시>는 감독의 전작에 비해 훨씬 덜 불편하다. 자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일상을 그저 담담하게 길어 올리는 이창동 특유의 연출은 사건을 일일이 설명하지도 메시지를 전달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덜 불편한 것이 더 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 보여주지 않은 채 관객이 채워주기를 바라며 비워진 행간은 담백하지만 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이 쉽지 않은 관문을 통과한 관객에게 허락될 여운은 전작보다 훨씬 깊은 곳까지 울려 퍼진다. 김용택 시인이나 최문순 의원처럼 극중으로 ‘진짜’들이 불쑥 등장하는 장면이 주는 소소한 재미도 적지 않다.

(글) 송경원-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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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힘, 기적의 체험

 

나는 가라타니 고진을 언급하며 글을 시작해 어느 정도 작성해둔 상태였다. 그런데 ‘이창동의 도덕’(<씨네21> 제753호)을 보면, 정한석 역시 <시>를 보며 가라타니 고진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그는 친절하게도 (내가 작성해두었던) 공동체의 도덕을 버티고 서려는 이창동과 그것을 넘어 윤리의 차원으로 나아가려는 고진의 차이를 언급하는 것도 빼놓지 않고 있었다. 방향의 전환, 그리고 글의 수정. 나는 <시>에 대한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을 때, 자뭇 궁금하면서도 풀지 못할 것 같아 접어두었던 어떤 의문이 하나 있었다. <시>는 대체로 단선적인 내용에 명료한 숏들로 구성된 작품임에도, 그 내용과 형식 사이에는 어떤 균열이 순간순간 돌출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내가 이러한 의문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 시의 도덕을 이야기하려는 영화의 기본적 태도에서 어느 정도 비껴나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창동은 세상의 아픔에 눈길을 돌린 채 순수한 아름다움을 찾는 행위를 완곡하게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창동의 인터뷰 내용을 참고하자면, 그것은 철없는 짓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창동이 영화 곳곳에서 대상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향해 눈을 흘깃거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러한 미적 태도 자체는 별다른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도덕 안에서 시의 역할을 찾으려는 이창동의 영화적 태도와 충돌한다는 점에서 쉽게 무시해버릴 문제는 아닌 거 같다. 난 <시>의 이러한 균열을 만든 원인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것만을 따라가기에 <시>는 너무도 풍요로운 작품이다. 넓게 에둘러 그에 관련된 몇 가지 관심사를 따라가면서 균열의 흔적에 접근해볼까 한다.

 

참을 수 없는 연민의 가벼움


이창동이 그려낸 공동체의 세계, 그러니까 소녀의 자살과 ‘연루’된 학부형들의 모습은 무척 ‘평범’하고, 그렇기에 ‘신랄’하다. 내가 말하는 평범은 당신과 나의 평균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고, 그만큼 우리와 닮아 있다는 것이다. 최문순 의원이 카메오로 출연한 교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아들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학교의 명예를 위해(또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지극히 평균적으로 행동한다. 학부모들은 소녀의 자살이라는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의견을 모은다. 놀랍다. 경험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이렇게 합의가 잘 이뤄지는 모임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이면이 없는 투명체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소녀의 자살에 대처하는 자세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되고, 그럼으로써 이 시대의 도덕이 어떤 곤경에 처했는지 확인하면 된다. 즉, 그들에게는 어떤 사태에 대처하는 이 시대의 ‘합의된 태도’가 드러나는데, 이창동이 보기에 그것은 ‘나’와 ‘가족’에 매몰되어버린 시대다. 공동체의 도덕은 가족에 짓눌려 압사당하기 직전이다. 실제로 미자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소녀의 자살에 대해, 그리고 그 어머니의 고통에 대해 ‘연민’을 갖지 않는다. 오직 미자만이 소녀가 머문 길을 따라가며 그녀의 고통에 눈물 흘린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좀 이상하다. 내가 ‘볼’ 때, 지금의 한국사회는 연민이 과잉된 사회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희생에 대해 집단적인 연민의 표출을 즐기려는 시대라는 거다. 시대의 공통감각과 무관하지 않은 ‘연민(또는 애도)의 유행’. 그런데 <시>는 그 반대로 지금의 한국사회를 연민이 부재하는 시대라 말하고 있다. 과잉된 연민(현실)과 부재하는 연민(<시>) 사이의 간극. 그렇다면 이러한 간극은 왜 발생한 것일까? 미리 밝히고 싶은 사실은, 나는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연민의 힘을 의심하는 쪽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는 연민이 대상을 타자화했을 때만이, 그러니까 그 대상이 나와 연루되어 있지 않다는 전제하에서 이뤄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수잔 손탁의 지적처럼,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러한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낀다. […]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동일한 타자의 고통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나와 연루된 것임을 자각하는 순간 연민은 설 자리를 잃는다. 연민의 연약함. 이창동은 현 시대의 연민의 과잉을 반대 방향에서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집단적 연민의 표출은 어떤 망각, 즉 우리와 대상간의 ‘연루 가능성’을 무의식적으로 괄호 속에 집어넣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이창동은 그 괄호를 벗기고자 한다.

영화 초반부 뉴스 화면에서 아들을 잃은 팔레스타인 여인의 울음이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자는 낮에 병원에서 자살한 소녀 어머니의 절규를 보면서 팔레스타인 여인을 보듯 연민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자는 이내 여인을 절규하도록 했던 슬픔의 원인에 자신이 연루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사실 이건 미자에게는 너무도 억울한 일이다. 그녀는 가슴속 응어리를 다른 사람과 나눠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니, 그걸 나누려는 사람을 만난 적도 없을 것이다. 말로는 딸과 친구처럼 지낸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정작 자신의 고통은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통은 정작 아무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녀는 타자의 고통을 떠안아야 한다. 그것도 가해자로서 말이다. 이창동은 괄호 속에 은닉되어 있던 ‘연루 가능성’을 끄집어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즉, 당신이 타자의 고통에 연루되어 있을 때에도 이를 연민으로 감싸고 이해할 수 있겠냐고 말이다. 결국 이창동이 우리에게 보라고 요구하는 것은 타자의 고통과 우리가 연루되어 있을 때, 너무도 쉽게 철회되어버리는 연민의 연약함, 그리고 그 연약함을 ‘즐기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창동이 타자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부정하거나 버리려 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이창동은 그 반대다. 이창동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놓여 있음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민의 나룻배를 타고 그것을 건널 수 있으리라는 믿음까지는 철회할 생각이 없다(연민이라는 말이 걸린다면 타자에 대한 이해 가능성 정도로 바꿔 읽어도 좋다). <밀양>을 생각해보라. 사건의 피해자였던 신애(전도연)의 고통이 우리가 허용할 수 있는 연민의 문턱을 넘어설 때, 우리는 타자의 고통과 우리의 연민(또는 이해 가능성) 사이에 결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놓여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창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덧붙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창동은 인물이 탈진하고 쓰러질 때까지 절망적인 심연을 보여준 뒤, 그것을 뒤집진 못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비밀스러운 한 줄기 빛을 덧붙였다. <시>에서 이창동이 말하는 ‘아름다운 시의 도덕’은 이 순간, 기적을 만든다.

 

이창동은 관객이 그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시>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영화이자 아름다움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아름다움이 타자의 고통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시가 그 고통을 대면한 뒤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는 영화가 <시>인 셈이다. 정한석이 지적했듯이, <시>의 도덕만 보는 것도, <시>의 아름다움만 보는 것도 모두 틀린 감상법이다. 왜냐하면 <시>는 “아름다움과 도덕 사이에서 꺽꺽 울음을 터트리는 미자”에 관한 영화(송경원)이자, “아름다운 시가 얼룩진 도덕의 사태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는 영화(정한석)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다. <시>는 아름다움의 영역에 속한 이창동이 곤경에 처한 공동체의 도덕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역할을 묻는 영화라고 말이다. 즉, 이창동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영화감독으로서) 자기 역할을 묻고 있는 거다. 하지만 현실에서 두 세계는 단절되어 있다. 즉, 시를 배운다는 미자의 말을 한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반응에서처럼, ‘공동체의 세계’와 ‘시의 세계’가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학부모들이 처음으로 모이는 장면에서 미자는 식당 바깥으로 나가 꽃을 감상하며 시상을 떠올린다. 꽃말이 방패인 맨드라미. 남루한 현실이 범람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침범하는 것을 막는 방패로서의 시. 미자의 웃음도 그렇다. 미자는 버릇처럼 늘 웃는다. 그녀의 웃음은, 그리고 화사한 옷차림은 비루한 현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방패다. 때로 아름다움은 현실을 외면한 대가로 자신의 순수성을 지속시키는 법이다. 미자가 소녀의 어머니를 설득하려 찾아간 장면이 대표적이다. 아름다움에 매혹된 그녀는 자신의 도덕적 책무를 잊는다. 인터뷰에서 이창동은 이를 ‘철없는 짓’이라 말한다. 미자는 손자 뒤에서 질책하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위치에 서 있지만, 이제 소녀의 어머니로부터 힐난의 시선을 받아야 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창동은 이를 철없다고 말한 거지, 시(poetry)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창동은 그것이 시의 한 유형임을 인정하지만, 이를 지지할 수는 없다고, 나의 영화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다.

<시>의 영화 제목이 화면에 새겨지는 순간은 이창동의 자기 다짐처럼 보인다. 이창동은 강물을 떠내려 온 소녀의 시체 옆에 ‘시’라는 제목을 새긴다. 이는 여러 은유적 의미(가령, 시의 죽음 등)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난 화면에 나타난 것 그대로 읽고 싶다. ‘시는 소녀의 시체 바로 옆에 있어야 한다’, 라고 말이다. 타자의 고통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된다는 이창동의 자기 다짐. 그것이 이창동이 자신의 필체로 ‘시’라는 글귀를 화면에 새긴 이유일 것이다. 이 오프닝은 엔딩과 함께 이야기할 때 완전해질 수 있다. 영화는 서사의 시작 직전, 그러니까 소녀가 강물에 몸을 던지기 직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간다. 아녜스의 시를 낭독하던 미자의 목소리가 소녀의 목소리로 전환될 때, 소녀의 목소리는 나를 온몸으로 반응하게 하는 기적의 순간이다. 그리고 철교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던 소녀가 뒤돌아 관객을 바라보도록 한 뒤, 그녀의 시체가 사라진 평온한 강물을 보여줄 때, 소녀는 신체 없는 목소리가 아닌 살아 있는 육체성을 부여받는다. 이창동은 관객이 그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마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에서 소아마비 딸이 땅 위를 걷는 듯한 기적이 오직 관객의 체험에서 가능했던 것처럼, 이창동은 그 기적의 순간에 관객의 감각이 반응할 것을 호소한다. 나와 타자의 암담한 심연을 건너는 기적의 순간은 영화 속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왜냐하면 기적은 설명이 아닌 체험될 때만이 자신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창동이 믿는 영화의 힘은, 그것이 관객의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 있다.

Kino-eye, 영화의 시적 아름다움

“나는 키노-아이(kino-eye)다. 나는 기계의 눈이다. 기계인 나는 당신에게 나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시>를 보다 보면 그 다짐의 절심함이 느껴지면서도 그것이 흔들리는 어떤 균열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시>를 처음 볼 때보다 두 번째 볼 때 그 균열은 좀더 커졌다 (정한석도 균열을 이야기하긴 하지만, 그는 내가 말하는 것과는 다른 맥락에서 이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균열은 이창동이 시가 비루한 현실을,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때 진실로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미적 무관심성’의 태도로 대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려 할 때 발생한다.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시>는 아름다워진다. (단순 무식하게 말하자면) 미적 무관심성은 대상에 대한 진리, 도덕, 유용성 등을 괄호 안에 넣어둔 채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이창동이 철없는 짓이라고 불렀던 미자의 행동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즉, 이창동 자신이 완곡하게 비판했던 철없는 짓에 정작 자신이 매혹되는 순간이 영화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시>에서 ‘보는 행위’는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이창동이 이야기하는 ‘봄’이 단지 눈으로 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시각적으로 보는 행위를 가장 중요하게 간주하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영화 속 ‘본다’의 의미는 닫혀 있는 나의 감각을 여는 행위, 그러니까 대상이 주는 모든 자극을 남김없이 감각적으로 수용하려는 적극적인 태도에 가깝다. 바람을 피부로 느끼는 것, 나뭇가지와 잎새의 재잘거림을 듣는 것, 심지어 자신을 향하는 누군가의 시선에 가슴이 찌릿해짐을 느끼는 것도 일종의 ‘봄’인 셈이다. <시>는 우리의 감각에 호소해 갑각에 둘러싸인 우리의 감각을 되살리려 한다. 현 시대는 감각의 알츠하이머에 시달리는 시대다. 이창동이 관객의 감각을 되살릴 ‘봄’을 위해 고민한 결과는 영화의 내용이 아닌 ‘시적 형식’의 영화다. 그런데 <시>의 시적 형식은 관객의 시선을 끌기 위해 미사여구를 늘어놓고, 볼거리를 전시하고, 낭만적 우수가 깃든 분위기나 화면의 여백을 만들고, 서정적 음악을 깔고 하는 상투적인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이창동은 단순하고 명료한 방식으로 관객의 감각에 호소하는 시적 형식의 영화를 만들었다. <시>는 어떤 대상이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순간에 시적인 감흥이 느껴지는데, 이때 이창동의 숏은 무척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방식으로 대상을 담아 우리 시야 앞에 불쑥 들이미는 느낌을 준다. <시>에서 가장 시적인 순간은 노트 위에 빗물이 떨어지는 순간이다. 소녀가 떠내려간 강가에 도착한 미자는 공책을 꺼낸다. 그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이때 이창동은 노트의 빈칸 위로 떨어진 빗물이 번지는 순간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노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전부다. 하지만 우리가 그 순간이, 그리고 빗물이 쓴 시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빗물이 소녀가 흘리는 눈물의 은유처럼 느끼기 이전에, 종이 위로 번지는 빗물의 ‘물질성’ 자체를 감각적으로 체험하기 때문이다(미적 무관심성). 어떤 대상을 무언가의 은유로 읽는 것은 우리가 그 대상을 ‘본’ 뒤에야, 그러니까 대상이 주는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감각이 열려진 뒤에 가능한 일이다. 이창동이 창출한 시적 아름다움은 베르토프의 ‘키노-아이’(카메라 눈) 선언에서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시>는 어떤 대상이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괄호 속에 집어넣고) 자신의 물질성을 드러낼 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만든다. 유사한 맥락에서 정한석은 때로는 시가 쓰이고, 때로는 협박의 문자가 쓰이는 노트를 클로즈업하는 숏의 활용이 주는 감각적 자극을 이야기한다. 그는 이 순간을 찬란하다고까지 극찬한다. 실제로 앞서 내가 언급한 빗물장면에서처럼, 노트의 클로즈업은 갑자기 시야에 툭하니 끼어드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숏 자체가 감각적 호소력이 있다(그 순간마다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이나 시가 어떤 운을 맞추는 듯한 느낌까지도 함께 자아낸다). 나는 흐름을 툭 끊고 들어와 숏 자체를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숏의 활용 역시 ‘숏의 물질성’이 드러나는 아름다운 순간이라 부르고 싶다.

그는 <시> 안에서 절실히 싸우고 있다

이런 장면들은 아름다움이 (도덕이나 그 밖의 다른 것들을 괄호 속에 집어넣은 채) 온전한 미적 무관심성을 통해 발견되는 사례들에 해당한다. <시>는, 그리고 이창동은 시가 도덕을 향할 때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면서도, 도덕 없이도 아름다울 수 있는 순간, 그러니까 미적 무관심성이라는 철없는 짓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을 반복적으로 흘깃거린다. 물론 앞서 언급한 영화의 엔딩이나, 시 낭송회에서 음담패설을 일삼던 형사가 자신이 읊었던 시 속의 연탄재와 같은 가장 따스한 사람이 되는 순간처럼, 시와 도덕이 만났을 때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눈흘김이 무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균열은 이창동이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즉 애초에 대상의 아름다움 자체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이창동이 무의식적으로 무관심성의 아름다움에 이끌린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창동이 도덕을 향해 자신의 발길을 돌려 세우는 것은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에 저항하려는 의식적 차원의 행위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것이 지속적일지까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그는 <시> 안에서만큼은 절실히 싸우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은 이런 거다. 왜 이창동은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을 억누르면서까지 도덕적 영역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일까? <시>에서 이창동의 자기 반영적 성격이 드러난다고 했을 때, 이 작품이 누군가의 고통에 가해자로서 연루된 자에 대한 영화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이창동은 미자에게 요구했던 사건에 연루된 자로서의 도덕을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자가 사건에 연루된 자로서 시의 도덕을 완성했듯이, 이창동 역시 이 시대의 비도덕과 자신의 연루 가능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균열을 감수하면서까지 <시>의 도덕을 버티고 서는 것, 그것이 바로 이창동의 도덕일 것이다.

(글) 안시환 -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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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풍경은 그렇게 우리에게 침입하고…

 

<시>에서 이창동은 패를 다 까고 판에 임하는 도박사와 같다.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대충 감이 잡히는 상태에서 2시간여를 끌고 가는 뚝심이 경이적으로 느껴질 즈음, 바닥까지 내려간 이야기의 리듬이 서서히 고조되는데, 마지막 20여분 동안 치고 올라오는 고통 속의 마음 출렁임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이 영화의 관점에 따르면 그건 주인공 할머니 미자, 오로지 그녀만 보게 되는 아름다움 속의 고통, 혹은 고통 속의 아름다움이다. 영화 속 다른 등장인물들은 모두 무심한데 푼수기 있고 백치적 천진함이 있는 이 할머니만 거기 도달한다.

이창동은 이미 <밀양>에서 더 심심하고 낮은 데로 임할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 영화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종찬이라는 캐릭터는 알 수 없는 삶의 운명 앞에 서서 스스로의 무력함에 이를 악물며 버티는 겸허함을 보이는 신애와 달리 실실거리면서도 그 고통의 내재화를 무의식적으로 이뤄내는 인간 존재의 고양된 순간을 보여준다. 그걸 이뤄낸 것에 이창동 영화의 작은 전환점이 있다. <시>의 여주인공 캐릭터 미자는 종찬의 확대된 버전이다. 겉으로 심심하고 평범해 보이는 그녀의 삶에 어마어마한 윤리적 운동을 깔아놓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적인 이 영화는 우연히 문화회관에서 여는 시 강좌에 출석한 미자가 결국 시를 쓰게 되는 한달여의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을 다룬다. 초등학교 시절 이후 시를 써본 적 없는 미자는 하필이면 알츠하이머병 초기 증상을 겪는 인생 말년에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딸에게도, 주변 이웃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그녀의 열망은 결국 관객만 아는 형태로 완성된다. 그런데 매우 비극적인 형태로 완성된다.

시상은 그녀에게 어떻게 찾아오는가

<시>에서 미자가 보여주는 푼수기와 허용은 관객인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수준이 아니다. 그녀의 푼수기는 오히려 타자를 향한 접촉과 공감을 향해 열려 있는 긍정적 자질이다. 영화 초반에 병원에서 다른 사람의 가방에서 나는 휴대폰 소리를 자기 것으로 착각해 찾고 있다가 남의 것으로 판명되자 멋쩍게 웃으면서 옆사람을 그녀가 쳐다볼 때 옆사람은 그녀의 미소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미자가 진찰을 받고 병원 앞을 걸어 나올 때 화면에는 딸의 죽음에 오열하는 여중생 박희진 엄마의 모습이 나타난다. 카메라는 긴 동선으로 미자와 희진 엄마의 모습을 커트 없이 한 공간에서 이어준다. 연출로 맺어준 이 공간 속의 동시 출현의 느낌은 주변 일에 반응하는 미자 캐릭터의 마음과 조응하는 것이며 이는 그녀가 시를 쓰는 자질과도 통한다.

미자가 나가는 시 강좌에서 저명한 김용탁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잘 봐야 한다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본다는 것’은 이 영화에서 거듭 변주되는 모티브인데, 미자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시상은 주변에 있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는 시인의 말을 미자가 무의식적으로 체화하는 것은 훨씬 뒤에 아주 잔인한 순간에 일어난다. 처음에 미자는 부질없이 초등학생처럼 시인의 말에 문자 그대로 매달린다. 시인이 본다는 것의 예로 든 사과를 집 식탁에 놓고 앉아 미자는 그걸 뚫어지게 바라본다. 외손자 종욱의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오고 아이들이 무슨 꿍꿍이를 하는지 궁금해 방 안에 들어가 사과를 줄까 권유했다가 타박받은 뒤에 미자는 사과를 보고 혼자 중얼거린다. “사과는 역시 보는 것보다 깎아먹는 거야.” 사과는 정관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먹어버리는 대상이다. 아직 그녀는 미적 세계의 입구에 들어서지 못했다.

약간 희극적으로 되풀이되는 후속 상황에서도 미자의 그런 방황은 계속된다. 동네에 있는 큰 나무 한 그루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미자에게 지나가던 할머니가 뭘 보냐고 묻는다. 나뭇잎들은 바람에 흔들리고 그때 종욱이 관련돼 있는 여중생 자살 사건의 어느 가해자 아버지에게 전화가 온다. 아름다움을 보려 했으나 고통까지 보게 되는 상황은 이렇게 다소 소름끼치는 방식으로 축적된다. 미자가 시 한편을 쓰는 것은 영화의 목표이자 도달점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시 한편을 쓰기 위해 통과하는 과정은 시인의 말대로 시상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시상은 미자에게 뜻하지 않는 방식으로 찾아온다. 그때까지 미자는 예쁘게 세상을 탐색하는데 거기서 자꾸 원래는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을 본다. 여중생 박희진 사건의 전말을 가해자의 학부모 모임에서 알고 난 뒤에 미자가 종욱의 학교에 갔을 때 미자는 노는 아이들을 보고 새소리를 들으며 최초의 시 비슷한 것을 쓴다. ‘새들의 노랫소리 무엇을 노래하나.’ 그녀가 텅 빈 복도 끝에서 아이들의 성폭행 현장이었던 과학실습실을 들여다볼 때 그녀의 얼굴은 코가 약간 눌려 일그러져 보인다. 노는 아이들 소리, 새소리, 그건 미자를 위한 것은 아니다. 미자는 대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느끼고 싶지만 대상은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상은 뭔가 그녀에게 잔인한 진실을 깨닫게 한다.

보는 일과 보이는 일

미자가 나가는 아마추어 동호인 시낭송회에서 누군가가 읊는 자작시는 좀 가관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동지섣달 이른 새벽 관절 부은 손으로 하얀 살 씻어 내리시던 어머니를 기억하는 일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깊은 밤 홀로 잠깨어 우는 일이다….’ 어쩌고 하는 시는 자기 연민의 넋두리를 감추고 있다. 이는 미자가 영화 중반, 희진 엄마를 만나러 가는 시골길에서 잠시 얻었던 시적 희열 비슷한 것이라고 스스로 착각했던 것과 비슷하다. 미자는 그때 풍경에 흡수되어 자기 동일성을 갖는다. 나무에서 떨어진 살구를 맛본 다음 그녀는 그럴듯한 시 비슷한 것을 쓴다. ‘살구는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진다. 깨여지고 발핀다. 다음 생을 위해.’ 이것 역시 그럴듯하지만 자기 연민의 발로다. 그 다음 상황에서 미자는 희진 엄마를 만나 실컷 삶의 아름다움을 얘기하며 도취한다. 살구가 땅에 떨어진 걸 간절하다고 생각했으며 자기 몸을 땅에 던져서 막 깨지고 밟히게 해서 다음 생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이를테면 그녀는 자기가 방금 쓴 시를 스스로 해설하는 것이다. 평생 살았어도 살구에 대해 처음 그런 걸 알았다고 만족해하는 미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녀가 희진 엄마에게서 돌아서서 그 길을 나올 때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충격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사실 희진 엄마에게 합의보자고 사정하려고 온 참이었다. 아름다움을 위장한 자기도취의 그물에서 깨어나는 것은 그녀에게 고통이다.

그 다음 열리는 시낭송회에서 동호회 회원들은 프로 시인들의 시를 낭독하고 있다. 그곳 회원이자 형사인 박상태는 이날 <너에게 묻는다>라는 안도현의 시를 낭송한다.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낭송이 끝나고 느물거리며 농지거리를 하는 박상태를 보며 미자는 아름다움을 찾는 건데 와이담이나 한다고 흉을 보지만 그날 밤 회식 자리가 끝나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가서 쪼그려 앉아 운다. 박상태가 ‘시 때문에 우세요? 시 못 써서?’라고 물으며 그녀 곁에 난감한 듯 서서 보다가 그녀의 옆에 앉는다. 그는 그녀의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박상태의 이 연대의 행동은 비로소 자기도취에서 깨어난 끔찍한 상태의 미자가 그때까지 보고 싶었던 것만을 봤던 것과 대비된다.

실은 미자에게 그런 일은 그때까지도 일어났고 그 뒤에도 계속 일어난다. 본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김용탁 시인의 강조는 미자가 보는 것과 미자가 보이는 것의 대비 속에 천천히 축적되어 마침내 ‘시’에서 ‘영화매체’로의 전이가 일어나는 과정을 관객에게 체험하게 한다(이는 <밀양>에서도 비슷하게 묘사된 모티브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에 미자는 자기가 병원에서 본 비극적인 사건, 희진의 죽음에 관해 주변에 말하지만 아무도 관심 기울이는 이가 없다. 미자는 혼자서 그걸 봤다고 생각하고 더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녀가 적극적으로 상황에 끼어들 때 미자는 보는 상태에서 보이는 상태로 바뀌고 그걸 황망스러워한다. 미자가 박희진의 추모 미사에 몰래 참석한 성당에서 희진의 친구로 보이는 한 여중생이 계속 미자를 쳐다본다. 미자는 불편해하며 희진의 사진 액자를 들고 도망치다가 길가에서 어느 남자와 부딪칠 뻔한다.

사건을 관찰하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거기 연루되자마자 미자는 보는 상태에서 보이는 상태로 옮겨가고 그건 더욱더 주변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다. 영화 중반, 사건의 내막을 안 뒤 돌보미로 일하는 강 노인 집에서 일을 마치고 그녀가 샤워기를 맞으며 울고 있을 때 강 노인은 목욕탕 바깥에서 그 소리를 몰래 엿듣고 있다. 다음날 아침 미자가 식탁에 놓은 희진의 액자를 배고프다고 식탁에 달려든 종욱이 본다. 미자는 종욱의 반응을 보고 있다. 종욱은 배고프다고 밥을 달라고 채근하며 그 응시의 강요를 물리치지만 무엇을 그가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밥을 먹고 난 뒤 아파트 앞 공터에서 종욱은 아이들이 훌라후프 추는 걸 가르친다. 여러 컷으로 나눠 찍힌 이 장면에서 종욱은 사람들간의 관계 속에 있다. 생기있게 관계 속에 있는 종욱의 모습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그 모습을 미자가 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적 감각의 모호성을 느낀다.

본다는 것의 정체에 대해 우리를 관찰자가 아니라 이해당사자로 연루시켜버리는 것은 나중에 이르러서다. 영화 후반, 미자가 부동산 중개소에서 합의를 보러 온 희진 엄마와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희진 엄마 집 근처에서 미자가 살구의 아름다움 운운하며 뻘짓을 한 다음이다. 희진 엄마는 미자를 보고 놀라 얼굴이 굳어진다. 미자는 치욕과 염치를 느낀다. 본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보인다는 것에 대해. 유리창 너머 말없이 이쪽을 보고 있는 희진 엄마와 미자의 시선은 마주친다. 다시 한번 본다는 것과 보인다는 것의 이 상관관계 속에서 어느 시인이 강조했던 본다는 것의 중요성은 영화매체의 표현 메커니즘으로 옮겨져 관객에게 질문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침입하는 장면

미자는 봉준호의 <마더>에 나온 혜자와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다. 혜자가 자식의 범죄를 표면적으로 감싸고 밀봉한다면 미자는 그 반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공동체에 대해 비슷한 시선, 비슷한 입장을 갖고 있다. <마더>에서 가장 뛰어난 장면인, 혜자가 밤에 살인이 일어난 건물 옥상에 올라 무심하게 곳곳에 불이 켜져 있는 마을 전경을 보는 이미지와 맞먹을 만한 것이 <시>의 후반부에서 공감각적으로 확산되는 화면들에 있다. 사물이나 풍경은 이 영화에서 미학이 될 수 없다. 적어도 초반에는. 미자가 시 강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설거지통도 시적 소재가 될 수 있다고 한 선생의 말을 따라 집 안 곳곳의 사물을 볼 때 마치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몇 대목처럼 인서트된 화면들이 보인다. 팬지가 있는 작은 화분, 설거지통에 있는 그릇들, 냉장고에 붙은 사진과 메모가 되어 있는 포스트잇 등은 오즈적인 정물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결코 미학이 될 수 없다. 미자의 시선으로도 연출자의 의지로도 육화된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갔다오면서 알츠하이머 확진 판정을 받은 미자가 버스에서 바깥 풍경을 볼 때 그녀는 풍경에서 자신의 심상을 본다. ‘시간이 흐르고 꽃도 시들고’라고 그녀는 공책에 적는다.

여기까지 바깥에 존재했던 풍경은 서서히 주인공쪽으로 밀고 들어온다. 미자가 여중생이 빠져 죽었으리라고 추정되는 어느 한적한 시골 강 콘크리트 다리 위에 섰을 때 미자의 뒷모습이 프레임된다. 그녀가 먼 풍경에 망연히 시선을 보내고 있는 동안 그녀의 모자가 강에 떨어진다. 검푸른 강물이 보인다. 풍경은 더욱 가깝게 다가오고 미자가 다리 밑 부근에서 시를 쓰려는데 비가 내린다. 미자는 한줄도 쓰지 못하고 미자의 공책은 빗물에 적는다. 시를 쓰려는데 풍경이 개입하고 난폭하게 치고 들어온다. 여기서 설명되지 않지만 미자는 뭔가를 느꼈을 것이고 강 노인을 찾아가 어떤 모종의 참혹한 의식 비슷한 것을 치른다. 그건 소녀의 죽음에 남아 있는 자로서 치르는 대속의식일 수도 있지만 이 참혹한 의식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정작 소녀의 죽음은 어떤가. 그건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망각되는 것이라고 해서, 무시되는 것이라고 해서 참혹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영화의 거의 종반부에 미자는 종욱과 배드민턴을 친다. 그들이 치는 셔틀콕이 나뭇가지에 걸리고 미자가 그걸 건져내려고 할 때 카메라는 부감으로 내려다본다. 거의 유일한, 심판의 느낌을 주는 부감숏 속에서 종욱이 다가오고 형사들이 프레임인해 종욱을 부르고 종욱이 그들과 얘기를 한다. 미자가 간신히 라켓으로 가지를 쳐서 셔틀콕을 떨어뜨려 줍고 돌아서자 종욱 대신 박상태가 라켓을 들고 서 있다. 심판의 느낌은 다시 일상적 풍경에 녹아든다. 이 전이는 굉장하다. 마지막 장면의 정서적 클라이맥스를 예비하는 것이면서 심판, 단죄, 망각 이런 것들을 일상적 풍경에 겹쳐놓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시가 낭송되는 장면이 있다. 미자가 결국 쓴 시, ‘아네스의 노래’라고 명명된 시가 선생인 김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미자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죽은 여중생 소녀의 목소리를 통해 화면에 들릴 때 시각적으로 보이는 숏들은 부재를 형상하는 풍경들이다. 미자의 텅 빈 집 내부, 아이들이 훌라후프를 하며 노는 아파트 앞 작은 공터(종욱은 이제 거기 없다. 아파트 앞 버스 정류장(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도 버스에서 내리지 않는다)), 미자에게 뭘 보냐고 묻던 할머니가 미자가 보던 나무를 보고 있는 모습 등이 비친다. 몇개의 이미지가 더 이어진 뒤에 지방 소도시의 일상적 풍경들이 다시 화면에 들어온다. 부재의 풍경은 다시 일상적인 것에 묻힌다. 그때 미자가 갔던 콘크리트 다리에 소녀가 프레임된다. 이것은 앞서 중반에 보인 할머니, 미자의 숏과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유비관계를 이룬다. 일체를 향한 유비다. 강제적인 영화적 제스처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무섭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희진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우리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는가. 더 심상치 않은 것은 강가를 비추는 마지막 이미지다. 강물이 흘러내린다. 멀리서 보면 잔잔한 듯했던 물결은 사정없이 요동치고 있다. 이때 풍경은 앞서 말한 대로 거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침입하는 것 같다. 강물이 흐른다. 원래 있던 것이다. 이번에는 다가온다. 거센 물살이.

(글) 김영진 -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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