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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영화 이야기

마타 하리 - Mata Hari

by Wood-Stock 2009. 12. 24.

마타 하리는 진짜 이중스파이였나

 

 

» 1905년 3월13일 마르가레타 젤레라는 한 이혼녀는 `마타 하리'라는 무희로 유럽 사교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 사진은 당시 공연 포스터로 마타 하리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사진들이다.

 

1차대전이 발발하던 1916년 12월께. 독일군과 전선을 대치하던 프랑스군의 조르주 라두 대위 등 방첩장교들은 적군의 한 무선을 가로채고 숙고하고 있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주재하던 독일군 정보장교 아르놀트 칼레 소령이 베를린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암호화된 무선이었다.

 

“H21의 첩보: 그리스의 조르주 공주인 마리 보나파르트가 브리앙(당시 프랑스 총리인 아리스티드 브리앙)과의 친밀한 관계를 이용해 남편이 그리스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프랑스의 지원을 얻으려 한다…영국은 프랑스를 정치적, 군사적으로 통제하고 있다…총 공세는 내년 봄으로 예정됐다.”

 

‘H21’이라는 암호명의 간첩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라두 등 프랑스 정보장교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개월 뒤인 1917년 2월17일 프랑스 당국은 파리 화류계에서 무희이자 고급 매춘부로 이름이 난 일명 마타 하리를 체포했다. 독일의 스파이 H21로 그녀가 체포된 것이다.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논란이 많았던 스파이 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마타 하리는 007 시리즈같은 스파이 영화 등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미모의 여성 스파이, 혹은 이중간첩의 원형이다. 그녀가 처형된지 15년 뒤인 1931년 스웨덴 출신의 전설적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가 주연한 <마타 하리>는 마타 하리의 전설을 대중적으로 굳히는 계기가 됐다.

 

가르보는 이 영화에서 신비하고 고혹적인 분위기를 통해 ‘팜므 파탈’(요부)의 이미지를 창출하며 당대의 최고 배우로 올라섰다. 마타 하리는 여성 스파이, 이중간첩의 대명사로 자리잡았으나, 사실 간첩으로서의 그녀의 역할은 논란이 많다. 실제 활동 또한 보잘 것 없다. 그리고 이 스파이 사건으로 인해 41살로 마감한 그녀의 삶은 전쟁의 광기에 희생된 측면이 분명히 보인다.

 

 

» 마타 하리가 이중 스파이의 대명사로 인식된 것은 그녀의 스파이로서 역량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시대를 앞서간 그녀의 예술적 재능,

그리고 남성을 매혹시키는 여성으로서의 매력 때문이었다. 그녀의 그런 재능은 결국 전쟁이란 시대의 불화에 희생양이 됐다.


마타 하리의 본명은 마르가레타 젤레(1876~1917). 네덜란드 출신이며, 모자 가게를 운영하던 아담 젤레의 3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업은 번창했다. 유복한 환경의 마르가레타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 등 이국적인 용모였다. 게다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타고난 성격과 자질로 주위의 관심을 끌었다. 자신을 꾸며대는 말 솜씨도 탁월했다. 언어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13살 때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곧 어머니마저 숨지자, 마르가레타는 훗날의 비극적 삶을 예약한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마르가레타는 대부의 집에 맡겨진다.

 

대부의 집에 맡겨질 때쯤 그녀는 이미 육체적으로 성숙해, 키는 네덜란드 평균적인 성인 남자보다 큰 180㎝ 가까이 성장했다. 당시 그녀의 큰 키는 평범한 여성으로서 결혼하는데 약점이었다. 그러나 훗날 무희로서, 매춘부로서 섹스어필을 하는데 큰 장점이 된다. 그녀는 또 큰 키에 비해 유방이 작아 브래지어에 헝겊을 넣었다고 한다. 매춘부 시절에도 그녀는 결코 브래지어를 벗지않아, 오히려 상대 남성들에게 신비감을 자아내게 했다고 한다.

 

   

» 피엣 반 데르 헴이라는 당대의 유명 화가가 그린 마타 하리의 초상화.

» 인도풍의 대담하고 이국적인 춤, 전라에 가까운 선정적인 무대 매너로 마타 하리는 곧 유럽의 최고 화제 무희로 떠올랐다.

 

 

그녀는 유치원 교사 학교에 입학했으나, 교장이 그녀에게 반해 큰 스캔들이 일어난다. 학교를 그만둔 마르가레타는 18살 때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서인도, 즉 인도네시아의 자바에 주둔하던 네덜란드군 장교인 38살 난 루돌프 맥레오드가 여자친구를 구한다는 광고였다. 이 광고는 그의 친구가 본인이 모르게 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 광고를 보고 찾아온 마르가레타를 본 맥레오드는 곧 그녀에게 빠져 결혼한다. 결혼한 두 사람은 자바로 이사한다. 마르가레타의 자바 행은 그녀에게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훗날 그녀가 무희로서 성공한 인도 풍 춤의 기반인 힌두교 문화에 눈을 뜨게 한 계기가 됐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마르가레타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두 아이를 가졌으나, 아들은 불만을 품은 가정부에 의해 독살됐다. 네덜란드로 돌아온 뒤 결혼 9년만에 이혼했고, 딸의 양육권은 남편이 가져갔다. 마르가레타는 나중에 유일한 혈육이 된 이 딸과 재회를 절박히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혼한 마르가레타는 곧 테오도로 와트슨이란 남자와 재혼해, 딸 플로라를 두었으나, 이 딸마저 알 수 없는 병으로 잃었다.

 

마르가레타는 곧 파리로 가서, 레이디 맥레오드란 이름으로 서커스에서 말을 타고, 화가의 모델로 활동하며 생계를 꾸렸다. 1905년 마르가레타는 이국적인 동양 스타일의 댄서로 갑자기 명성을 얻게된다. 그건 순전히 그녀의 재능이었다. 1905년 3월13일 파리의 아시아미술품 박물관인 ‘뮈제기메’에서 그녀는 마타 하리란 예명으로 무희로 정식 데뷔하며 하루 아침에 유명인사가 됐다.

 

말레이 언어로 ‘새벽의 눈’, 보통 태양을 뜻하는 마타 하리란 예명이 말해주듯 그녀는 인도풍의 대담하고 이국적인 춤을 선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인도 태어난 자바의 공주라고 선전하며,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선정적인 그녀의 스타일도 한몫했다. 힌두교의 시바 신을 연상시키는 복장과 무대 매너,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연이 진행되며 거의 누드에 가깝게 진행되는 그녀의 춤은 당시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그녀는 금새 유명인사가 되어, 파리 사교계의 부유층 사이에서 화제로 올랐다. 유럽 전역을 돌며 공연하는 연예인으로 자리매김했다. 28살 때 무희로 데뷔한 마타 하리는 무희로서의 경력이 그리 길지 못했다. 30살이 넘으며 그녀의 육체도 무희로서는 약점을 드러냈다. 무엇보다도 보다 젊고 이쁜 여성들이 그녀의 스타일을 흉내내, 그녀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35살이 넘으면서 마타 하리는 유럽 사교계에서 무희로서라기 보다는 매춘부로서 은밀한 명성을 날렸다. 유럽의 유명 인사들과 관계를 맺었다.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유명 인사들과 관계를 맺던 그녀는 당시 불안한 유럽 정세에서 각국 정보기관의 요주의 인물이기도 했다.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 8월2일 독일에 있던 마타 하리는 프랑스로 돌아오려다 위조여권 혐의로 각국을 전전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스파이로서의 의심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파리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남은 일생을 결정할 인물을 만난다. 40살이 된 마타 하리는 19살이나 어린 21살의 젊은 러시아 장교 블라디미르 말슬로프, 일명 ‘바딤’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프랑스와 동맹국인 러시아군 장교인 바딤은 프랑스-독일 전선에 배치됐다가 한 눈을 잃는 부상을 당했다. 그에게 모성을 느낀 마타 하리는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매춘에 더욱 매달리게 된다. 전선에 위치한 군병원에 입원한 바딤을 만나기 위해서는 당국의 허가가 필요했다. 마타 하리는 방첩장교 조르주 라두를 만나게 된다. 라두와의 만남으로 그녀는 확실히 간첩으로서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미 독일 스파이라는 의심을 받던 마타 하리는 라두의 제안을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마타 하리는 연인인 바딤을 만나야할뿐만 아니라, 전쟁때문에 매춘 영업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스파이는 거액의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직업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스파이로서 유럽을 돌아다니던 마타 하리는 각국으로부터 스파이의 의심을 더욱 받게 된다. 결국 영국에서 독일 스파이 ‘클라라 베네딕스’로 체포돼 프랑스로 소환되기도 했다. 이중간첩으로 마타 하리가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16년 겨울. 그녀는 마드리드에서 독일군 정보장교 아르놀트 칼레 소령을 만나 연분을 맺고 ‘프랑스령 모로코에서 독일과 터키군 장교들이 잠수함을 타고 침투하려 한다’는 정보를 깨냈다. 이 정보를 마타 하리는 라두에게 전했으나, 프랑스 정보당국에게는 이미 구문이었다. 이미 마타 하리를 프랑스 간첩으로 의심한 칼레는 이 정보를 흘려 그녀가 이를 어떻게 전달하는가 지켜보려 한 것이다. 그리고 칼레는 문제의 ‘H21’이라는 암호명의 무전을 보내, 마타 하리를 이중간첩으로 프랑스 당국에게 체포케 했다.

 

문제는 이 무전이 프랑스 정보당국에 의해 이미 파악한 암호체계로 보내졌고, 독일 정보당국도 이 암호체계가 프랑스에 의해 간파됐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프랑스 역시 자신들이 그 암호체계를 파악했다는 것을 독일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과 프랑스는 마타 하리를 놓고 서로의 상황과 의도를 뻔히 알면서 일종의 암묵적인 거래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독일은 자신들의 유명인사에 꼬리치는 고혹적인 스파이 마타 하리를 프랑스의 손으로 제거하려 한 것이고, 프랑스 역시 국내의 정치적 필요로 그녀를 엮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프랑스는 전황이 불리해, 국민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희생양이 필요했고, 사교계의 유명인사 마타 하리는 아마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구체적 증거가 없다는 논란이 있었으나, 마타 하리는 결국 그해 10월15일 사형에 처해졌다.

 

마타 하리의 처형 장면

 

그녀는 사후 그레타 가르보, 마를렌 디트리히, 실비아 크리스텔, 잔 모로 등 당대의 여배우들로 인해 현대사에 가장 유명한 스파이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스파이로서 그녀의 경력은 사실 일천하고 보잘 것 없다. 그럼에도 그녀가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스파이로 자리 잡은 것은 스파이 세계에 입문하기 전 명성때문이다. 사실 그녀의 진짜 재능은 시대를 미리 내다 본 대담한 춤과 그리고 무엇보다 남성을 유혹하는 힘이었다.

 

 

 

정의길 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