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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과학, 기술, 환경

애플 - 창의성 - 인문학

by Wood-Stock 2010. 5. 1.

우리는 '이런 거' 왜 못 만드냐고?

아이폰-아이패드 충격과 창의성의 근원

 

오마이뉴스 강인규 (foucault) 기자
 
대학에서 뉴미디어를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깨달은 게 있다. 기술과 사회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기술이나 혁신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소멸하는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기술의 사회적 형성'이라는 관점으로 한국사회를 살펴보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우선 "우린 이런 거 왜 못 만드냐"는 질문에서 시작해 보자. 최근 들어 정계와 재계의 지도자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말이다. 애플의 아이폰과 닌텐도의 게임기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윗분들'의 훈계 속에 양념처럼 들어가기 시작한 '유행어'기도 하다.

 

당사자가 의도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기술과 사회의 관점에서 '우린 이런 거 왜 못만드냐'는 물음은 상당히 전복적인 의미를 갖는다. '우리 사회는 왜 이 꼴이냐'고 묻는 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는 그가 몸담은 조직과 그 조직을 포함하고 국가 모두를 의미한다.

 

애플 사의 오랜 모토는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다.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기업으로 평가 받는 애플의 저력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여주는 사훈이다.

위계적인 기업의 문제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윗사람'의 생각이라면 특히 더.

 

 

못 만드는 이유?

 

결론부터 말해 보자. 흔히 '질문 속에 답이 있다'는 말을 한다. 이 상황에 정확히 부합하는 말이다. '이런 거 왜 못 만드느냐'고 묻는 것은 질문자가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백하는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만들자'고 말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모두 지도자들이다. 조직에서 가장 강한 권력과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사람들 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거 왜 못 만드냐'고 묻는 지도자가 많을수록 그걸 만들어 낼 가능성은 낮아진다.

 

두 번째는 이런 질문을 태연히 던질 수 있게 하는 위계적 사회구조다. 위계 사회에서 '왜 못 만드냐'는 말은 질문이 아니라, 질타이고 추궁이며 명령이다. 여기서 자신의 책임은 빠져있다. (자기는 방법을 모르지만) '어떻게든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고 있을 따름이다. 

 

위계적인 조직일수록 소통은 막혀있기 마련이다. 이런 경직된 소통구조 속에서 창의력이 꽃 피기를 바라는 것은 '우린 왜 못 만드냐'는 질문만큼이나 어리석다. 그런 질문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 조직이 창의적인 제품을 만들 수 없을만큼 위계적이고 경직되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게 두 번째 답이다.  

 

봉건적 위계사회의 비극

 

애플이 동기가 된, '이런 거 왜 못 만드냐'는 질문은 사실 한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나왔다. 그러나 일본에서 이 물음은 반성과 각성에 가까웠다. 왜 애플같은 회사가 일본에서는 태어날 수 없었느냐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혁신과 첨단기술의 대명사가 된 나라에서 말이다. 그 쟁쟁했던 소니, 도코모, 토요타의 일본에서 말이다.  

 

흥미롭게도,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주목할만한 답변마저 일본이 아닌 미국에서 나왔다. 2008년 2월 25일자 <뉴스위크>가 '애플이 일제가 아닌 이유'를 설득력 있게 분석한 것이다. 크리스찬 캐릴 기자는 "창의력의 빈곤은 일본의 독특한 기업문화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수직통합된 대기업이 지배하고 있는 위계적 경제환경에서는 융통성과 창의성이 발휘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위계적 조직에서는 반대가 불가능하다. 반대가 불가능한 곳에서 창의적 사고도 불가능하다. 창의성은 기존의 생각을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위계적 기업문화가 재계를 넘어 정치, 교육, 문화의 모든 영역까지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사회 전체가 단일 기업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일본 주식회사(Japan Inc.)'로 전락한 것이다.

 

기업 내부에서 반대가 불가능하면 밖에서 반대를 해 주어야 한다. 국민이, 언론이, 대학이, 정부가 말이다. 그러나 이들마저 기업조직의 일부가 되고 나면 창의력이 발휘될 여지는 사라지고 만다. '회장님' 좋아하는 언론이나, '기업이 선호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는 사회와 기업 모두에 해가 될 뿐이다.

 

하물며 정치 지도자가 '국가 CEO'를 자임하거나, 기업이 대학의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나라에서 희망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애플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기업으로서의 애플이 갖는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애플은 변함 없이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에 서 있었다"고 말했다.

 

 

애플과 인문학의 관계

 

현재 한국 교육계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이 변화는 '통폐합'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예컨대 음악과 미술 수업을 '통폐합'하고 (이런 '창의적 발상'이 가능한 나라에서 아이폰이 안 나온 게 놀라울 뿐이다), 초등학교에서 쉬는 시간을 5분으로 '통폐합'하고, 대학 전공을 "사회 변화의 요구에 따라" 절반 수준으로 '통폐합' 하겠다는 것이다.

 

쉬운 말로 하면, '노는 시간'을 없애고, '돈 안 되는 전공,' 즉 인문학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 뒤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승인과 지지가 있다. 정부는 이런 '교육개혁'을 주도하면서 '창의성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야심찬 "한국형 스티브 잡스 양성계획"도 나왔다. "탈락시스템에 따라 3단계의 검증 과정을 거쳐" 10명 안팎의 "소프트웨어 마에스트로"를 선정한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선발할지 모르지만, 대단한 '스펙'을 갖춘 실력자들이 몰려들 게 틀림 없다(조롱이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지원해도 탈락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어쩌나. 스티브 잡스는 한국 정부가 그렇게 없애고 싶어하는 두 골칫거리의 산물이니 말이다. 바로 '인문학'과 '노는 시간'이다.

 

지난 1월, 스티브 잡스가 신제품 '아이패드'를 선보인 날이었다. 그는 애플 사의 정체성을 설명하면서, 대형 스크린으로 표지판 사진을 보여주었다. 교차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내판이었지만, '길 이름'이 독특했다. 서로 엇갈린 두 개의 표지판에는 '인문학(Liberal Arts)'과 '기술(Technology)'이라고 쓰여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의미를 설명했다.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입니다. 애플은 언제나 이 둘이 만나는 지점에 존재해 왔지요."

 

미국의 대학에서 인문학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진은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인문/예술/사회과학 프로그램 웹사이트.

"위대한 사상이 세계를 바꾼다"는 표어가 보인다. 하프를 연주하는 사진 오른쪽에

"컴퓨터는 음악이론을 배울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음악과 컴퓨터 기술을 접목시킨 최신 연구들을 소개하고 있다.

 

 

'미국식 교육'의 중심은 인문학

 

'미국식 교육'을 잘 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식 교육을 '돈 되는 실용교육'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지역과 규모를 막론하고 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대학의 공통점이 있다. 하나 같이 뛰어난 인문학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첨단 기술연구로 알려진 매사추세츠 공대(MIT)는 훌륭한 철학, 언어학, 문학, 예술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으며,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 수업을 들어야 한다.

 

미국 대학의 전통은 크게 두 축이 있다. 연구중심 종합대학과 학부 중심의 인문대학이 그것이다. 인문학은 종합 연구대학에서도 중요한 기능을 하지만,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라 불리는 학부 중심 인문대학에서 더욱 큰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오바마 대통령도 콜럼비아 대학으로 옮기기 전 '옥시덴탈 칼리지'라는 학부 인문대학을 다녔다. 비록 한 학기만에 그만 두기는 했으나, 스티브 잡스가 다녔던 '리드 칼리지'도 학부 중심 인문대학이었다. 그는 청강으로 들었던 서예수업을 '생애 최고의 수업'이었다고 말한다. 물론 '생애 최고의 선택'으로는 '학교를 때려 치운 것'를 꼽았지만 말이다(게다가 대학 졸업 축사에서 이 말을 했다).

 

미국 대학이 '리버럴 아츠'라는 이름으로 가르치는 것은 뭘까? 크게 세 가지다. 커뮤니케이션(소통) 능력, 비판적이고 윤리적 사고, 분야에 얽매이지 않는 폭넓은 교양.

 

미국에서 인문교육은 '취업에 도움이 되는 실무 지식이나 실용적 기술'의 반대 의미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 한국 정부가 싫어하는 것들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과정인 셈이다. 스티브 잡스는 이런 '불온 교육'을 성공 비결로 내세운 것이다.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의 리드 칼리지. 학부 중심으로 인문학적 교양을 가르치는 미국적 전통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 가운데 하나다.

스티브 잡스는 이 학교를 한 학기 동안 다닌 후 자퇴했다.

 

 

인문학, 왜 중요한가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실용주의가 발달했다는 미국에서 왜 '돈 안 되는' 교육이 대접을 받는 것일까? 간단하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저 돈만 되는 게 아니라, 더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인문학 교육은 '고전 교육'이다. 고전(classic)이란 세월이 흘러도 의미를 잃지 않는 인류의 성과물을 말한다. 실무용 지식과 기술은 하루가 멀다고 변하지만, 소통능력, 비판능력, 윤리의식, 보편적 교양의 가치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문학적 기초가 있는 사람은 실무 지식도 쉽게 배운다. 쉽게 배울 뿐 아니라, 제대로 배운다. 제대로 배울 뿐 아니라, 그 지식을 올바로 쓸 줄 안다. 하지만 그 반대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교육을 투자에 비유한다고 하자. 당신이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디에 투자하겠는가? 

 

지금 한국의 기업과 정부와 대학이 실패하고 있는 이유는 실무적 지식이나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소통능력, 비판능력, 윤리의식, 보편적 교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주장하는 '대안'은 죽어가는 인문학을 뿌리까지 없애고 그 자리에 단편적인 실용지식과 기술을 채워 넣는 것이다.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인문학에 존경심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미래 경쟁력의 토대인 창의력까지 죽이고 있다는 점이다. 인문학적 비판 능력은 '남과는 다른 생각,' 즉 창의력의 토대가 된다. 인문학이 강조하는 윤리의식은 배려와 협력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할 수 있게 해 준다. 한국에서 애플이 나올 수 없는 세 번째 이유다. 

 

<와이어드>지는 2009년 6월호 표지기사를 통해 소셜 미디어 혁명을 다루면서 '신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썼다.

온라인상에서 펼쳐지는 협력과 공유 운동이 경제모델을 새롭게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와이어드>는 이 새 경제모델을 "신 신경제(New New Economy)"라고 이름 붙였다.

 

 

경쟁교육은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

 

유치원생이 영어공부 하느라 놀 시간이 없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단다. '무한 경쟁 시대'에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학생이 성적을 비관해 아파트 난간에서 몸을 던진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단다. 자본주의는 경쟁체제이고, 경쟁을 권장해야 '선진 일류국가'가 될 수 있는 만큼, 이런 '부작용'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진국 문턱'에서 좌초하고 만다는 이야기다.  

 

국가 지도자가 '선진 인류국가'와 '선진국 문턱'을 말할 때마다 내 입에서는 이런 무엄한 소리가 흘러 나온다.

 

"젠장, 그 문턱은 길기도 하다…."

 

유치원 시절에 듣던 '선진국 문턱' 이야기를 중년이 다 되어서까지 듣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장담컨대, 내 생전에 한국이 '선진국 문턱'을 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비관적인 이유가 있다. 한국 정부가 말하는 '선진국'은 다가서면 사라지는 신기루다. 당나귀 머리 앞에 달아놓은 당근. 주인을 태운 당나귀는 당근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걷지만, 죽는 날까지 당근을 입에 대지 못한다. 그 당근은 새 당나귀의 머리에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내 비관론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정부가 말하는 '경쟁교육'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경쟁 교육은 나누고 배려하는 사람을 배출하지 못한다. 한국식 경쟁 교육에서 앞서가는 '비결'은 빼앗고 감추는 것이다.

 

그러나 리눅스, 위키피디아, 플리커, 앱스토어, 트위터, 페이스북의 성공에서 보듯, 뉴미디어 시대에서는 '나눔'과 '배려'가 새로운 경쟁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와이어드>는 이처럼 협력에 기반한 미래의 공동체 경제를 '신사회주의(New Socialism)'라 부른다. 내가 나누면 남도 나눌 것이고, 공동체는 번영하게 된다.

 

모든 것을 떠나서, 서로 밟고 밟히는 곳에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이것이 한국인들의 행복지수가 낮고, 자살률이 높고,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이유다. 아이폰을 왜 못 만드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이런 식의 경쟁체제를 유지하다간 '한국형 잡스'나 '선진 일류국가'보다 사회 붕괴가 먼저 찾아올 것 같으니 말이다.

 

201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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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패러다임 바꾼 애플·트위터…IT 성공신화뒤 ‘인문학’이 뛴다 

 

“애플은 인문학-기술 교차로” 트위터는 다양한 전공 ‘융합

 

“애플은 단지 기술기업이 아닙니다. 그 너머에 있는 기업입니다.”(Apple is not just a technology company: it’s more than that.)

 

애플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가 지난 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콘센터에서 열린 ‘아이폰4’ 출시행사에서 한 말이다. 그는 ‘기술과 인문학의 결합’에서 애플과 다른 회사는 구별된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기술주 시가총액 순위에서 수십년간 1위이던 마이크로소프트(MS)를 제친 애플이 스스로 “우린 기술기업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다니.

 

인문학은 지난 1월 잡스가 태블릿 피시(PC)인 ‘아이패드’를 발표할 때도 등장했다. 당시 잡스는 “애플은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에 서 있었다”고 정체성을 밝혔다. 인문학은 기술보다 훨씬 멀리 있다. 애플은 기술기업에 더 가깝지만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는 시구처럼 인문학은 어려운 여정에도 도달해야 할 목표라는 것이다.

 

애플의 인문학 추구는, 홍보 목적도 있지만 애플의 성공 비결을 알려주는 열쇳말로 볼 수도 있다. 인문학은 전문 기술과 거리가 멀지만 인간과 지식에 대한 근원적이면서 보편적인 통찰과 호기심에서 비롯한 학문으로, 국내 대학에서는 흔히 ‘돈벌이에 도움 안 되는 학문’으로 여긴다.

 

스티브 잡스는 진보적 인문학의 전통이 강한 리즈대학을 다니다 첫해에 중퇴한 바 있다. 잡스는 중퇴 뒤에도 리즈대학의 다양한 인문학 강좌들을 청강했는데, 특히 붓글씨 강의에 매혹됐다.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잡스는 “붓글씨는 멋지고 역사성을 담고 있는데다 과학으로 분석할 수 없는 미묘한 아름다움이다”라며, 쓸데없어 보였던 청년 시절의 탐구가 훗날 맥컴퓨터를 만드는 데 요긴한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인문학을 중시하는 문화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다른 정보기술(IT) 기업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있는 단문블로그 업체 트위터 사무실을 방문해 보니, 컴퓨터 전공자만이 아닌 다양한 경력의 직원들이 모여서 일하고 있었다.


기술이 압도하는 시대에 숫자 숨기고 인간 내세워

 

사실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로 이어지는 애플의 히트작은 음악재생기(MP3플레이어), 휴대전화, 태블릿 피시 분야에서 처음 나온 제품들이 아니다. 후발주자로 뛰어든 시장에서 애플이 이뤄낸 성공은 사용자의 직관을 충족시켜주는 기능과 종전과 구조를 달리하는 산업생태계를 통한 가치 제공에 기인한다. 공급자 관점과 전통적 접근법을 버리고 사용하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만들어낸 제품들이다.

 

잡스는 아이폰4 출시행사에서 화상통화를 선보였다. 새로울 게 없는 서비스이지만 현장 참석자들은 영상을 보며 감탄했다. 군인은 병원에 누워 있는 아내랑 통화를 한다. 곧이어 아내의 뱃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화상전화로 보고는 감격한다. 연인인 두 청각장애인이 말이 없는 전화 통화를 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표정과 눈빛으로, 손말로 나누는 사랑의 대화였다. 화상전화가 왜 필요한지를 간단히 이해시키는 방법이었다.

 

모든 것을 숫자로 바꿔 기계가 처리할 수 있도록 한 디지털 기술은 기존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며 전에 생각지 못하던 혁신을 이뤄내며 생활을 변화시키고 있다. 스탠퍼드대 컴퓨터공학 박사과정에 다니던 구글의 공동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디지털 기술 진화의 선두에 서 있다. 수학적 알고리듬을 신봉하는 이들은 “과거의 업무 방식이 과학적이지 않고 비효율적이다”라며 데이터를 분석하고 효율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구글을 디지털 변혁의 중심이 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과 사회현상은 숫자로 측정하기 힘들고,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바뀌지 않는 사람의 사는 모습이 있다. 혁신이 일상화한 디지털 기술일수록 더디게 변화하는 사람의 특성을 고려하고, 인문학적 성찰을 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달 한국을 찾은 <구글드>의 저자 켄 올레타는 ‘구글의 장점은 곧 약점’이라는 지적을 했다. 그는 “구글의 엔지니어 위주 문화는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면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며 “애국심, 자존심, 두려움, 사생활 등은 측정될 수 없다”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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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이 부러운가? '지방대'란 말부터 없애라

혁신과 창의성의 조건은 '탈집중과 다양성'

 

언어는 사회의 거울이다. 독특한 언어습관을 잘 살피면 한 사회의 강박을 읽어낼 수 있다. 한국 역시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특한 언어용법이 있다. '지방'이라는 말이 그렇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지방(local)'은 '전국'(혹은 '세계')의 상대 개념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서울'의 반대말로 쓰인다. 한국에서 '지방'이 보편타당한 의미를 갖는 드문 용례는 '서울 지방법원'과 (서울시장도 뽑는) '지방선거' 정도일 것이다. 이 말은 서울도 전국을 이루는 지방의 하나라는 당연한 (그러나 잊혀진) 상식을 일깨워준다.

 

'서울이 아닌 모든 지역.' 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언어인가? 도대체 '서울 아닌 지역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기에 한꺼번에 뭉뚱그릴 수 있을까? 워싱턴 디시 이외의 북미대륙을 싸잡아 '지방'이라고 부르거나 미국 이외의 나라를 '변방'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지방'이라는 말이 얼마나 기괴한 언어인지를 알 수 있다.

 

한국언론에서 담론화되는 '지방대학'은 인종차별 언어인 '유색인종'과 유사한 맥락을 지닌다.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대상을 하나로 묶어 타자화함으로써 '열등함'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유색인종으로는 드물게 ~가 되었다'든가,

'지방대 출신으로 외국 명문대 교수가 되었다'는 외견상 긍정적인 맥락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성공은 '지방대'나 '유색인종'이

능력상의 아무 차이가 없음을 증명함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이 구분을 부각해 '희한한 일'로 의미화함으로써 차별적 범주체계를 재생산한다.

 

 

야만의 언어 '지방대학'

 

언어는 의미만을 갖지 않는다. 모든 말에는 사회가 부여한 정서와 평가 또한 담겨있다.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알 것이다. '지방'이 '서울이 아닌 지역'이라는 기능적 의미만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별개의 대상들을 한 덩어리로 묶는 행위 자체가 모멸의 의도를 갖는다. 인종차별적 표현인 '유색인종(colored)'처럼 말이다.

 

사전적으로 '유색인종'이라는 말은 '백인이 아닌 인종들'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백인이 아닌 인종들' 사이에 대체 무슨 유사성이 있으며, 이들을 백인과 구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놀랍게도, 영어권에서 오래 전 폐기된 '유색인종'이라는 모멸적 언어가 한국언론에는 흔히 등장한다. 이런 언론이 '지방'이라는 차별적 언어에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지방'의 담론 가운데 가장 억압적이고 모순적인 것은 '지방대'라는 말일 것이다. 완전히 다른 역사적, 문화적, 교육적 배경과 철학을 지닌 대학들이 왜 한데 묶여야 하는가? 단지 수도권에 있지 않다는 이유 만으로 말이다. 이 독특한 어법을 미국에 적용해보자. 한국인들이 높이 평가하는 대다수 대학들이 '지방대'로 편입될 것이다.

 

한국인들의 교육수준은 매우 높다. (한국의 교육제도 덕분에 높은 것이 아니라는 점도 덧붙여야겠다. 교육제도에도 '불구하고' 높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한국에서 초중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수도권'과 '비수도권' 대학을 구분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훌륭한 능력과 잠재력을 갖고있다는 말이다.

 

나는 이 문제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판단할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과 외국의 교육과정을 거쳐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그동안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의 학습능력과 연구성과로 출신대학의 '수도권'과 '비수도권' 여부를 짐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회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닌텐도는 도쿄가 아닌 교토에 본사를 두고 있다.

<뉴스위크>는 닌텐도가 수도에서 지리적으로 분리됨으로써 일본 특유의 답답한 기업문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아래 사진은 닌텐도의 게임기 위(Wii)와 3디에스(3DS).

 

 

한국 대학의 심각한 '하향 서열화'

 

최근 한국 정부와 기업은 '한국의 스티브 잡스' 양성 계획에 여념이 없다. 어리석은 짓이다. 한국에서 잡스같은 인재가 나올 수 없어서가 아니다. 양성하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학벌과 배경에 눈이 먼 사회가 이들을 알아 보지 못할 뿐이다.

 

나는 '지방대'라는 말을 없애는 것이 한국사회에 포진한 인재들을 발굴하는 첫 걸음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학교 졸업장이 있든 없든 능력에 따라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학교 서열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것은 '경쟁원리'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경쟁이지 학벌경쟁이 아니다.

 

학교 서열화는 도리어 경쟁을 저해한다. 소수의 '특권계층'에 속한 학교들은 교육의 질로 경쟁하기보다는 '이름장사'를 하면서 학생 선발만으로 권력을 유지하려 들기 때문이다. 반면에 부당하게 낮은 대접을 받는 학교들은 경쟁 의욕 자체를 잃기 쉽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시켜도 졸업생들이 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기운이 빠지지 않겠는가?

 

'1명의 인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엘리트론'으로 유명한 기업 총수가 있다. 최근 그 기업에 속한 이사 한 명이 공개적으로 고교평준화를 비판했다. 그는 "평준화 제도는 말도 안 되는 소리"며, '평준화 체제 속에서는 우수 인재를 기를 수 없다'고 단언했다. 누구든 자신의 견해를 말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사실은 분명히 밝혀야 할 것 같다.

 

평준화된 한국 초중고등학생들의 학업성취도는 전세계에서 수위를 다툰다. 국제적으로 가장 경쟁력이 떨어지는 곳은 오히려 대학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의 2009년 12월 연구보고서를 보아도 이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보고서가 밝히고 있듯, "초중등교육에 있어서 문해력, 수학, 과학 등에 있어서 성취도는 가히 세계적인 수준"인 반면, "대학 경쟁력은 아직 밑에서 세는 것이 빠를 정도로 낮은" 실정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 가장 서열화된 고등교육 단계가 가장 경쟁력이 낮은 것이다. 한국에서 초중등교육이 '상향 평준화'된 반면, 고등교육은 심각한 '하향 서열화'의 길을 걸어 온 셈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정말 경쟁이 필요한 곳은 초중고등학교가 아니라 대학임을 말해준다. 대학들 사이에 경쟁을 유도하는 방법은 출신학교 이름 프리미엄이 아니라 졸업자들의 능력대로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학벌 사회의 폐지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하자면, 앞의 이사님은 자신의 회사 먼저 걱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경쟁이 중요하다면서도, 정작 그 기업의 총수는 능력 경쟁이 아니라 유전자 친밀도로 기업을 물려줄 계획이니 말이다. 게다가 평준화 체제 속에서 교육받은 그 '비인재'에게 말이다.

 

교토대학의 상징인 시계탑. 자유로운 학풍의 교토대학은 60년대에 학생운동과 교수들의 진보적 사회참여로 명성이 높았다.

교토대학의 분방한 정신은 교토의 문화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보다 심각한 집중과 위계

 

두 가지 모두 근거 없는 차별이지만, '지방대'는 '유색인종'보다 더 부당한 내용을 담고 있다. '유색인종'은 그나마 소수인종에 대한 다수의 차별이었다. '지방대'는 소수의 몇몇 대학을 위해 국민 대다수가 교육 받는 배움의 터전을 차별하고 모욕하는 행위다.

 

일차적으로 이 언어는 지시 대상을 억압하지만, 그 피해는 '수도권대'를 비롯해 사회 전체에게 돌아간다. 실력을 갖춘 이들이 제대로 사회에 이바지할 기회를 누릴 수 없다는 것도 모두의 손실이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은 학교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서울 안에 존재하는 것 자체를 특권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심각한 집중화, 위계화, 획일화다. 이전 기사 <우리는 '이런 거' 왜 못만드냐고?>에서 집중과 위계가 어떻게 일본을 일사불란한 '일본주식회사'로 만들어 혁신과 창의성을 빼앗아갔는지를 지적했다.

 

믿기 어려울지 모르나, 한국의 상황은 일본보다 훨씬 심각하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신뢰(Trust)>라는 책에서 일본과 한국의 기업문화를 비교한다. 이 분석에 따르면, 한국 대기업은 과거 일본의 재벌(zaibatsu)을 모델로 삼아 성장했으나, 그보다 훨씬 집중적이고 위계적인 기업문화를 만들어냈다.

 

후쿠야마는 유교적 혈통주의를 원인으로 꼽는다. 한국의 기업은 아버지를 수장으로 하는 위계적 가정의 사회적 확장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는 전체의 합의를 중시하기 때문에 개인이 조직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반면에 한국은 경영자 개인이 혈통의 권위에 힘입어 조직 전체에 막대한 권력을 행사한다. 조직이 개인과 다른 목소리를 어려운 기업문화인 것이다. 이로 인한 독단성의 폐해는 현재 한국의 기업과 정부 모두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미국의 가장 창의적 산업이 동부의 대도시를 벗어나 캘리포니아에 자리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60년대 서부해안을 휩쓸었던 저항운동은 인권, 여권, 성적 다양성, 반전운동뿐 아니라 반부패, 환경주의, 탈도시 운동을 축으로 삼았다.

사진은 '실리콘 밸리의 수도'라 불리는 산호세의 전경으로, 이곳 교외에 애플, 구글, 인텔, 휴렛패커드, 어도비, 이베이 등이 자리잡고 있다.

애플의 본사가 있는 쿠퍼티노는 인구 5만 명, 구글의 마운틴뷰는 7만의 소도시다.

 

 

애플과 닌텐도는 '지방'에 있다

 

<뉴스위크>는 2008년 2월 25일자 기사에서 '애플이 일제가 아닌 이유'를 분석했다. 기사는 획일화된 기업문화로 인해 혁신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에 비견되는 '예외적 사례'로 닌텐도를 들었다. 사용자의 신체 움직임을 포착하는 '모션콘트롤'을 처음 도입한 게임기 위(Wii)나, 안경 없이 3차원 시각효과를 내는 3디에스(3DS) 등 비디오 게임의 혁신을 주도해 온 회사다.

 

소니, 도코모, 엔이시(NEC) 등 혁신을 주도하던 일본 기업들이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닌텐도는 어떻게 창의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뉴스위크>가 분석한 이유는 간단하다. '도쿄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도쿄에서 먼 교토에 본사를 두고 있기 때문에 획일화된 '주류 기업문화'에서 벗어나 독자적 기술개발과 경영방식을 구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아웃사이더' 정체성이 풍요로운 문화적 전통과 결합하여 교토를 창의력의 새 메카로 만들었다. '주류문화'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혁신 도시로 부상한 곳은 교토만이 아니다. 미국 실리콘 밸리 역시 역시 동부의 대도시를 벗어나 서부의 자연 속에 둥지를 틂으로써 성공을 일군 사례다. 수도와 대도시에서 벗어나는 것은 상식화되고 통념화된 관료주의, 부패, 위계질서로부터 탈피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의 정보통신업계에는 '실리콘 밸리 흉내내기'가 유행이다. 회사를 학교처럼 잔디 깔린 '캠퍼스'로 조성하고 사원들의 자유로운 복장을 허락하는 것이다. 이것도 좋은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사고를 배우는 것이다. '캠퍼스문화'의 핵심은 잔디나 청바지가 아니라 주류문화를 거부하는 저항정신에 있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가 60-70년대 저항운동의 온상이었던 캘리포니아에 자리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교토와 실리콘 밸리의 또 다른 공통점은 대학의 분방한 정신 속에서 성장해왔다는 점이다. 두 곳은 실질적 의미에서도 '캠퍼스'인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 교토는 자유로운 학풍의 교토대학, 그리고 실리콘 밸리는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 스탠포드, 산호세 주립대처럼 진보적인 학교들의 세례를 받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교가 기업을 움직여야지, 기업이 학교를 움직여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교토의 야경. 교토 고유의 문화적 전통은 도쿄 중심의 '주류 경영방식'과 구분되는 교토만의 기업문화를 일구어 낼 수 있었다.

한국은 일본보다 더 위계화된 기업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서울 아닌 지역들을 '지방'으로 치부하는 극단적 서울중심주의는 혁신의 여지를 더욱 좁혀가고 있다.

 

 

교토와 실리콘 밸리는 이미 한국에

 

현재 교토는 '창의경영 연수'를 온 한국의 대기업 임원들로 붐빈다. 이 역시 좋은 일이지만, 더 현명한 것은 한국 곳곳에 교토를 만드는 것이다. 사실 만들 필요도 없다.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자리 잡은 정부기관, 학교, 기업들이 '지방'으로 무시해 온 유서 깊은 도시들 말이다. 그곳에 투자하고 그곳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사람들을 과감히 채용해 보라. 그 기업들이 혁신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앞의 <뉴스위크> 분석기사는 일본 주류기업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았다. 이제 일본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곳곳에서 쏟아져 나올 혁신과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대만의 부상을 목격하고 있다. <뉴스위크>는 '애플을 만들지 못한' 일본에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하며 기사를 끝맺었다. "일본이 혁신을 원한다면 기술뿐 아니라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우리도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가 왔다. 못난 사람들이나 남을 차별하면서 즐거워하는 법이다. 차별의 근거가 희박하다면 더욱 그렇다. 그 행위가 스스로의 목을 죈다면 더더욱.

 

2010.07.02 / Ohmynews 강인규 기자(fouc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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