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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삼성, 삼성을 생각한다 - 김용철

by Wood-Stock 2010. 2. 6.

검사 상가 갈 때 ‘이건희 전용기’ 내줘

김용철 변호사 책에 드러난 ’관리의 삼성’
삼성사건 재판장은 2002년 관리 대상 검사 처남 주식손실 보전해 준 적도
이 전 회장 “공짜제품 뿌려 경쟁사 망하게”

 

“스튜어디스가 무릎걸음으로 와서 시중을 들었다. 동행한 검사들은 신기하다는 듯 연신 두리번거렸다.”

100여명이 탈 수 있는 여객기를 16인승으로 개조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전용기에는 김용철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과 몇몇 현직 검사들이 타고 있었다. 후배 검사의 상가에 급히 갈 일이 생기자, 이학수 당시 삼성 부회장이 김 팀장에게 회장 전용기를 탈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전용기 탑승을 받아들인 검사들과 삼성 사이의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일화다.

 

2007년 10월 이른바 ‘삼성 비자금 의혹’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가 지난 29일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를 냈다. 이 책에는 ‘관리의 삼성’이 그동안 법원·검찰·국세청 등 권력기관을 상대로 어떤 형태의 로비를 펼쳤는지와 경영권을 세습하는 과정에서 증거 조작도 마다하지 않는 행태가 반도체 회로도처럼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김 변호사는 다시 들어도 충격적인 법조계 관리 실태를 털어놓고 있다. 그동안 언급되지 않았던 인사들의 실명을 그대로 써 논란도 예상된다. 한 예로, 참여정부 때인 2007년 김 변호사의 폭로 뒤 청와대 쪽에서 국세청장 후보 3명의 ‘검증’을 그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결론은 “모두 삼성의 관리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법관도 예외가 아니었다. “판사의 고교 동창인 계열사 부사장이 관리를 맡았다. 2002년에는 나와 부사장, 판사 셋이서 함께 골프를 치기도 했다”고 김 변호사는 밝혔다. 이 판사는 6년 뒤 터진 삼성사건에서 재판장을 맡았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매각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검의 수사 진도가 나가지 않던 당시, 지검장 집엔 삼성 관계자가 드나들며 선물을 갖다줬다는 내용도 실렸다.

 

삼성 관련 사건을 맡은 부장검사의 처남이 삼성증권에 투자했다가 본 손해를 삼성이 보전해줬다는 주장도 있다. 또 한 대법관에게는 150만원짜리 굴비세트를 보낸 일도 있다고 한다. 보내면서 ‘설마 받기야 하겠나’라고 생각했지만, 굴비는 반송돼 오지 않았다고 한다.

김 변호사는 삼성 임원들이 연루된 사건의 뒤처리도 맡았다고 했다. 임원들이 1999년 성매매를 하다 걸려 검찰 조사를 받을 상황에 처하자 김 변호사가 이를 ‘처리’해 줬는데, 당시 삼성은 성매매를 한 임원과 이름이 비슷한 임원까지도 미국으로 도피시켰다는 얘기가 나온다.

 

책은 이 전 회장의 제왕적 모습도 자세히 소개한다. 이 전 회장은 삼성 제품의 판매량이 경쟁사에 뒤처지자 ‘모든 가정에 삼성 에어컨과 냉장고를 공짜로 나눠줘서 경쟁사를 망하게 하라’는, 선뜻 믿기지 않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고 김 변호사는 주장했다.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김 변호사는 “반도체 기술자보다 비자금 기술자가 대우받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고 묻고 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나훈아, 이건희 거액초청 거절…“공연표 끊어라”

 

2007년 10월 이른바 ‘삼성 비자금 의혹’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애창곡은 나훈아의 ‘영영’과 ‘사랑’이다. 지난 29일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를 펴낸 김 변호사는 책에서 ‘삼성 일가와 가수 나훈아씨에 얽힌 일화를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책에는 이건희 전 회장과 삼성을 둘러싼 다양한 일화가 실려 있는데, 연예계와 예술계에 얽힌 일화도 들어 있다. 가수 나훈아씨와의 일화도 그 중 하나다. 이 책에 따르면,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일가의 파티에는 연예인, 클래식 연주자, 패션 모델들이 초청됐다. 가수의 경우,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통 2~3곡을 부르고 3000만원쯤 받아간다. 이 전 회장 일가의 파티 초청을 거절하는 연예인은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가수 나훈아다. 삼성 쪽에서 아무리 거액을 주겠다고 해도 나훈아를 불러 노래를 부르게 할 수는 없었다. 나훈아는 대략 이런 입장이었다고 한다. “나는 대중 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공연하겠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 표를 끊어라.” 돈으로도 사지 못하는 한 가수의 자존심과 긍지가 묻어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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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직원에게 김용철 책을 권하는 이유·①] 꼭두각시 사장들 ~ "삼성은 왜 '아이폰'을 만들지 못할까?"

기사입력 2010-02-03 오후 12:02:03

 

삼성 주변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지난달 26일, 삼성전자 부사장이 투신자살했다. 그는 메모리 반도체 공정 기술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히는, 정통 엔지니어였다.

한편, 삼성에게 챔피언 자리를 줬던 전자 산업은 새로운 변곡점을 맞았다. 변화를 주도한 것은 아이폰 바람을 불러일으킨 애플과 스티브 잡스다. 누구나 자신이 만든 소프트웨어와 콘탠츠를 앱스토어에 올릴 수 있다. 이걸 내려 받아 아이폰에 설치한 소비자가 낸 가격 가운데 70%는 개발자 몫이다. 아이디어와 기술만 있으면, 판매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독립 개발자 시대가 열렸다. 아이폰의 성공은 하드웨어 품질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개발자들의 자유로운 열정을 끌어내고, 이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하는 제도가 만든 것이다.

반면, 삼성이 스마트폰 시장에서 아이폰의 맞수로 내놓은 옴니아2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지나친 아이폰 열기에 눌린 결과일까. 삼성은 그렇게 보는 듯하다.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이 "극성스런 네티즌에 의한 반짝 인기"라고 말한 것을 보면 말이다.

지난달 29일,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가 책을 냈다.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라는 책에는 그가 삼성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이 자세히 담겨있다. 삼성 수뇌부에게는 부사장의 자살이나 아이폰 열풍보다 더 큰 악재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판단이 달라진다. 총수 일가가 아니라 평범한 삼성 직원들의 입장에 서면, <삼성을 생각한다>에 담긴 내용은 삼성이 지금 부딪힌 문제를 푸는 힌트가 될 수 있다. 아이폰을 내놓은 애플처럼 시장 자체를 뒤흔드는 창조적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문제 말이다. <삼성을 생각한다>가 삼성 경영에 던지는 시사점을 정리했다. <편집자>


"'추격자 전략', 1등 된 뒤에는 안 통한다"

삼성 그룹 내부 언론인 <미디어 삼성>에는 최근 "1등 기업의 함정"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1등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성공적이었던 전략이 1등이 된 뒤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른바 '추격자 전략'이 가진 한계다.

이 기사에서 '추격자 전략'의 실패로 꼽힌 사례가 바로 스마트폰이다. 기사에 등장한 한 직원은 "앞으로 본격적으로 출시할 A플랫폼 기반제품은 훨씬 빨리 내놓아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A플랫폼 회사가 우리 쪽에 먼저 제안을 해 왔다"고 말했다. 여기서 A플랫폼이란 구글이 만든 운영체제(OS)인 안드로이드를 가리킨다. 윈도 모바일 기반 스마트폰 개발에 주력하던 삼성에게 구글이 안드로이드 기반 스마트폰 개발을 제안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삼성은 이런 제안을 거부했다. 결국, 구글은 대만 업체와 손잡고 첫 번째 안드로이드폰을 내놓았다.

기사 속 직원은 "(삼성은) 뒤늦게 A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제품 개발에 뛰어들었다. 왜 우리는 꼭 성공모델이 있어야 도전하는 것인지, 과연 우리가 진정한 1등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허수아비 사장들, 경영 실력 쌓을 기회가 없다"

▲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씀, 사회평론 펴냄. ⓒ프레시안
성공모델이 없으면 도전하지 않는, 보수적 기업문화가 삼성의 덫이라는 지적이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보면, 이런 문화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다. 이 책에 묘사된 삼성 계열사 경영진은 구조본(옛 비서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 책에 따르면, 삼성 계열사에는 모두 '관리담당'이라 불리는 임원이 있다. 정식 명칭은 경영지원팀장 등으로 다양하지만, 하는 일은 같다. 구조본의 직접 지시를 받으면서, 계열사 경영을 감시하는 것이다. 계열사에 있는 '관리담당'과 짝을 이루는 게 구조본 재무팀에 있는 '운영담당'이다. 관리담당과 운영담당은 서로 지시와 정보를 주고받으며 계열사를 통제한다. 그래서 계열사 사장이 아래직급인 관리담당의 눈치를 보곤 했다.

삼성 사장들은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날 직원들에게 오후 휴가를 주는 일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투자와 인사에 관한 결정은 말할 것도 없다. 아주 시시콜콜한 결정까지 구조본의 지시에 따라 이뤄졌다. 구조본에 유능한 인재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계열사와 동떨어진 곳에 있는 구조본 임원이 계열사를 제대로 이끌기란 쉽지 않다. 외국에서 성공한 사례를 찾아서 그대로 적용하는 경영 방식은 이런 상황과도 관계가 있다. 구조본이 모든 결정을 도맡는, 원격경영 구조에서는 권위 있는 매뉴얼을 구해서 계열사가 따르도록 하는 게 가장 편한 선택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부분적으로는 성공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더 이상 따라할 대상이 없어진 지금, 삼성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이 질문에 답을 찾는 게 삼성 경영진의 역할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전문경영인에게 중요한 결정을 맡기려 해도, 훈련된 경영인이 없다는 것. 유능한 경영인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경영인의 소양을 닦을 수 있다. 모든 결정이 구조본에서 이뤄지고, 구조본은 오로지 총수의 눈치만을 살피는 삼성 식 경영구조에서는 계열사 경영진이 독자적으로 판단하면서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다. 삼성 그룹이 오랜 역사와 방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스타급 전문경영인은 많이 배출하지 못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김 변호사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재무팀의 전횡, '세일즈 머신' 된 삼성전자

"재무팀이 작성한 보고서 끝에 의견란이 있는데, 모든 임원에 대한 평가를 반드시 쓰도록 돼 있다. '임원 누구누구는 즉시 조치함이 상당하다, 사장은 연말에 재평가함이 상당하다'라는 식으로 쓴다. 여기서 조치나 재평가란 해고를 뜻한다. 구조본 재무팀은 그룹 계열사 사장이나 임원에 대해 목을 쥐고 있는 자리인 것이다.

예컨대 그룹 내 어느 화학 계열사 사장이 명절에도 출근해서 안전점검을 할 정도로 열심히 일한다고 하자. 그런데 재무팀이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하자. 이런 경우, 재무팀에서 ''계장급 사장'이며, 리더십이 부족하다'라고 적어 보고하면 그만이다. 꼼꼼하게 실무를 챙긴다는 점을 거꾸로 비난의 근거로 삼는 것이다. 반대로, 사장이 굵직한 일만 챙기고 실무는 아랫사람에게 위임한다면? 역시 트집 잡을 방법은 많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자의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온 셈이다.

내가 재무팀에서 일하던 시절, 궁금한 게 있어서 소환하면 누구든지 바로 왔다. 이렇게 불려온 사람들은 사장에 대한 고자질을 밥 먹듯 했다 '어차피 사장은 회장이 파견한 사람일 뿐'이라고 여기므로 사장에 대한 충성심이 있을 리 없다. 충성을 바칠 대상은 오직 회장뿐인 것이다."


구조본의 옛 이름은 회장 비서실이다. 비서실의 약자인 '실'이라는 표현은 삼성 그룹 안에서 권력의 상징이었다. 김용철 변호사에 따르면, "여긴 실입니다"라는 한마디면, 계열사 사장이 긴장하는 게 확 느껴졌다고 한다. 비서실은 구조본, 전략기획실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특검 수사를 거친 뒤 공식적으로는 해체됐다. 그러나 삼성 그룹에서 비서실 기능이 사라졌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이런 기능 중에서 핵심은 자금 관리다.

▲ 김용철 변호사. ⓒ프레시안(김봉규)
김 변호사 재직 시절, 구조본 재무팀은 비자금 조성, 불법 로비 등 비리를 주도했을 뿐 아니라 삼성 그룹 내 최고 실세 집단으로 군림했다. 재무 관련 부서가 전권을 휘두르는 구조는 지금도 여전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재무 부서가 이토록 큰 힘을 휘두르는 구조가 정상일까. 부작용이 필연적이다. 이런 구조에선 당장의 수익성과 거리가 먼 지표를 개선하는 일에는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혁신을 주도하는 기술 리더십이 망가진다는 뜻이다.

실제로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 매출과 수익을 거뒀다는 발표가 나올 무렵,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삼성전자를 가리켜 '세일즈 머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기존 기술을 활용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아이폰을 내놓은 애플처럼 산업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신적인 제품을 생산할 능력은 없다는 평가다.

이 신문은 "삼성이 최근 수년 간 거둔 성공은 기술 리더십(technology leadership)에 기반한 게 아니라 신속한 대응(speed and agility) 덕분이었다"며 "그러나 결국에는 진정한 혁신의 부족이 수익성을 해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업통으로 알려진 최지성 사장이 삼성전자 경영의 전권을 쥔 것을 놓고도 비슷한 전망이 나온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공포, 상사 지시 없으면 머리 안 쓰는 문화"

이에 대해 삼성 측은 "통상 삼성전자의 연구개발비는 매출의 10% 수준이다. 이 정도면 결코 적은 게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런 반박에서도 '혁신'을 '연구개발비 지출'이라는 재무 지표로만 이해하는 태도는 반복된다. 충분한 연구개발비 투자는 혁신을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연구개발비를 많이 쓴 기업이 꼭 혁신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혁신을 위한 또 한 가지 조건을 빠뜨릴 수 없다. 바로 '문화'와 '제도'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삼성 내부 임직원도 공감한다. 앞서 소개한 <미디어 삼성>에 실린 "1등 기업의 함정"이라는 기사에 소개된 한 개발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우리는 뭔가 창조적 제품을 만들 필요가 없었고, 만들어서도 안됐다. 과거 다른 기업들의 성공 사례들을 좇는데 익숙하다보니 후발주자로서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기사에 소개된 다른 연구원은 "개발하다 보면 가끔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런 아이디어를 내면 '뜬구름 잡지 말고 다른 걸 생각해 봐! 바로 시장에 낼 수 있는 걸로…'라는 반응이 나온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직원은 "내가 제안한 아이디어는 심사까지만 1년이 넘게 걸렸다"면서 "잘 만들면 획기적 상품이 될 수 있는데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신규사업 개발 담당 전무 출신으로 <삼성과 인텔>이라는 책을 냈던 신용인 박사는 "윗사람 지시 없으면 머리 안 쓰는 문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지나치게 엄격한 관리와 통제 문화가 창의적인 혁신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다.

"혁신의 기풍 사라지고, 숫자에 맞춰 쥐어짜는 일만 남았다"

삼성 휴대폰에 쓰이는 천지인 자판 발명가인 최인철 삼성전자 차장은 제도의 문제도 함께 지적한다. 직원의 창의성이 낳은 결과물에 대한 적절한 보상체계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는 천지인 자판 발명으로 회사에 천문학적 수익을 안겨줬지만, 삼성 측은 그에게 고작 10만 원 조금 넘는 상여금을 줬을 뿐이다. 불법 로비, 비자금 조성 등에 가담한 이들이 누리는 혜택에 비하면 너무 보잘 것 없는 금액이다. <삼성을 생각한다>에도 "반도체 기술자 위에 비자금 기술자가 있는 구조"라는 말이 나온다.

그가 발명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것은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한 뒤였다. 직무발명 보상에 대한 부당이득금 반환청구소송을 취하하는 대가로 삼성이 그에게 돈을 줬던 것. 직원이 직무를 통해 얻은 발명특허로 회사가 이익을 얻었을 경우, 이익 가운데 일정 비율은 직원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법원 판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관련 기사: "'삼성 식 경영'을 고발한다")

최 차장은 "과거의 삼성전자는 지금보다는 혁신을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재무부서가 전권을 쥐면서, 모든 게 변했다. 철저하게 재무적인 지표로만 평가하는 문화가 일반화됐다. 이런 문화 속에서는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 자산은 설 자리를 잃는다. 기술과 서비스의 혁신이 가진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게 된다. 혁신의 기풍은 사라지고, 위에서 할당한 재무적인 목표에 맞춰 쥐어짜는 일만 남는다"라고 말했다.

/성현석 기자

 


[삼성 직원에게 김용철 책 권하는 이유·②] '관리'의 한계 ~ 삼성 부사장 자살이 남긴 숙제

기사입력 2010-02-04 오후 12:05:06

 

 

삼성은 유행 안 타는 정장 차림 남성?

반듯하게 넘긴 가르마 머리, 단정한 옷차림, 서열을 존중하는 깍듯한 예의. 흔히 '삼성맨'이라 불리는 삼성 직원들을 보면 떠오르는 말이다. 이런 이미지의 배경에는 '관리의 삼성'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기업 문화가 있다. 삼성에선 오래 전부터 재무와 인사 등 관리부서의 힘이 셌다. 이른바 '삼성맨' 이미지도 관리부서에 어울리는 것이다.

이는 다른 대기업과도 종종 비교되는 대목이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대학생 1227명을 상대로 기업 이미지를 조사한 결과에서도 이런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나온 조사결과에 따르면, 대학생들은 삼성을 보면 주로 '보통 체형에 유행을 타지 않는 정장 차림 남성'을 떠올린다. 반면, 현대ㆍ기아차에 대해서는 '근육질 체형과 사각형 얼굴을 가진 30대 중후반의 생산직 남성'이 떠오른다고 응답했다.

SK는 '세련되고 유행에 민감한 30대 초반의 판매서비스직 남성'이었으며 포스코는 '근육질 체형의 사각형 얼굴을 가진 40대 초반의 생산직 남성'이었다. LG와 롯데는 여성 이미지로 나타났다.

'보통 체형에 유행을 타지 않는 정장 차림 남성'을 떠올리게하는 기업 문화. 이런 보수적인 문화는 삼성 자동차, e-삼성 등 그룹 차원의 치명적인 경영 실패에도 삼성이 견뎌낼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우선, 너무 엄격한 관리 문화 속에서는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는 창조적 혁신이 어렵다는 점이 있다. 특히 총수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한 비서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치를 무시하기 쉬운 재무부서가 주도하는 관리 문화 속에서는 더욱 어렵다.

'새벽 3시의 커피타임', 극심한 피로감

다른 문제점은 임직원이 느끼는 피로와 스트레스다. 너무 심하게 옥죄는 문화를 오랫동안 견뎌내는 것은 무리라는 이야기다. 최근 자살한 삼성전자 부사장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평균적인 '삼성맨'들이 느끼는 피로감은 이미 위험 수위다. <삼성과 소니>라는 연구서를 낸 고려대 경영학과 장세진 교수 역시 '조직 피로감'을 삼성의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꼽았다. 혹독한 취업난 속에서 삼성에 입사한 젊은이들이 금세 사표를 내는 경우도, 대부분 극심한 피로감이 원인이다.

▲ <과학동아> 1991년 6월호에 실린 삼성 이미지 광고. ⓒ프레시안
이는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1991년 한 잡지 광고를 보면, "새벽 3시의 커피타임 이야기"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사진 참조) 당시 '휴먼테크'라는 모토를 내걸었던 삼성전자의 기업 이미지 광고다. 이 광고에는 "초를 다투는 반도체 기술전쟁…(중략)…진 박사 팀은 여느 때처럼 새벽 3시에 커피 타임을 가졌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새벽 3시 커피 타임'이 일상적인 문화에 대해 어떤 소비자들은 믿음직스러워 할 수 있다. 그러나 임직원들에게 눈을 돌리면, 생각이 달라진다. 특이체질이 아닌 이상, 이런 고강도 노동을 오래 배겨낼 수는 없다.

삼성 임원들은 정기적으로 정밀 건강진단을 받는다. 직원들의 심각한 피로감에 대해서도 경영진이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임직원 건강 '관리' 차원에서 접근하는 삼성 식 해법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무노조 경영'이 문제다. 삼성에는 노조가 없는 탓에 관리부서의 임직원 쥐어짜기를 견제할 세력이 없다. 그리고 관리부서는 비서실(구조본, 전략기획실 등)이 지휘하는데, 비서실은 합리적인 경영판단보다 총수의 뜻을 앞세우곤 했다. 직원 입장에서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데, 총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하는 일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이런 구조에서 임직원 건강 관리를 강화하는 것으로 '조직 피로감'을 해소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백혈병으로 죽어간 노동자들, 열악한 공장 환경

이 대목에서는 더 큰 문제가 있다. 사무직, 연구개발직 등 이른바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달리, 생산직 노동자가 겪는 문제다. 이들이 겪는 것은 그저 피로감, 스트레스 정도가 아니다. '생존'이 위협받는 환경이다. 맹독성 물질을 취급하는 반도체 공장이 얼마나 위험한 환경인지는 잘 알려져 있다. 이 곳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삼성 노동자의 가족들은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공장 환경과 백혈병 발병 사이에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없다는 게 삼성 측 입장이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이들은 많지 않다. 민주노동당 홍희덕 의원이 공개한 서울대 산학협력단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발암물질인 벤젠이 검출된 것은 사실이다. 반도체 부문은 아니지만, 삼성 공장의 열악한 환경에 대해서는 김용철 변호사가 자세히 이야기했다.

"OJT를 받으면서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삼성전자 수원공장의 가전부문 조립라인을 꼽고 싶다.

여성 생산직, 남성 생산직이 컨베이어 벨트에 예속돼 두 시간에 10분씩 휴식하면서 꼼짝 없이 일하는 모습을 봤는데 혹시 배탈이 나더라도 화장실에 갈 수 없는 정도였다. 또 복도는 전등이 희미하여 앞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웠다. 화장실에는 손 닦는 수건이 없어서 자기가 갖고 있는 손수건으로 닦도록 돼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깨끗한 공장 풍경과 너무 거리가 멀었다. 일류 기업이라는 삼성 직원들이 이런 환경에서 일하는구나 싶었다.

북한에서 외부인이 구경하는 평양 거리는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지만, 실제로 주민들이 생활하는 곳의 환경은 엉망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외부에는 '지상천국'이라고 홍보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북한과 무엇이 다른가 싶기도 했다. 직원들이 기계 부품처럼 묶여 일하는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파서 오랫동안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같은 직장에서 본사 직원이나 관리직은 쾌적한 공간에서 대접도 받고 권세도 부리는데, 생산 현장에서는 해마다 생산성 향상 30% 구호 아래 경비를 줄이기 위하여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내핍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텔레비전이 미국으로 적자 수출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3000억 원 대금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관리자 아닌 전문가'는 떠나야 하는 회사, 영원한 '세일즈 머신'"

지나치게 엄격한 관리 문화는 직원 경력 개발에서도 문제를 낳는다. 관리부서의 힘이 지나치게 세다보니, 전문성을 쌓는 쪽으로 경력 개발을 하는 임직원이 손해 보는 느낌을 갖는다는 것이다. 상당수 삼성 직원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문제는 삼성만 있는 게 아니다. 관리 업무에서 배제된 전문가가 회사에서 버틸 수 없는 구조는 한국 기업의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꼽힌다. 외국 선진 기업에는 백발이 성성한 현장 기술자, 연구소에서 평생 한 우물만 판 전문가가 즐비한 반면,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 삼성이 '세일즈 머신'에서 벗어나 '기술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다른 형태의 경력 개발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최근 자살한 삼성 부사장을 놓고서도 비슷한 설명이 있다.

그 부사장은 평생 연구개발 업무만 해 왔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장장으로 발령이 났다. 어떤 이들에겐 이게 만족스런 인사조치일 수 있다. 리더십을 발휘하는 경영임원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경영이나 관리 업무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연구개발 업무의 정점에 있던 삼성 부사장의 자살은, 삼성 조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연구조직 구성원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삼성과 인텔> 저자인 신용인 박사(전 삼성전자 전무)는 '이중 출세 방식(dual ladder career)'에 대해 이야기했다. 관리자로 성공하는 경로와 전문가로 성공하는 경로를 동등하게 대접하는 방식이다. 일정 직급 이상 승진하면, 반드시 관리 업무를 맡아야 하는 구조를 깨자는 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텔에서는 '비서 한 명만 두고 일하는 기술 임원'을 부러워하는 문화가 있었다. 굳이 관리자가 되지 않더라도, 주변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분위기라는 이야기다. 이런 문화가 있으면, 관리자가 지나친 권력을 누리는 일이 줄어든다. 그래야 전문적인 식견과 통찰력 있는 의견이 존중받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비자금 털어내야, 삼성 문화 바뀐다"

'굳이 관리자가 되지 않더라도, 인정받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어려운 일일까. 김용철 변호사의 설명에 따르면, 답은 '그렇다'이다. 삼성에서 관리조직이 지나치게 큰 힘을 갖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게다. 바로 '비리'다.

"구조본에 있는 비자금 담당자는 계열사에 일정 금액씩 비자금을 할당했다. 경영이 어려운 회사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과거 삼성엔지니어링은 부실 규모가 1조 원에 달하고 수주 실적도 없어서 심한 적자에 시달렸다. 당시 이 회사 관리담당(경영지원실장)이었던 김능수가 '회사가 너무 어렵다'며 내놓을 돈이 없다고 버텼지만, 구조본은 그에게 위협하다시피해서 매년 50억 원을 받아냈다.

구조본 재무팀 관재부서에 있는 30대 초, 중반 과장들은 프랑스제 델시 청회색 초대형 여행용 가방에 들어 있는 현금을 수시로 본관 지하주차장에서 27층 비밀금고로 날랐다.

물론, 다른 직원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서 운반하지만 구조본 직원들은 대개 운반 장면을 보게 된다. 대부분 애써 눈을 돌리고, 못 본 척한다. 현금이 너무 많아서 운반하기 힘들 때는, 화물운반용 트롤리(trolley)를 사용하기도 했다. 비자금을 운반하는 관재파트 과장들은 주로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이었는데, 미래의 사장감으로 분류됐다."


<삼성을 생각한다>의 한 대목이다. 이처럼 노골적으로 비자금을 만드는 구조에서 임직원 관리를 느슨하게 했다간 도저히 뒷감당을 할 수 없다. "로비 기술자, 비자금 기술자가 반도체 기술자보다 위에 있는 구조" 역시 필연적이다. 온갖 불법 행위를 저지르면서 '무노조 경영'을 고집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정상적인 노동조합이라면, 자신들에게 돌아오거나 회사에 재투자돼야 할 부(富)가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용납할 리 없다.

비자금이 사라지고 투명한 경영구조가 갖춰지지 않는 한, 감시와 통제 위주의 삼성 문화는 바뀔 수 없다는 이야기다.

/성현석 기자 

 


[삼성 직원들이 김용철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③] 기업 보안의 그늘 ~

"삼성 식 '공포 경영', 언제까지 통할까"

기사입력 2010-02-05 오후 4:28:49

 

 

삼성전자 기술 유출 관련 보도가 잇따른다. 반도체, 냉장고 등 관련 기술이 유출됐고, 삼성전자가 천문학적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이다. 이 사건을 놓고, 주요 언론은 기술 보안을 강조하는 기사를 쏟아낸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삼성 내부에서 '직원 군기잡기'가 더 심해지리라는 전망도 나온다. 기술 유출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감시와 통제를 더 강화하리라는 게다.


일상적인 도청과 검열, 임직원 사생활은?

첨단 기술을 다루는 기업 입장에서는 보안을 강조할 수 밖에 없는 면이 있다.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들여 개발한 기술이 경쟁사로 유출될 경우, 치명적인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정과 임직원 사생활 보호라는 원칙 사이를 조율하는 게 만만치 않다. 그러나 김용철 변호사가 공개한 내용을 보면, 삼성 내부에서 이런 조율이 이뤄진 흔적을 찾기 힘들다. 임직원 사생활 보호라는 원칙은 일방적으로 무시됐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삼성에서 도청에 얽힌 일화는 많다. 삼성이 관계사에 도청기를 설치하고, 그 회사가 그걸 잡아내는지를 검사한 적이 있다. 관계사의 보안 능력을 파악하는 절차다. 이런 일을 하다가 국가정보원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국정원에서 운용하는 도청기에 자꾸 이상 전파가 잡힌다는 것이다. 국정원과 삼성이 경쟁적으로 도청하는 것이었다.


일상적으로 도청을 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도청을 막는 기술도 발달했다. 구조본에서 근무할 당시, 내 방 유리창에는 난반사 필름이 부착돼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레이저 광선으로 유리창 진동을 감지하는 도청 기술이 있다. 이걸 막기 위해 부착된 필름이다.

구조본 사무실이 있는 삼성 본관 26, 27층부터 회장 집무실이 있는 28층까지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녹음돼 기록으로 남겨졌다. 천장에는 카메라가 설치돼 있고, 에스원 당직자가 그걸로 늘 감시했다. (…중략)

한 고위 임원이 회사 본관 1층 안내 데스크에 있는 여직원을 좋아한 적이 있다. 그가 여직원에게 보낸 메일에는 낯 뜨거운 내용이 잔뜩 담겨 있었다. 그 임원이 보낸 메일 가운데 문제가 있는 부분을 출력하니까, 100장이 넘었다. 노인식이 그걸 들고 와서 내게 보여줬다. 찬찬히 읽어보니, 그 여직원에게 보낸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당시 유행하던 아이러브스쿨 홈페이지를 통해 만난 초등학교 동창 유부녀와 주고받은 연애편지도 있었다.

실제로 그 임원은 일을 시키려고 보면, 자리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 안내 데스크에 있는 여직원은 다른 곳으로 발령 냈다. 그리고 그 임원은 계속 진급에서 누락시켰다. 그는 자신이 왜 진급을 못하는지를 모르는 듯했다. 결국 그는 회사를 떠났다."


'공포 경영' 속에서 창의적 시도 가능할까?

<삼성을 생각한다>의 한 대목이다. 기업 비밀 보안을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조치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감시와 통제가 강화된다면, 임직원들의 내면에는 어떤 감정이 자리잡을까.

바로 '공포'다. 삼성 비리 관련 제보자를 만났던 기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 역시 공포다. 언제든 도청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어디서 누가 감시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 이런 감정은 상당수 임직원들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삼성 특검 수사 당시, 삼성 계열사가 일제히 막대한 자료를 폐기했었다. 평범한 직원까지 이런 작업에 동참했다. 이 과정에서 심한 수치심을 느낀 직원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감정을 회사 바깥에서 공개한 직원은 찾기 힘들었다. 역시 '공포' 때문이다.

<삼성과 소니> 저자인 고려대 경영학과 장세진 교수도 같은 지적을 했다. 이 책에서 그는 "비서실의 역할이 너무 커지면서 삼성 구성원들이 비서실에 의해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로 인해 조직의 피로감이 높아지고 '공포 경영(fear-based management)'이라는 기업문화까지 생기고 있다"고 적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창의적인 시도가 가능할까. 아무래도 회의적인 목소리가 높다.


"이건희 사면 본 뒤에도, 삼성 비리 고발할 사람 있을까"

▲ 이건희 전 삼성 회장. ⓒ뉴시스

'공포 경영'에 대해 짚어볼 대목은 또 있다. '삼성맨'들만 공포를 겪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삼성 외부에서 느끼는 공포도 만만치 않다. 지난해 말, 이건희 전 회장 사면은 삼성의 힘을 온 나라에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전 회장 단 한 명을 위해 대통령이 사면권을 행사했다. 유죄 판결이 확정된 지 4개월 만이었다.

이쯤 되면, 누구나 삼성 앞에서 움츠러들게 된다. 법 위에 있는 존재와 다퉈서 좋은 결과가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이 전 회장 사면이 있기 전까지의 상황을 돌아보면, 이런 위축감은 더 커진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리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쏟아냈지만, 특검은 비리 의혹 대부분을 덮어버렸다. 그나마 기소된 내용도 대부분 무죄 판결이 났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삼성 관련 비리를 접한 이들이 용기를 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삼성 공포가 내면화된 언론

언론 역시 움츠러들어있기는 마찬가지다. 김 변호사의 양심고백이 있기 전부터 그랬다. <시사저널> 발행인이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 관련 기사를 임의로 삭제하면서 불거진 사태가 대표적이다. 당시 <시사저널> 기자들은 파업을 벌였고, 결국 퇴사해서 새로운 매체를 창간했다. 재벌이 언론에 미치는 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지만, 주요 언론은 대부분 외면했다. 기사거리가 아니라고 본 걸까. 그렇지 않다.

당시 파업 관련 보도를 한 어느 언론인은 삼성 출입 기자들의 발언을 인용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다들 실명 인터뷰를 꺼렸다는 게다. 음성 변조를 해서 보도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삼성은 누가 인터뷰했는지 결국 알아낸다며 거절했다고 했다. 이쯤 되면, 언론인들 역시 삼성에 대한 공포가 내면화돼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단지 광고를 염두에 둔 행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이런 공포가 더 커졌다. 지난해 말 이건희 전 회장 사면 이후, 삼성에 불리한 언론 보도가 뚜렷한 까닭 없이 삭제되는 일이 흔해졌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을 소개한 <경향신문> 기사가 온라인 판에서 삭제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이 SK텔레콤 측에 아이폰 도입을 유보해달라고 요청했다는 <한국일보> 기사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 집행유예 중인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이 이건희 전 회장의 미국 방문을 수행했다는 <서울경제신문> 기사 역시 삭제됐다.

심지어 광고를 거절하기도 했다. 김 변호사의 책을 낸 사회평론이 주요 일간지에 광고를 내려 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이런 사례가 처음이 아니다. 삼성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고르디우스의 매듭> 등 김병윤 두레스경영연구소 대표의 책들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대개의 언론사가 광고 유치에 목을 매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경제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 바로 공포 때문이다. 실제로 삼성 측 역시 언론사에 광고를 받지 말라는 압력을 넣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언론사들이 알아서 기었다는 이야기다.


영원한 '삼성 가족'은 없다

어떤 삼성 직원들은 언론조차 떨게 만드는 삼성의 힘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그들이 평생 '삼성 가족'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생각이 바뀐다. 총수 일가가 아닌 이상, 평생 '삼성 가족'으로 남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언젠가는 회사를 떠나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삼성과 어쩔 수 없이 부딪힐 수도 있다. 그 때도 법 위에 군림하는 삼성의 힘이 자랑스럽기만 할까. 그럴 리는 없다. 삼성 근무 시절 겪었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공포를 피할 수 없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뒤, 회사 측과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삼성전자 노동자들처럼 말이다. 그들 역시 한때는 '삼성 가족'임을 자랑스러워 했었다.

/성현석 기자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기고] 삼성을 생각한다 ~ <경향신문>을 비난하지 않겠습니다!

기사입력 2010-02-17 오후 4:13:45

 

<경향신문>에 기명 칼럼을 연재 중인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과)가 <프레시안>에 기고를 보냈다. 김 교수는 17일 <경향신문>에 실릴 예정이던 자신의 칼럼이 게재를 거부당한 일을 소개하면서, 이 일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모순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그의 글을 전문 게재한다. <편집자>

안녕하세요? 저는 전남대 철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김상봉입니다. 저는 지난해 말부터 <경향신문>에 3주에 한 번씩 수요일마다 기명 칼럼을 써왔습니다. 오늘 제 글이 실릴 차례인데 불행하게도 글이 실리지 않았습니다.

<경향신문>에서는 제가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를 소개하면서 삼성 및 이건희 전 회장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신문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 된다면서 양해를 구했습니다. 저는 물론 거절했으나, 신문사는 끝내 저의 칼럼 지면을 다른 분의 글로 채웠습니다.

저는 이 일에 대해 <경향신문>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문을 닫을 때 닫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언론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재 이 땅의 진보 언론들이 처해 있는 어려움의 원인이 신문사 내부의 잘못이 아니라 언론 소비자들의 무지와 무관심에 기인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일을 두고 <경향신문>을 비난하기보다는 도리어 진정한 독립 언론의 길을 걷도록 더 열심히 돕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 <경향신문>이 삼성 관련 기고를 게재 거부한 것은 지금 한국 사회의 모순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프레시안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번 사건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순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서 결코 묵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 수립 이후 우리는 독재 정부에 맞서 지속적으로 투쟁해왔습니다. 수십 년 동안 시민을 폭력적으로 억압한 주체는 국가 권력이었습니다. 하지만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결실로 국가 권력에 대한 시민적 권리는 큰 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재 권력이 물러간 자리를 지금은 자본 권력이 대신하여 또 다른 방식으로 시민적 자유와 주체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최근 김용철 변호사의 책이 일간지에 광고할 수 있는 지면을 얻지 못하고, 외부 칼럼으로 기고한 저의 원고가 신문사 자체 검열에서 끝내 게재를 거부당한 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삼성이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권력이 되었다는 것을 웅변해줍니다.

1970년대 유신헌법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개정이나 폐지를 청원하는 것도, 더 나아가 그런 움직임을 보도하는 것조차 금지했던 긴급조치 9호 시절처럼, 이제 우리 사회에서 삼성과 이건희를 비판하는 것은 이른바 진보 언론이라 불리는 신문에서조차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본이라는 새로운 독재자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회의 정의로운 기초를 뒤흔드는 시대에 누구든 어떤 식으로든 애써 역사의 종을 울려야 할 것입니다. 종이 신문에서 실리지 못한 저의 글을 혹시 실어주실 수 있는지 정중히 여쭈면서 이번 일이 이 땅에서 삼성의 독재를 끝내는 대장정의 첫걸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경향신문> 2월 17일 '김상봉 칼럼'에 실리지 못한 원고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변호사의 새 책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 나면 우리는 삼성이란 재벌이 어느덧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사회 암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책에는 삼성에 대한 심각한 이야기들뿐만 아니라 코미디의 소재가 될 만한 이야기들도 꽤 많다. 삼성의 이건희 전 회장은 일단 회의가 시작되면 아무리 길어져도 화장실을 가는 법이 없다 한다. 놀랍다면 놀라운 일인데 끔찍한 일은 따로 있다. 주인이 화장실을 가지 않으니 회의에 참석한 머슴들도 화장실을 못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녁에 회의가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물 비슷하게 생긴 것은 아예 입에 대지 않는다 한다.

이 책에 엽기적인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감동을 주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건희는 유명 예술인들을 집에 불러 연주를 청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그가 부르면 대중가수든 고전음악을 하는 사람이든 달려오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한다. 그런데 유독 나훈아 씨만은 그렇게 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는 대중가수이니 오직 대중들 앞에서만 노래한다는 것이 이 존경스런 가수의 신념이라 한다.

이 재미있는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에 비하면 대다수 언론의 침묵은 기이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하다. 출판사에서는 몇몇 신문에 광고를 내려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돈 주고 광고 내겠다는데도 선뜻 받아주는 신문사가 없어 지금까지 이 책은 입소문으로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일종의 금지도서 아닌 금지도서가 된 셈이다.

7~80년대에는 금지도서가 많았다. 체제에 비판적인 책들은 어지간하면 금서로 분류되어 책방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그렇게 밟고 눌러도 땅거죽을 뚫고 솟아오르는 겨울 보리싹처럼 많은 금서들이 수십만 권씩 팔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와 지금의 차이 또한 분명하다. 그 시절에는 국가가 비판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금서 같은 것을 지정하는 억압의 주체였다면, 지금은 삼성이 우리의 입과 귀를 막는 그런 권력이 된 것이다.

그렇게 말과 생각을 억압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의 말기적 징후이다. 삼성이 한국 최고의 경제 권력으로 군림하면서 뇌물로 국가기구를 매수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광고로 언론을 길들이고 나면, 이제 그 절대 권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내부로는 노동조합이 생기는 것을 막고 외부로는 삼성을 비판하는 개인의 입과 귀를 틀어막는 일만 남는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이 증언하듯이 삼성은 이미 노무현 정부 시절에 국가 기구와 주요 언론을 장악하는 과제를 완료했다. 삼성의 남은 과제는 김용철 씨처럼 어디서 출현할지 알 수 없는 비판자들이 나타나지 않게 막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누구도 삼성을 비판하지 못하도록 유신 독재 시절처럼 모든 개개인의 말과 생각을 전면적으로 검열하고 통제해야 한다.

마치 미국에서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공공연히 비판하는 것이 금기시되듯, 한국에서 삼성과 이건희를 비판하는 것이 대중들 사이에서 금기시되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삼성이 이건희의 왕국에서 그 아들 이재용의 왕국으로 순조롭게 이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포석인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이 금서 아닌 금서가 된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알고 보면 삼성그룹 전체에서 이건희가 소유한 지분은 0.57퍼센트에 불과하다는데, 그는 자기 머슴들의 배설을 억압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우리 모두의 입과 귀를 가리려 한다. 그러면서 이 짝퉁 루이16세 폐하께서는 황송하옵게도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한다'는 교시까지 내리셨다 한다.

선거날이 가까워올수록 사람들은 이명박 심판에 열을 올리겠지만, 그 일은 박근혜 전 대표가 누구보다 차분히 잘 해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눈앞의 허상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자본에 매수되지 않는 진보정당을 키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삼성을 해체하고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한국식 자본주의를 타파할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삼성제품 불매는 당연한 일이지만,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생각하기를 권한다.

 

/김상봉 전남대학교 교수 


 

 [알림]대기업 보도 엄정히 하겠습니다

경향신문은 최근 본지 고정필진으로 참여하고 있는 전남대 김상봉 교수의 칼럼을 싣지 않은 바 있습니다. 김 교수의 이번 칼럼이 삼성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내용이어서 게재할 경우 자칫 광고 수주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우려한 때문입니다. 편집 제작 과정에서 대기업을 의식해 특정기사를 넣고 빼는 것은 언론의 본령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한때나마 신문사의 경영 현실을 먼저 떠올렸음을 독자 여러분께 고백합니다.

경향신문 편집국 기자들은 이 일이 있은 뒤 치열한 내부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진실보도와 공정논평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는 언론의 원칙을 재확인했습니다.

경향신문은 앞으로 정치권력은 물론 대기업과 관련된 기사에서 보다 더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겠습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하는데 인색하지 않되, 그른 것을 그르다고 비판하는 것에도 결코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경향신문이 저널리즘의 원칙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격려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경향신문 편집국>

입력 : 2010-02-23 18:26:02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삼성공화국'과 '주식회사 대한민국'
[창비주간논평] 부도덕과 불의는 우리 영혼의 문제

 

기사입력 2010-02-24 오후 4:46:12

 

세상이 한줌도 안되는 세력의 거대한 음모에 좌우된다는 설정, 엄청난 사건들이 드러나지 않은 배후에서 비롯되었음을 하나하나 파헤치는 줄거리는 익숙한 플롯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흥미를 돋운다. 이런 거대 음모를 틀로 삼은 영화에서 가장 전형적인 음모의 주체는 정부기관의 권력자이다.

그러다 가끔은 <에일리언>이나 <아이 로봇>에서 그렇듯이 주모자가 '회사'로 지칭될 때도 있다. 사실상의 국가권력 혹은 그 이상을 획득한 하나의 거대 기업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구도 또한 식상해졌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두 유형을 뒤섞어 정부기관과 기업을 다 아우르는 '거대 음모조직'이 등장했다. 여기서는 정치와 경제, 권력과 돈 사이의 일말의 경계도 해소되고 오로지 해당 조직의 이해관계만이 절대적인 목표이자 기준으로 작용한다.

한국판 음모론 만들어낸 '신종 법치'

이런 설정에서 거부할 수 없는 리얼리티가 느껴지는 것이 요즈음의 한국사회이다. 심지어 그 거대조직의 이름도 공공연히 거론된다. '대한민국 1%.' 그럼에도 이런 사태는 박진감 넘치는 음모론의 소재가 되어주지는 않는다. 모름지기 음모란 적발과 폭로에 무너지는 것을 그 운명으로 하여 성립한다. 다시 말해 최소한의 정의를 위한 기본적인 법적·도덕적 시스템을 배경으로 해서 그 음습한 본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음모조직의 구상은 더이상 음지에 있지 않고 스스로 사회의 공인된 운영원리임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햇빛을 받아도 죽지 않는 진화된 뱀파이어처럼 이제 불법과 비리는 백주대낮을 버젓이 활보한다. 이같은 음모의 자기진화를 위한 기제가 바로 오늘날의 해괴한 '신종 법치'이다. 불법적인 것들의 합법화, 그리고 이를 위해 합법적인 것에 시비를 거는 일이 바로 이 새로운 '법치주의'의 목표였던 모양이다.

그들 뒤에는 政·法·言의 커넥션이

양심선언을 통해 삼성의 비리를 폭로하고 수사를 촉구했던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2010)는 최대 기업의 비리 전모, 면죄부 발급과정에 다를 바 없던 사법절차, '글로벌' 기업의 '중세적' 운영과 비뚤어진 기업문화를 파헤친 일종의 문화연구적 분석을 제시하면서 무엇보다 관민(官民)의 경계를 두루 꿰어 진행되는 음모의 합법화 패러다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이 책 자체를 둘러싸고 현재 진행되는 또다른 노골적 음모에 대해서도 이미 알려진 바 있다). 이제 사태는 일개 기업의 비자금과 세습과 로비가 아니라 정부·사법·언론의 광범위한 비리 커넥션과 '이래야 주류다'는 식의 파렴치한 지배이념의 문제가 된 듯 보인다.

책머리에 붙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추천의 글'에서 "대한민국의 부패상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한 것은 우리 모두가 이런 부패상에 일정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반성해야 한다는 얘기지만, 그만큼 중요한 또 하나의 의미는 관련성의 크고작음을 떠나 부패는 우리 모두의 삶을 잠식하고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환기시키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야말로 '강호(江湖)의 도덕과 상식이 땅에 떨어진' 사태를 낱낱이 증언하는 이 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그저 읽어보시라는 말로 대신해야겠지만 저자의 의도가 '이 더러운 세상'이라는 개탄과 냉소와 자조에 있지 않고 '삼성과 한국이 함께 사는 길'의 모색에 있다는 사실을 먼저 짚어두어야 하겠다.

▲ 지난해 말 단독 사면된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지난달 11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가전 박람회에 가족들을 이끌고 참석했다. ⓒ뉴시스

삼성 경영진과 현 정권, 어딘지 닮았다?

책을 읽으며 내내 지워지지 않는 인상은 삼성과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닮은꼴이었다. 여기서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란 물론 대한민국을 일개 주식회사로 보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대상을 가리킨다. 구성원의 비리와 불법에 전혀 개의치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능력과 융통성의 증거로 추켜세우기, 사적 충성에 근거한 인맥의 구축과 패거리 의식에 바탕을 둔 나눠먹기, 일상화된 통제와 감시기제 같은 갖가지 행태가 그런 닮은꼴들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삼성 경영진은 자신들이 실제로 국가를 운영한다고 믿는다는데 이 믿음은 자신들이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는 정권 '경영진'의 믿음을 그대로 상기시킨다.

저자는 삼성 경영진에게서 이같은 국가 운영자라는 자기규정과 국익에 대한 무관심이 양립하는 게 이상하다고 꼬집는데, 더욱 섬뜩한 일은 이제 '국가 운영자는 공익을 위해 일한다'는 상식적 판단기준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사익이 아닌 공익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아니 그런 영역에 대한 무지라고 해야 더 옳을 것 같은 심성과 사고방식이 삼성 경영진과 실제 국가 운영자들의 가장 뚜렷한 공통점으로 보인다.

이것이 그저 우연일 리는 없다. 국가를 하나의 기업과 등치시키는 발상과 그 발상을 은연중에 용인한 우리의 의식이 삼성'공화국'을 낳았고 이 '공화국'이 다시 공공성의 의미를 조롱한 악순환의 결과일 것이다.

저자는 양심선언을 위해 끝내 사제단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며 "상대가 삼성이 아니었다면 달랐을 게다. 상대가 정부였다면, 혹은 다른 재벌이었다면 오히려 남보다 먼저 문제를 공론화하려고 경쟁을 벌였을 게다. 그런데 삼성에 대해서는 다들 무서우리만치 조심스러워했다. 서로 공을 떠넘겼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정부나 다른 재벌이었다면 '먼저 공론화하려고 경쟁을 벌였다'는 이야기를 지금도 할 수 있을까, 또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삼성을 대하는 방식이 이제 정부와 여타의 재벌을 대하는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지 않은가. 언론까지 노골적으로 장악하려는 현 정권의 시도에서 그런 불안감은 더욱 깊어만 간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영혼을 회복하는 길

엉터리로 일관한 삼성 비리 재판에서 가장 엉터리였다는 2심 판결을 놓고 사제단의 김인국 신부가 '전 국민의 영혼을 오염시킬 것'이라고 한 경고는 더없이 엄중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밝혀질 만큼 밝혀졌는데도 음모론 플롯의 결말처럼 카타르시스가 주어지기는커녕 새로운 좌절이 앞을 가로막은 상황이다.

불법과 불의가 아니라 이 좌절과 무기력에 진다면 우리 모두는 더없이 황폐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싸움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이며 지금 자신들이 바로 '세상의 이치'라며 뻔뻔하게 머리를 치켜세운 무법과 부도덕과 불의는 민주주의의 문제이면서 또 우리 영혼의 문제이다.

정치적 문제를 도덕적 선악 문제로 치환하는 경향을 늘 못마땅하게 여겨왔지만 이제 그것이 지닌 함의를 실감한다. 이건 '근본주의적' 싸움이고 여기서 지면 우리는 더도 덜도 아닌 바로 영혼을 잃게 되는 것이다. <삼성을 생각한다>의 저자처럼 분연히 싸움에 나서지는 못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그들의 삶의 방식이 얼마나 시시하고 더럽고 치사한지를 경멸해주고 원칙과 정의의 보편적 가치를 더욱 소중히 여기는 것에서 시작하자.

 

/황정아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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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반칙왕'이 올림픽을 유치한다고?

[정희준의 '어퍼컷'] 이건희 전 회장의 IOC 위원 사퇴를 촉구한다

기사입력 2009-12-15 오전 9:53:10

 

지난 10월 경기도 용인의 한 가정집에서 냉장고가 폭발했다. 삼성전자의 지펠이었다. 얼마 후 삼성전자는 21만 대에 달하는 지펠 냉장고에 대한 리콜을 단행한다.

그런데 삼성전자의 리콜 결정에는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격노'가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지펠 폭발 사고를 접한 후 지난 20여년 심혈을 기울인 '품질 경영'이 흔들린 데 대해 크게 화를 낸 것이다. 그의 격노는 삼성전자 최고위층의 문책인사로 이어졌다. 삼성전자 가전생활부문 최진균 대표, 최도철 전무, 박용정 상무 등 지펠 관련 임원들이 모두 문책성 인사 조치를 받았다고 한다.

"불량은 곧 암"이라더니

이 전 회장이 그 동안 고객과의 신뢰를 강조하며 앞세운 말이 하나 있다. "불량은 곧 암이다." 이에 대한 이 전 회장의 신념은 확고하다. 1995년 임직원에게 선물로 돌린 휴대전화와 무선전화기가 통화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자 그 해 3월 시중에 나간 제품을 모두 수거해 구미공장에서 직원들이 보는 가운데 불태워 버렸다. 15만 대, 500억 원 어치였다. 이 이른바 '화형식 사건'은 '이건희 주연'의 전설로 회자됐고 동시에 '애니콜 신화'의 밑거름으로 불린다.

그런데 품질 경영, 고객과의 신뢰를 강조를 넘어 강요하다시피 하던 이 전 회장은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했다. 우리의 상식과는 반대로, 확실하게 구분했다. 사는 확실히 챙기는 사이 공은 사실상 무시했다. 냉장고 문짝 날아갔다고 불같이 화를 내고 담당 임원들을 줄줄이 문책할 정도로 자신의 회사 제품은 그렇게 완벽하게 챙기는데 법은 잘 챙기질 않았던 것이다.

▲ "이건희 전 회장의 기업 경영은 탈법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뉴시스
그의 기업 경영은 탈법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그가 저지른 수조 원 대의 차명 계좌 운영과 탈세, 불법 경영권 승계 등은 국가와 법을 우습게 보지 않고서는 저지르기 힘든 중범죄들이다. 사실은 그가 한국 사회의 재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냥 재벌이 아니다. 재벌 중의 재벌이다. 그래서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나 최태원 SK 회장이 거쳐야 했던 '구속 수감'조차 거치지 않았다. 그냥 집에서 출퇴근하며 검찰 조사 받고 법원에서 형 확정 받고 그랬단 말이다. 그러고 받은 형량이 고작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다.

뭐 사실 우리나라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은 이제 재벌들에겐 일종의 '정액 형량'이다. 정몽구, 최태원 회장 모두 똑같았다. 그런데 이들은 사면 또한 초고속이다. 2008년 경제개혁연대가 발간한 '8·15 대기업 관련자 사면 결과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8월 15일 사면된 대기업 관련자는 모두 45명인데, 이들이 최종 판결로부터 사면조치 받기까지 걸린 기간은 1인당 평균 16개월에 불과했다고 한다. 물론 상위 재벌이면 더 빨라진다.

그런데 재벌 중의 재벌 이건희 전 회장은 역시 다르다. 사실은 다소 엉뚱하게 평창올림픽 유치위원회와 대한체육회 등 체육계에서 출발한 그의 사면 청원은 곧 이어 재계를 한바퀴 돌더니 지식경제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찍고 이제 한나라당으로까지 이어지는 릴레이 청원이 되었다. 여기에 보수 언론과 경제지들은 '사면 여론 확산'이라는 기사 제목을 달아 분위기를 한껏 띄우니 청와대는 사면 반대 여론도 무시할 수는 없다며 자못 고민하는 척하고 있다. 결국 형이 확정된지 고작 석 달 지났는데 '이제 그만 하자'고 나서는 것이다. 도대체 이 나라엔 법이 있기라도 한 건가.

엔론 CEO들도 '성가대 어린이'로 만들어 버리는 이건희

경제 규모가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안 되는 미국에서 경제사범들이 받는 형량을 한 번 보자. 2001년 미국을 들썩이게 했던 엔론의 CEO 제프리 스킬링은 고작(?) 1조5000억 원대의 분식회계로 징역 24년을 선고 받았다. 53세의 나이를 감안하면 사실상 종신형이다. 얼마 전 미 역사상 최대 규모인 650억 달러의 다단계 금융 사기로 구속된 버나드 메이도프(71) 전 나스닥 증권거래소 위원장에겐 징역 150년형이 선고됐다.

2000년 뉴욕의 사업가 숄람 와이스는 4억5000만 달러, 그러니까 우리나라 돈으로 5000억 원도 안 되는 푼돈 사기(?)를 벌였다가 845년형을 선고받았고 그와 공모한 케이스 파운드도 같은 사기 사건으로 74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미국엔 이렇게 얼마 되지도 않는 '저액 사기 사건'으로 구속되어 그 죄값을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정도가 아니라 귀신도 지칠 때가지 치러야 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그래서 한 외신은 범죄의 중대함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가지 않는 이 전 회장에 비하면 "엔론의 CEO들은 성가대 어린이(choir boys·미 속어로는 일종의 '바른생활주의자')처럼 보인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 전 회장의 범죄 사실은 그 중함이 너무 크다. 경제 질서를 어지럽혔을 뿐 아니라 법을 우습게 봤다. 아니, 법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었다. 한 금융감독기관에 근무하는 지인의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 금융 및 조세 법은 '삼성 때문에 바뀐다'고 한다. 삼성이 여기저기에 존재하는 법의 틈을 파고들어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면 그때서야 정부가 개입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삼성이 그렇게 공격적으로 법조인들을 스카우트 하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삼성은 이런 식으로 국가의 경제 질서를 어지럽힐 뿐 아니라 법질서에 도전하는 것이다.

사실 그는 세계적으로도 '챔피언급'이다. 각 나라의 경제 구조와 질서가 다르니 단순비교는 힘들지만 벌금이나 배상금 등 '뱉어낸 돈'만 따져보자. 이 전 회장은 2007년 에버랜드 전환사채 증여, X파일, 불법 대선 자금 등의 문제로 궁지에 몰리자 국면 전환용으로 사재 8000억 원을 냈고 또 올해 삼성사건 1심 공판을 앞두고는 주주들에게 끼친 손해액 2500억 원을 변제했다. 그리고 형 확정으로 벌금 1100억 원을 부과 받았다. 벌금 1100억 원만 해도 무려 1억 달러다. 전세계 기업인 중 벌금이든 '위기 탈출용'이든 간에 '죄값'으로 10억 달러를 낸 사람 봤는가.

그리고 (역시 전세계적으로) 이건희 전 회장만큼 온갖 반칙(?)을 구사해가며 자식에게 회사 물려주겠다는 사람이 또 있을까. 빌 게이츠는 자선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은퇴를 선언하며 세 자녀에게 1000만 달러만 물려주겠다고 선언했고 워렌 버핏은 440억 달러에 달하는 전 재산 중 85%를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 등 자선단체 다섯 곳에 기부한다고 했다. 생전에 말이다. 이들은 회사는커녕 유산도 안 물려준다.

이 전 회장, '복귀'가 특기인가

지금 본인과 관련된 논란이 점차 커지는 와중에도 이 전 회장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삼성 측도 할 말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건희 전 회장 사면'은 이제 첨예한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했을 뿐 아니라 국론 분열의 소재가 될 기미마저 보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고 했던 사람이다. 그가 자신의 잘못이 정말로 국가와 국민에게 죄가 되고 부담이 됐음을 인식하고 있다면 지금 벌어지는 논란을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은 적절치 않다.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며 기회를 엿보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번 사면 논란이 시작된 것은 그의 IOC 위원직과 관련된 것인데, 그는 2008년 공판 진행 중에 IOC 위원직에 대한 직무 정지를 IOC에 요청했다. 스스로 자격 정지를 요청한 것인데 여기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1999년 솔트레이크시티가 2002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IOC 위원들에게 뇌물 공세를 펼쳤다는 올림픽 사상 최대의 추잡한 스캔들이 폭로된 이후 IOC의 윤리 규정은 강화됐고 윤리위원회가 신설된 바 있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재판 결과에 따라 IOC에서 당장 퇴출이 논의될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는 일단 IOC에서의 퇴출을 면하고 시간을 벌기 위한 노림수였던 듯 하다.

재미있는 점은 IOC 위원으로서의 활동을 자발적으로 정지 요청한 것이 이 전 회장이 취하고 있는 국내에서의 처신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일단 총수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여론을 조성해 경영 일선에 복귀하는 시나리오 말이다. 물러났다 다시 등장하는 건 이제 우리나라 재벌 총수들의 '특기'가 됐다. 영화로 '돌아온 회장님' 시리즈를 만들면 그 끝이 보이질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만.

▲ "이건희 전 회장은 여러모로 볼 때 이제는 더 이상 IOC 위원으로 적합한 사람은 아니다. 사실 거대 다국적 기업의 CEO로서는 세계적 '반칙왕'이다." ⓒ뉴시스

국익을 위해? '국위 손상'이다

이건희 전 회장은 여러모로 볼 때 이제는 더 이상 IOC 위원으로 적합한 사람은 아니다. 사실 거대 다국적 기업의 CEO로서는 세계적 '반칙왕'이다. 미국의 초특급 경제사범마저 '성가대 어린이'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말이다. 이 전 회장은 이런 논란이 계속 될수록 사마란치 전 위원장 이후 부패 집단으로서의 이미지를 벗으려고 노력하는 IOC의 노력에 누가 될 뿐이다. 국내엔 재벌에 깜박 죽는 국민들도 있고 곳곳에 깔아 놓은 이른바 삼성 장학생도 있지만 외국은 그렇지 않다.

<포린폴리시>는 이미 작년에 '부패한 비리 집단' IOC를 비난하는 기사에서 이 전 회장을 포함한 몇몇 인사들을 지목하며 "평화와 인권을 중시한다는 조직에 왜 '범죄자 사진 대장(rogues' gallery)'에나 나올 법한 인물들이 필요한지 미스터리"라고 했다.

이런 마당에 이 전 회장이 나선다고 올림픽 유치에, 그리고 '국익'에 도움이 되겠는가. 국위 손상이다. 그리고 이 전 회장은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올림픽 유치 활동에 나섰다가 두 번 다 실패하지 않았는가. 지금 상황에서 나선다고 도대체 뭐가 더 나아지겠는가. 그는 IOC 위원을 이제 사퇴하고 앞으로 좀 더 자숙하며 사회를 위해 할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정희준 동아대 스포츠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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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삼성 불매 운동'을 제안합니다!"

[삼성을 생각한다] 이젠 '삼성의 어둠'을 얘기해야 할 때

기사입력 2010-03-10 오전 10:27:15

 

삼성이 비판적 공론장에서 금칙어가 된 지 오래다. 진보 언론조차 삼성에 비판적인 글을 싣기 부담스러워 한다. 얼마 전 <경향신문>과 <오마이뉴스>가 김상봉 교수의 칼럼을 싣지 않기로 하면서 불거진 사태가 대표적인 예다.

주요 언론은 삼성에 비판적인 책은 광고조차 내주지 않는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전직 삼성전자 부장이 쓴 책 <고르디우스의 매듭>(김병윤 지음, 두레스경영연구소 펴냄)등 삼성에 비판적인 책은 모두 같은 운명을 맞았다. 누구나 돈만 내면 광고 지면을 빌릴 수 있다는, 시장 원리의 기본이 무너진 사례다.

시장 경제를 내세운 나라에서 이런 일이 생긴 이유가 뭘까. 누구도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다만 주눅이 들어 있을 뿐이다. 광고를 못 받을까봐, 아니면 소송 당할까봐 두려워한다. 이런 공포에는 근거가 있다. 삼성은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 광고주다. 규모가 영세한 진보 언론이 오히려 삼성 광고에 의존하는 비율이 더 높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또 유죄 판결이 났을 사건이, 피고인이 삼성 또는 이건희 전 회장인 경우에는 무죄 판결이 났던 사례도 많이 봤다. 이런 삼성과 법적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누구에게도 두려운 일이다.

가까운 일본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인 토요타의 경우다. 일본 언론과 지식인은 지난 수십 년 동안 토요타 모델을 칭찬하기만 했다. 미국의 포드식 경영과 대비되는 토요타식 경영은, 그래서 우리에게도 모범 사례로만 알려졌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토요타에 관한 진실 가운데 절반에 불과했다. 나머지 절반은 철저하게 감춰져 있었다.

최대 광고주인 토요타에 비판적인 보도를 할 수 있는 언론이 일본에는 없었던 게다. 일본의 한 언론이 낸 책 <토요타의 어둠(원제: 토요타의 흑막)>(MyNewsJapan 지음, JPNews 옮김, 창해 펴냄)이 일본 주요 언론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토요타의 어둠> 저자는 책 말미에서 토요타 등 대기업을 대하는 일본 사회의 태도를 태평양 전쟁 당시에 비유했다. 당시 일본 군부는 누가 봐도 패배가 뻔한 전쟁으로 국민을 내몰았지만, 일본 지식인은 객관적인 세계 정세에 침묵했다. 대다수 국민은 전진과 승리만 외치는 군부의 구호를 그대로 믿었다. 다수 국민이 군부가 걸어놓은 집단 최면에서 벗어난 것은 패전 이후였다.

이런 비유는 삼성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국민이 몇 개의 승전 사례 앞에서 군부를 비판할 엄두를 내지 못 했듯, 많은 한국인은 반도체, 휴대전화 등 일부 산업에서 삼성이 거둔 성취만 바라볼 뿐 삼성의 어둠에는 눈을 감는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태평양 전쟁의 패배가 일본 군부만의 패배가 아니었던 것처럼 '삼성의 어둠'이 낳을 비극 역시 삼성만의 문제가 아닐 게다. 한국 사회 전체의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말 이건희 전 회장이 사면되면서 지난 10여 년 동안 끌어온 삼성 비리 논란이 일단락 됐지만, 여전히 우리가 삼성을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삼성의 어둠'은 고스란히 '한국의 어둠'이다. '삼성의 어둠'에 빛을 드리울 방법은 과연 없을까.

다들 막막해 한다. 주요 언론은 입을 닫고, 사법부는 면죄부를 줬으며, 그나마 나온 일부 유죄 판결 역시 대통령이 금세 사면해 줬다. 이런 상황에서 무력한 개인들이 할 수 있는 게 뭐란 말인가. 그래도 그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이들이 있다.

전남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김상봉 교수가 대표적이다. 김 교수가 일단 제안하는 것은 삼성 불매 운동이다. 소비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 강력한 의사 표현이라는 것.

<프레시안>은 우선 삼성 불매 운동을 제안하는 김 교수의 글을 싣는다. 이어서 삼성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을 꾸준히 소개할 계획이다. 문호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삼성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글을 보낼 수 있다.

최근 논란이 된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 대한 독후감일 수도 있고, 무노조 경영, 협력 업체를 쥐어짜는 거래 방식, 임직원을 혹사하는 기업 문화, 창의적 시도보다 성공사례 답습에 급급한 경영 전략, 합리적 절차 대신 인맥에 의존해 문제를 풀어가는 관행, 비자금 조성 및 탈세 의혹, 총수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한 황제식 경영, 옛 비서실로 대표되는 총수 친위 조직의 전횡 등 삼성의 다른 문제점에 관한 글 역시 환영이다.

삼성의 잘못을 변호하는 글, 또는 삼성이 거둔 성취에 관한 글 역시 마찬가지다. 김상봉 교수의 글을 비롯한 앞으로 이 공간에 실릴 글에 대한 반론일 수도 있다.글을 보낼 주소는 mendrami@pressian.com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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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의 판매 부수가 10만 부를 넘길 때가 머지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삼성 내부의 비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그런데 그 폭로의 대상인 삼성과 이건희 일가로부터 아직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허황된 거짓말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김 변호사의 책을 읽고 단지 삼성의 비리에만 분노한다면, 아직 우리는 문제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아마도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삼성 말고도 다른 모든 기업이 비리를 저지를 것이다. 문제는 삼성이 단순히 불법과 비리를 일삼아 저지른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집단이 지금 한국을, 아니 바로 우리들을 보이지 않게 지배한다는 데 있다.

외환 위기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에 한국 사회는 심각한 변화를 겪었다. 심리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너나 가릴 것 없이 돈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에 상응하여 사회적으로도 자본 또는 기업이 한국 사회의 지배 권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우리 자신이 그토록 노예적으로 돈을 숭배하는데 어떻게 자본이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중에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한 것은 그런 현실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그다지 정확한 말도 아니었다. 그가 좀 더 정직했더라면 시장이 아니라 삼성이 지배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은 시장이 아니라 자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본을 가진 사람이 우리를 지배한다. 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도 남을 지배할 수 없다. 모든 권력은 불평등하게 집중된 힘에서 생겨난다. 자본 권력 역시 자본의 불균등한 소유로부터 생겨나고 빈부의 격차가 큰 만큼 더 커진다. 삼성의 자본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엄청나게 불어나 이제 다른 모든 기업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우리 사회는 속속들이 기업화되어 대통령이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를 자처할 정도로 국가 전체가 가히 기업 국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가 기업이면 일자리를 만들어 주니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인간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기업이 주는 일자리는 인간의 삶을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을 도구 삼아 이윤을 남기기 위해 던지는 미끼요 올가미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기업은 가장 독재적인 조직이다. 종업원들이 선거로 사장을 뽑는 재벌 기업을 보았는가? 국가가 기업에 동화되고 기업화된다는 것은 국가가 독재 국가가 된다는 것과 정확하게 같은 말이다. 기업 국가는 기업 독재 국가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5년에 한 번씩 국가의 CEO를 선출한다. 하지만 그는 유감스럽게도 바지사장일 뿐이다.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회장님'은 따로 있다.

이건희 전 회장이 자기 혼자만을 위한 대통령 특별 사면을 받아내고 동계올림픽 선수단 환영 만찬장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헤드테이블에 같이 앉은 모습이야말로 바로 그런 권력 구조의 극명한 상징이다. 선출된 권력 이면에 선출되지 않은 자본 권력이 군림할 때, 나라의 민주주의는 근본에서부터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삼성 불매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왜 삼성만 갖고 그러는가? 다른 재벌 기업들이 아니 다른 중소기업들이 삼성에 비해 나은 점이 무엇인가? 하지만 이런 질문은 권력의 본질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잘못된 물음이다. 그것은 마치 40년 전에 왜 '박정희'만이 문제인가, 모든 군인들이 또는 모든 공화당 정치인들이 다 같이 나쁘지 않은가 하고 묻는 것이 어리석은 물음이었던 것과 같다. 박정희 씨를 제거하고서야 유신독재가 끝날 수 있었고, 전두환 씨를 권좌에서 추방한 뒤에야 비로소 신군부의 독재를 끝낼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역시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그 권력에서 추방하지 않고서는 기업독재를 끝낼 수 없다.

▲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삼성은 단순히 하나의 기업 집단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프레시안
왜냐하면 삼성과 이건희 전 회장이야말로 지금 우리 시대의 최고 권력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삼성은 단순히 하나의 기업 집단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지금 재벌 기업이 과거 군사 독재 시절의 군부와 같다면, 삼성은 군부의 실세였던 하나회와 같고, '회장님'은 '각하'와 같다.

우리가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비판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우리는 삼성이 재벌 기업이라서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희 전 회장이 가장 부유한 자본가라는 이유 때문에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더 나아가 무작정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나 시장경제가 타도되어야 할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만약 이건희 전 회장이 빌 게이츠 씨 같은 자본가였더라면 우리는 그가 아무리 부자라도 단지 그 때문에 그를 비판할 까닭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비판하고 더 나아가 이건희 일가를 삼성으로부터 추방하고 삼성을 종국에는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이건희 전 회장과 삼성이 단순한 기업 집단도 자본가도 아니고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고 나라의 근본인 정의를 파괴하는 독재 권력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자기의 분수를 지키면서 나라 경제를 살찌우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한에서 우리 모두는 그런 기업을 사랑하고 지지할 것이다. 하지만 기업이 그 자본을 이용해 오로지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온갖 불법을 일삼아 저지르며, 그것도 모자라 공직자들을 매수하여 국가 기구 전체를 부패에 빠뜨리고 마지막에는 나라의 공공성과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기에 이른다면, 이제 그런 기업, 그런 자본가는 타도되어야 할 공공의 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삼성의 모든 타락상은 단순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기업이 저지르는 불법이 아니라 삼성의 특권적 권력에서 비롯된다. 삼성의 권력이 삼성을 다른 기업과 다른 방식으로 반사회적인 기업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이며 이건희 전 회장이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이라는 조사들을 우리는 심심찮게 보지만, 과연 이런 경우 사람들은 존경이란 말을 무슨 뜻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일까?

삼성이 얼마나 반사회적인 기업인지 알려면, 주변의 장애인 친구에게 삼성이 장애인 2퍼센트 의무 고용을 얼마나 지키는지 물어보면 될 것이다. 아니면 이런 것을 또 어떠한가? 3년 전 태안 앞바다에서 삼성물산 소속의 배가 인천대교 건설에 투입되었던 해상 크레인을 끌고 가다 가만히 있는 초대형 유조선을 들이받아 충남 서해안 일대를 죽음의 바다로 만들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자 삼성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삼성답게 먼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항해 일지를 조작한 일이었다. 지역 해양청이 충돌 위험을 무선으로 알렸는데도 그런 경고를 받은 적이 없는 것처럼 꾸민 것이다. 그리고 전 국민 수십만 명이 태안 앞바다에서 손으로 기름을 닦고 있을 때, 삼성은 마치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다가 사건 50일이 지난 다음에야 마지못해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삼성은 앞으로는 사과하는 시늉을 내면서 뒤로는 배상액을 50억 원으로 제한해 달라고 법원에 신청했다.

법원도 한 통속이어서 올해 1월 24일 서울고등법원은 삼성의 편을 들어 태안 유조선 기름 유출 사건에 대해 삼성이 이미 공탁해둔 56억여 원 이외에는 더 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액수는 삼성이 퇴직한 김용철 변호사의 차명계좌에 본인도 모르게 넣어 둔 돈 52억보다는 조금 많은 돈이지만, 삼성건설이 지은 서울 강남 타워팰리스의 큰 평수 아파트 한 채 값도 안 되는 돈이다.

삼성전자의 2009년 영업이익이 11조 원에 가까웠던 것을 생각하면 56억 원은 주머니 속의 동전에 불과하다. 그런데 천문학적 비자금을 쌓아두고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돈을 대선자금으로, 공직자 뇌물로 쓰면서도, 자기가 책임져야 할 사고에 대해 배상할 돈은 없는 기업이 삼성이다.

이런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삼성을 감정적으로 혐오하게 만들지만,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모든 독재 권력이 그렇듯이 삼성은 국가 권력과 법질서의 통제 밖에 있다. 삼성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을 만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며,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공직자를 매수하고, 이것 역시 불가능할 경우에는 대놓고 법을 무시한다. 분식회계 장부가 법원에 넘어가자 법원 직원을 매수하여 서류를 빼돌려 불태우는가 하면,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관이 확보한 자료를 삼성직원이 가로채 도망가면서 찢어버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몇 천 만 원 벌금으로 모든 불법을 덮어 버린다.

하지만 삼성이 일삼아 불법을 저지른다 해서 우리가 삼성을 일종의 조직 폭력 집단으로 규정한다면 사태를 오해하는 것이다. 삼성의 문제는 그것이 탈법과 비리를 일삼아 저지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기구 자체를 이윤 추구의 도구로 삼고, 국가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모든 공공적 기능을 무력화시키려 한다는 데 있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의 하나이다. 이를 위해 많은 나라들이 이념의 차이에 관계없이 국가적 차원에서 공공적인 사회 보장 정책을 수립하고 그것을 확장해 왔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의 보장 범위를 확대하려 할 때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기업이 삼성생명이었다. 국가가 다 보장해주면 삼성생명은 보험을 팔아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삼성이 꿈꾸는 세상이란 부자들은 감기만 걸려도 삼성병원 특실에서 황제처럼 대접받고 가난뱅이들은 죽을 병이 걸려도 동네병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하고 앓다 죽는 세상, 부자들은 외국산 수입 생수로 집안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때, 가난뱅이들은 재벌 기업이 운영하는 비싼 수도 요금을 내지 못해, 화장실과 부엌에 수도가 끊어져 공동화장실을 이용해야 하고 빗물을 받아먹어야 하는 세상이다.

이런 악몽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더 늦기 전에 삼성을 해체해야 한다. 우리가 박정희, 전두환 씨를 권좌에서 쫒아 내고 군부의 권력을 해체한 뒤에야 비로소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회장님'의 권력을 박탈해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삼성을 해체하지 않는다면 결코 기업 독재를 끝낼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자식들은 재벌 기업의 머슴으로 종노릇하는 운명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삼성 제품 불매는 자본의 독재, 삼성의 독재를 끝내기 위한 대장정의 첫 걸음이다. 유명무실한 삼성 특검 수사와, 대다수 범죄 행위에 대해 관대한 판결을 내려줌으로써 요식 행위에 그친 재판과, 그 재판을 통해 내려진 법의 심판조차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린 최근의 특별 사면을 통해 분명해진 것처럼, 국가기구는 더 이상 삼성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미 삼성에 매수되어버린 국가 기구가 삼성이 온전한 기업이 되도록 만들어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회장님의 비서가 회장님의 불법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소망이다.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삼성을 해체하고 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소비자뿐이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말은 공치사가 아니다. 화폐가 자기 증식 운동을 시작하면 자본으로 탈바꿈한다 하지만, 자본은 결코 저 혼자 불어나지는 못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비자의 지갑을 털어 불어나는 것이다. 국가가 없다 하더라도 자본은 자기 증식할 수 있다.

자본이 국가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까닭도 본질적으로 보자면 그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와 소비자가 없다면 자본은 절대로 혼자 증식할 수 없으며, 아예 존재할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자본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노동자들과 소비자들밖에 없다. 하지만 삼성엔 노동조합이 없다. 삼성이 다른 어떤 기업보다도 더 사악한 반사회적 기업이 된 까닭도 그 때문이다. 안팎으로 아무런 견제가 없는 권력이 어떻게 타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가도 노동조합도 삼성의 불법을 바로잡을 수 없으니 이제 남은 것은 소비자들의 직접 행동뿐이다. 삼성의 권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소비자들에게 자기 제품을 쓰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것이 모든 자본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리하여 아무도 삼성 물건을 쓰지 않는다면 그날로 삼성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게다가 삼성은 주방용 가전제품부터 안방의 청소기, 사무실의 전화기와 컴퓨터, 가방 속의 노트북과 주머니 속의 휴대전화, 그 속의 반도체 그리고 지갑 속의 신용카드, 생명보험과 자동차보험 등, 우리의 소소한 일상을 이루는 수많은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제공한다. 만약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삼성제품으로 채운다면, 마치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우리 모두 삼성의 먹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삼성제품을 거부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버릴 것은 수도 없이 많이 널려 있다. 버릴 수 있는 것은 버리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해약하고 해지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하자. 지구 위에 생명체가 등장한 뒤에 모래알처럼 작은 개미들은 영원히 살아남아도 공룡이 멸종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게다가 삼성이란 공룡을 멸종시키기 위해 우리가 엄청난 노고를 쏟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하지 않으면 된다. 삼성 제품을 사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하는 일은 어려워도 하지 않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하던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일은 오직 하나, 마음을 바꾸는 일뿐이다. 우리의 삶을 삭막한 사막으로 만드는 것도, 푸른 초원으로 바꾸는 것도 우리 마음에서 시작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삼성이 어떤 기업인지 그 실상을 깨닫고 삼성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과 삼성의 권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생각하면 이것이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더 좋은 제품을 사용하고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을 소비자의 권리라 생각한다. 이 기준에서 보자면 삼성은 소비자들이 선호할 만한 기업임이 분명하다. 제품의 품질은 물론이고 저녁 시간에 냉장고 수리를 신청했더니 두 시간 반만에 고쳐줄 정도로(<한겨레> 3월 9일자 김선주 칼럼) 완벽한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한다지 않는가. 하지만 그런 완벽한 서비스의 이면에 그만큼 완벽하고 비인간적인 노동 통제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 자본주의 사회의 톱니바퀴로서 도구화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아무 불편 없이 저녁을 준비할 수 있도록 나의 냉장고를 수리하러 온 노동자가 자기 가족과의 저녁 식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헤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와 소비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윤리이다. 단순히 제품과 서비스를 통해 나 개인이 느끼는 만족이 아니라 그 제품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전 과정이 얼마나 정의롭고 자연 친화적이며 우리 모두를 위해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것이 소비자로서 제품 선택에 대한 윤리적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성 불매 운동이란 단순히 외적 억압과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들 내면의 탐욕 및 아집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철학자가 삼성 불매 운동의 선두에 나선 까닭이다.

이런 사고방식의 전환은 결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비싸더라도 유기농 농산물을 선택하고 공정 무역 커피를 구매한다. 아마도 거기에도 문제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보다 좋은 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개인적 손해와 불편을 감수하려 하는 인간의 선한 의지이다. 그런 선한 의지에 의해 우리의 역사는 더디지만 진보해 왔던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삼성을 해체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나중을 위해 남겨두려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한국의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재벌 경제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더불어 같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과제라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나중에 삼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토론하기 전에 무조건 삼성 제품을 불매함으로써 삼성의 권력을 해체하는 일을 즉시 시작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박정희 시대에 '박정희 타도'가 무조건적인 대의였으며, 전두환 독재 치하에서 그 독재자의 제거가 다른 모든 것에 앞서는 선결 문제였던 것과 같다. 그렇듯이 지금 우리에게도 삼성 불매를 통해 삼성과 이건희 일가의 권력을 해체하는 것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서는 역사적 과제라고 우리는 믿는다.

어떤 경우이든, 분명한 것은 박정희 씨가 죽었다고 나라가 망하지 않았듯이 삼성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쓰지 않고 다른 회사 제품을 쓴다 해서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와 나라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이제 우리, 삼성은 더 이상 아니라고 말하자. 그리고 삼성 제품을 쓰지 않는 것이 고상한 인간의 품위와 교양의 징표가 되게 하자. 돈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하여!

 

/김상봉 전남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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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삼성을 생각한다] "삼성이 '정상기업'이 될 때까지…" 
"삼성, 선택하라…이병철 유훈인가 국민의 사랑인가?"
 

기사입력 2010-03-14 오후 2:37:25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가 다양한 논란을 낳고 있다. 주요 언론은 삼성 관련 칼럼 게재를 거부하는가 하면, 심지어 김 변호사의 책 광고까지 거부했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삼성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1등 기업 삼성은 왜 공포의 대상이 됐을까. <프레시안>은 독자들로부터 삼성에 관한 다양한 생각을 듣는 기획을 마련했다. <삼성을 생각한다> 독후감을 포함해, 삼성과 이건희 전 회장이 우리 사회에 남긴 숙제에 관한 내용이라면 누구의 글이건 소개할 계획이다. 독자들이 삼성을 생각하는 글은, 이 메일 주소mendrami@pressian.com로 보내면 된다. <편집자>

한국에서 삼성은 특별한 존재다. 가끔 이유없이 삼성을 언급한 원고가 게재하기 곤란하다는 통보를 받기도 하고, 삼성을 분석한 부분이 들어간 책이 출판사에서 반려가 된 경험을 나도 가지고 있다. 전부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국에서 삼성이라는 회사는, 카프카의 <성>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국민들은 삼성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한 때는 남산, 국정원, 청와대 같은 이름들이 절대 공포를 상징했지만, 지금은 삼성, 조선일보 정도가 그런 절대 공포의 상징이다. 조선일보와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나라 국민들은 한 번쯤 고민을 하게 된다. 삼성도 그러한 존재이다.

▲ 존 데이비슨 록펠러. 스탠다드 오일 창업자로 세계 최고의 부자로 꼽혔던 그는 시장 독점, 무자비한 노동자 탄압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예전에 록펠러가 그랬었고, 스탠다드 오일 컴퍼니가 유사한 위상을 가진 적이 있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이런 독점적 위치에서 공포를 상징하는 회사들이 가끔 나오지만, 성숙 단계로 넘어가면 대개 다른 기업과 다를 바 없는 정상기업이 된다. 지금 삼성이 그런 단계에 있는 게 아닐까?

지난 정권은 삼성 정권이었다고 생각된다. 진보 혹은 야당이 연합전선을 형성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를 쉽게 설명하면 한미 FTA 문제이다. 왜 민주당에 힘을 실어주지 못하고, 왜 한명숙이나 유시민을 지지하지 못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날탕으로 한미 FTA를 추진했던 사람들을, 그리고 그에 대해서 아직 한 번도 다시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지지할 수 있느냐? 한미 FTA는 민주당의 한가운데를 가르고 있는 사건이고, 여전히 살아있는 의제이다.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의 여러 가지 정책 중에서 아직도 사람들이 가장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사건이 한미 FTA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한미 FTA와 뉴타운, 이 두 가지로 민주당은 정권을 잃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여전히 정치적인 재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왜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FTA를 그렇게 급작스럽게 추진했을까? 영원한 미스테리가 될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그 실무자였는지는 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라고 알고 있다.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는 여러가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김용철은 삼성 구조본의 법무팀장이었고, 검사 출신으로 처음으로 삼성에 갔던 사람이다. 삼성전자의 법무팀 사장으로 바로 이 김현종이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 후에 옮겨갔다. 이런 일을 우리는 아직도 눈을 뜨고 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동계올림픽 유치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대통령은 삼성의 이건희 회장에게 특사를 단행했다. 이게 '선진 한국'을 주장하는 한국에서 도대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삼성의 후계구도와는 별도로, 대략 두 가지의 사회적 의제가 우리에게 남아있다. 첫 번째가 아주 오래된 질문이지만 '무노조 경영'이다.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해외에서도 무노조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성과를 올리고 있는 현대 자동차는 강성 노조로 유명한 곳이지만, 세계화 국면에서 노조 없이 회사를 소유하고 있는 주주들의 의사만으로 경영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 다른 의제는 삼성반도체의 화학물질로 인한 종업원들의 보건적 피해 문제이다. 삼성반도체는 첨단 산업으로만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사실은 화학공장 아닌가? 그 속에서 노조 없는 노동자들이 겪게 되는 피해는 당연한 일인데, 이걸 삼성의 힘으로 덮고 있는 것은, 정상적인 기업으로서는 이제는 그만 해야 하는 일이다.

물론 삼성이라는 대기업이 우리에게 주었던 피해는 많지만, 언젠가 삼성이 지금의 음침하고 공포스러운 이미지를 벗고, 정말로 국민의 기업이 되기를 바란다. 삼성 망하기를 바라고, 삼성을 이유없이 미워하는 사람은 한국에는 없다. 그러나 한미 FTA의 김현종이 그랬던 것처럼, 정부 인사인지, 삼성 인사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 듯한 실타래처럼 얽힌 이 복마전을 그대로 두고 우리가 다음 단계로 새로운 진화를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우리에게도 손해이고, 삼성에게도 손해이다.

삼성은 아마 오랫동안 국민을 두려워한 적이 없던 것 같고, 소비자를 진정으로 무서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럴만도 하다. 그것이 진보 정권이든, 보수 정권이든,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삼성의 관리라면 그럴 만도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 모두를 위해서, 이 어두운 역사는 과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내가 삼성의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요구하고 싶은 것은 딱 두 가지이다. 노조를 인정하는 것 그리고 삼성 내의 보건적 폐해 등 지금까지 삼성의 힘으로 누르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서 최소한 인간적인 사과와 형식적으로라도 보상을 해주는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 초기에 있엇던 이런 문제들을 그대로 안고 성숙한 자본주의로 넘어가지 못한다.

우리 집에 있는 물건 중에서 삼성 브랜드를 살펴보았다. 일단 내 핸드폰이 애니콜이고, 스캐너 복합기가 삼성 것이다. 그리고 아내가 혼수라고 자신이 샀던 유일한 물건이었던 DVD와 결합된 TV가 삼성 것이다. 기왕이면 국산을 사자고, 나도 이것저것 삼성 물건을 솔솔치 않게 가지고 있다.

이병철의 유훈인지, 국민의 사랑인지, 이제 삼성도 고민을 하시기 바란다. 삼성이 유훈 대신 국민을 선택하는 그날까지, 나도 삼성 불매 들어간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고 상식을 가진 국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대답을 해주시기 바란다. 그러면 나도 다시 삼성 물건을 구매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의 어둡고 음침한 삼성이 아니라, 밝고 투명한, 그래서 장부를 믿을 수 있는, 그런 정상적인 기업으로 삼성이 변하기를 바란다.

나는 김용철 변호사를 지지한다.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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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해체가 답인가?"

[삼성을 생각한다] "김상봉 교수의 글을 반박한다"

기사입력 2010-03-15 오전 9:15:15

 

김상봉 교수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지금 당장 '삼성 불매 운동'을 제안합니다"를 읽었다. 김 교수는 이 칼럼에서 국가기구마저 사유화하고 있는 삼성을 강도 높게 비난하면서 삼성 독재, 자본 독재를 끝장 내기 위해 삼성을 해체해야 하며 그 첫걸음으로 삼성 제품에 대해 불매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한국 사회 모순의 핵심에 삼성 문제가 있다는 김 교수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김 교수의 칼럼 안에는 꽤 많은 오류들이 담겨 있으며 이 같은 오류들이 삼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우선 김 교수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기업'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다. 김 교수는 "하지만 우리는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인간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기업이 주는 일자리는 인간의 삶을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을 도구 삼아 이윤을 남기기 위해 던지는 미끼요 올가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위의 발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시장경제 질서 아래 존재하는 기업 일반 및 기업들의 이윤 창출 행위에 대한 김 교수의 평가는 극히 부정적이다. 기업들이 이윤 창출만을 위해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식의 김 교수의 인식은, 자본이 노동력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수취하기 위해 임노동자를 고용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활동하는 기업들이 제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경영을 하고 고용을 하고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이윤을 창출한들 본질적으로 인간을 위한 기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김 교수의 생각인 듯 싶다.

그런데 김 교수는 자신이 쓴 칼럼 안에서 갑자기 기업에 대해 취했던 입장을 바꾼다. "기업이 자기의 분수를 지키면서 나라 경제를 살찌우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한에서 우리 모두는 그런 기업을 사랑하고 지지할 것이다"라고 쓴 것이다. 기업이 자기의 분수를 지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분명치 않거니와 김 교수의 논리대로 하자면 나라 경제를 살찌우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기업이더라도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 안에 있는 한 '인간'이 아닌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일텐데 그런 기업을 '사랑'하겠다는 표현을 어떻게 김 교수가 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김 교수가 생각하는 사랑받는 기업상(像)은 이윤 창출에 대한 추구는 자제한 채 나라 경제를 살찌우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기업인 것으로 보인다.

김 교수는 오해를 하고 있다. 시장경제 질서 아래에 있는 기업들은 이윤 창출에 대한 추구를 자제함으로써가 아니라 이윤 창출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이윤 창출이라는 결과를 통해 경제를 살찌우고 사회에 이바지한다. 고용, 투자, 기술 및 경영기법 개발 등의 기업활동이 모두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독과점을 형성하지 않는 한, 지대추구 행위를 하지 않는 한, 불법과 탈법을 저지르지 않는 한 기업들의 이윤 추구 행위는 권장해 마땅하다.

또한 김 교수는 삼성과 이건희 일가 및 이건희 일가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가신그룹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있다. 이른바 삼성 문제의 본질은 이건희 일가가 얼마 되지 않는 지분을 가지고 순환출자 등을 통해 시가총액 200조 원짜리 그룹을 사유물로 삼았고, 계열사들을 동원해 이건희 일가만을 위한 불법 비자금을 조성했으며, 이 비자금으로 국가기관들을 매수해 제 편으로 삼았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재용에 대한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불거진 온갖 불법과 탈법과 위법 행위들은 이같은 삼성문제의 본질에서서 파생된 사건이다. 물론 이학수와 김인주 등의 가신그룹은 이건희의 의중을 받들어 비자금 조성 및 사용, 경영권 불법승계 등을 설계하고 집행했다. 김 교수가 삼성 특권 혹은 독재의 사례로 든 태안 기름 유출사건, 삼성생명보험의 행태 같은 경우도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독단과 전횡 탓일 가능성이 높다.

즉 김 교수가 민주공화국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까지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삼성 문제의 실체는 삼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문제다. 물론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이 삼성을 공고히 장악하고 있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문제를 삼성그룹 전체의 문제로 치환시키는 것은 사실판단의 측면에서도, 전술적 차원에서도 옳지 않다. 김 교수가 삼성 문제의 해법으로 '삼성 해체'라는 무리한 주장을 하는 것도 삼성문제를 진단하면서 이건희 일가 및 가신그룹과 삼성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데서 상당 부분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편 김 교수는 삼성문제의 해법으로 '삼성 해체'를, '삼성 해체'를 실현할 첫걸음으로 삼성 제품에 대한 '소비자불매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국가가 삼성 문제를 해결할 힘은 가지고 있으되 의지가 없으므로 삼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삼성을 해체해야 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삼성 제품에 대한 구매를 거부하자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문제를 삼성그룹의 문제로 등치시키는 오류를 저지른 김 교수는 삼성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엉뚱하게 제시하고 있다.

기실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이 저지른 행위들은 법치주의와 공정하고 건강한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매우 중대한 범죄행위였다. 그러나 금감원,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의 시장감시기구와 사법기관(검찰 및 법원)이 제 역할을 했다면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발호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거나 적어도 최소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이 저지르고 있는 패악질의 본질은 '법치주의'의 실종에 연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성문제의 해법은 법치주의와 공정한 시장경제를 구현할 수 있는 국가의 구성에 있는 것이지 삼성그룹 해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삼성 문제는 강하고 유능하고 정의로운 국가를 조직해 이건희 일가 및 가신그룹에게 제 몫을 찾아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다. 국가의 지원과 국민들의 성원, 소속 임직원들의 노력 등을 통해 글로벌 기업이 된 삼성을 이건희 일가 및 가신그룹의 문제로 해체하자는 것은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 이상의 부작용을 불러올 것이 자명하다.

김상봉 교수의 지적처럼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이 다스리는 삼성이 한국사회 모순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삼성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삼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삼성 문제의 원인과 해법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김 교수의 칼럼에는 삼성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오히려 어려움을 줄 수 있는 사실적, 논리적 오류들이 적지 않다.

김 교수가 그와 같은 오류를 저지른 이유 중의 하나가 구좌파적 상상력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삼성 문제 해결에 기업 및 자본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삼성 문제는 이건희 일가 및 가신그룹과 삼성을 분리하는 사고, 법치주의를 철저히 구현하고 공정하고 건강한 시장경제를 운용할 수 있는 강하고 유능하고 정의로운 국가의 구성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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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칼럼] ‘삼성 불매’, 왜 제기되는지 아는가?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알려면 빼놓을 수 없는 필독서다. 특히 국가기관들이 삼성 앞에서 얼마나 참담하게 일그러졌는지 알게 해준다. 삼성 경영진이 천문학적 숫자의 비자금을 흩뿌릴 때 국가기관들은 불법과 비리를 덮어줌으로써 그 은혜에 보답했다.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 근대국가의 자율성이 여지없이 무너진 것이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을 중심으로 삼성 불매 직접행동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번지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국가에 배반당한 시민들의 분노에서 비롯되었다.

 

삼성권력은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국가를 장악했다.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은 참여정부 역시 삼성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는 뜻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삼성권력 앞에서 검찰은 물론 특검도, 국세청과 금융감독원도, 국회와 사법부도 법과 정의의 실현을 요구하는 국민의 ‘혹시나’ 기대를 ‘역시나’로 하나하나 배반했다. 모두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건희 총수 개인을 특별사면함으로써 ‘국가는 자본의 청지기’라는, 비판적 국가론에서 일찍이 제기된 명제를 분명히 확인해 주었다.

 

도둑질 과정을 한번 무사히 통과한 도둑은 더욱 과감해진다. 앞으로 삼성 경영진의 불법과 비리, 회계조작과 탈세, 그리고 노동착취는 더욱 거칠 게 없을 것이다. 노동조합조차 없는 삼성자본의 무소불위에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소비자밖에 남아 있지 않다.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깨어난 시민들은 금전적 손해와 불편을 감수해야 할 태세다. 주저될 때마다 스스로 물을 것이다. 내 자식들에게 이 추악한 사회를 그대로 물려줄 것인지. 그리고 내가 오늘 작은 편익을 추구할 때마다 그것이 내 자식, 내 동생에게 굴종의 무거운 사슬이 되어 되돌아오리라는 것을 거듭 되새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사회가 자유와 굴종 사이 어디쯤에 자리하는지 규정하는 것은 자본권력에 대한 시민사회의 견제와 균형의 힘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생산하는 노동자와 소비하는 시민의 자본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행동에 달려 있다. 거듭 강조하건대, 노동자가 생산을 멈추거나 소비자가 소비를 멈출 때 자본권력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공짜가 없듯이 자유 또한 저절로 얻을 수 없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자유를 지향하려면 불편함과 어려움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기업이 국민경제에 복무하기보다 국가가 기업에 복무하는, 이른바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서 시민들의 ‘삼성 불매’ 직접행동은 쉽게 ‘반기업’ 나아가 ‘반사회’ ‘반국가’라고 매도당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를 농락하고 무노조를 관철하는 삼성 경영진보다 더 반사회적이고 반국가적인 존재가 누구인지 물어야 마땅하다. 유럽 노동자가 “무노조를 관철하는 삼성에 왜 보이콧으로 대응하지 않느냐”고 물었듯이 삼성 불매 운동은 민주노총이 실제로 ‘강성’이라면 오래전에 벌였어야 마땅하다. 삼성이 누구나 말하는 ‘글로벌 경제’에 상응하는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도 삼성 불매 직접행동은 독이 아닌 약이다.

 

진짜 싸움을 벌일 때 역사는 진화한다. 그동안 근대성을 주로 강조해온 나 자신부터 스스로 다짐해야겠다. 자본권력과의 싸움, 그 정점에 있는 삼성권력과의 싸움을 회피하면서 노동운동은 물론 복지와 분배를 말하지 말자. 사회진보나 민주주의 성숙을, 생태, 양성평등, 참교육, 소수자 인권을 말하지 말자. 그건 다만 알리바이일 뿐이다.

 

홍세화 기획위원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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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삼성왕국,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우울한 초상" ~ "악마는 사라졌다. 과연?"

기사입력 2010-03-22 오전 10:15:10

 

나는, 악한 사람들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악한 사람들을 칭찬한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악한 사람들이 평소에 악한 일을 하던 바로 그 성읍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한다. 이런 것을 보고 듣노라면 허탈한 마음 가눌 수 없다.
―'전도서' 8장 10절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치하(기원전 301~198년)의 유다는 오랜만에 누리는 평화를 만끽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코헬렛'(Qohelet, 전도자)이라고 자칭하는 한 노학자는 '헛되다'는 말을 무려 30여 회나 내뱉으며 독한 냉소주의문학을 저술합니다. 그의 글은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1,2)로 시작하고, 이 글이 저작된 후에 첨가된 12장 9~14절을 제외하면,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12,8)"로 끝을 맺습니다. 왜 그는 이 평화의 시대에 그토록 독한 냉소주의에 빠져야 했던 것일까요.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무적의 군대가 팔레스티나로 진군하자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저항 없이 곧바로 항복을 합니다. 그리고 323년 이 새 제국의 군주가 요절한 뒤, 그의 휘하 장군들 사이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집니다. 기원전 301년 이집트에 터잡은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의 제국에 병합될 때까지 팔레스티나는 혹독한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백 년 남짓의 기간 동안 이곳에는 거의 전쟁이 없었습니다. 식민지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누리는 평화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다른 장군들이 세운 나라들에 비해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은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되었고 경제적으로 크게 번성했습니다. 전례 없이 안정된 중앙집권적 체제 아래 제국은 각 지방의 농민들에게 개량된 농법, 농기구, 새로 개발된 태양력에 기초한 과학화된 농경주기를 보급했고, 국제무역에서 유리한 작물 경작을 유도했습니다. 그리고 화폐제도를 확산시켜 무역의 효율성을 크게 진작시켰습니다. 그래서 헬레니즘 제국들 여기저기 건설된 폴리스 간 국제무역이 대단히 활발해졌습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는 거대한 도서관이 건립되고 있었습니다. 70만 권이라는 어마어마한 장서로 유명한 이 도서관 건립을 위해 제국은 막대한 기금을 쏟아부었습니다. 특히 책을 필사하여 복사본을 만드는 서기관의 수효가 급증하고,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서기관 교육시스템이 제도화됩니다. 문자 능력이 출중한 중산층 엘리트가 대량으로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경제적 활황으로 부를 축적한 서민 계층에서 배출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국 전역에 지식운동을 활성화시키며, 바로 이런 맥락에서 유다에서 이른바 '지혜'라는 장르의 문학이 태동합니다. 과거 왕실 사제나 서기관들이 저술한 문헌인 율법서나 역사서는 왕과 귀족의 나라, 그 뿌리와 비전을 다루었는데, 이들 신흥학자들인 민간서기관들의 지혜 문서들은 대중의 일상적 삶의 질서를 언어적으로 체계화하는 것, 곧 일상적 경험을 성찰하는 가르침을 다룹니다.

그런데 그런 지혜문헌 학자들이 많은 활약을 하고 있는 시기에, 코헬렛이라는 한 노학자는 그 지혜들에 짙은 냉소의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배적인 지혜들이 평화로운 세계를 만끽하면서, 이런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사는 법을 말하고, 그것이 풍요와 안정, 건강이라는 신의 축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인과응보의 진리를 설파하고 있는데, 코헬렛은 그 모든 것이 헛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제국이 제공해준 안정과 번영의 토대 위에서 많은 야훼의 현자들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악이 소멸해가는 세상의 가능성에 탐닉하고 있는데, 오늘 읽은 본문처럼, 코헬렛은 악한 자가 죽어도 그 악행이 자행되던 바로 그 곳에서조차 칭송받는 세상을 절망스럽게 냉소합니다. 악마가 사라지고 있다는 바로 그 시대에 악마는 사람들의 공모 속에 칭송받으며 일상과 동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바로 이 시기에 새로 부자가 된 평민들이 많았지만, 막대한 세금을 강탈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특유의 조세체제 아래서 더욱 많은 이들이 몰락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게 된 시기에 여전히 문맹인 더 많은 이들은 주체의 조건을 더욱 상실해갔던 것입니다.

느헤미야-에스라 이후 유다(예후다)는 명실상부 자치구가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총독사회가 안착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남겨둔 갈등의 축은 여전히 유다 지방 내부를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이 싸움은 성전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분명해진 것은 유다 지방의 핵심은 성전이라는 점, 그리고 성전의 수장, 곧 대사제는 이 사회의 지배자임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군주제가 총독통치를 경유한 뒤 '사제들의 사회'가 된 것입니다. 물론 사제들의 시대에도 군주 혹은 총독 같은 세속통치자가 있었지만, 대중의 정신을 지배하여, 슬프게도 하고 기쁘게도 하며, 절망하게도 하고 희망에 차게도 하는 것은 바로 사제들이 주도하는 신정체제사회가 된 것입니다.

한편 우리사회가 권위주의적 국부독재체제에서 민주정부들을 거친 뒤 포스트민주화를 향한 길을 찾아 나서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지금 어떤 양상으로 가시화되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군인들의 합리성이 사회 전체의 합리성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받던 시대가 반독재 민주화운동 특유의 문화적 성향이 대안적 합리성으로 수용되었던 시대로 이행했으며, 그것은 다시 최근 기업가들의 합리성을 전 국민에게 강요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우리사회 현재적 변화를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출판가를 강타하고 있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나는 이 생각을 계속하면서도 약간 다르게 읽는 것이 필요하다는 상념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사회의 민주화가 본격 가동된 것은 정권교체를 이룩한 1997년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라는 두 번의 민주정부들의 실험은 공히 두 가지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그 하나가 '민주화'이고 다른 하나는 '성장'입니다. 민주화는 권위주의적 군부체제를 청산하고 시민적 주권사회를 향한 제도적 실험을 의미했고, 성장은 과거 발전국가 모델을 신자유주의적으로 재구축하는 정치경제적 제도화 과정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와 성장은 '그 10년' 내내 잘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줄곧 갈등을 일으켜왔습니다. 하여 시민사회는 그것을 '386적인 합리성'의 한계로 이해했고 그 결과가 MB정부의 탄생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다 보면 포스트민주화 체제를 추동하는 제도적 헤게모니 세력은 MB 정부라기보다는 삼성의 이건희 체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미 삼성의 연 매출액은 국가 예산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정보력에서 국정원을 능가하고 기획력에서 청와대를 압도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정계, 제계, 법조계, 학계, 언론계 등, 사회 각 영역의 여론 주도집단을 지지층으로 둠으로서 막대한 정책형성능력을 갖춘 세력입니다.

게다가 민주화 이후, 특히 MB식 막가파 정치 이후, 사회적 합의 시스템이 교란된 상황에 있는 정부에 비해, 잘 조직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체제 같은 삼성은 훨씬 효과적으로 민주화 이후 체제의 비전을 더 잘 드러내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시민사회는 삼성의 부당내부거래, 불법상속, 노조탄압, 정경유착 등의 부조리함에 대해 잘 알고 있음에도, 글로벌사회에서 민족적 자긍심의 핵심을 이루고 있음을 또한 각인하고 있습니다. 삼성이 없다면 국가의 성장과 시민사회의 행복을 향한 여정은 심각하게 좌초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부조리함 대 자긍심' 사이의 양자택일의 귀로에 서 있는 한, 시민사회는 대체로 후자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음울하게 상상하는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모습은 기업의 합리성에 추동되는 정치 세력이 아니라 기업 그 자체다 이끄는 사회일지도 모릅니다. 사회세력간의 협상에 기초하는 정치가 아니라, 시장의 이익을 강조하는 기업이 우리의 미래를 이끌고 있다면, 더구나 그 기업이 군주제 모델에 기초하고 있다면, 그런 상상은 한 편의 치명적인 재앙의 시나리오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시민사회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일류국가, 일류시민이 되는 꿈 말입니다. 그것은 지구화 시대 삼성의 성공 모델에 기초한 꿈입니다. 그 과정에서 탈락자들이 무수히 있고, 그러한 탈락의 위기가 우리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삼성의 꿈을 공유하기를 갈망합니다.

군부권위주의 체제는 '빨갱이'라는 악마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민주화 시대에는 '반민주 세력'이라는 악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업의 시대인 포스트민주화 체제에 악마는 사라졌습니다. 낙오자와 성공한 자만 존재하고, 그 성공의 정점에 한 기업의 신화가 있습니다. 코헬렛의 '헛되다'는 주장이 겨냥하는 과녁은 우리 시대에는 바로 이 신화에 있습니다.

(이 글은 김진호 목사가 지난 14일 한백교회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김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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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공룡'이 된 삼성, '상업 언론'의 책임은? ~ "'삼성 공화국' 만든 것은 '창녀 언론'이다" 

기사입력 2010-04-05 오전 7:49:18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를 읽었다. <삼성을 생각한다>는 단순한 내부 고발이 아니라 가톨릭 신자 김용철이 절박한 상황에서 사제를 찾아가 행한 고해성사의 내용이다(23쪽). 그래서인지 내용에 신뢰가 갔다. 말로만 듣던 '삼성 공화국'의 흑막을 상세히 보여주는 책이었다.

이건희 회장 일가가 장악한 '삼성 공화국'이 돈이라는 마약을 이용해 대한민국을 마비시키고 있는 사례들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 한국 민주주의의 장래가 걱정됐다. 지금까지 화려한 통계로 장식된 대한민국의 초상화가 갑자기 초라해 보였다. 노무현 정권의 '참여정부'라는 명칭이 삼성의 구조조정본부 팀장회의에서 토의, 결정된 것이란 '비화'는 삼성과 정치 권력 간에 맺어진 유착의 밀도를 실감하게 했다.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삼성 공화국'의 괴력을 확인하게 됐다.

<삼성을 생각한다> 이전에 '언론 보도'가 있었더라면

삼성이 아무리 세계적인 대기업이라고 하지만 일개 재벌 기업이 한국을 이렇게 장악하고 주무르고 있다는 것은 이해가 쉽지 않다. 그러나 비밀의 성곽 안의 '삼성 공화국'이 흑막 뒤에서 벌이고 있는 일들을 보면 일개 대기업이 국민이 구성한 국가 기관을 장악한 데에는 언론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삼성을 생각한다>가 나오기 전에 언론이 이 같은 내용을 폭로했더라면 국민 여론이 삼성이 '삼성 공화국'으로 공룡화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으리라고 믿는다. 뒤늦게나마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가 나와 '삼성 공화국'의 위험과 언론의 책임을 되새겨 볼 기회를 갖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소름끼쳤던 것은 공권력의 상징인 특수부 검사에서 삼성의 임원으로 스카우트 된 김 변호사가 이건희 회장 측근과 틀어져 직장을 떠나게 되자 삼성의 조직이 집요하게 그를 미행하고 협박하고 끝내는 '밥줄'까지 끊기게 한 잔인한 행위(조지 오웰의 <1984>를 연상시켰다), 김 변호사가 처절한 상황에서 빠져나기 위한 자구책으로 자신의 사정과 삼성의 비리를 폭로하려고 여러 언론사와 접촉을 시도해 보았지만 10년에 한번 쯤 있을까 말까 한 대어(大魚) 기사 감에 관심을 보인 언론사가 <한겨레>를 빼고는 없었다는 것, (삼성이 아닌 다른 기업이라도 그랬을까?), 그래서 김 변호사가 마지막 수단으로 가톨릭교회의 정의구현사제단을 찾아가 양심고백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대한한국의 현실이었다. (조·중·동은 불법 행위를 한 삼성을 비판하기 보다는 삼성 편에 서서 고립무원의 김용철 변호사를 돕는 사제단을 비판했다는 핀잔을 받았다.)

김 변호사가 양심고백을 함으로써 삼성은 자기들의 치부를 알고 있는 김 변호사의 입을 막으려고 그를 끈질기게 괴롭히다 역습을 당할 꼴이 됐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궁서설묘(窮鼠齧猫)의 변을 자초한 꼴이 됐다. 이건희 회장과 그 일가가 '김용철 사건'을 진지한 반성의 기회로 삼았더라면 이 회장과 그의 가족에 대한 국민의 태도도 달라지고 삼성이 진정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는 기업으로 태어나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분간 이런 기대는 실현이 어려울 것 같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 2월 5일, 고 이병철회장 탄생 100주년 행사에서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 거짓 없는 세상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 국민을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오만한 발언이었다. 불법 행위를 저질러 유죄 판결을 받고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받은 지 겨우 한 달 밖에 안 된 장본인이 국민을 얼마나 무시했으면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었을까.

삼성이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기업이면서 국민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원인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반세기를 언론에 종사해 온 필자가 보기에는, 언론의 책임이 크다. 삼성을 경영하는 이건희 회장 일가는 돈 로비로 국가의 권력 기관을 부패시키고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불법 행위를 하다 걸려도 처벌을 받지 않는 면죄부를 받게 됐다. 점점 비리를 저지르는데 주저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돼고 권력 기관을 무시할 수 있게 됐다. 언론이 이런 사실을 취재해서 문제를 했더라면 한두 번은 몰라도 반복해서 불법 행위를 저지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삼성에 관대했다. 삼성은 한국 언론 기업의 사활에 영향을 주는 최대 광고주이다. 삼성은 언론을 길들이는데 광고의 위력을 최대한 이용했고 작전은 통했다. 국가의 3권을 '순화'시켰고 제4권력까지 장악하게 되니 두려울 게 없었다. 이런 위력을 알게 된 공권력이나 언론은 미리 삼성은 건들일 수 없는 성역으로, 치외법권의 존재로 간주했다. 언론의 권력 감시 역할이 가장 필요한 때에 언론은 돈에 눈이 멀어 처음에는 그 역할을 소홀히 했고 나중에는 역할을 포기하다 시피 했다. 이제 이런 상태가 관행으로 굳어졌고 삼성은 각 분야에서 무소불위의 존재로 등극한 것이다.

'삼성과 언론', 세계 언론사에 기록될 사건들
물론 1차적인 책임은 삼성이 져야 한다. 온갖 미명으로 위장된 뇌물에 윤리의식이 마비돼 삼성의 불법 비리를 눈감아 준 검찰이나 법관들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큰 책임은 권력-정치 권력 뿐 아니라 경제 권력, 언론 권력을 포함한 모든 권력-을 감시할 제1차적인 임무를 태만히 한 언론이 져야 한다. 언론이 민주 시민의 알 권리를 충족해 주고 권력 감시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더라면, 삼성-검찰의 유착, 삼성-정권의 유착 내용을 조사하고 보도했더라면 삼성이 오늘처럼 국가 권력을 무력화시키고 국민을 무시하도록 여론이 방관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김 변호사가 삼성의 비리를 알리기 위해 몇 개의 신문, 방송사를 간접적으로 접촉하고 보도 의사를 타진했다. <중앙일보>나 <동아일보>처럼 삼성과의 특별한 연고가 있는 매체는 아예 접촉을 하지 않았지만 접촉한 언론들의 반응은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책이 나온 다음 신문의 반응도 마찬가지이다. 삼성의 광고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을 제외하면 기사는 말할 것도 없고 <삼성을 생각한다>에 관한 서평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책 광고까지 거절했다. <경향신문>은 <삼성을 생각한다>에 관한 칼럼을 다룬 김상봉 교수의 기고를 싣지 않았다가 기자들이 들고 일어나 다음날 경위를 설명하는 사과문을 게재하는 진통을 겪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세계 언론사에 기록될 사건들이다.

신문이나 방송에 미치는 광고주의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제는 언론이 광고를 유치하기 위해 대기업의 홍보 기사를 실어 주겠으니 광고를 달라고 손을 내미는 수치스러운 사례까지 나오고 있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논란을 일으켰던 '창녀 언론'을 상기시키는 사건들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우리는 이런 매체를 언론이라고 부를 수 없다. 언론으로 대접해 줄 수도 없거니와 대접해 주어서도 안 된다. 창녀를 숙녀라고 부를 수 없고 창녀에게 숙녀 대접을 해줄 수 없는 것과 같은 논리다. 그런데 이런 언론들이 여전히 언론 행세를 하고 언론의 특권을 외친다. 사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들이면서 수치심마저 잃은 몰염치한 행동이다. 한국 언론의 현 주소가 어디에 있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사건들이다.

<창녀 언론>, 광고를 받고 기사를 파는 언론을 고발하다

미국에서도 '창녀 언론'이 문제된 때가 있었다. 지금부터 91년 전인 1919년 업톤 싱클레어(Upton Sinclair)라는 작가가 <창녀 언론(Brass Check-A study of American journalsim)>라는 책을 냈다. 싱클레어는 원래는 작가이지만 사회 부패의 고발을 통해 사회 개혁을 촉구하려던 20세기 초 제1세대의 '폭로 기자'(Muckraker)였다. 탐사 기자의 선구자이다. 독자를 끌기 위해서 선정적인 이야기를 폭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회의 비리 부패를 고발하고 시정하기 위한 폭로였다. 그는 미국 도살장의 비위생적인 쇠고기 처리 과정과 노동 착취를 고발하는 <정글(Jungle)>이라는 책을 써서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작가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책을 읽고 도살장 실태를 조사해 보고는 싱클레어의 고발이 모두 사실로 드러나자 식품의 위생 상태를 검사 관리하는 식품의약품안전청(FDA)을 창설한다. <정글>이 식약청을 창설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싱클레어는 당시 미국 언론이 너무 부패하고 기득권층의 이익만 옹호하고 서민들의 생활은 소홀히 다루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싱클레어는 미국 신문과 잡지의 사주나 기자들의 부도덕한 행태를 치밀하게 조사해서 고발하는 책을 발행했다. 책 제목을 "구리 전표'(Brass Check)"라고 붙였다. 언론을 사창에 비유한 것이다. 구리 전표는 사창가에서 손님이 매춘여성와 잠자리를 같이 하려면 미리 포주에게서 사야 하는 구리로 된 전표를 말한다. 손님이 매입한 구리 전표를 마음에 드는 창녀에게 건넴으로써 거래가 성립된다. 싱클레어는 당시 미국 언론이 매춘여성이 돈을 받고 몸을 팔듯이 언론 사주는 광고주 대기업으로부터 돈을 받고 그들의 이익을 감싸는 보도를 하고 기자들은 사주로부터 돈을 받고 사주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뒷받침하고 대기업이나 광고주의 이익을 옹호하는 기사를 쓰는 것을 사창 행위에 비유하고 "창녀 언론"을 고발한 것이다. 그래서 책 제목을 사창가의 "구리 전표"라고 붙였던 것이다. 사실 확인에 철저한 싱클레어는 책에서 다룬 어느 신문 잡지든 잘못된 사실을 발견하면 소송을 제기하라고 공개 도전했다. 그러나 소송을 제기한 신문은 하나도 없었다.

<창녀 언론(Brass Check)>은 싱클레어 자신이 자기가 평생 쓴 책 중에서 "가장 위험하고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두 권의 책 중의 하나"라고 자평할 정도를 심혈을 기울여 쓴 미국 언론 비판 기록이었다. 그는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고 언론 개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판권을 포기했다. 비판 대상이 된 주류 신문 중에서 이 책의 서평을 실은 신문은 하나도 없었다. 몇 개의 군소 신문이 서평을 실었지만 내용이 모두 부정적인 것이었다. 자연히 판매가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는데도 10년 동안에 15만 권이 팔렸다. 이 책 출판 후 미국 언론은 1920~30년대에 많이 정화됐다. 신문은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여론을 전보다 많이 다루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류 신문들이 책을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에 20세기 중반에 이르자 '창녀 언론'은 미국 지식인 사이에서도 거의 잊혀진 이름이 됐다. 조·중·동을 포함한 한국의 언론들이 <삼성을 생각한다>를 약속이나 하듯이 무시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효과를 노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 인터넷의 영향으로 조·중·동이 서평은 물론 책 광고까지 보이콧하고 있는데도 <삼성을 생각한다>의 판매 실적이 3월 말로 10만 부를 넘어섰다는 보도다. 나는 <삼성을 생각한다>가 1세기 전 업톤 싱클레어의 <창녀 언론>이 미국 사회에 끼친 것보다 훨씬 더 큰 긍정적 영향을 한국 사회에 기여하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정위구현사제단 "언론과 지식인, 모든 국민이 공범이다"

2008년 4월 23일 김용철 변호사를 보호하던 정의구현사제단은 제기동 성당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삼성 특검이 막을 내리고 이건희 회장이 경영에서 은퇴한다는 발표가 있은 직후였다. 언론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은 회견이었지만 삼성이 오늘날 이렇게 된 데는 언론의 책임 크다는 것을 강조하고 언론인과 지식인의 각성을 촉구한 교회의 목소리가 회견의 요지였다는 점에서 우리 언론사에 기록될 가치가 있는 회견으로 생각돼 핵심 구절 하나만 소개하고 글을 맺으려 한다.

"일부 언론의 왜곡과 많은 지식인의 침묵과 냉소는 용기있는 증인자들을 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경제 민주주의가 지연되고 있는 배후에는 언론과 지식인의 책임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또 경제라는 물신을 위해 모든 가치를 뒤로 미루는 오늘의 국민 정서 또한 재벌의 범죄를 방관하거나 관대하게 대함으로서 결과적으로 공범이기도 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장행훈 언론인·동아일보 전 편집국장 

 

  Book on Samsung Divides Korea

SEOUL — Life has been a roller coaster for Kim Yong-chul since he began talking about Samsung Electronics two and a half years ago. He has been celebrated by some as a whistle-blower, but in a culture that emphasizes workers’ loyalty to their employers, he has also been vilified as a traitor driven by personal grudges.

 

Kim Yong-Chul has written an exposé of Samsung Electronics titled “Think Samsung.”

 

 

That was before Mr. Kim’s 474-page exposé, “Think Samsung,” hit stores in February.

The book makes sensational allegations of extensive corruption by Lee Kun-hee, the richest man in South Korea and the chairman of Samsung Electronics, the world’s largest technology company by revenue.

 

Samsung is the most sacrosanct — and yet often mistrusted — company in South Korea. Since the book’s release, the country’s major newspapers and Web sites have refused to carry advertisements for it, and few South Korean publications have reviewed it. one newspaper reported on its popularity — it became a best seller, thanks to strong word of mouth on blogs and Twitter — but did not print its title or detail its allegations.

 

“Isn’t this a comedy?” Mr. Kim, 52, said in an interview. “I am challenging them to slap my face, to file a libel suit against me, but they don’t. They treat me like a nut case, an invisible man, although I am shouting about the biggest crime in the history of the nation.”

Samsung executives have dismissed the book as “fiction.”

 

“We are seething with anger, but we are not going to sue him and make him a star again,” said Kim Jun-shik, Samsung’s senior vice president for corporate communications. “When you see a pile of excrement, you avoid it not because you fear it but because it’s dirty.”

 

Mr. Lee was charged with tax evasion and breach of trust in April 2008 and convicted on both charges in what became known as the Samsung slush fund scandal. But he avoided prison and eventually received a presidential pardon and returned to the chairmanship of Samsung.

 

Though the legal case is over, the country is still grappling with the questions that it raised — and that Kim Yong-chul’s book continues to raise — about Samsung, its place in society and the independence of the country’s news media and justice system.

 

Under Mr. Lee’s direction, Samsung grew into a conglomerate that generates more than a fifth of South Korea’s exports. It employs 270,000 people around the world and has become synonymous with success, style and pride in South Korea.

 

Mr. Kim joined the company in 1997 after making his name as a star prosecutor who investigated the corruption of Chun Doo-hwan, the former military strongman. He became Samsung’s top legal counsel before quitting in 2004. He went public with his allegations of wrongdoing three years later.

Even for South Koreans accustomed to corruption scandals, his assertions were staggering.

 

Mr. Kim accused Mr. Lee and his loyal aides of having stolen as much as 10 trillion won, or $9 billion, from Samsung subsidiaries and stashed it in stock and bank accounts illegally opened in the names of executives.

 

The book alleges that they shredded books, fabricated evidence and bribed politicians, bureaucrats, prosecutors, judges and journalists, mainly to ensure that they would not stand in the way of Mr. Lee’s illegal transfer of corporate control to his only son, Lee Jae-yong, 41.

 

In his book, Mr. Kim depicts Mr. Lee and “vassal” executives at Samsung as bribing thieves who “lord over” the country, its government and media. He portrays prosecutors as opportunists who are ruthless to those they regard as “dead” powers, like a former president, but subservient to and afraid of Samsung, which he calls the “power that never dies.”

 

“I wanted to leave a record of Samsung’s corruption because prosecutors’ investigation turned it into historical gossip,” Mr. Kim said. “I wrote this book because I was afraid that children would grow up believing that in South Korea, justice does not win, but those who win become justice.”

The book has sold 120,000 copies so far — an unusually good performance in South Korea for a nonfiction work.

 

When Mr. Kim first approached the news media with his allegations, he said, no one wanted to touch the subject. It took a group of outspoken Catholic priests to publicize his claims, forcing an investigation.

Prosecutors uncovered 4.5 trillion won in accounts that violated a law requiring depositors to use their real names; they determined that the money belonged to Mr. Lee, inherited from his father, Lee Byung-chull, who founded Samsung.

 

But they concluded that there was no evidence of bribery, which astonished Mr. Kim, since he had provided a list of prosecutors whom he said he had helped Samsung bribe while he was working there. In addition, a lawmaker said she had once been offered a golf bag full of cash from Samsung, and a former presidential aide said he had received and returned a cash gift from the company.

 

Last year, Mr. Lee was convicted of having evaded 46.5 billion won in taxes on profits generated from the hidden money and of having helped his son buy shares of a Samsung subsidiary at an artificially low price. He was sentenced to three years in prison, but a judge suspended the sentence, saying the crime “was not serious enough to merit an actual prison term.”

 

After his conviction, Mr. Lee said he was “sorry for causing trouble to the people.” In February, he received a presidential pardon, and a month later he returned to Samsung as chairman, without a board meeting to approve the appointment.

 

The sequence of events deepened South Koreans’ mistrust of the justice system, following similarly light punishment for the heads of Hyundai, SK, Doosan and Hanwha, all convicted of fraud or other crimes in recent years.

 

The Grand Prosecutors’ Office has dismissed Mr. Kim’s book as repeating allegations that had been proved “baseless.”

 

And company officials say the Samsung of today is far more transparent than the Samsung of several years ago that Mr. Kim portrays in his book.

 

Samsung says it has not used its advertising budget to tame media coverage of Mr. Kim’s allegations. But a rare glimpse of how publications tiptoe around Samsung came in February, when the Kyunghyang daily newspaper rejected a college professor’s column praising Mr. Kim’s book and criticizing Samsung.

 

The professor, Kim Sang-bong, took his column to an online newspaper. When Kyunghyang reporters raised an uproar, the newspaper published a “confession” admitting that it had rejected the column for fear it might lose Samsung advertisements.

 

The refusal of newspapers to carry the advertisement for Mr. Kim’s book has actually helped sales, said Kim Tae-gyun, the book’s editor at its publisher, Sahoipyoungnon. Even people who did not want to read it bought copies to show their support, he said.

 

Sean C. Hayes, an American lawyer and newspaper columnist in Seoul who has worked for the Constitutional Court and taught at a law school here, said he hoped more “brave souls” like Mr. Kim would speak out about corruption “for the benefit of a promising nation that is being choked by corrupt incompetents.”

 

“The change will have to come from the masses,” he added, “since elite power centers have a firm grasp on most government entities through implicit guarantees that evils will only be dealt with by a little slap on the wrist.”

 

Mr. Kim said his decision to go public with his allegations against Samsung had exacted a heavy personal price. He said acquaintances had cut off contact with him, and when he gave a lecture at a law school this month, students asked whether attending might jeopardize job opportunities.

 

“People call me a betrayer,” said Mr. Kim, a classical-music buff who likes to swill espresso. “Others consider me be their avatar, who did something they wanted to but couldn’t.”

 

Nevertheless, he says his battle is far from over. He is working with activists organizing a boycott of Samsung products.

 

“I am not a revolutionary, an ideologue or a revenge-seeker,” said Mr. Kim, who is seeking to publish his book abroad. “But I am against business as usu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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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노무현'을 꿈꾸는가? 그럼, 삼성과 싸워라!"

[삼성을 생각한다] 삼성을 어떻게? 정치인이 답해야!

기사입력 2010-05-03 오후 4:16:40

 

노무현을 추억하며

다시 5월이다. 올해는 5·18이 일어난 지 30년이 된 해이다. 또한 5월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달이기도 하다. 그가 고향 마을 뒷산의 부엉이 바위에서 세상을 등져버린 날이 5월 23일이었는데, 이 날은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들을 몰아내고 기적과도 같은 대동세상을 열어가고 있던 날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후로 우리는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이어지는 광주항쟁을 기념하면서 그 한 가운데 자리한 노 대통령의 서거일을 늘 같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어찌 우연이겠는가? 노무현은 5·18이 불러낸 사람, 광주가 선택한 사람이었다. 5·18이 그를 역사로 불러냈으니 그가 마지막에 5·18의 품 안으로 돌아간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그가 5·18이란 역사에 단지 무동을 탄 채 살다 간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5·18이 피워낸 꽃이요, 5·18이 맺은 열매였으니, 역사에 큰 흔적을 남긴 모든 위인이 그렇듯이 그도 단순히 자기 시대의 부름에 응답했을 뿐만 아니라 시대를 앞에서 이끌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가 떠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가 남긴 유산 위에서 다시 우리 시대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는 무엇으로 자기 시대를 넘어 갔으며 무엇을 우리에게 남기고 갔는가? 사랑이다! 그는 정치에 사랑이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퍼뜨린 사람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를 말하면서 사랑이라는 낱말을 같이 쓰도록 만들었던 사람이다. 이것은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이 땅에서 정치란 사랑의 대상이 되기엔 너무도 추잡하고 비열한 권력욕으로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등장한 시대는 적에 대한 광기어린 분노와 증오가 여전히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던 시대, 한 마디로 말해 사랑이 사치였던 시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출현은 어떤 제도적 혁명보다 더 근본적인 혁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로지 분노와 적개심만이 넘실대던 정치판에 그가 한번 사랑의 씨앗을 뿌린 뒤에 모든 정치인들이 앞 다투어 대중들에게 사랑을 구하기 시작했으며, 대중들 역시 사랑하고 싶은 정치인을 갈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을 정치의 근본적 운동 원리로 만든 사람, 그가 바로 노무현이다.

노사모 이후 창사랑(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 이름인가?)에서 시작해 온갖 종류의 정치인 팬클럽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은 노무현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다. 노무현의 아류가 되기를 원치 않는 진보신당의 노회찬, 심상정 같은 정치인들은 팬클럽 대신 연구소를 만들었지만, 노회찬 대표가 트위터에 알뜰한 정성을 쏟는 것을 보면 현실 정치판에서 100개의 연구소가 하나의 팬클럽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 시대는 사랑받지 못하면 정치에서 성공할 수 없는 시대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을 보고 예외도 있다 할 것이다. 그는 전혀 사랑받지 못하고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까닭 없는 예외가 아니다. 뜨거워지기도 하고 식기도 하는 것이 사랑이다. 상스럽게 비유하자면 '이명박'은 '노무현'에게 실연당한 대중이 홧김에 서방질한 상대였다. 그러니까 그것 역시 사랑의 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 사랑이 자기 몫이 아니었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을 뿐. 이명박 씨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대통령으로 선택된 것은 나라를 위해서도 비극적인 일이지만, 특히 그 자신에게 너무 큰 불행이다. 그가 권력자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순간, 아무도 그의 파멸을 동정하지 않을 것이니, 그는 결코 운명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 때가 오면 그는 사랑이 아니라 욕망을 부추겨 대중을 유혹했던 것을 땅을 치며 후회하겠지만, 자기가 뿌린 것을 거두는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그의 운명이 나와 무슨 상관이랴! 다만 중요한 것은 이제 사랑이 한국 정치의 운동 원리가 되었다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새로운 것은 낯선 것이므로 늘 오해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 있다. 여러 번의 오해와 시행착오를 거쳐 새로운 것과 친해진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것에 제대로 적응하게 되는 것이다. 노무현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사랑이라는 선물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등장한 이후 수많은 정치인들이 그를 흉내 내었으나 제대로 뜻을 알고 흉내 낸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었다. 아니 도리어 그를 모방했던 정치인들은 대부분 노무현 현상을 오해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노무현의 등장 이후 정치인들이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것을 연예인들이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너나 할 것 없이 연예인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치인이 목에 두른 스카프로 정책의 빈곤을 감추거나, 앞 다투어 팬클럽을 만들어 사람들을 몰고 다니며, 티브이 화면에서 눈물을 찍어내는 연기를 하기 시작한 것은 모두 노무현을 오해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하지만 노무현은 패션 같은 것은 모르는 사람이었고, 스스로 팬클럽을 만들 생각도 한 적 없으며, 국회의원 명패를 집어 던지며 거친 분노를 보일지언정 가식적인 눈물을 찍어내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런 노무현이 그토록 애틋하게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까닭이 무엇인가? 이유는 딱 하나다. 그것은 그가 싸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의 악과 싸우는 사람이었으니 사랑받은 만큼 미움 받았던 사람이다. 그가 자기를 모방하는 모든 아류들과 구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연예인에게 '안티'는 백해무익한 독일 뿐이다. 하지만 정치인에게 '안티'는 자신의 존재이유이다. 왜냐하면 정치, 특히 진보정치란 현실의 악과 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악과 싸우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의 미움을 사게 마련이다. 그러나 정치인이 시대의 불의와 싸우는 것은 또한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니, 그가 크게 미움 받을수록 더 큰 사랑으로 보답받게 된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다만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싸우려 하지 않고 연예인들처럼 오로지 대중의 환심만을 얻으려 애쓴다면, 어떻게 그들이 대중의 사랑을 얻을 수 있겠는가?

노무현의 한계

하지만 우리가 노무현 이후의 정치인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는 까닭은 그들 개인의 정치적 성공과 실패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한국 정치의 객관적 위기상황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생각하면 반드시 노무현과 같은 의미에서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치인이 싸움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넓혀 나가는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 현상이다.

다른 누구보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와 함께 성장했던 김영삼과 김대중 대통령은 독재 권력과 비타협적으로 싸우면서 지지자들을 모으고 다시 그 힘으로 역사를 바꾼 사람들이었다. 정치인이 반드시 싸워야 할 시대의 악과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모습을 보이면, 처음엔 구경꾼들이 모여들고 마침내 그들이 같이 싸우기 시작한다. 그러면 역사가 바뀌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이 땅의 정치인들이 마치 투쟁의 시대는 끝났다는 듯이, 무엇과도 싸우려 하지 않고 연예인들처럼 대중의 환심만 사려 하는 것은 그들의 불행이기 이전에 시대의 불행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새로운 싸움을 통해 쇄신되고 진보하는 법인데, 정치의 광장에서 싸움다운 싸움이 일어나지 않으니 여기저기 분산된 싸움들 속에서 우리의 힘도 분산되어, 역사가 하나의 흐름을 이루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시대의 정치인들을 무턱대고 비난할 수도 없으니, 온갖 시대의 질병들이 하나로 만나는 어떤 근원을 찾아내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행복한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의 시대에는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싸워야 할 대상이 너무도 분명했으므로, 정치인들이 시대의 근본 모순이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보다는 결단할 수 있는 용기였다. 김영삼처럼 생각이 모자라고 어눌한 정치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에게 결단해야 할 순간에 결단할 용기가 있었고 뛰쳐나가야 할 때 나갈 줄 알았던 저돌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볼 때 노무현은 그의 선배들보다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직 반독재 투쟁이 채 끝나지 않은 시대에 정치를 시작했지만,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더 이상 반독재 투쟁이 시대적 과제가 아니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적어도 절차적 측면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실질적 의미에서도 정권 교체가 실현되었으니, 더는 독재 타도라는 구호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노무현은 변화된 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만 했는데, 그가 온몸으로 부딪쳤던 새로운 싸움의 대상이 한편에서는 지역 문제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언론 문제였다. 지역 감정의 문제라고 하든 아니면 보다 정확하게 호남 차별의 문제라고 하든 지역 문제는 한국 정치의 고질병이니, 노무현이 이것을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제기한 것은 조금도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언론 문제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주먹이 아니라 말이 지배하는 데 있으므로, 민주화된 사회에서 말을 지배하는 자가 나라를 지배하게 마련이다. 현대 사회에서 말을 지배하는 자는 언론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그 언론이 썩을 대로 썩어 있으니, 노무현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를 결코 확고한 지반 위에 올려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정확한 현실 인식이었다. 그가 이런 문제들을 시대적 과제로 제시하고 임기 내내 그와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은 그가 자신이 선 자리가 어디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준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 있음을 자각하고, 그에 걸맞게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제시하고 그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노무현이 불행했다고 말한 까닭은 그가 새로이 설정한 싸움의 대상이 결코 새로운 시대를 근본에서 규정할 만큼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모순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령 지역 문제가 해소되고, 언론이 제정신을 차린다 하더라도,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한, 이 땅에서 인간의 불행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은 그것을 알기엔 너무도 순진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역 문제와 언론 문제의 이면에 더 크고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가 설정한 그 두 문제하고만 부딪치고 또 부딪쳤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가 신자유주의에 그렇게 속절없이 투항하지만 않았더라면, 그의 싸움은 민주화된 시대에 싸움의 전선을 새로이 넓힌 것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표면의 적과 싸우면서 정말로 싸워야 할 본질적인 적에게 투항해버렸으니, 그것이야말로 그의 불행이며 시대의 비극이었다.

노무현과 삼성의 개인적 관계가 어떠했는지, 그가 부산상고 선배였던 삼성 구조본의 이학수 사장으로부터 언제부터 어떤 후원을 받았는지 그리고 대선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정치자금을 삼성으로부터 받았는지, 그런 것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하고 또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것은 중요한 일일 수도 있지만 사소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내막이 어떻든 그가 삼성전자 진대제 사장을 정보통신부 장관에 임명하고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을 주미대사에 임명했던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노무현이 <조선일보>와는 달리 삼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었다는 것을 모자람 없이 증명해준다. <조선일보>에 먹이를 주는 자가 삼성인데, 노무현은 <조선일보>에 대해서는 그리도 비타협적으로 싸울 줄 알았으면서, 그 배후에 웅크리고 있는 삼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의 한계였으며, 우리의 불행이었다.

그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여론의 왜곡과 검찰 같은 권력 기관의 부패와 권력 남용에 대해서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와 그것이 극단화된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었다. 취임 초반부터 한국을 동북아 금융허브로 만들겠다면서 일관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던 그는 마지막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밀어붙이다 청와대를 떠났다.

그 사이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졌다. 정상적인 사회였더라면 2000년 삼성 자동차가 천문학적 손실을 내고 파산했을 때, 대우의 김우중 회장처럼 몰락했어야 할 삼성의 이건희는 최고의 부자가 되고 대다수 국민들은 88만 원 짜리 인생으로 전락해갔다. 그 자신이 책임 없다 말할 수 없는 이런 상황 앞에서 그가 한 일은 마치 점령군 앞에 투항한 장수처럼 이제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음을 아무런 저항 없이 인정한 것이었다.

기업 국가와 자유민주주의의 위기

하지만 우리 시대의 불행은 그 말처럼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더 심각한 불행은 아직도 우리가 저 말의 의미와 심각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노무현이 그랬듯이 우리 또한 새로운 권력에 속절없이 투항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국가 위에 당이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국가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기업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본질적으로 기업 국가이다. 그것은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기업의 국가인 것이다. 지금까지 이것이 은폐되어 왔던 까닭은 기업이 아직 충분히 자라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기업이 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국가의 후견 아래 있는 동안에는 기업이란 국가를 구성하는 하나의 구성요소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기업을 통한 생산이란 근대에 이르러 출현한 생산양식이다. 그런데 근대국가와 기업의 관계를 비유로 말해 근대국가가 달걀이라 한다면 기업은 노른자의 중심에 있는 배반과도 같다. 달걀 없이 배반이 없듯이, 근대 국가가 없었다면 근대적 기업도 없었을 것이다. 기업화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근대적 국가의 법질서와 군사력 그리고 화폐 제도와 교육 제도 등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기업은 근대국가 속에서 잉태되었으며, 근대 국가는 기업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해 형성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기업은 근대국가의 목적이었다. 기업을 위한 국가가 근대국가였던 것이다. 그런데 기업이 국가의 후견을 필요로 하는 단계에서는 근대국가는 기업을 위한 국가일 뿐 아직 기업에 의한 국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업이 자랄 대로 자라 마치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 국가의 테두리를 넘어가는 시대이다. 이 단계가 되면 기업이 국가의 후견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국가가 기업의 후견을 필요로 하게 된다. 후견이란 지배의 다른 표현이니, 이 단계가 되면 국가는 단순히 기업을 위한 국가가 아니라 기업에 의한 국가, 곧 기업이 지배하는 국가가 된다. 이것이 지금 우리 시대 국가와 기업의 관계이다. 기업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고 기업에 의해 국가가 작동될 때, 국가는 전면적으로 기업에 동화된 기업 국가가 된다. 다시 말해 국가 자체가 기업화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 '민영화'라는 것은 '기업화'의 다른 이름이다.

과거에 공기업부터 국립대학까지 국가의 관리 아래 있던 공공적 기관이 민영화되는 것은 국가 자체가 전반적으로 기업화되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왜 문제라는 말인가? 그것은 국가가 기업화되면 될수록 시민의 자유가 억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당이 국가 위에 있는 것처럼, 이제 자본주의 국가에는 기업이 국가 위에 군림한다. 그렇게 되면 공산당이 국가 기구를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독재를 한다면서 인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독재적으로 기업 국가는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게 된다.

왜냐하면 기업은 공산당 이상으로 독재적인 조직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국가의 한 구성요소에 지나지 않는 단계에서는 기업이 독재적이든 아니든 시민의 정치적 자유는 지켜질 수 있다. 그 단계에서 시민들은 기업을 통해서는 경제적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국가적 삶의 지평에서 보다 고차적인 정치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가 통째로 기업화되어 기업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면, 더는 시민들이 국가를 통해 정치적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국가 자체가 기업에 의해 도구화되고 노예화 되어버려 국가 자체가 더 이상 시민적 자유의 현실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시민들은 이전까지 누리고 있던 정치적 권리 역시 제한되거나 빼앗기게 되는데, 지금 한국 사회에서 노동조합 활동이 실질적으로 불법화되고 집회와 표현의 자유가 갈수록 더 심각하게 위축되는 것은 단순히 대통령 한 사람을 잘못 뽑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나라가 본질적으로 기업에 의해 지배되는 기업 국가의 단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기업 활동의 자유가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공속하는 것처럼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제 이런 고정관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기업 활동은 양립불가능한 모순대립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독재적인 조직이 기업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국가의 하부 단위일 때 기업의 독재는 기업 내부의 일로 묵인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업이 국가의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 지금 기업 독재를 타도하는 것은 우리가 힘들여 이루어 온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가장 절박한 과제이다.

삼성이 문제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 말했지만, 그렇다고 시장이 나라를 지배한다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한 말이다.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초창기 신자유주의 정책의 정력적 추진자였던 영국의 대처 수상은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에 반대해 '사회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이 옳다면 동일한 전제로부터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시장도 없다.' 다만 개별 기업과 그 기업을 지배하는 자본가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시장이 지배한다거나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언제나 누군가가 지배한다. 그렇다면 지금 누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가? 삼성이 지배한다. 그리고 부당한 방법으로 삼성을 지배하고 있는 이건희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이다. 모든 권력의 정당성은 지배받는 민중들 자신이 그 권력을 정당한 절차를 통해 위임했을 경우에만 인정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삼성의 이건희에게 우리를 지배해달라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권력을 위임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날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우리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이런 상황을 방치한다면, 이제 그의 자식이 대를 이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삼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정치가 대답하라!

정치가 다른 무엇보다 시민적 자유와 권리 그리고 평등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이라면, 삼성과 싸우는 것은 바로 지금 가장 절박한 정치적 과제이다. 단순히 무상 급식이나 무상 의료 같은 복지의 확대를 말하는 것만으로는 지금 한국 사회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 수는 없다. 보다 근본적으로 기업에 의한 시민적 자유의 억압을 정면으로 문제 삼고 그 기업 독재의 정점에 있는 삼성과의 전면적인 싸움에 나서지 않는 한, 우리는 막힌 하수구를 뚫지 못하고 그 위에 소독약만 뿌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정치인들은 이 중요한 과제를 팽개친 채 모두 어디서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한나라당은 천안함 침몰을 계기로 늘 그랬듯이 북한과 싸우느라 여념이 없다. 마치 북한의 침략만 막아내면 자유민주주의가 지켜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하지만 지금까지 이 나라의 우익 세력이 북한을 핑계로 내부에서 독재적 권력을 추구해 온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일이니, 지금 그들이 기업 독재를 막아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런 한나라당의 독재와 싸운다는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이 삼성의 기업독재를 막아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면, 그것 역시 부질없는 희망이다. 그들이 김대중에 기대든 아니면 노무현에 기대고 있든지 간에, 그들은 이른바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군부독재국가를 기업독재국가로 순조롭게 이행시켜놓은 장본인들이다.

이런 사정은 민주노동당도 마찬가지이다. 투쟁하는 정당, 운동권 정당이라 각인되어 있지만 지금의 민주노동당은 외세와 싸우는 정당일 뿐, 삼성과 싸우겠다는 정당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신당의 정치인들이 삼성과 싸우겠다고 나서지도 않으니, 과연 우리는 지금 이 나라의 정치인들 가운데서 누구에게서 다음 시대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모든 시대는 인간에게 새로운 과제를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될 사람을 부른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정치인은 연예인 흉내를 내는 오렌지족도 아니고, 복잡한 정책을 말하면서 아는 척 하는 먹물도 아니며, 다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용기를 가진 싸움꾼이다.

그런데 김용철 변호사의 책에 얽힌 뉴스가 <뉴욕타임스>의 대문에 걸리고, <프레시안>에서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특집 기획이 한 달 이상 계속되도록 단 한 사람의 정치인도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하지 않고 있다. 그러고도 당신들이 대한민국의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 할 수 있는가? 우리가 당신들의 비겁한 침묵을 모르고 잊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진정으로 그대들이 이 땅의 책임있는 정치인들이라면, 이제 삼성을 어떻게 할 것인지 당신들이 대답하라. 삼성의 문제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이다.

(이 글은 지난달 28일 전남대학교 교수협의회가 마련한 담론의 장에서 발표된 발제문입니다.)

/김상봉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