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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era History

by Wood-Stock 2009. 12. 20.

 

역사적인 카메라 130선 ~「클래식 카메라」의 저자, 문두창

 

새로운 세기를 맞아 1839년 다게레오타입 사진술이 발표된 것을 시초로 하는 지난 세기 카메라의 발달사를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17C초 화가들은 핀홀 원리를 이용한 가장 단순한 형태의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la)를 애용했다. 19C초에는 윌리엄 탤벗(1800∼1877) 등의 인물들이 가장 단순한 카메라로 찍은 최초의 사진을 남겨놓았다. 다음으로 금속판을 사용한 다게레오타입 카메라가 상업적으로 발표되고 난 후, 종이대지를 사용한 프레드릭 스콧 아처(1813∼1857)의 칼로타입(Calotype) 처리법에는 콜로디온(Collodion) 유제를 사용한 습식과 건식 건판이 사용되었다. 그 후 리처드 리치 매독스(1816∼1902)의 젤라틴 건판 처리법(Gelatin dry-plate process)이 콜로디온을 구식으로 만들어버렸으며, 마침내는 1880년 조지 이스트먼의 롤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로 발달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왔다.

그러나 카메라의 진정한 발달은 롤필름의 개발과 함께 1889년 이스트먼의 "코닥" 카메라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00년 이스트먼의 사업적 예지로 어린이용 "브로니 카메라"가 발표되고, 손에 들고 찍어도 좋을 만큼 밝은 렌즈의 개발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면서 핸드 카메라 개발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카메라와 유제의 만남은 분명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두 개의 평행선이 역사의 한 시점에서 필연처럼 만난 것이다. 새로운 규격의 필름이 발표될 때마다 새로운 유형의 카메라가 천재적인 예지를 지닌 사람들에 의해 개발되어 주변사람들을 매료시켰다. 20C는 과연 카메라의 전성기라고 할 만하다. 그 만큼 능력 있는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카메라가 고안되어 여러 분야에 적용되어 왔다. 지금은 사양화되었지만 1860년대에서 20C 초반까지 스테레오 카메라는 요즘의 영화만큼이나 인기 있는 품목이었고 기호품이었다. 아직도 복고풍의 카메라 제작자들에 의해 제작되고 수집된다.

롤필름이 개발되고 난 후 스테레오 카메라는 더욱 융성하게 발달하였으며, 메커니즘은 일안반사식카메라보다 정교해지게 되었다. 단체사진이나 풍경에 매료된 사람들은 눈의 시야만큼이나 넓은 사진을 보고 싶어했다. 카메라 부피의 한계 때문에 카메라를 돌리거나 렌즈를 회전시켜야만 했다. 결국에는 눈의 시야만큼 넓은 광각렌즈 카메라를 개발했고, 물고기 눈의 화각에 착안한 어안렌즈로 구름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진이 대중화될수록 카메라는 소형화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1912년 이스트먼 코닥의 베스트 포켓 코닥(VPK)은 당시로서 4×6.5cm 화면으로 촬영하는 획기적인 소형 폴딩 카메라였다. 1925년 현대 카메라의 선조격인 독일의 천재적인 기계설계자 오스카 바르나크의 라이카를 에른스트 라이츠가 현실화시켜 주광장 전용 파트로네 타입의 35mm 필름으로 우리에게 「작은 네거티브, 큰 사진」을 선사했다. 에드윈 랜드 박사의 딸은 「왜 사진은 즉석에서 볼 수 없을까?」하고 의아해 했고, 몇 년 후 1948년 그는 세피아톤의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딸에게 선물했다.

사람들은 작은 필름으로도 선명한 사진을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크고 선명한 사진을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브로니필름은 여전히 인기가 있었다. 35mm 카메라의 소형화, 자동화와 더불어 중형포맷 카메라는 꾸준히 전문가와 고급 아마추어들에게 사용되었다. 그리고 일부 수중사진가와 우주인들은 자기들만의 고품질 카메라를 요구했다. 니콘과 핫셀블라드는 그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 마침내 1963년 니코노스 I와 1966년 핫셀블라드 SWC 우주용 카메라로 그들에게 응답했다.


오스카 바르나크의 컨셉트에서 나아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은 "하나의 필름으로 다양한 사진"을 요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사진 시스템(APS)의 카메라가 채택되고 전자의 발달로 하드한 영상보다 소프트한 영상을 선호하는 부류가 증가함에 따라 사진영상을 즉석에서 보고 압축, 전송할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과연 은염 유제사진은 디지털카메라의 발달로 그 종말을 고하는 것일까? 여기 그 카메라 역사의 진화과정을 보고 그 해답을 예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감히 지나온 발자취를 정리해 본다.

 

역사적인 카메라 130선

 

001 탤벗의 "쥐덧" 카메라(프랑스) 1835년

002 지로-다게레오 카메라(프랑스) 1839년

003 슈타인하일 다게레오타입 카메라(독일) 1839년

004 다게레오타입 "캐논(Cannon)"(독일) 1840년

005 루이스 다게레오타입 카메라(미국) 1851년

006 카르테 드 비지테(프랑스) 1854년

007 스코빌 스테레오(미국) 1861년

008 코닥(미국) 1888년

009 콤비(미국) 1893년

010 호크아이 카메라(미국) 1893년

011 사이클론(미국) 1898년

012 No.4 파노람 코닥 카메라(미국) 1899년

013 브로니 카메라(미국) 1900년

014 소호 리플렉스 트로피컬(영국) 1909년

015 싱클레어 우나 트로피컬(영국) 1910년

016 베스트 포켓 코닥(미국) 1912년

017 No.3 A 오토그라픽 코닥 스페셜(미국) 1916년

018 힐 카메라(영국) 1923년

019 에르마녹스(독일) 1923년

020 라이카 I(A형)(독일) 1925년

021 펄레트(일본) 1925년

022 롤라이플렉스(독일) 1932년

023 라이카 II(독일) 1932년

024 콘탁스 I(독일) 1932년

025 프로미넌트(독일) 1932년

026 수퍼 이콘타 A(530)(독일) 1934년

027 레티나 I(117)(독일) 1934년

028 로봇 I(독일) 1934년

029 콘타플렉스(860/24)(독일) 1935년

030 스포츠(소련) 1935년경

031 한사캐논(일본) 1936년

032 반탐 스페셜(미국) 1936년

033 키네 엑잭타 I(독일) 1936년

034 롤라이플렉스 오토매트(독일) 1937년

035 리가 미녹스(라트비아) 1938년

036 콤파스(영국) 1938년

037 수퍼 코닥 620(미국) 1938년

038 아르구스 C3(미국) 1939년

039 마미야식스 I(일본) 1940년

040 엑트라(미국) 1941년

041 핫셀블라드 항공카메라 HK7(스웨덴) 1941년

042 알파 리플렉스(I)(스위스) 1944년

043 머큐리 II(미국) 1945년

044 페이스메이커 스피드그라픽 (미국) 1947년

045 포톤(미국) 1948년

046 폴라로이드 랜드 95(미국) 1948년

047 캐논 IIB(일본) 1949년

048 콘탁스 S(독일) 1949년

049 콘탁스 IIa(독일) 1950년

050 라이카 IIIf(독일) 1950년

051 비테사(서독) 1950년

052 리코플렉스 III(일본) 1950년

053 코난16 오토매트(일본) 1950년

054 아르코35(일본) 1952년

055 라이카 M3(서독) 1954년

056 니콘 S2(일본) 1954년

057 아사히플렉스 IIB(일본) 1954년

058 미란다 T(일본) 1955년

059 올림푸스 와이드(일본) 1955년

060 니콘 어안 카메라(일본) 1955년

061 도류-2 (일본) 1956년

062 니콘 SP(일본) 1957년

063 마미야플렉스C 프로페셔널(일본) 1957년

064 주노(일본) 1958년

065 미놀타 SR-2(일본) 1958년

066 니콘 F(일본) 1959년

067 올림푸스 펜(일본) 1959년

068 젠자브로니카 D(일본) 1959년

069 베사매틱, 주마 렌즈(독일) 1959년

070 캐노네트(일본) 1961년

071 올림푸스 펜 F(일본) 1963년

072 톱콘 RE 수퍼(일본) 1963년

073 니코노스 I(일본) 1963년

074 니코렉스 줌35(일본) 1963년

075 아사히펜탁스 SP(일본) 1964년

076 캐논 펠릭스(일본) 1965년

077 젠자브로니카 S2n(일본) 1965년

078 캐논 7S(일본) 1965년

079 코니카 오토렉스(일본) 1965년

080 린호프 수퍼 테히니카 4×5(서독) 1966년

081 롤라이 35(서독) 1966년

082 라이카 M4(서독) 1967년

083 롤라이플렉스 SL66(서독) 1967년

084 아사히펜탁스 6×7(일본) 1969년

085 미녹스 C(서독) 1969년

086 마미야 RB67 프로페셔널(일본) 1970년

087 코니카 FTA(일본) 1970년

088 핫셀블라드 500C(스웨덴) 1970년

089 핫셀블라드 SWC(스웨덴) 1970년

090 캐논 F-1(일본) 1971년

091 아사히펜탁스 ES(일본) 1971년

092 올림푸스 M-1(일본) 1972년

093 콘탁스 RTS(일본) 1974년

094 미녹스 3 5EL(서독) 1975년

095 올림푸스 OM-2 (일본) 1975년

096 코니카 C3 5EF(일본) 1975년

097 캐논 AE-1(일본) 1976년

098 코니카 C3 5AF(일본) 1977년

099 미놀타 XD(일본) 1977년

100 캐논 A-1(일본) 1978년

101 올림푸스 XA(일본) 1978년

102 님슬로(미국) 1979년

103 아사히펜탁스 오토110(일본) 1979년

104 니콘 F3 (일본) 1980년

105 니콘 FA(일본) 1983년

106 올림푸스 OM-4(일본) 1983년

107 라이카 M6(독일) 1984년

108 펜탁스 645(일본) 1984년

109 니코노스 V(일본) 1984년

110 미놀타 α-7000(일본) 1985년

111 캐논 EOS 650(일본) 1987년

112 캐논 EOS-1(일본) 1989년

113 니코노스 RS(일본) 1992년

114 삼성 케녹스 FX-4(한국) 1994년

115 콘탁스 G1(일본) 1994년

116 니콘 F5(일본) 1996년

117 콘탁스 AX(일본) 1996년

118 알파 12 WA(스위스) 1997년

119 삼성 GX-1(한국) 1997년

120 라이카 R8(독일) 1997년

121 콘탁스 645AF(일본) 1998년

122 미놀타 벡티스 웨더매틱(일본) 1998년

123 핫셀블라드 엑스팬(스웨덴) 1999년

124 포익틀렌더 베사-L(독일) 1999년

125 알파 핀홀 카메라(스위스) 1999년

126 핫셀블라드 MKWE(스웨덴) 1999년

127 미놀타 다이낙스 9(일본) 1999년

128 마미야 645AF(일본) 2000년

129 니콘 D1 디지털(일본) 2000년

130 콘탁스 N1(일본)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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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카메라

http://sayyeah.net/study/links/history_of_camera/A1-Land/land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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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miriya/15601222


1998년부터 2011년 현재까지 나온 캐논, 니콘, 펜탁스, 소니-미놀타의 모든 DSLR들을 총정리해봤습니다. 올림푸스나 시그마, 파나소닉, 라이카 등은 잘 모르는 관계로 넣지 않았습니다. 캐논 20Da나 펜탁스 K10D Grandprix 등의 파생형 모델도 넣지 않았구요, 오로지 정식 발매된 제품만 넣었습니다. 


유의하실 점 : 제품 설명의 빨강/파랑으로 구분된 글씨는 해당 메이커의 이전 모델에 비해 나아진점/떨어지는 점을 정리한겁니다. 타사와의 비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품 사이즈는 대충 줄인거라 크기 비교 자료로 활용할 수 없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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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캠코더·하이브리드 디카 등 동영상 기기 대해부

 

자장이냐 짬뽕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이 치열하고 근원적인 고뇌. 그런데 가뜩이나 삶이 팍팍하고 고달픈 요즘, 디지털 가전에도 자장·짬뽕 같은 고민거리가 있다. 캠코더냐 디카냐? 그것이 문제로다!

 

요즘은 핸드폰과 디지털카메라로 다들 재미 삼아 동영상 한번쯤 찍어봤을 것이다. 동영상은 반드시 티브이, 컴퓨터와 같은 전자적 매체를 통해 봐야 한다는 약점이 있으나, 사진이 놓치는 움직임과 소리를 담을 수 있고 특유의 표현과 찍는 재미가 있다. 유튜브 같은 인터넷 동영상 매체가 유행하고 스마트폰-컴퓨터-티브이가 연결되는 ‘네트워크’와 ‘컨버전스’(융합)의 시대가 오면서, 일상생활에서 손수 제작 동영상의 재미를 좀더 쉽게 누릴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처음 등장한 디지털 캠코더는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은 소위 ‘풀 에이치디(HD)’(고화질)와 ‘테이프리스’(테이프 없는 녹화 방식)가 대세다. 여기에 얼굴 인식 등 디카의 최신 기술을 접목하여 초보자도 쉽게 촬영할 수 있다. 한편 디카는 동영상 촬영과 손떨림 방지 등 전통적인 캠코더 기술을 내장하여 캠코더를 위협하더니, 마침내 렌즈교환식 디에스엘아르(DSLR)로 캠코더 뺨치는 동영상 촬영이 가능한 시대가 왔다.

 

이렇게 용호상박의 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디지털 춘추전국의 난세에서,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고 싶은데 하나만 장만한다면 무엇이 좋을지 고민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가 나서서, 디지털 융합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충실히 고민하면서 기술의 최전선에 선 동영상 촬영 제품들을 소개해 드리겠다.

 

 

찍기만 하면 된다면

 

스마트폰 | 단지 기록만 하면 된다. 따로 챙길 필요가 없으니 편한데 화질도 의외로 괜찮다. 애플 ‘아이폰4’, 삼성전자 ‘갤럭시S’, 에이치티시(HTC) ‘디자이어HD’는 1280×720 해상도의 에이치디 동영상 촬영을 지원하고, 엘지전자의 ‘옵티머스2X’(왼쪽 사진)는 무려 1920×1080 풀 에이치디 촬영이 가능하다. 아이폰4는 아이무비라는 유료 편집 애플리케이션으로 폰 안에서 편집하고 자막을 입힐 수 있다. 디자이어HD와 옵티머스2X는 고화질 영상 입출력(HDMI) 단자로, 갤럭시S는 무선으로 티브이에 직접 연결하여 영상을 볼 수 있다. 다만 스마트폰은 손떨림 방지와 줌 렌즈가 없고, 얼굴 인식 기능이 드물다. 움직임이 심한 화면에서 위아래가 따로 노는 ‘젤로현상’도 심한 편이다.


포켓 캠코더 | 캠코더의 계보에서 뻗어나온 소형 하이브리드 제품군. 손안에 쏙 들어가는 휴대성이 강점이다. 산요 ‘작티(Xacti) VPC-CA100’은 5배 광학 줌 등 캠코더로서 완성도가 높고 방수 기능으로 물놀이도 찍을 수 있다. 소니 ‘MHS-TS20K’ 블로기 터치는 휴대폰만한 본체에 유에스비(USB) 단자와 전용 편집 프로그램을 내장한 세심함이 돋보인다. 둘 다 풀 에이치디와 얼굴 인식을 지원하며, 전자식 손떨림 방지를 채택했다. 렌즈 구경이 작아 야간촬영의 화질이 좋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스틸 사진도 어정쩡한 편이다. 가격은 30만~40만원대.

 

 

사진 위주, 때깔 좋은 동영상 원한다면

 

하이브리드 디카 | 최근 디카의 계보에서 혜성처럼 나타나 캠코더까지 위협하는 제품군. 디에스엘아르의 화질과 콤팩트 디카의 간편함을 접목했다. 풀 에이치디 동영상 품질 또한 우수하며, 디에스엘아르의 낮은 심도를 표현할 수 있다. 렌즈교환식으로 각각 독자적인 렌즈 마운트를 갖추고 있으나 아직 다양한 렌즈가 출시되지 않아 망원이 필요한 동물원, 공연 촬영에 약할 수 있다. 소니 ‘NEX-5’는 파노라마 촬영 등 개성적인 사진 기능을 갖추었으나, 동영상 촬영 때 사진 모드보다 화각이 좁아진다. 삼성전자의 ‘NX10’은 촬영 때 자동초점(AF) 소음이 큰 편이며 젤로현상도 비교적 심하다. 파나소닉의 ‘루믹스(LUMIX) DMC-GF2’는 마이크로 포서즈 마운트 채용으로 렌즈가 가장 다양하다. 전용 3디(D) 렌즈로 입체사진 촬영도 가능하다. 가격은 60만~80만원대.

 

디에스엘아르 | 최근 디에스엘아르의 에이치디 동영상은 화질이 워낙 빼어나 방송국 등에서도 활용된다. 선두주자인 캐논과 니콘은 드디어 보급기종인 ‘EOS 550D’(오른쪽 사진)와 ‘D3100’에도 이 기능을 탑재했다. 디에스엘아르 동영상의 남다른 특징은 낮은 심도. 한마디로 인물에만 초점이 맞고 배경은 흐릿한 감성적인 영상을 보여준다. 다만 초심자는 초점을 맞추기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자동초점 성능이 무척 중요한데, 소니의 ‘DSLT A 55’의 자동초점은 가장 빠르고 정확하다. 손떨림 방지 기능도 본체에 내장되어 렌즈를 가릴 필요가 없다. 디에스엘아르는 촬영중 렌즈를 교환해야 하므로 빠른 대응이 힘들다는 것이 약점. 동영상 기록 포맷도 제품별로 복잡해 컴퓨터에서 재생·편집이 불편한 점도 있다. 가격은 70만~90만원대.

 

 

비디오의 세계에 본격 입문하려면

 

슈팅형 캠코더 | 앞뒤로 길쭉한 형태의 전통적인 가정용 캠코더. 최근 크기와 무게가 놀랄 만큼 줄었다. 저조도 성능도 꾸준히 향상되어 밤에도 잘 찍힌다. 붙박이 렌즈는 줌 배율이 대개 10배 이상 되므로 망원에 강하다. 모두 기계식 손떨림 방지를 채택하고 있는데, 소니 ‘HDR-CX550’의 들고 뛰어도 끄떡없는 손떨림 방지 기능은 압도적이다. 삼성전자 ‘HMX-S16’은 신기하게도 인터넷 방송에서 생중계가 된다. 이것으로 동네 바둑 대국을 생중계하든 돌잔치를 생중계하든 용도는 상상하기 나름이다. 캐논 ‘VIXIA HF-S21’은 톡톡 튀는 개성은 부족하나 기본기가 탄탄하다. 가격은 100만원대.

 

준전문가용 캠코더 | 다양한 고급 기종 중에서도 기발한 제품 둘을 소개한다. 앞서 디에스엘아르가 캠코더를 벤치마킹했다면, 반대로 소니 ‘NEX-VG10’은 디에스엘아르의 대형 촬상소자와 교환식 렌즈를 도입한 역발상. NEX 디카의 ‘E-마운트’ 렌즈를 사용한다. 생각보다 작고 가볍다. 그리고 정말 예쁘다. 아마도 웨딩비디오 시장에 돌풍이 일지 않을까? 굳이 흠을 잡자면 캠코더 특유의 전동 줌 버튼이 없어서 당황스럽다. 파나소닉 ‘HDC-TMT750’은 무려 3디 촬영이 가능하다. 기본 장착된 3디 컨버터를 떼어내면 일반적인 2디 촬영도 된다. 아직 3디 영상기술이 발전일로에 있기에 선뜻 추천하기는 힘들겠다. 가격은 200만원대.

 

일반적으로 디카의 동영상 기능은 아직 오디오 품질이 낮고 줌 소음과 녹화시간 제약 등의 한계가 있다. 오디오 문제는 외장 마이크를 달아 개선할 수 있으며, 추가 메모리와 배터리 한개쯤은 여벌로 구하는 것이 좋다. 동영상 전용의 싸고 가벼운 반유압식 삼각대가 필요할 수도 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찍은 동영상을 편집하면 더욱 의미있는 기록이 된다. 윈도 무비메이커나 매킨토시의 아이무비처럼 쉽고 가벼운 편집 프로그램으로도 충분히 멋진 가족영화를 만들 수 있다. 지난번 다루었던 아이패드, 갤럭시탭 등의 태블릿이 대중화되면, 언제든 쉽게 열어볼 수 있는 우리 집 전자앨범의 구실을 하게 될 거라 예상한다.

 

디지털 가전은 사치재가 아니라서 대체로 가격과 성능이 정직하게 비례한다. 내 주머니 사정과 용도에 맞는 적당한 물건을 골라 쓰는 것이 현명하다. 굳이 지름신에게 휘둘리지 않더라도, 이번 주말에는 잠자고 있는 디카를 꺼내 들고 사랑하는 이의 ‘움직이는’ 모습을 열심히 찍어 주자!

 

글 이응일 영화감독 (2011-02-17)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4638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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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히스토리아 (한겨레 Esc) ~ 조경국 <월간 포토넷> 기자

 

(1) Nikon F3 ~ 동갑내기 조강지처

 

만약 자식 같은 카메라들을 떠나보내야 한다면 남길 단 1대의 카메라는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니콘 F3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캐논 5D도 아니고, 요즘 한창 찍는 맛을 들인 소니 a350도 제외다. 그렇다고 중고장터에 매일 ‘매복’하며 힘들게 구했던 코니카 Hexar RF Limited(2001대만 생산)도 아니다. 가장 오랫동안 사용하며 정을 붙인 니콘 F3만 있으면 된다. 디지털카메라 시대에 몸값이 그야말로 ×값이 되었지만 어찌 조강지처를 내칠 수가 있으리오.

 

 

니콘 F3의 첫 모습은 1974년 공개됐다. 올해 필자의 나이 서른여섯, 동갑내기다. 이전 모델인 F2AS를 기본으로 프로토타입(시제품)이 만들어졌다. 1977년 두번째 프로토타입이 발표된 이후 양산 모델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이다. 가장 기본형인 F3부터 F3hp, F3/T, F3p, F3AF, F3Limit 등 2000년 10월 생산이 중지되기까지 모두 여섯가지 양산 모델이 나왔다.

 

나의 조강지처 F3는 시리얼 번호가 ‘14’로 시작하는 1982년 생산품이니 거의 초기 모델인 셈이다. 2000년 8월 니콘에서 “4000대의 F3만 주문받고 더는 만들지 않겠다”고 공식적인 발표가 있었을 당시 주문량이 폭주했었다고 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기 F3의 단종을 슬퍼하는 팬들이 그만큼 많았던 모양이다.

 

니콘 F3의 디자인은 자동차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를 디자인한 살아있는 전설 조르제토 주자로(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또다른 그의 작품인 영화 <백투더퓨처>에 나오는 들로리안 DMC 12는 (물론 구할 수 없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자동차다. 그는 현대자동차의 ‘포니’ ‘스텔라’, 대우자동차의 ‘빅매그너스’ ‘렉스턴’ 등 국내 자동차 디자인을 맡기도 했고 지금까지 100대가 넘는 자동차 디자인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자동차부터 카메라, 시계, 심지어 파스타까지 넘나드는 주자로의 디자인 세계의 가장 큰 매력은 오랫동안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탄탄한 검은색 몸체에 살짝 유선형으로 돌출한 그립, 그립과 몸체 사이에 가늘지만 강렬한 붉은 줄 하나가 그어져 있는 니콘 F3의 세련된 디자인.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보아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후 주자로의 검은색 몸체에 붉은색 포인트를 준 디자인은 니콘 카메라의 이미지로 자리잡는다. 요즘 나오는 니콘 디에스엘아르 카메라들도 모두 그립 부분에 붉은색 포인트가 있으니 한번 확인해 보시길.

 

니콘 F3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캐논 F-1, 펜탁스 LX 등 경쟁사들의 ‘명기’들이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결국 모두 상대가 되지 못했다. 1990년대 이후 AF 카메라가 시장에 자리잡기 전까지 이렇게 경쟁사를 따돌리고 니콘 F3가 독보적인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디자인을 맡았던 주자로의 힘이 컸다. 특히 1982년 콘탁스가 포르셰 디자인 그룹과 함께 선보였던 콘탁스 RTS II도 치솟는 니콘 F3의 인기를 꺾지 못했다. 독일 디자인에 맞선 이탈리아 디자인의 승리인 셈이다. F3는 기술과 디자인이 제대로 결합할 경우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기술을 바탕으로 모양새까지 갖추면 쉽게 넘볼 수 없는 아우라가 자연스럽게 생기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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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Olympus PEN ~ “작고 가볍게, 언제 어디서나” 펜의 부활

 

“또로록 또로록~ 찍~” 올림푸스 펜(PEN) EE-3에 필름을 감고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이랬다. 몇 년 전부터 온라인 장터에서 다시 인기를 끌기 시작한 펜의 전성시대는 1980년대 중반까지였다. 사진관에서 카메라를 한 번이라도 빌려 써본 경험이 있다면 펜을 기억할 것이다.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앞두고 카메라를 빌리러 갈 때마다 사진관 아저씨는 필름 포장지 안쪽에 그려져 있던 그림을 보여주며 날씨와 조리개, 셔터 속도의 심오한(?) 상관관계를 설명해 주셨다. “제대로 사진이 나오려면 날씨, 조리개, 셔터 속도 삼박자를 딱딱 맞출 줄 알아야 한다”는 주인아저씨의 가르침은 내가 받았던 최초의 사진 교육이었다. 카메라가 귀했던 시절, 36장짜리 필름 한 롤 넣으면 72장이 찍히는 ‘마법’을 부렸던 하프 프레임(35㎜ 필름 1컷의 크기는 가로 36㎜×세로 24㎜, 하프 프레임은 이 크기를 반으로 나눠 가로 17.5㎜×세로 24㎜로 촬영할 수 있도록 만든 것) 카메라 펜은 사진관에서 대여용으로 많이 사용됐다.

 

작고 실용적인 펜 시리즈는 역사가 아주 오래됐다. 올해가 펜 출시 50돌. 1959년 10월 ‘올림푸스 펜’ 첫 모델이 나온 뒤 1981년 출시된 펜 EF가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올림푸스는 30년 넘는 기간에 17종의 펜 모델을 거의 매년 내놓았다. 가장 인기 있고 대중적인 모델인 펜 EE-3는 1973년부터 1986년까지 생산됐다. 지금까지 펜 시리즈의 누적 판매대수는 약 1700만대. 작고 단단한 몸체, 저렴한 가격, 하프 프레임을 적용해 사진을 곱빼기로 찍을 수 있었던 펜은 카메라 대중화의 선봉에 섰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펜 시리즈는 한 컷의 필름도 두 컷으로 나눠 아껴 쓰겠다는 일본인의 절약 정신과 축소지향을 진정으로 보여주는 카메라다.

 

렌즈를 교환할 수 있는 펜 F, FT, FV 세 가지 모델은 펜 시리즈 가운데서도 압권이다. 작고 단단한 몸체에 18가지 렌즈를 교환할 수 있도록 만든 펜 F 형제들의 강력한 포스는 다른 제조사의 ‘커다란’ 렌즈 교환식 카메라에 전혀 꿀리지 않았다. F 모델에 가장 잘 어울리는 E-주이코 38㎜ 팬케이크 렌즈는 지금도 일본 내 중고가격이 6만엔(한화 약 78만원) 안팎이다. 같은 펜이지만 펜 F 모델은 몸값부터 다르다. 온라인 장터에 가끔 매물로 나오는 펜 FT의 가격은 25만원 정도, 가장 많은 인기를 누렸던 펜 EE-3는 5만원 정도의 저렴한 값에 구할 수 있다. 2005년 삼청동 갤러리 온에 걸렸던 영국 사진가 믹 윌리엄슨(Mick Williamson)이 펜 EE-3로 작업한 사진은 감동 그 자체였다. 작은 액자에 들어 있던 그의 작은 작품들은 사진의 힘은 사진가의 가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올림푸스는 출시 50주년을 맞아 과거 속에 묻힌 펜 시리즈를 디지털카메라 펜 E-p1을 내놓으며 부활시켰다. 광고에서도 “작고 가볍게, 언제 어디서나 쉽게 촬영을 즐겨라!” 1959년 펜이 등장했던 당시 캐치프레이즈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뿐 아니라 모양새나 스타일도 펜 F 모델과 흡사하게 만들었다. 기술에선 다른 제조사들보다 항상 앞서갔지만 시장에선 열세를 면치 못했던 올림푸스가 디지털카메라 분야에서 펜의 영광을 다시 살리기 위해 준비한 히든카드다. 지난 14일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국내에 수입된 1000대가 5시간 만에 모두 팔려나갔다. 일본과 미국도 주문이 밀려들어 매장에서 펜 E-p1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부활한 펜의 출발 성적은 일단 합격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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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가 없는 국산 대형카메라 ‘JungWoo’

 

누리꾼이 뽑은 최고의 호러퀸은? ‘심은하’였다. 지난 7월 한 통신사의 인터넷티브이(IPTV) 채널에서 시청자 34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22표를 얻어 1위에 올랐다. 1994년 당시 문화방송(MBC) 납량드라마 〈M〉에서 마리 역을 맡아 열연한 덕분이다. 내가 꼽는 호러퀸(?) 심은하씨의 최고의 작품은 역시 한석규씨와 함께 출연했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작은 동네 사진관 스튜디오, 정원(한석규)의 카메라 앞에서 해맑게 웃는 다림(심은하)의 모습이 두고두고 기억나는 명장면 가운데 하나다.

 

이 글의 주인공은 심은하씨가 아니라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다림을 촬영했던 국산 대형카메라 ‘JungWoo M480-A1’(이하 ‘정우’)다. 1980년대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나오는 정우뿐 아니라 삼보, 남대문, 펜타 등 국산 대형 카메라들의 전성시대였다. 대형 카메라(4×5인치 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의 경우 몸체와 상관없이 렌즈를 교환해 사용할 수 있고 구조가 간단하기 때문에 국내 업체의 기술력으로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당시 국산 대형 카메라 대부분은 위스타나 도요 등 외국 업체 제품을 복제한 것이다. 하지만 비싼 외국 대형 카메라를 대체하기 위한 국내 업체들의 노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국산 대형 카메라는 ‘공룡이 멸종하듯’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정우’에 대해 인터넷에서 검색해 봐도 소용없다. 정확한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 전화를 돌린 곳을 헤아려보면 손가락·발가락을 동원해도 모자란다. 겨우 알아낸 것이 1980년대 초반 종로 4가에 있던 정우양행이란 곳에서 만들었고, 외국 제품에 비해 정밀도가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가격이 저렴해 소규모 사진관이나 스튜디오, 결혼식장에서 많이 사용했다는 정도였다. 정우양행이 카메라 사업을 접은 후 ○○의료기기로 이름을 바꿨다는 이야기를 듣고 물어물어 통화를 했지만 회사 대표를 맡고 계신 분은 “‘정우’라는 카메라 만든 적 없어요”라고 딱 잘라 말했다. 거기까지였다. 내가 ‘정우’에 대해 알아보려고 노력했던 것이.

 

1980년대 국내 업체에서 생산했던 대형 카메라들은 ‘실체’는 있으나 ‘역사’가 없다. 몇 대가 생산됐는지,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 주름상자의 재질과 레일의 길이는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모델명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대형 카메라만 생산하는 카메라업계의 역사이자 신화인 린호프가 1911년에 만든 홍보 팸플릿을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것과 비교한다면 30년도 되지 않은 국산 대형 카메라에 대한 기록은 왜 이렇게 부족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승자의 기록은 태양의 조명을 받아 역사로 남고, 패자의 기록은 달빛에 바래져 신화가 된다”는 소설가 이병주 선생의 명언은 사소한 기록조차 찾아보기 힘든 국산 카메라 앞에선 소용없는 말이다. 단지 만들어서 팔기에만 바빴을 뿐 카메라에 대한 기록을 남길 생각은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국카메라박물관 김종세 관장은 “1980년대 국내에서 생산했던 대형 카메라는 사용설명서나 홍보물조차 찾기 힘들어 정확한 자료 수집이 힘들다”며 제대로 된 기록이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기록이 전무해도 만약 당시 대형 카메라를 생산했던 업체 가운데 하나라도 살아남아 있다면 아픈 마음이 덜할 것이다. 무엇이든 기록으로 남기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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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 맘대로 찍히는데 자꾸 빠져드네 로모 LC-A

 

매우 선명한 사진이 찍히는 것도 아니고, 몸체가 튼튼한 것도 아니고, 디자인이 예쁜 것도 아니고, 이런 불만을 깡그리 날려버릴 만큼 가격이 싼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왜 로모카메라에 열광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로모그래퍼인 후배에게 꺼낸 적이 있다. “그 장난감 같은 거 머한다 쓰노?” 단도직입 물었다. “뭔가 삐딱하잖아. 지 맘대로 찍히는 것이.” 후배의 대답대로 셔터를 누르는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로모는 자신만의 사진을 만들어낸다. 사진 가장자리에 어두운 터널 효과가 생기고 원색은 도드라지게 진한 로모만의 독특한 사진은 전세계에 로모 추종자를 만들었다. 이들을 로모그래퍼라 부른다.

 

‘로모’(LOMO)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레닌그라드 광학기기 조합(‘Leningrad Optic-Mechanic Union’의 러시아식 표기 약자, 이하 로모사)을 말한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영향력을 행사했던 동독의 광학기술을 도입했다. 독일 남부 예나에 위치한 카를 차이스사의 오랜 세월 축적된 기술력을 가져와, 소련 시절 군사·우주 개발에 쓰이는 광학 제품을 개발했다. 로모사는 소련 광학 산업의 핵심 역할을 맡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로모그래퍼들에게 로모는 ‘로모 LC-A’ 카메라를 말한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로모 LC-A는 단종되고 최근에는 약간의 기능이 업그레이드된 로모 LC-A+가 팔리고 있다. 로모사에서 만드는 카메라들은 많지만 로모그래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모델은 로모 LC-A다.

 

로모사는 라디오노프 박사가 스파이용 카메라를 제작하기 위해 개발한 32㎜ 화각과 조리개 값이 f2.8인 ‘Minitar 1’ 렌즈를 이용해서 손바닥 안에 숨겨질 정도로 작은 크기(107×68×43.5㎜)를 가진 로모 LC-A를 생산했다. 그 시기는 1984년부터다. 올해가 로모 LC-A 탄생 25주년인 셈이다. 우리나라에 로모 LC-A가 알려진 것은 얼마나 될까. 원로(?) 로모그래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1999년 언저리에 외국 유학생들이 소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80년대 후반 옛소련 정세가 악화될 무렵 로모 LC-A는 자취를 감췄다가 소련이 붕괴되던 1991년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 작고 볼품없는 카메라가 철의 장막이 걷힌 것과 함께 부활한 것이다. 처음엔 소련과 주변 공산국가에서만 팔리던 내수용 카메라였지만 지금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됐다. 옛소련 시대 생산된 로모 LC-A의 개수는 약 45만대로 알려졌다. 현재 로모사에선 1년에 2만대 이상 로모 LC-A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한 명의 노동자가 450여개의 부품을 조여 하루에 한 대의 로모 LC-A를 만든다고 한다.

 

동영상 기능까지 탑재하고 캠코더의 영역까지 넘보는, 가공할 화질을 자랑하는 디지털카메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시장에 나온다. 그런 최첨단 디지털카메라 대신 초점도 조리개도 셔터 속도도 맞출 필요가 없는 초간단 완전무식 아날로그 필름 ‘똑딱이’ 로모 LC-A가 젊은 세대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로모 카메라가 단순한 기록의 도구가 아닌 ‘일상의 감정을 담아내는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공감대를 얻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로모그래피 코리아(lomography.co.kr)에 소개된 ‘사진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형식적이고 복잡한 지식을 해체할 지침’ 10가지 가운데 하나를 소개한다. “로모그래피는 인생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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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메이드인코리아 첫 독자모델 코비카

 

“기자를 사칭, 카메라를 빌려 달아난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20일 상오 10시 30분쯤 서울 중구 신당동 436 배명고등학교 앞 칠성문구사에 신문기자를 사칭한 35세가량의 청년이 가짜 신문기자 신분증을 내보인 후 코비카 카메라 1대(시가 4만원)를 빌려간 후 그대로 달아났다.”

 

<경향신문> 1979년 2월21일치 기사다. 당시 ‘기자 사칭’은 의외로 잘 통했다. 이 사기꾼은 이틀 동안 모두 5대의 카메라를 빌려 달아났다. 기자 신분증만 보고도 선뜻 카메라를 빌려줬던 것을 보면 당시에는 신문기자라는 직업이 꽤 믿음을 주는 직업이었던 모양이다.

옛날 신문에 나왔던 이 기사를 읽으면서 눈에 박혔던 것은 사기꾼의 기발한(?) 행태보다, ‘코비카’라는 카메라 이름이었다. 코비카는 국내 최초의 광학기기 회사였던 대한광학이 생산했던 카메라다. 대한광학이 구로공단에 문을 연 것은 1967년, 초대 전경련 회장을 맡았던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의 뒤를 이어 2~3대 회장을 맡았던 이정림(당시 대한양회 회장)씨가 박정희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회사를 세웠다. 그 당시 박 대통령은 일본의 광학산업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보고 정부가 투자만 하면 국내 기업도 승산이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광학산업의 기반을 닦았던 일본을 따라가기엔 무리였다.

 

광학산업에 대한 기초가 전혀 없었던 터라 대한광학은 일본 마미야와 손을 잡았다. 회사 설립 초반에는 카메라를 개발할 여력이 없어 쌍안경을 생산했다. 대한광학이 개발한 쌍안경은 상당한 인기를 끌어 40여개국에 수출해 세계 시장의 25%까지 점유했던 효자 상품이었다. 쌍안경, 현미경 부품들을 팔아 자금을 축적한 대한광학은 마미야의 기술력과 부품을 가져와 카메라를 만들어냈다. 비록 일본 기업의 손을 빌려 제품을 만들었지만 베릭스(VERIX)라는 자체 브랜드로 시장을 공략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국내 최초의 렌즈 교환식 카메라인 베릭스 HQ 등을 생산했다. 베릭스 HQ는 마미야 528 모델과 외관이나 기능이 거의 같다.

 

1976년 드디어 코비카(KOBICA)라는 독자 모델을 만들어낸다. 첫 제품이 코비카 35BC. 독자 모델이라고는 했지만 일본, 독일, 캐나다와 기술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비록 기술을 빌려오긴 했지만, 렌즈(독일 카를차이스 테사)와 셔터 박스(일본 코팔)를 제외한 나머지 부품은 대부분 국산화한 의미 있는 카메라다. “대한광학이 계속 카메라를 만들어냈더라면 국산 카메라도 세계 시장에서 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한광학이 부도나서 더 이상 코비카를 만들던 기술이 이어지지 못했으니 참 아쉬운 일이죠.” 청계천과 충무로에서 30여년 동안 카메라 개조와 수리를 해온 김카메라 김병수 대표의 기억이다. 코비카는 1980년대 중반 대한광학의 부도로 아쉽게도 생명이 끊겼다. 5만원 안팎의 값에 가끔씩 중고 시장에 나오는 코비카 35BC는 30년 세월이 무색하게 제대로 작동할 뿐 아니라 예상외로 선명한 사진을 찍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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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지각한 풀 프레임 디지털, 라이카 M9

 

라이카가 150만 화소 성능을 가진 디지룩스 줌(Digilux Zoom) 디지털카메라를 선보인 것이 1999년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라이카도 이제는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 회사가 아니다. 최근 출시된 풀 프레임(24×36㎜) 고체촬상소자(CCD)를 장착한 디지털 레인지파인더 카메라 M9는 라이카의 역사에 획을 긋는 카메라다.

 

레인지파인더 카메라인 라이카 M 시리즈는 M7까지 아날로그 필름 사용을 고집했을 뿐 아니라 디자인 변화나 기능 업그레이드도 최소화했다. M 시리즈에 내장 노출계가 달리거나, 최고 셔터 속도가 빨라지거나, A모드(조리개 우선 모드)를 지원하는 것만으로도 사진가들에겐 뉴스가 됐다. 다른 카메라들이 시대를 앞서갔어도 라이카만은 두어 걸음 뒤처진 행보를 걸어왔다.

 

라이카가 필름 카메라만 고집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출시된 라이카 대부분의 디지털카메라는 파나소닉과 손잡고 만든 것이다. 렌즈를 포함한 광학부는 라이카가 맡고, 나머지 디지털 처리 기술은 파나소닉이 개발했다. 라이카와 파나소닉은 성능은 같고 디자인만 약간 다른 제품들을 동시에 출시했다. 라이카의 디지룩스, 파나소닉의 루믹스 시리즈. 성능은 같지만 가격은 ‘라이카’(Leica) 딱지가 붙은 라이카 제품이 파나소닉 루믹스에 비해 훨씬 비쌌다.

 

소비자들은 돈이 더 들어도 파나소닉의 ‘전자제품’이 아닌 라이카의 ‘카메라’를 선택하기를 원했다. 1925년 라이카가 생산된 이래 카메라 종주 구실을 해왔던 라이카는 언제나 사진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니, ‘성능에 비해 가격이 월등히 높은’ 디지룩스의 인기를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아마추어 사진가를 위한 디지룩스 시리즈가 나온 지는 10년이 지났지만 라이카 카메라의 정수라 할 M 시리즈가 디지털카메라로 변신한 것은 M8을 출시한 2006년, 오래된 일이 아니다. 당시 풀 프레임이 아닌 1.3배(27×18㎜) 코닥 크롭 시시디를 장착하고 등장했을 때의 아쉬움은 컸다. 이미 1년 전 엡손이 포이크틀렌더 레인지파인더 카메라 바디를 빌려와 라이카 M 마운트 호환 렌즈를 사용할 수 있는 600만 화소급 디지털카메라인 R-D1을 출시했기 때문에 사진가들은 기능이 업그레이드된 라이카 M8을 원했다.

 

사진가들이 기대했던 것이 35㎜ 필름 사이즈와 같은 풀 프레임 시시디를 사용한 카메라였다. 스미룩스, 스미크론, 엘마, 스마론 등 라이카에서 생산한 수많은 렌즈들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선 풀 프레임 디지털카메라가 필수다. 크롭 시시디를 사용할 경우 렌즈의 화각도 좁아질뿐더러 완벽한 성능을 끌어낼 수 없다. 광각렌즈의 활용도가 큰 라이카 M에서 1030만 화소의 1.3배 코닥 크롭 시시디는 어중간한 선택이었다. 캐논은 2003년에 풀 프레임 일안렌즈반사식 디카(DSLR) 1DS를 내놓았다. 좀더 과감하게 M8부터 풀 프레임 시시디를 장착했더라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을 것이다. M8은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에서 완전한 풀 프레임 디지털카메라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기를 맡은 셈이다.

 

M9야말로 라이카 M 시리즈의 역사를 새로 쓸 소임을 맡은 것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만 해도 사진가들은 13×18㎝ 대형 건판 필름에다 삼각대, 빛을 차단해 주는 암막까지 많은 짐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라이츠의 기술자 오스카어 바르나크는 사진가를 위해 카메라를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18×24㎜ 영화용 필름 포맷을 두 배로 늘린 24×36㎜ 필름을 사용할 수 있는 소형 라이카 카메라를 최초로 개발한다. 바르나크가 사진가를 위해 만들어 냈던 ‘풀 프레임’ 사이즈를 라이카는 M9를 통해 뒤늦게야 되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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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중고 필카 시장의 ‘급등주’ 후지 TX-1

 

중고 카메라 시세도 오르락내리락할까? 당연히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값이 변한다. 중고 카메라는 세월이 흐를수록 하향 곡선을 그린다. 특히 디지털카메라는 시장에 나오자마자 값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단종된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걷잡을 수가 없다. 인기 없는 모델의 중고값은 폭락 수준이다.

 

내가 쓰고 있는 디에스엘아르(DSLR) ‘캐논 5D’의 경우 2005년 출시 당시 값이 400만원에 육박했지만, 현재는 220만원 정도면 새 제품을 살 수 있다. 지난해 9월 후속 기종인 ‘5D mark2’가 나오면서 값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깨끗한 중고도 160만원 내외면 살 수 있다. 딱 4년 만에 반값이 된 것이다. 그나마 ‘5D’는 꽤 인기가 있는 기종이라 꽤 오랫동안 지금의 중고값이 유지되고 있다.

 

필름카메라도 마찬가지, 디지털카메라가 필름카메라 시장을 대체하면서 값어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예를 들면 10여년 전에 70만원 가까이 주고 샀던 ‘니콘 F3’은 현재 20만원대로 폭락했다. 88 서울올림픽이 끝난 직후 ‘니콘 F4’에 대항하기 위해 캐논이 내놓았던 최고급 플래그십 모델 ‘EOS 1hs’를 단돈(?) 20만원에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디지털카메라가 대세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중고 필름카메라 시장에서도 애지중지 보물 대접을 받는 카메라들이 있다. 사용자층이 두껍고 명기라고 이름값을 하는 카메라들은 값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중형 카메라의 ‘좌장’이라 할 수 있는 핫셀블라드는 거의 가격 변동이 없는 편이다. 라이카도 예전만 못하긴 하지만 오늘 100만원을 주고 1년쯤 열심히 쓰다 중고 장터에 내놓아도 크게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요즘 중고 장터에서 상한가를 치고 있는 카메라가 있다.

 

 

후지필름에서 만든 135㎜ 필름을 사용하는 레인지파인더 카메라인 ‘TX-1’이 바로 주인공이다. ‘TX-1’은 일반 사진뿐 아니라 파노라마사진도 촬영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다. 1999년 출시됐던 ‘TX-1’의 당시 신제품 가격은 45㎜ 렌즈를 포함해 20만5000엔, 지금 환율로 따진다면 약 250만원 정도 하는 비싼 카메라였다. 그런데 이 ‘TX-1’도 쏟아져 나오는 디지털카메라의 위세에 눌려 2003년에만 해도 120만원에 깨끗한 제품을 살 수 있었다.

 

 

 

당시 파노라마로 촬영할 수 있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거금을 들여 손에 넣었다. 그런데 ‘TX-1’을 쓰면 쓸수록 사용자가 많지 않아 알려지지 않았을 뿐 만듦새, 렌즈 성능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저평가주’ 카메라라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색깔만 다를 뿐 똑같은 디자인과 성능에 핫셀블라드라는 이름값 하느라 가격만 훨씬 비쌌던 ‘X-PAN’과 비교하자면, 더더욱 ‘TX-1’은 가격 대비 성능을 따져 보건대 흠잡을 데 없는 카메라였다. 핫셀블라드뿐 아니라 대형 카메라를 만드는 호스만(Horseman)에서도 ‘TX-1’의 튼튼한 몸체를 기본으로 삼아 3디(D) 스테레오 카메라를 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현재 일본에서 한국에 있는 ‘TX-1’을 웃돈을 주고 되사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인 카메라가 됐다. 현재 중고 장터 시세는 보통 160만원이 넘는다. 내가 살 당시 별매 액세서리였던 나무 손잡이가 5만원 정도였는데, 그것마저 15만원에 나오는 것을 봤으니 ‘급등주’가 따로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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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영화·광고 단골 출연, 폴라로이드 명작 ‘SX-70’

 

1999년 영화 <러브레터>가 개봉됐을 때 주인공 후지이 이쓰키(나카야마 미호)가 눈 내리는 학교 운동장에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막샷’을 날리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후지이 이쓰키가 들고 있던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바로 SX-70. 당시만 해도 온라인 중고 장터나 동호회가 활성화되기 전이어서 구하기 힘든 카메라였다. <러브레터>에 나온 이후 이 카메라의 노출 빈도는 부쩍 올라갔다. <각설탕>에서 임수정씨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이나영씨가 SX-70을 들고 나왔다. 영화뿐 아니라 광고에서도 문근영, 김태희, 정려원씨의 소품으로 등장했다. 최근에는 국민 여동생으로 사랑받고 있는 김연아씨가 모기업 우유 광고에서 들고 나왔다. ‘SX-70’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이렇게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고, 이제 중고 장터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사용하기 위해선 상당한 ‘출혈’을 감내해야 한다. SX-70의 전용필름인 ‘타임제로’는 2007년 단종됐고, 다른 폴라로이드 필름도 2008년 2월부로 모두 생산이 중단됐다. 현재 SX-70을 사용하기 위해선 빛을 줄여주는 ND 필터를 끼우고 다른 카메라 전용(M790)으로 나온 T600 필름을 사용해야 한다. 단종 직전 타임제로 필름도 비쌌지만 T600 필름도 만만치 않다. 10장들이 1팩이 보통 4만원 정도에 팔리고 있다. 사진 1장에 4000원, 세상에 단 1장뿐인 사진이니 값어치를 따질 수야 없겠지만 <러브레터>의 후지이 이쓰키처럼 막 찍다간 가세가 기울 수도 있다.

 

 

SX-70은 72년부터 85년까지 생산됐다. SX-70의 매력은 트랜스포머도 울고 갈 변신 기술에 있다. SX-70은 사용하지 않을 경우 납작하게 접을 수 있다.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주는 군더더기 없는 SX-70의 디자인은 단종된 지 25년이 지났고, 필름조차 구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사진가들의 사랑을 받고, 영화와 광고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이유다. SX-70의 전성기 시절 앙드레 케르테스는 접으면 납작해지는 작은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반해 말년에 <프롬 마이 윈도>(from my window)라는 사진집을 내기도 했고, 위대한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도 SX-70을 즐겨 사용했다.

 

아직까지도 SX-70을 비롯해 그동안 출시된 폴라로이드 카메라들을 사용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많지만, 지난해 11월 20세기 사진과 광학 분야에서 수많은 히트상품을 내놓았던 폴라로이드사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즉석카메라 폴라로이드는 ‘사소한’ 이유에서 시작됐다. 43년 눈부심을 방지하는 편광필름 기술 개발자였던 에드윈 랜드가 크리스마스에 딸의 사진을 촬영하다 “왜 지금 사진을 볼 수 없어요?”라는 질문을 받고서 촬영 후 바로 사진을 확인할 수 있는 즉석카메라를 개발하기로 결심한다. 4살짜리 딸의 호기심이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의 결심은 47년 현실화된다. 폴라로이드사 최초의 즉석카메라 ‘모델95’와 전용필름인 ‘랜드40’을 동시에 발매했다. 당시 ‘모델95’의 가격은 89.95달러, ‘랜드40’은 1.75달러였다. 49년에는 500만달러어치를 팔아 ‘즉석카메라=폴라로이드’라는 공식을 확립시켰다.

 

폴라로이드사가 2006년 즉석카메라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까지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출시한 모델은 200가지가 넘는다. 그중에서도 SX-70은 이미 끝나버린 폴라로이드의 영광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는 카메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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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카메라 디자인을 전복한 카메라 캐논 CB10

 

“캬메라는 눈(眼)을 달마있다(닮았다).” 1960년 한국사진문화사에서 펴낸 <사진교본>에 나오는 글이다. <사진교본>의 내용을 좀더 옮겨보면 “렌즈=수정체, 주르개(조리개)=홍채, 샷터(셔터)=안검(눈꺼풀), 필림(필름)=망막”이라 적혀 있다. 50년 전에 나왔던 <사진교본>이나 지금 책이나 카메라의 기본 구조를 설명하는 부분은 비슷하다. 필름만 시시디(CCD)로 바뀌었다. 카메라의 구조는 1839년 프랑스인 자크 다게르가 다게레오타입 은판 사진술을 개발하고 카메라를 판매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다.

 

덕분에 카메라의 디자인도 오랜 세월 사각형 상자에 렌즈가 장착된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1861년 남북전쟁 당시 종군사진을 찍었던 매슈 브래디는 대형 카메라와 사진을 현상하는 암실을 마차에 싣고 다녔다. 그를 돕던 조수만 해도 19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모두 1925년 발명된 35㎜ 필름 카메라 덕이다. 작아졌다고 해서 투박한 디자인이 뚝딱 변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직사각형 몸체에 렌즈가 돌출된 형태다.

 

1982년 캐논은 디자이너 루이지 콜라니에게 미래형 카메라 디자인을 의뢰했다. 캐논은 콜라니에게 “어떤 구속도 받지 말고 자유롭게 미래형 카메라를 디자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형태의 마술사’로 불렸던 콜라니는 1928년 베를린에서 태어나 퀸스테 아카데미에서 조각을 배우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공기역학을 공부했다. 그 후 항공사 맥도널드 더글러스, 자동차 회사 피아트, 베엠베(BMW)와 함께 일하며 유선형을 적용한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가 디자인한 물건들은 모두가 에스에프(SF) 영화 소품처럼 상상 이상의 ‘포스’를 내뿜는다. “포크에서 우주선까지.” 콜라니는 살아 있는 유기체에서 영감을 얻어 ‘바이오 디자인’으로 형태를 극단화시킨 물건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만들었다.

 

그 가운데 캐논이 주문했던 ‘시비(CB)10’은 기존 카메라 형태를 ‘무시한’ 디자인이었다. CB10의 모양새는 이전의 카메라처럼 각진 장방형이 아니라도 충분히 카메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CB10은 상용화를 위한 카메라가 아니었다. 콜라니는 캐논을 위해 CB10을 시작으로 몇 가지 카메라를 더 디자인했다. 83년 티(T)99, T90을 위한 시제품, 84년 한 손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은 여성용 카메라(Lady Camera), 수중용 카메라 ‘프로그’(FROG)의 시제품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카메라들은 너무 ‘미래 지향적’이어서 공산품이라기보다 예술품에 가까웠다. 그는 90년대가 되어서야 겨우 상용화되기 시작한 디지털카메라를 이미 83년 상상력만으로 디자인했다.(당시 스케치를 확인하려면 콜라니의 누리집 www.colani.de를 클릭해보길)

 

콜라니와 캐논의 실험적인 시도는 결국 세계 최초로 인체공학 디자인을 적용시킨 에스엘아르(SLR)인 T90으로 결실을 보았다. 손가락이 닿는 부분에 굴곡을 넣어 밀착감을 높이고 셔터도 움푹하게 만들어서 훨씬 부드럽게 조작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T90은 기존에 여러 다이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카메라 상단에 파인더를 보지 않고도 바로 조리개값, 셔터속도, ISO 등을 확인할 수 있도록 큰 액정 디스플레이를 만들어 넣었다. T90은 콜라니의 디자인 덕분에 86년 생산이 시작되자마자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T90은 외형만 놓고 봐선 CB10을 절대 압도할 수 없다. 대량생산을 위한 T90과 디자인적 요소만을 고려한 CB10을 비교할 순 없겠지만 CB10의 파격적인 디자인을 T90과 더 접목했더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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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가족나들이 첫번째 카메라 미놀타 X700

 

사진의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이라면 언제나 카메라 업그레이드의 유혹에 빠지게 마련이다. 장비가 좋은 사진을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도 이 유혹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업그레이드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는 결국 ‘지름신’이 내리는 순간 폭발한다. 내가 구하는 카메라나 렌즈를 샀을 때의 뿌듯함을 무엇에 비하리오. 통장 잔고가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아내가 알아챌까 두려워도 당장은 행복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강력한 지름신의 후유증으로 자금 압박을 견디지 못해 카메라를 장터에 내놓을 때가 있다. 다행인 것은 카메라는 예나 지금이나 환금성이 있다는 것.

 

미놀타 X700,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던 첫 번째 카메라이자 가게에 팔았던 첫 번째 카메라다. 아버지 몰래 표준렌즈와 70-210㎜ 망원줌렌즈까지 포함된 X700을 팔아 받았던 돈은 고작 25만원. 그 돈을 받아 쥐고 가게 문을 열고 나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방에서 X700을 꺼내 놓자 사장님이 했던 말은 간단했다. “이거 너무 흔해서 값을 못 쳐주는데 웬만하면 가지고 있지.” 사장님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진열장 한쪽에 여러 대의 X700이 쌓여 있었다. 10년이 넘은 이야기다.

 

X700은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국내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에스엘아르 카메라다. 1978년 11월 삼성은 계열사 삼성정밀에 광학부를 신설하고 2개월 후인 79년 1월부터 미놀타에서 렌즈와 부속품을 공급받고 조립 라인을 가동했다. 한국 시장에 관심을 가졌던 미놀타는 삼성정밀과의 기술제휴를 통해 XD5, X300 등 카메라를 선보였다. 그리고 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X700 판매에 주력한다. 텔레비전 광고까지 하며 ‘신제품’ 홍보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X700은 이미 81년 개발되어 해외시장에 나왔던 구모델. 생산된 지 7년이나 지난 X700을 삼성이 가져와 판매를 시작한 것이다.

 

X700의 가장 큰 장점은 초점만 신경 쓰면 노출은 알아서 맞춰주는 P(프로그램) 모드가 있다는 것. 프로그램 노출 모드는 X700이 세계 최초였다. 지금은 P 모드 없는 카메라가 없지만 당시로선 미놀타만의 앞선 기술이었다. 에스엘아르 카메라의 M 모드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라도 P 모드를 사용하면 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캐논 AE-1, 펜탁스 MX, 니콘 FM2 등 다른 브랜드의 경쟁 기종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고 기능 면에서 전혀 뒤지지 않았다. 덕분에 사진을 처음 배우는 아마추어, 가족을 촬영하기 위해 저렴하고 부담 없는 카메라를 구입하고 싶었던 아빠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X700도 단점은 있었다. 가격을 낮추기 위해 플라스틱 몸체에 직물로 만들어진 수평 이동식 셔터를 넣는 바람에 내구성이 떨어졌다. 특히 셔터 늘어짐은 고질적인 문제였다. 사진의 일부가 까맣게 나오는 현상은 오래된 X700에서 자주 일어났다. 처음에는 약간만 까맣게 나오다가 쓸수록 검은 부분이 늘어났다. 그 때문에 훨씬 전에 나왔던 XD5 기종보다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단점을 삼성의 애프터서비스로 보완했다. 고장이 나더라도 집 가까이 있는 에이에스(AS) 센터에 맡길 수 있다는 점은 상당한 매력이었다. 값비싼 귀중품이 아닌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가전제품’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우리나라에서 에스엘아르의 대중화를 이끈 카메라가 바로 X70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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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아폴로 11호와 달을 밟은 하셀블라드

 

3억5000만원짜리 우주여행 상품과 2억원 상당의 백화점 상품권 중 택하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우주여행’이다. 하지만 지난 12일 한 백화점이 내건 ‘우주여행’ 경품 행사에서 100만여명의 응모자 가운데 뽑힌 행운의 당첨자는 백화점 상품권을 택했다. 당첨자는 사전 적응 훈련을 받아야 하는 등 이래저래 까다로운 우주여행보다는 백화점 상품권이라는 실리를 택한 셈이다. 나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 텐데! 우주선을 타고 112㎞ 상공에서 푸른 지구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우주선에서 지구를 찍을 수 있다,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소련은 우주를 탐험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1957년 10월4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우주경쟁을 시작했다.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에 충격을 받은 미국은 항공우주국(NASA)을 창설하고 달 탐사를 위한 아폴로 계획을 세운다. 1969년 7월20일 드디어 아폴로 11호에 탑승했던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에 첫발을 내디딘 인류가 됐다. 그들이 달로 가져간 카메라는 바로 하셀블라드 EDC(Electric Data Camera)였다.

 

1841년 스웨덴의 항구도시 예테보리에서 문을 연 하셀블라드는 무역회사였다. 독특한 인연으로 카메라 판매회사가 되었다. 회사 창립자의 아들이었던 아르비드 빅토르 하셀블라드는 자신의 신혼여행지인 영국에서 조지 이스트먼(코닥 설립자)을 만났다. 그 인연으로 그는 1888년부터 코닥의 상품들을 자신의 회사를 통해 유통시켰다. 하셀블라드가 카메라 제조회사로 거듭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항공용 카메라를 장착한 독일 전투기가 스웨덴에 항복하면서부터다. 스웨덴 군은 이 독일 전투기에 실려 있던 항공용 카메라 사용법을 아르비드 빅토르 하셀블라드의 손자, 빅토르(할아버지와 이름이 같다)에게 알려달라는 주문했다. 동시에 같은 카메라 제작을 의뢰했다. 빅토르는 1941부터 1945년까지 342대의 항공용 카메라 HK7을 스웨덴 군에 납품했다. 항공용 카메라뿐 아니라 시계도 생산했다. 그는 시계 제작은 품질 좋은 휴대용 카메라를 생산하기 위한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종전 후 1948년 10월6일 드디어 하셀블라드는 최초의 일반용 카메라 1600F를 내놓았다.

 

하셀블라드의 카메라가 미 항공우주국의 우주탐험 계획에 동참하게 된 것은 1960년 우주비행사 월터 시라가 휴스턴의 카메라 가게에서 하셀블라드 500C를 구입하면서부터다. 시라는 500C를 우주로 가져가기 위해 몸체의 가죽을 벗기고 반사를 줄이기 위해 검은색으로 칠했다. 1962년 머큐리에 탑승한 시라는 500C로 사진을 찍어서 돌아왔다. 그런데 이 500C가 사실은 우주선의 정식 탑재 목록에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그가 지구 밖에서 찍은 사진들은 훌륭했고 이후 우주탐험 계획에 하셀블라드가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월터의 500C를 시작으로 SWC(1966년, 제미니 9호), EC 500EL(1968년, 보이저 10호), EDC(1969년, 아폴로 11호), 500EL/M(1975년, 소유스호), 1990년대 우주왕복선에 실렸던 ELS, 그리고 가장 진보된 203S 모델까지 하셀블라드는 미 항공우주국의 우주개발 계획에 참여했다. 그 가운데 아폴로 11호에 실렸던 12대의 EDC는 귀환 셔틀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필름만 회수되고 달 표면에 그대로 남겨졌다.

 

만약 내가 달 여행 백화점 경품에 당첨된다면 암스트롱이 두고 온 그 EDC부터 찾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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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최초의 디카 3.8㎏ 초우량 ‘베이비’

 

요즘 보급형 디지털 콤팩트 카메라(일명 똑딱이)도 1000만 화소 이상 지원한다. 디에스엘아르 카메라(렌즈 교환이 되는 디지털카메라)는 2000만 화소를 넘었다.

 

‘화소’는 디지털카메라의 CCD(또는 CMOS: 이미지센서)에서 색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점을 말한다. 이 점들이 모여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화소가 많을수록 그만큼 색을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 하지만 화소수가 클수록 이미지 파일의 크기도 커진다. 지난해 10월 출시된 니콘 D3X가 지원하는 화소수는 2450만 화소. 압축하지 않은 데이터파일(RAW 파일)로 촬영할 경우 이미지 파일 1장의 크기가 무려 50MB. 흔히 사용하는 4GB 메모리카드를 넣어봐야 약 80장 정도만 촬영할 수 있다. 이 파일을 후보정하려면 컴퓨터도 최신형이어야 ‘버벅’대지 않는다. 결론은 화소수가 클수록 돈도 ‘무지’하게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4×6인치 사진을 인화하는 데 필요한 화소수는 200만 화소면 충분하다. 하지만 기술은 소비자의 필요가 아니라 시장의 법칙에 따라 개발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디지털카메라 화소수는 얼마나 될까. 1976년 코닥에서 근무하던 젊은 엔지니어 스티븐 새슨이 개발한 ‘프로토타이프 올 일렉트로닉 스틸 카메라’의 화소수는 고작 1만 화소였다. 이 카메라는 여러 회사의 부품으로 몸체를 만들고 렌즈는 당시 코닥에서 생산하고 있던 슈퍼 8㎜ 무비카메라용 중고 렌즈를 사용했다. 이 렌즈에는 아날로그 이미지를 디지털화해주는 회로기판이 6개나 붙어 있었다. 니켈 카드뮴 전지는 16개 달려 있었다.

 

가장 중요한 부품은 역시 열 받으면(?) 작동이 멈춰버리는 1만 화소짜리 CCD다. 하지만 이미지를 디지털 파일로 바꾼들 저장할 곳이 없으면 무용지물. 일렉트로닉 스틸 카메라의 저장장치는 카세트테이프였다. 이것저것 부품을 모두 합쳐 3.8㎏의 육중한(?) 무게를 가진 ‘일렉트로닉 스틸 카메라’에 저장된 이미지를 보려면 또다른 장치가 필요했다. 요즘처럼 엘시디(LCD)에 바로 촬영된 이미지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티브이 화면으로 이미지를 변환하는 장치가 필요했다. 1장의 이미지를 저장하는 데 23초의 시간이 필요했고, 다시 읽는 데도 그만큼 시간이 필요했다. 휴대용이라고 하기엔 무겁고, 다루기도 힘들었던 이 카메라를 스티븐 새슨과 동료들은 ‘베이비’라고 불렀다.

 

 

한 젊은 엔지니어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디지털카메라는 필름의 전성시대를 한껏 누리고 있던 코닥의 입장에선 시장성이 없어 보였다. 완성품을 만들려면 투자도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회사 경영진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국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베이비’는 사내 시연회에서만 반짝 소개된 뒤 잊혀졌다.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26년이 지난 2001년이었다. 그사이 캐논, 니콘, 소니 등 일본 카메라회사들은 디지털카메라 완제품 시장에서 완벽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코닥은 원천기술을 보유한 것만으로 자족할 수밖에 없었다. “연필처럼 쓰기 편한 카메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코닥의 창립자 조지 이스트먼(1854~1932)이 당시 살아 있었다면 분명 ‘베이비’를 알아봤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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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고 물 빠진 ‘돔키’의 멋

 

사진 좀 찍는다는 친구들이 가장 자주 바꾸는 것이 가방이다. 가방 까짓게 무슨 대수냐 하겠지만, 사력(寫歷)이 늘수록 카메라 가방도 쌓여간다. 처음에는 카메라 살 때 ‘보너스’로 끼워주는 가방으로 가볍게 시작한다. 그런데 하나둘 장비가 늘어갈수록 보너스로 받은 가방이 볼품없어 보인다. 좀더 ‘때깔’ 나는 가방으로 바꿔야겠다는 결심이 선다. 좀더 많은 장비를 넣을 수 있는 저렴한 가방으로 바꾼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메라만 좋으면 됐지 굳이 카메라가방까지 비싼 것으로 살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동호회에서 활동하다 보면 다른 회원들의 가방도 슬슬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기억하기 힘들 만큼 카메라가방 브랜드는 다양하다. 로우프로, 빌링햄, 탐락, 크럼플러, 카타, 텐바, 매틴, 델시, 헤밍스, 헤링본… 대충 아는 브랜드만 꼽아도 이 정도다. 좀 괜찮다 싶은 숄더백은 20만원이 훌쩍 넘고, 장비가 여유 있게 들어가는 큰 가방은 40만원이 훌쩍 넘는 것도 있다.

 

위에서 나열한 카메라가방 브랜드를 유심히 본 독자들이라면 무조건 있어야 할 이름이 빠졌다는 것을 알 것이다. 바로 현장을 누비는 사진가들이 가장 사랑하는 ‘돔키’(DOMKE).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돔키의 전성시대였다. 프로 사진가라면 으레 돔키를 사용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돔키는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하는 증거였다. 예전의 명성만은 못하지만 여전히 돔키는 카메라가방의 대명사 격이다. 해지고 물 빠진 돔키는 사진가에 대한 로망을 완성하는 최후의 아이템이다. 오직 연륜만이 가져다주는 돔키의 멋을 동경해 락스 푼 물에 세탁하는 인위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더 낡아 보이게 만드는 이도 있었다. 다른 회사 가방들은 ‘신상’이 자랑이지만, 오직 돔키만은 낡은 것이 미덕이다.

 

돔키의 전설은 1975년부터 시작됐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던 짐 돔키(Jim Domke)는 카메라 장비를 쉽게 정리해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튼튼한 가방이 필요했다. 하지만 마땅한 가방을 살 수 없자 자신이 직접 디자인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다. 짐 돔키는 자신의 낚시가방에 영감을 얻어 칸막이를 만들어 넣고 뻣뻣한 천 재질로 가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1976년 공화당 전당대회 기간에 동료 사진기자들에게 자신이 디자인한 가방을 주고 “사용해보고 아이디어를 달라”고 주문했다. 동료 사진기자들은 짐 돔키에게 6개의 캔맥주가 담긴 ‘식스팩’처럼 렌즈를 넣을 수 있게 칸막이를 만들고, 어깨끈 말고 손으로 들고 이동할 수 있는 손잡이를 덧붙여 달라고 주문했다. 짐 돔키는 동료들의 충고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않고 아이디어를 모아 쓰기 편한 ‘돔키백’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돔키백’은 나오자마자 800개가 팔리는 히트상품이 됐다.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돔키는 여전히 인기다. 2006년에는 30돌 기념 ‘돔키 F-2’가 한정판으로 판매되기도 했다. 별다른 디자인 변경 없이 30년 넘게 돔키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그만큼 사진기자였던 짐 돔키가 자신뿐 아니라 그의 동료들이 느꼈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기능성을 살렸기 때문이다. 군더더기 없는 심플함이야말로 돔키의 매력이자 영원한 생명력이다. 지금 돔키는 미국의 카메라 액세서리 업체 티펜의 한 브랜드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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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카메라의 ‘간지’ 외투 ‘카메라 아머’

 

대부분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카메라를 애지중지한다. 프로 사진가도 물론 카메라를 아끼지만 들이는 공력을 비교한다면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한 수 위가 아닐까. 프로 사진가에겐 일을 하기 위한 연장이지만, 아마추어 사진가에겐 취미 생활을 위한 ‘도구’일 뿐 아니라 재산 목록 가운데 상위를 차지하는 ‘귀중품’이기도 하다. 아내 몰래 비자금을 모아 구입했거나 카드 할부로 지른 최신형 디에스엘아르 카메라의 경우엔 혹시 흠집이라도 날까 상전 대접이다. 눈에 띄는 흠집이라도 생긴다면 그것은 곧 중고시장에 팔 때 ‘가격 하락’으로 이어진다. 평소에도 아기 다루듯 할 수밖에 없다. 폭신한 칸막이가 들어 있는 가방에 넣어 다니는 것은 기본, 흠집 날까봐 액정보호 스티커를 붙이고, 바닥에도 보호 시트지를 사다 마감공사를 한다. 그것도 모자라 흠집이 잘 생길 것 같은 부위는 검정 종이테이프로 공사(?)를 한다. 이 정도면 사진 찍기가 취미인지, 카메라 보호가 취미인지 헷갈린다.

 

예전에는 카메라를 보호할 수 있는 케이스는 기본이었다. 작은 콤팩트 카메라도 지퍼 달린 가죽케이스가 함께 딸려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비싼 수동 필름 카메라의 경우 가죽 케이스는 꼭 사야 할 필수품이었다. 카메라 가방을 따로 구하기 힘든 시절에는 가죽 케이스가 그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니콘 F3의 자주색 전용 가죽 케이스 ‘CF-22’는 검은색이 대세였던 시절 튀는 케이스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은 카메라 회사가 아닌 아르누보, 시에스타 같은 액세서리 회사에서 대부분 가죽 케이스를 제작한다. 현재 시중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카메라 가죽 케이스는 카메라 보호뿐 아니라 패션 아이템 구실도 한다. 색상도 화려하고 윗덮개가 없는 일명 ‘속사 케이스’라고 하는 하프케이스(카메라 아랫부분만 감싸는 덮개)가 주류다.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올림푸스 E-P1, 파나소닉 GF1 같은 카메라는 덩달아 예쁜 가죽 케이스도 주가를 올리고 있다.

 

현재 필자가 사용하고 있는 캐논 5D는 3년 전 중고로 구입한 것. 당시 200만원이란 쌈짓돈을 쥐고 판매자와 약속 장소에서 접선(?)했는데, 카메라가 이상했다. 카메라 전체가 고무로 덮여 있는 것 아닌가. 처음에는 판매자가 카메라를 잘못 들고 나온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카메라 아머’(Camera Armor)라는 실리콘 케이스를 씌워 알아보지를 못했다. 실리콘 케이스는 휴대폰이나 엠피(MP)3 플레이어 같은 제품만 있는 줄 알았는데 디에스엘아르 카메라 사용자가 늘어나고 시장이 커지니 나올 수밖에. 3년 전만 해도 ‘카메라 아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카메라 관련 제품 쪽에서는 꽤나 얼리어답터라고 내심 자부하고 있었는데, 흠집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아마추어 사진가를 위한 이런 흡족한 제품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가격이 생각보다 꽤 비싼 제품이었다. 3년이 지난 지금도 꽤 부담스런 가격(모델별로 다르지만 약 5만원 안팎)이긴 하지만, 가끔 청소를 위해 ‘카메라 아머’를 벗겨보면 여전히 카메라가 구입 당시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그 값을 충분히 하고 있는 셈. 단 빠른 조작을 원하고 거추장스런 것을 싫어하는 사용자라면 ‘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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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 코다크롬 뺏지 마세요”

 

연례행사처럼 새해가 되면 1년치 쓸 필름을 미리 사두곤 했다. 올해는 건너뛰었다. 필름을 사서 쟁여두는 일을 이제 그만뒀다. 2008년 사둔 40롤의 필름 가운데 절반도 쓰지 못했다. 남은 필름은 묵은 김치와 함께 냉장고에서 잠잔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기러기 아빠’의 불쌍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어서 “가족 곁으로 돌아가야지” 하는 생각보다 “저 필름, 빨리 찍어야 할 텐데”라는 마음이 먼저 삐져나온다. 하지만 필름카메라도 가방에 넣어 다닐 정도로 열심이었던 시절이 이제 내게는 ‘갔다’.

 

어느 순간 필름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언제나 영원할 것 같았던 필름카메라의 시대는 2000년을 정점으로 점점 막을 내린다. 2000년 필름 판매량은 7억8600만통이었지만, 2005년엔 3억1500만통에 그쳤다. 5년 사이에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필름 소비가 줄어들자 코닥, 후지, 아그파 등 필름 제조업체들도 덩달아 필름 사업부문을 축소하거나 없앴다.

 

2009년 6월22일 75년 역사를 가진 ‘코다크롬’(Kodachrome)의 단종 발표는 ‘아날로그 시대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는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었다. 1935년 레오폴드 만스와 레오폴드 고도프스키가 함께 개발한 코닥 최초의 컬러 슬라이드 필름이었던 코다크롬은 20세기 내내 코닥의 대표 상품으로 인기를 끌었다. 일반 필름카메라뿐 아니라 8㎜ 무비 카메라에도 사용됐는데, 1963년 11월22일 케네디 대통령 저격 장면이 담긴 동영상도 바로 코다크롬으로 촬영된 것이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인물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가 스티브 매커리의 사진(1985년 6월 <내셔널 지오그래픽> 표지사진으로 실린 ‘아프간 소녀’ 샤르밧 굴라)도 코다크롬으로 찍었다. 코닥은 코다크롬 마지막 생산품을 스티브 매커리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코다크롬’은 20세기를 기록한 ‘전설’ 그 자체였다.

 

컬러사진 시대를 열고 오랫동안 사진가들에게 사랑받았던 코다크롬이 정작 우리나라에선 1988년이 되어서야 현상이 가능했다. 서울 올림픽을 취재하기 위해 들어온 외국 사진기자들을 위해 현상시설을 만든 것이 계기였다. 올림픽이 끝난 이후 코다크롬 현상시설은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곧 철수했다. 결국 국내 사용자들은 현상을 위해 이전처럼 일본이나 멀리 미국까지 코다크롬을 보내야 했다. 코닥 엑타크롬, 후지 벨비아 등 대부분의 컬러 슬라이드 필름은 기술적으로 어렵지 않은 ‘E-6’ 현상법을 이용하지만 코다크롬은 ‘K-14’라는 까다로운 현상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코다크롬은 색을 만들어내는 성분이 현상액에 들어 있어 색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선 현상기술이 매우 중요했다.

 

코닥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코다크롬의 단종 이후 수많은 필름들의 명맥이 줄줄이 끊어졌다. 그나마 생산되는 필름의 값도 많이 올랐다. 36장 필름 1통을 찍어 스캔 서비스까지 받는다고 하면 필름값과 현상비, 스캔비까지 포함해 1만원이 훌쩍 넘어간다. 그래도 필름을 ‘죽도록’ 사랑하며 디지털로 전향하지 않는 아날로그 사진가는 수없이 많다. 그들은 1973년 사이먼 앤 가펑클의 폴 사이먼이 “엄마, 내 코다크롬 뺏지 마세요”라고 부른 노래(제목이 ‘코다크롬’이다)처럼 필름이 사라질까 두려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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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신도 울고 가는 ‘아빠만두’여

 

주위 사람들이 자주 “어떤 카메라를 사야 하나요?”라고 내게 질문을 한다. 나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돈, 얼마나 준비하셨어요?” 장사치 같지만 먼저 예산이 중요하다. 그들의 ‘요구’는 항상 정해져 있다. “저렴하고 사진 잘 나오는 카메라”를 구해달라는 것. 여기서부터 고민이 시작된다. 입맛에 맞는 카메라는 돈이 모자라고, 돈에 맞추려니 성능이 떨어지는 것 같다. 결국 마지막 선택의 기로에서 대부분은 예산 한도 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카메라’를 선택한다.

 

사진 초보자들은 대부분 아는 이가 추천한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그 카메라에 가까운 사람들부터 담기 시작한다. 그 재미가 쏠쏠해질 무렵, 좀더 좋은 사진을 제대로 찍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동호회도 가입하고, 사진 관련 사이트도 들락날락하다 보면 눈이 점점 높아진다. 슬슬 “저렴하고 사진 잘 나오는 카메라”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 신뢰가 바닥을 칠 무렵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지름신’이 강림한다. 이때부턴 주변의 조언도 무시하고 ‘필’이 꽂힌 물건에 무섭도록 집착한다.

 

F1.8은 10만원, F1.4는 37만원, F1.2는 176만원…. 아마 사진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어떤 ‘가격 차’(인터넷 검색 최저가 기준)인지 알아챘을 것이다. 캐논 50㎜ 표준렌즈 가격이다. 조리개 값(F-stop)에 따라 값이 천정부지로 뛴다. 조리개 값이 작을수록 밝은 렌즈, 빛을 더 많이 받아들일 수 있다. 어두운 곳에서 좀더 빠른 셔터속도로 찍을 수 있고, 배경을 ‘뽀사시’(아웃포커스)하게 만들 수 있다. F1.4와 F1.2, 단 ‘0.2’의 차이일 뿐인데 가격은 140만원 가까이 차이가 난다.

 

» 캐논 카메라 EF 50mm f1.0

 

1.8, 1.4, 1.2… 그 미묘한 차이만큼이나 사진만 놓고 보면 어떤 렌즈를 사용했는지 알기 힘들다. 가장 비싼 캐논 EF 50㎜ F1.2 렌즈의 애칭은 ‘오이만두’. ‘오’는 50㎜의 약자고 ‘이’는 1.2의 ‘2’다. ‘만두’는 렌즈의 전체 모양이 만두를 닮아서 붙였다. ‘오이만두’를 쓴다고 사진 실력이 ‘가격’만큼 업그레이드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런데도 큰돈을 들여가며 ‘오이만두’를 찾는 이유는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사진을 업그레이드하고픈 절박함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최고의 렌즈를 써보고 싶은 욕망도 깔려 있을 테고. 지름신은 이런 미묘한 틈새를 언제나 파고드는 법이다. 지름신이 내린 이에게 “저렴한 렌즈 사고 남는 돈으로 사진집을 사보라”는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반감만 산다.

 

그러나 그런 절박함이나 욕망뿐 아니라 지름신도 어쩔 수 없는 렌즈가 있으니 바로 캐논 EF 50㎜ F1.0 렌즈(‘아빠만두’라고 불린다)다. ‘아빠만두’라고 부른 이유는 ‘오이만두’를 뛰어넘는 최고의 렌즈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1989년 당시 캐논이 가진 기술력을 모두 쏟아부었다는 이 렌즈는 약 800개 정도만 만들어졌다. 1987년 수동렌즈를 사용하는 FD 마운트(캐논 수동카메라의 마운트. 마운트는 카메라의 몸체와 렌즈를 잇는 부분)를 과감하게 버리고 자동초점조절(AF)이 가능한 EF 마운트를 채용한 ‘야심작’이었다. 발매 당시 가격은 36만6000엔. 요즘 환율로 따지면 약 440만원이나 하는 초고가였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아예 시장가격이 없을 정도. 구하기가 정말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들다. 일본 내 캐논 마니아들이 가장 가지고픈 ‘소장품’이 된 터라 일본 내 장터에서도 웬만해선 찾아보기 힘들다. 중고가격은 발매가보다 높은 500만~600만원이라는데 이것도 ‘전설’로만 전해질 뿐이다. 지름신도 어쩔 수 없는 이런 물건에 꽂히면 더 괴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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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명한 ‘트리-비전’ 디자인이 아깝구나

 

국내에서만 1330만명이 봤고, 전세계에서 20억달러 이상의 극장수입을 올린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아바타>가 최근 3디(3D) 전용관에서만 재개봉한다. 이미 볼 사람들은 다 봤을 영화를 다시 스크린에 올리는 이유는 3디 전용관에서 <아바타>를 다시 보려는 관객들이 있기 때문이다. 2디(2D)와 3디, 평면과 입체가 주는 감동의 차이가 확실히 다른가 보다.

 

 

<아바타>로 인한 3디 열풍은 단지 영화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부록에 혹해서 샀던 남성잡지 포장지를 뜯었더니 3디 입체안경이 들어 있질 않나, <한국일보>는 아예 ‘한국 신문 사상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 지난 3월13일치 지면에 3디 사진을 선보였다. 신문에 실린 청룡상과 서울 덕수궁 중화전 풍경 입체사진을 보며 독자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상상이 간다. 이것뿐이랴, 삼성이나 엘지(LG)에서는 3디 티브이를 차세대 전략상품으로 내세우며 경쟁중이다. 사람들의 눈을 ‘혹’하게 만드는 3디의 위력이 가히 폭발적이다. 아마 이런 추세로 간다면 5년 안에 3디 영상이나 사진이 최소한 영화나 광고 시장에선 대세가 될 수도 있을 듯싶다.

 

사람들이 ‘3디’에 열광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이나 미국에선 인물이나 풍경사진을 입체로 보는 것이 인기를 끌었고, 입체사진을 감상하는 데 필수적인 입체경(stereoscope)을 가지는 것이 유행이었다.

 

입체사진의 원리는 간단한데 좌우 약 60~70㎜ 시차(사람의 눈동자 사이와 비슷한 거리)를 두고 같은 장면을 촬영한 사진 두 장을 입체경 위에 올려놓고 보면 전경과 원경이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에는 박스 형태의 입체경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낯선 이국의 풍경이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담긴 입체사진이 불티나게 팔렸다. 키스톤 뷰 컴퍼니(Keystone View Company)나 언더우드 앤 언더우드(Underwood & Underwood) 같은 회사들이 입체사진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웹사이트 스테레오뷰닷컴(www.stereoviews.com)으로 가면 당시 이 두 회사에서 팔았던 사진들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비싸지 않은 값에 살 수도 있다. 빈티지 사진 수집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라면 한번쯤 찾아봐도 좋을 듯.

 

단지 입체경으로 사진을 보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스스로 사진가가 되길 원했다. 1832년 영국의 물리학자 찰스 휘트스톤(Charles Wheatstone)이 3디 영상의 원리를 발견한 이래 수많은 광학 기술자들이 두 개의 렌즈를 가진 ‘스테레오 카메라’를 만들기 시작했다. 스테레오 카메라는 입체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카메라의 총칭. 스테레오 카메라가 가장 각광받던 20세기 초 코닥, 포이크틀렌더, 롤라이, 이카, 포머-슈윙 등 많은 카메라 회사들이 앞을 다퉈 신제품을 쏟아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을 겪고 35㎜ 소형 카메라와 티브이가 대중화되면서 큰 필름을 사용하던 스테레오 카메라의 관심은 곤두박질쳤다. 전쟁이 끝나자 1940년대 후반 미국 하닐(Haneel)사에서 트리-비전(Tri-Vision)이라는 스테레오 카메라를 선보였지만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세 가지 버전으로 나온 ‘트리-비전’은 스테레오 카메라의 인기가 급락하던 시기에 태어났지만 디자인만큼은 단명이 아까울 만큼 세련되고 아름답다. ‘아르데코’한 트리-비전의 모양새는 1950~60년대 생산된 캐딜락의 잘 빠진 꽁무니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배트맨의 비밀무기 같기도 하다. 혹시 트리-비전을 디자인한 사람이 1939년부터 <디시(DC) 코믹스>에 연재됐던 <배트맨>의 열혈 팬이었을 수도. 필자의 짐작이니 믿거나 말거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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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표 남발 막아주는 ‘휴대용 프린터’

 

사진을 뽑기 위해 동네 인화점을 가본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디지털카메라가 대중화된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모니터로만 사진을 확인한다. 예전에는 수학여행이나 소풍을 다녀오면 사진을 찍은 친구가 사람 수대로 사진을 나눠 주었다. 그 추억이 사라졌다. 이제는 이메일로 받아 본다. 그 시절이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다. 10여년 전만 해도 사진을 뽑아주는 동네 사진관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1998년 개봉했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초원사진관’ 같은 곳이 흔했다. 종종걸음 치며 필름과 사진이 든 종이봉투를 찾으러 가는 설레는 기분이란!

 

» 후지필름사 사진인화기

 

 

디지털카메라의 대중화는 곧장 동네 사진관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간단한 사진 촬영, 필름 판매, 현상, 인화까지 맡아서 했던 동네 사진관은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발 빠르게 디지털 인화 장비를 들이는 곳도 있었지만 규모가 크지 않은 곳에선 큰 부담이었다. 대형 할인마트에 인화점이 생기고 온라인 인화점이 급성장하자 폐업하는 곳이 속출했다. 고향에서 오랫동안 단골로 다녔던 ‘이왕카메라’ ‘중앙사진관’도 문을 닫은 지 오래다. 그리고 사진을 뽑아서 나눠 주는 일도 가뭄에 콩 나듯 드문 일이 되고 말았다. 벌써 액자에 넣어 멋지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던 사촌 여동생 결혼식 사진도 하드디스크에서 1년 넘게 잠자고 있는 중이고, 예쁘게 찍힌 아이들 사진만 따로 뽑아 앨범을 만들겠다는 생각도 머릿속에서만 오랫동안 맴돌이를 하고 있다. 사진으로 인화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사라진 지 오래다. ‘사진’은 없고 ‘파일’만 남는 삭막한 현실이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편한 쪽으로 빨리 기우는 법이다.

 

만약 프린터를 가지고 다니며 가장 잘 나온 사진만 뽑아줄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생각하는 디에스엘아르(DSLR) 카메라 사용자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나중에 메일로 보내겠다거나, 사진으로 인화해주겠다는 지키지 못할 빈 약속을 남발하는 것보다 찍은 자리에서 바로 사진을 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사랑받는 사진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필요는 수요를 낳는 법이라고 했던가. 휴대용 프린터가 시장에 나온 지도 꽤 됐다. 후지필름은 휴대전화 카메라 사용자를 위해 2003년 MP-1 프린터를 선보인 이후 MP-100, MP-300 등 선으로 연결하지 않아도 적외선 통신(IrDA)만으로 사진을 인화할 수 있는 휴대용 프린터를 만들어냈다. 엡손의 포토프린터 PM-310 같은 모델도 별도의 배터리팩을 구입하면 휴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긴 하지만 진정한 ‘휴대용 프린터’는 현재로선 MP-300이 유일하다. 덕분에 MP-300의 경우 국내에 정식으로 출시되지 않았지만 꽤 많은 사용자들이 있다. MP-300의 가장 큰 매력은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에 286g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작고 가벼워 촬영을 나갈 때 부담 없이 가지고 다닐 수 있다. 거기다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뽀사시’ 효과는 기본이라 여자친구에게 점수 따기도 좋다(?)는 사용자들의 의견도 많다. 단점은 인화지가 아닌 전용필름(후지 인스탁스 미니에 사용되는 즉석필름과 거의 같다)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가격이 꽤 비싸다. 사진 크기도 작아 딱 명함 크기다. 하지만 크기가 무슨 상관이랴! 디에스엘아르 엘시디창으로 잘 찍힌 사진을 골라 인화하는 재미에다 그 자리에서 바로 주는 재미까지 가득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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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의 최대 위협은 ‘스마트폰’

 

‘카메라 히스토리아’라는 이름표를 달고 아이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이폰이 출시될 때 주변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을 보고 호들갑이 심하다고 핀잔을 줬다. 까짓 아이폰이라고 별게 있겠나 싶었다. 색다른 애플리케이션(이하 앱)을 구경시켜줘도 그런가 보다 했다. 4~5개의 아이폰을 앞에 놓고 각기 다른 악기 앱을 깔아 ‘1인 밴드’ 연주를 멋지게 해냈던 ‘아이폰녀’ 김여희씨의 동영상을 봤을 때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폭소만발 ‘똥폰남’에게 애정이 갔다.

 

휴대폰이란 게 전화만 잘 터지고 알람만 제대로 울리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4월29일부터 5월3일까지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포토 2010’ 행사를 준비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드라이버와 나사못 그리고 수평계를 들고 일본 사진작가들의 액자 거는 작업을 했다. 수평계를 액자에 올려놓고 ‘오와 열’을 맞추는 지루한 작업을 끝내고 동료에게 “수평계 없으면 전시 준비도 힘들겠다”고 했더니 아이폰만 있으면 별문제 없다고 일러주는 것이 아닌가! ‘레벨툴프리’(LevelToolFree)라는 앱만 깔면 굳이 수평계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뿐이랴, ‘아트 앤 포토 컬렉션스’(Art & Photo Collections)는 갤러리 분위기에 맞는 액자와 매트를 미리 볼 수 있는 앱이다. 갤러리 벽, 액자, 사진을 합성시켜 미리 볼 수 있으니 전시회를 앞둔 사진가에겐 아주 유용하다. 중요한 것은 둘 다 ‘공짜’라는 사실.

 

실생활에 유용한 앱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아이폰 쓰는 재미가 무엇인지 알았다. 특히 사진가에게 유용할 앱들을 찾아보니 무궁무진하다. 수평계와 가상 갤러리는 빙산의 일각. 값비싼 노출계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라이트미터’(Lightmeter), 다양한 사진 효과를 줄 수 있는 ‘필름 랩’(Film lab),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꾸며주는 ‘폴러라이즈’(Polarize)도 있다. 암실에서 사진을 인화하는 것처럼 약품 처리 효과를 줄 수 있는 ‘스왱코 랩’(Swanko lab)도 재밌다. 이 정도를 이미 사용하고 있는 사진가라면 ‘포토샵닷컴 모바일’(Photoshop.com mobile)과 ‘포토커브스’(Photocurves)도 꽤 매력 있게 보일 것이다. 이 앱들은 꽤 높은 수준으로 사진을 보정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다양한 앱이 아니더라도 아이폰은 매력적이다. 아이폰의 매력이라고 한정하기보단 스마트폰의 매력이라고 해야겠다. 삐삐, 시티폰, 휴대폰의 시대가 20년 남짓한 세월에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스마트폰의 시대가 열렸다. 현재 130만명 정도 되는 스마트폰 사용자는 올해만 5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폭발적인 수요에 맞춰 스마트폰도 하루가 다르게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아마 콤팩트형 디지털카메라 시장은 카메라를 내장하고 있는 스마트폰에 밀릴 가능성이 크다. 디에스엘아르 카메라 시장은 그대로 남고, 콤팩트형 디지털카메라는 스마트폰 내장 카메라로 대신할 확률이 높다. 최근 나오는 스마트폰 카메라의 화소수는 500만화소. 가정에서 가장 많이 인화하는 4×6인치 사진을 뽑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새로운 스마트폰들의 사양을 살펴보면 1000만화소 내장 카메라 장착도 시간문제로 보인다. 폰과 카메라와 컴퓨터의 경계가 사라지는 ‘디지털 컨버전스’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스마트폰인 ‘안드로이드폰’을 질러 카메라와 사진 관련 앱을 열심히 검색중이다. 아이폰을 ‘절대’ 사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켰으나 결국 오십보백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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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동경하고 미지를 기록하다

 

천안함 사태가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 발표로 일단락되는 듯하다. 합조단은 지난 20일 “천안함은 북한제 어뢰에 의한 외부 수중폭발의 결과로 침몰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의혹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천안함 사태가 일어났을 때부터 국방부는 말 바꾸기를 하며 스스로 ‘의혹’을 키웠다. 천안함 사태가 풀기 어려운 실타래처럼 꼬인 것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바닷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 니코노스V(2002년까지 생산·왼쪽), 칼립소(오른쪽).

 

허블 우주망원경으로 머나먼 우주 공간까지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된 지 20년이 지났지만(올해가 허블 우주망원경으로 관찰을 시작한 지 20돌이다) 바닷속은 여전히 인류에게 ‘암흑’이나 마찬가지다. 천안함 생존자 구조 작전이 벌어졌을 때 서해의 수중 가시거리는 1m밖에 되지 않는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아무리 맑은 바다라도 수십m만 내려가면 사방이 깜깜해진다. 하지만 바닷속을 사진에 담으려는 노력들은 꾸준히 이어졌다. 1938년 브루스 모제트는 자신이 직접 만든 수중카메라를 가지고 바닷속에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바다에 적응한 ‘해저인간’처럼 물 밑에서 골프도 치고, 고기도 굽고(?), 피크닉을 즐긴다.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사진처럼 보이지만 실제 해저에서 촬영했다. 물속에서 모델들은 자연스럽게 지상의 생활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다. 브루스 모제트가 바닷속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하우징’(물이 스며들지 않게 카메라 외부에 덧씌우는 장비)을 들고 있는 사진을 보지 않았다면 수중사진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자연스럽고 훌륭하다.

 

수중카메라의 대명사 니코노스가 나오기 전까진 이렇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채용한 수제 ‘하우징’ 수중카메라들이 쓰였다. ‘하우징’형이 아닌 최초의 일체형 수중카메라는 1961년 프랑스 스피로테크니크에서 개발한 칼립소(사진 오른쪽). 스쿠버다이빙의 창시자이자 전설적인 해양탐험가였던 자크 쿠스토가 설립한 스피로테크니크는 이후 니콘과 손잡고 니코노스를 만들어낸다. 칼립소는 수심 50m, 영하 20도 환경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당시로선 획기적인 카메라였다. 극한의 환경에서도 촬영이 가능한 ‘수중카메라’ 칼립소는 히말라야, 남극, 북극 등 극지 탐험대의 기록용 카메라로도 쓰였다.

 

수중카메라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칼립소의 계보를 이어받은 ‘니코노스I’이 1963년 발매되고부터다. ‘니코노스I’부터 ‘니코노스V’(2002년까지 생산·사진 왼쪽)까지 니코노스 시리즈는 미지의 해저 세계를 사진에 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의 눈이었다.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하기 이전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수중사진들은 니코노스로 촬영된 것이라 봐도 좋을 만큼 수중카메라 분야에 있어서 니코노스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가장 인기 있었던 ‘니코노스V’ 이후 1991년 자동초점(AF)기능을 가진 ‘니코노스RS’를 발표했지만, 이전 모델만큼 사랑받지 못하고 생산이 곧 중단됐다. 충실한 방수기능과 수중에서 카메라를 쉽게 조작할 수 있도록 큼직큼직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니코노스는 험한 파도와 싸우는 구릿빛 선원의 울퉁불퉁한 근육처럼 남성미가 느껴진다. 니코노스는 바다를 동경하고 미지의 세계를 기록하고픈 인간의 욕구를 한발 앞서 충족시킨 카메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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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사진가의 분신이었던 ‘라이카 F’

 

헌책방 책꽂이 구석에 숨어 있던 데이비드 더글러스 덩컨의 사진집 <포토 노마드>(2003년 미국·영국·프랑스·일본에서 동시 발간됐다)를 발견한 순간 가슴이 벌렁거렸다. 사진집 가격은 단돈 1만5000원. 비싼 사진집은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헌책방 순례를 한다. 자주 찾는 곳은 신촌에 자리잡고 있는 ‘숨어 있는 책방’, ‘공씨책방’, ‘온고당’ 등이다. 데이비드 앨런 하비의 <쿠바> 같은 책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은 산삼밭에 굴러떨어진 심마니의 심정이다.

 

<포토 노마드> 이야기를 하다 옆으로 샜다. 덩컨은 한국전쟁 당시 종군사진가였다. 2차 세계대전 중에도 미국 해병대 소속 종군사진가로 활동하면서 피지와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사진에 담았다. 덩컨이 한국에 발을 디딘 것은 한국전쟁이 터진 3일째 되던 날. 중부전선에서 밀려 낙동강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압록강까지 전진하는 6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덩컨은 최전방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들은 <라이프>에 주요 기사로 다뤄졌다.

 

<포토 노마드>의 앞쪽 페이지에는 그의 부모님 얼굴 사진과 함께 한 대의 카메라가 눈에 띈다. 이것은 그와 전장을 함께 누빈 분신 같은 카메라 ‘라이카 에프(F)’였다. ‘라이카 에프’는 가죽 끈 대신 초라한 흰 끈이 묶여 있다. 외모는 초라하지만 튼튼함은 견줄 데가 없다. 8월 장맛비가 쏟아지는 낙동강 공방전에서도, 영하 30~40도까지 내려가 총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던 장진호 전투에서도 고장 나지 않았다. 어떤 최신형 디에스엘아르 카메라라도 덩컨이 경험했던 참혹한 전투 현장에선 하루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덩컨이 사용했던 ‘라이카 에프’는 라이카 Ⅲ 시리즈 가운데 가장 고참 격이다.(라이카 Ⅲ로 불리기도 한다) 1933년 출시되어 1939년까지 생산됐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라이프>에 입사해서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가장 손에 익은 카메라, ‘라이카 에프’를 들고 한국전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라이카 에프’는 한국전쟁이 터지던 해인 1950년에 나왔던 라이카 Ⅲf와는 차이가 있다. ‘라이카 에프’는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수많은 종군사진가들이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에서 라이카 Ⅲ 시리즈를 사용했다. 이전에 나왔던 다른 카메라들보다 가볍고 튼튼하며 렌즈까지 교환할 수 있었던 라이카 Ⅲ 시리즈는 목숨을 담보로 사진을 찍는 종군사진가들에겐 안성맞춤이었다. 라이카 Ⅲ의 성공은 니콘, 캐논, 콘탁스 등 다른 회사들이 성능 좋은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와 렌즈를 개발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포토 노마드>의 서문에는 그가 고른 7장의 사진이 실려 있다. 그 가운데는 1950년 12월9일 한국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젊은 해병대원의 얼굴도 있다. 추위에 떨며 허공에 시선을 둔 그의 표정에서는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기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사진 옆에 덩컨이 그와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덩컨이 다가올 크리스마스에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 해병대원의 대답은 짧았다. “단지 ‘내일’이 오기만 바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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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카메라를 만드는 법 

 

사진을 잘 찍고 싶은 욕심이 강해질수록 카메라 장비에 대한 집착도 커진다. 아무리 비싼 최신형 카메라라도 언젠가는 단점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 렌즈의 선예도와 저 바디의 성능이 합쳐진 ‘나만의 카메라’를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약 100대가 넘는 카메라를 지름신의 부름에 ‘절대 복종’하면서 구입했던 필자의 경험을 비춰 보건대 완벽한 카메라는 없다. 전지전능한 신이 만든 카메라라도 결점은 있으리라. 카메라의 성능이 훌륭한 사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갈고닦은 사진가의 실력만이 좋은 사진을 만들 수 있다. 카메라는 도구에 불과하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옛사람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 킨다이 렌즈 변환 어댑터.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겨주었던 사진집 시리즈 <러브>, <프렌드십>, <패밀리>(도서출판 이레)는 뉴질랜드 M.I.L.K 출판사가 세계 164개국 1만7000명의 사진가들에게서 4만여장의 사진을 받아 그 가운데 세 가지 주제에 맞는 100장씩의 사진을 가려 뽑아 엮었다. 9개 언어로 번역된 이 사진집들은 세계적으로 100만부 이상 팔렸다. 이 사진집 끝머리에는 사진가를 소개하는 짤막한 글과 사진가가 사용한 카메라에 대한 정보가 나와 있다. 카메라 장비의 세계에서 끼워주지 않을(?) 저렴한 카메라도 있다. 하지만 그 저렴한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그야말로 찡하다. 그 사진들은 카메라에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철없는 일인지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에도 ‘자신만의 카메라’를 꼭 만들고 싶다면 ‘렌즈 변환 어댑터’를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사진애호가라면 니콘 렌즈를 캐논 바디에 사용하거나, 라이카 렌즈를 올림푸스 바디에 장착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번쯤은 한다. 장비들을 통째로 바꾸는 것보다는 훨씬 저렴한 방법이다. 원리는 간단하다. 만약 캐논 EF 50㎜ F1.4 표준렌즈를 니콘 D700 바디에 장착하고 싶다면 렌즈 변환 어댑터를 마운트 부분(바디와 렌즈가 결합하는 지점)에 장착하기만 하면 된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외국계 회사인 와이드팬, 켄코, 킨다이에서는 사용자가 많은 렌즈와 바디에만 장착할 수 있는 렌즈 변환 어댑터를 제조했었다. 최근에는 파나소닉 GF1, 올림푸스 EP-1 같은 카메라를 위한 렌즈 변환 어댑터도 출시하고 있다. 명품으로 이름난 라이카, 카를 차이스 렌즈도 렌즈 변환 어댑터만 있으면 최신형 렌즈교환식 디지털카메라에 장착해서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다.

 

최근에야 렌즈 변환 어댑터가 우리나라 사진가들에게 주목받고 있지만 예전에는 일본 카메라 수입업자들의 대표적인 관심거리였다. 그들은 청계천에서 밀링머신으로 렌즈 변환 어댑터를 만드는 우리나라 카메라 수리공들의 기술을 믿었다. 수리공들의 손에서 소량 생산되던 제품은 그렇게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불과 10여년 전 일이다. 30년 넘게 카메라 개조와 수리를 해온 충무로 김카메라 김병수 대표가 전해주는 추억담이다. 만약 규모를 키우고 독자 브랜드를 만들었다면 청계천 카메라 수리공들의 렌즈 교환 어댑터는 세계적인 제품이 되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와이드팬, 킨다이 같은 회사가 지금쯤 충무로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렌즈 교환 어댑터를 볼 때마다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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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억원짜리 최고가 카메라

 

캐논 원 디에스 마크 스리(1DS mark3)는 700만원대, 니콘 디스리엑스(D3X)는 900만원대, 라이카 엠나인(M9)도 900만원대이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선망하는 고기능 디지털카메라들의 가격이다. 가격비교 사이트에서 확인했으니 아마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렌즈는 뺀 값이다. 카메라에 어울리는 렌즈를 화각대별로 구입하면 아마 2천만원쯤은 쉽게 넘어갈 것이다. 2천만원이면 웬만한 중형차 한 대 값이다. 취미로 사진을 찍는 아마추어 사진가들 중에는 이런 장비를 갖춘 이들이 많다. 사진동호회 누리집에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올린 고급 장비들 사진을 보면 포스가 엄청나다.

 

캐논 원 디에스 마크 스리, 니콘 디스리엑스, 라이카 엠나인은 하수로 치는 카메라도 있다. 체급이 다르다. 중형 포맷 하셀블라드 H4D-40의 가격은 3천만원이 넘는다. 그래도 이전 모델보다 값이 내렸다. 4천만 화소를 자랑하는 H4D-40의 사진 한 장 파일 크기는 120MB(TIFF 파일 저장할 경우). 웬만한 컴퓨터에선 내려받기 힘든 크기다. 한 친구는 “자동차, 오디오와 더불어 ‘폼 잡기’ 가장 좋은 취미가 사진”이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인생을 즐기는 데 ‘폼’은 필수다. 하지만 사진은 자동차와 오디오와는 다르게 창작의 고통이 따른다. 폼은 나는데 멋진 사진이 찍히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돈을 들인 만큼 결과물이 좋지 않으면 불쾌지수가 급상승하기 마련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진기 가운데 가장 비싼 사진기는 무엇일까. 지난 6월29일 1839년 제작된 세계 최초의 상업용 카메라인 다게레오타이프(은판사진술) 카메라가 오스트리아 빈의 ‘베스트리히트 포토그래피카 옥션’(www.westlicht-auction.com)에서 73만2천유로(약 11억원)에 팔렸다. 이 카메라에는 니엡스와 함께 다게레오타이프를 발명했던 다게르의 친필서명이 들어 있다. 현재 세계에 12대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제조연도가 무색할 만큼 이 사진기로 찍은 사진은 아름답고 깨끗하다. 이 사진기의 값은 세월이 지나면 더 오를 것이다. 170년 사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각형 나무상자에 황동으로 만들어진 렌즈가 앞으로 튀어나온 다게레오타이프 카메라는 사진기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물건은 상품 이상의 가치를 갖는 법이다. 니엡스가 발명했던 카메라, ‘헬리오그래피’는 8시간 이상 노출을 줘야만 상이 맺힌다. 다게르는 니엡스가 세상을 떠난 뒤 노출시간을 30분으로 줄인 그의 사진기, 다게레오타이프 카메라를 발명했다. 프랑스 정부는 사진을 발명한 공로로 다게르와 니엡스의 아들에게 각각 연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다게레오타이프는 단점이 있었다. 한 장의 필름으로 여러 장의 같은 사진을 만들 수가 없었다. 굳이 이해를 돕자면 지금의 즉석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비슷하다. 다게레오타이프 카메라에 들어가는 (요오드화은을 입힌) 구리판은 단 1장의 사진만 만들 수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영국인 폭스 탤벗이었다. 화학자였던 탤벗은 질산은과 갈릭산을 종이에 발라 원시적인 ‘필름’을 만들었다. 이 필름으로 똑같은 사진을 여러 장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사진은 니엡스와 다게르가 발명했지만, 무한복제가 가능한 현대적 의미의 ‘사진’은 탤벗이 만든 셈이다.

 

사족이다. 과거에 찍은 오래된 사진이나 제조연도가 오래된 카메라는 절대 함부로 버리거나 다루지 마시길. 지금 사용하고 있는 폼 나는 최신형 디에스엘아르 카메라보다 훨씬 값나갈 날이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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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헵번을 ‘도촬’했던 몰카용 카메라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여성은 누구일까? 영국의 연예전문지 가 지난 1일 2000명의 ‘여성’ 독자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1위는 ‘오드리 헵번’이었다. 지난날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여성은 오드리 헵번이 유일하다. 친구들이 소피 마르소와 피비 케이츠에 열광할 때도 흔들림이 없었다. <로마의 휴일>(1953년)에서 앤 공주 역을 맡았던 오드리 헵번은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짧은 파마머리를 하고 젤라토를 먹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에 반하지 않았던 남자가 어디 있으랴. 의 설문조사 결과만 놓고 보더라도 오드리 헵번은 성별 관계없이 사랑을 받았던 스타였다. 아내가 미용실에 간다고 하면 지금도 “그럼 짧게 깎고 헵번 스타일로 해보지”라고 말이 튀어나온다. 나의 일관된 권유에 대한 아내의 대답은 항상 똑같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또 한다. 그 머리가 얼마나 관리하기 힘든데….” 사실 ‘헵번 스타일’은 디자이너 지방시의 작품이지만 헵번 스타일의 9할은 <로마의 휴일> 앤 공주 이미지다.

 

 » ‘에코(ECHO)8’

 

사춘기 시절 ‘주말의 명화’에서 처음 봤던 <로마의 휴일>을 지금도 몇 번이나 다시 볼 정도다. 사진에 빠지면서 더 몰입했다. <로마의 휴일>의 사진기자 어빙 래도비치(에디 앨버트)가 들고 다녔던 (앤 공주를 찍던) 조그만 라이터 모양의 카메라 때문이었다. ‘몰카’ 용도로 딱인 이 카메라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일본 카메라 박물관 스파이용 카메라 전시부스에 “<로마의 휴일>에 출연했던 카메라”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에코(ECHO)8’을 직접 봤을 때 느꼈던 기쁨이란. 어떻게든 구해보려고 충무로와 남대문, 카메라 사이트를 뒤질 때는 볼 수가 없었다. 일본 카메라 박물관에서 실물을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도대체 이런 카메라를 누가 만들 생각을 했을까 싶었는데 역시 일본이다. 스즈키 광학에서 1951년부터 56년까지 생산했다.

 

에코8의 외형만 보면 지포 라이터와 비슷하다. 하지만 내부는 카메라 기능에 충실하다. 라이터만한 크기에 온전한 카메라 기능을 모두 집어넣으려니 작은 필름을 쓸 수밖에 없었다. 필름이 워낙 작아 16㎜ 필름을 반으로 잘라 썼다. 한 컷의 크기는 6×6㎜, 새끼손톱보다 작다. 15㎜ 고정렌즈가 달려있고 최소 조리개 수치는 F3.5, 셔터 속도는 B(벌브 모드)와 1/50초.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세력 다툼 하던 냉전시대였으니 스즈키 광학의 에코8은 상당히 인기 있는 스파이용 카메라였을 것이다. 아마 <로마의 휴일>의 어빙처럼 특종을 원하는 사진 기자들에게도 매력 넘치는 카메라였으리라. 에코8은 6년 동안 기능이 개선된 한 가지 모델만(A, B모델로 나뉜다) 나왔을 뿐 꽤 오랫동안 장수한 카메라다. 에코의 성공에 힘입어 기능을 줄이고 값을 낮춘 카메라라이트(Camera-Lite)도 생산했다.

 

<로마의 휴일> 마지막 신, 앤 공주의 ‘일탈’ 사진으로 한몫 잡으려던 노름 좋아하는 신문사 기자 조 브래들리(그레고리 펙)는 공모했던 어빙을 설득해 ‘로마의 휴일’을 끝낸 앤 공주에게 사진을 돌려준다. 그 장면을 독자들도 기억할 테다. 조가 사진을 돌려준 이유는 앤 공주를 사랑해서였을까, 아니면 기자의 양심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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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년 FM2’에는 개가 있다 

 

여름 더위를 이기기 위해 보양식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복날이면 보신탕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진다. 어떻게 반려동물인 개를 잡아먹을 수 있느냐는 공세에 예부터 전해내려온 뿌리 깊은 음식문화일 뿐이라는 방어가 끝없이 이어진다. 보신탕에 대한 다양한 찬반의견을 들어보면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러니 결론이 날 수 없는 문제다. 모두 ‘개인의 취향’이다. 상대방을 존중하면 된다.

 

보신탕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자. 복날에 생각나는 것은 보신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도 있다. 항상 잊고 있다가도 복날이 되면 이 카메라가 생각난다.

 

1994년은 개띠해 갑술년이다. 개띠해인 이때를 기념해 만든 카메라가 ‘믿거나 말거나’ 있다. 니콘은 인기 있던 FM2를 티타늄 몸체로 특별제작했다. 생김새나 성능은 FM2와 다를 것이 전혀 없다. ‘갑술년 FM2’는 구하기 힘든 ‘초절정 귀한 아이템’이지만 FM2는 1982년 생산이 시작되어 2000년 단종될 때까지 니콘을 카메라업계의 선두주자로 끌어올린 베스트셀러였다. 니콘 FM2의 역사는 전 모델인 FM이 개발된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니콘은 FM2를 단종시킨 이듬해인 2001년 FM3A를 새로 출시해 2006년까지 생산했다. 그야말로 FM 시리즈는 30년 동안 사랑받은 장수 카메라이다. FM 시리즈는 FM부터 FM2, FM3A로 이어지면서도 기능은 향상됐지만 외관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지금도 수동 필름카메라라고 하면 먼저 니콘 FM2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갑술년 FM2’의 전면에는 개띠해를 기념하기 위해 개의 옆모습이 새겨져 있다. 일본이 자랑하는 명견 아키타와 닮았다. ‘갑술년 FM2’ 생산대수는 단 300대. 기념판 카메라가 보통 1000~2000대 정도 만들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이 ‘갑술년 FM2’는 기념판 중의 기념판인 셈이다. 워낙 생산대수가 적어 일반 소비자가 구할 수도 없었다. 이베이에서 찾았던 ‘갑술년 FM2’는 보통 3000달러 안팎, 약 360만원 정도. 현재 FM2의 국내 중고가가 25만원 안팎이니까 거의 15배나 비싸다.(배송비와 세금을 합친다면 400만원을 훌쩍 넘어간다.) 단지 개의 옆모습만 없을 뿐 똑같은 외관과 성능을 가진 FM2/T의 가격이 50만~60만원 정도라는 것을 봐도 엄청난 가격이다. 국내에선 한번도 실물을 본 적이 없다. 니콘에서 선물용이나 이벤트용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개썰매만을 이용해 1만2000㎞를 횡단해서 북극점에 발을 디뎠던 위대한 탐험가 우에무라 나오미를 기념해서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음각된 개는 우에무라 나오미의 북극탐험 당시 썰매를 끌었던 개라고. 니콘이 북극탐험에 나선 우에무라 나오미를 위해 F2 3대를 특별제작했던 사실만 놓고 봐도 설득력 있다. 그리고 우에무라 나오미가 1984년 매킨리에서 실종된 해로부터 딱 10년이 지난 갑술년에 출시됐으니 더욱 신빙성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정확한 자료를 찾을 수 없으니 아쉬울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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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레고 카메라 

 

남자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장소 두 곳은? 목욕탕과 대형할인마트다. 아내에게 ‘대접’받으려면 무조건 기다리고 참아야 한다. “무슨 목욕을 이렇게 오래 하냐” “그만 고르고 가자” 등의 발언은 삼가는 것이 좋다. 목욕탕은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지만 대형할인마트는 그래도 구경거리라도 있다. 장난감 코너에서 시연용 게임기를 가지고 놀거나 프라모델 제품들을 들춰본다.

 

특히 레고가 있는 판매대에선 발길을 바로 떼기가 힘들다. 새로 입고된 스타워즈 레고 시리즈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레고 판매대에서 서성이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30대 중반)의 아저씨들이 많다는 점이다. 나만 철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얼마 전 <비비시> 방송에 출연한 데이비드 베컴이 “타지마할 레고를 조립하며 여가를 보낸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베컴의 이 한마디 때문에 5922개의 브릭(플라스틱 조각)이 들어 있는 300달러가 넘는 타지마할 레고의 판매량이 633%나 급증했다니 이것만 보더라도 레고가 단순한 아이들의 장난감은 아닌 셈이다.

 

1937년 덴마크에서 탄생한 장난감, 레고가 사랑받는 이유는 작은 ‘브릭’으로 어떤 물건이든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레고의 탄생은 목수였던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안센이 딸에게 줄 장난감을 만들면서부터. 지금과 같은 플라스틱 브릭의 모양을 갖춘 것은 한참 세월이 흐른 1955년이다. 작은 플라스틱 브릭을 쌓고 연결해 집, 자동차, 우주선, 배, 기차….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만들 수 있는 이 놀라운 장난감은 무궁무진한 즐길거리를 안겨준다.

 

당장 컴퓨터가 가까이 있는 독자라면 사진가 마이크 스팀슨의 플리커(www.flickr.com/photos/balakov)를 방문해 ‘클래식스 인 레고’편을 보시라.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 스티브 매커리의 ‘아프간 소녀’, 조 로젠탈의 ‘이오지마의 깃발’뿐 아니라 아널드 뉴먼이 피아니스트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를 촬영한 인물사진까지 우리가 알 만한 사진들을 ‘레고로 재현해’ 촬영했다. 20세기를 풍미했던 사진들의 ‘레고 버전’인 셈이다. 마이크 스팀슨의 재기발랄한 ‘레고 재현 사진’은 단순한 패러디의 수준을 넘어선다.

 

레고를 활용해 작품을 만드는 사진가도 있는데 ‘레고 카메라’는 없을까. 당연히 있다. 지난해 레고는 어린이를 위한 디지털카메라(사진)를 출시했다. 미국내 판매가격은 49.99달러. 300만 화소에 4배 줌 기능을 갖췄다. 메모리는 128MB밖에 되질 않는다. 2009년 출시된 디카로 보기 어려운 사양(?)이다. 레고 카메라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만든 ‘카메라 기능이 있는 장난감’으로 봐야 한다. 장난감처럼 아이들이 부담 없이 가지고 놀 수 있는 똑딱이 디카인 셈이다. 알록달록한 모양부터 아이들이 사진 찍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레고 카메라를 선물한다면 항상 아빠의 카메라에 관심을 갖는 아이에게 “아빠 카메라는 절대 만지면 안 돼”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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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핀홀 사진기 만들고 싶다면

 

새로운 디지털카메라가 나올 때마다 엄청난 성능에 놀란다. 에이치디(HD) 동영상 촬영은 기본이고 초점까지 잘 맞춰준다. 사람의 미소를 감지해 자동으로 셔터를 눌러주기도 한다. 손떨림 방지 기능은 기본이다. 다양한 상황에 맞게 자동으로 촬영모드가 바뀌어 사용자가 복잡한 조작을 할 필요가 없다. 이런 ‘똑똑한’ 디지털카메라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온다. 필름 레버를 돌리고, 셔터속도와 조리개값을 고민하고, 초점을 맞추고 마지막으로 숨을 고르며 셔터를 누르던 수동 필름카메라의 손맛을 느끼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가끔 상자 속에서 잠자고 있는 필름카메라를 꺼내 ‘공셔터’(필름을 넣지 않고 셔터를 누르는)를 날리는 것으로 향수를 달랜다. “카메라와 사람이 교감하던 시대는 갔다”고 자조하며 말이다.

 

 

“핀홀카메라(바늘구멍 사진기)로 찍은 사진을 구할 수 없을까요?” 후배의 부탁을 받고 끙끙댄 적이 있다. 핀홀카메라는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한 카메라 오브스쿠라(한쪽 면에 작은 구멍이 있는 어두운 방)를 그대로 구현한다. 내부를 검게 칠하고 빛을 완벽하게 차단한 상자에 작은 바늘구멍을 뚫고는 그 반대쪽에 필름이나 감광지를 붙이면 핀홀카메라가 완성된다. 원리는 간단하지만 실제로 핀홀카메라를 만들려면 상당한 공을 들여야 한다. 간단한 방법은 렌즈교환식 카메라(DSLR도 가능하다)에서 렌즈를 떼고 대신 바늘로 구멍을 뚫은 골판지를 붙이고 촬영하면 된다. 이때 골판지는 검은색이 좋고 바늘구멍은 정중앙에 위치해야 효과 만점이다. 카메라 내부에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바디캡이 있다면 바디캡에 바늘구멍을 뚫는 방법도 있다. 평상시에는 렌즈를 사용하다 핀홀카메라 사진을 찍고 싶다면 바디캡으로 바꿔 끼우면 되니 편리하다. 하지만 불에 달군 바늘로 바디캡에 깨끗하게 구멍을 내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여러 차례 도전을 했지만 이래저래 고민만 많아지고 쓸만한 핀홀카메라 사진을 얻지 못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세상엔 항상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쓸만한 물건으로 만들어내는 재주 좋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핀홀 바디캡’이라는 제품이 있는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핀홀아트(PinHoleArt)에서 만든 핀홀 바디캡은 렌즈교환식 카메라로 핀홀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사진가들을 위한 아이디어 상품이다. 0.25㎜ 구멍이 뚫려 있는 핀홀 바디캡을 카메라에 장착하고 촬영한 사진들은 흔들리고 초점이 맞지 않지만 아련한 맛이 난다. 삼각대 위에 핀홀 바디캡을 장착한 카메라를 올려두고 셔터를 오랫동안 열어두는 벌브 촬영을 하고 있노라면, 약간의 과장을 보태 1826년 니엡스가 노출시간이 무려 8시간이었던 최초의 사진촬영에 성공한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릴리스를 손에 쥐고 삼각대 곁에 쭈그리고 앉아 핀홀 사진을 찍는 재미도 최신형 디지털카메라의 위세에 묻힌 지 오래다. 어떤 사진이든 핀홀 사진 느낌이 나도록 바꿔주는 ‘첨단’ 기능을 가진 디지털카메라가 이미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혹시 손수 핀홀카메라를 만들어 보고픈 독자라면 다양한 제작기가 소개되어 있는 핀홀아트(www.pinholeart.com)를 방문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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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마니아를 위한 ‘홀가’ 시리즈

 

주류에 대한 반동은 어느 분야에나 존재한다. 남들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몸과 마음이 비딱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비주류’ 혹은 ‘소수자’라고 하던가. 카메라 동네도 마찬가지. 남들 다 쓰는 디지털카메라를 거부하고 끝까지 필름카메라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가 좀더 특별한 카메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구하기 힘든 ‘앤티크 카메라’나 선명한 사진을 기대하기 힘든(?) ‘토이 카메라’를 선택한다.

 

토이 카메라는 종류가 다양하다. 토이 카메라의 붐을 일으킨 로모, 토이 카메라의 원조 격인 다이애나, 여러 개의 렌즈가 달려 있는 샘플러, 어안렌즈가 달려 있는 피시아이, 36컷 필름 한 통으로 72장의 사진을 담을 수 있는 골든하프, 이안 리플렉스 카메라를 흉내 낸 BBF 등이 있다. 뭔가 특별한 카메라를 찾는 마니아들이 늘수록 수입되는 토이 카메라도 늘고 있다. 그중에서 홀가(Holga)는 인기가 높다. 대부분의 토이 카메라들이 35㎜ 필름을 쓰는 데 반해 홀가는 120㎜ 중형 필름을 사용한다. 가장 많이 찾는 모델은 120GN. 홀가 시리즈는 토이 카메라 마니아들이 로모와 더불어 한번씩 사용해보는 카메라다. 이런 마니아들의 인기를 등에 업고 3D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홀가 120-3D가 최근 출시되기도 했다. 중형 필름을 쓰는 카메라들이 대부분 고가인 것을 고려하면 홀가 120GN은 ‘껌값’ 수준이다. 가격은 5만원이다. 홀가의 매력은 사진의 주변부가 어둡게 나오는 ‘비네팅’ 효과다. 필름방 안에 빛이 들어오는 ‘빛샘 현상’은 홀가만의 매력(?)이다. 보통 카메라라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바로 반품하거나 수리점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빛샘 없는 홀가는 ‘팥소 없는 찐빵’이다. 허술한 마감이 오히려 구매력을 높인 경우다. 이런 상품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생각해봐도 홀가 외엔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홀가는 1982년 홍콩에서 만들어졌고, 중국에서 생산됐다. 홀가를 개발한 티 엠 리(T.M. Lee, 홀가 마니아들은 ‘홀가의 아버지’라 부른다)는 비싼 카메라를 구입할 수 없는 중국 노동자들을 염두에 뒀다. 홀가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재료는 값싼 플라스틱, 초기형 모델인 120G는 렌즈조차 유리가 아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서 단가를 낮췄다(120GN은 유리 렌즈를 달았다). 홀가는 한 엔지니어의 소박한 꿈이 숨어 있는 셈이다. 티 엠 리는 가진 자들만의 취미생활인 사진을 대중들도 쉽게 누릴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홀가를 마무리 엉성하고 볼품없는 ‘중국산’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홀가에 한번이라도 마음을 빼앗겨 본 적 있는 독자라면 사이캣 비스와스의 누리집(saikatbiswas.com)을 방문해 보시길. 산업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그는 현재 홀가 디지털카메라를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외관이나 성능, 액세서리까지 구체적인 ‘홀가. D’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의 바람은 티 엠 리가 그랬던 것처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고, 간단하게 촬영할 수 있는 ‘홀가’의 장점을 그대로 살린 디지털카메라를 만드는 것. 홀가 마니아와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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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파의 시련, 웃을수도 울수도 없구나 

 

‘1997. 7’은 너덜너덜한 코닥 플러스엑스 팬(Plus-x Pan) 필름 종이 포장지에 적혀 있는 유통기한이다. 지금은 단종된 코닥 플러스엑스 팬은 후배가 집에서 굴러다니던 것을 “필름카메라가 없다”며 내게 건네준 것이다. 넘겨받은 지 벌써 4년이 흘렀다. 유통기한이 13년이 넘은 필름을 냉장고에 넣어두고(필름도 냉장 보관하는 것이 좋다) 애지중지하고 있는 이유는 전장에서 마지막 총알을 아껴두는 병사의 심정이랄까. 더는 필름을 구할 수 없을 때 마지막까지 간직한 필름을 카메라(아마 니콘 F3가 될 테다)에 끼우고 하루 한 장씩 36일 동안 진지하게 사진을 찍겠다는 생각이다.

 

필름을 만들던 회사들이 하나둘씩 사업을 접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쉽게 구했던 필름들이 어느 순간 ‘품절’로 뜰 때는 불안한 마음마저 든다. 필름사업은 전세계 필름 판매량이 최고를 기록했던 2001년 이후 급격하게 사양산업으로 전락해 버렸다. 언제까지 필름을 구할 수 있을지 누구도 알 수 없다. 10년, 20년… 당장 사라지진 않겠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필름을 사용하려면 비싼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벌써 웬만한 필름들은 값이 뛴 지 오래됐다. 흑백필름 가운데 인기 있던 코닥 트라이엑스(Tri-x)는 이제 구할 수 없고, 그나마 생산되고 있는 코닥 티맥스(TMAX)는 한 롤에 7000원이 훌쩍 넘는다.

 

코닥뿐 아니라 후지, 일포드에서 나온 흑백필름들도 값이 몇 년 사이 상당히 올랐다. 슬라이드와 컬러 네거티브 필름도 마찬가지다. 필름을 살 때는 크게 심호흡 한번 해야 한다. 거기에다 현상비와 스캔비까지 생각하면 요즘은 필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부담이다. 그래도 가끔은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이유는 디지털보다 사진 찍는 ‘손맛’이 있기 때문이다. 그물로 던져 고기를 잡는 쪽이 디지털이라고 한다면 낚싯대 드리우고 가만히 기다리는 쪽은 필름이랄까.

 

필름 값이 오른다고 사진찍기를 그만둘 수는 없다. 필름카메라를 쓰는 사진가들이 택한 방법은 바로 ‘싼 필름 찾기’이다. 포장을 하지 않은 ‘벌크 필름’, 유통기한이 지난 ‘이월 필름’을 찾는 것은 기본이고 가격 저렴하고 품질 괜찮은 ‘변방 출신’ 필름들도 인기를 끌고 있다. 헝가리제 ‘포마’(FOMA)와 중국제 ‘럭키’, ‘상하이’가 들어온 것도 모두 필름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덕분이다.

 

페루츠(Perutz)도 1000원대라는 저렴한 가격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색감이 훌륭한 컬러 네거티브 필름이다. 페루츠는 독일의 유서 깊은 필름 생산회사였지만 1960년대 아그파에 합병되었다. 아그파에서 필름사업부만 따로 떨어져 나와 세웠던 아그파포토는 디지털카메라에 밀려 이미 2005년 파산했다. 1889년 최초의 흑백필름과 1936년 최초의 컬러필름을 개발했던 아그파의 기술과 저력을 믿었던 사람들은 파산 신청을 했어도 금방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100년 넘게 필름 시장을 주도했던 아그파도 디지털카메라의 파상공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경영권이 이리저리 넘어가는 우여곡절을 거친 뒤론 아그파는 시장에서 고급화 전략을 내세우는 코닥과 후지와는 반대로 저렴한 컬러 네거티브 필름만 내놓고 있다. 페루츠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아그파 필름의 일부분인 셈이다. 아그파가 겪고 있는 시련이 당장 필름카메라를 고집하는 주머니 가벼운 사진가에겐 도움이 되고 있으니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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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은 일단 기차로 보내야 했다 

 

고등학교 시절 자전거 페달을 숨이 넘어갈 정도로 열심히 밟아 필름 봉투를 역까지 배달했던 적이 있다. 지방일간지 기자를 하셨던 아버지의 심부름이었다. 마감 시간을 다투는 기사일 경우 현상도 하지 않은 필름을 부산행 열차편으로 본사에 보내고 기사는 전화로 불러주는 식이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일이다. 1990년대 초에는 그랬다. 필름스캐너가 대중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필름을 등기우편으로 보내거나 버스나 열차편을 이용해 전달했다. 인터넷만 연결하면 세계 어디서든 촬영 즉시 사진을 보낼 수 있는 현재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우리나라 안에서 일어난 일이야 이렇게 ‘직접 배달’이 가능하지만 나라 밖 소식을 담은 사진은 어떻게 주고받았을까?

 

“한국 언론이 (사진) 송수신기를 완전히 갖춘 것은 1983년이 되어서였다. <중앙일보>, <경향신문>에 이어 <조선일보>가 <에이피(AP)통신>을 통해 발주했다. 그 당시만 해도 이 전송기를 구입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왜냐하면 (에이피통신사가) 제한생산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그러나 수신 상태가 무척 좋지 않아 한 장을 수신하려면 몇 시간이 소요되기도 했다. 게다가 고장이 잦아 그 당시 사진부 기자들은 무척 고생했었다.”

 

1993년 출간된 <역사와 함께 발육하는 보도사진>(새소년, 김성배 지음)에 나오는 내용이다. 1983년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국내 언론사들은 <에이피통신>, <연합통신>, <합동통신>을 통해 국외 보도사진을 받아 썼다. 당시 국내 언론사가 사진 전송기를 갖추려고 한 이유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문이었다. 전송기를 갖추는 일은 4년 후 열릴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경쟁사와의 속보전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대비이기도 했다. 1980년대에 스포츠 일간지가 마구 창간된 이유이기도 하다.

 

니콘이나 캐논 등 메이저 카메라회사들은 올림픽이 열리는 시기에 맞춰 최신 기술이 집약된 신제품을 내놓았다. 언론사들도 거기에 발맞춰 사진장비를 업그레이드했다. 1980년대에는 <에이피통신>이 개발한 리팩스(LEAFAX), 니콘 NT 시리즈, 하셀블라드 딕셀(DIXEL)이 전송기의 대표 주자였다. 이 전송기들은 필름만 현상하면 스캔과 전송 작업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이전 전송기는 필름 상태로는 스캔을 할 수 없고 인화된 사진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외국 취재를 나가야 할 경우 확대기, 현상·인화 약품을 모두 가져가야 했다. 리팩스, NT, 딕셀의 무게는 모두 10㎏이 넘었지만 확대기까지 챙겨 가는 것에 비하랴.

 

리팩스나 NT, 딕셀의 등장은 해외 취재나 시간을 다투는 사진기자에겐 그야말로 개벽이었다. 하지만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의 징검다리 구실을 한 전송기의 시대는 길지 않았다. 디지털카메라와 인터넷의 발달로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역사와 함께 발육하는 보도사진>에 나오는 리팩스35(사진)의 사용 설명서 첫 문장을 옮긴다. 당시 사진기자는 가슴속에 ‘참을 인’ 자를 새기며 취재를 했을 듯싶다.

 

‘1) 코드를 정확하게 연결하고 전압을 꼭 확인(100V/220V) 한 다음 스위치를 켠다.(약 20분간 예열이 필요함)’(헉! 20분간 예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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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S 카메라의 기원 

 

심심하면 세계를 떠돌고 있는 여행자들이 인터넷에 올린 글과 사진을 찾아 읽는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세계를 떠도는 여행자들의 거칠지만 생명력 넘치는 여행기를 찾아 읽는 재미는 김용(진융)의 무협소설을 읽는 중독성과 버금간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고 되뇌며 글과 사진을 훑어보지만 어느새 나도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방랑벽이 도지는 것을 막는 특효약은 ‘구글어스’. 지구를 돌려(?), 가고 싶은 곳을 찍어 확대해 보는 것으로 부러운 마음을 달랜다.

 

요즘 인터넷에 올라오는 여행기에는 말미에 사진을 어디서 촬영했는지 구글맵이나 지피에스(GPS)와 연동되는 지도를 이용해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모두 위성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지피에스 덕분이다. 지피에스를 한번이라도 사용해본 사진가라면 이 기능이 얼마나 편한지 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외장형 지피에스를 따로 구입해서 여행을 떠났지만 최근에는 아예 지피에스 기능이 내장된 카메라를 가지고 간다. 1~2년 전만 하더라도 비싼 값을 치르고 촬영용 외장형 지피에스인 니콘 GP-1이나 소니 GPS-C1을 구입해야 했다. 아예 부품을 사서 직접 만들어 ‘탑재’하는 사진가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피에스 기능이 저렴한 콤팩트 디지털카메라에도 들어간다. 지피에스 부품 가격이 내려가고 소형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정확한 촬영 장소를 기억하고 싶은 사진가들의 강한 욕구를 카메라 회사에서 파악했기 때문이다.

 

최근에야 ‘지피에스 카메라’가 등장한 듯 보이지만 실제론 20년 전에 이미 선보였던 적이 있다. 1990년대 초반 코닥이 개발한 DCS 420 GPS-IR가 그것이다. 정부와 미군의 주문을 받아 개발 생산했던 이 사진기는 지피에스 기능뿐 아니라 음성녹음도 가능하고 적외선 사진까지 촬영할 수 있는 특별한 디지털카메라였다. 150만 화소 CCD를 장착하고 위치 정보를 기록하고 야간 촬영이 가능했던 이 사진기는 군사작전용이나 산림 생태 조사에 사용됐다.

 

DCS 420 시리즈는 DCS 420 GPS-IR처럼 특수한 기능을 가진 카메라뿐 아니라 똑같은 모양을 가진, 일반 사용자를 위한 모델도 함께 생산됐다. 니콘 F90s 몸체에 큼지막한 디지털백을 단 DCS 420(사진)은 위풍당당했다. 무게만도 1.7㎏에 육박했다. 필름카메라인 니콘 F90을 그대로 사용하고 거기에다 디지털 기능을 덧붙이려니 당시 기술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거대한(?) 디지털백의 3분의 1은 배터리가 차지했고, 나머지 부분은 저장 장치와 이미지 변환 장치였다. 이미지 파일을 외부로 옮기기 위해 스카시(SCSI) 어댑터까지 달려 있었다. 카메라에다 작은 컴퓨터를 덧붙인 듯한 DCS 420은 외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이미지 처리기술이 업그레이드된 DCS 460 시리즈로 탈바꿈했다. 1994년에 말이다. 당시로선 파격이었던 600만 화소의 DCS 460은 세계적으로 5000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하지만 코닥의 이 실험은 2000년대 이후 실패하고 만다. 독자적으로 카메라를 개발하지 않고 필름 대용인 디지털백에만 집중한 방식은 변화하는 시대를 따라잡지 못했다. 몇몇 모델이 호평받긴 했지만 사진가들은 카메라와 렌즈를 다른 회사에서 빌려 쓰는 코닥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뛰어난 디지털 기술을 가지고도 오랜 세월 황금알을 낳았던 ‘필름’을 버리지 못한 것이 코닥의 패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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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사진기자의 카메라, M3

 

전쟁터를 누비며 사진을 찍는 종군사진기자란 직업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만화영화 <에어리어 88>(국내엔 <공포의 외인부대>라는 제목을 달았다)을 보고서였다. 1989년 현충일에 깜짝 방영했던 <에어리어 88>은 당시 소년들에게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실제 중동 어딘가에서 일어났을 법한 전쟁을 배경으로 당시 실존했던 온갖 전투기를 볼 수 있는 초호화 버라이어티 만화영화였고, 스토리도 아동용답지 않게 제법 심각했다. 동료의 배신으로 어쩔 수 없이 용병이 된 주인공을 취재하려고 나선 록키는 한마디로 ‘멋졌다’. MD-4 모터드라이브를 단 니콘 F3로 ‘무장’했던 록키는 공중전을 취재하다 목숨을 잃는다. 록키가 탔던 전투기가 추락하고 그의 니콘 F3가 사막에 떨어져 반쯤 모래에 파묻힌 채 셔터소리를 내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1966년 2월25일치 <라이프> 표지 사진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구름이 낮게 깔린 석양 속으로 F-102 델타 대거(Delta Dagger) 편대가 날아간다. <에어리어 88>에서 나온 듯한 장면이다. 전투기 뒷자리에 앉아 조종석(콕핏·cockpit) 위로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촬영했던 주인공은 베트남전의 신화, 래리 버로스였다. 그는 1962년부터 1971년까지 베트남을 떠나지 않고 취재했던 <라이프>지 소속 종군사진기자였다. 전투부대원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전쟁터를 누볐던 래리 버로스의 사진은 베트남전의 진실을 보여주었다.

 

그는 당시 다른 종군사진기자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컬러필름을 썼다. 선홍빛 피, 검붉은 화염, 진초록 밀림. 그의 사진은 전쟁을 ‘흑백’으로 미화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표현했다. 그의 사진은 반전운동의 부싯돌이 됐고, <지옥의 묵시록>이나 <플래툰>, <햄버거 힐> 등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 큰 영향을 끼쳤다.

 

래리 버로스는 세번이나 ‘로버트 카파 메달’을 수상하고 <라이프>의 전쟁사진으로 커버스토리를 열번 넘게 장식했을 정도였지만 평소 종군사진기자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되물었다. “나는 항상 양심과 싸웠다. 혹시나 내가 다른 이의 슬픔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그러나 나는 베트남전을 기록하는 일이 (전쟁에) 무관심한 사람들의 가슴을 찌르리라 믿었다.”

 

흑백사진 속 래리 버로스의 모습은 선이 굵은 시인처럼 느껴진다. 며칠 동안 면도를 하지 못해 까칠한 수염, 굵은 주름살, 두꺼운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허름한 야전 상의에 머플러를 두른 채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소원은 “전쟁이 끝난 뒤 평화를 되찾은 베트남의 모습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래리 버로스는 그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에어리어 88>의 록키처럼, 취재에 나섰다 행방불명됐다. 1971년 동료 종군사진기자였던 앙리 위에, 켄트 포터, 시마모토 게이사부로와 함께 헬기를 타고 가다 라오스 국경 근처에서 총격을 받고 추락했다. 그들 가운데 다시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추락 사고가 일어난 지 27년이 지난 1998년, 미군 실종자 수색팀이 그가 타고 있었던 헬기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평소 사용했던 라이카 M3(사진 위)와 렌즈의 잔해만 수습할 수 있었다. M3 상판에 새겨진 일련번호가 그의 카메라란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밀림 속에 영원히 묻혀버릴 뻔한 래리 버로스의 M3는 추락 당시의 충격과 불길을 이기지 못하고 심하게 뒤틀리고 그을어 있었다. 몸체 부분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 27년 세월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래리 버로스의 부서진 M3는 목숨을 담보로 진실을 담고자 했던 종군사진기자의 인생을 담은 아이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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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카메라 향수 자극한 X100

 

“서툰 목수가 연장을 탓하는 법, 진정한 고수는 연장을 가리지 않는다”는 옛말을 철석같이 믿는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성능 좋은 카메라가 꼭 좋은 사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어떤 카메라를 사용하든 사진가의 안목과 내공이 사진 수준을 결정하는 법이다. 초보 시절에는 값 비싸고 폼 나는 카메라로 촬영하면 덩달아 사진 실력도 높아지는 줄 알았다. 카메라에 대한 욕심과 사진 실력은 따로 논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카메라 욕심이 강해질수록 오히려 사진은 뒷전이었다. 사진보다 ‘카메라’라는 물성 그 자체의 매력에 빠져버렸다고 할까. 손님이 안방을 차지하고 누운 꼴이다. 꽤 많은 카메라가 필자의 손을 거쳐갔고, 사진 실력보다 카메라 보는 안목만 높아졌다.(덕분에 이 글을 쓰고 있긴 하다.) 이제는 ‘지름신’에 현혹되지 않고 바꿈질의 수렁쯤은 쉽게 피해갈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을 쌓았다. 값나가는 카메라는 내다팔고 대신 저렴한 카메라로 바꿔 꽤 오랜 기간 ‘다운그레이드’ 생활을 즐겼다. “사진은 카메라가 아닌 사진가의 마음으로 찍는 것이다”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 말이다. 그런데 최면을 깨는 카메라가 등장할 줄이야.

 

파노라마 카메라 TX 시리즈, 즉석카메라 인스탁스 미니, 폴딩형 중형 필름카메라 GF670 등. 이 3가지 모델만 놓고 보더라도 후지필름의 행보는 다른 필름 제조회사나 카메라 회사와는 면모가 다르다. 어느 때는 한발 앞서가다가 아예 시대의 흐름을 무시하는 제품을 내놓기도 한다. 하셀블라드와 함께 출시했던 TX 시리즈(하셀블라드는 X-PAN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는 파노라마 형식에 목말라 있던 사진가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틈새시장을 제대로 파악한 카메라였다. 폴라로이드(미국의 광학기기 제조회사)가 즉석카메라와 즉석필름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뗐지만 오히려 후지필름은 인스탁스 미니에 공을 들였다. 폴라로이드는 역사의 뒤편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인스탁스 미니는 지난 10년 동안 100만대가 넘게 팔리는 상품으로 자리잡았다. 캐논, 니콘 등 모든 메이저 카메라회사들이 필름카메라 생산을 중지하고 더 뛰어난 디에스엘아르(DSLR) 카메라 개발에 집중하는 동안 후지필름은 ‘포이크틀렌더’(일본 카메라회사)와 손잡고 복고 노선을 걸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GF670. 디지털카메라가 완전히 자리잡은 2009년, 중형 필름을 사용하고 20세기 초기 주름상자가 있는 폴딩형 카메라를 재현한 GF670의 등장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지난 9월 독일 쾰른에서 열린 세계 최대 사진 기자재전인 포토키나(Photokina)에서 후지필름은 GF670에 이어 또하나의 ‘복고풍 카메라’ 시제품을 공개했다. 라이카 M과 후지필름의 콤팩트 카메라 클라세의 디자인을 섞어놓은 듯한 디지털카메라 X100(사진)이 주인공.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오마주가 느껴지는 X100은 출시 예정일조차 아직 발표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카메라 애호가들 사이에는 입소문이 퍼졌다. 호불호가 있겠지만 아직도 필름카메라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사진가들에게는 확실하게 매력적이다. 둥글둥글한 다이얼, 질긴 검은 가죽으로 감싼 무광 크롬 몸체, 완벽하게 레인지파인더 필름카메라의 외형과 느낌을 살려놓은 X100 디자인은 독자노선을 걷는 후지필름만의 남다른 감성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X100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는 동안 큰 즐거움에 빠져서 지름신에 휘둘리고 말았다. 그동안 용맹정진 면벽수행하며 쌓았던 공덕(?)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아~ 나약한 나의 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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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 기술 미리 알아본 노벨상

 

올해 노벨상은 유난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중국 인권운동가 류샤오보가 중국 정부의 탄압으로 시상식에 불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그가 노벨상 수상식에 못 가도록 여러 나라에 압력을 행사했다. 힘이 있다고 마구 휘두르면 불량배와 다름없다.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200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의 이름을 되새겨 보자. 윌러드 보일과 조지 스미스, 40년 전 고체촬상소자(전하결합소자·CCD)를 개발한 주인공이다. 1969년 10월 미국 벨연구소 반도체 분야 연구책임자였던 윌러드 보일과 연구원 조지 스미스는 빛을 전기신호로 바꿀 수 있는 시시디를 개발해 동료들 앞에서 시연했다. 아마 그들도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이 미래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끼칠지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시력을 잃은 사람에게 ‘전자눈’을 시술하는 것도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지난달 뉴욕주립대 사진학과 와파 빌랄 교수는 자신의 머리(정확하게 위치를 말하자면 뒤통수)에 카메라를 ‘이식’했다. 머리 두피를 절개해 티타늄 거치대를 달고 거기에 조그만 카메라를 장착했다. 머리 뒤에 눈을 단 최초의 인간이 된 셈이다. 물론 그의 뒤통수에 달린 ‘눈’은 시신경으로 직접 연결되진 않는다. 하지만 실시간 영상 전송장치를 통해 와파 빌랄 교수가 ‘제3의 눈’으로 보는 영상은 15일부터 웹사이트(www.3rdi.com)에서 생중계된다. ‘제3의 나’(The 3rd I)라고 이름 붙은 그의 엉뚱하고 기발한 퍼포먼스는 1년 동안 계속된다. 예술가의 넘치는 창작 욕구는 뒤통수가 불편한 것쯤으로는 꺾을 수 없는 모양이다. 하여간 그가 이런 퍼포먼스를 기획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고성능 시시디와 소형화되고 있는 디지털카메라 덕분이다.

 

아마 21세기가 끝나기 전 애니메이션 <요코하마 매물기행>(국내에는 원작이 <카페 알파>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의 안드로이드 주인공처럼 이미지 데이터를 몸 안의 저장 장치에 담아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거나, ‘600만불의 사나이’처럼 줌 기능을 가진 시신경에 직접 연결된 전자눈을 구입해 장착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모든 것은 몇 년 앞을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기 때문에 10년 내에 손에 잡히는 현실로 다가올 수도 있겠다.

 

그런데 카메라, 캠코더, 컴퓨터, 휴대전화 등 온갖 전자기기에 사용되는 윌러드 보일과 조지 스미스가 개발한 시시디 기술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곳은 어딜까. 바로 일본의 소니였다. 1969년 시연 이후 2년 뒤 조지 스미스는 세계 최초의 흑백 시시디를 개발하고 소니는 벨연구소에서 시시디 기술을 이전받는다. 검증되지 않은 신기술에 대한 소니의 과감한 투자는 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빛을 볼 수 있었다. 1978년이 되어서야 상품으로 쓸 수 있는 시시디 개발에 성공했고 1981년 세계 최초의 상용 디지털카메라 마비카(Mavica)를 선보였다. 마비카의 등장은 그야말로 개벽이었다. 캐논, 니콘 등 메이저 카메라 회사가 뒤늦게 시시디를 장착한 디지털카메라의 ‘상품성’을 알아차렸지만 오랜 세월 축적한 소니의 시시디 제작 기술을 쉽게 따라잡긴 힘들었다.

 

선견지명 덕분에 오랜 세월 소니는 시시디 공급자로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디지털카메라뿐 아니라 시시디가 들어가는 영상 장비는 소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지금도 많은 카메라 회사들이 소니의 시시디를 가져다 쓰고 있다. 소니는 캐논, 니콘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미놀타를 인수한 뒤 단숨에 카메라 업계의 강자로 떠올랐다. 기업의 맷집이 강하려면 역시 기술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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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렌즈, 추억의 삼양옵틱스

 

영화 <클래식>의 미술감독을 맡았던 송윤회 선생님의 작업실에 쌓여 있는 책 꾸러미에서 1989년 1월호 <디자인 저널>을 발견했다. 뒤표지 전면광고에 눈길이 멈췄다. 광고를 실은 기업은 삼양옵틱스였다. 20년도 더 지난 잡지에서 삼양옵틱스 광고를 발견할 줄이야. 자동카메라, 렌즈, 쌍안경 등 생산하는 제품(무려 114개, 지면으로 보여줄 수 없어 아쉽다)으로 페이지 전체를 빼곡하게 채웠다. 디자인 잡지에 싣기엔 촌스럽기 그지없는 광고지만 무엇을 만드는 회사인지 독자에게 확실하게 알려준다.

 

우리나라에서 카메라나 렌즈를 만드는 회사가 ‘삼성’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삼양옵틱스가 설립된 해는 1972년(당시 회사명은 ㈜한국와코),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카메라 광학 제품 만드는 일을 해왔다. 삼양옵틱스 이전에는 대한광학(1967년)이 문을 열어 카메라 ‘코비카’ 시리즈를 생산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 중반 문을 닫았다. 대부분의 부품을 국산화했던 브랜드였다. 그나마 외길을 걷고 있는 곳은 현재로선 삼양옵틱스가 유일하다.

 

삼양옵틱스의 전성시대는 1980년대 중반이었다. 삼양옵틱스의 렌즈 브랜드인 ‘폴라’(Polar)는 세계 교환렌즈 시장에서 상당한 점유율을 차지했었다. 삼양옵틱스 누리집 자료에 따르면 ‘40%’라고 하지만 정확한 수치로 보긴 힘들다. 하지만 폴라 렌즈가 당시 많은 인기를 끌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폴라 렌즈의 가장 큰 경쟁력은 ‘가격 대비 성능’이었다. 카메라 애호가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싼값으로 렌즈를 구할 수 있었고 빼어난 결과물은 아니지만 참지 못할 정도로 참혹(?)하지도 않았다. 굳이 수치로 표현하자면 내가 치른 값의 150%에 해당하는 성능을 보여줬다고 할까. 니콘이나 미놀타 정품 렌즈 하나 살 돈이면 약간의 과장을 섞어 중고 폴라 렌즈를 화각별로 모두 구입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장비 욕심은 많았으나 정작 카메라 가방은 텅 비어 있었던 대학 시절(미놀타 X700MPS를 썼다) 폴라는 주머니 사정에 구애받지 않고 입맛대로 고를 수 있는 유일한 렌즈였다. 그중에서도 미놀타 카메라에 맞는 135㎜ F2.0 폴라 렌즈는 오랫동안 함께했었다.(폴라와 함께 값이 저렴한 렌즈 가운데 비비타(Vivitar)도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화각을 쉽게 구하기 힘들었다.)

 

단골로 다니던 카메라 가게에 폴라 렌즈를 다시 되팔라치면 눈물을 머금고 거의 거저 넘기다시피 했다. 그렇게 넘긴 렌즈들은 역시나 주인아저씨의 눈길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바로 진열장 아래 구석자리에 처박혔다. 라이카, 카를차이스, 하셀블라드, 롤라이, 니콘, 캐논…. 진열장에서 대접받고 있는 카메라와 렌즈에 비교하면 찬밥 신세였다. 하긴 폴라 렌즈를 찾는 나 같은 손님도 주인아저씨에게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윤도 남지 않는 저렴한 중고 카메라와 렌즈들만 산다고 매번 귀찮은 질문만 받았으니 말이다.

 

폴라 렌즈는 계속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수동 필름카메라와 함께 누렸던 전성시대는 끝났지만 디에스엘아르(DSLR)용 폴라 렌즈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가격은 ‘착하다’. 지난해 출시된 니콘용 폴라 85㎜ F1.4 렌즈의 가격은 ‘단돈’ 36만원. 똑같은 화각과 조리개 값을 가진 니콘용 카를차이스 렌즈의 인터넷 최저가격 146만원과 비교하면 딱 4배다. 폴라 85㎜ 렌즈 사용기를 찾아 읽어보니 ‘가격 대비 성능비’가 월등하다는 이야기가 많다. 여전히 제값은 하는 폴라 렌즈다. 그런데 왜 ‘가격 대비’란 말이 그렇게 가슴에 걸리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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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라이 먹은 삼성, 오 놀라워라

 

1995년이다. 삼성이 독일 카메라 회사인 롤라이를 인수한 해는.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군 복무 중이었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가 보내준 사진 잡지에서 삼성이 롤라이를 인수했다는 기사를 고참의 눈치 보며 읽었다. 한달에 한번 ‘보안필’ 도장이 찍힌 사진 잡지를 받아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사진 잡지 구독은 팍팍한 군대 생활에서 큰 즐거움이었다. 내무반에는 별 읽을거리가 없던 터라 시간만 나면 꺼내 읽었다. 카메라 광고를 보며 제대만 하면 손에 넣겠다고 결심했던 카메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삼성이 롤라이를 인수한다는 소식을 읽었을 때 충격은 엄청났다. 20세기 초(1920년이다)부터 수많은 명품을 만들어온, 사진 역사의 한 축을 받치고 있던 롤라이가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사실도 꽤나 놀라운 일이었지만 삼성이 롤라이의 주인이 된다는 사실은 더더욱 믿기 힘들었다. 기사를 보면 삼성이 롤라이에 투자하는 연구개발비는 2100만마르크, 당시 환율로 117억원이었다. 세계적인 카메라 회사의 연구개발비치고는 적다는 생각이 들지만 롤라이의 한해 매출액이 5000만마르크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매출의 40%가 넘는 돈을 재투자하는 삼성으로서는 큰 손해를 감수한 모험이었다. 오랜 세월 축적된 롤라이의 기술력과 삼성의 자본이 만났으니 엄청난 카메라들이 곧 쏟아져 나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삼성과 롤라이의 합작품은 대중적인 자동카메라에 한정되어 있었다. 롤라이를 디딤돌 삼아 ‘명품’으로 부를 만한 삼성카메라가 나오길 기대했지만 관심을 끌 만한 카메라는 없었다.

 

삼성과 롤라이의 동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99년 결별했다. 하지만 미놀타, 롤라이, 펜탁스와 번갈아 손을 잡으며 끈질기게 카메라를 포기하지 않았던 삼성의 현재 기술력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여전히 인상 깊은 ‘한방’이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다. 만약 지금까지 롤라이와 삼성이 손을 잡고 카메라를 만들었더라면 어땠을까. 삼성이 롤라이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 ‘롤라이35’를 재발매하면 대박일 거라 생각했다.

 

1962년 독일 카메라 제조업체인 비르진의 수석 연구원이었던 하인츠 바스케는 렌즈가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일반적인 모양에서 벗어난 ‘특별한’ 카메라를 개발했다. 렌즈를 사용하지 않을 때는 몸체 안으로 집어넣을 수 있어 간편한 카메라였다. 이 남다른 외형 때문에 대량 생산으로 이어지기 힘들었다. 바스케는 이 카메라를 제품화하기 위해 라이카와 코닥을 찾았다. 하지만 두 회사 모두 렌즈를 교환할 수도 없고, 눈대중으로 초점을 맞춰야 하는, 상식을 뒤엎는 외형인 하인츠 바스케의 카메라를 외면했다. 결국 바스케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곳은 롤라이였다. 롤라이는 이 카메라에 ‘롤라이35’라는 이름을 붙였다.

‘롤라이35’가 출시된 해는 1966년. 그 후 1982년 싱가포르 공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롤라이는 16년 동안 모두 20가지 모델을 출시하며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롤라이35’의 인기 비결은 바로 라이카와 코닥이 외면한 독특한 외형, 그리고 뛰어난 해상력을 가진 카를차이스 테사 40㎜ 렌즈를 장착하고, 셔터와 노출계도 당시로선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컴퍼(Compur)와 고센(Gossen)의 부품을 사용한 덕분이었다. 굳이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독일 베엠베(BMW)의 소형 럭셔리카인 ‘미니 쿠퍼’ 같다고나 할까. 성능을 떠나 끊임없이 새로운 모델을 내놓는 것도 수집벽을 가진 카메라 마니아들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단종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20가지 ‘롤라이35’ 가운데 이가 빠진 모델을 찾아 이베이(ebay.com)를 뒤지는 ‘롤라이35’ 골수팬들이 많다. 명품은 세월이 지나도 대접받는 법이다. 삼성이 롤라이를 인수했을 때 복각판 ‘롤라이35’ 기념모델을 출시했더라면… 지금 생각해도 그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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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크필름의 탄생 그리고 소멸

 

현상 타이머, 현상 탱크, 릴, 필름 로더, 필름 피커…. 모두 먼지가 수북하게 쌓였다. 직접 필름을 현상하고 암실에서 인화지를 꺼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집에 암실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5~6년 전까지만 해도 직접 필름 현상을 하곤 했다. 코닥 D76(현상제) 분말을 정확한 온도에 맞춰 물에 녹여 1갤런(3.8ℓ)의 원액을 만드는 것부터 마지막으로 화장실 수건걸이에 집게를 달아 필름 말리는 일까지 필름 현상은 번거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현상이 끝난 필름을 스캔하는 일은 현상만큼 더디고 힘들었다. 한 롤 36장 가운데 잘 찍힌 사진을 한 장이라도 건진다면야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보람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나 싶을 때도 많았다.

 

필름 현상하는 법을 배울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손끝의 감각만으로 ‘암백’(빛을 차단한 검은 가방) 속에서 필름을 릴에 감는 일이었다. 스테인리스강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릴은 현상 탱크에서 필름이 겹치지 않고 골고루 현상액이 스며들도록 해주는 구실을 한다. 매거진 속에 돌돌 말려 있는 필름을 빼내 릴에 감을 때는 신경을 손끝에 집중해야 했고 완전히 익숙해지기 전까지 실수도 많았다. 실수를 할 때마다 왜 필름을 말아놓은 형태로 만들어 고생을 하게 만드나 불평을 늘어놓곤 했는데 이런 생각을 한 것은 필름 제조사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필름이 두루마리 휴지가 아닌 콤팩트디스크처럼 둥근 형태였다면 어땠을까. 가장 먼저 디스크 형태의 필름과 카메라를 만들어낸 인물은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조수로 일했던 윌리엄 딕슨이었다. 그는 1893년 포토렛(Photoret)이라는 주머니용 회중시계 크기의 작은 카메라를 만들고 그 안에 6장을 촬영할 수 있는 원형 필름을 넣었다. 세월이 흘러 1940년 엔지니어였던 제임스 딜크스가 디스크카메라에 대한 미국 특허를 얻고, 자이렉스(Gyrex)라는 카메라를 만들었지만 대량생산으로 이어지진 않았다.(제임스 딜크스는 자이렉스를 코닥에 넘기려고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인 1950년 면도날을 만들던 회사 에이에스아르(ASR)가 포토디스크(Fotodisc)라는 카메라를 출시했지만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원형 필름을 대량생산했던 회사는 딜크스의 아이디어를 버렸던 코닥이었다. 1982년 코닥은 실제로 디스크필름과 디스크카메라를 선보였다. 코닥이 디스크필름을 만든 이유는 대량의 필름을 한꺼번에 현상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롤필름은 현상기에 넣어야 할 경우 하나씩 ‘풀어야’ 하는 문제가 있지만 디스크필름은 가운데 뚫린 구멍을 이용해 금속막대에 차곡차곡 끼울 수 있어 간편하게 더 많은 양의 필름을 현상할 수 있었다. 디스크필름의 또다른 장점은 카메라를 ‘콤팩트’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디스크필름 크기는 지름 65㎜, 두께 0.18㎜에 불과했다. 코닥은 디스크필름을 사용할 수 있는 디스크 4000, 6000, 8000 등 3가지의 새로운 카메라를 함께 출시했다. 디스크 4000의 크기는 118㎜(가로)×78㎜(높이)×27㎜(너비), 담뱃갑보다 약간 큰 크기, 값도 67.95달러로 저렴했다. 디스크필름은 참신하고 여러가지 장점이 있었지만 이미 확고하게 자리잡은 롤필름을 위협하진 못했다. 디스크카메라는 1990년, 디스크필름은 1998년 생산이 완전히 중단됐다.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사라졌다. 아무리 멋진 아이디어라도 때와 운이 따르지 않으면 빛을 보기 힘든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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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또다른 상징 ‘패러 필드수트’

 

“당신과 키스하고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요. 코를 어떻게 해야 하죠?”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서 마리아(잉그리드 버그먼)가 로버트 조던(게리 쿠퍼)에게 속삭이는 대사다.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짧은 금발 곱슬머리 마리아의 모습을 기억하는 백발의 남성팬들이 아직도 많을 것이다. 1937년 스페인 내전이 배경인 이 영화의 원작은 내전 당시 공화파 정부를 지원한 국제여단에 참여했던 헤밍웨이가 썼다.

 

가뭄에 콩 나듯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누구를 위하려 종을 울리나>를 보면 항상 떠오르는 사진가가 있다. 스페인 내전을 취재했고, 잉그리드 버그먼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남자이며, 헤밍웨이와 게리 쿠퍼와는 죽이 척척 맞았던 사진가, 로버트 카파.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개봉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인물들은 모두 로버트 카파와 엮여 있다. 선 굵은 얼굴에 짙은 눈썹,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가졌던 매력남 로버트 카파의 주위에는 항상 친구와 연인이 있었지만, 그는 항상 누군가에게 얽매이기를 싫어한 보헤미안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파리를 찾은 잉그리드 버그먼과 우연히 마주친 로버트 카파와 동료 사진가 어윈 쇼는 그녀를 파티에 초대한다. 당시 유부녀였던 잉그리드 버그먼은 남편과 별거중이었다. 사랑에 빠진 잉그리드 버그먼은 전쟁이 끝나고 실업자 신세였던 로버트 카파를 미국으로 불렀다. 호황을 누리던 할리우드에서 로버트 카파는 영화 스틸 사진을 촬영했다. 잉그리드 버그먼은 로버트 카파와 결혼해 가정을 꾸미길 원했지만 로버트 카파는 평화로운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전쟁터를 찾아 떠났다. 첫사랑이었던 사진가 게르다 타로가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다 탱크에 깔려 죽은 이후 로버트 카파는 정착하지 못하고 항상 떠돌이 생활을 했다. 술과 도박을 즐겼으며, 일정한 거주지 없이 취재가 없을 때는 호텔을 전전했다.

 

스페인 내전,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이스라엘 독립전쟁, 인도차이나 전쟁 등 로버트 카파는 끊임없이 전쟁터를 찾아 헤맸다. 동료 사진가가 전쟁터에서 찍은 로버트 카파의 모습은 노련한 군인처럼 보였다. 필름을 넣었는지 주머니마다 부풀어 있는 야전상의, 비스듬히 쓴 철모, 앞섶에 단단하게 동여맨 낙하산 배낭, 비행기를 타기 전 긴장을 풀기 위해 입에 문 담배 등. 손에 쥔 카메라 롤라이플렉스만 빼면 사진가가 아닌 영락없이 전투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 군인이다. 1940년 헤밍웨이와 함께 유럽전선을 취재할 당시 사진 속 로버트 카파의 모습은 종군사진가 이미지의 전형이었다. 비와 추위를 막고 편하게 카메라와 필름을 넣고 다닐 수 있는 로버트 카파의 ‘헐렁한 야전상의’는 종군사진가의 필수품이었다.

 

유럽전선에서 로버트 카파가 애용했던 야전상의의 정확한 명칭은 미 공수부대원이 입는 ‘패러 필드수트 M42’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로버트 카파를 찍은 사진 대부분에 이 야전상의가 등장한다. ‘패러 필드수트’는 보병이 입는 야전상의보다 훨씬 세련된 디자인이다. 불필요한 장식은 모두 빼고 활동성과 수납 기능을 극대화했다. 주머니 덮개는 큼지막해서 물건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막아준다. 주머니 가운데 절개선을 넣어 더 많은 소지품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낙하산 외에 최소한의 장비만 가지고 적진에 신속하게 침투해 작전을 펼쳐야 하는 공수부대원들에게도 꼭 필요했겠지만 ‘패러 필드수트’는 필름과 카메라를 몸에 지니고 움직여야 하는 종군사진가에게도 딱 어울리는 아이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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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으로 ‘뽀샵질’ 하던 그때 그 시절

 

“이제 가게 그만둬야지. 30년 넘게 했는데 요즘 카메라는 잘 알지도 못하고…. 다들 인터넷으로만 거래를 하니 문 닫을 때가 됐어. 그거 마음에 들면 그냥 가져가.” 대학생 시절부터 드나들었던 카메라 가게에 오랜만에 들렀다. 카메라 진열장 위에 부옇게 먼지가 앉은 스포팅 물감(Spotting dye set·사진수정 물감)을 구경하고 있었다. 사장님이 챙겨 가라며 건네주셨다. 뚜껑도 따지 않은 새 물감을 손에 넣는 행운이라니. 사장님 말씀으로는, 두 세트를 도매상에 주문했는데 한 세트만 팔렸다고 한다. 나머지 한 세트는 먼지 쌓인 채 10년 넘게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예전에는 진열장에 각양각색의 카메라들과 사진용품들이 쌓여 있었지만 지금은 구닥다리 필름카메라와 잡동사니들만 있다.

 

 

필자가 가끔 웨딩촬영 아르바이트를 하던 19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사진관에서 수정용 물감으로 흠집을 없애는 작업을 종종 보곤 했다. 그 시절 사진 공부를 위한 필독서였던 <포토핸드북>(까치, 존 헤지코), <암실>(눈빛, 마이클 랭퍼드), <사진학 강의>(타임스페이스, 바버라 런던·존 업턴)에는 ‘작은 흠을 제거하기 위한 스포팅’에 대한 내용이 빠지지 않고 들어 있었다. <포토핸드북>에 나온 사진수정용 도구는 수정용 물감뿐 아니라 팔레트, 연필, 탈색제, 면봉, 칼, 확대경 등 모두 12가지. ‘작은 흠을 제거’하는 일에는 많은 준비물과 숙련된 기술, 예술가의 감각과 소양이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당시만 해도 사진 보정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어도비(Adobe)사의 포토샵은 누구나 쉽게 사진을 매만질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포토샵은 사진의 작은 결점을 제거하는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마법 같은 소프트웨어였다. 1990년 토머스 놀과 존 놀 형제가 개발해 어도비사를 통해 출시했던 포토샵은 21년 동안 발전을 거듭해 CS5 버전까지 나왔다. 사진가들에게 없어선 안 될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포토샵은 디지털카메라와 인터넷 사용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함께 영향력이 커졌다. ‘뽀샵질’은 일상어가 되었다. 사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간단한 사용법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다. 유명 여자 연예인의 ‘뽀샵’ 전후 사진에 대중의 관심이 쏠리고, 사실 그대로 보여줘야 할 보도사진조차 ‘뽀샵질’을 해 종종 문제가 되기도 했다. 포토샵 때문에 누구나 쉽게 사진을 입맛대로 바꿀 수 있게 되었지만 사진의 신뢰성은 그만큼 무너져 버렸다.

 

카메라 가게 사장님에게 받아온 수정용 스포팅 물감 포장지에는 여인의 옆모습을 형상화한 로고 옆에 ‘베로니카 카스’(Veronica Cass)라고 적혀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세인트피터즈버그 타임스>에 그의 부고 기사가 실렸다. 그는 실존 인물이었다. 2008년 10월, 8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베로니카 카스는 <사진보정의 시작과 끝> (Retouching from Start to Finish)이라는 책을 펴냈고 플로리다주에서 사진예술 아카데미를 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코닥은 그에게 ‘사진계의 위대한 여인’이라며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그의 책을 아마존서점에서 검색했더니 사인본이 있었다. 이제는 생산되지 않는 그의 스포팅 물감과 사인본을 함께 간직할까 욕심을 내다가 독자 서평을 읽고 그 생각을 버렸다. “전통적인 사진보정법에 관한 훌륭한 책이다. 만약 당신이 포토샵 기술에 대한 내용을 찾는다면 이 책은 알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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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필름 어디서 샀나요

 

그동안 쟁여뒀던 필름도 거의 다 쓴지라 필름을 사려고 오랜만에 카메라 쇼핑몰을 클릭했다. 들어갈 때마다 잘 팔리던 필름도 ‘품절’과 ‘절판’이란 붉은 딱지가 붙기 예사였는데 이번엔 구하기 어려웠던 폴라로이드 카메라 필름들이 대거 등장했다. 과거 폴라로이드 필름은 국내에선 구하기 힘들고 외국에서 ‘직수입’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값도 비쌌다. 열혈 폴라로이드 마니아들은 어떻게든 필름을 구하고 정보를 공유했다. 아마 폴라로이드 필름이 다시 등장한 것은 마니아들의 지극정성 때문이었으리라.

 

새롭게 태어난 폴라로이드 필름은 ‘폴라로이드’ 대신 ‘임파서블’이란 이름을 쓴다.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사용하는 필름이지만 ‘폴라로이드’란 단어를 쓸 수 있는 권리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필름은 임파서블사(the-impossible-project.com)에서 만들었다. 이 회사는 2008년 문을 닫은 네덜란드의 마지막 폴라로이드 필름 공장 기술자들과 오스트리아 기업가 플로리안 카프스가 손을 잡고 만들었다. 60년 넘게 10억대 이상의 카메라를 팔고 전성기 시절에는 한 해 1억5000만장이 넘는 필름을 팔기도 한 폴라로이드사는 2008년 파산 신청을 하고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갔다. 카메라와 필름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그때부터 폴라로이드 필름을 살리기 위한 ‘임파서블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폴라로이드 필름 공장에서 젊음을 바친 기술자들과 기업가 카프스가 나선 것이다. 이들은 자본금을 나누고 직접 회사를 운영한다. 그들의 꿈은 폴라로이드의 역사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 ‘임파서블’한 일을 임파서블사는 해냈다. 덕분에 폴라로이드 마니아들은 필름 걱정을 덜게 됐다.

 

 

‘10 꼬르소꼬모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는 세계적인 패션사진가 파울로 로베르시는 8×10인치 대형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30년 넘게 사진을 찍어왔다. 세계의 이름난 모델이나 스타들이 그의 카메라 앞에 서길 원한다. 파울로 로베르시는 2005년 김희선, 올해 화제가 된 송혜교 사진집을 제작해서 국내에도 꽤 친숙한 사진가다. 그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보그>나 <엘르> 같은 잡지, 유명 의류, 화장품 브랜드 광고에서 그의 사진을 봤을 것이다. 그는 8×10인치 대형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고집하는 이유를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폴라로이드는 흔들리기도 하고 영구히 보존되지도 않는 단점이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며 “무엇보다 폴라로이드는 자연 그대로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라고 밝혔다.

 

8×10인치 대형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하는 일은 대단히 번거로운 일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누르면 즉석에서 사진이 나오는 그런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아니다. 먼저 8×10인치 대형 카메라에 필름 홀더를 장착해야 한다. 셔터를 누르고 필름을 꺼내 필름 프로세서에 넣어 현상 과정을 거쳐야만 사진을 볼 수 있다. 파울로 로베르시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위해 30년 넘게 비싼 비용과 거추장스러움을 감내했다. 그나마 작은 판형의 필름은 임파서블사에서 다시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가 사용하고 있는 대형 필름은 B&H(bhphotovideo.com)나 프리스타일포토(freestylephoto.biz) 등 세계적 사진기자재 쇼핑몰에서도 구할 수 없다. 이베이에서 유통기한이 엄청나게 지난 8×10인치 폴라로이드 필름만 가끔 올라올 뿐이다. 내가 파울로 로베르시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면 작품 세계에 대해 묻기보다 필름 구입처부터 알아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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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국 <월간 포토넷>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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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napshot of the Camera’s History

From Leicas to iPhones


A poster from Pop Chart Lab’s “A Visual Compendium of Cameras” illustrates how the camera has evolved since the original Kodak (RIP) in 1888.

The 100 most important camera models from more than 100 years of photographic history — from amateur consumer to professional models — have deviated only slightly in structure.

Even the iPhone, which isn’t considered a camera but is the most popular form of photography today, is catalog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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