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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노래 이야기

트로트 이야기

by Wood-Stock 2009. 11. 21.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화제의 책] 트로트의 정치학 ~ 트로트, 80년 서민 생활과 함께한 멈추지 않는 '뽕끼'

기사입력 2009-11-21 오전 9:09:04

 

홍대 인디음악 폭발을 견인한 록밴드 크라잉 넛은 당시 주요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음악이 '조선 펑크'라고 말했다. 미국 뉴욕에서 시작한 펑크(Punk)에 한국적인 '어떤 것'을 삽입했다는 말이다. 그들의 음악에 들어간 한국적 정서는 바로 '뽕끼'이다.

 


크라잉 넛 멤버들이 공통으로 팬임을 강조한 가수가 바로 한국 고속도로 뽕짝 메들리를 평정했던, 그리고 메들리 가수로는 최초로 일본의 소니뮤직과 계약해 이듬해인 1996년에는 일본 대중음악 어워드에서 신인상마저 수상한 '이박사'인데서도 이를 알 수 있다. 고속도로 음반 판매량의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하지만 이박사의 음반들은 줄잡아 수백만 장은 팔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트로트의 정치학> 손민정 지음, 음악세계 펴냄. ⓒ프레시안

트로트. 시대에 따라 유행가, 변절된 엔카, 뽕짝 등 다양한 이름을 얻었다. 록, 포크, 댄스, 랩을 적극 받아들였던 젊은이들에게는 청산해야만 할 구시대의 상징이었다. 민족 정서, 일제 청산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역시 트로트는 천대받았다. 고상한 음악취향을 가진 이들에게는 천한 음악으로, 사회 변혁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친정부적 음악으로 역시 괄시받았다.

 

 

<트로트의 정치학>(손민정 지음, 음악세계)은 도저히 평론이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트로트를 문화인류학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5년 전 미국 텍사스주립대에 제출한 박사논문을 손질해 보다 읽기 쉽게 책으로 냈다. '정치학'이라는 말이 붙었으나 딱딱한 정치사와 연계해서 살펴보지는 않는다. 천대받기만 한 트로트를 온전한 음악장르의 하나로 복권해 어떻게 한국 사회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었는지를 긴 시간의 연구로 짚어냈다. 지난 80여년간 상처입었던 장르의 권위를 복구시켰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정치적이다. 트로트를 왜 다시 돌아봐야 하나? 책을 읽는 이도, 글쓴이도 여기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학생들의 열렬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트로트를 논문 주제로까지 끌고 갈 마음은 없었다. …(중략)… 그러던 중 나에게 경종을 울린 한 사람이 등장했다. 독설가로 유명한 그년느 미국 대중음악학자 엘리자베스 버그만이었다. 미국음악이 한국음악을 바꾸기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냐는 것이 첫 번째 질문이었고, 두 번째 질문은 왜 트로트라는 핵심적인 장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변을 빙빙 맴도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우리 주위에 있던 음악을 분석하면서 저자는 트로트를 단순한 음악 장르가 아닌, '음악 양식'으로 다룬다. 레코딩 기술은 어떻게 트로트의 대중화에 기여했는지, 트로트는 과연 단순히 2박 계열의 단순한 리듬에만 의존하는 저급한 음악인지, 엔카의 영향을 받은 음악이 맞는지를 책은 시간의 순서를 따라 훑어간다.


그리고 왜 아직도 <전국노래자랑>과 같은 장수 프로그램이 인기를 유지할 수 있는지, 얼굴없는 메들리 가수들이 그리도 많은지, 왜 무명 트로트 가수들은 여전히 반짝이 의상을 입고 무료 자선공연을 그리도 열심히 다니는지에 대해서도 읽는이로 하여금 추론의 여지를 제공해준다.


이 책의 구성은 시대순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트로트 80년 역사를 따라오며 이 음악장르가 시대에 따른 정치·사회·문화적 변화를 맞아 어떻게 살아남고 변신했는가를 되짚어볼 수 있다.


책을 읽고 나면 아마도 당신은 이런 의문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트로트는 과연 반계급적, 비정치적 음악이 맞나?'라고. 60년대 흐르는 머지강을 바라보며 고된 일상을 살던 영국의 노동자들은 비틀즈가 부르는 로큰롤(Rock & Roll)에 힘을 얻었다. 미국의 흑인들은 미시시피강 유역에서부터 전국으로 블루스(Blues)를 전파시켰고 이는 이후 리듬 앤 블루스(Rhythm & Blues), 솔(Soul)로 이어져 흑인들의 삶을 어루만졌다. 자메이카의 흑인들은 해방과 사랑의 메시지를 서정적이면서도 구슬픈 레게(Reggae) 음악에 담아 세계로 날려보냈다.


한국에서는? 30년대 일제의 통제하에 송출되던 라디오 방송에서, 50년대 전쟁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았던 부산항 어디메서, 60~70년대 개발독재시기 청계천변의 가발공장 한켠에서, 80년대 광주시내 한복판을 내달리던 택시 운전기사의 휘파람에서 트로트는 흘러나왔다. 서민들의 격동의 인생을 함께 내달렸던 트로트는 지금도 전국 고속도로 곳곳을 달리는 주름진 화물차량 운전자의 귓등을 간지른다.

 

/이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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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어르고 달랜 ‘뽕짝 80년사’
일제문화 잔재서 이젠 전통가요로 한국인 대표적 소통수단 자리매김

〈트로트의 정치학〉손민정 지음/음악세계·1만6000원

 

 

트로트. 2박 계열의 단순한 리듬과 ‘라-시-도-미-파’로 구성된 단음계, 독특한 꺾기 창법이 두드러진 한국 대중음악의 한 갈래다. 기원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일본 엔카에 뿌리를 둔 ‘왜색 음악’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서양 폭스트로트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으로 발전해온 한국의 전통가요 장르라는 의견도 있다. 그래서 일부에선 ‘전통가요’라 부르기도 하는데, 보통은 ‘뽕짝’이란 속된 이름이 통용된다. ‘후지고 촌티 난다’는 뜻의 ‘뽕필’은 그 파생어다.

 

<트로트의 정치학>은 5년 전 글쓴이가 미국 텍사스주립대에 제출한 박사논문을 손질한 책이다. ‘정치학’이란 제목에 지나친 기대를 거는 건 좋지 않다. 트로트라는 대중음악 장르의 형성과 변천 과정을 생산자-소비자의 입을 빌려 기술할 뿐, 그 심층을 복류하는 권력관계의 분석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한 탓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트로트의 문화사’다.

 

트로트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선 몇 차례 논쟁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게 1980년대 중반의 ‘뽕짝논쟁’이다. 뚜렷한 승자 없이 마무리된 논쟁이었지만,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민족주의가 압도하는 전반적 분위기 속에서 트로트에는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일제강점기의 문화적 잔재”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글쓴이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싹튼다. “이 논쟁에서는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 바로 이 음악을 만들고 사랑해온 사람과 그들의 몸부림이다. 한국인은 트로트를 통해 세상과 역사에 맞서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타협하며 살아가는 존재의 의미를 찾아나갔다.”

 

 

» 1960년대 말 한국 트로트의 라이벌 나훈아(왼쪽)와 남진, 이미자(가운데).

1920년대, 처음 트로트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저 ‘유행가’라고 불렀다. 아직 대중음악 초창기라 다양한 장르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특별히 이름을 지어 부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 활동했던 가수들이 고복수·김복희·선우일선·왕수복·이난영·전옥·채규엽 등인데, 여성들이 주로 기생이나 배우, 지방극단 출신이었던 반면, 남성들은 유학을 다녀오거나 클래식을 전공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라디오 보급률이 높지 않아 방송사의 힘이 세지 않았던 탓에 당시 음악산업을 좌우하던 것은 콜럼비아, 빅터, 태평 등 5대 레코드 회사였는데, 대부분의 노래들은 레코드사에 소속된 문예부장들이 만들었다. 평소 유행가의 유해성을 역설했던 홍난파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트로트의 성숙기였던 1950~60년대는 전쟁과 혁명, 군사반란의 시대였다. 트로트는 전쟁의 고통을 어루만졌고, 때로는 권력과 야합하기도, 때로는 저항하는 민중 편에서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면서 어두운 현대사의 터널을 통과했다. 이 시기는 이미자와 배호, 남진, 나훈아의 시대이기도 했다. 미국 팝 음악이 밀려들면서 젊은이들을 매료시켰고, 트로트는 끊임없는 왜색 시비에 시달리면서 팝의 스타일을 절충한 ‘뉴트로트’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위축돼 있던 트로트는 1980년대 든든한 원군을 만나는데, 디스코였다. 디스코는 트로트를, 들으며 즐기는 음악에서 춤을 위한 배경음악으로 진화시켰다.

 

“디스코는 트로트에게도 해방의 기회를 주었다. 리드하는 남자의 역할 분담이 확실한 사교춤에서 해방돼 남녀 모두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춤을 췄다. 소위 막춤이 가능해진 것이다. 트로트는 비애의 노래에서 희열의 댄스로 변했다.”

 

이 시절 전국의 고속도로 휴게소를 점령한 것은 트로트 메들리였다. 봄가을의 고속도로는 무도장이 된 관광버스들이 질주했다. 80년대 중반 3저호황이 가져다준 상대적 풍요의 선물이었다. 디스코를 만난 트로트는 이후 카페 트로트 메들리, 댄스 트로트 메들리, 테크노 트로트 메들리로 나날이 진화했고, 이런 장르적 발전은 2000년대 트로트가 ‘왜색’의 굴레를 벗고 ‘전통가요’의 지위를 획득하는 데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트로트는 이제 어린이집 재롱잔치에서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선거 로고송에 이르기까지 가장 직접적인 한국인의 소통방법으로 자리잡았다. 십대 아이돌 그룹들마저 댄스 트로트의 대열에 합세한 오늘의 상황을 두고 글쓴이가 내리는 진단은 이렇다.

 

“이제 누구도 트로트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게 됐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형화돼 전해지는 ‘전통’이 아닌, 현재적 의미에 맞게 ‘함께 만들어가는 전통’으로서 트로트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200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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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의 정치학' 손민정

"끈질긴 생명력… 트로트는 바로 한국인 모습"
 

시쳇말로 '뽕필'이라는, 유치하고 남루하고 왠지 남우세스러운 한국 전통 대중음악의 정서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복권하는 책이 나왔다. 미국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주립대에서 음악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손민정(사진)씨가 쓴 <트로트의 정치학>(음악세계 발행). 손씨는 한국음악, 그리고 한국인만의 틀질을 당당히 '트로트 스타일'이라 규정한다.

 

"트로트는 한국 서민의 끈질긴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음악의 형식이 변화해도 지켜지는 고집이 있지요. 우리는 '우리다운' 모습을 부각시켜 개발하고 자랑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본래 서양음악과 작곡 이론을 전공한 손씨는 석사 논문 주제를 스페인 세속가요로 잡으면서부터 세계의 다양한 음악이 지니는 고유한 가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음악의 정치ㆍ사회학적 요소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음악인류학이라는 낯선 분과에 대해 그는 "다양한 음악이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소개했다.

손씨는 책을 통해 트로트의 음악적 분석과 사회문화적 해석을 함께 시도한다. 트로트는 강한 2박 구조에 근거한 흥겨운 리듬과 간단한 선율구조, 반복적 후렴구 등이 특징인데 이것은 다양한 문화권의 서민 대중가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라는 것이다. "터키의 아라베스크, 미국의 컨트리, 한국의 트로트에는 모두 사람들이 살아가는 끈적끈적한 이야기가 묻어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트로트를 즐기는 취향을 스스로 부끄러이 여기는 것을 쓸데없는 자격지심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학생들을 4년 동안 가르치면서 실험해본 적이 있어요. 록음악부터 이것저것 한국 음악을 들려줬는데 심드렁하더군요. 그런데 트로트에는 눈과 귀를 집중했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눈치보기는 소주와 막걸리를 마시면서 와인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에요. 오히려 21세기 세계인들은 개성있는 친구를 원합니다."

"애정이 없는 인문학 연구는 불 꺼진 모닥불과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손씨는 트로트를 연구해 온 과정이 철들어가는 과정과 같았다고 얘기했다. "트로트를 연구할수록 트로트를 사랑하게 되었고, 트로트를 즐기는 한국인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가식적인 제 자신의 본모습을 깨달으며 그 소중함을 느끼는 과정이었다고 할까요. 끈질긴 생명력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 그것이 트로트의 매력이며 또 한국인의 미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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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의 정치학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트로트는 구세대층이 선호하는 음악, 단순하기 그지없는 네 박자의 낡아빠진 노래 장르 정도로 취급받았다.

경제적으로는 하층민, 세대로는 중장년층 이상, 예술성으로는 저속하고 촌스러운 수준의 노래 등이 트로트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또 음악적 양식의 변화를 외면하고 언제나 비슷한 리듬, 비슷한 전개, 비슷한 가창력, 가수마다 비슷한 의상(남성가수의 경우 8:2의 가르마에 반짝이 의상, 부담스러울 정도로 느끼한 연기 표정) 등이 강하게 인식돼 왔다.

그러나 최근 한국사회에서 트로트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신세대 트로트 가수 장윤정이 공중파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엔터테이너로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난 세기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만큼이나 한국의 가요, 문화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99년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장윤정이 트로트 전문 가수로의 변신은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주목을 받았다. 이후 라디오, 인터넷, 휴대폰 벨, 컬러링 등의 분야에서 급속히 인기를 끌면서 새로운 트로트 스타가 탄생했다.

일리노이 주립대학(음악학과) 객원교수를 지낸 손민정씨가 일제강점기에서부터 오늘날까지 한국 근대사와 맥을 같이한 음악장르 트로트를 소재로 '트로트의 정치학'을 펴냈다. 이 책은 '뽕짝'이라는 비하와 일본 엔카의 아류라는 폄하 속에서 오늘날의 트로트가 있기까지 트로트의 형성, 성숙, 지역화, 전통화의 과정을 연대기 순으로 다뤘다.

21세기 초 장윤정의 등장은 장기화되는 국내 음반시장의 불황을 극복하는 장르로 트로트를 급부상시키는 계기를 가져왔다. 기존의 장르가 10·20대에 집중된 편향된 마케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지닌 반면, 트로트는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친근하게 접근하고 즐길 수 있는 음악 장르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다양한 마케팅 기법으로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블루오션으로 수용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트로트가 있기까지를 연대기 순으로 보면 '트로트의 형성(1920년대 중반~1945년)', '트로트의 성숙(1945년 독립~1970년대)', '트로트의 지역화(1980년대~1990년대 초)', '트로트의 전통화(1990년대~현재) 등 네시기로 구분된다.

작가는 이 책에서 지난 1980년대 '뽕짝논쟁'에서 정작 트로트 음악의 생산자와 수용자가 소외된 점을 지적했다. 당시 기성문화에 저항적이었던 젊은이들과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의 비난으로 트로트 음악이 일제강점기가 남긴 부끄러움으로 매도되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또 일본 엔카의 아류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한다. 미국의 록이나 한국의 트로트가 자연스럽게 장르로 자리 잡으며 통용된 데 비해 일본의 엔카는 국가적 개입을 통해 만들어진 전통가요 장르라고 주장했다.

/ 김수미기자 (충북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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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깔아뭉갰던 트로트

트로트는 '뽕짝'이라는 비하와 일본 '엔카'의 아류라는 폄하 속에서도 대중과 함께 온 장르다.
'트로트의 정치학'은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관통해온 트로트의 미학을 생생한 현장을 통해 고찰해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트로트는 구세대가 선호하는 구식 음악, 단순하기 그지없는 네 박자의 뽕짝 리듬에 천편일률적인 내용의 가사가 얹어진 음악 등을 이유로 낡아빠진 장르로 취급받았다. 경제적으로는 하층민, 세대로는 중장년층 이상, 예술성으로는 저속하고 촌스러운 수준의 노래라는 따위의 인식이 트로트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아울러 음악적 양식의 변화를 외면한 채 언제나 비슷한 리듬, 전개 구조, 가창 방식, 의상 등을 고집하는 몰개성의 대명사로 굳어져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트로트를 대하는 시선은 사뭇 달라졌다. 대표적인 신세대 트로트 가수인 장윤정(29)이 보기다. 다양한 공중파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인기를 누리는 등 폭 넓은 활동영역을 자랑하고 있다. 장기화되는 국내 음반시장 불황에서 장윤정의 등장은 트로트라는 장르에 대한 새로운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다.

댄스, 발라드, R & B, 힙합 등의 장르는 10대와 20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드러냈다. 반면, 트로트는 세대를 초월한 장르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다양한 마케팅 기법으로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블루오션으로 수용되기에 이르렀다.

책은 오늘날의 트로트가 있기까지를 연대기 순으로 살펴본다. ▲트로트의 형성(1920년대 중반~1945년) ▲트로트의 성숙(1945년 독립~1970년대) ▲트로트의 지역화(1980년대~1990년대 초) ▲트로트의 전통화(1990년대~현재) 등 네 시기로 구분해 트로트가 자리매김한 배경을 설명했다.

제목 '트로트의 정치학'은 1980년대 '뽕짝논쟁'에서 정작 트로트 음악의 생산자와 수용자가 소외됐던 점을 지적한다는 의미다. 당시 기성 문화에 공격적인 저항으로 맞섰던 젊은이들과 민족주의를 표방한 지식인들의 일방적인 비난으로 인해 트로트가 일제강점기가 남긴 부끄러움으로 매도됐다고 주장한다.

당대 일부 전문음악인과 지식인 사이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사람들의 관점으로 책을 서술했다. 트로트를 만들어내는 창작자와 가수, 향유자들을 만나 거대 담론과 일방적 편견으로 얼룩진 트로트의 순수한 정체성을 찾아냈다. 손민정 지음, 256쪽, 1만6000원, 음악세계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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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풍각쟁이야...

 

일제 유행가라고 모두 ‘친일’ 이더냐

‘감격시대’ 광복 맞은 민중정서 대변, 트로트 효시 ‘이풍진 세월’도 왜색 아닌 민요창법
만요·신민요·재즈송 등도 전통 뿌리
실증 분석으로 ‘일제 이식론’ 조목조목 비판, ‘대중가요로 본 근대의 풍경’ 그려내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 숨쉬는 거리다/미풍은 속삭인다 불타는 눈동자/

불러라 " " " 거리의 사랑아/휘파람 불며 가자 내일의 청춘아//

 

바다는 부른다 정열에 넘치는 청춘의 바다여/깃발은 펄렁펄렁 바람세 좋구나/

저어라 " " " 바다의 사랑아/희망봉 멀지 않다 행운의 뱃길아//

 

잔디는 부른다 봄 향기 감도는 희망의 대지여/새파란 지평 천 리 백마야 달려라/

갈거나 " " " 잔디의 사랑아/저 언덕 넘어가자 꽃피는 마을로”

 

지난 1995년 광복 50돌 기념식에서 연주돼 친일가요 논란을 불렀던 ‘감격시대’다. 한편에서는 광복을 그려보며 부푼 감정을 밝고 약동적인 정서로 노래한 것으로 알고 한편에서는 일제가 전쟁준비로 뒤숭숭하던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권장한 가요라고 주장해왔다.

 

대학가요제 도전한 노래 열정

 

‘감격시대’ 노랫말을 뜯어보면 친일 흔적이 없지만 ‘어떤 대상에 대한 강한 지향성’을 드러낸다. 친일론은 그 지향성이 일제 식민정책에 대한 부응이라 해석하고 그 반대쪽은 조국 광복에 대한 열망으로 보는 것이다.

 

이 노래의 음반은 39년 4월 발매되었는데 함께 수록된 ‘달없는 행로’는 친일혐의가 없다. 또 ‘감격시대’ 발표를 전후한 39년 상반기에 같은 음반사 ‘오케’에서 발표한 곡은 ‘어머님 전상서’(2월) ‘세상은 요지경’(3월) 등이 보일 뿐 친일적인 노래는 없다. 이 무렵 각 음반사에서 발표한 대중가요 200여곡에도 친일 혐의가 있는 노래는 거의 없다.

 

» 오빠는 풍각쟁이야 / 장유정 지음. 민음in 펴냄 2만2000원

 

이런 분위기에서 유독 ‘감격시대’만이 친일 의도로 만들었다고 보기 힘들다. 친일론자는 이 노래가 행진곡풍에 장조 음계이고 미래 지향적인 가사라는 점을 단서로 꼽는다. 하지만 장조 음계는 대중가요 상당수가 사용하는 음계이고 행진곡풍도 친일 군국가요와는 질감이 다르다. 노랫말 역시 친일론자들은 ‘희망봉 멀지 않다’, ‘저 언덕 넘어가자’가 ‘전진’을 선동하는 노골적인 친일 가요를 예비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행운의 뱃길’ ‘희망의 대지’ 꽃피는 마을’이 언덕이라는 장애물을 넘어야 이를 수 있는 장소인 점에서 이 노래가 막연한 낙관주의만을 표출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절 ‘불러라’ 2절 ‘저어라’ 3절 ‘갈거나’가 명령형 또는 상대의 의견을 구하는 형식으로 청자에게 힘들어도 함께 넘어가자고 권유한다. 요컨대 노랫말에 드러난 낙관주의는 함께 노력하고 고난을 겪은 뒤에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또 ‘감격시대’가 해방공간에서 인기를 얻은 것은 노랫말이 광복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조응하면서 광복이 주는 이미지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대중가요에서 중요한 것은 작사자의 의도보다 그 노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다. 따라서 ‘감격시대’를 친일가요라고 규정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대중 가요로 본 근대의 풍경’이란 부제를 단 <오빠는 풍각쟁이야>(민음in 펴냄)의 지은이는 일제시대에 유행한 가요를 친일이라는 잣대로 잰 김창남, 이영미의 시각을 비판하고 실증과 분석에 입각해 당시의 대중가요의 진면목을 보고자 한다. 그 작업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평가된다.

 

지은이는 대학원에서 구비문학을 전공하면서 옛날 노래와 춤과 사람과 그들의 삶을 만나고 대중가요 연구로 시선을 옮긴 장유정씨. <오빠는 풍각쟁이야>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 <일제 강점기 대중가요 연구>(2004)를 깁고 더한 것이다. 93년 대학가요제에 출전할 만큼 노래를 좋아하고 소질이 있었던 지은이는 예선에서 떨어지면서 가수의 꿈을 접어야 했고 그 열정을 학문으로 옮겨 10여년 각고한 결과물이 이 논문인 셈이다. 음악적 재능를 지녔으며 구비문학 공부를 한 그한테 일제시대 대중가요 연구는 안성맞춤이지 않았을까. ‘감격시대’에 대한 새로운 견해는 <오빠는 풍각쟁이야>에서 지은이가 서 있는 자리이며 지은이가 논지를 펴고 이를 뒷받침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 기생 출신 가수 왕수복, 음반 가사지에 실린 ‘미스코리아’, ‘오빠는 풍각쟁이’를 부른 박향림, ‘사의 찬미’의 윤심덕, 가수 김해송, ‘미스터 콜롬비아’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박세환(맨 아래 왼쪽 타원 사진은 얼굴없는 가수 시절), 가수 고복수, 가수 황금심. (왼쪽 맨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구비문학 관심이 가요 박사논문으로

 

지은이는 우선 이식론자들의 대중가요(유행가)가 학교창가에서 유행창가를 거쳐 전개되었다는 도식을 비판한다. 교과서의 형태로 유포된 (학교)창가와 음반 형태로 향유된 유행가와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 창가는 강요하고 조장할 수 있지만, 음반은 상업적 목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인데 실제로 학교창가가 음반에 실린 예는 ‘학도가’가 거의 유일하다. 게다가 20년대 중반까지 유성기 음반에서 전통가요가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절대적임을 들어 전통가요에서 대중가요로 전개되었다고 주장한다. 또 트로트가 일본유행가 번안에서 시작되었으나 효시로 꼽히는 ‘이풍진 세월’을 뜯어보면 원곡 자체가 서양곡이며 창법 역시 민요창법이어서 이식으로 볼 수 없다. 또 ‘황성 옛터’(원제 ‘황성의 적’)가 4·7음이 빠진 단음계인 것은 사실이나 우리나라 전통적인 박자인 3박자를 사용한 점과 만주와 북간도로 이주해야 했던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했던 점을 들어 이 노래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기존의 주장을 반박한다.

 

외래곡조 빌려 토착화 성공

 

재즈송, 만요, 신민요, 트로트 등 대중가요를 네 가지로 대별해 노랫말을 검토한 결과도 마찬가지다. 재즈송은 삶의 비애에서 비롯한 진정성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노세’류 잡가 계보를 잇는 것으로 평가한다. 만요 가운데 ‘오빠는 풍각쟁이야’ ‘유쾌한 시골영감’ 따위는 시대상을 잘 반영할 뿐더러 대구법, 반복법 등 민요의 방식을 계승하며 ‘시큰둥 야시’는 사설시조에 닿아있다고 본다. 트로트 역시 전통의 일방적 쇠퇴와 새로운 양식의 대체라는 비극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기존의 주장과는 달리 당대 민중의 정서를 절실하게 드러내 공감을 샀다며 외래의 곡조를 빌려와 토착화해 성공한 갈래라고 주장한다. 고향을 잃고 헤매는 나그네 심사를 표현한 ‘황야의 고객’을 고려말 혼란기 유민의 노래인 ‘청산별곡’과 비교한 것은 무척 인상적이다.

 

책의 제목을 선정적으로 바꾸고 얼굴없는 가수,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창작가요의 첫 모습 등 눈요깃거리를 끼워넣어 ‘논문의 무거움’을 덜고자 한 편집자의 의도가 꽤 도드라진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기사등록 : 2006-03-09 오후 08:16:27 기사수정 : 2006-03-10 오후 0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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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행가의 여왕 왕수복 아시나요
기생학교 졸업 정통성악도 배워 음반 120만장·인기투표 1위
‘김일성 경제선생’ 김광진과 결혼, 전쟁 뒤 평양 남아 공훈배우로

 

 

 

» 1930년대 17살로 데뷔해 인기 절정 당시 위통치료약 ‘노르모산’ 광고 모델로 선 왕수복과 자필 서명(위), 시인 노천명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남편 김광진(아래 왼쪽), 97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열어준 팔순 기념 독창회에서 ‘뻐꾹새’를 부르고 있는 공훈배우 왕수복. 사진 경덕출판사 제공
평전 ‘평양기생 10대 가수 여왕되다’ 나와

 

 

“최승희씨가 조선무용을 살린 것처럼 나는 조선의 민요를 많이 노래하고 싶습니다.”(<오사카아사히> 남선판 1939년 4월9일)

 

‘조선 민요계의 최승희’를 꿈꾸었던 왕수복(1917~2003)은 기생이었다. 열두살에 평양 기생학교에 입학해 3년 과정을 마친 뒤 정식 기생이 된 이 맹랑한 여성은 1936년 스무살에는 벨칸토성악연구원에서 입학하여 정통 성악을 배웠다. 선생은 이탈리아 성악가인 벨트라멜리 요시코.

 

1933년(17살)에 폴리돌 레코드사에서 ‘고도의 정한’ ‘인생의 봄’을 취입하여 당대 최고 판매량인 120만장을기록할 정도로 노래 실력은 익히 증명되었다. 34년에는 그가 부른 ‘아리랑’이 경성방송국 한국어 제2방송의 첫전파를 타고 일본 전역에 중계되었다. 35년에는 잡지 〈삼천리〉의 남녀가수 인기투표에서 1위에 올랐다. 요즘으로 치면 연말 10대 가수 대상이다. 게다가 〈퀴리부인전〉, 〈좁은 문〉을 읽는 인텔리였다.

 

우리말 가사 금지에 따른 은퇴, 이효석과의 2년여에 걸친 불꽃 같은 사랑(1940~1942), 노천명의 약혼자 김광진(당시 보성전문 교수)을 쟁취하여 결혼(1945)한 그는, 분단과 함께 평양에 남아 중앙라디오, 국립교향악단의 전속가수가 되어(1953, 55) 한달간 소련 순회공연을 하는 등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마흔세 살에는 공훈배우가 되었고 60~70년대에는 경제 선전 예술활동에 동원되어 생산현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김일성 부자로부터 총애를 받아 환갑, 칠순, 팔순 생일상을 받은 그는 2003년 86살에 사망해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반면 남한에서는 월북자로 취급돼 철저하게 잊혀진 존재였다. 1965년 5월 남편과 함께 판문점을 관광하다 남쪽 언론에 포착돼 잠시 눈요깃거리로 소개되었을 뿐이다(<조선일보> ‘색연필’).

 

신현규 교수(중앙대 교양학부)가 왕수복의 반쪽 생애를 복원해 평전 〈평양기생 10대가수 여왕되다〉(경덕출판사)를 펴냈다. 스스로 구술하는 형식의 평전 뒤쪽에 〈삼천리〉, 〈조선예술〉 등에 실린 인터뷰와 수기 원문도 붙였다.

 

“왕수복의 노래는 황금심, 김정구 등이 부르면서 살아남았지만 이름은 잊혀졌어요. 한영애의 〈꽃을 잡고〉 리메이크로 함께 활동했던 선우일선의 노래에 대한 남북간 저작권 문제를 계기로 다시 알려졌지요.”


신 교수는 기왕의 알려진 자료 외에 남한에 생존한 평양 기생학교 후배의 증언을 땄다. 아흔살대의 증언자는 자신의 출신이 알려질까 이름 밝히기를 꺼렸다고 한다.

 

“복각판 ‘수수께끼아리랑’ 속의 ‘본조아리랑’을 들어보면 왕수복의 창법이 민요와 달라요. 완전히 서양식 성악기법입니다.” 일찍이 평양의 기생학교에서 김미라주, 이산호주한테 소리를 배운 바탕에 이탈리아 창법을 제대로 습득해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남쪽의 단편적인 기록에는 ‘신민요의 여왕’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유행가요의 여왕’이었어요. ‘그리운 강남’을 왕수복 등 세 사람이 함께 불렀다는 것도 이번에 새롭게 밝혔어요.”

 

왕수복의 사주로 점괘까지 봤다는 신 교수는 북한에서 기생학교 출신은 거의 숙청되었지만 왕이 장수한 것은 김일성 주석의 경제 선생이었던 남편 김광진 덕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기사등록 : 2006-09-21 오후 08:2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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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근대가요 가수로 나선 근대가요 학자 장유정 교수

 

"원래의 트로트는 담백하고 세련… 직접 들려주려 가수로 데뷔했죠"

 

왜 트로트인가

왜색이라 관심 두지 않던 장르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

우연히 버스에서 듣고 대성통곡위로가 되는 노래란 걸 깨달아

 

연구해보니트로트란?

한국어로 우리 정서를 노래일제때 '황성옛터' '목포의 눈물'

애국심 자극해 대중들이 공감엔카와는 다른 전통문화


현재 직업은 교수다. 단국대 천안캠퍼스 교양학부 장유정(40) 교수. 어릴 때 꿈은 가수였다. 고등학생 때는 라디오 노래자랑대회에 나가 장원도 했다. 대학가요제 예선에서 떨어지면서 꿈을 접었다. 대신 대중가요 연구로 돌아섰다. 민요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고 일제 시대 대중가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은 2년 뒤 책으로 나와서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 <오빠는 풍각쟁이야>. 일제 때 인기를 끈 만요(웃기는 노래)의 제목을 딴 이 책과 더불어 한국사회에 만요바람이 불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시대 대중가요 연구자로 첫손에 꼽히는 그는 이달 3일 가수로 데뷔했다. 1930년대 대중가요인 '외로운 가로등'을 리메이크해서 디지털음원을 공개했다. 황금심이 처음 불렀고 이미자 한영애도 리메이크한 유명한 트로트. 트로트는 그가 가장 좋아하면서 세상이 오해하는 게 가장 안타깝다는 장르이기도 하다. 그는 진짜 트로트를 들려주겠다며 이 노래에 '근대가요 다시 부르기'라는 기획을 붙였다. 둘째, 셋째곡을 준비중인 그를 만났다.

 

"음원이 얼마나 팔렸는지는 모르겠어요. 수익이 나면 어렵게 사시는 원로가수분들 도와드리고 싶어요. 그 분들이요? 경제적으로는 어려워도 항상 행복해하세요."

손용석기자 stone@hk.co.kr


_트로트라는데도 아주 담백하고 운치있네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트로트는 80년대 후반 뽕짝메들리가 나오면서 변질된 트로트지요. 1930년대에 처음 생겨난 트로트는 지금처럼 노골적이지 않았어요. 황금심씨 '외로운 가로등' 들어보면 가사 자체는 슬프지만 굉장히 담담하게 불러요. 템포도 빠르고요. 가성 썼고요. 가성 쓰면서 노골적일 수는 없거든요. 제가 '외로운 가로등'을 리메이크한다고 하니까 진짜 끈적끈적하게 불렀겠구나 했는데 원곡은 그렇지 않았어요."

_그런데 왜 하필 트로트를 부르게 됐어요?

"트로트가 요즘은 성인가요로 코믹화했는데 원래의 트로트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일러드리고 싶었어요. 인터넷에 잘못된 자료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바로잡고 싶었고요. 2000년부터 박사학위를 준비하면서 일제시대 대중가요 자료를 찾고 노래도 계속 들었거든요. 들어보니까 제가 알았던 트로트 뿐 아니라 굉장히 다양한 노래들이 존재하더라고요. 지금 불러도 굉장히 세련된 느낌? 그래서 이 노래 한번 불러보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가 작년 12월에 지인들이 모여서 트로트배틀을 한 적이 있어요. 저는 옛가요모임 유정천리 부총무로 있는데 트로트 애호모임이 여러 개가 있어서 모임마다 4명씩 대표로 나와서 홍대 앞에 카페를 하나 빌려서 트로트배틀을 했어요. 작년이 3회째인데 재미있어요. 빤짝이 옷 갖다놓고. 제가 '다방의 푸른 꿈'을 불러서 결승까지 올라가서 '외로운 가로등'을 불러서 우승을 했어요. 1등상은 트로피하고 종이 한 장 인데 트로피는 돌려줘야 하는 거고 종이를 펼쳐보니까 '짱'이렇게 한 글자만 써있었어요.(웃음) 노래를 하고 싶지만 용기가 안 났는데 트로트배틀에서 1등을 하면서 자신감을 확 얻었어요. 그래서 펜화가인 아버지(장봉기)한테 옛날 노래책에 나온 식으로 흑백 펜화도 그려달라고 해서 표지도 만들고 노래를 녹음했지요."

_노래를 상당히 잘하던데요.

"그래요?(웃음) 제가 어렸을 때부터 꿈이 가수였어요. 다섯 살 때부터 노래프로는 다 봤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송승환씨가 진행하는 '밤을 잊은 그대에게'라는 라디오프로에서 1주일에 한번씩 '우리들의 가요제'라고 노래자랑을 했어요. 거기에 나가서 변진섭씨 노래 '우리들의 사랑이야기'로 1등 했어요. 나중에는 KBS 남한강수련원에서 1박2일 동안 상반기 기말결선을 했는데 거기 나가서 대상을 받았어요. 청소년잡지에도 나가고 펜레터도 받고 생일 때면 학교로 선물이 몰려들어서 이틀에 걸쳐 선물을 가져가야 할 정도였어요. 가수 하자는 제의도 받았지만 고등학생이 노래한다는 게 겁나기도 하고. 어려서부터 대학가요제가 로망이라 대학에 꼭 가서 거기를 나가야겠다 그렇게 진로를 정했어요. 국문과(덕성여대) 간 것도 거기 가면 가사는 다 쓸 수 있는 거다, 그래서 갔는데 일단 좋은 노래를 만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판소리 재즈댄스 기타 피아노 배우러 다녔는데 대학교 3학년 때야 이제는 마지막이다 싶어서 누가 군대가면서 던져준 노래를 받아서 가사를 급히 바꿔서 대학가요제에 나갔는데 예선에서 떨어졌지요. 같이 간 친구한테 제가 그랬어요. '열정만으로는 안되는 게 있는 거 같다. 여기서 접어야겠다.' 그때 대중가수가 안 되면 대중가요를 연구해야겠다 마음먹은 거에요. 대중가요를 연구하려면 먼저 구비문학부터 공부해야겠다, 서울대를 가야겠다. 그래야 사회에서 대중가요를 인정해주겠다 생각이 들었고 학비도 싸잖아요.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공부하면서 (서울대) 대학원을 가게 됐어요. 모내기노래 연구인 '교환창 모노래의 2행시 구성방식 연구'로 석사논문을 썼지요. 박사학위 논문은 '일제강점기 한국 대중가요 연구'를 썼고요. 당시에 서울대에서 대중가요로 박사학위 준다고 반대도 많았다는데 서대석 선생님이 의미 있다고 격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_트로트도 어려서부터 좋아했어요?

"저도 트로트에 대해서는 왜색이다 일제시대 모든 문화를 말살시키고 당시 대중들을 식민지문화에 순응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 비판을 듣고 자라서 텔레비전에 트로트가 나오면 채널을 돌렸어요. 대학교 4학년 때 정말 학교 가서 공부하고 집에만 오던 시절인데 새벽에 버스에서 운전사하고 저하고만 있는데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어' 그 노래를 딱 듣는 순간, 대성통곡을 했어요. 짝사랑하다 실연도 했고 앞날은 분명하지 않고 그게 가사랑 딱 떨어진 거지요. 내가 천박하고 왜색이라 말했던 노래가 어떤 사람한테는 굉장히 위로가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마을버스를 탔는데 트로트메들리를 계속 틀어놓는 거에요. 집이 마을버스 종점이라 저랑 할머니랑 탔는데 저는 내내 시끄러웠지요. 그런데 종점에 도착해서 할머니가 '기사양반, 노래가 너무 좋아서 내릴 수가 없어' 그러더라고요. 그 순간 뒤통수를 딱 치는. 그렇구나. 내가 옳다는 것만 진리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구나. 학문하는 목적은 편견이나 선입견을 하나하나 깨는 것이고 그게 성숙하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우리 구비문학을 연구하자, 사람들이 과거를 잘 모르니까 트로트는 외부문화의 강제이식이나 전통문화의 단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_연구해봤더니 과연 트로트는 이식이나 단절이 아니었어요?

"가사 측면에서는 한국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었어요. 한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한국인이한국어로 쓴 거에요. 특히 만요는 당시의 세태를 한국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웃음으로 담은 거잖아요. 그런 내용이 외부 문화의 이식은 아니지요. 신민요도 변질이다 그러는데 전통가요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자 실험이었어요. 서양악기하고 합주하고. 지금 보면 비빔밥 짬뽕처럼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나름대로는 노력을 했던 거지요. 일제 때 인기를 끌던 유행가를 보면 '황성의 적(황성옛터)' '목포의 눈물' '눈물 젖은 두만강'처럼 나라 잃은 슬픔을 그린 곡들이 많아요. 일제시대에 순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애국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대중들이 공감했던 거예요."

_옛날 노래 가사를 보면 감탄할 정도로 훌륭한 것들이 많지요.

"안서 김억 같은 시인이나 서울대 영문과 교수였던 영문학자 이하윤씨, 박노홍씨 같은 작가들이다 유명한 작사가였어요. 가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 대중음악이 시대정서를 읽어냈는데 그 가치를 너무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쉬워요.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라고 할 수 있는 채규엽씨는 음악을 전공한 음악교사 출신인데 '이게 대중을 위한 위무제다'는 생각을 갖고 직업가수로 투신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어요. 이난영씨 남편으로 작년에 탄생 100주년을 맞은 김해송씨는 작곡하지 않은 장르가 없고 김송규라는 이름으로 노래도 불렀고 팔방미인으로 문화활동을 했어요. 김해송씨는 납북되면서 작사가 조명암씨는 월북을 하면서 노래가사를 그대로 쓸 수 없게 되었거든요. 대신 개사는 허용했는데 원곡 가사와 개사된 가사를 연구하는 과제도 남았고요. 일제시대 대중가요를 보면 당시에 이미 얼굴없는 가수가 나와서 신비주의 전략을 쓰기도 했고 전통음악을 아는 기생들이 대중가요로 투신한 기생가수 시대도 있었고요.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다채로운 문화활동이 당시에 벌어졌어요. 당시 역사를 이해하려면 이런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_트로트는 도대체 뭔가요?

"트로트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장르에요. 1930년대부터 등장한 유행가 양식을 1950년대부터 '도로또'로 음반에 표기하기 시작했어요. 외국에 폭스트로트라고 2박자로 춤출 때 쓰는 것은 있지만 트로트는 없어요. 일본에서 당시 유행하던 엔카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엔카하는 분들은 트로트하고 다르다고 해요. 그런데도 유독 우리나라에서 엔카의 영향을 굉장히 강조하지요. 물론 트로트 장르가 발생한 건 일본대중음악의 영향이라고는 생각해요. 그런데 일본이 들여와서 억지로 유행시킨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들어보고 이거 좋은데 해서 유행하게 된 거에요. 일본에서 엔카말고도 음두라는 장르도 굉장히 유행했지만 그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전혀 빛을 못 보거든요."

_한때는 우리나라 트로트가 엔카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 말도 있었잖아요.

"고가 마사오씨라고 일본 엔카에 유명한 작곡가인데 그 사람이 선린상고 다니면서 한국에서 살았어요. 그 분이 우리나라 음악을 굉장히 많이 들었거든요. 나중에 그 분이 일본에 가서 엔카 작곡가로 유명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엔카 작곡에 영향을 줬다 그러는데 그거는 음악적으로 이야기할 때 고가 마사오 개인한테는 있었겠지만 우리나라 트로트가 탄생했을 때는 일본 유행음악 엔카가 영향을 준 거는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그게 우리나라 음악이 아닌 거는 아니라는 거지요."

_근대가요 다시 부르기, 다음 노래는 뭐예요?

" '다방의 푸른 꿈'과 '이태리의 정원'을 함께 준비중이에요. '이태리의 정원'은 1936년에 무용가 최승희씨가 부른 노래에요. 원곡은 에르윈이라는 사람이 작곡한 외국곡인데 작사는 이하윤씨가 했고 제가 광복이전 노래 중에 제일 좋아하는 노래에요. 박사 논문 쓸 때 하루 10시간 이상씩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보면 정말 사람이 피폐해가지고 내가 왜 이러구 있나,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여러 가지 생각도 드는데 이 노래가 저를 위로해줬어요."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http://blog.naver.com/oopldh/101399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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