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동네를 찾아서
오밀조밀 오래된 서민의 역사와 일상이 살아 숨쉬는 ‘서촌’의 매력 뒤지기 | |
이제 막 시작된 신선한 가을 하늘 아래 종로구 통의동 일대를 산책했다. 어렸을 때 긴 막대기를 들고 뒷동산을 탐험했던 기억을 되살려 군데군데 미로처럼 숨어 있는 골목길을 들여다보며 인왕산 바로 아랫마을 옥인동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통의동, 창성동, 체부동, 효자동, 누하동, 누상동, 옥인동, 필운동 등이 퍼즐처럼 모여 있는 경복궁 서쪽의 ‘서촌’은 아기자기하고 풍성했다. 빨랫감 같은 생활의 흔적이 듬성듬성 골목에 나와 있는가 하면 청와대 앞길의 잘 가꿔진 가로수 꽃들은 호사로웠다. 그런가 하면 권력 1번지인 청와대와 가까워 삼삼오오 전경들이 동네 보안을 책임지고 있었다. ‘옆집 갤러리’, ‘컨테이너 갤러리’, ‘쿤스트독’까지 최근 급격하게 늘어난 전시공간을 유유히 걷다가도 유니세프 한국본부 앞, 청와대에 가까워지자 경찰이 “어디 가느냐”고 각을 세워 묻기도 했다.
남의 동네를 구경하기 위해 특정 공간을 찾는 건 쓸쓸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궁터였던 서촌 일대에 새로운 문화적·도시적 경험들이 쌓여가고 있는 건 삼청동이나 가로수길처럼 ‘뜨는 동네’를 선점하기 위한 몇몇의 전략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누상동 한옥에 살고 있는 박성진 건축 코디네이터는 서촌에는 이상 가옥, 박노수 가옥, 60년대 생활한옥, 이항복 집터,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 등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공간이 많고 궁에 물자를 댔던 서민문화의 흔적이 밴 골목길이 남아 있어 양반골이었던 북촌보다 복잡한 곳이라고 말했다. “근래 생긴 새 공간 중 작업실을 겸한 카페가 눈에 띄죠. 문구 디자인 사무실을 겸한 카페 ‘스프링 컴 레인 폴’이나 가구 디자인 사무실 아래 문을 연 카페들은 장사만 하려고 문을 연 게 아니라 서촌에서 살겠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거 아닐까요? 북촌이 쇼윈도 같은 느낌을 풍긴다면, 서촌은 작고 오밀조밀한 골목에 서민의 일상이 곳곳에 살아 있어요.”
부산함 벗어나려는 갤러리·작업실 속속 상륙
원거리에서 보는 통의동 일대가 권력과 가까운 곳,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곳이라면, 근거리에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통의동은 구석구석 디테일이 살아 있는, 그래서 옆집 사람들의 식거리와 근황이 궁금한 몇 안 되는 서울의 ‘동네’다. 2006년 겨울 통의동 옆 창성동에 터를 잡은 디자인 사무소 ‘워크룸’의 김형진 디자이너도 그런 동네를 상상하며 이곳에 왔다. “외국 영화를 볼 때마다, 카페에 들어서면 주인공을 알아채고 그에 맞는 음료를 주는 모습이 그렇게 멋스러워 보이더라구요. 우리나라에선 막상 많은 이들이 동네에서 활동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전 동네에서 이뤄지는 뭔가에 대한 로망이 있었죠.”
박활성, 이경수 등이 뭉친 젊은 디자이너 사무소 ‘워크룸’은 ‘통의동이 요새 문화적으로 뜨고 있다’는 신호탄을 알린 대표적 공간이다. “문밖의 공간과 이야기하겠다는 의지로 통유리를 선택했고 입구가 거창하지 않은 1층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꾸민 ‘워크룸’에서는 외부와 소통하는 관계지향적인 작업들이 꾸준히 진행됐다. 미술관에서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 규정하기 쉽지 않은 전시들이 열렸고 디자이너들은 이웃 가구 카페 ‘MK2’, 헌책방 ‘가가린’의 메뉴판이나 로고 등 아이덴티티를 세우는 작업을 했다. 거창한 일은 아니었지만, 노란색 종이의 ‘워크룸’식 디자인은 외부에 이곳의 매력을 각인시키는 단서가 됐다. “통의동에 어떤 식의 새로운 기운이 만들어지는 건 구호처럼 한순간 목표 달성할 수 있는 건 아닐 거예요. 거리가 새로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모이는 건 누구나 이 동네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겠죠.” 그들이 몇 달 전 한 인터뷰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영추문길은 지금 일방통행로 공사가 한창이다.
영추문길 끝 후지필름 건물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체부동, 누하동, 누상동을 올라가는 길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 나와 있는 인왕산을 향해 가는 바로 그 방향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퇴적물에 가까울 만큼 ‘예스럽다’고 느껴지는 소박한 간판의 책방, 과일가게, 어린이들을 위한 피아노 학원이 열려 있어 생활 속 모습을 모처럼 드러낸다. 하지만 새롭게 들어서는 젊은 기운도 옛 기운 못지않다. 최근 몇 달 새 체부동 ‘대오서점’ 옆방에는 자신들이 디자인한 제품을 파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가게 ‘풀’(pool)이, 좁은 동굴 같은 지하 건물에는 ‘로스트 갤러리’ 등이 생겼다. 통의동 부근에 집값이 오르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일대 한옥의 경우 평당 2000만원에 달하지만, ‘풀’처럼 소박한 공간은 한달 25만원의 월세로 아직은 저렴하다.
최근 인왕산 근처에도 급작스러운 철거가 진행되고 있는 옥인아파트를 기록하기 위해 젊은 예술가와 활동가들이 모였다. 그들 중 김화용 작가는 실제 옥인아파트 주민이다. “옥인동은 새소리와 계곡물 소리가 들려서 움푹 들어간 사각지대 같았지만, 시청 광장 집회부터 청와대 1인시위까지 다 보이는 특별한 공간이었어요. 인왕산 등산로 들머리라 새벽이면 등산객들이 야호!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죠. 사람이 살고 있는데도 유리를 깨는 등 심각한 철거 과정을 다 기록하고 있어요.”
평화로운 정경 아래 역사와 현실, 정책 문제 첨예
서촌이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건 잊혀졌던 ‘동네’라는 이미지가 파노라마처럼 한 상자에 담겨 있어서다. 그리고 이런 서촌의 궤적은 어린 시절 뛰놀았던 동네를 환기하는 개인적 기억뿐 아니라 침전된 역사적 경험과 대도시의 변화가 한데 섞여 있다. 통의동에서 15년 동안 철학원을 운영한 한 역술가는 “예부터 최고 명당 자리다. 음과 양이 조화돼 마음이 들뜨지 않고 여유롭다. 문화예술이 꽃필 장소”라고 호언장담했다. 통의동의 유서 깊은 보안여관에 사무실을 꾸린 일맥문화재단 최성우 이사장은 “서촌은 겉으로는 평안해 보이지만 도화선 같다. 주민들의 생존권 문제와 도심 재개발 문제, 유적 보존 문제, 옥인아파트 자리에 청정공원과 물길을 만들겠다는 정부 입장 등이 다 다르다. 하지만 서촌은 삼청동 같은 대로가 아니라 때론 막다른 길이 나오기도 하는, 있는 그대로의 골목길이 살아 있다”고 말했다. 여전히 서촌은 끝을 알 수 없는 미로처럼 이렇게 다채롭다.
글 현시원 기자 qq@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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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탕집 옆 빈티지 카페
정치인이 찾는 고급 한식당에서 모던한 유기농 레스토랑까지 통의동 맛집 순례 | |
최근 통의동 일대에는 젊은이들에게 사랑받는 카페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커피 즐겨찾기’와 ‘후지필름’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오면, 압구정에서 지난 11월 이사온 플라워 카페 ‘브릭레인 스트리트’가 보인다. 근처 창성동 골목에 문을 ‘카페 고희’는 갤러리를 겸한 널찍한 공간, 안에는 아기자기한 소품이 멋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브런치에 나오는 빵과 소스가 특히 맛있다.(02-734-4907) ‘파올로 엄마의 사과 케익’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식사들을 제공하는 ‘카페 두오모’나 그룹 브라운 아이즈의 윤건이 운영해 화제가 된 ‘마르코의 다락방’도 인기를 끈다. 빈티지한 가구와 갖고 싶은 소품들이 눈에 띄는 ‘마르코의 다락방’을 찾으려면 전경들에게 “벽에 크게 숲(soo:p)이라고 쓰여 있는 건물이 어딘지” 물어야 한다.
굳이 길을 물어 찾아가고픈 카페는 근처에 또 있다. 통의동, 창성동에서 길을 건너면 파란 간판의 우리은행 건물이 보이는데 그 바로 오른편에 서점 겸 카페 ‘길담서원’이 있다. 이곳은 세련된 인테리어보다는 서로의 대화, 사회과학 서적의 아우라 때문에 발길이 머물게 되는 곳이다. 통인동의 오래된 옹달샘 같은 느낌을 주는 이곳에선 청소년 인문학 교실, 중국어 강독, 음악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열린다. 한명숙 전 총리의 부군인 성공회대 박성준 교수가 운영한다. (02-730-9949, http://cafe.naver.com/gildam)
사실 효자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식당은 ‘메밀꽃 필 무렵’이다. 도심에서 보기 힘든 하얀 배경 위 검은색 큰 글자의 간판은 “맛있는 메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느낌을 첫눈에 주고 싶은” 주인의 의지가 담겨 있다. 옆 공간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던 주인은 15년 전부터 시골 향취가 정겹게 담긴 양 많은 메밀국수와 바삭하게 튀긴, 노릇하고 넓적한 메밀부침을 만들었다. 방바닥같이 소박한 식당 내부의 벽에는 가수 노영심 등의 사인이 붙어 있다.
평일에 청와대 근처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찾고, 주말에는 동네 주민들과 산책차 나온 외부인들이 가득 채운다. 주변 창성동과 통의동 근처에는 이렇게 동네 터줏대감들이 운영하는 십년 이상 된 식당이 많다. 조선시대 내시들이 살던 건물에서 ‘사철탕집’을 운영하는 아주머니와 옆 건물에서 ‘태진복집’을 운영하는 할머니는 마치 친모녀처럼 정겹게 오후 나절을 보낸다. 외진 골목길을 나와 조금 큰 골목길에는 고급 한식집이 많다. 1인분에 7만원 정식의 ‘대해’나 ‘다정’, ‘섬마을’ 등은 청와대와 가깝다는 점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자주 식사를 하는 곳이다.
글 현시원 기자·사진 박미향 기자
------------------------------------------------------------------------------------------------------------------------------- 도시 행간에 깃든 ‘문화 향기’…‘청와대 가는길’ 통의동 청와대로 가는 길에 통의동이란 동네가 있다. 이 지역엔 골목 입구마다 경찰들이 서있다. 죄지은 일도 없는데 괜히 마음이 불편해지는 곳이다. 오랜 세월 권력의 기세에 눌려 산 탓일까. 통의동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숨죽이고 있는 동네다. 서울 한가운데에 있지만 외지인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통의동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최근 1~2년 사이 이 조용한 동네에 변화가 일고 있다. 건축가와 화가, 사진작가 등 문화·예술인들이 통의동으로 모여들고 있다. 이들은 여기서 건물을 올리고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연다. 지금도 새로 문을 열 화랑 공사가 곳곳에서 한창이다. 과거 인사동과 삼청동이 누렸던 문화·예술 거리의 지위를 통의동이 물려받는 모양새다. 통의동에 둥지를 튼 문화·예술인들은 “통의동만은 삼청동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소비 문화와 자본에 밀려 인사동·삼청동을 떠난 사람들은 이 작은 동네가 자신들의 마지막 아지트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문화·예술마을로 변신하는 통의동 한때 낭만의 대명사였던 삼청동은 더 이상 고즈넉하지 않다. 못 보던 음식점과 카페가 바쁘게 들어선다. 주말이면 몰려드는 인파로 북새통을 이룬다. 삼청동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삼청동의 고요를 사랑했던 미술인들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사동을 떠났을 때처럼 이제 삼청동도 관광객들에게 양보해야 하는 것일까. 삼청동을 내주면 어디로 갈 것인가. 이들이 찾아낸 대안이 경복궁의 서편, 통의동이다. 통의동은 경복궁의 서문(西門)인 ‘영추문(迎秋門)’과 마주보고 있는 동네다. 이 지역은 삼청동이나 가회동, 소격동처럼 화려하지 않다. 눈길을 끄는 큰 기와집이 없고, 사진에 담고 싶은 돌담도 경복궁 담을 제외하면 없다. ‘인사동 지구단위계획’ ‘북촌가꾸기 사업’처럼 서울시가 벌이는 각종 보존 사업에도 포함된 적이 없다. 서울시가 굳이 ‘보존’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덕분에, 역설적이게도 통의동은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궁의 동편과 달리 소란스럽지 않다는 통의동의 매력은 예술가들을 끌어들이기 충분했다. 이들은 통의동과 창성동을 나누는 영추문길을 중심으로 갤러리와 독특한 카페, 책방을 열었다. 주민들 외엔 유동 인구가 거의 없던 이곳에 문화·예술인들의 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3월 문을 연 가구 카페 ‘mk2’의 주인 이종명씨도 이들 중 한 사람이다. 사진 작가인 이씨의 작업실은 본래 북촌길 정독도서관 앞에 있었다. 삼청동에서 가회동으로 이어지는 지점, 그러니까 맛집을 찾아다니는 미식가들과 카메라를 든 출사족들이 성지 순례하듯 휩쓸고 지나가는 그 길이다. 작업실 주변은 복잡했다. 주말엔 사람들에게 떼밀려 다녀야 했다. 한적한 곳으로 이사하고 싶었다. 그는 통의동에 작은 가게를 열고 평소 수집했던 빈티지 가구 몇 점을 진열했다. 들어와서 구경하고 마음에 들면 사가라는 뜻이었다. 가구만 내보이는 게 싱거워 커피도 팔았다. 손님들은 진열된 가구에 앉아 차를 마신다. 가구가 팔리면 자연스레 카페 인테리어도 바뀐다. 이씨는 “커피만 마시고 가는 카페가 아니라 미술·문화계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 작당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커피 팔아 돈 벌기 위해 카페를 연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것이 통의동 카페의 특징이다. 단순히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 공간에 그치지 않는다. 대안공간 ‘브레인 팩토리’ 옆에 있는 카페 ‘FAN’은 건물과 인테리어 자체가 작품이다. 본업이 큐레이터, 회화 작가, 설치 작가 등인 사장 4명이 설계부터 인테리어, 마감 공사까지 직접 했다. 간판과 창문, 그릇, 조명 등은 동료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채웠다. 카페 ‘고희’도 갤러리와 카페의 기능을 겸하는 곳이다. 매달 작가 1명을 선정해 그의 작품을 카페 내부에 전시한다. 사장이 직접 빚은 도자기도 진열해 놓는다. “자본의 관심은 반갑지 않다” 통의동은 예술인 공동체의 새로운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책방 ‘가가린’이다. 가가린은 회원들이 중고 서적을 맡기면 이를 대신 팔아주는 위탁 헌책방이다. 가가린은 장소만 제공할 뿐, 헌책에 값을 매겨 책방에 내놓는 것은 회원들이 직접 한다. 이 때문에 같은 책인데도 가격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주인이 미리 책값을 치르고 헌책을 대량 수집·판매하는 중고 서점과는 운영 방식이 다르다. 이 독특한 책방엔 주인이 따로 없다. 가가린은 영추문길 이웃사촌인 mk2와 디자인 스튜디오 ‘워크룸’, 갤러리 ‘팩토리’, 건축가 서승모씨가 공동 출자해 세운 책방이다. 이들이 손잡게 된 데는 절박한 사연이 있었다. 어느날 대형 음식점이 영추문길의 빈 점포 한 곳과 임대 계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통의동에 자본이 들어오는구나. 이것은 통의동의 삼청동화(化)를 예고하는 신호탄 같은 사건이었다. 통의동마저 망가지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또 다른 빈 공간이 나오자마자 이들은 각각 수백만원씩 돈을 모아 그곳을 덜컥 빌려버렸다. “책을 내놓고 팔면 재미있지 않을까?” 누군가 아이디어를 냈고 지난 여름 그 자리는 책방이 됐다. 가가린은 그 흔한 인터넷 웹사이트 하나 없다. 모든 가입·판매 절차가 오프라인에서 이뤄진다. 회원이 되고 싶은 사람은 직접 가가린에 찾아가 종이로 된 가입 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 어떤 책이 있는지 컴퓨터로 검색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데이터베이스를 따로 만들지 않아서다. 아날로그가 주는 나름의 매력 때문일까. 회원 수가 어느새 200여명에 달한다. 단골 중엔 출자자의 지인들도 있지만 동네 주민들도 많다. 예술인들의 공동 작업이 지역 주민들의 생활 속으로 녹아든 것이다. 워크룸의 그래픽 디자이너 김형진씨는 “워크룸과 mk2는 이 근처에 계신 분들과 주로 작업하거나 동네 주민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지역 기반화됐다”며 “동네 찻집, 동네 디자인 스튜디오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주민들과 접점을 넓히며 골목과 동네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젊은 예술인들이 통의동에서 재미나게 산다는 소문은 이미 ‘업계’에 파다한 듯하다. 새 식구들이 이사올 채비를 하고 있다. 화랑 신축 공사가 여기저기서 진행 중이다. 카페 고희 뒤편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냈던 미술평론가 오광수씨가 미술관을 짓고 있다. 전시회를 열려는 작가들도 통의동 화랑을 선호하는 추세다. 갤러리 팩토리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는 작가 권혁씨는 “예전엔 이 근처에 올 일이 없었다”면서 “최근 갤러리들이 이곳에 모이고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면서 작가들 사이에 통의동이 점점 알려지고 있다”고 말했다. 통의동 사람들은 이곳이 삼청동처럼 급속도로 달라지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청와대 코 밑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이 있고, 골목이 길게 이어지는 곳이 없어 거대 상권이 형성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종명씨는 “삼청동처럼 변질돼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뜬다’는 동네엔 자본도 관심을 보이게 되어있다. 지금 통의동에는 대기업이 레스토랑을 열기 위해 자리 몇군데를 사놓았다는 풍문이 돈다. 이태원의 유명한 식당 주인도 점포를 계약하고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형진씨는 “구멍가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누군가 건물을 짓고 있더라”며 “조만간 임대료가 큰 폭으로 상승해 우리도 쫓겨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내년 봄의 통의동은 지금과 얼마만큼 달라져 있을까. 통의동 예술가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글 최희진·사진 정지윤기자 daisy@kyunghyang.com> 입력 : ㅣ수정 : 2008-12-04 09:14:30 ==========================================================================================
골목골목 예술의 향기 ‘서촌의 재발견’ |
경복궁 서쪽 중인·화가·문인들 산실…북촌과 다른 독특한 매력
서울시-주민들, 한옥보존 갈등…“섬 아닌 조화로운 곳으로 가꿔야”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형성된 서촌은 조선 시대와 근대의 도시 구조와 건물들이 살아 있는 곳이다.
전문가들은 서촌 전체가 옛 동네로서의 정취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가꿔나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돌을 길게 다듬어 만든 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낯선 모양의 전봇대가 보였다. 일반 전봇대의 절반만한 크기에 몸통이 짙은 갈색 나무로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전봇대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도록 긴 못을 구부려 군데군데 박은 점도 특이했다. “일제 때에 만들어진 삼나무 전봇대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네요.” 지난 18일 종로구 옥인동 송석원길에서 취재에 동행한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이 말했다.
계단을 다 오르니 여기저기 보수한 흔적이 보이는 한옥들과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펼쳐졌다. 낮은 지붕 위에 얹혀 있던 기와를 들춰보니 안쪽에 삼베 무늬가 찍혀 있었다. 황 위원장은 “서촌에 몇 안 되는 조선 후기의 기와 양식”이라고 말했다. 서촌에 있는 663채의 한옥은 대부분 1910년대 이후 주택 계획에 의해 대량으로 지어진 이른바 개량 한옥들이다.
경복궁 서쪽에 있다고 해 ‘서촌’이라는 별칭을 얻은 종로구 옥인동, 체부동, 필운동 일대가 새로운 역사·문화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서촌은 한옥이 집중적으로 밀집돼 있는 북촌과 달리 한옥뿐 아니라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의 건축물이 얽히고설켜 있는 곳이다. 특히 서울시가 지난 3월10일 서촌의 한옥과 골목길을 보전하는 내용의 ‘경복궁 서측 제1종지구단위계획안’을 통과시키면서 북촌과는 또다른 매력을 가진 서촌을 앞으로 어떻게 가꾸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북촌이 조선시대 집권 세력의 거주지였던 것과 달리 서촌은 의학·천문학·지리학 등을 전공한 조선의 전문직인 ‘중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서촌에 살고 있는 황두진 건축가는 “서촌은 전통적 양반 마을인 북촌보다 도시생활이 많이 이루어졌던 곳”이라며 “궁궐에 물품을 납품했던 기관이나 공방들도 많았는데 이런 역사적 맥락을 잘 살리는 쪽으로 개발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촌은 구석구석에 예쁜 카페나 작은 갤러리, 예술인들의 작업실, 오래된 헌책방 등이 있어 종로구의 ‘걷기 좋은 골목길’로 선정되기도 했다.
서촌은 또 조선시대와 근대의 문인, 건축가, 화가의 산실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가 서촌에 살았고, 근대에는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시인 윤동주와 모윤숙, 작가이자 건축가였던 이상 등이 서촌 주민이었다. 서촌에는 이들이 살았던 집과 작업실이 적잖이 남아 있다. 작년 9월에는 옥인동 185번지에서 정선의 그림 ‘수성동’에 등장하는 돌다리가 발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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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사와 문화를 가진 동네로 보존해 나가는 것보다 그냥 재개발을 원하는 주민들도 적지 않다. 옥인동은 이미 재개발 조합이 결성돼 있고, 체부동·누하동·필운동에는 몇 년 전부터 재개발 조합 추진위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체부동 곳곳에는 1년 전부터 ‘체부동 주민은 아파트를 원한다’는 펼침막이 걸렸다. 박경식 누하정비예정구역 추진위원회 총무는 “설계비 등 이미 들어간 돈도 많은데 서울시의 한옥 보존 정책으로 개발이 전혀 진행되지 않아 답답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18일 둘러본 서촌은 낡고 지저분한 건물과 골목도 많았다. 홍성태 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번듯한 앞길과 달리 쓰레기로 뒤덮인 뒷골목들이 많아 동네 보존에 애착이 없는 주민들도 있다”며 “건축물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동네 전체에 초점을 맞춰 ‘찾아오고 싶은 동네’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한옥뿐만 아니라, 1940~60년대 지어져 당시의 주거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근현대 건축물들도 함께 보존해야 동네의 가치가 살아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황평우 위원장도 “서촌에 남아 있는 한옥, 문화재를 하나의 섬처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서촌 전체가 조화로운 동네가 될 수 있도록 가꿔 나가야 한다”며 “개발 이익 대신 관광 이익이 지역 주민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방안 등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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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어린 옛 골목길 그대로 간직, 경복궁 서쪽마을 ‘서촌’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 사이,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는 요즘 ‘서촌’으로 통한다. 한국 근현대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서촌은 어린 시절 노닐던 옛 골목 그대로다.
서촌에는 한옥과 빌라가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한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서촌’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을 일컫는 별칭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 사이,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를 뜻한다. 관광 명소로 유명세를 탄 북촌과 달리 서촌 골목은 친절하지 않다. 이정표가 없어 골목과 골목 사이에서 길을 잃기 일쑤. 그래도 서촌 골목은 으리으리한 한옥이 모여 있는 북촌보다 낯이 익다. 실핏줄처럼 이어진 골목을 돌아 세월을 덧댄 개량 한옥을 만나면 어릴 적 살던 동네가 떠오른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나와 효자로를 건너 거미줄처럼 연결된 골목을 따라 이야기를 찾아 나선다.
북촌 vs. 서촌, 닮은 듯 서로 다른 옛길
“여기 주민은 ‘서촌’이라면 몰라요. 사람들이 북촌과 대비해 서촌이라 부르는 거죠. 여기는 누하동, 저 골목은 옥인동, 저쪽으로 돌아가면 통인동...” 체부동에서 60년간 대오서점을 운영한 권오남(80)할머니가 대뜸 이렇게 설명한다. 그도 그럴 것이 행정동인 청운효자동만 하더라도 효자동·창성동·통인동·누상동·누하동·옥인동·청운동·신교동·궁정동 등 9개 법정동을 포괄한다. 골목을 돌아 나서면 마을 이름이 바뀌는 곳이 서촌 일대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물길을 따라 가회동, 안국동, 계동, 재동, 삼청동을 아우른다. 사대부 집권 세력의 거주지였던 터라 옛 모습을 간직한 한옥 800여 채가 남아있다. 골목 사이사이로는 갤러리와 카페가 현대의 예술적 풍취를 더한다. 이에 비해 서촌은 조선시대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직인 중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근대에는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시인 윤동주와 이상 등의 예술가들이 서촌 주민이었다. 북촌과 비교되는 점은 한옥 양식에서도 발견된다. 서촌 633채 한옥 대부분은 1910년대 이후 주택 계획에 의해 대량으로 지어진 이른바 개량 한옥이다. 시인 이상의 옛집만 하더라도 1933년 주택 업자에게 팔린 뒤 145평의 집이 5개의 필지로 나뉘어 도시형 한옥으로 새로 지어졌다.
1927년 경성시가도. 경복궁 서쪽으로 들어선 마을이 ‘서촌’이다
이정표 대신 사람에게 길을 묻는 곳
솔직히 말하면 서촌 골목을 걷는 건 쉽지 않다. 종로구청에서 추천한 골목투어 코스를 따라 길을 나섰지만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비슷한 골목 사이를 몇 번이나 오갔다. 이정표가 없으니 결국 사람에게 길을 물어 통의동 백송터를 찾았다. 경복궁역 4번 출구로 나와 고궁박물관 입구 맞은 편 대림미술관 골목 안쪽에 있다. 통의동 백송은 높이 16m, 흉고둘레 5m에 달할 정도로 크고 또 수형이 아름다워 1962년 천연기념물 43호로 지정됐었다. 그러나 1990년 7월 태풍으로 넘어져 고사돼 그루터기만 남은 상태다. 이 주변으로 효자동 80년 역사를 대변하는 보안여관, 골목이 아름다운 통의동 서촌 한옥이 있다.
대오서점/ 60년 동안 서촌을 지킨 대오서점. 권오남(80)할머니는 “이제 방송 인터뷰는 안할려고 했는데...”하면서도
흔쾌히 대오서점 안을 구경시켜 줬다. 6.25 이후 이 집으로 이사온 할머니 가족은 한옥의 아늑함이 좋아 서촌을 떠나지 않았단다.
자하문길을 건너 서쪽으로 향했다. 서당으로 쓰이던 이상가옥터를 지나 누각길을 따라 걷다보면 옥인부동산 안쪽 골목에서 대오서점을 만난다. 권오남(80)할머니는 “예전엔 여기가 다 이런 한옥이었지. 근방에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었어. 그래서 지금도 곳곳에 시인이나 화가 집이 많아요”라고 설명해준다. 누각길, 통인오거리길, 팔운대길을 따라 실핏줄처럼 이어진 골목 사이사이에 근대 화가 이중섭, 이상범 가옥이 있다. 재개발 중인 옥인아파트까지 올라가는 길에는 1938년에 지은 박노수가옥, 시인 윤동주의 하숙집, 안평대군의 옛 집터에 있었던 돌다리 ‘기린교’ 등을 만날 수 있다.
팔운대1길을 따라 배화여고가 있는 언덕에 올라선다. 20세기 초 서양 선교사 건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배화여고 생활관은 물론, 백사 이항복의 집터인 필운대를 만날 수 있다. 필운대는 배화여고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건물 뒤편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가야 찾을 수 있다. 배화여고 인근에는 우리나라 최초 공립 도서관인 종로도서관과 최초 공립 보통학교인 매동초등학교가 있다.
황학정/ 고종이 활을 쏘기 위해 즐겨 찾았다는 황학정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사람들을 만났다. 15년 전부터 활쏘기를 배웠다는 정지용씨는
“일제가 경희궁을 헐면서 황학정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해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활을 쏠 수 있다는 게 놀랍죠”라고 말한다
인왕산 등산로로 이어지는 길에서는 서촌의 운치를 느낄 수 있다. 고종이 활을 쏘기 위해 즐겨 찾았다는 황학정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사람들을 만났다. 15년 전부터 활쏘기를 배웠다는 정지용씨는 “일제가 경희궁을 헐면서 황학정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해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활을 쏠 수 있다는 게 놀랍죠”라고 말한다.
개발과 보존 사이, 서촌 사람들
“자유당 시절에는 효자동에서 외지인이 자고 가려면 신고를 해야 됐어요. 그만큼 이 일대는 규제가 많았어요” 마을토박이인 원흥식(71)씨는 30년 넘게 서촌에서 부동산을 운영했다. 청와대가 지척에 있어 서촌은 오래도록 개발의 수혜를 받지 못했다. 1990년대 말 건축규제 완화로 빌라들이 들어서면서 서촌에는 한옥과 빌라가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올해 3월 서울시가 경복궁 서측 청운·효자·통의동 일대 58만 2297m²에 대한 한옥 보존 대책을 발표하자 실망하는 주민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마을을 둘러보니 이미 재개발조합 추진위가 들어선 곳도 있었다. 원흥식씨는 “오래된 골목과 건물이 많으니까 불편해하는 주민도 있죠. 한옥 관리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한옥 매매는 요즘 거의 없어요”라고 말한다.
커피 한 잔/ 매동초등학교 바로 앞에 있는 ‘커피 한 잔’가게. 매일 숯불로 굽는 커피 향이 거리를 가득 채운다.
북촌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이형춘(49)사장은 서촌의 정감어린 분위기가 좋아 이곳에도 가게를 열었다.
그러나 개발과 보존 사이 서촌의 느린 시간 속으로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매동초등학교 앞에서 1년 전 커피숍을 낸 이형춘(49)씨는 “북촌에 똑같은 가게가 있어요. 저도 처음에는 이 곳을 모르다가 서촌의 정감어린 분위기가 좋아 커피집을 내게 됐죠”라고 말한다. 문방구를 개조해 만든 이씨의 가게에서는 매일 커피 볶는 냄새가 흐른다. 바로 옆집은 인도에서 공정무역으로 가져 온 물건을 파는 가게가, 또 그 골목을 따라 젊은 예술가들의 음악 소리가 들린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간직한 서촌에 현대의 시간이 조심스레 포개진다.
가는길/
서촌 여행은 서울 도심 한가운데서 시작한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로 나와 효자로를 따라 걷는다. 고궁박물관 맞은편 대림미술관 안쪽 골목에 통의동 백송터가 있다. 이정표가 없는 곳이 많기 때문에 골목에서 주민에게 길을 물어야 한다. 종로구청에서 서촌 골목 투어 이정표를 설치하고 있지만 아직 없는 곳이 많아 미리 종로구청 홈페이지에서 상세지도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http://tour.jongno.go.kr/tour/nomalCourse/view.do?menuId=01040101&tour=03&menuNo=2213&contentsDvCo=DT&contentsCo=29&pageIndex=1)
서촌 토박이/ 권오남할머니와 삼성부동산 원흥식(왼쪽)할아버지가 대오서점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원할아버지는 서촌에서 나고 자라 이곳을 떠나지 않은 ‘서촌 토박이’다. 골목에서 우연히 만나 길을 물었다가 대오서점까지 안내 받았다.
보안여관/ 보안여관은 80년 가까이 같은 자리를 지켜온 통의동 역사 그 자체. 광복 이후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시인과 작가, 예술인들이
자리를 잡기 전 장기 투숙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현재는 건물 외벽의 모양은 그대로지만 내부는 실험적인 예술인들의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어릴 적 그 골목/ 서촌은 조선시대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직인 중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서촌 일대 600여 채 한옥 중 대부분은 1910년대 이후 주택 계획에
의해 대량으로 지어진 이른바 개량 한옥이다. 1990년대 말 건축 규제 완화로 서촌에 빌라들이 들어섰지만 골목만큼은 어릴 적 동네에서 만나던 정취를 풍긴다.
시인 이상의 옛집 터/ 시인 이상이 3~24세(1912~1932)까지 살았던 옛집 터. 1910년 지적도(왼쪽 아래)에서는 154번지 전체가 하나의 집이었지만 현재
지적도(오른쪽 아래)를 보면 154번지가 여러 집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33년 주택 업자에게 팔린 뒤 도시형 한옥으로 새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하늘을 가리지 않는 집/ 서촌의 집들은 하늘을 가리지 않는다. 고개를 조금만 들면 파란 하늘과 초록빛 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좁은 골목길을 돌아다녀도 답답하지 않은 이유다.
체부동 홍종문가옥/ 1913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 넓은 정원에 한옥 안채, 정자, 광, 현대식 양옥 등으로 구성돼있다.
한국 고유의 건축미를 간직하고 있는 안채와 광, 한옥 2동이 서울특별시 민속자료로 지정됐다.
필운대/ 백사 이항복의 집터인 필운대. 배화여고 건물에 바로 뒤에 가려져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배화여고 건물 뒤편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가야 찾을 수 있다.
배화여고 생활관/ 20세기 초 서양 선교사 건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배화여고 생활관.
건물의 전체 외관은 서양식이지만 지붕은 한옥의 기와지붕을 사용해 서양식과 한국식 건축이 섞인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상범 가옥/ 동양화가 청전 이상범(1897~1972)선생이 살았던 집과 화실.
가옥은 1930년대에 지은 도시형 한옥 건물이고, 화실은 8평 남짓한 단층 양옥 건물이다. 현재 내부가 개방되지는 않는다.
서촌 거리/ 이정표가 없는 서촌에서 길을 잃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골목 구석구석 집 주인의 섬세한 솜씨가
느껴지는 공간을 만나기 때문이다. 종로구청에서는 탐방객들의 편의를 고려해 서촌 곳곳에 이정표를 설치할 계획이다.
서촌 둘러보기/ 경복궁역에서 시작해 서촌을 둘러보는 코스. 꼼꼼히 둘러본다면 2~3시간은 소요된다.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기린교가 있는 청운효자동 위쪽까지 둘러봐도 좋다.
① 옛 청와대 보안여관 → ② 창성동‘서촌’골목길 → ③ 쌍홍문 터 및 해공 신익희 가옥 → ④ 무궁화 동산 → ⑤ 육상궁 → ⑥ 최규식 경무관 동상 및 창의문 → ⑦ 윤동주 시인의 언덕 → ⑧ 백세청풍바위 및 김상용 집터 → ⑨ 송강 정철 집터 및 시비 → ⑩ 선희궁 터 → ⑪ 국립 서울 농맹학교 담장벽화 → ⑫ 우당 기념관 → ⑬ 기린교 → ⑭ 윤동주 시인 누상동 하숙집 → ⑮ 박노수 가옥 → 이상범 가옥 및 화실 → 세종대왕 나신터 → 자하문길
5호선 광화문역(2번출구) → ① 광화문광장 → ② 대림미술관 → ③ 통의동 백송 터 및 창의궁 터 → ④ 홍종문 가옥 → ⑤ 배화여자학교 및
백사 이항복 집터(필운대) → ⑥ 황학정 → ⑦ 단군성전 및 사직단 → ⑧ 오솔길 → ⑨ 성곡미술관 → ⑩ 서울역사박물관 → ⑪ 서울시립미술관 → ⑫ 경희궁 → ⑬ 흥국생명 앞 조형물 '해머링 맨' → 신문로1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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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없이 서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촌 1 - 영추문 앞 효자동 안쪽에서
경복궁 서쪽에서 인왕산 기슭에 이르는 지역을 '서촌'이라고 부른다. 효자동, 사직동, 옥인동 등 15개 동네가 여의도의 절반을 좀 넘는 좁은 터에 모여 있다. 북촌 영역에 비하면 그 3분지 1쯤 된다. 대궐 서쪽의 입지인 만큼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사직단이 세워진 곳이고 인왕산 풍광이 한 발걸음 안에 있어 유력자들의 거처와 별장에다 예술과 풍류가 일찍 꽃피었던 곳이다.
그러나 더 강조되는 서촌의 특징은 이곳이 윗대(청계천 위쪽이란 말)라고 불리던 지역으로 환관, 별감, 아전 등 대궐 관리들의 주거지이자 근대 들어 중인계급의 부르조아적 진취성이 모습을 드러낸 터라는 것이다.
여기서 만들어진 오래된 생활의 자취는 요즘 와서 다시 향수를 자극한다. 서울 사람들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주거지 북촌과 함께 이곳 '서촌'이 없이 서울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 경복궁의 서문 영추문 앞의 한적한 지난 가을 풍경. ⓒ 이순희 |
경복궁의 서문 영추문 있는 효자로에서 서촌 산책을 시작한다. 길가에는 고도제한을 받는 야트막하면서 현대적 건물이 가득하다. 남아 있는 한옥들도 대개 근대 건물이다. 길은 생명을 지닌 구조인 듯 서촌에서는 효자로, 자하문로, 필운로 등 3개의 큰길로 나뉜 지역마다 개성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경복궁이 융성했을 때처럼 청와대 코앞인 효자로에는 관청 건물들이 많아 거리에서부터 공무원 풍의 남자들이 많이 보이고 관료적 분위기가 강하다. 옛날 이 지역에 대궐과 양반가에 딸린 관리들이 많이 살아온 전통이 현대판으로 바뀌었을 뿐이란 생각을 한다.
서촌은 1980년대 이후 큰 길이 계속 남북으로 확장되고 집들 사이를 뚫고 소방도로 등이 나면서 옛 동네의 원형은 많이 사라졌다. 이 동네 사람인 건축가 황두진 씨는 "이 동네에 있던 옛 환관들의 집은 문간서부터 안방까지 찾아가는 통로가 미로처럼 생긴 구조였는데 재개발 바람에 모두 헐렸다'고 했다. 거의 획일적인 구조의 한옥만 남아난 지금 이런 집 건축은 어떠했을지 보고 싶어진다. 단 몇십 년의 시차로 서울은 귀한 건축유산을 많이 상실했다.
그래도 정부 관련 건물들이 자리 잡은 터만큼은 그리 변하지 않은 듯, 그 주변 좁은 골목길 틈틈이 남은 옛 자취가 있다.
▲ 서촌의 한 골목. 주택들만 모여 있는 이런 풍경은 아주 드물게 남아 있다. ⓒ 이순희 |
길가 건물 뒤 실핏줄 같은 뒷골목 사이로 들어가 보면 어쩌면 수백 년 전 구조였을 것 같은 좁은 길 그대로가 남아 있다. 동 규모가 작아서 몇 걸음 걸으면 금세 동네 이름이 달라지지만, 인왕산과 어울린 주거지의 모습에다 시장과 작은 가게 등 동네와 밀착된 상업시설들이기에 더욱 친근하다.
크고 작은 한옥들이 반은 양식화 된 채로 붙어 있는데 어떤 골목은 100미터가 채 안 되는 길이 6번이나 꺾어지면서 미로를 형성한다. 한낮인데 비밀스러운 느낌이 들 만큼 조용하고 인기척도 거의 없는 살림집들이다. 환관들 집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듯도 하다. 최근엔 조용한 분위기를 찾는 출판사가 많은 것도 이해가 되고 직장인 풍의 남자들이 드나드는 주택 형식의 음식점들도 많다.
▲ 서촌의 다른 골목. 직업적 예술가들이 아닌 동네 자체에서 우러난 미감이 옛 서울에 대한 향취를 일깨운다. ⓒ 이순희 |
▲ 서촌 또 다른 골목의 매력. 이 지역이 쇼 같은 상업지구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이순희 |
'이곳과 북촌만이라도 서울의 옛 주거지다운 분위기를 지켜주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버텨낼 수 있을까. 북촌에 이어 서촌이 주목을 받으면서 자꾸만 화려해지는 화랑과 음식점을 필두로 삼청동 비슷한 유흥상업지구가 되어간다. 땅값이 널을 뛴다고 한다.
북촌은 이미 주거지 분위기가 깨지다 못해 어느 골목들은 일본 관광객을 접대하는 상점가 같은 아류들의 거리가 되었고 원주민들은 놀라 다 도망간 빈껍데기 동네가 되었다. 6개월 단위로 높은 집세를 내는 업종들로 바뀌는 상점마다 집주인이 아닌 '알바'들로 채워져 이웃 간의 교류도 없고 모래알 같은 인간관계로 바뀌었다.
점잖고 오래된 동네 분위기는 전연 고려하지 않고 몰려다니는 관광객만 눈에 보이는 듯 집채만한 간판과 진열장을 만들어 달고 교태 어린 쇼처럼 장사에 나서는 업소 풍경은 충격적이다. 대한민국 문화를 대표한달 수 있는 북촌의 생활상을 보존하기 바란다면 정책상 이 거리는 주거지의 기본을 해치지 않도록 강력히 규제했어야 한다.
이제 서촌마저도 머잖아 상업지구로 변모된다면 서울은 옛 정서와 역사를 모두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서촌 산책은 그래서 더 변하기 전에 찾아보며 생활의 근저를 확인해보는 일정이다.
▲ 효자동-통의동의 백송은 이미 말라 죽고 둥치만 남아 있다. 동네 온갖 기물들이 어지럽게 주변에 들어서 있다. ⓒ 이순희 |
이 동네 한복판에 통의동 백송(白松)이 있다. 수령 600년으로 서울의 나이와 맞먹은 흰 둥치의 거대한 소나무였는데, 십여 년 전 고사했다. 빙 둘러싼 집들 사이 공간에 흰 표피가 일부 보이는 나무 밑둥치가 남아 있고, 주변은 새끼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이 백송이 온전히 살았을 때의 사진이 어느 집 담에 걸려 있기도 했는데 아주 보기 좋았다. 지금은 근처 집들의 기물인지 술 상자며, 장독, 죽은 화분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터를 점령하고 있다. 그걸 보면 이 동네 사람들이 특별히 자연과 나무의 아름다움을 누리고 사는 것 같진 않다.
▲ 서촌의 또 다른 골목 풍경. 오래된 주택가의 여유가 느껴진다. ⓒ 이순희 |
그래도 주변 골목길은 여유가 느껴져 허물다 만 담장에 기타가 하나 장식돼 그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사실 이 옛 동네의 가치는 작위적인 예술을 감상하기에 앞서 동네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유형·무형의 오래된 생활 속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 있다.
이곳 통의동 백송이 있는 장소를 망설인 없이 한 번에 찾아갈 수 있다면 분명 서촌 일대를 잘 아는 사람이다. 길가에는 화랑과 카페 투성이다. 이 지역에 속속 모여드는 예술가들이 보여주는 전시 품목은 온갖 취향을 드러내는 가지가지 물건들이다. 오래된 여관건물 안 房房마다구조 그대로 '예술을 파는 구멍가게' 가 되어 초현실적인 전시작품들이 들어서 있기도 하다. 근대 모더니즘의 시인 이상(李箱)의 난해한 시가 추상화처럼 흐트러져 쓰인 창문 안을 사람들이 기웃거린다.
▲ 담벼락의 낡은 회벽에 그려진 꽃나무 벽화가 있는 서촌 길. ⓒ 이순희 |
영추문에 비치는 하오(下午)의 서녘 햇살이 눈에 부신데, 건너편 그늘 속에 한 젊은이가 의자를 내놓고 앉아 책장을 넘기며 천천히 빵을 먹는다. 길가 집의, 회칠이 한 꺼풀 벗겨진 담벼락에는 자주색 꽃나무 벽화가 그려졌다. 마치 겉칠이 벗겨진 속에 처음부터 들어 있던 소중한 그림 흔적 같다. 무식한 소견으로 '예술가가 그렸나?' 생각 한다. 무표정한 한 남자가 뭔가 도구를 가득 들고 철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가 이 집의 예술가인가?
이들 사이 인도로 끊임없이 지나가는 인파는 예술 구멍가게의 창문과 담벼락 그림에 눈을 던지는 둥 마는 둥 동네사람에다 이 거리로 원정 구경 나온 한 떼의 젊은이들이 뒤섞여 있다. 가을 오후 '영추문 앞 효자동' 의 살아 있는 캔버스 같다.
200년 전에는 서예가 김정희(1786~1856)가 백송 있는 곳 어디쯤 살면서 서촌 끝 옥인동의 풍류객 친구들을 찾아 나들이했다. 이곳 효자로에서 자하문로를 건너 사직동, 옥인동까지는 걸어서 15분이면 도달한다.
서촌 2 - 사직단에서 정조임금이 물은 것, 그리고 예술가들
사직동에는 사직단이 있다. 조선왕조를 세우며 궁의 서쪽에 토지신과 곡식신을 받드는 사직단을 두었다. 1908년 이래 제사를 폐했다가 1988년부터 되살아나 9월 셋째 일요일마다 사직대제가 거행된다.
사직단 구역은 많이 축소되어 옛 그림에서 보이는 건물도 사라지고 지금은 2개의 담과 8개의 홍살문을 겹겹이 두른 사직터 만이 보존된다. 그 안에 화강암 장대석을 3벌로 쌓아올린 네모 반듯한 평면의 사(社)단과 직(稷)단이 나란히 있다. 단 주변 4방향에서 올라가는 계단도 3층이다.
높이 1m, 사방 7.65m의 정사각형 단에는 황토 흙을 깔았다. 원래는 오색토를 깔았는데 자꾸 혼합되어서 아예 황토로 대체했다. 나쁜 기운을 제거하는 황토의 역할이 생각된다. 1980년 충남 은산별신제 때에도 집집마다 대문에 금줄을 치고 그 앞에 황토 흙을 소금처럼 뿌렸던 것이 생각났다. 황토가 이처럼 고전적으로 쓰이는 의례는 이런 제(祭)뿐인가 한다.
▲ 높은 데서 바라본 사직단. 2겹의 담과 8개의 홍살문이 둘린 가운데 토지신인 사단과 곡식신인 직단 두 개의 단에는 황토 흙이 깔려있다. 서울에서 보는 가장 고대사적 풍경이다. ⓒ 이순희 |
종묘제례와도 달리, 땅과 신위가 그대로 통하게 만들어진 사직단은 그 생김새부터 독특한 기운이 느껴진다. 사와 직 두 개의 단에는 원래 위패처럼 밑부분은 네모나고 윗부분은 둥근 (天圓地方) 화강암 신위 돌이 황토 땅에 박혀 있었다. 석주(石柱)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국사(國社) 국직(國稷)으로 불리던 신위가 고종의 황제국 대한제국이 되면서 태사(太社) 태직(太稷)으로 승격될 때 이들 과거의 석주는 땅에 묻고 태사 태직 신위는 새로 제작했다. 이때 사단의 국사 석주만큼은 다 묻지 않고 윗부분이 드러나 보이도록 해서 그 존재를 남겨두었다. 지금 사단 황토 땅에 남아 있는 천원지방의 돌이 그것이다.
돌은 오래되어 보이고 윤이 나고 어딘지 신비롭게 느껴진다. 정조(재위 1776~1800)실록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 가까이서 본 사단과 직단. 세벌장대를 쌓아올린 사단(사진 위쪽)에는 매몰된 석주가 일부분만을 드러내 보이며 남아 있다. 정조 임금도 그 옛날, 이 돌이 무엇인가 물었다. ⓒ 이순희 |
정조 2년, 임금이 이곳에 들러 기물 등을 살피다가 '저기 사단(社壇)에 있는 돌은 무슨 돌인가?' 물었다. 책임자가'오례의에 사(社)가 있으면 석주가 있다는 글이 있는데, 단 위의 돌은 이를 따른 것입니다.' 하였다. 정조대왕도 보통사람처럼 단위에 있는 그 돌이 궁금했었다!
제례는 유교식이다. 평소 신위각 건물에 들어 있던 태사와 후토(后土, 태사의 배위) · 태직과 후직(后稷, 태직의 배위) 신위는 대제 때면 꺼내 제관들이 받들고 온다. 양 · 소 · 돼지 · 토끼 · 노루 고기 등이 날고기거나 장조림 되거나 삶아서 제물로 오르고 소금이며 곡식 · 떡과 술, 나물도 오래된 예법에 따라 올린다. 옻칠한 검은 그릇과 대소쿠리 그릇, 조각한 놋쇠제기가 쓰이는 것은 종묘대제와 같지만, 제수의 규모는 조금 다르다고 한다.
제사를 총괄하는 집례가 창을 하듯 제사의 순서('홀기'라고 한다)를 지시하면, 조선시대 제복차림의 제관 수십 명이 그에 따라 움직이며 술을 올리고 절을 하고 제물을 태우는 등 의례를 진행한다. 종묘제례에 쓰는 노란색과 구별해 사직대제는 서쪽을 상징하는 푸른색 헝겊으로 제상을 장식했다. 종묘대제의 축소판 같은 형식이고 붉은 관복 차림에 8줄로 맞춰 서서 추는 제례무인 일무와 국립국악원의 제례악 연주가 함께한다.
▲ 2011년 사직대제의 장면들 - 위로부터 석주가 보이는 사단에서 제를 거행하는 제관들, 제가 끝난 뒤에 공개된 사단의 제수차림, 신위의 철수장면(푸른색을 주목해 볼 것). ⓒ 김유경 |
사직단 옆으로는 단군성전, 황학정, 그리고 인왕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서울도성의 성벽이 이어진다. 홍석창의 단군영정 등 유명한 예술가들이 만든 단군상, 서예가 김응현 손경식 글씨 등이 모여있는 단군성전은 서울시 보호문화재이다. 필운동 이 동네에서 살던, 선조때 임진왜란을 겪어낸 정치가 이항복의 글씨 필운대(弼雲臺)도 돌에 남았다. 조선시대 명랑얄개였던 이항복과 이덕형 두 신동 소년의 일화 배경도 이 부근인가? 황학정에는 고종 황제이래 지금도 활 쏘는 사람들이 모인다.
오래된 역사가 켜켜이 똬리를 틀고 있는 이 지역은 그러나 가뿐한 한나절 산책코스로 현대인에게 다가온다. 도시의 여유 한때인 하이킹을 즐기러 가는 이들이 계속 지나간다. 우연 같지 않게 사직동의 이들 유물은 하나같이 한국인에게 주어진 최초의 국가를 잊지 않으려는 의례와 함께 국가의 틀 안에서 영위되는 삶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모두 껴안고 있어 보인다. 사람들은 여기서 시장과 집터를 이루고 지금까지 오래오래 살아간다.
▲ 서촌 종로도서관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도서관 설립자 이범승 흉상. 한 소녀가 바라본다. ⓒ 이순희 |
문화재청은 사직단 주변을 정비할 것아고 한다. 사직단에서 종로도서관이 이어지는 길에 볼품없던 담을 헐고 조선식 돌담을 쌓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며 사는 오랜 삶의 형태에 이 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염지윤 씨는 "오래된 전나무가 저기 서 있는데 새로 쌓는 돌담에 어울린 풍경이 이곳을 근사한 길로 만들어 줄 거라고 기대해요"라는 기쁨을 말했다.
서촌의 오래된 역사에는 인왕산이 배태한 예술가, 지식인들의 활동도 있다. 권력자와 애국자들의 거처 흔적도 있는데 이는 또 다른 장에서 풀어갈 이야기다.
옥인동 꼭대기 수성동(水聲洞) 기린교 있는 계곡을 보면 이 동네 시모임 옥계시사를 이끌던 천수경 등 이곳에 모이던 이들의 풍류와 시흥이 짐작된다. 1817년 김정희가 효자동 백송(白松)이 있는 자기 집에서부터 찾아와 합류하던 자리, 그의 글씨 송석원(松石園) 세 글자가 새겨진 바위 등이 남아 있다.
화가 정선(1676~1759)이 그린 '비 갠 뒤 인왕산 풍경(인왕제색도)'은 억세게 생긴 인왕산 바위를 마치 그 앞에서 쳐다보는 것처럼 그렸다. 비 온 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그림에는 나무들이 많고 그 속에 집이 하나 있다. 이 집이 정선의 평생 친구 문장가 이병연의 집이라고도 한다. 인왕산 우람한 바위는 지금도 자하문로를 지날 때 마주 보는 풍경이다. 다만, 몇 채의 옛집 대신 셀 수 없이 많은 건물이 가득한 오늘의 삶이다.
또 다른 옥인동 풍경 그림들이 많다. 여러 화가들은 하나같이 서촌 사람들이 즐긴 풍류와 삶을 그림 속에 드러내 준다. 1970년대 이후 인왕산 깊숙한 곳에는 고급요정 선운각도 있으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가 기업의 연수원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
이 일대에는 현대의 예술가들 면면도 화려하다. 동양화가 박노수, 가야금산조의 명인 김죽파, 많은 건축가 등이 산다. 시인 이상의 하숙도 있었다 하고 소설가 현진건은 부암동 안평대군 무계정사 터에서 살았다. 인왕산 기슭 청운공원에는 종로구청이 만든 '윤동주의 언덕'도 생겼다. '윤 시인이 누상동에서 하숙 살 때 이곳을 거닐며 시상을 다듬었을 것'이라는 설명 옆에 시 한 편이 새겨진 돌이 있다.
▲ 정선의 그림 '수성동(水聲洞)'에 나오는 옥인동 기린교 주변의 최근 복원 공사 현장 ⓒ 이순희 |
▲ 부암동 안평대군 무계정사 터의 오래된 우물 중 하나. 빈터에 우물 두 개가 그대로 전한다. ⓒ 이순희 |
그 옆에 '인왕산에서 굴러 온 돌'이란 제목의 미술품이 있다. 2007년 세 명의 건축가가 인왕산의 유명한 바위 모양 철골을 만들고 지나가는 이들로 하여금 인왕산 돌을 그 안에 채워 넣도록 한 것이다. 지금 이 일대는 말끔한 도로가 돼서 꽤 멀리서부터 힘들여 돌을 찾아다 채워넣어야 한다. 둥근 타원형에 날카로운 돌멩이들 수백 개가 속속들이 드러난 모양이 '수류탄이 터진 것' 같은 야성이 전해진다.
▲ '인왕산에서 굴러 온 돌' 윤동주 언덕의 설치미술. ⓒ 이순희 |
'예술가'들은 곳곳에 있다. 인왕산에 가장 가깝게 난 필운대로 안쪽으로는 오밀조밀한 골목에 살림집들이, 길가에는 주택을 개조한 생활형 가게들이 많다. 정육점, 농산물할인점, 수퍼마켓, 문방구점, 생맥줏집 사이에서 30세의 주의미 씨는 한옥의 2평짜리 사랑방 한 칸에 재봉틀로 손수 만든 헝겊 공예품들, 잡화 등을 진열해 놓고 판다.
▲ 누상동 길가에서 본 작은 가게. 그 옆의 오랜 헌책방은 문닫았다. 생활에 밀착된 이런 가게들이 얼마나 더 버틸지 알 수 없다. ⓒ 이순희 |
재래식 시장이 두 개나 성업 중이다. 아스팔트 포장에 현대화된 통인시장의 90개 가게에는 예술학도들이 몰려와서 가게마다 상품관련 설치미술을 붙여놓고 갔다. 칼 가는 할아버지를 시장 복판에서 오랜만에 봤다. 할머니가 어린 소년을 데리고 물건사며 돈 내는 연습을 시킨다. 올초 설 즈음해서는 이명박대통령 가족도 와서 과자랑 고기를 사갔는데 옷 얘기가 더 화제였다. 시장은 일상의 여러 광경들을 구경하고 재밌어하는 장소인 것이다.
그 아래 옥인시장('금천시장'이라고도 한다)은 땅 위에서 그대로 장사하는 중이다. 이 부근은 오래된 낡은 집들이 많다. 주민들은 한옥 보전에 반대해 곳곳에 '우리는 아파트를 원한다'고 써 붙여 놨다. 여기의 떡볶이 할머니는 화덕 하나와 종이상자 몇 개가 50년 된 가게 터이다. 젊어서부터 이 자리에서 순해 보이는 간장 떡볶이를 팔며 늙었는데, '고생이라기보단 재미있고 집에만 앉아 있으면 답답하다'고 한다.
어스름이 내리니 남정네들이 시장 안 술집으로 몰려와 자리를 차지하고 왁자지껄 흥겨운 시간을 보낸다. 시민들의 파티 타임이 시작된 것이다. 선뜻 시장 안 술집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주택가의 한 맥줏집 노천 테이블에 앉아 저녁 어스름을 바라본다.
▲ 인왕산 쪽에서 바라본 오늘의 서촌. 윗부분에 경복궁 서쪽 전각들이 모여 있고, 아랫부분 체부동 일대 양식 건물들 틈에 오래된 기와집 민가들이 보인다. ⓒ 이순희 |
연립주택들 많은 동네로 마을버스가 부지런히 사람들을 날라다 놓는다. 여기는 밤마다 주민들이 빠져나가는 여느 상업지구와는 다르다. 서촌 사람들은 동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편안한 일상풍경이지만, 서촌이라고 좋은 일만 일어나는 삶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 한 지식인의 집안은 옆집도 모르게 야반도주해 나갈 일이 있었다. 그래도 수성동 계곡이 과연 원래 비슷하게 복원될지는 이들에게 좌우될지도 모른다.
체부동 한옥들 틈의 오래된 양옥은 건축가 손으로 지어진 집이 분명했는데, 노부부 둘만 남아 큰집의 1층만 쓰면서 살고 있다. 화분 여러 개가 이 조용한 집에서 지속되는 서촌 한구석의 삶을 말해준다. 이 집 앞으로 다시 지나가고 싶어 그 골목길을 찾지만, 번번이 실패하곤 한다. 이젠 너무 많은 서촌의 집과 골목 틈에서, 지나가는 이의 발걸음은 거기까지인 것이다.
서촌 3 - 권력과 예술 사이, 송석원 미스터리
인왕산자락 청운동-옥인동-필운동 일대는 서울에서 손꼽히는 봄철 꽃구경의 명소였다. 지금은 집들에 가려 안보이지만, 웅장한 바위와 계곡에 흐르는 물, 살구꽃 복사꽃 버들이 어우러진 풍취는 글과 그림 글씨 등 문화적 역량이 응집된 예술을 이끌어냈다.
▲ 2012년 입춘 무렵 잔설이 남아 있는 인왕산 풍경 ⓒ이순희 |
안평대군이 꿈에 본 풍경을 안견이 그림으로 구현해낸 '몽유도원도'의 실제 배경이 이곳이었다 한다. 연산군이 봄날의 연회를 벌인 탕춘대도 이 부근 세검정지역이다. 정조도 인왕산에 올랐다. 그는 인왕산의 기세도 살피면서 '필운의 꽃 버들에 끌려 돌아가길 잊네' 라고 했다.
하지만 정조가 본 것은 꽃구경에 취해 몰려다니며 시 짓기에 열중하는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정조는 그 와중에 혼자 집안에 틀어박혀 글 읽는 사람을 눈여겨보고 어떤 조치를 취하리라고 시에 쓴다.
'송석원시사(詩社), 혹은 옥계시사'는 그런 정조의 시대에 출현했다. 서촌의 중요한 구성원이던 중인계층 지식인들의 모임으로 1786년 시작된 이 문예운동의 중심에 송석원이 있다. 그룹의 리더 천수경의 옥인동 집 이름이 송석원이고 이곳이 중요 모임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2011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웃대(서촌) 중인전'은 서촌사는 중인들의 존재와 당대 예술가들의 창작 시서화를 집중적으로 공개한 자리였다. 송석원시사의 일원이던 장혼의 시는 '사립문에 꽃 그림자 드리운 마을 고요한 한낮'을 말하는 섬세한 정감이다.
김홍도, 이인문, 임득명, 정선 등 여러 화가들 그림에는 점점이 꽃 더미가 묻어나는 산속 푸른 실버들이 날리고 바위의 웅장함과 계곡의 경치가 나온다. 야밤 휘영청 한 달빛 아래 갓 쓰고 흰 두루마기 입고 있는 남자들의 정취가 드러난다. 비 맞은 숲의 아름다움이 여러 번 강조된다. 비 온 뒤 개여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 숲이고, 비 갠 뒤 찬란한 햇살비치는 풍경을 담는다.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송석원시사가 열리는 장면을 저마다의 구도와 감성에 따라 달리 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특별한 흥미를 갖게 하는 문화사적 사건이랄 수 있다.
▲ 이인문이 그린 '송석원시사 아회도'. 송석원 글씨가 절벽바위 옆에 표시돼 있다. ⓒ개인소장 |
경치에만 몰입한 것은 아니었다. 정래교가 쓴 시 '서울 구석에서 머리 숙이고 살며 아전 노릇하기가 너무나 힘들어라'처럼 같은 풍경을 두고도 실존의 문제를 다룬 시가 나온다. 그는 '짐을 잔뜩 진 소가 길 가기 겁내다가 채찍 맞는 것 같은' 생활 속에 좋은 경치를 찾는 것에서 비로소 한순간의 위로를 얻는다.
거기에는 가랑비 내리는 아침 말 타고 달리는 서정도 곁든다. 물가에 와 '비로소 입을 벌리고 웃고, 옷자락 헤치고 길게 휘파람 불며 세상사를 생각한다'. 실존을 생각하는 그의 좌절에서 근대 프로페셔널의 감각이 느껴지며 중인계층의 전문성과 부르주아적인 취향도 엿보인다.
송석원시사의 구성원 10여 명은 대부분 30대 나이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작품을 활자로 찍어 남기고, '백전'이라는 시경연대회를 개최해 사회적 성격을 가미했다. 치밀한 사고력의 인물인듯한 장혼이 정조의 규장각 편찬사업에 참여하여 교정을 본 책은 모두 선본(오자가 없는 책)이었다고 한다. 선본(善本)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문화적 역량인지 아는 사람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 정조 때 역관(譯官)이자 대나무 그림도 잘 그린 임희지도 그 일원이었다.
▲ 김정희가 예서로 쓴 바위 글씨 송석원(松石園). 1950년대 김영상의 촬영으로 남은 유일한 근접 사진이다. 2004년 역사박물관 바위 글씨전에도 소개됐다. ⓒ김영상 |
1817년에는 통의동 백송(白松)이 있는 동네 살던 김정희가 5월쯤(음력 4월) 천수경의 회갑을 기념하는 시사에 와서 예서로 쓴 '송석원(松石園)' 글자를 바위에 남겼다. 이 사실은 오늘날 송석원을 되살리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키워드가 되었다.
송석원시사는 30여 년이나 지속되었다. 흥선대원군이며 여러 선비들이 찾아왔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이를 계승한 시모임이 나왔지만 한말(韓末)이 되면서는 100여 년의 기풍도 사그라졌다. 천수경의 집터 송석원은 그새 김수항, 민태호를 거쳐 윤덕영 소유가 되었다.
▲ 송석원 별장의 마지막 주인 윤덕영을 찍은 사진에는 위쪽 바위에 김정희가 쓴 오래된 글씨 송석원과 윤용구가 갓 쓴 벽수산장 글씨가 나란히 보인다. ⓒ화봉 책 박물관 |
김학진이 쓴 '일양정기략(一陽亭記略)'에는 송석원의 주인이 바뀌는 이야기가 자세하다. 안동 김 씨네가 송석원 부근에서 여러대를 이어 살다가 민 황후의 일족 민규호가 병에 좋은 물을 먹기 위해 와서 살게 돼 주인이 바뀌었다. 그 뒤로는 순종비 윤 황후의 큰아버지 윤덕영이 송석원의 마지막 주인이 되었다. 모두 왕비 집안의 일족임을 내세워 좋은 터를 지니고 대단한 권력을 행사했다는 공통점이 달라진 시대를 대변한다. 중인계층의 다양한 개성이 결집되는 데서 떠나 권력자 개인공간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1913년에는 일본 총독 마사다케 일당도 송석원, 윤덕영 자작 별장에 왔다. 점심을 먹고 한일의 시인, 서예가들과 골동 서화까지 점검하고(관람했단다) 일양정(과거의 청휘각)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문화재 전문 한 블로거가 찾아낸 사실이다. 아직 윤덕영의 서양식 벽수산장은 지어지기 전이었다.
▲ 이용민 감독의 1956년 영화 <서울의 휴일>에 주인공(양미희) 넘어 배경으로 보이는 옥인동 송석원 벽수산장과 주변의 주택들. 북악산 능선을 배경으로 한 건물 오른쪽으로 돌출된 첨탑이 보이고 측면에는 정원에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다. 당시의 건물은 언커크(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가 사용 중인 때다. ⓒ정인엽 |
윤덕영이 인수한 송석원은 옥인동 47번지 일대 3000평의 터에(어떤 자료는 9000평이라고 한다) 있었다. 1914년부터 10여 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프랑스공사 민영찬이 파리에서 가져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독일인이 감독해 지은 222평의 저택 벽수산장과 한옥 등 14동의 건물군이 들어섰다. 송석원 산장은 서울 최고의 호화주택으로 당시 신문에도 여러 번 기록되었다. 정문을 돌기둥으로 세웠기에 서촌 사람들은 현대에까지 이 집을 '돌문 안 뾰족집'이라고 불렀다.
윤덕영 사후 1941-1945년간의 태평양전쟁 중 이 집은 일본 미쓰이 재벌이 점거했다. 해방되면서는 덕수병원이 들어 있다가 6.25가 나자 '조선인민공화국 청사'가 되었다. 그 후 유엔군장교 숙소를 거쳐 언커크(UNCURK,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가 썼는데 1966년 집수리 중 불이 나 타버렸다. 1973년 철거되기까지 지은 지 불과 50-60년도 못돼 그림자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 옥인동 주택가에 남은 송석원 정문의 돌기둥 2개. 하나는 땅속 깊이 묻힌 듯하고 낙서가 있는 기둥 위에는 보안등이 박혀있다. 다른 하나는 아예 집의 벽재로 쓰였다. ⓒ이순희 |
송석원의 흔적으로는 정문 문설주 돌기둥 3기가 옥인동 한 빌라의 벽과 길에 남아 있다. 건축가 '오월의 세상이야기' 블로거가 처음 밝혀낸 사실이다. 이 돌문에서부터 벽수산장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50-100미터 정도로 보인다.
일양정에 이어 벽수산장마저 화재로 폐허가 된 후 이 터에 남아 있던 난간석 5,6개와 둥근 테이블 같은 돌이 근접한데 있던 윤덕영 사위의 양옥집으로 옮겨졌다. 후일 화가 박노수 씨가 이 집에서 거주하며 테이블 돌에 당초문과 사슴이 뛰어노는 그림을 넣어 새긴 것이 남았다. 야트막한 난간석 돌은 가운데가 잘록한데 아랫부분이 더 큰 모래시계 모양에 하얗고 세련돼 보인다.
언덕 위 별장자리는 옥인동에서 가장 터가 넓고 고급인 주택들이 밀집한 주택가가 되었다. 주민들은 이 앞으로 난 넒은 길을 '엉겅크(언커크의 순화된 발음) 길'이라고 불렀다.
▲ 박노수 미술관 정원의 돌 테이블과 의자로 놓인 송석원 터 난간석. 박노수 화백이 여기에 당초문과 사슴을 조각했다. 올 가을 미술관이 개관하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순희 |
이 동네 사는 동양화가 이영복 씨는 "이 집이 불나기 전까지 송석원 프랑스식 저택은 세검정으로 나가는 자하문(창의문) 고갯길에서 하얗게 아주 잘 보였다. 언덕 위에 있어 안국동에서도 그 집이 보였다. 그런데도 가까이 가보거나 그림 그릴 생각은 안 난 게 그 당시 언커크란 유엔기구가 있는 건물이라 어딘지 낯설어서였던 듯하다'고 했다.
1956년 이용민 감독의 영화 <서울의 휴일>에 주인공이 사는 동네 배경으로 이 저택 외관이 여러 번 등장한다. 수표교, 석조전 동관 서관, 환구단 조선호텔, 파고다공원(탑골공원) 등 1950년대 서울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줄거리 속에 흥미롭게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송석정 별장은 특히 여러 번 보인다. 정인엽 촬영감독은 이 집을 산의 능선과 어우러지게 잡고 그 아래쪽 동네풍경과 인물을 앞 배경으로 전개해 간다.
하지만 친일파 윤덕영 사후에는 후손 누구도 송석원 저택을 유지하지 못했다.
"규모가 너무 커서 도저히 유지할 수 없었다" 하고 "재산문제로 하도 시달리며 살아 일가의 재산유지에 미련이 없어 모든 것을 포기했다. 송석원 일화는 그 영역 안의 한옥에서 거주가 이뤄졌다는 것만 전해 들었고 이 집이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전혀 모른다"고 후대의 한 사람은 말했다. 한 사업가가 이곳에 미국식 클럽을 만들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사실이 아닌 듯했다.
송석원에 대한 관심은 여러 분야에서 지속되어왔다. 1935년 문일평의 송석원 답사기에는 이 집 앞으로 시냇물이 흘러 사람들이 빨래를 하고 연못도 있었고 숲이 좋았다. 샘물도 솟아났다. 1959년부터 '서울 6백년'이라는 글을 쓴 김영상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부터 송석원 바위 글씨 사진이 나왔다. 1984년에는 윤평섭교수가 송석원 건물, 다리와 냇물 등 지적과 조경을 다룬 논문을 발표했다.
2010년에는 '화봉 책 박물관'에서 송석원과 벽수산장 글자가 암각된 바위벽 아래 별장주인 윤덕영이 있는 1930년대쯤의 사진이 공개됐다. 사진 속 바위에는 김정희의 가로로 쓴 송석원 각자 옆에 윤용구가 세로로 쓴 벽수산장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윤덕영은 그 앞에 모시 두루마기에 책을 받쳐 들고 앉아있다.
옥인동 47번지 일대의 지적, 권력과 번지수 분할 등을 연구한 논문도 여러 편이다. 서울역사박물관과 시민단체인 서촌주거공간연구회가 구석구석 찾아낸 인물사와 변화된 흔적 등 송석원에 대한 두꺼운 자료집이 꾸며질 만하다.
서촌에서 송석원은 문화사적으로나 행정적으로 도저히 생략하고 넘어갈 수 없는 존재이다. 재개발의 예민한 문제가 없지 않지만, 오랜 기간 서촌이 지녔던 문화적 역량은 송석원의 역사를 통해 부인할 수 없는 구조로 나타난다. 중인이라는 특수계층의 사회적 활동이 여기서 근대를 향해 용솟음쳤다는 것도 기억해두어야 할 것 같았다.
서촌 4 - 옥인동 송석원의 윤덕영 한옥
옥인동 47번지 송석원 구역에는 프랑스식 건축 벽수산장 말고 여러 채의 한옥이 있었다. 1921년 이래 지형도에 그 위치가 나오는 99칸 한옥들 및 현재 윤덕영 한옥(윤씨 한옥)으로 알려진 집 한 채는 송석원에 포함된 건물군이다.
그중 '윤덕영 한옥'은 아주 장식적인 건평 77평의 ㅁ자 한옥으로, 폭 2-3m의 넓은 돌계단 36개가 ㄱ자로 꺾여 올라간 진입로부터 시작해 162평 터에 동북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송석원의 정문인 돌문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고 벽수산장과도 가까운 거리이다.
▲ 옥인동 송석원 터에 남은 건축 윤덕영 한옥의 돌계단 진입로와 건물 전면의 일부. 집은 많이 퇴락했지만 사진에 보이는 부분만으로도 보통 집이 아니었음을 알게 한다. ⓒ 이순희 |
계단 입구와 중간 계단 참에는 송석원 정문의 돌기둥과 비슷한 장식돌 2개가 어그러진 채 서 있다. 벽면의 돌을 쓴 장식이 화사하고 지붕 및 처마장식, 고급 돌자재 등으로 미루어 궁궐건축이라고 보기도 한다. 무엇에 쓰던 것이었는지 팔각 돌받침 같은 육중한 돌이 주변에 나뒹군다. 서울에 남아 있는 가장 아름다운 한옥일 것이다.
주변에는 돌벼랑이었다가 근래에 깎여나간 자리들이 보이고 무성하던 소나무들은 사라졌다. 계단 앞쪽으로 인왕산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을 건너는 다리가 나 있었는데 돌다리 부재만이 동네 여기저기 남고 물길은 모두 아스팔트로 덮였다.
▲ 윤평섭의 논문 '송석원에 대한 연구'에 발표된 1940년경의 송석원 배치도. 한옥(지금의 윤덕영 한옥), 99간 한옥, 2층 양옥(지금의 박노수 미술관), 과원 댁과 다리, 냇물 등이 나와 있다. ⓒ윤평섭 |
윤덕영 한옥 위쪽으로는 역시 고급하게 다듬은 돌계단 너머로 99칸 한옥군의 일부인 듯한 기와집의 잔해들이 허름해진 양식 주택들의 부속품처럼 혼합된 채 골목골목 흩어져있다. 날렵하게 솟은 누각 지붕의 선, 돌계단의 소맷돌, 연이어진 기와지붕과 길게 다듬은 장대석 주초 등은 민가 살림집이 쓰는 것 이상의 최고급 자재들이다. 높은 데서 보면 이 일대 이끼 낀 지붕이 함께 모여 있다.
6.25 이후 윤덕영 한옥이 있는 송석원 구역 전체가 피난민의 무허가 건축으로 뒤덮였다가 시간이 지나며 불하 등의 방법으로 양성화되었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 간신히 통과할만한 이 집 주변의 좁은 골목길은 전란으로 어지럽던 시절에 형성된 동네의 흔적이다. 도시행정은 산위까지 들어선 수많은 판잣집들을 걷어버리고도, 동네를 이렇다 하게 정비하지는 못했다.
5년 경력의 한 택배원은 '이곳 47번지 택배는 집 찾느라고 시간이 걸린다'고 말한다. 돌산 위에 들어선 집들은 현대적인 주거구조를 갖추기 어려워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게 사실이다.
'윤덕영 한옥'도 이때 이후 현재까지 7가구가 대지를 공동소유, 건물은 26평, 12평, 7평, 5평 등으로 분할해 소유하고 있다. 집주변을 돌아가면서 난 각 집의 출입구로 뚫리고 천막으로 뒤덮인 지붕 등을 보면 생존의 모습만이 부각될 뿐이다.
하지만 이 집은 1875년 건물로 추정되는 오래된 집이자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고급 한옥 건축이다. 윤덕영은 송석원 내 한옥에서도 거처했다는데 지금의 윤씨 한옥 내력에 대해선 이렇다 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그의 서자(庶子)가 살던 집 '과원 댁'은 송석원 구역 내 능금나무 밭 안에 따로 있었다.
▲ 윤덕영 한옥 층계참의 돌장식과 전면의 구조. 전문가들이 문화재로서 복원 1순위로 꼽는 이유를 말해주는 구조이다. ⓒ 이순희 |
▲ 처마 밑의 장식과 이층 높이에 있는 격자문 창 ⓒ 이순희 |
▲ 처마 밑 장식의 세부 ⓒ 이순희 |
▲ 지붕 아래에도 여간해 못 보는 구조물이 있다. ⓒ 이순희 |
가스보관창고며, 에어컨 실외기에 살림 그릇 등 온갖 시설에 가려져 있긴 해도 윤씨 한옥의 앞면만은 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궁궐 말고는 서울 어디서도 이만큼 섬세하고 당당한 한옥은 보지 못했다. 화려하고 사치한 거처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기고, 문물의 중심이 되는 서울에서 세련된 손으로 만들어낸 집이라는 증표 같았다.
윤평섭 논문의 송석원 배치도에는 흩어진 건물들을 넓은 영역의 숲이 에워싸고 있다. 느티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버드나무, 그리고 개나리가 무척 많다. 다리가 세 개 놓여 있고 200평의 네모난 연못도 있다. 윤덕영은 벽수산장을 짓고 그 인문적 역사를 기록한 '벽수산장 일람'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재개발의 난문제가 해결된다면, 이 집은 대표적인 한옥 건축의 하나가 될 것이다.
서울시 중구 필동 남산한옥마을에 이 집을 그대로 복원한 건물이 있지만, 진입로의 인상적인 돌계단도 제대로 없고 생경한 집과 이웃하여 달랑 들어선 기와집 한 채만으로는 셋트장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집은 옥인동 47번지에 36개 돌계단을 밟고 올라간 자리, 김정희의 송석원 바위글씨를 어딘가에 지닌 채 인왕산 가까이 있을 때 역사에서 오는 중후함과 진짜 사람이 살았다는 공기를 느껴볼 수 있다.
1984년 송석원 연구 논문을 낸 삼육대 윤평섭 교수도 "이 오래된 집은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라는 의견을 냈다. 건축가 조정구 씨는 이 집의 전면과 위에서 본 모습을 그리고 답사기를 올렸다. 그 도면을 보면 윤씨 한옥은 단순한 ㅁ자가 아니라 돌출된 부분이 있고 지붕 모양은 조각처럼 솟아올라 있다.
건축가 김원 씨도 "이 집은 지금 전체적으로 보존이 결정된 서촌 전체의 수백 동 한옥들보다도 가장 우선적으로 보존해야 할 한옥 제1호라고 봅니다. 한때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재개발을 위해 문화재 지위에서 해제되어 지금은 철거 및 퇴출위기에 있습니다. 이 집을 아는 모든 문화재 관련인사들은 찬탄을 아끼지 않는 수작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생명이 경각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 도와주세요" 라는 글을 올렸다.
서울대 로버트 파우저 교수가 이끄는 서촌주거공간연구회는 송석원 일대가 서촌 문화유산의 보고인 만큼 그 일부인 윤씨 한옥도 보존해야 된다는 주장을 편다. 1950년대까지도 남아 있던 김정희의 송석원 바위글씨는 이 한옥 주변에 있었으리라고 한다.
"이인문 그림이나 벽수산장 사진으로 보건대 송석원 글씨가 새겨진 4-5미터 높이의 동향한 바위 절벽은 옥인동 통틀어 세 군데 있다. 그중 윤씨 한옥 좌우의 바위벽에는 오래전의 송석원 글자와 소나무들을 기억하는 주민도 있다"고 김한울 서촌주거공간연구회 사무국장은 썼다.
한 주민의 말은 "그 바위 위에 집을 지으면서 소나무 여러 그루는 다 없애고 바위도 가려졌거나 손상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옥인동의 절반가량 집들이 재개발을 추진하면서 윤덕영 한옥과 99칸 한옥의 부분들이 한중간에 놓였다는 점이다. 관계자는 "윤씨 한옥은 남산 한옥마을에 복제하여 지어놨다. 서울시는 왜 그럴 능력이 없는 주민더러만 보존을 책임지라는 것인가. 그토록 보존가치가 높은 집은 서울시가 사들여 관리하는 것도 방법 아니겠나"고 했다. 서촌에는 이항복 대감 집 등 서울시가 소유한 몇 채의 한옥이 이미 있다.
하지만 서촌과 옥인동이 사랑받는 이유는 인왕산과 일체가 된 데서 만들어진 동네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품격을 위해, 아마 어떤 값을 치러도 잃어서는 안 될 서울의 오래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네, 윤씨 한옥 앞 어느 집 마당에는 김정희가 살았던 동네 통의동 백송의 후손나무가 한그루 와서 50년째 자라고 있기도 하다. 김정희가 200년 전 송석원 시사를 찾아 이곳에 온 것처럼, 통의동 백송도 따라온 것인가?
▲ 벽수산장과 구름다리로 연결됐던 박길룡 건축의 3층 양옥. 현재 박노수 미술관이 되었다. 집뜰 언덕 위로 송석원 터를 향해 난 문이 있었다. ⓒ이순희 |
옥인동에는 윤덕영의 딸과 사위가 살던 양옥집 한 채도 남았다. 어떠면 대지가 줄어든 듯 보이기도 하는 이 집은 냇물 건너 구름다리로 송석원 벽수산장과 연결되었다. 1938년 양식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반지하 포함 3층 건물이다. 주인이 바뀌면서 1972년부터 동양화가 박노수 씨가 살다가 2011년 종로구에 박노수 미술관으로 기증됐다.
이 주택과 송석원을 연결하는 무슨 고리가 없는지 들여다보다가, 벽수산장 화재 이후 가져온 난간석과 둥근 돌 테이블을 확인한 것은 수확이기도 했다. 송석원의 문기둥 몇 개와 다리 기둥, 붉은 벽돌 아치문도 옥인동 한 골목에 흩어져 남아 있다. 돌기둥 문으로는 차가 드나들고 아치문은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었다는데, 문 안쪽 끝에 벽수산장이 헐린 이래 새로 들어선 네 채의 주택들 지붕이 조금 보인다.
▲ 옥인동 옛날의 냇물이 흐르던 곳 근처에 돌다리를 형성한 기둥 두기와 담 밑으로 두 개의 난간석이 남아 있다. ⓒ 이순희 |
돌문 근처 또 다른 주택 주차장에도 난간석과 다리의 돌기둥 2기가 서 있었다. 99칸 한옥을 구성했던 돌석재들도 해체되어 이웃한 여러 집의 건축자재로 쓰인 게 보인다. 둥글게 다듬은 소맷돌 있는 돌계단 위로 베니어판(합판) 가림막이 쳐진 풍경 등 송석원의 잔해는 만신창이가 된 윤씨 한옥과 이들 돌자재 뿐이지만 '옥인동만이 가진 역사'임에 틀림없다. 그 안에는 송석원의 유산만이 아니라 함께 국가의 운명이 바뀌던 즈음의 시대사도 깃들어 있는 것이다.
박노수 가옥을 들어가 볼 기회가 있었다. 부인 장신애 여사가 회상했다.
"이 집에서 사는 동안 집 뒤의 동산으로 올라가 쪽문을 통해 나가면 언덕 위 송석원 터까지 산책할 수 있었습니다. 송석원이라는 암각글자가 뒤뜰 너머에 있다고 해서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여기선 종래 못 찾았구요. 1970년대 초만 해도 이 동네서는 우리 집이 제일 끝 집이고 주변은 전부 산등성에 집도 거의 없었지요. 지금은 없던 길도 많이 생기고 지형이 너무 변해서 옛날에 어땠다고 말하기도 어려워요.
이 집 마당의 돌은 박 선생이 워낙 돌을 좋아해 강남 신사동이 허허벌판일 때 그곳 돌 가게에 가서 사들여 기중기로 날라다 며칠씩 걸려 배치해 놓은 것들입니다. 원래는 마당에 돌이 없었습니다."
이 집은 박 화백이 집과 함께 기증한 그림 500점, 수석 369점을 포함한 박노수 미술관으로 꾸며져 올 가을부터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집 현관에는 여의륜(如意輪, '뜻대로 된다'는 뜻)이라는 추사 글씨를 전각한 현판도 걸렸다. 추사 김정희의 흔적이 이렇게나마 과시 되는 것도 옥인동다운 일이다.
▲ 동양화가 이상범, 누하동 한옥 마당과 담 처리. 장독대와 화분이 있지만 화가 생존 시의 유품은 아니다. |
전통이 이렇게 이어지는 것인가 싶게 이 동네에는 예술가들이 많이 산다. 누하동 골목에는 이상범의 한옥화실도 남았다. 그가 1945년 '해방된 산하' 6폭 병풍을 그린 것은 이 집에서였을 것이다. 화가는 1972년 작고하고 이 집은 수리를 거쳐 말끔해졌지만 화가의 그림 하나, 사진 하나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얌전한 한옥의 이중 미닫이문 달린 몇 개의 방과 다락, 부엌, 마당이 한눈에 보이는 구조에서 화가가 어떻게 움직였을 지가 조금 짐작됐다.
마루 앞에 경계를 이루는 이웃집 담 벽면은 그대로 두고 마주 보기 무미건조하니, 여러 문양을 넣어 회벽을 친 것 이 반쯤 떨어져 나간 것 같다. 이상범 화백의 그림이 아니라 집 짓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인 듯한데, 아무 설명이 없어 언제 적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이 집은 서울시가 관리한다.
화가 이중섭도 서촌에 살았고, 가고파의 작곡가 김동진의 집터는 누상동 연립주택 밀집지역의 한 빌라로 바뀌었다. 시인 이상의 집도 통인동 길가에 지붕만이 남은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상이 바라본 지붕 위 하늘, 그가 이 집을 오가며 생각하며 다닌 길 등이 있는 그대로가 더 좋아 이 집을 헐고 현대건축을 짓는 안에 반대했다.
사람들이 모이는 방 이름은 이상이 경영한 다방 이름을 따서 '제비 다방'이다. 이 집 주변에선 어떤 숨결 같은 게 느껴진다. 집주변은 모두 자그마한 개인 가게들이지만 성황을 이룬다면, 곧 자본이 와서 점령해 버릴만한 매력적인 골목길이다.
▲ 지붕만 남은 시인 이상의 통인동 집. 이 집과 주변의 작은 가게들로부터 서촌의 분위기가 배어 나오는 골목에 있다. 현대식 건물을 새로 짓느니 많은 이들은 이상 시인의 숨결이 어느 한구석이라도 남아 있는 현재 그대로의 모습을 더 원한다. ⓒ이순희 |
서촌이 그리 좋았는지 이상범은 한옥 현판에 '누하동천'이라고 휘호를 써서 걸었다. '뜻대로 이뤄지는 집(여의륜, 如意輪)'이라고 현판을 걸은 박노수는 그의 제자이다. 쌀쌀한 2월 화가 이영복 씨가 인왕산 들어가는 길 안쪽 바위산을 지날 때 말했다.
"2월 말 바위틈에 잔설이 아직 남아 있고, 그 사이로 마른 나뭇가지들이 삐죽삐죽 솟아있는 풍경이 좋아요. 깨끗한 바위와 양명한 자리가 아주 좋은 기를 주는 것 같아요. 광화문 한복판에서 1km도 안 떨어진 곳에 이런 환경이 있다니. 아침마다 여기로 산보 나오고 조깅합니다. 추울 때도 비 올 때도."
조선조 내내 인왕산 풍광에 반해 글과 그림과 건축을 남긴 수많은 이들의 정서는 2012년 지금도 이어지고 있음이 자연스럽게 확인됐다.
서촌5 - 서촌을 찾는 재미, 보물과 샘물과 호랑이
서촌은 규모가 작고 조용해 이야깃거리가 적을 줄 알았다. 한데 볼수록 새로운 국면이 드러나곤 한다. 서촌을 찾는 재미가 이런 것이구나 싶고 글은 자꾸 길어진다. 믿든지 말든지 다음의 이야기는 실화다! 박광배 시인이 실제 주인공한테서 듣고 전해준 서촌이야기 하나.
20여 년 전 서촌 어느 한옥에 '강남구 대치동의 35평 아파트 한 채와 무조건 바꾸자'는 사람이 찾아왔다. 이러고저러고 한옥 주인은 자기 집을 그대로 보존해 살게 되었는데, 왜 그런 제의가 있었는지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정묘호란(인조5년, 1627)에 왕실이 급히 강화도로 피난 떠날 때 어떤 공주의 귀중품이 궁녀를 통해 솥에 담긴 채 서촌의 어딘가에 묻히게 됐다. 그 후 어떤 연유로든 그 물건들은 원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그 사실은 내막을 아는 이들을 통해 대대로 전해졌다. 이제 와서 그 장소가 이쯤이라고 추측한 사람이 보물 생각에 집을 바꾸자고 한 것이다'라고.
역사와 궁궐이라는 배경에다 보물, 대를 이어 남모르게 소곤소곤 전해 들었을 이야기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인조 때 왕실은 두 번이나 강화도로 남한산성으로 청나라군을 피해 떠났었다. 가마솥이나 돌확에 귀중한 것들을 땅속에 묻어두고 간 것은 가깝게 6.25 한국전쟁 때에도 숱하게 있었던 일반적인 보관법이다. 400년 가까이 그 비사가 전해진 과정 자체가 흥미롭다. 사실일 수도 있지만, 환상적으로 부풀려져서 공주라는 신분으로, 또 묻힌 보물이라는 것으로 전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동네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서촌은 대궐일 하던 관리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이고 산속에 있는 동네라는 것이 더욱 간단치 않은 배경을 만들어 낸다. "우린 이런 이야기들이 많아요. 잘하면 흥미진진한 영화도 드라마도 되잖겠어요?"
▲ 필운동 골목 안의 (전)이항복 대감집 솟을대문 남은 모습. 사랑채 자리엔 빌라가 들어섰고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행랑채가 시작된다. ⓒ 이순희 |
서촌 필운동에는 오성 이항복 대감집으로 불리는 큰 한옥도 있다. 골목 안에 솟을대문이 있고 그 안에 행랑채가 가로로 길게 펼쳐진다. 행랑채 문을 들어가면 또 문이 나오고 그렇게 겹겹이 기와집들이 세 겹쯤 들어서 있다. 그 뒤로는 가파른 언덕을 담으로 두른 후원 안에 정원으로 나가는 일각문과 정자 같은 별당이 있다. 이런 구조가 고스란히 남은 집은 정말 귀하다. 서울에 단 하나 있는 집인지도 모르겠다.
몇백 년 된듯한 회화나무가 있어 이곳이 평범한 이의 집은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110평 대지의 사랑채는 2006년에 헐리고 그 자리에 커다란 빌라가 들어섰다. 집터는 주변의 여러 건물까지 포함하고 있다가 다른 소유자에게 내주며 줄었다. 어설픈 눈짐작으로 지금 집터만도 500평 이상 될 것도 같고 원래 터의 경계를 이어보면 애초엔 지금보다 세배쯤은 됐으려니 짐작된다.
지날 때마다 골목길에 언뜻 보이는 별당과 나무가 고색창연한 모습이어서 눈이 가곤했었다. 옛 조상들이 이 별당 정자 주위에서 한순간씩을 보내는 모습이 그림에서처럼 상상이 됐다. 지금도 잎이 무성한 회화나무는 그런 과거를 다 새기고 있을 것이다.
이 동네에서 제일 오래 산 주민 최순식 씨에 의하면 이 집 대문 앞 한 건물터가 마구간이었고 대장간도 붙어 있었다. 집 앞으로 인왕산 계류가 흘러 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펌프를 박아놓고 동네 공동 우물터로 쓰다가 근년에 복개했다고 한다.
▲ 후원의 정원 풍경. 왼쪽으로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다. ⓒ 이순희 |
▲ 일각문과 별당 주변 ⓒ 이순희 |
이곳이 이항복의 집이었다는 사료는 전혀 없지만, 필운동은 그가 살았던 곳이고 그의 자취가 서린 필운대 암벽도 남아 있기에 그 아래 99간 이 집을 '오성 대감집'으로 보는 것 같다. 건물에 대해서는 최근 서울시가 인수하면서 확인한 대들보 상량문에 '갑술년(1934년) 갑술시에 상량'한다고 적혀 있는데, 그전부터 다른 건물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지금 한옥은 짓고 나서 한 번도 손을 안 본 집같이 낡았지만 큰 규모라서 여러 세대가 모여 산 듯하고 지하 시설 같은 굴이 두 개, 우물터 등이 대단하다.
'대감'급 서촌 거주자로 조선말 심상훈 판서도 서촌에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누상동 초가집에서는 최초의 여성비행사가 된 숙명 여학생 이정희가 살았다.
▲ 이항복의 자취가 있는 필운대. 웅덩이 두 개에 맑은 물이 고였다가 흘러나간다. ⓒ 이순희 |
이 한옥도 필운대 암벽도 지금은 건물에 막혀 옛날 같은 주변 환경은 잃었다. 그래도 그 앞에 다가섰을 때 옛 분위기를 떠올릴 순간이 있었다. 필운대에는 이항복의 후손이 찾아와 쓴 시가 있고 그 아래 바위벽에서 배어 나오는 물이 고이는 웅덩이가 두 개 연이어 있다.
웅덩이 안에는 갈색 나뭇잎이 가득 잠겨있었다. 문득 1910년대 황해도 장련에서 산속 물웅덩이의 낙엽을 헤치면 그 안에 지네가 들어 있어 놀라곤 했다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백 년 전 산속 절에 가던 길, 큰 나무 옆 웅덩이의 물을 두 손으로 떠올리던 한 법학자의 행적은 오래된 그 분위기에서 앞으로 모험이 전개되리란 어떤 예감과 함께 서정적인 환경도 느끼게 하던 것이었다. 이항복의 시대에도 이 웅덩이에는 이렇게 나뭇잎들이 잠겨 있은 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필운대 암벽은 학교건물 뒤편으로 처박히듯 막혀버린 대신 그 위쪽 산속으로 통하는 길목에는 현대에 와서 지은 듯한 팔각정이 하나 있다.
서촌이 흥미진진한 것은 단순한 주택지를 넘어서 인왕산이라는 산을 끼고 있어 그런 것 같다. 한국인에게 산에 간다는 것은 단순한 등산 이상의 뜻을 가진다. 인생을 더 말하는 장소인 것이다. 산 가까이 있는 누상동 백호정 터를 찾아갔을 때는 인왕산 호랑이의 흔적까지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 백호정의 현재모습. 엄한붕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 아래 인왕산 호랑이가 마시던 샘물이 지금도 있다. ⓒ 이순희 |
백호정은 호랑이와 관련이 있다. 그 옛날 인왕산에 호랑이가 많던 시절, 병이 든 흰 호랑이가 와서 샘물을 마신 뒤 회복되어 바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걸 본 사람들이 백호정 약수를 찾기 시작했는데 물맛이 좋고 맑았다고 정평이 났다. 이 물을 마시면 모든 병, 특히 폐병에 좋다고 해서 더 유명해졌다.
한때 손꼽히는 활터였다지만 지금은 좁은 면적의 터만 남았다. 높이 솟은 바위에 숙종 때 명필 엄한붕(안내판에는 '엄한명'으로 잘못 표기함)이 쓴 '백호정' 글씨가 있다. 바위에는 그런 기백이 서려 있지만 비바람과 개발에 시달려 외롭고 훼손된 모습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이 이젠 존재도 희미해진 호랑이 신세 같다. 1920년 신문기사에는 이곳 정자에서 낮잠을 자던 사람이 정자가 갑자기 무너지는 바람에 그만 죽었다고 났다. 알게 모르게 호랑이의 기세가 느껴진다.
▲ 서촌 외진 곳에 있는 샘물이 있는 동굴의 출구 ⓒ 이순희 |
그 아래 바위에 면한 샘에는 지금도 맑은 물이 고인다. 빌라들이 숲처럼 들어선 동네 깊숙한 곳에 이만한 터와 글자와 샘물이 아직 보존돼 있다는 사실이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동네 사람들은 샘물에 철문을 달아주어 보존하고 있다. 비록 황폐해진 모습이지만, 현대인들에게 인왕산 호랑이의 야성과 맑은 샘물의 기를 고스란히 실물로 보여주는 이런 명소는 서촌의 보물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나무 대신 건물의 숲에서나마 좀 더 깊이, 멋있게 바라볼 터전이 많은 데가 서촌이다.
샘물의 원천자리는 여러 군데 남아있어 그것들을 확인하는 답사가 있었다. 몸을 굽히고 들어가는 굴속에도 샘물이 있었다. 주변에 한 암자가 있어 청결하고 엄격히 굴 입구를 간수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보통 샘물 이상의 곳인 듯 했다. 15미터쯤의 굴은 'ㄱ'자로 꺾어지는데 굴 한중간 깜깜한 바닥에 샘물이 있다. 시멘트로 정비한 테두리에 물 뜨는 바가지와 그릇이 놓여 있었다. 요즘이니 핸드폰에 있는 손전등으로 비춰봤지만, 옛날에는 횃불 또는 등불을 들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그 물을 떠 마시고 '이 동네 샘물 중 가장 맛이 좋다'고 했다. 그는 시인이었다. 샘물에서는 동굴 다른 끝의 출구가 보였다. 거기까지는 굴의 천장이 더 낮아져서 땅을 짚고 몇 미터를 기어 나왔다. 나와 보니 그 바깥은 사방이 산으로 막힌 곳이었다. 어린애였다면 이 동굴 속 샘물을 마시는 일이 대단한 모험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 글로 인해 이 장소가 훼손될까 봐 두렵고 그렇지 않기를 바라마지않지만, 서촌이 가진 산속의 순수한 야성적 매력이 이토록 의연히 남아 있을 줄은 오래된 서울사람이면서도 몰랐다. 서울, 그리고 인왕산 동네의 야성을 간직한 이런 곳이야말로 도시 속의 보물이 아닐까.
또 다른 샘물은 완전히 드러나 보이는 계곡 안에서 흘러나왔다. 이 동네에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 샘물을 식수로 마셨다고 한다. 파이프를 연결해 쓰기 좋은 넓은 터에 물을 이끌어냈는데, 안 쓴지 오래라 녹이 슬고 이용하는 이들도 거의 없는 듯 주변은 풀꽃만이 가득했다.
▲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샘물. 수도가 놓이기 전까지 누상동 주민의 식수원이었다. ⓒ 이순희 |
서촌 연구자 김한울 씨와 함께 이곳을 가보던 날, 웅덩이 맑은 물속의 낙엽은 세월의 퇴적처럼 느껴졌다. 호랑이가 마시던 샘물, 동굴 속 신성한 샘물, 바위굴에서 쏟아지는 환한 샘물, 오래된 한옥의 우물, 어느 집인지 묻어놓았다던 가마솥의 보물, 그런 것들은 서울 일부분으로 남아 있었다. 그 샘물을 짚어보며 다니다가 다시금 차들이 가득한 옥인동 길로 나왔을 때, 조선말 격변기에 정반대 인생을 살았던 두 사람의 흔적이 보였다.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으려고 수만금의 전 재산을 써가며 만주로 독립운동하러 간 이회영 형제기념관과, 거기서 몇 걸음 떨어진 필지에서 화려하게 살았던 이완용의 집터였다. 이회영 형제6인 중 5인은 광복을 못 보고 만주에서 비극적으로 사망했다. 생명까지, 모든 것을 다 바친 열정과 비극이 독립을 더욱 숭고하게 만들었다. 이회영 형제의 서간도 체류는 부인 이은숙 여사의 기록으로 남았다.
근대 6백여 년의 역사는 맑은 샘물과 호랑이의 정기서부터 역사가 잘못될 때 그에 대한 저항과 매국의 모습까지 서촌에 간직돼 있다.
▲ 서촌에 있는 우당기념관의 이회영 흉상과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날 것을 결의하는 형제 6인의 그림 ⓒ 이순희 |
프레시안 /김유경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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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여행①] 서촌 옥류동천길 따라 가는 시간여행몸은 '빨리빨리' 재촉... 이 동네는 그대로네요
서촌(西村), 본래 이름은 상촌(上村). 물이 흘러내려오는 곳이라 하여 웃대라고도 한다. 우리가 부르고 있는 서촌은 경복궁 서쪽에 있다하여 그냥 붙인 이름이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촌 대신 상촌 또는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세종마을을 고집하고 있지만 사람들에게는 서촌이 더 익숙하다.
▲ 옥류동천 길 사진 속 복개된 아스팔트길은 원래 수성동계곡에서 흘러내려 백운동천과 합류하여 청계천으로 흘러가던 물줄기였다.
▲ 옥류동천 길 빠른 걸음걸이는 아스팔트에 적힌 ‘천천히’ 글자로 느릿해 진다
우리는 산과 물줄기에 기대어 마을을 이루어 왔다. 서촌도 마찬가지. 인왕산 동쪽자락에서 청계천으로 흘러가는 백운동천(白雲洞川), 북악산 서쪽자락에서 경회루와 영추문 앞을 흐르는 대은암천(大隱岩川), 인왕산 수성동계곡에서 백운동천에 합류하는 옥류동천(玉流洞川), 청운동자락에서 백운동천으로 흐르는 청풍계천(淸風溪川)이 서촌의 물줄기다.
계곡과 물줄기 따라 생긴 청운동, 신교동, 궁정동, 효자동, 통의동, 통인동, 옥인동, 누상동, 누하동... 이 동(洞)들이 서촌마을을 이루었다. 물줄기는 모두 복개되어 길로 되고 계곡은 뭉개져서 집터가 되었지만 서촌의 참맛은 이 물줄기 따라 여행할 때 나온다.
옥류동천에 제일 먼저 발길을 주었다. 서촌의 속살길이다. 경복궁2번 출구-우리은행-이상의 집-대오서점-(이상범가옥)-박노수기념관-윤동주하숙집 터-티베트박물관-수성동계곡으로 이어지는 'S'자 곡선길이다.
저절로 걸음이 느려지는 동네
윤동주와 이상, 노천명, 이중섭, 박노수, 이상범 등 많은 시인, 화가들이 머물던 옥류동천, 이 길은 옛 문인, 화가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인문의 길이요, 복개된 길 따라 키 작은 가게들이 죽 늘어선 추억의 길이다.
▲ 이상의 집 이 집에서 이상이 산 집은 아니고 이상이 살았던 집터다. 윤동주 하숙집도 마찬가지, 하숙한 집이 아니고 하숙한 집터다
이상이 살았던 터에 지어진 '이상의 집', 그 옆에 '빵과 생강 상회', 좀 더 나아가면 60년대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대오서점'이 옥류동천을 빛낸다. 흑백사진 같은 풍경이 빛을 내다니, 졸(拙) 한 것이 더 아름다운 역설의 미가 있다. 서촌이 그냥 아름답고 예쁜 곳 이상의 미학적 매력이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 대오서점 옥류동천 길에서 제일 인기 있는 곳, 지금은 카페로 변했다. 서점으로 다시 문 여는 세상을 기다려본다
빠른 걸음걸이는 우리의 몸이 기억하는 몹쓸 습관. 느릿한 걸음걸이는 점점 빨라지는데 '밥+', '東洋百貨店(동양백화점)'에 이르러 다시 속도를 늦추게 된다. 아스팔트 위에 적힌 '천천히'라는 글자 때문이다.
길은 반복해서 'S'자로 휘어지고 키 작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서촌의 파수꾼 '옥인상점', 맛 집으로 소문난 '남도분식'이 있고 간판이 상고머리를 생각나게 하는 '머리까끼', 무조건 7000원에 파는 '양품점', 유명피자집 대신 골목 안에 '옥인피자'가 있다. 이걸 다 보려면 발을 앞장세우고 눈은 뒤에 두고 와야 한다.
▲ 옥류동천 길 중심 키 작은 건물에 재미있는 간판을 단 가게들이 죽 들어서있다
배우 이민정의 외할아버지 댁으로 알려져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박노수미술관도 보인다. 친일파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어준 집이었다는데 박노수화백이 구입한 뒤 종로구에 기증하여 구립미술관으로 문을 연 것이다.
집의 내력과 무관하게 예쁜 집이라 그런지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미술관 앞에 걸린 '如意輪(여의륜)' 현판은 추사의 글씨를 전각한 것이다. 추사의 글씨는 어디가나 인기다. 이 현판 하나만으로도 집의 품격이 달라진다.
▲ 박노수미술관 추사의 글씨와 박노수 전시작품은 눈을 맑게 하고 건물 밖 공간은 몸을 편하게 한다
필름을 되돌리듯 아까 보고 왔던 화가 이상범 가옥과 화실을 떠올려본다. 옥류동천에서 약간 비켜 있는 누하동 골목에 있다. 박노수미술관에 비해 초라하고 찾는 이도 드물다. 그래도 옥류동천의 문예가로 한자리 거뜬히 차지하여 서촌에 예술적 기운을 보태고 있다. 마루에 앉아 '樓下洞天(누하동천)' 편액과 여러 문양을 넣어 만든 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 이상범가옥 담 마루에 앉아 이 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너무 편하다
수성동계곡에 거의 다다를 즈음 윤동주가 하숙했던 소설가 김송의 집터를 알리는 판(板)이 담에 붙어있다. 그 판에 70년대 누상동과 윤동주하숙집의 정경을 흑백사진으로 남겼다. 눈여겨볼 만하다.
수성동에 가까워질수록 계곡의 흔적은 짙어진다. 티베트박물관 옆 급경사 계단과 그 계단위의 바위가 이곳이 꽤나 깊은 계곡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급경사계단은 서촌의 포토존이다. 누구라도 여기서 폼 잡고 찍으면 모델이 된다. 계곡벼랑에 둥지 튼 다락집도 볼만한 볼거리다.
▲ 옥류동천 계단길 티베트박물관 옆 계단길. 누구나 이 계단에 서서 사진을 찍으면 모델이 된다. 계단 위 바위로 예전 수성동계곡을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다
마을버스9번 종점, 드디어 수성동계곡이다. 1969년에 지어진 옥인아파트가 철거되어 인왕산과 수성동계곡이 훤히 드러났다. 겸재 정선은 수성동계곡을 그림으로, 추사도 비오는 날 수성동계곡폭포에 대한 감회를 시로 남겼다. 옥류동천에 머물던 이상, 이상범, 박노수, 윤동주, 김송 등 많은 문예가의 단골산책로였을 거라 짐작된다.
옥인아파트가 철거되지 않았으면 실제로 수성동계곡을 보지 못하고 겸재의 그림을 감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복개된 아스팔트를 걷어내어 옥류동천에 물이 흘러가는 날을 기다려 본다.
▲ 수성동 계곡 9번마을버스 종점위에 수성동계곡이 있다
며칠 전 서촌에 다녀온 그날 일요일 저녁 KBS '다큐멘터리3일'이 방영되었다. 지하철택배를 하는 노인 분들의 이야기다. 그 중에 슈퍼마켓을 하다가 그만 둔분, 택시를 운전하다 그만둔 분들이 있었다. 그분들은 모두 슈퍼마켓과 택시로 자녀들 교육을 다 시켰다고 얘기하고 있다. 과연 지금도 그럴 수 있을까?
옥류동천 서촌의 풍경을 보고나면 그럴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시간이 몇 십 년 전으로 되돌아간 듯한 풍경들, 여러 한옥과 양옥이 공존하는 곳, 조그만 가게와 밥집, 카페, 동네빵집이 있다. 월마트, 이마트 대신 통인시장과 '옥인상회'가 있다.
택시 운전으로 대학 교육... 우린 가능할까?
흔한 대기업빵집 대신 '효자베이커리'가 있는 곳이다. 대기업 보안시설 대신 담에 솟은 철장(鐵杖)이 있다. 대기업 보안업체가 집을 보호해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철장도 그저 낭만적으로 보이는 그런 마을이다.
▲ 서촌 골목길 풍경 골목길도 반가운 데 여기서 자전거 타는 아이를 만났을 때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좁은 길 따라 다니는 마을버스, 자전거 타고 좁은 골목을 쌩쌩 달리는 아이, 아이스크림으로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는 아이엄마, 축 늘어진 옷을 걸치고 대문턱에 앉아 이웃과 도란도란 얘기를 주고받는 마을사람들의 모습이 남아있는 사람 사는 세상이다.
이런 서촌의 풍경을 보고나면 골목상권보호, 경제민주화라는 거창한 정책을 떠올리지 않아도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택시를 운전하고 대대로 빵을 구우면 한 가계를 거뜬히 꾸려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나이브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나이브한 생각이 현실화되는 날을 꿈꿔본다.
[서촌여행②] 백운동천길에서 만난 서촌의 거장들
80년도 더 된 여관, 이름 한번 묘하네
옥류동천과 청풍계천이 서촌(서울 경복궁 서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의 지류(支流)라면 백운동천과 대은암천은 주류(主流)다. 전자는 남북을 나누고 후자는 동서를 가른다. 백운동천과 대은암천 모두 복개되어 자하문길과 창의문길이 되었다. 그나마 겸재가 남긴 그림 <창의문>으로 물길을 엿볼 수 있다. 지금은 그림속 물줄기를 상상하면서 좇아야 하는 '상상의 길'이 돼 버렸다.
▲ 겸재의 <창의문> 겸재 정선의 창의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에서 왼쪽(인왕산)물줄기가 백운동천, 오른쪽(백악산)물줄기가 대은암에서 흘러내린 물줄기와 합류하는 대은암천이다. 창의문 왼쪽 언덕이 지금의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다
이 물길에 기대어 이룬 동이 청운동, 궁정동, 효자동, 통인동, 통의동, 적선동이다. 서촌의 주류답게 걸출한 대가들이 이곳에서 나거나 성장했다. 겸재, 송강이 청운동에서 태어났고 안동 김씨 중에 장동 김씨로 따로 불릴 만큼 명문대가를 이룬 김상헌 집터가 궁정동에 있다.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터가 통의동에, 추사가 성장한 월성위궁터가 적선동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서정주와 이중섭 등 여러 문인과 화가들이 활동했던 보안여관이 통의동에 있다.
특히 겸재, 송강, 추사는 과거의 형식과 관념,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양식,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문예의 경지를 구축한 우리나라 문예사(文藝史)에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이다. 복지(福地)와는 다른 차원의 기운, 문기(文氣)와 예기(藝氣)가 왕성하게 흐르는 곳이다. 기운이 과하면 넘치는 법, 서정주는 친일행위로 후대에 욕을 먹었고 송강은 기축옥사 책임자로 역사에 오점을 남겼으며 장동 김씨는 19세기 세도정치로 명성에 먹칠을 하였다.
백악산 봉우리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내려앉고
'상상의 길'은 '윤동주시인의 언덕'에서 시작한다. 백운동천과 대은암천이 시작되는 곳이다. 맨 처음 찾아간 곳은 청운동 언덕배기에 있는 윤동주문학관. 윤동주가 인왕산 아랫동네, 누상동에서 하숙한 인연으로 여기에 문학관을 세운 것이다.
▲ 윤동주문학관 하얀색 문학관은 윤동주 시인의 맑은 영혼 같다
하얀색 문학관은 시인의 맑은 영혼을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선하면서 옹골진 눈매, 어디 한 군데 악의라고는 없는 시인의 얼굴을 나타낸 것인가? 맞은편 뽀대나는 최규식 경무관 동상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시인의 언덕은 문학관 옆 계단 길로 올라간다. 언덕은 등기부등본에는 등재돼지 않은 시인의 영혼이 소유한 땅이다. 올곧게 살아온 사람들만 누리는 특권이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 표짓돌 이웃한 백악산을 빼닮았다
문패 같은 표지석은 백악산을 옮겨다 놓은 듯 빼닮았다. 누구의 작품인지 일반조경업자의 안목은 아닌 것 같은데 언덕 앞에 서 있는 시비(詩碑)는 지나치게 커서 눈에 거슬린다. 언덕아래에서 태어나 뒷동산처럼 드나들었던 겸재가 지금 이 시비를 보았다면 틀림없이 시비(是非)를 걸었을 것이다.
송강 정철, 서촌에서 호사를 누리고
청운초등학교 주변 어딘가가 정철이 태어난 곳이라 하는데 그를 알리는 표짓돌, 기념비와 가사비 등이 학교의 담을 이루고 있다. 우리말로 우리정서를 찾으려 했던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은 문인으로서 대접 받을 만하지만 정치인으로서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송강 정철을 알리는 안내석과 작품비 서촌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에서 호사를 누리고 있다
정문 앞에 세워진 '송강정철작품비 안내' 마지막에 "송강께서 태어나신 유서 깊은 이곳에 그 분의 투철한 충효사상과 선공후사(先公後私)의 공복정신을 기리고 시가문학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자 그 대표작품을 수록한 시비를 세워 만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고 적혀있다.
적어도 정치가로서 정철은 충효사상, 선공후사와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조선 최대의 정치 참극으로 기록되는 기축옥사의 최고 책임자로, 천 명의 생명을 죽게 한 것이 충효사상과 선공후사로 여겨진다면 충효사상과 선공후사는 몇 번이고 버려져야 할 사상이다.
▲ 서울농학교 담벽화 농학교학생의 마음을 담은 벽화.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 같은지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한다
한 학생이라도 읽지 않을 거라 생각되어 다행이지만, 교육목적이라면 차라리 곁에 있는 서울농학교학생의 절실한 소망을 담은 담장벽화를 한 번이라도 구경시키는 것이 나을 듯싶다.
추사 집터의 안내 표지석은 잘못
통인시장 길 건너편에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터와 김정희 집터를 알리는 표짓돌이 나란히 있다. 두 돌이 나란히 서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영조와 추사의 관계는 널리 알려진 바, 추사 증조부(김한신)가 영조의 사위이며, 추사는 영조 외고손자다. 이런 인연으로 표지석에 "창의궁 터는 곧 추사 선생이 사시던 곳"으로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딸과 사위에게 월성위궁을 지어주었는데 추사는 어려서 이 집의 주인이 되었고 이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월성위궁은 창의궁 남쪽 어딘가로 알려지고 있다. 적선동에 월궁동, 월성위골이라는 지명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경복궁3번 출구 혹은 정부청사 뒤편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창의궁터가 김정희 집터라는 것은 잘못이다.
▲ 아랫동아리만 남은 백송 100여 년 전 사진을 보면 백송이 있는 이곳이 창의궁터였다는 점은 확실하다. 창의궁 흔적은 집 속에 묻혀버리고 명을 다하여 아랫동아리만 남은 백송이 이 터를 지키고 있다
▲ 창의궁터 골목길 창의궁터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이 들어선 후 쪼개져 사진속의 골목처럼 변하였다
창의궁터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이 들어선 후 쪼개져 그 흔적은 알 길이 없다. 아랫동아리만 남은 백송(白松)이 쪼그라들고 옹색한 이 터를 지키며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예산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성장한 추사는 당대 서촌문인들과 활발히 교류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그의 자취는 그리 많지 않다. 당대의 문인들이 교류한 송석원의 바위에 '松石園(송석원)'이란 글씨를 남겼으나 친일파 윤덕영의 집 '벽수산장'과 함께 사라졌다.
▲ ‘如意輪(여의륜)’현판 옥류동천 박노수미술관 앞에 걸린 추사글씨를 전각한 것이다. 서촌에 남은 추사의 글씨여서 반갑다
옥계동천 한켠 박노수미술관 앞에 추사의 글씨를 전각한 '如意輪(여의륜)' 현판이 있고 수성동계곡에 대한 감회를 읊은 추사의 시 '수성동우중관폭(水聲洞雨中觀瀑)'이 전하여 그나마 우리를 위로해 준다.
보안여관, 이름 참 묘하네
백송의 미로 길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영추문. 경복궁 서문으로 청와대가 가까이 있어 검문이 심하다. 이런 분위기에 맞게 영추문 맞은편에 이름도 묘한 '보안여관' 건물이 있다. 1930년대에 건립되었다 하나 뼈대는 그대로다.
▲ 보안여관 1930년대에 세워진 이 건물은 아직 건재하여 자신의 존재, 더 나아가 서촌을 알리고 있다
1930년대에 서정주가 이중섭과 교류했고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시인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펴낸 곳이다. 1960~70년대에는 청와대 공무원들과 신춘문예를 준비하던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보안여관의 이름은 어디서 온 걸까?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청와대 가까이 있고 공무원들이 자주 드나든 곳이어서 '보안'이라 하지 않았을까? 2004년까지 여관으로 명을 이어오다 근래에 공연, 전시, 퍼포먼스를 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 ‘예술을 파는 구멍가게‘ 간판 보안여관 간판과 함께 보안여관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문기(文氣)와 예기(藝氣)가 왕성한 서촌의 일면을 고스란히 간직한 서촌의 상징적 건물이다. 건물 좌우에 달린 '보안여관'과 '예술을 파는 구멍가게'라는 간판이 '여관에서 예술까지'라는 이 건물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돈이 안 되면 파괴하고 정신마저 그 속에 묻어 버리는 세태에 반기라도 들 듯 타일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자신의 존재, 더 나아가 서촌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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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流따라 열리던 詩會… ‘조선 르네상스’ 산실로 불리던 동네
다음의 글은 2014년 5월 9일 문화일보에 ”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4050901033130242002
1950년대까지 옥인동 동네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되던 가재우물. 옥류동 계곡에 이 우물을 판 노가재(老稼齋) 김창업과 그의 형 삼연(三淵) 김창흡은 ‘도시의 은둔자’로 살면서도 겸재 정선을 길러내는 등 ‘열린 정신’의 소유자였다. 김영상 사진
참 을씨년스러운 동네다. 서울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인왕산 자락의 야트막한 언덕과 아담한 계곡을 끼고 있어 아침 햇살 속에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맛이 일품이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런 정취를 찾을 길이 없다. 정취는 고사하고 한두 집 걸러 빈집이고, 서너 집 걸러 폐허다. 골목에서 풍겨나는 쇠락한 기운이 그곳으로 선뜻 발걸음을 들여놓기 어렵게 한다.
옛 지명으로 ‘옥류동(玉流洞)’인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번지의 모습이 이렇다. 2007년 이 일대 9000여 평이 ‘옥인 제1주택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된 지 8년째다. 당연히 그동안 증개축이 금지됐다. 지금도 재개발조합과 서울시 사이에 소송이 걸려 있어 언제쯤 이 동네가 고즈넉한 맛과 사람 사는 냄새를 되찾게 될지 기약할 수 없다. 옛 명성을 듣고 이 동네의 골목길과 옛집을 답사라도 할라 치면 큰맘 먹어야 한다. “어디서 왔냐?” “빈집 옆에 사는 사람 심정을 한번 생각해봤냐?”는 등의 날 선 반응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래는 서울 사대문 안에서 가장 아늑한 주거지인 동시에 가장 개방적인 문화의 발신지로 꼽혔지만 이제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너무 좋은 장소였기 때문일까? 그래서 너무도 대단한 사람들의 손을 타다 보니 정취를 잃게 된 것일까?
사실 지금 이 동네에는 낡은 가옥 150여 채뿐 이렇다 할 역사적·문화적 랜드마크가 없다. 동네 중심지의 옥류천은 복개되어 그 자연스러운 곡선을 숨겼고, 역사에 이 동네의 첫 소유자로 기록된 김수항(1629∼1689·김상헌의 손자)이 말년에 세운 육청헌(六靑軒)과 청휘각(晴暉閣)도 그 자리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재 확인되는 유적으로는 김수항의 넷째 아들 김창업(1658∼1721)이 팠다는 가재우물(옥인동 47-376)과 이 동네의 마지막 소유자인 친일파 윤덕영(1873∼1940)이 신축한 한옥 살림집(옥인동 47-133) 정도다.
그나마 가재우물은 해방 후 이 동네에 빈틈만 있으면 마구 밀고 들어선 주택들이 그 위를 타고 앉는 바람에 보일러실인지 창고인지 알 수 없는 처참한 공간으로 변해 버렸다. 건평만 77평에 이르는 윤덕영의 살림집 역시 세입자 대여섯 가구가 어울려 살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문화재 지정과 해제를 반복하고 있다. 이 동네의 현 상태가 재개발 여부로 어수선한 것만큼이나 근현대사가 남긴 족적도 이렇게 갈피를 잡을 수 없게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볼품없는 옥인동 47번지 일대가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 장소가 그 내부에 차곡차곡 쌓아 온 역사적 지층의 다양성부터 언급되어야 한다.
조선 중기에는 김수항과 그 아들 등 사대부정신의 사표가 되어 온 안동김씨 일문의 터전으로, 후기에는 중인들의 시회 장소로 각각 각광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1817년엔 왕족의 후예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이들 중인들의 활동에 대한 오마주(hommage)로 옥인동의 한 바위에 ‘송석원(松石園)’이라는 큼지막한 휘호를 남기기도 했다. 말하자면 조선 중후기의 문화적 역량이 서로서로를 부추기며 차고 흘러넘치는 현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이곳은 숙종∼영·정조 대의 ‘조선 르네상스’가 배태되고 성장한 공간들 가운데 하나였다. 김상용·김상헌 등 선대에 목숨 걸고 지킨 ‘충절’과 ‘의리’의 사대부정신이 이곳 옥류동 계곡에서 후손들의 맑고 개방적인 학문과 예술로 꽃을 피운 것이다.
원래 김상헌은 장의동(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단청도 올리지 않은 ‘무속헌(無俗軒)’이라는 집을 짓고 살았다. 그는 병자호란 뒤 심양에 잡혀가 있으면서 이 집을 ‘맑고 시원한(淸) 곳’이라고 읊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단종이 삼촌에게 쫓겨나 유배됐던 영월의 ‘청령포(淸浦)’와 같은 표현이다.
그 무속헌에 살던 김수항이 옥류동으로 옮겨 앉으며 지은 정자 ‘청휘각’도 예사롭지 않다. ‘비 갤 청(晴)’에 ‘햇살 휘(暉)’. 비가 내리다 막 갠 뒤 햇살이 쨍하고 나는 상황, 누구나 원하는 정경이다. 날씨뿐 아니라 나랏일도, 개인의 처지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동-서인과 노-소론의 대립 속에 이 집안이 꼭 그렇게 되지는 않아 몇 차례 피비린내 나는 옥사를 거친 뒤 셋째 김창흡(1653∼1722)과 넷째 김창업은 벼슬길을 포기하고 옥류동과 장의동을 오가며 학문과 후진 양성에 주력했다. 맑은 정신의 ‘시은(市隱)’, 곧 ‘도시의 은둔자’로 산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은둔의 삶이 곧 세상과의 단절은 아니었다. 이 두 사람은 노론이면서도 다른 학문 경향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고, 문학과 미술 등 예술 분야에서도 자신의 정서를 한껏 펼칠 줄 알았다. 제자들 중엔 중인들도 있었다. 균형감각과 평상심을 잃지 않고, 거기에 더해 세상에 열린 자세로 살려고 노력한 것이다. 두 형제의 문하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의 정점을 이룬 겸재 정선 같은 걸출한 화가가 배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두 형제가 세상을 떠나고 60여 년이 흐른 뒤 옥류동에서는 전혀 예상 못했던 또 다른 일이 벌어졌다. 그 일대의 중인 지식인들이 ‘옥계시사’를 결성하고 바로 그 옥류동 계곡에서 시회를 열기 시작한 것이다. 천수경(1758∼1818), 장혼(1759∼1828) 등이 주인공이었다. 그 무렵은 이들 말고도 여러 중인 시모임들이 절정에 이른 때였다.
천수경 등은 김수항 이후의 안동김씨들과 옥류동 계곡에서 공존하는 처지였다. 이를 증명하는 한 쌍의 그림이 남아 있다. 1791년 유두날(음력 6월 15일), 그때는 ‘송석원시사’로 이름을 바꾼 이들 그룹이 옥류동 초입에서 시회를 열었다. 장마철이다 보니 낮에 한 차례 비가 왔던 모양이다. 할 수 없이 헤어졌지만 저녁 무렵 비가 그치자 아쉬운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이들은 한밤중에 술을 한 병씩 꿰차고 이번에는 옥류동 계곡의 가장 깊은 곳 언덕 위로 모여들었다. 구름 속에서 어슴푸레 빛나는 보름달이 시인 묵객들을 꿈결 속의 인물들로 만들었으리라.
바로 그날 낮의 시회는 당대의 화원 이인문이, 밤의 술모임은 이인문과 동갑인 화원 김홍도가 각각 그림으로 남겼다. 역시 중인이던 두 화원은 시회 모임에 동행하지는 않았고 나중에 주문에 의해 그림을 남겼던 것 같다. 그만큼 중인 계층이 사회경제적으로 성장했다는 얘기다. 낮의 장면은 ‘송석원시회(詩會)도’라고, 밤의 장면은 ‘송석원시사야연(夜宴)도’라고 후세 사람들이 각각 화제를 달았다. 지금 봐도 신품(神品)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그림에 대한 평가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중인 그룹이 옥류동 초입부터 최상단까지 물길을 따라 마음껏 휘젓고 다녔다는 점이다. 안동김씨들의 주택과 마당 안에까지 들어가지야 않았겠지만 그 주위의 계곡 여기저기에서, 많을 경우 수백 명씩 모여 ‘백전(白戰)’이라는 시회를 열곤 했다. 요즘 백일장(白日場)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로 안동김씨 사대부들과 중인들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조선시대에 계층의 벽을 넘어 ‘은둔’과 ‘개방’과 ‘공존’의 가치가 이토록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장소를 옥류동 이외에 달리 찾아볼 수 없다.
한 가지 더. 원래 ‘송석원’은 앞서 언급한 중인 시회의 맹주 천수경의 당호였다. 그러던 것이 그 모임의 이름이 되더니, 나아가 모임이 수십 년 계속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옥류동의 별칭으로까지 발전했다. 중인의 당호가 3중의 의미를 획득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중인의 승리’였다. 김정희가 이들이 1791년 유두날 낮에 모였던 장소 근처에 ‘송석원’이라는 큰 바위글씨를 남긴 일 역시 그 의미를 생각하면 감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모든 일이 오래 가서 꼭 좋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옥류동에 흘러넘치던 새로운 시대정신과 그윽한 문향도 세월이 가면서 이울었다. 안동김씨들은 순조-헌종-철종 내리 3대의 왕비를 배출하며 60년 세도정치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것은 19세기 한국정치가 불임의 시대로 들어서는 도화선이었다.
옥류동의 처지 역시 비슷했다. 이곳에 깃들던 개방적이고 개혁적인 중인들의 모임도 19세기 중반 청계천 근처로 근거지를 옮겨갔다. 옥류동은 본래의 의미를 잃고 대저택의 장소로만 남았다. 아무래도 장소성(placeness)이란 그 핵심이 물리적인 장소보다 그 장소를 경영하는 사람에게 있는 모양이다.
고종 등극 이후 1870년대엔 여흥민씨 처족들 가운데 민태호-민규호 형제가 이 지역을 물려받았다. 명분은 ‘가재우물의 샘물을 마시고 싶다’는 것이었다. 강탈이나 다름없었다. 1882년 민태호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됐다. “바야흐로 간택되어 입궁하기 직전에 민태호는 초조하여 송석원을 닫고 손님을 사양했다. 국혼이 정해지자 비로소 대문을 열고 하객을 맞는데 눈썹 사이에 기쁨이 흘러넘쳤다.”(‘매천야록’)
그런 기쁨도 잠시, 순종 등극 전인 1904년 민태호의 딸이 죽고 말았다. 여흥민씨 세도의 끝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다음 옥류동을 차지한 것은 1906년 새 황태자비를 배출한 해평윤씨 가문이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윤씨의 큰아버지 윤덕영이 1910년 말 이곳을 차지한 것이다. 그는 순종의 시종원경으로서 을사늑약과 합방조약의 체결에 최고 수준의 친일을 한 인물이었다. 이완용에 비해 품계와 연배가 낮다 보니 덜 부각되었을 뿐이다.
옥류동, 즉 송석원은 이렇게 시들어 갔다. 왕실 처족이 줄줄이 들어서니 내방객들이야 많았겠지만 그것은 대개 일가붙이나 매관 청탁자들이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윤덕영이 프랑스 귀족의 설계도를 구해 벽수산장이라는 건평 800평 가까운 석조건물을 옥류동 언덕 위에 지으며 동네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의 이 ‘한양 아방궁’은 그 자체로 나라가 망했음을 웅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옥류동은 세도정치의 전리품으로 전락한 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나라 도둑질의 부산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끝이었다. 해방으로 적산이 된 옥류동 지역엔 피난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우후죽순 격으로 몰려들었다. 그 뒤 양성화되긴 했지만 질서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저 다행이라면 이 동네가 청와대 옆이다 보니 고도제한 때문에 재벌의 눈길을 받지 않은 점이다. 경제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 무질서한 동네이면서도 서민들이 밀집해 사는 아늑한 맛만은 간직할 수 있었다.
이런 옥인동 주변에 몇몇 주목할 만한 현대사의 흔적이 흩뿌려져 있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우선 진보적 민족주의자 이여성(1901∼?)이다. 그는 일제시대에 언론인으로서 ‘숫자조선연구’(전 5권)라는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해직된 뒤엔 옥류동 계곡 초입의 옥인동 56번지(지금 세종아파트 자리)에 칩거하며 ‘조선복식고’라는 전대미문의 영역을 개척하는가 하면 여운형의 건국동맹에도 가담했다.
1940년대 초 어느날 이여성의 집 2층 발코니에 그가 고증한 삼국시대 의상을 차려입은 이화여전 학생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그의 저서에 실릴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엄청난 볼거리이자 옛 영화의 환생이었다. 이 이벤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옥외패션쇼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또 한 가지는 화가 박노수(1927∼2013)의 주택이다가 최근 그의 기념관으로 개관한 종로구립미술관(옥인동 168-2)이다. 이 집은 윤덕영이 딸 부부를 위해 옥류동과 이웃 인왕동 경계(이 두 동네가 일제시대에 ‘옥인동’으로 통합됐다!)에 1930년대에 지어준 집이었다. 예쁘장하고 견고한 목조주택이다. 그러던 것을 1970년대에 박 화백이 매입해 30여 년을 살다 지방자치단체에 자신의 작품들과 함께 기증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옥인동엔 친일과 반일의 기운이 교차하는가 하면, 지금껏 자기표현에 능한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찾는 지역으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 이 지역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가지 기대가 있다면, 앞으로 재개발이 되든 그렇지 않든,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100여 년의 쓰라린 역사를 뛰어넘어 옥류동 본래의 ‘은둔’과 ‘개방’과 ‘공존’의 정신을 되살리는 방법이 강구되기를 바랄 뿐이다.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장소가 간직했던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아가면 좋겠다는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이 을씨년스러운 옥인동 47번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 국토를 돼지 내장 삶아 까뒤집듯 헤집어놓지 않고서는 속이 풀리지 않는 재개발·재건축의 광풍에서 서울, 아니 나라 전체를 구하는 길일 수도 있다.
김창희 / 통의도시연구소 이사, ‘오래된 서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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