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련한 식민지의 낭만이여~ 인천 자유공원과 배다리골목 | |
개항기 자취 서린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쫄면 고향 신포동, 배다리 헌책방 골목까지 4.2km | |
조계지는 외국인 거주지를 뜻한다. 제국주의 시대, 조계지에 사는 외국인들은 스스로 경찰권과 행정권을 행사했다. 아직까지 온존한 조계지의 도로와 건축은 식민지적 낭만을 자극한다.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 칭다오의 독일 조계지가 여행자들로 붐비는 이유다. 19세기 후반 인천시 자유공원 일대엔 청나라와 일본 사람들이 거주촌을 형성하며 살았다. 바로 인천 청·일 조계지다. 여기서 워킹투어를 시작했다.
웬만하면 ‘한국 최초’ 타이틀 붙는 건물들
늦은 오전 인천역에 내려 여행정보센터①에서 지도를 챙겼다. 전세계 어디서나 차이나타운의 들머리를 상징하는 ‘패루’②가 인천역 앞에 서 있다. 제1패루를 통과해 차이나타운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자장면의 고향이다. 중국에도 없는 ‘한국식 퓨전 요리’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문화사학자와 호사가들의 논쟁이 되어 왔지만, 20세기 초반 한국 최초의 자장면이 이곳에서 시식됐으리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인천 최고의 청요릿집인 ‘공화춘’③은 폐허로 남았다. ‘건물 붕괴 위험이 있으므로 주정차를 하지 말라’는 펼침막이 사람을 쫓아낸다. 사람들은 여기서 사진을 찍고 ‘옛 공화춘’의 이름을 딴 새 음식점 공화춘④에 몰려들어가 자장면을 먹는다. 도교와 불교가 혼합된 중국식 절 의선당⑤도 들렀다.
<삼국지> 주요 장면을 벽화로 그린 삼국지거리의 들머리에는 갤러리 쉬필라움⑥(cafe.naver.com/spielraum)이 있다. 단칸방 크기의 소담한 갤러리에서는 인천 작가 박선영의 전시회가 열린다. 쉬필라움 아래로는 청·일 조계지 계단⑦이다. 계단의 서쪽은 청나라 조계지, 동쪽은 일본 조계지였다. 계단을 중심으로 건축 양식이 다르다. 왼쪽은 밋밋한 왜식 건물이고 오른쪽은 처마와 테라스를 지닌 청식 건물이다.
계단을 횡단해 일본 땅에 들어갔다. 일본제1은행⑧, 제18은행⑨, 제58은행⑩은 르네상스 양식의 석조 건축물이다. 제18은행은 ‘인천개항장 근대건축 전시관’으로 활용된다. 오늘 여행에서 볼 건축물과 전시물에 대한 설명이 빼곡하다.
해발 69미터 응봉산에 자리잡은 자유공원을 향해 올랐다. 중구청으로 쓰이는 옛 인천부청사를 지나 옛 제물포구락부⑪에 닿았다. 1901년 완공된 이 건물은 청·일 조계지와 공동 조계지(청·일 이외의 나라 사람들이 살던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사교장이었다. 해방 뒤에는 주한미군의 클럽으로 이용됐다. 계단을 마저 오르면 미국의 공간이다. 오른쪽에는 맥아더 동상⑫이 서 있고 왼쪽에는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⑬이 서 있다. 정상에서는 100년 만에 거대한 산업항구로 변신한 인천 앞바다가 내려다보인다.
» 자유공원 광장에서 올려다보이는 맥아더 장군 동상.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과 함께 응봉산 정상에 자리잡았다. » 차이나타운에 있는 중국식 절 의선당.
자유공원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근대 공원이다. 서울 탑골공원보다 9년 빠른 1888년 조성됐다. 자유공원의 원래 이름은 각국공원이었다. 조계지에 청, 일본, 미국, 러시아인 등이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공원의 이름은 서공원으로 바뀌었고, 해방 뒤 만국공원으로 이름 붙여져 원래 의미가 회복됐다가, 1957년 맥아더 동상 설치를 기념하며 다시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맥아더 동상은 조각가 김경승의 작품이다. 맥아더장군 동상 건립위원회는 그해 7월15일 표지석에 이렇게 썼다. “1950년 6월25일 공산도배가 북으로부터 민국을 침입하였을 때 즉시 미국 정부는 한국 구원을 결정하고 맥아더 장군에게 공산 침략 항전에 참가한 모든 군대를 지휘하도록 명령하였다.”
자유공원 일대의 공간 배치 과정은 한국과 외세가 맺는 관계성을 역사적으로 보여 준다. 2005년에는 맥아더 동상 철거를 둘러싸고 대립이 일어났다. 통일운동 단체들은 맥아더 동상 철거 시위를 벌였고 보수단체는 가스총을 들고 동상 사수 경비대를 조직했다. 원래 인천시와 인천 시민단체는 자유공원을 만국공원으로 복원하면서 동상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려 했다. 양쪽 진영의 대립이 격화하자 이런 계획은 빛을 잃고 말았다. 당시의 소란은 장소와 경관 해석을 둘러싼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맥아더 장군 밑에는 이런 역사적 대립의 심각성에 어울리지 않게 ‘무릉도원 정자’와 ‘자유공원 새우리’가 있다. 닭과 호로조, 청둥오리, 거위 사이에서 하얀 토끼가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새우리는 정말로 ‘근대적인 새장’이다. 자유공원2길로 내려가면 홍예문⑭이다. 일제강점기 일본 조계지에 뚫은 터널이다. 일본 사람들은 아나몽(穴門)이라고 일렀고, 인천 사람들은 홍예문(무지개문)이라고 일렀다. 내동 성공회성당⑮을 둘러보고 내려가면 신포시장이다. 바로 쫄면의 고향이자 신포우리만두(16)의 본점이 있는 곳이다. 시애틀 파이크플레이스의 스타벅스 본점 못지않을 거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모듬만두와 쫄면을 먹었다. 각각 3500·3800원. 오전에 출발했다면 늦은 점심을 하기 좋은 장소다. 신포시장은 닭강정도 유명하다. 신포닭강정(17)과 신포맛집닭강정(18)이 자웅을 겨룬다. 주말에는 닭강정 먹는 줄이 대로변까지 이어진다.
쫄면 인기 이어받은 신포시장 닭강정
신포시장에서 지하도를 건너면 답동성당(19)이다. 1897년 세운 아름다운 성당이지만, 현재는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 개항로를 따라 7~8분 걷다가 경인선 다리를 지나면 배다리다. 개항 직후, 외국인들은 인천항부터 응봉산까지 좋은 터전을 잡아 살았고 한국인들은 내륙인 배다리로 밀려났다. 그 뒤 배다리는 인천 근대 교육과 종교, 교통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배다리에 이르러서는 다국적성은 사라지고 한국적 근대의 풍경이 우세해진다. 대표적인 게 배다리 헌책방 골목이다. 양조장을 개조한 미술공간 스페이스 빔(20)에서도 전시회 말고도 옛 풍경을 마주칠 수 있어 좋다. 사진책 도서관 함께 살기(21)와 시가 있는 작은 책길(22), 근대건축물인 창영초등학교(23), 여선교사기숙사(24)도 볼거리다. 봄날 오후, 창영초등학교에 앉아 꼬마 선수들이 벌이는 리틀야구를 구경했다. 가는 길엔 아벨서점(25)에 들러 헌책 서너 권도 샀다. 동인천역에 도착하니 해가 저문다. 여기까지 4.2㎞를 걸었다.
차이나타운에 서 있는 공자상. » 거리를 걷다 보면 낡고 빛바랜 간판들을 흔히 만날 수 있다. 옛것의 흔적은 묘한 상념으로 인도한다.
인천=글·사진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기사등록 : 2009-04-01 ----------------------------------------------------------------------------------------------------------------
이 책을 보면, 인천 화교의 역사는 127년전인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대와 함께 강화도를 통해 들어온 40여명의 군역상인으로부터 시작됐다. 주로 푸젠성, 저장성 등 남방인들이었던 군역 상인들은 청나라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면서 조선 상인들과의 무역도 했던 군 소속 상인들이었다. 인천문화재단은 “이들 남방 중국인들이 한국 화교의 효시라는 점을 밝혀낸 것이 이 책의 중요한 업적”이라고 말했다.
1884년 인천 자유공원 인근에 청국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화교 유입이 본격화됐지만 청·일전쟁의 패배와 1910년 한일합방으로 상업활동을 위주로 하던 화교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20년대 일어난 산둥지역의 자연재해로 산둥인들이 대거 한반도로 이주하여 부두 노동자,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데, 이들이 현재 인천 차이나타운 등 한국에 거주하는 대다수 화교들의 조상이다.
값싼 노동력과 성실성을 갖춘 화교 노동자는 조선 노동자의 생계를 위협했는데, 일본은 이를 조선인과 중국인과의 민족적 갈등으로 번지도록 부채질했다. 1931년 만주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벌어진 ‘만보산 사건’이 그 사례라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인천문화재단 관계자는 “인천과 유사한 성격의 항구 도시인 일본 요코하마와의 비교를 통해 인천 화교의 형성 과정을 다룬 것도 의미가 있다”며 “개항과 함께 시작한 화교의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파트너십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인천 중구에 있는 인천 차이나타운(11만4천여㎡)에는 현재 화교 832명이 중국 음식점과 기념품 판매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난해 215만명이 방문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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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는 활기가 넘친다. 붉은 바탕에 한문으로 쓴 간판들, 차이나타운의 특징이다. 양꼬치 굽는 냄새가 지나가던 발걸음을 붙잡는다. 그 앞엔 ‘칭다오 맥주’까지 놓여있으니 군침이 돈다. 꼬치를 구우며 연신 중국말을 내뱉는 장사꾼. 거리를 구경하느라 출출하고 목마른 행인들의 속사정까지 간파한 것이 틀림없다. 내심 ‘중국인의 상술은 대단해’라고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건너편 2층 건물 문간에는 듬성한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넘긴 노인이 앉아있다. 노인은 통달한 표정으로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은근슬쩍 노인 옆에 앉아 수다를 시작했다.
68년 전 중국청년이 겪은 질곡의 역사
인천차이나타운(이다일기자) |
어눌한 말투가 연로하기 때문인가 했더니 중국인이란다. 열아홉에 중국 산둥성에서 누나 찾아 인천으로 왔다가 길이 막혀 돌아가지 못했다. 결국 14년 만에 인천에서 재혼했고 화교들이 인천을 떠날 때 노인 역시 뉴욕으로 떠났었다. “첫 부인은 40살까지 기다리다 재혼했데…”, 노인의 회상하는 모습은 마치 질곡의 역사를 가진 인천의 모습과도 같았다. 거리에 대해 묻자 깜짝 놀랄 대답들이 이어진다. “요 앞집은 일본헌병대장 집이었고 여기는 독일영사 관사였지” 앉아서 설명을 듣자니 그 시절로 되돌아 간 듯하다. “저 아래는 담배 팔던 곳인데 요즘엔 음식점이 됐네” 보이는 거리와 건물이 모두 노인의 추억이 담긴 곳이다. “그 때는 공화춘, 중화루, 송죽루가 제일 유명한 음식점이었고 진짜배기 일본사람, 중국 사람이 여기서 살았지”
청나라 관공서가 몰려있던 거리 ‘청관’의 120년 전 모습(이다일기자) |
1883년 개항이후 인천은 청나라를 비롯한 열강이 첫발을 내딛은 곳이었다. 1884년엔 청국 조계지가 설정됐고 이후 러시아, 미국,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이 몰려들었다. 1888년엔 최초의 서양식 공원 ‘자유공원’이 만들어졌다. 이후 1914년 일제강점기에 조계제도가 폐지되기까지 인천은 한반도의 출입구였다. 조계는 폐지됐어도 사람들은 남았다. 1920년대 ‘청관거리’라 불리던 이곳 차이나타운에 공화춘, 중화루가 들어섰다. 이후 1967년 ‘외국인 토지소유권 제한조치’가 실행돼 장사하기 힘들어진 중국인들이 해외로 떠나가기 전까지 차이나타운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북적이는 도시 중에 하나였다.
아픈 역사가 남긴 근현대문화유산
차이나타운의 명물 공화춘. 자장면의 시초로 알려져 있지만 1900년대 초반 공화춘은 고급요리를 하는 음식점이어서 노동자들이 주로 먹던 자장면이 최초로 만들어졌다는데 최근 이견이 있다. 현재는 건물 개보수를 위해 막아놓았다. 건물은 수리 후 자장면 박물관으로 활용된다. 이곳에 있던 공화춘은 자리를 옮겨갔고 원래의 중국인 주인도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
일찍이 열강들의 출입문으로 홍역을 앓은 인천에는 아직도 흔적들이 남아 있다. 등록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된 인천 중구청 건물은 1883년 2층 목조건물로 지어진 ‘인천부청사’였다. 또한 1890년대에 지어진 답동성당, 일본 18은행 인천지점, 1892년 지어진 일본 58은행 인천지점을 비롯해 수많은 건축물들이 120년 전 인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제물포를 중심으로 뻗어있던 건물들은 6.25 전쟁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1905년 영국인 제임스 존스톤이 별장으로 지었던 건물은 1950년 인천상륙작전시 포화로 소실됐고 1897년 지어진 영국영사관 역시 전쟁 통에 사라졌다.
자유공원 아래 산등성이에 위치한 최복순 할머니 집이다. 일본식으로 지어진 이 집은 해방 후 일본인들이 두고 간 것을 할아버지 회사에서 사택으로 받은 것이다. 창틀과 벽면 모두 처음 들어와 살 때 그대로 라는 할머니의 설명에 근대문화유산 못지않은 가치가 느껴지는 듯하다. (이다일기자) |
지금 인천의 근현대문화유산은 교육과 관광을 위해 개발됐다. 일본18은행 건물을 개조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이 마련되어 주말이면 700~800명이 찾는다. 살아있는 역사의 교육장인 것이다. 이곳에서는 당시의 건물들과 인천 개항장의 모습을 비롯해 인천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중국사람, 일본사람 그리고 한국사람
근대화를 겪으며 여러 나라의 문화가 섞인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옛날 얘기를 듣기위해 경로당을 찾았다. 북성동 노인회장 문순희(77) 할머니는 “중국 사람들은 중국학교 다니고, 일본사람들은 일본학교 다니고 그랬지 뭐… 별로 서로 왕래하고 그런거 없었어”라며 시큰둥한 반응이다. “6.25때 피난갔다 와서도 중국 사람들은 돈도 많고 장사도 잘했어”, “차이나타운이라고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60년대에 다 (해외로)나가버리고 그냥 우린 다른 마을처럼 살았지. 회사 다니고, 장사도하고…” 옆에 있던 다른 노인은 “인천에서 상권은 중국인이 장악했었고 일제강점기에 대해서는 더 말해 뭐하나…”라며 탐탁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시큰둥하던 문할머니가 칭찬할 것이 있다고 했다. 얼마 전 차이나타운에 개업한 한 중국인이 매달 노인들을 초청해 음식을 대접한 다는 것. “옛날엔 장사만 할라고 하더니 요즘엔 이렇게 좋은 사람들도 있어, 세상이 바뀌긴 했나봐”
인천역에서 바라보면 화려한 차이나타운이 보인다. 십여년전만 해도 엘리베이터 있는 건물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개발되지 않은 지역이었는데 최근 옛날의 전성기가 다시 돌아온 듯하다. 중국음식점이 늘어서 거리는 온통 붉은색이다. 차이나타운의 유명한 이름들 ‘청관’, ‘공화춘’이 보인다. |
해방이후 중국인들이 빠져나가면서 쇠락했던 차이나타운은 최근 다시 부흥하고 있다. 근현대문화의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고 차이나타운이 부활하면서 대한민국 최초의 자장면 발상지로 알려졌다. 2002년 35만 명에 불과하던 관광객이 2006년엔 67만5천명으로 늘어나더니 최근에 주말이면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게다가 중국과 이어지는 인천항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관문 인천국제공항까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함께한 인천은 세계로 뻗어가는 발판이 되고 있다.
서울에서 지하철 1호선 인천행을 타고 인천역에 내리면 바로 앞이 차이나타운이다. 관광안내소나 동사무소, 박물관에서 나눠주는 지도를 보고 따라가면 근대문화유산과 유명 관광지를 볼 수 있다. 공영주차장이 있지만 주말이면 넉넉지 않으므로 대중교통이 편리하다.
(기타정보)
인천차이나타운 홈페이지 (http://www.ichinatown.or.kr) / 인천광역시 상공회의소에서 운영하는 공식 홈페이지다. 차이나타운의 볼거리, 먹거리 사진과 함께 설명되어있다. 화도진도서관 향토,개항문화 자료관 홈페이지 (http://hto.ihl.kr) / 근현대 인천에 대한 자료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차이나타운 거리에 고기굽는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쇠꼬챙이에 끼운 양고기가 익는 것이다. 출출한 오후라면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 없다. 게다가 옆에는 시원한 음료수와 중국 맥주까지 있으니 발걸음이 멈춰진다. 꼬치가 구워지는 사이 계속 중국말을 하는 상인 덕에 이곳이 차이나타운임을 더욱 실감한다. (이다일기자) |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 원산, 인천이 개방됐다. 1883년엔 인천항이 개항됐고 각국의 배가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청나라 상인들은 상해, 청도, 천진, 대련 등지에서 마련한 광목, 옥양목, 면직물, 비단, 설탕, 밀가루, 담배, 비누 등을 들여와 장사를 했다. (화도진도서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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