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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Tour - 대한민국

경북 영양 주실마을 생명의 숲

by Wood-Stock 2009. 11. 10.

경북 영양 '주실마을' 기행

시인의 마을, 생명의 숲을 찾아서

 

전날 마신 술이 미처 깨지 않은 주말 아침에 아내를 재촉하여 길을 나선다. 오늘의 여정은 경북 북부의 3대 오지인 이른바 '비와이시(BYC, 봉화·영양·청송)' 가운데 하나인 영양이다. 내 계산은 아주 단순했다. 나는 영양 '주실마을'을 들렀다가 그 마을 숲을 만난 뒤 '대티골 숲길'을 한 바퀴 돌아보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注谷里) 주실마을 숲은 지난해에 베풀어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생명상'(대상)을 받았다. 올해는 같은 면 용화리의 '대티골 숲길'이 어울림상을 받았으니 영양의 숲은 시방 이태에 걸쳐 '아름다운 숲'으로 기려지고 있는 참이다.

 

그뿐이 아니다. 주실마을이 어디인가. 청록파 시인 조지훈(1920∼1968)이 태어난 동네다. 1920년 이 마을에서 태어난 지훈은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보통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혜화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려 상경한 열일곱 살 때까지 그는 이 마을에서 살았던 것이다.

 

내비게이션에 의지하여 집을 나선 건 10시가 겨워서였다. 아내와 함께 인근 가게에서 '비상식량'으로 김밥 몇 줄을 샀다. 답사를 다녀보면 때맞추어 끼니를 챙기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아내와 나누어 먹는 김밥은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되는 것이다.

 

영양은 안동 인근이지만 정작 우리에게 주실마을은 초행이다. 글쎄, 기회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다른 볼일로라도 그 인근을 스쳐간 일도 없었고, 굳이 시간을 내어 그의 자취를 더듬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던 것이다.

 

영양은 몇 사람의 굵직한 문인을 낳은 고장이다. 영양읍 감천리는 '내 소녀'라는 시를 남긴 오일도(1901~1946) 시인의 고향이고, 석보면 원리리 두들마을은 소설가 이문열이 태어난 곳이다. 흔히들 영양을 '문향(文鄕)'으로 부르면서 이들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터이다. 

 

'지조론'의 시인 조지훈을 낳은 영양 주실마을

 

두어 해 전에 나는 감천리의 오일도 시인의 생가를 찾았고, 지난봄에는 이문열의 두들마을에 들렀었다. 그의 선조인 존재 이휘일에 관한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다. 나는 마을을 둘러보긴 했지만, 작가가 세웠다는 무슨 문학연구소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흔히 그를 '국민작가'로 부르는 모양인데, 나는 거기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잘 팔리는 작가'라는 사실과 '국민'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훈은 내게 호오의 감정과는 무관한 인물이다. 나는 중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승무'의 시인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청록파'는 아마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문학 유파가 아닐까 싶다.

 

 

조지훈(1920 ∼1968)                   조지훈 생가에서 바라본 문필봉. 가을이 깊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국어 교과서에서 배우는 시 중에 청록파 시인의 작품은 반드시 끼어 있게 마련이다. 스물네 살의 동갑내기였던 박목월과 박두진, 네 살 터울의 갓 스물 조지훈은 1939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지로 등단한다. 이들이 '청록파'가 된 것은 이들이 해방 이듬해 공동시집 <청록집(靑鹿集)>을 펴내게 되면서부터다.

 

이들 시인들의 작품 가운데서 대체로 '해'(박두진), '나그네'(박목월), '승무'(조지훈) 등을 대표작으로 치는 듯하다. 박두진과 박목월의 그것은 등단 이후의 작품이지만, 조지훈의 대표작인 '승무'는 또 다른 그의 대표작 '고풍의상', '봉황수' 등과 함께 <문장>지 추천작이다.

 

이는 세 시인 중에 유독 조지훈에 대한 인상이 뚜렷하지 못한 것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박두진과 박목월이 7, 80년대에도 꾸준히 시작활동을 계속한 반면 조지훈은 만년에는 시작보다는 주로 국문학자로 활동(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장으로 <한국문화사대계> 편찬)했던 것이다.

 

조지훈은 나머지 두 시인보다 네 살이나 아래였지만 가장 단명했다. 그는 우리 나이로 마흔아홉 살에 세상을 떠났다. 박목월은 그보다 10년을 더 살았고, 박두진은 무려 30년이나 더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조지훈이 주는 인상은 시인보다 지사(志士)로서의 풍모가 더 확연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지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識見)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지사(志士)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 운동을 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 다 지사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 운동의 단계의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들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정당 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정책을 통해서의 정상(政商)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 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구복(口腹)과 명리(名利)를 위한 부동(浮動)은 무지조(無志操)로 규탄되어 마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지훈 '지조론(志操論)' 중에서

 

발표(1960)한 지 반세기가 가까워오는 글이지만 그의 글이 전하는 메시지는 여전하다. 오늘의 삶과 세상이 반세기 이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욕된 일이다. 한국 사회의 도덕과 윤리, 민주주의가  여전히 50여 년 전의 수준을 답습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안동에서 입암과 영양읍을 거쳐 일월 쪽으로 접어들자 가로의 나무와 주변의 빛깔이 짙어진다. 이도 위도의 탓일까. 주실마을이 눈앞에 다가오는데 정작 마을은 보이지 않고 에스자로 굽은 도로 양편으로 펼쳐진 주황과 노랑빛이 뒤섞인 마을 숲이 한눈에 들어왔고 아내가 탄성을 질렀다.

 

주실마을은 한양 조씨가 세거해 온 오래된 마을이다. 전통마을이면서도 실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일찍이 개화를 받아들인 진취적인 고장이다. 양반마을이라면 꼬장꼬장한 선비들의 외곬이 연상되겠지만, 정작 시인의 선조들은 유교적 전통을 이으면서도 인습은 과감히 떨쳐 버렸다.

 

박정희 정권 때의 '가정의례준칙'이 바로 이 마을에서 유래된 것은 그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일본을 따른다고 민족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양력설을 쇤 것도 객지에 나간 자식들이 다 모일 수 있어서였다. 이들은 명분보다 실리를 선택했던 합리주의자였던 셈이다.

 

'삼불차(三不借)'를 지킨 지훈의 생가 호은종택

 

▲ 호은종택 조지훈 시인의 생가로 호은은 주실마을의 입향조 조전을 이른다

 

▲ 옥천종택 호은 조전의 증손인 조덕린의 종택이다

 

▲ 월록서당 지훈이 한문을 배운, 주실마을 신교육의 전당이었다.

 

마을 어귀에 전통 한옥 형식으로 커다랗게 지어놓은 조지훈 문학관을 우리는 건성으로 한 바퀴 돌았다. 시간에 쫓긴데다가 내겐 그런 형식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 있다. 현실적으로 한 인물을 기리는 방식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긴 하다. 그러나 입구 자 모양으로 덩실하게 올린 문학관은 내게 마치 지방자치시대에 시나브로 상품화하고 있는 '문화'의 표지처럼 보였던 것이다.

 

지훈의 생가 호은종택은 마을 앞 들판 너머 문필봉을 바라보며 호젓하게 서 있었다. 솟을대문 앞 커다란 바위에다 '호은종택(壺隱宗宅)'이라 새겨져 있다. 맞배지붕의 口자형 전통한옥인 종택은 그리 위압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호은은 한양 조씨 입향조 조전(趙佺)의 아호로 그는 1629년(인조 7년) 주실에 처음 들어와 이 동네를 일구었다.

 

앞면과 옆면이 각각 7칸이고 앞면 사랑채가 정자 형식인 이 종택에서 지훈은 호은의 14대 후손으로, 제헌·2대 국회의원이었던 한의학자 조헌영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짐작하였겠지만 그의 가계는 만만찮다. 지훈은, 한일합병 후 곡기를 끊고 죽음을 선택한 한말 의병장 조승기,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항거하다 자결한 지훈의 조부 조인석 등이 태어난 이 종택의 태실에서 태어난 것이다.

 

개화와 새로운 시대를 무난히 받아들이긴 했지만, 꼬장꼬장한 선비정신이란 그리 녹록하지 않다. 호은종택에선 예부터 '삼불차(三不借)'를 지켰다 한다. '삼불차'는 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말로, '인물'을 빌리지 않고(즉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뜻), '재물'과 '문장'을 빌리지 않는 것을 이른다.

 

다른 가문의 '인물'을 빌리지 않는다는 데에 이들의 고집과 기백이 드러난다. 그것은  대가 끊어지는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만만찮은 선언인 것이다. 그런 기백과 정신이 '지조론'의 시인이자 지사였던 지훈을 낳은 것일까.

 

'지조론'으로 도저한 선비의 기개를 밝힌 지훈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1942년 봄부터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을 돕던 지훈은 경찰의 신문을 받고 풀려난 후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문인들은 '조선문인보국회'라는 친일문학단체에서 활동했지만, 그는 시 몇 편 발표로 시인이겠냐며 붓을 꺾어 버렸다.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도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지훈을 꼽는 까닭이 여기 있는 것이다. 그는 자유당 정권 말기에도 독재에 항거하는 민간단체에서 활동했다.

 

주실마을에는 오래된 고가가 많다. 호은의 증손 조덕린의 옥천종택, 문중의 서원 노릇을 했던 창주정사, 지훈이 한문을 배웠던 신교육의 전당 월록서당 등이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일찍 개화한 마을답게 마을 한복판에는 교회가 서 있다. 독실한 기독인인 아내조차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즐비한 고가와 담장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예사롭지 않은 형상의  그 콘크리트 건물이 좀 '거시기한' 것이다.

 

더 거시기한 것은 마을 뒤편에 조성한 '지훈 시 공원'이다. 작은 계곡 옆 산자락을 따라 오르게 되어 있는 시공원에는 조지훈의 동상과 시 27편을 새긴 돌비가 줄을 이어 서 있다. 시공원이니 '시'를 새긴 돌을 나무랄 수는 없는데, 어쩐지 그게 지훈이나 그의 시편들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공원 안 쉼터 옆에 선 지훈의 동상은 너무 크고 높고 우람했다. 펴들고 있는 책이 아니었다면 그는 시인이 아니라, 무슨 정치적 지도자처럼 보일 듯했다. '승무'와 '봉황수' 따위를 새긴 시비 옆의 관련 조각 작품들도 어쩐지 공원의 분위기와 따로 노는 것처럼 들떠 보였다. 거기 드리워진 것은 어쩌면 관광 상품화에 급급한 지자체가 단기간에 조성한 '날림'의 혐의 같은 것은 아닐는지…….

 

▲ 지훈 시공원 마을 한쪽 산자락 아래 공원을 조성, 지훈의 동상과 시비를 모아놓았다.

 

▲ 시비들 지훈 시공원에는 이런 형식의 시비가 무려 27개나 있다.

 

 

마을과 사람과 나무의 공존, 주실마을 숲

 

좀 씁쓸해지는 마음으로 마을을 등지면 곱게 단풍든 마을 숲이 길을 막는다. 마을사람들이 '주실쑤'라고 부르는 이 숲은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는 보호숲이다. 밖에서 보면 숲에 가려 마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장승을 뜻하는 사투리를 섞어 '수구막이 숲'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백 년 된 아름드리나무들이 모여서 이룬 이 숲이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은 백여 년 전이라고 한다. 마을 입구의 우거진 숲에 소나무를 심으면서 문중에서는 숲을 마을의 일부로 편입시켰던 것이다. 당나무인 느티나무와 느릅나무 등이 연출해 내는 이 숲의 풍경은 고즈넉하고 넉넉하다.

 

이 숲이 마을과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온 지난 세월은 '공존'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지난해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이 숲이 받은 생명상(대상)은 '숲과 마을(사람)이 서로를 지켜내고 가꾸어 온 교감의 세월'에 대한 상찬이었던 것이다.

 

▲ 주실마을 맞은편에 월록서당, 오른편은 주실마을 숲이다.

 

▲ 주실마을 숲 지난 백여 년 동안 마을과 숲이 나눈 세월은 공존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 숲과 길 주실마을 숲을 가로지르는 영양-봉화간 도로

 

숲 안에는 '빛을 찾아가는 길'을 새긴 지훈의 시비와 스물한 살에 요절한 지훈의 형 세림 조동진의 시비도 있다. 나지막한 돌비에 새긴 형제의 시는 주변의 노랗고 푸른 단풍빛 속에서 살갑게 녹아 있다. 숲으로 들어서자 가슴 높이까지 차오른 숲의 기운이 온몸에 빛처럼 쏟아지는 듯했다.

 

숲 사이를 휘돌아 나가는 도로 저편으로 가을이 잔명(殘命)처럼 깊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용화리로 차를 몰았으나,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다음 일정 때문에 우리는 대티골 숲길 어귀에서 발걸음 돌려야 했다. 우리는 나중을 위하여 대티골 숲길을 아껴두기로 했다. 

 

우리가 늦은 점심을 든 것은 오후 3시가 겨워서였다. 그것도 읍내에서 마땅한 식당을 찾지 못해 읍 외곽의 손 자장면 집에서였다. '옛날식'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먹은 그 집의 '간짜장' 맛은 별로였다. '김밥'이 없었다면 아내는 나를 용서하지 않았을 거였다. 우리는 김밥의 공로를 과장해 치하하면서 귀로에 올랐다.

 

2009.11.10 /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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