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불러오던 정동의 찬바람을 맞으며
11월 '역사, 문화와 함께 하는 종로 중구 걷기 모임'은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 앞에서 지난 22일(일) 오전 9시 30분에 집결했다. 정동을 거쳐 사직단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덕수궁의 정문 앞에 집결한 것은 최근 광장공포증에 시달리는 MB정부와 오세훈 서울시장의 철학 없는 디자인 중심의 닫힌 행정 때문에, 대한문이 민주화의 성지처럼 된 곳이라 찾기 쉽고 교통이 편리하다는 이유에서다.
▲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이곳이 정동여행의 출발지인 것 같다
덕수궁은 원래 조선 세조 임금의 큰 손자인 월산대군의 사저였다. 왕족의 사가가 왕궁이 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의주로 몽진을 떠났다가 돌아와 보니, 경복궁 등 모든 궁궐이 불타 한성 내에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어 이곳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한 것에서 유리한다.
당시에는 현재의 정동을 정릉동이라고도 부르고 있었다.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이 현재의 영국대사관 자리에서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가기 전에 있었던 곳이라 정릉동이라 불리다가 정릉이 옮겨간 이후에는 정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을 복원하여 이거하면서 경운궁이라 칭하였다. 나중에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한 다음 30년 간 궁역에 속해 있던 여러 가옥과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어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으로 축소되었다.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을 한 직후, 태후와 태자비 등을 경운궁으로 옮겨와 살게 하였고, 자신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 당한 후 경운궁에 머물렀다. 일제는 경운궁을 퇴위한 고종이 사는 집이라는 의미에서 덕수궁이라고 부르게 된다.
일행들이 집결한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우진각 지붕 집으로, 궁궐의 정전인 중화전 정면에 있었던 것을 동쪽으로 옮긴 것이다.
언제부터 인가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이나 부부가 함께 걸으면 헤어지거나 이혼을 한다고 터부시 했다.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면 이혼심판을 하는 가정법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덕수궁의 돌담길을 따라 정동으로 들어서면 배재학당과 이화여고, 서울시립미술관, 정동제일교회, 유관순기념관, 정동극장, 경향신문 등이 있고, 구한말 정치인과 구미 외교관들의 사교장으로 이용되던 손탁 호텔, 러시아 공사관, 문화체육관, MBC방송국 등의 터가 있다.
정동 길 왼쪽에 서울시청이 임시로 이전해 와서 쓰고 있는 건물과 시의원회관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청사 앞에는 지난 봄 용산참사 이후 아직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는 주민들 몇 명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연좌농성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누군가에게 주려는지 목도리를 뜨고 있는 아주머님의 모습이 오늘 따라 더 처량하게 보이지만, 살아남은 가족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내 가슴을 뜨겁게 했다.
▲ 서울시청사 아래의 석축 내 생각에는 서울성곽의 옛 석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간혹 지나다니는 길이지만, 시청 청사 아래의 석축을 보고 있자면, 옛 서울성곽의 흔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돌의 모양이 그런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어서 좀 더 알아봐야겠다.
우측으로 방향을 잡으면 길가에 작가의 이름이나 제목이 없는 '사람의 키를 낮추어 눌러 놓은 모양의 가족상'이 보인다. 어쩌면 저렇게 정확한 비율로 키를 낮추어 조각을 만들어 놓았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 ‘사람의 키를 낮추어 눌러 놓은 모양의 가족상’ 정확한 제목과 작가의 이름이 없는 것이 아쉽다 |
▲ ‘광화문연가’의 작곡가인 고 이영훈씨의 노래비 너무 작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
간혹 지나다니면 나를 늘 웃게 만드는 재미난 조각이다. 약간 더 가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미국대사관저가 나오는데 나는 별로 관심 없이 지나친다. 정동로타리 가운데 가수 이문세가 부른 '광화문연가'의 작곡가인 고 이영훈씨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작은 노래비는 인물과 마이크를 연상하게 하는 표식과 노랫말이 써져 있다. 워낙 작은 노래비라 주목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다시 정면으로 길을 건너면 60~70년대 발간되던 장기봉이 창간한 독자 중심의 상업신문이었던 신아일보 사옥이다. 신아일보는 1980년 10월 언론기관통폐합 때 경향신문에 흡수 통합되었다.
▲ 옛 신아일보 사옥 앞은 초라하지만, 옆의 담쟁이가 좋은 곳이다. |
▲ 러시아대사관 정동에 있는 러시아대사관 |
신아일보 사옥은 앞에서 보면 별로 볼품이 없지만, 옆의 담쟁이는 초겨울에도 정취가 있다. 신문사 우측에는 러시아대사관이 들어와 있다. 원래 90년대 초반 러시아와 수교가 되면서 정동의 러시아공사관 자리로 들어오려고 했지만, 부지 일부가 개인 땅이라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바로 옆에는 1885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H.G.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 터와 박물관이 보인다. 고종 임금이 이 학교를 '배재학당'이라 이름 지어 간판을 써 주었다고 전한다.
▲ 배재학당 배재학당 터와 남궁억 선생의 집터를 알리는 표지석 |
▲ 배재학당 박물관 |
학당 터에는 터를 알리는 표식과 배재학당의 교사를 지냈고, 언론인이었던 남궁억 선생의 집터를 알리는 표식이 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배재학원의 120년 역사를 담은 다양한 자료가 역사별로 전시되어 있고, 김소월, 주시경, 이승만 등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동문 소개가 되어 있다.
<텬로력뎡>이라고 하는 국내 최초의 영문소설 번역서가 1895년 배재학당에서 운영하던 삼문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배재학당은 당시 미국의 선진교육과 출판을 국내에 적용함과 함께 일제 때는 기독교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 배재학당 옛 학당의 교실 모습 |
▲ <텬로력뎡>이라고 하는 국내 최초의 영문소설 번역서 배재학당은 출판 사업도 했다고 한다 |
인근의 정동제일교회와 이화학당 등과 함께 기독교 선교, 교육, 독립운동의 큰 획을 그은 의미 있는 곳을 둘러보니 기분이 좋다.
배재학당 옆에는 구한말 한성재판소 자리에 일본이 만들었던 대법원 청사를 이용하여 만든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다. 1920년대 서양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옛 대법원 건물을 전면부의 파사드(Facade)만 그대로 보존한 채 좌우측을 신축한 것이라고 한다.
▲ 서울시립미술관 일본이 만든 대법원 청사를 해방이 된 다음에도 우리 정부는 40년 간
대법원으로 쓰다가, 미술관으로 바꾸었다. 일제의 침략을 다루는 역사박물관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곳이다
개인적으로는 일제의 대법원을 해방 이후에도 우리정부가 40년 가까운 시간동안 그대로 쓰다가 새롭게 강남에 신축을 하여 이전을 한 것은 올바른 일이지만, 이곳을 일제의 침략이나 잘못을 알리는 역사박물관으로 만들지 않고 미술관으로 만든 이유는 아직도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찬반의견을 보면서, 올바른 역사인식이란 무엇인가? 하는 고민에 빠져든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정동의 찬바람이 오늘은 더 스산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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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한 정동
정동의 서울시립미술관 입구에는 조선 5현 가운데 한사람으로 예(禮)의 본질과 의의, 내용의 옳고 그름을 탐구하던 유학의 한 분야인 예학을 태두인 사계 김장생 선생과 그의 아들이며 예학의 대가였던 신독재 김집 선생의 생가 터를 알리는 작은 표지석이 보인다.
▲ 시립미술관 입구의 김장생, 김집 선생 생가 터 표식 작은 표식이 이쁘다
길을 앞으로 더 전진하여 정동제일교회로 간다. 1885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감리교회다. 미국인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자신의 사택에서 조선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 교회의 시초가 된다.
특히 교회 내부의 벧엘예배당은 1897년에 건축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 건물로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도 1918년에 이곳에 봉헌되었으며, 성가대는 한국 개신교 음악 문화를 선도했다.
▲ 정동제일교회 헨리 아펜젤러의 흉상 |
▲ 정동제일교회의 벧엘예배당,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이다. |
또한 1887년에 설립된 정동부인병원은 한국 최초의 어린이와 부녀자 전용 병원이다. 정동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는 아펜젤러가 맡았고, 1902년에 제4대 담임목사로 최병헌이 부임하면서 한국인이 당회장을 맡게 되었다.
제5대 현순, 제6대 손정도, 제7대 이필주 담임목사는 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들이다. 1919년에는 담임목사 이필주와 전도사 박동완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면서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3·1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옥사한 이화학당의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도 신자였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정동교회는 미국식 기독교의 초기 전파지였으며, 교육과 독립운동에도 주도적 역할을 한 성전이기도 했다.
▲ 정동극장 정동의 문화예술명소 |
▲ 남도 추어탕 집 아주 유명한 식당이다 |
정동교회 앞에는 정동극장이 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를 복원한다는 기치 하에 1995년에 건립되었다. 전통예술의 발전과 보급, 생활 속의 문화운동 전개, 청소년 문화의 육성이라는 세 가지 지표 아래 다양한 공연예술 프로그램을 개발, 보급하고 있으며, 주변의 다른 문화공간과 함께하는 도심 속 문화관광 명소다.
그 위쪽으로 올라가면 골목 안에 너무 유명해 많이 기다려야하는 추어탕 집이 있고, 그 옆에 2008년 등록문화재 제402호로 지정된 구 신아일보사 별관이 나온다. 1930년대에 지하1층, 지상2층으로 건축된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외벽은 상하이에서 가져온 붉은 벽돌로 쌓은 것이다. 신문사 별관으로 사용되면서 1975년에 지상4층으로 증축되었다.
▲ 신아일보 별관 건축사에 의미가 있는 유적이다 ▲ 주한 캐나다 대사관
원래 구한말 관세청사로 쓰였고, 조선 최초의 서양인 외교고문이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사무실도 이곳에 있었다. 그 뒤 미국기업 싱어미싱사의 한국지부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1963년 신아일보사에 매각되어 별관으로 사용되었다.
구한말 파란만장한 역사와 함께 1980년 신군부의 언론기관통폐합 조치로 언론수난현장을 대변하는 등 역사 문화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또한 당시 민간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슬라브(Slab) 구조 및 원형철근 사용 등 일제 강점기의 건축수법이 잘 보존되어있어 근대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그 앞에는 이화학당 자리인 이화여고가 보인다. 이화학당은 1886년(고종 23) 해외여성선교회에서 파견된 메리 F. 스크랜튼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사립여성교육기관이다.
▲ 이화여고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 자리에 있다
설립 이듬해인 1887년 2월에는 고종 임금이 '이화학당'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했다. 이는 사액서원에 비견되는 것으로서 이화학당이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근대식 여학교임을 의미한다.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이화학당은 점차 학제를 정비하여 1904년에는 중등과를, 1908년에는 보통과와 고등과를 신설함으로써 일관된 학제를 마련하였다. 이화학당은 1908년 5명의 제1회 중등과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어 우측에 2~3년 전에 새롭게 신축하여 자리를 잡은 주한캐나다대사관이 보이고, 미술 특기생을 위한 중학교인 예원학교와의 사이 길을 올라가면 구 러시아 공사관이 보인다. 현재는 보수공사 중이지만 1977년 사적 제253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러시아 공사관 건물은 1885년(고종 22)에 착공되어 1890년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설계자는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틴이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1896년 2월 1일 세자와 함께 옮겨가 이듬해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피신해 지내던 곳이다.
▲ 러시아공사관 현재 공사 중이다.
또한 아관파천 중에 친일파였던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파 박정양 내각이 조직되는 등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의미 있는 건물이다. 한국전쟁 이후 거의 소실되었다가 70년대 탑부만 복원되어 남아있고, 그나마 공사 중이라 볼 것이 없다.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있는데 덕수궁까지 연결되어있다.
공사관 아래에는 공원이, 옆에는 주차장이 있고, 그 옆에는 경향신문사가 2~3년 전에 건축 시행한 노인전문복지시설인 상림원이 있다. 중국 고대의 진, 한나라의 천자가 거닐던 정원이라는 뜻의 아파트로 덕수궁의 후원이었음을 강조한 집이지만, 분양이 순조롭지 않아 신문사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들었다.
▲ 상림원 경향신문사가 시행한 상림원 |
▲ 구가도시건축 정동아파트 1층에 있는 건축사 사무소 |
현재의 경향신문사 사옥은 원래 러시아 정교회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길을 다시 나와 전진하면 정동아파트가 있다. 정동에 있는 유일한 살림집이라고 보면 된다. 40년도 넘은 오래된 아파트지만 정비와 보수를 잘해서 인지 겉모양은 멀쩡하다.
1층 입구 왼쪽에 '구가(guga)도시건물사무소'가 보인다. 경주에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한옥호텔인 '라궁'의 설계를 이곳에서 했는지, 조그만 모형이 창문 틀 위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보기 좋다.
길 건너 창덕여중 옆쪽으로는 중화 기독교 한성교회라는 자그마한 교회가 있다. 1912년 화교들을 위해 문을 열었는데 1958년 벽돌로 신축한 건물을 아직까지 쓰고 있다. 2층짜리 교회와 앞에 작은 도서관이 있다.
▲ 화교교회 백년 전에 설립된 중국인 교회다 ▲ 경향신문사 건축가 김수근 선생의 작품이다.
그 앞에 정동국시와 경향갤러리가 있는 경향신문사 별관과 본관이 보인다. 한국의 1세대 건축가인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작품이다. 1967년에 완공된 건물로 예술품 중에 하나지만, 현재는 낡고 초라한 모습이 신문사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김수근은 지금은 사라진 한국일보 사옥을 설계했고, 세운상가, 불광동성당, 경 복궁역사, 국립진주박물관, 공간사옥 등을 설계한 유명 건축가다.
경향신문사 앞쪽으로 길을 건너면 현재 문화일보 사옥이 나온다. 예전 동양극장이 있던 곳이다. '홍도야 울지마라' 등의 신파극을 공연하던 유명한 공연장이었지만, 연극 공연이 인기를 잃은 이후 건물이 사라지고 문화일보가 들어섰다.
▲ 피어선재단빌딩 피어선대학, 현 평택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곳이다
경향신문을 끼고 우측으로 돌면 1912년 설립된 피어선성경학원이 있던 피어선학원재단빌딩이다. 현재는 임대료가 저렴하고 교통이 좋아 가난한 사회단체가 많이 입주하고 있어 유명한 곳이다. 피어선신학대학은 현재 평택으로 이전하여 평택대학교로 교명이 바뀌어 종합대학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 아래로 조금 더 내려가 씨티은행 서울지사를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면 경희궁 터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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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을 복원할 생각이 있기는 하니?
경희궁 터 안에 만들어진 서울역사박물관을 지날 때면 참 많은 생각이 든다. 또한 경희궁 안쪽에 있던 서울중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한 이후에 세워진 서울시립미술관의 경희궁 분관 역시도 나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전시장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아쉽게도 경희궁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역사의 아이러니다.
일본의 대법원 터에 세워진 덕수궁 옆의 서울시립미술관 역시도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이곳은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곳이다.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가장 파괴가 심한 곳이 바로 경희궁이기 때문이다.
경희궁은 처음에는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화문, 황학정 등의 건물이 함께 있었으나 융복전과 집경당은 일본의 권력자들에 의해 여기저기로 흩어졌고, 나머지 건물들은 1910년 조선에 와 있는 일본인 귀족들의 자제들을 위해 설립된 경성중학교(지금의 서울중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또 다시 이리저리로 흩어졌다.
▲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원래의 위치보다 좀 더 안쪽 왼쪽으로 이전 복원 되었다. |
▲ 경희궁이 정전인 숭정전 현재 숭정전은 동국대 내에 있는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고, 이 것은 도면대로 복원한 신품이다. |
회상전은 남산의 일본 절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 안의 정각원으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신사인 남산의 박문사 정문으로 갔다가 해방이 된 다음에는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오랫동안 쓰이다가 겨우 경희궁의 정문으로 그 위치를 옮겨왔다.
정부와 서울시가 발굴 조사를 계속하여 복원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그 자리에 장시간 동안 정부 기관인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원, 서울시교육청 등이 들어서 있어 복원의 의지가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서울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이 경희궁의 정중앙에 터를 잡고 있는 것을 보면 서울시가 역사를 말할 자격도 철학도 없는 정책을 펴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 숭정전의 용상과 오봉일월도 이것도 신품이다. |
▲ 숭정전 천정의 용 두마리 새롭다 |
앞에서 말한 3개의 기관 정도만 자리를 비운다고 하면 경희궁은 어느 정도 복원의 틀이 이루어지는데도 말이다. 정부기관이 좋은 자리를 전부 차지하고 있으니 복원을 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더 수월한데도 말이다.
아직도 동국대 안의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는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옮겨오지 못하고 원래의 설계대로 복원이 된 건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부가 너무 깨끗하고 용상과 뒷면의 오봉일월도, 천정의 용 문양 또한 너무 또렷하다. 새롭다는 느낌이 좋기는 하지만 왠지 새로움이 주는 감동은 적었다.
경희궁을 둘러 본 다음 서울 성곽의 4대문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서대문이라고도 불리던 돈의문 터 앞에 선다. 누구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문'이다. 서울시가 최근 복원을 한다고 하니 기쁜 일이기는 하다.
▲ 서대문이 있던 자리 돈의문 터 |
▲ 보이지 않는 돈의문 서대문을 알리는 표식 |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 공사로 인해 철거된 문으로 대략적인 모습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무지개문을 큼지막하게 내고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 지붕집의 초루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한 모양이었다고 전한다.
이제 삼성병원 안에 있는 경교장으로 들어간다. 백범 김구 선생의 개인 사저이다. 최창학 소유의 별장이었던 이 집은 1938년 완공 당시에는 죽첨장이라 하였으나, 선생이 경교장이라 개칭하였다.
▲ 경교장 백범 김구 선생이 쓰던 경교장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건국에 대한 활동 및 반탁, 통일운동을 주도했다.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건물의 중요성이 재평가되면서 2005년 국가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2층 서쪽에 위치하고 있던 선생의 집무실이 원형대로 복원되어 기념실로 운영되고 있다.
▲ 스위스대사관 난파 기념관 가는 길에서 찍은 모습 |
▲ 난파의 집 |
경교장을 나와 서울성곽의 옛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우측의 서울시교육청과 서울복지재단을 지나 갈림길이 나온다. 바로 전진하면 좌측에 스위스대사관이 있고 윗길로 가면 홍난파 가옥이 나온다. 난파는 일본에서 도쿄음악학교에서 공부한 후 귀국, 1920년 '애수'를 작곡하고, 1925년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이후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 이화여전 강사, 경성보육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1935년부터 '백마강의 추억' 등 모두 14곡의 대중가요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 주도로 결성된 친일단체인 조선문예회에 가입했고, 1938년에는 대동민우회, 1941년에는 조선음악협회 등에서 친일활동을 했다.
천재 음악가였지만, 친일 역사로 우리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으로 남아 있는 난파의 집은 송월동 독일인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독일인들이 건축한 건물로 난파가 말년에 6~7년 간 살면서 음악 활동을 한 곳이다.
2층짜리의 아담한 난파의 집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는 기념관으로 평일 낮에는 자유 관람이 가능하다. 1년에 1~2차례 종로구 주관으로 음악제가 열리기도 한다. 정남향이라 햇살이 좋고, 지하층은 현대식 반지하층 개념으로 활용이 좋은 편이다. 서쪽 벽은 담쟁이가 좋다.
난파 기념관 뒤쪽에는 구세군 영천영문교회가 있다.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감리교 목사이던 윌리엄 부스와 그의 부인 캐서린 부스가 창시했다. '그리스도교 전도회'라는 명칭으로 서민층을 상대로 동부지역 빈민가 등을 찾아가 노상전도를 한 데서 기원한다.
그리스도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교리를 가지고 선도와 교육, 가난구제, 자선 및 사회사업을 통해 전인적 구원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1878년 구세군으로 개칭하였다. 조직은 군대식 제도를 모방하고 교회를 국제적인 단일조직으로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도 1908년 영국에서 파견된 로버트 호가트 정령이 이끄는 10여 명의 사관이 선교를 시작한 이래, 의료선교, 고아원, 양로원, 육아원, 교육기관을 통해 포교에 힘쓰고 있다.
영천교회를 지나 사직터널 위를 지나면 임진왜란 당시의 3대 명장인 권율 도원수의 생가 터가 나온다. 현재는 집의 흔적도 전혀 없지만, 그 자리에 400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듯하다.
권율 장군을 떠올리면 어린 시절 그의 옆집에 살았던 장군의 사위 백사 이항복 선생이 떠오른다. 백사는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과 한음'의 일화를 오랫동안 전하고 있다.
▲ 권율장군 생가터의 은행나무 가을에 오면 은행이 장관이다.
이웃에 권율장군의 사위인 이항복의 집도 있었을 것 것이다.
어린 시절 이항복의 집 감나무가 권율 장군의 집 담장을 넘어 자라고 있어, 그 집의 하인들이 함부로 감을 따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당연히 권 대감 집 하인들이 주인의 힘을 믿고 감을 따고도 돌려주지 않았고 도리어 큰소리를 치는 형국이 되었다.
화가 난 어린 이항복이 권 대감 집으로 달려가 문 속으로 손을 잡어 넣고는 "대감님 이 손이 누구의 손입니까?" 라고 물어본다. 갑자기 문종이 사이를 파고든 어린 소년의 손에 장군은 놀랐지만, "당연히 너의 손이다."라고 말한다.
이에 어린 항복이 "그런데 왜 저희 집의 감을 대감님 집의 종들이 함부로 따 가냐"고 따진다. 이에 권 장군은 노복들의 잘못된 행동을 알게 되고, 어린 소년의 재주와 기지에 감동 하게 되어 훗날 사위로 삼는다는 이야기다.
은행나무 옆에서 임진왜란으로 전국을 누비며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발로 뛰던 권율 장군과 이항복 대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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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와 사직은 어디로 가고 공원만 남아
종로구 행촌동 서울성곽 바깥쪽인 사직터널 위의 권율 장군 옛 집터에는 딜쿠샤(Dilkusha)라고 불리는 1923년에 지어진 서양식 붉은 벽돌 가옥이 하나 있다. 금광개발업자이자 영국 런던 데일리뉴스 한국 특파원(Free)으로 서울에 머물렀던 미국인 알버트 와일드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가 지어 조선에서 추방되던 해인 1942년까지 거주하던 곳이다.
▲ 딜쿠샤(Dilkusha) 1923년에 지어진 서양식 집이다.
건물 초석에 'DILKUSHA 1923'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DILKUSHA'는 그의 인도인 부인을 위해서 작명한 이름으로 힌두어로 '행복한 마음', '이상향'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큰 아치형 창문과 지붕 모양 등이 한눈에 서양식 건물임을 알 수 있는데 지금도 여러 가구가 살고 있다.
딜쿠샤에 역사적 의미가 있는 이유는 테일러가 일제의 눈을 피해 3.1 독립선언문을 입수해 전세계에 알렸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1948년 사망 당시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무덤은 마포 양화진의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다.
딜쿠샤를 본 다음 길을 돌아 지식경제부의 사직사 방향으로 길을 잡아 올라 간다. 길 좌측에 서울성곽이 보인다. 이곳에서 인왕산을 지나 자하문, 다시 북악을 넘어 혜화문을 거쳐 낙산까지는 어느 정도 성곽의 흔적이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남아 있다.
우리는 안쪽으로 길을 잡아 사직단 방향으로 이동한다. 사직단이 보이는 사직공원 귀퉁이에 단군성전이 있다. 성전 안에는 단군영정을 봉안하여 한민족의 상징으로 기리고 있으며, 현정회가 주최가 되어 종교와 이념을 초월하여 국조 숭모의 참뜻을 새기기 위해 건립되었다.
▲ 단군성전 사직공원 안에 있는 단군성전 |
▲ 단군상 사직공원 안에 있는 단군상 |
단군성전은 백악전이라고도 불린다. 성전 안에는 단군영정과 단군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곳은 지난 1968년 이숙봉의 희사에 힘입어, 단군성전으로서는 한국 최초의 공공건물로 건립된 후 현정회로 이관되었으며, 1973년 서울시로부터 보호문화재로 인정을 받았다. 이후 1990년 쌍용그룹의 도움으로 증축했다. 현액인 단군성전은 김응현, 홍익인간 글씨는 원중식, 이화세계 글씨는 손경식, 내외삼문의 간판은 이현종이 각각 쓴 것이다.
사실 나는 사직단에 왜 단군성전이 자리하고 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국조 단군의 성전이 필요하다는 판단은 들지만, 사직단에 있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아 약간은 의아하다. 이것은 사직공원 안에 있는 사임당과 율곡의 동상이나 종로도서관 역시도 마찬가지다. 꼭 문화재를 파괴하면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얼까?
단군성전을 둘러 본 다음 맨 안쪽 위에 있는 활터인 황학정으로 이동했다. 1974년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된 곳이다. 사직공원 뒷산 인왕산 기슭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건평 59㎡이다.
1898년 고종 임금의 어명으로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었던 것을 일제강점기인 192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궁술 연습을 위한 사정(射亭)이 다섯 군데 있었는데, 필운동의 등과정, 옥동의 등룡정, 삼청동의 운룡정, 사직동의 대송정, 누상동의 풍소정 등으로 이를 서촌오사정(西村五射亭)이라고 하였다.
▲ 황학정 4대문 안에 있는 유일한 활터 |
▲ 활쏘는 궁사들 황학정 |
오사정은 조선 전기부터 무인의 궁술연습지로 유명했는데, 갑신정변 이후 활쏘기 무예가 쇠퇴하자 많은 활터가 사라졌고 일제강점기에는 활쏘기를 금지했으나 황학정만 그 맥을 이어왔다. 지금 황학정이 세워져 있는 곳은 오사정의 하나인 등과정이 있던 자리이다. 대한제국 때까지 남아 있던 유일한 궁술연마장으로 지금도 이곳에서는 궁술행사가 열리고 있다.
당일은 활을 쏘는 사람이 여러 명 나와 시위를 당기고 있어, 나도 눈으로 활쏘기를 즐길 수 있었다. 만일에 있을지도 모르는 안전사고예방을 위해서 인지 활의 촉은 없는 상태에서 무게감을 위해 앞에 쇠로 봉을 만들어 단 것이 특이했다. 촉 없는 활을 과녁을 향해 쏘아 명중이 되면 과녁의 나무와 화살의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들려 실력 확인이 가능한 것 같았다.
▲ 황학정 뒤의 우물 이용을 잘 하지는 않는 것 같아 보인다
7~8명의 궁사들이 활을 쏘는 모습을 한참 동안 보고 있다가, 황학정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정자 뒤에는 조그만 우물이 있어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마실 수 있게 되어있었는데 겨울이 다 되어서 그런지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나뭇잎이 너무 많고 지저분하여 직접 마시보지는 않았다.
황학정을 둘러 본 다음 아래로 내려와 사직단으로 갔다. 사직단(社稷壇)은 토지를 주관하는 신인 사(社)와 오곡을 주관하는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보통 수도에 궁궐을 건설할 때 궁궐 왼쪽엔 종묘를, 오른쪽엔 사직단을 두었다. 아쉽게도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성역이었던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공원을 조성한다는 구실 아래 훼손되기 시작했는데 부지를 분할하여 학교를 신설하고 우회도로를 개설했다.
▲ 사직단 사직단 옆에서 |
▲ 사직단 입구 쪽에서 본 사직단 |
더 안타까운 것은 사직단의 수난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어 1897년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태사' '태직'이라고 높여 부르게 했던 사직단의 정문이 1962년의 도로확장공사 때도 본래의 위치에서 14m 가량 뒤쪽으로 밀려났다.
▲ 사직단의 정문 |
▲ 종로도서관 사직공원 안에 있는 종로도서관 |
현재 공원 내에는 종로도서관, 시립어린이도서관, 노인정, 체육시설, 운동장 등의 공공시설과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단군성전, 이이, 신사임당의 동상 등이 있다. 인왕산 길의 진입로가 가까이 있어 등산객과 산책객이 많이 찾는다. 안타까운 것은 입구의 사직단 정문과 사방이 봉쇄되어 출입이 불가능한 사직단을 제외하고는 이곳에 문화재가 있는 유적지라는 것을 알기 힘들 정도로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사직단과 사직단 정문을 본 다음 인근 누하동의 환경운동연합으로 이동했다. 개인적으로 환경운동연합의 회원은 아니지만, 넓은 마당에 큰 나무와 3층 정도 되는 건물의 1층에는 친환경 매장이 있고, 2~3층의 사무실과 지붕의 태양열 집열판이 너무 좋기 때문에 구경을 간 것이다.
▲ 환경운동연합의 나무 마당이 참 좋은 곳이다 ▲ 환경운동연합 3층 건물로 앞에서 보면 2층, 뒤에서 보면 3층이다. 지붕은 집열판이 있다.
지나가는 길에 참 터가 좋다는 생각을 자주하는데, 당일은 일요일이라 아무도 없는 건물과 텅 빈 마당을 둘러 본 다음, 큰 나무를 중심으로 사진을 한 장 찍고, 건물의 사진도 한 장 찍어왔다. 참 건물이 마당에서 보니 2층이고 아래와 뒤에서 보니 3층이구나! 특이하다.
오늘은 역사적인 아픔이 많은 정동과 경희궁, 서울성곽, 사직단 등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역사 인식과 옛것에 대한 보존과 유지, 보수의 필요성을 많이 느꼈다. 또한 우리 정부의 무심함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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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OhmyNews 김수종 (kimdaisuke)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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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 멀미, 프랑스 수녀 잡을 뻔했네 ~ 근대 태동의 산실 '정동길'
겨울비가 촉촉이 내리던 지난 10일에 여성문화유산연구회가 주관한 '여성의 눈으로 서울을 걷자' 답사는 '명동 성당 예수상' 앞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오늘의 답사코스는 정동 일대로 정동 길에 남아있는 근대의 흔적을 만나보되 격동기 근대를 살아온 여성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자는 것이다.
명동성당은 유명한 곳이긴 해도 성당 안까지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어리버리한 태도로 예수상을 찾는데 바로 입구에 아주 단아하고 조촐해 보이는 예수 조각상이 눈에 들어온다. 우람하고 커다란 조각상이 아니라 우선 마음이 놓였다.
▲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
답사 일행은 성당의 본관 뒤쪽에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샬트르 수녀회의 프랑스 수녀들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오게 된 시기는 1888년이었다. 우리나라에 먼저 들어와 있던 블랑 주교가 최초의 고아원을 세우고 그녀들에게 도와 줄 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4명의 수녀들은 배를 타고 제물포를 통해서 들어왔는데 한양까지 들어올 때는 가마를 타고 왔단다. 당시 사람들이 외국 여성이 임금이 사는 한양에 들어온 다는 것은 부정 타는 일이라 생각해서, 신분을 감추기 위해 7월 삼복더위에 네모 상자 안에 갇혀서 정동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수녀들은 프랑스에서 여기까지 49일간의 배로 온 배멀미보다 가마 멀미가 더 힘들었다고 회상했단다.
▲ 수녀님과 아이들 프랑스 공사였던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의 사진첩에서 발견된 자료.
우리나라 사회복지 사진으로는 가장 오래된 사진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명동성당 자리에는 당시 고아원이 있어서 수녀들은 지금의 정동근린공원 안에 있던 정동 사제관으로 가서 짐을 풀었다고 한다. 당시의 수녀들은 선교활동보다는 우선 교육, 의료, 보육활동을 비롯한 사회복지 활동을 시작했다.
사제관은 러시아 공사관과 담을 맞대고 있었다. 러시아 공사관에는 손탁이라는 독일 여성이 궁중출입을 하면서 외국인을 접대하는 요리를 맡고 있었고, 나중에 고종에게서 지금의 이화여고 정문 입구 쪽으로 추정되는 곳의 땅을 하사받아서 호텔을 지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다고 하는 '손탁호텔'이다.
그녀는 수녀들과 친해졌고, 고아원을 운영하며 자급자족해야 했던 수녀들에게 공사관의 빨랫감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아이들이 수를 놓은 것으로 바자회도 열어주고, 고종이 주관하는 연회에서 음식이 남으면 수녀들을 통해서 고아원에 전했다고 한다.
박물관은 당시의 손탁 여인을 '은인'으로 묘사해 놓고 있다. 샬트르 수녀회의 수녀들이 입국한 지 일주일 만에 순교자들의 후손이었던 다섯 명의 처녀들이 입회하여 한국인 첫 수녀들이 되었다고 한다. 자료로 전시되고 있는 일부 사진들은 당시 프랑스 공사로 있던, 신경숙 소설의 <리진>에 나오는, 바로 그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의 사진첩이다.
▲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 당시 수녀회와 고아원의 은인으로 묘사되고 있는 손탁 여인과 손탁호텔 사진
"어서 오십시오 여행자님들"로 시작된 안젤라 수녀님의 조근 조근한 설명은 근대의 시간 속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수녀들이 살고 있는 곳은 일반인들이 들여다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수녀회 역사관을 세웠고, 수녀들의 삶을 아주 조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했다는 말을 한다. 이곳은 언제든지 와서 둘러보고 사진도 찍으란다.
신경숙 소설 <리진> 속에 나오는 블랑 주교, 콜랭 공사, 고아원의 역사가 근대의 기록이 되어 그곳에 있었다. 소설 속의 추상적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 속에 정말 존재하는 시대로 다가왔다. 순교의 시간을 찾아 이 땅에 온 수녀들의 숭고한 정신은 종교를 떠나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좋은 여행 하십시오. 정동길은 비오는 날에도 돌아보기 좋은 길이랍니다."
안젤라 수녀의 인사를 받으며 성당을 나와서 롯데백화점 쪽으로 걸었다. 길을 건너서 롯데백화점을 오른 쪽에 두고 길을 걷다보면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이 나온다. 호텔의 정문을 가로질러 나가면 호텔 뒤편에 '환구단'이 꼭 호텔의 후원처럼 들어앉아 있다.
▲ 환구단 석조 대문 환궁우에서 바라다 보이는 대문과 호텔 커피숍, 꼭 호텔의 후원 같은 느낌이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 고려 때부터 시행했었고 설치와 폐지를 되풀이하다가 조선 세조 때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 뒤 고종 때 와서 다시 설치가 되었고,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다시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고종은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일제 때 이곳에 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일부가 헐리고 정문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지금은 3층 8각 정자 '황궁우'와 '돌북', '석조 대문'만이 남아있다. 석조 대문의 계단에 있는 답보에는 용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바로 황제의 나라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용무늬인데 덕수궁과 이곳에만 있다고 한다.
▲ 환구단 용무늬 답보와 석조 대문 사이로 보이는 3층 8각의 환궁우
호텔을 지으면서 철거한 환구단 정문은 40여년을 우이동 어느 곳에 있었고 한다. 그 정문을 옮겨와 복원시켜놓았다. 정문은 꽃단장하고 돌아왔으나 시골처녀가 도시처녀가 되어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그곳에 어울리지를 못하고 있었다. 너무 생뚱맞도록 단청색이 화려해 보여 환궁우 하고도 어울리지 않았고, 주변의 현대식 건물하고는 더더욱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노는 듯했다. 이제 제자리로 찾아왔으니 조만간 어울리는 풍경이 되어 가겠지. 정문 앞에는 시청광장이 있고, 맞은편 길 건너에 덕수궁 대한문이 보인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길이 이어지고 그 어름에 정동제일교회가 나온다. 1885년 아펜 젤러 목사가 한옥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정동교회의 효시란다. 지금 남아 있는 붉은 색 교회 건물은 명동성당과 함께 당시로서는 혁신적 건축양식이라서 사람들에게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근대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선교활동보다는 의료와 교육, 봉사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 정동제일교회 아펜 젤러 목사가 세웠다는 정동제일교회.
당시 명동성당과 함께 새로운 건축양식으로 해서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한다.
교회를 지나쳐 계속 정동길을 걸어 오르면 이화여고가 나온다. 정문으로 들어가니 입구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손탁호텔터' 표지석이 보인다. 학교 안 입구에 있는 이화 박물관옆 길을 걸어 들어가면 왼쪽으로 보이는 공터에 '유관순 열사 빨래터'라는 우물이 나오고 계속 그 길을 따라 걸어서 작은 언덕을 올라 내려가면 유관순 기념관 건물이 나온다. 열사의 동상도 보인다. 기념관으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가니 로비에 열사가 활동했던 당시의 사진들이 소박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 유관순 열사 동상 이화여고 안에 세워져 있는 유관순 열사 동상. 투박한 모습의 얼굴이 오히려 안도감을 준다.
▲ 환구단 옛모습 유관순열사 기념관 전시실에는 환구단의 옛 모습의 사진도 전시되어 있었다.
유관순 열사의 초상에 대한 논란이 있단다. 원래는 얼굴이 투덕투덕하지 않고 단아한 상인데 고문에 의해 얼굴이 부어서 무섭게 보이는 것이란다. '열사가 그런 것을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후손들을 보면서 잘한다고 칭찬하실까?' 뭐 그런 객쩍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열사를 기억해야 할 우리들은 얼굴이 아니라 그분의 행동하는 양심적 지식인의 태도일 것이다.
▲ 정동근린공원 정동공원 안에 있는 당시 수도원 터, 프랑스를 떠나온 수녀들이 이곳에 처음으로 둥지를 틀었다.
이화여고를 나와서 길을 건너 앞의 예원학교 담을 끼고 조금만 올라가면 러시아 공사관이 있었던 정동근린공원이 나온다. 그곳은 프랑스에서 떠나온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낯선 한국 땅에 발을 들이고 처음 둥지를 튼 곳이기도 하다. 오늘의 답사는 이곳에서 마무리되었다.
근대 태동의 산실이라 할 정동길에서는 여성들의 발자취를 조금은 만난 느낌이다. 이국땅에서 순교자의 삶을 산 수녀님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 놓은 유관순 열사, 격동의 근대를 치열하게 살았을 또 다른 여성 선각자들에게 머리 숙여 지는 시간들이었다.
200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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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는 혼자 달리지 않는다 ~ 파고다 공원, 인사동, 수송공원
영하의 날씨에 탑골공원 삼일문도 떨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공원을 찾은 몇몇의 어르신들이 건물을 비껴 찾아든 햇볕으로 해바라기를 하셨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의 '여성의 눈으로 서울을 걷자' 답사일이다. 탑골공원으로 해서 인사동 근처를 돌았다. 주제는 '여성과 독립운동'이다. 근대로 넘어오면서부터 여성들의 발자취들이 기록물들로 남겨져 제법 눈에 들어온다.
종로구 종로 2가에 있는 탑골공원은 일명 탑동공원, 파고다공원이라고도 한다. 1992년에 파고다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칭이 되었다. 이곳은 고려시대 때는 흥복사가 조선전기에는 원각사가 있던 자리다. 중종 이후 빈터로 남아 있던 것을 고종 때(1897년) 영국인이 설계하여 공원으로 꾸며졌다. 당시 고종은 백성들을 위한 장을 만들어 주자는 취지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도시공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시청, 광화문 광장 같은 개념인데, 당시 파고다 공원에서 최초로 민중대회인 만민공동회도 열렸다고 한다. 물론 정부의 탄압이 뒤따랐다. 시청, 광화문 광장도 개념만으로 시민광장임을 강조하지 말고 민중의 언로가 자유롭게 트이는 진정한 광장으로 시민들 품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공원 안의 팔각정은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곳이다. 시민의 광장이었기에 3·1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다. 원래 팔각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왕실과 관련된 건물에만 짓는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 탑골공원 팔각정 공원 안에 있는 팔각정. 3.1독립운동 때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곳
이곳의 현대식 단청은 나중에 남산 팔각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공원 안에는 국보(원각사지 10층 석탑)도 있고 보물(원각사비)도 있고, 문화재와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여러 기념탑들도 있고, 소리를 내고자 모여드는 사람도 있었다. 김두한이 국회에 오물을 투척한 오물이 이곳 화장실에 있던 것이라고 누군가 얘기를 한다.
공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삼일문 왼쪽에 육의전 터 표지석이 있다. 비단, 면포, 명주, 종이, 모시, 어물 등 여섯 종류의 상품을 팔던 국가공인 상점 거리의 터라고 적혀있다.
공원 옆길이 바로 인사동이다. 종로 2가 로터리에서 시작되는 인사동 길로 접어들자마자 왼쪽으로 조그만 공터가 길 안쪽으로 나있다. 그곳은 1922년에 세워진 조선극장이 있던 자리로 토월회의 창립공연 등 한국 영화 연극사에 큰 공헌을 하였던 곳인데 1936년 화재로 소실되고 지금은 표지석만 남아있다.
그곳에서 인사동 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승동교회 안내판이 나온다. 승동교회는 조선시대의 교회 건물을 아직 간직하고 있고, 3·1운동 때는 이 교회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시위가 일어났으며, YWCA가 이 교회에서 처음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교회 안에 3·1 독립운동 기념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승동교회를 나와 다시 인사동 길을 걸어 오르다보면 인사동 4거리가 나온다. 오던 길에서 왼쪽 골목길로 쭉 걸어 들어가면 태화빌딩이 있다.
▲ 국보 원각사지 10층 석탑 팔각정 바로 뒤에 세워져 있다. 공원이 원각사 터이고, 세조 때 원각사 안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 조선극장 터 인사동길 입구 왼쪽에 조그만 공터가 있는 곳이다.
▲ 승동교회 1899년에 지었다는 승동교회당. 개보수를 거쳤지만
건물의 기본적인 형태나 구조는 변함이 없고 보존상태도 좋단다.
그곳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장소인 명월관의 별관인 태화관이 있던 자리다. 조선 전기에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사당인 순화궁이었던 적도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이완용의 소유였다가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이 인수해 태화관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지금은 기독교 태화복지관 건물이 되었다. "이완용이 살던 곳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곳이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는 해설사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려 본다.
▲ 태화관 터 지금은 기독교 태화복지관 건물이다.
중종반정 시기에 '태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자리이기도 하단다.
그곳에서 나와 왼쪽 골목길로 빠져 나오니 종로타워 뒤편 공터가 나온다. 그 앞에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2층 한옥집이 보인다. 이문설렁탕집 간판이 걸려있다. 해설사가 '근우회터'였다고 알려준다. 현대식 건물들 뒤편에 이런 오래된 한옥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고, 그곳이 여성운동의 모태가 되는 근우회와 연관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추위에 떨던 우리들은 근우회 보다는 뜨끈해 보이는 설렁탕간판에 눈길이 더 머물렀다.
▲ 근우회 터 높이 솟아 있는 종로타워 뒤편에 있다. 지금은 '이문 설렁탕'집이다.
근대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 이전에 이미 여성들의 지위향상에 눈을 뜬 사람들이 있었다. 1898년 북촌의 양반집 부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찬양회다. 그들은 '남녀가 똑같이 태어났는데 왜 여성들이 남성에게 예속되어 있는가' 하면서 '여권통문'을 신문에 올렸다고 한다.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하고 전통사회에서 벗어나 남성들처럼 경제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정치에도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민립여학교인 순성여학교를 태동시켰다.
비록 주축은 양반계층의 부인들이었지만 참여자는 모든 신분계층의 여성들에게 열려 있었다한다. 일부 남자들은 여기에 동참을 했지만 그들은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즉 여성 개인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엄마가 배워야 그 자식에게도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세대재생산자'로서의 엄마 역할을 강조했다고 한다. 가부장적 시대를 내재화하며 살아온 남자들의 각성이 쉽게 바뀔 수는 없었음을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또 1919년 2월경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만들어져서 '우리 여성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자' 했다고 하는데 이 선언문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아직 연구가 활성화되어 있지는 않다고 한다. '수레바퀴는 혼자 달리지 않는다. 독립운동을 남성에게만 맡길 수 없다'며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여성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이런 각성들을 통해 힘을 모으면서 민족주의 계파와 사회주의 계파가 하나로 뭉쳐 여성 항일구국운동 및 지위향상운동을 위한 단체를 1927년에 결성했는데 그 단체가 바로 근우회다.
▲ 보성사 터 조계사 뒤편 수송공원 안에는 '터'들의 집합소였다. 보성사는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인쇄소다.
근우회 터였다는 이문설렁탕 골목길을 빠져 나와 길을 건너 종로구청 쪽으로 방향을 잡고 찾아든 곳은 조계사 뒤편에 있는 수송공원이었다. 공원 안은 '터'들의 집합소 같았다. 보성사 터, 보성학교 터, 중동학교 터, 대한매일신보 터, 숙명여학교 터의 표지석들이 공원 안 여기저기에 세워져 있었다.
보성사는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곳이란다. 당시는 보성학교 구내에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일제는 보성사를 폐쇄시켰고 1919년 6월 28일에 불을 질러 버려서 터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 보성사 기념탑 수송 공원 안에 있다. 탑 아래 양각 되어 있는 곳을 보면 당시 보성 학교 안에
인쇄소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오른 쪽 나무 옆 지붕만 보이는 이층 건물이 보성사다.
해설사는 "3·1운동 당시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남성들 못지않았습니다. 아마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다면 그렇게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퍼져 나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역사 발전에 여자들이 한 것이 무엇이냐 하겠지만 여성들은 알게 모르게 3·1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지위가 올라갔다고 하지만, 사실 OECD 국가들 중에서 그 지위가 거의 최하위에 속해 있다.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기에 우리 여성들은 여러 방면에서 여성들의 지위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단다.
10회에 걸친 '여성의 눈으로 서울을 걷자'는 오늘로 막을 내렸다. 조계사 경내를 가로질러 길을 건너서 다시 인사동으로 들어왔다. 그동안의 시간들을 정리하고 마무리하기 위해 음식점에 자리를 잡았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것들이나 기록에 남아 있다고 해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하찮게 여겨져 사라지고 있는 여성들의 문화유산을 찾아 발품을 팔고, 여성의 입장에 서서 재해석해 다시 새기게 해준 여성문화유산연구회 사람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200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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