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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

by Wood-Stock 2013. 8. 2.

경향신문


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


(1) 연재를 시작하며 - ‘유신의 모더니즘’, 민초의 입장서 입체적으로 되짚어본다


2013년 나라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 나라에는 대통령이 세 명인 것 같다. 두 명의 전 대통령이 함께 한국을 통치하는 느낌이다. 박정희와 노무현은 끝없이 살아서 정쟁의 소재가 되고 우리를 괴롭힌다. 그들이 남긴 행적과 말에 매달리고 시시비비를 하느라 미래는 잘 안 보인다. ‘경제민주화’나 ‘대통합’ 같은 장밋빛 화두는 완전히 실종되고, 서민의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NLL 문제 공방이나 ‘귀태’ 발언 소동만 횡행한다. 모두 과거로부터 비롯된 증오정치의 소산이다. 박정희의 딸과 노무현의 비서실장이 맞대결한 대선을 치른 뒤끝이니 오죽하랴마는 해도 너무 한다. 앞으로의 5년에 희망이 있을까? 그런 정치야말로 구시대의 유물이자 마지막 쇼였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지만, 과연 우리가 그 유산들을 직시하고 미래를 위해 성찰할 수 있는 재료로 삼을 수 있을지 회의가 든다. 사람들 마음에 너무 깊이 과거가 남긴 상처가 남아 짓무르고 있고, 상처는 이제 비이성적이며 불합리한 진영 논리가 돼 버렸다.

박정희 시대가 남긴 기억과 상처, 그리고 유산의 양은 물론 다른 어떤 시대가 남긴 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깊다. 그 기간은 무려 18년이었다. 지금부터 거꾸로 헤아려 이명박, 노무현, 김대중 시대 각 5년씩 15년에다 김영삼 시대의 일부까지 합쳐야 되는 참으로 길고 긴 기간이다. 유신 시대만 해도 무려 7년에 이른다. 실로 왕에 비견될 만하다. 북녘의 김씨들이 더 질기긴 하지만, 조선의 이씨 왕 중에서 18년 이상 통치한 자가 몇이나 될까.

1970년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은 이전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회 변화와 속도전을 경험했다. 그래서 ‘모든 낡은 것은 공기처럼 흩어지고 녹아났다’. 사진은 유신시대 학원가를 지나가는 학생들의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인문·역사학적 관점에서 유신의 삶과 문화 재조명

새로운 인문학과 역사학적 시야와 개념으로 유신 시대의 삶과 문화정치를 재조명하고, 그래서 새 시대를 맞는 데 콩알만큼의 성찰이라도 보태고 싶다는 마음을 모아 이 연재를 시작한다. 유신의 통치성과 박정희 국가는 흔히 파시즘이나 전체주의의 개념으로 설명되어 왔고, 때로는 만주국이나 일제강점기 말기의 총동원체제에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두는 일리를 가진 것임과 동시에 뭔가 불충분한 것이다. 박정희 국가를 결정지은 동아시아의 냉전질서나 북한과의 관계, 또는 경제성장과 근대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대중의 문제를 담아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시대를 살아낸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현재의 입장에서 유신의 정치사와 문화사를 입체적으로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이 연재를 통해 유신 시대의 본질이었지만 살펴지지 않은 이면, 즉 문화정치와 성정치 그리고 유신 시대 사람들의 삶과 앎을 새로 살펴볼 것이다. 가장 먼저 중점을 두고 말할 것은 그 시대의 근대화와 근대 경험에 대해서다. 

매년 10% 가까이 경제 규모가 팍팍 커지고 어디엔가 공업단지가 생겨나고 도시에 사람들과 건물이 빽빽해진다. 정부가 민생의 아주 작은 구석까지 통제하며 초등학생까지 새마을운동 같은 국가적 사업에 동원한다. 그래서 가능해진 ‘압축성장’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그 같은 ‘유신의 모더니즘’은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전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회변화와 속도전을 경험하게 했다. 어느 석학이 말한 것처럼 이 산업화·근대화의 강력한 힘 앞에서 ‘모든 낡은 것은 공기처럼 흩어지고 녹아났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그때서야 처음 국가와 재벌의 위력을 제대로 체험하고 처음 공장에서 일하고 도시에서 살며 자본주의자가 돼 갔다.

흔히 박정희의 최대 업적을 경제성장과 근대화라 하지만, 그 기획은 비단 박정희의 것만도 아니었고, 경제성장과 근대화를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도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절대빈곤과 봉건시대의 낡은 것들에 비해서는 물론 좋은 것이겠지만, 다른 한편 그 자체로서 거대한 파괴와 또 다른 야만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뭔가 그렇게 빨리 축적되고 성장했다면, 그만큼 동시에 파괴되고 허물어졌다는 뜻이겠다. 유신 시대, 가족은 해체됐고 농촌은 무너졌다. 자살자도 대폭 늘어났고 범죄율도 높아졌다.

그러니 근대화는 하나가 아니다. 박정희식 근대화가 우리가 원한 것이었나? 그리고 박정희의 머릿속에 있던 ‘근대화’란 과연 무엇이었나? 박정희 자신은 메이지유신과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모방할 수밖에 없었던 문화적 지체와 개인적 교양 수준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정희를 성공한 근대화 혁명가로 만들고 보조한 것은 미국과 일본이 만들어준 국제적 환경, 그리고 박정희 주변의 또 다른 근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한편 일제강점기 이래의 ‘식민지 근대’가 키우거나, 아니면 1945년 이후 미국의 힘에 의해 급성장한 두뇌들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국의 근대화 추진세력 속에는 피눈물 나는 희생을 감내하면서도 근대화가 자기에게나 공동체에게 이익이 된다고 굳게 믿어준 민초들이 포함돼 있었다. 

■ 대중, 권력과 다른 방법으로 근대화에 참여

통치성에 자기통치자로서 대중도 연루된다. 권력과 엘리트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대중 또한 근대화에 깊숙이 함께 참여하고, 자신의 경험과 인식의 지평을 변화시켰다. 1960~1970년대를 거쳐 지금껏 성장해온, 민주주의와 대중의 힘을 생각하면 어쩌면 박정희나 그 독재 같은 것은 한낱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개항이나 3·1운동 같은 역사적 계기 이래, 한반도 주민 스스로가 근대화의 주역으로서 삶과 문화와 정치 모든 면에서 그렇게 능동적으로 삶을 변화시키고 바꾼 적이 없다. 그전에 근대화의 동력은 사실 외세나 위로부터 추동된 면이 더 많지 않았던가.

따라서 유신 시대 대중문화와 문화적 모더니즘의 성장은 결코 부차적이거나 2차적인 것이 아니었다. 1970년대의 대중문화는 더 다변화되고 폭이 훨씬 두꺼워졌다. 그것은 박정희의 탄압과 검열도 거스르지 못한 대세였다. TV와 라디오가 전체 국민들의 가정으로 보급되면서 일상의 문화는 물론 미디어와 인간의 관계 자체를 바꾸기 시작했다. TV 앞에 앉아 인생을 보내는 호모TV쿠스가 출현했다.

<선데이서울> 같은 새로운 대중적 읽을거리가 부쩍 늘어난 독서 공중과 함께 인기를 끌었다.

사회 전체가 보유한 교양의 폭도 달라졌다. 개발과 경제발전의 결과가 축적됐을 뿐 아니라, 20세기가 개막된 이후 축적되어온 배움을 향한 대중의 열망이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되고 실현되기 시작했다.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여공들이 다닌 산업체특별학급에서부터 탄압에 신음하던 대학까지 한국 지성사는 새로워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본격 예술이나 서구적이고 전위적인 문화도 함께 유신의 검열체제를 뚫고 성장했다.

유신의 모더니즘과 근대화의 경험은 서로 다른 층위의 욕망과 행동양식을 결합하기도 했다. 박정희 시대에는 민족적인 것과 전통이 새롭게 구성되었다. 공주의 무령왕릉이 발견되어 백제사가 새로 쓰여지고, 경주 개발과 함께 옛 신라의 천마총·황남대총이 발굴된 것도 1970년대의 일이다. 이충무공이나 신사임당도 박정희 정권 덕분에 새로 스타가 되었다. 말기의 박정희는 마치 반미주의자로 변신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유신의 독재가 미국식 패권이나 서구적 자유주의와 충돌했기 때문이다.

최근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유신 시절에 선포된 9개의 긴급조치 모두를 위헌 무효 판결했다. 또한 긴급조치 9호 위반 재심사건에서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은 ‘긴급조치’를 통해 이뤄진 박정희의 통치행위가 모두 ‘법 바깥’의 ‘예외상태’에서 이뤄진 위헌 행위라는 것을 법적으로 다시 판단했다. 그런데 이는 유신통치의 불법성을 보여주는 실례라기보다는 오히려 법의 무능함과 무용성을 보여주는 일 같다. 법은 법으로써 박정희 시대의 불법과 통치를 보족하고 보증해주지 않았던가. 박정희의 정치는 ‘법보다 주먹’이라는 명제에 충실하여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폭력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그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동의와 이데올로기의 기제도 다양했다. 그것은 단순히 ‘반공’이 아니었기에 어쩌면 깊이 우리의 습속을 좌우하고, 오늘의 정치체제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 개발·투기 열풍·창조경제, 70년대에 이미 나타나

오늘날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욕망과 과제가 1970년대에 벌써 괴물 같은 모습을 드러냈다. 잘 알려진 강남 개발과 투기 열풍, 그리고 토건자본의 성장뿐만 아니라 ‘창조경제’의 엄마 아빠들이 그때 나타났다. 공고와 공과대학, 기능올림픽이 대접을 받았다. 우리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대통령을 모신 것도 그 바람 덕분이다. ‘국민행복’의 아이디어도 박정희시대에 뿌리를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의료 자본주의에 힘입어 복지국가와 전 국민 의료보험 담론이 나왔다.

오늘날 글로벌대기업이 된 재벌들도 박정희 시대에 죽순처럼 쑥쑥 잘 자라났다. 언제나 재벌 위주의 경제정책을 폈지만,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담론도 박정희 시대의 말기에 수입되기 시작했다.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자유민주주의와 정치적으로는 대립하는 것 같았지만, 본질적으로 부자와 특권층 중심 경제의 수호자였던 박정희식 정치야말로 한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창조자이기도 했다.

■ 그럼에도 우리는 민주주의자로 성장

우리는 유신의 아들딸이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가 이미 보여준 것처럼, 우리 아동·청소년기는 유신의 학교에서 유신의 선생들이 휘두르는 주먹과 말도 안되는 체제선전으로 얼룩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민주주의자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전태일과 김상진도 있었지만, 사실 어린 우리는 그들을 잘 알지는 못했다. 중대한 사건들은 유신의 검열관들이 다 감춰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신 서울의 공기가 너무 답답해서 옷을 홀랑 다 벗고 종로 거리를 내달린 스트리커(나체질주자)나,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든가, “왜 불러? 왜 불러?” 같은 안타깝고도 건방지게 들리는 노랫말이나, 미스터리로 감춰진 모호한 사건들로부터 우리는 어딘가에서 저항이 꿈틀대고, 박정희의 체제가 겉과 달리 불안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1979년 10월, 부산ㆍ마산의 항쟁과 궁정동의 총소리가 들렸을 때 우리는 여전히 어렸지만, ‘결국 올 것이 왔다’는 것을 알았고, 18년 독재와 늙은 왕이 사라진 자리에 거대한 새 꽃이 필 거라는 것쯤은 예감할 수 있었다.

한 시대는 그런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유신 시대의 모더니즘과 산업화는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집단적 새 경험이자 길의 출발이었다. 그래서 긴긴 성찰의 대상이다.

<대표집필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2) 박정희,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근대화의 역설, 대중은 박정희의 성공을 욕망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만큼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도 없다. 장장 18년 5개월 열흘이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있었다는 시간의 무게 말고도 그가 대통령으로 행한 모든 것이 우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이해하지 않고서 한국 사회를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박정희의 의미는 정치권이나 학계의 논쟁 대상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무당의 몸주신이 된 몇 안되는 역사적 인물이다. 몸주신의 자격은 크게 원한과 힘, 두 가지로 압축된다. 몸주신 중에는 남이, 최영 장군이 유명하지만 왕신으로 불리는 단군, 태조, 사도세자, 단종도 있다. 이들은 위대한 힘을 가진 영웅, 억울하게 죽어 원한에 찬 영웅으로 구분된다. 원한은 비슷한 체험을 반복한 사람들에게 강렬한 동일시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강력한 힘이다. 보통사람들이 없는 거대한 힘과 위력으로 원한을 해결해줄 수 있는 절대적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박정희는 비극적 죽음과 절대권력자였다는 점에서 두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 마오쩌둥이 중국 보통사람들의 수호신이 된 것처럼 박정희를 몸주신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일부 무당들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전근대적 민속신앙의 몸주신이 된 것은 근대화의 결과였다. 농촌근대화로 규정된 새마을 운동을 통해 미신 타파를 부르짖고 각종 민간신앙을 대대적으로 몰아냈음에도 그는 5000년 가난을 몰아낸 영웅으로 재현된다. 요컨대 박정희는 이미 현대의 신화가 되었고 그 한복판에 근대화가 놓여있다. 

억울한 죽음으로 원한에 찬 영웅이자 보통 사람들이 넘보지 못하는 강력한 힘을 가졌던 박정희 대통령은 대다수 한국인에게 신적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박정희 신화의 처음과 끝, 수직적 근대화

사실 근대화는 박정희 이전부터 중요한 화두였다. 개항 이래 엘리트 지식인들의 오래된, 그러나 좌절된 욕망이었다. 그 좌절은 거의 모든 엘리트 지식인들이 서구 근대에 대한 강렬한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박정희 체제는 이 좌절된 욕망을 국가 프로젝트로 구성하고 강력한 추진력으로 실물화시켰다는 점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즉 근대화는 더 이상 소수 엘리트 지식인이나 제한된 영역에 국한된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전사회적 현상이 됨으로써 모든 주민집단의 삶과 의식을 뒤흔들어 놓았다. 

박정희 신화의 핵심은 근대화, 다시 말해 경제개발이었다. 산업화는 경제적인 것을 특권화하는 과정이었다. 경제가 모든 영역을 압도하면서 가장 중요한 차원으로 상승했고, 이는 ‘경제적 욕망의 정치’가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전근대 사회가 신분제적 격벽과 토지긴박을 통해 ‘안정’에 치중했기에 ‘안분지족’과 ‘금욕’을 강조했다면, 근대사회는 만인평등의 자연상태를 가정하고 능력별 위계서열화를 내세웠기에 욕망의 경쟁을 통한 사회적 유동성을 강조했다. 이는 곧 수직적 승강운동이 새로운 원리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박정희 본인이 근대의 놀라운 성공사례였다.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지존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의 전형이었다. 그의 성공적인 근대 체험은 수많은 대중을 근대화로 이끌 강렬한 유혹이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조건을 달고 태어난 박정희가 신화적 인물이 된 결정적 계기는 교육이다. 

그의 학력은 구미보통학교(1926~1932), 대구사범학교(1932~1937), 만주군관학교(1940~1942), 일본 육사(1942~1944), 조선경비사관학교(1946) 등으로 정리된다. 이상의 교육과정을 보건대 박정희는 당대 최고 수준의 근대교육을 이수한 셈이었다. 요샛말로 화려한 스펙을 쌓은 셈이다. 박정희는 우수한 성적과 품행을 바탕으로 보통학교 시절부터 급장이라는 권력 정치를 익혀나갔다. 그의 급장 시절은 어린이로 보기 힘든 승부근성과 권력의지로 요약된다. 같은 반 동기생의 기억에 따르면 성품이 몹시 독한 데가 있었고 그로부터 맞아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 정도였다. 또한 박정희는 힘이 세고 말을 잘 들어먹지 않는 급우 한 놈을 산술 숙제를 도와 내 말이라면 무조건 굴복하게 만들 줄 아는 학생이었다. 

무엇보다 급장 박정희는 급우를 수평적 벗이 아니라 수직적 통제대상으로 생각했다. 박정희는 평생 수평적 관계에 대단히 취약했는데, 보통학교 급장 이래 상하관계가 분명한 세계에 익숙했다. 수직의 세계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꼭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무한대의 상승운동을 반복하는 것이었고, 박정희는 그 동력을 힘과 능력으로 파악했다. 힘과 능력의 제도적 형태가 권력이라면 그는 대단한 권력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는 대구사범학교 시절의 우울과 군관학교행이라는 결단으로 이해 가능하다. 박정희의 사범학교 시절은 꼴찌를 맴돌았던 성적, 외톨이 생활 그리고 음울·불성실·불평 등으로 기록된 조행평가로 요약된다. 이 우울은 좌절된 욕망과 관련이 있다. 사범학교는 이민족 정복자 일본인과의 조우와 경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고, 박정희는 수직운동의 막다른 골목에서 식민지적 우울을 경험한 것이었다. 

박정희의 선택은 만주군관학교행이었다. 군인의 길은 집안의 기둥이었던 셋째 형 박상희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된 박정희의 주체적 결단이었다. 이 단계에서 박정희는 이미 가족과 고향을 떠나 수직세계의 주체로 진입했다. ‘모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경구가 횡행하던 세계전쟁의 시대에, 폭력의 감수성을 갈고 닦았던 소년의 길이 군인으로 연결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만주군관학교에서 박정희의 성적은 사범학교 때와는 달리 최상이었고 모범적인 생도가 되었다. 다시 한 번 성적이 그의 상승운동의 핵심 동력이 되었고, 최고 권위의 일본육사에 편입할 수 있었다. 

수직의 질서를 통한 박정희의 근대 체험은 화려한 성공이었음이 분명했다. 이것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중요한 배경이자 근대화 프로젝트를 저돌적으로 추진하게 된 동력이다. 그것은 한때 거의 모든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 대통령으로 수렴되었던 기억을 되살리게 만든다. 그의 개인적 성공은 국가적 성공담과 결합되어 양자를 아우르는 설득력 높은 서사 구조를 이루었다. 개발연대의 추억은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야만 했던 국민의 교육용으로 제격이었다.


■ 국민에 복종 강요한 지식과 권력의 결합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박정희의 놀라운 성공은 거대한 실패와 짝을 이루는 것이기도 했다. 그가 성공적으로 체험한 근대는 주로 기술의 근대였으며 해방의 근대와는 별로 인연이 없었다. 그를 보고 “공기 대신 애국애족을 호흡하는 것 같았다”는 한때의 술친구 이병주의 회고는 박정희의 인식론적 뼈대를 확인시켜 준다. 이병주에 따르면 국수주의자들이 일본을 망쳤다는 황용주의 말에 박정희는 “천황 절대주의와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라고 반문하면서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일본 국민의 저변에 흐르고 있기에 오늘의 일본이 가능했다”고 반박했다. 

이 얘기는 1950년대 말경의 일이었는데 박정희의 인식은 이미 식민시기에 그 기본 틀이 확립되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군 경력으로 일관한 그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전향적 태도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짧았던 남로당 경험도 철의 규율과 조직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강조하는 것이었기에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삶 속에는 식민시기에 체득한 일본의 파시즘적 경향을 역전시킬 만한 구체적 계기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가 구축한 체제는 중앙정보부를 위시한 폭력적 국가장치와 촘촘한 관료제, 냉전체제를 조건으로 한 반공 이데올로기와 안보담론 그리고 개발주의와 민족주의를 통한 동원체제였다. 한마디로 기술의 근대를 집약한 체제였고 그 정점은 유신체제였다. 그리고 이 체제를 작동시키기 위해 집권 초기부터 ‘교수정치’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지식인들을 대거 동원해 말 그대로 지식과 권력의 결합을 추구했다. 


고려대 창립 60주년(1965년)을 맞아 박정희 대통령이 쓴 휘호 ‘조국근대화’.




이에 포퓰리즘적 대중정치가 덧붙여졌다. 그것은 특히 집권 초기에 두드러졌다. 1963년에 출간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박정희는 “1% 내외의 저 특권 지배층”에 대하여 “증오의 탄환을 발사”하자는 과격한 주장을 펼쳤다. 이런 대중정치는 그전까지 유례를 찾기 힘들었다. 이승만은 왕족 의식이 대단했고 윤보선은 명문 귀족출신이었다. 이에 반해 박정희는 빈농의 아들임을 강조하면서 서민으로 죽겠다고 공언했다. 밀짚모자를 쓴 그가 농민들과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이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물론 이런 대중정치는 정권 후기로 가면서 후퇴했다. 특히 유신체제 성립은 대통령 선거라는 대중정치 공간을 아예 없애버렸고 새마을 운동이라는 대중동원과 장발 단속이라는 대중통제가 등장했다. 대중정치의 실패는 쓰디쓴 원한을 남겼다. 10·26사건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해방의 근대를 호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한 김재규의 대의명분은 다름아닌 자유민주주의였다. 

조갑제에 따르면 박정희는 ‘봉건과 싸우다 전사한 근대화 혁명가’였다. 앞서 보았듯이 그는 기술의 근대성을 개인적·국가적 차원에서 성공적으로 실천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를 근대화의 순교자라 부르는 게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근대화의 사도라면 그가 이끌고자 했던 어린 양들은 어떠했을까.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을 최대한 증폭시켜 거대한 수직 승강운동을 촉발시킨 경제개발은 시장의 자유가 난무하는 세상으로 연결되었다. 이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이어졌고, 자유주의를 극단적으로 혐오했던 박정희에게 그것은 체제를 위협하는 ‘서구적 타락’, ‘현대사회의 병폐’에 다름 아니었다. 박정희는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변했지만, 그렇게 순진한 국민적 주체는 현실에 존재하기 힘들었다. 대중은 박정희의 욕망보다 그의 성공을 욕망했다. 그것은 수많은 ‘박정희들’이 양산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 적자생존의 희생자이면서도 ‘정글’의 회복 열망

박정희는 우리시대의 어떤 욕망을 먹고 자란다. 박정희 체제기에 폭발적으로 높아진 사회적 유동성의 기억은 비록 퇴행적인 것이라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삶의 희망처럼 여겨진다. 생존과 출세를 위해 개인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상식이 되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적자생존을 법칙으로 승인하면서 자신이 적자생존의 희생자가 됨에도 불구하고 정글의 풀이 무성하기를 열망하는 경제적 초식동물을 양산했다. 박정희는 육식동물이 되고자 하는 모든 초식동물들의 불가능한 꿈일는지도 모른다. 그 꿈이 좌절되는 지점에서 박정희는 몸주신으로, 일그러진 영웅으로 다시 등장할 것이다.

<황병주 |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3) 전태일, 열사 그리고 김진숙의 외침

새 세상 꿈꾸는 노동자들의 영원한 영웅 ‘전태일’

지난 7월, 학생들과 함께 ‘made in 창신동’ 전시를 보러 갔다. 이제는 사라져 가는 창신동에는 전태일과 시다들의 기억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전시장 한구석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병철은 전시 안 하고 전태일만 전시하남….” 그분에게 창신동의 기억과 전태일은 여전히 불편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박광수 감독이 만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이다. 전태일을 역사화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만든 이 작품을 보고 뭔가 개운치 않았다. 지식인의 보호와 배려 대상으로 그려진 여성노동자에 대한 이야기가 편치 않았던 것이다. 물론 지식인 친구를 그토록 원했던 전태일과 이에 대한 지식인들의 부채의식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전태일 주변 여성노동자들이 그런 식으로 묘사되는 것은 불만스러웠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1990년 상영된 독립영화 <파업전야> 이야기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주인공이 기계를 끄고 스패너를 들고 공장 밖으로 달려 나가는 장면이다. 주인공 한수가 든 스패너는 1980년대 노학연대의 상징인 동시에,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 노동운동이 지향한 ‘노동자상’이었다. 이런 3가지 에피소드처럼 우리들 안에는 ‘여러 개의 전태일’이 있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라 노동자의 상징이자 열사로 자리매김한 전태일을 1970년대 산업화 과정의 어두운 그림자의 한 자락으로만 남겨야 할까. 사진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내에 재현된 1970년대 봉제공장 세트. | 박민규 기자 parkyu@kyunghyang.com


■ 전태일 열사, ‘유신’ 속의 전태일

창신동 인근, 과거 평화시장 주변을 덮었던 전태일의 삶의 공간은 전태일의 분신에 관한 기억이 역사화되면서, 노동자들에게 잊혀지기 어려운 장소였다. 청계피복노동조합가 데모할 때면 이곳에서 시작하곤 했다. 1958년 청계천 복개 이전부터 수차례에 걸친 화재 발생과정을 거쳐 1962년 2월에 시장개설 허가가 나왔다. 평화시장, 통일상가 그리고 동화상가는 당시 의류 내수시장의 80%를 차지하며 가난한 시절을 감싸안았다. 내수 의류를 거의 이곳에서 공급했기에 상가 내에 있던 공장들은 점차 상가 밖으로 밀려나 창신동 인근 건물과 주택까지 파고들었다. 이소선 여사의 투쟁, 청계피복 노동교실을 지키기 위한 목숨을 건 9·9투쟁, 청계피복노조 정상화 그리고 1980년 신군부의 강제적 해산 이후 투쟁 등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다만 유신 시절에 전태일의 죽음, 그리고 열사로서의 의미가 1980년대와 같진 않았다. 1970년대 전태일은 교회의 추도 형식을 띤 예수의 부활이나 민중의 한 등으로 이야기됐다. 1970년대 당시 반유신에 앞장섰던 함석헌, 도시산업선교회 지식인들은 전태일의 분신을 이웃을 위해 자기 자신의 목숨을 바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해했다. 바로 주위의 어렵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보호해준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태일에게 중요한 것은 여공들을 보호해주는 것이었다. 소녀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미싱을 돌리고 가위를 잡고, 희미한 눈동자로 잠을 참는 비참한 노동환경이 그녀들의 삶의 공간이었다. 전태일이 쓴 글을 모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에는 당시 비참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아이롱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으니 정말 죽고 싶다. (…) 육체적 고통이 나를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고통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없어도 좋겠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청계피복노조, 동일방직, 원풍모방,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터 등 민주노조가 만들어졌다. 유신정부, 고용주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던 한국노총에 맞서 이들은 최대로 힘을 내서 싸웠다. 그 과정에서 전태일이란 세 글자는 노동자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전태일에게 대학생 친구가 되지 못했던 지식인들에게는 ‘연대’ 혹은 ‘부채’라는 이름으로 계속 남았다.

■ 전태일, ‘열사’로 살아나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은 이후 1980년대로 이어지는 열사의 시작이었다. 자신의 몸을 불살라 죽는 분신은 다른 사회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저항 방식’이었다. 힌두교에서 사티(suttee)와 같이 과부가 남편의 시신을 화장할 때 자신의 몸을 던져 죽는 순사와 달리, 한국에서 분신이 지닌 저항적 의미는 변화를 추구하는 강력한 열망에도 지배권력의 압도적인 폭력성으로 인해 이를 실현할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할 때, 약자가 최대한의 도덕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무기였다.

전태일 이후 열사란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됐다. 한국에서 일어났던 분신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은폐된 자살이 아닌 공개된 자살이자,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군중을 의식한 점이다. 이처럼 분신과 열사가 잇달아 일어나며 그 안에 ‘열사 전태일’의 이름이 각인되기 시작했다. 1986년 신흥정밀에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를 철회하라, 노동3권을 보장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박영진 열사도 죽어 가면서 “전태일 선배가 못다 한 일을 내가 하겠다. 1000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전태일이 1000만 노동자의 상징이자 열사로 자리 잡은 본격적 계기는 1988년 11월13일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에서였다.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하던 시절의 전태일



당시 분위기를 한 노동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난해 11월13일 전태일 열사 추모일의 그 장엄한 광경을 (…) ‘노동악법 철폐하고 노동해방 앞당기자’ (…) 전태일은 그렇게 살아 있었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우리 노동자의 투쟁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지 달려가 그 한가운데 서서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형제들이여! 내 죽음을 결코 헛되이 하지 말라’고….” 이를 반영하듯 1988년 전국노동자대회를 정점으로 거의 모든 노제의 시작은 “전태일 열사여”로 시작될 정도로 열사 일반, 노동열사로서 전태일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컸다.

노동자들은 ‘나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란 등사물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켰으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전태일의 유언은 분노와 각성의 계기가 됐다. 또 학교시절 교사로부터 들은 전태일 이야기가 이후 학생운동, 노동현장에 들어가게끔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되기도 할 정도로 전태일에 대한 신념은 종교에 가까울 정도였다.

열사에 대한 애도와 일체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각종 운동의례로 드러나기도 했다. 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을 기점으로 열사에 대한 거리노제, 걸개그림, 깃발, 만장, 대형 이동그림, 열사 영정 등을 통해 열사의 영웅화가 계속됐다. 해방 직후 김구 장례식에서 볼 수 있었던 노제가 1980년대 전태일과 그 후예들에 의해 복원된 것이다. 1988년에 제작된 <노동해방도>(최병수 작품)는 대형 앰프 위에 배치된 3명의 노동자를 통해 전태일의 후예들이 지향하는 노동자상을 그려냈다.

바로 전태일 열사는 한 가족의 자식이 아닌 ‘천만 노동자의 아들’이자 죽음을 통해 노동운동의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는 ‘영웅’으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또 전태일과 그 이후 노동열사들의 죽음은 열사만의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열사의 죽음을 둘러싸고 존재하던 폭력의 공포를 극복하고 자신의 신체, 언어 등을 열사의 것과 ‘일체화’시킴으로써 열사의 죽음을 목격한 역사의 증언자로 자신을 변모시키고자 했다.

■ 전태일, ‘역사’가 될 것인가? 

다시 평화시장, 창신동으로 돌아와 보자. ‘made in 창신동’ 전시 공간에는 민중가요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의 ‘사계’가 울려 퍼졌다. 그 주변에는 복원된 다락방, 미싱, ‘시다 구함’이란 전단지 등이 전시됐다.

문득 든 생각은 전태일은 ‘과거의 역사’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었다. 1970년 어린 여공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랐고, 1980년대 노동운동의 상징이자 노동자들이 바랐던 인간형이었던 전태일을 우리는 1970년대 산업화 과정의 어두운 그림자의 한 자락 혹은 어두운 시대의 아이콘으로 남겨야 할까? 1980년대가 전태일을 한 사람의 노동자가 아닌 열사와 그를 따랐던 투사로 만들었듯이, 1970년 전태일의 유서와는 다른 세계를 우리는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을 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하던 김주익의 죽음의 방식이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 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음으로 깨지는 겁니다. (…)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김진숙, ‘전태일과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김주익 열사 추모사’ 중에서)

2003년 김주익 열사를 보내며 한 김진숙의 이 외침에 눈물로만 답해서는 안되지 않는가.

<김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4) 선데이서울과 유신시대의 대중ㆍ독재권력 시대 억압의 탈출구, 대중의 ‘날욕망’


■ 주간지 전성시대

‘선데이서울’은 지금까지 선정적 대중잡지의 대명사로 통한다. 그 덕에 ‘선데이서울’이 전거가 되기라도 하면 어떤 말씀이든지 단박에 품위가 떨어진다. 주간지 자체가 저급한 잡지로 몰린 데에는 ‘선데이서울’의 공이 크다. 선정, 음란, 외설을 지나 쇼킹과 엽기까지, 대중의 온갖 하위문화적 코드들이 ‘선데이서울’이란 다섯 글자 안에 응축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선데이서울’이 대중잡지의 대명사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독자의 열망이 이 한 권의 주간지 속에 모두 담겨 있음을 뜻하는 게 아닐까. 한 분야의 대명사가 되었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선데이서울’이 한국 주간지의 시초는 아니지만 한국 주간지를 대표하는 것은 분명하다. 1968년 7월 주간지를 발행하지 않기로 한 협약이 해소되자 각 신문사들은 앞다퉈 주간지를 발행하기 시작한다. ‘주간중앙’을 필두로 ‘선데이서울’ ‘주간경향’ ‘주간여성’ 등이 몇 달 동안 쏟아져 나왔는데, 결과적으로는 ‘선데이서울’이 단연 최고 수준에 올랐다. 



‘선데이서울’로 대표되는 1970년대의 대중잡지들은 성적 욕망과 환상을 과감하게 담아내면서도 보수적 도덕관을 전파하는 이중성을 띠었다. 사진은 영인본으로 남은 1970년대의 ‘선데이서울’. |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대중 주간지는 처음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대중오락 잡지를 표방한 주간지는 곧장 음란, 외설 논란에 시달렸다. 대학생들은 주간지를 불태우면서 불매운동을 펼쳤고, 국가의 검열제도는 실질적으로 위협을 가했다. 

1969년 월간지 ‘아리랑’과 ‘인기’가 검찰에 기소되는 상황에서 주간지의 선정성은 1970년대 내내 검열의 최대치를 시험해왔다. 그러나 곡절 속에서도 주간지는 1970년대 대중의 정서를 대변하는 가장 대중적인 매체로 이 시기를 가로질렀다. 여기에는 도시와 농촌의 근로청년뿐만 아니라 대학생도 포함됐다. 그야말로 1970년대는 주간지의 전성시대였다. 

잡지란 읽을거리가 가득 쌓여 있는 텍스트의 보고다. 잡지는 신문에 비해 양과 깊이에서 훨씬 요긴한 읽을거리를 품고 있다. 월간지나 계간지의 수준 높은 정보는 지식인의 요구에 부응한 결과다. 1960년대 말 이후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이 한국의 비평계의 새 흐름을 주도했다. 1980년대 무크지가 시대의 억압을 견딘 것도 마찬가지다. 잡지는 글을 싣는 매체이면서 담론이 모여드는 사상의 저수지 역할을 한다. 

그런데 1970년대에 태동한 주간지는 어떠했을까. ‘선데이서울’을 위시한 대중주간지는 고담준론은커녕 한번 읽고 버려도 무방한 기사, 사상의 아카이브가 될 수 없는 통속적 글로만 채워져 있다. 그래서 주간지에는 대중의 다양한 욕망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인다. 대중은 주간지가 그려내는 값싼 판타지를 소비하며 일상속에서 허름한 정체성을 확인하고 동질감에 안도한다. 주간지는 ‘선데이’의 가벼운 유흥 이상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이것이 대중문화에서는 핵심적인 사건이 된다. 주간지보다 대중의 정체성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매체가 있을까. 이미 화보가 다 뜯겨나간 ‘선데이서울’을 사료로서 넘겨보는 이유는 그 속에서 1970년대를 살아온 대중의 정체와 욕망을 짚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대중적 욕망과 성

경제성장이 가시화되자 바야흐로 한국에도 대중사회가 도래했음을 곳곳에서 선포한다. 그런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대중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대중인가. ‘선데이서울’을 통해 본 1970년대 대중의 한 국면은 성(sex)이다. 전후에서 1960년대까지를 아울렀던 ‘명랑’ 이데올로기는 ‘성’이라는 자극적 대상에 의해 소멸된다. 

‘3S정책’은 5공화국의 전유물 같지만, 실은 1970년대 ‘선데이서울’에서도 충실히 활용됐다. 스포츠, 영화 그리고 성을 빼놓고는 잡지를 말하기 어렵다. 화보 여배우의 도발적인 육체는 검열관과 대중 모두를 시험에 빠지게 했다. 배우나 탤런트, 가수, 그리고 스포츠스타의 자잘한 동정이 과장된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연예계 이면에 대한 집요한 관심은 지금의 수준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이들의 이야기는 간통과 불륜의 드라마로 이어지면서 정점에 달한다. 간통 재판 기사는 당대 최고의 특종으로 몇 회에 걸쳐 집중적으로 파헤쳐진다. 화보에서 여성의 육체를 대할 때와 같이 연예기사는 안 봐도 뻔하다는 듯한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연예인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즉 낮 시간의 주부, 고고클럽을 드나드는 여대생과 여공 그리고 전문직이랄 수 있는 마담, 호스티스에게까지 미친다. 주간지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1970년대 대중의 새로움이란 시대 요구에 맞게 분출되고 소비되는 성에 의해 증명되는 것 같다. 

1970년 정부의 윤리위원회는 음란성의 기준을 들고 검열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는 ‘성적 수치심’과 ‘성적 흥분’이란 말이 여기서 시작되거니와, 그 기준이란 형편없이 자의적이다. 예컨대 미니스커트 단속기준이 “속옷이 비치는 칠칠치 못한 여자” “경찰이 보기 민망스러운 아가씨” 등 판단을 포함하는 상황에서 통제의 합리성을 찾기는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선데이서울’의 화보는 대중의 선택을 이끌었고, 통제 권력은 대중의 선택을 적당한 선에서 존중해 주었다. 이는 주간지의 이중적인 태도가 통제 권력과 적절히 호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데이서울’의 ‘쇼킹화제’ ‘놀랐지 정보’만 보면 한국 사회는 온통 성해방에 도취된 듯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간지는 건전 코드를 이에 적절히 버무려놓는다. 가정주부와 청춘남녀에게는 화목한 가정으로 돌아가도록 타이르고, 호스티스와 마담에게는 건실한 직업의식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이 같은 성적 올바름은 ‘선데이서울’이 표방한 선정성과는 모순되지만, 성적 유흥의 허용되는 대가로 지불되는 최소한의 포즈이기도 했다. ‘선데이서울’은 이 아이러니를 ‘딸자랑’을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포장했다. 학자에서 사업가, 예술인, 정치인에 이르는 사회 저명인사의 딸을 소개하는 ‘딸자랑’의 화보가 비키니 화보나 거리의 관음적 ‘도촬’과 나란히 놓인 장면은 퇴폐와 순결이 혼재된 1970년대의 한 풍경으로 도드라져 보인다. 

부에 대한 열망 - 성공 이데올로기

주간지의 또 다른 관심은 말 그대로의 ‘돈’이었다. ‘신동아’ ‘세대’ 등 종합교양 월간지와 달리, 주간지는 어떤 수사적 표현도 배제한 채 돈 버는 일에 집중한다. ‘차관’과 ‘재벌’이 월간지의 경제문제 키워드였다면, 주간지의 관심은 ‘부자’가 핵심적 주제였다. ‘선데이서울’의 초창기에 연재된 ‘예비재벌’은 대중의 열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재벌이 경제문제로 부각될 때 평범한 대중은 재벌의 비리나 국가 경제를 걱정하는 대신, 어떻게 우리도 그들처럼 부자가 될 수 있는지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진다. ‘예비재벌’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재벌처럼 돈을 번 사람들이다. 중소규모 상공인과 자영업자가 다수였지만 공무원이나 교직원, 종교인, 나아가 돈깨나 만진다는 마담들도 예비재벌의 목록에 이름을 올린다. 이들은 하나같이 ‘맨주먹’으로 떨쳐 일어나 남이 부러워할 부를 축적한 입지전적 인물들이다. 몇 년이 지난 후 이들 중에서 준재벌의 수준에까지 오른 이들도 많았으니 이들은 곧 대중의 선망 대상 혹은 역할 모델이 되었다. 

부가 이 시대의 미덕이 되고, 부에 대한 열망이 인정받자, 부를 선취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은 결과로써 정당화된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돈을 모을 수만 있다면, 그 과정의 작은 비위는 ‘선데이서울’에서만큼은 문제 삼지 않는다. ‘쇼킹화제, 집 사고 차 산 구두닦이 4형제’(1971·1·31)는 가난한 형제의 미담을 전하는데, 기사의 핵심은 그들이 큰돈을 모았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 등장한 땅투기, 고리대금, 식비·하숙비 착취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성공비결로 여겨진다. ‘선데이서울’이 발굴해낸 수많은 성공담들은 1970년대 개발과 성장의 비열한 신화와 너무나 닮아 있다. 

최소한의 포즈도 없는 성공 이데올로기의 맨얼굴 앞에서 공식적인 윤리적 규범은 작동하지 않는다. 실상 ‘선데이서울’을 포함한 대중잡지에 등장하는 규범들은 스스로 그 규범을 무화시키는 모순을 노출한다. 예컨대 여성들의 성적 일탈을 질정하는 윤리적 규범이 잡지의 곳곳에 표면화되어 나타나지만, 한두 페이지만 넘기면 곧 여성의 성감대를 가르쳐주며 어떻게 잘 놀고 즐길 것인지를 상세히 알려준다. 가난이라는 좌절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두고 한껏 동정하고 위로한 뒤 곧바로 재벌을 향한 부러움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두 모습 모두 대중의 실체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을 만큼, 대중의 정서에는 두 가지의 감정이 혼재되어 있다. 모호한 윤리의식에 정체성을 의탁하는 동시에 통속적인 욕망에도 충실한 것이 대중적 욕망의 참모습이다. 


■ 권력과 욕망의 사이

‘선데이서울’이 보여준 대중의 욕망은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킨 듯이 보이지만, 문제는 거기에도 권력의 억압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문화에 드리운 그림자는 유신체제의 실질적인 힘이다. 1975년을 기점으로 한국 대중문화의 활력은 한풀 꺾이면서 권력과의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대마초 파동같이 직접적인 제재도 있었으며, 긴급조치 같은 초법적 권력에 의해 대중의 의식 자체가 억압당하기도 했다. 이 시기 ‘선데이서울’에도 관변 기사들이 눈에 띈다. 육영수 여사 1주기 특집기사에서 백리 길을 걸어와 매일같이 참배했다는 노인이 등장하는가 하면, ‘배신자 김형욱’을 비난하는 연예계 인사의 공개 발언이 소개되기도 한다. 1980년에 이르기까지 이 어색함은 가시지 않았다. 1980년대 이후 ‘선데이서울’은 제 역할을 잃어갔지만, 1970년대 대중성의 기원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통제와 억압에 현실적으로 대응해 간 대중의 날욕망은 지금껏 이어져 온 것이 아닌가. 그래서 ‘선데이서울’의 선정성도 변함이 없다.


<김성환 |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HK교수>




(5) 유신·신자유주의 그리고 하이에크 - 욕망이라는 이름의 ‘경쟁열차’


유신체제 붕괴가 1년 남짓 남은 1978년 9월9일 오후, 김포공항에는 귀빈을 넘어 ‘진객’으로 불린 팔순의 노경제학자 한 명이 홍콩으로부터 막 도착했다. 그의 이름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F A von Hayek). 주지하듯이 그는 밀턴 프리드먼과 함께 20세기 신자유주의의 최고봉을 이루는 헌신적인 자유지상주의자로,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으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20여년간 지속되던 케인지안 시대의 종결자가 되어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만개를 알린 인물이었다. 최고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그가 최악의 반자유주의적 유신 국가를 방문한 까닭은 무엇일까.

■ 경제개발이 불러 온 사회·문화적 자유주의 


어느덧 시대의 총아가 된 자유주의를 키워드로 1970년대를 검색해보면 무엇이 나올까. 먼저 정치 영역에서는 자유주의와 반자유주의가 짝을 이루어 나타난다. 1970년대 정치와 운동을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이해하는 것이 지배적이지만, 그 내용은 사실 자유주의 대 반자유주의의 성격이 짙었다. 1975년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전격 처형에서 보이듯이 상궤를 벗어난 체제의 살벌함은 수많은 지식인들을 민주화 운동으로 몰아갔고 그들이 붙잡은 핵심적 가치가 곧 자유주의였다. 사상·양심·언론·출판의 자유와 함께 인권이 저항운동의 마르지 않는 이념적 저수지 역할을 했다. 요컨대 자유주의라 쓰고 민주주의라 읽은 셈이었다.

사회·문화 영역에서도 자유주의는 상당량의 검색 결과를 보여줄 터였다. 이른바 ‘통블생’과 장발로 대표되는 청년층의 대중문화 흐름은 서구 자유주의와 긴밀히 연동되는 것이었고, 문단의 자유주의를 상징했던 ‘문학과지성’이 1970년 창간됐다. 유신체제는 이런 흐름을 ‘서구의 노라리풍’이라고 노골적 경멸의 시선으로 응시했으며 ‘빠다에 버무린 깍두기’라는 민족주의적 비아냥도 들려왔다. 요컨대 개인에 눈뜨고 개인의 자유를 열망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유신의 한복판에서 대거 출현한 셈이었는데, 실상 이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체제가 명운을 걸고 추진한 경제개발이었다. 산업화에 따른 도시화, 서구화 그리고 대중사회화가 기본 배경을 이룬다고 본다면 자유주의는 유신의 사생아일 것이다.

그런데 시장의 자유주의는 어떠했을까? 경제 유신으로 불리는 8·3 조치나 중화학공업화 등은 박정희가 총사령관이 돼 추진한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으며 아무래도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사실 유신체제가 하이에크의 방한을 반겼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8박9일의 짧지 않은 체류기간 중 그가 만난 정부 고위 관료는 최각규 상공장관 정도였고 환영 만찬장에도 정부 측 인사들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매일경제와 동아일보가 하이에크 방한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동아일보는 특파원을 동원해 홍콩에서부터 하이에크를 취재했는가 하면 조순, 김입삼 등과의 대담까지 마련하는 등 정성껏 대우했다. 

■ 신자유주의자 하이에크를 초정한 전경련

하이에크를 초청한 주체는 다름 아닌 전경련이었다. 전경련이 그를 초청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세계적 석학이라는 것이 한 이유였을 것이다. 노벨상으로 상징되는 서구 지식체계에 대한 한국 사회 및 엘리트 지식인들의 오래된 콤플렉스를 생각한다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전경련이 이런 이유만으로 그를 초청할 리는 없었다.

하이에크의 핵심 키워드는 자유, 경쟁, 시장으로 요약됐다. 그의 기본 입장은 개인에게 모든 지식이 축적될 수는 없기에 분산된 지식이 시장에서의 자유경쟁을 통해 최선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최악의 시장이 최고의 계획보다 낫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개인적 자유를 보증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기관’에 불과하고 ‘국가의 감시 아래 있는 시장 대신 시장의 감시 아래 있는 국가’가 목표였다. 그는 또한 경제적 자유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는데,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 또한 경제의 자유를 통해 가능한 것임을 주장했다. 하이에크가 방한 도중 중앙은행의 발권기능 폐지와 민간은행의 자유 경쟁을 주장해 대담자를 당황시켰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1978년 9월 방한해 최각규 상공장관, 전경련 관계자들과 만난 신자유주의 이론가 하이에크


하이에크의 방한은 확실히 신자유주의의 좋은 계기였다. 동아일보는 “자유의 고귀함을 깨닫게 되고 민간 창의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하이에크의 내한은 이 이상 값진 것이 없을 것’이라고 했는가 하면, 당시 친정부지였던 경향신문의 ‘정경문화’ 1978년 9월호에는 “자유사회인 한 경제발전의 주인공이 민간기업이지 정부의 계획당국이 아니라는 점은 너무 당연한 이치”라는 주장이 나타났다.

하이에크 방한에 즈음한 1970년대 중·후반의 자본은 확실히 국가권력의 입만 바라보던 왕년의 그들이 아니었다. 1973~1978년 사이 46대 재벌이 국내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8%에서 17.1%로 높아졌다. 커진 덩치만큼이나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전경련 회장으로 하이에크 초청의 주역이었던 정주영은 1978년 12월28일 국무총리 초청 간담회에서 정부의 전환기적 결단을 촉구하면서 민간이 담당할 수 있는 부문은 민간에 넘겨 자율성을 부여하고 시장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9년 1월17일에는 경제 4단체장과 경영자협회장이 신현확 부총리를 초청해 ‘관·민 합동간담회’를 개최해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한 가격정책, 금융기관의 자율적 운영, 자율적 임금 결정 등을 요구했다. 

재벌은 무소불위의 유신체제에 거리낌없이 자신들의 주장을 압박했는가 하면, 실질적으로 사회를 움직여 나가는 핵심 동력이 되어갔다. 1977년 의료보험 전격 실시가 가능했던 요인은 전경련으로 대표된 재벌들의 동의 때문이었다. 재벌그룹 문화재단들이 집중적으로 설립되는가 하면 각종 스포츠 단체장을 재벌기업 회장들이 장악하기 시작한 것도 1970년대부터였다. 요컨대 자본의 사회적 형식으로서 기업은 시장을 넘어 사회 전체로 스며들고 국가로 역류했다. 

하이에크의 방한 직후인 1978년 12월 유신의 마지막 개각이 이루어졌는데, 9년간 경제정책을 주도했던 남덕우 대신 신현확이 경제부총리로 기용된 것이 핵심이었다. 이 개각은 일차적으로 경제안정화를 위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으로의 전환이었다. 신현확 경제팀이 1979년 4월에 발표한 ‘경제안정화 종합시책’의 핵심 지향은 시장기능의 강화와 민간 자율성의 확대였다. 유신 말기 핵심 경제관료였던 강경식은 안정화 시책을 한마디로 “관 주도에서 시장경제로 가는 것”으로 정리하면서 “성장에서 안정으로, 보호에서 개방으로, 경쟁 촉진으로”의 전환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이는 “정부 정책의 철학을 180도 바꾼” 것이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김만제가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 계획은 미국 시카고학파의 영향력이 유신 국가를 집어삼키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뒤이어 1980년에는 1966년 이래의 과제였던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이듬해 공포됐다. 이로써 하이에크가 강조한 자유경쟁이 흘러넘칠 공정한 시장에의 꿈이 영글어갔다. 

1978년 남덕우 부총리 주재로 열린 경제장관회의는 수입 개방을 무기로 통화 및 물가 안정을 이루겠다고 결의했다. 남덕우 부총리(태극기 앞자리) 왼쪽으로 김용환 재무, 최각규 상공, 신형식 건설, 오른쪽으로 장덕진 농수산, 장예준 동력자원, 신현확 보건 사회부 장관이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자본이 사회를 움직이는 권력으로

물론 이러한 전환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8·3 조치 직전인 1971년 2월 국무총리에 임명된 백두진의 첫 기자회견은 민간주도형 경제체제로의 전환을 강조했다. 재벌들도 앞다투어 비슷한 주장을 반복했다. 이 기조는 8·3 조치와 유신 선포, 중화학공업화를 거치면서 잠시 유예되었지만 결국 10년도 안되어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이 자본의 궁극적 목적일까. 자본이란 움직이는 화폐이고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어야 하는 영겁회귀의 운동이다. 즉 자본은 잉여가치 추출의 최적화된 조건을 창출하기 위해 이용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한다. 8·3 조치의 반자유주의와 하이에크의 자유주의는 자본에 전혀 모순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다만 자본 증식의 최적화된 조건의 역사적으로 다른 형태일 뿐이었다. 정주영에게 박정희와 하이에크는 자본 증식을 위한 하나의 도구, 잉여가치 창출에 투입되어야 할 산 노동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무한증식의 자본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사회 자체를 자신의 모습대로 복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사회체제 내부에 기업의 형식을 파급시키는 것이자 그 기업 형식으로 모든 주체들을 복제하는 것이었다. 마치 암세포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모습대로 복제해내는 자본의 위력이 1970년대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바야흐로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새로운 주체 형식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복제된 1970년대는 욕망과 경쟁이라는 키워드로 압축 가능하다. 1977년 아파트 입주는 178 대 1이라는 상상도 못할 경쟁률을 뚫어야 가능했고, 1978년 국회 직원 단 5명 모집에 2000명 이상이 지원해 400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한국의 시장은 이미 충분히 가혹해졌다. 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경쟁열차는 이미 오래전에 출발했을 것이다. 사회진화론, 문명 개화, 계몽, 실력 양성, 근대화, 선진화 등 한국의 근현대 역사 속에 명멸했던 다양한 담론들이 모두 동일한 종착역을 향하고 있었다.

그 종착역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 중에 김승제가 있다. 1962년부터 오랫동안 수원문화원장을 지낸 자수성가형 사업가 김승제는 1970년 1월27일자 경기연합일보에 ‘신춘유감’이란 글을 투고했다. “1970년대를 가리켜 어느 외국학자는 ‘경쟁의 시대’라고 부르고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한 국제적 생존경쟁이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 우리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누구도 이 치열한 경쟁의 권외에 설 수는 없는 것이다. 잘살고 못사는 것도 경쟁의 결과요, 지배와 피지배의 요인도 또한 경쟁의 소산인 것이다.” 

그렇기에 김승제는 “경쟁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겨야만 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이에크가 정교한 논리로 설파한 신자유주의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경쟁논리가 1970년대 벽두에 지방 문화원장의 뇌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 논리는 그가 1973년 5월9일 서울의 마천루 어느 곳에서 허공으로 몸을 날리기 전까지 멈추지 않았다. 투신 이유는 사업 실패로 알려졌다. 죽마고우였던 선경 창업자 최종건의 도움을 뿌리친 그의 선택은 사업 실패가 단지 경제적인 성공과 실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와 연루되는 상황이었음을 암시한다. 기업 형식으로 재구성된 호모 이코노미쿠스에게 기업이 생존할 수 없다면 그 형식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미 사탄의 맷돌은 돌아가고 있었고 그것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유신체제조차 이 맷돌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황병주 |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6) 유신시대 문단권력과 현대문학

권력과 자본의 품에 안겨 지배에 봉사한 문인들


지난 8월7일 ‘인문정신문화계’(?)에서 존경받아온 학자·지식인들의 청와대 오찬과 그 자리에서 나왔다는 ‘영원의 여인’ 발언은 후학과 후배들에게 상당히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사태의 전말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런 언행은 기본적으로 문학과 인문학의 본연을 위배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그보다 훨씬 더 진하고 상징적인 일이 문예지의 지면에서 벌어졌다.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예지인 ‘현대문학’ 9월호는 영문학자 이태동의 권고를 받아 한국문인협회 소속 ‘문인 박근혜’의 수필 4편을 게재했다. 신작이 아니라 15년 전에 단행본으로 발표된 책에 이미 실린 글이라니, 대단한 특전이며 일종의 반칙이라 볼 수도 있다. 

이를 변명하기 위해 ‘현대문학’ 측은 편집후기를 통해 “절제된 언어로 사유하는 아름다움의 깊이를 보여주는 문인 한 개인을 넘어,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이라고 썼다. 이 원고의 게재를 주선하고 비평문을 쓴 이태동 왈, 대통령의 수필이 “우리들의 삶에 등불이 되는 아포리즘들이 가득한,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진주와도 같다”며 “부조리한 삶의 현실과 죽음에 관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의 코드를 탐색해서 읽어내는 인문학적인 지적 작업에 깊이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성이 있는 울림으로 다가”온단다. 그래서 만약 “문단과 독자들이 그의 수필을 멀리한다면 너무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언행들 앞에서 대학에서 문학과 인문학을 가르쳐온 사람으로서 눈앞이 막막해진다.

유신시절 우파 중심의 주류 문인들은 권력에 협력하고 곡학아세한 반면 양심적 문인들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박정희는 1974년 긴급조치를 발동하고 조작된 ‘문인간첩단’의 소설가, 평론가들을 감옥에 가뒀다. 문인간첩단 사건 당시 재판정에 이호철 임헌영 김우종 장병희(필명 장백일)씨가 나와 있다. | 출처 1975년 보도사진연감


■ 지식인과 문인의 흑역사, 현대문학·문인협회

혹 한국문인협회 소속 수필가 박근혜의 글이 정말 뛰어난 문학성을 갖고 있다 해도, 그리하여 ‘세계 수필계’(?)의 거두(?) 몽테뉴와 베이컨의 전통을 잇고 있다 해도, 진정한 학자거나 평론가라면 저런 ‘빨대성’ 단어들을 늘어놓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학부 수업 시간에 어느 학생이 저런 평문을 제출했다면 그는 C학점 이하의 점수를 받아야 할 것이다. 작품을 과대해석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비평이 견지해야 할 최소한의 객관성이나 비판정신을 내버리고 과장되고 상투적인 찬사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 청와대 오찬의 아양이나 ‘현대문학’이 한 일은 기실, 한국문학사의 한 전통에 닿는 일이다. 왜냐하면 현대 한국문학사가 그 무엇에도 자유로운 개인의 꿈과 내면성을 추구한 자유주의적 전통이나 ‘민족’과 ‘민중’ 따위의 코드로만 점철된 것처럼 ‘오해들하고 그러는데’, 그것은 일면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기실 현대 한국문학사의 한 축은 처음부터 제국주의와 권력에 대한 협력과 애틋한 흠모로 꽉 차 있었다. 계속 그랬다. 한국 현대문학의 비조격인 이광수·최남선은 물론, 가장 존경받는 국민 시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서정주나 대표적인 소설가·평론가로 꼽히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김동리·조연현 등 셀 수 없는 예가 있다. ‘현대문학’은 전쟁 직후 조연현이 창간·운영하며 문단 주류의 기관지 노릇을 했고, 한국문인협회는 가장 크고 주류적인 문단의 가장 큰 권력기구이자 ‘직능’단체였다. 이를테면 문인협회는 전두환이 학살을 통해 국가권력을 탈취했을 때도 태평가를 부르고 찬양성명서를 제출했다. 지지난 대선에서는 이명박을 공개 지지했다. 따라서 ‘현대문학’과 문인협회는 이 나라 지식인·문인의 ‘흑역사’며 반지성사의 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제자·동료 문인과 기자들이 감옥에 잡혀가 고문당하거나 직장에서 쫓겨나던 유신 때도 한국문인협회는 꿋꿋이 ‘협력’했다. 흔히 저항과 민족·민중문학의 견지에서 유신시대 지식인과 문인의 상황을 조명한다. 그 저항은 분명 오늘날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언론자유와 지식인의 사회적 소명에 대한 한국적 전통을 형성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실은 그보다는 더 많고 큰 ‘협력’과 곡학아세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협력’과 ‘저항’은 때로 뒤엉키기도 했다. 그 현장을 되돌아보는 것은 한국 지식사회와 문학판이 어떤 기원과 약점을 내장한 것인지를 살펴보는 의미가 있다.

■ 문학사상 가장 권력지향적이었던 조연현·서정주

분단과 전쟁 때문에 식민지시대를 대표하던 중견 문인들은 물론 웬만한 진보적인 문인·지식인들이 거개 월북하거나 죽자 문단은 젊은 우파들의 차지가 되었다. 해방 당시 조연현은 불과 26세, 김동리는 32세, 서정주는 30세였다. 흥미로운 것은 문단의 좌우 대립이 분단의 고착으로 종식되자마자 남한에 남은 문인들끼리의 내용 없고도 새로운 사생결단 분란이 시작되고, 주류 문인이 권력에 밀착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한국 문인 일부의 체질처럼, 또는 주류 문단의 일상처럼 되었다. 

문인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권력지향적이었던 조연현이나 타고난 모국어 구사력을 권력을 향한 광대짓에 사용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던 서정주 같은 이들이 그 대열에 있었다. 그들은 한 치의 오차와 일탈 없이 ‘친일-친이승만-친박정희-친전두환’의 한길을 올곧게 걸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문단 내에서 파벌을 만들고 정치꾼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행태로써 문단권력을 사냥하는 데 집착했다. 그 대상은 문인협회, 한국펜클럽, 소설가협회, 시인협회들이었다. 김동리 조경희 박종화 등도 이런 판에 끼어 있었다. 이들 단체가 가졌던 이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협회장 선거에서는 거의 언제나 정치판보다 더 심한 이전투구가 벌어졌다. 점잖고 꼿꼿해서 세속의 일에 무관심했다던 김광섭, 황순원 같은 작가나 이름 없는 젊은 작가들과 지역 문인들도 이 싸움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유신 때 이런 행태가 극에 달했다는 점이 교훈적이다. 1973년 1월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에서는 문협 사상 가장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김동리 대 조연현의 이 싸움은 비루한 비방 모략전과 후배 문인 줄세우기를 야기한 돈선거이기도 했다. 결과는 321 대 312로 김동리의 신승, 하지만 과반수 미달. 선거는 두 달 뒤로 연기됐고 1차전의 패자 조연현은 치밀한 전략을 구사했다. 서정주 황순원 등 영향력 있는 이들을 끌어들여 지지성명을 발표하게 하고, 다른 분과장 선거를 적절히 이용하고 거래하여 부동표를 흡수했다. 조연현의 최종 승리.

1975년 1월 또다시 열린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는 더 가관이었다. 이때는 젊고 진보적인 소설가 이호철이 출마하여 썩은 기성의 문단권력에 도전했다. 이사장 조연현 측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금품 살포와 비방은 물론 기본수단이었고, 지방 문인들을 단체로 버스를 대절하여 서울의 고급 호텔에 묵게 하고 푸짐한 향응을 제공했다. 그리고 급기야 ‘문학’을 거래하였다. 몇몇 젊은 문인들에게 편지를 보내, 조연현 지지를 대가로 작품을 ‘현대문학’ 등에 게재해 줄 것을 약속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이 폭로되었지만, 당선은 당당 또 조연현.

왜 주류 문인들은 이다지 심하게 타락했을까? 이런 분열과 병통의 뿌리에는 어떤 정치적 무의식과 ‘지성’이 있었을까? 가깝게는 1972년 유신 이래 이어진 지식계와 문단 상황이 있다. 유신이 발표되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 문인협회는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박정희 총통체제의 꼭두각시 대의기구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문인 몫으로 박종화 장덕조 전숙희 등이 진출했다. 그러나 한쪽에서 양심적인 지식인과 문학인들의 유신반대운동이 서서히 타오르고 1974~1975년 정점에 올랐다. 바로 그때 한국의 글쟁이들과 먹물들이 겪었던 고난은 분명 지성사 전체에서 특기되어도 좋을 한 페이지라고 본다. 박정희는 1974년이 되자마자 긴급조치를 발동하고 재야인사들과 조작된 ‘문인간첩단’의 소설가와 평론가들을 감옥에 가뒀다. 동아일보 사람들 180여명이 직장을 뺏겼고 와중에 장준하·김상진 그리고 인혁당 사람들이 목숨까지 잃었다.

■ 저항, 새로운 지성과 문학의 미래를 낳다

그러나 저항은 문단에서도 타올라 1974년 11월에 드디어 자유실천문인협회가 결성되었다. 그 세는 아직 작았지만, 이 새로운 단체는 광기어린 권력과 기성 문학판에 반감을 가진 젊은 지식인과 문인의 지적 구심이 되고, 결국 문학판을 재편하여 문학사를 새로 쓰게 할 예정이었다. 유신은 이처럼 역설로써 새로운 지성과 문학의 미래를 배태한 것이었다. 이런 정황이니 조연현과 문인협회는 기를 쓰고 기득권을 지키려 한 것이겠다.

그런데 왜 그 시절의 일부 주류 문인들은 권력에 아부하며 한몸이 되고 서로 이전투구하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됐을까? 일제의 총동원체제에서부터 분단과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버티고 살아낸 그들의 정치적 무의식에는 권력에 대한 강한 열망과 동일화가 있었다고 보인다. 즉, 타락과 분열의 뿌리에는 식민지와 분단경험의 상처가 있는 것이다. 타자가 사라지자 이념 없는 ‘순수문학’, ‘문학을 위한 문학’은 오직 서로 싸우며 지배에 봉사할 일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때 ‘문학성’을 위시한 문학의 제도란 곧 헛된 권위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이 만인의 복종을 요구할 때, 지식인과 문인도 대개 굴종하게 돼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문학과 문학의 또 다른 본연이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저항을 만들어내고, 지성과 문학을 분열시킨다. 유신시대는 이런 역사적 교훈에서도 ‘갑’이다. 그런데 이번 8월의 일들은, 유신이 문학을 통해서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미나 문학성 같은 가치가 때로는 얼마나 허약하고 자의적인 것인지, 문학이 얼마나 쉽게 지배의 장난감이 될 수 있는지 알게 한다. 문학은 권력과 자본의 품에 은밀히 안겨 뒷길로 지배에 봉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 지배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저 ‘현대문학’은 더 대단하다. 문학이 기성의 질서와 권력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어야 한다는 따위의 관념을 정면으로 이기고, 고고한 문학성의 성채를 이룬다. 문학성이란 역사적 인간주의나 공리주의적 주박과는 아무 상관없는, 언어의 완미하고 자율적인 운동, 또한 인간적 고요의 ‘순수’한 결정체이어야 함을 가장 오래된 문예잡지가 재증명한다.

앞으로 청와대 만찬이나 ‘현대문학’에서와 같은 일은 늘어날지 모른다. 관료문학이나 궁정문학이 융성할 태평성대가 올 것을 미리 대비해야겠다. 그렇다면 특히 다음 겨울호 계간지엔 국정원 작가 특집이 어울리지 않을까? 그들은 댓글달기를 통해 2010년대 인터넷문학을 주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남북정상회담과 내란음모 사건의 두 녹취록을 통해 이제껏 안일하게만 다뤄진 분단정치의 실재를 하이퍼리얼리티 수준에서 구현해보여주었다. 나아가 그 녹취록들이 불러일으킨 이런저런 논란은 온 국민의 텍스트 해석 수준을 한껏 높여 주지 않았는가.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7) 한국적인 것의 발명과 국민 교육

민족교육의 이면엔 ‘체제순응적 국민’ 만들기


지난 7월 덕수궁 미술관에 ‘야나기 무네요시전’을 보러 갔다. 식민지 시기 조선과 그 문화에 애정을 지녔던 그의 수집품 전시는 2006년에 이어 두 번째다. 도자기·가구·회화·자수·목공예·금속공예 등 다양한 전시가 펼쳐졌다. 

아직도 야나기 무네요시가 이야기되는 건 식민지 시기에 그가 말한 선(線)과 비애미를 중심으로 한 ‘조선적인 것’의 자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지하는 1970년대에 “나는 야나기 무네요시를 비판하는 입장”이라고 선언하며 선, 비애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야나기의 미학관과 공식 결별을 고했다. 그리고 야나기와 구분되는 힘, 단절성, 투쟁성, 희극성 등을 지닌 남성적 문화가 한국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최근 국가정체성, 민족적 자긍심·우수성, 전통 등이 강조되고 있다. 한류, 한국전통, 한국문화 등이 문화상품 차원뿐만 아니라 국격, 국민의식 그리고 국민자긍심 고양 차원에서 언급된다. 한류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전통문화의 창조적 발전전략이 필요하다든지, 전통문화 진흥이 국가 정체성과 이미지를 형성하는 핵심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한편으로 교과서 논쟁이나 국사의 필수과목 지정 등을 둘러싼 논의 속에 등장하는, ‘민족의 뿌리가 어떤 것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후세대가 나왔을 때 역사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라는 질문 뒤에 숨겨진 것은 체제순응적인 국민을 양성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처럼 반복적으로 민족자긍심, 국가정체성 등이 소환되는 역사적 기원에는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한 ‘한국적인 것의 발명’이 자리 잡고 있다. 

■ 민족중흥과 국민 만들기 

1960년대 후반부터 민족중흥, 민족문화, 국난극복사, 자기긍정적 민족사 등 다양한 ‘한국적인 것’이 발명됐다. 하지만 5·16 군사쿠데타 직후 한국역사에 대한 박정희의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 즈음에 민족주체성의 회복을 모토로 한 ‘한국적인 것’을 강조하는 흐름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단적인 예가 근대화를 위한 정신적 바탕을 만드는 제2경제론(1967), 국민교육헌장(1968)에서 ‘정신이 선도하는 물질문명’의 강조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6월 민족 주체성 확립, 새로운 민족문화 창조, 개인과 국가의 조화를 통한 민주주의 발전 등의 이념을 담은 국민교육헌장 제정을 권오병 문교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이어 같은 해 12월5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선포식에 참석해 393자의 헌장 전문을 직접 낭독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0년대 후반 들어 정부와 지식인 모두 한국적인 것에 천착했던 이유 중 하나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이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재식민화의 공포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안보위기’와 더불어 근대화에 따른 광범위한 도시대중의 출현과 이들의 불만이 1971년 경기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번졌던 상황은 정부에 또 다른 위기감을 안겨줬다. 이에 따라 유신체제는 근대화에 따라 확산된 서구물질문명과 대중문화에 대한 검열과 통제를 확대하는 한편, 이를 대체하는 자기긍정적 민족문화, 민족중흥을 위한 민족사의 재해석, 민족영웅의 재발명 그리고 민족주체성을 강조하는 정신혁명을 통해 체제에 순응적인 국민을 만들고자 했다.

■ 국적 있는 교육의 창안 

정신문화에 대한 강조는 민족중흥의 주체로 생산적, 효율적, 순종적, 윤리적 주체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대규모 민족문화의 재발견과 연관된 사업들이 추진되면서 국적 있는 교육과 민족사관, 국난극복사관의 시각화를 통해 자폐적인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일례로 ‘국적 있는 교육’을 살펴보자. 1969년 한국사학계 중진인 한우근, 이기백, 이우성, 김용섭은 ‘중고등학교 국사교육개선을 위한 기본방향’을 통해 새로운 교과요목 시안으로 한국사 전 기간을 통해 민족주체성을 살리며, 민족사 전 과정을 내재적 발전방향으로 파악할 것을 강조했다. 정부도 ‘국적 있는 교육’에 기초한 민족사관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972년 지방장관회의에서 박정희는 그간 국적 없는 교육을 실시해 막연한 세계인을 만드는 데 치중했다고 지적하면서, 건국 이후 최대 규모인 8000명이 참석한 ‘총력안보를 위한 전국교육자대회’에서 국적 있는 교육을 지시했다. 제3차 교육과정에서는 교육과정의 기본 방향으로 민족주체의식 고양, 전통을 바탕으로 한 민족문화 창조, 개인의 발전과 국가 융성 조화 등을 제시해 국사의 위상은 급격하게 높아졌다. 

■ 내재적 발전론, 문학사 시대구분론 그리고 실학 

비슷한 시기에 정부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내재적 발전론, 근대문학사 그리고 실학 연구가 확산되며 독자적인 한국적 정체성을 만들고자 했다. 먼저 역사학계는 1967년 한국경제사학회 논의를 시작으로, 한국사연구회가 결성되어 정체성론(停滯性論), 반도론 등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했다. 

현재 내재적 발전론이라고 불리는 주장은 1960년대 식민주의 역사학을 청산하기 위한 ‘학술문화운동’이자 새로운 역사학을 재건하기 위한 집단 운동으로 전개됐다. 내재적 발전론이란 식민지가 필연이라는 역사인식을 지양하면서 조선 후기사회 저변에 농민층이 분화해 새로운 경제주체가 등장했으며 독립수공업이 대두하는 등 이미 자본주의의 맹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내재적 발전론이 등장한 것은 북한과 일본의 영향도 있지만, 중요한 원인은 지식인들의 내적인 문제에서 비롯됐다. 역사에 대한 주체적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던 4·19 혁명이 5·16 쿠데타와 유신체제 성립으로 유산됐다고 이들은 판단했다. 삼선개헌과 유신헌법 등 현재 역사는 퇴행하고 있지만, ‘조선 후기 역사의 발견’을 통해 민족의 내재적 발전 가능성을 확인함으로써 민족에 대한 허무주의가 걷히기를 원했다. 내재적 발전론은 역사학에만 국한된 움직임은 아니었다. 국문학계에도 영향을 미쳐 영·정조대를 근대문학의 태동기라고 주장하는 김현, 김윤식의 <한국문학사>(1973)가 발표됐다. 내재적 발전론의 논리에 근거해서 17세기 자본주의 맹아를 읽어낼 수 있었듯이, 문학사 시대구분론은 문학사로 재구성된 내재적 발전론이었다. 

한국적인 것을 탐색하는 또 하나의 중요 매개는 실학(實學)이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정부가 대규모 지식인을 충원해 엘리트 집단의 형성이 일단락되자 이들은 정부 주도 근대화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생산했다. 반면 권력 외부에 존재했던 지식인들은 글쓰기를 통해 지식인으로서의 자아를 실현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됐다. 즉 이들은 ‘근대화 비판(비평)’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실학은 단지 고전이 아닌, 근대적 정신이 배태된 사상으로 여겨졌으며, 이를 근거로 지식인들은 실학이 정체된 민족사라는 부정적 편견을 역전시킬 수 있는 매개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내재적 발전론이나 문학사 시대구분론을 주창한 논자들은 대부분 식민사학과 자립적인 발전이 부정된 역사관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보편적인 역사’에 대한 강한 열망을 드러냈다. 대표적 지식인인 조동일(1939년생), 김용섭(1931년생), 김지하(1941년생)는 유년과 청소년기에 전쟁과 빈곤, 전통이 부정당하는 시기를 체험했고 청년기에 4·19를 맞이했다. 이들은 빼앗긴 민족적 주체성·자긍심을 지적으로 복구하고 싶었을 테고, 이것이 이들 공통의 사상적 기반이 됐다. 그것은 민족사를 ‘정상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그 작업은 자신들 세대의 손으로 국가·민족의 학문을 구축하고자 하는 강박감 속에서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구성하고자 했던 한국적인 것의 핵심에는 ‘정지된 시간’인 17~19세기 전통 속에서 민족·평민적인 요소를 추출해 세계사적인 진보에 조응하도록 역사를 새롭게 만드는 일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정부와 지식사회의 ‘한국적인 것’의 발명이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사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국민교육헌장, 국정 국사교과서 채택과 국적있는 교육 그리고 유신 체제로의 전환을 ‘민족적 위기’라는 근거로 정당화했다. 내재적 발전론이 제기된 근거 역시 4·19가 부정되는 민족적 위기를 과거의 역사를 통해 극복하는 것이었다. 이들 모두 정체된 민족의 역사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민족중흥과 내재적 발전 그리고 이를 담당할 주체를 발견하고자 했다. 표면적으로 다를지 몰라도 양자는 ‘민족국가의 발전’을 위한 담론을 공유했다. 

■ 국민 만들기를 넘어서 

지난 8월 경주 통일전을 방문했다. 박정희가 경주개발을 지시한 뒤 만들어진, 재발견된 화랑의 대사당인 이곳은 지금도 엄청난 규모와 조경을 자랑하지만 이제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한국적 인간형으로 환골탈태하려는 많은 학생들이 방문했던 통일전은 이제 만들어진 취지조차 알 수 없는 장소가 되었다. 통일전을 보며 1970년대 충무공 정신의 생활화를 위해 탄신일에 맞춰 진행된 ‘성지참배 고교대행군’이 생각났다. 1972년 4월29일 대한뉴스를 보면 충무공 탄신 427주년을 맞아 교련복에 소총으로 무장한 고교생들이 서울에서 문교부 장관과 서울시장에게 출발신고를 하고 현충사까지 야영을 하며 124㎞를 행군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국무총리인 김종필까지 참여한 대규모 행사였다. 통일전과 성지참배대행군은 민족중흥을 위해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국민을 육성하기 위한 기획이었다. 

국사필수, 역사교과서 논란 그리고 민족자긍심 강조 등 유신시기의 흔적이 앞으로 다시 등장할지도 모른다. 현재까지의 역사교육은 유신과 제5공화국 시기의 자민족중심주의와 국사 위주 역사서술을 수정, 보완하는 과정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민족사에 갇힌 ‘한국적인 것’을 강요하는 국민만들기 교육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 내부의 차이를 적대시하지 않고 그 자체로 인정하며, 민족 간 국경을 넘나드는 역사적 시야를 갖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김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




(8) 전위(前衛)와 1970년대‘불온’한 예술, 유신의 ‘피고’가 되다


■ 변혁의 풍문과 예술

전위(前衛)란 군대에서 한 발 앞서간 선발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전선에서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간 이들은 목숨을 대가로 전황을 살피고, 이로써 부대 전체의 운명을 좌우한다. 20세기 예술의 전위들은 인간성을 의심하게 만든 전쟁의 충격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 관습의 벽을 넘어섰다. 특히 전후에 전위예술은 인간의 보편성을 향해 경계를 넘어선 만큼 국경을 넘어 급속히 퍼져나갔다. 1960년대 서구 사회를 뒤흔든 일련의 사태와 예술은 ‘68혁명’으로 불리는 인상 깊은 정신사적 장관을 만들었다. 

사회 전반을 뒤흔든 청년문화의 여파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도 다다랐다. 그러나 한국에 건너온 서양의 사정들, 특히 히피문화 같은 낯선 문화가 오롯이 이해되기는 힘들었다. 청년들이 해괴한 복색을 갖추고 난잡한 관계를 맺고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로 유흥을 즐기는 모습은 한국의 기성권력에게는 난동 정도로만 보였으며, 반응은 고대 벽화에서도 적혀있다는 ‘젊은 것들’에 대한 지탄에 그쳤다. 아니면 ‘나체’ ‘프리섹스’의 이름이 붙은 선정적 화보 뒤에 숨겨졌는지도 모른다. 몇몇은 이를 두고 ‘스튜던트 파워’, 젊은이들의 반항, 혹은 현대사회의 고독과 소외감 같은 학구적 해설을 붙였지만, 청년들이 추구했던 사상의 실체와 사회에 끼칠 영향력을 엄밀하게 진단해내지는 못했다.

당시 서구의 급진적인 변화상을 충실히 지켜보았던 이는 영화감독 하길종이었다. 그가 영화학과에 유학하던 1960년대 말의 캘리포니아는 한창 히피문화가 맹위를 떨치던 곳이었다. 그는 이 광경을 새로운 매체, 즉 영화의 문법으로 번역하려 했다. 그는 퇴폐적으로 보이지만 그만큼 전위적 히피의 문화가 말하려는 것에 진지하게 귀 기울인 몇 안되는 한국인 중 한 사람이었다. 하길종은 마약과 사랑에 찌든 히피들에게서 변혁의 희망을 읽었다. 히피 문화를 통해 권력의 억압과 그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저항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벌거벗은 화보의 주인공으로 변형되든, 청년들의 치기로 보이든 상관없이 하길종은 변혁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영화가 국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임을 깨달은 그가 문학 대신 영화를 선택했다. “방법은 다르더라도 우리 땅에도 미국의 젊은이들의 생각을 한국의 젊은이들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 나타내기를 시도하고 있는지 모른다. 또 오늘날 모든 국가적 종교적인 울타리를 떠나 젊은이들의 생각은 항시 빠르게 소통되고 같은 것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장발과 기타와 마약의 세대’ <세대>, 1971·7)고 판단한 그는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길로 나아갔다. 하길종이 추구한 영화는 새로운 소통을 위한 인식 자체로서 이전 영화와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이를 실천했고, 한국 영화계를 들쑤시며 충무로의 두통거리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기존 영화에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간 사람이었다.

1970년 광복절에 제4집단은 사직공원에서 모여 태극기와 백기, 꽃관을 들고 ‘문화의 독립’을 외치며 한강으로 향했다. 제4집단 이 기획한 ‘기성문화예술인의 장례식’은 지금 서울시청 부근에서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붙잡히며 중단됐다. 당시 ‘선데이서울’은 ‘관 메고 예술하니 경관이 웃기지마’라는 제목의 가십 기사로 다뤘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전위, 한국에서 한 걸음 내딛다

새로운 예술 양식은 기존 질서에 도전하고 논란을 일으킨다. 특히 세계사의 격변 지점에서 생겨난 청년의 예술 양식은 그 자체로 도전일 수밖에 없다. 1970년대 한국 미술계도 이 도전과 맞닥뜨린다. 추상미술과 구상미술의 대립이 기존 체제 속에서 공전하는 상황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전위예술은 퍼포먼스, 행위예술, 해프닝, 대지예술 등의 낯선 형식을 통해 등장했다. 이는 미술 양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1970년대라는 시대에 대응하는 인식과 실천의 문제였다.

백남준은 일찍이 이 흐름을 선도한 한국인이다. 백남준은 플럭서스의 일원으로 해외에서 이름을 날렸지만 한국에서는 다루기 곤란한 인물이었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제에서 2위를 수상한 정명훈이 훈장을 받고 카 퍼레이드를 벌인 것에 비한다면 백남준은 명성에 한참 모자란 대접을 받았다. 백남준은 해외토픽이나 단신을 통해 알려졌으며, 나체 공연으로 경찰에 검거되었다는 소식으로 사회면에 등장하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인이 귀했던 시절에도 백남준의 소식은 정신병자인지 예술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평가와 함께 주로 해외에만 머물렀다. 

전위적인 시도가 따돌림 받은 것은 국내 작가들이 세계적인 흐름을 외면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하길종이 목격하고 백남준이 실연한 예술의 전위성은 한국에서도 꾸준히 시도되었다. 1970년 창단을 선언한 행위예술 그룹인 ‘제4집단’은 한국에서 예술의 전위를 시도한 보기 드문 사례이다. 김구림, 정찬승, 손일광, 정강자, 방거지, 김벌래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참여한 제4집단은 인간 해방과 한국문화 독립을 선언하며 본격적인 전위적 실험에 나섰다. 창단 이전부터 제4집단의 구성원들은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한 작품의 무단 철거나 보디 페인팅, 해프닝 등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이들은 1970년에 이르러 본격적인 활동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들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경계를 넘어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점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들이 첫 걸음에 만난 것은 대중의 무관심과 권력의 힘이었다. 1970년 광복절, 제4집단은 창단 두 번째 퍼포먼스로 ‘기성문화예술과 기존체제의 장례식’을 치른다. 흰 깃발을 선두로, 모래를 채우고 꽃으로 장식한 관을 메고 뒤이어 삽을 들고 뒤따르던 행렬이 광화문에 이르렀을 때 경찰은 이를 가로막고 묻는다. 

경찰: 당신들은 도대체 무슨 예술을 한단 말이오?

답: 우리가 하는 것은 해프닝이라고 합니다.

경찰: 해프닝이라는 건 또 뭔데?

답: 즉흥예술인데 지금 우리들은 이 재료를 가지고 작품 발표를 하려는 것입니다. 

경찰: 이게 관이지 어째서 작품입니까?

답: 모래와 꽃입니다. 작품의 재료가 됩니다.

경찰: 뭐요?

답: 대지예술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들은 모든 기성의 문화예술에 반기를 드는 겁니다. 

(‘주간여성’, 1970년 8월26일자)

여기 등장한 경찰은 무관심한 대중의 얼굴 중 하나였다. 사실 제4집단을 포함한 전위예술은 주류 언론으로부터 외면당했다. 그들의 활동이나 공모전에서 철거당한 수모는 신문보다 주간지가 더 적극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주간지의 관심은 옷을 벗었다거나 경찰에 끌려갔다거나 하는 사소한 데 집중되어 선정적인 흥미만을 부추겼을 뿐이다. 이보다 더 가혹한 것은 권력의 반응이었다. 제4집단은 중앙정보부로, 경찰서로 불려다녔고, 주변인물마저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백기를 든 것이 북괴를 향한 항복이냐”는 취조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어느새 체제를 위협하는 불온의 혐의를 쓰게 된 것이다. 제4집단은 권력의 탄압을 거치면서 결과적으로 예술의 전위성이 억압과 저항이라는 주제와 직결될 수 있음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박정희 정권은 단발령 같은 억압적·폭력적 조치로 예술인들의 전위를 무력화시켰다. 단속에 걸려 노상에서 강제 이발 당하는 장발족들의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유신이라는 침대

제4집단이 불온의 혐의를 쓴 이상, 권력의 대응은 가혹했다. 퍼포먼스 직후 내무부는 이내 사회풍조 일소방안을 마련하여 전위예술을 직접 겨냥했다. ‘전위미술(나체그림, 보디페인팅, 나체쇼, 음화), 전위연극(거리에서의 연극, 성행위 연극 및 실연), 전위의상(종이나 비닐재료를 사용한 것, 누더기옷 입기, 과다노출 활보), 전위영화(극, 줄거리 없는 영화나 도색영화)’ 등 거의 모든 예술에서 전위적인 것이 금지되었고, 제4집단을 포함한 히피족, 장발족은 물론 남자 미장원까지 단속 대상이 되었다. 장발가수 조영남의 출연분이 통편집된 것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장발 단속이 시행된 게 1970년 8월29일이었다. 장발이라면 외국인도 입국이 불허될 정도였으니, 제4집단의 여파는 상상 이상이었다. 

억압은 갈수록 증폭되면서 197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1976년에는 급기야 대통령이 직접 나서 “우리 문화를 오염시키는 외래문화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택할 것은 택하고 퇴폐적이고 백해무익한 것은 과감하게 버리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며 “전위 예술인이니 하면서 대담하게 하는 것이 머리가 앞선 사람인 것처럼 아는 풍조가 있는데 이는 위험하다”는 지시를 내렸다. 전위는 이제 예술 양식 논란에서 벗어나 체제와 권력에 대한 도전이자 불온의 실체가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 전위는 완전히 사라질 처지에 놓인다. 제4집단의 주축이었던 김구림이 일본으로 떠난 뒤, 또 다른 멤버 정강자가 칵테일바의 마담이 되었더라는 주간지 기사만이 후일담으로 남았을 뿐이다. 

1970년대 벽두부터 단발령의 폭거를 이끌어낸 전위는 유신정권이 얼마나 민감하고 폭력적인 촉수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증명한다. 대통령이 가리킨 ‘우리 문화’는 역사적 실제와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황병기의 ‘미궁’은 말할 것도 없고 전통 연희에서 출발한 가면극이나 사물놀이도 불온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단속 대상에서 보듯 가장 큰 문제는 예술을 성립시키는 매체 자체가 금지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내용과 형식은 물론 소재와 소통 방식마저 문제 삼을 때 예술은 그 자체를 잃을 수밖에 없다. 창조적 소통을 위한 매체의 가능성을 폐쇄하고 오직 ‘한국적인 것’ 하나만을 강요한 것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다를 바 없는 폭력이었다. 정해진 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은 무참히 잘라내고 추방해야 하는 것이 한국적인 것의 정체였다. 

1975년 전후 상황은 급격히 악화된다. 대마초 파동을 기화로 벌어진 정화운동, 사회풍조 일소의 이벤트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문화계 전반에 들이댄 형국이었다. 바니걸스가 토끼소녀로 창씨개명할 만큼 억압은 집요했다. 제4집단이 억압의 도화선이 된 후 유신체제의 문화 예술은 1970년대 내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 상황을 몸소 겪고 있던 하길종은 스스로를 피고인으로 불렀다. 억압의 대상이면서 무기력한 처지를 자조한 피고인이라는 말은 이 시기 예술가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이들의 혐의가 벗겨지는 데는 한참이나 걸렸다. 백남준은 1984년이 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었지만 예술가들의 피소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확언하기 어렵다. 지금도 권력은 예술을 피소하고, 자기검열의 기제가 또 다른 피고인을 만들고 있지 않은지 유신시대의 예술가를 보면서 되묻는다.

<김성환 |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9) 충성과 반역 그리고 배반, 1970년대의 중정부장들


김형욱의 배반은 김재규의 반역으로 연결

1979년 10월26일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울린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이하였다. 벌써 34년이나 되었지만 10·26 사건은 여전히 숱한 의혹과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 이 사건에 비견될 만한 예는 현대사는 물론 한국 역사 5000년을 통틀어도 찾기 힘들다. 단언컨대 10·26은 단군 이래 최대의 미스터리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굳이 세계사로 눈을 돌려 유사한 사건을 꼽자면 브루투스의 시저 암살 정도가 비교될 만하다.

이 사건이 놀라운 것은 최측근의 최고 권력 살해라는 엽기성뿐만이 아니다. 사실 측근에 의해 유명을 달리한 권력자는 한둘이 아니다. 조선왕조의 골육상쟁만 보아도 권력을 둘러싼 암투는 근친 살해도 불사하는 잔인함과 엽기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다른 사건들은 대부분 인과관계가 비교적 분명한 반면 10·26은 통상적인 인과율로 설명되지 않는 측면이 너무 많다. 

대부분의 반역이 다양한 층위의 적대를 기본으로 하여 발생하는 데 비해 10·26의 두 주인공인 김재규와 박정희 사이의 적대적 관계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고향 후배이자 육사 동기로 보안사령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 등을 역임한 이력에서 드러나듯이 박정희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박정희는 김재규를 고향집 막내둥이처럼 아꼈다고 하고 김재규는 법정 최후진술에서 박정희와는 친형제와 다름없는 사이였다고 진술할 정도였다. 

김재규가 10·26 직후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이뤄진 현장검증에서 박정희 시해를 재현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두 사람의 관계는 중앙정보부장 임명으로 그 정점을 찍었다. 중앙정보부가 어떤 조직이던가. 1961년 5·16 직후에 쿠데타 핵심 김종필이 제일 먼저 만든 것이 중앙정보부였다. 이후 이 기관이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굳이 부연설명할 필요가 없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길목마다 ‘중정’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이 별로 없다. 중정은 각종 공안 사건과 정치공작의 주역만이 아니었다. 대북 타격을 위한 실미도 부대와 ‘양지’ 축구단을 창설해 운영한 것도 중정이었고 서울 철거민들의 집단 이주를 은밀히 지원했는가 하면 대통령의 밤생활까지 책임졌다. 대통령부터 축구선수와 철거민까지 거의 모든 주민들이 중정의 활동 대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정의 이 모든 활동이 권력의 유지 및 재생산과 밀접히 관련되는 것임은 자명했고, 그것은 곧 중정이 대통령의 의지가 직접적으로 관철되는 핵심 중 핵심이었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중정부장이란 대통령의 심복 중 심복이어야 했다. 중정부장은 오직 한 사람, 즉 대통령의 입만을 바라보는 자여야 했다. 아니 입으로 발화되지 않은 의중까지 꿰뚫고 있어야 하는 자리였다. 중정은 모든 반역을 색출해 제거함으로써 대통령에 대한 충성 하나로 유지되어야 하는 조직이었다. 양자는 반역과 충성을 매개로 연결된 하나의 운명 공동체였다. 

10·26은 한마디로 이 반역과 충성의 역전이었고 김재규는 충성과 반역의 롤러코스터를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역전이 가능해진 것일까. 김재규는 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것일까. 

그것은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바쳤던 충성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사실 김재규는 마지막까지 박정희에 대한 인간적 예우를 지키고자 했다. 법정에서도 깍듯하게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했는가 하면 채홍사 역할을 한 박선호의 여자 문제 관련 진술을 제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최후진술에서 친형제와 다름없는 박정희와의 개인적 정분을 야수와 같은 마음으로 끊었다고 했다.

김재규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혁명을 한 것이다. 그는 “10·26 민주 국민혁명”이란 용어를 사용했는데, 유신체제를 “꽉 짜인 억압과 폭력의 조직”으로 규정짓고 부마항쟁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희생을 줄이기 위해 “자유 민주주의 혁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체제 수호의 첨병이었던 그였기에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쉽지 않지만, 어쨌든 김재규가 자유 민주주의란 대의명분으로 박정희를 살해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요컨대 그는 박정희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유 대한’을 더 사랑했다는 것으로, 충성의 대상이 분열한 셈이었다.

그러면 절대적 충성의 대상이었던 박정희가 어느 날 갑자기 반역의 대상이 된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충성과 반역은 사실상 동전의 양면이다. 극단적으로 대비되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처럼 서로 기묘하게 얽혀 있다. 

애초 김재규의 충성 대상은 단단하게 결합된 하나의 실체였다. 그에게 박정희와 ‘자유 대한’은 구별될 수 없는 것이었고 ‘각하’가 곧 국가였다. 각하의 안전이 국가의 안전이었고 각하의 의지가 국가와 민족의 의지였다. 이렇게 자신의 충성 대상을 하나의 단일한 실체로 확인할 수 있었던 김재규는 기꺼이 행복하게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했다. 

문제는 그 단일한 충성 대상이 분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분열의 계기는 대략 서너 가지로 추정된다. 가장 흔히 회자되는 것이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갈등설이다. 이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김재규의 극적인 변화를 설명하기에는 무리이다. 그것은 양념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1979년의 심상치 않은 정세 변화이다. 김영삼 의원직 제명, YH 노조 신민당사 농성과 강제진압 그리고 부마항쟁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정국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갔다. 특히 부마항쟁은 김재규가 시위군중 틈에서 직접 현장을 확인하고 대중의 체제 이반이 심상치 않은 정도임을 체감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더욱이 부마항쟁은 그 대응 방법을 둘러싸고 차지철과 김재규 간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세 번째는 미국이었다. 미국을 빼놓고 한국 현대사를 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미국은 현대 한국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김재규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중정부장은 업무상 미 CIA 한국지부장과 밀접하게 관련될 수밖에 없는 자리였고, TV 드라마에도 많이 나왔지만 10·26 직전에도 김재규는 CIA 지부장 로버트 브루스터와 술자리를 같이했다고 한다. 

그런데 카터 정권의 인권외교와 주한미군 철수 정책에 대한 박정희 체제의 반발로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불거지는 등 당시 한·미관계는 최악이었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이를 매우 강조하면서 유신체제 지속과 한·미관계 복원은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충성 대상이 분열하면서 김재규는 극단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을 것이다. 권력 유지의 핵심인 대중적 지지, 미국의 지지가 모두 흔들리고 있음을 파악한 마당에 권력 내부의 응집력은 차지철과의 갈등으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각하와 국가의 동일시가 불가능해진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자명할 것이다. 이 무렵 중요한 사건 하나가 터졌다. 김형욱의 실종이었다.

김형욱이 1977년 미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에서 박정희와 유신을 비판하는 증언을 하고 있다(왼쪽 사진). 1979년 파리에서 김형욱이 행방불명된 소식을 다룬 경향신문 보도(오른쪽). |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형욱은 김재규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중정부장 중 한 명이다. 1963년 7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만 6년 넘게 중정부장 자리를 지켰던 김형욱은 안기부와 국정원을 합쳐도 최장수 정보기구 수장이었다. ‘멧돼지’ ‘돈까스’로 불리며 남산을 공포의 상징으로 만들어 정권 유지의 1등공신이 된 그였지만 말로는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김형욱 또한 애초에는 김재규처럼 국가와 정권 그리고 박정희를 거의 동일선상에서 파악했다. 게다가 이 동일시는 자신의 운명으로도 연결되는 것이었다. 김형욱도 자신의 행위를 혁명으로 파악했는데, 박정희의 권력이 유지되어야 이른바 혁명과업이 완수될 수 있고 자신의 운명도 여기에 종속된다는 사고였다. 이를 위해 1963년과 1967년의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 과정에서는 중정의 힘을 총동원해 개입하는 등 권력 유지의 최일선을 담당했다. 박정희에 대한 그의 충성은 자타가 공인했고, 심지어 권력 내부 인사라 해도 가차없이 제거하는 맹목과 잔인함의 근원이기도 했다.

그가 결정적으로 박정희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게 된 계기는 1969년 중정부장 해임이었다. 3선개헌을 밀어붙여 관철시킨 공으로 유임을 예상했지만 보기좋게 해임된 마당에 유신체제 성립 이후에는 유정회 의원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 중정부장 재임 시 자신의 행적을 잘 아는 그였기에 도처에 적들이 우글거리는 정글 속에 알몸으로 내던져진 꼴이었다.

김재규가 미국을 구원의 천사로 여긴 것처럼 김형욱 또한 미국이 삶의 젖줄이었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중정부장 재임 시 에드워드로 알려진 미국 CIA 지부장과 긴밀히 협력하는 장면이 곳곳에 나오는데, 퇴임 중정부장이 갈 곳도 역시 미국이었다. 

결국 김형욱은 미국 망명과 함께 배반의 길로 들어섰다. 김형욱도 김재규처럼 자유 민주주의를 근거로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박정희의 치부를 고발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두 중정부장의 충성과 반역 그리고 배반이 자유 민주주의를 중요한 근거로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두 사람의 극단적 행적을 보건대 그들의 이념적, 정치적 진정성이 흔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자유 민주주의는 이념이자 어떤 실체의 상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들이 그 실체를 미국으로 보았음은 분명해 보이는데 국가적, 개인적 생존의 문제가 그 실체에 달렸다고 본 셈이었다. 박정희를 비롯한 권력 핵심부의 거듭된 설득에도 불구하고 날선 비판과 폭로를 감행하던 김형욱은 1979년 10월1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되었다. 김형욱의 실종이 차지철의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그가 김재규의 명령으로 권총 살해되었다고 결론지었다. 

선배 중정부장이자 자신보다 앞서 박정희 비판에 나선 김형욱을 제거한 김재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자신의 손으로 박정희조차 살해하게 될 것을 예감했을까. 김재규도 김형욱의 행적을 배반으로 보고 제거에 동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박정희에게 바친 마지막 충성이란 설명도 있다. 그렇다면 10·26은 그 마지막 충성에 대한 최후의 배반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김형욱의 배반은 김재규의 반역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충성과 반역이 동전의 양면이라면 반역과 배반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는 것이다. 누군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했는데, 박정희의 중정부장들 역시 두 번의 충성과 반역 또는 배반을 비극적으로 반복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주민집단을 향해 최고의 충성을 요구하던 유신체제 내부에서 벌어진 충성과 반역의 드라마가 대중의 반역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10·26이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사이에 나타난 것은 우연만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광주는 1970년대의 저주이자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황병주 |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10) 스트리킹, 1974년 봄의 주변부 남성 ㆍ저항과 일탈, 그 갈림길에서의 해프닝


■ 가장 약하고도 가장 강한 ‘벗은 몸’

“어디서 용기가 나서 옷을 벗고 싸웠을까.” 정말이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서 속옷까지 다 벗어던지고 경찰에 맞섰을까. 200여명이나 되는 여성 노동자들이. ‘섹시’가 최고의 찬사로 통하는 지금도 옷을 한 꺼풀 벗어버리는 건 겁나는 일이겠거늘, 가부장제가 독했던 1970년대 한복판에 젊은 여자들이 나체가 돼 맞선다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1976년 7월25일,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나체 시위는 1970년대를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다. 한여름인데다 여러 날 농성 중이었던 끝이라 산더미같이 쌓인 속옷은 하나같이 ‘꼬질꼬질하고 더러’웠다고 한다. 그 속옷더미를 보니 “절로 눈물이 났다”고 시위 참가자들은 후일 회고한다. 그랬을 테다.

벗은 몸은, 가장 약하고 가장 강하다. 아무것도 지닌 것 없으되 그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한다. 1970년대를 통해 가장 상징적이고 가장 중요한 벗은 몸이라면 응당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몸을 꼽아야 할 터이다. 노동사에 있어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YH 사건과 더불어 박정희 시대의 종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동일방직에서는 나체 시위에 이어 1978년에는 예의 ‘똥물 사건’이 벌어져 여성 노동자의 삶, 그 극한의 억압을 몸 자체를 통해 확인케 해 주었다. “이 쌍년들아, 똥이나 먹어라! 이것이 뭣인 줄 아냐? 바로 개가 먹는 똥이다!” 욕설과 함께 분뇨를 뿌리고 심지어 억지로 입에 분뇨를 밀어넣은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같은 작업장에 근무하던 남성 노동자들이었다.


 

1974년 미국과 유럽,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주변부 남성’들의 스트리킹이 벌어졌다. 경찰은 음란죄·경범죄를 적용해 처벌에 나섰다. 사진은 일본 히로시마 번화가의 스트리킹(3월14일자). | 경향신문 자료사진

치안국의 형사처벌 방침을 다룬 경향신문의 보도(3월18일자). | 경향신문 자료사진



잘 알려져 있듯 1970년대 노동운동을 주도한 것은 경공업에 종사하던 여성 노동자들이다. 남성 노동자의 참여도는 극히 저조했던 것으로 전한다. 동일방직의 경우 보이듯 남성=어용, 여성=민주라는 식의 이분법이 작동하기 쉬운 사례도 드물지 않다. ‘큰오빠’ 전태일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던 남성 노동자들. 1970년대의 여러 사건 속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불만이 없었을 리 없건만 그것은 정권을 향하는 대신 흔히 주변의 약자를 상대로 배출됐다. 응당 동요와 분열이 있었을 텐데 그 또한 좀체 표면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들의 신체는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신체와는 전혀 다른 신체, 예컨대 1974년 한때 유행했던 ‘스트리킹’의 벌거벗은 몸에 가까웠다.

1974년 3월이었다. 1974년이라면 연두에 긴급조치 1호가 발효된 바로 그해다. 광복절 행사 때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피격당했던 해이기도 하다. 청년문화논쟁이 신문지상을 달구었던 것도 같은 연도다. 한편에서는 박정희 정권 위기설이 떠돌기 시작했고 각 대학 학생들은 3~4월을 목표로 대규모 시위를 일으킬 준비에 착수했다. “그 3월은 주지하다시피 대학가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음을 누구나 예감하던 시절이었다.”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실제적 귀결은 4월3일 서울 시내 몇몇 대학에서의 동시적 시위, 그리고 같은 날 발표된 긴급조치 제4호였다. 긴급조치 제4호는 ‘민청학련’이라는 조직을 거명하며 반정부 조직 일망타진을 예고했다. 1년여 후에는 긴급조치 7호를 발표해 옛 인혁당 관계자들을 한꺼번에 사형대로 보낸다. 1974~1975년 벌어진 일련의 정황은 박정희 정권이 국내외적 고립을 감수하고 비판 세력을 ‘소탕’할 태세에 들어갔음을 알려준다. 1975년 봄, 대학가에서 산발적 시위가 있었지만 주동자 제적에 휴교령이 잇따르면서 그나마 잠잠해졌다. 대한민국의 일상은 그야말로 ‘얼어붙었다.’ 갑남을녀들마저 공포를 일상적으로 체감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던 듯하다.

스트리킹은 권력과 반권력 사이 긴장이 최고로 고조된 순간 찾아들었던 해프닝이다. 처음 소식이 전해진 것은 ‘뭔가 일어날 거라는’ 예감으로 가득 차 있던 1974년 이른 봄. 3월 초 여러 신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미국에 ‘나체 질주’가 유행 중이라는 사실을 보도했다. 미국, 대학, 나체. 한두 단짜리 가십성 기사로나마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단어들이었다. 세계적 격변의 한복판이었다. ‘1968’로 상징되는 대규모 시위는 사그라졌지만 익숙한 옛 세계는 이미 사라져 버린 후였다. 1973년에는 마침내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했고, 그 전후 뮌헨 올림픽 테러(1972), 칠레 쿠데타(1973), 중동 위기(1973) 같은 사건이 잇따랐다.

미국에서 스트리킹이라는 희한한 퍼포먼스가 출현한 것은 1973년 초였다. 원인도 명분도 분명치 않은 채 이 퍼포먼스는 1년여 미 전역 캠퍼스를 휩쓸었다. 규모도 커졌다. 처음엔 단독으로 달리던 것이 1973년 중반부터는 ‘단체 질주’가 유행하기 시작, 메릴랜드 대학에서는 533명의 학생들이 나체로 거리를 뛰었고 조지아 대학에서는 1543명의 학생들이 벌거벗은 채 시내를 가로질렀다. 가끔 닉슨 대통령 탄핵 같은 정치적 의제를 결합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미국 대학생들에게 스트리킹은 그저 재미, 일회성 해소였던 것 같다. 스트리킹(streaking)의 원뜻이 말해주듯 그 전형적 행동 양식은 ‘질주’였다. 위반, 일탈, 저항, 질주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마침표.



‘스트리킹 서울 상륙’이란 제목의 20대 청년의 알몸 질주(3월14일자).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예술과 저항, 문화와 범죄의 사이 

한국에 최초로 스트리커가 등장한 것은 1974년 3월13일이다. 3월이지만 추워서 아침엔 영하 7도까지 내려가는 날씨였다 한다. 오전 8시를 좀 넘긴 출근길, 고려대 앞 안암동 차도 한복판에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성이 뛰어들었다. 뒤에선 친구인 듯 보이는 두 청년이, 한 명은 옷을 들고 한 명은 카메라를 겨냥한 채 따르고 있었단다. 청년은 200여m 되는 거리를 달리다 주유소 옆 골목으로 사라졌다. 외국의 스트리킹에 대한 신문 보도가 시작된 지 고작 일주일 남짓 됐을 때의 일이다.

이들이 누구였는지는 지금껏 알려져 있지 않다. 고대 앞 차도에 출현한 것으로 보아 학생이었거나, 적어도 학생으로 보이고자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카메라를 들었던 것으로 보아 젊은 예술가들이 벌이는 일종의 퍼포먼스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튿날 경향신문에서는 다른 사정은 불문에 부친 채 “스트리킹이라는 광태가 급기야 서울 거리에 출현하고 말았다. 참으로 통곡할 일이다”라고 썼다. 같은 날 일본에도 최초의 스트리커가 등장했다. 히로시마 시내를 질주한 이 스트리커는 맨몸인 채 헬멧을 쓰고 망치를 들고, 등에는 탄원한다는 뜻의 ‘강소(强訴)’란 글자를 크게 써 넣었다.

3월15일에는 전국적으로 세 군데서 스트리킹 사건이 있었다. 미군들이 벌인 해프닝을 예외로 하면, 서울 한남동에서는 20대로 보이는 장발 청년이 알몸으로 도로를 질주했고 충무에서는 27세의 구두닦이 청년이 충무극장에서 통영여고까지 시내 한복판을 달렸다. 후자의 경우는 현장에서 체포당해 구류 7일 처분에 처해졌다. 17일 밤에는 금호동에서 20대 인쇄공이 스트리킹을 하려 옷을 벗다가 체포됐다. 스트리킹을 하면 2차를 사겠다는 말에 즉흥적으로 벌인 일이었다고 한다. 이튿날 경찰청에서는 스트리킹에 대한 처벌을 강화, 공공장소에서의 음란행위죄를 적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즈음 전국적으로 다시 장발 단속령이 내렸는데 그것도 스트리킹 유행 때문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안암동 스트리커를 체포하기 위해 전담 수사반까지 편성됐다.

전국을 휩쓸 기세였던 스트리킹은 그러나 이후 신문 지면에서 사라진다. 연말의 회고를 참조하면 주요 신문사들이 보도 자제에 합의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마 여러 건의 스트리킹이 더 있었겠지만 “신문보도가 중지되자 스트리킹도 중지”됐다. 확인할 수 없지만 보도되지 않은 스트리킹 사건들도 20대, 남성, 구두닦이나 인쇄공 같은 직업을 가진 이가 벌인 일이었기 쉽다. 대학생이 중심이 된 해외 유행과는 달랐던 셈이다.충무에서의 27세 인쇄공은 스트리킹 막판에 통영여고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스트리커가 속칭 ‘바바리맨’과 달라 보이지 않는 지점이다. 외국에서도 스트리커들은 주로 백인 남성이었다. 한국에서는 사회적, 문화적인 파장도 크지 않았다. ‘스트리킹 시대의 청년문화’라는 선전문구를 내건 영화가 등장했으나 별반 관심을 끌지 못했고, 당대의 인기 작가 최인호가 <바보들의 행진> 말미에 ‘병태의 스트리킹’이란 장을 할애했으나 그마저 옷 입은 채 달리는 “토착화된 스트리킹”에 그쳤다.


■ 부조리한 체제에 ‘반기’를 들다

이른바 ‘도시 하층 남성’. 이들은 ‘선데이 서울’의 주요 독자층이었고 호스티스 문화의 광범한 저변이었던 한편 광주대단지 사건과 부마항쟁에서 저항의 도화선이 된 집단이었다. 1974년 봄, ‘질주’가 상징하듯 불만은 최고에 이르렀고 궐기는 산발적으로나마 출현하기 직전이었다. 다른 쪽에서는 학생과 지식인들의 저항이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두 흐름은 막 조우할 찰나였다. 일상생활에서의 불만이 익을 대로 익고, 그런 불만이 ‘이름’을 갈망하게 될 때, 그리고 먼저 절망하고 먼저 궐기했던 이들이 지은 ‘이름’을 대중이 허락할 때. 봉기는 그런 순간 일어난다는 것을 역사는 되풀이해서 보여준다.

개발의 열매를 서민에게 돌리겠다는 약속을 믿는 사람은 점점 드물어졌다. 박영복 대출사기 사건이 보여주듯 정부는 재벌에 한없이 관대했고, 연탄 파동이 보여주듯 서민들은 실패한 정책의 결과를 짐 진 채 허덕여야 했다. 주변부일수록 고통은 더 심했다. 스트리킹 사건의 주역들은 바로 이 주변부의 삶에 위치한 이들이었다. 동일방직에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똥물을 퍼부은 것도 아마 이들이었을 터다. 폭력으로써 여성 위에 군림했지만, 그러나 돌아서면 막막한 삶 앞에 허세는 사라졌다. 체제는 결코 그들 편이 아니었다. 폭발하듯 질주하여 체제를 넘어서고 싶은 욕망이 저 너머에서 꿈틀거렸다. 자기와 똑같이 보잘것없는 이들과 손잡고 싶은 마음도 솟아나지 않았을까.

한국의 스트리킹은 바로 그 사이, 갈림길에서 있었던 해프닝이다. 덜렁거리는 신체를 과시함으로써 한순간 뭇사람을 놀라게 하고 끝날 것인가, 혹은 온 힘으로 질주해 경계를 넘어설 것인가. 긴급조치가 잇따라 발동된 1974~1975년의 정국 앞에 이 동요는 움츠러들었다. 정권의 선전포고 앞에 도시 하층 남성 주체는 다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정권의 골칫덩이’이자 ‘말단 하수인’이라는 이중의 위치로 돌아간 듯 보인다. 이들의 얼굴이 다시 눈에 띄기 시작하는 것은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에 이르러서다.


권보드래 | 고려대 국문과 교수




(11) 유신시대 한국의 자살ㆍ죽음으로 ‘압축 성장’을 보이콧한 사람들


언젠가부터 박정희 시대가 무척 행복하고 살기 좋았던 시대인 것처럼 생각하는 착각이 퍼졌다. 누가 이런 거짓 신화를 만들어 유포했겠는가. 아무래도 공범 중 하나는 성장제일주의인 듯하다. 경제성장이 이뤄지면 ‘국민’이 (저절로) 행복해진다는 허구는, 평균 3%대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때문에 일제시대를 찬양하는 뉴라이트뿐만 아니라 ‘경제학 이데올로기’도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있는 바다. 관료나 기업가뿐 아니라 국민들 중에도 이 선전에 감염돼 있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그러니까 이명박의 747공약 같은 사기술도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성장은 물론 중요한 가치이지만, 문제는 성장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성장인가가 아닐까. ‘누구를 위한 어떤 성장인가’가 이슈가 아닐 때 성장의 의미는 퇴색한다.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의 말대로 성장은 민주주의와 함께하지 않을 때, 진정한 삶의 질 향상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니 결국 문제는 정치와 계급관계일지 모른다. 어떤 방향의 경제정책을 누구의 힘으로 결정하고, 성장의 과실 또는 손실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바로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처럼 금융이나 재벌이 유일한 갑(주권자)이면, 대다수 일자리를 비정규직화하고 철저히 1~10%의 인간만을 살찌우는 ‘성장’도 가능하다. 대다수 인간은 재벌이나 특권계급이 먹고 남은 성장의 부스러기를 떨어뜨려주기(trickle down)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대신 경기후퇴나 불황의 혹독한 대가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 치른다.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청년학생·야당·지식인, 그리고 일반 시민들을 무지막지하게, 거의 북한이나 나치를 방불할 수준으로 탄압했다. 그러나 유신시대의 사람들은 일상화된 억압과 감시,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반공 공안통치뿐 아니라 가난과 사회변동 때문에도 허덕였다. 박정희는 유신 말기에 자신의 주종목이라는 경제에서도 크게 실패했다. 물론 박정희 통치기간을 통틀어 실질임금이나 실질소득이 증가했지만, 불행은 별로 개선되지 않았고 사람들의 마음은 피폐해졌다. 


  

(좌)집단 자살하려는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해 죽음에서 벗어난 딸들(위·1963년 5월1일자)에 관한 당시 보도. | 경향신문 자료사진

(우) 직장 연애를 금지하자 함께 죽은 기업의 남녀 동료(아래 왼쪽·1963년 11월19일자)에 관한 당시 보도.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박정희 시대 사회 심층은 아노미 상태 

놀랍게도, 1960~1970년대의 한국도 지금처럼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자살률을 유지했다. 실업률이 낮고 사회적 통제가 강력했는데도 말이다. 연세대 의대 신경정신과 이호영 교수팀은 1965년부터 1988년까지 치안본부가 집계한 총 21만6374명의 자살기록을 분석한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에 있어서 자살률의 추이’란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에 따르면 박정희 집권 초기인 1965년의 자살률은 29.81명(이하 10만명당)으로 대단히 높았다가 1968년에는 24.56명으로 약간 떨어졌다. 그러나 박정희가 한 손에는 독재의 광기어린 칼을 휘두르고 다른 한손에는 공업화와 고도 경제성장을 구가한 유신시대에 오히려 자살률은 높아졌다. 1973년에는 자살률이 27.61명이었고 1975년에는 31.87명으로 정점을 이루었다. 이는 극심한 양극화와 무한경쟁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오늘날의 통계(2011년 31.7명, 2012년 28.1명)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1970년대 중후반에는 일반적인 자살 외에도 가족의 집단 동반자살 사건이 늘기 시작했다. 이는 대개 생활고나 가정불화에 지친 남성 가장이나 주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자살한 사건이다. 1976년 6월2일 서울 관악구 신림4동에 살던 야채행상 최모씨(32)의 부인 김모씨(26)가 각각 6·4·2세의 세 딸과 함께 쥐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쥐잡기날’을 맞아 통장에게 받은 쥐약을 카스텔라빵에 섞어 아이들에게 먹였다. 쥐잡기운동 때문에 정부가 전 국민에게 나눠준 쥐약은 곧잘 자살 도구로 사용되었다. 남편은 숨진 김씨가 평소 생활고에 시달려 고민해 왔다고 말했다. 

1977년 11월24일에는 부산 동래구 칠산동에 살던 이모씨(38)의 부인 장모씨(30)가 여섯 살인 장녀, 네 살배기 딸, 그리고 한 살배기 아들에게 극약을 먹여 죽이고 자기도 자살했다. 장씨는 무려 일곱 가구가 함께 세든 집에 살고 있었는데, 생활고 때문에 다른 셋방 이웃들의 물건을 훔치곤 했던 모양이다. 죽기 이틀 전에는 콩 몇 되를 훔쳤다가 들켜 죄를 자인했다 한다. 1978년 4월28일에는 경기 평택군 팽성면 이모씨(56) 집 건넌방에 세들어 사는 이모씨(45)가 방에다 연탄불을 피워놓고 큰딸(10), 둘째딸(8), 셋째딸(4), 막내아들(2)과 집단자살을 기도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먼저 연탄가스로 죽게 하고 자신은 목매 자살했다. 죽은 이씨는 2개월 전에 실직했고, 가정불화 끝에 부인 최모씨(34)가 3일 전 가출하자 이를 비관해왔다 한다. 

박정희 정권 통치 전 기간에 자살률은 상당히 높았지만, 정권은 이 문제에 대해 정책 수준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학자 정승화의 연구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유신정권은 자살률을 숨겼다. 자살률을 감추는 것은 냉전기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한 일과 같다. 전체주의는 자살을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국가에 저항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자살사건의 통계나 사건 자체를 숨기려 들었다. 

자살률이 높은 만큼 사회사업 차원에서 자살 예방과 상담 등에 대한 관심과 실행은 늘었다. 가톨릭교단은 1960년대부터 상담센터를 설립해 자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도왔다. 1976년 9월 ‘서울 생명의 전화’가 설립되면서 처음 상담전화가 설치되고 1978년에는 ‘도움의 전화’와 코미디언 심철호가 만든 ‘사랑의 전화’가 설치되었다. 


■ ‘사랑’이나 완성하려했던 정사(情死) 

1960~1970년대의 사회에서 오늘날과 확연히 다른 자살의 상황이 있다면, 비극적인 사랑에 빠진 남녀가 동반자살하는 정사다. 1963년 쿠데타를 일으켰던 박정희 각하가 대통령이 되어 힘차게 새 출발한 바로 그 해에 정사 사건이 많았다. 다양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주인공들이 ‘민족중흥’과 ‘경제개발’에 나서지 않고, 죽어서 ‘사랑’이나 완성하려 했던 것이다. 

그해 2월9일자 경향신문에 의하면, 유부녀이며 무려 “5남매의 어머니인” 34세의 정금자씨와 그의 어린 정부 21세의 대학생 이모군이 정사했다. 반대로 그해 11월에는 4남매의 아버지인 30대 중반의 직장인이 20대 초의 “바 걸”과 정사한 사건도 있었다. 또한 “처가 버젓이 있는 30대 남자가 그의 6촌 처제와 서로 사랑해오다가 결혼 못함을 비관 끝에” 같이 음독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65년에는 현직 검사가 다방 마담과 함께 정사한 사건이 일어나 꽤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서울지검 수원지청에 근무하던 33세의 김모 검사는 대구 경북고와 고려대 법대를 나와서 사시 8회로 임관했고 6년 전에 중매 결혼한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두 살 연상이며 다방을 경영하던 ‘애인’이 있었다. 

다방 마담과 함께 죽은 현직 검사(1965년 5월31일자)에 관한 당시 보도. | 경향신문 자료사진

검찰·군·국세청 등 권력기관의 남성 관료란, 남성들 중에서도 가장 자살할 확률이 낮은 부류가 아닐까. 웬만해서는 자기를 방기하지 않는, 자기관리와 보신에 확고한 부류의 인간이 아닌가. 오늘날 지배계급 남성이 룸살롱 마담 같은 애인과의 사랑 때문에 목숨을 함께 버리는 사건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물론 가정을 가진 고위관료나 현직 검사, 또는 중년의 교육자 중에 ‘이루어질 수 없는’ 진실되고도 비극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상식에 가까운 것은, 사랑은커녕 성상납 받는 검사와 경찰, 술자리 후 함께 성매매에 나서는 관료와 장교, 부하직원이나 제자를 성추행하는 공직자와 교육자들이다. 

분명한 것은 정사한 남성들에게 규범을 벗어난 ‘사랑’과, 그것을 고통으로 화하게 했을 ‘가정’은 오늘날의 그것과 의미가 미묘하게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런 시대는 1970년대 초까지 이어진다. 1966년 1월 부인과 5남매를 둔 집권 공화당의 경상남도지부 사무장(당 42세)이 애인과 함께 자살했고, 1971년 11월에는 50대 초의 초등학교 교감이 딸뻘인 20대 여교사와 함께 학교에서, 1971년 8월에는 사랑에 빠진 40대 교사와 여고생이 함께 설악산에서 정사한 일도 있었다.


■ 인간적 삶의 비상 상태가 만들어낸 ‘탈락 인간’

1974년 2월15일의 경향신문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인식의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자료 하나를 보여준다. 고려대 교육대학원이 서울과 경북 상주의 남녀 고교생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이다. ‘부모가 결혼을 반대할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는 설문에 약 33%의 고교생이 “단념한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 “집을 떠나서 결혼” 등 부모의 뜻을 거역하겠다는 취지의 답도 꽤 많아 46.24%였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정사한다”는 답변이다. 설문 대상 전체 청소년의 4.54%, 그 중 특히 경북지역 여성 청소년들이 8.2%나 “정사한다”고 답을 했다는 것이다. 

2008년에도 비슷한 설문조사가 있다. 오늘날 대학생은 결혼을 부모가 반대할 경우 “반대를 무릅쓰고 한다”(43%)는 대답이 “끝까지 설득해 보고 안되면 포기한다”(40%)는 응답보다 조금 많았다. 여기까지는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사한다”는 설문 문항 자체가 없다. 단지 이 차이는 10대들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총체적인 것일 터이다. 사랑과 삶에 관한 태도가 한 세대 전과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고도성장과 함께한 초고도 자살률은, 박정희식 근대화가 ‘인간의 피’를 동력으로 했으며, 정치적으로 북한과 다를 바 없는 전체주의나 전전 일본식 총동원 체제와 유사한 통제 상황이 펼쳐졌지만, 기실 사회의 심층에서는 ‘아노미’적 상황이 존재했음을 재확인해주는 수치가 아닌가 싶다. <자살론>의 사회학자 뒤르켐은 “사회질서가 심각하게 재적응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갑작스러운 성장이든 예기치 않은 재난이든 사람들이 자살하기 쉽다”며 자살이 증가하는 이유는 “위기(고비)” 때문이라 했다. 유신시대에는 자살률뿐만 아니라 살인·강도·강간 등 강력범죄 발생률도 1960년대보다 훨씬 높아졌다. 경제 문제 때문이든, 가족이나 농촌 전통사회의 해체 때문이든, 유신시대는 일종의 위기국면이자 인간적 삶의 ‘비상상태’였던 것이다. 그런데 마음 좋은 사회과학자들은 그것을 ‘압축 성장’이라 부르고, 박정희의 리더십이 성장의 가장 중요한 견인차였던 것처럼 찬양한다. 압축성장과 박정희 리더십은 수많은 ‘탈락-인간’을 만들었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12) 대중문화와 청년문화ㆍ‘유신의 금기’를 넘어서려는 욕망


얼마 전 1970년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었던 소설가 최인호가 세상을 떴다. 그는 유신 시절 ‘청년문화선언’(1974)에서 “전에는 침묵의 대중을 몇몇 엘리트들이 정의 내리며 주도하였고 이끌었지만, 오늘날의 청년문화는 엘리트를 인정치 않는다. … 오늘날의 청년문화는 침묵의 다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의 문화인 것이다”라며 기성세대가 청년문화를 저질, 퇴폐로 몰아붙이는 데 반박하며 통블생(통기타·블루진·생맥주) 문화를 옹호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청년문화도 역사의 뒤편으로 퇴장하는 듯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1970년대 대중문화가 복고처럼 우리 주변에 다가와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최근 ‘세시봉’으로 상징되는 통기타 가수들과 <불후의 명곡>이란 음악프로그램에 송창식, 신중현 등이 등장해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부모세대와 다른 정체성이 형성된 그 시절에 대한 애잔함이 아직도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대중문화의 시대가 도래하다 

1970년대가 정부에 조국근대화의 시대였고, 재야와 학생운동권에는 민주회복의 시기였다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바야흐로 대중문화의 시대였다. 도시에 무정형의 대중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196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제1차 경제개발 계획의 성과가 드러나며 물질적인 풍요에 대한 기대가 확산되자 다양한 취향, 문화, 습속의 향유와 함께 서구문화가 물밀 듯이 밀려와 전통을 여지없이 파괴하는 시대가 눈앞에 펼쳐졌다. 

대중문화의 확산이 체제 유지나 정부에 대한 획일적 동원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지식인들의 우려와는 달리 대중은 획일적으로 순응하지도, 수동적 존재로 문화상품에 마취되지도 않았다. 대중은 적극적으로 라디오, 텔레비전 등을 소비하고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특히 ‘통블생’으로 상징되는 청년문화가 유행하던 1970년대는 청년이 문화적 주체이자 시대적 특성으로 호명된 유일무이한 시기였다. 1970년대 대학진학률은 8.4%에 불과했지만 1980년에는 15.9%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학력자본과 문화자본은 이들에게 이전 세대, 다른 계급과 자신을 구별지을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줬다. 

‘청년문화’란 말이 처음 사용된 시기는 송창식과 윤형주가 결성한 트윈폴리오가 음악을 시작했던 1968년경이었다. 이 시기 문화적 취향의 두드러진 특징은 서구적 감수성이었다. 청년문화의 음악은 모던 포크, 스탠더드 팝, 팝 발라드, 로큰롤, 샹송 그리고 칸초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는데 그 출발은 서구음악의 번안곡이 다수였다.


‘북한 간첩에게 보내는 암호’라는 소문이 돌았던 가수 김추자의 손짓.



이전 세대가 식민지 체험으로부터 일본문화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었던 데 비해, 청년문화 세대는 소비와 구매력에 기초해 서구문화의 세례를 받은 최초의 세대였다. 이들의 손에 든 타임지와 뉴스위크지 등 영문 잡지와 원서, 뽕짝에 대한 반발심이 담긴 통기타 등은 그 세대의 감수성을 드러내는 도구였다. “기타 못 치면 간첩”이란 이야기가 돌 정도로 확산된 통기타 문화는 대중이 문화의 소비자에서 한 걸음 나아가, 문화의 생산자로 자리 잡아갔음을 보여준다.

한대수가 “통기타 세대라는 하나의 세대가 등장했다. 대학생들도 기타를 들고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음악의 수준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위대한 출발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회고했듯이, 이제 문화는 대중의 것이었다. 이들이 또래 서구 청년들의 스타일을 따라했던 것은 무조건적인 서구 취향을 넘어서는,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이었다. 유신체제라는 숨막히는 정치상황과 ‘민족중흥의 주체 되기’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거부하면서 ‘서구=자유로운 문명’을 지향하는 서구의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당시 청년문화를 대변하는 신중현·한대수의 앨범.


■ 소비는 퇴폐인가? 

유신시기 정부는 소비억제를 강조했다. 박정희 정부는 1970년대가 되면 소비가 미덕이 될 것이라고 주문을 외웠지만 말뿐이었다. 유신 직후 박정희 정부는 허례허식과 사치낭비에 대한 전면전쟁을 선언했고, 언론도 고고춤, 장발족, 골프, 유흥 등의 근절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긴급조치 3호를 통해 양주, 자동차, 귀금속, 골프,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등을 포함하는 사치성 소비품목에 대한 억제 정책을 실시했다. 

이처럼 1970년대 내내 정부는 퇴폐단속과 선도를 이어갔고 심지어 1975년 민간에서 ‘퇴폐풍조정화위원회’라는 요상한 이름의 조직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당대 최고 인기 가수였던 김추자에 대해 정부는 “저속한 창법, 퇴폐적이고 폭력적”이라고 규정했고, ‘거짓말이야’라는 노래에서 그녀의 손동작이 북한 간첩에게 보내는 암호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신중현이 1970년 시민회관에서 마련한 ‘고고 갈라 파티’라는 이름의 사이키델릭 쇼를 신문과 잡지는 퇴폐와 폭력의 온상으로 매도했다. 

문제적인 사실은 정부뿐만 아니라 지식인이나 대학생들도 ‘소비=퇴폐’라고 이해했다는 사실이다. 1971년 경향신문 ‘오늘날의 대학생’ 좌담에서 한 대학생은 소비문화를 부추기는 언론을 비난했다. 또 1974년 이슈가 되었던 청년문화 논쟁에 대해 대학언론은 ‘딴따라패’ ‘도깨비문화’라고 정면 비판했다. 단지 스타일에서 서구 하위문화를 모방할 뿐, 비판정신이 결핍된 문화가 청년문화이며 자신들을 ‘딴따라’에 대비되는 ‘화랑도’라고 불렀다. 이는 유신에 비판적인 대학생의 대중소비문화에 대한 시각이 정부와 묘하게 닮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소비억제와 저축을 강요하는 정부, 지식인들의 의지와 달리 대중의 소비는 갈수록 늘어갔다. 1969년 연간 커피 소비량은 125억잔, 맥주는 하루에 24만병이 소비됐다. 통계치를 보더라도 1961년 민간소비지출 총액은 2457억원이었는데 1977년에는 10조원으로 엄청나게 늘었다. 정부는 소비 억제를 강요했으나 소비의 규모 자체가 엄청나게 커졌다. 뭐니 뭐니 해도 1970년대 대중의 소비능력을 판별하는 지표는 내구성 상품인 텔레비전, 라디오, 세탁기 등이었다. 정부는 이들 상품을 사치성 품목으로 지정했지만 텔레비전 180만대, 냉장고 85만대, 세탁기 26만대가 팔리는 등 이들 상품의 소비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점차 필수품이 되어갔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텔레비전 보급률이 80%까지 치솟았다. 대중소비 시대의 대중에게는 구매가 ‘행복’인 동시에 ‘주류문화의 편입’ 수단이었던 것이다. 


 대학가의 퇴폐 반대 시위


■ 서울에 고고홀을 허하라: 폭발하는 대중, 대중문화


몇 년 전 유신 시기 전설의 음악 그룹을 주인공으로 한 <고고70>이란 영화가 있었다. 이는 1970년대 상황에 상상력을 더한 극영화지만, 당시 대중문화를 둘러싼 진실도 포함하고 있다. 오후 7시부터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새벽 4시까지 문을 여는 ‘나이트 클럽 문화’에 대해 정부는 유신 선포 이전까지 방관했다. 속칭 ‘고고족’은 당국의 단속을 피해 지방원정, 고고파티, 유원지에서 춤판을 벌였다. 1972년 10월13일자 만화 ‘고바우’를 보면 고고춤에 빠진 딸이 집안에서 춤 연습을 하자, 어머니는 딸이 잡혀갈까 봐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으나 딸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춤 연습을 할 정도로 그 열기는 대단했다. 결국 1975년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청소년, 부녀자가 술에 취해 춤을 추는 것을 풍기문란, 퇴폐로 규정하고 같은 해 6월 유원지 풍기문란 단속으로 780여명이 잡혔다. 

공전의 히트를 거둔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서 영자가 입은 엉덩이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 뒤축을 눌러 신은 운동화 등 여성성이 제거된 중성적인 옷차림, 성별을 구분하기 어려운 장발 등은 부모세대를 거스르는 반세대의식의 상징이었다. <별들의 고향>에서 등장하는 연애담도 통속적이라고 비난받기보다 당시 신세대의 감수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남녀탐구생활’이었다. 이처럼 최인호는 1970년대 대중문화와 청년문화의 현실을 ‘날것의 언어’로 대중에게 전달해 주었다. 


미성년자·장발자의 입장을 금지한 다방


하지만 청년문화 가운데 정치적으로 해석되어 박해를 받으면서 상당 기간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진 경우도 있다. 1974년 초반까지만 해도 통기타를 중심으로 한 포크음악은 불온하지도 퇴폐적이지도 않은 것으로 인식됐고, 대학가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 불길 같은 호경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1973년,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1974년 앨범이 나오자마자 금지됐다. 약간만 사회적 메시지가 있거나 퇴폐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을 경우 유신의 철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마지막 철퇴는 1975년 11월 연예인 40명이 포함된 대마초 파동이었다. 당시 만화에선 신중현의 ‘미인’을 비유해, “한번 피고 두 번 피고 자꾸만 피고 싶네”란 대사가 등장할 정도로 그 충격은 컸다. 요즘 말로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던 포크팝과 포크록은 침묵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대중문화와 통기타, 장발족으로 상징되는 청년문화는 ‘유신의 공적 1호’였다. 하지만 검열, 탄압, 물리적 제재 등으로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용광로같이 확산되는 대중의 소비 욕구와 대중문화에 대한 취향 자체를 금지할 순 없었다. 민족중흥과 국적있는 교육을 강조했던 유신시대의 흐름과 이들이 지향했던 삶의 스타일은 조화되기 어려웠다. 이들의 감수성에는 교련, 학도호국단 등 유신체제의 학교에서 누릴 수 없던 자유를 향한 동경, 우울하고 신파로 가득찬 한국 사회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내재되어 있었다.

송창식의 ‘고래사냥’의 가사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 앉았네”에서 느껴지는 정조인 우울, 슬픔, 비탄 등은 과장이 아니었다. 동시에 국가와 민족,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강요되었던 정신개조 프로그램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비록 대중문화의 내용 자체가 저항적이지 않았을지 몰라도,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의 마음속에는 민족중흥이란 외침만으로 가득 찬 유신체제에 대한 불만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김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



(13) 총과 권력 : 1970년대의 총기 사건 - 억압과 부조리를 겨눈 ‘분노의 총성’


■ 총을 든 사람들

1981년 김홍신은 <인간시장>의 주인공 이름을 ‘권총찬’에서 ‘장총찬’으로 바꿔야만 했고, 그 덕에 그 이름은 어딘가 묘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권총을 장총으로 바꾼 것만으로 상상의 방향이 달라진 것이다. 소설 집필 20여 년 전, 짙은 선글라스에 권총을 차고 등장한 이들은 이제 사라진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 후예들이 똑같은 권력을 휘두를 만큼 세상은 별로 변한 게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총 한 자루는 여전히 권력의 상징이자 권력 그 자체를 상기시키는 실체로 군림하고 있었다. 총을 든 이들이 한국사회의 전면에 등장한 이래, 그 중심부 인사들은 총을 실질적인 힘을 과시하는 도구로 진지하게 활용했다. 번번이 총부리를 겨누었다던 경호실장 ‘피스톨 박’이 총을 내려놓게 된 것이 문세광의 탄환 때문이었던 것이고 보면, 총은 권력 기제 속에서 상징적인 동시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톱니바퀴였던 셈이다. 

총이 얼마나 대단한지, 군사정권 하에서 총은 절대적인 힘의 상징이었고, 의심받을 수 없으며, 함부로 공유할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총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큰일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1970년대에 총기 사건은 신문지상에 자주 등장한다. 무장 탈영병의 난동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민간 영역에서 발생한 총기 사건은 군사정권의 통제력을 의심케 만든다. 1970년대를 연 총기 사건이 바로 ‘정인숙 살해사건’이다. 지금껏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이 사건은 당시 야당에서 권력형 스캔들 의혹을 제기할 만큼 큰일이었다. 그러나 범행에 쓰인 총기도 찾지 못한 채 사건 재판은 종결되었고, 언론에서도 이를 권력의 차원에서 다루지 않았다. 대신 몇몇 사적인 배경을 중심으로 윤리 차원에서 시도된 평가가 있었을 뿐이다. 

정인숙

한 신문기사는 “총기를 소지할 수 있는 신분이 제한된 우리 사회에서 볼 때 이런 사건의 실마리는 수사기관이 밝힌 점들과는 다른 방향”에서 문제를 제기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기사 내용은 ‘인륜부재와 사회도덕의 타락을 집약한 사건’이라는 점만을 강조했다. 기사가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서구화로 인한 전통적 가족제도의 붕괴, 아버지의 부실한 가정교육, 그리고 형제의 열등의식 등이었다.(경향신문 1970년 3월21일자) 한국 사회에서 총이 가진 특수성을 이해하면서도 윤리 도덕이나 개인적 콤플렉스를 탓한 학자들의 진단에는 총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가 들어있다. 총기 사건은 권력 층위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한 개인의 우발적인 과오일 뿐이라는 것이 동의의 요지일 터다. 이들의 분석을 끝으로 진범의 존재는 물론, ‘소지할 수 있는 신분이 제한된’ 총이 어떻게 개인의 음란과 방탕의 죗값을 치르는 데 쓰였는지에 대한 의문도 함께 묻혀 버렸다.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총은 극도의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총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없지만, 그에 굴복해야 하는 권력을 직접 가리키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상징이자 실체라는 점에서 총은 쉽게 언급할 수도 없다. 총의 맥락을 삭제한 채 윤리 문제로 분석한 학자들의 발언 역시 독재를 직시하고 비판하는 것이 불가능한 1970년대의 시대적 증후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1972년의 ‘방성자양 사건’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되었다. 전성기가 지난 여배우가 쏜 총에 도둑이 맞고 쓰러진 이 사건에는 공군장성이 개입된 병역비리와 난잡한 재벌 2세 등의 시대적 코드가 얽혀 있었다. 그러나 이는 곧 아름답게 봐달라는 유행어만 남긴 채 주간지의 흥밋거리로 떨어져버렸다.

■ 1970년대를 쏜 2인조 강도

권력의 상징으로서 총은 명확하게 분석되기를 거부했지만 1970년대 내내 총기 사건은 끊이지 않고 일상에 충격을 전했다. 일차원적인 총기 사고 외에, 총은 주로 범죄 도구로 쓰이며 왜곡된 힘을 과시했다. 범죄자들의 총은 은행, 금은방, 택시기사들을 표적으로 삼았고 인명을 앗아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권력의 차원에서 은폐되는 사이, 총이 가진 힘은 일상에서 범죄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재현되기에 이른 것이다. 비교적 소규모 사건으로 이어지던 총이 일상의 한복판에서 폭발력을 발휘한 사건이 1974년 이종대, 문도석의 카빈소총강도 사건이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2인조 총기강도의 2년여에 걸친 범죄행각은 경찰과의 대치 중 가족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파국으로 끝이 났다. 

언론의 입장은 이전 총기 사건과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이복형제의 멸시로 인해 중학 때부터 탈선’이라든지, ‘계모 구박에 부모 원망 포악해져’(동아일보 1974년 7월29일) 등의 소제목에서 보듯, 신문보도는 범죄의 원인을 개인의 불우한 과거에서 찾으려 했고 이종대, 문도석을 삐뚤어진 생각으로 엄청난 죄악을 저지른 악인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총기강도 자체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을 준 것은 결말의 참혹함이었다. 자식과 아내를 살해하고 자살로까지 몰아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종대는 유서에서 피해자에게 용서를 빌고, “태양아, 큰별아 아빠를 용서해줘, 너희들 뒤따라간다. 황천에 가서 집 마련해서 호화스럽게 살자. 냉혹한 세상에 미련 없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여기에 잔학한 살인강도 대신 한 가장의 극단적인 비정이 묻어났음은 물론이다. 언론에서는 유서를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정서적 반응과 상상은 사건 너머에 이른다. 박완서는 “아무리 죽도록 일해봤댔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든지 했을 건 뻔한 일이다. (중략) 여기에도 간단하게 극악무도하다고만 단정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는 있다고 본다”(‘비정’,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평민사, 1977)라고 말하며, 그들의 극단적 선택에 대한 책임을 우리 사회가 나누어 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최인호는 <지구인>에서 두 사람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잔인한 범죄의 또 다른 원인을 찾았다. 이 소설에 따르면 그들의 범죄 이력에는 격정적인 악마성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이후 1970년대까지 온갖 고난이 두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갔고, 그에 맞서면서 그들은 점차 괴물로 변해간 것이다. 소설에서 특히 인상 깊은 부분은 이종대가 총을 대하는 순간이다. 최인호는 이종대가 총을 처음 쥐는 순간 운명처럼 악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묘사했다. 타인을 굴복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힘-권력이 총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종대는 희대의 악인이 된 것이다. 어떻게 한 인간이 거대한 힘의 유혹에 빠져들고 악과 조우하는지를 보여준 것이 소설 <지구인>의 공감대였다. 소설적 상상력을 제쳐두고서도, 이 사건은 여러 층위에서 한국 사회를 들쑤셔 놓았다. 사상 최대의 인원이 동원된 수사과정에서 300여건의 강·절도 용의자를 검거한 것이 부수적 성과였지만, 수사 중에도 유사한 총기강도 사건이 벌어졌다는 점도 의외의 결과였다.

동일범의 소행으로 지목된 1973년 5월의 권총납치강도는 카빈소총강도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총기강도는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권력의 도구로 보였던 총이 그 권력의 바깥에서 악의 형태로 쓰인다는 사실 역시 이 사건이 드러낸 시대적 진실 중 하나였다. <지구인>에 따르면, 총은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을 만큼 강렬한 악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총이란 극단적인 폭력의 도구임은 분명하다. 그 점에서 이종대와 문도석을 옹호할 여지는 없다. 중요한 것은 총에는 악의 기운도 선한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두 강도가 악으로써 증명한 총의 절대성은 권력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재현된다. 악에서든, 권력에서든 총은 최종적인 폭력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총은 이 같은 억압의 상황과 메커니즘의 유력한 증거였을 뿐이다. 

1970년대의 총기 사건은 최고의 권력형 스캔들인 ‘정인숙 살해사건’에서 시작해 자신의 움막을 불태운 철거반원 4명을 때려 죽인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에 이르기까지 유신시대의 저변을 반영했다. 사진은 가짜 총을 만들어 철거반원을 제압했던 범인 박흥숙이 현장 검증을 하는 모습이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무등산 타잔’ 박흥숙의 총 

살인만을 목적으로 한 극단적 경우를 배제한다면, 총은 다양한 맥락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매개가 될 수 있다. 1977년 4명의 철거반원을 때려죽인 ‘무등산 타잔’ 박흥숙이 만든 총이 그러했다. 박흥숙에게도 총이 있었다. 그 총은 호신용으로 만든 딱총 수준의 것이라도 건장한 철거반원 일곱을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무등산 타잔이니 이소룡 뺨치는 무술고수니 하는 것은 이후에 붙은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지은 무등산 자락의 움막에 철거반원이 불을 놓자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은 만큼 박흥숙은 삶을 내걸고 권총을 들어 극한의 분노를 표출했고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무허가 건물 철거가 취미라는 대통령의 광주방문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시행된 무등산 정화사업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유신개헌으로 취임한 대통령에게 “국민총화를 위한 무궁한 지도력과 우리 민족의 숙원인 평화통일”을 기원한 가난한 고시생 청년의 집을 보이지 않으려고 말이다. 이 상황이 알려지면서 이화여대 총장 김옥길을 포함한 각계 인사들이 구명운동을 펼쳤다. 대통령의 영애도 구명운동을 지지했다고 알려졌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에게 총이 없었더라면 철거반원들도 그렇게 제압당하지 않고 정화사업도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 결과적으로 총을 쥐는 순간 상황은 달라졌다. 총은 살인의 증거가 되든 생존투쟁의 수단이 되든 극단적 결과를 피할 수 없었다. 쿠데타 세력이 한강을 건넜을 때처럼, 박흥숙은 자신이 만든 사제 권총에 운명을 넘겼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총의 힘으로 모든 사람을 굴복시켰지만, 후자는 4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그 역시 총에 희생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박흥숙에게 총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신의 집이 무너지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지 않는 이상 저항의 수단은 분노만큼이나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총이 아니었더라도 그의 분노를 누가 막을 수 있었을까. 총이 아닌 어떤 것이라도 그의 손에서는 총과 같은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혹여 그가 제압당했다고 하더라도 그 분노가 변할 수 있었을까. 좌절과 분노를 강요받은 이에게 총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 외에는 주어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 비극의 근원이었다. 총으로 흥한 자 총으로 망한다는 진리가 박흥숙과 같은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는 것 또한 우리 사회의 슬픔이다. 

1970년대 권력이 배반의 총성으로 마감되었지만 그 권력의 핵심은 건재함을 확인할 때 총과 권력의 조화는 더욱 끔찍해 보인다. 무등산 타잔의 총은 참으로 허망했지만, 지금 우리가 그것 말고 무엇을 쥐어야 할지를 아직 묻고 있는 듯하다.

<김성환 | 부산대 HK연구교수>



(14) 고교 평준화 - 평준화로 포장한 ‘국민총화’


■ 불평등을 위한 평등한 경쟁

1974년 2월14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서울과 부산에서는 사상 최초로 고등학교 배정을 위한 컴퓨터 추첨이 진행됐다. 이른바 ‘고교 평준화’가 시행됨으로써 중학생들이 악명 높은 고교 입시지옥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도 평준화 정책이 살아있기는 하지만 특목고, 자사고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거의 좀비 수준의 생존처럼 보인다. 평준화는 사실 경쟁의 확산과 강화를 위해 기회의 평등을 확대하는 (신)자유주의 기획의 연장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사회는 기회의 평등을 형식적 수준에서나마 최대화하고자 했던 이 정책마저 ‘유신의 좀비’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끔찍해졌다. 

고교 평준화 정책은 1972년 11월경부터 준비됐다. 당시 문교장관 민관식 주도로 시안이 만들어져 1973년 2월20일 박정희 재가를 거쳐 28일 기본 계획이 확정 발표됐다. 1974년 서울과 부산을 시작으로, 1975년 대구·인천·광주, 1979년 대전·전주·마산·청주·수원·춘천·제주 등 전국으로 확대됐다. 

평준화는 당대 많은 사람들의 열망이었다. 이미 일제시기부터 보통학교 입시경쟁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해방 이후 학교 교육이 대폭 확대되고 계층 상승의 유력한 사다리임이 확인되면서 과열 경쟁 분위기는 숱한 사회적 부작용을 낳았다. 학부모들의 경제적 부담은 말할 것도 없고 입시경쟁에 내몰린 학생들의 피해가 심각했다. 전인교육은 고사하고 신체발육조차 지장을 받는가 하면 극단적으로는 입시 실패로 자살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69년 시행된 중학교 평준화 정책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중학교 평준화 정책은 입시지옥을 고등학교 입시로 유예한데 불과했기에 고교 평준화가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고교 평준화 이전, 한 중학생이 부모의 응원을 받으며 입시를 치르기 위해 시험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평등과 자유의 대립’ 사회적 논쟁 치열

평준화 정책은 시행을 전후해 커다란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찬성하는 쪽이 입시과열과 교육비 부담 등을 주요 근거로 들었다면, 반대하는 쪽에서는 민주사회의 자유경쟁 원리에 어긋난다는 점과 함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평등한 경쟁력 저하라고 비판했다. 당시 연세대 최정호 교수는 이 논란을 ‘평등과 자유의 대립’으로 요약했다.(경향신문 1978년 5월23일자) 평준화 반대 입장의 한 예는 저명 언론인으로 경향신문 회장이자 5·16장학회장을 맡고 있던 최석채였다. 그는 경향신문 1975년 11월3일자에 실린 ‘인생의 컴퓨터 의존’이라는 제하의 칼럼에서 ‘인간사회에서 생존경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규정하고 평준화가 ‘적자생존의 철칙’을 무시해 학력저하만을 초래하는 비현실적인 정책이라고 맹비난했다. 시인 황동규는 학력 차가 있는 학생들을 한 교실에서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고, 소설가 최인호는 경쟁의식 실종으로 방관자 의식이 조장될 것을 우려했는가 하면, 심지어 당시 평준화를 준비했던 입시제도협의회 위원장 서명원조차 “지나친 평등사상은 앞으로 올 무한경쟁 시대에 인적자원의 고갈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반대했다. 

반면 유종호는 1977년 6월2일자 동아일보에 ‘무시험제도’라는 제하의 칼럼을 기고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평등 관념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사회적 다위니즘은 실상 깡패의 논리에 다름 아니며 과거의 식민주의가 이를 잘 보여주었다는 주장을 폈다. 

논란은 정치권으로까지 확대돼 공화당과 유정회가 나서 평준화 확대에 제동을 걸었다. 1975년 국회에서 신민당 천명기 의원의 문제 제기가 있었고 1976년 공화당 손승덕 의원이 자유 경쟁제도로의 환원을 주장했다. 이듬해 1월에는 공화당 정책위를 통해 재차 문제가 제기되어 정부에서도 “경쟁제도를 보다 강화하는 방향에서 검토”를 하게 되었다. 결국 환원되지는 않았지만 경쟁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압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논란 속에 평준화 정책을 밀어붙인 유신체제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주무 장관이었던 민관식은 “속칭 KS 마크가 출세의 척도가 된다는 사회의 그릇된 통념은 국민총화에 역행”된다는 신념으로 정책을 추진했다고 술회했다. 논란이 일기는 했지만 여론도 대부분 평준화에 우호적이었고 대다수의 학부모들은 더 많은 교육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절대적 지지를 보냈다. 당시 사학들도 대부분 찬성 입장이었는데, 재정보조 및 정원모집난 해결과 함께 새로운 명문고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렇게 보면 유신체제의 평준화 정책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 기반을 가졌다고 보인다.

그런데 민관식의 발언 중 ‘국민총화’가 눈길을 끈다. 박정희는 쿠데타 초기부터 학벌, 문벌, 각종 파당의식, 교파의식을 비판하며 종친회, 문중회, 화수계(花樹契)는 물론이고 향우회, 도민회, 군민회에다 심지어 각종 학회, 클럽마저도 파당을 형성해 국민을 분열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고로 “우리가 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특수 특권의식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정희의 사고는 유기체적으로 통합된 민족이라는 신화에 고착되어 있었기에 갈등하는 사회 또는 사회적 적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 교과서 ‘국정화’ 정당성 찾는 논리로 작용

유신체제의 국민총화는 최고 권력의 명령에 전 국민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동원체제를 요구했다. 특수 특권으로 표현된 그 어떠한 중간 단계의 교란세력도 용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유신체제의 평준화는 평등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균질화와 동질화에 기반한 수직계열화를 의도한 것이었다. 

그것은 평준화를 계기로 교과서 국정화 움직임이 정당화되는 논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1976년 교과서 국정화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교과서 집필자들과 출판사들이 이구동성으로 “국위를 떨어뜨리며 시대에 역행하는 처사”라고 비판했음에도 한성중학교 박승국 교장은 중·고교 평준화가 된 마당에 교과서 국정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동아일보 1976년 8월28일자) 박 교장은 교과서 국정화의 가능성을 평준화에서 끌어오고 있는데 이는 곧 평준화가 국가 중심의 동질화, 획일화로 이해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물론 동질화는 경쟁과 그 결과에 따른 수직적 계층 구도와 결합되는 것이었다. 평준화가 학연질서와 입시과열을 약화시키는 데 일정한 효과를 거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경쟁이라는 잣대로 평가하자면 사태는 다르게 보인다. 평준화 반대론의 주된 근거가 경쟁의 약화였지만, 실제 정책 시행으로 경쟁이 약화되었다고 보는 것은 일면적 파악이다. 오히려 경쟁의 확산, 장기화를 통해 전반적으로 경쟁이 재강화되는 것이 기본적 흐름이었다. 

평준화 정책에 따라 무작위 고교 배정을 위해 컴퓨터 시스템이 도입됐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즉 평준화는 기존 질서의 해체였지만 그것은 새로운 명문으로의 도약을 위한 기회로 여겨짐으로써 수많은 고교를 경쟁으로 새롭게 끌어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른바 신흥 명문 고교의 등장은 평준화 속의 경쟁이 어떤 식으로 확산, 재구성되었는지를 웅변한다. 기존 명문 고교들은 수성의 차원에서, 신흥 명문을 꿈꾸는 고교들은 공세의 입장에서 전면적인 경쟁의 장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평준화 이전까지 소수 명문 고교를 제외한 여타 학교들은 사실상 대학입시라는 경쟁을 포기한 상태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중학 평준화와 고교 평준화가 결합됨으로써 대학 입시로 경쟁이 집중됐고, 이는 그만큼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인 경쟁 체제가 작동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고교 평준화는 말 그대로 고등학교를 균일하게 조절해 경쟁을 확산, 강화시켰는데 이는 국가개입을 통해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보장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 논리와 통하는 것이었다.

학교 간 경쟁 강화는 학교 내부로 곧장 연결되었다.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었지만 우열반 편성이 일반적 현상이었고 우등과 열등 간의 경쟁, 탈락자에 대한 배제와 멸시가 구조화됨으로써 경쟁은 학교생활의 기본 문법이 됐다. 경쟁 논리에 기반한 우열반 편성은 수많은 갈등과 상처를 양산했다. 사람 취급하지 않는 우반 학생들을 죽이고 싶었다는 증언이 있었는가 하면 1975년 전남 순천에서는 실제로 사소한 시비 끝에 열반 학생이 우반 학생을 우산대로 찔러 죽이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고교 평준화 시행 2년 뒤인 1976년 서울과 공주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교육비 지출 증가는 다른 항목을 능가했다. 주된 이유는 평준화 정책의 파급효과로 해석됐다. 가계당 교육비 지출은 총 수입의 24~27%를 차지해 일본의 7%에 비해 3~4배에 이르렀다. 무려 78%의 학부모가 무거운 부담에도 교육비 지출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35%의 부모들은 남아의 경우 대학원 진학까지 희망했다.(경향신문 1976년 2월7일자) 

평준화의 결과로 1979년 진학률은 중학교 93.4%, 고등학교 81%를 기록했다. 절대 다수의 학생들이 중등교육을 이수하게 된 상황에서 4년제 대학 진학률은 25%에 머물렀다. 그 결과 1978년 대학 입시생 31만9000명 중 9만명 정도만 대학과 전문학교 진학이 가능했다. 요컨대 재생산 과정의 최종 경쟁 관문이 대학으로 상승했고 학생들은 12년간 경쟁상태 아래 놓이게 된 셈이었다. 유신의 아이들은 이미 유아기부터 각종 예체능은 물론 허다한 경연대회, 실기대회로 내몰리는 비정상적 상황이었고, 어느 대학 신입생의 16%가 정신질환 증세를 가지고 있다는 조사가 나오는 형국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과외금지와 대학 졸업정원제 실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불가피한 반응일 수밖에 없었다.

■ ‘공평한 기회’ 내세워 수직적 계층구조 합리화

결국 평준화는 실질적 평등 대신 기회의 평등으로 연결됐고, 그 결과에 따른 수직적 계층 구조를 합리화하고 강화했다. 공평한 기회가 부여되었음에도 자기가 공부를 못해서 ‘공돌이, 공순이’가 된다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제도적 뒷받침으로 시대의 상식처럼 돼버린 것이다. 따라서 평준화를 자유 대 평등 간의 대립으로 보는 것은 사태의 일면만을 보는 것이다. 평준화가 기존 명문고의 특권동맹을 약화시킨 것은 맞지만 새로운 특권의 등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경쟁을 내건 (신)자유주의로의 길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었기에 아이들은 ‘배워서 남 주냐’라는 근대적 격언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입시전쟁의 전사로 나서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소수의 되바라진 엘리트보다 국민총화를 위한 멸사봉공의 대중 전사를 기대했겠지만 어린 전사들의 전투는 내전에 가까웠다. 그들이 경험한 이 자연상태의 전쟁이야말로 사회상태의 진정한 맨얼굴이었다. 이 전쟁은 전사자조차 좀비로 살아갈 것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영겁회귀의 전쟁이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자 동지인 야누스가 되어야 했던 이 분열증적 경험을 빼놓고 오늘의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병주 |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15) 영화, 검열과의 공존ㆍ권력의 시선, 스크린을 지배하다


■ 검열, 상상력을 제한하다

1970년대 영화는 ‘저질영화’로 평가된다. 1970년대는 동시에 영화 위기의 시대였다. 이는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확산, 대중 오락성향의 다양화 때문이기도 했지만, 퇴폐·문란 등 ‘반사회적·반민족적’ 문화콘텐츠에 대한 검열과 금지가 일상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검열이란 대중의 현실에 대한 이미지와 상상의 경계를 구획하는, 즉 대중이 진실이라고 믿기 바라는 현실의 내용과 범위를 조정하는 행위였다. 이 시기 영화를 검열이 필요한 ‘저질’로 평가할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유신 시기는 교련검열, 원고검열, 기사검열, 대학 강의 검열 등 모든 것이 검열에 둘러싸인 시기였다. 특히 대중과 감성을 나누는 매체인 영화에 대한 검열이 매우 심했다. 당시 영화 검열은 제작신고 시 각본 심사, 제작단계에서 시나리오 검열, 완성 필름 실사검열 등 세 단계에 걸친 장치가 존재했다. 1971년 하반기 국가비상사태 선포 이후에는 해외영화제 출품 영화까지 검열을 해서 검열관이 ‘영화제 프로그래머’란 비아냥이 있을 정도였다. 1973년에는 유신영화법으로 불리는 영화법 제4차 개정이 이뤄졌다. 그 골자는 영화진흥공사 신설과 검열 강화였다. 1975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시나리오 심의가 문공부에 사전 보고되도록 하는 ‘문공부의 새로운 정화 지침’이 발표되어 검열이 더욱 강화됐다. 1976년에는 공연윤리위원회가 만들어져 행정기관이 검열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검열 기준이 강화되면서 영화 시나리오 반려 비율도 1970년 3.7%, 1971년 25%, 1972년 58%, 1975년에는 80%로 크게 증가했다. 

유신시기 정부가 장려했던 것은 ‘국책영화’였다. 영화는 정부정책 홍보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해 영화진흥공사로 하여금 문예, 반공, 계몽 등 부문에서 국책영화를 제작하도록 했다. 국립영화제작소에서도 경제발전, 민족중흥 의지, 호국선현의 업적을 담은 문화영화를 만들었다. 또 제4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 수입영화쿼터제가 만들어져 한국영화 3편당 외화수입권 1편을 배정했다. 영화 제작사들은 흥행이 보장되는 외국영화 수입을 위해 한국영화 3편을 의무적으로 제작했는데 이는 질적 하락을 가져왔다. 이 밖에 문공부 사전 승인으로 민족사관, 정부시책, 반공 등을 소재로 한 영화를 장려하는 한편 대종상 수상 등 인센티브를 통해 정부 목적에 맞는 영화 제작을 독려했다. 영화진흥공사 주도로 유신이념의 생활화와 새마을 정신 함양을 고무하는 영화를 대종상 수상작으로 선정했고 1976년부터는 민간영화사에도 국책영화 제작을 의무화했다. 

대표적인 국책영화인 민족수난을 영상화한 작품으로는 <세조대왕>(1970), <성웅이순신>(1971), <난중일기>(1977), <세종대왕>(1978), <율곡과 신사임당>(1978), <호국팔만대장경>(1978)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영화에서 남성 지도자들은 국가를 수호하고 민족을 이끄는, 냉전 시기 람보 같은 ‘하드 버디’ 영웅으로 등장했다. 민족수난기에 민족의 아버지인 남성 영웅들이 백성과 혼연일체가 되어 민족을 수호하는 유신체제의 총화이데올로기를 은유하고자 한 정치적 목적이 노골화된 것이었다. 

■ 검열은 영화에 대한 탄압이었나?

1960년대 이미 <7인의 여포로>로 곤욕을 치렀던 이만희는 1973년 국책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영화진흥위원회 설립 기념작으로 제작했다. 이 영화는 2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임권택의 <증언>(1972)과 더불어 1억원이 넘는 예산을 국방부에서 지원 받았다. 그러나 잔인한 공산당의 폭력에 맞선 반공이데올로기가 이 영화를 지배하길 원했던 정부와 달리, 이만희는 반공이 아닌 반전에 초점을 맞춰 전쟁으로 희생된 국민의 상처와 허무를 드러내고자 했다. 결국 이만희는 편집권을 포기했고 이후 그의 연출활동은 폐점휴업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서편제>로 널리 알려진 임권택 감독 역시 유신 시기에는 정부가 요구하는 범위 안에서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새마을 영화 <아내들의 행진>(1974)의 마지막 장면에는 전후 맥락 없이 무장공비가 등장했는데, 이는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 윤주영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검열에 동조한 영화도 공존했다. 문제작 <오발탄>(1961) 이후 리얼리즘 영화를 만들던 유현목은 유신 시기 반공 문예영화 제작에 동참해 우수영화 보상정책의 수혜를 받았다. 유신 시기 유현목은 북한을 절대악으로 상정하고 이에 대항하는 개인적 고뇌를 그린 영화인 <카인의 후예>(황순원 원작), <불꽃>(선우휘 원작) 등을 만들었는데 이는 검열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그의 선택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1990년대 자신의 영화를 엉망으로 만든 박정희를 찬양하는 영화 <조국의 등불>(1990), <사랑의 등불>(1990) 등을 만든 것으로 미뤄볼 때 분명해진다. <조국의 등불> 편집을 마치면서 유현목은 “역사의 거인인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치적의 단편들을 영상에 담은 그간의 기록영화를 단축 재편집하는 책임편집자로서의 저는 커다란 영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신 시기 들어서 유현목 같은 중견 감독조차 검열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안전한 영화를 만들며 검열과 예술의 공존을 추구했던 것이다. 

 

새마을운동을 소재로 만든 국책영화 <아내들의 행진>(임권택 감독·1974)에서 동네 여성들이 마을을 개간하는 장면



■ 검열과 거리 두기

1970년대 검열의 특성을 국가의 과도한 그리고 허술한 간섭이라고 간주한다면, 하길종은 영화에 검열의 흔적을 새겨두는 전략으로 자신의 의도를 드러냈다. 하길종은 애초 시위장면이 검열로 삭제되자 실제 영화에서는 강의실에서 바로 연고전 응원연습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구성하고, 시위에 함께 나갈 것을 종용하다 강의실에서 칠판을 지우는 병태가 이상국가를 사쿠라로 고쳐 쓰는 등으로 검열의 흔적을 남겨 대중들에게 ‘삭제된 무엇’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효과를 낳았다.

한편 이만희 영화 가운데 개봉관에 걸리지도 못했던 <태양을 닮은 소녀>(1974)에 등장하는 주인공 인숙이나 <삼포 가는 길>(1975)의 주인공 백화 등은 몸은 성인이지만 채 성숙하지 못한 페르소나로 등장했다.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1974)에서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로 상징되는 경아와 같은 주인공 역시 1970년대 중반 스크린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매매춘 여성과 순수가 오버랩되는 이들의 존재는 유신시대에 타락하지 않은 자, 어른이 되기 전의 순수를 지닌 존재로 묘사되었다. 이들이 어른이 되지 못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영화의 결말은 유신이라는 성장을 불가능하게 하는 시대에 대한 거부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유신이라는 권력의 시선이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명랑한 미래를 강요했다면, 이들은 성인으로 살아가길 거부한 존재로 재현된 것이다. 

호스티스 영화가 가족에서 일탈한 여성의 활력을 묘사한 것은 가족제도의 모순에 대한 비판이었다. 동시에 여성의 비극과 고통을 드러냄으로써 여성 관객의 감정 이입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남성을 구원하는 순수한 여성, 남성 관객의 시각을 반영한 여성의 성적 대상화, 무엇보다 가족을 강조함으로써 유신 정부가 내세우는 가부장제/민족주의에 공모하기도 했다. 단적인 예로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염복순이 분한 영자의 백치 같은 외모와 이에 수반되는 성적 코드는 하층민 여성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했다. 이들 영화에 등장했던 경아와 영자 등 독립적인 여성상은 순결의 상실, 비극적 최후, 가정으로의 복귀 등 지배적 가치를 강요당하는 대상으로 그려졌다. 청년문화의 영향을 받은 감독들이 만든 호스티스 멜로영화는 휴머니즘과 자유주의라는 무기로 검열에 반대했지만 가부장제, 남성성 복원 등 주요 가치를 권력과 공유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이들뿐 아니라 주변부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전형적 모습이었다. 

■ 영화, 검열을 내면화

유신시기 영화가 검열 때문에 대중들의 외면을 받았다고 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영화 속에 그려진 근대화를 위한 눈물, 청년문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에 나타난 젊은이들의 자살, 우울과 비극적 결말, 가족제도 내 여성의 고통, 산업화 과정 속 여성 노동자의 고통 등은 유신 시기 사람들이 겪고 있는 모순적인 삶을 그려냈다. 

임권택의 <아내들의 행진>의 여성 주인공들은 조국 근대화의 가치를 내면화한 인물이자 고통을 극복하고 마을을 패배주의와 가난에서 구출하는 ‘국민’으로 묘사되었다. 민족수난사, 민족공동체의 고통을 묘사해 눈물을 쥐어짠 영화를 통해 유신 시기의 민족 중흥, 대중 동원에 성공한 것이다. 군사 퍼레이드, 기능올림픽 수상자를 위한 카퍼레이드, 전국체전 매스게임,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기리는 기념비 등 일상영역에서도 대중에게 고통의 인내를 강요하는 기제는 많았다. 수다한 고통에도 근대화는 반드시 이뤄져야 하며, 이를 위한 의지, 감수성을 고조시킴으로써 대중의 동의를 이끌어냈던 것이다. 

검열이 모두에게 피해로 다가온 것은 아니며 영화인이나 관객들이 모두 검열의 피해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검열의 범위 안에서 검열을 내면화하거나 정부가 강요하는 우수영화를 만들면서 생존했던 사람들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유신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하길종조차 <한네의 승천>(1977) 같은 후기 작품에서는 정부 우수영화가 강조하는 민족문화 창달과 통하는 윤회 등의 가치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는 세련된 서구적 감수성의 이면에 존재했던 결핍된 주체의식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관객들에게 쾌락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대중의 바람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담아내는 것이라면, 검열의 틈바구니에서 성장을 거부한 주체, 우울과 답답함을 드러낸 스크린의 아우라는 1970년대 대중의 내면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검열에도 불구하고 유신 시기 영화와 대중의 감성이 맞닿는 부분이 존재했다. 그렇다면 검열로 인한 표현 자유의 제약이란 측면만으로 유신 시기 영화 그리고 관객을 바라보는 것은 절반의 이해가 아닐까.


김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



(16) 대중과 방송: 텔레비전의 시대 - ‘바보상자’에 투영된 권력의 통제와 대중의 열망


■ 텔레비전은 바보상자였나

라디오가 그랬듯이, 텔레비전 보급은 일상의 변화를 이끈 원동력이면서 사회 변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가족구조가 변화하고 문화주택이나 아파트 같은 주거공간이 새롭게 고안되면서 텔레비전은 전면적인 변화의 중심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거실이라는 공간의 빈 벽면은 전에 없던 무언가로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때 복제 명화나 민예품이 그곳에 잠시 머물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텔레비전이 한쪽 벽에 주인처럼 들어앉았다. 가족은 텔레비전 앞에 모여 밥을 먹고 잠들 때까지 텔레비전과 함께하면서 한 가족임을 실감한다. 텔레비전은 근대화된 한국 가족을 이어주는 가족매체가 됐다. 

텔레비전은 영화나 서커스 같은 구세대 볼거리의 “숨통을 막아도 아주 명치끝을 채”(한수산, <부초>) 버리고 ‘안방극장’을 펼쳐 놓았다. 이런 텔레비전에 늘 붙어다니는 오명이 ‘바보상자’라는 말이다. 1961년 혁명정부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기획된 만큼 텔레비전은 선전 수단인 동시에 적절하게 하향 평준화된 대중의 오락거리였다. 그 때문에 텔레비전의 전국적 보급이 완성되기도 전에 바보상자라는 경계와 두려움이 먼저 퍼져나갔다. 텔레비전은 대중 소비사회를 찬양하는 것으로 비치기도 하고, 인간을 과학문명의 노예로 만들어 세계를 집어삼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텔레비전 문명은 세계를 삼킬 것인가’, <세대>, 1970년 12월). 바보상자라는 혐의는 외국에서 수입된 텔레비전 수상기에 달려온 부록인 듯 보인다.

그런데 텔레비전은 왜 바보상자일까. 누가 텔레비전 덕분에 바보가 되었단 말일까. 당시 기사와 논문을 들여다봐도 대답은 선명하지 않다. 기껏해야 텔레비전 도둑이 늘었다거나 텔레비전 없이는 식모 구하기도 어렵다는 사소한 얘깃거리만 볼 수 있다. 아니면 ‘육백만불의 사나이’를 흉내내다가 목숨을 잃은 어린이의 사고 정도가 있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1974년에 발족한 새마을방송협의회를 필두로 보도심의위, 심의실장회의, 반공방송협의회 등 촘촘히 둘러싼 검열기구의 눈에는 텔레비전 시청자가 새마을과 유신 정신, 그리고 총력안보의 정신을 실천해야 할 훈육의 대상처럼 보였겠지만 ‘착한 국민’이 되지 못했다고 특별한 말썽을 일으킨 적은 없다. 그럼에도 “너, 참 텔레비전이로구나”라는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텔레비전=바보”라는 등식이 통용되었다. 도대체 누구더러 바보라고 말한 것일까. 

1970년대 텔레비전은 정권의 선전 수단이자 ‘하향 평준화’된 대중의 오락거리였다. 가족 가운데 특히 여자와 아이들은 안방이나 거실의 텔레비전 앞에 모여들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텔레비전이 구획지은 것

텔레비전이 만들었다는 바보들은 대개 여성(주부)과 어린이다. 안방극장이라는 말이 통용될 만큼 초창기 텔레비전의 성공은 드라마에 힘입은 바 크다. <아씨> <여로>와 같은 드라마는 텔레비전 선망의 원인이었고, 여성들은 드라마를 안방에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후 드라마는 텔레비전 방송의 핵심 콘텐츠가 되었다. 텔레비전이 안방극장으로 불린 것도 이 때문이다. 또 하나의 바보는 학업부진, 정서장애, 텔레비전 관련 사고에 불안하게 노출된 어린이다. 이에 비해 바보가 되어버린 성인 남성의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가장이 체면치레를 하는 사이 채널 선택권을 쟁취한 여성과 어린이는 텔레비전의 폐해도 고스란히 안았다. 여성들은 불륜과 선정이 판을 치는 안방극장에 정신이 팔렸고 드라마가 과시한 사치풍조에 물들었다. 아이들은 어른의 세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버릇없는 꼬맹이가 되어버렸다. 아이들은 계모가 아닌 이상 어머니에게 존칭어를 쓰지 않을 만큼 버릇이 나빠졌고(동아일보 1978년 3월16일자) 바지보다 미니스커트가 더 예뻐 보인다거나, 어린이 프로는 모범생들이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해서 재미가 없다는 내용의 일기를 쓸 만큼 되바라졌다(조선일보 1973년 5월16일자). 이 모든 것이 텔레비전 탓이다. 그리고 지각 있는 남성들은 고매한 활자매체를 통해 텔레비전의 문제를 질정하기 위한 수사로 예의 바보상자론을 들고나왔다. 

시청자 계층이 과학적으로 분석되는 상황에서 텔레비전 비판론은 여성과 어린이를 성인 남성과 분리하고 구분하는 역할을 했다. 텔레비전이 저속할수록 누구를 계도해야 할지 분명해졌다. 이는 일종의 권력관계로, 도시와 시골 사이에 그어진 텔레비전 경계에서도 볼 수 있다. 텔레비전이 동심을 납치한 것처럼 농촌의 미덕은 텔레비전으로 인해 타락했다고 한다. 삼삼오오 모여서 보는 텔레비전은 전통사회의 마실문화를 없앴으며 도시를 동경하게 만들고 농촌을 열등한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마실과 민요 노랫가락이 사라진 대신 촌로의 입에서는 대중가요, 그리고 ‘새마을운동’이니 ‘건설 수출 증산’ 등과 같은 ‘TV슬로건’이 거침없이 흘러나오게 된 것이다(이규혁, ‘TV문화의 망령들’, <세대>, 1974년 5월). ‘TV문화의 망령’이란 망령이라기보다 텔레비전이나 보는 이들이 계몽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확인시키는 증언 같은 것이었다. 텔레비전이 망령과 같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동시에 이를 통해 국민으로 호명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찍어준다는 사실은 텔레비전을 대하는 권력의 이중성의 기원이었다. 

텔레비전 이전과 이후의 한국 사회는 확연히 달라진다. 텔레비전은 한국 사회를 전혀 다른 관습과 체제 속으로 옮겨 놓은 마법을 부린 듯이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텔레비전은 한 사회가 어떻게 조정되고 통제되는지를 보여주는 권력의 청사진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텔레비전 앞에서 여러 가지가 구획된다. 지각없는 여성과 어린이는 물론, 텔레비전 보급 운동의 대상이었던 농촌사회가 바보상자 쪽으로 기울면서 권력과 대중의 관계가 은연중 노출된 것이다. 

여성 노동자들이 텔레비전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 권력의 통제와 대중성의 드라마

텔레비전을 포함한 방송매체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저속의 위험을 안고 있기에 항시 통제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대중의 통속적인 열망은 쉽게 통제 속에 융해되지 않았다. 텔레비전이 여성과 어린이를 망치는 사이, 어른도 아이도 아닌 청소년의 관심 일부는 라디오가 차지했다. 편성통제에서 다소 비켜나 있었기에 라디오는 텔레비전에 비해 비교적 자유롭게 프로그램을 짤 수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심야 라디오 방송이다. 텔레비전 방송이 끝날 즈음 시작되는 <영시의 다이얼> <밤을 잊은 그대에게> <별이 빛나는 밤에> <꿈과 음악 사이에> 등의 심야 라디오 방송은 경계에 서 있던 청소년들의 작은 해방구였다. 그리고 그들의 열망은 이른바 ‘리퀘스트’를 통해 실현된다. 편지와 엽서, 전화로 신청곡과 사연을 보내고 이를 소개하는 방식은 지금껏 가장 효과적인 라디오 방송 포맷이다. 라디오 방송은 경쟁적으로 리퀘스트 형식을 갖추고 청소년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저질 혐의를 쓴 가요와 팝송이 소개되고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쏟아졌다. 

물론 심야 라디오 방송도 통제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1971년 긴급조치 이후 라디오 편성권은 정부 쪽으로 넘어갔다. 맨 먼저 손을 댄 것은 리퀘스트였다. 청소년들을 부당하게 자극하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전화 리퀘스트가 중단되었고 안보가치관 확립을 위한 내용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연예인 DJ는 방송국 아나운서로 대체되었으며 팝송은 금지되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이 클래식이나 건전가요, 세미클래식이었다. 그러자 청취자의 불만은 차치하더라도 대기업 수준으로 성장한 민간 방송사의 요구가 이에 저항하는 상황에 놓였다. 결국 긴급조치 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심야방송의 리퀘스트와 팝송은 부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은 텔레비전에서도 다를 바 없었다. 긴급조치 이후 정책시간대 편성지침은 물론 광고물량까지 통제하면서 저질·선정 드라마를 퇴출시키고 <실화극장> 같은 정책극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권력도 대중매체가 가진 본연의 속성을 완전히 제어하지는 못했다. MBC, TBC가 신문사를 겸업하면서 대기업화하는 수순에 있었고, 이들 자본의 요구는 정부로서도 완전히 틀어막을 수 없었다. 정부가 요구한 민족사관극, 명랑가족드라마를 표방하는 듯했지만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드라마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1975년 <아빠> <안녕>에 이어 1977년 <청춘의 덫>이 정부의 편성지침에 따라 중도 폐지되었지만 작품에 드러난 미혼모의 복수라는 특유의 정념은 1970년대 드라마의 한 축을 이루었다. <결혼행진곡>은 “바쁘다 바빠” “죽갔네” 같은 말투가 저속하다는 비판 속에서도 명랑가족드라마로서 인기를 잃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은 비(非)프라임 시간대로 밀려났음에도 변함없이 높은 광고료가 증명했다. 

방송에 대한 검열과 통제는 197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방송자본이 만들어낸 대중문화 콘텐츠와 그에 호응한 대중의 번듯한 열망은 숨바꼭질하듯 부침을 거듭하며 권력과의 모호한 관계를 유지했다. 권력과 대중의 열망의 관계가 끊어진 것은 1970년대 후반이다. 1978년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 리퀘스트가 전면 금지되었고, AM라디오에서 팝송이 완전히 퇴출되었다. 텔레비전에서는 검열과 광고통제를 통해 드라마, 음악, 코미디 등의 대중오락 프로그램이 고사 직전으로 몰렸다. 권력과 대중의 갈등이 만들어낸 방송사(史)의 기묘한 드라마는 이쯤에서 파국을 맞이했으며 1970년대도 더불어 저물어갔다. 

20세기 후반 텔레비전이라는 신기(神機)는 재빠르게 권력의 자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권력의 정당성을 민족과 국민의 이름으로 승인받기를 원한 신흥국가에서 그 속도는 더욱 빨랐고 1970년대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부가 선사한 텔레비전에서는 언제나 착한 국민을 불렀고, 텔레비전에 매혹된 이들은 그에 호응함으로써 스스로 대중이 되었다. 그러나 대중동원으로서의 텔레비전은 자본화한 대중성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매체였다. 1970년대 대중성을 이끈 또 다른 견인차는 재벌 수준의 방송자본이었다. 이들이 만들어낸 대중을 근대적 국민, 유신의 아들딸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권력만의 착각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들은 완전히 바보가 되지도 않았고, 권력이 원한 대로 살아가지도 않았다.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라는 방송 경고문은 권력을 일상에서 반복한 다 큰 어른들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대중은 퇴폐와 불건전의 혐의 속에서 사소하지만 항상 다른 것을 열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바보상자라는 비판론이란 진지한 염려가 아니라 통제에 대한 권력 스스로의 신경증이었을지 모른다.


김성환 | 부산대 HK연구교수



(17) 의료보험과 의료자본주의 -  정권 돈 한 푼 안 들이고 시작한 ‘의료보험’


■ 근대 의료체계의 핵심은 돈

‘앓느니 죽지’라는 말이 있듯이 질병은 인간 삶에 치명적이다. ‘3년 병치레에 효자 없다’는 속담은 질병이 인간의 기본적 생활조차 파탄낼 수 있음을 드러낸다. 근대성의 위력은 질병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근대 의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예전 같았으면 꼼짝없이 저승길이었던 숱한 질병들이 퇴치되었고 이로 인해 환자, 즉 질병에 걸린 인간에 대한 의사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수술은 단지 의학용어에 국한되지 않는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병든 신체에 대한 수술에 비유했다.

근대 의료체계의 핵심은 돈이다. 인술과 상술이란 두 개의 기술을 겸비한 근대 의학은 마천루를 방불케 하는 병원에 거주한다. 돈이 없다면 마천루 같은 병원은 신기루에 불과하며 신묘한 의술은 언감생심이다. 이러한 조건이라면 치료는 오직 치료비의 효과일 뿐이다. 유전무병, 무전유병인 세상이다. 

따라서 보험이 자본주의의 꽃이라면 의료보험은 꽃 중의 꽃이다.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려면 무엇보다 건강한 노동력의 안정적 관리가 필수적이다. 

근대 권력을 보살피고 돌보는 권력으로 부르는 이유가 이것일 것이다. 죽음을 담보로 하되 살려주는 권력, 즉 생명관리 정치야말로 국가와 자본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의료보험은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최초로 도입했다. 한국에서는 비스마르크와 히틀러를 대충 버무린 듯한 유신체제가 주역이었고, 1977년 7월1일자로 본격 실시됐다. 의료보험법은 이미 1963년 12월에 만들어졌지만 강제 가입 조항이 없었기에 립서비스에 그쳤다. 1970년 8월의 개정안도 시행령이 만들어지지 않아 사장된 상태였다. 이런저런 핑계가 있었지만 결국 권력의 의지박약이 주원인이었다. 민족중흥과 조국 근대화, 자주국방과 경제개발을 위해 쓸 돈도 없다고 생각한 박정희에게 의료보험은 사치였다. 

그런데 1975년 12월 내각 개편을 통해 신현확이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등용되면서 의료보험 실시 준비가 본격화되었다. 1976년 4월 보사부가 의료보험 실시를 공포했고 12월에 개정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유신체제가 갑자기 의료보험을 시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1972년 남북대화 당시 북한의 선전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북한이 자신들의 무상의료 체제를 선전하자 남북대결에 각별한 관심이 있던 ‘각하’가 맞불작전을 폈다는 것이다. 북한의 월드컵 8강 소식에 중앙정보부가 나서 초국가대표급 ‘양지축구단’을 만들던 시절이니 그냥 흘릴 말은 아닐 것이다. 최근에는 김종인 역할설이 많이 나오지만 본인의 주장 이외에 별다른 근거는 없어 보인다. 

의료보험법 최초 제정과 본격 시행 사이에는 무려 14년의 낙차가 있다. 낙차의 핵심에는 대중의 욕망 상승과 이에 대비되는 팍팍한 의료현실이 있었다. 경제개발에 따른 기대 욕망의 상승은 의료분야라고 예외가 아니었지만 상대적 빈곤 문제가 심각해져 갔고, 돈이 없어 병원 문턱 대신 저승 문턱을 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72년과 1976년에는 국립의료원,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경찰병원 등 유수의 의료기관까지 포함된 진료거부 파동이 발생해 사망자까지 나오게 되었다. 1972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의료혜택을 받는 비율은 서울 27%, 지방도시 17.9%, 농촌 2~3%에 불과하고 그것도 90%가 자비 부담이었다. 

의료보험은 국가와 자본의 양보를 이끌어낸 제도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와 자본의 사회적 지배력을 제고시킨 제도였다. 사진은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된 1977년 7월1일 이후 환자들로 붐비는 병원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병원 문턱을 높인 것은 권력의 탓이 컸다. 박정희 체제는 자유방임에 따른 자유 개업의 제도를 유지하면서 보건의료 투자를 극도로 꺼렸다. 1970년 정부 예산 중 보사부 예산 비율은 6% 정도였는데 이는 유럽과 일본의 30%와 비교조차 힘든 수치였다. 1974년 기준으로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사이의 비율은 의사가 18.4% 대 81.6%였고 병상은 21.1% 대 78.9%였다. 이러한 상황은 의료비의 가파른 상승으로 연결되었다. 1965년부터 1975년 사이 10년간 1인당 의료비는 생계비 증가율의 3배가 넘었다. 

■ 의료비 급증 사회불안에 긴장한 유신체제

의료비 상승은 의료산업의 발전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상징적인 것이 종합병원의 급팽창인데 1970년에 12개에 불과했던 종합병원이 1979년에는 무려 70개로 크게 늘어났다. 같은 기간 일반 병원과 의원은 제자리걸음을 했다. 

개인과 가족 차원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의료비 상승이 결국 사회와 체제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가 유신체제를 휘감았다. 제4차 경제개발계획 작성 무렵 중앙정보부는 청와대에서 안보 상황보고를 했는데 봉천동과 상계동 등 판자촌 빈곤 주민들이 안보의 최대 취약점임을 강조했다. 즉 “일단 병에 걸리면 치명적이 되는 상황이어서 유사시엔 예측불가”하기에 이들에 대한 의료보장 대책이 시급하다고 건의했다는 것이다(이광찬, <국민건강보장쟁취사>, 양서원). 참석자들의 눈가에 광주 대단지의 데자뷰가 어른거렸을 것이다.

체제가 내놓은 해법의 최상위 전략은 이른바 ‘사회개발’이었다. 사회개발은 유엔 주도로 세계적 의제가 된 것으로 한국에서도 이미 1960년대부터 주요 관심사였다. 이를 주도한 것이 보사부 산하의 사회보장심의위원회(사보심)였다. 사보심은 이미 1968년 ‘자본주의 경제발전에 따른 빈부격차’가 우려할 만한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사보심과 중앙정보부가 하는 일은 천양지차였지만 상황인식은 대동소이했다. 이에 따라 다양한 사회개발 프로젝트가 나왔는데 의료보장 강화가 중요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의료보험 실시의 최대 관건은 돈이었다. 4차 경제개발계획을 작성하면서도 당시 고재필 보사부 장관은 의료보험을 1980년대 5차 계획의 과제라고 못박았다. 대신 민간 의료보험 지원책을 펴는가 하면 빈곤층에 대한 의료보호 정책을 강조할 따름이었다. 

돈은 의료계에도 결정적인 문제였다. 의료 산업화에 따른 의료수가 폭등은 중산층조차 버거울 정도였고 개인이 의료수가 상승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면 의료 공급자 입장에서도 커다란 문제였다. 병원의 대형화, 현대화에도 불구하고 1974년 기준으로 병상 이용률은 전국 평균 57.8%에 불과했다. 이런 상태로는 병원 경영이 곤란했다. 결국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는 의료비용의 사회적 또는 국가적 지불 방안이 절실해졌다. 

이에 의료계를 대표해 의학협회, 병원협회 등이 주도해 의료보험 도입을 적극 추진했다. 또한 의료보험 실시가 결정되자 의학협회는 보사부와 함께 의료수가 책정작업을 공동으로 수행했다. 보사부와 일정한 갈등이 있기도 했지만 의료계는 행위별 수가제를 관철시킴으로써 병원 이익의 최대화를 꾀했다. 

문제가 돈이라면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가 생각을 바꾼 것도 당시 장예준 상공장관에게 전경련의 적극적 입장을 보고받고 나서였다(의료보험연합회, <의료보험의 발자취>). 실제 의료보험 수입구조는 기업 50%와 종업원 50%로 정부 재정은 한 푼도 들어가지 않는 방식이어서 기업의 동의가 없었다면 시행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박정희가 복지 문외한의 경제관료였던 신현확에게 주무장관 자리를 맡긴 것도 철저하게 돈 안 드는 의료보험 제도를 위한 것이었다.

전경련은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의료보험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었다. 1970년 법 개정 당시에도 “제2의 산재보험”이라고 격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정권의 권유도 있었지만 1974년부터 기업복지가 본격화되었고 복지재단 설립이 유행처럼 번져 1974년부터 1978년 사이에 현대, 대우, 선경, 기아, 금호, 삼미 등 굴지의 재벌들이 앞다투어 문화와 복지 관련 재단을 설립했다. 자본의 서식지는 시장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대되고 있었고, 문화와 복지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상황 변화의 이유를 전경련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가 비등했다’는 점에서 구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요구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재벌의 덩치가 커졌다는 것이다. 재벌의 덩치는 자본의 집적과 함께 집중의 결과였다. 1978년 46대 재벌은 국내총생산의 17%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집중된 경제력에 대해 재분배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했고 그 구체적 방식이 의료보험을 포함한 복지 시스템의 강화였다. 독일 대자본들이 비스마르크, 히틀러와 손을 잡았다면 한국에서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 정권·의료계·경제계 ‘삼각동맹’

재벌은 돈만 댄 것이 아니었다. 전경련은 이미 1974년 의료보험 관련 간담회를 개최하기 시작했고 의료보험중앙연합회를 전경련이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주장대로 1977년 의료보험협의회는 전경련이 주도해 설립되었으며 사무실 또한 전경련 회관에 두었다. 

결국 의료보험을 주도한 것은 유신체제를 꼭짓점으로 한 의료계와 경제계의 삼각동맹이었다. 심지어 어용 소리를 듣던 한국노총조차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 동맹의 결과 만들어진 의료보험은 행위별 수가제로 병원의 안정적 이익을 보장해준 반면 의료비 부담률은 30~40%에 불과했다. 비록 단계적 확대라고 토를 달기는 했지만 적용 대상이 500인 이상 기업으로 국한되어 수혜자는 전 인구의 10분의 1 정도였다. 요컨대 자본을 전주 삼고 의료계를 실무기술자로 동원해 정권은 돈 한 푼 안 들이고 ‘복지국가’를 건설한 셈이었다.

의료보험은 양가적 효과를 냈다고 보인다. 한편으로 그것은 국가와 자본의 양보를 이끌어낸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국가와 자본의 사회적 지배력을 높인 것이기도 했다. 다른 말로 통치성의 제고를 통해 주민집단에 대한 안정적 관리를 도모한 것이었다. 요컨대 기아와 질병을 통제하는 권력의 통치성이 고도화된다면 주민집단의 실질적 포섭 효과 또한 배가될 것이다. 

경향신문 1977년 7월1일자 1면 머리기사는 부가가치세와 함께 의료보험 실시를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밑에 중요 기사로 배치된 것이 정주영의 복지재단 설립 소식이었다. 정주영은 무려 500억원을 출연해 아산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할 것이며 장학사업과 함께 병원 설립 등 의료복지가 주된 사업이 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두 개의 기사를 1면에 묶은 편집자의 감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다만 편집자의 주관적 감각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의료보험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 자본의 재현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 재현전략대로 미래가 구성되었다면 과장일까. 정주영의 꿈대로 아산중앙병원은 삼성의료원과 함께 국내 최고·최대의 의료시설로 군림하고 있다. 그 병원 문턱은 과연 저승 문턱의 반대편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두 개로 보이는 하나의 문턱일까. 무엇보다 의료보험은 그 문턱을 넘을 수 있을까.


황병주 |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18) 다른 나라, 다른 지도자들 속에서

숭배와 혐오 사이, 그들의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


1960년대에 일어난 쿠데타 숫자는 세계적으로 119회를 헤아린다. 1961년 한국의 5·16 쿠데타는 그 숱한 사건 중 하나였다. 1970년대에 암살당한 국가 원수는 세계적으로 11명. 1979년 10월26일 박정희의 죽음은 그 가운데 하나다. 박정희와 그 시대는 한국적인, 유일무이한 사건이지만, 또한 동시대 세계사의 흐름 속에 위치해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아마 박정희는 1960년대의 쿠데타와 1970년대의 암살이라는 기록을 동시에 보유한 지도자 중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일 것이다. 2013년, 적어도 지금 연대를 기준으로, 한국의 5·16 쿠데타는 세계적으로도 성공적인 쿠데타였던 듯 보인다. 

■ 낫세르·수카르노 등 롤 모델 삼은 ‘소장 박정희’

1961년, 당시 45세였던 소장 박정희가 ‘혁명’을 일으켰을 때라면 상황은 달랐다. 박정희에게는 여러 명의 롤 모델이 있었다. 당시 이집트의 대통령이었던 나세르가 대표적일 테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며 싱가포르의 리콴유와 대만의 장제스-장징궈 등, 교사 혹은 반면교사로 작용한 인물은 그 밖에도 여럿 있을 터이다. 카말 압둘 나세르에 대해서는 5·16 직후 박정희 스스로 그 지대한 영향력을 인정한 바 있다. 1963년에 출간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박정희는 총 분량의 거의 10분의 1을 나세르를 논하는 데 할애했다. 수에즈 운하 국유화와 아스완 하이댐 건설을 특별히 주목하면서 “우리들은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사회를 형성 중에 있을 뿐이다”라는 나세르의 말을 인용했다.

‘자유 장교’들이 주도한 1952년 7월 이집트의 격변은 ‘혁명’에 가까웠다고 지금도 인정되고 있다. 당시 이집트는 명목상 독립국가였지만 영국의 실질적 지배하에 있었다. 입헌왕정 체제였으나 자주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못했던 왕실과 정부는 민심에서 멀리 이반한 상태였다. 군인들의 거사는 ‘대중적 열광’을 얻었고, 왕정을 종료시켰으며, 이어 이집트의 실제적 독립을 획득하는 데로 나아갔다. ‘혁명’ 후 몇 달이 지나 나세르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자유롭고 강력한 이집트”를 현실화하기 위한 과감한 정책을 추진한다. 아스완 하이댐 건설을 추진했고, 영국과의 군사충돌을 무릅쓰고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해 냈으며, 1960년에는 (제2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시작했다.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무렵 나세르에 대한 제3세계 민족주의의 기대와 찬탄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는 45세의 육군 소장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이다. 사진은 1979년 10월 열린 리콴유 총리(왼쪽에서 두번째) 환영만찬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세번째)과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 대통령(첫번째)이 함께 앉아있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나세르의 국내 통치는 1인 독재에 가까웠다. 1960~61년 은행과 기간산업을 국유화했을 당시에는 재무부 장관마저 그 사실을 발표 후에야 통지받았다고 한다. 나세르뿐이 아니었다. 항용 반식민의 영웅이었던 제3세계 지도자들은 독립 후 종종 뜻밖의 독재적 면모를 드러내곤 했다. 젊은 시절 사회주의에 매혹됐음에도(혹은 매혹됐기 때문에) 철저하게 사회주의-공산주의를 탄압했다는 점에서도 이들 중 상당수는 공통점이 있다. 이슬람주의자였던 나세르는 예외였던 것 같지만, 대만의 장징궈, 싱가포르의 리콴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은 모두 청년기에 사회주의에 경도되었거나 그 사상을 가까이서 겪었다. 박정희 역시, 잘 알려져 있듯, 여순사건 당시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숙군 대상이 됐던 바 있다.

장징궈는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의 아들이었음에도 1925년, 16세 때 동료 학생들과 함께 소련행을 택한 후 1937년까지 10년 넘게 그 땅에서 살았다. 한때 시베리아로 이주당했음에도 귀국 직전에는 정식으로 소련 공산당원이 되기까지 한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및 그 각료들은 좌·우 사이 중도를 표명했으며 드물잖게 사회주의적 신념을 표하곤 했다. ‘국가 자본주의’ 혹은 ‘시장 사회주의’라는 명칭 역시 사양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리콴유의 노선은 영국식 ‘혁명 없는 사회주의’(페비언 사회주의)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된다. 

수카르노의 경우 집권 말기 혹독한 좌익 탄압을 방조했음에도 오래도록 ‘인도네시아를 공산주의 캠프로 몰아넣으려 한다’는 의심을 샀다. 이들 대부분이 경제계획을 입안할 수 있었던 데도 사회주의 학습 효과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만으로의 이주 초기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1만여 명을 체포하고 1000여명을 처형했던 장징궈의 이력이 잘 보여주듯, 제3세계 지도자들은 종종 ‘반공’과 ‘멸공’을 통해 자기 입지를 다지곤 했다.

나세르처럼 이들 역시 ‘강하고 자유로운’ 조국을 꿈꾸었다. 그 조국이 살아갈 세계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은 달랐다. 나세르나 수카르노가 달라진 세계 속에서 달라진 조국을 구상했다면, 리콴유나 장징궈는 현존의 세계 질서를 바꿀 수 없는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조국의 생존과 부강을 모색했던 듯하다. 박정희는 후자에 가까웠다. 웃음기 없이 긴장감으로 팽팽한 그 얼굴, 15도쯤 높은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그 시선은 결코 ‘비현실적인’ 세계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강력한 비판자였던 함석헌과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곳이 여기다. 함석헌은 누구보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였지만 늘 한민족을 통해 세계 전체를 구제할 것을 기원했다. 박정희는 달랐다. 

■ 격렬한 찬반 논쟁 여전한 역사의 평가

박정희는 진심으로 조국을 염려했을 것이다. 권력을 욕심내고 자기 안위를 걱정했을지라도 그것과 조국에 대한 격정을 스스로 구분하지 못했기 쉽다. 통일을 위해서라도 정치 안정성을 높여야 한다는, “일대 개혁”을 위해 “무질서와 비능률”을 척결해야 한다는 유신헌법 반포 당시 명분 역시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는 1960~70년대 많은 제3세계 지도자들이 공유했던 태도였다.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인권 담론이 부상, 국제적 판단과 개입에서도 중요한 척도로 작용하게 되지만, ‘개발 도상’에 있던 국가의 지도자들은 흔히 자유·민주·권리 같은 개념을 부차화했다. 명분이 너무나 정당하고 상황이 너무나 급박했으므로, 이들은 ‘강하고 자유로운’ 조국을 위해서라면 다른 가치는 유보될 수 있다고 믿었다. 강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이 강하고 자유로운 국가를 만든다는 신념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이상주의를 일체 거부하고 현존의 세계 체제 속 조국 근대화에 몰두할 경우 그런 괴리는 한층 커지곤 했다.

박정희라는 지도자의 출현은 세계적 현상 중 하나다. 1960~70년대, 냉전체제가 와해되기 시작된 가운데 제3세계에서는 민족주의적 명분으로 무장한 지도자들이 다수 출현했다. 실제는 다양한데, 그 스펙트럼은 존경할 만한 세계 지도자에서 추악한 독재자에까지 미친다. 박정희는 그토록 많은 이름 중 하나다. 지금껏 ‘박정희’라는 이름을 회자케 하고 있는 원동력, 즉 1960~7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성장률도 비단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싱가포르는 1966년 독립 후 여러 해 동안 두 자릿수 성장을 거듭했으며, 대만은 1965년 이후 1981년까지 연 평균 9.4%의 국민총생산(GNP) 실질성장률을 보였다. 인도네시아는 1960년대 후반 이후 정치·사회적 격변 속에서도 오래도록 7% 안팎의 경제성장률을 과시했다. 실제 경제성장에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이집트마저 1960년대 한때는 연 평균 5.5%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세계적으로도 1960년대는 국내총생산(GDP)이 연 평균 4.3%의 성장률을 보였던 때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수치는 7.3%였다. 지금 40대 이상이라면 생생히 기억할 1980년대 중반의 호황이 상당 부분 세계 경제 호황에 말미암았듯,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과 그 성공 및 실패 역시, 한국이 다른 여러 나라와 공유하고 있는 역사다. 

박정희를 비롯한 1960~70년대 ‘가난한’, ‘제3세계’, ‘개발도상국’의 지도자들은 지금껏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그러하듯 정견이 충돌하고 혐오가 들끓는 - 다양성을 향한 진자운동이라기엔 너무나 소모적인 상황의 한복판에 수십 년 전 지도자였던 이들이 놓여 있는 경우도 많다. 카스트로와 카다피, 호찌민 같은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들까지 ‘제3세계’라는 범주로 함께 묶는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그들 중 극소수는 사랑받는 민족 지도자로 살아남았다-베트남에서 ‘호 아저씨’가 지금껏 그러하듯. 그러나 ‘호 아저씨’ 호찌민은 1960년대 이후 사실상 정치일선에서 물러났고, 1960~70년대를 통해, 혹은 그 이후까지 권좌에 있었던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찬반 중 어느 한쪽이 명백한 대세를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 한때 신봉했던 사회주의, 집권 후 철저히 탄압 공통점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연방에서 싱가포르가 독립한 후, 1965년부터 20여년간 집권했지만 부정 선거에 대한 소문은 없었다. 리콴유와 그 주변의 청교도적 결백성은 유명하다. 그는 후계자 그룹을 선발하고 훈련시켰으며, 총 7인으로 구성된 그룹이 권력을 인수할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한 후 1988년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사임 이후에도 대통령직을 신설해 리콴유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본인이 한사코 마다했다고 전한다. 그럼에도 리콴유마저 숭배와 혐오의 양가감정을 완전히 피하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책 제목으로마저 선보였듯이 <리콴유가 없었다면 싱가포르는 어떻게 됐을 것인가>. 그러나 젊은 세대에게는 다른 현재, 다른 미래를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불만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재정·금융 서비스의 허브, 깔끔하고도 질서정연한 싱가포르-그 현재는 아들 이센룽을 포함해 후계자들을 직접 선발·교육했던 리콴유가 기획한 연속선상에 고스란히 머물러 있으니 말이다.

수카르노는 1968년 쿠데타로 권좌에서 물러난 후 1970년에 숨졌다. 나세르는 대통령으로 재직 중 1970년에 세상을 떠난다. 장징궈는 아버지 장제스가 죽은 후 총통으로 취임, 1988년 임기 중에 타계한다. 싱가포르의 리콴유는 권력을 이양하고 벌써 25년, 여전히 존경받는 원로로 생존해 있으나, 1960~70년대의 지도자들 중 대부분은 세상을 떠났다. 박정희 역시 30여 년 전 수명을 다했다. 그럼에도 그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까지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지금 한창 격변을 겪고 있는 이집트의 상점에서는 아직껏 나세르의 책이며 연설 테이프를 판매하고 있다고 하고, 수카르노와 장징궈는, 앞으로도 오래 계속될 숭배와 향수와 혐오 사이 복잡한 반응의 교차 속에 있다. 박정희는 누구 못지않게 착잡한 경우다. 그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힘이, 지혜가, 공동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권보드래 | 고려대 국문과 교수




(19)발굴의 시대 - 왜, 경주였나

‘신라사’ 복원…통일과 정권의 정당성 주입


지난 11월 취임 8개월 만에 변영섭 문화재청장이 교체됐다. 이유는 숭례문 부실 복구 등 문화재 보수사업 관리 부실이었다. 12월 박근혜 대통령은 경주 석굴암을 방문해 문화재 관리를 둘러싼 여러 우려에 대해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 같은 문화재 보존에 대한 정부나 대통령의 관심은 유신 시기를 전후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신 시기 문화재의 발굴, 보존, 개발에 대한 정부의 지속적인 개입이 정권 붕괴 직전까지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10·26이 일어나기 이틀 전인 1979년 10월24일 경주 보문단지를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그는 건물 색조까지 하나하나 살피며 여러 사항을 지적했다고 한다. 오늘날 경주의 원형은 1968년 불국사 복원으로 시작돼 1971년 종합개발로 이어졌다.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과 지시로 조성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왜 경주라는 장소에 주목했을까?

1960년대 전반 박정희는 한국사를 타파해야 할 인습으로 봤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근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들어서는 제2경제론, 국민교육헌장, 사회정화운동 등으로 ‘정신이 선도하는 물질문명’을 강조했다. 서구에서 받아들인 물질문명과 근대정신을 한국 전통 속에 간직해온 정신문화와 조화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선전했다. 정부는 민족이란 원초적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민족문화의 정수인 문화재 발굴, 정화, 성역화 그리고 기념물화를 민족의식 확립의 핵심적 요건으로 제시했다. 1971년부터 시작된 ‘경주고도개발사업’에 125억원을 투자했고 보문단지를 국제적 관광단지로 조성했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신라사의 복원’이 시각적으로 이뤄졌던 것이다. 

경주와 신라의 재전유 

1970년대 들어서는 호국선열, 국방과 관련된 문화재 보수 및 정화, 성역화가 대규모로 이뤄졌다. 1975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만들어졌다. 이후 천마총, 황남대총, 안압지 등을 발굴, 정화했는데 이 시기를 ‘발굴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다. 문예진흥기금 485억원 가운데 70%를 민족사관 정립을 위한 사업에 투입했다. 이는 문화재 발굴, 보수, 정화뿐만 아니라 발굴된 문화재를 관광에 활용하는 관광산업 육성으로까지 확대됐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문화재와 주변 경관은 보존 대상일 뿐만 아니라 문화관광을 통한 외화 획득 수단으로도 자리 잡게 된다. 

천마총 찾은 박정희 경주 천마총 발굴현장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 1973년 7월3일 오후 1시에 이곳을 찾은 박정희는 약 30분간 발굴현장을 둘러보고 경주개발사업에서 발굴이 필요할 경우에는 발굴사업을 우선적으로 실시한 후에 공사를 수행하라고 당부하고 조사원들을 격려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 전환기의 한가운데 경주가 있었다. 1969년 경주시가 ‘관광개발기본계획’을 마련했고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경주관광종합개발’이 입안됐다. 대통령으로부터 발굴과 개발 지시를 받은 청와대 비서실은 기획단을 구성해 긴급 작업에 들어갔다. 건설부, 문화공보부 등 관련 부서 국·과장들이 중심이 돼 청와대안을 만들었다. 관계부처 장관이 참여하는 보고회를 거쳐 대통령이 최종 결정했다. 지시 이후 2개월도 지나지 않은 기간에 계획안이 재가를 받아 추진됐다. 

이 시기 경주와 신라가 재발명된 배경과 이유는 박정희 정부가 통일을 위한 국민교육과 훈련의 장으로 화랑도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부는 화랑도와 화랑정신을 풍류도와 불교호국사상이 결합된 ‘국민적 군사운동’으로 이해하고 대규모 자원과 인력을 투입했다. 다음으로 남북한 체제경쟁을 들 수 있다. 북한이 고구려를 민족 주체성의 시조로 정립했던 것에 대응해 박정희 정부는 신라 문화를 민족문화의 정수로, 통일신라를 한국사의 황금기로 자리매김했다. 정권 차원의 경주 발굴과 개발은 국난 극복사에서 화랑도를 민족의 얼로 부각시키고, 이들의 충(忠) 관념이 삼국통일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는 당대 맥락에 조응했다. 

박정희는 개발과 발굴의 세부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시했다. 그는 1971년 친필로 ‘경주관광코스’를 지시해 이를 실제 투어 프로그램에 반영했고, 경주 개발의 기본 개념으로 “웅대, 찬란, 정교, 활달, 진취, 여유, 우아, 유현의 감(感)”을 강조했다. 경주 개발을 위해 정부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서 2160만달러를 차관으로 들여왔을 뿐만 아니라 공공자금에다 골프장, 호텔 건설 등 수익성 사업을 위한 민간자본까지 경주 개발에 투자하도록 강제했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으로 알려진 대형 고분 발굴도 대통령의 지시로 이뤄졌다. 1972년 박정희는 황남동 98호분(황남대총) 발굴을 지시했다. 고고학자들은 98호분을 신앙처럼 여기는 경주 사람들에게 실망을 줄 가능성을 우려했고, 동시에 98호분 발굴 직전 무령왕릉 발굴 과정에서 불거진 졸속 발굴 문제 때문에 발굴을 꺼렸다. 고고학자들은 1973년 98호분 발굴 전단계로 황남동 155호분(천마총) 발굴을 제안했다. 155호분에서 유물이 대거 발견되자 98호분 발굴로 이어졌다. 발굴이 잇달아 성공하면서 정부는 유적을 통한 ‘새로운 역사 만들기’에 착수했다. 신라 고분을 발굴하고 출토된 유물을 국민들에게 적극 홍보해 통일의 정당성과 정권의 정통성을 획득하려 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6년 6월 신라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대중에게 통일 의지를 주입시키려는 또 다른 시도를 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여한 인물인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을 기리는 화랑들의 대사당인 통일전을 세워 성역화한 것이다. 경주 남산 자락에 위치한 통일전은 총 6억4900만원이 투입된 대규모 화랑 사당이다. “화랑의 정신으로 통일을 이루자”란 지극히 정치적 목적을 띤 통일전과 본전(本殿)은 이후 모든 유적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경주 발굴은 화랑도와 신라사를 민족사의 중심에 위치시킴으로써 국난 극복의 민족적 주체를 구성하기 위한 정치·사회적 기획의 일환이었다. 

발굴과 개발 시대에 대한 기억 

그렇다면 당시 발굴과 개발에 참여했던 고고학자, 발굴 전문가, 청와대·문공부·건설부 행정관료들은 경주 발굴과 개발을 어떻게 기억할까? 발굴 관련자들의 기억에서 두드러진 점은 박정희에 대한 것이다. 박정희는 “진지한 대통령” “지시하는 대통령” 등 여러 방식으로 기억됐다. 여러 관계자들은 박정희 덕에 고고학이 발전했고 경주 발굴이 가능했다고 여겼다. 박정희의 경주 발굴에 대한 강한 추진 의지가 없었다면 짧은 시기에 경주가 현재와 같이 재구성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기억한다. 

실제 1973년 7월3일 박정희는 천마총 발굴현장을 직접 찾기도 했다. 박정희의 방문은 국가원수의 최초 발굴 현장 방문이었다. 가장 빈번하게 관계자들에게 기억되는 것은 ‘박정희의 지시사항’이었다. 발굴 관계자와 관련 공무원, 조경 담당자들은 박정희와 청와대의 수많은 지시를 받고 이를 시행해야 했다. 이들의 기억에서 드러나는 지시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황룡사 일대 논밭 정리, 다보탑과 석가탑에 보호각 설치, 제2의 석굴암 건축, 경주 일대 벚나무 식수, 불국사 주변 불량 주택·담장·대문 수리, 불국사 가로수 조성 등이다. 박정희는 가로수를 일본 고베에서 지원받아 은행나무로 교체할 것을 지시했다. 천마총 주변의 휴식처를 수리하고 안압지 주변 대기소를 주위와 조화를 이루도록 한식으로 개조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과도한 지시와 개입에도 이들에게 경주 발굴은 “고고학에 대한 첫사랑” “감동의 순간” “신라 문화의 신비함에 매혹”된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고고학자에게 경주 발굴은 의미가 컸다. 이들은 대규모로 계속된 경주 발굴을 “고고학 훈련장” “고고학이 국민에게 이해되는 시기” “식민사관에서 탈피하는 고고학 보고서 작성” 등으로 기억한다. 

초기에는 자국의 유물을 발굴한 경험이 거의 부재했기에 이마니시 류(今西龍) 같은 식민사학자가 쓴 검총(劍塚) 보고서부터 시작해서 조선의 발굴보고서 등을 검토했다. 발굴과 복원이 많이 이뤄지자 천마총, 황남대총, 안압지, 황룡사에 이르는 과정은 “고고학 훈련소”라고 불릴 만큼 많은 전문가를 길러냈다. 경주는 민족사의 원초적 사료인 유물을 발굴하는 장이기도 했다. 경주 발굴 이전까지 남의 시각으로 유물을 해석하고 기록한 데서 벗어나 당대에 지향했던 민족주의 사관의 정립과 연동되면서 고고학의 한국화가 이뤄졌다. 

망각된 기억들 

하지만 민족사의 재구축을 목표로 했던 경주 개발과 발굴 과정에서 생긴 주민의 피해, 원망, 반발 그리고 유언비어 등은 20년이 지난 뒤에도 이들의 기억 속에서 부유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당시 토지매입과 발굴, 개발과정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관련자들은 스치듯이 혹은 안타까운 기억의 흔적으로 지금은 잊혀진 주민들의 저항과 불만을 남겨 놓았다. 이런 흔적은 민족문화, 민족 주체의 재구성이라는 국민 중심의 전통적 역사서술에서 망각된 것이었다. 

우선 망각된 기억은 발굴 및 복원 과정에서 이장과 철거 등을 둘러싼 주민들의 반발이었다. 조상의 묘를 이장하거나 주택 철거, 도로공사, 상하수도 공사로 길을 파헤쳐 주민의 불만이 높았고 발굴과 복원 과정에서 민원은 끊이지 않았다. 주민들은 살고 있는 집 수리조차 제약을 받았다. 이들은 불국사 복원 과정에서 시위를 벌였다. “인건비 미지출로 인한 작업 중단과 농성” “석축공사를 맡았던 석공들의 인건비 인상을 위한 태업” “중기회사의 재계약 요구 작업중단” 등 다양한 불만과 요구가 터져나왔다. 1972~1973년 경주시청 앞은 매일 데모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을 정도다.

발굴 과정의 유언비어는 당시 불만을 대변한다. “1973년도는 굉장히 무더웠다. 조사할 때마다 노인들이 두루마기를 입고 지팡이를 짚고 갓을 쓰고 와서 ‘네놈들이 왕 무덤을 파니까 하늘이 노해서 비도 안 오고 가물다, 이놈들아’ 하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경주 김씨 종친회 원로들은 현장 사무실에 와서 드러눕거나 시위를 계획하기도 했다. 1973년 8월10일 동아일보 기사에도 “고분발굴 저지운동”이 나왔다. 기사는 이 운동이 경주의 박씨, 석씨 그리고 김씨 후예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전했다. 

경주와 신라사, 화랑정신 등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창출된 집합적 자기 표상은 이후 오랫동안 내셔널 히스토리를 구성한 요소들이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주민들은 경주라는 신라의 상징을 재창조했던 과정에서 망각된 자신들의 피해에 대해 잊지 않고 있다. 이런 피해들이 망각된 것은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지시와 속도전식 공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기억의 장이 망각되어온 것을 사유하는 일이라면 주민의 피해, 원망, 반발 그리고 유언비어 등 망각되거나 흔적처럼 남겨진 기억의 파편에도 주목해야 한다.


김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20) 유신의 교육과 대중지성 - 개발주의 ‘폭압’ 속에서 꿋꿋이 큰 대중지성


유신의 모더니즘과 광속도 개발은 ‘새마을노래’가 읊는 것처럼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소득 증대 힘써서 부자 마을 만드”는 데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시기를 좀 넓게 잡아 1960~1980년대 개발연대에서의 가장 의미 깊은 개발과 그 큰 과실은 ‘인간 개발’이었다. 이 점은 정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시대에 우리는 말 그대로 세계 최고 수준의 ‘인적 자원’과 교육 인프라, 문화적인 수준과 지적인 깊이를 단숨에 갖추게 되었다.

누적되어온 ‘포텐’(잠재력)이 터졌다고 해야 할까? 대중은 적어도 이 면에서는 지극히 자발적이고 적극적이며 한마음으로 ‘개발’에 동참했다(물론 딸들을 상급학교에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못나고 가난한 가부장들이 여전히 많긴 했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이는 온갖 제도적 불합리와 방해나 모순을 뚫고 진정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이뤄진 과정이었다. 배는 곯아도 공부는 해야 한다는 그 열의와 욕망은, 물론 새로운 버전의 학벌사회를 만드는 부수적 효과를 내기도 했지만, 뭘 바라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혼연일체가 된 채로, 신앙처럼 불꽃처럼, 모든 계층과 남녀들 사이에서 타올랐다고 하는 편이 더 사실에 맞는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산업체 특별학급에 다니거나 검정고시 전선에 서 있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과 노동자·농민과 그 아들딸들의 열정을 이해할 수가 없다. 

■ 학벌사회와 재수생 문제 

한국의 대중지성은 정권의 폭압 속에서 커나갔다. 대학생들의 사회 모순에 대한 인식은 날카로워졌다. 대학 밖에서는 가난과 소외를 이기며 읽고 쓰는 노동자들이 생겨났다. 사진은 1970년대 대학 캠퍼스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배움에 대한 위대한 한국적 열정은 유신시대에도 부작용을 낳았다. 1970년대 내내 ‘재수생 문제’가 심각했는데, 대학입시에 낙방한 재수생뿐만 아니라 고교입시나 중학입시에서 낙방한 청소년들도 문제였다. 서울 광화문(공평동과 내수동) 뒷길은 세칭 ‘재수로’라 불릴 정도로 대입 학원들이 밀집된 지역이었다. 이 동네 대폿집과 맥주집에는 대낮부터 남녀 재수생들이 담배를 꼬나물고 희희덕거리며 청춘의 고민을 불태웠으며, 동네 당구장은 물론 카바레까지 재수생들 덕에 경기가 좋았다 한다. 

중학입학 무시험제도와 고교 평준화 및 학군제도가 도입되면서 1970년대 중반에는 중입·고입 재수생 문제가 차츰 해소돼 갔으나 1976학년도 대입에서 25만3000여명의 응시자 중 무려 16만명가량의 불합격자가 발생하자 다시 재수생 문제가 크게 사회 문제화되었다. 특히 박정희가 1월 문교부 업무 순시 중에 학원가 주변에 유흥장이 많아 걱정된다면서 “올해 내로 재수생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1976년 내내 한국 사회 전체가 재수생 대책을 고민하고 논쟁했다. 가뜩이나 서러운 삼수생에게 대입 전형 과정에 불이익을 줘 삼수생 수를 줄이자거나, 재수생을 졸업한 고교에 등록하게 해서 진학 및 생활 지도를 받게 하자는 황당한 방안이 검토되기도 했다. 

이 시절 비좁은 대학문 앞에서 와글거리며 서 있던 것은 바로 베이비붐 세대였다. 결국은 대학 입학 정원의 증원이 ‘근본적인’ 대책으로 선택됐다. 다시 말해 대학을 더 세우고 인가하여 진학률을 높이는 방안이 실행됐다. 한국 사회를 확 바꿔놓게 될 이 대책은 1978년 10월에 나왔다. 문교부는 당시 33.1%였던 대학 진학률을 53.5%까지 끌어올려 대학교육을 ‘보편화’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발표했다. 당장 1979학년도 대학 입학정원을 무려 4만9490명이나 증원하고 1980년에도 5만~7만명을 대폭 증원하기로 했다. 2년 만에 대학생 수를 10만명이나 한꺼번에 늘린다는 계획은 군사독재가 아니면 집행하기 어려운 놀라운 밀어붙이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증원 계획은 주로 지방대학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데 사실 지방대학에는 당장 교원과 교실이 부족했다. 

문교부는 우수 교수요원 확보를 위해 서울대 등의 대학원을 대폭 확충하기로 했으며 대학교수 연구비를 20억원 증액하고 연간 200명의 교수를 해외에 파견할 계획도 세웠다. 비록 갑자기 늘어난 학생 수를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대학교수의 ‘리즈 시절’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시책 때문에 많은 대학교가 새로 태어나고 재편·승격됐다. 경기도에 인천공과대학, 전북에 우석여자대학, 부산사상공단 내에 인제의과대학이 신설됐고, 서울 소재 대학 중 ‘경영능력이 우수한 대학에 지방분교를 허가’하여 한양대는 반월공업단지, 중앙대는 안성, 동국대는 경주에 각각 분교를 설립하게 됐다. 또 기존의 초급대학 제도를 없애고 6개교를 대학으로 승격시켜 경동공업전문학교는 동의대학, 안동초대는 안동대학, 목포초대는 목포대학, 마산초대는 마산대학, 군산여자초대는 군산대학, 강릉초대는 강릉대학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그리고 지방대학 야간 정원도 크게 확대했다. 제주대, 원광대, 경남대, 관동대, 울산공대가 증원했고, 또 국가경제 발전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한다는 명분으로 기초과학 및 외국어학과 등에 1만7860명을 증원했다. 수도여사대와 청주여사대는 각각 세종대학과 청주사대로 바뀌어 남녀공학이 됐다. 따라서 흔히 전두환 정권의 작품으로 오해되는 졸업정원제는 실질적으로 이때 시작된 셈이다. 

■ 독서운동과 지하독서 

한편 1960~1970년대에는 ‘국민개독운동’도 벌어졌다. 기독교를 믿자는 운동이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皆)가 독서인이 되자는 전국 규모의 책 읽기(讀) 운동이었다. 원래 민간에서 시작된 마을문고운동, 자유교양운동 등을 정부가 지원하고 관변화함으로써 독서운동에 학생과 지역민들이 강제로 동원되기도 했다. 특히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진 ‘대통령기 쟁탈 전국자유교양대회’는 거대한 규모였다. 절정에 달한 1974년에는 전국에서 8900여개교, 즉 전국 학교의 96%, 학생의 90%가 대회에 참가했다.

정권도 관심이 많았다. 제1회 자유교양대회 시상식부터 정일권 국무총리가 치사를 했을 뿐 아니라 매해 문교부 장관이나 국회 문공위원장이 대회에서 치사를 했다. 육영수 여사도 1970년부터 매해 상위 입상자와 학부모를 청와대로 불러 격려했다. ‘자유교양’지는 1971년 수상자와 학부모가 모인 자리에 참석한 육 여사의 동정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큰딸 근혜양이 대학입시 준비를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고전을 잘 이해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임을 느끼셨다고 어머니로서의 체험담을 들려주셨는데 그때의 표정은 ‘퍼스트레이디’라는 말에서 풍겨나는 위엄보다는 자애와 우애로써 가득 차 있었다.” 

제목에서 보듯 이 좋은 취지의 운동은 다분히 ‘유신스럽게’ 진행됐다. 마치 청룡기나 황금사자기 또는 전국체전 같은 군부독재시대의 스포츠대회를 연상하게 하는 ‘대통령기 쟁탈 전국자유교양대회’에는 전국 각 시·도에서 초·중·고 및 대학생들이 각각 학년별 ‘선수’로 참가했다. 득점이 높은 학생에게 금·은·동메달을 수여했고, 학교별로 딴 메달 득점수를 종합하여 시상하고, 시·도별 참가 학교들의 점수와 독후감 제출자 수를 합산하여 시·도별 상도 주었다. 그래서 ‘자유’로운 고전 읽기는커녕 예상문제 풀이와 선수 합숙훈련 같은 군사독재식 동원과 성과주의가 이 독서운동을 오염시켰다. 그러나 이런 관변 독서운동이 아니라도 대중의 독서력과 독서인구는 확대·확장일로에 있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지하독서’ 인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은 바로 그날, 1974년 8월15일, 서울역에서 청량리를 오가는 지하철 1호선 첫번째 구간이 개통되었다. 연이어 지하철 1호선의 다른 구간도 개통되어 근대 대중교통과 도시사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976년 8월13일자 경향신문은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2주년을 맞아 지하철이 바꾼 일상풍속을 명랑한 어조로 소개했다. 종로 등 지하철역 주변의 상권이 커지고 지하철역이 새로운 데이트와 약속 장소로 쓰인다는 것. 그리고 지하철에서는 다른 대중교통 공간보다 공중도덕이 잘 지켜져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거의 없다는 것. 이어 지하철은 버스처럼 흔들리지 않고 조명도 밝아서 책뿐만 아니라 일간지나 잡지 읽기에도 좋아 서울시민들이 지하철을 탈 때면 으레 포켓북이나 읽을거리를 소지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 ‘지하독서’의 미풍은 2000년대 말 잡스와 갤럭시의 전면 내습을 받아 전면 퇴락하기 전까지 근 40년간 한국 독서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다. 

박정희와 그 체제가 점점 이성을 잃고 미쳐갈 때 이처럼 새로운 대중지성과 민중주의의 지적·윤리적 토대가 만들어졌다. 박정희의 폭압과 개발주의는 대중지성과 민중주의의 성장과 불균등하고 비대칭적인 변증법적 관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1975년 이후 소위 긴급조치를 발동하면서부터 박정희와 그 일당은 검열과 반공의 칼을 휘두르며 더 미쳐 날뛰었지만 함석헌·리영희를 위시한 몇몇 저자의 책들이 청년·대학생층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유신체제에 대한 이반의 힘도 점차 커졌다. 노동자들이 두 눈을 파랗게 세상을 향해 뜨는 이야기를 담은 황석영이나 조세희의 소설도 잘 팔렸다. 대학생들은 단지 숫자만 늘어난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모순과 그 해결 방법에 대한 인식도 날카로워졌다. 1970년대 말에 야학운동과 노동자들을 향한 지식인의 투신이 시작되었다. 광주민중항쟁의 한 주역이었던 윤상원·박기순 등의 ‘들불야학’이나 최근에 영화로 만들어져 새롭게 조명된 부산의 ‘부림’ 사건의 주역들도 이때부터 독서운동에 나섰다. 그리하여 전태일의 후배들이 드디어 책을 읽고 자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유동우·석정남처럼 전국 각지의 공장·교회·야학에서 노동자로서, 나아가 민주주의자이며 인간으로서, 가난과 소외를 이기며 읽고 쓰는 노동자들이 생겨났다. 

개발연대 한국의 대중지성은 폭압 속에서 이처럼 잘 커나갔다. 그 결과 1980~1990년대의 한국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억압적이고 무식한 군사독재·반공체제가 없었다면, 한국인의 지적·문화적 역량은 더 깊고 넓어지지 않았겠는가.


천정환 |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21) 새마을운동과 뉴타운 - ‘돈 맛’으로, 욕망하는 농민을 생산하다


2008년 4월 제18대 총선에서 서울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한나라당은 무려 83%의 선거구를 휩쓸었는데 이는 보수 집권 여당의 승리로는 사상 최대였다. 이 놀라운 총선 결과의 원인은 무엇일까? 노무현 정권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크게 작용했을 테지만 직접적 이유는 ‘뉴타운 개발’이었다. 서울시장 이명박의 작품이었던 뉴타운 개발은 오직 경제적 욕망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뉴타운, 순 한글로 새마을이다.

이 욕망의 열차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출발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아담과 이브가 첫 승객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열차가 한국 농촌마을에 도착한 시점은 대략 1970년대 언저리가 될 것이다. 1970년대 한국 농촌에는 새마을 열풍이 몰아쳤다. 새마을, 영어로 하자면 뉴타운이다.

새마을운동은 국가 주도의 농민동원 프로젝트로는 사상 최대 효과를 냈다고 보지만, 성공과 실패를 간단하게 정리하기는 애매하다. 공식적으로 새마을운동의 목표는 농촌 환경개선, 소득증대 그리고 정신혁명이었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첫 번째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으나 두 번째는 별로였고 세 번째는 도대체 계량할 방법조차 없다. 

뉴타운의 근원 새마을운동 2000년대 뉴타운 개발에서 드러난 경제적 욕망의 연원은 1970년 새마을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농촌 주민들이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된 담장 개량 작업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농촌 ‘잘살기 운동’의 출발점… 시멘트 살포

‘잘살기 운동’인 새마을운동의 성과는 농민의 농촌 탈출, 즉 이촌향도 흐름을 저지했는가를 보면 될 것이다. 농민들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살기 좋아진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드는 우매한 짓을 할 까닭이 있겠는가. 그러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극성기는 또한 이촌향도의 극성기였다. 서울인구는 1970년대 10년간 무려 300만명이 증가했다. 농민들은 국가의 선전, 방송과 언론의 호들갑에도 자신들의 삶의 육감을 더 신뢰했다. 그 감각에 따르자면 도시로 가야 했다. 1970년대 농민들은 농업, 농촌, 농민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인데 매우 정확한 판단이 아니었겠는가. 산업화가 농업, 농촌, 농민의 희생을 통해 진행된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확인된 바이다.

그럼에도 새마을운동에 대한 농민들의 반응은 상당히 인상적인 것이었다. 전국 거의 모든 마을에서 연인원 수백만명이 동원됐고 자기 농사일도 내팽개친 채 운동에 헌신하는 숱한 지도자와 이장들이 나타났다. 새마을운동의 경험을 일생일대 최고의 보람찼던 일로 기억하는 농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반응의 요인은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물질적 유인 효과가 있었다. 새마을운동의 첫 출발은 남아도는 시멘트를 모든 마을에 500포씩 살포하는 것이었다. 국가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던 농민들에게 이 시멘트 ‘만나’가 최초의 먹거리였음은 분명했으며 이후로도 정부 지원은 새마을운동의 최대 동력원이었다. 새마을 지도자나 이장들에 따르면 정부 지원을 따면 하고 못 따면 내년을 기약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또 하나 중요했던 것은 농민들의 자존감이었다. 단적으로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민들은 국가 최고 지도자와의 동일시가 가능해졌다. 이승만과 윤보선이 왕족과 귀족 분위기를 냈다면 박정희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자랑했다. 밀짚모자를 쓰고 논두렁에서 농민들과 막걸리를 나누는 대통령의 모습은 분명 생경한 것이면서도 농민들의 감동을 끌어냈음직 하다.

■ 농민을 ‘1등 국민’으로 치켜세운 파격

새마을 연수원에서는 장관을 비롯한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이름모를 시골마을의 새마을 지도자와 숙식을 함께하며 서로 동지라고 불렀다. 월간 경제동향보고 회의석상에는 매 번 새마을 지도자 한 명이 선정되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했다. 이름 대신 ○○댁으로 불리던 부녀 지도자들은 군수와 면장 같은 높은 분들이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칭찬하는 것을 듣고 말할 수 없는 희열과 보람을 느꼈다고도 했다.

나아가 박정희는 1970년대부터 농민과 농촌에 대한 열렬한 상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960년대까지 농촌과 농민은 후진성의 상징으로 근대화의 제1차 대상이었기에 늘 국가와 대통령으로부터 설교조의 계몽연설을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박정희는 도시 대신 농촌을 강조했다. 도시는 서구화에 찌들어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 같은 곳이라고 비난하면서 오히려 농촌과 농민이 유구한 민족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보물창고라고 치켜세웠다. 농촌과 농민은 ‘서구화 없는 근대화’ 전략의 첨병으로 배치된 셈이었는데,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공략하는 형식은 마오주의를 닮기도 했다. 이는 산업화에 따른 새로운 사회적 적대와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민족주의 담론전략이었다. 어쨌든 농민들로서는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을 듣게 된 셈이었다. 농민들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1등 국민으로 호명되었고 그 호명에 응답을 한 셈이었다.

이 밖에 여러 가지 통치기술들이 많이 동원됐다. 새마을운동의 기본 단위는 마을이었는데 전통적인 공동체의 결속력과 함께 선별 지원을 통해 마을 간 경쟁을 부추기는 전략을 펴기도 했다. 공동체적 압력을 활용하는 방식은 토지 희사와 같은 경우에 위력을 발휘했다. 새마을 사업을 위해 필요한 사유지를 마을 총회를 열어 자발적 희사 방식으로 강제 수용하는 식이었다. 박정희는 이를 마을 민주주의 또는 생활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유신의 민주주의가 새마을 열차를 타고 시골로 낙향해버린 셈이었다. 아마 상행 열차에는 농민들이 타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기본은 국가 관료제의 팽창과 강제력이었다. 1963년 1203명에 불과했던 전라북도 공무원 수는 1980년 8109명으로 늘어난 반면 같은 기간 인구는 248만명에서 223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인구가 줄어드는데도 공무원은 7배 가까이 늘어났으며 그만큼 국가 통치성이 확대 강화된 것이다. 국가 통치성은 다만 양적으로 확대된 데 그치지 않고 ‘영농과학화’란 이름의 근대적 지식권력으로 무장해 농업생산과정을 장악해 들어갔다. 

면단위 지방 공무원들은 모두 담당 마을이 정해졌고 며칠씩 마을에 머물면서 새마을운동을 압박하기도 했다. 때로는 신품종 못자리가 아닌 곳을 과학이란 미명하에 장홧발로 짓밟으면서까지 농민들을 겁박했고, 나무조사와 밀주단속을 통해 농민들의 일상을 장악해 들어갔다. 마을마다 공동 퇴비장을 마련하게 하고 주기적으로 실적을 체크했는가 하면 지붕개량을 위해 반강제적으로 농협 융자를 받게 했다.

농민들이라고 순순히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퇴비장에는 나무 박스를 안에 집어넣어 눈속임을 했고 관의 눈을 피해 밀주를 담가 먹었으며 별 대안이 없었기에 산에서 몰래 나무를 해다 아궁이를 따뜻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국가와 속고 속이는 게임을 하거나 숨바꼭질은 할 수 있을지언정 정면 승부는 불가능했다. 왜 그랬는가.

무엇보다 농업 재생산 과정이 거의 완벽하게 국가와 자본의 손안에 장악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농업은 외부 간섭이 대단히 곤란한 산업이었다. 수천년간 농업은 매우 고립적이고 자기완결적인 생산과정을 영위해왔다. 그러나 산업화는 이촌향도를 부추겼을 뿐 아니라 농사 짓는 과정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종자 구입부터 농작물 판매에 이르기까지 농업은 거의 완벽하게 자본과 국가에 의해 장악되었다. 

■ 국가와 자본에 완벽히 장악된 농업

이러한 변화를 상징했던 것이 1968년부터 시행된 고미가 정책과 1970년대의 녹색혁명이었다. 고미가 정책의 주된 이유는 식량문제였다. 1970년을 전후해 수입 양곡비용은 매년 10억달러를 넘나들었다. 쌀 팔아먹느라 귀하디귀한 달러를 다 써버리는 상황이었고 급기야 전경련까지 나서 고미가 정책을 주문했다. 1970년대 후반 고미가 정책이 후퇴할 때도 역시 전경련의 건의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농업조차 기업의 주문대로 경영되는 시대가 된 것이었다. 

1968년 애초 7% 인상으로 책정되었던 추곡 수매가 인상률이 17%로 높아졌고 이듬해에는 22.26%까지 올라감으로써 본격적인 고미가 정책이 실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출 경쟁력을 위해 저임금·저곡가 유지가 불가피했기에 고미가 정책은 이중곡가제가 되었다. 그 결과 고가로 수매하여 저가로 방출하는 데 따른 적자, 즉 양특적자(양곡관리특별회계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1980년도에는 누적 적자가 1조원을 넘었다.

여기에 통일벼로 상징되는 다수확 신품종 보급이 결합되었다. 미질은 형편 없었지만 소출량이 많았던 통일벼를 정부가 고가로 매입함으로써 농가경제는 상당한 정도로 개선될 수 있었다. 이에 1970년대 중반 농가 소득이 도시가구 소득을 일시 추월하는 상황이 나타나기도 했다. 물론 이는 가구 단위로 비교한 것이고 1인당 소득으로 환산하면 농촌이 도시를 능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인당 실질 소득은 1965년 농촌이 도시의 87.7%에 달했으나 1975년에는 78.6%로 떨어졌고 이듬해에는 65.8%에 불과했다. 

통일벼로 상징되는 녹색혁명은 무엇보다 돈이 많이 드는 농법이었다. 종자를 구입해야 했으며 보온못자리용 비닐도 사야 되고 병충해에 약해 농약도 많이 쳐야 했다. 게다가 비료도 더 많이 주어야 했다. 이제 돈이 없으면 농사짓는 것이 불가능했다. 농촌의 돈 문제, 즉 농업금융은 농협을 통해 장악되었다. 1970년대 초반 농가부채 중 농협의 비중은 30% 남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것이 1980년도에는 48.7%로 절반에 육박하더니 1990년에는 80%를 넘어섰다. 이는 곧 농협이 농민들의 돈줄을 거의 완전히 장악해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제 농사를 지으려면 종자와 함께 종잣돈도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정 하에서 농민들이 국가의 주문을 나몰라라 하는 것은 매우 곤란했다. 먹고살려면 농사를 지어야 했고 농사를 지으려면 농협 돈을 빌려야 했고 돈을 빌리자면 농협에 신용을 저당잡혀야 했다. 돈을 매개로 농민은 곧 자신의 모든 삶을 국가에 저당잡힌 셈이었다. 이로부터 농민운동의 슬로건은 농가부채 탕감, 추곡 수매가 인상과 같이 국가에 돈과 관련된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농민은 국가에 밀착되면서 또한 돈 맛을 알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돈 맛이 주입된 것이었다. 농민은 이제 수천 년의 관습에서 벗어나 교환가치로 모든 것이 환원되는 삶 속으로 들어서게 됐다. 실질적 포섭이란 말은 이럴 때 써야 될 것이다. 요컨대 새마을운동의 최대 성과는 욕망하는 농민의 생산이었다.

돈 맛이 주입된 농민이 도시로 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도시에 들어온 농민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도시에서 뉴타운에 열광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사족이 될 것이다. 이촌향도는 공간의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양식의 전면적 변화였으며 나아가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근본적 변환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 모두는 뉴타운에 입주하고 싶은 이촌향도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새마을 노래의 또 다른 이름은 농민장송곡일 터이며 그 무덤으로부터 뉴타운의 욕망이 자라났을 것이다.


황병주 |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22) 유신 종말의 단초가 된 부마항쟁

자괴감의 이심전심, 유신의 심장 겨냥해 폭발


■ 서울에서 온 가위

1970년대 말 이화여대에서 조롱의 뜻으로 가위를 보냈더라는 소문이 1974년 이래 교내 시위가 끊긴 탓에 ‘유신대학’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던 부산대에 떠돌았다. 부산대 학생들은 가위의 수신자를 자처하며 자괴감을 되씹었지만 이는 이 학교만의 일이 아니었다. 의원직에서 제명당한 김영삼의 지역구에 위치한 동아대도, 전직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가 장악한 경남대도 이 소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거시기’를 잘라내고 싶을 정도로 이 지역 대학생들은 자신의 무기력에 자괴감을 느꼈고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동시에 공분의 표출 방식을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이 가위에 관한 소문이었다. 이 대학생들의 자괴감은 한순간에 부마항쟁으로 폭발한다. 

1979년 10월16일 부산대에서 시작된 부마항쟁은 학생 중심의 민주항쟁 성격과 도시 하층민에 의한 도시 봉기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어느 하나가 절대적이지 않았기에 두 성격은 부마항쟁의 짧은 기간에 혼재되어 있었다. 낮에는 대학생이 게릴라식으로 도로를 점령하는 시위를 주도했고, 밤에는 사진 찍힐 것을 두려워하여 “불 꺼라”를 외치는 도시 하층민이 관공서를 공격하며 부산과 마산의 항쟁을 이끌었다. 어느 것에 초점을 맞추든, 부마항쟁은 독재권력이 종국에 이르러 무엇에 맞닥뜨리게 되는지를 보여준 역사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비록 유신정권의 마지막 장면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탄환으로 장식되었지만, 탄환에는 없었던 저항의 근원적인 폭발력을 부마항쟁이 보여주었음은 자명하다. 1970년대 들어 처음으로 시위대가 도심을 점령했으며 파출소, 세무서 등 관공서와 권력에 굴복한 언론사가 공격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약탈행위 같은 난동은 일어나지 않았고, 김영삼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비난받을 정도로 항쟁의 지향점은 정치적 이해를 넘어서 있었다. 계엄령이 내려지고 공수부대가 급파되기까지 이 짧은 시기의 부산과 마산에는 혁명적인 저항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한동안 ‘잊혀진 항쟁’으로 남아 있던 부마항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가 있었다. 야당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이 지역의 정치적 정서를 자극했으며, YH사건 등으로 이어진 일련의 민중저항이 부산, 마산에도 현실감 있게 전해진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정책에서 소외된 지역의 열악한 경제상황에다 과중한 부가가치세로 인해 서민계층의 불만이 쌓인 것도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중소상인까지 합세하여 세무서를 공격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성장해온 대학생·시민사회의 민주화 기반 역시 부마항쟁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대학생 지하서클은 계속되었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운동과 독서모임도 역량을 키워나갔다. 1981년 ‘부림사건’으로 엮인 이들의 독서·학습모임도 1970년대 후반부터 성장해온 민주화 운동 세력의 중추였기에 부마항쟁의 뜨거운 열기는 한순간 급격하게 타오를 수 있었다.

1979년 10월16일 시민과 대학생들이 부산 광복동에서 유신철폐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10월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심성의 연대로서 부마항쟁

그러나 역사적 평가와 분석만으로 부마항쟁의 근본적인 동력의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경찰이 상주하던 1970년대 대학의 살풍경 속에서, 게다가 유신대학의 고분고분한 학생 시위대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도심으로 진출하여 시민과 합세하는 장면은 상상하기 쉽지 않다. 학내 시위를 준비한 조직이 존재한 것은 분명하나 이것이 대규모 시민 항쟁으로까지는 기획되지 않았던 점에 비추어 본다면, 부마항쟁의 해방적 장면은 자발적인 동기부여를 빼놓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사실 부마항쟁은 작은 실패에서 시작되었다. ‘10·16 부마항쟁’으로 불리는 항쟁의 전날, 부산대에서는 시위를 주도한 이들이 교내에 유인물을 뿌리고 도서관 앞으로 모일 것을 알렸지만 이에 호응한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튿날 상황은 달라졌다. 전날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선동에 교내 절반에 가까운 학생들이 움직였다. 이 같은 극적인 상황변화는 전날의 실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0월15일 도서관 앞에 무심하게 흩어진 선언문은 시위 실패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유신대학생의 내면에 가라앉았던 자괴감과 분노를 되살리는 불씨가 되었던 것이다. 10월16일 다시 유인물이 뿌려졌을 때 수천명의 학생들이 뛰쳐나온 것은 세련되게 조직된 선전 덕분이 아니라 저항의 심성이 서로에게 전염되듯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유신대학생의 항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위대가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남포동, 광복동 일대의 도심으로 진출하자 그 소식은 근처 동아대, 고신대 학생에게도 전해졌다. 자신들의 앞마당을 뺏길 수 없다는 묘한 자존심과 함께 유신체제 내내 소문 속 문제의 가위를 받은 듯한 부끄러움 혹은 모멸의 심성이 대량으로 전염되었다. 고립되어 있던 개인의 내면은 해방된 공간에서 극적으로 접속하면서 커다란 항쟁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은 부산에서 마산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부산의 상황이 가라앉던 18일에 결집한 경남대 시위대가 맨 먼저 향한 곳은 4·19의 시작점이 된 3·15의거 기념탑 앞이었다. 그곳에서 경남대학생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선배님, 못난 후배를 꾸짖어 주십시오. 우린 전국 대학생들이 유신헌법 철폐 시위를 벌일 때 학교당국의 농간으로 ‘유신찬성 데모’를 해버린 못난 후배들입니다”라는 고해성사는 부마항쟁을 일으킨 청년들의 심성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오랜 기간 묵혀 두었던 자존심이 사라지지 않고 되살아난 것이다. 이러한 심성을 서로가 확인함으로써 이들은 거대한 저항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부마항쟁의 시위는 부끄러움과 분노라는 심성의 전도(傳道)와 연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심성의 연대는 조직적인 기획 없이도 시·도의 경계를 넘어 북상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비상계엄 선포를 보도한 경향신문 10월18일자 1면 기사.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연대의 힘과 권력이 느낀 두려움

유신의 심장이 두려워한 것은 이 전도현상이다. 현장을 목격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마항쟁의 열기가 5대 도시에서 재현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만큼 사태는 심각했다.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노라 말했고, 100만명쯤 죽여버려도 별일 없다고 경호실장이 부추겼지만, 이는 오만보다도 본능적인 두려움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특히 공화당의 텃밭으로 다져진 부산·경남지방에서 반정부 소요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한 충격은 컸던 모양이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가 도농의 경계를 따라 남북으로 나뉘었다면, 1970년대 들어 이 경계는 교묘하게 동서 간의 지역감정으로 전환된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부산·경남의 항쟁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과 다름없었다. 부산에서 마산으로 전도된 것같이 대구를 거쳐 서울로 전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실제로 부마항쟁이 종료된 후 대구의 경북대와 영남대에 휴교령이 내려졌지만, 10월25일에 계명대에서 시위가 발생한다. 부산의 시위에 놀라 다급하게 휴교를 알린 경남대 교내방송이 오히려 집결신호 역할을 한 것에서 보듯이 저항은 휴교령 정도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결국 부마항쟁을 거치면서 유신정권은 자신의 지지기반이 붕괴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부마항쟁은 유신정권의 심장을 겨냥한 치명적인 사건으로 떠올랐다. 

부마항쟁은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치밀하게 기획된 사건도 아니었다. 부산대에서 벌어진 시위는 이 커다란 저항의 발상이었고 실제 항쟁은 그 이상으로 전개되었다. 부산에서 마산으로 이어진 대학생들의 심성의 연대에 거리의 시민들도 공감할 만큼 저항은 전방위적이었다. 정권은 언론을 통해 YH사건을 적군파 빨갱이의 소행으로 매도했지만 마산 공단의 노동자들은 여공들의 절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서울 학생들이 합류한 지역 사회조직도 동질감으로 지역적 차이를 무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연대는 도시의 하층민에게로 향했다. 경제성장의 혜택에서 가장 멀리 소외되었기에 그들의 저항은 훨씬 더 격렬했다. 대통령은 ‘식당뽀이’나 ‘똘마니’들이 난동을 피운다고 단정했다. 또 목격자에 따라 깡패처럼 보이기도 했다. 부산시경은 20세 전후 때밀이, 식당 종업원, 공원, 구두닦이 등의 ‘불량성향자’가 대학생으로 가장했다고 분석했지만, 시민들은 오인하지 않았다.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는 물론, 다방 아가씨와 호스티스까지 거리로 나왔을 때 사람들은 ‘세상은 이미 달라졌다’, ‘유신도 박정희도 이젠 갔다’고 생각했다. 항쟁 초반을 주도한 대학생들이 점차 흩어지고 도시 하층민들이 다시 거리를 메운 것은 부마항쟁만의 현상은 아니다. 4·19혁명과 1980년 광주도 이와 같았다. 이 ‘똘마니’, ‘깡패’ 들은 유신 체제 하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같은 심성으로 엮인 사람들이었다. 

전면적인 항쟁이 서울이 아닌 정치적 텃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내면으로부터의 저항이 이미 대세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부마항쟁은 1980년 광주와도 직접 연결될 수 있었으며 민주화 운동으로서 보편적인 가치를 얻게 되었다. 

■ 소외된 이들의 가능성

그런데 반유신의 저항이 왜 하필 이곳에서 일어났을까. 아니, 지방의 저항이 어떻게 유신정권의 종말을 부른 결정적 사건이 될 수 있었을까. 이 같은 사태가 서울에서 벌어졌다면 상황 전개는 달랐을지 모른다. 여당의 텃밭, 혹은 집토끼쯤으로 여겼을지라도 부산·경남은 항상 한국의 변두리였다. 그러나 변두리에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사건이 되지 않았을까. 정권의 감시와 통제도 주변부 내면의 저항은 소멸시키지 못한다. 지역의 소외된 이들의 심성이 짙어질수록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에 집중된다. 그리고 그 심성은 결정적인 국면에서 보이지 않는 연대를 확인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항의 불길을 일으킨 것이다. 부산에서 마산으로, 대학생에서 노동자로 이어지는 반유신의 심성들은 주변부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그 점에서 부마항쟁은 서울보다 더 큰 저항의 의미를 갖는다. 주변에서 중심을 향하는 힘의 전복적 가능성은 중심에서 주변을 향하는 지배의 힘보다 훨씬 거대했다. 

부마항쟁의 의의는 여기에 있다. 4·19, 5·18,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을 잇는 민주화 운동사에서 부마항쟁은 지역적 특이성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가진 가치의 일반성을 증명한 것이다. 자발적인 저항이 집결하는 장면은 부끄러움과 분노라는 심성이 연대했기에 가능했으며 이 연대가 계층의 차이와 지역의 경계를 넘을 수 있음을 보인 것도 부마항쟁이었다. 유신은 이때 이미 끝나 있었다고 보는 게 옳다. 나약한 이들이 부끄러움과 분노를 고백하며 서로의 ‘안녕’을 물을 때 말이다.


김성환 | 부산대 HK연구교수



(23) 연탄 파동과 에너지 정책 강압적 ‘주유종탄’ 정책에 검게 탄 서민의 가슴


한국에서 연탄의 전성기는 박정희 통치기와 대략 맞먹는다. 연탄이 공장 및 산업 시설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일반 가정에서도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연료의 주종은 신탄이었다. 1960년 당시만 해도 에너지 소비 중 나무와 숯의 비중이 63%를 웃돌았던 반면 석탄의 역할은 27%에 불과했다. 석탄 소비가 본격화하고,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석탄을 주원료로 하여 원주형으로 압축 성형한 구멍탄’, 즉 연탄이 가정용 연료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다.

아마 지금 4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연탄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찬바람이 돌면 연탄부터 들이던 기억, 리어카나 지게로 나르던 기억, 연탄 가느라 한밤중에 오들거리며 방을 빠져나가던 누군가에 대한 기억. 겨울철이면 매일이다시피 연탄가스 중독 기사가 떴고 1년에도 여러 번 탄광 매몰 뉴스가 전해졌으며 박정희가 죽고 몇 달 후에는 사북에서 대규모 쟁의 소식이 들렸지만, 기름보일러나 도시가스 난방이 주종이 돼 버린 지금 연탄은 거의 ‘그때 그 시절’의 감미로운 향취마저 띠고 있다. 

시흥 주부들 수백명 ‘연탄집게 시위’ 연탄파동이 일어난 1974년 10월16일 경기도 시흥 주부들이 대도시 위주의 연탄 공급에 항의하면서 연탄집게를 들고나와 시흥대교 부근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증기기관 발명 이후 한때 석탄은 국가의 부강을 좌우하는 열쇠였다. 지금도 화력발전의 상당 부분을 수입 유연탄에 의존하고 있는 처지임에도 한국에서 석탄이나 연탄은 이미 지나간 시절의 화제처럼 보인다. 박정희 시절부터 그랬다. 1960년대 중반까지 박정희 정권의 주축 에너지 정책은 매장량이 풍부한 국내 무연탄을 개발하는 것이었으나 울산 정유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하면서 그 축은 유류로 대체하는 쪽으로 급속히 기울었다. 1966년 연탄파동을 겪은 후에는 더욱 그랬다. 

■ 1966년 ‘가격 통제’로 1차 파동

물가인상률이 경제성장률만큼이나 가파르던 당시, 정부에서는 물가인상률을 8%선에서 동결시킨다는 방침하에 먼저 연탄가격 통제에 나섰다. 시중가격이 장당 15원대였음에도 8원이라는 고시가격을 책정하고 판매상을 압박하는 밀어붙이기식 통제였다. 비현실적 고시가격은 당연히 공급 위축을 불러왔다. 산지에 무연탄이 쌓여 있는데도 실제 소비자들은 연탄을 구하지 못해 발을 굴러야 했다. 암거래가 성행해 외곽에서는 연탄가격이 고시가의 세 배 훨씬 넘게 치솟았다. 시장주의자들은 “경제질서를 무시한 통제정책이 부작용만 양산했다”며 혀를 찼다. 

때마침 정유시설을 마련해 국내 석유가격을 낮출 수 있게 됐다. 정부는 연료를 전적으로 유류로 대체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국영기업과 대기업에 유류로의 대체를 의무화하다시피 했고 다방이나 접객업소에까지 기름 사용을 강권했다. 이른바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으로의 전환이었다. 산업화·도시화의 여파로 매년 10%씩 에너지 수요가 급증하는 형편이라 에너지 정책의 전환이 시급하긴 했다. 

정부에서는 국내 무연탄만으로는 에너지 수요의 3분의 1밖에 감당하지 못할 것이고 그나마 30~40년이면 고갈되고 말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반면 중동 산유국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석유는 싸고 무진장한 자원처럼 보였다.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으나 ‘주유종탄’ 정책은 그대로 추진되었다. 1966년 총 16%에 불과했던 총 에너지 공급 대비 석유의 비율은 1972년 52%로 급상승한다. 

그리고 한동안 “정유공장을 여기저기 짓고 석유를 흔하게 만들”었다. 석유공사 외에 호남정유와 경인에너지가 설립되면서 과다경쟁으로 석유값이 더 내려가기도 했다. 연탄은 아직 신식 연료인 데다 새마을운동으로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면서 연탄아궁이가 겨우 농촌에도 보급되기 시작한 단계였지만, ‘주유종탄’ 정책의 파급 효과는 빨랐다. 도시의 살 만한 가구에서는 벌써 연탄아궁이를 없애고 기름보일러를 들이기 시작했다. 1974년 두 번째 연탄파동이 닥친 것은 이렇듯 유류로의 대체화가 급속히 이루어지던 무렵이다. 

한국이 ‘1973년의 제1차 오일쇼크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계속했던 것은 사실이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 당시 승승장구하던 한국이 벽에 부딪힌 것은 그보다 앞선 1968~1971년 무렵, 그러니까 박정희가 압도적 지지로 재선에 성공한 직후였고, 1973~1974년은 이미 유신체제에 진입한 한국이 중공업화 정책으로 선회, 경기침체에 공격적으로 대응하던 즈음이었다. 그러나 오일쇼크의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4년의 연탄파동은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오일쇼크가 서민들의 삶에 어떤 얼룩을 남겼는지를 잘 보여준다.

비현실적 가격통제 때문에 시작됐던 1966년의 연탄파동과는 달리 1974년의 연탄파동은 실제 공급량 부족이 큰 원인이었다. 조짐은 1년 전부터 보였다. 오일쇼크의 여파로 기름값이 오르기 시작하자 정부에서는 연탄 사용을 독려하는 한편 제철에 앞서 미리 연탄을 사다 말려놓으면 열효율이 한결 높다고 선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파동을 겪은 바 있는 서민들은 1974년에는 여름이 닥치기도 전에 연탄을 사 나르기 시작했다. 유가 인상을 겁내 기름보일러를 다시 연탄아궁이로 바꾸는 집마저 있었다. 몇 년간의 주유종탄 정책으로 채탄량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상황이어서 7월에 벌써 연탄이 바닥날 조짐을 보였다.

■ 오일쇼크 여파에 연탄 품귀…1974년 2차 파동

정부에서는 연탄값을 올리고 탄을 소형화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장당 22원이었던 가격을 30원으로 대폭 인상하는 한편 중량은 0.5㎏쯤 줄였다. 그것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7월20일에는 일종의 배급제를 고시했다. 전국 12개 도시를 대상으로 가구별 연탄카드를 발급, 1회당 구매량을 제한한 것이다. 그 밖에 요식업소나 접객업소 등에서의 연탄 사용을 금지하고 각급 학교 겨울방학을 연장하는 등의 방책도 내놓았다. 오일쇼크 와중이었음에도 기름값을 10% 이상 인하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겨울이 깊어가도록 사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특히 연탄카드제에서 소외된 지역은 문제가 더 심각했다. 새마을운동으로 연탄아궁이 설치가 독려된 데다 산림보호법 개정으로 많은 지역에서 낙엽 채취마저 금지된 상황이었다. 마을별로 연료 공동채취장을 지정했지만 땔감이 모자랐고 연탄은 더더구나 부족했다. 연탄 운반선이 끊긴 섬지역에서는 뭍으로 연료를 구하러 나서야 했다. 도시에서 30원인 연탄이 울릉도에서는 장당 80원까지도 갔다고 한다. ‘새마을’에서, 모처럼 마련한 연탄아궁이를 지피지 못해 “시부모와 아들 내외가 한방에서” 자야 하는 형편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연탄아궁이를 땔감아궁이로 환원시키라는 시책마저 하달되었다. “1년에 아궁이를 세 번이나 뜯어고쳤다”는 하소연은 아마 사실 그대로였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나지만 서울이라고 편안치는 않았던 것 같다. 연탄은 여전히 부족했으며, 한번에 수백장을 들이는 대신 찔끔찔끔 수십장을 들일 때마다 집 안은 검댕투성이가 되곤 했고, 탄이 작아져 아궁이 간수해야 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품귀 현상의 당연한 여파로 저질 연탄이 많아져 사정은 더 고약했다. 1966년 파동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공급 자체에 급급했던 정부는 저질탄 문제를 애써 외면했다. 불량탄이 적발되었을 때도 번번이 경고 조치만으로 넘어가곤 했다. 덜 마르고 작고 열효율 낮은 불량 연탄 때문에 고생하던 누군가를 기억한다면, 그건 그 배후에 똬리를 틀고 있던 에너지 정책, 산업정책, 새마을운동 등을 한꺼번에 환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1966년과 1974년의 연탄파동에서 집단적 항의는 거의 없었다. 산발적 불평불만이 제기되었을 뿐이다. 1974년 10월 경기도 시흥에서 있었던 주부들의 항의가 지금 확인할 수 있는 집단행동으로는 유일하다. 당시 안양시에 편입돼 있던 시흥군은 시흥대교를 사이에 두고 서울과 접한 지역이었다. 다같이 힘들었던 연탄파동 중에도 지역별 불균형은 심각해 농어촌이나 도서지역 외에 대도시 밖의 거주자도 힘든 고초를 겪어내야 했다. 대도시는 연탄 우선 확보에 집중하는 한편 밀반출을 엄격히 금지했다. 시흥대교에도 서울시 연탄 밀반출 단속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안양시내 연탄값이 장당 100원까지 치솟았다는 그해 가을, 주부들은 더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 문제는 모자라는 것이 아닌 고르지 않은 것

10월16일, 연탄을 가득 실은 트럭이 시흥대교에 다다른 순간 인근 주부들이 모여들어 트럭을 둘러쌌다. 자세한 내막은 전해지지 않지만, 아마 처음엔 웅성거리며 항의하던 것이 순식간에 숫자가 300~400명으로 불고, 그중 상당수는 연탄집게를 들고 나와 트럭에서 연탄을 내리려 했던 것 같다. 정치·사회적 변동에서 가장 먼 자리에 있는 주부, 그야말로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 수백명 떼를 짓고 연탄집게를 흔들어대며 목소리를 높이는 장면은 적잖이 충격을 준 모양이다. 사태는 더 번지지 않은 채 일단락됐고 그 충격 자체만은 몇몇 조각글을 통해 전해진다. 그때 어느 신문에서 꼬집었다시피, “모자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고르지 않은 것이 바로 문제”였다. 

두 차례 파동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에너지 정책은 별반 바뀌지 않은 듯하다. 에너지원의 석유의존도는 1978년 63%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상승했다. 1970년대 말 국제유가가 가파르게 상승한 후에야 석유 의존 일변도의 정책이 수정되기 시작했다. 천연가스를 도입하는 한편 원자력과 유연탄을 이용한 발전시설을 확충하는 방향으로 일대 전환이 이루어진다. 석유의존도는 1987년 44%로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개발과 성장을 지상과제로 삼았던 에너지 정책의 체질 자체가 바뀌지는 않았다. 


‘주유종탄’ 시절에서는 멀어졌지만,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 정권 말기에 마련된 에너지 정책의 궤도 위에서 살고 있다. 유보조건을 달지 않을 수 없겠지만 박정희 시절 한국의 ‘발전’은 과연 놀라운 것이었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그 막다른 길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와 다른 길을 어떻게 찾아나갈 수 있을까. 어떤 길도 쉽지 않고 어느 부문도 만만치 않을 텐데 어떻게 뒤에 태어난 자, 배우고 달라져야 할 자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을까. 박정희에 대한 평가 자체는 차라리 그 뒤의 몫이었으면 싶다. 2013년 현재 연탄 한 장 값은 500원이라고 한다.


권보드래 | 고려대 교수



(24) ‘퍼스트레이디’ 육영수 - 박정희의 냉혹함 보완한 ‘목련꽃 이미지’


현재 한국 대통령은 여성이다. ‘박근혜’라는 미혼의 자연인은 젠더로서의 ‘여성성’이 다가(多價)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한국 가부장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아직 그가 ‘여성’으로서 발하는 (젠더적) 영향력은 거의 없는 듯하다. 한복이 새 패션코드가 됐다는 소식도 없다. 

박근혜 후보가 지난 대선에서 51.6%의 득표율로 당선된 데에는, 국정원과 군의 성실한 몇몇 공무원들의 ‘개인적’ 여론조작 활동 외에도 50~70대 여성들의 몰표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한다. 그들은 못된 며느리(?)를 연상시키는 이정희가 미워서, 또는 ‘엄마아빠 없이 자란 근혜가 불쌍해서’ 같은, 도저히 합리적인 정치적 선택의 근거로는 보기 어려운 이유를 대며 거의 ‘조직적으로’ 몰표를 던졌다 한다. 이정희 후보는 대선 후보 토론에서 ‘재수 없는’ 말빨과 총기(?) 넘치는 눈빛으로 박근혜 후보를 철저히 짓밟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그것은 시종 ‘버벅거린’ 박 후보의 득표에 도움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 세론이었다. 그런데 계급마저 초월한 그들의 ‘묻지마 투표’에는 남성중심사회나 젊은 세대에 대한 분노뿐 아니라 여성의 권리를 향한 열망 같은 것들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에서 소외되고 희생한 세대들이다. 

육영수 여사가 1969년 한 양말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공장 노동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영부인’ 활동도 정치임을 보여주다

박근혜가 가진 정치적 자원 중 가장 유력한 것은 물론 ‘박정희 신화’지만, ‘여성 대통령’으로서 박근혜가 가진 정치적 자원 중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분명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과 ‘육영수 코드’일 것이다. 박정희야 언제나 증오와 저주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누구도 육영수를 미워하거나 폄하하기 어렵다. 

여기서 꽤 어려운 질문과 마주쳐야 한다. ‘영부인’의 면모나 활동 따위가 과연 해당 정권의 통치성 중 일부가 될 수 있나? 그럴 수도 있음을 보여준 것이 바로 육영수와 그녀가 남긴 것이 아닌가. 

결론부터 미리 말하는 셈이 되겠는데 육영수는 박정희식 정치의 냉혹함과 촌스러움을 그 특유의 자애로움과 우아함(또는 그런 이미지)으로 어루만지거나 무마하는, 그리하여 박정희 레짐의 국민주의를 다른 차원에서 구현하는 주체 역할을 했다. 그 이미지는 특히 신사임당 같은 봉건적·역사적 인물과 겹쳤지만(또는 그렇게 조장했지만) 육영수의 역할은 단지 ‘현모양처’ 이상이었다. 아직 이에 대한 연구나 논의는 별로 없다. 

육영수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진정한(?) ‘퍼스트레이디’이자 ‘국모’(이런 봉건적인 용어를 인용해야 함을 용서 바란다)로서 박정희 정치를 보족(補足)했다. 육영수의 전임자인 프란체스카와 공덕귀는 매우 제한된 역할만을 수행했을 뿐, 국모 자격은 없었다. 프란체스카는 기본적으로 파란 눈의 외국인이었고 못난 독재자 남편과 함께 비루하게 하와이로 달아나야 했다. 공덕귀 여사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여유 자체가 없었다. 

후임자들과 비교해도 퍼스트레이디로서 육영수는 독보적이다. 예컨대 전두환의 ‘안사람’이며 ‘이대 나온 여자’(중퇴)였던 이순자 여사가 어린이와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나름 애쓴 공로가 없지 않음에도 절대다수 국민들에게 받은 조롱과 미움을 생각해보라. 실제 한국행정학회가 조사한 한 자료에 따르면, 역대 퍼스트레이디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육영수 여사만 긍정적으로 나타났다 한다. 

■ 비극적 죽음으로 완성된 이미지

육영수는 1950년 한국전쟁 중 부산에 피란 중일 때 전처소생이 있는 육군 중령 박정희와 결혼했다. 퍼스트레이디가 된 이후 육영수의 활동폭은 넓었다.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만든 육영수의 면모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여성·장애인·아동 등 소외된 자들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벌인 봉사활동이다. 알려진 대로 육영수는 양지회 같은 단체를 통해 소외되고 가난한 여성이나 장애인을 도왔으며 자주 고아원·양로원을 방문·위문하고 복지정책에 관여해 어린이회관·어린이대공원을 만들고 정신지체 아동을 위한 사회사업도 벌였다. 특히 육영수의 ‘봉사 신화’가 만들어진 데는 한센병 환자를 도운 일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듯하다. 육영수는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한센병 환자 복지사업에 나섰다. 그중에서 가장 크게 대중의 이목을 끈 일은 1971년 12월18일 유명한 한센 시인 한하운이 수행하는 가운데 전남 나주의 한센인촌을 방문하고, 이어 1972년 9월3일에도 전북 익산의 한센인촌을 방문한 것이다. 또한 틈틈이 한센인촌에 약품과 종돈 등 구호물자를 ‘하사’했으며, 1973년 10월2일에는 소록도 한센병 환자 자녀들을 청와대에 불러 접견하고 다과를 베풀었다. 한센병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사회적 배제가 여전하던 시절, 직접 환자와 접촉하고 사회적 인식을 다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육영수의 공로는 크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1974년 서거 직후에 전국에 산재한 한센병 환자들이 소록도 등에 육 여사 공덕비를 세웠다. 아마 이런 사정들 때문에 육영수가 소록도 한센인촌을 방문해 일일이 환자들 손을 잡아주었다는 신화도 만들어진 모양이다. 그러나 이는 없는 사실이다. 육 여사는 소록도를 방문한 적이 없다. 2000년 5월 역대 대통령 부인 중 처음으로 소록도를 찾아간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였다. 이 사실은 국립소록도병원사에도 뚜렷이 기록돼 있다. 

둘째, 육영수가 여성으로서 겪은 고난이다. 이는 특히 거칠고 독한 유신의 시대상과 박정희식 정치에서 비롯되는 바다.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주로 육영수 자신의 인터뷰에서 비롯된 것임) 육영수는 재야와 일반사회의 여론을 들어 박 대통령에게 직언과 건의를 마다하지 않는 ‘청와대 안의 야당’이었다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남편 박정희의 사생활이다. 박정희는 상당히 시끄러운 여성편력의 주체였고 육영수 생전에도 말썽을 일으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육박전’을 벌여 박정희에게 맞았다는 둥 소문의 주인공으로서 육영수는 못된 가부장에게 수난당하는 여성이자 조강지처로서의 대중적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이 그녀의 이미지를 완성했다. 이런 면은 1974년 8월15일 박정희 저격사건에서 육영수가 결국 남편인 박정희 대신 희생된 격이어서 더욱 증폭됐다. 아직 젊고 우아했던 그녀가 총탄에 갑자기 서거함으로써 그 죽음은 진정 비극적이고 애처로운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목련꽃’이라는 이미지도 이렇게 부여된 것일 테다. 8월19일에 열린 국민장이야말로 유신의 역사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아니 대한민국 현대사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한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수한 대중과 특히 많은 여성들이 육영수와 박정희의 가족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 이날, 박정희식 파시즘적 통치와 반공개발주의는 다른 함의와 후과를 갖게 된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에 남긴 ‘상반된 후광’

육영수는 좋은 의미에서 오지랖이 상당히 넓었던 듯하다. 그녀의 손길은 전태일을 배출하고 1970~1980년대 가장 대표적인 민주노조운동의 산실이 된 청계피복노조에까지 뻗었다. 1973년 육영수는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실태에 대해 듣고,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뜻을 받들어 노동교실을 설립하자 이를 적극 챙겨 지원했다. 그러나 육영수 사후 1977년 박정희의 공권력은 바로 이 노동교실을 마구 짓밟고 노동자들을 감옥에 처넣었다. 이 에피소드는 상징적이다. 육영수의 온정주의와 박정희의 잔인무도한 노동정책과 통치성이 선명하게 대비되지 않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흥미롭게도 대통령과 퍼스트레이디를 겸하고 있는 셈이다. 부모 양쪽으로부터의 후광을 다 물려받은 그녀의 통치는 잔혹하고 공포스러웠던 아버지 쪽에 기울게 될까, 아니면 자애롭고 따뜻했던 어머니 쪽으로 흐를까? 물론 어느 쪽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불통과 복고 이외에 박근혜 대통령이 새로 보여준 긍정적인 리더십이나 ‘대통령 문화’는 없다. 이제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인데 사람들은 마치 유신시절 몇 년을 보낸 것처럼 답답해하고 있다. 어머니 육영수의 민주적이고 ‘목련꽃’ 같은 이미지는 단지 외양 때문에 얻어진 것만은 아니다. 전태일과 청계피복노조의 후예라 할 만한 민주노총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금 박 대통령 앞에 있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25) 기능올림픽 - ‘산업전사’들, 패자 부활의 잔혹사


방송과 언론이 소치올림픽으로 들썩이는 것을 보니 다시 올림픽 시즌이다. 올림픽의 가장 강렬한 기억은 아마 ‘쌍팔년도 올림픽’일 것이다. 담배부터 고속도로, 심지어 탱크에까지 88이란 이름이 붙었고 금메달을 목에 건 자랑스러운 ‘대한의 자식들’이 텔레비전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올림픽을 치르면서 한국은 구질구질한 1970년대와 작별하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주지하듯이 올림픽은 국가 간 경쟁의 글로벌 이벤트이다. 국가와 민족 단위로 편제된 국제질서는 1등부터 꼴찌까지 전 지구를 단일한 수직 계열화로 묶어냈고 올림픽은 그 질서의 상상적 재현 메커니즘이 되었다. 비슷한 것으로 월드컵이 있다. 양대 글로벌 이벤트에서 4등을 한 한국, 과연 선진국일런가.

여기 선진국을 향한 또 다른 올림픽이 있다. 정식 명칭은 국제직업훈련경기대회쯤 되겠지만 기능올림픽이라는 별칭이 더 유명한 이 대회는 단연 한국의 독무대이다. 1967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해 1977년 최초로 종합우승을 한 이래 9연패를 달성했는가 하면 2013년까지 치러진 20개 대회에서 무려 18번의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스포츠 올림픽이나 기능올림픽이나 국가별 등수를 매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은 독자적 순위매김에 골몰한다. 


■ 국가·자본 의기투합 ‘민족주의 동원’

구질구질한 1970년대는 무엇보다 기능올림픽의 시대였다. 1947년 스페인에서 시작되어 1953년 제1회 국제대회가 개최된 기능올림픽에 한국이 참여하게 된 것은 1965년 유럽순방 중이던 김종필의 구상으로부터였다. 5·16 쿠데타의 구상자답게 김종필은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었다. 중앙정보부와 공화당을 만들어내더니 자의 반 타의 반 유럽 외유길에 한눈에 반한 게 기능올림픽이었다. 귀국하자마자 김종필은 권력 2인자라는 조건을 십분 활용해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켰다. 1966년 1월 국제기능올림픽한국위원회를 만들어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고 참관인단 파견을 거쳐 1967년부터 정식으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첫 선수단의 출국신고를 받고 박정희는 훌륭한 성적을 거둔 선수에게 일생을 보장할 것을 약속했다. 처녀출전해 세계 4위의 성적을 거두고 귀국하자 범국민적 환영행사가 개최되었다. 요란한 카퍼레이드를 거쳐 서울 시민회관에서 개최된 환영대회가 국무총리 이하 9개 부처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고 대통령에게 귀국신고를 하였다. 시작과 끝은 언제나 청와대였다. 

1967년 첫 출전해 종합 4위의 성적을 거둔 국제 기능올림픽 선수단이 서울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기능올림픽의 황금기는 1970년대였다. 1977년 최초로 종합우승을 했고, 1978년에는 부산 대회를 유치하였다. 종합우승을 차지하자 환영행사는 말 그대로 ‘거국적으로 거행’되었다. 카퍼레이드, 대통령 귀국신고와 함께 국립묘지 참배가 추가되었고 지역별 환영행사도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언론과 방송 또한 연일 1면 기사로 우승 소식을 전했고 동아일보는 사설로 “조국의 번영을 몸으로 실천하고 이룩하는 역군들”이라고 칭송했다. 화룡점정은 영애 박근혜양을 대동한 박정희가 “미국 등 선진 공업국가들의 선수들과 일대일로 당당히 겨루어 종합우승한 것”을 치하하는 것이었다. 

기능올림픽은 국가와 자본의 합작품이었다. 초대 김종필을 위시해 김재순, 오학진, 이낙선, 홍성철 등 1980년도까지 역대 위원장들은 김재순을 제외하고 모두 5·16 쿠데타 주역이었다. 반면 부위원장은 재벌들이 주로 맡았다. 이낙선 위원장 시절에는 럭키금성의 구자경을 위시해 이정림, 박용학 등 재계 거물들이 부위원장이었다. 실무 담당인 사무총장은 대학교수였다. 기능을 매개로 국가와 자본 그리고 지식이 삼위일체를 이룬 셈이었고 학교와 공장은 그 제도적 장치였다.

국가와 자본이 의기투합한 이유는 분명했다. 기능올림픽은 무엇보다 ‘민족중흥’이라는 민족주의 스펙터클의 훌륭한 무대였다. 양정모의 금메달 하나에 전국이 들썩일 정도였는데 기능올림픽은 종합우승을 밥먹듯이 했다. 당시까지 세계대회에서 한국이 종합우승을 차지한 것은 기능올림픽이 유일했다. 세계체제 속에서 자신의 존재증명을 하는데 이만한 호재가 없었다. 

■ 가혹한 경쟁으로 탄생한 ‘국가대표’

물론 기능올림픽은 규모와 영향력 그리고 중요도 측면에서 스포츠 올림픽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월드컵과 박스컵의 차이라고나 할까. 17~22세 사이 청소년 대상의 직업교육 활성화 차원에서 시작된 대회를 몇 배로 뻥튀기하여 전 민족적 국가 이벤트로 만든 것은 박정희 체제의 민족중흥 욕망일 것이다. 어쨌든 박정희 체제에서 기능올림픽은 주관적으로 지상 최대의 제전이어야 했고 또 그렇게 ‘산업전사’들을 호명했다. 

산업전사들은 무엇보다 혹독한 경쟁의 산물이었다. 기능경기대회는 기능과 스포츠를 결합시켜 최대한의 경쟁 원리를 가동시키는 방식이었다. 국가대표는 지방대회와 전국대회를 거쳐 선발되었는데 1978년의 경우 지방대회 참가 2768명 중 전국대회를 거쳐 최종 국가대표로 선발된 인원은 33명이었다. 지방대회 출전 또한 학교·기업별로 선발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실질적으로 경쟁에 투입되는 인원은 훨씬 더 많았다.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지방대회 기준으로만 83 대 1의 경쟁률이었고 실제로는 수백 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했다. 

가혹한 경쟁으로 내몰린 이들의 삶의 중심에는 가난과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1994년의 조사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의 메달리스트들은 극심한 빈곤으로 대학을 포기하고 공고로 진학하거나 공장에 취업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제1차 경쟁에서 패배한 셈이었다. 빈곤은 계층상승의 핵심 통로인 교육과정에서부터 저열한 위치를 강요했고 결국 ‘공돌이, 공순이’라는 하층의 삶으로 퇴적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이들을 시장의 경쟁 메커니즘으로 회수할 수 있다면 사회전체를 자유경쟁으로 동원할 수 있을 터였다.

■ 계층상승 욕망 불지핀 ‘달콤한 약속’

박정희 체제는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를 위해 기계공고, 시범공고, 특성화공고 등을 집중적으로 설립해 기능인력을 대규모로 양성하고자 했다. 이들이 기능올림픽의 주요 자원이었고 혹독한 경쟁의 주역이었다. 가정형편상 국비 지원이 되는 공고로 진학한 어느 금메달리스트의 회고에 따르면 “매우 어둡고 적막한 학교 건물 지하 3층 창고에서 오랜 기간 집중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심신이 피로한 것은 둘째치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하면서 “여기에서 이겼기 때문에 지방대회, 전국대회, 국제대회에서 일등을 할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또 다른 금메달리스트는 3년 반 동안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빈곤은 제1차 경쟁의 탈락자들을 만들어냈지만 그 빈곤을 벗어나는 길 또한 또 다른 경쟁, 패자부활전이었다.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는데, 그만큼 더욱 절박했고 이를 잡기 위한 피나는 자기계발이 요구된 것이었다. 

이 계층상승 욕망에 불을 지핀 것은 국가의 달콤한 약속이었다. 박정희는 첫 종합우승을 치하하는 자리에서 “비록 여러분이 상급학교에 진학 못했다고 하더라도 노력만 하면 학문과 이론을 배울 수 있도록 대학에 진학하는 길도 터놓았다”고 강조했다. 화려한 축하 파티에서 산업전사들의 깊은 트라우마를 건드린 셈이었는데, 기능대학이 그 치유제가 될 수 있을는지는 본인조차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밤을 새워 손가락이 잘려나갈 위험 속에 선반과 씨름하고 살갗에 불꽃이 튀기는 용접을 배웠건만 그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평생을 책임지겠다던 대통령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1994년 조사에 따르면 100명의 조사대상 메달리스트 중 10여명이 해외 이민을 떠난 상황이었고 설문에 응한 32명 중 동일 분야에서 계속 일하고 있는 사람은 불과 9명에 그쳤다.(<한국인의 장인의식>, 한국개발연구원) 

메달리스트들은 실제 보상이 거의 없었거나 매우 미흡했다고 토로했다. 특히 스포츠 올림픽 수상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공통적으로 거론했다. 연금제도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했고 직장에서의 대우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기능올림픽으로 ‘숭문천공(崇文賤工)’의 풍조가 바뀌었다고 선전해댔지만 어느 금메달리스트는 “기능인 천시사상이 결코 개선되리라고 보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단언했다. 요컨대 기능올림픽 금메달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평등을 가져올 수는 없었다. 대신 혹독한 경쟁과 훈련을 통해 굶어죽을 자유와 계층상승의 자유 사이로 내몰렸던 것이다.

이 자유로운 개인은 민족중흥을 내세운 대대적인 민족주의 동원전략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어디까지나 나 자신을 위해 땀 흘린다고 생각”하는 주체이기도 했다. 국가의 대대적 동원 속에 ‘국가대표’가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위한 고독한 경쟁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이 메달리스트야말로 자유주의가 기대하는 개인의 모습에 가까웠다. 이들은 국가주의적 집단 주체로 호명된 국가대표이자 경쟁의 쓴맛을 본 개인이기도 했다. 패배의 열패감을 ‘기술 하나 배워두면 밥은 굶지 않는다’는 근대적 격언으로 무마하면서 새로운 기회의 평등, 또 다른 경쟁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현재 이 전사의 후예들은 국가대표이자 삼성과 현대 선수단의 일원으로 기능올림픽에 참가한다. ‘배워서 남 주나’라는 삶의 교훈은 살인적인 취업난 속에 배워서 기업에 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스스로를 시장의 고독한 개인으로 구성해 낸 이 전사의 후예들은 과연 패자부활전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황병주 |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26) ‘저항의 시혼’ 김남주 20주기

‘전사’ 김남주의 ‘사상의 거처’는 사라졌는가


지난 2월12일 경향신문 5층 강당에서 김남주 20주기 심포지엄이 열렸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기조발제 ‘역사에 바쳐진 시혼’에서 “군사독재와 외세 지배에 대한 불굴의 저항, ‘광주 코뮌’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짧지만 강렬한 해방의 경험, 그리고 이 경험의 민중적 확산을 통한 역사의 반전-이러한 광주항쟁의 정신을 온몸으로 전 생애에 걸쳐 살았던 인물로서 김남주를 빠뜨릴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고 말했다.

전남대 함성지 사건과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하 남민전) 사건으로 오래 투옥된 김남주는 1988년 전주교도소에서 나온 직후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에 시인은 항시 있어야 하고 저 또한 있을 생각입니다”라는 결의를 다졌듯 1994년 세상을 뜰 때까지 스스로 ‘전사’로 불리길 원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등졌던 1994년조차 김남주의 뜻과는 달랐다. 김남주는 혁명적 조직을 원했으나 변해버린 현실과 그의 외침 간의 거리는 멀었다. 1988년 영어의 몸에서 자유로워진 이후에도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마다 찾아갔으며 투사이자 전사의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조직도 파괴되고/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부끄럽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징역만 잔뜩 살았으니/ 이것이 나의 불만이다”라는 시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1991)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일상과 투사의 삶 간의 간극으로 적지 않게 힘들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4년 그의 사후, 김남주의 직설적이고 명징한 언어들의 의미는 점차 잊혀져 갔다. 시인의 길보다 혁명을 꿈꾸는 전사의 길을 걸었으며, 문학은 변혁의 무기라면서 시인들이 피했던 용어들을 자신의 시에서 사용했던 그의 자취는 갈수록 변화되어 가는 세계와 조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1980년 2월3일 신향식(앞줄 왼쪽), 이재문(앞줄 일어선 사람), 김남주(이재문의 왼쪽) 등 남민전 사건 관련자 73명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불행히도 이재문은 사건 2년여 만인 1981년 11월23일 옥중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신향식은 1982년 10월8일 사형이 집행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긴급조치와 사상적 성숙 

1971년 말부터 대학생들은 학생운동 참여가 어려웠다. 위수령 때문에 많은 활동가들이 대학에서 제적돼 학생회 기능이 멈춘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간에도 활동가 양성은 이어졌다. 1973년 2학기 서울대 상대의 경우, 전체 학생 195명 가운데 150명이 서클 대항 체육대회에 참석할 정도였다.

당시 사회과학 서적이 귀했지만 동대문·청계천 등 서울뿐만 아니라 대구, 광주, 부산의 헌 책방을 뒤지면 <고요한 돈강> <세계사교정> <낙동강> <임꺽정> 등 해방 직후 발간된 잡지나 서적들이 널려 있었다. 학생들은 이 책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김남주 시인의 회고에 따르면 전남대에서는 문학계간지인 ‘창작과 비평’, 박현채와 리영희의 저서 그리고 금서로 취급되던 <들어라, 양키들아> <스페인 내전> <레닌의 생애> <붉은 10월> <인간의 세속재산> 등이 널리 읽혀졌다.

민청학련의 전국적 시위 실패 이후 활동가들은 박정희 정권이 허약한 정권이 아닌 것을 감지하고 직업적 운동가 양성을 위한 여러 가지 모색을 했다. 학생 서클의 대표적 유형은 이론적 탐구보다 행동을 중시한 ‘후진국사회연구회’ 같은 곳이었다. 이에 비해 서울대 ‘한국사회연구회’(한사연)는 무조건 학생운동에 참여하기보다 이론적 탐색을 중시하는 조직이었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한사연은 40명이 넘는 1학년생이 세미나에 참석해 2~3개팀으로 나눠 세미나를 진행했다. 이처럼 민청학련 이후 학생운동은 대규모 조직을 만들기보다 장기적으로 운동 주체를 키우는 준비론적 경향을 지니게 됐다.

김남주가 관여했던 전남대 학생운동은 1971년 10월 교내신문 ‘녹두’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민족사의 새로운 구성을 주창했다. 

또한 1972년 즉각적인 반유신 투쟁을 촉구했던 지하신문 ‘함성’의 작성을 위해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 지하신문, 러시아혁명기 지하신문의 배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유인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도구들인 가리방(등사판), 철필, 묵지를 마련하기 위해 주머니 돈을 털고 책을 팔기도 했다. 지하신문 ‘함성’은 유신체제에 사형을 내린다는 의미에서 죽을 사(死)를 써서 유신을 비판했고 유신체제에 동조하는 행동을 죽음의 행렬, 노예의 길로 묘사했다. 

이후 김남주와 동료 김상윤은 카프카서점과 녹두서점을 운영하며 일본어 사회과학 학습팀을 운영했다. 뿐만 아니라 1978년에는 본격적으로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박관현, 안진, 박병섭 등을 중심으로 들불야학을 조직했으며, 1979년 광천공단에서 야학활동을 하던 학생들이 공단 실태조사를 위해 ‘사회조사연구회’를 만들기도 했다.

■ 남민전, 김남주 그리고 사상의 거처

1976년 2월29일 서울 중구 청계천3가 태성장에서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3인은 잭나이프를 포개 잡고 ‘남민전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 발기인 3명은 강령과 규약, 선서문 등을 검토하고 지도부를 형성했다. 남민전은 실제 지도부로서 남민전과 반유신 민주화 투쟁의 지도부로서 ‘한국민주화투쟁국민위원회’(민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검거된 후에도 남민전이란 조직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성원들도 있었다.

남민전은 몇몇 지도부의 결단의 산물이 아니었다. 누구도 유신체제가 붕괴되리라고 믿지 않은 긴급조치 9호 이후 대부분 조직운동이 활동을 정지한 시기에 민주주의와 변혁을 지향하는 개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투쟁하고 저항하는 것이라고 이들은 판단했다. 긴급조치 9호는 운동인자에게 전향 혹은 재구속과 도피 및 활동이라는 양단 간의 선택을 강요하는 조건을 만들어냈고 결과적으로 ‘싸우다 죽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남민전이 표방했던 투쟁 방향은 먼저 유신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적인 연합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 단체는 한국 사회를 신식민지로 규정했다. “식민지 사회에서는/ 단 한 사람도 자유롭지 못하다고”(‘각주’)나 “사상은 노동의 대지를 그 밭으로 삼는다”(‘사상에 대하여’)는 김남주의 시 구절은 당시 남민전 구성원의 현실인식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준다. 김남주는 “신식민지 사회에서의 민족해방이란 제국주의로부터의 고리를 끊어내고 최종적인 변혁을 이룰 때까지 민족모순의 과정을 계속해 나아가는 것이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경과한다든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즉 1978년 김남주 자신이 번역한 파농의 <자기 땅에서 유배받은 자>에서 언급한 것처럼 탈식민화란 폭력투쟁을 통해 어떤 ‘종’(種)의 인간을 다른 ‘종’의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특히 1978년은 남민전 활동이 적극적으로 이뤄졌던 해다.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삐라의 살포가 전개되었다. 10월4일 속칭 ‘파라슈트 작전’을 통해 ‘김치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게 만든 박정희 유신독재체제’라는 논설이 실린 ‘민중의 소리’ 2호를 발간했다. 2호의 주요 내용은 반독재 학생운동을 강화하자는 논단, ‘독도 영해권을 왜 팔아먹느냐’는 사설, 김남주가 가십난에 쓴 ‘백성의 마음은 속일 수 없다-돈과 권력의 궁합’, 대학가 소식과 동일방직 투쟁 소식이다. 무장투쟁 조직인 혜성대라는 남민전 조직은 당국의 무장폭동 사주라는 음해와 달리 선전선동의 주도, 자금 확보와 체력 단련을 하는 수준이었다. 혜성대에서 김무송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고 알려진 김남주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남민전에 들어갈 때에 이름도 없이 죽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사람이 죽어주기를 내가 바랄 수 있겠어요. 해방은 죽음 없이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 인식을 왜 내가 실천하지 않고 남이 해주기를 기다려야 되겠어요.”

■ 70년대와 80년대를 잇는 사상의 징검다리

이처럼 김남주가 사상과 조직을 만들고 전사이자 투사가 되기를 결의했던 시기는 헌법으로 보장된 기본권을 국가가 유신이란 이름으로 무력화시킨 때였다. “총구가 나의 머리 숲을 헤치는 순간”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하는 ‘진혼가’의 한 구절처럼 폭력과 죽음의 두려움에 맞서 스스로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결단의 시점이었다.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김남주, 그는 유신에 맞섰던 것이다. 

하지만 잊혀져 갔던 김남주와 전사들은 반유신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들은 1980년 광주를 거치며 근본적인 사상과 운동을 실천하기 시작한 1980년대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였다. 김남주 20주기, 그가 마지막까지 놓치려 하지 않았던 ‘사상의 거처’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은 유신과 신군부란 폭력에 맞섰던 ‘사상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27) 에필로그 - 모순 속에서도 성장한 민주주의, 그래서 포기할 수 없다


■ 유신의 모더니즘, 그리고 오늘

이 연재는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 즉 1970년대의 정치·사회·문화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고, 박정희의 유산이 여전히 남아 흘러넘치는 이 땅의 오늘을 헤쳐나갈 지혜의 일단을 함께 도모하고자 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이 글들을 통해 얼마나 멀리, 저 전형화된 1970년대에 대한 서사와 이해로부터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됐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그 시대의 사회나 문화를 오늘의 모순에 닿은 물결의 저류로서 이해하며 새롭게 읽으려 애썼다. 특히 박정희 정권의 통치성, 대중문화의 성장과 민중의 저항, 유신의 생체정치와 성정치, 1970년대적 지성의 새로운 양식 등을 탐구하려 했다. 그러나 지면의 제약과 능력의 부족으로 그 시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또 다른 항목들인 미디어, 성, 스포츠, 코미디, 스펙터클, 마약 같은 항목은 다룰 여유가 없었다. 추후 다른 기회를 통해 이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게 되기를 기대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을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치 부활로 단순히 환원할 수 있을까. 유신시기와 지금을 비교해 무엇이 다른지 잘 파악하고 실천하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다. 사진은 1975년 10월 유신 3주년을 맞아 열린 ‘총화유신국민대회’(위쪽)와 지난해 2월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식 장면이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세상에서 가장 ‘비정상’이었던 ‘유신’

애초에 필자들이 생각한 연재 제목은 ‘유신의 모더니즘’이었다. 고대 중국인이 만들고 근대 초 일본인들이 다시 쓴 것을 수입한 단어인 ‘유신(維新)’은 후진성과 군국주의, 근대화와 반민주의 상징어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세상에서 가장 ‘비정상’인 게 있었다면 바로 ‘유신’이다. 그것은 총체적인 억압과 착취, 개인성 말살의 기호이다. 그래서 ‘유신’의 정체(政體)란 일종의 정치적 쓰레기나 암흑의 대명사로 간주된다. 물론 우리 사회 일각에는 그런 것조차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는 국가주의자도 여전히 많다. 그런데 그 따위 쓰레기나 암흑에도 모더니즘이 있는가? 있다. 

그것이 유신시대와 모더니즘의 비밀이라 생각한다. ‘유신과 오늘’을 이해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세 가지 관점을 제안하고 싶었다. 

첫째, 박정희가 추진하고 달성한 근대화·산업화는 단지 일국 수준에서 이뤄진 것도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박정희의 근대화·산업화는 미국의 중재(간섭)로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식민통치 36년의 고통을 3억달러에 ‘퉁치고’ 일본 자본을 끌어들임으로써, 그리고 미국의 용병으로 수천 생령의 목숨을 월남의 전장에 갖다 바침으로써 비로소 시동이 걸릴 수 있었다. 즉 근대화·산업화란 애초에 세계 분업체제에의 편입과 ‘서구화’를 의미했던 것이다. 

국제시장뿐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그랬다. 후기식민국가의 두령이었던 박정희는 제 필요에 따라 민족주의자 코스프레를 했다. 특히 유신 이후 미국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지고 68혁명 전후 ‘우드스탁’이나 비틀스로 상징되는 급진적인 청년문화와 세계적인 문화적 조류가 한국에도 일부 유입되자 주체성과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검열체제를 옥죄었다. 하지만 그것을 다 막지는 못했다. 한국 청년들도 히피처럼 머리를 기르고 진바지를 입고 존 레넌과 레드 제플린을 들었다. 

하길종은 미국에서 영화를 배워와서 청년영화 <바보들의 행진>을 만들었고 신중현은 한국 록을 꽃피웠다. 이문구가 <우리 동네>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잔존하던 전통사회가 붕괴하고 일상적 삶의 양식은 근저로부터 서구화되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근대화’ 과정과 등가를 지닌 것이기도 하다. 

둘째, ‘유신’은 ‘한 사람을 위한 체제’가 아니었다. 유신체제가 비정상적 헌정체제였음에도 8년간 유지된 것은, 또 반대로 전체주의 뺨치는 철권통치에도 불구하고 8년 만에 끝장난 것은 오로지 국민-대중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국민-대중은 박정희 체제가 근대화와 경제성장, 그리고 복지를 이루는 데 효율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해주었다. 이 동의를 정신이 나가버린 박정희는 자신의 영구집권체제로 횡령하려 했다. 그러나 유신체제는 박정희의 욕망대로 영속되지 못하고 내부로부터 붕괴했다. 알다시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자신의 보스에게 총을 쏴버림으로써 유신은 끝났다. 그러나 그 일은 부산·마산 민중의 저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혹자들이 말하듯 김재규는 ‘의인’도 ‘혁명가’도 아니었다. 김재규는 자신의 은인이자 절대권력자를 쏘아 죽인, 정치학적으로 흥미롭고 놀라운 일을 실행했으나 그가 불완전한 그의 ‘의(義)’와 ‘혁명’을 사유한 것은 총을 쏘기 전이 아니라 보안사 감옥에 가고 난 뒤부터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혁명’에 대해서 고교생보다 못한 유치한 사유를 갖고 있었다. 김재규를 의인으로 만든 것은 결국 전두환과 계엄령 하의 군사법원이다. 따라서 오히려 아쉬운 것은 김재규가 그렇게 어설프게 박정희를 처단하는 바람에 한국 민중이 스스로의 힘으로 박정희를 물리칠 중대한 역사적 기회를 잃고 또 다른 ‘유신 본당’인 전두환이 권력을 탈취하게 됐다는 점, 그리하여 ‘민주화’가 또 7년 뒤로 연기됐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오늘날 한국 정치의 퇴행과 유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착시 또는 오류라 생각한다. 10년 전쯤을 돌이켜보면 좀 놀랍다. 한국사회는 그때보다 하나도 좋아지지 않아 이런 것을 ‘퇴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민주정권의 실패와 이명박의 등장이 민주주의에 대한 대한민국 사람들의 신념과 성취를 상당 부분 망쳐놓았다.

그러나 아무리 나빠도 유신 시절에 직접 비교될 정도는 아니다. 우리 사회는 분명 뒤로 물러설 수 없는 불가역적인 발전을 했다. 그 핵심은 개인의 자유와 욕망의 강도가 커지고 폭력과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자라났다는 데 있다. 그 자체로 충분하지 못하다 해도 이 땅에서 민주주의는 생활 양식이자 시민의 상식으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고도로 발전한 한국 자본주의와 디지털화된 문화 자체가 그 토대이기도 하다.

■ 독재-민주 이분법 아닌 구조적 성찰 필요

그런데 예를 들어, 어느 진보정당 홈페이지 첫 화면에는 ‘유신독재 반대’라는 구호가 걸려 있다. 이는 오늘날 ‘유신’이라는 정치사의 키워드가 오남용되는 대표적인 사례 같다. 

물론 일부 정치권과 박근혜 대통령의 머릿속에 고장난 시계가 들어있고 바로 그 사람들의 의식이야말로 ‘유신’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 해도 우리가 그 장단에 춤을 출 수는 없다. 막연히 유신 때와 지금이 비슷하다고 말하지 말고 뭐가 다른지를 잘 파악해야 더 나은 ‘실천’을 할 수 있을 거 같다. 박근혜 정권은 겨우 4년에 불과하다. 그리고 언제나 민주주의 전선이 있겠으나 ‘독재-민주’라는 이분법으로는 1970년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또 오늘의 모순을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천주교 교단을 위시한 양심 있는 사람들이 박근혜 퇴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집권 과정에 작지 않은 하자가 있었으나 그 자체가 현정권의 정통성을 죄 부정하는 대중적 논리가 되기는 힘들다고 본다. 대중은 그 문제를 몰라서가 아니라 냉정하게 관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신 그 최초의 하자가 더 중요한 다른 이유, 즉 이 정권의 사회경제적 한계나 실책과 결부될 때 대중은 단호한 행동에 나설 것이다. 그것은 새마을운동 수준의 낡은 인식과 미국식 혁신경제에 대한 막연한 부러움을 뒤섞은 소위 ‘창조경제’와 대중을 기만하는 데 동원된 ‘경제민주화’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우리는 박정희의 딸이라는 대통령 개인의 한계보다 그런 대통령을 있게 만든 구조를 더 성찰하고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1970년대가 만든 발전과 모순 속에서 성장했다. 우리는 유신과 박정희의 하수인들, 즉 그 ‘꼬붕’과 별다를 바 없는 무기력하고도 못된 학교체제와 소심한 소시민인 부모들 아래서 자랐으나 민주주의자로 컸고, 지금도 괴로워하는 민주주의자이다. 민주주의자는 괴로워한다. 가진 돈이나 먹은 나이 따위에 함몰되지 않고 동료시민들과 함께, 고통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 사회를 고민해야 함을 생각한다. 또한 그런 고민이 역사를 보는 시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사나 민중사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도 나이를 꽤 먹었다. 그런데 저 군복 입은 ‘어버이’들, 또 조로해 버린 수구 보수와 기득권을 누리는 486·586들, 그들이 우리를 청년으로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박정희나 그의 딸, 또 그를 맹종하는 배부른 사람들보다, 또 그 짝패인 소위 ‘백두혈통’ 김가 식솔과 그 수하들보다 훨씬 더 나은 민주공화국의 국민 아니 정의롭고 선한 한반도 주민이 되기를 꿈꾼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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