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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유신의 추억 - 민족문제연구소

by Wood-Stock 2012. 10. 17.

ohmynews

민족문제연구소는 유신선포 40년을 맞아 유신독재의 본질을 조명하는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전국순회 특별전을 진행하고 있다. 6월 9일부터 30일까지 부산 민주공원, 8월 8일부터 9월 9일까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특별전이 열렸다. 10월에는 고양, 광주, 인천, 울산, 춘천, 서울청계광장, 대구에서, 11월에는 창원, 진주, 원주에서 전시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전시회를 유치하려는 지역 시민단체들은 많지만, 예민한 전시 주제로 인해 예산확보는 물론 전시장조차 구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탓에 서울, 부산, 창원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전시회가 패널 야외전시로 진행되며 실물자료는 전시되지 않는다. <오마이뉴스>는 실물전시를 볼 수 없는 독자들을 위해 서대문형무소 제12옥사에서 열렸던 '유신의 추억전'을 지상중계한다.

 

[유신의 추억 ①] 10월 유신은 일본제국 파시즘 체제의 전면적 부활 10월 17일 유신 선포... '천황파시즘' 흠모한 박정희

 

 

이땅의 민주주의에 조종을 울린 10월유신 선포 40년을 맞아, 유신독재의 본질을 조명하는 특별 기획전시가 민족문제연구소 주관으로 서울에서는 지난 8월 8일에 시작됐다. 이번 전시는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이란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애국지사와 민주투사가 목숨을 바치거나 고초를 겪었던 저항운동의 성지 서대문형무소의 한 옥사에서 열려 의미를 더해준다. 

제목은 전시의 성격을 함축하고 있다. '식민의 유산'은 유신체제가 일제 천황제 파시즘의 사생아라는 점을 직설한다. '유신의 추억'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패러디해 왔다. 절대 추억일 수 없는 끔찍한 경험이지만,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과거라는 점에서 '유신'과 '연쇄살인'은 공통분모를 가진다. 어떤 이들의 추억은 다른 이들에게 악몽이자 트라우마를 의미한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추억'은 역설적이고 중의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전시는 유신으로 가는 길, 조국근대화의 빛과 그림자, 학교 그 잔혹한 풍경, 총력안보와 감시체제, 금지의 시대 등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유신주체의 의식세계가 천황제 파시즘의 영향 아래 놓여있었으며 통치시스템과 동원기제 또한 일제의 조선 지배와 만주국 경영에서 원리를 차용했다는 점이다. 즉 유신체제는 제3세계의 일반적인 군사독재와는 유형을 달리한다고 본다. 

정통성을 결여한 반민주적 정권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체계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와 통치 메카니즘을 완비하였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별성이 있다는 해석이다. 달리 말하면 유신체제를 패망한 '식민지 모국=일본제국' 파시즘체제의 온전한 복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혈서 지원 보도 기사 (<만주신문> 1939.3.31)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혈서와 함께 보낸 편지 내용 일부)

▲ 박정희가 쓴 <국가와 혁명과 나> 이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명치유신이란 (중략) 아세아의 경이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167쪽) "명치(메이지)유신은 그 사상적 기저를 천황절대제도의 국수주의적인 애국에 두었다.(중략) 명치혁명인의 경우는 금후 우리의 혁명수행에 많은 참조가 될 것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본인은 이 방면에 앞으로도 관심을 계속하여 나갈 것이다."(171-172쪽)

 


유신으로 가는 길

 

박정희에게 5.16쿠데타와 10월 유신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으며 청년기 이래 오랜 로망의 실현이었다. 일생 동안 그의 의식세계와 행동양태를 지배한 이념은 소학교 훈도(교사)와 제국 장교로서 체화한 파시즘이었다. 분필과 총칼은 얼핏 대립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으로 상징되는 교화와 무력은 파시즘을 지탱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철저한 파시스트가 될 기초를 충실히 닦은 셈이다. 

무엇보다 그는 제국 일본이 만든 군인의 상에 매료되었다. 학생시절에는 일본 군인들의 무훈담을 읽으면서 열광했다. 교사시절에도 박정희의 영웅은 페스탈로찌가 아닌 나폴레옹이었다. 식민지 코르시카인이 장교가 되고 황제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출세는 전범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1961년 11월 수상관저 만찬회에서 이케다 일본 수상과 담소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왼쪽은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


박정희의 이러한 야망을 일부나마 충족시킬 유일한 현실적 통로는 일본 군부였다. 당시 '상승' 제국군대의 장교는 선망의 대상이자 출세와 권력의 표상이기도 했다. 박정희의 군인상은 풍찬노숙하는 '초라한' 독립군이 아니라, 근사한 제복에 칼 차고 말 타고 천황을 위해 진군하는 '멋진' 황군(皇軍)이었다. 이것이 박정희가 안정된 교직을 버리고 혈서까지 써가며 제국군대의 일원이 되려한 주된 이유였다.

 

박정희는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 지도자들을 '지사(志士)'로 존경했다. 그가 롤모델로 삼은 청년지사들 중에는 정한론을 외친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의 사고체계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은 쇼와유신(昭和維新)이었다. 박정희는, 1930년대 일본 군부의 급진파와 우익세력이 추구한 천황 중심의 국가개조론인 쇼와유신의 이념에 몰입했다.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방종으로 여기고 정당정치와 언론자유를 사회혼란과 동일시하며 강력한 반공정책을 표방한 황도파의 쇼와유신은 비록 실패로 끝이 났지만, 군부의 정치개입을 일상화하고 천황제 파시즘을 정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쇼와유신에 의해 다이쇼데모크라시의 명맥이 끊어졌듯이,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민주주의는 쇼와유신을 흠모한 박정희의 5·16쿠데타에 의해 채 피지도 못한 채 저버리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박정희는 그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5.16쿠데타가 지향하는 바가 명치유신과 쇼와유신의 목표와 다르지 않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국가주의가 자신의 신념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친위쿠데타인 '10월유신' 또한 용어에서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그를 답습하였다. 

 

▲ 미 중앙정보국(CIA) 특별보고서, <한일 관계의 미래> 1966.3.18.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일본 기업들이 1961-1965년 사이 당시 민주공화당 총 예산의 2/3를 제공한 바, 각 개별 기업의 지원 금액이 각각 1백만 달러에서 2천만 달러에 이르며 6개의 기업이 총 6천6백만 달러을 지원했다.(중략) 한일협상을 증진시키기 위해 김종필에게 지불되고, 또한 여러 일본기업들에게 한국 내에서의 독점권을 부여하는 대가로 지불된 것뿐만 아니라 민주공화당은 또한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기업으로부터도 지불을 받았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정부방출미 60,000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과정에 개입한 8개의 한국회사가 민주공화당에 11만 5천 달러를 지불했다."


1930년대 중반 이래 학생 또는 교사로서 박정희는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체계적으로 수용하고, 전시체제하의 다양한 동원정책과 교육정책을 이론에서 실무까지 체득했다. 그는 체제교육의 중요성을 경험으로 확실하게 간파하고 있었으며, 집권 후 국가운영에서 이를 자신의 목적에 따라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5.16 직후의 국가재건운동과 1970년대 새마을운동 따위의 국민개조운동,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 또는 애국조회와 국기하강식과 같은 국가주의 의례 강요, 충효사상 보급과 교련, 체육 등 군사교육 강화, 라디오체조와 조기청소 실시 및 국민가요 개창운동, 퇴폐풍조 일소와 미풍양속 고취, 반상회의 정례화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국민의 일상을 지배했던 숱한 제도와 의식들은 하나같이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에서 실행했던 전체주의적 통치시스템을 그대로 본떠 부활시킨 것이었다. 

한편 개발독재의 양축을 이룬 고도 국방국가를 목표로 한 총력안보체제 구축과 국가통제형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시행은 일제의 만주국 경영에서 그 기본구조를 빌려온 것이었다. 

 

유신체제는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미명으로 포장되기도 했다. 이는 본질적인 측면에서 '메이지유신-쇼와유신'으로 이어지는 일본 극우세력의 국가주의 전통에 근대화론을 접합시킨 시대착오적 전체주의의 산물이었다. 

 

  특별담화문- 헌법개정안 공고에 즈음하여, 1972.10.27.


'최후의 제국군인' 박정희가 일으킨 10월유신 친위쿠데타로, 한국사회는 해방공간과 정부수립 이후 진행된 친일인맥의 화려한 복귀에 이어 파시즘 체제의 전면적인 부활이라는 역사의 반전을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랜 기간 사회 요소요소에 구조화한 뿌리 깊은 '박정희주의'는 지금까지도 민주주의의 정착을 가로막는 최대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유신의 추억 ②] 농촌 망가뜨린 새마을운동, 그때 그 시절

당신의 아침을 깨운 그 노래, 이런 비밀 있었다

 

  부녀자들도 일제 때의 몸뻬를 다시 입고 근로에 나섰다. 일제강점기 여성근로보국대를 연상케 한다

 

1970년대 대한민국의 아침은 확성기로 울려 퍼지는 <새마을노래>로 시작됐다. 박정희 지지자들은 새마을운동을 "하늘만 바라보고 가슴을 치던" 무기력한 농민들에게 "하면 된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위대한 정신개혁운동이었다고 주장한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소득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으며, 세계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농촌개혁운동이었다고 격찬하기도 한다. 심지어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으로서 지방자치의 선구가 되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은 결코 살기 좋은 농촌을 만들지 못했다.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던 1970년대, 농가의 평균 소득은 10배 증가했으나 부채는 21배 증가했다. 저곡가정책 등으로 인한 도농 불균형발전은 이촌향도 현상을 가속화했다. 잘 살기 운동인 새마을운동 기간 내내 수많은 농민들이 대대로 살아온 정든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새마을운동이 성공한 운동이라고?

새마을 모범부락과 같은 성공 사례조차도 대부분 국가의 정책적 지원이 집중된 곳이었다. 일부 예외적인 경우가 마치 전체적인 양상인 양 과대 선전된 측면도 없지 않았다.

새마을운동이 전개한 일부 사업은 농민의 이익과 배치되어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붐을 이뤘던 마을도로 개선사업은, 시멘트 수출이 막히자 농촌을 새로운 소비지로 선택한, 공업 우선 정책의 사례 중 하나이다.

 

  사실상 동원에 가까웠던 새마을근로활동.

 

초가지붕을 강제로 개량하면서, 지붕이 바뀌는 만큼 농가 부채도 늘어났다. 이 때문에 마을 이장이나 새마을지도자들의 건의는 관의 개입이나 전시 행정을 자제해달라는 데 집중되었다. 

획일적인 농촌개량사업은 전국의 시골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어느 곳을 가도 시멘트 길에 벽돌담과 원색의 슬레이트 지붕으로 단장된 모습이었다. 전통과 다양성은 통일과 질서를 우선시하는 군사문화 아래서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고 말았다. 

 

 

  1933년 8월 우가키 조선총독의 현지 시찰장면   박정희 대통령의 현장시찰.

 

대대적인 새마을운동 전개에는 경제적 동기보다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정권이 상대적으로 통제가 용이했던 농촌사회를 조직하고자 했던 정치적 동기가 더 작용했다.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이나 '농촌중견인물양성'이 실제로는 전통향촌사회를 재편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듯이, 새마을운동 또한 1인 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선전과 체제동원의 매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새마을운동은 유신이념의 실천운동으로 규정되었다. 농촌진흥운동이 농촌통제와 연과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박정희는 1972년 유신체제를 선포하면서 새마을운동을 '유신체제의 실천도장'으로 규정했다. 해마다 전국적으로 실시된 새마을연수교육도 대통령의 탁월한 영도력을 찬양하고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주입하는 각종 정치교육 프로그램이 중심이 되었다. 

 

▲ 농촌진흥운동 선전 화보 일제는 농가경제 갱생을 명목으로 매년 수확목표와 수지 목표 등을 기입한 '갱생5년계획'을 농가마다 작성해 이장에게 검사를 받도록 했다. 총독이 농가를 방문해 '갱생5개년지침서'를 직접 하달하고 있다. 사진의 공동탁아소 운영, 초가지붕과 아궁이 개량, 부녀자근로동원, 단발과 색깔옷 착용, 합동결혼식, 문맹퇴치(일본어교육) 및 갱생부락(모범부락) 지정 그 외 국기게양, 조기청소, 생활간소화 등 대부분이 새마을운동의 핵심 사업으로 부활했다.

 

유신시대 새마을운동 교육 이수자는 연인원 약 7000만 명에 달했다. 전국민이 1인당 2회 꼴로 세뇌교육을 받은 셈이다. 날이 갈수록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국민의 반감과 저항이 커져가자, 새마을운동은 당초 표방한 '잘살기운동'의 본질마저 던져버리고 유신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국민정신개조운동'으로 변질된 것이다. 농촌새마을운동을 도시새마을운동으로 확대하고, 유신체제 하에서 5년이 넘게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박근혜가 충효이념을 모토로 '새마음운동'이란 광풍을 일으킨 것도 국민정신개조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장밋빛 새마을운동은 이제 거대한 관변조직만 유지하면서 겨우 명맥만 이어가고 있다. 만약 새마을운동을 농촌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꾼 세계적인 성공사례라고 주장하려면, 오늘날 텅텅 비어있는 수많은 슬레이터 집들과 노인만 남은 암담한 농촌 현실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대답해야 한다.   

 

▲ 새마을모범부락 1930년대 만주의 안전가옥(요새형 마을)을 연상케 한다.

 

불편한 진실, 성장의 그늘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론은 강력한 리더십 아래 국가가 경제정책을 입안해 산업 질서를 재편하고, 선별한 특정 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지원하는 국가주도형 개발독재였다. 특히 슬로건을 내걸고 고지를 점령하듯 성장목표를 향해 돌격하는 국가총력전 방식의 경제운용은, 일찍이 '고도국방국가'를 표방한 만주국의 '산업개발 5개년계획(1937~1941년)'과 매우 유사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정경유착에 기반한 거대한 부패구조를 국가 차원에서 재생산하고, 노동자들의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면서 전개되었다. 특혜의 대가로 막대한 불법 정치자금이 만들어졌고, 각종 국토개발사업은 개발정보를 사전에 독점한 정권 또는 권력자에 의해 거액의 정치자금과 부를 축적하기 위한 부동산 투기로 연결되었다.

정경유착과 정치헌금은 으레 부실경영을 초래하기 마련이었으나, 정권은 기업의 불법을 눈감아주거나 조장하기까지 했다. 수출주도형 경제는 대외의존성을 심화시키고 내수 불균형을 가져왔다. 공업입국을 표방한 경제정책 아래 농업은 일방적으로 희생되었다. 조국근대화의 기수, 산업전사라는 허울만 쓴 노동자들은 장시간·중노동·저임금으로 고통을 겪었고, 최소한의 권리인 노동3권조차 박탈당했다. 희생은 민중에게, 성장의 과실은 특권계층에게 돌린 것이 박정희식 경제개발이었다.

 

  '번영과 통일의 길 10월유신' 홍보포스터

 

조국근대화를 내건 경제개발은 안보이데올로기의 하나이자 독재정권을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정치이데올로기로서, 원천적으로 민주주의를 거부한다. 경제개발의 최고 슬로건인 조국근대화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며 북한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경제전쟁'으로 규정되었다.

또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자' '총력수출' 따위의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안보와 경제를 일체화시켜, 노동조합 결성이나 파업 등을 반국가적인 행위로 지목해 가혹하게 탄압했다. '제O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대망의 80년대' '조국근대화의 완성' 따위의 구호 아래 그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위대한 영도자'를 중심으로 국민들이 일치단결할 것을 강요했다. 

 

▲ <보람찬 내일-10월유신의 미래상>, 문화공보부 10월유신을 결행함으로써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을 달성할 수 있다고 선전한 홍보물.

 

결국 기약이 없는 조국근대화의 완성을 핑계로 지도자의 장기집권을 정당화한 것이다. 특히 박정희와 그의 추종자들은 안보와 경제지상주의를 내세워, 조국근대화를 위해서라면 유신과 같은 독재도 불가피하다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웠다. 이는 (그 성과조차 논란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기본권도 유보할 수 있다는 그릇된 가치관에서 비롯되었다. 

사회 저변으로 확산된 경제지상주의는, 부의 축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황금만능 물신숭배의 풍조를 만연시켰다. 이는 사회적 도덕적 책무와는 담을 쌓은, 1%만을 위한 천민자본주의를 잉태하는 씨앗이 되었다.

 

  '갱생에 빛난다.' 일제의 근로미담집으로 일종의 모범청년성공사례집이다.   '광명의 지도자.' 새마을모범지도자의 수기를 만화책으로 만들어 배포했다.

 

목적을 달성한다면 과정은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국가가 앞서 사회통념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일제 때 유행했던 조선 기생관광은 유신정권 시기 국책사업으로 부활했다. 정부는 야간통행증까지 발급해가며 매매춘 등 불법적 외화벌이를 부추겼으며, 심지어 이들을 산업역군 또는 애국자로 미화하며 이를 조장했다. 주한미군철수를 막기 위해 추진했던 대대적인 기지촌 정비사업도 유사한 사례의 하나였다. 도대체 국가의 존재 이유를 의심케 하는 일들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의 조국근대화와 고도성장의 금자탑 아래에는 세칭 "공돌이와 공순이"로 홀대받으면서도, 오로지 대망의 80년대를 기다리며 희생한 지난 세대 노동자들의 피와 눈물이 배어있다. 굳이 경제도약의 공로를 따지자면 마땅히 이들에게 영광이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박정희 추종자들은 알량하게도 노동자들에게는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허명만 부여하고, 산업화의 모든 영예를 독재자 개인의 탁월한 영도력에 돌리며 우상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유신의 추억 ③] 70년대 학교, 그 잔혹한 풍경

학교에서 수류탄 던지기 훈련, 정말이냐고요?

 

 1974년 대학가에서는 일제히 교련과 학교의 병영화 반대 시위를 격렬하게 일었다

 

유신정권이 표방한 '국적 있는 교육'은 실은 '국적 상실 교육'이었다. 왜냐하면 일제의 황국신민화교육과 일란성 쌍둥이였기 때문이다. 유신교육은 놀라우리만치 일제의 전체주의 교육을 답습했다.

유신시대 학교는 국가와 지도자에게 절대 충성하고 복종하는 국가주의를 훈육하는 도구였다. 여기에 총력안보체제 수립이 강조되면서 학교는 병영으로 변모했고, 교과서 또한 영도자와 유신체제를 찬양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일제의 천황제 파시즘 교육에서 기본원리를 빌려온 유신교육은 정권안보의 버팀목으로 활용되었다.

 

 일제시대 교과서에 실린 교육칙어.

 

 일제 때 애국조회에서 교육칙어를 봉독하는 모습. 박정희 시대와 꼭 닮았다.

 

▲ 일제의 애국조회 장면 교육칙어와 황국신민서사를 외어야 했다. 천황에게 충성과 효도를 다하도록 충효교육이 강조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학생들의 복장과 두발을 철저히 규제했다. 교복과 교모, 삭발은 획일주의의 상징으로 체제순응을 규율하는 기본적인 수단이었다. 역대 독재정권들은 교육현장의 일제잔재들을 청산할 의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국가주의 교육을 강화해 이를 확대 유지시켰다.

교문에 들어서면 학생주임 교사와 규율부 학생들이 완장을 차고 복장 검사를 했다. 규정에 어긋나면 '원산폭격' '왕복달리기' '쪼그려 뛰기' 등의 얼차려나 구타가 이어졌다. 학교 교문을 통과하는 일은 살벌한 군사훈련소 정문을 통과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 일제의 애국조회 장면 교육칙어와 황국신민서사를 외어야 했다. 천황에게 충성과 효도를 다하도록 충효교육이 강조되었다.

 

  1970년대 국민학교 애국조회 장면

 

 

교실에서는 담임선생이 정례적으로 두발과 복장 그리고 가방 검사를 실시했다. 규정보다 길면 '바리깡'으로 여지없이 머리 가운데를 밀어 '경부고속도로'를 내어버리기도 했다.

자치조직인 학생회는 군사조직인 임명제 학도호국단으로 재편되었고, 학생회장은 연대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동등해야 할 학우들이 연대장-대대장-소대장-병졸로 계급이 나뉘어졌다. 일제강점기의 학교 군사교육도 다시 시행되었다. 학생들은 교련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해야 했다. 1년에 한 번씩 실시되는 교련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전교 학생들이 최소 한 달 이상 방과 후 훈련에 매달려야 했다.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면 재검열을 받아야 했다. 대학 시험에 체력장 과목을 두어 일제시기 체력검사 항목의 하나였던 (모의) 수류탄던지기도 포함시켰다.

 

 일제강점기 남학생 군사훈련 장면

 

 여학생들도 군사훈련을 받았다.

 

 

고등학교 군사훈련장면(1974년)                                                   여학생들이 황국신민체조라는 이름으로 검도훈련을 하고 있다.

 

유신체제는 애국조회를 특히 중시했다. 일제의 각종 국가주의 의례가 이름과 형태만 바뀐 채 다시 시행되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 전교생이 집합해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제창해야 했다. 그리고 충효나 반공 또는 시국에 대한 훈화를 반복해 들어야 했다.

교과서도 개편되어 철학 과목은 '반공도덕' 또는 '국민윤리'로 바뀌어 안보와 충효가 이론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화랑은 일제시기 친일파들에 의해 '상무정신'의 귀감으로 악용되었듯이, 이제 '멸공통일'의 표상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했다. 찬반 토론도 없이 사실상 만장일치로 대통령을 뽑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거수기 선거를 '한국형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억지논리로 정당화했다. 게다가 신라의 화백제도를 그 기원으로 끌어오기도 했다.

 

 5.16혁명공약. 혁명의 발자취

 

 이승만 정권 때 나온 우리의 맹세

 

 

반공소년 이승복을 비롯해 이순신 장군, 김유신 장군, 신사임당 등 호국을 상징하는 인물들을 충효 이데올로기 교육의 지표로 삼기 위해, 전국의 교정에 빠짐없이 조악한 동상을 세웠다. 이 모든 희극은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박정희의 가부장적 사고가 빚어낸 비극적 현실이었다.

결국 유신체제 하의 학교 교육은 개인 인격의 존엄성에 기반한 민주시민 양성 대신, 국가에 대한 충성이란 미명 아래 1인 독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해 오로지 복종하는 기계를 만드는 국가주의 주물공장이었다. 여기에 만연한 군사문화와 체벌은 학생들의 정신세계마저 황폐화시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말죽거리 잔혹사> 등과 같은 문학과 체험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1936년 부임한 미나미조선총독은 국체명징(천황중심의 국가체제를 분명히 하는 일)을 교육 지표로 내세웠다. 박정희의 국적 있는 교육을 연상케 한다.

 

  황국신민서사(아동용)

 

 

 

[유신의 추억④] 전국민을 통제하는 시대...노래 '거짓말이야'가 간첩 신호?

간첩잡는 아빠, 신고하는 엄마... '살벌하네'

 

   민방위훈련 중 대피장면

 

 

박정희는 1972년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국민이 스스로 자유를 제한할 수 있어야" 하며, 비상사태에 순응하지 않으면 계엄령을 각오해야 한다고 협박했다. 이러한 위협적 분위기 아래 '10월유신'을 단행했다. 유신체제는 '고도국방'과 '총력안보'를 앞세워 1인 종신집권의 길을 열었다.

고도국방은 만주국이 강력하게 표방한 안보개념인 '고도국방체제국가'에서 따왔다. 대한민국도 이른바 누란지세(累卵之勢)라 할 안보위기에 처해 있으니, 모든 국민이 전시하의 비상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총력안보'는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에 돌입하면서 구축한 전시총동원체제(총후국방)와, 현대전은 전선과 후방이 따로 없는 총력전이라는 개념에서 나왔다. 총력안보란 '군관민(군인, 관료, 국민)'이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는 것을 의미했다. 

 

   일제하 민방공훈련과 군사훈련

 

 

이를 위해서는 이른바 국론통일이 필요했다. 반대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동원된 수단은 냉전 이데올로기였다. 유신의 최후 보루로서 반공·방첩은 정권안보를 위한 무소불위의 도구로 기능했다. 유신정권은 문인간첩단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재건위 사건, 재일동포유학생간첩단 사건 등 수많은 조작사건을 통해 위기감을 조장했다. 

한편으로 불평불만 한마디에 간첩이 되는 세칭 '막걸리 반공법'의 피해자도 무수히 생겨났다. "간첩 잡는 아빠 되고 신고하는 엄마 되자" 또는 "홀로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 보자" 등 불신을 조장하는 웃지 못 할 각종 안보 표어가 난무했다. 반공을 주제로 한 표어 짓기, 포스터 그리기, 글짓기와 웅변대회를 무더기로 열어 정권안보에 악용했다. 직장이나 학교 그리고 반상회에서 간첩이나 불순분자를 식별하는 요령을 배우고, 수상하면 즉각 경찰에 신고해야 했다. 이웃이나 친척이라고 신고하지 않으면 불고지죄로 처벌받았다. 

 

  유신시대 반공표어 중 하나.    매월 15일은 민방위의 날로 각종 경보를 발하고 대피훈련을 했다.

 

 

이 때문에 이웃은 서로 감시하는 관계가 되었다. 대학도 사찰대상이었다. 기관원들이 구내에 상주하면서 수업을 참관하고 교수와 학생을 감시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는 불신사회로 가는 지름길이 되고 있었다.

1975년 남베트남이 공산화하자 유신정권은 총력안보 태세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때 민방위기본법을 시행하여 전 국민적인 동원체제를 완비하였으며, 이듬해부터 반상회를 정례화하여 일상적인 주민통제가 가능하도록 조치하였다. 

주민등록증은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특정번호를 부여해 '요람에서 무덤까지' 철저히 감시 통제하는 장치였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1962년 1월 인구동태 파악과 간첩은신 방지를 구실로 처음 제정된 주민등록법은 1975년 개정을 통해서 현행 '생년월일-부여번호'의 13자리 고유번호로 자리 잡았다. 이 제도는 행정편의주의에 입각한 강력한 통제시스템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지문등록이란 괴상망측한 것까지 태동 중이란 사실이다.(중략) 마치 국민을 요시찰인 또는 우범자로 다루려는 것 같은 극히 불쾌한 인상, 심하게 공포심까지 갖게 한다." - <동아일보> 1965. 12. 8

이런 보도는 일반 시민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었다. 일제의 악법도 반공을 명목으로 부활했다. 치안유지법을 모방한 국가보안법이 한층 개악되었다. 전향공작전담반이 가동되면서 폭력으로 사상을 개조하는 '피의 전향공작'도 다시 등장했다. 일제의 보호관찰제도나 사상범예방구금령을 본떠 사회안전법을 시행했다. 만기출소한 비전향자들을 재심사하고 전향을 거부하면 재수감함으로써 장기수를 양산했다.

 

  일제 말 국민정신총동원연맹과 국민총력조선연맹이라는 전시총동원기구가 만들어지면서 10개 가구를 단위로 애국반을 조직했다.

매월 1회 개최되는 애국반회의(반상회)를 통해 각종 시책을 전달하였으며, 그 이행 여부를 검사하고 주민들끼리 서로 감시하도록 했다.

 

 

반공은 이성마저 삼켜버렸다. 가수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노래 추임새가 간첩과 접선하는 수신호라는 유언비어가 돌아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포장지에 뽀빠이가 그려진 과자 '라면땅'이 한동안 가게에서 사라지자, 아이들 사이에는 뽀빠이가 입은 붉은 상의와 푸른 바지가 각각 북한과 남한을 상징하고 팔뚝의 닻 문신이 남침을 의미해서 판매금지 되었다는 '걱정스런 소문'도 나돌았다. 정상적인 언로가 봉쇄되면서 '카더라 통신'이 유행하는 폐쇄사회의 한 단면이었다.

 

유신체제는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개인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대신 오로지 국가(지도자)에 대한 충성만을 요구했다. 일제시기 각종 협력단체들이 총독부의 시책 홍보에 앞장섰듯이 자유총연맹, 대한반공연맹, 새마을운동본부, 구국여성봉사단, 새마음봉사단 등 다양한 관변단체들이 유신의 외곽 조직으로 충성을 다했다. 국가와 개인을 연결하는 국가동원기구와 어용단체만 존재했을 뿐,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 시민, 또는 단체는 아예 존재할 수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것이 박정희의 눈에 벗어난다면 가차 없는 박해가 이어졌다. 박정희 시대에 '시민' 아닌 '재야'라는 독특한 저항 진영이 형성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5.16군사쿠데타 직후부터 반상회가 운영되었고, 1976년 5월 말부터 매월 25일 '정례 반상회의 날'로 지정,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참석하도록 했다. 1면에는 대통령의 담화를 실어 정부시책을 주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