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게이트와 닉슨의 교훈 - “나는 모른다” 대통령 닉슨을 기억하라
▶ 1973년 닉슨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두번째 임기 첫해를 맞았습니다. 1972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맥거번 후보를 워낙 큰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기에 닉슨 대통령과 백악관 참모진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닉슨 대통령은 1974년 임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 물러나고 말았는데요,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그의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맞닥뜨린 박근혜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요.
‘물타기→꼬리자르기→수사방해’하다 대통령직 사임
1973년 미국에서는 재선에 성공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취임했고,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13년 한국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했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각각 국가 최고 정보기관인 중앙정보국(CIA)과 국가정보원(국정원)의 대통령선거 개입 의혹이 불거져, 집권 첫해부터 큰 위기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곧 워터게이트 사건과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이다.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따른 여론 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이듬해인 1974년 결국 백악관에서 물러났다.
닉슨 대통령이 임기 중 사임이라는 막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워터게이트 사건 자체에 있지 않았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따른 대통령의 책임을 단 한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워터게이트에 쏠린 미국 사회의 관심을 자신에게 유리한 ‘국가안보’ 이슈로 돌리려고 애썼다. 이마저도 뜻대로 이뤄지지 않자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도록 중앙정보국을 활용해 연방수사국(FBI) 등에 압력을 넣었다.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를 주도한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닉슨을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린 것은 바로 ‘은폐’였다”고 지적했다.
“3급 침입절도사건”이라며 논평 거부하다
닉슨 대통령과 그의 측근이 워터게이트 사건 은폐 과정에서 시도한 ‘물타기→꼬리 자르기→수사 방해 및 권력 남용’ 등 일련의 행태는 2013년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관련해 한국에서 불거지고 있는 ‘정치공작’ ‘물타기’ 논란을 연상케 한다. 최초 발생 시점을 기준으로 40년도 넘게 지난 워터게이트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1972년 미국 대선을 약 5개월 앞둔 6월17일 토요일 새벽, 수도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호텔 빌딩 안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서 정장 차림에 외과 수술용 장갑을 낀 다섯 남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체포 당시 이들은 최신형 도청장치를 손에 쥐고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이들 가운데 한 명의 신분이 밝혀졌다. 제임스 매코드라는 인물이었다.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틴 기자는 그가 중앙정보국 출신으로 닉슨 대통령의 선거 캠프인 닉슨재선위원회에 몸담고 있었다고 6월19일 보도했다. 다음날 워싱턴포스트는 매코드 등 범인 두 명의 수첩에서 역시 중앙정보국 출신이며 백악관의 법률고문인 찰스 콜슨의 측근인 하워드 헌트의 전화번호가 나왔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훗날 헌트는 워싱턴의 홍보대행업체 ‘로버트 멀린’사 소속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멀린사는 중앙정보국이 꾸려놓은 여러 위장 회사 가운데 한 곳이었다. 곧이어 범인들이 가지고 있던 현금의 출처가 닉슨재선위원회였다는 사실, 재선위원회 관계자와 범인들이 범행 직전 십수 차례에 걸쳐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대해 백악관은 ‘물타기’로 일관했다. 로널드 지글러 백악관 대변인은 사건 초기(6월19일) 워터게이트 빌딩 도청사건에 대해 “3급 침입절도사건”에 불과하다며 아예 구체적 논평을 거부했다. 백악관이 이런 무성의한 논평을 내놓은 이유는 약 5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 때문이었다. 당시 민주당 조지 맥거번 후보를 크게 앞서고 있던 닉슨 캠프로서는 논란 확산을 원치 않았다. 이에 따라 백악관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단순한 해프닝이라고 주장하며 대중의 관심에서 자연스레 멀어지기를 바랐다.
대선을 5개월 앞둔 1972년 6월 미국 민주당 전국위 사무실에서 5명의 남자가 경찰에 잡혔다
도청장치를 든 이들 중 한 명은 CIA 출신의 닉슨 캠프 사람 ‘절도 사건’이라는 백악관의 변명
2012년 12월 대선 8일 전 야당 후보 비방 댓글 올린 혐의로 경찰은 국정원 직원 집을 덮쳤다
박근혜 후보는 ‘인권 침해’라며 야당을 향해 맹공격을 펼쳤다
지난해 12월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이 처음 불거졌을 때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보인 태도도 이와 비슷하다. 다만 박 후보는 이를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대선을 일주일여 앞둔 12월11일 경찰 및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은 국정원 여직원 김아무개씨의 서울 역삼동 오피스텔을 급습했다. 해당 여직원은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의 인터넷 댓글을 달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 관계자가 대선 기간에 야당 후보를 겨냥한 인터넷 게시물을 올린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선거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를 만했다.
박근혜 후보는 이를 “국정원 여직원 인권침해” 사건으로 규정하며 역공을 펼쳤다. 박 후보는 김씨에 대한 경찰의 소환조사를 하루 앞둔 12월14일 새누리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가안위를 챙기는 정보기관마저 자신들의 선거 승리를 위해 의도적으로 정쟁의 도구로 만들려고 했다면 이는 좌시할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라고 주장했다.
12월16일 밤 11시 경찰이 “국정원 여직원 대선 관련 댓글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자, 문재인 후보를 향한 박 후보의 공세는 한층 거세졌다. 박 후보는 이튿날 “경찰이 (여직원의) 컴퓨터 노트북을 뒤져봐도 댓글 하나 단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2박3일 동안 감금당하고 고생한 젊은 여직원, 그 여직원만 불쌍하게 됐다. 민주당은 지금도 이렇게 하는데 정권을 잡으면 도대체 어떤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지 두려운 생각까지 든다”(경기도 수원 지동시장 유세)고 말하는 등 ‘국정원 여직원 인권’을 선거에 쏠쏠히 써먹었다.
닉슨과 박근혜 대통령은 각각 워터게이트와 국정원 대선개입이라는 대형 악재를 딛고 1972년, 2012년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대선 직전 두 사람의 발목을 잡을 뻔했던 대형 사건에 대한 대중의 기억도 조금씩 사그라졌다.
취임 초까지 유일하게 보도한 워싱턴포스트
워터게이트에 대한 미국 사회의 분노를 일깨운 것은 다시 워싱턴포스트였다. 당시 미국 언론 가운데 1973년 닉슨 대통령 취임 초까지 워터게이트 사건을 거의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보도해온 곳은 워싱턴포스트였다. 워싱턴포스트는 10월10일치 보도를 통해 닉슨 행정부가 도널드 세그레티라는 젊은 변호사를 활용해 야당인 민주당을 겨냥한 광범위한 스파이 활동을 벌이는 등 워터게이트가 하나의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또 1972년 초까지 법무장관을 지낸 존 미첼 닉슨재선위원회 위원장이 민주당 관련 정보 수집의 총책임자라는 사실도 처음 알렸다.
닉슨 대통령의 취임 직후인 1973년 1월30일에는 미국 사법부도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던졌다. 사건 관련자에 대한 공판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존 시리카 연방법원 판사는 검찰 수사 단계에서 피고인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닉슨 행정부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잇단 단독보도 행진에 이어 시리카 판사의 발언까지 나오자, <뉴욕 타임스>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등 경쟁 매체도 비로소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에 관심을 쏟았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둘러싼 여론 지형의 변화에도 닉슨 대통령은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는 식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3월20일 그는 “백악관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고, 4월 들어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존 미첼 위원장이 워터게이트 사건 모의 과정에 참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나는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사전에 아무것도 몰랐다”고 발뺌했다. 대신 닉슨 대통령은 4월30일 워터게이트 사건 수습책의 하나로 밥 홀드먼 백악관 수석보좌관과 존 얼리크먼 국내담당보좌관을 해임했다. ‘꼬리 자르기’였다.
닉슨 대통령은 실제로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백악관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억울하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혔다. 그의 최측근이었던 찰스 콜슨 특별고문은 자신의 회고록 <백악관에서 감옥까지>에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미리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소개했다. 다만 닉슨 대통령 자신이 미리 알았든 몰랐든 선거전의 총책임자로서 끝까지 “나는 모른다”는 태도를 고집한 것은 그의 실책이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이 재점화된 과정도 언론을 통해서였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대선을 3일 앞둔 지난해 12월16일 밤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원 여직원의 대선 관련 댓글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한 데 이어, 지난 1월3일 “김씨가 올린 글은 정치적인 이슈와는 전혀 상관없고, 개인적이거나 국정원 업무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연이은 폭로에 닉슨 대통령 “몰랐다” 말하면서 보좌관 해임하며 꼬리 자르고 특검 해임하며 수사 방해
베트남전 내세워 안보 강조하다 모든 게 실패하자 사임했다
국정원 여직원 댓글 드러났어도 “의혹 밝히는 건 국회의 일”
박근혜 대통령 선 긋는 사이 국정원은 경찰 수사 방해하고 NLL 대화록을 공개하며 국가안보 논란을 부추긴다
1월31일치 <한겨레> 보도는 달랐다. 한겨레는 ‘오늘의 유머’에서 활동한 국정원 여직원 김씨의 아이디 11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그가 지난해 8월22일부터 12월11일까지 모두 91건의 게시글을 작성했으며 해당 게시물은 정부 여당을 일방적으로 편들거나 야당 및 야당 대선후보를 비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고 보도했다.
국정원의 정치·대선 개입 혐의를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속속 나왔다. 지난 3월18일 진선미 민주당 의원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취임한 2009년 2월부터 2013년 1월까지 국정원 인트라넷에 게시된 ‘원장님 지시·강조말씀’ 내부문건을 공개했다. 진 의원은 “국정원 문건을 보면 원 전 원장이 여론 조작을 시도하고, 종북 좌파에 대한 대응과 공작, 이명박 정권의 전위부대로서 4대강 등 각종 국정 현안을 실질적으로 지시한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진 의원은 5월15일에도 ‘박원순 서울시장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압해야 한다’는 취지의 국정원 작성 추정 문건을 추가로 공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이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국내 정치 및 선거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박 대통령은 지난 24일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국정원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대선 때 국정원이 어떤 도움을 주지도,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또한 그는 “국정원이 문제가 있었다면 여야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국민 앞에 의혹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절차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아니라 국회가 논의해서 할 일”이라고 말했다. 곧바로 ‘꼬리 자르기’라는 비판이 불거졌다. 40여개 시민단체·정당 연대기구인 ‘세상을 바꾸는 민중의 힘’은 25일 기자회견을 열어 “권력의 가장 큰 수혜를 받고 당선된 대통령이 국정원 사건과 관련해 ‘나와 관계없는 일’로 치부하는 모습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워싱턴포스트 등 언론의 집요한 보도는 1973년 2월 미국 상원 ‘워터게이트 사건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의 설치와 5월18일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 임명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워터게이트 사건은 기존의 연방수사국 수사와 의회 워터게이트 특위의 청문회, 특별검사의 수사 등 세 방향에서 닉슨 대통령을 압박해갔다.
특검 해임, 토요일 밤의 학살
닉슨 대통령은 여전히 “나는 모른다”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또한 워터게이트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미국 사회를 상대로 그는 두 가지 대응 방식을 선택했다. 우선 중앙정보국을 적극 활용해 연방수사국 및 워터게이트 특검의 수사활동을 교묘히 방해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과 전쟁을 치르던 당시 미국 사회의 애국심을 적극 활용했다. 닉슨 대통령은 5월22일 “워터게이트 사건 조사는 미국의 국가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고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김정인 참여연대 부위원장(춘천교대 사회교육과 교수)은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닉슨이 말한 국가안보란 곧 ‘정권 안보’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닉슨과 그의 참모들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정권의 위기가 깊어지자 국가안보라는 입장에서 기자들과 칼럼니스트, 일부 정부 부처 관계자에 대한 도청을 시도했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며 닉슨 정권이 말한 국가안보도 곧 ‘정권 안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닉슨 대통령은 1973년 10월 자신의 목에 더욱 깊숙이 칼을 들이미는 콕스 특검을 아예 해임하며 민심을 완전히 등졌다. 콕스 특검은 수사 과정에서 대통령 집무실에서 오간 모든 대화를 기록한 음성테이프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닉슨 대통령에게 이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닉슨 대통령은 이를 거부하며 되레 콕스 특검을 10월20일 해임했다. 그러자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장관은 콕스 특검 해임에 반대하며 사임하는 것으로 맞섰다. 법무차관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언론은 이를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고 불렀다.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직접 지시했거나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여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원 법사위원회는 1974년 7월27일 닉슨 대통령에 대한 탄핵 권고안을 결의했다. 탄핵 사유는 사법방해죄와 권력남용죄였다. 그는 결국 1974년 8월8일 탄핵에 앞서 먼저 사임을 발표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관련해 최근 여론이 크게 들끓은 지점은 지난 24일 남재준 국정원장이 ‘총대’를 멘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였다. 국정원은 지난해 대선 직전 경찰이 ‘국정원의 대선 개입은 없었다’는 내용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과정에도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지난 17일 “지난해 12월16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과 박원동 당시 국정원 국익정보국장이 여러 차례 통화했다는 제보가 있다”고 주장했다. 남재준 원장의 대화록 공개 직후 새누리당과 <조선일보> 등 일부 매체는 기다렸다는 듯 이를 계기로 뜬금없는 ‘국가안보’ 논란을 부추겼다. 40년 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중앙정보국이 주도한 정치공작, 곧 찰스 콜슨 고문의 표현처럼 “아무도 반박하지 못하는 국가안보라는 주문의 보호막”을 만들어내 워터게이트 사건을 극복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3730.html
1970년대 미국 ‘처치위원회’
사찰에서 악소문 퍼뜨리기까지 CIA·FBI를 낱낱이 조사했으나…
미 중앙정보국(CIA)이 개입된 워터게이트 사건 후인 1975년, 미 상원은 ‘처치위원회’를 열어 국가기관의 민주주의 파괴행위 내용을 구체적으로 규명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바로잡았다. 그 기준은 ‘시민의 권리 보장’이었다. 위키리크스 갈무리
아인슈타인까지 사찰한 FBI, 남베트남 쿠데타 기획한 CIA
닉슨이 사임한 뒤 조직된 미 상원 ‘처치위원회’는 이들 정보기관의 정치개입과 시민권리 침해 사례들을 조사
CIA도 국내 사찰활동 벌였다. 반전운동가 미행하며 도청하고 언론에 비난기사를 싣게 했다
악소문으로 실직하게 하고 악의적인 편지 보내기를 통해 시민들 결혼생활까지 깼다
1970년대 미국은 국내외적으로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냉전정책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는 전환점이 생겨난 것이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식과 함께 닥쳐온 군수산업의 위기를 ‘새로운 적’을 만들어 대응해 나간 미국의 냉전정치는 진정한 평화를 기대했던 미국 시민들의 반발을 국가안보의 명분으로 억누른다. 미국 하원의 ‘비미국인 활동 위원회’(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조사 대상이 된 사람들은 사회적 매장을 당했다. 이른바 ‘안보국가’(Security State)의 등장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 중앙정보국(CIA)에 의한 외국 지도자 암살, 쿠데타 기획과 지휘, 연방수사국(FBI)에 의한 국내 정치 개입, 언론인과 인권운동 지도자 등에 대한 수십년간의 비밀사찰 사실들이 드러나게 된다. 이와 같은 국가기관의 민주주의 파괴행위 내용을 구체적으로 규명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바로잡아 나간 것이 상원 ‘처치 위원회’(Church Committee)였다. 아이다호 출신 상원의원 프랭크 처치 위원장의 이름을 따 1975년에 출범한 이 위원회의 공식 명칭은 ‘정보활동에 관한 정부의 운영정책 검토 소위원회’였다.
그들은 알고보니 불법조직이었다
이에 앞서 일련의 사건이 있었다.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가 절정에 이른 1971년, 연방수사국의 민간인 사찰 사건이 시민운동 단체에 의해 최초로 폭로된다. 마틴 루서 킹을 비롯해서 심지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까지 비밀 사찰한 연방수사국의 방첩프로그램 코인텔프로(COINTELPRO: Counter Intelligence Program)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시기, 또 하나의 중대한 문건이 공개된다. 국무부에서 베트남전쟁 종결 과정에 관여했던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출신의 대니얼 엘즈버그가 베트남 비밀개입 전략이 상세하게 기록된 비밀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유출·폭로한 것이었다. 케네디와 존슨 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나마라가 작성을 지시한 이 문서에는 중앙정보국이 베트남 정정을 어떻게 관리하고 쿠데타를 진행시켰으며, 어떤 암살행위와 민간인 학살에 관여했는지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하지만 미국 사회는 아직 진상의 핵심에는 다가가지 못했다.
1971년 8월에는 1944년 이래 브레턴우즈 체제의 약속에 따라 금 1온스당 35달러에 교환해주던 금 태환 시스템이 붕괴된다. 그 이듬해인 1972년 2월 닉슨의 중국 방문은 또 하나의 시대적 격변을 예고한다. <펜타곤 페이퍼>, 코인텔프로, 베트남 반전 운동 등은 순식간에 대중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고, 당연히 닉슨은 자신감을 갖는다. 그는 재선 준비팀을 가동하다가 결국 무리수를 쓰고 만다. 1972년 6월 전 중앙정보국 요원이 투입된 민주당 선거사무실 난입이라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미-중 관계 정상화라는 외교적 성과를 내세운 지 겨우 4개월 만이었다. 1974년 닉슨은 불명예 퇴진을 하고 정부 권력기관에 대한 처치위원회의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된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
중앙정보국, 연방수사국, 그리고 국가안보국(NSA: National Security Agency) 등은 이 과정에서 의회의 감독과 관리 대상이 되었다. 처치위원회는 “이 위원회 설립 결의의 가장 중대한 강조점은 미 정부기관의 정보활동이 ‘미국 시민들의 권리’를 위협했는가의 여부에 있다”고 강조했다.
위원회는 국가안보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정보기관에 대한 강력한 통제 수단이 강구되지 않으면 “민주사회가 위협받고 미국 사회의 본질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세 가지 유형의 활동을 그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첫째는 프락치 잠입, 도청, 편지 뜯어보기 등의 비밀 사찰활동, 둘째는 이렇게 수집된 정보를 대중적으로 확산해서 목표가 되는 개인이나 단체를 공공의 적처럼 만들어버리는 행위, 셋째는 목표가 되는 개인과 단체를 파괴하거나 사회적으로 추방당하게 하는 비밀활동 등.
이러한 활동을 조사하면서 처치위원회가 집중한 질문들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1. 정부의 어떤 기관이 민간인 사찰에 관여했는가? 2. 얼마나 많은 수의 시민들이 정보기관의 사찰 목표가 되었는가? 3. 정보기관의 사찰 기준은 무엇이었는가? 4. 단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찰 대상이 되기도 했는가? 5. 목표가 된 시민들의 사적 생활과 관련된 정보도 수집되어서 그 개인의 삶을 훼손하는 데 이용된 적이 있는가? 6. 정보기관이 사찰 대상이 된 단체나 개인의 신뢰를 파손하고 그 조직이나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활동을 한 바 있는가? 7. 상부기관의 명령에 따른 행위였는가, 아니면 독자적인 행위였는가? 8. 정보기관은 법치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9. 정부와 의회는 정보기관을 통제하고 책임을 묻는 조처를 얼마나 취해왔는가? 10. 전체적으로 봐서, 삼권 분립과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 정보기관 통제에 제대로 작동했는가?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것은, 이들 정보기관이 미국 헌법의 기본조항들을 모조리 위반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알고 보니 불법조직이었다.
국내 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중앙정보국도 카오스(CHAOS)라는 이름의 국내 사찰활동을 벌였다. 이들 정보기관들은 마피아를 동원해서 피델 카스트로 제거 계획을 세우거나, 미국 시민들을 대상으로 본인이 모르게 심리통제 약물 시험을 하는가 하면, 반전 운동가들에게 도청 등 대대적인 비밀사찰을 하고 언론에 이들에 대한 비난 기사를 싣게 해서 이들의 대중적 영향력과 신뢰를 훼손한 것은 기본이었다. 악소문으로 실직하게 만들거나 결혼생활까지 파괴하는 악의적인 편지 보내기 등으로 시민들의 권리를 유린하는 작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 1976년 포드 대통령은 처치위원회의 요구에 따라 대통령 명령 11905를 통해 대외정보기관에 대한 의회의 감독을 강화하고, 암살을 비롯해 제3국에 대한 비밀개입을 금지하는 조처를 취했으며, 1978년 지미 카터는 대통령 명령 12036을 통해 더욱 강화된 정보기관 감독 법률을 시행했다.
레이건·부시 정권 때 뒤집어져
그러나 1981년 레이건은 대통령 명령 12333으로, 처치위원회의 결정을 완전히 뒤바꿔 정보기관의 기능을 확대강화하고 중앙정보국을 비롯한 정보기관의 요청이 있으면 미 연방정부기관은 정보 제공에 최대한 협조하도록 만들었다. 네오콘(강경 보수파)의 태동이었다. 20년 뒤 이들 네오콘이 권력을 쥐는 부시 때는 대통령 명령 13470을 바탕으로 정보기관의 기능을 최강으로 확대하는 역전이 일어났다. 처치위원회의 노력이 무산되는 순간이자 미국 민주주의 위기가 재론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2008년 처치위원회의 보고서가 이런 상황에서 재출간된다. 역사적인 문서가 현실적으로 의미심장한 책자가 된 것이다.
결국 의회의 일상적인 감시와 통제, 언론의 비판기능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각성된 의식과 문제제기가 있지 않고서는, 이러한 기관의 민주주의 유린 사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국민의 감시망에서 벗어난 국가안보 논리는 꾸준히 민주주의를 위협하기 마련이다.
역사를 망각하지 않은 시민에게 민주주의는 살아 움직인다. 미국의 역사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 고어 비달은, “미국은 ‘아메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 아니라 ‘망각의 합중국’(United States of Amnesia)”이라고 한 적이 있다. 이렇게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비틀거린다.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로부터 국가안전기획부를 거쳐 지금의 국가정보원 그리고 검찰에 이르는 권력기관의 민주주의 유린에 대한 소상한 조사와 함께, 이들에 대한 강력한 민주적 통제가 절실하다. 처치위원회의 활동은 오늘날 한국 국회와 시민사회에 중요한 역사적 참고가 되어야 한다. 처치위원회의 보고서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권력에 대한 ‘영구적인 감시’(eternal vigilance)가 ‘자유를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price of liberty)라는 것을 망각하는 순간, 권력기관은 불법을 저지른다.” 권력은 방치하면 언제든 우리를 공격한다. 그러나 그러한 권력은 우리가 깨어 있는 한 마침내 몰락한다.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5937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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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반란에 준하는 ‘남재준의 누설’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 ‘매카시즘·워터게이트·3.15부정선거’ 연상되는 그의 누설
역사의 축소판이 될 만하다
종북몰이에선 매카시즘, 수사 축소 압력의 측면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을 닮았다
선거에 개입했다는 점에선 3·15 부정선거가 연상된다
정보화 사회, 사이버 시대로 접어든 21세기 특성 감안하면
이 사건은 군대를 동원하고 다수 국민을 적으로 돌린 반란과 내전에 비교할 만
지난 3월 ‘강직한 참군인’으로 군과 자신의 명예를 걸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국가정보원 개혁을 이끌어내 주리라는 기대감 속에 남재준 신임 국정원장이 취임했다. 그 뒤 언론 보도와 검찰 수사로 국정원의 불법 정치·선거 개입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는 동안 그는 침묵했다. 원세훈 국정원에서 불법 정치 개입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의심받는 국정원 관계자가 청와대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도, 경찰에서 범죄 혐의를 입증해 입건한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씨와 이아무개씨 등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도 조치도 없었다. 국내 정보기능 폐지 등 개혁 방안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배반의 핵폭탄’을 터뜨렸다. 엄중한 적법절차 없이 공개해선 안 될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본’을 공개한 것이다. 검찰의 판단이나 재판을 통해 처벌 여부가 가려지긴 하겠지만, 그는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하고 수사를 받게 됐다. 하지만 그는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임명된 지 석달밖에 안 된 사람이, 전임자의 잘못을 바로잡고 대대적인 개혁을 하겠다고 공언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결국 남재준은 국민의 신망과 군의 자존심, 명예보다 그가 모시는 ‘주군’과 그를 비호하는 ‘정당 패거리’를 위해 헌법과 법률, 국가기관의 기본 사명을 팔아먹은 ‘원세훈의 길’을 그대로 답습하기로 한 것으로 봐야 한다.
원세훈-김용판-남재준의 연결고리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경제지 <월스트리트 저널>은 남재준의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에 대해 ‘한국에서는 정보기관이 기밀 누설자(Leaker)’라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그가 벌인 행위의 파장은 실로 상상을 초월한다. 북한이 기다렸다는 듯이 엔엘엘(NLL)의 합법성 문제와 ‘정상회담 대화 내용’을 공개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 문제를 제기하며 맹공격했다. 다른 나라 정상들과의 회담은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 한-중 정상회담에 임하는 중국 쪽에서도 심금을 털어놓는 대화는 꺼릴 것이다. 2002년 민간인 신분으로 방북한 박근혜 대통령이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과 했던 대화 내용을 북한이 공개하겠다고 위협하면 우리 정부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국익을 수호’해야 할 국가정보원이 스스로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국익을 참담하게 훼손’한 국가적 범죄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왜 갑자기 이런 돌발 행동을 했을까?
이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 ‘단서’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불거진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고 경찰의 증거 인멸과 허위 발표, 무마 압력 등이 속속 밝혀지면서, 박근혜 대통령을 뽑은 선거의 정통성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밀리고 싶지 않았던지 정문헌, 서상기 새누리당 의원 등을 필두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엔엘엘 포기 발언’ 문제를 제기하며 국정원에서 보관중이던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본을 새누리당 의원들이 단독으로 열람하게 된다. 그러고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엔엘엘 포기 발언을 한 것이 맞다. 김정일에게 보고드린다는 등 굴욕적인 표현을 일삼았다’는 등의 폭로를 감행했다. 6월20일, 6·25 한국전쟁 발발 63주년을 닷새 앞둔 시점이었다. 보수적 국민들의 애국과 반공, 보훈 심리가 강해지는 시기적 특성을 노리는 한편 국정원 불법 선거 개입 의혹의 국면을 전환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이들 새누리당 의원들의 ‘공개’가 불법행위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아직 ‘때가 묻지 않은’ 남재준 원장이 총대를 메고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본’을 공개한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대선 전후에 제기한 모든 주장과 발언들을 ‘사후적으로 정당화’시키는 한편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의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전 대선 후보가 실제로 ‘엔엘엘을 포기하고 북한 정권에 굴종하는 종북세력’이라는 여론을 불러일으키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곧 앞으로 이어질 ‘국정원 사건 국정조사’와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원세훈과 남재준 그리고 김용판, 전혀 다른 배경과 특성을 가진 ‘세 명의 국가기관장’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 김무성, 권영세 등 새누리당 핵심 실세들이다. 원세훈 전 원장의 조직적이고 파렴치한 여론조작 범죄행위와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허위조작 공직범죄 그리고 남재준 원장의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혐의 행위의 배경에 이러한 정황들이 작용한 증거가 뒷받침된다면, 새누리당의 핵심 실세들은 ‘정치전략이라는 이름으로 헌법을 유린하고 국가기관을 사병화하는 한편 색깔론으로 국민을 분열시키고 국격을 추락시키고 국익을 저해한 역적’으로 역사에 기록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런 ‘정황’과 원세훈, 김용판, 남재준의 불법행위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면 이 세 사람은 지위와 역할에 걸맞지 않은 공개적이고 확신에 찬 범죄적 일탈행동을 행한 ‘이상심리’에 대해 전문가의 정신감정과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국정원 게이트’는 인터넷에서 조직적으로 여론을 조작해 야당 후보 등을 ‘종북’으로 몰고 그 혐의에 대한 수사 과정마저 압력과 허위로 왜곡한 사건 그리고 이를 덮기 위해 국가기밀인 정상회담 대화 내용까지 불법적으로 유출한 의혹에 관한 사건이다. 국정원 게이트는 국정조사와 재판 등 앞으로 이어질 진상규명 과정에서 입증되고 확인될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첩보기관 역할 할 수 있겠나
이미 드러난 정황과 증거만 가지고도 종전에 발생했던 어떤 사건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국가적 범죄행위’로 총칭할 수 있다. 그 하나하나만으로도 역사를 바꾼 매카시즘 사태와 워터게이트 사건, 3·15 부정선거가 국정원 게이트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1950년부터 4년 동안 미국에서 “내 손안에 공산주의자의 명단이 있다”며 정치인과 공무원, 지식인과 예술인, 교사, 군인 등을 무차별적으로 빨갱이로 낙인찍고 고발한 조지프 매카시 공화당 상원의원. 그의 위세에 눌려 누구도 감히 정권과 정부 시책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결국 그의 주장은 거짓임이 드러났고 공화당 소속 의원들이 “자유는 결코 독재의 방법으로 지킬 수 없다”며 매카시를 규탄하는 양심선언을 하기에 이르면서 매카시즘은 종말을 맞았다. 미국의 사상가와 철학자들은 “미국의 지성사에 절대로 회복하지 못할 상처를 남겼다”고 매카시즘을 진단한다. 지금도 누군가를 공산주의자로 규정하고 공격하는 ‘이념적 마녀사냥’에 대해 세계 각국에서 매카시즘이라고 규정할 정도다.
국정원 게이트도 마찬가지다. 원세훈 원장 재직 4년 내내 수십명의 직원들과 민간인 협력자들을 통해 인터넷상에 야당 정치인과 정부 비판 지식인, 시민사회단체 등을 ‘종북’, ‘빨갱이’로 매도해 척결과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글을 지속적으로 게시했다. 우익 성향의 논객이나 네티즌 등이 이를 반복 전파해 여론을 조작하고 국론을 분열시켰다. 국정원 게이트는 매카시즘 못지않은 폐해와 파급 효과가 큰 사건이다.
1972년에 발생한 워터게이트 사건은 민간인 다섯명이 야당 사무실이 차려진 워터게이트 호텔 방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가 적발돼 경찰에 체포된 것이 발단이었다. 실제로 선거에 아무런 영향이나 효과를 미치지 못한 ‘미수에 그친’ 범죄다. 하지만 공화당 닉슨 대통령 당선 뒤 경찰의 수사 과정에서 중앙정보국(CIA)과 백악관, 선거운동본부 등이 관련된 사실이 드러나고, 연방수사국(FBI) 수사를 무마하려는 닉슨 대통령의 압력과 모의 사실이 알려지면서 닉슨 대통령은 탄핵 직전에 사임했다. 이 과정에서 특위 소속 공화당 의원 17명 중 6명이 탄핵안에 동의하는 ‘양심적 행동’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정원 게이트는 도청 미수라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비해 훨씬 파급력이 큰 여론조작이라는 조직적 범죄행위가 실제로 이뤄졌고, 그 수사 과정에서 권력에 의한 축소와 왜곡 압력이 작용했다는 점에서 워터게이트를 능가하는 불법성과 폭발력을 가졌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기록된 역사적인 시민저항운동인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 정권이 내무부와 경찰, 폭력조직을 총동원해 불법·관권 선거를 치르고, 항거하는 시민들을 유혈폭력 진압한 사건이었다. 국정원 게이트 역시 제18대 대선 과정에서 국정원이 보유중인 ‘정상회담 대화록’이라는 기밀이 여당 쪽에 선거전략용으로 제공되고, 조직적 여론조작행위가 이뤄졌으며, 윤정훈 새누리당 에스엔에스(SNS) 단장 등이 운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위 ‘십알단’ 등 ‘사이버 깡패’들이 동원되었음은 물론 경찰의 증거인멸과 허위 중간수사결과 발표 등 조직적인 불법개입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총체적 불법선거’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에 불거진 스노든의 폭로 역시 같은 맥락이다. 국정원 게이트의 경우에는 초기에 국정원 직원이 전 직원을 통해 여론조작 범죄 정황을 제보하는 ‘폭로’로 시작된 측면도 있지만,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고 야당의 공격과 시민사회의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이를 희석시키기 위해 직원 개인이 아닌 국정원장이 공개적으로 국가기밀을 유출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스스로 기밀을 유출하는 정보기관이 앞으로 국제 첩보세계에서 제구실을 할 수 있을까?
책임있는 모든 사람을 숨김없이 밝혀야
정보화 사회, 사이버 시대로 접어든 21세기라는 특성을 고려하면 이 사건은 20세기에 군대를 동원해 권력을 찬탈하고 다수 국민을 적으로 돌린 반란과 내전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엄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대통령 개인의 진퇴나 특정 정당이나 정파의 이해·승패라는 소아적 망상과 집착은 던져버려야 한다. 이 사건 가담자들 중에는 자신이 실제로 ‘애국’을 한다는 확실한 신념하에 적극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사람들과 정치적 줄서기를 통해 이익을 보려는 사람들 그리고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상급자가 시키는 대로 지시를 수행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
첫째, ‘야당 등 종북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비뚤어진 애국주의적 신념을 가진 자들은 마치 광신도나 테러리스트와 같은 확신범을 연상케 한다. 대통령이나 정부, 정당 등이 곧 ‘국가’라고 여기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이나 세력을 ‘적’으로 간주해 ‘전쟁’을 벌인다는 심리가 있다. 전쟁 중에 법이나 원칙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인식, ‘지면 죽는다’는 절박함이 평시의 민주주의 사회에 정상적일까? 민주주의를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헌법의 정신과 내용을 제대로 깨치지 못한 채 편협한 주장에 반복 노출된 탓에 그릇된 신념으로 ‘세뇌’가 이뤄진 것 아닌가.
둘째,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반국가적 범죄를 주도하거나 가담한 자들의 심리는 일반적인 범죄자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그 폐해가 국가 전체에 미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셋째, 상관의 부당한 지시를 거역하지 못하고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경우다. 1961년 실시된 ‘밀그램의 실험’에서, 권위를 가진 자가 독촉할 경우, 틀린 답을 제시한 학생에게 지속적으로 높은 전기충격을 주는 버튼을 눌러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비율이 90%에 이른다는 것이 확인된 것처럼 의외로 많은 사람이 ‘권위적인 불법적 지시’에 항거하지 못한다. 밀그램의 실험 이후 우리나라를 포함한 각국은 이런 유형의 조직적 국가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법과 제도를 마련해왔다. 국가공무원법과 공무원 행동강령 등에 불법 부당한 지시에 항거하고 따르지 말 것을 정하고 있으며 공무원 채용 및 직무 교육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부당한 지시 이행 거부’ 의무를 가르친다. 여전히 법과 원칙보다는 권위와 명령이 우선시되는 전근대적 조직문화가 남아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무엇보다 이들에 대한 엄한 처벌이 이루어져야 ‘상관의 지시를 따르기 때문에 괜찮을 거야’라는 인식을 뿌리뽑을 수 있다.
잘못된 정치 풍토와 관료주의 문화가 소수의 광신적 확신범과 만나 이루어진 이런 망국적 범죄행위가 다시 자행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선열들이 피와 생명을 바쳐 지킨 대한민국의 존립과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이미 국가기밀까지 전세계에 공개된 마당에 더 숨길 게 무엇이 있겠는가? 이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실과 책임있는 모든 사람을 숨김없이 밝혀야 한다. 그리고 법에 정한 응당한 처벌이 이루어지고 재발 방지를 위한 강도 높은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이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이렇게 훼손되고 오염되고 짓밟히기엔 너무 많은 이들의 피와 땀과 생명이 서려 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36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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