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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세상 이야기

민주공화국 대통령 후보의 자격 - 진중권

by Wood-Stock 2012. 9. 18.

ohmynews

민주공화국 대통령 후보의 자격을 묻는다① 5·16 쿠데타와 10월 유신박정희가 천상에서 사죄했을 거라고? 김진 위원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

 

순항하는 듯했던 박근혜호(號). 출범하자마자 역주행을 하더니 결국 유신항(港)에 닻을 내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일부 선원이 '기항지가 잘못됐다'고 항의하나, 선장과 항법사 등 조타실 간부들은 요지부동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유신항에 정박한 배는 닻을 올리기를 거부하고 있다. 닻은 거기에 내려둔 채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이야기. 선원들이 '그게 불가능하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 소리가 조타실까지 들릴 리 만무하다. 선장은 '이게 다 어묵 사먹으며 포장마차 매상이나 올려주면 풀릴 문제'라고 믿는 모양이다.

나는야 유신의 딸 

 

솔직히 박근혜 후보가 스스로 유신에 발을 묶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인터넷으로 기사검색을 해 보라. 박근혜 후보는 이미 2002년, 2007년에도 지금과 동일한 물음에, 지금과 동일하게 대답했다. 지금이 2012년이니, 정확히 5년마다, 즉 대선이 있는 해마다 과거사 문제에 봉착했던 것이다. 물론 그때마다 그녀의 입장은 확고했다. '유신체제는 정당했고, 아버지는 억울하다'는 것. 사실 그녀의 인식은 뿌리 깊은 것이다. 

"4·19 때 목숨까지 버렸는데 그 혼란의 와중에서 공산당의 밥이 됐다면 그 희생이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더 나아가 3·1운동 6·25사변(한국전쟁)도 그때 많은 우리 선조가, 앞서간 분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희생을,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놓으셨는데 그것도 5·16 때 공산당한테 나라가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희생이 값진 것이고 헛되지 않은 것이지, 만약에 나라가 (먹혔다면) 그 희생은 다 헛된 것 아니겠느냐. 그런 의미에서 5·16을 생각하고 싶고요. 

마지막으로 제가 유신에 대한 얘기가 끊어져서 말씀을 못했는데, 특히 유신과 자주국방은 떼려야 뗄 수가 없어요. 왜나면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그 기한 안에 이루기 위해 아버지가 유신을 하신 것이기 때문에..." (1989년 박경재의 <시사토론> 인터뷰 당시) 

한마디로, 5·16은 단순한 군사쿠데타가 아니라, 헌법전문에 명기된 3·1운동이나 4·19에 맞먹는 '혁명'이며, 유신체제는 단순한 군사독재가 아니라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위한 '구국의 조치'였다는 이야기다. 이번 사태는 박근혜 후보가 23년 전의 이 생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상식적으로 30여 년 전의 과거사에 발이 묶여 표를 잃는 것은 후보에게 결코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이 부조리를 고집하는 것일까. 이 사안이 적어도 그녀에게는 계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5·16 쿠데타와 유신헌법은 박근혜의 정치철학의 요체, 말하자면 그녀가 정치를 하는 이유, 그녀가 삶을 사는 동기 그 자체다. 따라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박근혜가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도 유신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통합진보당 구당권파가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도 북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과 흡사하다. 

박정희 따님의 사당, 새누리당 

5·16 쿠데타와 유신체제에 관한 박근혜 대표의 인식은 정확히 3공·4공 시절 정권에서 강제로 유포하던 정치 프로퍼갠더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청와대에서 자라나 그 안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까지 하다 보니, 정권의 프로퍼갠더에 완전히 세뇌돼 버린 것이다. 이런 문제적(?)인 후보를 모신 당으로서는 당연히 근심이 깊을 수밖에. 그리하여 김종인·이준석·이상돈 교수는 물론이고, 남경필 의원을 비롯한 당내의 몇몇 인사들도 박근혜 대표에게 과거사에 관해 입장을 전환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후보는 요지부동이다. 

정상적인 경우, 후보의 사적 소신(?)과 정당의 공적 입장이 충돌하면, 조정이 이뤄진다. 이 당연한 일이 왜 안되는 것일까. 그것은 새누리당이 정상적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박근혜 후보는 한나라당이 오합지졸이 될 때마다 나타나 당을 위기에서 구하곤 했다. 하지만 선거 때마다 발휘되던 그 리더십의 요체가 무엇인가. 결국 '박정희 향수'로 핵심 지도층을 추슬러 그것을 구심으로 선거전을 이끄는 것이었다. 이렇게 위기의 극복이 아버지의 후광을 업은 개인의 인기에 의존하다 보니, 당 자체가 특정인의 사당이 돼 버린 것이다.

어느 당이나 선거를 앞두면 후보 중심으로 편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그 수준을 넘었다. 박근혜가 '정당의 후보'가 아니라, 새누리당이 '후보의 정당'인 상황. 홍일표 대변인의 사임은 이를 잘 보여준다. '두 개의 인혁당 판결'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자, 홍 대변인은 "박 후보의 표현에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박 후보 본인이 "전혀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이를 부인하고 나섰다. 설사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해도, 당의 혼란상을 드러내며 굳이 부인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파문이 더 커지자, 박 후보는 마지못해 "피해를 당한 분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는 입장을 내놓는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박근혜의 언급이 '쿠데타와 유신체제'에 대한 반성과 사과라고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녀는 여전히 쿠데타를 혁명이라 여기고, 유신독재의 정당성을 확신한다. 다만 그 도도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희생자는 발생할 수 있고, 그런 희생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가해의 주체는 역사며, 판단의 주체 역시 역사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역사'가 죽일 놈이다. 

유신 공주님의 환관들 

 

어차피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쌓은 국정경험을 통해 얻은 리더십 자체가 결코 민주적인 성격의 것은 아니다. 며칠 전 영남의 어느 도시에 강연을 갔다가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박근혜 후보가 시장을 방문했더니, 그곳에서 장사하던 어느 할머니가 "공주마마 오셨다"며, 넙죽 엎드려 큰 절을 올리더란다. 박근혜 후보가 5·16 쿠데타와 10월 유신에 대해 그토록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이 자기만의 생각이 아니라, 자기 측근과 지지자들 사이에 널리 공유된 생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친박 좌장이자 박근혜 경선캠프 공동선대위장인 홍사덕 전 의원은 "유신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 게 아니라 수출 100억 달러를 넘기기 위한 조치였다"고 말했다. 박근혜 후보는 곧바로 "그건 그 분 개인의 견해"라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홍사덕 전 의원의 발언은 유신이 '자립경제'를 위한 조치였다는 후보의 소신과 일치한다. "인혁당? 모두 배가 부른가 보지?"라는 친박 이한구 의원의 발언도 마찬가지. 오죽 황당하면, 이를 보다 못한 정몽준 의원이 "국민을 배부른 돼지로 아느냐?"며 반박하고 나섰겠는가. 

새누리당 김병호 공보단장은 아예 염장을 지른다. "사과라는 것은 누구한테 하는 사과냐, 피해자가 누구냐"라며 "사과를 피해자 당사자들이 아닌 그들의 가족이나 후손까지로 확대하기 시작하면, 전 국민 중에 사과를 안 받을 사람이 있겠느냐"라고 말했다(<한겨레> 김병호 박 후보 공보단장 '인혁당 사과는 당사자들에게만' 2012년 9월 16일 치). 결국 인혁당 사건은 희생자의 가족과 후손들에게까지 할 사안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박근혜 공주께서 승하하셔야겠다. 저승에 계신 '당사자들'에게 사과하는 길은 그 길밖에 없잖은가. 

이 모든 망언 퍼레이드에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친박계로 3성 장군 출신인 한기호 의원이다. 

"역사를 쓰는 일에만 몰두해서 과거로 발목잡기를 하는 세작들이 있지만, 역사를 만들어온 사람들은 새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오늘을 허비하지 않는다." 

이렇게 그는 애먼 사람들을 싸잡아 졸지에 '세작'(간첩)으로 만들어 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유신시절 무고한 이들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던 바로 그 논리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친박계의 의식 속에 유신은 '과거'가 아니다. 그들에게 유신은 생생한 현재요, 우리에게는 닥칠지 모르는 '미래'다. 

유신의 잔당들 

이 망언의 대열에 일군의 극우 인사들이 합류한다. 이들의 견해는 상당히 독창적이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대의 판사들은 양심이 없는 판사들이기 때문에 당시의 판결은 일고의 가치가 없고, 민주화시대의 판사들의 양심만 옳다는 현 여론의 추세는 참으로 당혹스럽고 불길하다. 필자는 민주화 시대의 판사들을 매우 불신한다. 그들 중에는 김일성 교시에 따라 빨갱이로 제조된 판사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필자는 22개 사건을 재심으로 일거에 뒤집은 이용훈을 빨갱이라고 생각한다."(지만원·인혁당 사건 "法이 法을 파괴하는 法" <프론티어타임즈> 2012년 9월 15일 치)

<뉴데일리>나 <조갑제닷컴>에서는 아예 인혁당 사건이 조작임을 부정하는 기사를 끊임없이 내보낸다. 물론 '인혁당 사건에 관해서는 다른 증언이 있으며, 대법원에도 두 개의 판결이 있다'는 박근혜의 발언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SNS에도 움직임이 존재한다. <저격수다>라는 <나꼼수> '짝퉁' 팟캐스트에 출연하고 있는 축구해설가 장원재 교수의 발언이다. "인민혁명당이 조작된 사건이라면, 인민혁명당 이야기가 나오는 북한 교과서와 김일성회고록도 조작된 책이겠네! ㅋㅋ"(@yark991) 이들이 이토록 북한교과서와 김일성 회고록을 신봉하는지 몰랐다. 

그나마 온건한 박근혜 옹호 입장은 안병직 교수의 것. 한마디로 '1차 인혁당 사건은 단순한 조작이 아니라, 혁명조직으로서 나름 실체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조직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았다는 안병직 교수 개인의 경험을 근거로 한다. 박근혜 후보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증언;은 이를 가리킨다. 물론 1차 인혁당도 북한의 대남공작과 연계된 것은 아니며, 실체가 불분명해 당시의 담당검사들이 무리한 기소라고 항명한 적이 있다. 안병직 교수는 1, 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이나 처형이 정당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1975년 4월 8일 새벽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사법살인' 당한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서도원(전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 하재완(무직), 이수병(일어학원 강사),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송상진(양봉업), 우홍선(무직), 여정남(전 경북대 총학생회장) 8명의 사형이 집행된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정작 검증해야 할 것은?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보수진영의 입장을 거칠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견해의 스펙트럼이 나온다.

①인혁당 사건이 조작임을 부정하며, 처형의 정당성을 시사한다.(극우매체. 지만원·장원재)
②인혁당 사건이 조작임을 부정하나, 처형의 정당성은 부정한다.(뉴라이트. 안병직)
③인혁당 사건이 조작이고 처형은 부당하나, 사과할 사안은 아니다.(새누리당 친박계. 이한구·김병호)
④인혁당 사건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는 자들은 간첩이다.(새누리당 친박계. 한기호) 
⑤인혁당 사건은 조작이고 처형은 부당하니, 박근혜가 사과하라.(새누리당 비박계와 보수언론)

이게 바로 한국 보수의 스산한 풍경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마도 ①에서 ④까지의 입장이리리라. 그것들은 명백한 역사 수정주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견해들은 망언에 가까워, 논쟁보다는 스캔들의 대상이 될 뿐, 정작 문제 삼아야 할 것은 ⑤이다. 왜? 이 입장은 '사과'라는 쿨한 말 속에 가장 핵심적인 검증의 항목을 슬쩍 은폐하기 때문이다. 바로 유신체제 자체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공식적 입장이다. 아래 문장을 보라.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고 처형은 부당하니, 박근혜가 사과하라 

최근 보수언론들도 경쟁적으로 박근혜를 향해 이렇게 주문한다. 하지만 이 말로써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애매하다. 그 주문은 

(1)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만 사과하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2) '유신독재 자체에 대해서 사과하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핵심은 역시 '유신체제' 자체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입장이다. 왜? 인혁당의 피해자들은 바로 유신독재에 항거하다가, 유신헌법으로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단순한 실수나 오류로 인한 사법의 피해자가 아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문제에 관한 박근혜 후보의 입장은 이런 것으로 보인다. 

유신은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위한 구국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만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자신의 언급을 "사과로 받아 들여 달라"거나 "유가족이 허락하면 만날 수 있다"는 박근혜 후보의 말은, 인혁당 사건을 '유신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는 관계없는 고립된 개별사건으로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설사 유가족을 만나 사과를 하더라도, 박근혜는 여전히 아무 모순 없이 '유신체제가 정당하다'고 말할 게다. 그런 의미에서 홍사덕 전 의원은 박근혜의 입장을 제대로 요약했다. "유신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게 아니라 수출 100억 달러를 넘기 위한 조치였다." 여기에 '박사모'가 화답한다. 

"독재 정권을 용인한 북한에서 (중략) 정치범 수용소에서 떼로 죽어 나가며 아예 야당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지만 우리는 김영삼·김대중 등 야권 지도자는 건재했다. 그들이 유신 당시에도 항거할 수 있었기에 독재라도 상당히 느슨한 독재였다." 

헌정을 수호할 대통령의 책무 

박근혜 후보에게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은 5·16 쿠데타와 10월 유신에 대한 공식적 입장이다. 왜냐하면 이 두 사건은 대한민국의 헌정을 유린한 범죄였기 때문이다. 박근혜 후보는 대통령이 되려 한다. 그런데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책무 중의 하나는 헌법을 수호하는 데에 있다. 이 두 사건에 대한 입장을 묻는 것은, 자신의 집권 시에 행여나 

(1) 나라가 혼란하여 쿠데타가 일어날 경우 그것을 '혁명'이라 환영할 것인지, 
(2) 자신에게 국민이 저항할 경우 유신과 같은 초헌법적 조치를 취할 것인지,

여부를 묻는 것이다. 이 두 물음의 어느 것에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하는 후보는 절대로 대통령이 돼서는 안된다. 쿠데타를 용인하고, 파쇼헌법을 옹호하는 것은 헌정을 수호할 책무를 진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심각한 결격사유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연좌제'라고 비난한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박근혜 후보가 내세우는 국정운영의 경험은 유신시절에 습득된 것이다. 게다가 우리 국민은 박근혜 후보를 유신의 어두운 기억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의향이 있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를 그 어두운 시절과 연결시키는 끈은 박 후보 자신이 맨 것이다. 끈을 풀어버리라는 제 당의 조언도 거부하고, 국민의 요청도 거절하고, 제 스스로 옭아맨 것이다. 결자해지. 그 끈을 푸는 것은 박근혜 후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개인적 생각까지 바꾸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것은 박정희-박근혜 모녀의 사적 관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점은 박근혜 자신이 <나의 삶, 나의 아버지>라는 책에서 "인상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나의 부모님은 내 삶의 모델이다. 특히 정치인이 된 지금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공적 검증의 대상인 정치철학을 아버지 박정희가 아니라 독재자 박정희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이야기다.

"유신체제와 같은 독재가 되돌아 올 가능성은 없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가 어디 일본의 식민지배가 되돌아올 것이 두려워 일본에게 과거사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요구했던가. 게다가 우리는 이명박 정권을 경험해 봤다. 아무리 민주화가 됐어도,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질 낮은 대통령 한 명이 민주주의를 순식간에 망가뜨리는 것을 지난 5년간 똑똑히 목도한 바 있다. 그런 국민이 헌정을 파괴한 독재자에게 정치를 배운 인물이 대통령이 되는 데에 두려움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설사 '상당히 느슨한 독재'가 된다 하더라도.

언젠가 통합진보당과 관련해 '종북' 논란이 일어났을 때,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은 종북의원을 가려내는 기발한 방법을 제시한 바 있다. 

"옛날 천주교가 들어와 (신도를 가려내려고) 십자가를 밟고 가게 한 적이 있지 않느냐." 

이런 잣대를 새누리당 자신에 들이댄다면, 박정희 사진을 깔아놓고 박근혜 보고 밟고 지나가라고 요구해야 할 것이다. 물론 누구도 그런 봉건적 잔악함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이번 기회에 새누리당 의원들이 그 발언이 얼마나 잔악한 것이었는지 깨닫고, 자신들의 공직후보에 대해서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를 원할 뿐이다. 

내가 김진 위원을 존경하는 이유

 

 

 

이 문제에 관해 얼마 전 <중앙일보>의 김진 논설위원이 칼럼을 쓴 모양이다. 읽어 보니, 내가 바로 위에서 지적한 꼼수의 전형이다. 한 마디로, '유신독재는 정당했다. 대만의 장개석, 싱가폴의 리콴유를 보라.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독재자가 필요했다'는 논리다. 그는 이렇게 독재와 경제 사이에 필연적 인과관계를 설정한다. 해괴한 논법이다. 물론 인권에 대한 의식도 낮았으니, 그 시절 가정에서 남편에 의한 아내의 구타율도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남편이 아내를 패서 경제가 발전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얼굴에 철판 깔고 유신독재를 정당화하고, 그것의 추악상을 상대화하는 이 칼럼 역시 마지막으로 박근혜 후보를 향해 사과를 주문한다. "이제 유족을 껴안는 일은 이승의 딸에게 남겨져 있다." 한마디로 유신독재는 경제발전을 위한 구국의 조치였으나, 인혁당 사건만은 잘못됐다고 인정하라는 이야기다. 이 인식은 차라리 <조선일보>보다 수구적이다. 조선일보의 입장은 5·16은 긍정하되 유신은 부정하자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김진 위원이 아직도 이런 인식을 갖고 있다면,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자격이 없다. 

우리 모두는 대한민국 헌법에 합의했다. 그리하여 극좌와 극우의 공격으로부터 헌법을 지킬 의무를 진다. 헌법을 바꾸려면 헌법에 규정된 절차를 따라야 한다. 좌익 혁명으로 헌정을 전복하는 것이 용납돼서는 안 되듯이, 5·16과 12·12와 같은 우익 쿠데타나 10월 유신과 같은 초법적 조치로 헌정을 전복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이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우리가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지키기로 합의한 약속이다. 일간신문의 논설위원에게 이런 상식이 결여돼 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 칼럼 덕분에 방송에서 괜히 "김진 위원을 존경한다"고 했던 나까지도 욕을 먹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겠다. 그게 다 몰라서 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그에 대한 존경을 포기하지 않겠다. 다음 구절 때문이다. 

"박정희는 천상에서 인혁당 8인에게 사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막걸리를 마시며 조국을 얘기하고 있을 것이다." (김진·"박정희 독재 어떻게 볼 것인가?" <중앙일보> 2012년 9월 17일 치)

이 구절을 통해서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김진 위원은 자신이 간첩으로 체포돼 갖은 고문을 받고 교수대에 달려 죽은 뒤 강제로 화장을 당하더라도, 저승에서 '쿨'하게 박정희의 사과를 받고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조국을 논할 분이라는 점이다. 이 대인배적 면모를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진 위원은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다. 찬미하라.

 

민주공화국 대통령 후보의 자격을 묻는다② 나는 '친박'이 무섭다

박근혜 캠프의 3대 코드 '비리', '공작', '망언'

   박근혜 후보의 국민행복캠프 홈페이지 화면 캠프는 입으로 하는 공약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공약이다. 후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후보와 더불어 일할 사람들. 사실 박근혜 후보보다 더 걱정되는 것이 캠프다. 이른바 '친박'이라는 세력은 선거의 자원봉사자가 아니다. 그들은 '수권 세력'으로서 집권할 경우 국정의 방향을 정하고 집행을 책임질 사람들이다. 하지만 박근혜 캠프는 어떤가? '이념'과 '도덕'과 '양식'의 면에서 이들은 심각한 의구심을 갖게 한다. 국민의 불안은 이것이다. "과연 이들이 집권을 해도 나라가 온전할 수 있을까?" 

돌려 막는 비리 

벌써부터 비리의 봇물이 터져 나온다. 집권도 하기 전에 벌써 이러니, 권력을 손에 쥐면 가관일 것이다. 먼저 "부산의 친박"으로 알려진 현영희 의원이 현기환 전 의원에게 공천헌금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어서 "친박의 좌장"으로 통하는 홍사덕 전 의원이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했다. 선관위에서 수사의 '의뢰'를 넘어 아예 '고발'을 했다는 것은 물증이 충분하다는 뜻이리라. 캠프의 핵심이 낙마를 하다 보니, 아예 캠프 구성을 다시 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박근혜의 아바타" 송영선 전 의원이 사고를 쳤다. 그녀의 녹취록은 길이 보존해야 할 정치학의 귀중한 사료다. 친박 세력이 정치를 어떻게 하는지 구체적이며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 기록 덕분에 국민들은 대통령이 나눠주는 차관급 자리가 무려 5000개이며, 조직을 굴리려면 1억 5천만 원 상당의 윤활유가 필요하며, 지역구에서 6만 표를 몰아주면 장차관 자리를 얻는다는, 정상적으로는 알기 힘든 귀중한 사실을 알게 됐다. 

제명을 당하자 송영선 전 의원은 총선 당시 공천헌금을 받은 "실세의원"이 존재한다고 폭로했다. 그게 빈 말이 아니라면, 공천비리가 박근혜 후보의 최측근의 손에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얘기가 된다. 당이 이렇게 돌아가자, 보다 못한 "친박의 원조" 서청원 전 대표가 당을 구하기 위해 "백의종군" 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구원투수로 나선 이 분도 실은 18대 총선 당시 공천헌금을 수수한 혐의로 징역형을 받은 바 있다. 신악(新惡)의 대안이 구악(舊惡). 이 얼마나 황당한가? 

"박근혜의 아바타" 송영선 전 의원이 박근혜와 박사모를 뒤에 업고 당직자의 뺨을 때리는 장면은 과연 압권이었다. 이게 21세기의 정당 정치에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어느 일간신문은 국민의 우려를 이렇게 전한다. 

문제는 이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수년간 대세론을 달렸던 박 후보를 등에 업고 수많은 친박인사들이 권력의 부나방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 총선과 경선 과정에서 친박 핵심인사들이 비리에 연루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사고치는 '박근혜 사람들'…집권해도 '걱정' 내일신문 2012.09.25) 

공작 정치, "나오면 죽는다"
박근혜 캠프의 또 다른 코드는 '공작'이다. 박근혜 후보는 대개 언론인 출신으로 채워지는 공보단에 검사 출신의 정준길을 임명했다. 처음부터 안철수에 대한 네거티브를 염두에 둔 포석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그는 트윗에 안철수를 공격하는 부정적 멘션을 올리는 것으로 몸을 풀더니, 급기야 두 가지 허위사실을 들어 협박을 하며 안철수의 불출마를 종용했다. 그는 그것이 '친구끼리' 나누는 가벼운 대화였다고 주장했으나, 택시 기사가 나타나는 바람에 들통이 나고 말았다.

어느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후보는 유독 검찰 출신을 좋아한단다. 가령 박근혜 후보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쇄신 드라마의 핵심인 '정치쇄신특위'의 경우, 위원의 절반가량이 검찰 출신이라고 한다. 특위의 위원장 역시 물론 검찰 출신 안대희 전 대법관이다. 게다가 4·11 총선 때 당시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은 것도 검사장 출신의 정홍원 변호사. 이 분은 결국 현영희 의원 공천헌금 의혹으로 구설수에 올랐다.('무차별 영입한 檢출신…선무당 되나' 문화일보 2012/0907) 

하지만 이보다 더 고약한 사정이 있다. 현재 박근혜 주변에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주도한 검사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뉴스 타파'에 따르면, 유서대필 조작을 주도한 검사들 중에서

김기춘 검사는 현재 박근혜 후보의 측근인 '7인회' 멤버로 활동 중이다. 강신욱 당시 강력부장은 대법관을 지내고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에서 법률지원특보단장을 역임했다. 남기춘 검사 역시 박근혜 캠프에서 클린검증 소위원장을 맡았고, 광상도 검사는 박근혜 후보의 '싱크탱크'로 알려진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에 참여했다. 윤석만 검사는 올해 대전지역에서 새누리당 예비후보로 출마했으며, 현재 박 후보를 지지하는 외곽 조직에 있다. 임철 검사는 2008년 총선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한국판 '드레퓌스사건' 검사들이 왜 박근혜 캠프에… 미디어오늘 2012.09.01) 

최근 박근혜 후보는 최근 과거사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그 사과와 반성에 진정성이 있다면, 5공의 연장인 노태우 정권 하에서 벌어진 인권유린에 대해서도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 

박근혜 후보에게는 새로운 인물의 '더하기'보다 기존 인물들의 '빼기'가 더 시급해 보인다. 한 젊은이의 인생을 망쳐놓은 파렴치한 공작정치와 사법범죄의 주체들을 그냥 놔둔 채 과연 '국민대통합'을 운운해도 되는 것일까? 이 문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정준길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대선기획단 공보위원이 6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금태섭 변호사(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측)에게 전화를 걸어서 안 원장의 뇌물비리와과 여자문제 폭로를 협박하며 대선불출마를 종용했다는 금태섭 변호사의 폭로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친박계 김재원 대변인은 임명장을 받기도 전에 사퇴했다.


실언, 망언, 폭언의 차차차 

또 다른 문제는 박근혜 캠프의 양식을 의심케 만드는 망언 퍼레이드. 시발은 인혁당 관련한 박근혜 후보의 언급이었다. 먼저 친박 좌장 홍사덕 전 의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유신을 한 게 아니라 수출 100억 달러를 넘기기 위해 한 것이다" 박근혜 캠프의 정치발전위원인 박효종 교수. "1960년대 초의 참담한 상황과 비교하면 지금은 상전벽해다. 당시 상황을 불가피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결코 부적절하지 않다." 이들의 망언은 결국 정몽준 의원의 타박을 받고 만다. "국민을 돼지로 아느냐?"

압권은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의 망언이다. 그는 과거사의 청산을 요구하는 국민을 아예 간첩으로 만들어 버린다. "역사를 쓰는 일에만 몰두해서 과거로 발목잡기를 하는 세작들이 있지만, 역사를 만들어온 사람들은 새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오늘을 허비하지 않는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박근혜 후보의 '입' 노릇을 하는 김병호 공보단장의 망언이다. "유신 자체를 기준으로 한다면 당시 가족들은 물론 지금까지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모두 사과해야 한다." 한 마디로, 일일이 사과할 필요 없다는 얘기다.
후보의 입 노릇을 하는 공보단에서 협박에 이어 망언까지 늘어놓자, 박근혜 후보는 부랴부랴 공보단장과 대변인을 교체한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이정현 공보단장-김재원 대변인'으로 이루어진 투톱 시스템. 한 마디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김재원 대변인-이정현 공보특보' 라인이 부활한 셈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회전문 인사는 그 자체가 "새누리당과 박 후보 측 인재풀의 협소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복심' 이정현, 새 공보단장으로 복귀. 경향신문 2012.09.23)하지만 이 새로운 공보 라인도 오래 가지 못했다. 김재원 대변인은 임명장도 받기 전에 기자들에게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폭언을 퍼부어댔다. "야, XX들아. 이렇게 한다고 너네들이 특종을 할 것 같냐. 너희가 정보보고 하는 게 우리한테 다 들어온다." 

구원투수가 더 심한 폭투를 한 셈이다. 결국 그는 임명장도 받기 전에 사퇴를 하고 만다. 흥미로운 것은 19대 국회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새누리당 대변인들이 줄줄이 낙마를 했다는 점이다. 김영우, 홍일표, 김재원. 여기에서 박근혜 캠프의 난맥상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박근혜 후보가 김무성 전 의원을 공동선대위장에 준하는 요직에 임명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뜬다. 친박 좌장 홍사덕 전 의원이 비리와 망언으로 낙마하자, 돌아온 탕자를 끌어 안으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기사 바로 아래 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은 6월 항쟁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발언했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6월 항쟁의 현장에서 찍힌 노 전대통령의 사진은 합성이나 연출이라 주장할 작정인가? 박근혜 캠프의 실언, 망언, 폭언의 퍼레이드는 멈출 줄을 모른다. 
과연 이들이 집권해도 나라는 안녕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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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꺾인 '선거의 여왕', 다시 날 수 있을까

'제가' 실패로 '치국' 한계 보여준 박근혜

혼란에는 두 가지 근원이 있다. 하나는 보수의 정체성 위기. 박근혜 캠프는 선거를 위해 보수당으로서 '정체성'을 포기했다. 거리에 나붙은 새누리당의 붉은색 플래카드는 색깔이나 구호가 진보신당의 그것과 똑같다. 얼마나 우스운가? 

둘째, 리더십의 위기다. 박근혜가 대선후보가 된 것은 그녀에게 특별한 리더십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워낙 인기 없는 정권을 재창출하는 유일한 길은 그나마 계파 갈등 때문에 정권과 거리를 유지했던 그녀를 내세우는 것뿐. 박근혜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보수층의 '마지못한 선택'일 뿐이다. 그러니 내부에서 권력의 배분을 둘러싸고 잡음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한 일. 

박근혜의 꺾인 두 날개 

 

먼저 첫 번째 요인부터 살펴보자. 대권을 향해 비상하는 박근혜의 양 날개는 '경제개혁'과 '정치쇄신'이었다. 전자를 위해 박 후보는 김종인을 영입했고, 후자를 위해서는 안대희를 내세웠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당무를 거부하고 있다. 한 마디로 양 날개가 꺾일 위기, 장기에 비유하자면 '차' '포'를 떼야 할 상황이다. 현재 김종인은 이한구 원내대표의 사퇴를 요구하고, 안대희는 한광옥의 국민통합위원장 임명에 반대한다.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이한구와 한광옥을 내쳐야 할 상황이다. 설사 이들을 내친다 하더라도, 박근혜가 던지는 대선 메시지의 진정성은 이미 크게 손상된 상태다. 

한광옥을 내칠 경우 박근혜의 '대통합' 행보에는 바로 제동이 걸리게 된다. 삼고초려 끝에 억지로 모셔온 인물(?)마저 제 필요에 따라 내친다면, 누가 기꺼이 그 캠프에 가려고 하겠는가? 이미 정치적 의미를 잃은 인물을 영입한 것 자체가 박근혜판 대통합 행보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러잖아도 박 캠프는 외부인사 영입에 난항을 겪어 왔다. 장하준·정태인·김지하·김성녀·김용택·손숙·김재범. 어디 잡음이 일지 않은 적이 있던가? 젊은 세대를 향한 행보에도 제동이 걸렸다. 최불암·이순재·노주현. 이 세 분의 연세를 합치면 무려 200세가 넘는다.

어차피 한광옥은 민주당에서도 버린 카드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칠 수도 있을 터이나, 문제는 이한구. 그는 원내대표라는 직함이나 친박 그룹 내에서의 위상 때문이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인 의미에서 '문제적' 개인이다. 그의 뒤에는 재계가 서 있기 때문이다. 김종인이 누차 지적했듯이 그는(실질적이든, 혹은 상징적이든) 새누리당과 한국의 재계를 연결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를 퇴진키는 것은 재계와 새누리당의 고리를 쳐냄으로써 새누리당의 가장 중요한 지지기반 자체를 뒤흔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 효과는 조중동과 경제지들의 논설로 당장 나타날 게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지난 5일 오전 새누리당 당사 회의실에서 열린 대통령선거대책기구 임명장 수여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은 안대희 정치쇄신특위 위원장, 오른쪽은 김종인 국민행복특위 위원장.


대통합에서 대봉합으로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이명박 정권의 실정과 거리를 두기 위해 박근혜가 애초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이다. 즉 보수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 '진보 코스프레'에 들어간 것 자체가 오류였다. 현재 박근혜 캠프는 '김종인의 옷을 입은 이한구'라고 할 수 있다. 이한구의 입장에서는 김종인의 요구가 '몸을 옷에 맞추라'는 소리로 들릴 게다. 이게 가당키나 한가? 하지만 선거를 치르려면 여전히 옷이 필요하다. 최선의 방법은 옷이 옷의 주제를 알고 좀 가만히 있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옷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을 '몸'으로 삼을 거라는 약속을 믿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정치쇄신도 마찬가지. 현영희·홍사덕·송영선 등 연쇄적으로 터진 비리 사건이 보여줬듯이, 박 캠프는 사실 정치쇄신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이렇게 주체와 대상이 일치하다 보니, 자기가 제 몸을 자르는 연쇄 '출당' 사태가 이어진 것이다). 이를 가리려 안대희를 내세워 '쇄신 코스프레'를 하려 했으나, 그것으로 친박의 알몸을 가릴 수는 없었다. 캠프가 썩었으니 밖에서라도 데려와야 하는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다. 그래서 억지로 모셔온 것이 고작 비리혐의로 인해 민주당에서 내다 버린 한광옥. 안대희라는 옷은 한광옥이라는 단추가 제 스타일을 구긴다고 본 것이다. 

애초에 박 캠프는 보수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운데에 이명박 대통령의 실정으로 인한 문제를 수정하는 방향으로 나갔어야 한다. 도대체 길거리에 나붙은 플래카드를 보라. 재계를 등에 업은 당이 저 '시뻘건' 공약들을 무슨 수로 이행한단 말인가? 게다가 정치쇄신을 외칠 거라면, 애초에 캠프를 구성할 때부터 쇄신을 실현했어야 한다. 이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안 캠프로 간 김성식 전 의원의 행보다. 그가 새누리당을 떠난 것은 곧 '박근혜 대표 하에서는 새누리당의 쇄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성식 전 의원의 행보가 박 캠프에 뼈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종인이나 이한구, 안대희나 한광옥, 어느 쪽을 내치든 박 캠프는 결정적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남은 길은 옷과 몸을 적당히 '봉합'하는 길뿐. 밖으로 '대통합'에 나섰던 박근혜 캠프가 이제 안으로 '대봉합'에 나설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이한구를 선대위에서 배제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그가 원내대표로서 새누리당의 정책 브레인으로 남아 있는 한, 김종인이 원하는 경제민주화는 요원한 일이다). 하지만 설사 봉합에 성공한다 해도, 박근혜의 두 날개는 밀랍도 아니고 딱풀로 간신히 몸에 붙여 놓은 가짜 날개임이 이미 드러났다. 그 날개로는 하늘을 날 수가 없다. 

 

 

 


또 하나의 뇌관 

 

또 하나의 뇌관은 권력 다툼이다. 경선이 끝났지만, 박근혜 후보는 경쟁자였던 이재오와 정몽준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재오는 애초에 '박근혜 필패론'이 소신이기에 대권보다는 개헌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양이다. 정몽준의 경우 박근혜를 만났으나 선대위 참여에 확답을 주지 않았다. 대선에서 박 후보를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겠다는 뜻을 피력한 셈이다.

유력한 두 주자가 캠프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거나 주저하는 것은 당연히 박근혜 캠프가 자신들이 몸담을 만한 곳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리라. 사실 새누리당은 박근혜의 사당(私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거기에 친이계와 친박계의 오랜 갈등이 존재한다. 정권의 실정으로 민심이 땅에 떨어지자, 새누리당은 박근혜에게 전권을 줄 수밖에 없었다. 박근혜는 정권과 어느 정도 거리를 뒀고, 그만큼은 실정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다(심지어 항간에는 '박근혜가 돼도 정권교체로 간주하겠다'는 분위기가 존재할 정도였다). 

친이와 친박은 같은 당이면서도 준(準) 여당과 준 야당만큼의 거리가 존재한다. 비박계로서는 박근혜가 '우리 후보'가 아니라 마지못해 선택할 차악일 뿐. 당내에서 지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녀와 거리를 두는 게 차차기를 위해 나을 수도 있다.

게다가 친박 내에도 갈등이 존재한다.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만 기용한다는 박근혜의 용인술은 친박 내에서도 산삼-장뇌삼-도라지라는 해괴한 골품제를 낳았다. 비박과 친박의 갈등에 맞물려, 이른바 '근박'(近朴)과 '원박'(遠朴)의 갈등이 존재한다. 거기에 '월박'과 '복박'이라는 귀순용사들, '주이야박'이라는 빨치산 용사까지 가세해 어지러운 아귀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이 어지러운 '잡박'(雜朴)들의 싸움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아드 상크툼(ad sanctum). 한 마디로 성스러운 것에 더욱더 가까이 가기 위한 경쟁이다. 성녀에 가까울수록 권력도 커지기 때문이다. 

친박 성골이 박근혜 후보의 귀를 막았다는 새누리당 쇄신파들의 요구는 정당하다. 그들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경직된 태도를 보여 후보를 위기로 몰아넣고, 자신들의 손에 권력을 독점하여 당의 단합을 깨뜨렸다. 하지만 새누리당 쇄신파들의 문제는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데 있다. 그들을 2선으로 물려봤자, 결국 자질과 도덕에 비슷한 문제를 가진 이들이 그 자리를 채울 테니까. 다만 '앞으로 권력을 분점하겠다'는 후보의 의사를 확인하는 성과 정도랄까? 사실 문제의 근원은 박근혜 후보 자신이다. 하지만 후보를 갈 수는 없는 일. 그것이 새누리당의 실존적 딜레마다.

시험대에 오른 박근혜 

 

선거를 앞두고 캠프가 이런 대혼란의 상태에 빠져든 것은 박근혜의 리더십이 정상적으로 얻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박근혜에게서 검증된 것은 '선거의 여왕'이라는 점뿐이다. 그녀는 하다못해 구청장을 해본 경험도 없다. 그녀는 자신의 오랜 정치적 경험을 자랑하나 의원으로서 그녀의 입법 실적은 입에 담기 민망할 정도로 참담한 수준이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경제적 활동을 해 본 경험도 없다. 정수장학회, 영남대 이사장 등 주로 부모의 유산으로 그동안 먹고 살아왔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 역시 아버지 후광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박근혜의 리더십이 당내에서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것이다. 선거형 리더십과 통치형 리더십은 전혀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성공적으로 선거를 치르는 것과 안정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통치도 아버지·어머니 후광으로 할 것인가? 생각해 보라. 역대 대선에 그 어떤 캠프가 슬로건 자체를 놓고 논란을 벌였던가. 역대 대선에서 어떤 캠프가 선거 전부터 저런 권력 투쟁을 겪었던가. 역대 대선에서 그 어떤 캠프가 몇 달 만에 집권 몇 년치의 비리 실적을 올렸던가. 박근혜를 바라보는 불안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박근혜 후보는 쇄신요구를 일축했다. 선거를 앞두고 더 이상 혼란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설사 그녀가 쇄신의 요구를 수용한다 해도, 애초에 인적 대안이 없기에, 그 조치는 '정치쇄신'보다는 '이익조정'에 가까울 게다. 옛말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했다. 박근혜의 리더십은 '제가'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그동안 박 캠프의 일정은 거의 재난사고의 기록이었다. 캠프를 그 지경으로 끌어온 후보에게 과연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맡겨도 될까? 저 후보에 저 캠프라면 국가를 총체적 파국으로 이끄는 데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안철수 후보는 대한민국을 "궤도를 벗어난 아폴로 13호"에 비유했다. 과연 대한민국이라는 우주선은 지구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을까? 박근혜의 리더십이 그런 것이라면, 그녀가 선장이 될 경우 아폴로 13호는 화성을 지나치고, 목성을 지나치고, 토성을 지나쳐서 영원히 우주의 유령선이 되고 말 것이다. 

 

2012.10.9 / 오마이뉴스 /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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