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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과학, 기술, 환경

한국 호랑이의 멸종

by Wood-Stock 2010. 1. 6.

한국호랑이는 언제, 왜 사라졌을까

 

마지막 포획·유일 표본 뒤쫓아 ‘멸종사’ 확인
총독부 호랑이 표범 곰 등 싹쓸이 사냥 기록
 
Untitled-2 copy.jpg‘1979년 12·12사태’로 정국이 뒤숭숭하던 1980년 1월24일 석간 <동아일보> 사회면에 눈이 번쩍 뜨이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산 호랑이가 나타났다-57년 만에 경북 산속서 등산객 촬영’이란 제목의 이 기사는 서울에서 의상실을 하는 한 남자가 친구와 경주 부근 대덕산에서 등산을 하다가 절벽 위에서 한국산 호랑이 컬러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다는 내용이다. ‘반세기만의 진객 백수의 왕’이란 제목이 달린 사진엔 호랑이의 “늠름한” 모습이 또렷했다.
 
산림청은 혹시 이 호랑이가 밀렵꾼에게 당할까 봐 긴급 보호조처에 나서는 등 법석을 떨었지만 낭보는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코미디로 드러났다. 서울대공원의 벵골호랑이를 찍은 것임을 대공원 직원과 동물학자들이 확인한 것이다.
 
동아일보 오보 철석같이 믿고 무작정 한국행
 
그런데 이런 해프닝의 전말을 모르는 한 여행 가이드는 일본인 관광객에게 한국호랑이가 발견됐다는 이야기를 했고, 이 이야기는 마침내 일본의 동물작가인 엔도 키미오한테 전달됐다.
 
<한국의 호랑이는 왜 사라졌을까>(엔도 키미오 지음·이은옥 옮김/한국학술정보/1만5천원)는 한국 유력지의 오보를 철석같이 믿고 무작정 한국을 방문한 뒤 여러 해에 걸쳐 한국호랑이 관계자를 만나고 자료를 뒤진 엔도 키미오의 취재기록을 담은 르포이다.
 
Untitled-1 copy.jpg호랑이는 단군 신화에서부터 등장하면서 한국인의 의식 깊숙이 자리 잡은 동물이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은 “우리 조상은 이런 호랑이를 좋으면서 싫어하고, 무서워하면서 우러러보았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의 상징이었던 호돌이와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기아타이거스의 마스코트가 친숙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호랑이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국호랑이가 남한에서 사라진 사실쯤은 모두 알 테지만, 마지막 한국호랑이가 언제 어디서 잡혔으며, 멸종의 길로 들어선 것은 언제, 무엇(누구) 때문인지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남한에 하나밖에 없는 한국호랑이의 표본은 어디에 있으며, 그 호랑이는 어떻게 잡혔고 지난 100년 동안 이 땅에서 잡힌 호랑이와 표범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이는 드물 것이다. 호랑이를 좋아하고 이용하려고만 했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알려고 하지 않은 언론인을 포함한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길이 2·5m, 몸무게 153㎏ 확인…“일제의 무서운 폭력 사죄”
 
이 모든 일을 20여 년 전부터 묵묵히 한 이가 바로 일본인 엔도 키미오 일본야조회 명예회장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호랑이 멸종 뒤편에 일제의 무서운 폭력과 무자비함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일본인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를 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1986년 출간된 이 책은 지은이가 1908년 전남 영광 불갑산에서 1908년 잡혀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박제로 남아있는 한국호랑이와,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남한에서 마지막으로 잡힌 호랑이를 집중 추적한다. 또 서울대 도서관과 남산 국립도서관의 옛 자료를 뒤져 일본 강점기 때 호랑이 포획 실태에 관한 귀중한 통계자료를 찾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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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한국말과 친구인 원병오 경희대 명예교수에 기댄 그는 꼼꼼한 관찰력과 예민한 감수성, 집요한 취재력으로 한국의 어떤 언론인도 해내지 못한 한국호랑이의 멸종사를 그려내고 있다.
 
상세한 포획기록이 남은 마지막 한국호랑이는 1921년 10월 경북 경주 대덕산에서 사살됐다. 지은이는 이 호랑이에게 물려 큰 부상을 입은 김유근(타계)씨 등 마을 사람들을 인터뷰해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했다.
 
김씨와 다른 마을 청년 몇은 추석을 앞두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지게를 진 채로 정면에서 달려든 호랑이의 공격을 당했다. 지게가 부서질 정도의 위력이었지만, 김씨는 지게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마침 일본 왕실의 귀족이 경주를 방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마을의 미야케 순사는 도로공사를 하던 조선인 수백 명을 몰이꾼으로 동원해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산등성이로 쫓기던 호랑이는 목을 지키던 포수의 총탄 두 발에 거꾸러졌다. 길이 2.5m, 체중 153㎏의 큰 덩치였다. 호랑이 가죽은 일본 왕실에 헌상됐다. 당시 초등학생을 위한 일본말로 된 ‘국어교과서’에는 이 충성심 깊은 순사의 이야기가 실려있음이 확인됐다. 한국의 마지막 호랑이는 일본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북돋기 위해 쓰인 것이다.
 
헌병 등 총동원, 호랑이 24 표범 136 곰 429 늑대 228 마리 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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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유달초등학교에 남아있는 한국호랑이 표본은 1908년 영광 불갑산에서 주민들에게 잡힌 것이다.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창으로 찔러 죽인 주민들은 이 호랑이를 들쳐메고 며칠을 걸어 부유한 일본인 상인들이 많은 목포에 도착해 우여곡절 끝에 팔게 된다. 다다미 상인 쇼지로는 이 호랑이를 구입해 일본에서 박제한 뒤 당시 일본인 학교였던 유달초등학교에 기증한다.
 
그가 서울대 등에서 발굴한 조선총독부의 각종 통계자료는 충격적이다. 일제는 주민이나 가축에게 피해를 주는 호랑이, 표범, 곰, 늑대 등 ‘해로운 짐승’을 구제하는 사업을 1910~1920년대에 걸쳐 대대적으로 펼쳤다. 피해 신고를 받으면 주민을 몰이꾼으로 동원해 사살하는 방식이었다.
 
<조선휘보>는 1915년 호랑이에 물려 죽은 사람이 한반도 전체에서 8명, 1916년에는 일본인 1명 포함해 3명으로 기록했다. 일본인은 사냥하다 역습을 받아 사망했을 것이다. 1915년 늑대에 물려 죽은 사람이 113명으로, 호랑이나 표범보다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와 눈길을 끈다.
 
‘해수’를 구제하기 위해 1915년 경찰과 헌병 3321명, 사냥꾼 2320명, 몰이꾼 9만 1252명이 총 4220일 동안 동원됐고 호랑이 11마리를 죽였다. 그 밖에도 표범 41마리, 곰 261마리, 늑대 122마리 등이 잡혔다. 이듬해에도 4만여 명이 동원돼 호랑이 13마리, 표범 95마리, 곰 168마리, 늑대 106마리를 퇴치했다. 요즘이라면 한 마리가 나타나도 반가울 대형 포식동물이 해마다 수백 마리씩 사라진 것이다.
 
총독부 자료를 보면, 대덕산 호랑이가 죽은 뒤에도 남한의 호랑이는 계속 잡힌 것으로 나온다. 1924년 전라남도에서만 6마리의 호랑이가 포획됐다. 해마다 2~3명이 호랑이에 물려 목숨을 잃었다는 통계도 나온다.
 
1933년부터 1942년까지 잡힌 호랑이는 8마리, 표범은 103마리였다. 그러나 1933년부터 호랑이가 붙잡힌 곳은 모두 함경북도 등 북한이었다.
 
흥미로운 건, 남한에서의 호랑이 피해는 계속됐다는 것이다. 1936년 경북과 충북에서, 1942년엔 경남에서 호랑이에 물려 죽은 사람이 보고돼, 이때까지도 남부지방에 호랑이가 살아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조선시대도 정2품 장수 두고 왕이 직접 챙기며 포획 독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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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말살한 책임은 일제에 있는 걸까. 이항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이 책 기획편집 후기에서 “호랑이 절멸의 책임을 일제 탓만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이 결정타를 가했지만, 이미 호랑이 개체수는 체계적인 호랑이 포획 정책을 편 조선시대 동안 급감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가정하더라도 우리는 이 땅에서 호랑이가 살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으로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적었다.
 
지난 15일 열린 국제 학술대회 “호랑이의 삶, 인간의 삶”에서 김동진 한국교원대 교수는 조선은 성리학의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호랑이를 적극적으로 포획하고 살상해 사람과 호랑이 사이의 생태적 균형이 무너졌다고 밝혀다. 조선 초기 논으로 개발된 저습지는 호랑이가 주로 살던 곳이어서 대규모 호환이 일어났고, 백성 보호와 굶주림을 막기 위해 국가가 나서 체계적으로 호랑이를 잡았다는 것이다.
 
조선은 호랑이를 잡은 사람에게 적병을 베는 것에 버금가는 상을 내려 호랑이 사냥은 출세의 지름길이 됐고, 일정 수 이상의 호랑이와 표범 가죽을 진상하게 하고 전국의 포호 성과를 국왕이 직접 챙겼다. 백성을 사랑하는 왕의 마음이 범에게는 죽음을 가져온 것이다.
 
게다가 ‘착호갑사’라는 호랑이 포획 전문 병종을 만들고, 호랑이 포획활동을 전문적으로 지휘하는 정2품에서 정3품에 해당하는 장수인 착호장을 두는 등 제도를 정비했다. 또 포획기술의 개발과 보급에도 힘썼다. 조선 후기에 도입된 조총도 범의 포획을 가속했다. 그 결과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최상위 포식자는 호랑이에서 늑대로 교체됐다고 김 교수는 주장했다.
 
이제 한국 호랑이의 흔적은 극동 러시아에 살아남은 시베리아호랑이(아무르호랑이)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됐다. 이항 교수는 “호랑이와 전혀 무관한 유럽과 미국의 젊은이가 호랑이 보전을 위해 애쓰고 있는데 거기에 한국인은 없다”며 호랑이 보전을 위한 관심과 참여를 촉구했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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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호랑이 과연 살아있을까

 

별도 아종으로 분류 기회없이 아무르호랑이로 통합
한 집단 생존에 경기도 면적 숲 필요…남한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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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띠해가 다가오면서 다시금 한국범에 관한 핵심적 질문이 나온다. 남한에 한국호랑이나 표범이 과연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는가, 라는 질문과 도대체 한국호랑이란 것이 존재하긴 하나, 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한국범보존기금이 9일 환경재단 레이첼카슨 홀에서 연 ‘한국범 복원의 길’ 토론회에서 범 전문가들이 답을 내놓았다. 한 마디로 ‘한국범은 있다, 그러나 남한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노력한다면 먼 미래에 한반도 남쪽까지 한국범을 복원할 수는 있다. 
 
아무르호랑이와 차이 없지만 더 넓고 뚜렷한 줄무늬 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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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한국범, 너는 누구인가”라는 발제에서 한국범의 의미와 기원, 분류를 소개했다. 그는 민화 등 수많은 기록에서 드러나듯 범이란 말은 호랑이와 표범을 모두 아우르는 뜻으로 사용됐지만 현대에 들어와 호랑이만을 가리키는 말로 좁아졌다고 설명했다.
 
분류학에서는 호랑이를 8개의 아종으로 나누는데, 이들의 공통조상은 인도차이나 북부와 중국 남부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와 극동 러시아, 중국 동북부에 서식하는 호랑이는 한국호랑이, 동북호, 시베리아호랑이(서식지가 시베리아와 무관하므로 러시아에서는 학술명칭인 아무르호랑이로 부름) 등으로 불리지만 모두 아무르호랑이 아종에 속한다.
 
Untitled-3 copy.jpg그렇다면 한국호랑이와 아무르호랑이는 정말 같은 아종일까. 이 교수는 최근 야생동물유전자자원은행과 국립생물자원관이 박물관에 보관된 한국호랑이 표본을 이용해 실험한 결과 둘 사이에 거의 유전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예비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한국호랑이=시베리아호랑이=아무르호랑이란 등식이 성립한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한국호랑이가 막연히 우리 것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의 소산은 아니다. ‘한국호랑이’란 이름의 족보를 따져보자. 1844년 네덜란드 동물학자 콘라드 제이콥 테밍크가 아무르호랑이를 새로운 호랑이의 아종으로 학계에 발표할 때 그 기준표본을 포획한 곳은 한반도였다.
 
그후 브라스란 학자는 1904년 한국의 호랑이가 아무르호랑이보다 넓고 뚜렷한 줄무늬가 있고 붉은 빛깔이 도는 작지만 매우 아름다운 가죽을 지니고 있다는데 착안해 ‘한국호랑이’라는 별개의 아종으로 기재했다.
 
한반도서 호랑이 포획 개체수 급감…사진으론 1924년이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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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사투닌이라는 러시아 학자는 1915년 한국호랑이란 아종의 이름을 ‘코리엔시스’에서 ‘미카도이’로 바꾸었는데, ‘미카도’는 일본 천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어쨌든 한국호랑이란 아종명은 1965년까지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의 국제무역에 관한 협약(CITES)’목록에 올라 있었다가 나중에 아무르호랑이로 통합됐다. 이항 교수는 “한국 호랑이를 별도의 아종으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한지 세밀하게 검토하고 확인할 기회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렇지만 호랑이나 표범의 발자국을 봤다는 목격담은 끊이지 않는다. 최현명 와일드라이프 컨설팅 대표는 이날 ‘한국범의 발자국-남한에 범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있는가’란 발제에서 이 논란거리에 대한 답변을 시도했다.
 
그는 목격담의 진위를 따지기에 앞서 과연 호랑이가 생존할 조건이 갖춰져 있는지를 물었다. 암컷 아무르호랑이 한 마리를 부양하려면 지리산 국립공원 면적과 비슷한 450㎢의 숲이 필요하다. 호랑이가 대를 이어 번식할 50마리의 집단이 살려면 경기도 전체 면적의 숲이 필요하다. 남한에 호랑이가 살아갈 만한 땅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했다는 것이 부정적 답변의 두 번째 이유이다.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잡힌 수는 1920년대 연간 6.1마리에서 1930년대 연간 1.9마리로 줄었다. 남한에서는 강원도 횡성에서 1924년 잡힌 것이 사진으로 남은 최후의 개체였다.
 
표범 목격담은 사실일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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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포획기록이 1964년, 1965년, 1974년, 1987년에 있고 2000년에도 함남 부전군에서 발자국이 발견됐다는 보고가 있지만 정확한 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최씨는 “생존하고 있더라도 몇 마리에 불과할 것이며, 어쩌면 중국 쪽 호랑이와 중복 계산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그는 남·북한이 통일되어 호랑이가 한반도를 자유롭게 왕래하게 되더라도 현재의 개발수준에서 남한에 고정적인 호랑이 집단이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최씨는 “북한에서 영역을 확보하지 못한 호랑이가 남하해 떠돌아다니다 북상하거나 멧돼지 올가미에 걸려 죽는 일은 있을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예측했다.
 
아무르표범에 관한 최씨의 전망 역시 비관적이지만 호랑이보다는 정도가 덜하다. “많은 목격담 중 몇 건은 표범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증거는 발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표범은 1970년 경남 함안군 여항산에서 잡힌 것이 최후의 기록이니까, 호랑이보다는 반세기 가량을 더 버틴 셈이다. 1947년부터 1970년까지 모두 15마리가 잡혔는데, 이 가운데 8마리가 올무나 덫에 걸린 것이다. 최씨는 “쌀 수십~수백 가마의 값을 받을 수 있는 표범이 뒷산에 있다면 필사적으로 잡으려 했을 것”이라며 “실제로 1970년대 후반까지 법적으로는 표범을 분기마다 1마리씩 수렵하는 것을 허용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범을 복원하는 길은 무얼까. <밀림이야기-시베리아호랑이 3대의 죽음> 등 지난 10년 동안 호랑이 자연다큐를 만들어온 박수용 <교육방송>(EBS) 피디는 “한국호랑이와 동일종인 아무르호랑이 450여마리가 살아 있는 러시아 극동지방을 보전하는 것이 한국호랑이를 지키는 최선의 길”이라며 “최근 호랑이 발자국이 발견된 북한 쪽 호랑이 서식지에 대한 한국 연구자들의 조사연구 지원도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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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호랑이 부활, 러→중→한반도 ‘길닦기’에 답 있다

 

“시베리아·한국 호랑이 유전자상 거의 같은 종, 테알린 산맥~백두대간 생태축 복원이 길”

 

국제 동물보호단체 보고서

 

한반도에 호랑이가 돌아올 수 있을까? 숲이 파괴되면서 남한에 호랑이가 살아갈 공간이 사라졌지만, 호랑이 복원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한반도 호랑이 복원’을 위해 전문가들이 먼저 주목하는 곳은 러시아 ‘시호테알린 산맥 생태계’다. 이곳에는 현재 500마리 안팎의 시베리아호랑이가 살고 있다. 만약 이 지역 호랑이들이 이웃한 중국 ‘창바이산 생태계’에 남아 있는 10여 마리의 호랑이와 생태적으로 연결된다면, 북한을 통해 한반도로 호랑이가 돌아올 가능성이 열린다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세계야생생물기금(WWF)과 야생동물보호협회(WCS) 등은 지난달 공동으로 내놓은 ‘창바이산 생태계의 호랑이 서식 가능 지역 확인’ 보고서에서 “창바이산 지역에 호랑이의 안정적인 서식 공간을 만들어 서식공간을 넓히는 것이 시베리아호랑이 보전의 핵심 과제”라고 지적한 것으로 7일 확인됐다. 창바이산 생태계는 중국 지린성, 헤이룽장성 지역으로, 과거 ‘한국호랑이’가 호령했던 곳이다. 보고서를 발표한 이들 단체는 중국 동북부에서 호랑이 보전 활동을 벌이고 있는 세계적 동물보호단체들이다.

 

시베리아호랑이는 유전학적으로 과거 한반도를 무대로 뛰어놀던 한국호랑이와 거의 흡사하다. 이항 서울대 교수(수의학)는 “아직 연구가 진행중이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유전 데이터를 보면 한국호랑이와 시베리아호랑이는 거의 같은 종”이라고 말했다.(표 참조)

 

 

문제는 창바이산 지역의 호랑이들도 생태적인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단체는 보고서에서 “창바이산 지역에 서식하는 호랑이는 10여마리뿐이라 안정적인 번식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창바이산 지역 생태계에 훈춘, 왕칭 등 몇몇 핵심 서식 가능지역을 조성하고, 여기에서 이웃한 시호테알린 산맥 생태계와 연결하는 ‘생태통로’를 만든다면 이 지역의 호랑이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 비교적 안정적인 무리가 분포하는 시호테알린 산맥 지역의 호랑이가 중국 접경지역으로 왕래하는 흔적이 발견됐다고 동물보호단체들은 전했다. 호랑이는 다 자란 수컷의 경우 혼자서 서울보다 넓은 활동영역을 누비고 다닐 정도여서 생태계 연결이 불가능하지 않다.


이처럼 중국 동북부에 안정적인 규모의 호랑이 무리가 정착하면 백두대간을 통한 한반도의 호랑이 부활도 꿈만은 아니다. 최태영 국립환경과학원 연구사는 “남북한에 걸쳐 있는 백두대간은 중요한 생태축으로서 백두산을 정점으로 중국을 거쳐 러시아 시호테알린 산맥으로 이어진다”며 “이런 계획이 현실화하려면 이 지역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한·중국·러시아 등 각국 정부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녹색연합은 오는 9일 오후 1시 서울 정동 환경재단 레이첼카슨룸에서 <한겨레>와 환경부 후원으로 ‘한국호랑이 보존을 위한 토론회’를 열어, 관련 전문가들이 호랑이의 생태학적 복원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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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한국 호랑이 싹쓸이, 새끼까지 박제로 떴다

정호군 동원해 사냥하고 시식회까지… 국내 첫 공개, 교토 도시샤 중고교에 소장중 확인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사냥한 조선 호랑이와 표범 박제가 22일 오전 국내 언론에 최초로 공개됐다.


이날 미디어오늘이 김영준(혜문 스님)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를 통해 입수한 호랑이 박제 사진은 일제 강점기 일본 자본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1873~1927·무역상사 송창양행 사장)가 ‘정호군(征虎軍)’을 꾸려 한반도에서 사냥한 호랑이다.


야마모토는 해당 호랑이의 고기로 서울과 도쿄에서 시식회를 열었고, 가죽은 자신의 모교인 도시샤 대학에 기증했다. 호랑이 가죽은 박제돼 현재는 교토에 위치한 도시샤 중·고등학교에 소장돼 있다. 호랑이와 표범이 남한에서 멸절됐기 때문에 도시샤 측에서 한국에 반환할지 여부가 주목된다.



▲ 22일 일본 교토 도시샤 중고등학교에 소장된 호랑이 박제가 김영준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혜문)를 통해 국내 언론에 공개됐다. 호랑이 길이는 총 3m, 높이 80cm 가량으로 꼬리만 1m가량이다. 사진=혜문 제공



▲ 새끼호랑이와 대호가 한마리씩 있는데 사진은 그 중 새끼호랑이. 사진=혜문 제공



▲ 22일 일본 도시샤 중고등학교에 소장된 조선 대호 뼈(왼쪽)와 조선 표범 뼈 골격이 공개됐다. 사진=혜문 제공


현재 도시샤 중학교에는 호랑이 2마리(대호, 새끼호랑이)와 표범 2마리가 있다. 이는 교토의 시마즈 제작소에서 박제해 전부 유리상자에 보관돼 있다. 김 대표는 “전남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있는 호랑이 박제와 비교하면 도시샤 박제는 모피 퇴색도 거의 없어 보관상태가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이번에 공개된 호랑이 박제는 야마모토가 호랑이 사냥을 위해 모집·기획한 정호군을 통해 사냥한 두 마리의 대호 중 하나다. 그는 다른 한 마리를 당시 일본 왕자에게 기증했다. 야마모토가 당시 활동을 정리한 책 ‘정호기’에 따르면 조선 호랑이 사냥은 일본 사나이의 기개를 보이고, 식민지 조선의 혼을 상징하는 호랑이를 잡으며 제국주의 야욕을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야마모토의 정호군은 1917년 11월10일부터 한 달간 사냥꾼 24명, 몰이꾼 약 150명을 8개 반으로 나눠 함경남북도와 강원도, 전라남도 등 4개 지역에 배치해 호랑이를 사냥했다. 호랑이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은 야마모토는 자신의 정호군 수렵활동을 담은 책 ‘정호기’를 통해 이같은 내용을 밝혔다. 야마모토의 정호군은 영화 ‘대호’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의 해수구제사업


야마모토의 정호군 배후에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군사통제권을 제외한 행정, 사법을 통괄하던 직책) 야마가타 이사부로가 있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해로운 맹수로부터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호랑이, 표범, 곰, 늑대 등을 사냥했다. 당시 일제의 영토가 된 한반도에 호랑이 등 맹수의 습격은 일본인에게 위협적이었다.



▲ 정호군이 사냥한 호랑이 두마리. 왼쪽이 한마리를 사냥한 포수 최순원. 오른쪽이 정호군을 창설한 야마모토 다다사부로. 그의 손에 사냥총이 들려있지만 실제로 사냥을 하지는 않았다. 사진=에이도스 제공



▲ 정호군이 영흥역에서 최초로 포획한 표범. 사진=에이도스 제공


일제는 항일의병을 막는다는 이유로 총기 소지를 금지해 맹수 피해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당시 조선인들은 이 사업을 환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호랑이·표범이 멸절되는 등 생태계가 훼손됐고, 야마모토와 같이 조선호랑이 사냥을 침략 행위로 활용한 사례도 있었다.


조선총독부 발행 잡지 ‘조선휘보’에 따르면 해수구제사업에 경찰관과 헌병은 3321명, 공무원 85명, 사냥꾼 2320명, 몰이꾼 9만1252명이 1915년부터 4220일간 동원됐다. 이로 인해 1915년 호랑이 11마리, 다음해에는 13마리를 잡는 등 공식 통계로 약 200마리가 잡혔다. 기록에 남기지 않은 것까지 합하면 호랑이 500마리, 표범 3000마리 이상이 일제에 의해 잡혀 멸절된 것으로 추정된다.


야마모토의 야욕, 호랑이 시식회


야마모토는 정호군을 통해 사냥한 호랑이 고기 시식회를 서울(경성)과 도쿄에서 열었다. 조선을 상징하는 호랑이를 시식해 ‘조선을 먹는다’는 정치적인 행사였다.


1차 시식회는 1917년 12월7일 조선호텔에서 야마가타 정무총감을 포함해 실력자 120명을 초대해 열었다. 시식회 방명록에 보면 정호군을 따라다니며 그 여정을 ‘매일신보’에 보도한 언론인 심천풍(본명 심우섭)이란 인물도 있는데 ‘상록수’의 작가 심훈의 맏형으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친일파다.


시식회는 일본에서도 열렸다. 같은해 12월20일 도쿄 제국호텔 대연회장에는 체신 대신, 농상무 대신, 육군 대장 등 정재계 요인 2000여명이 참석했다. 김영준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혜문 스님)는 “야마모토의 정호군의 호랑이 사냥은 악의적인 목적이 뚜렷하다”며 “단순히 강제로 호랑이를 잡아간 걸 넘어 조선을 무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 대표는 22일 도시샤 학교 법인에 호랑이 박제 반환을 요청했다. 김 대표는 “조선의 호랑이는 현재도 조선의 영혼, 조선의 정신을 상징한다”며 “발전적인 한일관계와 세계 평화를 위해 해당 호랑이는 이제라도 원산국(한국)에 반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 22일 일본 교토 도시샤 중고등학교에 소장된 조선의 호랑이와 표범 박제가 혜문(스님)을 통해 국내 언론에 공개됐다. 사진은 표범 박제. 사진=혜문 제공



▲ 일본 교토 도시샤 중고등학교에 소장된 한국 표범 박제. 사진=에이도스 제공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2016년 02월 23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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