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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노래 이야기

Dalida 20주기 (2007)

by Wood-Stock 2009. 4. 7.

세 남자의 자살도 꺾지 못한 '금의 목소리'
[해외리포트] 사망 20주년 맞은 샹송 가수 달리다
한경미 (cfhp) 기자
▲ 전시회장에 전시된 달리다의 수백 가지 얼굴.

알랭 들롱 : 참 이상하기도 하지. 오늘 저녁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너를 마치 처음 보는 것 같아.
달리다 : 여전한 말, 항상 하는 말, 늘 같은 말뿐이야. 네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항상 말뿐이지만 네가 이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라는 것을….


무엇보다 사랑을 갈구했던 달리다(Dalida)가 알랭 들롱과 듀엣으로 불렀던 유명한 샹송 '파롤, 파롤'('말, 말'이란 뜻으로 한국에서는 '달콤한 속삭임'으로 번역됨)은 이렇게 시작된다. 많은 프랑스인의 가슴에 잊히지 않는 이미지를 남기고 간 가수 달리다가 사망한지 20년이 지났다.

파리 시청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5월 1일부터 9월 8일까지 '달리다, 하나의 삶'이란 전시회를 열고 달리다의 화려하고 불행했던 삶을 조명하고 있다. 가수로서 엄청나게 성공했지만 항상 외로운 가슴으로 이 세상을 살다갔던 미녀 가수 달리다. 그녀는 20년 전인 1987년 5월 3일 굴곡 많은 세상살이를 정리하기로 결심한다. "인생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군요, 나를 용서하세요." 이것이 당시 54세이던 달리다가 측근과 팬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다.

이탈리아계인 달리다(본명 욜랑다 지글리오티)는 1933년 1월 17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태어난다. 부친은 카이로 오페라의 수석바이올린 연주자였다.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낸 달리다는 가톨릭학교를 졸업한 후 속기 타이피스트 비서로 일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탁월한 미모 덕에 모델로 발탁되는 행운을 누린다.

1954년 친구의 권유로 참가한 미스 이집트 선발 콩쿠르에서 달리다는 미스 이집트 타이틀을 얻어내는데, 이는 그녀의 인생에 평생 비춰질 하이라이트의 서곡이었다. 당시 미스 이집트 선출을 지켜보고 있던 관람자 중 한 명이던 프랑스 영화 제작자가 뛰어난 미모와 개성에 주목, 달리다에게 영화 출연을 제안한다.

▲ 5월 1일부터 9월 8일까지 파리 시청에서 개최되는 '달리다, 하나의 삶' 전시회.

빈손으로 입성한 파리에서 2년 만에 대히트 가수로

이집트에서 3편의 영화에 출연한 달리다는 본격적인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파리행을 결정한다. 1954년 달리다는 여행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아는 사람이 전혀 없던 미지의 도시 파리에 도착한다. 당시 21살이었다. 달리다의 가방 속에는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꿈이 차곡차곡 접혀 담겨있었다. 달리다는 훗날 "어릴 때부터 난 항상 중요한 사람이 되길 원했다"고 회상했다.

미스 이집트로 선출된 후 이름을 달릴라로 바꾸었던 달리다는 파리에 도착한 후 좀 더 부르기 쉬운 달리다로 이름을 다시 바꾼다. 아마도 삼손 없이는 그 존재이유가 미미한, 성경의 데릴라에서 따온 이름 달릴라가 부담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름을 바꿨지만 달리다는 항상 자신의 삼손을 찾아 헤매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파리 생활 초기에 달리다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처음 4년 동안 달리다는 여러 하녀방(옛날 하녀가 살았던 건물 꼭대기 층의 작은 다락방을 고쳐 학생이나 독신자에게 세를 놓은 방)을 전전하게 되는데, 1955년 16구에 있는 하녀방에서 살 때는 아직 무명이던 영화배우 알랭 들롱이 같은 층의 다른 하녀방에서 살고 있기도 했다.

이 시기에 달리다는 학원에 등록해 노래를 배우는데, 결국 운명은 그녀를 영화보다는 음악 쪽으로 이끈다. 카바레에서 무명가수로 노래를 부르던 달리다는 당시 올림피아 음악당에서 주관한 아마추어 노래 자랑 참가를 권유받는다. 당시 유럽1라디오 방송의 프로그램 디렉터(PD)이던 뤼시엥 모리스가 이 노래자랑을 참관하는데, 달리다의 미모에 주목한 뤼시엥 모리스는 그녀를 가수로 키우기로 결심한다.

2년 후인 1956년 달리다가 하룻밤 만에 녹화한 샹송 '방비노'(아이란 뜻의 이탈리아어) 디스크가 백만 장이 팔리는 대히트를 치면서 가수 달리다가 탄생한다. 달리다의 매니저가 된 뤼시엥 모리스의 도움과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수와 매니저로 만난 두 사람은 5년 동안 동거한 끝에 결혼한다. 1961년 4월의 일이다.

▲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와 듀엣으로 '장밋빛 인생'을 부르는 모습(전시회장에 설치된 비디오 사진 촬영).

성공적인 무대, 그러나 실패한 사생활

결혼하고 한 달 보름이 지났을 때 달리다는 칸영화제에 초대받는데, 거기서 24세의 젊은 화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 사랑은 달리다를 이혼에까지 이르게 하지만 결국 오래 가지는 못했다. 언론은 이혼한 달리다를 곱게 보지 않았다. 전 남편은 또 전 남편대로 달리다에게 전쟁을 선포, 달리다의 샹송 중 가장 보잘것없는 것만 골라 라디오 프로그램에 내보내면서 복수를 시도한다.

그러나 달리다는 남편과 매니저를 동시에 잃은 어려운 상황에서 오히려 가수로서 역량을 보여준다. 달리다는 같은 해 말 올랭피아에서 열린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는데, 다른 사람 도움 없이 혼자 치러낸 성공적인 콘서트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달리다의 파란만장한 삶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1966년 말 달리다는 이탈리아의 무명가수인 뤼지 텡코와 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당시 산레모 가요제에 참가했던 텡코는 자신의 노래가 관객의 반응을 얻지 못하자 엄청난 실의에 빠져 가요제가 열린 날 저녁에 자살했다. 절망에 빠진 달리다는 한 달 후 자살을 시도하지만 미수에 그친다.

달리다를 절망에서 구한 것은 항상 무대였다. 1967년 10월 올랭피아 무대에 다시 올라선 달리다, 절망과 고통을 겪은 달리다는 이미 이전의 발랄하기만 했던 달리다가 아니었다. 달리다의 목소리에는 깊이가 담겼고 얼굴에선 인생의 무게가 느껴졌으며, 달리다가 부르는 샹송의 레퍼토리가 바뀌었다. 관객은 고통 속에서 부쩍 성숙한 새로운 모습의 달리다와 만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마다 자살로 곁을 떠나고

달리다는 1969년 동양철학을 접하면서 가수생활을 접을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노래의 힘은 너무나도 컸다. 노래를 단념할 수는 없었다. 인생을 새로운 시각으로 접하고 노래를 새로운 방식으로 부르게 된 달리다에게 운명의 가혹한 힘은 그 세력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전 남편이던 뤼시엥 모리스가 달리다와 이혼한지 3년 만인 1970년 자살한다. 1975년에는 달리다와 친한 친구인 가수 마이크 브란트가, 1983년에는 다시 셍제르멩 백작이라 불린 리샤르 샹프레가 자살했다. 샹프레는 달리다가 9년 동안 삶을 같이 나누었던 동반자였다.

달리다는 친구 하나와 사랑했던 연인 3명을 16년이란 길지 않은 기간 동안에 모두 잃게 되는데, 이들은 자살이라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달리다의 곁을 떠났다. 한 여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역설적으로 달리다는 이 기간 동안 가장 주옥같은 샹송을 부른다. 음유시인이자 가수인 레오 페레의 노래를 리바이벌한 '시간과 함께', '그는 갓 18세가 지났다', '기다릴게' 등의 샹송이 여기에 속한다.

▲ 몽마르트의 달리다 광장에 놓인 상반신 조각(조각가 아스렝의 작품).

'금의 목소리를 가진 가수'... "인간은 고독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

달리다가 이 기간 동안 부른 샹송은 대부분 행복을 노래하고 있지만, 현실의 달리다는 점점 더 심한 절망에 빠져들고 있었다. 1962년에 구입한 몽마르트르의 대저택에서 달리다는 일요일마다 측근과 친구들을 불러 저녁을 같이하고 토론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고독감은 달리다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집이 감옥처럼 느껴질 때 달리다는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기자들을 한없이 귀찮아했다. 그 집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할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결국 달리다는 그 집에서 스스로 최후를 맞는다.

'금의 목소리를 가진 가수' 달리다. 1956년 달리다를 위해 처음으로 골드 디스크 상이 만들어졌고 1964년에는 플라티나(백금) 디스크 상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1981년에는 다시 다이아몬드 디스크 상이 달리다를 기리기 위해 창조됐다. 프랑스 가요 역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달리다는 평생 동안 70개의 골드 디스크 상을 받았고 2000곡이 넘는 달리다의 샹송 디스크는 세계에서 1억2천만장 판매됐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아랍어, 영어 등 4개 국어를 구사했고 모든 옷을 소화해내는 완벽한 몸매 덕분에 이브 생 로랑 등 많은 쿠튀리에(디자이너)들이 다투어 옷을 지어주고 싶어 했던 달리다는 생전에 파리의 의상 유행을 이끄는 선두주자이기도 했다. 또한 트위스트, 디스코, 레게 등 다양한 음악스타일을 고루 소화해낸 만능 탤런트였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말년에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해 화려한 의상과 독특한 제스처로 미국식 할리우드 쇼를 프랑스에 선보였던 달리다가 앵글로색슨 국가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달리다가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달리다는 사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프랑스인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있다. 2005년에 실시된 '과거부터 현재까지 프랑스를 대표하는 100명'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많은 프랑스인들이 달리다를 꼽았다. 당시 여가수로서는 에디트 피아프와 달리다만 선정되는 영광을 안는다.

만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만 항상 외로움에 떨었던 달리다는 이렇게 말했다. "관중이 내 연인이고 샹송이 내 아이들이다." "인간은 모두 외로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독 속에서만 인간은 자신을 되찾을 수 있고 창조할 수 있으며 행복할 수 있다."

▲ 달리다가 1962년부터 1987년까지 살았던 몽마르트르 저택.
2007-07-15 18:18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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