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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노래 이야기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 이진원

by Wood-Stock 2010. 11. 7.

일어나라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 쳐야지

뇌출혈로 쓰러진 1인 밴드 이진원의 삶과 꿈

지하방서 첫 앨범 나홀로 녹음, ‘스끼다시…’등 인디계서 인기
자금난에 은퇴 고비 넘었지만 1일 병원으로…쾌유기원 쇄도

 

아, 머리가 아파온다. 숙취인가? 하긴 밤새 마시고 새벽녘에야 들어왔으니. 어젠 기분이 너무 좋았어. 밴드로는 다섯달 만에 한 클럽 공연이었으니까. 뒷풀이에서 아는 형님이 술값을 쏴서 돈도 굳고 말야. 콩나물국으로 해장을 해야지. 이제 라면은 지겨워. 끓기 시작하는군. 좀만 더 기다리자.

 

왜지?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네. 홍대 독문학과 92학번 이진원은 참 평범했는데 말야. 음악 동아리 ‘뚜라미’에서 통기타 좀 친 게 그나마 특별했달까? 그때만 해도 음악을 업으로 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지. 졸업 즈음 닥친 ‘아이엠에프 사태’가 아니었다면 아마 샐러리맨이 됐겠지. 마땅한 직장을 찾지 못하고 비정규직으로 들어간 음반사, 인터넷 방송국에선 얼마 가지 못했어. 그때 난 결심했어. 이렇게 된 거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실컷 해보자고. 그래서 1인 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 된 거야. 지하에 사는 요정이라니….

 

2003년 첫 앨범 <인필드 플라이>를 완성했어. 집에서 혼자 연주며 노래며 녹음이며 다했지. 기타 파트 녹음 뒤엔 기타를 팔고 베이스를 샀어. 베이스 파트 녹음 뒤엔 베이스를 팔고 믹싱 장비를 사는 식이었어. 근데 나름 대박이 난 거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가내수공업으로 만든 시디가 1599장이나 팔렸어. ‘절룩거리네’, ‘스끼다시 내 인생’은 어느 라디오 인디 차트 1위에도 올랐지. 노랫말에 밴 ‘루저’ 정서에 다들 공감했나 봐. 2004년 음반을 재발매하고, 신문사와 인터뷰까지 했다니까.

 

방송국에선 ‘절룩거리네’는 장애인 비하, ‘스끼다시…’는 국적 불명 언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했지만, 온라인에선 싸이월드 미니홈피 배경음악 등으로 인기가 좋았어. 근데 이상하지? 디지털 음원 회사에선 돈 한푼 안 들어왔어. 알아보니 음원을 하나 내려받으면 가수에게 30~50원, 실시간 듣기, 배경음악, 벨소리, 통화대기음 등은 기껏해야 3~4원이 들어오는 구조더라고. 그것도 어느 정도 금액을 넘어서야 몰아서 지급한다고 하더군. 항의하니 사이버머니인 ‘도토리’를 주지 뭐야. 짜증이 나서 ‘도토리’라는 노래를 만들어 2008년 발표한 3집 <굿바이 알루미늄>에 실었어. 다람쥐 반찬만 먹고 살 순 없잖아?


그러고 보니 3집도 참 어렵게 만들었지. 2006년 발표한 2집 <스코어링 포지션>은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지원금 1천만원으로 만들 수 있었는데, 정권이 바뀌면서 제도가 폐지됐어. 전업 음악인으로 연봉 1200만원만 되면 음악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연봉이 1천만원인 거야.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음악을 포기할 순 없었어. 능력 없이 열망만 넘쳤던 인디 음악인이 삼십대 중반이 돼서야 현실을 인식하고 자신이 패배자이며 낙오자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노래한 게 바로 3집이야. 올 3월엔 미니앨범 <전투형 달빛요정-프로토타입 에이>를 전투적으로 냈어. 이젠 힘을 좀 내보려고 해. 언젠가는 ‘축배’를 들 날이 오지 않겠어?

 

음, 콩나물국이 다 됐네. 한 숟갈 떠볼까? 억! 머리가 왜 이리 아프지? 의식이 흐려져. 이러면 안 되는데. 어어어~(이상은 취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 지난 1일 밤 지인들이 지하 셋방 문을 따고 들어갔을 때 그는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병원에선 뇌출혈로 쓰러진 지 적어도 30시간은 지난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여전히 감은 눈을 뜨지 못한 채 병상에 누워 있다. 이 사실이 트위터로 알려지자 격려 메시지들이 쏟아지고 있다. 일부 음악인들은 그의 쾌유를 기원하는 공연을 추진하고 있다. 우선 오는 10일 저녁 7시 홍대 앞 클럽 타에서 이한철, 와이낫, 좋아서하는밴드, 오지은, 갤럭시익스프레스 등이 참여하는 첫번째 공연이 열린다.

 

“9회말 주자 만루 투아웃 투스리 풀카운트/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가 온 거야/ 오늘을 기다렸어 지금이 바로 그때/ 모두 다 일어나 외쳐라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중에서)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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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말 역전만루홈런은 끝내 터지지 않았다

1인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6일 오전 숨거둬
지난 1일 자택서 뇌출혈로 쓰러진 채 발견돼
트위터 타고 시민, 동료음악인들 추모물결 넘실

 

9회말 주자만루 투아웃 투스리 풀카운트. 그토록 고대하던 역전만루홈런은 끝내 터지지 않았다.

 

1인 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37)씨가 6일 오전 8시께 숨졌다. 지난 1일 혼자 사는 자취방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있는 그를 지인들이 발견해 병원으로 옮긴 지 닷새 만이다. 서울 영등포 한림대 한강성심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진 이씨는 수술을 받았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했고, 이날 오전 끝내 세상을 떠났다.

 

고인 쪽은 이날 공식 누리집을 통해 “이진원씨가 6일 오전 8시13분 이 세상과의 인연을 마치고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며 “우리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슬픔이지만 아마 그는 많은 분의 응원과 사랑을 가슴에 품고 행복하게 여행길에 올랐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안타까운 소식이 트위터와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자 “반드시 다시 일어날 거라 믿었는데, 너무도 안타깝다”, “하늘나라에 가서라도 역전만루홈런을 때리길 기원합니다” 등의 추모 글이 쏟아지고 있다.

 

음악계 동료들도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냈다. 고인과 중학교 동창 사이인 것으로 알려진 이적은 이날 오전 트위터에 “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진원의 명복을 빕니다. 진원아, 미안하다”라는 글을 남겼다. 윤종신은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진원씨”라는 글을 남겼고, 힙합 그룹 슈프림팀의 쌈디도 “달빛요정만루홈런 이진원씨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추모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2003년 집에서 혼자 만든 첫 앨범 <인필드 플라이>로 데뷔한 고인은 한때 생활고로 음악을 포기할까 고민도 했지만, 2008년 3집 <굿바이 알루미늄>에 이어 올 3월 미니앨범 <전투형 달빛요정-프로토타입 에이(A)>까지 내며 음악 활동에 열정을 쏟아왔다. 특히 쓰러진 채 발견되기 직전인 지난달 30일까지도 클럽 공연을 벌이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일부 네티즌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음악을 포기하지 않는 심경을 담은 고인의 노래 가사를 트위터로 전파하며 안타까움을 곱씹기도 한다.

 

“어제 나는 기타를 팔았어/ 처음 샀던 기타를 아빠가 부실 때도/ 슬펐지만 울지는 않았어 어제처럼/ 내일부턴 저금을 해야지 그래도 난/ 한때는 세상을 노래하는 가수였는 걸/ 언젠가는 다시 기타를 사야지”(‘치킨런’ 중에서)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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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은 간다', 그렇게 자신의 음악을 남기고

떠나선 안 될, 위대한 루저 뮤지션 '이진원'을 보내며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그의 음악은 '승자'의 음악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진하고 묵직하게 남아있다.

 

'야구'라는 스포츠가 원래 그렇다. 여기 최종 스코어 7:8. 말 그대로 케네디 스코어가 난 경기가 하나있다. 그 경기에서 승리한 팀은, 9회말 7:4로 뒤지는 상황에서 투 아웃 투 쓰리 풀카운트에 역전 만루 홈런을 때려, 대거 4득점 하여 꿈같은 역전승을 일궈낸 것이다.

 

푸른 잔디위에 하얀 다이아몬드. 3만 관중이 가득찬 그 경기에서, 쭉쭉 뻗어가는 역전만루홈런의 하얀 야구공의 아름다운 궤적을 당신은 본적이 있는가. 연신 '큽니다!! 큽니다!! 좌익수 뒤로~ 좌익수 뒤로~ 홈런이냐? 홈런이냐?! 역전 만루 홈런이냐?!!'를 마치 비명처럼 외치는 방송국 캐스터의 말을 들으며 그 승리에 도취된 적이 있는가 말이다.

 

그리고 극적인 홈런을 친 그 타자는 환한 웃음과 두 주먹을 위로 불끈 쥐어보이며 베이스를 천천히 돈다. 그 멋지고도 당당한 걸음걸이 하며, 관중석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뜨거운 응원은 또 어떠한가. 아울러 그의 홈런을 축하하며 뛰쳐나오는 동료들의 축하세례와 팀 승리를 축하하듯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는 야구장의 노란 라이트를 보라. 그리고 함성을 들어보라. 

 

그야말로 아름답다. 사실 상상만으로도 벌써 온몸에 전기가 흐른다. 야구란 그런 거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에서 환상을 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스포츠가 뭐 다 그렇지 라고 치부하기엔, '야구'는 사람들이 그 '환상'을 볼만큼 너무나 아름다워서 문제라고 늘 생각한다.

 

홈런을 친 타자, 그리고 묻혀버린 '달빛요정'

 

하지만 말이다. 그곳에는 승리에 도취된 아름다운 드라마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마운드에서 홀로 홈런을 맞아 무릎 꿇고 절망하는 투수도 있다. 펜스를 넘어가는 그 공을 잡지 못해 그라운드에 철퍽 누워버려 엉엉 울고 있는 어린 외야수가 있으며, 직구 사인을 보내야 하는데 괜히 변화구 사인을 보내 홈런을 맞았다며 자책하는 포수도 있다.

 

그리고 역전 만루 홈런을 얻어맞은 그 무릎 꿇은 투수에 주목해보자. 2002년 타자로 꽤 화려하게 처음 프로에 등장했지만 도저히 성적이 안 나오자 2군을 전전하며 투수로 전향한 이 선수는, 비록 언제나 질책에 시달리는 나날을 보냈지만 이 중요한 경기 8회 말 마운드에 올라와 공 10개로 적진의 공격을 그야말로 잘 막아낸 투수였다.

 

그래서 9회 말 역전홈런을 맞기 직전까지에 그는, 9회 말 마운드에 오르기 전 프로생활 처음으로 동료와 감독에게 따뜻한 칭찬과 격려를 더그아웃에서 받았던 것이다. 시간상으로는 단지 몇 분에 불과했겠지만 그 선수는 정말 행복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시절까지 야구에 올인 했던 자신의 인생이 이것으로 다 보상되었다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결국 역전 홈런을 얻어맞은 그 선수는 축 처진 어깨로 주섬주섬 짐을 싸며 핸드폰으로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 그래도 잘했다는 위로 아닌 위로를 받으며 경기를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에게, 그리고 팬들에게 너무 죄송하고 또 미안하다. 그리고 천천히 버스에 몸을 싣는다. 바로 그때, 버스계단을 오르는 그 선수에게 누군가 공을 내밀며 사인을 해달라고 말했다. 약간 멈칫하며 놀라던 그는, 조금은 의아한 표정과 그래도 조금은 기쁜 표정을 하며 어린 팬이 내민 야구공에 정성껏 꾹꾹 사인을 해줬다.

 

야구공에 적힌 그 선수의 이름은 길고도 화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그의 부모님께서 아들에게 뭔가 이 세상에서 큰일을 하라고 조금 무리해서 붙여준 이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름하야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그 '달'씨 집안의 이 야구선수는, 그 경기 이후 꽤 오랫동안 무명선수로 남아있다는 후문을 한동안 들었던 것 같다. 연봉 1200만 원이라도 야구만 할 수 있다면 행복하다고, 오늘도 손에 잡히는 물집을 참아가며 공을 던지고 또 치면서 말이다.

 

그랬던 어느 날, 출근하는 짬통같은 361번 버스 안에서 생각 없이 눌러대던 인터넷 뉴스를 통해 그 선수가 11월 6일 삶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뇌출혈이란다. 그리고 그제야 사람들은 연신 그의 이름을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써 내리며, 그가 지나온 선수 기록을 훑고 있다고 했다. 그는 여느 선수처럼 많은 인기를 끌며 상업적으로 성공한 선수는 아니었을지라도, 그렇게 사람에 마음을 움직이는 경기를 했던 선수로 추억하며 말이다.

 

위대한 루저 뮤지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나도 이제 그 선수의 플레이를, 아니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란 이름을 가졌던 이진원의 새로운 음악을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다. 그 슬픔은, 정말 지금도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침통하다.

 

지금도 명반으로 회자되는 그의 1집 <인필드 플라이>를 비롯해서, 정규 2집 <스코어링 포지션>, 그리고 3집인 <굿바이 알루미늄>을 관통하는 그의 음악은, 희망이나 사랑 그리고 행복을 말하는 주류의 그것과는 확실히 달랐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의 음악은, 그의 노래는 오직 그만이 부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덕분에 그의 석장에 정규 음반 외에도, 그가 발표한 EP들과 최근 민트페이퍼의 기획음반인 <라이프(LIFE)>에 실린 곡인 '주성치와 함께라면'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은 패배자나 루저, 혹은 절망이나 자책과 같은 단어들이 자꾸 튀어나온다.

 

하지만 알겠지만, 그는 결코 패배자나 루저가 아니다. 자신의 꿈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를 그 누구도 패배자라 말할 수 없다. 노래하기 척박하다, 사랑하기 힘들다, 그리고 살아가기 괴롭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받아들인 채 기타를 잡고, 또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고 또 노래했다. 그가 발현하는 청량한 멜로디나 목소리도 그의 음악에 이끌리는 상당히 중요한 요소였지만, 그의 음악에 백미는 언제나 쓰러져도 또 일어나고 깨져도 또 걸어 나가는 누군가의 삶이 진하게 녹여있는 듯한 특유의 가사와 태도가 그렇게나 좋았다.

 

물론 사내새끼 죽는 소리하는 게 제일 듣기 싫다고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구석에 박혀있는, 그래서 말하지 못하고 동여맨 감정과 현실을 그는 대신 노래해준 것이 어쩌면 고마웠던 것 같다. 또한 그런 상황에서도 가끔씩 날리는 그의 한 방이 그렇게나 통쾌하고 또 즐거웠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을 들을 때면 늘 나는 말이 없어졌나 보다. 

 

'위대한' 루저 뮤지션. 그의 음악은 그래서 슬프기 보다는 즐거웠고, 안타깝기 보다는 또 고마웠다.

 

'요정은 간다', 그렇게 자신의 음악을 남기고

 

그리고 오늘 다시 그의 음악을 찾아듣는다. 평소에 그렇게 눈물이 없다고 자부했던 나지만, 이상하게 3집에 실려 있는 12번째 트랙인 '요정은 간다', 여기서 왠일인지 자꾸만 눈물이 난다. '난 잊혀질 거야 지워질 거야, 모두에게서 영원히, 난 노래할 거야, 어디에서든 혼자서 가끔 이렇게' 라는 가사가 이렇게 슬픈 가사가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요정은 간다. 가지 않았으면, 계속해서 내 옆에서 노래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지만, 요정은 그렇게 나의 곁을 떠나갔다. 그래서 사실 원망스러운 마음과 허무한 마음을 지우기 어렵다. 정말로 가지 않았으면 했다. 툴툴 털고 일어나 다시 한 번 노래하길,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운드나 타석에 들어서길 바랐다. 하다못해 <텍사스 히트>라는 타이틀이라도 계속해서 활동해 주길 바랐지만 그는 그렇게 떠나갔다.

 

요정은 갔다. 하지만 믿고 싶다. 어디선가 그는 계속해서 어디선가 노래하고 있을 거라고. 너무나 위약한 위로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밀려오는 이 먹먹함을 어찌할 수가 없다. 부디 그의 명복을 빈다. 그의 음악은 가히 <그랜드 슬램>이었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2010.11.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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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앨범은 다음과 같이 6장입니다.

 

1. Infield Fly (2003/Laylamusic.Net)

2. Sophomore Jinx (2004/아름다운동행)

3. 스코어링 포지션 (2006/아름다운동행)

4. Single Hit #1 (2007/Www.Rockwillneverdie.Com)

5. Goodbye Aluminium (2008/아름다운동행)

6. 전투형 달빛요정: Prototype A (2010/Layla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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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룩거리는 인생, 희망은 있다 [2004.07.15]

1인 포크록 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진심 담아 날리는 홈런타 가사를 들어보라

 

출퇴근길을 함께하던 ○번 버스를 잃어버렸다. 타 지역민에게 민망한 서울 시민들의 요란함은 ‘대중교통 애용자’라는 서민의 이름으로 양해를 구해야겠다. 도시 생활의 ‘발’이 꼬이니 상상 이상의 스트레스가 머리를 꾹꾹 누른다. 이 지근거림, 누구와 얘기 나누나.

 

그러다 문득 361번 버스를 쿵작쿵작 노래하던 ‘달빛요정’이 생각났다. “달려라 날아라 하늘 끝까지/ 밟아라 엔진이 불타 터져버릴 때까지”(<361 타고 집에 간다> 중)를 강요당하던 그 동네 버스는 괜찮을까.

 


음반사 취직… 해고 뒤 지하 세계로

 

화창한 지상에서 만난 지하 생활자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361번의 운명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게 말이죠. 번호는 죽고, 노선도 변경됐습니다.” 달빛요정은 말을 잇는다. “청계천도 버스도 무턱대고 밀어버리는군요. 이 도시는 추억을 허락하지 않아요.”

 

씁쓸한 감상을 전해오는 달빛요정. 1인 포크록 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32)씨다. 그의 실체는 1집 의 여섯 번째 곡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에서 짐작할 수 있다. “9회 말 주자만루 투아웃 투쓰리 풀카운트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가 온 거야/ 오늘을 기다렸어 지금이 바로 그때/ 모두 다 일어나 외쳐라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만루홈런!/ 찬양하라 위대한 그 이름 달빛요정.” 과대망상의 즐거움을 껴안고 살아가는 아저씨인가. 그도 홈페이지에서 말했다. “추구하는 음악이나 소유한 세계관·가치관에 비해 너무 아리따운 이름인 것은 스스로도 인정한다"

 

노래 만들기가 주종목이라 ‘가수’라 하면 섭섭해할지 모르겠다. 대학 시절 통기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음악을 업이라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국제통화기금(IMF)의 터널로 들어가면서 마땅한 직장을 찾지 못하고 음반사에서 인터넷 방송국 PD와 오디션 관리자를 맡으면서 사회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인터넷 저작권 문제의 공론화 조짐에 따라 방송국은 폐지되고 비정규직 사원은 해고당했다. 할 수 없이 장비를 싸들고 지하로 들어가 요정이 됐다.

 

당신은 ‘100원짜리 모아 1천만원 통장 만들고, 그런 통장 10개로 1억원 모았다’는 저축의 신화를 믿는가. 달빛요정은 습작곡 200곡 중 몇곡을 추려 가내수공업으로 2003년 2월6일 CD 2천장을 찍고 1번부터 팔기 시작했다. 1년 뒤 1천장 고지 달성, 2004년 3월2일 한정판 1599번 판매완료. 드디어 4월22일엔 정식 유통 음반을 발매하면서 반창회급 신화를 이룩했다. 정식 음반 3천장 내놨고 7월 중순에 다시 1천장 찍는다고 한다. 이에 그는 말한다. “4월22일엔 내가 드디어 얼굴 없는 ‘사이버’ 가수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가수가 됐구나라는 뿌듯함이 있었죠. 그런데 두세달 지나도 여전히 가난하니 요즘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식 음반 시장에 진입하기까진 그의 진솔한 노래가사들이 한몫했다. 라디오 인디음악 코너를 줄기차게 탔던 노래 <절룩거리네>는 당신과 나의 모자란 인생사를 얘기하고 있다. “…나이값도 못하는 게 골방 속에 처박혀 뚱땅땅 빠바빠빠/ 나도 내가 그 누구보다 더 무능하고 비열한 놈이란 걸 잘 알아/ …지루한 옛사랑도 구역질 나는 세상도 나의 노래도 나의 영혼도 나의 모든 게 다 절룩거리네.”

 

서른 넘은 아저씨에게 남겨진 ‘소년’이 묻어나온다. 깔끔한 목소리가 텁텁한 가사와 만나 포크록의 서정성을 만든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얘기했지만, 그건 노래 듣는 이의 감정이기도 하다. 진심이 담긴 가사, 참 오랜만이다.

 

 

‘박찬호 20승’에 담긴 가사 철학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골똘히 가사를 생각하죠. 나름대로 체계적인 가사랍니다. 그러다가 그녀에게 차이고 술 마시고 신세 한탄 노래도 만들게 되죠.” 그래서 자기 인생을 ‘스키다시’라고 했나. “졸업하고 처음 나간 동창회 똑똑하던 반장놈은 ○○○○ 나온 ○○○○가 되었고 예쁘던 내 짝꿍은 ○에 ○○ ○○○○○○랑 결혼을 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나는 뭐 잘났나 스끼다시 내 인생/ 스포츠신문 같은 나의 노래/ …언제쯤 사시미가 될 수 있을까….” 가사의 도발이 목소리의 서정미를 덮어버리면 재미없다. 홈페이지(http://www.rockwillneverdie.com)에 접속하면 노래들을 들을 수 있다.

 

그는 가사 훈련을 꽤 한 모양이다. 다중적 텍스트를 만드는 연습을 했단다. “40%는 내 얘기로, 60%는 다른 이들 느낌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박찬호 20승’같은 단어들도 사람에 따라 제각각의 의미를 가져요.” 80년대, 90년대 초반 젊은 시절을 보냈고, 데모의 공포심을 기억하는 주변 이들은 민중가요 같다며 무겁게 여기는데, 어린 친구들은 부담 없이 가볍게 즐기는 게 신기하단다. “요즘 조선음악 가사들은 중학생 수준이에요. 80년대 김현식·유재하·김광석·꽃다지 감성들이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왜 이 재미난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을까. 사실 홈런타 가사들은 방송국에서 문전박대당했다. <절룩거리네>는 장애인 비하, <스끼다시 내 인생>은 국적 불명의 언어라는 이유로 금지당했다. “저도 ‘스키다시’가 올바른 언어가 아니라는 거 알아요. 청소년 교육상 제 노래가 아주 좋은 것도 아니에요. 다만 그 단어 외엔 표현할 만한 게 없었고, 그냥 제 정서예요.“ 알고 보면 그는 포크록 스타일이라 하드코어나 메탈처럼 강하게 울부짖지 못한다. 1집 전반부는 울퉁불퉁 모난 인생 사는 얘기들이 있고, 후반부엔 알싸하지조차 못하는 서른살 순정들이 간지러운 순풍이 되어 흐른다.

 

“싸이월드 배경음악 되어도 전 한푼도 못 받죠. 노래는 공짜가 아니에요. 100원이라도 받고 싶어요. 돈 버는 사람 따로, 콘텐츠 만드는 사람 따로니 다들 음악 장비 팔고 장사해야지라고 얘기해요.” 클럽에서 춤추는 데 2만원 쓰는 건 안 아깝고 음반 9천원 주고 사긴 그렇게 어렵냐고 묻는다.

 

그래도 그는 항상 낙관적이다. “알 수 없는 그 어떤 힘이 언제나 날 지켜주고 있어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거야 난 행운아”(<행운아> 중) 달빛요정이 베짱이 기질 가지고 투박한 일상을 사랑하며 살자고 노래한다.

 

 

 

 

요정님! 저도 판 내고 싶어요

 

‘마이너스 통장에서 2집 준비 모드로’. 이는 서민 음악인에겐 꿈의 슬로건이 아닐 수 없다. 가창력도 있고 작곡 실력도 있는데, 얼굴이 네모라고 배 둘레가 크다고 어느 기획사도 관심 주지 않는다. 노래·녹음·믹싱에 홈페이지 제작·홍보·유통까지 혼자 해치웠던 달빛요정 이진원씨에게 1인 프로젝트의 비법을 들어본다.

 

- ‘분단국가형 가내수공업 뮤지션’이라고 들었다.

= 분단국가형=한국형. 투자받을 데 전혀 없어서 혼자 작업하는 음악인이란 뜻이다

 

- 진지는 잘 구축돼 있나.

= 아마추어보단 좋을지 모르지만 롤러코스터·넥스트 같은 유명 가내수공업자들의 장비랑 비교가 안된다

 

- 믹싱·녹음도 혼자 했나.

= 나도 정식으로 배운 건 아니다 장비 사용법 익히면서 프리랜서 작곡 활동 때 계속 소리를 탐구했다.

 

- 돈은.

= 노래·녹음·믹싱은 내가 하니까 공짜다. 그런데 마스터링에 100만원, 2천장 찍는 데 100만원이 필요해서 ‘스페셜 땡스 투’에 넣어준다면서 친구들을 찔렀다. 음악좋아했던 직장인들이 고맙게 보태줬다.

 

- CD가 집으로 배달왔나.

= 100장 든 상자 스무개가 왔는데 대단했다. 이사가기 두렵다고 생각했다.

 

- 어떻게 팔렸나.

= 판 내기 전의 입소문만큼 일단 팔렸다. 한장 팔리면 담배 사고, 어쩌다 다섯장 팔리면 고기 먹고. 인터넷 그림쟁이 싸이미니가 배경음악으로 쓰고 링크 타고 홈페이지 방문하는 사람 늘어서 조금 팔았다. 그러다가 올해 초 문화방송 라디오 <고스트네이션>을 타면서 2월엔 하루 50장씩 나갔다. 심야방송이라고 해도 영향력이 참 크다는 생각을 했다.

 

- 가내수공업으로 만족하나.

= 나라고 오케스트라 반주에 노래 안 하고 싶겠나. 그런데 오케스트라 부르는 값이 내 전체 제작비일 것이다

 

- 음반 좀 팔렸는데 계속 가내수공업인가.

= 그것만이 내 살길이다. 1.5집 땐 더 ‘가내적’이 될 듯하다. 형편 때문에 장비 몇개 팔았다.

 

- 유통은 남에게 맡겼나.

= 2월에 많이 팔면서 기분은 좋았는데 포장하고 우체국 다녀오면 하루가 끝났다. 음악 작업을 할 시간이 전혀 없어서 남의 도움을 빌리기로 했다.

 

 

장비의 발전과 보급으로 가내수공업으로 홈레코딩 음반을 만드는 일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패션의 구제 스타일처럼 가내수공업으로 로파이(Lo-Fi·저충실도의 녹음이 내는 낡은 느낌)를 살린 음반이 여럿이다. 물론 음악인이라면 최고의 스튜디오를 꿈꾸지만 그것이 수작을 위한 필요충분 조건은 아니다. 그리고 인터넷이 생기면서 21세기형 가내수공업은 덜 고독해졌다. 조PD·클래지콰이도 실력 하나 밑천 삼아 MP3 배포로 ‘떴다’. 인디음악 매장의 앨범도 자생력이 있는 한 쉽게 죽지 못한다. 2인조 펑키 밴드 ‘얼바노’는 자비로 찍은 1집을 소수 매장에서 다 팔고 올해 정식 유통사에서 재발매했다. 관건은 음악으로 하는 진검 승부와 대중이 이에 대한 비용 지급을 인정하는 데 있다.

 

김수현 기자 groov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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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의 외로운 죽음 뒤엔…음악인 피말리는 디지털 음원 시장이 있었다

실시간 듣기·정액제 주류, 한곡당 고작 수십원 배분
‘음악=무료’ 소비자 의식과 사이트들 저가경쟁도 원인

 

 

» 뇌출혈로 지난 6일 숨을 거둔 1인 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의 발인식이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거행되고 있다.

고인이 생활고 속에서 어렵게 음악을 해온 사실이 알려지면서 디지털 음원 수익의 배분 문제에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6일 숨을 거둔 1인 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진원)이 생활고를 겪으며 고군분투해온 사실이 알려지면서 최근 음악인의 주수입원으로 떠오른 디지털 음원 수익 배분 문제에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 누리꾼들은 음악인에게 지나치게 적게 몫이 돌아가는 지금의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디지털 음원, 어떻게 나눌까?

 

멜론, 엠넷 등 국내 음원 사이트들은 노래 한 곡을 내려받는 데 보통 500원을 받는다. 애플사의 아이튠스에서 곡당 1달러를 받는 것과 견주면 절반 수준이다. 음원 사이트는 이 가운데 보통 45%를 가져간다. 나머지 55%에서 저작권협회와 실연권협회에 들어가는 저작권료(9%)와 실연권료(4.5%)를 제하면 40%가량이 남는다. 여기에서 음원 유통 대행사 수수료를 뺀 뒤 제작사·음악인에게 돌아가는 돈은 200원 안팎이다.

 

아이튠스의 경우에는 아이튠스 쪽이 30%를 가져가고 70%를 음원 유통 대행사에 넘긴다. 대행사는 이를 제작사와 나누는데, 우리나라 음원을 아이튠스를 통해 외국에 판매하는 디에프에스비(DFSB)는 1달러의 절반 이상을 제작사에 돌아가도록 한다. 제작사와 음악인은 이를 받아 저작권료와 실연권료를 해결한다. 1달러를 1000원으로 환산하면 제작사와 음악인에게 최종적으로 돌아가는 몫은 400원이 좀 넘는다. 매출액의 40%가량을 음악인이 받는다는 점에서 분배 비율에 큰 차이는 없다.

 

■ 문제는 스트리밍과 정액제 서비스

 

하지만 국내 음원 시장의 대부분을 개별곡 내려받기가 아니라 실시간 듣기(스트리밍)와 월 정액제 서비스가 차지한다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이는 국내 음원 사이트들의 지나친 저가경쟁이 낳은 결과다.

 

매달 3000원을 내고 무제한 실시간 듣기 서비스를 이용하면, 제작사·음악인에게 돌아가는 돈은 곡당 몇원에 그친다. 매달 5000원에 40곡 내려받기부터 매달 9000원에 150곡 내려받기까지 정액제 서비스의 경우 곡당 제작사·음악인에게 돌아가는 돈은 몇십원 정도다. 가격 자체가 워낙 싸게 책정되다 보니 음악인에게 돌아가는 돈이 터무니없이 적은 것이다. 국내 음원 시장에서 실시간 듣기와 정액제 매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70%가량으로 추정된다. 사정이 이러니 이름이 제법 알려진 인디밴드라 해도 온라인 음원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음반 한 장에 500만원을 넘기기 힘들다.

 

한 음원 사이트 관계자는 “음악인에게 너무 적은 돈이 돌아간다는 문제에는 공감을 하지만, 우리가 폭리를 취한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며 “불법 다운로드 등을 통해 ‘음악은 무료’라는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소비자들이 싼 서비스만 찾다 보니 정액제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대형 연예기획사의 입김 때문에 우리가 마음대로 가격을 정할 수 없는 상황도 있다”고 전했다. 음원 사이트의 저가경쟁뿐 아니라 대형 기획사와 소비자 인식 등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문제라는 것이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에게 음원 수익 정산에 앞서 사이버머니인 ‘도토리’를 주려 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싸이월드 관계자는 “돈 대신 도토리를 주는 경우는 결코 없다”고 해명한 뒤 “그나마 우리는 스트리밍이나 정액제가 아닌 개별곡 다운로드 서비스만 하기 때문에 제작사·음악인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돈이 돌아가는 편”이라고 말했다.


■ 공정 유통, 공정 소비가 대안

 

이에 일부 제작사들은 분배가 공정하게 이뤄지는 별도의 음원 유통 사이트를 만드는 방안을 논의중이다. 이응민 파스텔뮤직 대표는 “음원 사이트들이 하는 무료 쿠폰 행사의 경우 어떻게 정산되는지 도통 알 수 없다”며 “음원 사이트나 저작권협회가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것도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으나 혼자서는 해결하기 힘들어 몇몇 레이블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있다”고 말했다. 싸이월드 관계자도 “이번 일을 계기로 인디밴드의 경우 수익이 아티스트에게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좀더 근본적인 개선책은 없을까? 인디음악 음원을 유통하는 이창희 미러볼뮤직 대표는 “지금처럼 정액제 서비스가 주가 되는 한 음원 시장이 더 발전하기는 쉽지 않다”며 “개별곡 다운로드 시장으로 중심이 옮겨가야 한다”고 말했다. 대중들의 인식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는 “지금의 음원 시장 구조가 형성되기까지는 대중의 인식 또한 크게 작용을 했다고 본다”며 “음악에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야 더 좋은 음악이 많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좋아하는 음악에 지갑을 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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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의 슬픈 유언…"도토리 싫어. 고기가 좋아!"

[분석] '달빛요정' 도토리 논란, 진실은 무엇인가?

기사입력 2010-11-09 오전 8:12:22

 

"세상이 정말 좋아졌나봐. 나 같은 것도 가수랍시고 판을 냈어"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도토리' 中)

지난 6일 세상을 떠난 원맨 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하 달빛요정) 이진원 씨. 그는 '인디 뮤지션'이라고 불렸다. 홍익대학교 근처 소규모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인을 거칠게 한 데 묶는 말이다. 그는 '세상이 정말 좋아졌나봐'라고 노래했지만 그의 사후에 비춰진 문제들은 현실이 정반대였음을 드러낸다.

가난한 '전업 뮤지션' 현실

그는 2003년 자체 제작한 1집 <인필드 플라이>가 입소문을 타고 1599장이나 팔리면서, 수록곡이 이동 통신사 통화 연결음 서비스에 등록되고 이듬해 정식 유통 앨범을 재발매하는 등 거대한 '대중음악 시장'에 편입됐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배경 음악으로 인기를 끌고, 일간지와 인터뷰도 했지만, TV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웃음을 끼워 파는 대중가수는 될 수 없었다.

"얼굴이 알려져서 망했어. (…) 나는 무겁고 안 예쁘니까 뭘 해도 마찬가지"('도토리')라서가 아니다. 세상을 향한 비관과 독설이 가득한 그의 노래 제목과 가사는 방송이란 포맷에 어울리지 않았다. 몇 곡은 방송 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자기 음악의 심장부인 가사를 밴드 이름처럼 '예쁘게'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올해 초 EP(미니앨범) <전투형 달빛요정-프로토타입 에이>을 낸 직후 음악 웹진 <음악취향 Y>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더 대중적인 노래를 만들어서 히트를 쳐야 노후 보장이 되고 그럴 텐데, 지금은 이 상황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내가 음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강조하면서. 돈이 많이 벌리는 음악보단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음악을 택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선택의 기회비용이 뮤지션으로서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이라는 데 있었다.

▲ 공연 중인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뉴시스

달빛요정, 음원 수익 배분 문제를 비추다

8일 정오 서울 영등포구 가톨릭대학교여의도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발인식이 거행됐다. 사흘간 치러진 장례식에 고인의 동료와 팬들이 찾아와 슬픔을 나누는 동안, 온라인상에서는 '도토리' 의혹이 크게 불거졌다.

4일 <한겨레>가 고인의 투병 소식을 전하면서 '고인이 SK커뮤니케이션즈로부터 싸이월드 미니홈피 배경 음악(BGM) 음원 권리료를 도토리(사이버 머니)로 지급받았다'는 내용을 실은 것이다. 소식은 빠르게 전파돼 음악팬들의 분노를 부추겼다.

논란이 커지자 SK커뮤니케이션즈 측은 자사가 그동안 음원 권리 대행사인 뮤직시티를 통해 고인의 소속사에 도토리가 아닌 정당한 음원 권리료를 전달해 왔다고 해명했다. 해당 기사를 쓴 기자도 자신의 트위터(@westminia)를 통해 "도토리 얘기는 돈(음원 권리료)을 지급하기 이전에 있었던 일인 듯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논란의 초점은 "(뮤지션들에게) 불합리한 음원수익 배분 구조"라며 '음원 수익 배분 문제 자체에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호소했다.

지금까지 나온 관련 증언을 종합해 보면, 고인은 음원 권리료가 SK커뮤니케이션즈 측의 정산 합계 총액에 도달하지 못한 시점에서 '도토리라도 먼저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음원의 판매 수익이 일정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음원 생산자에게는 한 푼도 돌아가지 않는 구조인 것이다. 실제로 기자가 한 뮤지션이 지난해 12월 모 사이트에게 제공 받은 음원 사용 계약서를 확인해본 결과 "사용료 지급은 정산 합계 총액이 30만 원이 넘는 시점부터 한다"고 적혀 있었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 씨 역시 "도토리는 상징적 사건에 불과하다"며 음원 수익 배분 구조의 불공정성을 지적했다. 위의 경우처럼 음원이 일정 수준 팔리지 못하면 1원도 받을 수 없게 한 조항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요율 배분 그 자체에 있다. 음원이 소비될 때 그것을 만들거나 실연하는 사람은 턱없이 적은 돈을 받고, 판매·유통업체만 돈을 벌어들이는 구조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특히 현재 음악 소비의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디지털 음원의 유통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과정에는 △실연자(가수·연주자)와 저작권자, 음반 제작사 등 저작권 권리자들 △벅스·엠넷·멜론 등 음원 사이트들 △음원을 벨소리·통화 연결음·온라인 포털 서비스로 가공하는 제휴사(이동 통신사 등)들이 겹쳐있다.

가수는 직접 쓰거나 작곡가로부터 받은 곡을 녹음해, 제작사를 통해 음반을 내놓는다. 음반은 홍보 대행사나 기획사를 통해 음원 사이트와 계약이 맺어져 해당 음원이 온라인에서 팔릴 수 있게 된다. 이 음원은 다시 제휴사와의 계약을 통해 벨소리 등으로 가공된다.

이 과정에서 음원 사이트가 수익의 절반 정도를 가져가고, 저작권협회에 지급되는 저작권료(9%)와 실연권협회에 들어가는 실연권료(4.5%)를 제하고 나서야 제작사나 음악인에게 돌아가는 몫이 생긴다. 여기서 또 음원 유통 대행사에 지급하는 비용도 빼야 한다.

가령 싸이월드의 경우 음원 1곡이 판매되었을 때마다 계약 해당자인 '기획사 및 음반사'로 35%의 음원 권리료(저작인접권료)를 지불하고 있다. 여기에 저작권자에게 5%를 실연권자에게 2.5%를 따로 지급하지만, 수익의 57.5%는 고스란히 싸이월드로 돌아가는 셈이다.

물론 '기획사 및 음반사'로 지급된다는 35%가 어떻게 쪼개져 가수에게 떨어질지는 양자 간 맺은 계약에 좌우된다. 가수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는 회사도 있을 것이고 반대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1곡(약 500원) 당 35%(약 175원)를 회사와 음원 유통 대행사 등과 나눈다고 할 때 현실적으로 음악가에게 남는 몫은 많아야 몇십 원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음원 개별 다운로드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음원 사이트들이 경쟁적으로 내놓는 '9000원에 150곡 다운로드' 등 파격적인 월 정액제나 실시간 듣기(스트리밍) 서비스는 영세한 음악가·제작사에 돌아가는 파이의 크기를 더욱 줄인다. 또 휴대폰 벨소리, 통화 연결음 등 이동 통신사를 거치는 제휴 서비스를 구매할 경우에도 음악가에게 돌아가는 몫이 거의 없다는 것이 한 음원 사이트 관계자의 전언이다.

김작가 씨는 이러한 불합리한 구조가 "인디 음악을 넘어 한국 음악계의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다만 그는 "가수가 대형 기획사에 소속돼 있는 경우 CF나 방송 출연 등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다른 플랫폼이 존재하지만, 개별적으로 활동하거나 약소 레이블에 소속된 인디 뮤지션들의 경우 음원 판매 외엔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달빛요정이 인디 음악계에선 드물게 매 앨범마다 2000장 안팎의 판매고를 기록하는 '히트 가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단 하루만 고기 반찬 먹게 해줘"('도토리')라고 노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편한 현실, 어떻게 고치나

고인은 생전에 자신이 대중 매체에서 '88만 원 세대'나 '루저' 등 젊은 세대를 둘러싼 사회 문제의 대변자로 표현되는데 대해 불만을 토로했지만, 결국 눈을 감으면서도 사회 문제를 고발하게 됐다.

'도토리 논란'으로 불거진 음원 수익 구조의 불공정성 문제가 온라인상에서 공론화되고 있는 것. 누리꾼들은 음원제작자협회 등 뮤지션들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협회의 직무유기를 성토하는 한편 이동 통신사와 음원 제공 업체들의 자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인디뮤지션들이 자발적으로 노조나 협회를 만들어 권익을 옹호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도 나온다. 따로따로 흩어져 자신의 음악 생산에만 몰두해 왔던 소규모 생산자들 스스로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홍대 앞 인디뮤지션들이 음악 생산 기반과 공정한 유통 채널을 마련하기 위한 준비 모임('자립음악가생산자모임(준)')을 지난 5월부터 추진해 왔다. (아래 상자 기사)

한편, 2008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음반상을 수상하기도 한 밴드 '못(MOT)'의 이이언 씨는 최근 자신의 트위터(@eaeon)를 통해 "음원 수익 배분의 비율도 문제지만, 그것이 전혀 투명하게 관리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인터넷 상에서 어떤 음원이 얼마만큼 전송·재생되고 있는지 기록이 확실하지 않아 뮤지션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수익이 은폐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씨는 "과거 정보통신부에 근무하던 지인이 이런 확실한 기록을 위해 디지털 음원 유통에 대한 '공인인증시스템'을 도입한 적이 있으나 관련 협회·부처의 반발로 무산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저작권 협회와 음원 유통사가 담합하면 시장 규모 자체를 얼마든지 축소 은폐할 수 있는 구조"라며 우려했다. 공정한 유통이 이뤄지려면 정부의 감시와 개입이 필요함을 지적하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뮤지션의 CD를 사거나 공연을 가는 것은 고사하고 500~600원이 드는 음원 구입에도 인색했던 이들에게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크다. 많은 음원 사이트들이 월 정액제·스트리밍 서비스 가격 경쟁에 매달려 온 데엔 소비자의 요구가 가장 큰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와 함께 유럽의 자멘도(Jamendo)와 같은 대안적인 디지털 음원 유통 플랫폼을 개발할 필요성도 거론되고 있다. 자멘도는 뮤지션들이 음원의 공개, 홍보, 상업적 사용이나 재판매 가능 여부에 대한 계약 내용을 직접 작성하고, 방문객들은 게재된 음원을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각 뮤지션들 페이지의 방문자 수와 그들이 맺은 상업적 이용 계약의 내용에 따라 수익을 정산하게 되며, 자멘도와 해당 뮤지션이 50:50으로 나눠 갖는다.

달빛요정은 떠났지만, 한국 음악계의 불편한 진실은 그의 불편한 가사들과 함께 고스란히 남았다.

태동하는 '자립음악가생산자모임'

같은 음원 수익 배분 문제라도 다른 활동 경로가 없는 인디 뮤지션일수록, 그 가운데서도 덜 알려져 있거나 청자 폭이 적은 이들일수록 더욱 심각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뮤지션들은 대형 음원 사이트를 둘러싼 디지털 음원 수익 배분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하면서도 "수많은 문제들 중 일부"라고 입을 모았다.

이번 논란으로 '뮤지션들이 노조나 협회를 만들어 권익을 옹호하면 어떻겠느냐'라는 제안이 나오는 가운데, 실제로 인디 뮤지션들의 자립 시스템 마련을 추진 중인 '자립음악가생산자모임(준)'의 일부 멤버를 8일 만났다.

달빛요정의 1집처럼 제작사 없이 자가 제작한 앨범을 지난 6월 발매한 '밤섬해적단'의 권용만 씨는 "홍대 인디 음악계에서는 인터넷에서 음원을 팔지 않는 뮤지션들도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그가 지적한 인디 음악계의 불공정 구조는 "레이블과 계약하고 앨범을 냈는데 돈을 하나도 못 받은 경우, 공연을 하고도 정당한 대가를 못 받는 경우" 등 다양하다.

그는 "초점은 소위 '돈이 안 되는' 음악을 한다고 해도, 자신이 음악을 만든데 대해선 조금이나마 대가가 와야 한다는 것"이라며 "중간에 많은 부분이 가로채어지는 것이 문제"라고 설명했다. 같은 밤섬해적단의 장성건 씨는 "현재의 시장 구조는 뮤지션의 열정을 착취하는 구조"라고 거들었다.

과거 '아마츄어 증폭기'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한받' 씨는 "작년 모 음원 사이트와 계약을 하려다가 뮤지션에게 전적으로 불리한 구조로 되어 있는 계약서를 읽고 고개를 저었다"고 말했다. 그는 2004년 한 레이블과 정식 계약을 맺고 앨범을 발매했으나 레이블 측으로부터 한 푼도 정산 받지 못한 경험도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그가 만들고 노래한 음원은 레이블을 통해 음원 사이트에 올라가 여전히 판매되고 있다. 자신의 의지완 상관없이, 자신에게 떨어지는 몫 없이 음원이 거래되고 있다는 것이다. 몇 년간 이런 상황을 지켜본 한받 씨는 "수익이 공정하게 음악가들한테 배분될 수 있는 대안적인 유통 채널을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립음악가생산자모임을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공간'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공간은 인디 뮤지션들의 또 다른 생존 활로인 라이브 공연과 관련한 문제다. 클럽에서 공연을 하고도 대가를 지급받지 못하는 것은 클럽들조차 운영 사정이 여의치 않아 대관료가 치솟기 때문이다. 한받 씨는 "한 클럽은 2006년 이후 드는 손님은 그대론데 건물 임대료가 두 배 이상 올랐다"며 "뮤지션이 아무리 뼈 빠지게 공연을 해도, 클럽 주인이 정당한 대가를 주고 싶어 해도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비슷한 이유에서 연습할 공간 역시 문제다. 밴드 '노컨트롤'의 황경하 씨는 "2008년쯤 홍대 인근의 합주실 10개 정도가 모여 가장 싼 방의 대여료를 1시간에 8000원에서 1만 2000원으로 올리자는 담합을 하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음악 생산자가 아닌 장소를 가진 자가 터무니없는 이득을 취하는 구조는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홍대 인디 음악계가 공생이 아닌 자멸의 굴레로 순환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문제제기가 터져 나온 것은 지난 5월 1일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 역 근처 철거 건물 '두리반'에서 열린 '전국 자립음악가 대회 뉴타운 칼챠 파티 제공 <51+>'라는 공연을 전후해서다. 두리반 농성 투쟁 기금 마련과 노동절 120주년 기념을 위해 인디 뮤지션 60팀 이상이 힘을 합친 이날 공연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뮤지션이 자립할 수 있도록 상황을 타개해보자'는 담론이 형성됐다.

이후 진지를 짠 일부 뮤지션들이 5개월 이상 회의와 토론을 통해 개선해야 할 문제들을 수렴시켰고 현재에 이르렀다.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이들은 "다양한 음악이 살아 숨 쉬는 인디 음악계가 대중음악 시장의 '마이너리그'로 전락하지 않도록 그 자체를 지켜낼 목적"이라면서 "불합리한 사례들을 찾아 대응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지난 5월 1일 '두리반'에서 열린 <51+> 공연 모습. ⓒ프레시안(허환주)

/안은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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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 2009년 1~5월 일기…음악과 세상 고민의 편린 고스란히

“내 처절한 파멸만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

 

〈esc〉가 지난해 11월 갑자기 세상을 뜬 이진원씨의 일기를 단독 입수했다. 달빛요정의 일기와 글은 조만간 <행운아>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 도서출판 북하우스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2009년 1월부터 5월까지 그의 일상, 음악과 세상에 대한 고민의 편린이 담긴 그의 일기를〈esc〉가 요약·발췌해 공개한다.

정리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2009년 1월16일 금요일 | 출판사에서 선인세가 입금되었다. 오늘부터 일기를 써야지. 나름 문학소년이었던 고등학교 때 꽤 열심히 쓴 일기들을 이사 다닐 때마다 발견하고 몇 년에 한 번씩 훑어보곤 하는데 그때의 일기가 해마다 다르게 읽히더군. 어차피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음악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후 사고의 성장이 멈췄으니 세상을 대하는 기본 마인드는 변함없지만.

 

그러다 대학에 들어가서 방위로 소집되기 전까지 2년 동안 매일 술을 먹는 바람에 글질 같은 것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 2년 동안 기타 열심히 쳤으니 후회는 없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어야 할 내 스무살을 별 되도 않는 논쟁들에 휘말려 지냈던 것은 좀 아쉽다. 음악도 많이 못 들었던 것 같다. 듣기도 하고 많이 부르기도 했다만 그건 노래가 아니었지.

 

한숨 자고 일어나 밤 9시부터 11시까지 연습, 모레가 공연이라 음주는 하지 않았다. 장하다, 달빛요정.

 

 

“팬이라곤 있어도 루저들뿐”

 

1월17일 토요일 | 엊그제 2월 단독공연 포스터 1000장이 나왔는데 붙일 일이 막막하다. DC인사이드 인디밴드 갤러리에다 올리긴 했는데 페이가 짜서 그런지 영 호응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붙이기도 뭐한데 포스터에 내 얼굴이 제대로 나와 있단 말이지. 뮤지션으로서 살아남는 방법은 결국 팬심을 이용하는 것뿐이란 말인가. 팬이라고 몇 있지도 않거니와 있어도 루저들뿐인데.

 

1월19일 월요일 | 돈 되는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하던 남용이는 지금 일본에서 장사하면서 잘살고 있고 ‘Rock Spirit’ 운운하면서 겔겔대던 나는 벌써 5년차 가수가 되어 음악으로 돈 벌 궁리만 하고 있다는 것. 나의 음악은 그때쯤 끝나는 게 딱 좋았을지도 모른다. 어디든 취직해서 10년쯤 굴러먹다가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젊은 날의 보상심리로 비싼 기타나 한두 대 사서 매일매일 닦고 조이며 ‘스테어웨이 투 헤븐’이나 ‘티어스 인 헤븐’ 같은 유명한 곡들을 가끔 연주하는 것. 그리고 가끔 보는 티브이에 나오는 아이돌의 음악성을 욕하며 자신의 ‘Rock Spirit’에 존경을 보내는 것. 그런데 가끔 나도 나 자신에게 묻는다. “아이돌이 음악성이 왜 필요해?”

 

1월20일 화요일 | 장기하가 뜨긴 뜬 모양이다. 장기하 및 인디음악 관련 에스비에스 뉴스와 인터뷰. 연습하는 거 찍어 갔는데 제발 불쌍하게만 안 나오면 좋겠다. 나의 무한한 추락이 그들에게는 가벼운 소재가 되겠지. 나의 처절한 파멸만이 내가 뮤지션으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 대중의 귀는 알 수가 없는 법.

 

 

1월23일 금요일 | 월급날, 나의 유일한 고정수입, 저작권료. 고정수입이긴 하지만 액수를 예상할 수 없으니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며 받아야 한다. 언젠가부터 10만원은 넘게 나오고 있으니 핸드폰 요금은 낼 수 있다. 가끔 100만원도 넘게 나올 때는 친구들에게 시원하게 고기를 쏘기도 한다.

 

1월25일 일요일 | 점촌. 아버지와 어머니가 여관을 하시는 곳이다. 나와 동생을 대학에 보내고 과감히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내려가 음풍농월하고 계신다. 어디든 서울보다 나을 거다. 심심해서 그렇지. 1년에 서너 번 정도 가는데 언젠가부터 조금씩 개발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대운하 관련해서 땅값이 좀 올랐다고 좋아한다. 그래봤자 10년 동안 1000만원 오른 것. 어쨌든 대운하는 안 된다. 그만 좀 파헤쳐라.

 

2월2일 월요일 | 대림역 작업실을 처분했다. 보증금 50만원에 권리금 30만원 내고 들어가서 월세 8만원에 잘 썼다. 어차피 방이 6개나 되는 시끄러운 공동작업실이라서 새벽에만 가서 썼는데 택시요금도 만만치 않고 새벽에 몰래 도둑처럼 녹음하는 것도 처량하고 그래서. 잘 쓰시오, 저한테 나름 추억이 묻어 있는 곳이니. 그리고 꼭 음악으로 성공하세요. 여름이면 많이 습할 텐데, 환기도 안 되고.

 

2월5일 목요일 | 그분께서 닌텐도 같은 게임기를 만들라고 하셨는데, 게임기는 삽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어요, 만들어도 아무도 안 사요. 왜 내가 당신 때문에 관계에 대한 고찰을 해야 하는데, 우리의 관계는 수직인가요? 수평인가요? 당신은 면제잖아요, 대통령은 국민보다 위에 있나요? 이런 병신 같은 생각으로 하루를 보냈다. 아까운 나의 서른일곱의 하루.

 

 

3월1일 일요일 | 나도 얼굴에 철판 깔고 야부리 까고 다닐 능력이 있었으면 음악 만드는 것보다 음악에 대해 이거저거 싸질러대면서 딴따라판 언저리를 맴돌고 있지 않았을까. 차라리 영화평론가들은 나은 것 같아. 음악평론이라는 건 아무나 싸지를 수 있지만 누구나 잘 싸지를 수는 없어.

 

3월14일 토요일 | 홍대 앞 클럽 ZOO에서 메탈공연을 보다. 10장 정도 앨범을 낸 한국의 대표적인 메탈그룹이 자기 노래 할 때보다 카피곡 할 때 더 좋다는 게 가슴 아프기도 했다. 노래가 다 비슷하다는 게 문제. 공연을 보고 껍데기집에서 소주 한잔하고 맥줏집에서 2차로 미치도록 달렸다.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서글퍼지기도 하고 가슴 아파지기도 하고 취하기도 했던 그런 날이었다.

 

 

“난 장기하보다 더 넓은 음역대의 가창력”

 

4월5일 일요일 | ‘88만원 세대의 힘겨운 데뷔전’에 달빛요정 전격 출연. 역시 장기하한테 묻어가는 달빛요정. 올해의 인터뷰는 끊임없이 장기하와 비교당하며 하고 있는데 미디어에 종사하고 있는 인간들이 달빛요정에게 원하는 건 ‘서울대를 안 나온 장기하는 어떨까’에 대한 답인 것 같다. 미안하지만 난 그 답을 해줄 수가 없다. 난 달빛요정이니까.

 

TV라는 게 화려한 사람은 더 화려하게 만들어주고 초라한 사람은 더 초라하게 만들어주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자극적이고 과장되어 있는 거지. 그리하여 시사/교양 프로그램에 나온 나를 보고 내 주위 친척들은 언제나 잔소리다. 엄마는 음악 때려치우라고 난리다. 왜 인터뷰만 하면 븅신처럼 보일까.

 

4월6일 월요일 | ××일보 인터뷰, 내가 장기하 때문에 고생이 많다. 장기하는 나를 알까? 장기하한테 가서는 달빛요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기는 할까? 나는 장기하보다 더 넓은 음역대를 가진 그저 그런 가창력의 소유자.

 

4월9일 목요일 | 작가 후배가 주위에 오빠 팬이 있는데 나중에 만나서 술이나 같이 한잔하자고 해서 알았다고 문자를 교환한 적이 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소개팅. 어이없어서 고기 먹고 동동주 먹고 만취. 나중에 소개팅시켜주기로 했는데 주위에 남은 것들은 돌싱 아니면 어린것들, 혹은 딴따라. 딴따라 소개팅시켜주는 건 좀 위험하지. 엘지 트윈스 1승(-1).

 

4월23일 목요일 | 저작권료 받는 날. 노래방 저작권료가 들어왔나 보다. 꽤 많다. 한달 생활비 및 밀린 공과금 내고 나면 본전을 유지할 수 있을 듯. 저작권료 받는 날은 매번 설렌다. 대체 얼마나 받을지 알 수가 없으니, 이런 것이 갬블하는 기분일까. 고정수입이 있는 사람이 부럽다. 나도 계획적으로 금전관리를 해보고 싶다구. 엘지 트윈스 1패(-3).

 

 

 

“자고나면 죽음에 더 가까워진 느낌”

 

 4월24일 금요일 | 간밤 숙취로 아침부터 기상, 술을 먹으면 잠을 잘 못 잔다. 뭐, 평소에도 그다지 잘 자는 편은 아니지만. 수면을 통해 기력을 회복하는 게 아니라 자고 일어나면 죽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져 있는 느낌. 오늘은 드라마 <친구> OST에 들어갈(들어갔으면 하는) 노래의 가이드를 작업해야 한다. 이 엿같은 시대에 희망 찬 노래를 쓰는 건 위선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도 먹고살아야 하므로 어쩔 수 없다. 엘지 트윈스 1승(-2).

 

4월26일 일요일 | 새벽까지 술을 먹었지만 8시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 박찬호 선발 등판 경기 시청. 밀어서 홈런 치는 찬호를 보며 크게 한 번 웃었다. 언제나 스릴 넘치는 박찬호 선발 등판 경기를 보고 다시 잠을 잘까 했는데 어제 먹은 술이 덜 깨서 그런지 머리가 아프다. 에잇, 잠도 안 오는데 어제 불러논 거 작업이나 하자. 제목은 ‘축배’로 정했다. 멜로디 및 구성은 완성했으나 긍정적인 가사를 일부러 쓰려니 역겨워서 대충 입에 붙는 걸로 불러서, 가이드로 만들어서 그런 건가. 까였다. 내 앨범에나 써야지. ‘361 타고 집에 간다’ 풍의 노래를 원한다는데 이제 그런 노래 만들기는 지겹기도 하고 비슷한 리듬의 노래를 만든 지가 얼마 안 돼서 새로 작업하기가 부담스럽다. 하나 어쩌랴, 빡세게 모아서 4집 앨범 제작비를 마련해야 한다. 엘지 트윈스 1패(-2).

 

5월8일 금요일 | 어버이날인데 잊고 있다가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선물은 필요 없고 빨리 장가 좀 가라는 닦달. 아이구 지겨워.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공연연습 및 신곡연습. 6월13일에 스카이하이에서 공연하기로 했는데 메탈밴드들이랑 할 것 같아서 걱정이 태산. 엘지 트윈스 7연승(+4).

 

5월9일 토요일 | 클럽 타에서 루네 1집 발매 기념 공연 게스트. 7시 조금 넘어서 첫 밴드로 공연 시작. 역시 가오 잡는 건 힘들어. 게다가 조명은 왜 이리 센지 눈이 부셔서 노래를 부르기가 심하게 불편했다. 언제나 그렇듯 내 공연 빼고는 객석에 여인들이 가득하다. 이러한 문화생활을 즐기는 부류들은 대충 20대의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경제력을 갖게 될) 여인들이기 때문이겠지. 게다가 루네의 음악은 온갖 지적 허영의 코드가 가득하다. 스타벅스를 먹는다고 뉴욕에 온 건 아닌데. 이런 글 썼다가는 샤레이블 애들한테 쳐맞겠구나. 불만족스러운 공연을 끝내고 럭셔리 수노래방 맞은편에 있는 생맥줏집에서 밴드 애들끼리 한잔하고 2차로 루네 공연 뒤풀이에 가서 새벽 두어 시까지 만취하도록 마시고 집에 왔는데 어떻게 왔는지 기억은 안 난다. 다시 만취의 날이 되었군. 결심한 대로 12시에 갔어야 했는데. 엘지 트윈스 8연승(+5).

 

5월23일 토요일 | 공연 다음날은 무조건 절대 휴식. 나의 유일한 낙. 시체놀이.

 


 

달빛요정 유고: 나는 어떻게 달빛요정이 되었나

“서른 넘어 음악만으로 살기로 했다”

 

나는 달빛요정이다. 왜 하필 ‘달빛요정’이냐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 뜻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인터뷰를 많이 했더니 이젠 모범답안도 생겼다. “‘달빛요정’은 제가 피시통신 시절부터 쓰던 아이디구요, 그렇게 몇 년을 쓰다가 미래가 안 보이는 제 삶을 격려하기 위해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라는 노래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 노래가 밴드 이름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한숨에 발음하기 힘든 불친절함도 마음에 들었구요.”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매번 참으로 친절하게 답변해주지만, 홈페이지만 한번 훑어보고 와도 다 아는 내용 아닌가. 속으로는 열불이 난다오, 기자님들아.

 

나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라는 밴드를 혼자서 이끌고 있다. 요새는 공연을 위해 밴드를 조직해 한 달에 한 번 정도 공연을 하고 있어 겉으로는 홍대 바닥을 굴러먹는 많은 보통의 밴드들과 다를 바 없으나, 앨범을 만들 때는 제작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으니 원맨밴드라 불러도 그리 거창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원맨밴드라는 분류가 뭔가 음악적인 대단함을 과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는 가끔 ‘싱어송라이터’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이 표현도 가끔은 부담스럽다. 난 노래를 잘 못하니까. 그렇다고 ‘음유시인’이라고 불리는 건 더 민망하다. 그래서 생각해낸 말이 ‘가내수공업 뮤지션’.

 

처음이자 마지막, 한 번만으로 그치고 말리라 생각했던 가내수공업. 그렇게 소위 ‘가수’로 데뷔한 게 2003년, 그 후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몇 장의 정규앨범과 몇 장의 미니앨범을 낸 나름 중견이라면 중견인 뮤지션이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의 나이를 먹었으나 나의 음악 제작방식은 여전히 가내수공업에 가깝고 형편도 그때보다 나아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음악만으로 평균적인 수준의 삶의 질을 누린다는 건 불가능하다. 상판이 좋든가 몸빨이 좋든가 말빨이 좋든가 춤을 잘 추든가 인간관계가 넓든가 아니면 최소한 웃기기라도 하든가.

 

하지만 나는 음악으로만 살기로 하였다. 서른 넘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념앨범을 내기로 결심할 때도 몇 년을 고민했고 3집을 낼 때쯤에 찾아온 허탈함에 몸서리칠 때도 결론은 결국 역시 나는 음악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것. 그러려면 나는 많은 걸 포기하면서 살아야 한다. 구질구질하게 사는 법에 익숙해져야 한다.


빚을 내서 1집을 만들었다. 그 빚을 지금도 갚고 있다. 대한민국 평균의 남자는 평생 빚을 갚으며 산다. 나도 마찬가지. 친구들은 차를 사고 집을 사고 애 키우는 데 빚을 지지만 나는 음악을 하기 위해 빚을 졌다. 어울리지 않는 비싼 옷을 10년 할부로 산 셈이다. 평생을 갚아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뮤지션의 신분을 갖기 위해 평생 갚아야 할 큰 빚을 졌다. 하지만 언젠가는 대박이 날지도 몰라. 그 로또만큼의 확률을 향한 내 욕망의 흔적.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그렇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은 욕망이다. ‘73년생 이진원’이 아닌 내가 스스로 붙인 이름을 갖고 싶었던 욕망. 현실의 이진원은 대한민국 하위 70퍼센트의 인간이다. 그래서 나는 무대에서 달빛요정의 탈을 쓰고 평균치의 인간이 된다. 노래하는 이진원은 달빛요정이다.

 


 

달빛요정 유고: ‘도토리’에 대해서 ~ “말도 안되는 수익구조”에 분노

 

도토리. 싸이월드 엿먹으라고 만든 곡.

 

에스케이(SK)에서 인수하기 전에 가입했다가 별 재미 없어서 내버려두고 있다가 싸이월드가 한창 유행일 때 들어가서 ‘친구찾기’ 기능으로 타고 들어온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의 옛 친구들이랑 글 좀 교환하다가 그 좁은 화면에 질려서 또다시 방치. 공식 홈페이지보다 싸이월드 클럽이나 일촌관계를 더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서 사진 퍼가라고(홍보의 수단이 이런 거밖에 없다니, 참으로 가슴 아프도다) 또 몇 번 관리하다가 요새는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두고 있는 그곳, 혹은 그 짓거리. 과시욕과 관음증이 서로 반응하며 공존하는 곳.

 

싸이질은 거의 하지 않지만 싸이월드를 통해 탄생한 수많은 된장녀와 허세남들의 자폭 인증은 참으로 많이 보았다. 내 노래가 그런 욕망의 공간에 배경음악으로 사용된다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뭐, 어쨌든 내 노래가 널리 퍼지면 좋은 일이다. 나는 이런 신기한 음악도 듣는다는 문화적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함일지라도 나쁘지 않다. 문제는 그게 하나도 고맙지 않게 느껴진다는 것.

 

요새는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싸이월드에서 노래 한 곡을 500원에 구입했다고 치자. 일단 수입의 반은 에스케이가 먹는다. 250원이 남는다. 이 250원을 싸이월드에 음원을 납품한 디지털 음원 유통회사와 5 대 5 정도의 조건으로 나눠 먹는다(그나마 이건 좋은 조건). 그러면 125원이 남는다. 본인이 직접 제작했을 경우에는 이걸 다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은 제작자가 절반 이상을 가져간다. 좋은 조건으로 계약해 5 대 5의 분배조건을 갖는다 하더라도 75원. 여기서 또 도대체 뭘 관리해주는지 알 수 없는 저작권협회에서 관리수수료 명목으로 9퍼센트를 떼어간다. 70원도 안 되는 금액이 저작권자에게 돌아간다. 그나마 이건 작사와 작곡을 같이 할 경우. 두 사람에게 나눠진다면 35원씩 받게 된다. 만약 밴드음악이라면 더 끔찍하다. 밴드멤버 4명이 공동으로 작사, 작곡에 참여했다면 한 곡당 20원도 못 받게 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익분배 구조. 참고로 외국의 대표적인 음원서비스인 아이튠스(itunes)에서는 서비스 제공업체인 애플(Apple)이 30퍼센트를 가져간다고 한다. 이것도 많이 먹는다고 뮤지션들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인간의 권리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기 위한 국민학교를 나왔으니까. 인간이 되기 위한 초등학교를 나온 어린 분들이여, 당신들은 부디 파이팅!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게 사내새끼 죽는소리라는데 당신들은 죽는소리 안 해도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요정은 기원합니다. 이것은 요정의 축복!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새로운 세상이여, 열려라!

 

이 노래에서 가장 맘에 드는 노랫말인 ‘벗으라면 벗겠어요’는 오래전에 심하게 열중해서 보았던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 나오는 신이의 대사에서 따왔다. 물론 더 오래전부터 한국 에로영화에서 가끔 들었던 대사이다. 어디에서 들었던 것 같은 ‘나는 무겁고 안 예쁘니까’는 김태희가 나왔던 싸이언 시에프(CF)에서 따온 것이다. 그 시에프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어쨌든, 카피 만든 분께 경의를 표한다.

 

 ‘달빛요정’ 고 이진원씨의 유고 ‘도토리에 대해서’와 관련해, SK커뮤니케이션스 싸이월드는 13일 음원 수익배분율은 50대 50이 많지만 달빛요정의 경우 40(싸이월드 쪽)대 60의 비율이 적용됐다고 밝혀왔습니다. 아울러 다른 음원판매 회사가 ‘100곡에 1만원, 한달에 4500원’ 등으로 덤핑판매하는 것에 견줘, 싸이월드는 음악인들에게 돌아가는 수익률이 가장 높다고도 전해왔습니다. 디지털 음원 수익분배에 대해 더 자세한 사항은 지난해 11월9일치 <한겨레>에 실린 서정민 기자의 기사 <‘달빛요정’의 외로운 죽음 뒤엔…음악인 피말리는 디지털 음원 시장이 있었다>(www.hani.co.kr/arti/culture/music/447790.html)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인디 속 인디 달빛요정, 루저 투혼 그립다

죽은 뒤 더 빛나는 이진원의 메시지…27일 추모공연 100개 팀 홍대 집결

 

 

지난해 11월6일 37살 한창나이에 황망히 세상을 떠난 1인 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하 달빛요정)의 고 이진원. 홍대 인디음악계가 낳은 스타로 꼽히지만, 7년 남짓한 길지 않은 그의 음악 인생은 인디신에서도 비주류 중의 비주류에 속했다.

 

2003년 발매된 데뷔 앨범 <인필드 플라이>(왼쪽 사진)에서 그에게 지명도를 안겨준 노래는 두 곡이다. ‘절룩거리네’와 ‘스끼다시 내 인생’. ‘절룩거리네’는 엠비시 에프엠(MBC FM) <신해철의 고스트네이션>에 소개되면서 인기를 끌었고 이 프로그램의 인디 차트에서 5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정작 인디신에서는 그의 이름이 별로 회자되지 않았다.

 

우선 그의 활동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인디신에서 뮤지션이 지명도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활발한 클럽 공연이 필요했다. 당시 시스템은 이랬다. 먼저 공연을 통해 반응과 입소문이 생겨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레이블과 계약을 거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라이브 활동으로 생긴 반응을 토대로 앨범을 낸다. 그중 반응이 좋아 공연의 마지막 곡으로 부르는 노래를 앨범 타이틀 곡으로 삼아 홍보하는 식이었다. 이런 시스템이 당연했던 시절이다. 하지만 달빛요정은 앨범을 내기까지 이렇다 할 클럽 공연을 한 적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음악은 펑크와 모던 록으로 양분되던 당시 인디음악계의 어떤 경향과도 무관했기 때문이다. 이는 함께 무대에 설, 비슷한 음악을 하는 이들이 없고 홍대 앞으로 그의 공연을 보러 올 고정 관객층도 그다지 없었다는 얘기다.

 

 

또한 기존의 음악인들이 클럽에서 공연을 보러 다니는 관객에서 출발해, 자연스럽게 인디음악 커뮤니티에 몸담게 되고, 멤버를 모아 밴드로 데뷔하는 일반적인 인맥 확보의 경로에서도 그는 벗어나 있었다. 학교 졸업 뒤 회사를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홀로 작업실에서 곡을 만들며 어느 날 갑자기 앨범을 냈던 그였기에 비빌 언덕도 마땅치 않았다. 고작해야 홍대 동문 출신으로 이미 터를 잡고 있던 음악인들이 전부였다. 말 그대로 ‘인디의 인디’였달까.

 


데뷔 전 클럽공연 경험 없는 ‘비주류 중 비주류’

 

 

 

그러나 그의 음악에 주목했던 이들이 있었다. 오히려 평소 라이브 클럽이나 인디 레이블에 관심이 없던 20~30대의 일반 대중이었다. 전형적인 장르 음악이 아니라 민중가요와 1980~90년대 가요의 분위기를 갖고 있는 음악은 진입 장벽이 낮았다. 또한 당시 주류와 비주류를 막론하고 찾아보기 힘들었던 직설적이면서도 자조적인 가사, 게다가 명확한 가사전달력이 처음 듣는 이들에게도 높은 호소력을 안겼다.

 

그래서 그의 공연장은 다른 인디 밴드들의 그것과는 자못 다른 풍경을 보였다. 여느 공연장의 객석을 10~20대 인디음악 팬들이 메우는 반면, 달빛요정의 음악을 들으러 오는 나이대는 그보다 높았다. 다른 밴드의 공연에서 보기 힘든 얼굴들이 유독 많았으며 남성의 비율 또한 높았다.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음악이 주로 회자되는 공간은 음악 애호가들이 모이는 음악 웹진의 게시판보다는 생활인들이 취미를 공유하는 커뮤니티의 게시판이었다. 누군가 이 노래 좋지 않으냐며 ‘절룩거리네’를 올려놓으면 댓글이 호응하는 식으로, 그의 음악은 회자됐다. 앨범이 계속 나오고 공연을 지속하면서 객석을 메우는 이들도 점점 많아졌다. 초기 공연 당시의 관객이 손에 꼽을 만큼의 인원이었다면, 지난해엔 매진에 가까운 인원을 동원하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재래시장을 방문해서 상인에게 목도리를 벗어준 그 유명한 사진을 패러디한 포스터를 내세웠던 공연이 가장 많은 관객을 모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생전의 인터뷰와 보도자료를 통해 “연봉 1000만원만 벌 수 있으면 계속 음악을 하겠다”고 했다. 세번째 앨범 <굿바이 알루미늄>(오른쪽 위 사진) 발매 당시 했던 말이다. 그리고 이 앨범에서 그의 뜻은 이뤄졌다. ‘치킨 런’ 같은 기존의 자조적 음악이 역시 기존 팬들에게 호응을 얻었고 ‘나를 연애하게 하라’가 대표적인 여성 취향 페스티벌인 그랜드민트페스티벌의 2009년 테마송으로 선정되면서 문화 소비 시장을 주도하는 여성들도 팬층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페스티벌 당시 이 테마송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샤방하게’ 차려입은 여성 관객들이 흥얼거리며 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기존 달빛요정의 음악이 소비되던 방식을 떠올리면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는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근근이 먹고살면서 동생들 술 사줄 정도는 되는” 정도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대통령 재래시장 방문 패러디해 인기 폭발

 

그런 상황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힘으로 거기까지 갔던 그였기에 비보가 주는 안타까움이 더 컸나 보다. 그가 데뷔하고 7년이 지나 음악계의 판도도 많이 바뀌어 장르보다는 분명한 음악적 정체성이 평가의 기준이 되고, 밴드뿐만 아니라 ‘달빛요정’ 같은 싱어송라이터들도 많은 활동을 하는 상황이 됐다. 그 시점에서 그는 여러 음악인의 하나일 뿐이었다.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음악이었기에 팬뿐만 아니라 다른 음악인들도 그의 가사와 메시지에 대해서 높이 평가할 정도였다. 더는 아웃사이더가 아니었다. 버티고 버텨서 살아남았다. 그렇게 살아남아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 그는 세상을 떴다.

 

이제 한국 음악계가 그를 기린다. 오는 27일은 홍대 앞, 아니 한국 음악계에 한 획을 긋는 날이 될 것이다. 100여팀의 음악인들이 함께 달빛요정을 추모하는 공연을 벌인다. 여느 ‘떼공연’과는 다르다. 무대에 서게 될 팀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물론 노개런티다. 동시에 공연이 진행될 20여 라이브클럽·카페·바 역시 마찬가지다. 서교음악자치회, 라이브음악발전협의회, 클럽문화협의회 등 홍대 앞에 존재하는 여러 음악 관련 단체들이 처음으로 모두 함께 주관한다. 공연을 꾸미고 진행할 자원봉사 모집 공고가 나간 지 하루 만에 100명이 넘는 인원이 지원했다.

 

이 공연에 참가하는 음악인들의 면면을 보자면 화려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블랙홀, 블랙신드롬 같은 헤비메탈부터 디어 클라우드, 요조 등 모던 록까지 한국에 현존하는 모든 장르의 음악인들이 다 모인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장르뿐 아니라 세대도 다양하다. 함춘호, 이상은 같은 중견부터 크라잉넛, 노브레인으로 대표되는 인디 1세대, 장기하와 얼굴들, 국카스텐 등 신진 스타들까지 총망라된 출연진이다. 규모와 방식만 보자면 홍대 앞, 아니 아니 한국 음악계를 대표했던 이에게 바치는 공연 같다.

 

칼럼니스트 김작가 noisepop@hanmail.net


 

홍대앞 인디밴드들이 사는 법 ~ ♬ 고달파도 음악에 죽고 음악에 살고 ♪

 

누구나 라면을 먹는다. 그런데 라면 먹는 모습만 나온다. 젊은 독신 상당수가 반지하에 산다. 유독 그들만 반지하에 사는 것처럼 그려진다. 인디음악인들 얘기다. 90년대 중반 이 땅에 ‘인디’라는 말이 등장한 이래 그들의 삶을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가난이 꼬리표처럼 따라붙곤 했다. ‘어두운 반지하에서 라면을 먹지만 음악이 있어 행복하다.’ 그런 기사가 나올 때마다 그들은 고개를 가로젓곤 한다. 그렇다면 인디뮤지션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한마디로 말할 수 없다. 말해서도 안 된다. 회사의 말단 직원과 회장의 삶이 다르듯 여러 층위가 존재한다. 음악만으로 어느 정도 생활이 가능한 층이 있고, 부업을 하는 경우가 있다. ‘안 벌고 안 쓰자’는 일념으로 검박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도 있다. 다만 9시 출근 6시 퇴근이라는 수레바퀴 바깥에 있기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음악적 열정과 꿈이 있기에 오늘의 생활이 고달파서 잠깐 주춤해도 내일을 향해 질주를 멈추지 않는 인디음악인들이 홍대 클럽신에서는 다수 서식중이다. 달빛요정의 이진원이 그랬던 것처럼.

 

» 국카스텐. 왼쪽부터 드럼 이정길, 베이스 김기범, 기타·코러스 전규호, 기타·보컬 하현우.

 

생활과 작업 | 가장 골치 아픈 건 홍보

 

인디밴드 국카스텐의 하현우(29)는 아침에 할 일이 없다. 출근을 하는 것도, 학교를 가는 것도 아니다. 스케줄은 대부분 오후부터 시작된다. 대개 늦잠을 잔다. 8일 밤엔 늦도록 많은 문자가 왔다. 전날 방송된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붉은밭’과 ‘거울’을 불렀다. 시청자들은 뒤집어졌다. 포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국카스텐이 차지했다. 다른 멤버들은 보나마나 한잔하고 있을 게 뻔했다. 하지만 하현우는 집이 안산이고 술도 못 마신다. 서울예대 부근 작업실에서 하던 신곡 작업을 계속했다. 잠든 시간은 새벽 5시. 빠르면 오전 11시, 늦으면 오후 2시께 일어날 때까지 전화벨은 울리지 않을 것이다. ‘일어나면 전화해줘’라는 메시지 정도가 있을 뿐. 다른 뮤지션들도 거기서 거기니까.

 

일정은 단순하다. 방송·인터뷰·공연·행사, 넷 중 하나다. 나머지 시간은 밤과 마찬가지로 작업의 연속이다. 스케치 단계의 곡이 어느 정도 형태가 잡히면 멤버들과 편곡 작업을 한다. 편곡은 주로 합주실에 모여 ‘잼’으로 만들어진다. 먼저 곡을 써온 멤버가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각자 악기별로 살을 덧대어 최종적인 곡의 형태로 완성하는 식이다. 그렇게 곡이 쌓이면 앨범 작업에 들어간다.

 

» 2010년 허클베리핀 공연 장면.

 

요즘은 홈 리코딩 기술이 발달해서 웬만한 녹음은 다 집에서 컴퓨터로 할 수 있다. 때문에 앨범 제작비도 아끼려면 얼마든지 아낄 수 있다. 시디를 공장에서 찍는 데 몇십만원 정도만 있으면 된다. 그나마도 예전 붕가붕가레코드처럼 일일이 시디를 구워서 가내수공업 형태로 낼 수도 있다. 물론 레이블의 지원이 확실하다면 비용을 들여 스튜디오 녹음을 하고 양질의 커버를 갖춘 멋진 음반을 낼 수도 있다.


앨범을 낸 뒤, 그다음이 문제다. 유통도 생각해야 하고 홍보도 안 할 수 없다. 몇해 전만 해도 신촌의 향뮤직이나 홍대의 퍼플레코드 등 마니아들이 주로 찾는 레코드 가게에 앨범을 가져다 놓는 게 최선이었다. 최근에는 미러볼 뮤직 같은 인디음반 전문 유통사들이 생기면서 음반뿐 아니라 디지털 음원 유통도 쉽게 해결됐다. 그래도 홍보는 골치 아프다. 물론 90년대나 21세기나 인디음악인들에게 최선이자 최후의 보루는 라이브 클럽이다. 일단 클럽 평일 무대에 서는 걸로 경력을 시작한다. 아직 음악으로 먹고살아 보겠다는 야심 같은 거, 없을 때다. 그냥 음악을 하고 싶을 뿐인 그런 단계다. 거기서 어느 정도 주목을 받으면 주말 공연에 설 수 있다.

 

아예 입소문을 확 받으면 레이블로부터 연락이 온다. 2008년 국카스텐, 한음파, 장기하와 얼굴들을 배출했던 <교육방송>(EBS) ‘스페이스 공감’의 신인발굴 프로그램 ‘헬로 루키’ 이후 인디음악인들을 상대로 한 오디션도 꽤 늘어났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인디음악인들은 이름을 알린다. 그때 대상을 탔던 국카스텐의 하현우는 말한다. “음악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었어요.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동안의 삶에 대한 용서가 되는 기분이었어요.” 물론 음반을 낸 뒤 인터넷으로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지는 일도 있다. ‘앙코르 요청 금지’로 2007년 연말에 화제가 됐던 브로콜리 너마저, ‘인터넷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들으며 ‘홍대 앞의 빅뱅’으로 군림했던 장기하가 그 좋은 사례다.

 

 

» 허클베리핀이 운영하는 또다른 술집 ‘샤인’. 보컬 이소영씨는 청소중.

 

» 음악작업을 하는 허클베리핀의 보컬 이소영씨.

 

생활과 경제 | 레슨·행사 없인 못살아

 

음반 시장은 갈수록 힘들어진다. 음원 시장은 커지지만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제값 주고 음원 사는 사람이 그다지 없다. 그나마도 아이돌 음악에만 압도적으로 쏠린다. 게다가 음원 사이트 및 이동통신사의 불합리한 수익분배율 탓에 정작 음악인들이 가져가는 건 한숨만 나오는 수준이다. 그러나 요즘 기준으로 음악은 콘텐츠다. 콘텐츠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마련.

 

음악인들의 첫번째 부가가치로는 레슨이 있다. 우후죽순 실용음악과가 생기면서 사교육 시장이 열렸다. 실용음악과를 졸업한 연주자의 경우 입시학원의 우선 섭외 대상이다. 대부분의 학원에서 음악 생활을 인정해주기에 활동에도 지장이 없다. 모던록 밴드 디어클라우드는 멤버 전원이 이런 레슨을 통해 생활을 해결하는 대표적인 예다.

 

실용음악과 지망생이 아니더라도 레슨을 받으려는 이들은 많다. 최근 취미로 악기를 배우려는 학생이나 직장인이 많아졌다. 베이스 김기범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 전원이 독학으로 음악을 한, 즉 입시학원을 노리기 힘든 국카스텐은 “아마 레슨이 없었다면 거지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모든 음악인들이 레슨을 하는 건 아니다. 기타 좀 가르쳐 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섰음에도 “내가 기타를 배워서 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누굴 가르치지 못한다”며 거절하기 바쁜 문샤이너스의 차승우 같은 이들도 있다. 스무살이었던 98년 당시 이미 한상원에게 한국의 차세대 기타리스트로 꼽혔던 준재임에도.

 

레슨 못지않은 건 행사다. 수많은 지자체들의 수없이 많은 축제 무대나 각종 영화제, 봄가을 황금 시즌인 대학 축제가 행사 시장의 주된 밥그릇이다. 지명도는 없지만 연줄이 있어서 운좋게 행사를 따는 경우 적으면 10만원 정도의 출연료를 받는다. 지명도가 쌓이면 100만원대로 올라간다. 히트곡이 생기면 500만원까지도 받을 수 있다. 500만원급의 밴드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행사가 많아도 생활이 넉넉지 못한 경우가 많다. 레이블과 팀이 3:7로 수익을 나누고 또 멤버들끼리 나누면 손에 쥐는 돈은 그리 많지 않다. 행사라는 게 그렇게 자주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음악 성향이 차분해서 행사장의 분위기를 방방 띄우지 못한다면, 섭외에서 제외되기 마련이다. 이들은 그래서 주로 출연료 낮기로 소문난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행사나 문학의 밤에 주로 불려간다. 이렇게 행사로 벌어들인 수익을 멤버들끼리 나눠갖는 일도 있지만 밴드 통장에 쌓아두는 경우가 더 많다. 앨범 제작비나 장비 구입에 쓰기 위해서다. 레슨 수익이 월급이라면 행사 수익은 투자금인 셈이다.

 

» 국카스텐에서 드럼을 치는 이정길씨.

 

 

레슨과 행사로 생활을 해결하기 힘든 이들이 택하는 길은 다른 일을 갖는 거다. 하드코어 밴드 바셀린의 멤버들은 모두 다른 일을 갖고 있다. 뮤직비디오 감독, 패션디자이너, 대형마트 직원 등의 버젓한 직함이 그들의 명함에 새겨져 있다. 인디음악 중에서도 비주류이기에 처음부터 전업 뮤지션 대신 건실한 생활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펑크 뮤지션들 역시 ‘노동자의 삶’에 대한 존중으로 두 개의 삶을 사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노동량의 절정이라는 대리급 사원이 되면 라이브 클럽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이런 환경을 잘 알고 있기에 아예 사장이 되는 음악인들이 늘고 있다. 2000년대 중반부터 홍대 앞에 카페 문화가 조성되고 상권이 커지면서 음악인 출신의 사장이 하나둘 생겨났다. 극동방송국 앞에서 ‘바 샤’를 운영하고 있는 허클베리핀이 대표적인 경우다. ‘비닐’ ‘레게치킨’ ‘이리카페’ 같은 홍대 앞의 명소들 역시 전·현직 음악인들이 시작해서 성공한 가게들이다. 허클베리핀은 다른 음악인들과 달리 밴드가 함께 가게를 시작했기에 음악에 쓸 힘을 많이 뺏기지 않을 수 있었다.

 

 

생활과 행복 | 음악은 내 운명…후회는 없다

 

 

전업이든 부업이든 음악만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기란 힘들다. 그래도 그들은 음악을 한다. 국카스텐의 하현우는 말한다. “후회해본 적 없어요. 음악 말고 잘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내가 포기가 빨라요. 중학교 때 영어수업 첫 시간에 그걸 느꼈어. 음악을 시작했는데, 이건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들이 후회하는 건 대략 이럴 때다. “들국화 트리뷰트 앨범에 들어갈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를 녹음하는데 전인권의 보컬에서 넘을 수 없는 벽을, 부르면서 느꼈어요. 불러도 불러도 나는 안되는 건가 싶더라고요.” 허클베리핀 이소영의 말이다. 스타가 되는 건 다음 문제다. 그저 음악이 있을 뿐이다. 운명이다.

 

 

인디음악계 삼권분립 형성사

 

인디음악의 인프라는 세 축으로 구성된다. 우선 라이브 클럽. 1994년 개업한 전설의 클럽 드럭을 시작으로 스팽글, 마스터플랜 등 초기의 클럽들은 인디 신 탄생의 견인차였다. 초기에는 클럽마다 소속 밴드들이 고정적으로 서는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누가 공연을 하든 클럽의 분위기를 좇아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는 ‘죽돌이’들이 있었다. 그러다가 밴드의 개별적인 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새로 생긴 클럽은 ‘스타 밴드’의 공연이 필요했다. 인기 있는 밴드들은 클럽을 가리지 않고 공연을 했다. 클럽이 레이블을 겸하고 있었던, 즉 그 클럽에서 공연을 하는 밴드의 앨범이 클럽의 이름을 달고 발매되던 시스템 역시 사라졌다. 1998년 ‘인디’를 시작으로 레이블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클럽 대신 레이블이 소속된 밴드들의 음악적 색깔을 대표하기 시작했다. 팬들과의 소통(클럽), 앨범제작·홍보(레이블), 음악 생산(음악인)이라는 인디 음악계의 삼권분립이 이미 인디 신 초기부터 형성된 것이다.

 

글 칼럼니스트 김작가 noisepop@hanmail.net·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2011-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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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의 음악정신, 추모공연을 통해 되살린다!

 

 

지난해 11월 뇌경색으로 쓰러져 숨을 거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이 부활해 다른 멤버들과 합주를 하는 특별한 무대가 마련된다.

오는 27일 저녁 7시 서울 홍대 앞 클럽 26곳에서 103팀이 참여한 가운데 동시다발로 열리는 ‘달빛요정 추모공연-나는 행운아’ 주최측은 마지막 순서로 스페셜 프로그램을 준비한다고 밝혔다. 이날 다른 클럽의 모든 공연이 마무리되는 밤 11시가 되면 상상마당 라이브홀에서 특별한 무대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 무대에서 생전 공연 실황에서 따온 이진원의 실제 목소리와 기타 연주를 틀고, 이에 맞춰 평소 같이 공연하던 다른 멤버들이 악기를 연주한다. 이를 위해 이동훈(기타), 장혁조(베이스), 유승혜(키보드) 등이 손발을 맞추고 있다. 무대 한가운데 이진원이 서던 자리에는 공연하는 이진원을 실제 크기로 비추는 화면을 세워, 마치 다함께 공연하는 듯한 광경을 연출할 계획이다.

주최측은 이날 스페셜 프로그램을 포함한 모든 공연의 타임테이블(첨부자료)을 확정하고 홈페이지(www.rockwillneverdie.com)에 공개했다. 이날 출연진 가운데 눈길을 끄는 밴드들도 있다. 달빛요정을 기리기 위해 멀리 제주도에서 날아오는 밴드(피리)가 있는가 하면, 프로 뮤지션이 아니라 취미로 음악을 하는 이들이 뭉친 직장인 밴드도 있다. 이번 공연을 위해 특별히 ‘달빛요정카피밴드’라 이름붙인 직장인 밴드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대표곡들을 연주할 계획이다. 한음파, 수상한 커튼 속 제제와 부엉이, Mono Tone 등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과 함께했던 멤버들이 따로 활동하고 있는 밴드들도 추모공연에 나선다.

뮤지션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높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트위터에선 추모공연 소식이 널리 전파되고 있으며, “반드시 추모공연에 가겠다”는 내용이 지속적으로 올라오고 있다. 이날 공연 진행을 도울 자원활동가 70여명을 모집하는 데는 300명이 넘는 지원자들이 몰려 주최측이 행복한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달빛요정 추모공연은 1만원 팔찌 티켓으로 모든 클럽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공연 수익금은 기본적인 경비를 제외하고 일체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추모사업’(가칭)에 쓰인다. 이날 입장하는 관객들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 발표한 앨범 가운데 한 장을 골라 받을 수 있다.
문의 : 컴퍼니에프 (02-334-7191)

 

>> 추모공연 참가할 뮤지션 명단 103팀 (가나다 순서대로)
가자미소년단, 갤럭시 익스프레스, 게이트플라워즈, 고구려밴드, 구텐버즈, 국카스텐, 권우유, 김마스타, 김정배, 나비잠, 내귀에 도청장치, 네바다 #51, 노브레인, 노컨트롤, NY 물고기, 니나노난다, 달빛요정카피밴드, 달콤한소금, 더문, 디어 클라우드, 라루나, 랄라스윗, 레스카, 로맨틱펀치, 모모필드, 밀크티, 박호산, 밤섬 해적단, 보드카레인, 블랙신드롬, 블랙홀, 서드스톤, 수상한 커튼 속 제제와 부엉이, 슈퍼 8비트, 슈퍼키드, 스윙체어, 스팟라이트, 시조새, 신가람밴드, 아이씨 사이다, 아톰리턴즈, 아폴로18, 악퉁, 안녕바다, 애쉬그레이, 야마가타트윅스터, 얄개들, 엑시즈, 옐로우몬스터즈, 오소영, 와이낫, 요조, 원펀치, 이미지, 이상은, 이스턴사이드킥, 이윤혁, 이장혁, 이한철, 일단은 준석이들, 잠비나이, 장기하와얼굴들, 저지브라더, 정혜숙, 제이벨원, 조한석, 최고은, 치바사운드, 치즈스테레오, 카피머신, 크라잉넛, 킹스턴루디스카, 타루, 타바코쥬스, 타카피, 텔레파시, 투명, 퍼플헤이즈, 피리, 피콕그린, 한음파, 허쉬크릭, 허클베리핀, 황보령=SmackSoft , 회기동 단편선, 49 Morphines, 4Hz, Beam Eyes Beam, Bye Bye Badman, Casual Visit, DJ 안과장, Don M, Easy FM, Mono Tone, Ninesin, Pop Record House, Rockcatz, Sound Smith, The Loosers, The Unitd 93, TV Yellow,  UMC/UW, WHOOL.

>> 추모공연 참가 클럽 명단 26개소 (무순)
롤링스톤즈, 긱라이브하우스, A.O.R, 리디안뮤직, 스카이하이, 라이브클럽 빵, 라이브클럽 쌤, 쏘울 언더그라운드, 브이 홀, 스팟, 솔라, 프리버드, 오뙤르, KT&상상마당, 에반스, 고고스2, 클럽 타, FF, Bar Sha, DGBD, 롤링홀,FB 소울하우스, 크랙, Common, 벤 제임스, 씨클라우드.

▶ 달빛요정 추모공연 '나는 행운아' 타임테이블과 공연장 상세히 보기  http://j.mp/h2UqZ2

 

20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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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 추모공연에서... 88만원세대가 달빛요정에게 보내는 편지

"이제 우리가 역전만루홈런을 날릴게요"

 

달빛이 되어버린 사내에게

 

당신의 노래를 처음 들었던 날은 싱그러운 청춘이 보석처럼 빛났던 어느 해 봄이었습니다. 광화문거리에는 희망을 담은 촛불들이 하나둘씩 불을 밝히던 때였습니다. 우리들도 거리에 앉아  학점, 스펙, 취업 문제와 같은 고민들을 함께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젖은 신발을 신고 지하철 5호선 첫 차에 올라탔을 때, 당신의 노래는 나의 차가워진 감성을 어루만져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당신을 볼 수가 없게 되었네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27일 오후 7시 홍대로 발걸음을 옮겼어요. 이 날은 <나는 행운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당신의 추모공연이 있는 날이었거든요.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공연장 안을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조금이라도 빨리 당신을 만나려고 걸음을 재촉했건만 처음 문을 두드린 클럽 빵(club bbang)은 이미 사람들로 넘쳐났어요. 당신이 그리워 모인 사람들 때문이었지요. 그 곳에서는 저녁 7시 '달빛요정카피밴드'가 첫 공연을 할 예정이었거든요. 자원봉사 스태프 이지현 씨(22)는 "(클럽 빵에서만) 100장이 넘는 표를 준비했는데, 이렇게 빨리 매진될 줄 예상하지 못했다"며 미안한 기색을 표했어요. 다른 클럽에서 표를 사가지고 오라면서 안내를 해주기도 했어요. 그 때 시각 저녁 7시 15분 이었어요.

 

아주머니 한 분과 함께 표를 구하러 나섰지요. 중학교 2학년짜리 딸과 함께 왔다는 40대 아주머니는 클럽이 처음이라고 했어요. 당신을 잘 알지 못했지만 신문기사를 보고 찾아왔대요. 그는 "이진원씨 노래가 참 맑더라. 살아온 삶 자체가…. 그냥 막 살던 사람이 아니라 지하 단칸방에서도 자기 꿈 가지고 하고 싶은 것 끝까지 하던 사람이니까"라며 미소를 지었어요.

 

 

▲ 매진 달빛요정 추모공연티켓은 일찌감치 매진돼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른 클럽에서 표를 구해 클럽 빵에 돌아왔어요. 순서가 바뀌어 달빛요정카피밴드가 저녁 8시부터 공연을 시작했어요. 순수 아마추어 직장인밴드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달빛요정카피밴드는 "왕년에 밴드의 꿈을 안고 음악을 하다 각자 직장에 들어갔으나 최근에 다시 규합했다. 오늘이 우리의 첫 공연이다"라고 말했어요.

 

카피밴드의 두 번째 무대에서는 관객이 직접 노래를 했어요. 카피밴드의 보컬이 엊그제 한일전을 보다가 목이 다 쉬어버렸데요. '절룩거리네'를 부르겠다고 당차게 나선 이는 당신을 '산적 아저씨'라고 부르곤 했다는 26세 여자였어요. 자신을 88만원 세대라고 소개한 그는 "연봉 1000만원을 벌 수 있으면 계속 음악을 하겠다"고 이야기한 당신이 자신에게 희망의 아이콘이었대요. 그는 "그림을 그리며 디자인을 하는데, 한 달에 100만원도 벌기 어렵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당신을 추모하며 노래를 시작했어요.

 

절룩거리네

하나도 안 힘들어

그저 가슴 아플 뿐 인걸

아주 가끔씩 절룩거리네

깨달은 지 오래야 이게 내 팔자라는 걸

아주 가끔씩 절룩거리네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절룩거리네' 중에서

 

자리를 옮겨 도착한 곳은 브이홀(V-Hall)이었어요. 저녁 9시부터 카피머신의 공연이 시작됐죠. 카피머신의 보컬 준다이씨는 "준비한 표 4500장이 30분 만에 매진됐답니다"라며 환호를 했어요. 그는 이어  "오늘 행사는 단발적인 것이지만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자기 음악을 하는 사람들을 응원해준다면 희망은 있을 것입니다. 공은 음악인들이 던지지만 홈런은 여러분이 치시는 겁니다"라고 외친 뒤 관객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한 무대를 보여줬어요. 그들의 신나는 노래에 일어서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권우유씨가 공연을 하고 있다.

 

제 옆에서 폴짝 폴짝 뛰면서 마구 소리를 지르던 사람은 알고 보니 40대 주부였어요. 혼자 공연장을 찾았다는 최미정(42)씨는 "그동안은 몰라서 못 왔다. 이렇게 함께 호흡할 수 있어서 정말 좋다"라고 말했어요. 심지어는 "(이런 좋은 공연은) 만 원 더 받아야 한다"라고 말해서 88만원 세대인 기자의 가슴을 놀래키기도 했어요.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P(30)씨는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다니던 컨설팅 회사를 얼마 전에 그만 뒀대요. 그는 "예전에는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막상 직장에 가보니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어요. 그는 앞으로 시를 쓰고 싶대요. 순간 그에게서 직장을 그만두고는 그토록 하고 싶던 음악을 시작한 당신이 보였어요.

 

저 산이 좋아서 저 산을 바라봤어

왜 오르지 않냐고 사람들은 웃었어

산아 내게 불어줘 날 납치해줄 바람을

내가 가고 싶은 낙원으로 나를 데려줄

땅 위의 파도 몰아치는 비바람

씻은듯이 데려가줘

- 카피머신, 'Rodeo' 중에서

 

"달빛요정 잘 몰랐는데, 자꾸 눈물이 나요..."

 

시각은 어느덧 밤 10시. 브이홀의 마지막 무대는 '장기하와 얼굴들'이 장식했어요. 이미 홀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꽉 차있었어요. 장기하 씨는 당신을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이야기하고는 그냥 헤어져 아쉬웠대요. 그는 당신의 일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어요. 최근 일부 공개된 당신의 일기에는 '장기하는 날 알까?'라는 구절이 있었대요. 장기하씨는 "알 뿐만 아니라 달빛요정이 날 알기 전부터 좋아하고 존경했었다. 오늘 그 말을 여러분들께 대신 전한다"고 말했어요. 그러고 나서는 "울면 안 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어요.

 

▲ 공연장 밖 공연장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밖에서 음악을 감상하고 있다.

 

스쳐 지나갔던 너의 두 눈 속에 있지도 않았던 눈물이 생각났어

난생 처음 봤던 너의 얼굴 뒤에 숨지도 않았던 옛날이 보였었어

나 정말로 없었는지 한번만 더 보고싶었어~어 아~아

- 장기하와 얼굴들, '정말로 없었는지' 중에서

 

추모공연의 마지막은 바로 당신의 무대였어요. 밤 11시 상상마당 지하 2층 라이브홀에는 26개 클럽으로 흩어졌던 300여명의 뮤지션들이 한 데 모였어요. 관객들을 말할 것도 없었지요. 자리가 부족해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홀 바깥까지 자리를 메우고 모니터를 통해 공연을 지켜봤지요. 우리는 무대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당신을 볼 수 있었어요. 당신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어요. 스크린 속 당신의 목소리를 따라 실제 연주 세션이 반주를 맞춰주었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렸어요. 역시나 눈물을 흘리고 있던 남상현 씨(25)는 "사실 달빛요정을 잘 몰랐는데도 이 자리에 오니 자꾸 눈물이 난다"고 말했어요.

 

▲ 허클베리핀 추모공연을 하고 있는 허클베리핀

 

달빛요정,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제가 당신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당신을 잘 알지 못하는 이가 많았어요. 하지만 당신 때문에 103팀의 뮤지션들이, 5000명에 달하는 관객들이 한 자리에 모인 거예요. 이 날 공연에 참여했던 허클베리핀의 이기용 씨(기타, 보컬)는 "오늘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날인 것 같다. 지금 진원이가 홍대를 누비면서 음악을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달빛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진원이를 생각할 것이다. 매년 이맘때 그를 위해 노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겠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니 당신은 정말 '행운아'인지도 몰라요. 이제는 우리가 당신이 던진 공을 받아칠 차례인 것 같아요. 지금은 비록 '스끼다시 인생'일지라도, 또 다시 '절룩거릴'지라도, 역전만루홈런을 치는 그 날을 위해서 말이에요.

 

꿈이 꿈대로만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찬란히 빛났으면 좋겠다. 어디에서든.

- 달빛요정의 마지막 에세이, <행운아> 본문 중에서

 

201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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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작가의 음악동향] 언론은 인디가수 추모공연에서 무엇을 봤나

홍대 앞을 비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홍대 앞엔 달이 뜨지 않았다. 하늘에서 잠시 내려와, 홍대 앞을 유유자적 휘젓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자신을 추모하기 위해 벌어진 판을 즐기고 있을 것 같았다. 지난 달 27일,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추모 공연 '나는 행운아'를 말이다.


"오늘처럼 홍대 앞이 홍대 앞 다웠던 적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무대에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밴드에서 키보드를 맡아온 유승혜는 말했다. 그랬다. 90년대부터 한국 대안 문화의 상징적 공간이었던 홍대 앞. 많은 사람들이 홍대앞이 예전같지 않다고 말한다. 아니, 말해왔다. '예전'의 기준은 언제였을까. 주류 문화와는 다른 뭔가가 시작되었던 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쨌든 홍대앞은 독자적 자생 문화가 존재하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판도와 세력이 달라졌을 뿐. 그녀가 말했고, 많은 이들이 공감했던 '홍대 앞 다웠던 적'은 홍대 앞에 문화공동체로서의 열망이 들끓었던 때였을 것이다. 자본과 세월의 논리에 의해 홍대 앞 문화가 산업화, 혹은 상업화 되면서 사라진 공동체로서의 열망. 지난 27일은 그 열망이 휴화산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던 순간이었다.

 

 


 

100여 팀의 뮤지션들, 26개의 공연장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행사를 진행할 자원봉사자는 모집 하루만에 300여 명이 모였다. 클럽문화협회, 라이브음악발전협회, 서교자치회 등 이 좁디 좁은 판에서 이해관계와 설립목적을 달리하고 있던 단체들이 한 마음이 됐다. 그 누구도 수익분배라던가 하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계산기를 두드리면 능히 1억 정도의 예산이 필요했던 행사였다. 기적의 시작이었다.
 
완성은 관객의 몫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이슈가 바뀌는 한국에서 과연 몇 달 전에 사망한, 그것도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지 못했던 음악인의 죽음을 누가 기억할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처음 이 공연이 기획되기 시작할 무렵의 얘기다. 기우였다. 문의는 끊이지 않았고 이야기는 계속 됐다. 그리고 당일. 첫 공연이 시작된 오후 7시에 대부분의 공연장에 관객들이 들어 찼다.
 
8시쯤 되었을 때는 먼저 풀린 4000장의 티켓이 모두 동났다. 예비로 확보하고 있던 500장을 포함, 총 4500장의 티켓이 8시 반을 전후해서 모두 팔렸다. 티켓을 구하러 이 공연장 저 공연장을 해매이는 이들이 홍대앞에 넘쳐났다. 약간이라도 인기있는 팀이 무대에 서면 공연장 바깥 복도에서 음악을 듣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티켓을 못 산 이들은 내한하는 팝스타의 티켓을 놓친 것 만큼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근처 술집에서 아쉬움을 달랬다. 누가 공연을 하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4500명 중 하나가 되고 싶은 바램,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꾸려진 이 역사의 순간에 동참하고 싶은 열망이 그들을 평일의 홍대앞으로 이끌었다.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 객석을 채운다는 것만으로 공연의 제목처럼 '나는 행운아'라고 말할 수 있었다.
 
분명한 추모였다. 무대에 선 이들 대부분이 고 이진원을 기렸다. 허클베리핀은 'Moon Light Dance'라는 추모곡을 발표했다. 장기하와 얼굴들은 자신들의 '정말 없었는지'를 추모의 마음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대다수가 그의 노래를 리메이크했다. 그 때 마다 모든 공연장은 숙연해졌다. 눈물이 함께 했다. 애시당초, 추모가 이 공연의 시발점이었다. 하지만 귀착점은 축제였다. 모든 공연이 끝난 후 11시, 상상마당에서 고 이진원의 영상과 음성이 담긴 소스를 바탕으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영상 콘서트가 열렸다. 제한된 공간에 입장가능했던 진정한 행운아, 즉 500여명의 관객들은 그의 노래를 목청껏 합창했다. 마치 그가 진짜 무대에서 노래하고 있다해도 믿을만큼의 열기로. 다른 공연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생전 처음 들었을지도 모를 노래들을, 뮤지션의 유도에 따라 합창하고 환호했으며 뛰어 놀았다. 혹한의 밤바람은 여름 페스티벌의 혹서처럼,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데 아무런 제약도 되지 못했다. 영상콘서트에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멤버들은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보였다. 이 미묘한, 하지만 멋진 아이러니의 아이콘 같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이 공연을 수락했을 그들도, 결국 행복했을 것이다. 홍대 앞에서 펼쳐진 이 기적같은 밤을 지켜보며.
 
아쉬운 건 단 하나였다. 많은 언론들이 이 공연 취재를 나왔다. 다음날 뉴스에서 이 공연이 비중있게 보도됐다. 그러나 초점이 빗나갔다. '생활고로 사망한 인디 뮤지션의 안타까운 죽음'을 추모하는 공연으로 다뤄졌다. 그러나 묻고 싶다. 그는 불행했을까. 가난이 불행의 동의어일까. 유의어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과 잘할 수 있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원없이 하다간 음악인을 불행이라는 틀로 재단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나. 비단 고 이진원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실례를 무릅쓰고 고 이진원의 동생이 트위터에 남긴 말을 인용한다. "앨범을 6장 내고 다수의 팬도 있고 책도 낸 능력있는 사람의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하면 안되는 건지..." 이 땅의 예술인들은 대체로 사회안전망 바깥에 있다. 자기 창작물로 생활이 불가능한 구조다. 언론은 그런 것들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어야하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대안 문화를 지지하고 있는지를 비췄어야 하지 않을까. 경제력에 따른 행복과 불행의 이분법이 아니라.

2011.2.7 / 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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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행운아>

달빛요정, '非서울대 장기하' 아닌 '행운아'였다!

기사입력 2011-02-18 오후 6:18:40

트위터를 뜨겁게 달구더니, 각종 포털사이트의 메인 화면을 가득 채우고 이내 9시 뉴스에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의 평생 숙원이던 '인기 가수'가 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

세상을 뜨고 나서야 사람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음악을 널리 알릴 수 있었던, 재능이 넘치지만 행운이 넘치지는 못했던 한 음악가가 남긴 책 <행운아>(북하우스 펴냄)의 제목을 두고 –자신의 노래 '나는 행운아'와 같은 제목이다-역설적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진원은 분명 행운아다.

공연장에서, 그보다 더 자주 술자리에서 얘기를 나눈 이진원은 그것이 말이건 음악이건 기타건 자신의 얘기를 하며 남루한 미사여구를 붙여본 적 없다. 그 자리가 어디건 상대가 누구건 하고 싶은 말을 아낀 적도 없었고 그렇다고 과장하거나 꾸며서 한 적도 없다. 이 책에서도 소개되는 소위 '짭새' 사태, 그가 지난해 5월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근처에서 지나가는 경찰차를 보고 '짭새가 지나간다'고 말했다가 서교파출소에 연행됐던 사건에서도 마지막은 그날 한 번밖에 쓰지 못하고 잃어버린 LG트윈스의 새 모자를 찾아 달라 하지 않는가!

절제되어 있거나 과장되어 있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진원의 그런 화법은 때로 지나치게 낯선 것이어서 그를 가까이 하기 힘든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다. 사실 그 배경에는 '술'이라는 촉매제가 자리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음악을 하면서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은 자신의 음악을 '멋지게' 들리도록 포장하거나 뭔가 있어보이도록 하는 현학적 방법들을 쓰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조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평소 사람들에게 얘기하듯, 인터넷에서 자신의 얘기를 글로 올리듯, 이진원의 음악은 그렇게 이진원스러웠다. 시원시원한 멜로디라인과 그만큼이나 호쾌한 목소리, 담백하고 간결한 편곡 위에 감출 것도 없이 솔직하게 풀어가는 노랫말. 달빛요정만루홈런의 음악이 주는 감동은 어쩌면 그의 음악적 재능이라기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음악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행운아>(달빛요정역전만루홈련 지음, 북하우스 펴냄). ⓒ북하우스
그리고 <행운아>라는 책이 남겨졌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눈물겹게 반갑기도 하고 참 불편하기도 했다. 이진원이 평소 하던 말투가 그대로 살아있다. 역시 책의 출간을 위해 글을 쓴 게 아니라 자신의 말투 그대로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가고 있었다. 지금 바로 옆에서 '빠르고 더듬는' 말투로 얘기하는 듯해서, 그리고 언제나 하던 그 얘깃거리들이라서 반가웠지만 그를 아직 완전히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나와 동료들에게는 더 이상 이 친구를 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주었기 때문에 동시에 불편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책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프롤로그조차도 마무리하지 못한 것을 실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퇴고를 거쳐 이진원이 처음 원했던 혹은 출판사가 원했던 방향으로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말투와 음악이 그랬듯 이 책도 어쩔 수 없이 '이진원스러운' 그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책을 채우고 있는 것은 당연하게도 음악, 영화, 야구, 만화, 술, 음식 등 이진원이 항상 떠들어 대고 가사의 소재로 썼던 내용들이다. 단지 평소의 말 속에서 파편처럼 튀어 사라지거나 제한적인 양의 가사에서 잘려나갔던 부분이 고스란히 않고 담겨 있어서 마치 그의 사담을 녹음해서 재생하는 듯한 느낌이다.

특히 음악 하는 사람끼리 사석에서도 쑥스러워서 잘 하지 못하는 사적인 감상들을 밝혀, 평소 친분이 있던 사람들조차 그의 음악에 대해 재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곡을 만들기 시작할 때의 느낌, 완성해 가는 과정, 그리고 그 뒤에 숨어있는 뒷얘기들은 음악 하는 친구들끼리 모여 있을 때 이야기 소재가 되지는 못한다.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이의 음악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는 경우야 흔하지만,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대방의, 혹은 자신의 음악을 소재로 삼는 것은 드물뿐더러 요리사들끼리 서로의 요리에 대해 평하거나 자신의 요리를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진원은 이런 일반적인 경우에서 예외에 가깝긴 했다.)

물론, "조금 더 밝은 음악을 하는 게 어때?"라거나 "라이브 공연 때는 이런 식의 편곡이 더 좋겠어" 따위의 가벼운 조언들은 언제나 할 수 있었지만. 이진원이 이 책에서 터놓고 밝힌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음악들이 만들어진 배경과 그것을 만들 때의 감정 등은 음악 하는 동료로서도 매우 반갑고 소중하다.

<행운아>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야구라는 소재는 이진원과 내가 가장 많이 얘기한 것이기도 하다. 같은 야구팀을 응원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각별하다. 특히 그 둘이 야구에 완전히 미쳐있는 사람들일 때, 그것도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 팀에 푹 빠져 있는 경우일 때, 게다가 그 응원팀의 성적이 몇 년간이나 좋지 못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LG트윈스에 대한 이진원의 절절한 사랑은 자칭 '사랑타령'이라 불렀던 그의 다른 사랑 노래 혹은 그 이상으로 깊다. 2011년 LG트윈스 4강 진출 기원 공연을 같이 해보자했던 만큼, 더 이상 그와 함께 LG트윈스의 성적을 두고 한탄하거나 유망주들을 분석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외롭다.

이 책에 담긴 이진원의 일상과 취향은 마치 영상을 보는 것만큼이나 생생하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노래가 그렇듯 거침없이 풀어나간 글귀들이 어느 용감한 투수의 직구를 닮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불쌍하게 보는 시선을 단호히 거부하고 자신의 음악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조롱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생각은 책의 곳곳에서 아주 쉽고 솔직하게 발견된다. 혹여 이진원의 죽음을 '가난한 음악가의 비참한 죽음'이라는 포장하기 편리한 미디어의 뉴스로만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편견과 선입견은 그의 직구 앞에 어이없는 헛스윙으로 무너질 것이다.

음악은 본질적으로 시간 예술이다. 시간이 한번 지나고 나면 그 음악을 다시 듣는 것이란 불가능했다. 이것이 아쉬워 사람들은 그 음악을 남겨놓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냈다. 하지만 그 어떤 첨단의 방법으로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라이브 공연을 다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진원은 자신의 앨범들과 함께 이 책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이제 우리가 그를 만날 수 있는 길은 그 앨범 속에 담긴 노래들과 이 책에 남겨진 그의 얘기들뿐이다.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나고 난 이후에도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듣고 그의 글을 읽으며 그를 기억하고 추억할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직구를 던지던 용맹하고 늠름한 마운드 위의 한 투수로. 단 한 번도 비겁한 변화구를 용납하지 않고 세상이 뭐라 떠들건 자신만의 직구를 던지던 투수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은 행운아다. 그리고 그 행운은 오롯이 자신의 작품이다.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 보석처럼 빛나던 아름다웠던 그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절룩거리네' 중)

(☞라이브 영상 바로 보기)

 

/주몽 밴드 와이낫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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