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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Tour/My Tour - Asia

중국 - 심양

by Wood-Stock 2010. 7. 7.

0. 심양(瀋陽, Shenyang=선양) : 중국 요녕성의 성도

 

- 1625년 청태종 누르하치가 심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성경(盛京)으로 개명

- 1644년 청나라가 북경으로 천도한 후 1657년 봉천(奉天=펑톈)으로 개명

- 1929년 다시 심양으로 개명

- 1932년 심양을 강점한 일제가 다시 봉천으로 개명

- 1945년 2차 세계대전 이후 심양으로 복원

 

 

1. 요하(遼河=랴오허, Liao) 그리고 고구려, 발해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만주 벌판과 심양 부근을 거쳐 발해만으로 흐르는 강으로 이 강의 동쪽을 요동, 서쪽을 요서라 한다 (심양은 요동 지역에 있다) 일찍이 이곳은 고조선, 고구려 땅으로 개모성, 요동성이 있었고 요하를 구려하(句麗河)라고도 부르는 데에서 우리 역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수나라를 살수에서 처단한 고구려는 당나라의 침략을 안시성에서 제압했고 패배한 당태종 이세민은 이곳 요하를 거쳐 만리장성을 넘어 퇴각했다. 요하 유역과 심양은 고구려의 땅이었고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당에 편입되지 않발해의 중심도시로 우리 역사와 오랜 기간 함께해 왔으나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세운 요나라 이후 중국 땅이 되어 지금에 이른다.

 

대부분의 북방민족들(원, 금, 요, 청)은 요하와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으로 진출했는데 왜 고구려는 요하에서 멈추었을까??? 한방에 보낼 수 있었는데...

 

* 요하문명 : 황하문명과는 전혀 다른 그러나 훨씬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문명의 흔적이 요하 부근에서 발견되어 중국의 심기를 건드렸는데 이 요하문명의 주인공이 누구냐를 놓고 한-중간에 이견이 분분하다. (우리꺼라고 찜하면 되나?)

 

 

 

심양 시내에는 동북 삼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에서 가장 큰 요녕성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이 나의 관심을 크게 끌었던 이유는 이 곳이 과거 고구려, 발해의 영토였기 때문에 관련 유물이 많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의 실상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금, 청의 첫번째 수도였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작살냈던 소위 여진과 청나라의 초기 역사가 가장 잘 보존 된 곳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바로 황하문명보다 앞선 것으로 추측되지만 성격이 전혀 다른 소위 요하(遼河)문명, 홍산(紅山)문화의 방대한 발굴자료들이 바로 이곳에 있다는 것이다...

 

 

지금 국내 학자들은 이 요하문명을 우리 역사의 기원으로 보는 반면 중국은 그들 역사라 주장하며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주로 한반도와 만주지방에서 발굴된 것들과 유사하다는 객관적, 과학적 입장인데 비해 중국은 무조건 자기들거라 우기는 다소 황당한 입장으로 보인다. (여기서 대동강문명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북한은 제외다...)

 

솔직히 심양을 비롯한 만주지역은 중국에서 수천년동안 개무시하던 오랑캐의 땅이었는데 이제와서 자기들 역사를 무려 1000년 이상 상향시킬 수 있는 유적이 자기들 땅에서 쏟아졌으니 무조건 찜... 퉤퉤퉤... 이런 모습에 이르러서는 그저 헐~~~

 

 

 요하문명, 동북공정을 둘러싼 한중 갈등 양상을 역사서가 아닌 출토 유물중심으로 비교적 분석한 책이 있으니

 관심 있으면 한번쯤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역사서는 후대에 제멋대로 기술할 개연성이 있으나 출토 유물은 빼도박도 못하는 물증 그 자체...

 그런데 이마저도 우기는 그들은 정말...

 

 <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 > - 이형구, 이기환 공저

  http://www.yes24.com/24/goods/3387050?scode=032&srank=1

 

 

이 박물관의 요하문명관 5개 전시관을 차례대로 보면 요하문명 유물들이 중국 역사 속에서 전설로 통하는 夏,商,周나라의 실증자료로 둔갑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수,당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고구려,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부, 지자체 정도로 취급되는 상황을 분노와 허탈감으로 직시하게 된다.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을 내전, 반란 정도로 취급...)

 

수,당 전시관 한 모퉁이에 환도산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들과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장군총 내부의 축소모형이 전시되어 있으니 이미 중국사에 편입된 중국 지방정부 고구려의 안타까운 모습이 아니겠는가...

 

 

 

한반도에서 신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당나라 시대의 중국 영토로 표시된 지도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당시 발해국은 발해도독부로 조그맣게 표시되어 있다... 유난히 작은 한반도... (사진확대후 확인해 보시기 바람)

 

 

지금 우리는 동북공정을 백두산 영유권, 고구려 역사왜곡 정도로 파악하고 있지만 그 실체는 요하문명에서 비롯되는 중국 역사의 재편과, 요하문명에서 보듯 중국과 한국은 먼 옛날부터 한 국가, 하나의 문화권이었다는 논리로 변방의 나라 한국 역사의 종속화를 밀어부치고 결국에는 중국의 다음성으로의 편입까지 고려한 행보라는 느낌도 받았다...

 

북한의 고립과 이어지는 정권붕괴 시점이 바로 그때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게하는 지도 한장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조선성... 동북 4성...) 너무 지나친 억측인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우리는 한중 무역관계라는 자본주의 논리에 매몰되어 심한 대응을 자제하는 분위기까지 있었고 또 한쪽으로는 독도 문제에 대해서도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해괴논리 덕분에 그들 교과서가 전부 바뀌어도 대응을 자제하는 실정이다. 

 

학자들도 제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특유의 뻥으로 미루어 머지않아 자기네 역사가 1만년도 넘는다고 우기는 날도 머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거 보고 웃고 즐기고 무시하다가 우리 5천년 역사가 중국 역사에 편입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뒤로하고 박물관을 나왔다... (미국이 있어서 걱정 없다고???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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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현세자, 심양장계, 추노

 

1627(인조 5년) 후금은 명과 가깝던 조선과의 전쟁(정묘호란)을 통해 형제의 맹약을 맺고 돌아갔으나 청(淸)으로 개국한 이후 계속 명과의 유대를 지속하던 조선을 1636년(인조 14년) 다시 침략하여 1637년 1월 남한산성에서 조선 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군신의 관계를 맺게 된다

 

소위 삼전도의 비극이라 불리우는 병자호란의 결과 인조의 세아들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과 청과의 결사항전을 외치던 삼학사(윤집, 홍익한, 오달제)가 청으끌려갔는데 세 왕자가 머물렀고 삼학사가 처형된 곳이 당시 청의 수도였던 심양이다.

 

청심양고궁의 입구... 북경의 자금성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작은 이곳의 규모는 덕수궁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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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등 왕족이 머물렀던 조선관은 현재 심양시립아동도서관 자리로 추측되며 삼학사가 참수당한 곳은 중산공원 부근이라 전해진다. 또한 청국의 명령에 따라 노비, 공녀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 지금의 심양 서탑지구인데 이곳은 지금도 조선족과 한국인이 다수 거주하는 곳이다

 

심양 고궁에 전시되어 있는 청나라의 군기와 당시 갑옷...

이 갑옷을 입고 이 깃발을 휘날리며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패망 직전까지 몰아갔던 것이다.

 

 

명분도 없고 상대도 안되는 무모한 전쟁으로 나라를 패망 직전까지 몰고갔던 무식하고 용감한 무대뽀 인조와는 달리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머물면서 명나라의 패망을 직접 목격했고 청나라와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를 직접 체험하여 조국으로 돌아가면 이를 적극 활용하여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청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소현세자가 못마땅했을 뿐만 아니라 배신자로 생각했고 나아가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데 독살되었다는게 대다수의 일반적인 평가다...

 

이 대목에서 가끔 부질없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만약 소현세자가 왕위를 계승하여 그의 비전대로 나라를 다스렸다면 이는 일본의 메이지유신보다 2세기나 앞서는 것이었고 그렇게 되었다면 현재 동북아의 위상은 크게 달라졌을거라는 역사학계의 견해가 야속하기만 하다...

 

 

한편 함께 끌려갔던 삼학사 3분은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고 버티다가 심양에서 참수를 당했는데 그분들이 처형된 곳이 심양 시내 중산공원이다.

 

이른 아침부터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운동하는 많은 시민들이 모이는 아주 작은 이곳에서

그분들의 흔적을 찾는다는건 말도 안되지만 다만 아픈 역사의 흔적을 되새기며 잠시 거닐어 보았다...

 

 

* 심양장계(瀋陽狀啓, 심양에서 온 편지) : 소현세자가 심양으로 끌려가던 그때부터 9년만에 조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승정원에 보낸 서신 기록물

 

o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36413057 참조

 

* 얼마전 우리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추노‘는 바로 심양의 소현세자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다.

* 소현세자에 그치지 않고 세자비까지 사사하고 그 아들들을 제주로 유배하여 모두 죽게 만든 인조 임금이시여

  그래서 개뿔 자존심 좀 찾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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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 시내 서탑가는 서쪽 탑이 있던 거리라는 의미인데 여기에 코리아타운이 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잡혀온 노비, 공녀 등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니 그 역사가 400년은 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번 방문을 통해 느낀건 서울의 못된 곳만 흉내낸 환락가가 따로 없더란 것이다...

 

룸싸롱, 돈텔마마 나이트, 노래방과 단란주점...

KTV는 방송사가 아니라 가라오케 TV가 구비된 단란주점을 말한다... 위 사진에만 몇개인가 세어보라...

 

 

이런 환락가 가운데 숨은듯 자리잡고 있는 작은 북한식당 하나...

 

 

예쁜 한복을 입고 입구에 서있는 저들은 대부분 북한 상류층, 고위층 자제들 중에서도

고강도 훈련(사상교육 및 기예훈련)을 받은 엘리트 여성들이다...

 

 

1층은 커피숍, 2층은 식당, 3층은 개별방(룸)... 그러나 그런 룸 아니다....

 

중국 현지식만 먹다가 이곳 음식을 맛보는 순간 이념을 떠나 너무 좋더라는 얘기...

서울에서 맛보기 힘든 다양한 음식과 별미를 원형 테이블에서 돌려가며 먹는데 서빙하는 북한 처자의 미소와 재치있는 입담이 북한식 억양과 어울려 입맛 상승...

 

가기 전 쓸데 없는 정치적 이념적 발언은 절대 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고 갔지만 최근 천안함을 둘러싼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태도에는 아무 변화가 없어 보였다... 북한산 들쭉술까지 곁들여 한잔, 두잔 마시다 보니 이제 춤과 노래를 서비스한다... 이러한 가무가 서비스 되는 곳이 개별방이다...

 

음악 이야기로 작업을 걸어 1:1 몰래 대화까지 성사되었던 이 색시...

사진만은 극구 사양하던 그 바램을 무참히 깨버린데 대해 뽀샵에 의한 초상권보호로 보답한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북한에서 자랑하는 여성 하이톤 특유의 소위 주체발성...

은쟁반 위를 구르는 옥구슬 소리에 가장 가깝게 재현했다는 그들의 자랑...

얼마전 탈북자(새터민) 여성으로 구성된 '달래음악단'의 뽕짝 음반을 들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 주체발성으로 부르는 뽕짝...

정말 남자들에겐 심각한 위협이다....

 

아무튼 잘 먹고 잘 듣고 잘 보면서 색다른 경험을 했던 이곳에서 북한가요 '다시 만나요'를 마지막으로 함께 부르고 떠나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성사되기 힘든 희망을 얘기했다... 우리 평양이든 서울이든 다시 만나자고....

그러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서탑가는 또 다른 유혹으로 밤을 세우고 있었다...

 

발 마사지하는 곳... 오리 기름으로 맛사지 해준다 하는데 잘 모르겠고 발 맛사지를 족도(足道)라 한단다...

양자(良子)는 발맛사지 전문 체인점 이름인데 아마도 오리기름 맛사지를 처음 도입한 사람 이름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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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주 군벌과 항일 독립운동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 ‘마지막 황제’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푸이는 청국의 마지막 황제에서 폐위된 후 일본이 만주에 세운 괴뢰국가 만주국의 황제로 취임을 하지만 그 무렵 실제 만주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인물은 친일파 군벌-만주의 제왕 ‘장작림’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중국에는 독자적인 군대 조직을 보유하고 있던 군벌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장개석과 더불어 중국의 만주 및 동북지역에서 가장 큰 위력을 떨치던 군벌이 장작림(張作霖, 사진)이고 그의 본거지가 바로 심양이다.

 

한일합방 이후 많은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이 간도, 연해주, 만주 일대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친일 군벌 장작림은 일본과 협력하여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일본에 넘기는 등 우리 입장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자였다.

 

상해 임시정부와 별개로 만주, 러시아 인근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항일 무장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심양에서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운 것은 장작림의 본거지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무관심 때문이 아닐까? 그들 대부분이 좌파라서???

그러나 독립운동 기념비 하나조차 없는 심양이 항일 무장독립운동의 무대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장작림과 그의 아들 장학량이 심양에 지은 그들의 저택(장씨솔부박물관)은 중국식, 유럽식, 일본식 기법이 혼용된 매우 우수한 건축물로 1988년에 요녕성보호문물로 1996년에는 전국 중점보호문물로 지정되었다.

 

심양의 9.18 역사박물관에는 만주사변의 계기가 되었던 1931.9.18 만주철도 폭파사건에서부터 일본의 패망과 중국의 독립에 이르는 역사와 더불어 일제의 만행, 만주지역의 항일운동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여기서 우리 민족의 항일운동 역사도 볼 수 있다. (왜 남의 박물관에 있나고요....)

 

 

* 장작림 뒷이야기...

 

중원의 패권을 놓고 장개석에 대항했으나 패퇴하여 만주로 돌아온 장작림은 만주 정복을 계획하던 일본의 열파폭발 테러로 사망하게 된다(1928). 그의 자리는 그의 아들 ‘장학량’이 이어받게 되는데 그는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운명적인 인물로 등장하게 된다.

 

부친 사망 이후 엉뚱하게도 장개석과 의형제를 맺고 그의 휘하에 들어간 장학량은 모택동과 내전만 일삼는 장개석에게 실망하여 느닷없이 장개석을 감금해 버리는 대형사고, 즉 서안사변(1936)을 일으키게 된다.

 

사실 장개석군이 모택동의 홍군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던 시기에 발생한 어이없는 사건으로 인해 장개석과 모택동은 잠시 내전을 멈추고 국공합작을 통해 항일운동에 협력하는 듯 했지만 결과는 지금의 중국과 대만이다.

 

그런데 장학량은 이후 장개석에게 잡혀 연금에 들어갔으며 장개석은 대만으로 쫓겨나면서도 장학량은 챙겼고 그는 21세기에 들어서 연금상태에서 운명을 달리한다. (1901~2001, 101세, 거의 19세기에 태어나서 21세기를 보신 양반....)

 

만약 장학량의 서안사변이 없었다면 중국의 패권은 누구에게로 갔을까? 만약 장개석이 중국을 통일했다면 한반도 분단은? 한국전쟁과 중공의 개입에 이은 이 비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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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타 등등

 

* 금(金)나라의 진실

 

만주를 비롯한 만리장성 너머 심양 주변의 동북지역은 한족이나 조선족의 땅이 아니라 역대로 여진, 말갈, 거란 등 북방 유목민들의 터전이었는데 이곳에 나라다운 나라를 처음 건국한 것은 1115년 여진족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다.

 

1125년 거란족의 요나라를 합병하며 국력을 떨쳤으나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에 패망(1234년)하여 역사에서 사라졌고 훗날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울때까지 변방의 오랑캐로 남게 된다.

 

그런데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가 실은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후손 김씨라서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했다는 설이 있는데 얼마전 방영된 역사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서 난 아들(금준)이 금나라의 시조인 것처럼 묘사했었다. (이건 좀 오버인 듯...)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우리는 중국 북방 유목 국가들을 고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로 편입하여 이에 대응해야 한다는 움직임과 함께 금나라 시조의 신라왕 후손설은 역사학계의 관심사라 하겠다....

 

실제 금나라 역사서인 金史에 보면 아골타의 조상이 고려에서 왔고 아골타는 그 7대손이라고 씌여있으며 또 다른 책에는 신라인의 9대손이 아골타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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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 시청... 광장은 지하철 공사로 인해 접근 금지... 그런데 광장에 있는 금색 구조물이

심양을 상징하는 유서깊은 구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지하철 공사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어 그 가치가 빛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개발의 논리앞에......

 

1928년 심양에 주둔한 일본군이 세운 건물... 지금은 역사건축물로 지정되었지만 내부는 명품백화점...

 

 

심양 재래시장에서 싼값에 판매되고 있는 짝퉁 한류 DVD

 

농심 심양공장에서 생산한 스넥... 한국에서는 졸병스넥, 중국에서는 병졸스넥...

위의 것은 매운맛, 아래 것은 카레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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