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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Photo, Foto

DJ Last Diary -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by Wood-Stock 2009. 8. 21.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2009년 1월 1일

새해를 축하하는 세배객이 많았다.
수백 명.
10시간 동안 세배 받았다.
몹시 피곤했다.
새해에는 무엇보다 건강관리에 주력해야겠다.
'찬미예수 건강백세'를 빌겠다.


2009년 1월 6일

오늘은 나의 85회 생일이다.
돌아보면 파란만장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2009년 1월 7일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2009년 1월 11일

오늘은 날씨가 몹시 춥다. 그러나 일기는 화창하다.
점심 먹고 아내와 같이 한강변을 드라이브했다.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둘이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매일 매일 하느님께 같이 기도한다.


2009년 1월 14일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다.
그것은 얼마만큼 이웃을 위해서 그것도 고통 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느냐가 문제다.

 


2009년 1월 15일

긴 인생이었다.
나는 일생을 예수님의 눌린 자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교훈을 받들고 살아왔다.
납치, 사형 언도, 투옥, 감시, 도청수없는 박해 속에서도 역사와 국민을 믿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생이 있는 한 길을 갈 것이다.

  

 

 


2009년 1월 16일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은 자기만은 잘 대비해서 전철을 밟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전철을 밟거나 역사의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


2009년 1월 17일

그저께 외신기자 클럽의 연설과 질의응답신문, 방송에서도 잘 보도되고 네티즌들의 반응도 크다.
여러 네티즌들의'다시 한 번 대통령 해달라''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다시 보고 싶다, 답답하다, 슬프다'는
댓글을 볼 때 국민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힘닿는 데까지 헌신, 노력하겠다.


2009년 1월 20일

용산구의 건물 철거 과정에서 단속 경찰의 난폭진압으로 5인이 죽고 10여 인이 부상 입원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2009년 1월 26일

오늘은 설날이다.
수백만의 시민들이 귀성길을 오고가고 있다.
날씨가 매우 추워 고생이 크고 사고도 자주 일어날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 임금을 못 받은 사람들, 주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는 설날이 큰 고통이다.


2009년 2월 4일

비서관회의 주재.
박지원 실장 보고에 의하면 나에 대해서 허위사실을 공표한 한나라당 의원에 대해서(100억 CD)

대검에서 조사한 결과 나는 아무런 관계 없다고 발표.
너무도 긴 세월동안 '용공'이니 '비자금 은닉'이니 한 것, 이번은 법적 심판 받을 것.
그 의원은 아내가 6조 원을 은행에 가지고 있다고도 발표, 이것도 법의 심판 받을 것.


2009년 2월 7일

하루 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


2009년 2월 17일

 

명동성당에 안치된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 앞에서 감사를 드리고 천국영생을 빌었다.
평소 얼굴 모습보다 더 맑은 얼굴 모습이었다.
역시 위대한 성직자의 사후 모습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다.


2009년 2월 20일

방한 중인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으로부터 출국 중 전용기 안에서 전화가 왔다.
그는 전화로 1. 클린턴 대통령의 안부 2. 과거 자기 내외와 같이 있을 때의 좋았던 기억

3. 나의 재임시의 외환위기 수습과 북한 방문시 보여준 리더십 4. 다음 왔을 때는 꼭 직접 만나고 싶다

5. 남편 클린턴 대통령도 나를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힐러리 여사가 뜻밖에 전화한 것은 나의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 표명으로 한국 정부와 북한 당국에 대한
메시지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아무튼 클린턴 내외분의 배려와 우정에는 감사할 뿐이다.

 


2009년 3월 10일

미국의 북한 핵문제 특사인 보스워스 씨가 방한했다가 떠나기 직전 인천공항에서 전화를 했다.
개인적 친분도 있지만 한국 정부에 내가 추진하던 햇볕정책에의 관심의 메시지를 보낸 거라고
외신들은 전한다.


2009년 3월 18일

투석치료. 혈액검사, X레이검사 결과 모두 양호.
신장을 안전하게 치료하는 발명이 나왔으면 좋겠다.
다리 힘이 약해져 조금 먼 거리도 걷기 힘들다.
인류의 역사는 맑스의 이론 같이 경제형태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 헤게모니를 쥔 역사 같다.
1. 봉건시대는 농민은 무식하고 소수의 왕과 귀족 그리고 관료만이 지식을 가지고 국가 운영을 담당했다.
2. 자본주의 시대는 지식과 돈을 겸해서 가진 부르주아지가 패권을 장악하고 절대 다수의 노동자 농민은
피지배층이었다.
3. 산업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노동자도 교육을 받고 또한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노동자와 합류해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4. 21세기 들어 전 국민이 지식을 갖게 되자 직접적으로 국정에 참가하기 시작하고 있다.
2008년의 촛불시위가 그 조짐을 말해주고 있다.


2009년 4월 14일

북한이 예상대로 유엔 안보리의 의장성명에 반발해 6자회담 불참, 핵개발 재추진 등 발표.
예상했던 일이다.
6자회담 복구하되 그 사이에 미국과 1 대 1 결판으로 실질적인 합의를 보지 않겠는가 싶다.


2009년 4월 18일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와 인척, 측근들이 줄지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노 대통령도 사법처리 될 모양.
큰 불행이다.
노 대통령 개인을 위해서도, 야당을 위해서도, 같은 진보진영 대통령이었던 나를 위해서도, 불행이다.
노 대통령이 잘 대응하기를 바란다.


2009년 4월 24일

14년 만에 고향 방문.
선산에 가서 배례.
하의대리 덕봉서원 방문.
하의 초등학교 방문, 내가 3년간 배우던 곳이다.
어린이들의 활달하고 기쁨에 찬 태도에 감동했다.
여기저기 도는 동안 부슬비가 와서 매우 걱정했으나 무사히 마쳤다.
하의도민의 환영의 열기가 너무도 대단하였다.
행복한 고향방문이었다.


2009년 4월 27일

투석치료.
4시간 누워 있기가 힘들다.
그러나 치료 덕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 크게 감사.
나는 많은 고생도 했지만 여러 가지 남다른 성공도 했다.
나이도 85세.
이 세상 바랄 것이 무엇 있는가.
끝까지 건강 유지하여 지금의 3대 위기 ─ 민주주의 위기, 중소서민 경제위기, 남북문제 위기 해결을 위해
필요한 조언과 노력을 하겠다.
'찬미예수 백세건강'


2009년 5월 1일

이제 아름다운 꽃의 계절이자 훈풍의 계절이 왔다.
꽃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마당의 진달래와 연대 뒷동산의 진달래가 이미 졌다.
지금 우리 마당에는 영산홍과 철쭉꽃이 보기 좋게 피어 있다.



2009년 5월 2일

종일 집에서 독서, TV, 아내와의 대화로 소일.
조용하고 기분 좋은 5월의 초여름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행복이고 아내와 좋은 사이라는 것이 행복이고 건강도 괜찮은 편인 것이 행복이다.
생활에 특별한 고통이 없는 것이 옛날 청장년 때의 빈궁시대에 비하면 행복하다.
불행을 세자면 한이 없고, 행복을 세어도 한이 없다.
인생은 이러한 행복과 불행의 도전과 응전 관계다.
어느쪽을 택하느냐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것이다.


2009년 5월 18일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내한한 길에 나를 초청하여 만찬을 같이 했다.
언제나 다정한 친구다.
대북정책 등에 대해서 논의하고 나의 메모를 주었다.
힐러리 국무장관에 보낼 문서도 포함했다.
우리의 대화는 진지하고 유쾌했다.



2009년 5월 20일

걷기가 다시 힘들다.
집안에서조차 휠체어를 탈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
좋은 아내가 건강하게 옆에 있다.
나를 도와주는 비서들이 성심성의 애쓰고 있다.
85세의 나이지만 세계가 잊지 않고 초청하고 찾아온다.
감사하고 보람 있는 생애다.


2009년 5월 22일

버마 혁명민주지도자 등 수 명이 내방.
민주화에 대해서,
나는"버마는 외국의 지지는 충분히 얻고 있으니 이를 활용해서 안에서 국민이 자력으로 쟁취하도록

력하시오"라고 격려했다.


2009년 5월 23일

자고 나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보도.
슬프고 충격적이다.
그간 검찰이 너무도 가혹하게 수사를 했다.
노 대통령, 부인, 아들, 딸, 형, 조카사위 등 마치 소탕작전을 하듯 공격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수사기밀 발표가 금지된 법을 어기며 언론플레이를 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신병을 구속하느니 마느니 등 심리적 압박을 계속했다.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강요된 거나 마찬가지다.



2009년 5월 24일

노 대통령 장례식을 정부와 측근들은 국민장을 주장하는데 가족은 가족장을 주장해 결말을 못 보았다.
박지원 의원 시켜서'노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살았고 국민은 그를 사랑해 대통령까지 시켰다.

그러니 국민이 바라는 대로 국민장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전했는데 측근들이 이 논리로 가족을 설득했다 한다.


2009년 5월 25일

북의 2차 핵실험은 참으로 개탄스럽다.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태도도 아쉽다.
북의 기대와 달리 대북정책 발표를 질질 끌었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주력하고 이란, 시리아, 러시아, 쿠바까지 관계개선 의사를 표시하면서
북한만 제외시켰다.
이러한 미숙함이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해서 핵실험을 강행하게 한 것 같다.


2009년 5월 29일

고 노 대통령 영결식에 아내와 같이 참석했다.
이번처럼 거국적인 애도는 일찍이 그 예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현실에 대한 실망, 분노, 슬픔이 노 대통령의 그것과 겹친 것 같다.
앞으로도 정부가 강압일변도로 나갔다가는 큰 변을 면치 못할 것이다.
 

 



2009년 5월 30일

손자 종대에게 나의 일생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이웃사랑이 믿음과 인생살이의 핵심인 것을 강조했다.


2009년 6월 2일

71년 국회의원 선거시 박 정권의 살해음모로 트럭에 치어 다친 허벅지 관절이 매우 불편해져서
김성윤 박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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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김작가의 음담악담] "아직 나의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 문화 대통령 DJ, 그에게 바치는 노래

기사입력 2009-08-23 오전 11:25:14

 

그 때, 벼락처럼 닥친 소식은 오직 슬픔과 충격, 애도와 비탄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한결같이 반응했다.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았다. 아직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이 드문드문 보인다. 먼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 충격에서 빠져 나오기도 전에 또 한 분을 보내고야 말았다. 급작스러운 사건은 아니다. 천수를 누리셨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한 달여 투병 생활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얼굴로 선생은 가셨다.

한 마디로 정리되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한 편의 비극을 읽은 느낌이었다면, DJ의 그것은 대하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노통도 없는 이 마당에 선생까지 가신 지금, 하늘에 의지해서 뱃길을 가던 항해사가 갑자기 별이 사라진 밤을 맞이한 기분이 꼭 이럴 것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문화대통령이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DJ 이름으로 U2 유인하기

참여 정부 때의 언젠가, U2의 내한 공연이 추진됐었다. 구체적인 단계까지 간 것도 아니었고 말 그대로 구상의 단계에서 끝났던 일이다. 그 작당모의의 현장에 참여한 적이 있다. 밴드 뿐만 아니라 무대를 통째로 들고 와야 하는 U2공연의 특성상, 제대로 된 개런티 다 주고 불렀다가는 아무리 사람이 많이 와도 망할 수밖에 없다.

돈이 아니라 명분이 필요했다. 현존하는 음악인 중에서 가장 국제 사회에 영향력 있는 뮤지션, 그야말로 행동하는 양심의 표상인 U2를 이 땅에 끌어들일 명분말이다. 모의의 중심에 섰던 분은 그 때 제안하셨다. DJ와 보노(U2의 보컬)가 만나면 된다고. 그들이 함께 판문점을 방문하면 된다고. 우리는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 U2 + ( )=내한, 이라는 산수 문제에서 돈을 제외한 다른 변수를 괄호안에 채워넣어야 하는 상황. DJ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정답!을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 문제에서는 다른 어떤 변수도 DJ만큼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 약했다. 박근혜 대표? 이명박 시장? 에이, 설마. 허황될 수도 있는 이 산수 문제의 정답은 DJ가 유일했다. 일개 문화판 한량들에게도 그의 존재감은 그러했다. 그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었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으며, 일생에 걸쳐 자신의 삶을 곧 한국 현대사로 만들었으며, 나아가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세계의 유력층에 영향력을 가졌던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DJ가 그저 정치와 투쟁, 외교와 경제에 매몰된 사람이었다면 그 때 조금은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대중문화를 알았던 통치자

그는 대중문화를 세련되게 이용할 줄 아는 첫 번째 대통령이었다. 97년 대선 이전, DJ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투사이자 야당 총재, 그 뿐이었다. 그런 그의 이미지를 바꿔놓은 게 이른바 뉴 DJ플랜이었고, 그 계획의 정점에는 DJ DOC의 노래를 이용한 'DJ와 함께 춤을'이라는 선거 로고 송이 있었다. 그 CF에서 그는 컬러풀한 넥타이를 매고 젊은이들과 더불어 활짝 웃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미 칠순이 넘었던 노인의 이미지적 연령은 그 장면 하나로 확 내려 갔다. 거기에 검정 두루마리의 민주화 투사는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인기 가요를 대선 로고송으로 사용하고 CF까지 찍는다는 건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그 때 이회창 후보의 선거송이 어땠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대통령 취임식 때 마이클 잭슨이 참석한 것도 놀랄만한 일이었다. 마이클 잭슨 정도의 팝스타가 되면 돈으로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랬다면 앨범을 내지 않았던 오랜 공백동안 온갖 정상들의 취임식을 기웃거렸겠지. 그런 마이클 잭슨이 공연과 상관없이 한국을 찾았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를 초청할 생각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더 놀라웠다. 아무리 마이클 잭슨의 이름값이 있다지만, 높고 높은 어른들의 관점으로 보면 한낱 딴따라에 불과했던 게 불과 10여년 전 이 땅의 고정관념이었다.

DJ못지 않게 대중문화를 잘 이용할 줄 알았던 대통령은 박정희가 유일하다. '새마을의 노래'를 직접 만들어, 방송은 물론이고 전국의 동사무소 스피커를 통해 아침마다 틀어대며 자신의 자작곡을 온 국민이 아는 노래로 만드는 대통령이 세계에 또 어디 있었을까. 인기 정상의 작곡가였던 신중현에게 정권 캠페인 송을 부탁할 정도의 안목또한 갖추고 있었으니 대중음악의 힘을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다만, 정권의 안위를 위해 활용했던 것과, 구미에 맞지 않은 음악은 모두 금지곡으로 묶어 버리는 만행이 문제였을 뿐이지.

그러나 DJ시절의 한국 대중문화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명 캐치프레이즈하에 본격적인 문화 정책의 틀 안에 들어갔다. 박정희가 탄압해서 군림했다면, DJ는 포용하여 군림했다. 그리고 한 명은 총탄에, 한 명은 평온하게 이 세상을 떠났다. 신중현 선생이 박정희의 서거 소식을 듣고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마이클 잭슨이 살아 있었다면 DJ의 서거 소식에 애도를 전해왔을 게 분명하다.

그에게 바치는 노래

DJ가 조금만 더 일찍 떠났다면, 혹은 좋은 시절이 다시 찾아온 뒤 떠났다면 이렇게 복잡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평생을 추구해왔고 이뤘다고 느꼈을 가치가 단숨에 무너지는 걸 보면서 그 또한 우리만큼 괴로웠을 것이다. 그 괴로움이 5월의 통곡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작심하고 시작한 현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 괴로움이 조금 더 허락될 수 있었던 삶의 길이를 당겼을 것이다. 천수를 누리다 가셨어, 하고 나라의 큰 선생 가시는 길을 겸허히 지켜볼 수 만은 없는 이유다.

좋은 시절에 진정 천수를 누리고 가셨다면 밥 말리의 'one Love'를 영전에 바쳤을 것 같다. 이런 사연을 가진 노래다. 1978년, 망명중이던 밥 말리는 평화콘서트를 위해 다시 자마이카를 밟았다. 4월 22일, 무대에 선 밥 말리는 'one Love'를 부른 직후, 예정에 없던 이벤트를 벌였다. 양쪽으로 갈라져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던 자마이카의 두 수뇌부, 마이클 만리와 에드워드 시가를 무대위로 불렀다. 그리고는 둘의 오른손을 잡고 자신의 머리 위에서 두 손을 맞잡게 했다. 그 아래에서 밥 말리는 노래를 마무리했다. "이제 자마이카에 평화가 왔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순간, 듣고 싶었던 노래다.

그러나 지금은 U2의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를 고른다. 애석한 마음으로. 하늘의 박정함을 원망하며. 우리가 찾아왔던, 거의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을 허허롭게 그리며.

▲보노는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종종 이름을 오르내렸다. 80년대 U2는 '록의 양심'으로까지 묘사됐다. ⓒ로이터=뉴시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김대중 자서전 서평] 1400쪽 분량도 모자란 '거인'의 삶 ~ 서자 김대중, 민주주의의 적통을 열다

 

기사입력 2010-08-09 오후 12:08:20

 

참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이 나왔다. 대통령 후보로만 27년, 그의 삶은 그 자체가 한국현대정치사였다. 그처럼 역사의 중심에서 일생을 보낸 사람은 격동의 한국현대사에서 다시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자서전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사당에 앉는데까지 9년, 1970년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무려 27년이 걸렸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 6년간 감옥에 있었고, 수십 년 동안 망명과 연금 생활을 했다. 대통령 후보, 야당 총재, 국가 반란의 수괴, 망명객, 용공분자 등 나의 호칭이 달라질 때마다 이 땅에는 큰 일이 있었다.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워낙 겪은 일이 많은 분인지라, 책의 분량이 만만치 않다. 1권과 2권을 합하여 근 14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김대중 대통령 자신의 구술을 바탕으로 경향신문 김택근 논설위원이 대표집필 했고, 김대중 대통령 자신의 검토와 수많은 관련인사들의 자문과 감수를 받았다고 한다. 가히 '정본 자서전'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 1권과 2권을 합하여 근 14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김대중 자서전>이 나왔다. ⓒ연합

김대중 대통령은 이 자서전을 통해 처음으로 당신의 어머니가 작은댁이었음을 고백했다.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정치인이 된 뒤에도 그는 이 문제 때문에 "많은 공격과 시달림을 받았지만 침묵"했었다고 말했다. 김대중은 이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고 다만 "하늘에 계신 어머니 당신이 이 세상에서 맺었던 모든 인연과 화해하셨을 것"이라는 표현으로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감싸 안았다.

그가 태어난 해는 1924년. 일제는 1944년부터 조선청년들에 대한 징병을 실시했다. "묻지마라 갑자생"이라는 말은 일제 때는 징병 1기로, 한국전쟁 때는 국민방위군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던 1924년 갑자년 생들의 고단한 삶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김대중이 바로 그 갑자생이다. 일제하에서 전쟁터에 끌려갈까봐 걱정하던 평범한 청년이던 김대중은 호적을 고쳐 징병을 모면했고, 그러던 사이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목포에서 사업을 하며 건국준비위원회와 진보적인 신민당에 잠시 몸담았던 김대중은 이 경력 때문에 평생 '용공분자'라는 비난과 의심을 수구진영으로부터 받아야 했다.

"김구, '좌우합작'에 뛰어들었어야…조봉암, 난국 돌파하는 요령 부족"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김대중이 살아오면서 직간접으로 접했던 수많은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이다. 특히 백범 김구와 조봉암에 대한 평가에서는 김대중의 삶의 자세가 묻어난다. 김대중은 '정치인' 김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김구 선생을 감히 평한다면 길이 빛난 독립투사였으며 절세의 애국자였지만 정치인으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좌우 합작' 논의가 있을 때 선생은 그 속으로 뛰어들었어야 했다. 분단을 막아야 한다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했다. 그리고 신탁통치를 받아들여 3년이나 5년 후에 독립을 모색했어야 했다. 때를 놓쳐 남쪽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다고 결정되었다면 총선에 참여했어야 옳다고 본다. 김구 선생이 전면에 나서 총선에 참여했다면 소속 정당은 과반 의석을 확보했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이승만과 한민당은 궁지에 몰렸을 것으로 본다. 이것은 나만의 추측이 아니라 다시 민심의 도도한 흐름이었다." (1권 67쪽)

김대중은 "역사에 가정법을 동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지만"이란 단서를 달고 만약 김구가 5.10선거에 참여했더라면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이 땅에 반공을 빙자한 친일파에 의한 독재가 발붙이지 못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정치인' 김대중은 "정치인은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 상황이 나쁘면 최악을 피하고 차악을 택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정치인이란 현실을 살펴 미래를 향한 진리를 구하는 것이지 진리만 붙들고 현실을 도외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 정치인으로서의 내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김대중은 또 자신이 조봉암에게 과거 공산당의 핵심 간부였다가 전향한 조봉암이야말로 "국민에게 왜 공산당이 나쁜지를 알리는 적임자"라며 왜 공산당을 그만두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을 권유했던 사실을 고백했다. 이에대해 조봉암은 "김 동지 말이 맞긴 한데, 그럴 경우에 지지층이 이탈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했다. 김대중은 이렇게 썼다.

"나는 실망했다. 지도자라면, 적어도 조봉암 같은 큰 정치인이라면 국민을 위해 결단할 때 결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집결되는 표도 중요하지만 그 표에 대해서 할 말을 하는 그런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설사 그 표가 떨어져 나가더라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 후 선생이 간첩 혐의로 사형을 당했기에 더욱 아쉬웠다. 내가 아는 조봉암 선생은 인간미가 넘치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단지 난국을 돌파하는 요령이 부족했다." (1권 98~99쪽)

김구와 조봉암에 대한 평가를 보면 김대중이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남았는지가 분명해진다. 김대중은 이 험난했던 한국현대사에서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살아남았고, 마침내 평생의 소원인 대통령까지 되었다. 그는 "상황이 나쁘면 최악을 피하고 차악을 택"하는 인내와 "난국을 돌파하는 요령"을 김구와 조봉암의 좌절이라는 역사적 비극으로부터 배웠다. 정말 그는 친일파가 득세하여 반공을 내세워 독재를 일삼던 이 땅에서 김구와 조봉암처럼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꿈을 정책으로 집행해 볼 기회를 가진 정치인이었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방법에서는 유연한 실사구시"를 추구했다.

"87년 대선, 나라도 양보했어야…"

1970년대와 1980년대 청년 학생들은 김대중이 진보적이지 못하다고, 정치노선이 선명하지 못하다고 비난하거나 낮게 평가했던 적이 있다. 그 자신이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지난 일이지만 너무도 후회스럽다"라고 이 자서전에서 고백한 1987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보인 분열과 패배의 책임은 그에게 결코 벗겨지지 않는 멍에로 남아있다. 한 때 열심히 운동하던 사람들 중에도 김대중이 싫다고 신한국당이나 한나라당으로 가버린 자도 한둘이 아니다. 특히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이 5.16 군사반란의 '원흉' 김종필과 손잡았을 때, 진보진영의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병 환자' 김대중에게 손가락질을 해댔다.

한 사람의 삶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어떻게 살아왔나보다 어떻게 죽었나가 그의 삶의 색깔을 보다 분명히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수없이 타협하고 돌아가야 했던 김대중의 삶은 어쩌면 2009년 8월의 그의 '전사'가 아니었으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칙을 져버린 권모술수에 능한 한 정치인의 삶으로 저평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등장 이후 민주주의 위기, 남북관계의 위기, 서민경제의 위기 등 3대 위기가 닥치고, 급기야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늙고 병든 김대중은 뜬구름 잡는 우아한 얘기만 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2권 585쪽)라는 한마디는 참으로 무게가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입원하기 전까지 두 달 동안 이 땅에서 90을 바라보는 노인 김대중만큼 열심히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과 맞장을 뜬 사람은 없다. '행동하는 양심'이었던 그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결국 악의 편이라며, 하다못해 바람벽에 대고 욕이라도 하라며 자신보다 젊은 모든 사람들을 독려하다가 지쳐 쓰러졌다. 김구와 조봉암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민주주의 전선에서 쓰러진 것이다.

눈물 많은 정치인 김대중

김대중은 눈물이 많은 정치인이었다. 1987년 10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처음으로 망월동 묘지를 방문하여 광주 유가족들과 부둥켜안고 통곡했고, 1994년 1월 문익환 목사의 빈소에서 오열했고,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울음을 터트린 것은 필자의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이 자서전을 보니 그 때 이외에도 김대중은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을 때, 함께 사고를 당한 택시기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고, 납치사건에서 살아 돌아와 기자회견을 하며 눈물을 흘렸고,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대전교도소에 있던 큰아들 홍일이 보낸 편지를 받고 눈물이 앞을 가려 몇 시간 동안 봉투를 어루만지기도 했다. 어디 김대중만 울었었나, 그는 지지자들의 눈물을 타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 특히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 그의 지지자들은 슬픔을 넘어 절망의 눈물을 흘렸고,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을 때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에서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오열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
"한여름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막 퇴근한 가장처럼"

김대중 자서전은 모두 2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권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2권은 대통령 취임이후 서거까지의 기간을 담았다.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워낙 오랜 기간 한국현대사의 한복판에 있었다보니 1400페이지라는 적잖은 분량도 그가 겪은 일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로만 27년을 보냈는데, 27년이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역사가 가장 긴 단체인 임시정부의 활동기간과 일치한다. 1924년 출생부터 1997년 말의 대통령 선거까지 70년이 넘는 기간을 담은 1권은 호흡이 대단히 빠른 반면, 대통령 재임기간 5년을 500여 쪽 이상 할애한 2권의 호흡은 1권과는 전혀 다른 책이라 할 만큼 좀 쳐지는 느낌이 든다. 2권에 서술 된 사건이나 내용은 '일지'라 할 만큼 여러 가지 일을 빠짐없이 담다보니 너무 번잡해져버렸다. 집중과 선택의 아쉬움이 남는다. 1권의 경우 김대중만이 증언해 줄 수 있는 흥미로운 사건들이 대단히 많은데, 너무 호흡이 빠르게 처리된 점이 아쉽다. 이것은 어쩌면 현대사학도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일반 독자들이 책을 읽기에는 1권은 아주 잘 쓰였다. 한국현대정치사의 큰 흐름의 여운을 남기면서 빠르게 전개된다. 특히 1973년 납치사건에서 살아 돌아와 귀가하는 과정을 한 단락으로 묘사한 부분은 참으로 압권이다. "대한민국, 한여름 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막 퇴근한 가장처럼."

모든 자서전에서 똑같이 마주하게 되는 문제이지만, 당사자가 말하고 싶어 하는 문제와 독자나 연구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문제가 일치하는 법은 없다. 아무리 솔직하고 자세한 자서전도 감추거나 빠트린 것이 있다. 여기에는 의도적으로 감춘 것도 있을 것이고, 당사자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언급하지 않은 것도 있을 것이다. 자서전의 집필자인 김택근 논설위원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집에서 청소하는 사람이나 밥하는 사람이나 모두 20년 이상 DJ 곁을 머물던 이들이다. 사람을 내치지 않더라"라고 썼지만, 늘 감시와 회유와 공작의 대상이 되었던 김대중의 정치적 동지들 중에는 김대중에 의해서 내쳐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갈등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권노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1997년 말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외환위기를 불러온 책임을 물어 재벌개혁과 관료개혁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당선자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 왜 원래 구상했던 재벌개혁과 관료개혁에서 멀어졌는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킬 때 대중들의 가장 적극적인 호응을 끌어낸 예비군 폐지문제를 왜 대통령이 된 뒤 안보 환경이 1971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거론조차 안 했는지 아쉽게도 아무런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서자'로 태어나 민주주의 '적통'을 세운 거인의 삶

나는 인권 대통령 김대중의 주요업적 중의 하나로 그가 2001년 8월의 한국-베트남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월남전 참전과 관련,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사과한 것을 주저 없이 꼽는다. 그런데 자서전에는 1998년 정상회담 당시 불행한 과거사를 한국 대통령으로서 처음 언급한 사실만 기록돼 있을 뿐,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이 크게 여론화된 뒤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에 정식으로 사과한 일이나, ODA의 자금으로 민간인 학살 지역 40여 곳에 학교를 지어준 일은 빠져있다. 또 2002년 10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문제가 불거졌을 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인권대통령으로서는 뜻밖에도 양심적 병역 거부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한 일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런 사안들은 자서전이 아니라 평전이 쓰여질 때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는 대목인데, 당사자의 입장을 들을 수 없는 점이 아쉽다.

김대중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거인이었다. 민주주의는 그의 일생을 관통한 신념이요 가치였다. 그가 동구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원인을 사회주의가 잘 못 돼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 것은 참으로 김대중다운 탁견이라 할 수 있다. 김영삼에게 민주주의란 대통령이 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면, 김대중은 "민주주의가 후퇴한다면 나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라는 말을 삶과 죽음을 통해 보여주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제 김대중이 남긴 역사와 유지를 떠나서는 이야기 할 수 없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란 분단과 친일파의 득세로 이지러진 민주주의를 바로 잡아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자'로 태어난 김대중은 이 힘겨운 여정에서 민주주의의 '적통'을 확립했다.

▲ 서자로 태어나 민주주의의 적통을 확립한 김대중 전 대통령. 그는 2009년 8월 영면에 들었다. ⓒ연합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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