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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Photo, Foto

간도의 한국인

by Wood-Stock 2009. 5. 19.
[간도의 한국인] 김재홍씨 수집자료 단독 공개
‘독립운동 씨앗’ 뿌리던 산천…그 숨결 아직도 들리는 듯
겨레의 꿈 키우던 광야…그때처럼 윤동주의 별도 뜬다네
한겨레  
» 명동촌 설립자인 김약연 선생의 증손자 김재홍씨
 




“지금도 용정의 규암(김약연) 선생 댁 마당에서 뛰어놀던 기억이 선하다.”

 

북한학 연구의 석학으로 꼽히는 서대숙(UCLA 석좌교수) 박사는 1931년 태어나 중학교를 마치고 46년 남한으로 내려올 때까지 간도의 용정에서 자랐다. 간도 일대를 돌며 개척교회 활동을 펼친 부친 서창희 목사는 문익환·동환 형제의 부친인 문재린 목사와 용정 중앙교회에서 함께 시무하기도 했다.

 

그는 한-중 수교 이전인 87년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장으로서 중국을 초청방문했다. 그때 공산당 정부는 그를 배려해 용정의 생가를 다시 가볼 수 있게 했고, 현지에 살고 있는 은진중학교 동창생들이 환영회도 열어 주었다고 한다.

 

“사실 우리는 슬픈 독립운동사를 갖고 있다. 일제에 저항은 했지만 독립전쟁을 벌이지는 못했다. 3·1운동만 해도 서울을 중심으로 한 국내에서는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표방했고, 심지어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는 ‘독립시켜 달라’는 청원을 했으니까. 하지만 간도에서는 육탄 혈전의 독립투쟁을 벌였다. 실제로 무장을 했고 그럴 만한 힘도 있었다. 그 힘의 원천은 바로 규암을 비롯한 명동촌의 선구자들이었다.”

 

» 간도의 첫 한인 공동체였던 명동촌

올해는 간도의 첫 한인 공동체였던 명동촌 개척 110돌, 중국과 일본 간의 간도협약 100돌, 명동교회 설립 100돌, 안중근 의거 100돌 등을 맞는다. 그 민족사적 의미를 당시 사진 자료를 중심으로 짚어본다. 명동촌 설립자인 김약연 선생의 증손자인 김재홍씨가 30여년 동안 전세계를 돌며 후손들에게 수집한 자료를 <한겨레>에 단독 공개한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 만주벌판 다 보이게…
동교회 뒤편 종각 나무에서 그네타기 놀이를 하고 있는 여학생들. 흰저고리에 검정치마 차림으로 보아 중국 공산당의 영향권에 접어든 1940년대로 보인다. 왼쪽 멀리 보이는 뾰족한 산은 명동촌과 용정 일대에서 소풍 장소로 인기 있던 선바위다.

 


▲ 문익환 목사 어머니 모습도
1929년 8월30일 ‘명동 기독여자청년회 제9회 창립 기념식’에서 그네타기(추천) 대회를 연 뒤 찍은 기념사진이다. 앞쪽에 상품으로 나눠준, 크기가 다른 5개의 무쇠솥이 놓여 있고, 뒷줄 맨 오른쪽에 문익환·동환 목사의 어머니 김신묵씨 모습도 보인다. 그네타기는 당시 간도 조선 여인들이 가장 즐겨 한 민속놀이였다.

 

 

▲ ‘선구자’의 다리
1920년대말 용정을 감싸고 흐르는 해란강 위에 놓여 있던 목제 용문교 위에서 물놀이를 나온 대성중학교 학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항일독립지사들이 말을 달리던 바로 그곳이다.

 


▲ 용두레 우물터
‘용정’이란 이름이 비롯된 용두레우물 터에 서 있던 ‘용정지명기원지정천’ 비석의 1920년대 모습. 중국의 문화혁명기에 없어졌다가 훗날 복원된 비석의 처음 모습을 알려 주는 귀한 사진이다. 19세기 말 조선 이민들이 오래된 샘을 발견해 용두레를 설치하면서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 김약연 선생 회갑날
1928년 4월29일 명동촌 설립자인 규암 김약연 선생의 회갑 기념으로 장재촌의 자택 규암재 앞마당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 중절모 차림이 규암, 왼쪽 어깨 뒤로 맏딸 인순, 그 옆이 부인 안연씨, 세 사람 건너 주시경 선생의 수제자로 당시 명동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던 박태환 선생의 모습이다.

 

 


▲ 국수 먹는 강원용 목사
1937년 용정 시내의 한 국숫집에서 당시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강원용(가운데) 목사가 친구들과 국수를 먹고 있다. 강 목사가 작고한 뒤 발견돼 이번에 처음 공개하는 사진이다.

 


▲ 장하린 회장의 바이올린
강원용·문동환 목사, 안병무 박사와 더불어 은진중학교 17회 동기생인 장하린 전 종로서적 회장이 1937년 무렵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 ‘바이올린 장’으로 불린 그는 소질을 살려 43년 일본 도쿄(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에 입학했다.

 

 


◀ 함께한 윤동주
1935년 8월 용정 북부교회(감리교)의 여름성경학교를 마친 교사들. 뒷줄 오른쪽 끝 안경 쓴 이가 문익환 목사, 왼쪽 끝이 윤동주 시인이다. 대학 진학 준비를 위해 은진중 3년을 마치고 평양의 숭실학교로 전학하기 직전 모습이다.


▲ 교복 입은 나운규
1918년 명동학교에 입학한 나운규(오른쪽) 감독의 교복 차림. 수업시간에 거울 보며 웃는 연습만 하던 ‘엉뚱한 학생’이었던 그는 1926년 10월 서울 단성사에서 각본·주연·분장·감독까지 도맡은 첫 영화 <아리랑>을 개봉한다.

 


▲ 졸업사진 속 모윤숙
1932년 명신여고 7회 졸업 앨범 사진. 용정 출신으로 이화여전을 나와 1931~32년 이 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모윤숙(가운데 왼쪽) 시인의 모습도 들어 있다. 명신여학교는 1913년 영국인 선교사 베이커의 부인 박혜선(레베카)이 세운 곳으로, 가운데 보이는 건물이 초기의 기와집 교정이다.

 


▲ 한눈에 보이는 지금의 명동촌
2007년 무렵의 명동촌 전경. 문익환 목사네 선산이 있는 중영촌 언덕에서 내려다본 모습이다. 1899년 2월18일 새벽 김약연·김하규·문병규·남위언 네 가문 142명(1900년 윤하현 가문 합류)이 함경북도 종성에서 두만강을 건너와 맨손으로 일군 간도의 첫 한국인 정착촌이다. 민족교육, 기독교 신앙, 항일독립운동의 기지로 우리 근대사를 밝힌 ‘선구자들의 이상향’이었다.

 


▲ 용정 광명중학교의 겨울풍경
용정의 광명중학생들이 1929년 겨울 어느날 교정에서 신나게 눈싸움 놀이를 하고 있다. 1912년 기독교계 영신중학교 부속 영신소학교로 설립됐으나 1924년말 재정난으로 히다카 헤이고로라는 일본인 낭인에게 넘어가 은진(기독교), 대성(연길 공교회·유림), 동흥(대종교) 등과 달리 친일계 학교로 변해갔다. 1936년 봄 윤동주 시인과 함께 대학 진학 자격을 얻고자 유일한 5년제였던 광명에 편입했던 문익환 목사는 “일본인 선생들이 학생들을 일본 외무성 순사나 만주육군사관학교에 보내려고 혈안이 된 그런 학교였다”고 얘기하곤 했다.

 


▲ 명동여학교 동창회
1929년 4월27일 열린 명동여학교 동창회 기념사진. 1911년 명동학교 부설로 명동여학교가 문을 열면서 명동촌 여성들은 비로소 한글을 깨치고 자신만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고만녜’로 불리던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도 이 학교를 다니며 ‘김신묵’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뒤이어 1914년 용정의 명신여학교, 1920년 화룡현 명신사 삼도구 충신향의 삼명여학교, 1921년 화룡현 삼개사 만진기의 정신여학교, 유하현 삼원포의 삼성여학교, 연길현 용진사 대교동의 교향여학교 등이 잇따라 생겨났다.

 


▲ 국사 가르치던 은진중학교
1940년 무렵 용정 은진중학교의 부례수(브루스) 교장이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김약연 등 간도 대표 15명의 요청으로 캐나다 선교회가 1920년 세운 은진학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1925년 끝내 문을 닫은 명동중학교의 맥을 이었다. 일제가 금지한 우리말은 물론 영어·성경·국사·과학실습·다양한 특별활동 등 수준 높은 수업으로 수많은 지도자를 키워낸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다.

 


▲ 명동학교 동창회
1962년 서울 동국대 교정에서 월남한 명동학교 출신들이 처음으로 동창회를 열었다. 신민회 회원으로 개교 산파 노릇을 한 정재면 선생(앞줄 오른쪽 세번째), 문재린(왼쪽 옆) 목사, 그 아들인 문익환(뒷줄 오른쪽 네번째) 목사, 김기섭, 윤영춘, 윤영규씨 등의 모습이 보인다. 1908년 명동서숙으로 출범한 명동학교는 명동중학교와 명동여학교로 증설되면서 25년간 1200명의 인재를 배출하며 간도 독립운동의 기지가 됐다.

 


▲ 간도지역 선교사들
1910년대 초 조선 주재 캐나다 장로교회선교협의회 소속의 구례선(로버트 그리슨) 목사와 부인 레나가 간도지역 선교를 위해 말을 타고 두만강을 건너는 희귀 사진이다. 구례선 목사는 정재면 선생과 더불어 실학자였던 규암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도함으로써 명동촌을 명동학교와 명동교회를 축으로 한 민족교육과 교회운동의 기지로 탈바꿈시켰다.


▲ 동만노회
1940년대 초 동만노회 21회의 주역들. 앞줄 오른쪽 네번째가 이권찬 목사, 두번째 줄 오른쪽 두번째가 이태준 목사, 한 사람 건너 용정 제창병원 육장안(블랙) 원장, 규암 선생, 서고도(스캇) 선교사, 한 사람 건너 문재린, 이병하, 이성국 목사, 세번째 줄 오른쪽 두번째 서창희(서대숙 박사 부친) 목사의 모습이다. 간도에서 이주한인사회·기독교·민족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 ‘삼위일체’를 이뤘다. 191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함북노회에 속했던 간도의 교회들은 수년 사이 200여개로 늘어나 1921년 12월 토성보예배당에서 동만노회로 독립한다.

 


▲ 명동교회
명동학교 설립 이듬해인 1909년 설립된 명동교회의 초기 전경. 교육을 조건으로 명동학교 교사로 부임한 정재면 선생의 권유를 받아들여 규암과 원로들이 설립한 것으로 보인다. 명동촌 주민들은 물론 인근 지역에서도 교인들이 몰려와 일요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 3·13 만세운동의 현장 오층대건물
1919년 3월13일은 명동촌의 운명이 결정되던 날이다. 용정촌 서전대야에 8000여명의 간도 주민이 가슴마다 태극기를 품고 운집했다. 명동촌의 지도자들과 명동학교의 브라스 밴드가 앞장을 선 가운데 용정 시내 일본 영사관으로 향하던 시위행렬이 오층대건물 앞에 이르렀을 때 일본 경찰의 발포로 19명이 목숨을 잃고 30여명이 다쳤다. 이듬해 1월 명동학교 출신들이 독립군 무기 조달을 위해 조선은행 자금을 강탈한 ‘15만원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일제의 탄압은 한층 거세진다.

 


▲ 경신참변
1920년 경신참변 때 일본군이 한인 독립군을 총살하고 있는 장면.(재미 사료수집가 맹우열씨 소장) 일제는 이들을 ‘비적’ 또는 ‘마적’으로 몰아 중국인과 한인 사이를 이간하려 했다. 청산리 전투가 있기 하루 전인 그해 10월20일, 일제는 이른바 ‘불령단의 소굴’(항일독립운동의 기지)로 명동촌을 지목하고 보병·기병·공병까지 동원해 명동학교를 불태우고 주민을 살상하는 등 이른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 안중근 의사 사격연습터
1908년 안중근 의사가 사격 연습을 했던 명동촌 뒷산 문암골. 1907년 명동촌에서 석달간 머물렀던 안중근 의사는 이듬해 러시아 연해주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국내 진공을 감행하다 회령에서 참패한 뒤 이곳에 홀로 찾아와 절치부심하며 권총 사격 연습을 했다. 그리고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명중시켰다.

 


▲ 1947년 무렵 중국 공산당 명동지부 임원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1920년대 초부터 간도 한인사회에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빠르게 퍼진다. 용정 대성중학교 부설 동양학원이 설립되는 등 각 학교에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단체들이 속속 결성되고, ‘청년회’란 이름으로 수많은 사회주의 운동단체들이 생겨난다. 명동촌과 명동학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규암이 용정으로 옮겨간 1930년대 초반 이후 공산주의 세력의 지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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